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200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5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사랑을 통한 자기완성(요일4:11) 2005.5.10 교직원예배 1
2. 사랑은 아픔을 함께 합니다(고후11:29) 2005.4.28 교직원예배 6
3. 지식과 사랑(빌1:9) 2005.6.9 교직원예배 12
1. 사랑을 통한 자기완성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1)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은 요한일서입니다. 요한일서 4장, 오늘 설교할 구절은 11절입니다. 11절. 제가 7절부터 10절을 읽고 11절을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다같이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아멘.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아멘. 기회가 닿으면 사실 꼭 한번 다시 설교해보고 싶은 시리즈가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지금 설교하면 한 8년 전에 설교한 거보다는 훨씬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이 완성되어가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겁니다. 더 심하게 이야기하면 사랑이외에는 아무것도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를 해도 전혀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한 사람은 태어날 때 완성된 채로 태어나지를 않아요. 그것은 타락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어요. 타락하고 난 후에는 더 불완전한 상태로 태어나는 거예요. 그리고 그가 일생을 살아가는 과정이 자기가 완성되는 과정이에요. 자기완성이라고 하는 것이 뭘 뜻 하냐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이 세상에 지으신 의도와 목적에 부합하는 존재가 되어가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도 결국은 그 자기 완성을 향해 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이죠. 또 믿은 다음에 성화의 삶도 결국은 자기완성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에요. 중생해서 주님의 자녀가 되는 것, 이후에 성화의 삶을 살면서 예수를 닮아가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자기완성의 과정이거든요. 그 완성의 과정이 무얼 통해서 완성으로 이행이 되냐 하면 사랑을 통해서 완성을 향해 이행이 되는 거예요. 예전에는 우리에게 본성적 사랑이 있지만 이 본성적 사랑은 마치 본성적 사랑은 그 빛에 있어서 원래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하자 않는 것은 아니지만 죄로 말미암아 다 파괴가 되어있어서 논리적인 연결이 없고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뭐냐 하면 타락한 이후에 인간이 극도의 자기사랑에 빠지게 된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완성으로 가기 위해 필요한 그러한 객관적인 선으로서의 사랑과 극도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극단적 자기사랑의 충동이 뒤섞여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애정을 느끼기도 하는데 그것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이타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사랑의 탈을 쓰고 있다는 거죠. 이러한 혼란이 생겨나면서 결국은 인간들은 각기 사랑하려고 애를 쓰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 사랑들이 논리적으로 모두 해체되어있어서 그 사랑이 진정한 자기완성에 기여하지 못해요.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완성하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을 믿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한 사람이 자아의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에는 그 시작이 사랑을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 잘 들으세요. 이 세상에 가장 위험한 사람이 사랑을 받을 줄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참 위험한 사람이에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사랑을 받을 줄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굉장히 위험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먼저 터득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Heart of being love 사랑을 받는 기술에요. 사랑을 깊이 받는 것이 필요해요.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아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첫 걸음이에요. 신령한 면에서. 또 본성적면에 있어서는 사랑을 받는 것이 진정한 자기완성으로 나아가는 시작이에요. 태어나서 따뜻한 부모의 사랑을 받는 거, 또 그 기회를 놓쳤으면 좋은 사람을 만나서 사랑을 받는 거, 어쨌든 깊이 사랑을 받는 거, 그 관계가 어떠하든지 간에 거기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이 진정한 자아의 완성을 향해서 출발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얼마나 신비한지 생각을 해봐. 지난 주에 설교한 것처럼 인간은 각 시기마다 투입되어야 할 사랑이 있어요. 서로 서로가 보완 관계에 있지 않아요. 근데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한 대체관계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으로 인해서 모든 부족한 사랑을 대체받으면서 그러면서 진정한 자아 완성을 향해 가게 되는 거예요. 그것이 사랑받는 거예요. 근데 이제 사랑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경향성과 중심성이에요. 경향성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사랑을 하게 되면 모든 삶의 방향이나 목표 이런 것들이 그쪽을 향하여 흐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이야기하면서 제가 그런 말씀을 드렸죠?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은 그 목표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할 뿐 아니라 삶 자체도 재편된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죠? 그것은 뭐냐 하면 진정한 사랑일 경우에는 그 사랑을 중심으로 삶이 재편되는 거예요. 나머지 모든 것들은 그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기여하는데 보탬이 되는 쪽으로 자리를 다시 잡는 거예요. 우선순위가 다시 매겨지는 거예요. 이게 경향성이고. 두 번째는 중심성이에요. 중심성은 뭐냐 하면 그를 중심으로 모든 것들이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연상이 사랑하는 대상을 향하여 모두 연상이 되는 거예요. 그것이 사랑이 가지고 특성이죠. 사랑은 내 표현으로 소용돌이와 같아요. 소용돌이는 물이 크게 휘돌면서 주위에 있는 물질이 무엇이든지 간에 중심으로 끌어가려는 성질이 있잖아요. 블랙홀처럼. 사랑에 그런 힘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분을 위해서 삶이 재편되지 않은 것은 그거는 가짜 사랑이에요. 진정한 사랑이 아니에요. 진짜 사랑하면 그럴 수 없어요. 그렇게 사랑을 받는 것이 이제 자기완성을 향해 가는 겨우 출발이에요. 나는 여러분들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이렇게 보잖아요.
오늘 아침에도 기도하면 여러분들 생각했는데 가까이 이렇게 보잖아요. 참 걱정돼요. 뭐냐 하면 사랑을 받을 줄을 몰라요. 할 줄 모르는 것은 고사하고 사랑을 받을 줄을 몰라요.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우리 이렇게 같이 있을 때에는 예수 사랑이 우리를 주장하니까 사랑을 받을 줄을 몰라도 사랑하고 심지어는 내가 사랑하는데 원수로 갚아도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사랑하려고 애쓰고 그러잖아요. 근데 이 세상에서 만나는 여러분과 만나는 사람들이 누가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냐는 거예요. 우리니까 우리끼리 그렇게 사는 거지 근데 이제 우리가 살아야 될 삶은 훨훨 날아가는 거잖아요. 그렇잖아요? 등대가 조명기구상에 모여 있는 것은 아니고 어두운 밤바다에 가서 세워지잖아. 그러면 여러분들이 만나는 사람은 우리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진짜 이리 같은 사람들, 그리고 마치 그 가인의 고백과 같이 여러분들이 손톱자국을 내면 칼로 여러분들의 목을 베일 것은 그런 포악한 사람들을 만날 것 아니야. 그런데 에티투드가 그래가지고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고 또 사랑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요즘은 제가 그런 생각을 해요. 우리의 목양이 너무나 피상적이에요. 진짜 우리의 목양은 살을 맞대고 가까이 있으면서 그 사람 하나하나를 고쳐주는 것이어야 돼요. 정말 그래서 요즘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아프다고 그러면 모두 다 아까징끼, 삐었다고 그러면 모두 옥토정끼, 골 아프다고 그러면 모두 펜잘, 이것이 우리 교회가 이런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은 그것도 완벽한 해결은 되지 않는다. 한사람 한사람. 그런 고민이 있는 거죠. 그렇게 이제 사랑을 받고 나면 진정으로 사랑받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그 다음에 무얼 깨닫게 되냐면 사람들에게 모두 그런 사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사랑을 받는 경험 속에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 자기를 내어주어야 하는 소명이 내포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보면 다가와도이꾜라고 하는 일본의 김진홍 목사님 같은 분이셔. 그 창녀들과 아무 희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일생을 허비한 분입니다. 참 훌륭한 분이죠. 그 분이 쓴 책 가운데 ‘사선을 넘어서’ 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런 철저한 삶을 살면서 그렇게 고통 받고 희망이 없는 사람들을 향해서 자기의 삶을 허비하듯이 내어주는 그런 삶의 원천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해요? 사랑받는 경험이 그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내민 거예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지금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것이에요. 여기 똑같은 얘기잖아요. 하나님을 뵙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그럴 수 없다는 거죠. 그래서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누군가 하나님은 물론 사랑하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고 마음에 그 사람의 이름이 그리움이 되도록 그런 사랑하는 대상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은 괜히 살아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이에요. 희망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그렇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은 그러면 사랑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에요. 거기에 자기 이름 석자가 새겨있는 거예요. 자기를 사랑하는 거예요. 그 자기는 부패한 자기에요. 그 자기를 사랑하는 거예요. 그래서 너무 불쌍한 거예요.
그래서 보면 우리의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완성되어 가는 거예요.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저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요. 나는 나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누구와 논쟁 하는 것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뒤집어쓰는 성격을 가진 사람인데 근데 비난하는 사람을 만나게 돼요. 저는 항상 우리 모두가 우리가 완벽한 사람일 수 없기 때문에 자기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열린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돼요. 그래야지만 그 사람이 큰 나무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어요. 그런데 종종 아무리 생각해도 그 비난이 근거가 없어요. 그리고 심지어는 그 비난 속에 나를 향한 미움과 악의가 섞여 있어요. 사실 그런 것 때문에 교역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한동안은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 후에 일체의 비결을 터득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그 사람의 이름을 끌어안고 정말 사랑하게 될 때까지 기도하는 거예요. 그 사람이 일으킨 문제는 생각하지마.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지금 사단이 나를 노리고 위험한 것은 그 사람이 나를 근거 없이 비난한 내용과 풍설이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나의 명예가 무분별하게 실추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 그렇게 나를 악의적으로 비난한 사람을 내 영혼이 미워함으로 그 미움의 죄 속에서 하나님 앞에 내 영혼이 망가져가는 거예요.
그리고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리는 것이에요. 그렇게 사람을 향해 미워하고 평정을 잃게 되면 찬양도 부를 수 없고 말씀을 읽어도 그 말씀의 빛이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아요. 그러니까 문제는 그 사람의 비난, 그로 인해 실추되는 내 명예 그런 게 아니야. 그건 핵심이 아니야. 문제는 뭐냐 하면 그를 부당하게 여기고 미워하게 될 내 마음이에요. 그러니까 그 사람의 이름을 끌어 안고 간절히 기도하는 거죠. 언제까지 기도 하냐 하면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게 될 때까지.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겠죠?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일어납니다. 어떤 때는 불과 삼사일이 지나기 전에 그 사람을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를 비난한 사람을 축복해. 그는 근거 없이 나를 비난하므로 매였으나 나는 그를 사랑함으로 놓임을 받는 그런 사랑의 본을 누가 보여주셨냐 하면 하나님이 보여주신 거예요. 하나님이 보여주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가 깨뜨려졌는데 하나님은 얽매이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죄에 얽매인 사람들이 되어서 하나님은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셨지만 우리는 하나님보다 우리의 죄를 사랑해서 하나님과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에 그래서 오히려 우리가 부자유한 사람이 된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한없는 자유 함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영혼 안에서 그런 것들을 놓아 주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자기의 영혼을 상처 입히고 비참하게 파괴해요. 그래서 잘 들으세요.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거나 가정생활을 하거나 직장생활을 하거나 교회를 섬기거나 자기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야. 선물이야. 여러분들이 모자라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끌어안고 주님 앞에서 예수님의 본을 배움으로 말미암아 성숙한 사람이 되어가게 하시는 거요.
(예화) 중국에 가면 담수진주를 기르는 곳이 굉장히 많아요. 생각보다 진주가 쌉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누가 올 때 진주목걸이 사다줘도 일단은 감동을 하지 않는 것이 안전합니다. 비싸질 않아요. 근데 그 담수진주를 기르는 방법이 뭐냐 하면 가리비 같은 조개를 묶어놓고 그냥하면 진주가 안 생깁니다. 그거를 벌려요. 그리고 살에다 상처를 내고 사금파리 같은 것을 심는 거예요. 거기에다. 그러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호르몬 같은 것들을 쏟아내 가지고 자기 살을 위협하고 아프게 하는 거를 계속 감싸는 거예요. 그게 마지막 결정체가 진주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의 선물이죠.
그래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표지 가운데 두 번째가 겸손이에요. 제가 쓰기 시작하는데 그 겸손하게 하는 요인이 예수님이 나를 십자가에서 구하셨다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우리를 겸손하게 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섭리 속에서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중에 하나가 바로 그런 거예요. 마음에 상처를 주는 사람, 관계가 깨뜨려지게 된 사람을 만나는 거예요. 그때 그렇게 되면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그를 받으실 수가 있어요? 예배도 거짓이고 기도도 가증한 거죠. 그러니까 미워하는 사람을 용납하고 용서하는 것은 자기를 영적인 억압에서 풀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를 위한 것이라는 이거에요. 그러니까 그거를 그 사람을 깊이 끌어안고 사랑할 때까지 기도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파.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게 뭐냐 하면 내가 무언가 하고 싶은 것을 참는 것도 힘들지만, 아,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것도 힘들지만 더 힘든 것은 뭐냐 하면 미워해야 될 사람을 그거를 억누르는 거예요. 그것은 결국은 죽음에 방불한 고통의 과정을 겪게 되는 거예요.
그 속에서 예수 죽음의 형상을 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자기 깨어짐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소극적으로 자기가 잘못된 것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깨어짐이고 또 적극적으로 보면 자기가 사랑하지 않고 있는 것들을 사랑하도록 깨어지는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깊이 그를 끌어안고 기도해요. 근데 조끔 형식적으로 기도하면 일년을 기도해도 그 마음이 안 들어요. 근데 우선순위 1번에다 놓고 그를 진심으로 축복해요. 긍휼히 여기고 항상 예수님이 그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기에 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요.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용서하고 사랑하는 과정을 통해서 부단한 자기 죽음을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그때에 그런 거를 경험하고 나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되냐면 이 삶의 태도가 바뀌게 되는 거예요. 저는 처음 있던 교회에서 횟수로 8년을 전도사 생활을 했는데 정말 혹독하게 전도사 생활을 했어요. 그 8년 동안에 운 눈물을 모두 모으면 제가 생각하기에 아마 콜라병으로 10병을 될 거에요. 근데 그렇게 하면서 어느 순간에 이제 하나님이 여기서 떠나게 해주시는데 그때 딱 떠나면서 마음속에 어떤 느낌이 들었냐면 이제 나는 모든 면에서 아직 어리고 미숙하고 말씀도 잘 모르지만 하나는 자신 있어요. 이 세상에서 정말 이상한 사람을 만나도 같이 목회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같이 그 사람과 함께 한 교회에서 지낼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게 오늘 저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끊임없는 자기 죽음의 과정은 사랑의 과정을 통해서 자기 죽음의 과정이 실현되는 거야. 사랑을 통해서.
그래서 그렇게 하면서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해요. 그때에 그 사람이 정말 향기로운 사람이 되는 거요. 우리 가곡 가운데 그런 말이 있죠. 가시밭의 백합화 뭐 가사는 더 생각이 안 나지만 뭐 그윽한 네 향기 그윽하여라. 식물학자에 의하면 실제로 백합화 같은 것들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가시에 찔리면 향기를 더 많이 뿜어낸대요. 허브 같은 거 이렇게 툭툭툭 치면 더 냄새가 더 잘나잖아요.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이 정말 변화되고 나면 이제 진짜 사람들에게 찔릴 때 더 많은 향기를 내게 되는 거예요. 더 많이 사람들에게 찔릴 때 더 많은 향기를 내게 되는 거예요. 그게 자기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완성되어가는 거예요. 서로 사랑하세요. 그렇게 살아야지만 일평생 우리에 입술을 열어서 전할 제목이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도다. 그거거든요. 사도요한이 말년에 너무 늙어서 제자들 부축을 받으면서 설교단상에 올라가면 두 손을 높이 들고 “사랑하는 자녀들은 너희는 서로 사랑하거라. 이것이 마땅하니라.” 그 한마디만 하고 내려오면 눈물바다가 되었답니다. 요한이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우뢰의 아들이라고 불리 울 정도로 혈기방자하고 과격하던 사람이었어요. 끊임없는 자기 죽음의 과정,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자기 죽음의 과정을 통해서 사랑의 사도가 되어 갔던 거예요. 여러분이 먼저 거기서 이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해요. 기도하겠습니다.
2. 사랑은 아픔을 함께 합니다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고후11:29)
제가 예수님을 믿고 상당히 오랜 세월을 지난 후, 심지어는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신학적으로 혼돈 속에 빠졌던 것이 이 사랑의 문제였습니다. 저는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신학대학원을 3년을 졸업할 때까지 사실 이 문제에 대한 그 신학적인 해답을 얻지를 못했습니다. 그것이 저의 영적생활에 어떤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어쨌든 신학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가운데 이 사랑에 문제를 가지고 혼미함 속에서 지냈던 것은 틀림이 없고 그로 말미암아서 저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면서 매우 좁은 시야를 가지고 사역을 하고 또 인생을 살아 올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주님의 성품을 새롭게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께서 비천한 저에게 이런 사랑의 세계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탐구의 과정은 지금까지 계속 되어왔고 그런 탐구의 과정을 통해서 저는 예전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높은 질의 삶을 살 수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그러한 인식이 죄의 문제를 자동적으로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런 인식을 가지고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와 그런 인식이 없이 은혜의 지배 있을 때가 신앙생활의 차이가 어떠냐? 이런 식으로 비교한다 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어패가 있는 것이죠. 짧은 시간에 이 문제를 다 말씀드릴 수 없지만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해보라’ 라고 하는 책이 여러분들이 이미 다 보고 지나간 책인데 지금 아마 여러분들이 다시 읽으시면 느낌이 새롭고 처음에 읽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통찰력들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드가 고린도전서 13장 강해에서 사실은 그것은 설교라기보다는 한편의 거대한 논문입니다. 체리티스 폴츠라고 하는 그 논문에서 그가 그리스도인의 모든 신령의 경험의 한복판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다 라고 하는 그 이야기를 읽기 전에 저는 영적인 변화를 경험하면서 그 사실을 깊은 터득했습니다. 제가 고린도전서 13장을 강해할 때까지는 에드워드의 그 논문을 읽지 못했습니다. 후에 그 논문을 읽으면서 깊이 깨닫게 된 것은 뭐냐 하면 아주 정확하게 제가 주님을 만나고 그런 분 같은 탁월한 신학적 지식은 없지만 성경을 이해하는 범주 안에서 신학적 사색을 통해서 도달한 결론과 그 분의 결론이 너무 탁월하게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모든 신령한 은혜의 경험 그 핵심 속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한 사람은 불신자의 상태에서도 불완전한 사람이지만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도 불완전한 사람이죠. 그 불완전한 사람이 점점 완전해져 가는 거예요. 그 완전해져가니까 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안다는 것과 거의 동의어이고 한 사람이 완성되어 간다고 라고 하는 것은 사랑의 관계에 있어서 원숙한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동의어예요. 그렇게 사랑을 통해서 한 사람이 참으로 한 인간이 완성된 인간으로 되어 가는데 그 출발이 뭐냐 하면 사랑을 받는 것이에요.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이 보다 구체적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서 그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거예요. 특별이 이 사랑은 본성적 관계에서 오는 사랑이 있고 그렇지 않은 관계에서 오는 사랑이 있어요. 예를 들자면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부모라고 할지라도 자식은 사랑해요. 그렇죠? 예.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라도 자식은 사랑해요. 그런 엄마 아빠의 사랑을 받으면서 아이가 자라나요. 그것도 그 아이를 성숙시키는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하죠. 그래서 부모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자란 아이가 자기 새끼도 사랑한다 이거예요.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자기 자식에 대해서 무정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본성적 관계에서 오는 그런 사랑의 경험도 아주 매우 중요한 그런 인간을 완성해가는 중요한 것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이제 사실 엄마 아빠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은 참 쉽지 않아요. 왜냐하면 아주 쉽게 얘기하면 엄마 아빠의 사랑은 하나님 없이도 본성적으로 그렇게 사랑하는 것을 우리들이 너무나 많이 보고 경험하기 때문에 어려워요. 진정으로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건 뭐냐 하면 이게 교회 공동체 안에서예요. 자네가 내 딸은 아니잖아. 우리 형제는 아니잖아. 피가 섞인 것도 아니잖아? 그죠?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 심지어는 한 사람은 종이었고 한 사람은 자유인이었어요. 너는 헬라인이고, 나는 히브리인이야. 유대인이야. 그리고 너는 왕족의 자식이고 나는 종의 자녀이야. 근데 사회적으로 보면 서로 성립할 수 없는 관계의 사람들이 모여서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그때에 가장 확실하게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실체를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들이 흔히 그런 얘기하잖아요. ‘뭐 은혜 받았다는 놈들이 말이지, 자기 집안 식구들한테는 사랑도 별로 안하면서 교회당에 가서는 말이지, 지 애비, 애미보다 잘 한다고 그래.’ 사실 그 말이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불신자보다 악하다 이렇게 한 사도바울의 교훈으로 미루어 볼 때는 일면 타당성이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자연스러운 거다 이거죠. 왜냐하면 본성적 관계에서 오는 사랑보다는 비 본성적 관계를 통해서 오는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실체를 더 확연하게 느끼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하면서 근데 기억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그런 한 사람으로부터 깊이 사랑을 받는 것, 그것은 겨우 완성된 인간을 향하여 나아가는 기초일 뿐이에요. 그래서 진정한 인간의 완성, 사랑의 완성은 사랑을 하는데 있어서 온전한 자가 됨으로서 자기가 완성되는 건데 그러한 종류의 사랑에 있어서의 자기완성은 사랑을 받는 것은 겨우 그 길로 들어서는 시작에 불과하고 그 완성은 자기가 자기 사랑을 끊임없이 버리면서 누군가를 사랑하는데서 자기 자신이 완성되어 가는 거예요. 거기에서 모든 것이 농축되어 있는 거예요. 그리스도께서 가치 없는 죄인을 사랑하신 것이 무엇이고 그의 결점을 오래 참는 것이 무엇이고 등등을 사랑의 모든 지체를 배워가는 거예요. 사랑에 대한 지식도 마찬가지로 개념적이고 말하자면 이론적인 지식이 있고 경험적인 지식이 있는 거예요.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개념적인 이해는 단지 지성적인 이해일 뿐이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땀, 눈물, 흐느낌, 탄식, 통곡, 그리움, 사무침 이러한 모든 것들은 사랑에 관한 경험적 지식 안에 존재하는 것이지 개념지식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거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많은 논문을 써도 이해할 수 없지만 한번 하나님의 품에 안겨보면 그 사랑을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랑을 어떻게 알 것이냐? 언젠가 필리핀인가 어디 갔더니 막 찬송을 부르는데 ‘He's love is beyond my description.' 이런 가사가 나와요. '그분의 사랑은 나의 묘사를 능가합니다.' 그러나 이제 사랑에 관한 많은 지식이 있으면 사랑과 인간 본성과 이런 것들에 풍부한 지식이 있으면 남들이 ’니가 경험한 사랑이 어때?‘ 그러면 아 ‘He's love is beyond my description.' 이렇게 하고 말하면 할 말이 없잖아요. ’그분의 사랑은 나의 묘사를 초월해.‘ 묘사를 초월한다고 하는데 더 이상 할 말이 없잖아요. 사랑에 관한 이런 지식들을 잘 습득하고 인간 본성에 대해서 많이 숙고해서 지식을 소유하게 되면 입만 쫙 벌리고 beyond my description 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그 다른 사람은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말해줄 수 있는 거예요.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지식을 통해서 그 교훈이 흘러가는 거예요. 그래서 뭐냐 하면 개념적이고 말하자면 지성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사랑의 지식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는 거죠. 여러분들이 받은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가 무엇인지 한번 숙고해본 적 있어요? ’사랑이 뭔가? 왜 날 사랑하셨을까?‘ 그냥 이해할 수 없네. 그러고 입만 벌리고 있으면 잘하면 그냥 감탄하다가 죽는 거예요. 시편에서 시인이 뭐라고 그래요? “주께서 나에게 큰일을 행하시면 내가 백수가 될 때까지 주께서 행한 기이한 일을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리다. 주의 도를 내가 가르치겠나이다.” 그러잖아요. 신자의 삶은 입만 벌리고 살아가는 삶이 아니야. 진짜로 자기가 만난 하나님의 세계. 자기가 깨닫게 된 인간 본성 속에 있는 이 사랑의 세계에 대해서 가르쳐서 그래서 그런 사랑을 갈망하도록 만들어 주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오늘 여기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런 얘기를 해요. “너희 중 누가 약할 때에 내가 약하지 않더냐? 너희 중 누가 실족했을 때에 내가 실족하지 않더냐?” 사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 고린도교회는 교회 하나하나를 교인으로 비유하고 바울이 세워놓은 많은 교회의 연합을 한 교회에 비교하자면 이 고린도교회는 목사를 마음 아프게 하고 속 썩이는 교인이었어요. “여기 목사님 내보낼 방법이 없겠냐? 얼마 주면 나간데?” 그러면서 사람 모아서 “우리 목사님 나가시도록 우리 같이 기도하자.” 말하자면 말이지, “진짜 신학교는 제대로 나온거야?” 그리고 뒷조사하고 다이던 그런 교인이거든 말하자면. 근데 오늘 뭐라고 그러냐면 “너희들이 약할 때, 내가 약하지 않더냐? 너희들이 실족할 때에 내가 실족하지 않더냐?” 이게 뭐냐 하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어떤 사람의 인생을 살아왔을 때, 일생을 쭉 살면서 그 사람을 망가진 삶을 살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요인이 있잖아요. 그 사람 안에. 그거는 당사자 본인이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고 혹은 피상적으로 알 수도 있고 전혀 잘못 알 수도 있어요. 그런 당사자의 인식의 상황과는 상관이 없이 우리들이 관계를 갖다가 보면 그걸 깨닫게 되요. 그렇지 않겠어요? 곤고하게 인생을 살다가 열린 교회에 와서 심방을 받고 등록을 하잖아요. 너무 기뻐하죠. 처음에는 그 사람들이 곤고하게 산 게 모두 다 말씀을 못 듣고 좋은 목회자를 못 만나서 곤고하게 산줄 알았어요.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깊이 깨닫게 된 것은 뭐냐 하면 물론 그것도 원인이 있지만 인생이 곤고하게 사는 것은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어떤 부속이 그 속안에 들어 있어. 그 사람 안에 들어 있는 거야. 그래서 어떤 사람 일생을 다 살면서 계속 사람들에게 배신만 당하는 거야. 그래서 자기 입장에서 그 모든 일생의 사건들을 진술하면 우리 모두 공분하게 되는 거야. “야, 정말 어떻게 인간들이 그렇게 악할 수 있을까? 이 연약한 이 사람을 그렇게 배신하고 벗겨 먹다니.” 이 사람의 성품을 객관적으로 보면 사람들이 그렇게 오래 그 사람을 신뢰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요인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또 어떤 때 보면 사람들에게 이렇게 소외당하는 이가 있어요. 사람들로부터 소외를 당해요. 가는 곳마다 소외를 당해요. 그래서 정말 그 단체들은 너무나 사랑이 없다. 근데 객관적으로 시간이 지나고 가만히 그 사람을 보면 진짜 그를 소외당하게 하는 요인이 사람들에게도 있지만 더 중요한 요인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거예요. 심지어는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도 혹은 또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며 사는 사람도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사람들에게 요인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도달한 결론은 뭐냐면 우리 흔히 인복이 천복이라는 말하잖아요. 인복이라고 하는 것은 천복이라고 하는 거예요. 인복이라는 말 알잖아요? 인복이라고 하는 것은 천복이라는 거예요. 하늘이 내려준 복이라는 거예요. 하늘이.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에요. 그게 뭐냐 하면 하늘이 복을 내려주기는 내려줬는데 그거를 객관적으로 그 사람 바깥에 있는 것을 그 사람에게 준 것이라기보다는 하늘이 그 사람의 성품을 변화시킨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인복이 있는 사람이 되게끔 그를 변화시킨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모든 것들이 상대적인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한 사람이 참으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성숙해 가는 것인데 사랑에 있어서 성숙해가는 건데 그것에 출발은 뭐냐 하면 사랑을 받는 거지만 완성되어 가는 것은 끊임없이 사랑함으로서 완성되어 가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그 사랑하는 과정자체가 뭐냐 하면 자기 사랑을 버리는 거예요. 이 세상에 순수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없어요. 그거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없고 인간과의 관계에서도 없어요. 그럼 뭐냐 하면 끊임없이 순전해져 가는 거예요. 자 보자. 이제 여러분들이 이제 곧 결혼을 해야 될 것 아니에요. 곧 결혼을 하는데 그러다가 보면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할 것 아니야. 그 처음 사랑이 상대방을 위한 사랑일 수가 있어요. 아, 쉽게 이야기하면 지 좋아서 하는 거지.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그것도 사실은 주님을 위한 겁니까? 처음에 시작이야 다 지 좋아서 하는 거지. 근데 말씀을 깨닫고 계속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면서 주님을 향한 사랑 속에 섞여있는 이기적인 요소들이 계속 빠져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순수해져 가게 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거룩한 사랑으로 화해 가는 거예요. 사람들 사이에도 마찬가지에요. 가끔 보면 진짜 불같이 뜨겁게 사랑을 해서 결혼을 했거든요. 근데 뻔히 예수 믿는 친구들인데 몇 달 안 되가지고 이혼하겠다고 그것도 담대하게 담임 목사 찾아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거는 어떻게 된 거예요? 그거는 뭐냐 하면 철학자들은 이 사랑을 정념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이 정념이 희랍어로 파도스에요. 이 파도스는 말이지, 그 파도스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게 있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고 있는 거룩한 정념하고는 좀 틀려요. 이제 희랍어 원의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럼 뭐냐 하면 약간은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충동적 정념이에요. 이게 파도스라고. 파도스. 여기서 영어의 파토스가 나온 거예요. 파도스란 말이에요. 영어의 파토스가 그런 걸 가지고 있는 거는 아니에요. 그렇지만 희랍어 원의 파도스라고 하는 것은 그런 단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파도스만 있는 거예요. 이게. 진정한 love는 없고. 그러니까 몇 달 살다가 보니까 파도스가 고갈돼버리는 거예요. 정념이라는 것이 자기가 만족을 채우고 나면 그 다음에 꺼지는 거지 무슨 정념이라고 하는 것은 배변작용하고 비슷한 거야. 그래서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 틀리고 나올 때 틀리다고 하잖아. 들어가서 확 그리고 정리하고 나면 그 다음에 무슨 화장실 간판 아무리 눈에 보이고 후미진 곳이 보여도 그게 사랑스럽지 않은 거야. 보일 다 봤으니까. 파도스가 다 빠져나간 거야. 그러니까 어떻게 돼? 힘이 없는 거죠.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잘 들어요. love는 자기 사랑과 공존할 수 없지만 그러니까 love는 자기 사랑을 죽이는 거예요. love혹은 charity 자비는 자기 사랑을 끊임없이 죽여. 그리고 파도스는 자기 사랑을 그대로 간직한 게 파도스가 될 수 있는 거야. 무슨 얘기 줄 알아요? 그러니까 그런 형제 · 자매의 경우는 love는 없고 파도스만 있는 거야. 그러니까 파도스가 있으니까 얼마나 뜨거워. 열렬할 것 아니에요.
근데 그 파도스가 자기 사랑을 그대로 간직한 파도스야. 그리니까 몇 달 살다가 파도스가 고갈돼 버리는 거야. 배변작용이라고 그랬잖아. 이젠 볼 것 다 봤고 알 것 다 알고 뭐 했는데 뭐 더 신비한 게 있냐 이거야. 그러니까 파도스가 다 사라져 버린 거야. 그러니까 파도스의 물 쫙 빠지고 나니까 자기 사랑의 암초만 불쑥 나온 거야. 암초끼리 부딪치는 거죠. 파도스라도 출렁거리면 그래도 감추고 사는데 그 파도스가 무슨 뭐 평생도록 출렁거릴 파도스가 어디 있어요. 그런데 예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상당히 신앙이 깊은 사람들이 이 파도스와 사랑을 혼돈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러한 것들은 말하자면 잘못된 것들이에요. 그래서 철학자들은 사랑을 파도스라고 보는데 이것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거예요. 충동적 정념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그러면 오늘 마지막으로 핵심인데 이러한 자기 사랑을 버리면서 남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는 그 시작이 어떻게 이루어지냐 하면 한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었던 고통의 핵심적인 요소 있잖아? 그죠? 그거는 사실 우리 서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야. 감추고 산다 이거야. 왜냐하면 그거는 창고만 열면 거기서 벌레니 뭐니 온갖 더러운 것들이 기어 나와. 그래서 자기도 열어 보기가 싫은 거예요. 그런데 그거를 다른 사람 불러 가지고 이거 한번 열어봐. 그리고 열어주겠냐 이거야. 열어주지 않죠.
그래서 결국은 적당하게 사람들이 그것들을 감직하고 가면을 쓰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근데 참된 사랑은 뭐냐 하면 그것을 보여주는 것. 그래서 지금은 사라져 버렸지만 초대 교회의 전통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 형제들이 이렇게 모여서 제일 먼저 하는 성찬하기 전에 먼저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spirituality 자체가 초대 교회의 spirituality였을 때에는 거기서 깜짝 놀랄 만한 죄들을 다 고백해도 그것이 거기에서 다 받아들여지는 거예요. 그리고 그를 용서해주고 용납해주는 거예요. 지금은 그게 안 되죠. 그래서 나는 항상 그런 거 잘 못하게 하는 게 왜냐하면 어느 수련회에 갔는데 애들이 그런 시간을 가졌어. 거기서는 막 눈물 흘리고 그랬는데 나와 가지고는 애들이 막 이러거든. 누가 무슨 죄를 졌대. 막 돌아다녀. 교회가 온통 시험에 휩싸여. 근데 그런 거들 이렇게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들이 딱 열려요. 그러면 거기에서 그 사람을 아프게 했으니까 그 아픈 게 한 것들을 이제 그거를 터치하게 될 때, 그 아픔을 자기 자신도 함께 느끼면서 거기에 동참하는 거예요. 그거를 통해가지고 이제 사랑의 관계가 성립이 되는 거예요. 그때에 이제 뭘 경험하게 되냐면 여기 사도 바울의 고백이 바로 그 진수를 보여주는 거예요. 뭐냐면 이 사람들이 약해요. 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약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편에 서서 사명을 감당해나가려고 그러다가 약한 거 그런 신령하고 성결한 것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야. 모든 방면에 약한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에요. infirmity라 이거에요. 약한 걸 보여주는 거라 이거에요.
그러니까 이것을 어떻게 보면 허물이라고 말할 수 있죠. 허물. 그런데 그런 것과 또 육체의 상태, 전인적인 것을 모두 포함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사도들을 파송하시면서 주신 그 권세가 뭐였냐면 모든 병든 것과 약한 것을 고치며 이것은 physical한 육체적인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거에요. 근데 그런 것들이 그 약한 것들이 대부분은 악한 것에 오염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를 힘들고 괴롭게 해요. 그런 것들 중에 하나가 사실은 사도 바울을 지금 괴롭히고 있는 거거든. 근데 그것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유머의 마음을 바울이 가졌던 거예요. 그것이 뭐냐 하면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서 그냥 아파하는 거예요. 그 마음이 바로 말하자면 그 바울의 마음이에요. 지금 방금 생각난 비유인데 사실 장애에 처한 사람들이 불쌍하지 않은 사람이 없지만 그 중에 정말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우리들이 가져야 되는 사람들이 뇌성마비 환자들이에요. 그죠? 저도 그런 제자들을 몇 명 가르친 적이 있는 개내들 중에서 참 똑똑한 애들도 있었어요. 근데 글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어요. 배변도 제대로 못해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 아이가 뇌성마비에 걸려서 배변도 제대로 못하면서 그렇게 그 배설물들을 흘리면서 그렇게 기어가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세요. 사람들이 볼 때 얼마나 불쾌한 모습이겠어요? 그런데 엄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아니에요? 그게 바로 뭐냐 하면 약한 것에 대한 사랑이에요. 그것을 만지면서 함께 그 고통에 동참하는 거예요. 사랑은 그것을 특권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거예요. 그런 사랑이 모티브가 되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강한 자와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고 약한 자와 함께 하셔요. 그리고 건강한 자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고 병든 자의 편에 서셨던 거예요.
그래서 일생이 그런 섬김으로 살아가셨던 거예요. 심지어는 실족했을 때 조차도 그를 넘어뜨리게 만들었던 그 요인에서 오는 고통에 동참하는 그러면서 이제 뭘 가져 오냐 하면 사랑의 경험을 가져오는 거예요. 사랑의 경험은 따라서 고통의 경험이고 자기 죽음의 경험이에요. 그걸 통해서 자기 사랑이 끊임없이 죽는 경험이고 이타적 사랑이 사는 경험이에요. 그러면서 떼어 놓을 수 없는 사랑의 관계 속으로 이제 바울과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들어가게 되는 거죠. 사실은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거의 유치원 수준에 불과해요. 너무 잘 모르고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이기적인 사랑에 똘똘 뭉쳐서 살아가는 사람이 편안하게 세상을 살 수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러나 이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뭐냐 하면 이런 종류의 사랑이 모든 인간들 속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흘러간다. 강물처럼 흘러가고 사람들이 그 혜택을 입게 한다고 할 때 그것은 돈이나 잔뜩 쥐고 흘러가서 돈 물이나 흘러들어가게 하는 그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에요. 이러한 사랑이 흘러들어가서 그래서 사상이 깨울 수 없었던 사람들을 이 사랑이 깨우고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사랑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을 사랑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사랑받을 때 그것을 거부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들을 일깨우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도 그런 사랑의 자원을 가지고 흘러가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강물처럼 흘러간다고 할 때 그 흐름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자원은 겨우 사랑이에요. 사랑이라는 물 속에 함께 섞여서 떠내려가는 거예요. 그 사랑이 있으면 자신이 하나님께 섬기도록 받은 모든 자원을 하나님과 그리고 지체들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 모든 자원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그 자원이 그들을 위해서 상용될 수가 없어요. 자기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가 내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얘기한 이유가 그거에요. 방언을 멸시하거나 예언을 천시하는 게 아니에요. 천사의 말을 하찮게 여기고 무슨 그런 신령한 경험을 우습게 여기는 그것이 아니라 그거는 사랑이라는 물과 함께 떠내려가서 스며들어서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의 혜택을 받게 해주는 아주 필수불가결한 도구들이잖아요. 근데 사랑의 물이 없으면 그것들이 떠내려갈 수 없다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두개를 비교하고 그럴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아무리 좋은 배를 만들어 놓고 성능 좋은 배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숙달된 선원들이 배를 항해 한다고 할지라도 흘러가는 물이 없는데 어떻게 그 배가 떠내려 갈 수 있겠느냐 이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끊임없이 완성되어 가야 하는 거예요. 이렇게 만나는 여러분들이 바로 그런 사랑의 장이야. 그래서 사람을 사랑하되 그 사람의 깊은 속까지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돼요. 그 속에서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사람이 완성되어가고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 자신이 완성되어 가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주님을 닮는다고 하는 말은 주님의 사랑을 닮는다고 하는 말과 같은 말이라 이 얘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지식과 사랑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빌1:9)
모두 다 경험을 해보셨겠지만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어렵고 그러나 가장 치명적으로 중요한 것은 현재적으로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과거에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또 은혜 이전에 생애적인 회심을 경험하고 또 많은 기도의 응답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비치는 성령의 조명이 있었던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이 오늘 하나님 앞에 정말 풍성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다고 한다면 그러면 문제는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현재적으로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 되는 것이죠.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숙제구요, 그리고 또 풀어야할 문제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모든 복음 사역이 최소한 신자들을 향해서는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물을 잘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 물만 가지고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강바닥도 파고 주변에 축대도 쌓고 그리고 물길도 바로 잡고 여러 가지 수리시설을 하게 되듯이 바로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우리의 다양한 기독교 복음사역이 존재한다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도바울이 옥에서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향해 인사말을 하는 가운데 자기가 기도하고 있는 제목이 있는데 너희의 사랑을 점점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빌립보 교회는 알다시피 자주장사 루디아의 전도에 의해서 세워진 바울로서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아주 귀한 교인들이 모인 사랑스러운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앞에서 그리고 뒤에서 두 번이나 반복해서 빌립보 교회 교인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또 복음 안에서 함께 사랑으로 교제했던 것에 대해서 아주 깊이 마음에 감사하며 빌립보 교인들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의 교인들이 모인 이 사랑스러운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사도가 간절히 마음에 원하는 것은 이들의 사랑이 점점 풍성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듣고 그리고 변화를 받아서 예수를 사랑하게 된 그 사랑, 그 예수를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그 놀라운 사랑, 하나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인간을 깊이 사랑하게 된 형제우애의 이 사랑, 이 형제들뿐 만아니라 또한 아직도 복음의 빛을 받지 못한 많은 불신자들을 향한 그 탁월한 사랑이 나누어진 세계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랑이 점점 더 이 사람들 속에 불 일듯 일어나서 영혼에 대한 하나님께 대한 영혼의 싫증이 날마다 더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그런 사랑이 되어가기를 사도는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사실 이것이 우리의 생애에 있어서 구도의 길을 걸어가는 신자로서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숙제이고 또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우리의 신앙의 화두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 세상에서 그가 어떠한 지위에서 살고 얼마나 많은 부를 누리면서 이 세상에 사느냐고 하는 것은 심지어는 그가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일을 맡겨주셨는가 하는 것조차도 삶의 한 양태, 섬김의 한 양상에 불과한 것이 삶의 본질은 아닙니다. 삶의 본질은 어거스틴이 말한바와 같이 오히려 하나님의 생명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인간 안에 있어서 그 생명이 역사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에 본질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정말 성공적인 인생은 마지막에 우리들이 주님 앞에 부름을 받는 그 날이 이 세상에서 주님을 가장 많이 사랑한 날이 되는 거예요. 그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져서 마지막에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그 때에 우리가 주님을 향한 사랑이 크기에 있어서 가장 크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우리의 온전한 사랑이 가장 최고점에 달했을 때, 그때에 우리의 인생은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쓰임을 받았든지 성공한 인생이고 훌륭한 인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요새 어거스틴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계속 나 자신에 대해서 ‘아, 짐승이구나.’ 정말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읽을 때 전혀 느끼지 못했던 그런 장엄한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 앞에 비감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래 나는 사람이 아니요, 벌레라는 그런 느낌을 갖습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책 속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거스틴은 이제 이런 논리입니다.
뭐냐 하면 잘 들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어요. 창조하셨고 또 사람을 창조하셨어요. 사람이든 사물이든지 간에 처음 창조된 상태에서는 선해요. 그 선한 이유는 뭐냐 하면 그 사물 그 자체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그 의도대로 Integrity를 가지고 있어요. 소위 이야기하는 일자성을 가지고 있어요. 설명하기 굉장히 어려운 말인데, 물이면 물로서의 본질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하나로 꽉 차있다 이거에요. 모든 사물을 그런 일자성, integrity를 가진 그런 존재로 창조하셨어요. 그래서 그 자체가 아주 선해요. 그 일자성을 가지고 있는 한 그 모든 사물은 선해요. 그래서 그 각각의 일자성을 가지고 각각 사물이 존재하는 자리에 일자성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로서 존재하면서 사물의 충분한 특성을 드러내요. 그것들이 고유한 특성을 가진 것들이 서로 연결을 이루면서 그 배치자체가 하나님의 놀라운 신적 지혜 속에서 작용을 하면서 창조세계의 영광을 드러냈던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러한 integrity, 이 일자성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하고 나머지 창조된 사물하고 틀린 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변할 수 없는 integrity를 가지신 분이에요.
그런데 하나님 이외의 모든 사물들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와 부패에 종속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제한적 일자성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그러한 일자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나 사물이 시간의 흐름이나 여러 가지 요인에 따라서 변하고 부패하고 그 다음에 다른 것들이 섞여서 그래서 그 일자성이 깨뜨려지는 거예요. 예를 들자면 빵이 있는데 방부제를 안 넣고 열린 공간에서 하는 것처럼 맛있게 만들면 몇 칠 나두면 부패하죠. 빵은 그냥 있는데 곰팡이가 슬어서 부패해요. 그러면 어떻게 되냐면 부패한 것만큼 빵의 본질이 변한 거예요. 모두 다 변한 건 아니고 일부가 변했는데 우리는 그 빵을 못 먹어요. 더럽다고 그러는 거죠. 버리는 거죠. 아무리 비싼 빵이라도. 마찬가지로 그런 일자성이 깨뜨려지는 거예요. 일자성이 깨뜨려지게 되면 무슨 문제가 나오냐면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자리에 하나하나 있어야 될 것들이 존재론적으로 위치가 흔들리는 거예요. 그 다음에 작용적인 면에 있어서는 일자성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지정하신 자리에서 지정하신 작용을 하는데 이게 이상한 작용이 거기에서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만물 사이에 있는 모든 일치와 아름다움을 깨뜨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죄가 들어오면서 그 일자성이 모두 무너진 거예요. 거의 무너진 거예요. 파괴되면서 막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사물이 자기의 위치에서 이탈하고 하나님이 지정하시지 않은 작용들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창조세계의 모든 아름다운 연결들이 커뮤니케이션들이 깨뜨려지는 거예요. 이런 일들이 인간에게 똑같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일자성을 가지고 있는 integrity를 가지고 있는 존재로 창조하신 거죠.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 사람은 그냥 사람이 아니라 참 사람이었던 거죠. 베라 Homo, 참 사람이었어요. 참 사람으로서 존재했던 거죠. 죄가 들어오면서 그 참 사람이 깨뜨려지는 거죠. 그러면서 변화, 이런 것들이 들어오게 되요. 소위 얘기해서 defect 결함이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망가지게 되는 거예요. 그런 사람을 이제 하나님께서 중생을 통해서 그를 다시 회복시키시는 거예요. 그래서 중생을 통해서 일자성을 인간을 갖게 되는 거예요. integrity를 다시 소유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깊이 회심하고 거듭나고 보면 자기 속에 여러 가지가 막 뒤섞인 느낌이 드는 게 아니라 똑바른 통일성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되냐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통일된 경향성을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문제는 그런 통일된 경향성들이 다 이야기 할 수 없지만 잔존하는 죄로 말미암아 위협을 받는 거예요. 거기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여기에서 사랑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는 이 과정이 뭐냐 하면 이 죄와 부패에 의해서 결함에 의해서 계속해서 이 일자성이 깨뜨려질 위협 속에 놓여있는 인간이 이 일자성을 계속 회복해가는 과정이 뭐냐 하면 너희 사랑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속에서 사랑이 꽉 채워져서 그래서 주님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미워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주님을 향한 사랑이 내 안에 꽉 차는 그게 integrity를 회복하는 과정이에요. 그것이 내가 늘 설교 속에서 강조했던 순결을 회복하는 과정과 동일한 거란 말이죠. 그래서 그런 일자성, integrity 속에서 주님께만 붙어 있으려고 하는 올곧은 마음의 경향,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야기하는 올곧음이고 그 올곧음과 일자성을 토대로 말과 행실이 일치하는 삶이 신실한 삶이고 언행이 하나 된 그것이 바로 정직이에요. 그리고 그런 모든 것에 항거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의로운 삶이라 이거에요. 그러니까 이 integrity는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포괄하는 아주 뛰어나고도 놀라운 덕목이고 우리 성화의 궁극적인 목표가 결국은 이러한 일자성을 회복함으로 말미암아 창조의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서 주님이 지정해주신 작용을 함으로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에요. 그리고 그런 창조의 영광을 들어낼 우주적인 성취가 이 교회 안에서 선취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제 적용을 해봅시다. 가장 우리에게 있어서 이러한 교리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시사점들은 무엇입니까? 그건 바로 여러분 자신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지금 어떤 정도인지를 물어보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가는 사랑인지, 아니면 계속해서 사도가 기도했던 것처럼 풍성해지고 있는 사랑인가 하는 것을 물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같은 사람이 이야기 하면 하나도 감동이 아니겠지만 헤르만바빙크는 정말 근대에서 뛰어나게 한번 짚고 넘어가야할 탁월한 신학자였습니다. 그 사람은 철학과 신학, 그리고 아주 탁월하고 실제적인 경건을 함께 소유했던 칼빈주의 신학자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고 그의 학문의 세계는 지금도 높이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나의 학문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 구원받는 것이다.” 우리가 이야기하면 하나도 심각하지 않지만 그 탁월한 천재가 이야기했기 때문에 참 진지한 거잖아요. 나는 나의 학문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해서 많이 연구했으나 그 학문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여러분이 누구이든지 어떤 위치에 있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 모두에게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는 모든 공통분모는 그 공통분모보다 클 수 없습니다. 다른 모든 다양성은 이 공통적 기반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 평생에 있을 그 큰 의무는 주 예수의 덕을 늘 기리다가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주되신 주를 참 사랑하는 것, 그리고 그것은 사역을 하고 있는 동안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사역을 그만두고 나서 시작해야 될 일이 아닙니다. 살아있을 동안에만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죽은 후에도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사도가 사랑하는 이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을 향해서 가장 간절한 소원을 빕니다. 충성하거라.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 부흥시켜라. 그게 아닙니다. 너희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이웃들을 향한 사랑이, 교회 안에 있는 지체들을 향한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 지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그 풍성한 사랑의 작용을 통해서 일자성을 회복하고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이 뭐냐 하면 이러한 사랑을 회복시키시는 방법이에요. 이 사랑이 어떻게 회복이 되는가 보세요. 하나님께서 지식과 총명으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지식과 총명을 주셔서 너희의 일정한 크기의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이렇게 점점 더 불 일 듯 일어나게 하기를 원한다는 그런 고백을 하고 있는 거거든요. 생소하잖아요. 우리는 흔히 지식은 사랑과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사도는 오히려 지식에 물을 부으면 사랑의 불길이 타오른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이것을 우리들이 어떻게 이해해야 될지 한번 사색해보기를 바랍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신자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은 신학적으로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초월적인 사랑의 경험이에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는 특정한 시기에 그 사람에게 매우 비범한 은혜로 물 붙듯 자기의 사랑을 부어주시는 거죠. 그래서 그 사랑에 사로잡히게 되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든지 신자는 그때에 이 사랑의 경험이 자신 속에서 내재된 가운데에 다시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강력하게 부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거죠. 이것이 신자의 초월적 사랑의 경험이에요. 또 하나는 내재적 사랑의 경험이에요. 이것은 뭐냐 하면 신자가 성화의 삶을 살면서 끊임없이 죄를 죽이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진실하게 참회하는 것을 통해서 마치 꺼져가던 사랑의 불씨가 자신 안에서 다시 일어나는 이러한 사랑의 경험을 가리키는 것이에요. 이것은 내재적 사랑의 경험이라고 말하고 혹은 오웬의 표현대로라면 이것은 free battle the persuasion 싸워 이긴 설복이라고 불러요. 싸워 이겨서 성화의 싸움을 싸워 이기니까 그 죄의 요소들이 제거되면서 사랑이 다시 설복하듯이 불타오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신자의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은 이 둘 중에 하나에요. 전자는 매우 특이한 경험이고 후자는 일반적인 경험이에요. 이 초월적 사랑의 경험이든 내재적 사랑의 경험이든지 간에 이 경험은 모두 지식을 통해서 온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리고 이 총명은 그런 것들을 적용한 것, 그래서 갖게 된 개개의 사실들에 대한 추론적 능력을 의미해요. 그런 걸 의미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어두움과 눈 멈 속에 있던 인간들이 이런 지식과 총명을 소유하게 되는 것은 어떤 방식을 통해서 일까요?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영혼을 비춰주는 계명과 그래서 어두움을 물러가게 하고 조명을 통해서 이성의 밝은 빛이 들어오고 감화를 통해서 마음이 움직임으로서 이런 지식의 빛이 들어와서 사랑의 불을 불러일으키는 거라 이거죠. 결국은 무슨 뜻이냐면 끊임없이 구도의 길을 가면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진리에 말씀을 통해서 우주와 인생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 지적인 각성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사랑의 불길을 더 활활 타오르게 만들어준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참된 지식을 탐구하는 구도의 눈빛을 잃어버리게 되는 그의 가슴은 싸늘하게 식어있습니다. 그것을 기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 그렇지 않고 가슴이 뜨겁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신적 지식에 의해서 불붙여진 그 불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일반적인 본성에 의해서 붙여진 불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불처럼 보이는 것은 신령한 세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경기를 하면서 애국심에 불타서 열렬하게 응원하는 사람들의 그 불을 보십시오. 그것도 또 하나의 사랑의 감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그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하나님에 관한 새로운 깨달음들이 우리에게 계속 존재하느냐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부패하고 영혼에 총기를 잃어버리는 일들은 예수님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에요. 천사들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어요. 그래서 두 눈이 초롱초롱하고 정신이 살아있는 눈이 되어야 해요.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이 순간에 자기 자신에게 한번 자문해보십시오. 요새 어떤 진리들에 대해서 새로운 깨달음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이 영혼이 그 진리에 대해서 새로이 눈 뜨고 그리고 이전에 자신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을 깨워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그 말씀을 모르던 때의 여러분들을 부끄러워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그러한 정신의 작용이 없이 여러분들이 살아간다면 여러분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여러분들은 중요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 생각과 지식은 불타오르는 아궁이에 비유할 수 있는 우리의 가슴에 장작을 끊임없이 공급해주는 통로와 같습니다.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성품과 은혜에 세계에 대한 깨달음이 계속될 때에 우리의 가슴에 그 장작들이 공급되어서 우리 전체가 그 불속에 타올라 일자성을 회복하게 되고 순결하게 되고 그리고 올곧은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관계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은 어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요즘 지성의 자극을 받고 있습니까? 깨달음의 빛이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까? 그 빛이 적용되어서 여러분들이 점점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습니까? 그래서 여러분 가슴의 사랑의 불길이 계속 타오르고 있나요?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죠. 그것이 구도의 삶입니다. 밥을 잘 안 먹으면 건강이 나빠지기도 하지만 건강이 안 좋기 때문에 밥을 못 먹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이 건강하지 않으면 이런 지식의 빛에 대한 탐구가 없어요. 마지막으로 세 번째, 오늘 사도는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하노라. 내가 기도하노라 그랬습니다. 그러니 이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냉담한 우리의 마음을 덥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합니다. 그리고 기도는 이 세상에 욕망과 위선, 허위, 교만 등으로 어두워졌던 우리의 눈에 참회에 눈물이 흐르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씻어내 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하나님의 지식의 빛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갖추게 하죠.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겁니다. 바로 자기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그리고 자신에게 맡겨진 영혼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할 때, 그들에게 지식의 빛이 총명의 기운이 들어와서 그들 속에 잠재되어 있는 사랑이 불 일듯 타올라 일자성을 회복하며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져가는 거예요.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우리들이 존재하는 거예요. 이제 수련회 갔다 와서 기회가 닿으면 다시 한번 그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합니다만 작년에 저희들이 저로서는 큰마음에 결심을 하고 교역자, 사모님들하고 부부를 모아놓고 저희들이 세 번인가 네 번에 걸쳐서 제방에서 세미나를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나가는 사모님들에게 선물을 하나씩 주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각 지체들의 명단과 6개월 동안의 기도 그래프를 모눈종이로 만들어서 주었어요. 6개월 후에 보자. 6개월 후에 정말 봤습니다.
근데 이 사모님들의 공통적인 고백이 뭐냐 하면 이 기도표를 작성하면서 너무 두렵더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남편의 영혼을 돌보는 사역이 자신이 기도한 기도의 그래프와 거의 일치하더라는 거예요. 자신의 기도의 불이 꺼지면 사역의 불도 꺼지고 기도가 펄펄 살아 타오르면 그 영혼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요. 왜? 기도가 이렇게 지식과 총명의 빛을 전달해주는데 있어서 너무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에요. 제가 성경을 연구할 때에도 여러분들이 기도를 많이 하면 더 많은 빛이 들어옵니다. 저는 이번 겨울 사경회 때에 아주 생생하게 경험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설교자는 기도의 후원을 많이 받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정문주 목사님은 저는 그렇게 까지 해본 적이 없는 금요일 날 말씀 준비하다가 도저히 안 되면 전화를 한답니다. 각 구역장들에게 전화를 돌려라. 각 구역장들에게 전화가 다 갑니다. 목사님이 지금 도저히 설교 준비가 안 된답니다. 우리 주일날 아침에 아무래도 죽 먹게 생겼습니다. 그러면 이제 구역장이 구역 식구들에게 쫙 전화한답니다. 그러면 이제 있는 처소에게 각기 기도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이 시작하는 거예요. 거짓말 같죠? 정말 사실이에요. 놀라워요. 사실이에요. 전혀 발견할 수 없었던 진리들을 보게 만들어주어요. 너무 놀라워요. 그러니 영혼들에 대해서 어떻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기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지 우리의 목회 사역이 꽃 피웁니다. 우리의 목회 사역은 축구경기와 같잖아요. 유니폼도 멋지고 달리기도 잘하고 드리블도 환상적이고 패스는 줄로 잰듯하고 자로 잰듯하고 점프도 잘하고 작전도 기가 막히고 근데 문전에 가면 항상 슛을 못 쏴. 그게 뭡니까? 무슨 묘기 대행진입니까? 아무 소용없어요. 우리들이 그 목표를 위해서 많은 사역들을 해요. 그게 드리블이고 숏 패스과 롱 패스고 크로스 패스고 그 다음에 단체정신이에요. 다 좋으면 뭐합니까? 마지막에 우리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영혼들이 변화되는 것이에요. 다른 것은 기도를 좀 덜 해도 될지 모르지만 그렇게 지식의 빛이 부어져서 영혼들이 불 일 듯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integrity(인티그리타스)를 회복해가는 이것은 기도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이에요. 기도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기도의 사람으로 엎드렸을 때에 그때에 이런 말씀의 역사, 사랑의 풍성한 역사가 나타나게 되요. 우리가 그 일을 위해서 섬기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셔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