하나님의 사랑
(2003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3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3:16) 2003.4.14 십자가사경회(새벽) 1
2. 그리스도의 사랑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아2:6-7) 2003.4.15 십자가사경회(새벽) 5
3.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롬8:38-39) 2003.4.16 십자가사경회(새벽) 11
4. 사랑은 순종입니다(요14:15) 2003.4.17 십자가사경회(새벽) 15
5. 먼저 나타난 사랑(요일4:10) 2003.4.18 십자가사경회(새벽) 19
1.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성경구절 : 요한복음 3장 16절-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실 하나만을 가지고는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없거든요. 그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믿어져야 되는데, 성령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그래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지요.
이후에 살아가는 삶도 간단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끊임없는 시험과 도전들이 있지요. 그것을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하고 이길 수가 없어요.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에게 세상을 이기고 시련들을 이겨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 주시는 것이지요. 그렇게 이어지는 모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십자가의 사랑, 이런 모든 것들의 이 근거, 원천이 어디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있다 이거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는 범죄한 인간들을 벌주시기 위해서 골몰하신 분이시고, 예수님은 우리를 그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져내셨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구원에 있어서 공로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돌려져야 된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너무 잘못 생각하는 거라는 것이죠.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도 이 세상에 내려오실 수 있었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실 수 있었고, 또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하나님 아버지를 믿을 수 있게 만들어 주셨고, 이렇게 되는 거라 이거죠. 그렇게 때문에 커다란 저수지에 물이 가득 고인 상태에서 그 수문이 열리고 나니까, 그 수문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논과 밭을 적시면서 두루 휘돌아서 많은 곡식과 열매를 맺는 땅들을 만들듯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도 그런 것이었다 이거죠.
그래서 우리들이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모든 일의 축복의 근원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다 이거죠.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특별히, 당신이 구원하기로 선택한 사람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여러분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사람들이 사랑을 배워나가면서 하나님 아버지를 배워 나간다고요.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누리게 되요.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그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알게 되고, 그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지를 알게 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나도 저를 사랑할 것이요, 그래서 저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이렇게 놀랍도록 뛰어나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이렇게 뛰어난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무한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사랑은 절대적인 사랑이고 뛰어난 사랑이다 이거죠. 그래서 요한사도는 요한 일서에서,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외아들을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주셨음이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두적인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무한히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그 사랑을 알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다 이거죠.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성화를 통해서 그 우리들이 끊임없이 거룩해져 가고 순결해져 가고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들이 신령해져 가고 변화되잖아요. 그런데 그런 모든 신령한 변화의 궁극적인 그 목표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신령한 변화의 그 중심 속에 있는 핵심이 뭐냐 하면, 사랑이에요. 그렇게 하나님을 알아가기 때문에 포악하고 못된 인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가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베푸시는 가지고 계시는 사랑은 언제나 동일하고 절대적인 사랑이에요.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진노하시기도 하고 기뻐하시기도 하고 하는, 이런 많은 변화들이 나타나잖아요. 그렇죠? 이런 변화들이 나타나는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 인간들을 교육하고 바른길로 인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표현이야. 우리가 아이들을 낳아서, 아이들이 어렸을 때,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 하면, 부모로서 그 아이에게 어떤 때 엄마 아빠가 즐거워하는지 슬퍼하는지 화나는지, 그것을 아이들이 분명히 느낄 수 있게 해 줘야한다, 그것이 아이들에게 선악의 관념을 심어주는 가장 훌륭한 교육법이에요. 아주 말하지도 못할 때. 그래서 아이가 때로는 아주 예쁜 짓을 하면, 엄마 아빠가 아주 웃고 좋아하고 안아줘요. 그렇지만 못된 짓을 하면, 화난 표정을 짓는단 말이죠. 그것을 통해서 아이들이 ‘이건 옳지 않은 것이구나,’ 라는 것을 배워가는 것이죠.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 부모의 마음속에, 이렇게 입술을 깨물면서 아이에게 화난 표정을 지었을 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아이를 교육하기 위한 것이지 이 부모의 마음속에 ‘저 자식 죽여 버려야 되겠다. 내가 저놈을 왜 낳았을까’ 그런 감정이 이 속에 있는 건 아니다 이거죠.
그러니까 하나님도 우리를 교육시키기 위해서 수시로 화나는 모습과 그 다음에 슬퍼하시는 모습과 이런 모든 것을 보여주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것은 마치 구름 아래에서 하늘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그 마음은 사랑의 마음이다 이거죠. 그것은 구름위에 사시사철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 빛과 같은 것이에요. 신앙은 바로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불변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신앙이란 말이지요. 그래서 오늘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처럼 이라고 하는 것은 뒤에 나오는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신 그 사랑을 이야기 하는 것이죠.
구약의 백성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의식하는 것이 힘들었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들에게 율법이 있었기 때문에. 율법은 목적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율법은 그 자체의 목적이 자신이 그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리고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율법을 다 지킬 수 없고 구원 받을 수 없다 그래서 나의 구원을 위해서는 밖으로부터 나를 위하여 오는 또 다른 구원이 필요하다, 라고 하는 것을 일깨워 주시기 위한 한 수단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율법을 보면서 지키려고 애를 썼지만, 그러나 끊임없이 그 속에서 범죄한 모습으로 밖에 나타날 수 없는 자기를 발견하게 되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은,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가 있었어요. 무엇 때문일까? 제사에요, 제사. 제사. 자기는 죄를 지었고, 자기의 힘으로는 도저히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켜드릴 수 없었던 때에 그 때에 그 율법 속에 제사가 계시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제사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 제사를 통해서 자기의 희생이 아닌 짐승의 희생을 통해서 죄를 용서받고 다시 자기를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일시적으로나마 용서를 통해서 경험하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리고 거기 교통이 이루어지게 되는 거예요.
그런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면서 그러면서 살 수 있었던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면서 산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 신약시대에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우리보다는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느꼈다고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구약시대에 가장 뛰어나게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누리고 계시를 누렸던 사람들도 이 신약의 시대를 그렇게 그리워하고 바라보면서 죽었던 것이라 이거죠.
그런데 문제는 이거죠.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언제나 계속돼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요즘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 안 하신다’ 이렇게 느끼는 것은 느낌일 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게으르게 살고 바르게 살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고 하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훈련시키시는 과정이에요. 그럴 때 빨리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되지요. 가장 불행한 것이 무엇이에요. 아버지와 한 가족관계로 살면서도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 그것은 가장 커다란 불행이에요. 인간 사회에서는 모든 아버지가 자식들을 그렇게 살 깊게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절대로 이 세상에서 부모들이 그렇지 않아. 자식만 타락한 것이 아니라 부모도 타락했어요. 그래서 자식들이 그 부모를 항상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듯이 부모도 마찬가지다 이거죠.
그래서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는 가장 기본적으로 남아야 할 이런 관계들이 다 깨뜨려지게 된 것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복원시키는 것이 이것이 복음의 힘이란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서, 인간의 아버지는 자기를 항상 그렇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항상 사랑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는 항상 사랑하셔요. 그것이 아닌 것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못 느끼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사랑은 언제나 확실하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이에요. 그런 의미로 말하는 것이 요한복음 3장 16절이에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런데 그 사랑의 위대함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자격을 보면서 하시는 사랑이 아니라 이거죠. 그래서 우리도 은혜를 많이 받고 주님의 사랑을 알아 가면, 자격이 없는 사람들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이 세상에 속하였지만 예수님 때문에 다른 세상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일방적이고 변함이 없는 사랑은 아주 놀랍고 큰 것이에요.
그러나 그 하나님의 사랑은 크고 놀라운 것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래서 그 사랑이 우리가 주님을 모를 때에도 우리를 지켜주셔서 이렇게 살아가게 만드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일방적으로 사랑하시는 것만으로는 우리의 인생이 바뀔 수가 없어요. 우리의 인생이 바뀌기 위해서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알고 나도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반응하는 사랑을 보이면서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의 인생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처음 회심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그 때 놀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비로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예전부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는데, 내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모르고 살았구나.’ 라는 후회가 우리의 회심의 경험과 함께 들어온다 이거죠. 그렇잖아요. 그거에요. 그래서 예전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는데 내 인생은 바뀌지 않았어. 언제부터 바뀌었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내가 깨달았을 때. 그래서 내가 그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게 되었을 때에 내 인생에 정말 크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사랑은 상상을 초월하는 사랑이에요. 언제나 거기 계셔서 빛을 비추시는 태양과 같은 분이시다, 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해야 한다 이거죠.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보여주신 사랑이 얼마나 큰가하는 것을 우리가 날마다 느끼면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성도의 가장 커다란 의무가 뭐냐 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항상 생각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보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사랑을 주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일컫게 하셨는고.’ 그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큰 의무에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사랑인지를 모를 때에 십자가를 보는 거죠. 그래서 그 십자가를 통해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뛰어나고 놀라운 것이었구나,’ 그것을 깊이 깨달으면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거예요.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큰 사랑을 알면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더 의지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고 내 살을 깍고 뼈를 갈아서라도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존재가 되고 마음에 들게끔 살아가지 않고는 베길 수 없는 마음이 되는 것이에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해서 성도들이 마땅히 보여야 할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원동력이 되어서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온 삶을 움직이게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바라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강렬한 소원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당신이 가지고 계신 그 사랑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첫 번째 중요한 성도의 책임이고 의무인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사랑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게 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아 2:6-7)
아가서는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묘사한 그림 같은 작품입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논리적으로 차근차근 말씀해주셔서 우리를 깨닫게 하시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일찍이 본적이 없는 것 같은 아주 화려하고 인상이 깊은 그림 한 폭을 보여주심으로서 우리를 깨어나게 만드셔서 신앙의 진리를 붙들게 해주시기도 합니다.
여기에 보면 ‘왼손으로 신랑이 베게를 하고 오른 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결혼을 해보신 분들은 이 표현이 무슨 뜻인지 잘 알 수 있을 겁니다. 왼손은 부자유하고 오른 손은 자유로우니까 왼손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안고 오른 손은 사랑하는 사람의 몸 위에 얹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더듬으면서 자기의 애정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특별히 성경에서 오른 손은 하나님의 선택과 관련된 손입니다. 그런 손이 하나님의 교회를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를 왼팔로 안으시고 가슴에 바짝 교회를 붙이시고 교회의 머리끝부터 시작하여 그 목덜미까지 교회의 모든 신체를 각 지체 어느 부위하나 소중한 것이 없이 그렇게 두루 어루만져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론 적으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정말 교회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교회전체가 예수님의 침상에서 예수님의 품에 안겨서 그래서 교회의 각 지체들 하나 하나를 예수님이 어루만져주시는 애정의 손길들을 골고루 모든 지체들이 느낄 때 신랑되시는 예수님만을 사랑하고 순결을 지킬 수 있는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르게만 한다고 해서 교회가 모두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올바른 것을 포기해도 좋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오류에서 바르게 되는 일도 꼭 필요하지만 그것만을 가지고는 안됩니다.
궁극적으로 교회가 그 예수님의 품에 안겨서 온전히 몸 구석구석을 신랑이 신부를 어루만지듯이 그 신랑에게는 어느 한 부분도 소중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몸 전체를 어루만지듯이 예수님께서 교회를 품어주셔서 이 교회가 모두 어루만져져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부분이 그래서 모든 교회의 지체, 기관, 모든 교회에 속해있는 이 지체들, 부서들이 그렇게 충분히 신랑되신 예수님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그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회에 보시면 알지만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누구냐면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여성들입니다. 남편이 있는데 사랑을 안줍니다. 그런 사람들이 열심히 특히 그럽니다. 가정에 문제있는 사람들이 왜냐하면 그 어떤 즐거움을 못 찾으니까 그런 즐거움을 교회에 와서 충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뭔가 참된 신앙과 신앙이 아닌 것들이 뒤섞인 것을 정확하게 구별을 해서 지도해 주어야 합니다. 청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 아빠의 사랑을 충분히 받으면서 동기간이 함께 사랑하면서 이렇게 살아온 사람들은 덜 그러는데 뭔가 가정에서 치인사람, 사랑받아야할 관계에서 충분히 사랑을 받지 못하고 망가진 관계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서 자신의 연약함이 성품과 고착되어 죄성을 띠게 된 사람들은 굉장히 이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한테 사랑 못 받으면 교회도 나오지 말라는 말인가! 가정이 문제가 있으면 신앙생활도 하지말라는 말 아닌가! 그런 뜻이 아니라 너무 곡해 하지 마십시오. 다 좋은데
그런 연약함을 본인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영혼을 돌보는 우리들도 알면서 돌봐야 합니다. 거기에 대한 해결책이 무엇이냐면 예수의 품에 안겨서 남편에게 못 받은 사랑, 엄마 아빠에게 못 받은 사랑, 동기간에 못 받은 사랑을 모두 예수님께로부터 충족한 어루만지심의 사랑을 받고 그리고 거기서 충분한 공급을 받을 때에 그때야 비로서 그 사람이 그렇게 결핍된 사랑으로 말미암아 굽어지고 찌그러졌던 성품들이 펴지면서 변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간절히 열망해야 합니다. 교회의 영광이란 것이 무엇이냐면 교회의 영광은 이 세상에서 전사적인 삶을 살아서 하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겨서 그렇게 매일 밤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겨서 신부로서 신랑에게 따뜻한 끌어안음과 애무없이는 그런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실질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그렇게 신랑되신 예수님께 깊히 사랑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여기 교역자들이 있고 직원들이 있는데 직원들은 대부분은 구역장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가장 큰 기도제목이 무엇이냐면 여러분의 구역 자체가 하나의 신부가 되어서 예수님이 비어주시는 왼팔의 팔베게로 오랫동안 교회에 나와서 구역장이 된 나부터 시작을 해서 이제 처음 예수를 믿기 시작한 새 구역원에 이르기까지 사랑스럽고 순종을 잘하는 지체부터 아직까지 도가시가 남아있는 지체들까지 신랑되신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의 구역을 당신의 품안에 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루 안아주시는 그것이 가장 큰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교구와 교회학교 부서를 맡고 있지않습니까? 똑같습니다. 여러분의 기도제목이 아주 분명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여러분들이 맡고 있는 그 부서를 예수님이 당신의 품에 안으셔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연약한 지체부터 가시가 남아있는 지체까지 두루 어루만져주시는 그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이것을 적용하자면 여러분 자신들에게 적용됩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예수님의 사랑에 품에서 충분히 사랑받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뛰어난 가치는 이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매주 회의를 하고 마음을 쓰고 때로는 지적을 하고 올바르게 목양을 하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예수님께 사랑을 받는 교회가 되기 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랑해 주시기 위해서는 또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반응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렇게 지체들을 잘 목양을 해서 그렇게 예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을 행복해하고 좋아하는 사람들로 실제로 주님이 어루만지셔서 그들을 변화시켜주시도록 그렇게 위해서 우리들이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오늘 아침에도 기도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내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을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실까? 가장 커다란 기도의 제목이 내가 어떻게 해서라든지 정말 주님께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주님이 기쁨이 될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성화를 위해 많이 노력하는 이유도 무엇입니까? 성화되지 않으면 뭐가 나쁜겁니까? 성화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들을 사랑하지 않으십니까? 사랑하십니다.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성화되지 않으면 문제는 무엇입니까? 성화되지 않으면 그렇게 예수님의 품에 안겨서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밖에 없는 귀한 신부라고 생각하시면서 온 몸을 어루만지시다가 우리를 안고 잠드시는 것 같은 오늘 성경에 나와있는 장면을 우리들이 경험할 수 없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더 온전한 연합을 그것을 위해서 우리들이 성화를 위해서 애쓰고 노력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을 기르면 제일 먼저 부모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이냐면 아주 어렸을 때 부모가 호/불호를 정확하게 구분해서 아이들에게 표정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선악에 대한 관념을 심어주는 지름길입니다.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도 하나님이 그를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목양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모르지만 조금 커서 한 살쯤 되면 착한 일을 하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엉덩이를 토닥거려주지만 나쁜 일을 했을 때에는 ‘씁’하고 합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에게 도덕적 판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을 통해서 보편적으로 옳지 않는 일이라고 하는 것을 아이들이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게 야단을 치는 동안에도 엄마는 아이를 사랑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이 똑같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이냐면 만약에 하나님이 아무리 우리를 엄마가 아이를 사랑하는 것같이 사랑하신다고 하실지라도 나타나실 적마다 ‘씁’하시면 계속해서 나타나신다면 우리의 삶이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원리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을 주셔서 구원하셨다는 과거의 추억만을 가지고는 우리들이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가 나를 기뻐해서 나의 집에 찾아와서 나를 자기의 품에 앉고 잠드시는 복락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여러분들이 다 사역을 하지만 오늘 아침에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제일 염려되는 사역하는 사람들은 사역을 잘 못하고 능력이 좀 떨어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정말 걱정되는 사람들은 사역을 하면서 예수의 품에 안겨서 어루만짐을 받아보는 경험이 고갈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언제가 자신이 섬기고 살아가는 모든 동기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드러냅니다. 때가 아직 여름이기 때문에 상록수나 아니면 가을이면 잎이 떨어지는 나무나 모두 같이 파랗게 있는 것이지 때가 되면 반드시 그것을 구별할 수 밖에 없는 때가 되면 반드시 기필코 반드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게 됩니다. 그래서 아주 부끄러운 모습이 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아픔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내가 죽는데 까지 따라가겠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저는 절대로 주를 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때는 아직 여름이었습니다. 근데 예수님이 끌려가시고 사람들이 흩어졌을 때 그때는 겨울이었습니다. 결국은 예수님이 잡히신 가야바의 뜰에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많이 사랑하고 언젠가 그분의 품에 안겨서 함께 동침하며 어루만짐을 받는 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괜찮습니다. 조금 능력이 부족하고 그래도 주님을 너무 사랑하였기 때문에 자기를 고치려고 애를 씁니다. 능력이 조금 떨어져도 그는 결코 게으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데 어떻게 게으르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부족한 능력은 성실함으로 보안하고 떨어지는 재능은 부지런함으로 배워가면서 그는 점차 점차 나아져갈 것입니다. 우리가 큰 일을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목회를 하면 다 수 만명 목회하는 사람처럼 목회를 하겠습니까? 우리가 무슨 그림을 그리면 김중섭 화백같은 사람이 되겠습니까? 사람마다 다 자기의 그릇에 따라 하나님이 쓰십니다.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 이렇게 예수님을 사랑을 받으면서 일생을 사는가? 하다못해 똥을 퍼도 진짜 예수님께 사랑을 받으면서 자신의 소명을 이루어가며 사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뒤에 보면 아주 애절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루살렘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으로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어다. 밖에 노루와 사슴들이 있는데 노루와 사슴들이 부스럭거리거나 소리를 내고 그러면 신랑이 깬다. 노루와 사슴에게 부탁해봐야 못 알아들으니까 예루살렘의 여자들아 내가 정말 부탁하는데 내가 신랑하고 있는 동안 나를 위해 봉사 좀 해라. 노루와 사슴 좀 잘 간수해서 우리 신랑 좀 깨우지 말아라.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까 신부는 깨어있습니까? 자고 있습니까? 깨어있는 겁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신랑의 품에 안겨서 신랑이 자신의 온 몸을 어루만지다가 손을 얹고 잠이 들었습니다. 근데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는 겁니다. 왜 입니까? 깨면 신랑이 몸을 뒤척이면서 자기를 머리에 베개한 왼손을 빼고 자기를 끌어안았던 오른 손을 떼어 놀까봐 그게 두려워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는 가운데 마음 속으로 예루살렘의 여자들에게 밖에서 나고 있는 바스락거리는 노루와 사슴소리를 부탁하는 겁니다. 제발 부탁한다. 나를 위해서 지금은 특별한 시간이니까 노루와 사슴이 부스럭 거리지 않게 도와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래야 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신랑의 품이 그리웠으면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쥐 날 텐데 목에 베개하고 무거운 팔까지 올라왔으니 쥐나지 않습니까?
결혼하고나서 얼마 안되었을 때 밤에 자는데 밤새도록 고생을 하는 겁니다. 가위에 눌려서 말입니다. 얼마나 커다란 통나무가 배위에 올라와 있는 겁니다.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이것 좀 치워줘 고함을 치는데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잠을 깨는데 우리 집사람 다리가 배 위에 올라와 있습니다. 내가 얼른 확 던져버렸습니다. 그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신랑이 팔을 얹혀놓고 있는데 움직이지도 못하고 가만히 신랑은 잠들어 있으니까 힘이 안들지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쥐가 날정도인데도 뭐가 좋으냐면 신랑의 품에 안겨서 어루만져지는 것이 너무 행복하고 좋은 겁니다.
그래서 교회가 환란이 온다면 겁낼 것이 없습니다. 근데 신랑을 떠나도록 흔들어 깨우는 노루와 사슴들의 소리는 그게 환란이나 핍박이 아닙니다. 그래서 뭐라하냐면 환란이나 핍박이냐 칼이랴! 적신이나 위험이냐 칼이랴1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결코 끊을 수 있으랴 근데 우리의 허물과 죄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 끊어진 것 처럼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공을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막살면 안됩니다. 부주의하게 생각없이 막 살며 힘들다고 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신랑이 깹니다. 이런 세심함을 가져야 합니다. 정말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내게서 모든 것이 사라져도 괜찮지만 예수님의 사랑이 사라지면 어떻게할까? 신랑되신 그분의 사랑이 깨면 어떻게 할까? 두려워하면서 전전 긍긍해하는 섬세함이 있는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냐면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소심합니다. 소심함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이냐면 'carflness' 주의깊음에서 비롯되는 소심함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은 담대함입니다. 죄를 향해 겁내지 않는 영적인 대담함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죄가 갖고 있는 특성은 그런 것입니다. 맹렬함 광기, 대담함 그런 것입니다. 죄 가운데 깊이 쩌든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 신자가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그래서 영적인 주의깊음에서 오는 신령한 소심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를 충만히 누리고 살았던 사람들은 아주 소심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뭐냐면 "어 이렇게 살아도될까? 내가 이런 걸 기뻐하실까?" 이것을 몇 년에 한 번씩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아침마다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매 순간순간 마다 "하나님이 나를 좋아하실까? 이런 마음을 싫어하실 텐데 어떻하나.. 내가 이런 마음을 가졌었는데.. " 이렇게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랑의 품에 안겨서 어루만짐을 받으며 살아가는 신부로서의 교회의 모습이고 성도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기도하면서 여기저기 들려오는 이야기들을 보면 교인들이 왜 이렇게 거칠고 대담할까? 왜 이렇게 대담할 까? 물론 세상적으로 보면 커다란 잘못은 아니지만 어떻게 대담할까? 예수님이 보시기에 애처로울 정도의 마음씀, 신령한 소심함, 그런 것들에 마음을 쓰는데 예수님이 "괜찮다. 너무 그렇게 까지 마음쓰지 말아라."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지 예수님이 "너 이렇게 살아서 되니?"" 아 괜찮아요. 예수님 뭐 그런 것 가지고 그러세요" "너 이렇게 되면 안될텐데" 성령님이 그렇게 말씀하셔도 "다른 사람은 더 해요 이정도로 뭘 그러세요" 이렇게 하면서 사니까 예수님께 사랑을 받는 애틋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성 자체도 말로는 주님의 사역을 한도고 하면서도 아주 거칠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마음 씀, "교회가 이렇게 되도 괜찮을까?" 아파하고, "내가 이렇게 되도 괜찮을까?" 고통하고 그러면서 어떻게 하든지 신랑의 마음에 맞게 그래서 그분의 친교와 사랑이 자기에게서 떠나가지 않기를 깊이 고민하면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경회는 바로 그렇게 이제 신랑이 멀리 떠났을 때 그때에 신랑이 가버렸을 때 신랑을 찾아가야 되쟎아요? 그럼 결단이 필요하고 그런 결단의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 이러한 사경회, 참회의 기회입니다. 이것을 제공해 주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도들이 그렇게 애틋하게 예수님의 품 안에서 항상 어루만짐을 받으면서 살고 신랑이 잠든 순간에도 조용히 눈을 뜨고 예루살렘의 여자들에게 노루와 사슴을 인하여 부탁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지 않을 때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시 신랑을 만나게 해주어야 하고 다시 그 품에 돌아가서 어루만짐을 받으며 살아가도록 해야합니다.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러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현장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되면 안됩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객관적으로 듣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내가 어느 교인을 만나서 얘기를 했는데 사경회가 있었는데 "사경회를 들으면서 어떤 말씀을 깨달았냐?" 그랬더니 하는 얘기가 뭐냐면 "자기는 너무나 감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감탄하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줄 알았습니다. "어쩌면 목사님과 저와 나이차이도 별로 안나는데 어쩌면 설교를 잘하느냐고 감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만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설교자도 사라지고 세상도 사라지고 정말 우리들이 만나야할 그 신랑의 품에 안기는 겁니다. 그래서 그 어루만짐을 받고 이 세상에서 정말 예수님이 나를 이 모든 세상보다 사랑하시고 나를 당신에게 있어서 전부인 것처럼 사랑하신다고 생각할 때 그 때 우리는 고난도 이길 수 있고 사역에서 오는 견디기 힘든 통증들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하면 사역이 힘들고 일이 어려워서 우리들이 넘어지고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신랑의 사랑이 없어서 무너지는 것입니다. 솔직히 얘기해서 이렇게 얘기하면 여러분들한테 미안하지만 나한테 하는 얘기입니다. 뭘 하는게 있습니까? 우리들이 전도할 때 생명의 위협을 초대교회처럼 느낍니까?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설교를 하다가 사도바울처럼 투옥을 당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받을 대접 받으면서 하나님 섬기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뭐가 힘듭니까? 우리들이 힘들게 하는 것은 환경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렇게 수시로 교회 전체적으로 혹은 자기가 개인적으로 예수님의 팔베개를 하고 안겨서 어루만짐을 받는 그 은밀한 사랑의 기쁨이 있었기 때문에 고난과 시련과 죽음 이런 것들이 판을 치는 그런 세상 속에서도 향기로운 인격을 가지고 주님을 나타내는 편지처럼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원래 좋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예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말씀에 탁월한 인식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오늘 그 신랑의 품에 안겨서 그 사랑을 받고 어루만짐을 받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결코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기에서 사역을 감당할 수 없고 또 사역을 감당하면서 향기로운 신앙의 인격으로 여러분들이 다시 빚어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번 사경회에 깊이 은혜를 받고 절대로 객관적으로 말씀을 듣지 말고 건성으로 흘려보내고 테이프 다시 듣지 그러지 말고 이게 마지막 기회다 생각하고 정말 예수님의 품에 안겨서 새롭게 살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사랑은 언제나 동일하지만, 우리가 그 사랑을 항상 동일하게 느끼면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를 많이 사랑해주셔도 우리가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깊이 잠기기 전에는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만큼 충분히 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얻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라고 우리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알아가는 것은 우리가 철들어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안 사람들이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로서 철든 사람들이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지 못하면 그가 비록 거듭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한 사랑을 알아가기 전에는 그가 충분히 철든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렇게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러면 왜 그럴까? 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지만, 비로소 철이 들어갈까, 이거죠.
이것을 영적 성숙의 측면에서 우리들이 관찰을 해 보자면, 영적인 성숙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신령한 은혜의 경험 속에서 성숙이라고 하는 것이 얻어지게 됩니다. 이 성숙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해서 얻어지게 되는데, 그 신령한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은혜로운 사랑의 정서에 대한 경험을 동반한단 말이죠. 그 사랑의 경험이 결국은 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경험과 맞물리게 돼요. 그렇게 맞물리면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알아가게 되는 것이거든요. 그렇게 되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 가지고 계신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될 수록 그는 하나님 앞에 정말 철든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교인들을 이렇게 봐도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한 사람들은 철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런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 혹은 그런 사랑에 대한 경험이 고갈된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은 철이 없어요. 특별히 그런 사랑을 거의 경험해 본 적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서 거듭났는지도 확신이 안서는 그런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굉장히 교회에서 철이 안 들었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는 거죠. 그래서 우리들이 신앙의 세계에서는 얼마나 오래 믿었느냐 또 그 얼마나 육신적인 나이가 많이 들었느냐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고 그 사람이 철이 들었느냐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제 철이 안 든 사람들이 교회에서 커다란 직분을 맡고 살아가면, 그러면 그건 본인에게도 굉장히 그 불리한 것이고 그런 사람들을 보는 사람들에게도 굉장히 신앙적으로 불리한 것이에요. 왜냐하면, 바르지 못한 본보기가 미치는 신앙의 영향은 굉장히 큰 겁니다. 말로 쓴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편지 수천 장을 실제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편지가 한 번에 지워버린다고요. 무슨 얘긴지 이해할 수 있죠? 글로 쓴 좋은 편지 수천 장을 말로 쓴 수천 장의 이 아름다운 이 편지를 존재 자체로 보여주는 편지 그 한번의 그림을 가지고 다 지워버릴 수 있는 것이 이게 그리스도인의 모본의 강력한 효과라 이거에요. 어제도 잠깐 이야기 했습니다만,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완악해지기 시작하면 차라리 복음을 모르고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아이들이 훨씬 순수하게 예수님을 잘 받아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뭐냐 하면 악한 본보기를 부모를 통해 발견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 마음이 돌같이 굳어지기 시작하고 부모의 그 악한 본보기를 통해서 복음에 대한 반감을 갖는 거예요. 그리고 복음과 화해를 하려고 들지를 않아. 복음과 화해를 하지 않는 것만큼 이 신앙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것은 없거든요. 뭐 신앙 자체가 성립을 안 하죠. 복음과 화해를 안했는데.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에요.
실제로 신자가, 신자가 된 다음에 가장 커다란 행복이 뭐라고 생각을 해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되면, 어제 저녁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것은 결국 이 세상을 바라보는 모든 관점 자체가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이거죠. 이제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세상에 있는 자원을 가지고는 자기가 결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해서 살 수 없고 자신도 행복해질 수 없다, 라고 하는 그런 인생에 대한 새로운 견해가 생겨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의 물질이나 사회적인 지위나 이런 것들이 인간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하지요. 꼭 필요하지만 그것으로 절대로 충분하지 않다 이거죠. 그것이 아무리 많아도 신자가 자기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 때문에 행복해 하는 그런 진실한 변화가 없을 때에는 결코 그가 하나님 앞에 행복해질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것을 우리들이 깊이 깨달아야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갈수록 이제 그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어가고 철이 든 신자가 될 수 있는 거거든요.
오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그 당하게 되는 많은 어려움들을 기술하고 있거든요. 사실 동의가 좀 잘 안되잖아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았으면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좀 평탄한 인생이 주어져야지, 환난이랴, 적신이랴, 위험이랴, 기근이랴 위험이랴 칼이랴 그건 사실 하나님 안 믿는 세상 사람들에게도 거론하기 싫을 정도로 많이 고통스러운 말하자면 고통스러운 상황들이거든요. 환난, 위험, 적신, 적신이라는 것은 뭐 벌거벗는다는 것이거든요. 가난해서 혹은 핍박을 받아서 벌거벗고 그리고 위험을 당하고 칼을 만나고 환난을 만나고, 그런 것들이 사실 세상에서도 너무 어려운건데 왜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에게 왜 그런 것들이 여전히 있느냐 이거죠. 여전히 그런 것들을 당한다 이거죠.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우선 내적인 원인과 외적인 원인으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어요. 내적인 원인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속에 죄가 남아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적절하게 그 다루시는 거죠. 그래서 우리 안에 이런 죄가 남아있기 때문에 여전히 이런 죄들이 우리 안에 남아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의 고통들이 여전히 그치지 않는 것이지요. 그렇죠? 그리고 또 하나는, 외적인 것이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측면에서 보면, 우리가 복음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이미 세상의 편에서 보면 변절자가 된 사람들이거든요. 그러니까 세상이 우리를 향해서 대적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이치라 이거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뭐라고 하셨어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그 세상은 뭐고? 어두움이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세상은 뭐고? 썩는 거죠. 소금은 썩지 않게 하는 거고. 이렇게 성질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에 그런 쪽에서 볼 때에 세상에서 볼 때에 우린 변절자란 말이죠. 그러니까 당연히 세상 속에서 뭍혀 살아도 사람들이 환란과 시련을 당하는데 세상의 입장에서 볼 때 변절자가 되었으니까 외부적으로 세상이 우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적절한 그런 고난이 있단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섭리적으로 기가 막히게 사용하셔서 그것들을 통해서 우리들을 부패하지 않게 하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끊임없이 갈구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 거라 말이죠.
영국에서 있었던 일인데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아가지고 이제 런던으로 이렇게 오는데 말이죠. 이 고기가 자꾸 죽는 거라. 청어래요 청어였다고 그래요 청어가 자꾸 죽는 거라. 사실 고기도 그 바닷물 통에 들어가서 고속도로를 몇 시간씩 달리니까 그 사실 얼마나 힘들겠어요. 뭐 산소 발생기를 꽂고 난리를 쳐도 말이죠. 그래서 이 운반하는 사람이 머리를 써서 어떻게 했냐면, 청어를 잡아먹는 물고기 한 마리를 거기다 집어넣어. 딱 한 마리만, 커다란 통에 청어가 많이 들어있는데, 그것을 잡아먹는 큰 물고기 하나를 집어넣은 거예요. 그게 뭐 잡아먹어도 배가 한정이 되 있는데 그 뭐 한 트럭을 다 잡아먹겠어요? 그러니까 한 마리를 집어넣어. 이 놈이 신이 난 거죠. 돌아다니면서 한 마리씩 잡아먹으니까. 이 청어들은 안 잡혀 먹으려고 몇 시간 동안 뱅글뱅글 도는 거예요. 그러니까 딱 끝난 다음에 그 고기 도착한 다음에 고기를 꺼내니까 말이죠. 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거죠.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을 그렇게 사용하시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세상에서 전혀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인지 세상에 속한 사람인지 우리가 금방 잃어버릴 거예요. 죄가 없었던 아담도 그 창조된 지 얼마 안 되어서 자기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잃어버리고 선악과를 따 먹잖아. 그럼 죄가 있는 우리는 얼마나 잘 우리의 소속을 잃어버리고 그렇게 세상과 하나 되겠느냐 이거죠.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세상에서 적절하게 환난과 시련을 당하게 함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이 섭리 속에서 우리가 속한 곳이 이 세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게 해 주시는 거예요. 환난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런 것들을 당하면서 ‘나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구나.’ 그런 거죠.
그리고 또 하나는 그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신자에게 하나님의 그 풍성한 인격적인 사랑에 대한 갈망을 갖게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재미있는 예 하나 들어 볼까요? 여러분들이 어렸을 때에 골목에서 막 딱지치기하고 구슬치기하고 친구들하고 술래잡기하고 어울려서 놀아요. 고무줄하고. 엄마가 “야, 나 좀 봐라. 심부름 하나 해라. 얘, 이리 오너라.” 그래도 안가죠. 놀이에 정신이 팔려서. 그러다 큰 애가 와서 한 대 딱 때려요. 얻어맞아요. 그럼 누구 찾아요? “엄마~잉~” 그러면서 엄마 찾아 가는 거예요. 그리고 엄마가 “누가 그랬느냐, 누가 우리 딸 울렸느냐?” 그러면 갑자기 더 서럽게 울지요. 그리고 엄마 치마폭에 가서 막 그러는 거지. 쟤가 때렸다고 말이지, 쟤가 고무줄 끊고 도망갔다고 말이지. 이르지요. 그리고 자기가 그 엄마에게 소속된 아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고 그 엄마가 있음으로 해서 자기가 얼마나 그 안전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잖아요. 우리도 똑같아요. 세상에 살면서 놀이에 정신 팔려가지고 하나님이 불러도 안돌아와. 고무줄놀이 재밌고, 구슬치기 재밌고, 딱지치기 재밌고, 딱지가 그 돈하고 비슷하잖아. 돈에 미쳐서 안 돌아와. 구슬, 구슬, 그 반짝반짝한 그 구슬 말이죠. 보석하고 비슷하게 생겼잖아요. 애들 술래잡기하고, 뭐하고, 하면서 안 가는 거죠. 그러다가 딱 한 대 얻어맞아요. 그 때 비로소 아는 것이 뭐냐 하면, 이 골목이 내 집이 아니고 우리 엄마 있는 집이 내 집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거죠. 그래서 항상 하나님께서 섭리적으로 적절하게 신자들로 하여금 이 세상으로부터 배신감을 느끼도록 만들어 주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함으로써 ‘죄 많은 이 세상으로 충분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살아야 하는구나,’ 그것을 깨닫도록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뭐냐 하면 그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면 환난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것들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 놓을 수가 없다 이거죠.
그럼 왜 하나님의 사랑을 하필이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라고 표현을 하느냐 이거죠.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직거래로 이루어지는 사랑이 아니야. 그럼 어떻게 하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내주실 때에도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사실 우리의 사랑은 너무나 결함이 많고 때가 묻어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으시기 에는 적합하지 않아요. 그 분에게는 이 우리의 사랑이 어울리는 사랑이 아니에요. 그건 마치 황제에게 개밥을 갖다 주는 거나 비슷하단 말이에요. 어울리지 않는 거예요. 황제께 드린다고 하고 정성껏 다리 밑에 사는 노파가 만들어가지고 했는데 개밥 비슷하게 되었는데, 그걸 황제가 먹을 수가 있겠느냐고. 아무리 정성껏 했어도 황제는 그런 거 먹는 거 아니라 이거죠. 그러니까 적합하지가 않아. 그걸 적합하게 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게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라고 하는 문을 통해서 모든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으로 내려오고,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이 예수님이라고 하는 문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동안에 그 우리의 사랑도 예수의 피에 씻겨서 개밥과 같은 사랑이 예수의 피에 씻겨서 하나님이 보실 때에 흠 없고 아름다운 사랑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얼마나 우리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분이시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잖아요. 예수님이 없으면 여러분들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서 예수님의 중보자 되심은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서 오셨을 때에 고난 받으실 때만 중보자 되신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선택할 수 있는 삶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정말 두려운 것은 세상이 아니야. 여기도 보면 환난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런 것 모두 만났는데도 그 사람들이 세상으로부터 그런 어려움들을 당했지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삶을 살았잖아요. 그러니까 정말 두려운 것은 이 세상이 아니라 나 자신이에요. 나 자신이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하고 이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거하고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주님이 나를 향해 베푸시는 그 사랑에 올바른 사랑으로 반응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그리고 그렇게 되지 못할까봐 우리가 두려운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이 날마다, 날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도 언제든지 그렇게 변절할 수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매 순간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셔야 하고 주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그 큰 사랑에 대해서 그 사랑이 하나님 혼자만의 짝사랑이 되지 않도록 우리들이 그 사랑에 대해서 온전하게 반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에요.
4. 사랑은 순종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지, 정, 의 즉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이 감정이 생기고 또 그렇게 사랑을 하게 되면 그 관계를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지를 알아서 그 관계가 요구하는 의무를 행하고 이렇게 모두 전인격적인 것이 사랑입니다. 이게 이 사랑의 특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랑에는 생각이나 의지보다는 감정적인 면이 훨씬 더 강력하게 자극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이 사랑에 있어서 이 감정이 그 가장 앞자리에 오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이 시작할 때는 감정부터 먼저 일어나서 사랑이 시작되게 되고 또 사랑이 식을 때에도 제일 먼저 감정이 식기 시작하면서 인격적인 사랑이 점점 뒤로 물러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이 사랑이 인격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감정이 북받쳐 오르고 사라지는 것에 따라서 사랑에 대한 생각들이 사랑이 있고 없고 이런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되고 그것이 사랑에 대한 생각의 전부를 차지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은 그것만 가지고는 사랑이 확인이 안 되는 것이죠.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예외는 아닙니다.
저는 결혼을 준비하는 지체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결혼으로 인도하실 때에 항상 마음에 소원을 두게 하셔서 그래서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심으로 응답하시는 것은 사실이거든요. 사실인데 그런 감정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소원인지 자신의 육체적 자극을 통해서 홀로 자기 안에서만 일어나게 된 감정인지는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이렇게 충고합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항상 그 자기 자신이 하고 싶은 쪽으로 모든 것을 합리화시키는 그런 성향이 있거든요. 그래서 일단 자기의 마음속에 그 사람이 강력하게 좋아져 버리면 그러면 그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 라고 하는 감정을 가지고 다 해석을 하려고 한단 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판단이 참 힘들게 마련이에요. 그래서 그게 사랑인 줄 알고 결혼을 했는데 살고 보니까 이 사람이 영 아니더라. 제가 아는 어느 지체들은 뭐 지금은 없습니다만, 3년 반인가를 열렬하게 연애를 하다가 결혼을 했는데 결혼하고 3일밖에 안됐는데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던 그 남자가 패더래요. 그런 면이 있는 줄을 자기는 3년 반 동안을 사랑하면서 한 번도 못 느꼈다는 거죠. 형제 얘기를 들어보면 똑같은 얘기죠. 3년 반을 사귀었는데 그런 면이 있는 줄은 자기는 몰랐다. 그래서 손을 좀 봤다. 그거죠. 이처럼 사랑은 그처럼 감정에 의해서 흔들리기 쉬운 것이거든요. 그것가지고 자기가 사랑이 있다 없다 이렇게 하기가 쉽단 말이죠.
그런데 이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야.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 심지어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까지도 자기 속에서 솟아나는 감정을 가지고 사실은 자기 안에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거나,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 이 얘깁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하나님을 향한 성도들의 사랑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게 사랑하면 반드시 그 사랑이 참사랑인 경우에는 그 사랑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된다, 라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반드시 눈에 안 보이는 열매가 아니라 보이는 열매라 하는 거죠. 사실 바람이라고 하는 것은 공기의 흐름이니까 공기가 보이지 않죠. 그러니까 사실 누가 바람을 보았다고 말할 수 없거든요. 그런데도 우리는 바람이 분다, 아니야 이제 바람이 멎었어. 그렇게 말하지요.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람이 지나갈 때에는 나뭇가지도 흔들고 지나가고 널어놓은 빨래도 펄럭이게 하면서 지나가지, 바람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지나가는 법은 별로 없단 말이죠. 그래서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 바람에 펄럭이는 빨래, 바람이 흔들어 놓은 나뭇가지,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들. 이런 걸 보면서 바람의 존재를 반드시 느낄수 있듯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 더욱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보이지 않는 사랑이 그런 식으로 증거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것이 예수님에 의해서 오늘 명료하게 거론이 되는데 아주 길지도 않고 짤막하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 이거죠.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러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킬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 방식은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도입된 방법이 아닙니다. 이미 구약에서 하나님이 계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면서 너희가 나를 경외한다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고.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보이지 않는 요소인 사랑과 사랑의 증거로 나타나는 보이는 요소인 계명의 준수를 계속 말씀하신 것은 이미 벌써 구약부터 계속되는 사상입니다. 계속되는 사상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사랑은 단지 감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사랑은 감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책임지는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당신과 이스라엘 백성들 간의 사랑의 관계를 말씀하실 때 부부와의 관계를 가지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가 이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존재했던 사랑의 관계를 혼인의 관계로 묘사하기도 하고, 또 사도바울은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님을 우리의 신랑이라고 말하고 우리를 예수님의 신부라고 말하면서 혼인의 관계를 가지고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사실은 왜 하필이면, 사랑을 이야기할 때 혼인의 관계를 이야기 할까? 혼인의 관계뿐만 아니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의 관계를 가족관계를 가지고 많이 또 말씀하셨죠. 아버지의 사랑을 가지고 말씀하시잖아요. 이렇게 가족관계나 혼인관계를 가지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 사랑이 모두 책임을 동반하는 관계로서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에요. 이런 거지요.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해. 그래서 보기만 하면 그냥 끌어안고 뽀뽀를 해줘. 그리고 난 너 사랑한다, 난 너 없이 살 수가 없다, 그래요. 그런데 돈도 안 벌어오고 집에도 안 오고. 그리고 며칠 만에 한 번씩 온다, 몇 주 만에 한번씩 온다, 그런 것도 없어요. 어디 갔는지 소식도 없이 쳐 박혀서 제 멋대로 살고 돌아다니고 먹고 마시다가 어느 날 갑자기 와가지고는 또 끌어안고, ‘난 너 너무 사랑해.’ 그리고 생활비도 안주고 또 어디로 가버린다 이거죠. 그럴 때 그 사랑은 진짜 사랑이라고 믿을 수 있는 사랑이 아니다 이거죠. 남편과 아내의 관계도 마찬가지죠. 어느 날 남편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하~ 난 너무나 당신을 사랑한다오. 당신 없이는 진짜 내가 살수가 없다오,’ 그리고 부부관계를 요구하고. 그리고나서 그 다음에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어디로 살아지고 나서는 없어요. 언제쯤 돌아온다는 것도 없고. 어느날 갑자기 또 나타나 가지고는 ‘난 너를 사랑하다’고. ‘옛날에 사랑했다’, ‘앞으로도 사랑할거다’ 그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사랑한다고 말이죠. 이러한 것들은 그 감정이 비록 그 아내 되는 사람을 만났을 때에 고도로 분발되어서 올라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길거리에 있는 여자들하고 사랑을 나눌 때에 솟아오르는 그런 감정에 고조 된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정도의 동물적인 사랑이라는 말이죠.
하나님은 우리가 그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인하여도 모독을 받으시지만 이런 잘못된 방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의해서도 모욕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지를 당신 자신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으로 먼저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어떻게 사랑해야 될지는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 그런 무책임한 감정놀음이 절대 아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사랑도 역시 감정에만 치우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전 인격적인 사랑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계명의 문제가 들어오는 것이죠. 그래서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그 판단이 항상 옳을 수가 없단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만약에 나를 사랑한다고 할 것 같으면 너희 스스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 정말 나를 사랑하는 건지 너희 스스로 너희 자신을 한번 재봐라. 그 재볼 수 있는 시금석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너희가 나를 향해 가지고 있는 사랑이 정말 내가 원하는 종류의 전 인격적인 사랑이라면 너희는 내 계명을 잘 지킬 거다. 그리고 만약에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느끼면서 네가 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속지말아라. 그것은 네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말씀이거든요.
그러면 이제 여기서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이 왜 이렇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사랑이 계명을 지키는 것에 의해서 입증이 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이것이거든요. 진정한 사랑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의존의 관계야.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그 사람이 나한테 무얼 해주고 안 해주고와는 상관없이 사랑의 관계는 의존의 관계야. 그래서 자신 홀로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고 그 사랑하는 대상에 자신의 존재가 전적으로 기대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사랑의 감정이죠.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를 떠나 버리면 그러면 자신 혼자 자기를 지탱할 수 없어서 죽어버리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건 뭐냐 하면 얼마나 그 사람의 존재가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상대방에게 의존되어 있는 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의존의 감정을 동반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예를 들자면 ‘아, 난 너 너무 사랑해. 진짜 난 네가 너무나 좋아. 근데 네가 있으나 마나 난 괜찮아.’ 그건 사랑이 아니라 이거죠. 그러니까 ‘난 널 사랑해 난 네가 너무나 좋아. 그러나 있으나 없으나 마찬 가지야.’ 그런 사랑이라는 것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죠. ‘난 너를 너무 사랑해. 네가 없이 내가 혼자 존재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어. 그것은 죽음이고, 그건 절망이야.’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사랑고백이라 이거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렇게 한번 누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편지 한번 써 봐요. ‘난 너 너무 사랑해. 근데 넌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야.’ 그래 보라고. 그럼 누가 그걸 사랑이냐고 생각하겠느냐 말이야. 거짓말로라도 ‘난 너 너무 사랑해. 난 네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고 네가 없는 세상은 곧 죽음 자체야. 그리고 너 없이 혼자 사느니 차라리 같이 죽고 싶어.’ 거짓말이라도 그렇게 이야기해야지 ‘이 사람이 나를 진짜 사랑하는 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그렇게 사랑은 반드시 의존의 마음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너희는 세상을 사랑치 말라.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 거기서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것은 목적격의 사랑이거든요.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너희가 세상을 사랑하면 너희가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없다. 이거거든요. 왜? 의존의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거예요. 세상을 사랑한다는 건 세상에 기대어서 세상을 의존하며 산다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렇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만을 의존하면서 살도록 창조하신 거예요.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주 더러운 것이에요. 불결한 것이라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의존하는 마음이 있을 경우엔 반드시 순종합니다. 절대적으로 그 사람을 의존하는데 어떻게 순종하지 않을 수가 있어요? 믿는 게 그 대상밖에 없는데 어떻게 순종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이거죠.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하나님을 향해서 절대적인 의존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순종을 잘 합니다. 그런데 독립 선언한 사람들은, 절대 순종 안합니다. 그 삶을 가르쳐서 교만한 삶, 하나님 없는 삶, 불순종의 삶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해 놓으시고 정말 원하셨던 관계가 하나님을 향해 절대적으로 의존해 있는 관계, 그래서 그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고 살아가는 그런 존재가 되기를 원했고 그렇게 될 때에 그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자원을 공급받으면서 가장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되어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의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있다면 반드시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잘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5. 먼저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일 4:10)
우리들이 많은 사랑을 말합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 부부의 사랑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 좋은 이웃과의 사랑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우리에게 얼마나 커다란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정말 부모로부터 정상적인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자라는 자녀들을 보십시오. 구김이 없고 자신감 있게 자랍니다. 남편으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는 아내, 아내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는 남편. 모두 다 건강한 삶을 이어가게 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세상의 고통은 사랑이 없는데서 오는 고통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류역사 이래 문학이 생기고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목마르게 사랑을 이야기한 원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이 우리에게 매우 인생을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보다 더 근원적인 사랑의 그림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 본래의 사랑은 어떤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오늘 성경이 답을 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여기에 있다, 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앞 절에 나오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그 사건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그 사랑이 바로 우리들이 그토록 목말라하고 찾는 그 사랑의 본래 근본 실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정말 안다면 그러면 그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보여주시는 그 사랑 앞에서 인간들은 그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베길 수 없을 것이고 또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고 하면 반드시 그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것이 궁극적으로 죄를 말미암는 인간세상의 이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그를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가 우리를 사랑하사’, 되어있습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가 사랑의 소재를 말한다면, 그 뒤에 나오는 ‘우리가 그를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가 우리를 먼저 사랑하사’ 는 사랑의 선도권 문제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이지, 우리가 먼저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위대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반응으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이 먼저 오셔서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는 것이죠. 사실 이치를 따지고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셨고, 거기에 계셨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멀리 떠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실은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셨는데 우리가 스스로 범죄 함으로 하나님께 욕을 보이고 주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그러면 손해를 입은 쪽은 하나님이시고, 고통을 당하신 쪽은 하나님이시니까, 당연히 인간이 먼저 하나님께로 찾아와서 용서를 빌고 죄 사함을 구하는 것이 이것이 모든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의 이치였습니다. 만약에 그러했더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돋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은 있었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갈 수 있는 죄의 결과는 받았지만 스스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은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를 묘사하기를 길을 잃은 양에 자주 비유하였습니다. 길을 잃어버릴 수는 있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집을 찾아갈 수 없는 양에게 최선의 방책은 목자가 먼저 찾아와서 그를 발견하고 그를 어려움 속에서 건져내고 그를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이렇게 다루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더더욱 그 사랑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주는 감동을 주는 대목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잘못했지만 스스로 그 잘못을 고칠 수도 없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도 없는 그런 무능한 인간. 심지어는 너무나 멀리 하나님을 떠나왔기 때문에 자기가 돌아가야 할 곳이 하나님의 품이라는 사실조차 깨달을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그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선도적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는 점에서 이 사랑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그림자와 같은 사랑의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우리가 이러한 사랑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사랑을 많이 노래하고 찾아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알게 되는 그 순간 자신들이 이제껏 찾고 즐겨왔던 그 사랑이 지푸라기와 같은 사랑이었다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어두운 밤에는 촛불아래 있기를 좋아하지만, 밝은 태양이 뜨고 나면 누구도 그 촛불에 연연해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이처럼,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의 모든 사랑과 대를 끊을 정도로 절대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사랑에 붙잡히면, 참으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바로 선도적인 사랑이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믿게 된 이 모든 것에 대해서도 우리의 공로를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그 분이 우리를 찾아오지 아니 하셨더라면, 우리가 그 사랑을 알았을 수도 없고 누렸을 수도 없었을 텐데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들이 이처럼 구원받은 존재가 되었으니까 우리는 단지 그 선도적인 사랑을 하나님 앞에 감사할 뿐인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 선도적인 사랑이 희생을 통해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먼저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가 우리를 먼저 사랑하사 자기 아들을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주셨음이라’ 는 것이죠. 화목제물이라고 하는 이 말의 희랍어는 ‘히라스무스’라고 하는 말인데 이 말은 구약에서 제사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여 졌고, 또 구약에서는 이 말이 용서, 하나님의 사유하심을 가리키는 단어로도 사용이 되었습니다. 즉 화목제물인 히라스무스는 곧,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죄로 말미암아 불화해진 관계를 청산하고 화목함을 회복하기 위하여 희생으로 바쳐지는 제사였고 그 제사에 소용되는 희생물이 바로 화목제물이었으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가 적대감과 거리감으로 멀어지고 우리는 부당하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주님으로부터 멀리 떠났지만 하나님은 정당하게 당신 안에 있는 거룩의 성품 때문에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실 수밖에 없었고, 우리와 우리의 죄가 하나 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와 우리 죄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이 손해를 입으신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당신을 떠나서 살아가는 그 모습이 너무 비참하고, 당신이 이 세상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기대하셨던 인간의 참된 목적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시며 너무나 가슴아파하신 나머지 하나님께서 당신이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인간을 찾아오신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갈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만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고 그리고 자신의 죄로 인해서 고통하고 있었지만,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화목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감당시키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히라스무스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그 희생은 그 희생과 고난의 깊이가 크면 클수록 그 희생과 고난의 깊이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크기와 깊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가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가지고 계신 사랑을 우리가 항상 동일한 정도로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랑이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고 그 사랑을 온전히 믿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어떠한지에 대해서 감동을 받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그 분께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그 일이야말로 하나님이 인간을 이 세상에 처음 창조하셨을 때에 그 인간에게 기대하셨던 바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아니하고는 그 분을 의존할 수 없고 의존하지 아니하고는 순종할 수 없고 순종하지 아니하고는 결코 그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믿음으로 살아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순종하고 그 분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마음속에서 살면 우리의 남은 죄들이 우리 안에서 놀랍게 죽고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신 그 사랑에 대해서 반드시 사랑으로 반응하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능력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이렇게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온전히 죽여서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삼으신 것으로 나타났으니, 이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와 화목한 가운데 살기를 원하시고 다시는 우리들이 죄로 인해서 좋으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 하나님과의 무한한 거리감속에서 살아서는 안 되는 존재인지를 하나님이 의심할 여지가 없도록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연약하여 범죄 하려고 할 때마다, 죄가 우리를 주관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찬송이 말하듯이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라고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를 보면서 그 앞에서 항상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펑펑 우는 감격으로 주께서 우리의 인생에 이 수고로운 날들을 그치게 하실 때까지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한 편으로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 때문에 울고 또 한 편으로는 그 놀라운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헌신하고 이바지하는 것이 없다는 자기부족과 헌신의 부족을 인해서 뉘우치는 마음으로 울고 그래서 한 편으로는 감사와 또 한 편으로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요. 정말 쓰레기와 같은 존재들일 뿐이며 주님이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선도적인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일평생 주님을 말할 수 없이 불쾌하게 해 드리고 주님 마음에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겨드리다가 심판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 앞에서 나의 나 된 것이 모두 이 선도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 때문에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신 예수님의 은혜 때문 이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날마다 우리의 거룩한 삶을 위한 동기가 되고 주님을 거스려 살아가는 불화한 이 세상을 위해서 우리 자신이 희생물이 됨으로써 그들에게 참 평화를 주고자 하는 진실한 도구가 될 때에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무나 간절하게 원하시는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며 사는 이 일은 고난주간에만 이루어지는 그 일이 아니라 일평생 ‘숨질 때 하는 말 이것 일세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이런 방식으로 우리들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먼저 선도적으로 찾아오셔서 말로 다할 수 없는 희생을 치르시고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보답이고, 아버지에 대한 보답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