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을 덮는 사랑
(2010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0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진실과 사랑(마7:3-5) 2010.1.24 주일오전 1
2. 상처를 이기는 용서(창50:17-21) 2010.1.31 주일오전 10
3. 네 형제를 비방하지 말라(벧전2:1) 2010.2.7 주일오전 19
4. 은혜의 힘으로 용납함(벧전2:2) 2010.2.14 주일오전 28
5. 사랑으로 허물을 덮으며(벧전4:7-8) 2010.2.21 주일오전 35
6. 용서하는 마음(엡4:30-32) 2010.2.28 주일오전 47
7. 하나님의 용서, 성도의 사랑(몬1:10-18) 2010.3.7 주일오전 58
8. 용서의 십자가(눅23:33-34) 2010.3.21 주일오전 65
9. 죽음으로 용서하신 하나님(롬5:8) 2010.3.28 주일오전 73
10. 기도하려면 용서하라(막11:25) 2010.4.18 주일오전 83
허물을 덮는 사랑 1
허물을 덮는 사랑 1 2010.1.24 주일오전
진실과 사랑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3-5).
I. 본문해설
II. 외식과 판단
A. 외식이란 무엇인가?
B. 판단 기준 : 외형
III. 진실과 사랑
-신앙의 생명 : 진실
1. 하나님을 닮기 원함
2. 자기를 진리에 합치시킴
3. 뉘우침
IV. 형제의 허물을 덮으며...
1. 오히려 자기성찰의 기회 삼음
2. 사랑으로 기다림, 도움을 줌
3. 주님께 부탁함
허물을 덮는 사랑 2 2010.1.31 주일오전
상처를 이기는 용서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찌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17-21).
I. 본문의 배경
II. 상처의 사람 요셉
III. 허물을 덮은 용서
IV. 상처를 이긴 신앙
A. 하나님의 주권
B. 하나님의 섭리
C. 선하신 하나님
V. 결론
허물을 덮는 사랑 3 2010. 02. 07. 주일오전
네 형제를 비방하지 말라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벧전 2:1)
I. 본문해설
II. 형제를 비방할 때
A. 악의에서 비롯됨
B. 사랑은 믿고 싶어함
C. ‘우리의 허물’로 품음
III. 끝없는 사랑의 힘으로
허물을 덮는 사랑 4 2010. 02. 14 주일오전
은혜의 힘으로 용납함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I. 본문해설
II. 네 형제를 비방할 때
III. 허물을 품은 사랑의 힘
A. 순전하고 신령한 말씀
B. 갓난아이들 같이
C. 영적 성숙의 길
IV. 결론
허물을 덮는 사랑 5 2010. 2. 21 주일오전
사랑으로 허물을 덮으며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 7-8)
I. 본문해설
II. 마지막 때가 가까움
1) 명백한 징조에 대한 낙관
2) 물질적 처방, 정신과 영혼의 불행
3) 객관적 기준의 상실로 방종함
III. 종말을 바라보는 성도의 실천
A. 기도의 생활
1. 세상과 감각
1) 시대 정신: 분별 없음
2) 감각 표상: 안정 잃음
2. 세상과 사랑
1) 행복 추구: 진리 없이
2) 무한 경쟁: 성찰 상실
3. 신자와 기도
1) 마음 근신: 자기 경계
2) 기도: 나를 찾음, 하나님을 봄으로써
3) 은혜: 옳은 바를 행할 힘을 받음
B. 사랑의 생활
1. 사랑의 양면: 은혜 + 자유
2. 사랑의 교통: 은혜의 계획- “제일 큰 계명”
1) 나눔: 육적 나눔, 영적 나눔
2) 용서:
-영적 교통의 장애: 죄와 미움
-영적 장애의 극복: 용서와 사랑
-성도 사랑의 확장
IV. 결론: 사랑으로 허물을 덮으라
허물을 덮는 사랑6 2010. 2. 28 주일오전
용서하는 마음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0-32)
I. 본문해설
II. 용서해야 할 이유
A.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임
B. 마음의 쓴 뿌리를 보여 줌
III. 용서하는 마음의 은혜
A. 인자하게 대함
B. 긍휼하게 여김
C. 진심으로 용서함
IV. 결론
허물을 덮는 사랑 7 2010. 03. 07 주일오전
하나님의 용서, 성도의 사랑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저를 돌려 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찐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몬 1:10~18)
I. 본문의 배경
1. 바울의 상황
2. 동역자 빌레몬
3. ‘내 아들’ 빌레몬
II. 쓸모 없었던 인간
1. 도망친 노예
2. 불의와 도적질
III. 변화된 오네시모
A. 하나님의 용서
B. 성도의 사랑
IV. 결론 : 몹쓸 사람 - 용서와 사랑이 필요한 사람
허물을 덮는 사랑 8 2010. 03. 21 주일오전
용서의 십자가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 눠 제비 뽑을쌔”(누가복음 23:33~34)
I. 본문의 배경
II. 십자가 처형
III. 예수님의 기도
A. 죄사함을 빌으심
B. 용서하시는 사랑
IV. 관계를 지속하게 하는 사랑
허물을 덮는 용서 9 2010. 03. 28 주일오전
죽음으로 용서하신 하나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I. 본문해설
II. 사랑을 확증하신 하나님
- 율법을 지키나 하나님 사랑을 모름
- 율법도 없으며 하나님 사랑을 모름
III. 사랑을 확증하신 방법
A. 그리스도의 죽으심
B.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C. 용서로 관계를 여심
IV. 결론
허물을 덮는 사랑 10 2010. 04. 18 주일오전
기도하려면 용서하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막 11:25)
I. 본문해설
II. 영적 교통과 기도
III. 기도가 막힐 때
A. 사랑과 기도
B. 용서 : 관계로 새롭게 됨
IV. 결론
허물을 덮는 사랑 1
허물을 덮는 사랑 1
1.진실과 사랑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3-5).
I. 본문해설
오늘부터 몇 주간에 걸쳐 허물을 덮는 사랑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산상수훈 중 한 부분입니다.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이에 예수께서 가르쳐 가라사대’로 시작되는 마태복음 5장부터 6장과 7장까지를 우리들이 산상수훈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다른 모든 가르침들은 바로 이 가르침을 확대해 놓은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신약성경 전체가 바로 이 산상수훈에 대한 구체적 해설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산상수훈은 천국이 어떤 나라이며, 그 천국 백성은 어떤 사람들이고, 또 그 천국시민으로서 살아가는 생활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II. 외식과 판단
그중에서 오늘은 천국백성에게 부합하지 않는 한 삶을 지적하고 계시는데 그것이 바로 외식과 판단하는 삶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바리새인을 비롯한 많은 유대교주의자들이 백성들의 신앙을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종교의 본질인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기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만을 가지고 사람들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외면적인 율법의 준수를 높이 평가하고 내면을 깊이 성찰하지 않는 종교적인 분위기는 많은 외식하는 사람들을 양산하였습니다.
A. 외식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도대체 이 외식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 외식은 다른 사람에게 좋은 평판을 받을 목적으로 자기 마음에는 없는 선을 행하는 것, 그래서 자기를 의롭게 보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외식입니다. 이런 외식을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미워하셨고, 그리고 탄핵하셨습니다. 예수님 가르침에 의하면 한 사람의 행위라고 하는 열매는 그 사람의 됨됨이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나니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지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위선적인 행동, 외식은 사람은 옳지 않은데 옳은 열매가 맺힌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하셨는데, 외식은 사람은 악함에도 불구하고 선한 행동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달리 악한 사람에게서 선한 열매가 맺힐 수 있는 것일까요? 겨울에 직원들 데리고 수련회를 갔는데 밤중에 나와 보니까 그 숙소 마당에 여러 그루의 나무가 있는데 잎이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가 있는데 거기에 등을 매달았어요. 이렇게 보기가 괜찮아요, 그래서 이제 돌아와서 그 집에 있는 것은 좀 너무 시뻘게서 마치 중국영화에 나오는 장삿집 분위기를 연상하게 하니까 진짜로 한번 예쁜 등을 찾아봐라,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서 매단 등이 교회에 있는 ‘감’등입니다. 이제 겨울이 되면 나뭇잎이 다 떨어져서 을씨년스러운데 그래도 밤에 오면 그게 달려있어서 기분이 좀 그래요. 그런데 어느 교인이 둘이서 저녁 때 교회 마당을 오게 되었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아이고, 감이 참 탐스럽게 열었네.” 순간적으로 착각을 한 것입니다. 옆에 있는 교인이, “아이고, 그러게 말입니다.” 나쁜 나무에 좋은 열매가 달렸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매달린 열매가 아니라 누군가 다른 나무에서 맺은 그 열매를 따다가 실로 묶어 놓은 것입니다. 그 나무에 그 과일이 매달렸을 때에는 열흘, 보름 흘러가도 과일이 망가지지 않고 오히려 나무의 진액를 빨아먹으며 탐스럽게 영글지 않습니까? 그러나 실로 매달아 놓은 것은 하루는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시간이 흐르면 그것은 시들고 썩어서 결국 그 나무와는 상관이 없는 열매라는 것을 입증하고야 맙니다. 이것이 바로 외식의 특성입니다.
B. 판단 기준 : 외형
이러한 외식을 하는 사람들은 판단의 기준이 외형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 나오는 가상적인 이 사람도 형제의 눈을 보면서 “야, 네 눈에 티가 있구나, 내가 빼줄게.”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눈에 들보를 가진 사람입니다. 들보란 기둥 같은 것인데 눈 속에 기둥이 들어갈 일이 있겠어요? 이것은 하나의 비유죠. 그래서 외적인 형식으로만 판단을 했더니 저 형제가 이런저런 작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데 나는 그런 잘못을 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깨끗하고 너는 잘못됐기 때문에 내가 널 고쳐주마.”라고 했는데 실상 이 사람은 겉으로는 그 형제가 잘못한 것이 외형적으로는 없지만, 그 형제가 그러한 잘못을 하게 만든, 그 형제가 잘못한 것 보다 더 커다란 잘못할 수 있는 가능성과 마음에 바르지 않는 성향이 이사람 안에 있는데 그것이 들보와 같은 것이다, 그런 이야기에요. 그러니 형제의 눈에 티는 외적으로 드러난 잘못이고, 고쳐주겠다는 사람의 눈에 있는 들보는 아직 마음 속에 있는 커다란 죄의 성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외식하는 사람들이 남을 판단하기를 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교회에서 끝없이 말에 말을 내고 사람들을 비판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제에 있어서는 행위의 열매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그리고 영적인 은혜 안에서 성숙되지 못한 사람들이 그렇게 외식하고 또 외식하는 사람들이 자기처럼 그렇게 외적으로 못하거나 혹은 바르지 않게 하는 사람들을 날카롭게 판단하고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얼마나 큰 차이를 가져옵니까? 능력이 없어서 나는 병든 사람을 위로해 주러 가는데 능력이 있는 사람은 고쳐주러 갑니다. 재능이 없는 사람은 일터에 나가서 열 시간을 일하고도 십만 원을 벌기가 힘든데, 재능이 있는 사람은 한 시간을 일하고도 십만 원을 받겠다고 해도 쓰겠다고 하는 사람이 줄을 지어요. 또, 학식이나 지식은 얼마나 훌륭합니까? 아는 것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보다는 높은 학식과 지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뛰어납니까? 오늘날 우리 목회자들은 다 자기가 하나님을 말씀을 제일 잘 전한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역사를 보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메뚜기 같이 느껴질 정도로 하나님에 관한 말씀에 탁월한 종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을 연구해 보면 마치 오늘날 나는 메뚜기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런 느낌이 들 때마다 여러분이 참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그러 시대에 태어나서 그런 훌륭한 목사님 밑에서 신앙을 배웠더라면 아마 지금보다 훨씬 뛰어난 성도들이 되었을텐데, 하는 느낌을 떨치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 학문이 또 얼마나 훌륭합니까? 엊그제 우리 집사람이 이야기를 하는데, 어느 교회에서는 은혜를 받은 성도가 와서 “목사님, 교인이 이렇게 많은데 교회가 좁으니 교회를 지으시죠.” 하면서 “제가 일,이백억 내 놓겠습니다.” 했답니다. 나 같으면 얼른 통장번호를 알려 줬을텐데, 이 목사님은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사업이나 열심히 하쇼.” 그랬답니다. 그 얘기를 듣고 나서 나도 한번 그런 말을 하고 싶은데 누가 와서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어야 나도 한번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사업이나 하쇼.” 물질이 없는 사람은 기도 응답을 기다리지만, 이 땅에 자원이 많은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기도의 응답을 이루어주는 하나님의 도구가 됩니다. 그러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차이도 참 크고 얼마나 현저한 차이를 만들어 냅니까? 그러나 이러한 능력, 재능, 학식, 물질의 소유 이런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신앙의 더 탁월한 가치가 있어요.
III. 진실과 사랑 -신앙의 생명 : 진실
1. 하나님을 닮기 원함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진실해지는 것입니다. 그 진실과 사랑, 이것이 그 모든 것보다 신앙에 있어서 더 탁월한 덕목이 되는 것입니다. 이 진실은 사랑과 떨어질 수 없어요. 진실한 사람은 반드시 사랑의 사람이고, 옳게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은 사랑할수록 진실해 질 수 밖에 없으니 이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또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가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주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진리 되신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아니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진리와 사랑은 한가지로 가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진리에 대한 애착은 이념에 대한 집착일 뿐이고 진리에 대한 앎이 없는 사랑은 동물적인 충동에 불가한 것입니다. 올바른 진리를 알고 그 진리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나머지 그 진리를 사랑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진실한 삶을 위한 조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진실입니다.
2. 자기를 진리에 합치시킴
그러면 이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이 진실은 객관적인 선악의 진리에 자기를 합치시킨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의 진실이 가장 탁월하고 훌륭한 진실이지만, 비록 하나님을 몰라도 선악을 알고 거기에 부분적으로나마 자기를 합치시키려는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동화 하나 들려줄게요. 어느 나라에 임금이 한 사람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외동딸 밖에 없어요. 외동딸이 못 생겼을까요? 예쁠까요? 아주 그림처럼 예쁜 공주가 있었습니다. 여자한테는 나라를 물려줄 수 없다는 법이 있으니, 사위에게 나라를 물려주어야 할 텐데, 왕이 보니까 다 도둑놈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고민 끝에, 또 공주가 잘 안 웃으면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서 공주를 활짝 웃게 하는 사람에게 나라를 줄 터인데, 또 성격도 명랑해서 웃음도 많아 그럴 필요도 없어요. 왕이 고민하다가 한 아이디어를 내었습니다. 그리고 전국에 방을 붙였대요. “자, 내게 예쁜 공주가 하나 있는데 사위에게 이 나라를 물려주려고 한다. 그러니 지위고하,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사위가 되고자 하는 자는 응모를 해라.”고 방을 붙였더니 원서를 내기 위해서 성에 끝이 안보이게 줄을 선 것입니다. 시험 문제가 뭐냐 하면, 꽃씨를 댓개씩 손에 쥐어준 것입니다. 백성들이 와서 그 꽃씨를 들여다보니, 생전 이 나라에서는 본 적이 없는 꽃씨인데, 한 종류도 아니고 여러 종류가 섞인 것입니다. 그것을 댓 개씩 손에 쥐어주면서 시험 문제를 내었는데, 가을에 이것을 기른 화분을 가지고 올 때에 가장 탐스럽게 이것을 잘 기른 사람에게 우리 딸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가을이 왔어요. 온 젊은이들이 손에 손에 꽃을 이고 끌고 구르마에 싣고 성에 모였는데, 완전히 꽃밭이 된 것입니다. 듣도 보도 못한 화려하고 예쁜 꽃들이 수없이 화분에 담겨서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그런데 왕이 그렇게 아름다운 화분을 가지고 왔는데 다 고개를 흔들며 불합격을 시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한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화분을 들고 왔는데, 흙만 남긴 화분을 들고 온 것입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눈물을 펑펑 흘리며 왕에게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이 씨앗을 잘 키워서 예쁜 꽃을 키워달라고 저에게 꽃씨를 주셨는데, 그래서 지성으로 물을 주고 추우면 들여놓고 더우면 내놓고 하면서 햇빛을 쬐였는데 결국은 싹이 나지 않았습니다.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리고 빌었더니, 왕이 일어나서 이 사람이야말로 나의 사위가 될 자격이 있다고 했대요. 왜냐하면 왕이 이름도 모를 외국의 꽃씨를 몇 가마를 들여와서 후보자들에게 나누어 주기 전에 큰 가마솥에 넣고 삶았답니다. 그래서 다 죽여서 햇빛에 말려서 그것을 나누어준 것입니다. 그것이 꽃이 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꽃을 피워서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은 꽃을 심는 목표이기는 하지만,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고 하는 선악의 기준에 자기를 합치시키려니까, 다른 사람들처럼 외국에 가서 다른 동네에 가서 꽃을 모아다가 더 예쁜 화분을 만들 수 있었지만, 그것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게 진실입니다. 그러면 신앙적인 면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영혼의 참된 변화를 우리에게 주셨어요. 그러면 그렇게 변화 받은 우리들이 이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되겠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진리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분은 그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기억하고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진리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고 우리 밖에 있는 이 세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또 동시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까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진리에요. 이 진리의 빛이 비추일 때에 그 때에 우리는 그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알게 된 사람이 자신의 마음과 삶을 알게 된 그 진리에 부합하도록 합치시킬 때에 그 상태를 우리는 진실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진리를 알고, 정직해지지 아니하고는 진실해질 수가 없죠. 그러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모두 털어놓는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을 진실이라고 부르지 않아요. 이런 경우는 진실입니다. “내가 너를 미워했거든, 죽이고 싶었거든, 사실 너를 죽이고 싶어서 조폭을 찾아가 견적까지 받았지, 그리고 그들이 쓸 칼까지 내가 갈아다 주었거든, 그런데 어느 날 조용히 생각해보니 인생은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하겠더라구, 그래서 내가 입금까지 했지만, 널 죽이지 말아달라고 말했어. 내가 진짜 잘못했다.” 이것은 진실한 것입니다. 아무리 조폭에게 돈을 주고 총을 주고 칼을 사와도, 그것은 진실한 것입니다. 왜? 마지막 결론이 결국은 진리로 돌아가는 거니까. 그러나 이런 것은 진실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를 무지하게 미워했거든, 진짜 갈아 마시고 싶었어, 나는 네가 태어난 게 하나님의 실수라고 생각을 했거든, 너를 없애는 것이야 말로 내가 인류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지금도 그래, 어쩔래?” 그것은 진실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배 째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은 항상 자기는 원하지 않는데, 밖에 있는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기준이 있어서 거기에 자기를 포기하고 버리고 거기에 합치시키려고 할 때에 거기에서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3. 뉘우침
그것이 바로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니,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의 편지니’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찬송에 보면 그런 것이 있죠. ‘가시 밭에 백합화’ 그런 찬송, 가곡이 있잖아요. ‘가시 밭에 백합화’ 왜 백합화는 하릴없이 가시 옆에만 펴요? 그 뜻이 아니라, 백합화가 가시 밭에만 핀다는 게 아니라, 백합화가 폈는데, 그 옆에 가시밭이 있으면, 바람이 불면서 가시가 툭툭 쳐요. 그 때에 꽃은 자기를 외부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 확 하고 뿜어내, 그게 향기에요. 그러니까 가시가 찌르는데 꽃은 이것을 해충의 공격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향기를 확 뿜어내요. 그러면 그 향기를 대부분의 곤충들은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원리에 의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사람이 제 생각대로 살다가 이렇게 와서 단정한 마음으로, “하나님, 나는 갈 길을 모릅니다. 진리를 가르쳐주시옵소서.” 이것도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겸손해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 진리가 그것이군요. 어쩜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것과 딱 맞네요.”라고 박수를 치는 것은 쉬울 지 모르지만, 진리가 자기를 칭찬할 때에는 좋아하다가도 진리가 자기를 꾸짖을 때에는 이를 악물고 토라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그러나 진실은 진리가 그렇게 자신을 책망할 때에도 자기보다는 진리가 올바르다고 믿으면서 자기를 꺾어 진리에 부합시키고자 할 때에, 그 때에 그 사람이 진실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진실은 항상 내적인 변화, 본성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나무 먼저 고치고, 그 나무의 기운을 북돋아서 열매를 맺게 하는 종교에요. 그래서 삶에 근본, 인생의 근본을 고치는 기독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미움과 용서에 대해서 설교를 했대요. 그리고 이제 “여러분 중에 이 세상에 미워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사람 손 들어 보십시오.” 누가 손을 들 수 있겠어요? 하다못해, 시어머니가 밉던지, 애들이 밉던지, 하여튼 미운 사람이 왜 없겠어요? 그런데 저기 연세 드신 할아버지 한 분이 손을 높이 드신 것입니다. 목사님이 너무 감동을 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 이 세상에 미워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 있는데, 저 할아버지는 열심히 교회 나오시더니, 이 세상에 미워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저 할아버지처럼 신앙생활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한번 할아버지에게 물어봅시다.” “할아버지에게 어떻게 신앙생활을 잘 하셨길래, 이 세상에 미워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세요?” 그러니 할아버지가 기침을 콜록콜록 하고, “내가 사실 미워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다 죽었어. 그래서 이 세상에는 없어.” 그것은 이 할아버지가 미움의 죄를 버린 것이 아니라, 죄가 할아버지를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은 진실한 신앙생활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이 없으신 분이시겠습니까? 지혜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오늘 주실 수도 있고, 낮은 사람은 내일 높이실 수도 있고, 가난한 사람은 다음 주에라도 부자로 만드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진실하게 만드시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 앞에서 깨닫고 자기를 고통 속에서라도 포기하게 하시는 과정을 통해서 진실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기 때문에 이 인격에 맺히는 진실의 착한 열매는 우리가 성공해서 손에 쥐고 있는 모든 외적인 것보다 더 높고 뛰어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그렇게 그 진리에 합치시키기 위해서 때로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아픔을 주기도 하시고, 때로는 때리기도 하시고, 때로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데 붙잡지 않으시고 나 없이 살아보라고 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놓아두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마지막에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공해서 우리 주님께 감동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흠 없이 진실한...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 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주님의 순결한 신부가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이렇게 진실해지려는 신앙의 자세를 가지고 있으면, 다른 사람이 무엇인가 잘못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크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일 진리의 말씀 앞에 자기를 비추어보면서 자기가 그 진리의 빛 아래서 얼마나 불결하고 더러운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달을 때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지만 진리와는 거리가 먼 나, 진리를 알지만 진리가 나를 두둔할 때는 좋아하고 진리가 나를 꾸짖어 다른 사람을 만들려고 할 때에는 싫어하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회개하게 될 때에 항상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그 위에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IV. 형제의 허물을 덮으며...
1. 오히려 자기성찰의 기회 삼음
이러한 속에서 자신은 하나님 앞에 다만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이것이 형제의 허물을 볼 때에 그를 손가락질 하며 판단하고 비판함으로 자기를 세우는 데 이용하지 아니하고, 그의 허물과 잘못을 마치 자기의 잘못인 것처럼 느껴지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형제의 허물을 덮으며 살아가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형제의 허물을 덮음으로써, 자기성찰의 기회를 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외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행동을 하거나 허물이 있을 때에는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 사람의 성품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체들의 잘못을 보거나 죄를 볼 때에 그 사람은 죄를 지었고 나는 아직 죄를 짓지 아니하였지만, 그들이 지은 죄들 중 그 씨앗이 내 안에 없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책 속에서 술 취하고 싶은 욕망과 관련해서 이러한 말을 남깁니다. “하나님, 당신을 믿은 후로 나는, 술 취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술 주정뱅이였던 사람이 회개하고 단정한 사람이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한 번 술을 끊은 사람이 계속해서 술에 취하고 싶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며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똑같은 씨가 있는데, 저 지체는 그것이 활짝 피어나서 행위로 열매를 맺어 허물과 죄를 드러냈고, 나는 아직 그것이 활짝 피지 않고 씨앗의 상태로 혹은 싹이 난 상태로 아직 마음에 남아있어요. 그러면 그것이 활짝 피어나서 나도 저 사람 같은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은혜가 그 죄악의 씨들을 눌러주셨기 때문에 내가 저 형제가 범한 잘못을 범하지 않은 채 살아있는 것이지, 무슨 차이점이 있느냐 이 얘기에요.
2. 사랑으로 기다림, 도움을 줌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교회의 지체들이 형제의 허물을 볼 때에 사랑 없이 판단하여 정죄하기 보다는, 그가 범한 죄와 허물을 마치 나의 것인 것처럼 느끼며 가슴 아파하고 회개하고 그리고 그 허물과 상처를 덮어서 치료하는 데에 내가 이바지 할 수 있게 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날, 장에 암이 생겼다는 선고를 받게 될 때에 아마 우리는 그 암을 미워하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속히 병원에 가서 그 부분을 도려내고 살아도 다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암이 생겨날 때까지 무절제하게 생활하고 먹고 마시고 이러한 자신의 잘못된 부패한 생활을 미워하게 될 지는 모르지만, 질병에 걸렸다고 해서 자신을 미워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의 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 한 몸으로써 형제의 허물이 있으면 그것은 나의 허물인 것입니다. 그것을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성령의 사람 안에서 교통을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답게 주님께 붙어있고 그 분을 사랑하노라면 그러면 그 사랑의 교통을 따라서 형제들의 기쁨이 내 마음에 행복이 되고 형제들의 허물이 내 마음에 고통이 되고 형제들의 죄가 나의 잘못인 것처럼, 때로는 남을 위해서 회개할 마음이 생겨나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한 몸을 이룬 영적 상태에요. 제가 고등부 학생을 가르칠 때인데, 이 녀석이 매일 병원엘 가요. 너 왜 그렇게 매일 병원에 다니냐고 했더니 마지막에 마지못해 하는 얘기가, 공부 열심히 안 한다고 아버지가 싸대기를 한 대 때렸대요. 맞고 나서 너무 귀가 아프더래요. 그래서 나중에 혼자서 병원에 갔더니 고막이 터졌대요. 그런데 그 아버지가 우리 교회 담임목사님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정방문을 갔어요. “목사님, 목사님이 우리 고등부 애 때리셨어요?” 목사님이 가만히 생각하시더니 하도 공부를 안 해서 너무 화가 나서 한 차례 때렸대요. “목사님, 다음부터 때리지 마시고 잘 타이르세요. 그만하면 착한 아이입니다. 고막이 찢어졌답니다.” 목사님이 얼굴이 확 일그러지면서 우시려고 합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그러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가려고 하니, 내가 뭐 의사에요, 약사에요? 갑자기 목사님이 내 손을 붙잡고 “거 혹시 차라리 내 고막을 뜯어서 걔를 주면 안 될까요?” 그것이 바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피붙이의 마음이 하나님이 교회의 모든 지체들을 묶어 놓고 싶으셨던, 살이 되고 피가 되는 바로 그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릴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주님은 치료하시는 분이세요. 그래서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별명을 ‘여호와 라파’라고 불렀으니, ‘라파’는 ‘치료하다’라는 뜻입니다. 의사가 약으로 우리의 병든 몸을 치료하여 부분적으로 병든 것을 온전케 고치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약 삼아 우리의 교회를 고치십니다. 그리고 허물이 있는 형제들과 잘못에 빠진 지체들은 바로 여러분 자신의 몸의 상처에요. 그러면 죄에 빠진 사람들은 더더욱 그리스도가 필요한 사람들이고, 허물에 빠진 사람들, 자신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뼈저린 부패가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그 약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를 기억해보십시오. 몇 년 전에 교역자 수련회를 갔어요. 그런데 견딜 수 없는 독감에 걸린 것입니다. 그래서 일주일동안 수련회를 하는데, 병원을 매일 갔어요. 그랬더니 의사선생님이 그래요. “도대체 뭘 하시는 분이시길래 그렇게 의사 말을 잘 들으십니까?” “아, 목사입니다.” “아, 그러십니까? 목사선생님이셔서 그렇게 말을 잘 들으시나봅니다.” 라고 합니다. 매일 오라는 대로 가고, 먹으라는 대로 먹고. 온 관절과 마디가 쑤셔서 배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양제를 놔주면서, “5분만 기다려보세요. 이제 안 아플 겁니다.”라고 하는데 5분이 아니라 3~4분이 지났는데, 거짓말같이 안 아픈 것입니다. “뼈마디가 쑤시고 정신이 혼미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금방 안 아플 수가 있습니까?”라고 하는데, “더 맛있는 게 생겨서 그 놈들이 그것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요. 연약한 뼈마디 같은 것을 공격하다가 가만히 보니 맛있는 양분이 피를 타고 막 흘러들어오니까 그것을 찾아서 흩어지니 안 쑤시는 것이래요. 이렇게 우리가 허물이 있는 형제들, 그리고 잘못한 형제들은 연약한 관절들과 같아요. 그래서 마귀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요, 그 때 필요한 게 무엇이냐 하면 영양제에요. 하나님의 은혜, 지체들의 끊임없는 용서와 돌봄, 이러한 것들이 계속 부어질 때에 그 때에 하나님은 병들었던 교회의 몸에 일부를 약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고치시는 것입니다.
3. 주님께 부탁함
그렇게 고침을 받으면서, 예전에는 오네시모처럼 쓸모없던 사람이 그렇게 쓸모 있는 사람으로 바뀌어져서 그래서 하나님 섬기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이 세상에 있는 당신의 몸인 교회를 바라보십니다. 분쟁과 시기, 미움과 갈등 속에 피 흘리며 찢긴 교회들을 보실 때에 주님의 그 마음이 어떠시겠어요? 그리고 주님의 그 마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그 삶에서 누릴 수 있는 그 영광과 기쁨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이겠어요? 미움을 받는 사람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더 많은 영혼의 고통 속에 하나님과 막힌 관계 속에 살아가잖아요. 한 해를 시작하면서 여러분이 마음 깊이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마음에 미움과 비판의 쇠사슬로 묶었던 사람들을 자유롭게 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고 혹시 그들에게 명백하게 부족한 것이 있다 할지라도, 바로 그 부족한 것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보내셔서 그 모자란 것을 보충하게 하셨다고 믿으면서 더 많은 은혜를 구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때에 하나님은 잠시 진실을 떠나고 사랑에서 멀어졌다 할지라도 여러분을 다시 불러 이렇게 진실한 사람으로 되돌아가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허물을 덮는 사랑 1
2.상처를 이기는 용서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17-21).
I. 본문의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유명한 족장 요셉의 이야기에 나오는 마지막 부분입니다. 아는 바와 같이 요셉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히 야곱은 이 요셉을 매우 사랑해서 형들이 시기하리만치 아버지께 특별대우를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후에 고생하는 모든 가족들을 애굽으로 불러 고센 지역에서 짐승을 치며 평화로운 삶을 살게 하였습니다. 야곱이 수가 다하여 죽고 요셉의 형들은 이제 요셉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행한 일이 워낙 악한 일이었기 때문에 동생이 여전히 자신들을 향해 복수의 마음을 품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요셉이 그러한 이야기를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언뜻 보기에는 형들이 지어낸 것 같은 말로 요셉에게 일렀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당신에게 남기신 말씀이 있는데, 우리를 용서해주라고 하셨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요셉은 지금 애굽의 국무총리로서 형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자기의 지난날의 잘못들을 용서해 달라고 빌고 있는 처지입니다만은, 요셉은 상처의 사람이었습니다.
II. 상처의 사람 요셉
아버지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그러나 그 대신 그 아버지께 사랑을 받는 대가는 너무나 혹독한 것들이었습니다. 형들에게 시기하는 마음과 미움을 사서 결국은 들에 있을 때에 요셉을 죽이려고 했고 또 결국은 죽이지는 않았지만 노예 상인에게 팔아서 애굽까지 끌려와 종살이를 하게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한 적이 없었지만 형들은 이 요셉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였고 그래서 사랑하는 아버지와 생이별을 하게 만들었으며 이 요셉이 짐승에게 찢어 죽임을 당했다는 표시로 그 채색옷에 짐승의 피를 묻혀 또 요셉 아버지인 야곱도 일평생 이 일을 한처럼 가슴에 품으며 살아갔던 것입니다. 애굽에 온 이후로 과거의 슬픔에 잠겨 있는 대신에 요셉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에 충실한 인생을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도 히브리인의 노예임에도 불구하고 온 마음을 다하여 충성스럽게 일하였고 급기야 그 집안 많은 종들 중에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먹고 마시는 것과 아내 이외에 모든 것을 요셉의 손에 두어 요셉으로 하여금 그 모든 일을 맡아서 처리하게 하였습니다. 거기서도 요셉은 믿음으로 살고자 하였으나 보디발의 아내가 자신을 연모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부터 그는 제 2의 시련을 맞이하였습니다. 준수한 청년인 이 요셉을 지극히 사랑하던 보디발의 아내는 급기야 이 젊은 요셉에게 잠자리를 같이하자고 요구하였고 이것을 거절하자 그 사랑은 미움과 원망으로 바뀌어서 그래서 요셉을 자기를 겁탈하려다 실패한 노예로 몰았습니다. 거기에서 커다란 고통을 겪으며 그는 죄도 없이 믿음을 따라 살려고 했다가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변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야곱에게 아들로 있을 때에 이 요셉이 가지고 있었던 중요한 결점 하나가 고쳐진 것입니다. 요셉에게는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치는 바람직하지 못한 습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형들로 하여금 요셉을 미워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수많은 연단과 고통의 과정을 겪으면서 그는 조금씩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해갔습니다. 억울하게 잘못한 것도 없이 옥에 갇혀 장래의 생명을 보장 받을 수 없는 위치에 있게 될 때에 누군들 자기의 결백을 주장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마는 이 요셉은 감옥 속에 있으면서도 일체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을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함께 옥에 갇힌 떡 맡은 관원장과 술 맡은 관원장과의 대화 속에서도 그냥 간단하게 자기는 여기에 이렇게 옥에 갇혀서 벌을 받아야 할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만 간단하게 피력하였을 뿐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요셉은 상처투성이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는 그렇게 미워한 적이 없건만, 형들은 일체 자기를 미워하여 사랑하는 아버지와 생이별을 하게 만들었고 자기를 돈 몇 푼에 노예로 팔아버린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안락하고 평화로운 가정을 등지고 낯설고 물설은 이 이국의 땅에 끌려와 비참한 노예살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고단한 일과를 마치고 헛간에서 잠드는 밤이면 창 밖에 찬란하게 빛나는 별들을 보며 아버지의 품 안에서 사랑을 나누며 살았던, 채색옷을 입으며 살았던 그 것을, 고향과 함께 그리워하였을 것입니다. 그 악이 아니었더라면 그 행복한 삶의 환경을 박탈당하고 이 이국의 땅에서 피나는 노예 생활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III. 허물을 덮은 용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오늘 형들이 자신에게 지은 수 많은 죄들을 용서해 주는 관용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이미 용서하였지만 세월이 많이 지나고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 두려움에 싸여있는 이 형들의 무서운 마음을 보듬어주며 허물을 덮는 용서를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이 모든 과거의 자신에게 행한 형들의 악을 잊었습니다만, 악을 행한 사람의 마음 속에 살아있는 양심의 작용은 은혜를 받은 사람 마음 속에 있는 아픈 상처의 기억보다 뛰어나서 요셉은 잊었습니다만, 악을 행한 이 형들은 잊지 않고 동일한 두려움을 여전히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애굽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이 동생의 말 한마디면 자신과 모든 가족들의 생명은 바람 앞의 촛불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놀랍게도 그들의 모든 죄악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어쩌면 아버지가 하지도 않았을 말로 짐짓 거짓 보고를 하는 이 형들의 가련한 보고와 함께 머리를 조아리며 “우리는 당신의 종일뿐입니다.”라는 고백을 들었을 때 요셉은 울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마 한 편으로는 아버지를 여읜 슬픔에, 또 한편으로는 형들의 이 고백이 오랫동안 잊혔던 마음의 상처를 생각나게 만들어서,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자신에게 악을 행했으나 이제는 엎드려 빌고 있는 이 형들의 가족을 보는 불쌍한 마음 때문에 그는 울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그들을 진심으로 용서해 주었습니다. 상처는 컸지만, 그 상처를 허물을 덮는 용서로서 이긴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진공 속에서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은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관계 속에서 그 수많은 관계들을 씨줄과 날줄 삼아서 옷감처럼 시간을 통해서 직조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살아 온 인생은 우리 홀로서는 성립될 수 없는 인생이고, 우리 인생의 길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없이는 회상할 수도 없고 지금 현재 느낄 수도 없고 미래에 예측할 수 도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좋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에게 선한 대접을 받고 그래서 자신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이후로는 이 일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들이 인간사 속에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수많은 불행과 고통의 밤이 오게 되었고, 이러한 불행과 고통의 어두운 밤이 있기 때문에 인간을 구속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는 더욱 찬란하게 빛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은 하나님의 은혜로서 위대해진 인물들이지, 성정 자체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요셉도 그저 평범한 젊은이에 지나지 않았고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어 하는 철없는 아이에 불과하였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사랑하고 이해 받아야 할 가족에게 버림을 받고 낯설고 물설은 땅에 두려움에 떨며 노예로 끌려와 온갖 학대와 고난을 받으며 가시밭길 같은 인생을 헤쳐 살아올 때에, 그의 살아온 삶 하나 하나는 상처의 연속이었고, 궁극적으로 그 상처의 원인은 자신을 노예로 판 형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았지만, 그의 고난의 기억이 얼마나 쓰라렸던 것인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을 때 그 아이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싶다’라고 지었으니 그 이름이 '므낫세‘인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상처의 사람이었지만, 상처보다 큰 은혜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불행을 이기고 오히려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을 허물을 덮는 용서로서 용납하여 불행과 고통으로 얼룩 진 가정사에 막을 내리고 화해와 일치를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IV. 상처를 이긴 신앙
이것이 바로 요셉의 상처를 이긴 신앙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 보면 이러한 깊은 상처를 이긴 신앙이 세 가지로 묘사가 됩니다.
A. 하나님의 주권
우선 첫째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자기들을 용서해 달라고 비는 이 형들 앞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워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이렇게 이 사람들이 악을 행했다면,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은 것이니 마땅히 하나님은 그들을 큰 죽음의 형벌로 응징하셨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운 주권은 오히려 이 형들의 끔찍한 악, 이 끔찍한 악을 사용하여서 하나님이 요셉으로 하여금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게 하고 그리하여 그 땅에 있는 수많은 죽어갈 생명들을 양식으로 살리시는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신앙을 그 큰 고난의 시기를 지나며 배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깊은 뜻이 계셔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창조된 사람들로 살아갑니다. 주님은 당신을 믿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까지 당신의 주권을 가지고 통치하시고 다스려 나가십니다. 이 요셉은 하나님의 주권에서 위로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오직 형들이 자기에게 악을 행하고 죽이려고 했고 그리고 돈 몇 푼 받고 인신매매해버린 기억 밖에는 남지 않을 터지만 그는 인간의 오류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더 높은 주권을 바라보았습니다. 요셉도 처음부터 이런 하나님의 주권을 모두 알 수는 없었으나 믿음으로 매일매일 살아가고 알 수 없는 자신 앞에 널려진 고난의 길도 하나님이 나의 모든 인생의 주관자라는 사실을 믿으면서 인생의 길을 걸어갈 때에 주님의 주권은 하루하루 자신에게 명백하게 드러났고 그래서 선을 행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악을 행하고 부지 간에 남들에게 고통을 주는 모든 사람까지도 결국은 주님이 쓰시고자 하나님께 이용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형들의 죄악을 사용해서 자기를 만민을 구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이었고 그 주권 속에서 다시 만날 수 없는 이 사람들을 애굽에서 다시 만나 살게 하셨는데 그 하나님의 놀라운 주권을 대신해서 내가 어떻게 당신들의 악을 악으로 갚겠느냐고 되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마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일치한 생각이 있으니, 그것은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 행복이 언제 우리가 찾게 된 행복인지는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행복한 상태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아, 여기가 행복이구나.’라는 사실을 앎으로서 이미 행복에 대한 그 기준이 우리의 마음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항상 행복한 쪽으로만 전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을 복 되게 하고자, 때로는 악을 행하고 죄를 짓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짓밟고 혹은 상처를 주면서까지 자기를 행복케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 결과는 쓰라린 고통으로 돌아오고 사람들과의 소중한 관계를 산산히 부셔뜨리는 악한 모습으로 돌아오기 십상입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주 작은 범위에서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고 죄를 범한 사람이 있고 피해자가 있지만, 더 높은 하나님의 주권의 견지에서 보면 이 모든 일들, 우리에게는 고통스러워 보이는 일까지 하나하나 모두 작용을 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들을 이루어간다는 점에서 우리는 종종 우리의 시선을 우리들이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로 둘 때에 우리는 그 하나님의 주권을 굳게 믿고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깊으신 뜻대로 이 세상 위에 펼치는 세상이야 말로, 가장 아름다운 세상이요, 그 세상은 굳이 나를 중심으로 하는 세상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의 원대한 자기 회귀적인 사랑의 한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련을 만나고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견딜 수 없는 상처를 입을 때마다, 과거의 기억들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높으신 주권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항상 우리에게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의 인생이 아무 계획 없이 사람들과의 부딪힘 속에서 전개되는 우연 투성이의 인생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주권 아래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은 얼마다 커다란 복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때로는 우리에게 행복하고 기쁘고 좋은 날 하나님께 감사할 뿐만 아니라, 고난과 시련, 견디기 힘든 고통의 날들을 지나면서도 우리는 잠시 머무는 세상에서의 이 고통보다 더 뛰어나게 높으신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보며 내 인생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그 분의 통치 아래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며 살게 될 때에 우리는 요셉처럼 우리에게 잊힐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긴 사람에게도 용서할 신앙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의 섭리
두 번째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입니다. 요셉은 두려워하는 형들 앞에서 고백하였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습니다. 맞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노예 상인에게 팔아버렸을 때에, 나를 죽이겠다고 웅덩이에 가두었을 때, 그것은 분명히 나를 해하고자 하고, 나를 죽여버리고자 함이고, 그리고 나를 없애고자 하는 악한 의도 외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것 뿐이라면, 나는 당신들을 향해 복수를 꿈꾸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봤더니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악을 행하였습니다만은,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에요. 나도 직접 본 적은 없어요. 그런데 어렴풋이 본 기억에,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방직공장이 참 많았어요. 그래서 거기에 가면 밤새도록 2교대로 12시간씩, 그리고 어떨 때는 18시간씩 방직공장에서 사람들이 일을 했습니다. 밤일을 더 하면 돈을 더 주니까. 옷감을 짭니다. 이 비단을 짤 때 말이죠, 그 무늬를 새기면서 비단을 짜잖아요. 그런데 그 비단 무늬가 위로 나오는 게 아니라 아래로 나온답니다. 그래서 기술자들이 한 올 한 올 비단을 짜면서 여기에는 무슨 실을 어떤 모양을 넣어야 할 지를 생각하면서 옷감을 짜 가는데, 위에서는 아주 지저분한 실밥들이 나와도 밑에서는 새가 날아가고 물이 흐르고 학들이 춤을 추는 광경이 아로 새겨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이 우연의 연속 같고 우리의 고통에는 반드시 우리를 이 고통으로 몰아넣은 원인을 제공한 사람을 찾을 수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다 이해되지 않고 왜 이렇게 혼란스러운 일들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밑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지혜가 정조하게 직조되어서 결국은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도 그러한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들은 좋아 보이는 것을 통해서 좋은 것을 받고 싶어 합니다. 좋은 것들은 우리에게 좋은 것들을 예상하게 만들고, 좋은 것들을 통해서 좋은 것들을 받게 될 때에 과정도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결과도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좋아 보이는 것을 통해서 좋은 것을 주실 때보다는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 좋은 것을 주실 때가 더 많은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모든 하나님을 향한 반응들을 사용하여서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주시고, 또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고 할 때에 그것은 운명을 믿는다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운명을 믿는 사람들은 체념을 배웁니다만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은 주권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서 반응할 줄 압니다. 그래서 정의로운 하나님을 발견하기 때문에 의롭게 살고자 하고, 사랑의 하나님을 발견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려고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에 승복하는 신앙은 섭리를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비록 나빠보이는 것이지만, 이 나빠보이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장 좋은 것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과정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믿게 하시려고 이러한 신앙의 길을 걷게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 같이 교사로 생활하던 형제 자매가 결혼을 해서, 영국에서 목회를 하고 있어요. 교인은 한 3~40명 모이는 작은 교회에서 목회를 하니까 형편이 그렇게 썩 좋지는 않죠. 자녀가 둘 있는데, 그래서 안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주 목소리가 활기차서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고등학교 3학년인데, 우리로 말하면 수시 입학고사에 합격을 한 것입니다. 얘가 피아노를 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하도 많은 사람이 피아노를 하니까 그런가보다 했죠. 아홉게 대학에 원서를 넣었는데, 다 합격을 했답니다. 그 중에 가장 좋은 학교가 로얄 아카데미래요. 참 잘했다 그랬어요. 피아노 실기를 봤는데 영국 전체에서 6등을 했답니다. 기쁜 소식을 활기차게 전하고 그 다음에 한숨을 쉬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그랬더니, "근데 목사님, 등록금이 4천만 원이랍니다." 그래요. "무슨 등록금이 그렇게 비싸냐?" 했더니, 이번에 얘기를 나누어 보니까, 2천5백만 원이 등록금이고, 기숙사비가 1천만 원쯤 되고 5백만 원 용돈을 쓰면 4천만 원 계산이 나온대요. 부인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거기서 생활비를 하고 그러는데 그 돈을 마련할 길이 있겠어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걱정하지 마라, 유사한 경우를 나는 목회하면서 수없이 많이 봤는데, 하나님은 오히려 넉넉한 가정에서 걱정 없이 입학한 아이들보다 더 좋게 대우해 주시더라.” 이제 이 아이도 열심히 기도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엄마 아빠가 자신에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엄마 아빠가 넉넉했다면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했겠어요? 그러니까 이제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고, 이 엄마 아빠도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지 않겠어요? 그렇게 매달리는 과정을 통해서 넉넉한 집 아이들은 결코 받을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는 사랑의 비밀들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찬양)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혹은 부모가, 혹은 형제가, 혹은 교회의 지체가 나에게 악을 행하고 견디기 힘든 상처와 고통을 나에게 주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그러한 상처가 없었더라면 맛볼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섭리 속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데려가시고 그리고 이끄신다는 사실을 터득함으로 좋은 환경을 통해서 뿐만이 아니라 역경을 통해서도 우리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요셉에게는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이 생겨났기 때문에, 애굽에서의 그 쓰라린 노예살이, 배신과 그리고 미움으로 복수로 일관된 그 끔찍한 다른 인생의 길을, 상처를 이기고 다른 형제들의 허물을 용서해주면서 살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올 한 해 하나님 안에서 활짝 피어나는 꽃처럼 살기 위해서는 마음에 속박하고 있는 사람들을 이제는 풀어주어야 합니다. 미울수록 마음 깊이 축복하고 자신에게 고통을 준 사람일수록 마음 깊은 곳에서 용서하고 그들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은 신뢰하지 않지만, 악한 사람까지 사용하셔서 결국은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묶여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마음은 하늘을 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큰 섭리를 믿으며,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C. 선하신 하나님
마지막 세 번째,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믿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시게 하려 하셨습니다. 이 요셉이 형들에게 악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노예로 팔리지 않았겠죠? 노예로 팔리지 않았으면 애굽에 끌려왔을 리가 없겠죠? 애굽에 끌려오지 않았더라면 보디발의 집의 종이 될 수 없었겠죠?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그 가정의 총무가 되었을 리 없습니다. 총무가 되고 가정의 삶에 깊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보디발의 아내와 마주칠 리가 없었겠죠? 보디발의 아내와 마주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는 감옥에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감옥에 간 것도 결국은 보디발의 아내의 그 끔찍한 모함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옛날에 성화되지 않은 요셉의 성품 같았으면 틀림없이 형들도 고자질도 했는데, 자기에게 끔찍한 짓을 해서 고통을 준 그 여자를 고자질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그 여자가 악을 행했기 때문에 자신은 감옥에 갇혔고, 감옥에 갇혀서 떡 맡은 관원장과 술 맡은 관원장을 만났습니다. 자기가 그들이 꾼 꿈을 해석해 줌으로써 떡 맡은 관원장 너는 결국은 복직을 못하고 죽고, 그리고 너는 복직을 할 것이라 술 맡은 관원장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왕 앞에 갈 때에 나를 잊지 말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 큰 은혜를 요셉에게 입고도 요셉을 잊어버리고 2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2년 후에 바로는 해괴한 꿈을 꾸었습니다. 7년 동안은 끔찍한 흉년이 들고 7년 동안은 대풍이 든다는 해석을 요셉이 들려주었을 때에 그는 나이 30세였습니다. 후에 애굽의 고고학적 발굴 결과 바로 당시의 30세는 애굽에서 공직을 담임할 수 있는 최연소 연령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의 악들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계획하셔서 그래서 때가 차매 그 옥 속에서 나오게 하셔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요셉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무엇인지 배웠을 것입니다. 요셉에게 있어서 형들에게 악을 당하여 팔린 것도 나쁜 것이었고,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당한 것도 악한 것이었고, 술 맡은 관원장이 자기의 은혜를 2년 동안 잊어버린 것도 악한 것이었지만, 애굽 전체의 죽어갈 사람들을 살리려는 하나님의 계획에서 보면 그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을 선하게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으로 데려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큰 섭리의 전개의 과정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요셉은 처음에는 가장 낮은 차원의 자기중심적인 선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보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이 온 세상, 자기만이 아니라 이 가족들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휘감고 계신 하나님의 불변하신 선하심이 결국은 자신의 인생을 형들의 악까지 사용하여서 여기에까지 오게 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이 요셉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어떠한 악을 행해도 하나님은 절대로 선하신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이시기 때문에 때로는 사람들이 악해 보이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이 그것들을 사용하셔서 더 큰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반드시 그가 살아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과 환경을 통해서 판단 받으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악을 당하고 세상의 모순이 가득찬 것 같아도 하나님은 절대로 선하신 분이시고 잠시 악해 보이는 것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더 큰 선으로 나아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믿음을 갖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커다란 선의 계획 속에서 우리의 인생사를 읽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힘이 생깁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하면서 살아야합니다. 상처와 그리고 고통이 그리고 악이 우리들에게 주어질 때에 우리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가 들어온 이후 이것은 우리에게 늘 일어나는 일상사가 되었습니다. 주님 없이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의 삶 속에 생겨나는 기쁘고 선한 일, 슬프고 악한 일을 보면서 그 때마다 흔들리며 요동치는 삶을 삽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우리들은 요동치는 이 모든 세상의, 인간의 악과 그리고 허물, 상처와 모든 고통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그 악하고 나쁜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수단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악한 것을 통해서 더 선한 것을 사모하게 되고, 허물을 통해서 완전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상처가 있고, 사람의 허물이 있고, 때로는 믿음으로 살려고 할 때에 악을 당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쉽게 잊어버릴 수 밖에 없는 이 세상의 본질을 생각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상처를 받고 버림을 받을 때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우리의 영원한 고향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사람에게 버림을 받고 실망을 느낄 때마다 피하여 도망치는 주님의 품에서, 안식과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행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살지만, 이 땅에 있는 것으로 먹고 배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를 마치 바다 위에 배가 떠있으나 그러나 마실 물은 그 바다 위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고 위로 내리는 새로운 물을 기다리듯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임을 배우게 됩니다.
V. 결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람들은 우리에게 영원히 선한 사람이 없습니다만은, 하나님은 영원히 변함없이 선하신 분이십니다.
폭풍우 흑암 속 해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기울이시사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다 나를 버려도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한 가지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거기에 마음을 잠그십시오. 하나님 홀로 선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 홀로 우리를 완전하고 영원한 방식으로 사랑하시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내가 나를 버릴 때 조차도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에게 있는 수많은 악을 선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이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받은 그 견디기 힘든 상처와 고통을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 돌릴 아름다운 것으로 변화시키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상황에 휘둘려 사람을 의지하는 대신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혀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이제는 그만 마음에 묶여 있는 많은 미워하는 사람들, 우리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었던 사람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용서를 빌지 않아도 어차피 사랑은 사죄 없이 용서되는 것이기 때문에 진심으로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묶인 것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여러분의 지난 날들에 상처를 주었던 많은 사람들의 허물을 주님의 사랑으로 덮고 복의 근원이 되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큰 나무와 같은 삶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그늘 아래 많은 사람들이 깃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요셉이 이 형들에게 복수의 칼을 휘둘렀더라면 그 원한은 다시 자손들에게까지 이어졌겠죠? 그러나 고통 가운데서도 그 모든 상처를 은총으로 극복하고 자신의 품 안에 깃들게 만들었을 때에 미움과 상처는 끝나고 용서와 사랑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백성들이 이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은혜의 그늘, 전능자의 그늘이 되는 비결입니다. 올 한 해 그렇게 살아서 여러분이 더 큰 복의 근원이 되길 바랍니다.
허물을 덮는 사랑 1
3.네 형제를 비방하지 말라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괴율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1-2).
I. 본문해설
몇 주에 걸쳐서 우리는 허물을 덮는 형제사랑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사도 베드로가 핍박을 받고 있는, 혹은 앞두고 있는 아시아에 흩어져있는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는 뼈아프게도 주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함으로 주님을 배반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핍박을 앞두고 있는 성도들이 자신과 같이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일이 없도록 마음을 기울여 그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성도가 고난을 받을 때 오히려 기뻐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는것, 그리스도 때문에 박해를 당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도록 특별히 권면하면서 사도는 독특한 방식으로 그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이미 받은 그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고 영광스럽고 복된 것이며 그 구원 안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누리고 살도록 주신 그 거룩한 실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가르쳐줌으로써 현재 당하고 있는 이 고난과 어려움이 장차 올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우리에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동력은 우리가 받은 구원에 대한 감격입니다. 과거에 받은 구원뿐 아니라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그 구원의 결과에 대한 한없는 감사와 감격이 미래에 나타날 그 구원의 완성과 함께 누리게 될 영원한 복락을 즐거워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자 하나님 앞에 지을 수 있는 큰 죄 중의 하나가 구원받은 것에 대한 감사를 상실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선한 행실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받은 그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사는 사람이 오늘 주님을 위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의무는 이렇게 자기가 누구인지를 현재적인 십자가의 경험을 통해서 잊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현재적인 경험을 통해서 과거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무슨일을 하셨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우리를 이곳까지 인도하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지를 기억하면서 구원해 주신 그 경륜을 따라서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의무입니다. 사도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썪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영원토록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된것임을 위리에게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성도들로서 마땅히 살아가야할 삶이 어떤 삶인지를 2장 이하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악독과 모든 괴율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그랬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오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어린아이와 같이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나옵니다. 당연히 이 젖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버린다고 하는 이 말이 결국은 분사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악독과 괴율과 외식과 시기와 분쟁하는 말을 다 버린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라는 뜻이 아니라 악독과 모든 괴율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을 버리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을 끊임없이 버리면서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인 신령한 젖을 사모하게 될때 우리가 참다운 구원에 합당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도 영적인 성장이 없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고 직분이 변하고, 그리고 이렇게 저렇게 교회에 일에 익숙해지는 것이 영적 성장은 아닙니다.
영적성장은 우리가 속으로 강건한 어른 같은 사람이 되고, 주님을 향해서 순수한 삶에 동기를 간직한 가운데에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과 삶을 닮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성장입니다. 그 모든 영적인 성장의 핵심은 날이 갈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장이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그 말씀 앞에서 자기가 깨뜨려지고 변화되는 가운데에 주님을 닮아가는 기쁨이 증진되는 이 삶이 바로 신앙의 신비이고 경건의 비밀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결코 지루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성장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한편으론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야 할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불신자이던 시절에 우리들이 몸과 마음에 깊이 젖어서 살던 악습들을 버리는 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이 악독은 마음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살지 않으려는 그러한 악하고 독한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괴율은 간사한 꾀로써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가르친다면 외식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서 거짓으로 선을 행하거나 마음 안에 있는 악을 감추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시기는 자기 보다 더 뛰어난 점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높아짐을 멸시하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오늘 여기서는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라고 하였는데 나는 특별히 여기서 이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는 그것이 일치된 형제를 이루는 교회생활에 있어서, 심지어는 불신자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II. 형제를 비방할 때
'형제를 비방한다'라고 할때 이 비방이라는 단어는 '카타랄리아'라는 희랍어 단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랄리아'는 말하다 라는 것이고 '카타'는 대항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누구에 관해서 말을 할 때에 좋은 뜻을 품고 그에게 좋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거스르고 대적할양으로 그에 관하여 말하는 모든 비난과 험담을 가리켜서 우리는 비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A. 악의에서 비롯됨
이 모든 비방은 악의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비방은 말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과 대화를 할 때에 다른 사람을 칭찬하거나 다른 사람을 호평하는 일에는 매우 인색하고 혹시 그런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매우 소극적이고 마지못해서 하면서 다른 사람의 결점이나 혹은 부족한 점을 들추어 낼 때에는 굉장히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고 아주 즐겁게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입을 열기만 하면 모든 많은 사람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결점과 단점에 대해서 청산유수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내면이 악의에 차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에게 결점이나 혹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결점과 문제가 있다할지라도 그 사람 안에 악의가 없다면 다른 사람의 결점이나 허물에 대해서 그렇게 예민한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마치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부모의 눈에 자식의 허물이나 잘못이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즐겁게 이야기 할 수 없는 마음이 있는 것처럼 악의가 없는 사람들의 마음은 혹시 다른 사람의 결점과 단점을 발견해도 그것을 즐겁게 화제에 올리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비방하는 생활이 비방하는 말이 일상화되어 있는 그 사람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은 해석하는 존재입니다. 바깥에 있는 어떠한 동일한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누가 그것을 보느냐에 따라서 각자에 마음속에서는 해석이 달라지게되고 심지어는 같은 나인데도 똑같은 사물을 어떤 마음에 상태에서 해석하느냐에 의해서 다르게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같은 새가 소리를 내도 마음이 즐겁고 기쁠 때는 노래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우울하고 힘들 때는 슬프게 우는 것처럼 들리게 마련입니다. 부모의 마음이라고 할지라도 여유가 있고 생기가 넘칠 때에는 아이들이 떠들고 재잘거리는 소리가 집안에서 생명에 기운이 움트는 것처럼 들려도 정신이 복잡하고 근심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아이들에 그 즐거운 웃음소리와 재잘거리는 소리가 마음에 거슬리고 시끄럽게 들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다른 사람의 어떤 허물과 과오가 전혀 없는데도 그렇게 다른 사람에 대해서 나쁘게 말을 한다면 그것은 중상이고 모략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상대방을 파괴하고자 하는 심각한 악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령 어느 정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과실과 허물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확대해서 말하면서 그것을 계기로 그 사람을 비방하는 말을 늘 하는 것은 받아들이는 그 사람 마음 안에 있는 악의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음의 선의가 있을 때에는 충분히 그렇게 가슴에 다가오지 않던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가 마치 기회를 잡은 사람처럼 적시에 포착이 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이야기해서 그 허물을 지닌 형제에 명예를 깎아내리고 험담을 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쓸모없는 사람, 무익하고 해로운 사람으로 보편적인 평가를 받게 하고자 하는 그 의도가 그 사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입만 열면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얼마나 열렬하게 부정적인 태도로 말하는지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보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의 결점과 과오에 대해서 그 사실을 아주 확대해석해서 그에 대한 비난의 말과 그리고 근거가 부족한 비판의 말을 쏟아냄으로 또 다른 사람에게 사실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이것은 명백한 죄인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이런 죄는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불신자들이 즐겨하는 생활의 습성이고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한 지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실들을 버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에게는 매우 불행한 것이요, 교회 또한 여러분의 그런 비방하는 행실을 통해서 교회의 일치과 사랑을 깨뜨리기 때문에 여러분은 두 번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덕을 세우는 말에 있어서는 대단히 소극적인 사람들이 남을 깎아내리고 남의 허물을 마치 아주 즐거운 대화의 소재인 것처럼 끌어올려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알게 하고, 또 사실이 아닌 그 이상의 것을 보태어서 상상하게 만들어주는 그 모든 일들은 매우 더럽고 불결한 일인 것입니다. 이는 마치 수치심 없이 대중 앞에서 배설하고 그리고 입으로 토해낸 것을 스스로 다른 사람의 입에 넣어주고 자기도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짐승과 같은 행동인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 안에 얼마나 은혜가 없고 악의로 가득 차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음은 굽고 부패해있기 때문에 어디선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아버지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고 주님의 거룩한 목적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은 그에게 기쁨이 되지 않습니다. 마음이 악의가 가득 찬 사람에게는 악을 자신도 모르게 좇는 습성이 있고 선이 이루어졌다라고 하는 소식은 그에게 관심을 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B. 사랑은 믿고 싶어함
그러나 사랑은 믿고 싶어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은 믿고 싶어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위대한 믿음의 장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바라며 견디느니라'고 합니다. 사랑받는 사람은 절망하고 낙심하는 일이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은 오히려 고난 중에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는 것보다는 사랑을 하는 사람이 훨씬 행복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받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을 수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 주님과의 관계를 생각해도 잘 증명이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진리를 가르쳐 주실 때에 그 분께로 부터 주어지는 진리를 받아들일 때에 여러분은 두 손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한손은 '믿음'이라는 손이고 또 하나는 '이성'이라는 손입니다.
그래서 이 두 손을 어느 한 손을 사용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면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즉 믿음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이성으로 받아들인 그 진리가 어떻게 우리에게 참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지를 부지런히 터득해야 합니다. 지난 금요일과 토요일에 우리가 성화반 수련회를 갔습니다. 한 40명 가서 그 산에서 같이 하룻밤을 지내면서 우리들이 많은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고, 그 은혜를 오래도록 간직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공통점은 좋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다음에는 부지런히 공부해서 받은바 진리의 말씀이 어떻게 하나님에 말씀이고 그리고 그 말씀을 어떻게 나에게 적용하고 다른 사람에게 잘 가르쳐줄 수 있을지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비교적 은혜를 오래 보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우리에 이성을 많이 사용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 교회는 공부 못하는 사람은 다니기 참 힘들겠다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과 졸업한 사람은 열린교회 다니기 힘들겠다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은 타당성이 별로 없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진리를 올바르게 깨달은 성도들의 마음속에는 그 진리의 이치를 더 상세히 알고자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고 또 그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탐구하며 살고자하는 소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절대 못하는 것이 있는데 그게 뭐냐면 화투와 게임입니다.
나는 그 화투치는 거 가끔 옆에서 이렇게 보면 그 복잡한 룰을 어떻게 그렇게 외우고 심지어 자기 것도 헤아리는 것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저 사람이 뭘 들었을까 까지 계산을 해내고 마지막에는 너 뭐뭐뭐뭐 이렇게 4장 들고 있지 그러고 펴보면 거의 틀림없이 맞는걸 보면서 얼마나 노력을 하면 저런 심오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가끔 비행기를 타면 책을 읽거나 혹은 기도를 하거나 잠을 자면서 갑니다. 그런데 그걸 툭 틀어보면 게임이라는 것이 나와요. 그래서 한번 들어가 봤어요. 그랬더니 캄캄합니다. 도저히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오히려 더 스트레스를 받아서 꺼버렸습니다. 근데 옆에 있는 쬐끔한 아이는 그걸 어떻게 배웠는지 기가막히게 돌리면서 연습을 해내는 것입니다. 그거 왜 그래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연구하고 탐구해 가는것 자체가 기쁨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기쁨으로 하나님에 말씀을 받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씨 뿌리는 비유에서 말씀하시기를 잠시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았다 그런데 핍박이 오니까 버리더라 이것이 바로 이 잠시 싹이 나다가 시들어 버리는 결실을 하지 못하는 믿음이다. 그렇게 우리에게 일시적인 믿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부지런히 공부해야합니다. 여러분이 이제껏 교리를 배우고 여러 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이 상당한 수준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의 드넓은 세계에 비하면 그것은 태산아래 돌멩이 하나를 손에 들고 있는 것과 같이 하찮은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는 넓고 그리고 공부할건 많아요. 진리에 세계는 넓고 공부할 것은 많다. 그러니까 부지런히 공부해야 한다. 여러분이 은혜를 받아도 대화를 나누다보면 저 같은 사람의 마음에도 어쩜 저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을까 하고 불쌍한 마음이 드는데 진리 자체이신 주님이 우리들을 바라볼 때에는 얼마나 우리가 아는 것이 없는 그런 벌레 같은 인간이겠어요.
그러니까 겸손한 마음을 품고 부지런히 공부해야합니다. 나이가 많아서 눈이 어두워지면 돋보기를 쓰고, 돋보기를 쓸 수 없이 눈이 어두워지면 옆에서 손자보고 읽어달라고 해서라도 계속 공부하고, 마지막 주님 나라에 가는 눈감는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진리를 터득해야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이성적으로 많이 노력한다고 할지라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그것이 훌륭한 하나님의 말씀을 훌륭하게 받을 수 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언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 마음속에 잘 심겨졌는가 하고 회상을 해보면 믿음이 충만했었던 때였고 언제 우리에 믿음이 충만해서 무슨 말씀이든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면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는가 하고 생각해보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그때가 가장 믿음이 충만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믿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믿는 마음의 사랑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그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선의로 해석하고자 하는 성향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누군가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체들에게서 어떤 허물과 잘못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사랑이 있는 사람은 과연 그것을 전해주는 사람의 말이 틀림없이 사실을 전하는 것일까 하는 것을 오히려 의심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남을 비방하게 될때, 대부분은 그에 잘못을 우리가 직접 목격한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다른 사람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 들입니다. 이때에 만약에 내 마음속에 그를 향한 사랑이 있으면, 그 사랑의 성향은 우리로 하여금 그에 관한 비난의 말을 모두 즉시 믿도록 그렇게 만들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의가 가득 찬 사람은 이 사람은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이런 식으로 나쁜 일을 했대. 그런데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니까 이렇게 이렇게까지 했다는구만 할 때에 오히려 그 사람에 대해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것도 여러 다리 거쳐서 들려오는 이야기니까 좀 보탰겠지 그리고 만약에 사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거기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아마 사정이 있을 거야. 우리가 그것을 알기까진 그 사람을 쉽게 판단할 수 없겠지 하는 또 다른 해석의 마음이 이 사람 속에 자리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바로 이런 일을 우리에게 시킨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훌륭한 증거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던 마지막 순간에 우리에게 남겨주셨습니다. 이제 부당하게 재판을 받으시고 형장으로 끌려가셨지만 재판은 부당해도 자신이 그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이 하나님이 택하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임을 깨달았기에 예수님은 순순히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그리고 채찍에 맞으신 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악한 원수들은 우리를 섬기던 예수그리스도에 그 아름다우신 두 손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다니시던 그 발에 더 큰 못을 박았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그렇게 끔찍한 정죄를 하나님께 받으시고 자신의 손과 발에 못 박히시고 십자가에 높이 메달리실 때 그 고통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관심은 당신 자신의 고난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못 박는 사람들이 미구에 당하게 될 하나님으로부터 임할 심판이 두려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피 흘려 매달리시면서도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자들을 위해서 제일 먼저 중보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C. 우리의 허물로 품음
'아버지여 저희에 죄를 사하여주시옵소서. 저희는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그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 했을 리가 있습니까?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고 치밀한 계획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에는 죽어가는 영혼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으셨기 때문에 당신이 당하는 고난의 크기보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를 짓고 아버지하나님께 심판을 당하게 될 그들의 고통 하는 영혼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에 아버지 앞에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리고 변명거리를 찾아냈습니다. 저희도 만약에 자기가 하는 일이 무슨 일인지를 알았더라면 당신께 이렇게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죄를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며 변호해줄 가치가 전혀 없는 죄인들을 위해서 아버지께 중보의 기도를 올리셨으니, 이는 그들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리스도에 마음에 있는 사랑이 얼마나 그들의 죄조차도 선의로 해석하게 하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피할 수 없이, 우리 형제들에게서 어떤 허물과 잘못이 발견되었을 때, 우리는 그의 허물을 우리의 허물로 품어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불러 한 자녀로 삼으시고 그에 몸에 접붙여 주실 때에 우리를 교회로 한 몸이 되게 하시었던 한 몸이 되게 하려고 하셨던 그 경륜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부부가 대개 못살고 헤어지는 것은 서로의 결점 때문이 아니라 사랑의 부족 때문입니다. 만약에 내 남편에게서 어떤 허물과 잘못이 있다고 하면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저런 못난 남자와 짝지어 주신 것은 '바로 저 모자라는 부분을 내가 보태어 온전케 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결점이 있을수록 오히려 그 결점 때문에 못 헤어집니다. 아내도 역시 마찬가지죠. 아내에게서 어떤 잘못이나 결점이 발견되었을 때, 야 저런 인간이었구나 라고 생각하면 같이 살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저런 부족함을 보충하게 하시려고 나 같은 사람을 부르셨구나 라고 생각하면 상대방에 결점이 헤어져야할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같이 살아야할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보완의 관계로 하나님이 남녀를 짝지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남녀관계 뿐이 아니라 주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류를 창조하실 때에 계획입니다. 각자 각자를 따로 부르심이 아니요. 한 사람 한 사람을 한 몸으로 불러 그래서 서로의 부족한 것들을 서로 보충하게 함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그에게로부터 받는 호의와 좋은 은택을 인하여 그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때 그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과 은혜의 크기와 높이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온 이후로는 이러한 하나님의 인류창조의 계획이 전적으로 무시되었고 그리고 파괴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지극히 불쌍히 여겨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교회를 이루시고 그들을 한몸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서 성취될 온 인류의 하나됨을 위한 예표예요.
그래서 그때까지 교회는 그렇게 마치 부부가 서로의 부족한 것을 보면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사랑의 고백으로 서로의 모자란 것을 보충하면서 살듯이 그렇게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서로의 허물을 진심으로 용서해주고 그리고 서로의 잘못을 그 잘못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나 같은 사람을 보내어서 죄를 덮어주고 감싸주고 저를 고쳐주는 하나님의 은혜의 전달자가 되게 하려고 부르셨다고 생각하게 될 때에 그에 허물은 우리의 허물이 되는 것입니다.
칼빈 선생이 <기독교강요>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30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모든 책의 거의 대부분의 주어는 '우리'입니다. 사도 신경을 해석할 때에도 주기도문을 강해할 때에도 십계명을 주석할 때에도 모두 주어는 '우리'입니다. 내가 아니라 '우리'입니다. 심지어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중 누가 먹고 또 어떤 사람은 주릴 때에도 그에 주림이 우리의 주림이 되고, 다른 사람의 먹음이 우리의 먹음이 되도록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고, 또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해달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 말씀을 적용해 봅시다. 형제들에게 허물이 발견될 때 그것을 악의에 가득찬 마음으로 비방하기에 앞서 단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무릎을 꿇고 그에 허물이 나의 허물이라고 생각하고 그가 그런 허물에서 벗어나도록 기도해 본적이 있습니까?
집요한 미움의 마음이 우리에게 깔려있다면 우리는 결코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없을 터인데, 사실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오히려 더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전혀 아니었던 플라톤 같은 철학자도 말하기를 '비판하려거든 비판하는 대상을 먼저 사랑하라'하고 가르쳤습니다. 불신자이면서도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그것이 자신의 영혼에 얼마나 해로운지를 일반은총 차원에서라도 깨달았기 때문에 그는 비판하려거든 먼저 그 비판의 대상을 사랑하라고 그래야만 올바른 비판이 나온다고 가르쳤습니다. 본성의 희미한 빛 아래서도 이 원리를 터득한 사람이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쳤다면 그보다도 훨씬 명증한 진리의 빛을 소유하고 있는 우리들이 그 원리를 성경의 원리를 외면한다고 할때 우리는 어떤 사람일지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주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더럽히는 것은 너희에 몸에서 밖으로 나오는 그것이 아니라 너희의 마음에서 나오는 그것이 너희의 입을 통해서 너희를 더럽힌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니 만약에 우리가 함께 그 허물을 덮고 그에 과오를 용서해 주고, 심지어는 그에 끔찍한 죄까지도 그 사람에 죄일 뿐아니라 우리 모두 죄로 여기고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참회하며, 서로 거룩한 공동체가 되어가도록 그리스도에 사랑 안에서 부름 받은 사람들이 그 속에서 서로를 비난하고, 심지어 없는 말까지 보태어 자기뿐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까지 지체들의 평판을 깍아 내리고,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교회 안에서 조차 싫어버린바 되도록 만드는 일에 이바지하면서 산다면 여러분은 한편으론 주님의 몸을 세우겠다고 기도하며 또 한편으로는 주님에 몸에 상처를 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선행으로 우리에 많은 죄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례전적으로 교회가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은 우리의 죄, 우리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몸인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큰 건물이나 화려한 시설이나 이 세상의 평판과 명예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한 교회의 참된 아름다움은 그와 영적으로 이어진 그리스도 예수의 머리되심을 그 머리되신 그리스도에 아름다움을 얼마나 많이 현실속에 나타내느냐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매달려 죽으시면서 까지 당신을 죽이는 그 죄인들을 변호하시고 그에 허물로 아버지께 정죄를 구하시는 대신 오히려 충심으로 그에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III. 끝없는 사랑의 힘으로
그리고 우리는 만약에 그러한 가슴 저미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었더라면 진작에 주님께로부터 정죄받았을 죄인중의 괴수들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일체 오래 참으시는 그 큰 사랑을 우리에게 보이신 것은 우리로 그 사랑을 힘입어 그리스도에 몸에 한 지체가 된 후, 그 사랑을 기억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베풀며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에 교회 속에서 지체들에 끊임없는 허물과 우리에 마음을 상하게 하는 잘못과 심지어는 악들을 봅니다. 하나님에 선명한 말씀의 지혜로 이것을 판단할 뿐만 아니라 끝없는 사랑의 힘으로 이것들을 극복하고 품으며 남에 허물을 나의 허물로 우리에 허물로 여기며 아버지 앞에 온전한 삶을 살고자할 때에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님을 더욱 닮아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못 박는 죄인을 위해 아버지께 용서를 비실 수 있었던 것은 실제로 죄인들에게 죄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죄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큰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에 마음을 녹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안에 있는 그 큰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죄인들을 용서할 수 있었고, 그들이 당하게 될 심판에 고통을 지금 당하고 있는 죽음의 고통보다 더 크게 느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오늘날까지 생각 없이 살았던, 말에 절제가 없었던 여러분의 날들을 진심으로 성찰하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여러분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그 수많은 독화살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찔렀는지를 생각하고 사실은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의 마음이었음을 자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진지하게 통회하고 마음에서 다른 사람들의 잘못과 허물들을 즐겨 화제의 대상으로 삼는 그 사악한 습성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끊임없이 증진하는 악의로 더럽혀질 것이고, 여러분이 교회에 머물러 있는 그 자체가 그리스도에 몸에 끝없는 고통이고 다른 성도들에 많은 희생과 헌신 속에 되찾은 교회의 아름다움이 여러분의 그러한 태도로 말미암아 추한 것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마음을 다해서 진지하게 자신을 성찰하고 생각 없이 지내왔던 이 많은 날들을 진심으로 회개하고 마음속에서 이렇게 미워하고 함부로 비방을 하여 그들을 고통스럽게 했던 여러분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고, 마음에 감동이 되면 그들에게 직접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것이 여러분의 영혼이 자유해지는 비결입니다. 마음에 한번 이런 결심을 품어봄이 어떻겠습니까? 내가 누군가에 허물과 결점을 발견할 때 마음을 쏟아 그를 고쳐주시도록 기도하지 않은 때에는 결코 그에 허물을 말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입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팍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릴 불쌍히 여기사 치료에 은혜 허락 하시네
세상에 어디에서 우리가 허물이 있을 때에 그것을 자기에 허물처럼 생각하고 덮어주고, 우리에 잘못 있을 때 그것을 자기가 잘못한 것처럼 아파하며 기도해주고 바로 잡아줄 수 있는 곳이 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마지막 남은 유일한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면 나에게 고통을 주는 대도 형제의 허물을 선의로 해석하고, 그가 잘못한 악 조차도 내 마음속에서 그에 영혼을 긍휼히 여기도록 만들어 주는 이 끝없는 사랑이 필요한데 그 사랑은 도대체 어디서 넘쳐나는 것일까요? 다음 주일에 계속하겠습니다.
허물을 덮는 사랑 1
4.은혜의 힘으로 용납함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I. 본문 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지난주에 이어서 우리가 한편으로는 육체에 속한 일,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는 한 편 또 한편으로는 무엇을 취해야 하는 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비방과 관련하여서 우리들은 지난 시간에 바로 형제의 허물과 잘못을 발견했을 때 그것을 악의로써 비방하는 일이 얼마나 악한 일이고 교회의 몸을 더럽히는 것인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Ⅱ. 네 형제를 비방할 때
우리의 형제를 비방할 때 그 때 그것은 형제의 허물과 잘못에서 시작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허물과 잘못이 있으면 그것을 바로 잡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올바로 세우는 것이 신자의 도리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비방은 바르게 하고 무엇인가를 건강하게 할 의도를 가지고 형제의 잘못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사람들을 미워하고 분내는 악의가 형제의 과오나 잘못에 대해서 악의를 가지고 말하는 것을 이르는 것입니다. 즐거움 자체가 악의를 가지고 상대방을 비난하고 그 이야기들을 서로 나눔으로써 형제를 현저히 따돌리고 그리고 공동체로부터 잘못된 평가를 받게 하는 데에 목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해치는 것이요 명백하게 함께 용서하고 사랑함으로써 물질과 그리고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을 나누어야할 교회를 끊임없는 비난과 그리고 부정적인 인상으로 뒤덮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허물과 잘못이 있을 때 마치 의사가 환자의 몸을 다루듯이 그렇게 형제의 허물을 다룬다면 그것은 결코 비방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인 교회에 대한 사랑이 그의 마음 속에 먼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형제의 허물을 보고 그것을 비방하는 것은 설령 형제에게 과오와 잘못이 있다할 찌라도 그것을 품고 용납하고 극복하지 못하는 현저한 사랑의 부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사랑이 부족한 사람들은 끊임없는 비방으로 형제의 허물과 오류를 드러내고 목표자체가 그것을 바르게 함으로 교회를 바르게 세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니 이는 그럴만한 사랑이 그의 마음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 대해서 중립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이런 비방을 들으면서 부정적으로 기울게 되고 또 어떤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의 마음에는 아예 대못을 박아 그 사람을 향해 완전히 부정적인 인상을 굳히도록 만들어 주는가 하면 호의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부정의 그림자를 드리움으로 어느 형제에 대해서 올바르지 못한 선입견을 갖게 하는 것이니 이러한 비방의 말들은 끊임없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지체들의 관계를 파괴하고 그리하여 교회 전체를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에게 올바른 판단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비방으로 이어지는 한 그 옳은 판단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지체들의 관계는 끊임없이 파괴되고 망가져서 교회 몸 전체가 손상을 입게 되는 것이니 비방할 만한 형제의 잘못보다도 그것을 비방하는 사람의 죄가 더 크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가슴에 깊이 새기고 누구의 어떠한 잘못과 허물을 보든지 그리스도의 몸 전체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고 사랑으로 그 모든 문제들을 올바르게 다루고 극복할 수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렇게 한편으로는 우리의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를 버리고 진실해지면서 형제의 과오를 볼 때 그것을 비방하는 대신 어떻게 은혜의 힘으로 이것을 용납하고 살아갈 수 있을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허물을 품는 사랑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Ⅲ. 허물을 품는 사랑의 힘
사도는 이러한 허물을 품는 사랑의 힘이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는 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말입니다. 1절에서는 우리가 버려야 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2절에서는 우리가 취하여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버려야 할 것은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과 같이 다섯 가지나 복수로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취하여야 할 것은 오직 ‘젖’ 여기서 말하는 이 젖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버려야 할 것은 많지만 우리들이 취하고 사모하여야 할 것은 하나인 원천, 곧 하나님의 말씀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받는 은혜의 힘으로 지체들을 용납하고 허물을 품으며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한 사람의 성품의 탓으로 자주 돌립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어떤 사람의 성품 속에 항구적으로 깃드는, 그래서 그 사랑이 그 사람 자신의 것인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사랑에 그런 특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왜냐하면 사랑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의 인격과 성품 속에서 깃들어 행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끊임없이 그 사람을 감화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용서한 사람을 오늘 다시 미워하기도 하고 또 한 때는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을 지금 비난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마치 전력이라는 원천에 끊임없이 붙어있어야지만 빛을 발하는 전구처럼 동일하게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붙어있을 때에 사랑은 끊임없이 우리 마음에 역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이러한 육체의 일을 버리고 형제를 비방을 그치게 하는 원천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이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진리를 주시는 우리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전달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올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진실한 사람이라면 누군가에게 말을 건낼 때에 거기에는 반드시 자기의 마음이 담겨져 있을 것입니다. 거짓된 마음을 가지고 착한 말을 하는 것을 우리는 위선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마음과 함께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을 우리는 거짓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겉과 밖이 다르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는 그의 마음이 담겨져 있고 그의 마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웃으며 말씀하시는데 속은 분노에 불타거나 슬퍼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하시면서 마음속으로는 즐거워하시는 이중적인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가슴에 기억하여야 합니다. 겉과 속이 하나이신 그 분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실 때에는 그 말씀을 통해서 당신 자신의 마음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십니다. 성령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 분의 마음을 전수받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았다고 할 수 없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마음도 함께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는 젖을 사모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깨달아 질 때에 거룩한 사랑의 감화를 불러일으키고 이것은 항상 우리에게 우리의 육체에 속한 욕심을 버릴 수 있는 힘을 공급해주고 형제의 명백한 오류와 잘못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형제의 잘못과 오류를 용납하게 만들어 주는 허물을 품는 힘을 공급해줍니다. 왜냐하면 이 은혜의 힘은 곧 사랑의 능력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그리고 은혜의 능력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A. 순전하고 신령한 말씀
이 말씀을 오늘 성경은 순전하고 신령한 말씀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신령하다라고 하는 것은 영적이고 정신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육체에는 육체에 어울리는 양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체는 물질에 속해 있기 때문에 물질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물질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흩어져 있는 물질들이 합해질 때에는 에너지를 뺏아가고 그리고 하나인 물체들이 나뉠 때에는 에너지를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음식들이 우리의 몸에 들어가 작게 분해될 때에 그것이 흡수되고 에너지가 발생합니다. 물질은 물질인 몸의 에너지를 가져다주고 신비한 방식으로 이것은 우리의 정신과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육체적으로 힘들고 배고프고 목마르면 정신도 혼미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이렇게 물질에 속한 것을 양식으로 삼게 되듯이 우리의 영혼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자원을 섭취함으로써 건강을 유지하게 되고 우리의 영혼이 그렇게 건강을 유지하게 될 때에 우리는 육체의 일을 버릴 뿐 아니라 형제의 허물을 은혜의 힘으로 용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이런 일들을 하나님의 말씀이 합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말씀은 일평생 원수된 자의 잘못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하게 하여줄 뿐만 아니라 또 우리들이 일생을 살면서 맺는 그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의 많은 허물들을 용납하고 사랑으로 품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교회가 몸인 교회 전체에 이러한 사랑이 가득하게 될 때에 그것은 마치 저항력이 충분히 있는, 면역력이 충만한 그런 인간의 육체와 같습니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위한 신령한 양식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가 ‘순전한’ 이라고 한 이 표현을 덧붙인 것은 순수한 사랑의 힘과 순수한 은혜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과 어떻게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감흥이나 감동을 주는 것은 진리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전혀 아닌, 심지어는 오류와 악도 우리에게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도 악인들이 죄를 짓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감동, 감흥 그리고 능력과는 현저히 다른 것입니다.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게 만들고 그 사랑으로 일치를 이룰 수 있도록 우리를 바꾸어 줍니다. 그래서 이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은 영혼은 순수한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를 기뻐하고 다른 사람에게 이 진리를 나누어 주고 싶어하고 그리고 진리의 힘으로 오류를 극복하고자 하는 용기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이러한 사랑 안에서 일치를 이룰 때에 교회는 공동체적으로 끊임없이 육에 속한 것을 버리면서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에 지체들의 허물과 잘못을 용서하고 품을 수 있는 사랑의 능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큰 사랑에 감화를 받으며 그리고 그 십자가의 사랑에 감동을 받고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을 자신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시고 또 여기까지 인도하셨는지를 가슴에 새길 때 그는 육체의 힘만으로는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전하고 신령한 감화를 받을 때에 교회는 일치한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사랑의 힘은 은혜에서 비롯되고 교회의 충만한 이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성도 개개인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신자 각 사람 사람을 갓난아이처럼 가슴에 품고 그리고 어머니와 같은 교회의 품에서 그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먹으며 그렇게 은혜의 힘으로 지체들의 허물과 잘못을 용서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에 일치를 이루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런 모든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을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버리면서 또 한 편으로는 갓난아이들 같이 이 하나님의 말씀의 젖을 사모하도록 성도들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B. 갓난아이들 같이
(예화)아이를 갓 낳아서 불과 몇 분이 흐르지 않았는데 그 아이에게 젖을 물리면 아이는 누구에게 배운 적도 없는데 그 젖을 빱니다. 그건 동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아지를 길러보면 강아지가 태어납니다. 그러면 아직 젖어서 눈도 뜨지 못하는데 그 코로 엄마젖의 냄새를 맡으며 글로 기어갑니다. 그리고는 그 젖을 빱니다. 근데 이제 저희도 개를 길러 봤는데 참 사랑스럽습니다. 근데 이 개가 죽는 것이 하도 안타까워서 안 기르기 시작해서 이제는 개를 기를 수 있는 형편도 안 되잖아요. 아파트에서. 근데 참 재미있는 게 개가 새끼를 낳는데 작게 낳으면 4, 5마리 많이 낳으면 우리 기를 때 8마리까지 새끼를 납니다. 그러면 이제 개가, 어미개가 젖이 가슴 위쪽서부터 배 아래까지 달려있어요. 근데 이 위에 있는 젖은 거의 장식입니다. 젖이 안 나와. 그리고 이 밑에 쭉 달려있어서 밑에 달린 이 젖이 가장 실합니다. 그런데 처음 태어나는 순간 이 강아지들이 끙끙거리면서 이 엄마젖을 찾아 가잖아요. 태어날 때는 개가 부실한 놈이 없지는 않지만 거의 비슷비슷하게 태어나요. 근데 이제 이 놈들이 끙끙거리며 엄마 젖을 물어 근데 어느 젖을 차지하나에 의해 이게 강아지들의 성장과 발육을 절대적으로 좌우합니다. 그래서 이제 갑니다. 그리고 이제 빨기 시작합니다. 실한 젖을 물은 놈은 하루가 다르게 커져요. 우리 아이들이 신생아 때 하루에 20g씩 아이들이 커져요. 열흘이면 200g입니다. 백일이면 2kg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젖이 콸콸 나오는 그 아래 있는 젖을 물은 강아지는 한 일주일만 먹고 나면 현저하게 발육이 좋아져서 1주일 지나면 눈도 뜨거든요. 한 3일 만에 눈뜨니까 그러면 옆에 있는 강아지들이 혹시라도 그걸 먹으려고 하면 완력으로 물리치고 자기가 그걸 차지해요 그래서 이제 좋은 젖을 물은 놈들은 처음에는 우연히 그랬을지 모르는데 시간이 지나면서는 점점 몸집이 커지고 실해져서 이제 힘으로 밀쳐내요. 그러면 이제 저희 할머님이 이놈을 강제로 떼어내요. 그래서 골고루 기회를 주시는데 만약에 그러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발육이 현저히 틀려집니다. 눈에 보여요 매일매일. 그래서 그걸 생각하면 성도들도 똑같애. 교회라고 하는 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젖 삼아 먹는데 그것을 잘 섭취하고 풍부하게 섭취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먹으면서 신앙이 아주 놀랍게 자라서 이쪽 위쪽에 붙어 있는 젖 같은 거, 한 8마리씩 낳아가지고 정 안되면 할 수 없이 위에 있는 젖 물잖아요. 그러면 나오지도 않아요. 손으로 짜도 겨우 찔끔찔끔 나올까 말까해요 유량이 절반도 안 돼. 그러니 그걸 먹고 주인이 배려를 해주니까 그렇지 야생의 상태에서는 지들끼리 산다면 그건 결국 저항력도 없고 체력도 안 되서 결국은 죽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죽고 사는 문제라 이것입니다. 갓난아이들은 엄마 품에서 젖을 막 파고 들 때에 그거이상 바라는 것이 없어요. 그 아이들에게는 훌륭한 집, 장래가 보장된 직장, 그 다음에 무슨 아름다운 장신구, 장난감 필요 없습니다. 그건 다 컸을 때 얘기죠 그래서 여기서 ‘어린 아이같이,어린 아이들 같이’라고 하는 그 말은 뭐냐 하면 얼마나 성도들이 육체의 일을 버리면서 끊임없이 성장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실한 사모함이 있어야 되겠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기 위해서 온 마음을 바쳐서 그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섭취하는 일에 마음을 쏟을 때 형제의 허물을 품을 수 있는 사랑의 힘이 그 은혜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는 큰 능력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종종 역사 속에서 원수까지 용서했던 사람들의 큰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것이 결국은 그 사람 자신의 위대함이라기보다는 그의 마음을 움직였던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죄인들이 모여 있는 교회가 이렇게 끊임없이 성도들이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을 사모함으로써 영적인 성숙의 길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C. 영적 성숙의 길
여기에서 말하는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한 이 말씀은 성화를 통해서 우리가 지복의 상태에 계신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그런 의미에서의 또 다른 성화의 구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주님의 형상을 교회 전체가 회복해 감으로써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닮은 것만큼 교회 전체가 공동체적으로 예수를 닮은 교회 공동체가 되는 것인데 바로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렇게 불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예화) 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걸렸으면서도 두려워하는 질병 중에 하나가 아마 간염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간염은 정말 조심해야됩니다. 목회하다 보면 간염 때문에 갑자기 사망하는 사람들을 아주 많이 봤어요. 그래서 이런 간염 중에서도 특별히 우리들이 B형 간염을 경계하는 이유는 이 간염이 급성으로 번지면 간염으로도 죽지만 급성으로 번지지 않아서 만성이 되면 이 간염은 이제 간염 보균 상태는 만성 간염으로 발전을 하고 그리고 발현된 간염은 간경화, 그리고 간암 등에 이르게 하는 순서를 밟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B형 간염 말고 A형 간염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런데 이 A형 간염은 예방주사만 몇 번 잘 맞아도 걸리지 않을 수 있는 병인데 이 병이 나이 든 남자들에게서는 발견이 잘 안되고 젊은 사람들에게서 발견이 된대요.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이것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너무 깨끗한 환경에 살기 시작하면서 생기는 병이랍니다. 그래서 40대 50대 60대된 사람들은 이런 A형 간염에 걸린 사람들이 거의 안 나타나고 병원을 찾는 사람들의 90%가량이 10대와 20대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예전에 우리는 지저분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다른 병에 걸려서 또 죽었을 수도 있지만 이 A형 간염과 관련해서는 우리들이 이 질병의 균을 그저 부지불식간에 접촉하고 우리의 몸이 그것을 이겨서 항체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지금 20대,10대 아이들은 그래도 환경이 좋은 데서 태어났기 때문에 부모들이 균에 대해서 우리나라처럼 예민한 나라가 없어요. 거의 멸균 상태에서 아이들을 길러요. 근데 그게 절대 좋은 게 아닙니다. 아이들은 흙바닥에서 가끔 흙도 집어 먹고 지저분한 데서 손도 좀 뭐가 묻어있고 이런 게 좋은 것이지 거의 멸균 상태에서 생활하니까 이러다가 해외여행 같은 것을 해서 덜컥 걸리면 몸이 아무런 방비도 못한 채 이제 그 질병에 감염이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어떤 형제의 허물과 잘못은 교회에 해로운 것이고 그리고 교회에는 그것이 악한 것이겠죠. 그렇지만 만약에 하나님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악한 것도 선한 것으로 바꾸어서 결국은 당신의 목적을 이루시게 하실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종종 교회에 형제들의 허물과 잘못 때문에 그것을 통해서 주님의 교회를 오히려 더 올바르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좋은 것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아니하고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도 좋은 것을 주시는 것처럼 또한 동일하게 교회에도 좋은 것을 통해서도 좋은 것을 주시지만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도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형제의 허물과 과오는 나쁜 것이지만 그것을 지체들이 사랑의 힘으로 품고 은혜의 힘으로 용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에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교회는 그 나쁜 것 때문에 오히려 더 좋은 것으로 하나님 앞에 받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영적인 성숙의 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게 혹은 개인에게 어떤 오류와 잘못이 있을 때에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다루고 나면 오히려 이런 오류와 잘못이 없었던 때보다도 더 순전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을 사모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우리에게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버리고 멀리 방탕하였다가 다시 돌아오게 되면 마음은 더러워졌는데도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의 소중함을 알고 그리고 진리의 가치를 새롭게 깨달아 알게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리워하고 사랑하게 되듯이 교회의 몸 전체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IV. 결론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형제의 잘못과 허물을 볼 때에 마음에 있는 악의로써 그것을 비방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이 형제들의 관계를 파괴하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오히려 끊임없이 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의 감화를 받고 사랑의 힘으로 은혜의 능력으로 이런 허물을 품음으로 자신은 아파도 자신의 아픔을 통해 자신도 온전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고 교회 전체도 온전한 교회의 성숙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바지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우리 모자라는 사람들을 각각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게 하신 거룩한 뜻입니다. 그리하여 영원히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험한 이 세상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양무리가 되어서 한 울타리 안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서로를 기대며 궁극적으로 우리의 양의 문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과하고 그분을 깊이 의존하는 가운데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의 힘으로 서로를 용납하면서 자기를 죽이는 훈련들을 끊임없이 경험합니다. 이로써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지를,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큰 능력인지를 오히려 우리는 경험하면서 형제의 허물을 품는 사랑의 힘으로 이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 한 사람 여러분이 한 편으로는 육체의 일을 끊임없이 버리고 한 편으로는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 아이처럼 간절히 사모하여 자신에게는 없는 하늘의 능력으로, 은혜의 힘으로 이런 허물들을 품으며 그리스도의 몸을 이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허물을 덮는 사랑 1
5.사랑으로 허물을 덮으며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7-8).
I. 본문해설
오늘 본문은 사도베드로가 흩어진 교회의 성도들에게 픽박과 시련을 앞둔 상황속에서 믿음을 굳게 지키며 살아가도록 권면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앞서서 믿음의 도리를 설명한 후에 이4장에서 구체적으로 성도로써 어떻게 이 마지막 떼를 살아가야할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라고 말합니다. 제일은 먼저 그는 우리보고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이 시대의 때를 알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II. 마지막 때가 가까움
이것은 명백하게 종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종말이라고 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있는 것이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없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종말조차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끝내시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완전하고 완성된 세계로 데려가시는 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이 보다 더 완전한 성화의 상태에 이르는 과정인 것처럼 세계도 역시 똑같이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이 세상에게는 이것은 분명한 종말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쌓아올려진 자신들의 가치와 모든 세계들이 파괴되고 하나님 앞에 심판 받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제일 먼저 외치신 말씀이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고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 말씀은 매우 생소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야말로 축복의 나라인데 그 나라가 오는 것이 마치 커다란 재앙이나 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회개하라고 엄중히 외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말미암아 도입되는 새로운 완성된 세계의 질서는 그 세계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무너트리는 것으로부터 시작 시작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을 때에 그 나라는 심판과 축복이 두 국면을 함께 가지고 있는데 너희 유대인들은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않으니 회개하여야만 그 나라가 너희에게 복된 나라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때부터 말세는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말세가운데 마지막 때를 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에 마지막 때에 특별히 말세에 맨 끝에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여러 차례 경고하셨습니다. 사도는 이렇게 만물의 마지막 때가 가까웠음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마지막 때에 그 끝날을 살고 있는데 사실 오늘날 우리 앞에 펼쳐지는 이 현실은 종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충분히 설득 시키고도 남을 정도의 증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곳곳에 일어나고 있는 전쟁의 소속은 물론이거니와 자연의 많은 재해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고 그리고 이런 것들은 불가항력적으로 우리를 강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무분별한 자연의 남용과 그리고 개발로 말미암아서 이제 이 지구는 병들고 심음하고 있습니다. 어떤 과학자들은 앞으로 천년 후인 주후 삼천년이 지구의 용도가 끝나는 말하자면 용도폐기 되는 시점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일단의 과학자들은 이때를 위해서 일류를 화성으로 옮길 그런 연구들을 하고 있습니다. 점점 더 이렇게 고갈 되가는 차원은 인류의 새로운 문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서 여전히 낙관하고 있습니다. 발달된 기술과 축척된 문명이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잇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과연 나날이 발전하는 인류과학기술의 진보는 눈부실 정도이고 심지어는 바닷물의 온도가 높아졌기 때문에 이런 기상이변이 온다고 하니까 일단의 사람들은 거대한 기구를 동원해서 삼천 미터 속에 있는 바닷물을 순환시켜서 이런 기상 이변들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합니다. 백번 양보해서 이런 모든 것들이 실현된다고 칩시다. 그래봐야 그 모든 것들은 물질의 문제에 국한된 문제의 해결일 뿐입니다. 이런 폭발적인 기술 문명의 발전과 도시화 산업화로 말미암아서 그리고 과학화 첨단화 정보화로 말미암아서 참된 인간성은 점점 비참하게 파괴되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젊은 날에 그 가치 업서는 일에 매몰시키면 미래가 매우 어둡다는 생각을 가슴에 깊이 새겨야 됩니다. 특히 컴퓨터게임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 앞에 죄라는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 자체의 한 행위는 죄가 아닐지 모르지만 그것은 우리의 삶을 매우 쓸모없게 만들어서 결국은 주님을 섬기라고 주신 우리의 인생을 낭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참 어린나이에 가족들 속에서 관계를 배우고 사회성을 익히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어떻게 다른 의견과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사랑으로 하모니를 이루면서 같은 목적을 향해서 갈 수 있는지를 터득 될 중요한 시기에 사람들이 그런데 코를 박고 시간을 낭비하고 정욕을 소비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입니다. 최근에 어느 학생이 엄마가 컴퓨터 게임 좀 그만 하라고 야단 좀 쳤더니 둔기로 엄마를 때려서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어요. 청소년 심리학자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 게임에 아주 몰두하게 되는 그 게임이 폭력적이잖아요. 그죠! 그러면 찔러죽이고 총 쏴서 죽이고 아니면 때려죽이고 심지어는 막 때리니까 골이 빠개져서 피가 흐르고 이러잖아요. 그런 것들을 가장 실감 있게 묘사 할 때에 그 게임을 만든 사람들이 대박을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엄청난 부를 축척하는데 그것이 얼마나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그렇게 게임에 몰두하게 되면 가상에서의 적과 현실 속에서의 적을 혼돈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내가 게임을 게임을 하려고 하는데 엄마가 게임하지 못하게 하니까 이 게임 속에 나오는 적군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쉽게 사람들을 그 가상의 세계 속에서 죽였기 때문에 그게 현실로 돌아올 때 현실과 가상 사이에 구분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모든 군인들은 사회에 적응 하는데 상당한 사간이 걸리고 그러한 치열한 전쟁가운데 싸우고 돌아온 80%는 모두 다 정신과 치료를 요구한다고 그래요 그게 말하는 전쟁 트라우마라는 거거든요 그래서 그런 게임 속에서 죽이고 하는 것들을 현실 속에서 나타나니깐 뭐 하루에도 몇천 명씩 죽였는데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질문명이 마지막 때가 다가올 때의 이사회와 세계가 처한 상황을 어느 정도 개선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정신과 영혼에 관한 것들은 더욱 해결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미국에서 있었던 일 세금을 너무 많이 거뒀다고 불만을 느끼면서 비행기를 몰고가서 충돌해서 죽어버렸잖아요. 미국에 있는 어느 교수는 심사에서 떨어 졌어요. 총을 가져와서 갈려버려서 여러 명을 죽여버렸어요. 그것도 여자교수가 이렇게 마지막 때가 되면 울분을 참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손해를 입었을 때에 잠시도 인내하지 못하는 일들이 되는데 이모든 상황들이 결국은 마지막 때에 우리의 정신과 영혼이 얼마나 피폐해질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마지막 때를 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균형 잡힌 생각을 가져야 하는 것이에요 저 미국에 메너나이트라는 교파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이런 문명들을 전면적으로 거부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자신들끼리 집단을 만들어서 100% 농경생활을 해요 그리고 문명의 이기를 다 거절해요 그리고 문명의 이기는 수의실 앞에 있는 공준전화기 하나만 나두고 나머지 다 거절하고 옛날 방법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거는 좋은 사회가 되리라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러면 잘못 살아가는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 없잖아요. 그러니깐 이것도 사실은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그 가르침에는 어울리는 삶이 아니에요 그러나 또 이세상속에 들어가서 똑같이 살면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는 커녕 이 세상의 영향력에 의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집에서는 어느 아이에게 올바로 교육 시킨다고 텔레비전을 아예 없애 버리고 컴퓨터도 안 사주는 집이 있거든요 그건 많이 잘못되고 있는 교육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아이 들이 그러니깐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경건하기만 하는 분위기 속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다니는 것도 그리 좋은 것도 아니야.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교육을 잘 받고 문을 열고 달라 그러니깐 지난주에 무균 애기 하다가 A형 간염 바이러스 애기까지 나왔잖아요. 그게 뭐냐면, 적당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기회사에 예수 믿는 사람만 뽑잖아요. 잘못하는 것입니다. 반듯이 자기들끼리 부패해져 버려 적당히 섞여야 돼 그리고 경우 따라서는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가끔은 뽑아야 돼. 그래가지고 그 사람들이 말하자면 바다 메기가 청어를 괴롭히듯 그 사람이 회사에서 사람들을 괴롭히고 해야 돼. 그래야지만 기도도하고 전도해야 되는 필요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이렇게 나오는 이유는 뭐냐 하면 직장에서 예수 안 믿는 사람들 하고 부딪히면서 내가 은혜가 떨어졌구나, 은혜 없는 사람들과 만나야지 자기가 은혜 떨어진 것을 알지 매일 은혜 받는 사람들끼리 모여 가지고 자기네들끼리 서로 짜다 그러고 자기네들끼리 서로 양이라 그러고 빛이라 그러고 그러면 그게 뭐가 되겠나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텔레비전도 보게 해주고 컴퓨터도 하게 그 대신 거기에 빠져들지 않도록 신아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만큼만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알고 그것을 극복하게끔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 때를 살면서 여러분은 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면서 이 모든 것들이 허무하고 허무하도다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 집에 가서 파출부나하고 걸레질이나 하고 수의노릇이나 하고 그 직업이 천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봉사하라는 것 그러면 아예 관계를 끊든지 그것 밖에는 없는 거야. 여전히 경쟁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 사람들은 비겁하게 경쟁하도 여러분은 정정당당하게 경쟁해서 그 모든 자원들이 하나님의 것이거든 그들이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여러분이 정정당당히 경쟁해서 그것들을 빼앗아야해. 그들의 속에 있으면 잘못 사용 될 이세상의 자원과 권력과 이런 것들을 여러분의 손에 넣어서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끔 재분배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을 위해서 여러분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서 여러분은 교육을 받고 있는 거고 그렇게 하라고 해서 여러분에게 재능과 그리고 실력들을 주신 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가지고 올바르게 살 때에 그 참 놀라운 하나님의 섬기는 일들을 하게 되는 거죠 독일의 있는 기업가운데 보쉐라는 기업이 있습니다. 그 기업은 자동차 부품만드는 회사로 유명하고 그것이외에도 굉장히 많은 재품들을 생산해요 굉장히 놀라운 기업입니다. 이익금을 전액 사회에 환원합니다. 절반이 아니라 100%를 그래서 사회기업입니다. 세계적으로 인정된 사회기업입니다. 그러면 어떤 놈은 재벌이 되어서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정치권에 돈 갖다 바치고 그 다음에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그 다음에 분식회계하고 돈 끌어 모아가지고 그 나쁜 짓하고 말이지 그렇게 살아가는 놈들한테 돈이 다 들어가면 그 나쁜 짓 하고 말이지 그런 사람들이 돈과 권력을 가지고 있을수록 이 세상은 병들고 고통하고 심음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부터 멀리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근데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원이 들어가서 그것들을 재분배 하게 될 때에 그때에 일반 은총적인 차원에서 이세상은 펼쳐지게 되고 특별은총적 차원에서 그 사람들이 만약에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양육하고 길들이는데 사용한다면 놀라운 일들이 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시대이든지 그리고 그 이후에 시대이든지 간에 그래서 이 세상에 권력을 가진 평신도들과 물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재산가인 평신도 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발전에 이바지 한 것은 역사 속에 들어나지 않지만 굉장히 많은 공헌을 하지요. 오늘날 평신도 들이 그런 짓에 대한 강력한 소원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심방가서 제일 꼴배기 싫은 게 뭐냐면 밥은 먹고 삽니다. 밥 먹으려고 사업을 하냐 당신이 식충이냐 그 사람이 살면서 꿈이 있어야지 더 겸손하면 입에 풀질은 합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그런 꿈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되는 거잖아요. 문화의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요. 문화도 생각해보세요. 문화도 사회에서 많이 일어나잖아요. 이 기술의 발전이 굉장합니다. 최근에 아바타를 봤어요. 이 보고 입체영화 3D로 봤어요. 처음으로 비슷한 거 옛날에 어렸을 때 본 기억이 나지만 대단하게 만들었다는 느낌을 받더라구요. 그 속에서 많은 문화코드를 저는 읽었습니다. 이젠 그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그랬어요. 집사람한테 나는 갈 생각이 없었는데 자꾸 가자구 그래. 나오면서 그랬어요. 여보 참 좋다. 근데, 싫다. 걱정이 됩니다. 저런 것들이 안방까지 들어오면 이제 온가족이 서로 얼굴도 안쳐다보고 안경 쓰고 그거나 들여다보고 앉았을 텐데, 참 걱정돼, 그러면서 이 현실 속에서 만족이 안 되고 불만을 느낀 사람들이 꾸역꾸역 그 속으로 들어가서 가상의 세계에서 만족을 누리고 이러는 것 쪽으로 가는데 앞으로 발전될 것은 저거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발전이 될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내 예고하는데 극장이 이제 저런 식으로 되는 게 아니라 맞춤형 극장으로 발전을 할 것입니다. 내가 딱 갔는데 이제 넌 무슨 영화를 보고 싶냐 물어보면 나사실 최근에 몇 년 동안 살면서 참 돈이 없어서 이 사람한테 무시당하고 저 사람한테 무시당했다. 그래! 그럼 너는 재벌되는 그 영화를 보여 주마, 그래서 가상공간 속에서 재벌이 되어가지고 사람들을 지배하는 그런 거 나이가 40이 다 되도록 장가를 못간 사람은 기가 막힌 킹카로 태어나서 수많은 여자들이 따라다니는 거런 영화 속으로 그런 식으로 발전할 거라고 나는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실세겨에서 전혀 꿈으로 품고 있던 것들이 거기에서 이루어져서 만족을 느낀 나머지 실질 세계에서 그것을 피 흘리면서 추구해 가야할 필요를 못 느끼는 쪽으로 문화가 발전 할 거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은 우리에게 기독교 신앙에 어떤 영향을 줄까요?
III. 종말을 바라보는 성도의 실천
마지막 때의 이런 풍조들은 모두 우리의 경건을 심각하게 앗아갈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엄중한 소명은 가상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현실이 하나님의 통치를 반영하는 세계로 변화되어야 하고 하나님 눈에 보이는 안 믿는 실제적인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변화되어서 실제적인 이 실제의 세계, 여러분이 요새 쓰는 말로 레알한 세계 속에서 저 사람들 지금 못 웃고 있잖아 그런 세계 속에서 실제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근데 마지막 때에는 이런 것들을 더 심각하게 일어나서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야 할 가장 큰 본분이 되는 삶이 충실하지 못하도록 가로 막는 세대가 된다는 것이에요 오늘날 사도는 그런 것들을 대비하면서ㅓ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두 가지로 말하는데 하나는 기도의 생활이고 또 하나는 사랑의 생활이에요 사도가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희랍어 성경을 보면 기도에 이르도록 정신을 차리고 근신을 하여 라고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정신 차린다고 하는 것은 뭐냐면 술을 먹거나 약에 취해서 이성을 상당부분 상실한 상태가 아닌 맑은 정신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맑은 정신이 되는 것이 마지막 때에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문화들을 객관적으로 보고 읽어서 그 속의 약의 요소와 독의 요소를 분간할 수 있는 신학적인 안목을 같을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내가 항상 애기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합니다. 열심히...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맑은 정신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신을 차리고 기도에 이르도록 근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근신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현대에서는 방종의 위협으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맑은 이성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통찰하고 진리의 빛 아래서 자신을 비춰보는 삶을 사는 데신 감각으로 흐르게 되지 않습니까? 감각으로 가득 찬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감각에 빠져서 감각에 의해서 감각에 휘둘려서 살아가는 삶을 사니깐 정신을 차릴 수가 없고 감각에 휘둘리게 될 때에 결국 삶은 방종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재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방종에 휘둘리게 되면 결국은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기도하면서 살수 가 없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40전에 여러분이 거의 태어나지 않을 지도 모르죠. 40년 전에 우리는 엄청나게 가난했습니다. 그 무대를 만들어 놓고 만약에 여러분을 거기에다가 보름만 넣어 집어 넣어 두면 죽겠다고 아마 아우성 칠 것입니다. 그럴 정도로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가난하고 비참했기 때문에 지금 전세를 다녀서 그때에 우리나가 겪은 가난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나라는 거의 안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아프리카까지 가면 모를까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닐 것입니다. 국민소득이 백 달라 미만이었으니깐. 생각해보십시오. 장정남자가 먹여만 주면 하루 종일 노동을 제공한 시대였어요. 그런 속에서 40년 동안에 기적적인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이렇게 짧은 시간 정확하게 말하면 30년 어간에 민주화도 이정도 이룩하고 경제발전도 이룩한 나라 없어요. 전쟁이 끝나고 모두 폐허가 되어서 아무 물자도 남아있지 않고 자원도 없는 상태에서 이 나라가 이 만큼 발전하게 된 것은 거의 기적이고 반 토막 난 나라가 세계지도를 펴놓고 보면 손톱만한 나라가 몸부림을 쳐서 세계 십대 무역국 안에 들었다고 하는 것도 그건 세계사에 흔히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 모든 축복들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중심에는 교회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겁니다. 20년 전 40년 전 거슬러 올라가면 정말 교회마다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70년대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서 엑스플로를 인도했던 빌리그리암 목사님은 미국에 돌아가자마자 한국에서 받은 그 감격적인 인상을 이렇게 전했어요.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교회의 종소리로 새벽을 맞이하고 교회마다 가득 모인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 속에서 대한민국의 아침은 밝아옵니다. 사실이었습니다.
A. 기도의 생활
(예화) 옛날에는 4시까지 통금이 있었습니다. 12시부터 4시까지는 다니다가 걸리면 경찰서에서 밤을 세우고, 문제가 없을 때에는 밤을 세우고 4시에 풀어주고 문제가 있으면 며칠 구류도 살고 그랬어요. 군인이 만약에 걸리면 장군 될 사람들도 옷을 벗어야 될 정도로 특히 공무원들은 엄격했었습니다. 통금할 수 가 없었습니다. 위반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가난해서 시계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니깐 교회에서 4시까지 통금인데 4시5분에 종을 쳐요 일어나라고 새벽기도 갈려면 준비해라 그 뜻이고, 초종이라고 합니다. 25분에 재종을 쳐요. 곧 예배가 시작된다. 그리고 4시 반에 새벽기도가 시작됩니다. 이런 현상은 시골에서는 더 했습니다. 시골은 아예 시계가 집집마다 없으니까 교회종소리 듣고 아 4시 넘었구나. 밭일하러가야지. 그러고 시골사람들이 일어나서 밭일을 하고 그러고 밭일 좀 하다가 돌아와서 밥 먹고 소죽도 끓이고 다시 일하러 오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새벽종소리가 울리는 것입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일어나서 새벽일을 하러 나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땅을 파도 해가 안 뜨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깐 교회사찰이 자다가 한 시 반에 일어나서 새벽종을 울린 것입니다.
근데 정말 기도 많이 했어요. 간절하게. 그때는 새벽기도 나오는 것이 그저 신앙생활의 일부처럼 여겨져서 그래서 밤늦게 까지 행상을 하고 방직공장 다니고 그렇게 고단하게 살면서도 그 새벽 기도하러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거기서 자신의 마음을 다 쏟아놓으면서 회개하고 설움도 쏟아놓고 거기서 하나님께 소망이 없고 하는 그런 기도생활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교회가 오늘날과 같이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세월은 흘러서 이제 물질적으로 매우 부요하게 되었고 전 세계 어디가도 우리보다 부자인 나라는 많지만 우리처럼 이렇게 아낌없이 그 물질들을 소비하고 사는 나라도 그렇게 많지 않아요 우리는 부자도 별거 아니면서 티를 많이 내는 나라에 속합니다. 전 세계를 다녀도 밤에 이 이렇게 휘양 찬란한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뉴욕을 가도 이렇지 않아요.
이러한 물질문명을 누리면서 교회는 점점 기도가 약해지고 있습니다. 이게 결국은 물질문명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 시대에 정신에 의해서 교회가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누가 감히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일들은 점점 더 심해질 것이라고 보고 사람들은 점점 감각적이 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이런 속에서 더 치열한 경쟁들이 도입될 것이고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아마 이 세상은 더 많은 것을 여러분에게 요구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회의 직장은 거의 종교화 되어가고 있지요. 그리서 회사에 어떻게 한번 취직하면 회사가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것은 일주일에 40시시간의 근무가 아니라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회사를 사랑하고 또한 둘째도 이와 같으니 사장을 공경할지라.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나마 기회를 얻는 사람들은 정말 복된 사람들입니다. 이런 무한한 경쟁 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형편들이 앞으로 더 심각해 질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날에 언제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고 기도하며 살려고 할 때에 이 세상에 환경이 우리를 도와주는 좋은 때는 없다 고하는 사실을 기억을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찌하든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살아야 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에 당신 스스로 기도의 모본을 보이심으로써 마지막 때를 사는 성도의 삶을 위한 은혜의 차원이 어디로부터 획득되는 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바쁘지만 수시로 틈을 내어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붓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쁜 일과 속에도 수시로 마음을 들어 하늘을 향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여러분의 영혼은 영적인 순발력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야지만, 이 시대 속에서 살면서 여러분이 시대에 물들지 아니하고 오히려 이 시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모하는 나라는 세상의 나라가 아니라 이 땅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나라를 점령하는 것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위에 세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공부도 열심하고 사업도 열심하고 직장도 열심히 다니고 하다못해 어디 가서 아르바이트를 해도 여러분이 사라지고 나면 절실하게 여러분을 필요로 하는 그런 존재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런 빛된 삶을 살게 할 수 있는 모든 힘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온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위해서 여러분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야 합니다. 24시간 중에 마음을 쏟아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일주일 동안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는 때가 얼마나 됩니까? 여러분이 하루를 맞이하고 일 앞에 서기 전에 먼저 마음을 쏟아 붓는 기도 속에서 하늘 이슬로 여러분의 영혼이 충분히 젖어드는 가운데 하루를 맞이하고 있습니까. 그런 날들이 여러분 한 달의 시간 속에 얼마나 되는지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매일매일 패배의 익숙해진 삶은 바로 이렇게 그의 삶의 뿌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거룩함과 기도의 뿌리를 내리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지난주간에도 저녁때에 기도하러 교회 몇 번나왔습니다. 진짜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저녁시간에 와서 그렇게들 여기저기서 엎드려서 기도하더라고요. 그런 세계를 모든 성도들이 가져야 합니다. 저희 교회가 최근 몇 달 동안에 많은 성도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 것입니까! 지금도 이 세상에는 방황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한명씩 두 명씩 교회에 찾아와서 이렇게 앉기가 좁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정말 중요한 일은 주일날 예배드리기 위해서 모이는 사람들의 수요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에서 혹은 여러분의 가정에서 어디에서든지 주님의 얼굴을 구하며 마음을 쏟아 부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의 연합이 아닐까요. 그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마음을 쏟아 부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근심과 걱정은 우리의 마음을 찢어놓지만, 기도는 우리의 흩어진 마음 조각난 우리의 정신을 하나로 모아 하나님을 향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정신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 한분을 향하게 될 때. 거기에는 어마어마한 영적인 에너지가 나오는 것이고 이런 것들이 다양성속에서 교회 안에서 하나의 일치를 이루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엄청나게 놀라운 일들을 교회를 위해 행하시고 선교지에 이 일들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없이 이루어지는 여러분의 삶은 뿌리가 잘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에 살아갈 때에 여러분은 기도하는 세계에 있어서 불신자들과 구별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경건의 능력은 없고 말에만 능 하는 말쟁이들과는 다른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더 많은 시간을 무릎을 꿇으십시오. 시간을 정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으십시오. 염려와 근심으로 마음을 녹이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여러분의 심령을 녹여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새로운 사람으로 빚으셔서 당신의 나라에 합당한 승리를 여러분의 삶속에 매일매일 안겨주실 것입니다. 믿고 기도에 헌신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B. 사랑의 생활
사도는 마지막으로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할 또 한 가지의 삶을 제시하고 있는데 사랑의 생활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고 말입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이 부분이 분사구문으로 되어있습니다. 즉 열렬한 사랑을 서로에대해서 가지면서 정신을 차리면서 근신하여 기도하라 왜냐하면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을 하는 그것이 마지막 때에 우리들이 해야 하는 일이다. 라고 마지막 때의 특징은 아주 열렬한 자기사랑이에요 객관적인 도덕의 체계들을 거의 거부하고 이제는 자기의 눈에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선이고 그리고 우리 각자는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우리 각자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행복에 방해가 되든지 혹은 거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가차 없이 처단해서라도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들은 철저하게 무시되고 이제 이렇게 감각적인 세계 속에서 극도의 자기사랑에 치우친 채 살아가기 때문에 이세상은 점점 더 고통스러워 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한번 마음에 상처를 받으면 좀처럼 풀지 않고 원수처럼 가슴에 그것을 쌓아두며 살아갑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은 한 시대에 정신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복음 이외에는 이런 사람들의 마음들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예화) 며칠 전에 병원에 가서 신문을 읽었는데, 신문에는 마음에 묻어둔 힘든 이야기를 편지로 털어놓으면 육필로 쓴 편지를 그대로 인쇄해서 신문에 실어주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근데 어떤 사람이 썼어요. 남성인지 여성인지는 구별이 안 되는데, 여성일수도 있고 느낌상으로는 결혼을 안 한 사람 같았어요. 많으면 20대 후반정도 되지 않았을까 지기 가정사에 있는 일을 편지로 쓴 것입니다. 아버님께, 이런 날은 당신 아버님이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어렸을 때에 우리를 참 힘들게 했습니다. 우리에게 폭언과 폭력을 일삼았고 우리 보는 앞에서 엄마에게 손지검을 하기도 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당신은 이제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고 계십니다. 대놓고는 말씀 안하지만, 제가 자주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섭섭하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우회적인 말로 당신의 섭섭한 마음을 나에게 말씀하시기도 하시지요. 그러나 아버지 나는 가끔 외치고 싶습니다. 당신은 개새끼라고 말입니다. 당신은 이제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편하게 살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어린 날 당신이 준 상처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제 모든 세월이 지나가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당신의 그 아름다운 식구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엿 먹으세요.
그 편지를 읽는 데 가슴속에서 눈물이 확 쏟아지더라구요. 뭐냐면 그런 젊은이들을 교회에서 수없이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그 아버지 못지않게 그 자녀는 불행한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가 잘못했죠. 그렇지만 그 아버지가 행한 것보다도 더 나쁜 것이 그 사람 속에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 남았는데, 근데 그게 세월이 흐른다고 사라지겠어요. 제가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 작년에 가정시리즈를 설교하는데 예배시간에 50대 중반이 훨씬 더 넘어보이는 어느 성도님 한분이 비서실 문을 열고 들어오셨어요. 약속도 없이 불쑥 들어오셨어요. 들어오자마자 막 우시는 것입니다. 50대 중반이 넘으셔서 60이 다돼가는데 막 우시는 것입니다. 왜 그러세요 그랬더니 목사님,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제가 우리 부모님을 용서했습니다. 왜요 저를 낳은지 일주일 만에 우리 부모님이 저를 버렸습니다.
60년 가까운 세월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절대로 치료 안돼요. 마지막 때가 될수록 진짜 이 복음 절실하게 이모든 인간들에 대해서 마지막 유일한 희망이 돼.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올바르게 전해야 할 교회가 그 복음의 실제를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복음은 절실하게 필요로 하면서도 교회는 필요가 없어지는 그런 시대가 될 거라고 경고를 받고 있는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뭐냐 하면 이마지 막 때에 이 세상 사람들이 절실하게 필요로 할 복음의 실제들을 우리들이 그대로 구연해서 우리들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살아가는 그 진정한 참된 복의 실제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최고의 섬김입니다. 그래서 참된 교회가 되는 것 참된 신자가 되어서 복음의 진정한 실제를 그대로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만 해도 그건 우렁찬 선포가 되는 거죠 그런 가장 중요한 실제가 뭐냐 하면 사랑의 삶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쉽게 원수 맺고 한번 원한을 맺으면 절대 풀지 않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몸에 접 붙혀진 지체들로 부르셨어요. 맨 처음 하나님이 일류를 창조하실 때 주님의 마음에는 그 태어날 모든 인류들이 동시에 한꺼번에 현재적으로 하나님 마음에 있었고 그것들은 하나님이 구상하시는 하나의 몸이에요 그 몸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안에 일어나는 인간의 이모든 분쟁과 고통은 하나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고통입니다. 이것을 치료하기위해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외아들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의 입혀 보내셨는데 몸을 치료하기 위한 약으로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 이셨지만 필연적으로 인간의 몸의 일부로 태어나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망가진 이 모든 인류의 몸을 치료하기위해서 결국은 하나님이 그 몸을 그 몸을 치료할 몸 안에 몸을 만드셨으니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이세상이라는 몸과 구별되고 그래서 이세상의 몸속에 주님이 구원하실 자들을 모두 모으셔서 하나로 만드신 후 그리고 모든 것들을 종말 속에서 구별되게 하셔서 심판으로 그리고 참된 영광으로 이르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몸이 이세사의 인류의 몸과 일치를 이루는 세계의 완성을 가지고 오실 것인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머리가 되신 상태에요 그때까지 이교회는 세상 속에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아니하고 교회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고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나 교회 안에도 여전히 세상이 있으니 여전히 죄의 본성이 남아있어서 그래서 여전히 교회 속에서 분쟁과 다툼이 있고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는 오류들이 섞여있어서 교회의 몸은 끊임없이 다양한 인간의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교회의 몸인 그리스도에게 두 가지를 실행하도록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나눔과 용서에요. 그래서 우리 각자가 하나님께로 받은 많은 유형 무형의 자원들을 그것을 나를 통해 주신 것들을 내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수여하신 것이라고 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내게 주신 그 자원들이 흘러가도록 개방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나눔의 정신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고 그 모든 하나님의 주신 자원들이 자원에 대해서 내가 최종적인 종착역이 되려고 할 때에 그때에 그는 그 하나님이 주신 자원과 함께 부패하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물질이면 물질과 함께 부패하고 권력이면 부패하고 그리고 심지어 지식이면 지식과 함께 재능이면 재능과 함께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가까이 있는 우리의 지체들과 나누고 멀리는 이 지체들과 나누는 것들이 나를 통해 이 지체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상에 까지 흘러들어나 나누어지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눔입니다. 쉐어링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또 하나의 사명은 용서에요. 여전히 교회 안에서는 이런 이기심의 잔재가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것들이 끊임없이 분쟁을 일으키고 이해관개가 얽혀서 서로 미워하게 되고 원망하게 될 때에 그때에 그 속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영혼에 대한 무관심과 자기 사랑 때문이 일어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어떤 사랑을 베푸셔서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게 하셨고 자신의 살아가고 있는 이생명과 사랑의 삶의 실재가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끊임없이 선물로 거저 주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 때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내게 주신 이모든 것들은 흘러가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자기를 중심에 세우고 자기를 실현하라고 가르치고 이것이 행복에 이르는 비결이라고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지만 우리는 오히려 교회 속에서 정반대의 복음의 도리를 만나게 되는 거죠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주님이 나를 통해 보내고자 하시는 그 물질의 흐름과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들의 흐름을 위해서 한 통로로 하나님 앞에 택함을 받았을 뿐이다. 나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자원의 최종적인 종착역일 수가 없다 라고 생각하며 자기를 포기하는 그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지목에 가깝게 다가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자신이 영원한 복이신데 그 안에 있는 참된 만족과 복은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함께 누려지도록 허락하시는 그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에게로 부터 시작이 되어서 그리고 인간에게 이모든 사물들을 거쳐서 당신 자신에게로 회기 하게 되는 것이니 만약에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를 버리고 자기의 사는 것이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따라 그리스도와 그리고 형제들과 이웃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 속에 흘러들어가는 그 사랑은 하나님에게만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받고 흘러가는 모든 사람에게 만족을 주는 것입니다. 영혼을 가진 인간으로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고독할 수가 있습니다만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해도 오히려 한사람이라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도 않고 그는 오히려 영혼을 향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우리를 하나님이 구원해 주셔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히신 것, 그리고 우리에게 우리를 아프게 하는 많은 이웃들을 우리 곁에 두신 것 상처받고 원한에 맺힌 사람들 속에서 관계를 맺고 가족으로 교회의 지체로 살아가게 하신 그 이유는 그들을 보듬고 주님이 내게 주신 그 은혜를 나를 위해 사용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나를 포기하고 내가 그들의 행복에 이바지 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입니다. 그 많은 은혜 진리의 빛 은혜의 불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많은 감동들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리신 것처럼 너도 너를 버리고 나를 흘려보내는 자가되게 하라고 우리에게 주신 은혜들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에게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신 그 아버지의 사랑을 입었습니다. 주님의 그 충만한 사랑을 입되 아들은 자신이 그것을 누림에 있어 종착역이라고 믿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다 찢으시고 아버지의 그 사랑을 이 세상에 흘려보내셨고, 그렇기 때문에 그분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우리가 이렇게 많은 또 하나의 밀알이 된 것입니다. 주님의 원하시는 나라는 이렇게 그리스도가 한 알의 밀알로 썩어져 맺은 또 다른 밀알인 우리들이 그리스도처럼 바람에 날리고 농부에 손에 뿌려져 또 하나 썩어서 사라지는 밀알이 되는 것입니다. 난 괜찮습니다. 난 아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나의 형제들 나의 가족들 나의 이웃들 그들이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들로 누릴 수 있다면, 나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이런 고백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IV. 결론 : 사랑으로 허물을 덮으라
몸은 이시간과 공간속에 어면한 현실과 함께 살아도 우리의 마음과 정신은 종말을 통해 도입될 완성된 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종말과 완성의 빛 아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볼수 있는 지혜와 총명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세상의 그 누구도 자기를 위해 살므로 행복해 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있고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와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구속받았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인생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안 이후에는 덤으로 사는 인생인 것을 고백을 해야 합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는 사랑을 십는 도구가 되고 상처가 있는 곳에서는 용서를 베푸는 도구들이 되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희생해야하는 비용이 아무리 커도 그것을 너무 큰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둠속에서 살던 우리가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의 빛 아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았을 때에 이후의 우리의 모든 인생은 주님 앞에 바쳐진 덤으로 사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매일매일 맞닥뜨리는 이세상의 분요함과 그 수많은 물질의 유혹과 표상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그네와 같이 순례자와 같이 이 세상을 잠시 지나는 영원한 성도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이세상이 끊임 없이 우리의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만들고 우리를 방종하게 살라고 해도 우리가 기도하는 한 이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연약한 성도라 할지라고 그가 마음을 쏟으며 무릎을 꿇을 때 하나님이 그 사람과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주님으로 가득 채우십시오. 무릎을 꿇고 그대들의 마음을 우리 주님 앞에 쏟아 놓으십시오.
(찬양)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여 재물되실 때.
우리를 위해 고난 당하신 그 십자가의 고난을 마음에 가득 채우고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강도처럼 당신 곁에 바로 부르지 아니하시고 이 땅에 남겨놓으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그의 남은 고난을 나의 육체에 채우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다해서 자기를 허비하고 또 허비해 사랑하는 성도들과 이세상의 영혼들에게 유익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이세상은 악해도 우리는 이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믿음으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6. 용서하는 마음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0-32)
I. 본문해설
에베소서는 사도바울이 쓴 가장 위대한 서신서중 하나입니다. 사도의 신앙이 원숙해진 말년에 장엄한 필체로 이 에베소서를 써내려 갔습니다. 이 에베소서 1장부터 3장 까지 사도는 우주와 교회와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에 대해서 장엄한 필체로 하나님의 설계를 보였었습니다. 그 후에 4장에 와서 사도는 갑자기 초점을 이동하여 교회내부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우주에 대한 계획과 교회의 설립의 관한 계획은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결국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를 통해서 교회를 살펴보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렇게 하나님의 우주적인 완성을 이루어갈 도구가 될 교회를 내부적으로 들여다 보면서 그 안에서 성도들이 어떻게 그 교회의 설립목적에 맞게끔 살아갈지를 4장에서 지체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상세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으로 4장의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함께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진심으로 용서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용서해야할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사도는 바로 이 우주론적인 맥락을 가지고 30절과 31절에서 상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한사람 한사람이 구원을 받은 것은 공동체적 사건입니다. 저의 설명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후에 일어날 모든 일어날 모든 일들의 계획을 이미 가지고 계셨겠죠. 그래서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죠. 이 세계를 창조하신 계획도 그분 안에 있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류를 창조를 위한 계획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인간이 타락할 것이라는 계획도 하나님 안에 이미 있었겠죠. 주님이 타락시킨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타락할 것을 하나님은 이미 아셨죠. 그리고 교회에 대한 계획도 있으셨겠죠. 날마다 하나님이 아무렇게나 사람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깊은 예정과 작정에 따라서 만물을 움직이시고 사람을 태어나게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 마음 안에 이미 교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생각 안에서 접혔던 것들이 시간과 공간속에 펼쳐지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들이 들어날 때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고 회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한사람의 회심은 인생 속에서 우연이 일어난 일 같지만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 안에 영원 전부터 있었던 계획이 그 사람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실현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니깐 우리는 이미 구원받기 전에도 어떤 의미에서는 영원 전에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받고 그리스도와 상관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영원으로부터의 칭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시간 속에서 우리의 회심을 통해 중생을 통해 전개되어 나아가는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혀졌지만 그렇게 접붙혀지기로 영원 전부터 예정된 것이 구체적으로 실현 되어가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것도 사실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영원한 작성의 성취에 불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부터 받는 모든 칭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그 영원한 칭의가 현실적으로 성취되는 것이에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습니다. 어떤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한없이 부족한데도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낄 때도 있고, 또 때로는 심지어 우리가 악을 행하는 데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변함없는 사랑으로 자비롭게 대해주신다고 하는 것을 고백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우리에게 집적 주어지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게 물 붇듯 부어주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로써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몸을 사랑하시는 그분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창조하셔서 모든 인간들을 바로 그 성령의 사랑 안에서 하나로 묻으려고 하셨던 것처럼 이제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든 질서가 깨어진 이 세상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 교회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일을 이루셨고 이렇게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몸이 충만한 하나님 생명의 교통으로 사랑가운데 서로 연결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순절에 교회에 부어진 하나님의 성령입니다. 오순절에 부어진 성령의 역사는 단순한 부흥의 역사가 아닙니다. 이 성령의 역사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마태와 이런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주님께 성령을 받은 사건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게 온전한 사랑의 일치를 이루며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부어주신 사건이고 오늘우리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접붙인바 될 때에 오순절에 부어진 그 성령에 세례에 우리들이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그 성령은 우리 안에 영원이 떠나지 않고 내주하시는데 이성령의 내주하심은 우리 개개인에게 내주하심이라기보다는 이미 교회에 내주하시는 성령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인 몸인 교회에 접붙여져 참여했기 때문에 성령의 내주하심 안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치를 이루며 살아가게 하는 그 생명과 사랑이 역사가 결국은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II. 용서해야 할 이유
그런데 우리가 용서해야할 이유를 오늘 성경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A. 성령을 근심께 하는 것임
사도는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합니다. 성령을 근심께 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성령의 인격성을 보여줍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어떤 관계를 맺느냐의 따라서 기뻐하시고 슬퍼하고 마음아파하시고 탄식하시고 괴로워하시는 효과가 우리에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자신은 불변하는 영원한 무한자이시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서 그분의 감정이 우리에게 모두 느껴지게 하셔야지 만 우리가 그분의 감정을 느끼면서 우리의 태도를 변화시킬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당신이 거기계시는 효과를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순종하면 성령이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주님의 몸인 교회에 거치는 자들이 되면 우리는 주님을 근심시켜 들이는 자들이 됩니다. 이 성령은 신자가 받는 모든 거룩한 은혜의 본질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신자가 받는 은혜 자체가 성령이라고 묘사 할 수 도 있어요.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은혜를 받기위해서 은혜의 방편들을 많이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신 차려서 듣고 그리고 말씀의 깨달음은 우리에게 은혜를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한 의지를 북돋게 되고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우리의 의지를 선한 방향으로 강화시켜 줍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이런 은혜의 효과죠 기도생활은 이런 은혜를 우리의 마음에 성령이 불러 일으켜 주시는 성령님이 아주 좋아하시는 은혜의 방편입니다. 그래서 지식이 뛰어나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지식이 좀 부족해도 마음을 바쳐서 순수하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은혜 충만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 생활 얼마나 놀랍습니까?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 신실하게 봉사 때 그 섬기는 과정을 통해 주님의 은혜는 우리의 마음속에 한결 새롭게 북돋아 집니다. 그래서 기쁨으로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나면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께 대한 감사함이 가득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도와 말씀과 봉사와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훌륭한 수단이 된다 할지라로 한편으로 우리가 주님의 성령을 근심시켜 드리면서 그 일을 하고 있다면 그러면 우리는 마치 우리와 마주하는 사람의 뺨을 한손으로 때리면서 또 다른 한손으로는 악수하자고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많은 말씀을 깨닫고자 해도 진실한 깨달음은 가슴에 맺히지 질 않고 기도하고자 해도 기도하는 모양은 있으나 마음은 주님의 성령의 은혜 충만하게 차는 기도의 결과는 희박한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많은 기도는 헛되고 그들의 청취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마음에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렇게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피곤한지는 여러분 자신이 증인일 것입니다. 교회의 확장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 건물이 커지고 인간들이 늘어나는 것이 진정한 교회의 확장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교회의 확장은 보이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몸의 학장입니다. 핏줄이 핏줄로 이어지고 신경이 신경으로 역어지고 그 속에 뜨거운 피가 흐르고 생명이 함께 공유될 때 에 그것이 진정한 몸의 성장입니다. 그러면 결국 교회의 확장은 사랑의 확장이고 이러한 사랑의 확장은 성령의 역사의 확대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의 몸이 지체로 역어진 이유입니다. 그런데 한사람이 그렇게 교회의 본질이신 성령님을 근심시켜 드릴 때에 그를 통해 교회의 확장은 방해를 받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 성령을 근심시켜드립니다. 사도는 오늘 말합니다.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 는 것입니다. 인 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도장을 찍은 것입니다. 도장을 찍었다는 것은 무슨 뜻이죠? 보증을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가 부도 위기를 만났죠. 그랬더니, 오늘 아침에 프랑스와 독일이 누구든지 그리스의 채권을 사는 사람들은 나라에서 지급을 보증해 주겠다고 했어요. 그리스는 망해도 프랑스와 독일이 망하지 않는 한 손해를 보지 않게끔 정부가 보증해 주겠다 그 뜻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는 못 믿어도 프랑스와 독일을 믿고 그 채권을 사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인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태어나 하나님의 나라에 출생해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태어났다는 증명서 있습니까? 이 나라에 태어나면 출생증명이 있고 출생증명서를 가지고 호적을 하면 등본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성인이 되면 주민등록에 기록이 되죠 그것으로서 내가 대한민국의 국민이요 .태어난 등록된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에선 아무 증명서도 없습니다. 교회에 남아 있는 이름들은 그건 증명서가 아닙니다. 가짜신자들도 얼마나 많은데, 교회에 이름이 있다고 천국에도 이름이 있을 줄 압니까.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께 태어나서 그리스도 예수에 몸에 접붙여진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의 일원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증명이 됩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보이는 증명서 보다 더 강력한 증명서가 있습니다. 그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잘못하고 양심의 송사를 받고 율법의 정죄를 받아서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조차도 우리들은 느낌 보다 더 강력한 성령이 우리 안에 계셔서 너는 내 아들이라 보증해 주시는 하나님의 보증을 성령의 인치심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인 쳐주신 것을 우리에게 보증해 주시는데 성령을 슬프시게 하면서 살면 이보증이 흐릿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하고 성령의 은혜를 따라 살면 이인치심이 강력하게 느껴져서 이세상사람들이 나를 다 정죄하고 버릴지라도 주님이 나를 당신의 자녀 삼으시고 그리고 누구보다도 이 세상에서 나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몸의 일부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지 안는 다는 것이 우리에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게 성령의 인치심이에요 그 인치심이 확실한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강력한 확신이 있고 그리고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고 맺힌 것을 풀지 못한 채 원한을 품거나 미워하면 이 성령이 근심하심으로 우리에게 이 보증이 흐려진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용서받지 못한 건 형제인데, 용서하지 못한 결과는 형제에게가 아니라 자신에게로 휘돌아 와서 자신의 영혼에게 손해를 입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기를 원하지만은 허공을 치는 것처럼 성경을 읽고, 그리고 허공을 치는 것처럼 예배를 드립니다.. 많이 기도하지만 기도 소리는 교회당을 울려 돌아올 뿐 하늘로 이르기도 전에 꺾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한편으로는 성령은 근심시키면서, 또 성령의 은혜를 구하는 모순적인 생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충심으로 용서해야하고 그가 사랑스럽지 않으면 여러분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라도 그를 충심으로 용서하여야합니다. 지체들을 용서해야할 또 다른 이유를 사도는 마음의 쓴 뿌리를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B.마음의 쓴뿌리를 보여줌
그는 말합니다.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등등 악의 와 함께 버리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악독이라고 한 이 말은 희랍어 성경에 쓴 것 이라고 나옵니다. 쓴 것 쓴 뿌리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 잘 모릅니다. 어떤 상황을 만나봐야지만, 비로소 우리 안에 우리도 알지 못하던 것들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것이 쓴물처럼 쏟아져 나올 때에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인간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옛날에 아주 의좋은 형제가 살았데요. 그래서 둘이서 부모님을 모시고 가족들을 거느리고 아주 행복하게 살았는데. 그 형제가 의가 얼마나 좋은지 모든 동네 사람들이 자기의 자식들의 형제우애에 귀감을 삼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형제는 강에 가서 고기를 잡기로 하고 배를 띄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배를 저었고 고기를 잡아가다가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산에 한번 올라 보자하고 산을 산책을 하다가 이만한 금덩어리를 주었답니다. 언제 그랬느냐고 묻지 마요. 그저 그런 이야기니까. 그래서 그 금덩어리를 발견하고 형제가 끌어안고 펑펑 울었습니다. 동생이 말했습니다. 형, 이제 고생 끝이야! 우리 이 금을 팔아서 우리 부모님에게 고래 등 같은 집을 사드리고 그리고 우리 자식들과 아내들에게도 잘 입히고 먹여서 우리 영원히 행복하게 살자! 그리고 서로 기뻐하고 떠들고 이야기하면서 그 금덩어리를 들고 배에 탔습니다. 그리고 이쪽서부터 저쪽까지 노를 저어 오는데, 강이 폭이 꽤 넓었습니다. 그런데 그 금을 발견하고 배에 실을 때까지는 형 동생이 그렇게 흥분하면서 막 떠들었는데 배에 타고 동생이 노를 젓기 시작하자 노를 젓는 동생도 앉아 있는 형도 조용히 침묵이 흘렀어요. 강 중간에 제일 깊은 곳에 왔을 때 형이 벌떡 일어나더니 그 금덩어리를 번쩍 들어서 강물 속 에 풍덩 던져 버렸어요. 동생이 깜짝 놀랐어요. 형 미쳤어! 그 금덩어리를 가지고 우리가 이제 잘 살 텐데 왜 버리는 거야! 아우야 나는 일평생 너를 정말 사랑했고 너를 위해서는 내 목숨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오늘 저 금덩어리가 생기고 배를 노 저어 가는 순간에는 니가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더라 이런 마음이 내 밑바닥에 있는 줄은 나도 몰랐단다. 여러분 안에 감추어진 그 미움과 죄악의 쓴 뿌리들은 여러분 개인의 것만의 아닙니다. 어디로 가든지 여러분은 보이지 않는 교회의 몸의 일부에요. 그래서 그 감추어진 쓴 뿌리는 여러분의 문제이기도 하지마는, 공동체 전체의 문제에요. 그리고 그것은 질병입니다. 여러분에는 냅둬! 내가 쓴 뿌리가 있던지 단 뿌리가 있던지 이건 내문제고 나는 내거니깐 생긴 되로 살 거니깐 참견 하지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여러분에게는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끝까지 그러한 권리가 있다고 확신하고 추어도 돌이키지 않는 다면 여러분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아들이 하나 있다고 쳐요 너무너무 사랑합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의 뼛속깊이 사랑하는 그런 아들이 있다고 쳐요. 장성해서 그 아들이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혼식을 올리고 그 신부와 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 아들이 자기의 아내를 그렇게 한없이 사랑하고 그 아내는 자기 아들을 그렇게 많이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부모인 여러분의 마음에 최고의 행복이 되었을 때 그 며느리에게 몸에 큰 병이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러면 틀림없이 여러분은 여러분의 재산모두를 버려서라도 그를 고쳐 줄 것입니다. 왜! 아들향한 사랑 때문에 그 아들의 신부에게도 여러분의 사랑이 쏟아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가 만약에 자기의 질병상태를 잘 모른다면 설득시킬 것이고, 끝까지 고쳐지길 거절한다면, 납치해서 강제로 묶어서라도 나 같으면 고쳐주겠어요. 왜? 아들의 아내니깐.
우리를 사랑하신 자비의 주 아버지 주께로 나아갈 때에 기도 들으사
우리 죄악과 강팍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허락 하시네.
그래서 주님은 그사람의 쓴 뿌리를 당신의 몸 전체 안에 있는 쓴 뿌리로 여기셔서 때로는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을 옆에 두셔서 좋은 사람들을 만났더라면, 결코 자기에게 그런 쓴 뿌리가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테인데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자기의 마음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는 지를 들어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밤새도록 청어를 잡아먹기 위해서 쫒아 다니는 바다 매기처럼 그렇게 때로는 부분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지체들 심지어는 마음에 악함을 가지고 있는 지체들을 옆에 두셔서 우리를 찌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사람을 만났더라면 자기가 주님 안에서 많이 거룩해진 사람으로 여겼을 터인데 그런 못된 지체들을 만나서 자기의 마음 깊은 곳에 사랑이 없다는 것과 쓴 뿌리들이 남아 있어서 한번 맺인 원한을 쉽게 풀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알게 되었을 때에 그가 신앙이 있다면, 자기에게서 그 쓴 뿌리를 드러내게 해준 그 사람을 미워하기 보다는 그에 의에서 쓴 뿌리가 있는 것이 들어 난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너무 부끄러워서 그래서 주님 앞에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 드러났든 이렇게 내게 괴로움을 주는 지체가 아니었다면 결코 깨달을 수 없었을 내 마음 안에 있는 이 쓰디쓴 뿌리는 주님을 향한 악독이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이제껏 그럴싸했던 삶의 모습제법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왔던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의 과거를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주님 앞에 드러난 우리의 악독과 그리고 주님을 모질게 대항하는 우리 밑바탕에 깔려있는 이 세상의 어떠한 하나님의 은혜로도 다루어지지 않았던 그런 쓴 뿌리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수없이 많은 날 성경을 읽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절동안 철야기도를 하고 금식을 하고 주님 앞에 목 놓아 울었지만, 그 모든 은혜의 화살을 맞고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우리의 마음에 있는 쓴 뿌리들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것으로부터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연약한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가 망가진 사람인 것과 주님이 내게 베풀어 주신 그 크신 은혜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 안에 있는 쓴 뿌리가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몸에 한 병든 부분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치료하시는 주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히려 교회 안에 있는 다듬어지지 않은 지체들 심지어는 내게 악을 행하는 지체들을 통해서라도 교회의 몸에 상처를 보여주시고 또 그것을 치료해 주시는 주님 앞에 믿음으로 나아가게 만들어 주셔서 온몸을 침투한 병균 때문에 오히려 온 몸에 저항력이 생기는 것처럼 그렇게 주님의 교회를 지체들의 허물과 악 때문에 더욱 그리스도 예수를 닮은 교회로 세워가시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아주 비밀스러운 경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저 우리를 사랑할 뿐이고 우리를 변화시켜 주지 못하지만,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지체들은 오히려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다 메기 같은 지체들을 통해서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고 그 악을 통해서 주위에 있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코 찌른 적이 없던 우리의 마음 깊이 있는 쓴 뿌리까지 창을 박고 칼을 박아서 그 더러운 물들이 울럭거리고 솟아나게끔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우리 안에 있는 깊은 쓰디쓴 죄악의 뿌리들 악독의 근원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체들은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창으로 찌르고 칼로 베어내지마는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런 우리의 악독까지라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것이라 내것이라
좋은 것이 있을 때 우리를 사랑하고 나쁜 것이 있을 때 우리를 미워하지만 주님은 쓴 뿌리들을 간직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 하셔서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모자라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완전하심을 덧입어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 그의 한 살과 뼈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주님을 우리를 더욱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으로 만드시기 위해 우리 안에 생명과 사랑을 더욱 충만하게 부어 주셔서 우리로 주님의 지복에 참여하게 하시려고 악한 지체들을 통해서 우리를 찌르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아프게 하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쓴 뿌리를 보여주신 것은 우리로 좌절하고 스스로 실망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요, 제법 주님을 믿으며 이제껏 살았지만은 내안에는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절망적이 죄와 쓴 뿌리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만을 의지 하게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발견은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은혜에 대한 목마름을 가져오는 통로입니다. 누구도 자기의 죄를 깨닫기 전 까지는 하나님 앞에 몸부림 칠 사람이 없고 주님의 은혜에 탄식하며 목말라 할 수람이 없습니다.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형제들이 있습니까? 아직도 원한을 품고 있는 가족들이 있습니까? 그대들이 이런 마음을 품으며 살아갈 때 불행한 사람은 여러분이 미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미워하는 여러분의 영혼입니다.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을 찌르는 지체들에게 고마워하십시오. 그렇게 많은 말씀을 읽어도 여러분이 보지 못했던 여러분 안에 있는 쓴 뿌리들을 알게 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이 그것을 섭리속에 알게 해 주셨으며 이 쓴 뿌리를 보고 너는 이제 멸망하라고 우리에게 보여주셨겠습니까? 아니면 주님이 당신의 몸을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여러분을 고쳐주지 아니하겠습니까?. 이어서 사도는 용서하는 마음의 은혜를 우리에게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III. 용서하는 마음의 은혜
그는 말합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합니다.
A. 인자하게 대함
그는 제일 먼저 인자하게 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인자하다라는 이 말은 희랍어로 크레스토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사용할 수 있는 써먹을 수 있는 섬길 수 있는 이용할 수 있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인자하다 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필요하다고 할 때 얼마든지 써먹을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그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이 자기를 이용할 수 있도록 자기를 개방하고 억제하지 않는 것 그래서 그들이 나를 이용하고 사용해서 자신의 행복에 이바지 하도록 도구로 쓰는 것 그렇게 될 때에 그것을 즐거워하는 마음 이것이 인자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항상 희생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남을 속이고 싶을지언정 속기를 당하기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남을 속일 수는 있어도 남에게 속임을 당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기 마련이고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써먹어서 자기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은 기뻐하는 일이지만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하고 써먹혀져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득이 되고 내게는 아무런 득이 되지 않고 때로는 희생과 손해를 불러오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인자하지 않은 마음입니다 .인자한마음은 자신의 행복자체를 다른 사람을 위해 이바지 하는 것 다른 사람이 자기를 사용해서 자기가 이용되지 않았더라면 도달할 수 없는 행복의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 때문에 기뻐하는 것 이것이 인자한 마음입니다. 이 인자의 원천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듭된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불순종과 악을 범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할 수없이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이라는 나라를 들어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은총이 깃들이라고 믿었던 예루살렘성은 비참하게 불타버렸고 그리고 주님의 임재와 함께 한다고 믿던 예루살렘 성전은 바벨론 군대의 말발굽 아래 비참하게 짓밟혔습니다. 성전의 영광이요 아름다움의 상징이었던 수많은 금은 기명들과 기구들이 뜯겨 나가고 예루살렘 성전은 겁탈 당한 부녀자 같은 비참한 처지가 되었으니 사면을 둘러보아도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패어가 된 터 위에서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는 주님의 이 역사를 묵상했습니다. 그리고는 깨달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 나라는 파괴되었고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은 비참하게 부서졌지만, 보이지 않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은 지금도 계속되었고 누구든지 믿음으로 이 심판 속에서 주님을 이용하여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열어 놓으시고 탕자를 맞이하는 그 아버지처럼 기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가 멸망한 도시 안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인자 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 예루살렘이 심판받지 않았을 때는 오히려 부를 수 없었던 새 노래로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그래서 주님의 인자는 우리의 양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선할 때만 우리가 하나님을 이용해 먹은 것이 아니라 때로는 우리가 악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났을 때조차도 우리는 주님을 사용하여 우리의 행복을 도모했고 언제든지 당신에게 다가와 자신을 누리려고 하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으시는 아버지의 그 큰 사랑은 마치 당신의 재산을 모두 탕진해 버리고 돌아온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동구 밖에서 그를 끌어안고 맞아 주신 탕자의 아버지와 같은 인자였습니다. 우리가 아직 숨 쉬며 살아가고 있는 것도 이 더러움이 가득 찬 인감들임에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여전히 한 지체로 붙어서 살아가는 것도 모두 우리의 장점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인자하신 성품 때문에 우리가 분에 넘치는 유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무엇입니다. 이렇게 값없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기 위해서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그 사랑을 아는 것이 바로 신앙이 아닙니까?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늘 주님의 마음에 칼 꽂고 주님께 돌멩이 던지는 우리를 여전히 성령 안에서 당신의 몸의 한 부분으로 여기시고 우리가 병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당신의 몸의 한 지체로 삼으신 것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으시는 그리스도예수의 당신 자기의 몸을 사랑하시는 그 은혜 그것을 아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그 인자를 떠나서는 도저히 살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의 몸에 지체에 어울리는 삶을 살 수 있을 때뿐만 아니라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조차도 우리는 그리스도예수를 의지하여 당신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는 악함이 가득하고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우리를 도저히 주님의 맞도록 고칠 수 없지만,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믿으면서 우리는 우리 때문에 우리를 구원해주시지 않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을 의지하여 보혈의 핏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한걸음씩 나가네
휘장을 찢고 그분이 뿌리신 핏길을 맨발로 걸어 우리는 아직까지도 악하고 쓴 뿌리가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씻으신 그 보혈의 피고 우리를 용서해 주신 믿음으로 아버지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체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사람들입니까? 지제들이 필요할 때 여러분을 써먹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을 사용해서 지체들이 좀 더 나은 행복에 도달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신자의 사라의 삶입니다. 그대들을 아프게 한 사람들을 끌어안고 그대들을 아프게 하는 그 사람이 그렇게 아프게 할 수 밖에 없는 여러분 안에 있는 아픔보다도 더 큰 아픔을 느껴 보십시오. 그리스도는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사람의 몸을 입어 이 세상에 내려오시고 마지막에 죽기까지 복종하사 십자가에 죽으실 때 까지 철저히 우리에게 이용당하시고 사용되신 분이였습니다. 창기와 세리들도 그분을 이용했고 죄인과 원수들 까지도 그분을 사용했습니다. 오죽했으면 그분이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면서 나는 너희를 위한 생명의 떡이라고 까지 말씀하셨겠습니까? 주님은 아무에게나 이런 인자한 삶을 살라고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그 하나님의 인자를 미리 누리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 인자를 힘입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 영광을 버리고 내려오신 이후로 죽으실 때까지 그분의 생애 전체는 우리의 밥 이였습니다. 우리에게 이용당하고 사용당하고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자기를 못 박는 자기들의 원수에게까지 당신이 사용되기를 원하신 분이였습니다. 그리스도예수께서 하나님의 창조와 목적을 거스려 살며 영원한 심판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구원해 주시고 우리가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할 그때에 이미 우리의 인생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이후에 모든 삶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이 너는 나를 본받아 인자한 자가 되어 너희 지체들을 위한 양식이 되거라 하고 하셨을 때 우리는 그 명령이 가혹하다고 생각 할 수 없도록 그렇게 충만한 인자를 그 용서하신 는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이에요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런 인자를 베풀었으니 너는 이제 이 사랑으로 만족하고 그리스도와 교회와 주님이 사랑하신 이 세계를 위해 살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두 번 째로 성경을 긍휼하게 여기라고 말합니다.
B. 긍휼하게 여김
이 여기에 나오는 이 긍휼이라는 단어가 희랍어 성경에 유스프랑크노스라는 단어인데 유는 좋다는 뜻이고 스프랑크노스는 창자입니다. 그래서 좋은 창자를 가지라, 이런 뜻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영혼이 사람 안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실 또 그러하고요 그러면 비록 눈에 보이지 않은 비물질적인 영혼이지만 그 중심적인 자리가 어디 있을까 라고 생각할 때에 심장이나 뇌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창자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알다시피 이 창자는 해부학적으로 썩은 냄새가 나는 고약한 곳이지만, 심리적으로 보면 욕망이 산출되는 본거지에요. 이 욕망이 산출되는 본거지인 창자가 좋은 창자인 것이 긍휼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깐 예수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9장에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이 여기시니 할 때에 그 에스프랑크니스데가 이것과 어원이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창자가 흔들리기까지 감동을 받다 그 뜻입니다. 그럼 여기서 좋은 창자를 가지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비참한 사람을 볼 때 마음이 찢어지는 것같이 아파하는 사람이 되라 그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고통을 받을 때에는 비참하고 그 비참하게 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를 파악하면서 고통을 받고 있는 그의 비참한 모습이 당연하다고 라고 설득이 되는 것은 좋은 창자가 아닙니다. 좋은 창자는 어떤 사람이 고통을 받을 때 원인과 결과를 추적하면 당연하다고 생각이 되도 필름이 끊어지듯이 이모든 과정은 생략되고 지금 아프고 고통하고 있는 그 사람 모습이 한 장의 사진처럼 선명하게 찍혀서 마음에 그를 향해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유프랑크노스라는 단어에요. 그 마음이 바로 예수님이 사도들을 이 세상에 파송하시면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주신 이유였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기 자신을 못 박으신 이유였습니다. 우리가 행한 대로 갚는 다면 우리의 고통은 비참해도 너무 당연한 것이었고 파괴된 세상의 불행은 조금도 하나님의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어긋나는 부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논리의 고리를 초월하셔서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짓 발피고 고생하는 우리가 너무 불쌍하셨기 때문에 하늘의 영광 버리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셔서 멸시와 욕을 당하시고 자기의 우리를 위해 화목재물로 우리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핵심! 경건의 그 핵심은 바로 이런 긍휼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되 주님의 사랑이 내게 있어서 주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신 것처럼 내게 악을 행한 지체들조차도 불쌍히 여기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이고 이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논리를 초월해서 우리들의 형제들을 우리의 악한 형제들조차 용서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속을 얻고 감당할 수 없는 은혜로 이 벌레만도 못한 몸들이 그리스도예수의 몸에 지체가 되었습니다. 마음의 품고 있는 악들이 여전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침마다 새로운 주님의 인자하심이 주님의 자비가 우리에게 밀려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통해 우리를 어두움에서 깨어나게 하시고 좋은 것은 알아도 행할 수 없을 때에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힘이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선한 뜻을 품고 주님을 위해 살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 주시고 품을 수 없는 사람들을 품고 하시고 가시 같은 사람을 우리의 가슴에 끌어안게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이모든 일에 있어서 감사하는 것은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이 구원의 은혜가 무한히 크기 때문이고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사랑을 이미 받았고 그 사랑에 빚졌고 지금도 그 사랑에 의지하여 벌레 같은 인간들이 주님의 은총을 받으며 지금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형제를 용서하지 못했는데도 주님은 용서하지 못했노라고 우리가 참회할 때 역설적으로 우리는 용서해 주십니다. 그래서 다시용서 할 수 있는 은혜의 힘을 우리에게 불어 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게 악을 행하는 지체들을 용서하기 어려울 때마다 우리가 주님께 한 짓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악독한 우리를 어떻게 용서하셨고 주님이 우리를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해 주셨을 때 우리는 우리의 남은 인생을 모두 접고 그분의 도구로 살기를 원했던 그 서약의 순간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기쁨을 삼고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며 순종하며 살겠노라고 다짐했을 때 우린 우리 자산을 당신의 도구로 이미 드린 것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C.진심으로 용서함
마지막으로 사도는 진심으로 용서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는 말합니다.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입니다. 마음으로 깊이 용서했던 사람들이 은혜가 식으면서 다시 섭섭한 마음이 들기 시작할 때 우리는 우리의 용서와 주님의 용서가 얼마나 다른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해 주신 이후 한 번도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을 후회하신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께 그 큰 사랑과 은혜를 입고 또다시 불순종할 때조차도 우리의 주님의 마음에 대못을 박을 때조차도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신 것을 후회하지 않으시고 이미 용서한 죄를 다시 묻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단지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용서를 통해서 우리를 다시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체들을 용서했다고 말하면서 다시는 더 이상 역기고 싶지 않다고 말할 때 그것은 용서한 것이 아니라 복수하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끊어졌던 사랑이 다시 흐르는 사랑의 교통의 한 과정으로 이해되어야지 그 어떤 일의 결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많은 세상에서 끊임없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사랑은 용서를 통해 다시 이어지고 이어져서 그리스도의 몸에서 혈관의 피가 흐르듯이 예수의 사랑이 교회 안에 흐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 모르지만 남을 통해 이렇게 흐르는 수많은 사람의 사랑의 덕을 입으며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받았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가슴을 쥐어뜯고 주님 앞에 죽어가는 자기 죽음의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죽었고 주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흘러들었습니다.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 그리스도의 몸에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았던 사람들은 그렇게 끊임없는 자기의 희생과 깨어짐을 통해서 자기를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자비를 붙들었고 그래서 그들은 고통 받았지만, 그들을 통해 흐르는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죽어가는 영혼에 샘물이 되어서 우리를 살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일을 할 수 있었다가 보다는 우리와의 사랑에 매이기 전에 먼저 자기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예수의 사랑에 매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잘 것 없는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었고 우리가 자기들에게 악을 행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우리의 쓴 뿌리에서 난 악으로 그들을 아프게 했지만, 그들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주님의 인자하심으로 갚아서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한지체로 머물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행한 사람들일까요.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은 전하는 자가 없어서 이 사랑에 눈먼 자들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대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로 접붙임을 받아 그분의 생명을 누리도록 선택 된 사람들이고 오늘도 여러분의 귓가에 울려 퍼지고 있고 눈에 보일 수 있도록 여러분에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가슴 터질 것 같은 주님의 사랑과 용서의 경륜을 어떻게 돌 같은 마음에 이해시킬 수 있을까요?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용서하십시오. 마음에 묶여있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그를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이 그 사람을 사랑하기가 아무리 어려워도 주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것이 어려운 것만큼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을 보고 사람을 용서하거나 사랑하지 말고 주님께로부터 받은 여러분의 사랑과 그 과 없는 용서를 기억하며 주님 때문에 내 형제 자매들이 주님의 사랑을 덧입게 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일부로 삼으신 이유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우리 안에 드러난 쓴 뿌리 때문에 우리는 죽어도 우리들이 죽는 것만큼 그리스도의 온몸에 사랑과 생명이 흐를 수 있다면 우리는 죽어도 다시사신 그리스도의 몸과 함께 우리는 영원히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하나님의 용서, 성도의 사랑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저를 돌려 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찐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몬 1:10~18)
I. 본문 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로마에 투옥되었을 때 쓴 편지입니다. 그래서 이 빌레몬서는 빌립보, 골로새 그리고 에베소서와 함께 옥중서신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바울에게는 빌레몬이라고 하는 아주 훌륭한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아마 평신도 동역자인 것으로 여겨지는 이 사람은 어느 정도 재산도 소유하고, 노예를 거느릴 수 있을 정도의 재력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역시 사도바울을 만나서 복음을 듣고 신앙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되는 이 사람은 사도바울의 든든한 협력자였습니다. 아마도 골로새 지방에 거주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이 빌레몬은 오늘 사도바울이 쓴 이 빌레몬서의 수신자로 되어있습니다. 이 서신서에서 사도바울은 “빌레몬과 압비아와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군사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라고 했습니다. 자매 압비아는 빌레몬의 아내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군사된 아킵보라는 사람은 빌레몬의 아들이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측합니다. 그래서 이 편지는 교회에 보낸 편지라기보다는 개인에게 보낸 편지가 아니겠는가 라고 판단하여 이 편지는 성경이 될 수가 있을까 라는 의심들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 보면 이것은 빌레몬을 수신자로 하면서도 빌레몬의 집에 모이는 모든 교회의 성도들에게 회람형식으로 돌려준 편지입니다. 오히려 이 빌레몬서에는 복음서와 사도바울 전체를 아우르는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이 실제의 사건으로 들어있으니 그래서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이 빌레몬서는 신약의 보석과 같다’고 하였든 것입니다. 이 빌레몬에게 사도바울이 옥중에서까지 편지를 보낸 이유는 오네시모라고 하는 도망친 노예와 관련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이 오네시모라는 노예를 감옥 속에서 전도하여 예수를 믿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이 오네시모는 바울이 옥에 갇힌 가운데 풀려나 그리고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는 처지가 되었든 것 같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오네시모라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 예수를 믿게 하였고 오네시모는 성심으로 바울 가까이에서 그를 섬기는 훌륭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오네시모를 갇힌 중에 낳은 아들이라고 표현했고 또 동역자라고도 소개를 했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의 형제라고 까지 일컬어 주었으니 이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향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사도바울의 사랑이 얼마나 따뜻하였든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Ⅱ. 쓸모 없었던 인간
그러나 오늘 성경은 이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한때는 쓸모없었던 인간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정체는 도망친 노예였습니다. 이 사람이 바울을 만나기 위해서 일부러 감옥 속에 온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그야말로 우연의 일치였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그의 죄를 고백을 받는 가운에 아마 도망친 노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바울이 네가 어느 집에서 종살이를 하다 도망쳤느냐고 물었을 때에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그때에 사도바울은 바로 그 빌레몬이 자기의 친아들과 같이 자기의 복음 사역을 돕는 훌륭한 성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로마시대에는 약 8천만 명의 노예가 있었습니다. 그 이전에 그리스 시대 때에는 노예들이 상당히 사람대접을 받았고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와 존엄성을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주인이라도 노예를 함부로 학대하거나 살해 할 수 없게끔 보호되었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중앙집권제적인 로마의 통치가 이루어지자 노예는 이제 사회에서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을 감당하는 노동력을 제공해 주는 사람들로 전락하게 됩니다. 당시 사회에 가장 커다란 문제 중 하나가 이 노예의 도망이었습니다. 도망친 노예는 생계의 수단이 막막하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고 이러한 범죄는 사회 전체의 불안 요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도망친 노예는 아주 엄격하게 다루었고, 또 스티그마 제도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노예의 몸에 이 노예는 노비다 라고 하는 문신을 새기는 풍습까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에서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노라’고 할 때의 그 흔적이 바로 노예의 문신을 빗대어서 자기는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는 사실을 설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오네시모는 도망칠 때에 그냥 도망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도망치는 노예들이 그러하듯이 무엇인가 이 빌레몬의 집에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고 물질까지도 훔쳐서 도망 나왔을 것이다 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그가 만약 네게 불의를 하였든지 손해를 하였으면 내가 대신 갚아주겠노라고 명백하게 빌레몬에게 편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네시모라고 하는 이름의 뜻은 ‘쓸모 있는’그런 뜻입니다. 당시 노예들에게 아주 흔하디흔한 이름이었으니 마치 우리나라에서 이름 없이 낳은 노예의 자식을 그냥 ‘돌쇠’라고 붙여두었듯이 생각 없이 일이나 열심히 하고 아무리 많이 일해도 돌덩이 같아서 병도 들지 말거라 그런 뜻으로 돌쇠라는 이름을 붙여주게 되었고 그 앞에 나중에 영화가 나오면서 ‘의리의 사나이’라는 말이 붙여졌지만 그거는 괜히 그냥 해본 거고 원래 그냥 돌쇠에 그런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 ‘오네시모’도 그저 누가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네가 기왕 노예가 되었으니 우리 집에 와서 밥값은 하는 녀석이 되거라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오네시모였으니 어쩌면 이 이름은 빌레몬이 지어준 이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이 이름하고는 정반대의 형편이 되어있었든 것입니다. 빌레몬의 집에 손해를 입혔고 또 물질적인 피해도 준 가운데 도망친 노예가 되었습니다. 당시에 도망친 노예는 엄격하게 다스렸고 사형을 당하여야 했으니 아마도 이 오네시모가 옥에 갇혔을 때 도망치고 빌레몬의 집에서 뭔가를 해를 끼치고 탈출한 노예라는 것이 인지되었다면 옥에서 풀려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아서 아마 이러한 사실은 사도바울이 알고 있었던 사실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을 해보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는 쓸모없는 인간이었고 사회에도 쓸모없는 인간이었고 노예의 주인에게는 씻을 수 없는 손해를 입히고 그리고 또 같은 노예의 가족에도 고통을 안겨준 그런 사회의 암적인 손해를 끼칠 존재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사도바울은 이러한 막돼먹은 인간을 갇힌 중에 낳은 내 아들 오네시모라고 까지 하였고 또 이사람을 동역자라고 불러주었고 또 형제라고 까지 불러주었고 심지어는 뭐라고 까지 말했냐면 ‘네게 저를 돌려보내노니 저는 나의 심복’이라 이 심복이라는 단어가 창자에요 창자. 지난주에도 창자 얘기가 나왔죠. 그러면 왜 자기의 심복을 창자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의 영혼이 깃드는 자리가 창자이고 거기에 모든 마음의 작용이 있는데 자기 분신처럼 자기의 애정과 마음, 생각을 똑같이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이 바로 심복입니다. 그래서 심복은 말하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그 주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혼연일체를 이루는 그런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빌레몬은 이 편지를 보면서 어쩌면 사도바울이 빌레몬 자기 자신 보다도 이 오네시모를 끔찍이 사랑하고 있다고 하는 그러한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 아들이라는 칭호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자주 사용하던 호칭이었으니 디모데가 교역을 하고 평신도가 아닌 교역자로서 사역에 있어서 사도바울의 아들과 같은 제자였다면 이 오네시모는 평신도로서 자기에게 그런 사랑과 그리고 애정을 받는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는 쓸모없는 사람이요 인간 말종과 같이 모든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였는데 어떻게 해서 사도 바울에게 자기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 같은 아들이 되었고 너무도 소중하고 귀해서 자기의 창자와 같은 사람이 되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는 자기가 하는 이 복음 사역에 없어서는 안 될 동역자요 또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가 되었을까요? 변화된 오네시모. 그를 그렇게 변화시킨 요인이 어떤 것이었을까요?
Ⅲ. 변화된 오네시모
A. 하나님의 용서
첫째는 하나님의 용서였습니다. 용서였습니다. 옥 속에서 둘이 같이 죄수로 만났다면 사실 사도바울에게서 오네시모가 발견할 수 있는 좋은 것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그는 고작해야 다 늙은 노인네로서 옥 속에 끌려와 있는 죄수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네시모는 아직 젊었습니다. 어쩌면 사도바울이 자기보다도 더 쓸모없는 죄수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거기서 사도바울이 전해주는 복음을 통해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크고 놀라운 은혜의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육신으로는 노예로 태어나서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영적으로는 사도바울에게서 낳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난 자유로운 신자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자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모두 쓸모없는 인간 말종과 같은 존재, 아무 희망이 없는 비천한 노예라는 자아상을 가지고 빌레몬에게 돌이키기 힘든 손해를 끼치며 도망쳐 나온 이 불의한 이 죄수인 노예를 변화시킨 것은 하나님의 용서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같은 인간도 사랑하신다는 사실, 그리고 자기 같은 죄인도 하나님이 용서하셔서 그리스도의 피로 씻으신 후 새 사람을 만드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면서 그는 자기 같은 노예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사도 바울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기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거듭나게 되자 그는 비로소 운명처럼 살아가던 이 노예의 처지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영혼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고 육신이 속박 받으면 영혼도 속박을 받을 것이라는 그의 생각과 편견은 깨뜨려지고 비록 여전히 신분은 노예였으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용서를 통하여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보고 신학적으로 본다면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냐는 분명합니다. 그렇죠? 좋은 신자가 되면 좋은 사람이라고 제가 늘 가르쳐 드렸죠? 궁금한 거는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정신 의학자들은 어떤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 그럴까? 내가 정신과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 항상 내가 묻고 싶었던 게 그거였어요. 정신과 의사는 우리를 치료하려고 자꾸 그러는데 우리를 치료해서 그래서 어떤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게 의사의 목표일까 그게 참 궁금했습니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시간이 없고 그러니까 못했는데 최근에 어느 정신과 의사가 그거에 대해서 답을 주더군요. 그는 이렇게 얘기해요 학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대개 합의를 보는 내용이, 정신의학적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된다고 본답니다. 첫째는 감정의 조절 기능이 살아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밉거나 복수하고 싶을 때, 확 솟아날 때 이거를 스스로 이거를 절제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난번에 고등학교 학생 하나가 엄마가 게임 좀 그만하라고 잔소리를 했더니 머리를 쳐서 그 자리에서 자기 엄마를 죽여 버렸잖아요. 이런 것들은 뭐냐 하면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데 우리들이 그게 뭐냐면 감정조절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마 다른 때에 부모가 ‘얘야 게임 좀 그만해라’ 그랬으면 안 죽였을 것입니다. 그죠? 근데 감정 조절이 안 되는 것입니다. 또 무엇인가 옳지 않은 것을 하고자 하는 욕망이 확 생길 때에도 그것을 이렇게 절제할 수 있는 힘이, 의지와 이성의 힘이 남아있을 때, 그것이 작용을 할 때 그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두 번째 조건은 뭐냐면 건전한 자아상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보면 학교나 교회에서 ‘아휴 쟤는 애가 아주 부산하고 말썽을 피워’이렇게 낙인을 찍힌 애들이 계속 말썽을 일으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누런 바지에 흙 묻어도 표 안 나듯이 이 아이는 자기가 말썽을 피우는 사람이라고 하는 자아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말썽을 피워도 그것이 부자연스럽지를 않고 오히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상과 일치를 이루기 때문에 가책이나 저항 같은 것들이 마음속에 없다는 것입니다. 술꾼이 자연스럽게 술 먹는 거처럼. 그러니까 이런 자아상들이 대게 6세 이전에 80%까지 완성이 된답니다. 그러니까 6세 이전에 이 아이가 올바른 부모와 스승, 친구들 속에서 자라면서 지나치게 분에 넘치는 자아상을 갖지도 말고, 그거는 망상이 되는 거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너무 억눌린 자아상도 갖지도 말고, 객관적이고 건전한 자아상을 갖게 될 때 그 때에 우리가 올바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예를 들면 하나님의 참 자녀다 라는 건전한 자아상을 가지고 있으면 잘못하려고 할 때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데 그러면 안 되지 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근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자아상들이 뭉개진 가운데에 살아갑니다. 부모가 그걸 짓밟아서
그 자아상을 뭉개 버리고 학교에 가서 돈 없다고, 공부 못한다고, 재주 없다고, 그 다음에 엉뚱한 생각한다고 짓밟히면서 자아상들이 자꾸 이렇게 부서져서 뭉개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올바른 상을 갖지 못하게 되고 그러니까 이제 좋은 사람이 못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세 번째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거라는 것입니다. 귀를 기울여서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듣는 것입니다. 이해하다가 영어로 understand잖아요 그래서 under는 아래고 stand는 서있다 에요 그래서 그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있으면 안 되고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서 그래서 그 사람의 의견을 더 낮은 자리에서 청취하려고 해야 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상전과 같은 마음을 친구에 대해서 가져서는 친구를 이해를 못해 오히려 종과 같은 마음을 가져서 그 밑으로 내려가면 위에서는 이해 안 되던 그 마음이 밑으로 내려오면 이해가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또 아무리 이해해도 이해가 안되는 것도 있잖아요. 안될 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을 하면 그 사람의 삶이 굉장히 고달파지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나는 이해를 못하지만 워낙 세상이 넓고 사람이 다양하니까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라고 받아들이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 이게 세 가지 좋은 사람이 되는 조건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근데 이게 사실은 성경적으로 보면 이 모든 걸 하나로 뭉뚱그려서 대답을 하게 되면 그게 결국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나면 그 다음에 비로소 건전한 자아상도 갖게 되고 그리고 다른 사람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로써 자기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자제력도 가지게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바로 좋은 사람이 되는 비결입니다. 이런 모든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는 이렇게 억눌리고 구겨졌던 우리의 인간다운 참된 본성을 펼쳐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이고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거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휴머니즘이 기독교 신앙과 정면으로 충돌을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누구이고 하나님이 어떤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인간이 참으로 사람다워지는지 비결이 어떻게 하나님 안에서 성취되는지를 알면 이 기독교야 말로 참된 휴머니즘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의 본성과 아름다움을 깎아버리고 부셔버려서 우리를 당신에게 맞는 존재로 만드시는 게 아니라 죄와 편견, 그리고 사회적인 억압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구겨져 있던 것들을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깨닫고 나서 이것들이 펼쳐지게끔 만들어 주셔서 참된 인간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참된 인간이 되는 것 그래서 인간다운 인간성을 소유하고 참 인간으로서 활짝 꽃피우는 삶을 사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하나님 없는 휴머니즘을 꿈꾸면 그는 결국은 참된, 참된 그런 휴머니즘에 도달하지를 못하고 비인간화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기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그분을 섬기고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휴머니즘에 도달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휴머니즘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거라 이것입니다. 거기에 인간의 참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이 오네시모는 노예요, 도망치고, 사고를 저지른 노예요 모든 사람에게 쓸모없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고 나자 그는 하나님이 자기 같은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같은 인간을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하나님의 그 위대한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이 오네시모는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영혼과 마음을 바꾸시고 그리하여 얽매였던 죄의 사슬을 끊어주시고 그 붉은 죄에서 용서받게 해 주실 때에 그 은혜가 예전에는 쓸모없었던 이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사도바울에게 있어서는 자기의 창자와 같이 중요한 심복으로 하나님이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참된 변화는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가 아무리 많아도 주님과의 만남이 답인 것입니다.
B.성도의 사랑
마지막으로 두 번째는 성도의 사랑을 통해서 오네시모는 쓸모없는 사람에서 아주 소중한 사람으로 변화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옥 속에서 만난 오네시모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했고 그것을 가리켜서 영적 출생이라고 보았기에 그는 ‘내가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다’ 오네시모의 몸은 부모로부터 낳았으나 그의 영혼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이 낳은 바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지극한 사랑이 이 쓸모없는 노예를 변하여 하나님 앞에 유용한 일꾼이요, 동역자요 형제요 그리고 사도 바울에게 아들과 같은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만큼의 신앙에 자라기까지 나 혼자 힘으로 성장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우리를 만나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모든 얽매였던 죄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주홍과 같이 붉은 죄라고 할찌라도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만할 악한 죄를 저지르고 모든 사람에게 실망을 주는 사람이었다 할찌라도 바로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사랑을 나를 통해서 나타나게 하셨다는 사실을 깊이 터득하게 될 때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도망친 노예와 같고, 이웃에게 가시와 같고, 사랑하는 우리 가족에게는 찌르는 칼 같던 우리들이 변화된 것은 하나님의 이런 용서가 있었기 때문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런 용서를 먼저 경험했던 사랑하는 성도들이 우리의 허물을 끊임없이 용서해주고 우리에게 필요한 영육간의 자원을 자신을 희생함으로 공급해주는 그 아름다운 성도의 사랑의 섬김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거미줄 같은 신앙이라도 붙들고 교회의 한 지체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만약에 복음을 통해서 오네시모를 만나주시지 않았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 인간 말종과 같은 존재가 되어서 도망이나 다니고 죄나 지으면서 비참하게 인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아마 잡혀서 사형을 당하거나 길가에 병들어 아끼는 사람 없이 비명횡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용서해 주심으로 오네시모는 변화되었습니다. 사도바울과 같은 성도의 지극한 섬김과 사랑을 통해서 그는 망가진 자기의 자아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되찾게 되었고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노예를 부리는 주인조차 봉사할 수 없는 이 거룩한 복음 사역에 사도바울이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존재로 여기는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한 때는 다 오네시모 같은 존재였습니다. 주님의 집에 손해를 입히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과는 정반대로 살면서 내 이웃들에게 찌르는 가시가 되었고 내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아픔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성도들의 지극한 오래 참음과 돌봄, 이름 없는 성도들이 나를 위해 빌어준 그 눈물의 기도 때문에 우리가 이만한 성도로 살아가게 되었으니 이제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이렇게 실패한 오네시모와 같은 수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그 몹쓸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의 용서와 성도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가 그렇게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와 같은 쓸모없는 사람들을 이렇게 주님을 위해 매우 유익한 사람으로 바꾸는 이 교회의 섬김에 티끌만큼이라도 보탬이 되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알게 하신 것이 아닐까요?
Ⅳ. 결론 : 몹쓸 사람-용서와 사랑이 필요한 사람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숨질 때까지 하신 일이 바로 그 일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시는 마지막 순간에 하신 일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당신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한 편 강도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해서 그를 낙원으로 인도하는 일에 헌신 하신 것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마지막 사역이었고 그 사역 끝머리에 아버지께 기도하신 일이 그 중보의 기도가 바로 주님의 섬김이었습니다. 세상이 모두 버려 나무에 못 박은 그 인간 쓰레기 같은 강도요 저질스러운 죄인을 예수그리스도는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고 당신 자신을 주심으로써 그 몹쓸 인간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알게 하심으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위로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망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고 망가져서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 고쳐주신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또다른 망가진 인간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주님 앞에 온전하지 못한 성도들을 만날 때마다 여러분 자신도 한 때는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었음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용서와 이름 모를 성도들의 끝없는 사랑과 자비가 여러분을 주님의 교회에 남아있게 하신 것을 기억하고 이렇게 여러분도 베푸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8.용서의 십자가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 눠 제비 뽑을쌔”(누가복음 23:33~34)
I. 본문의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광경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일곱 마디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그 중 오늘 본문이 기록하고 있는 것은 첫 번째의 말씀입니다. 일곱 마디의 말씀 중 대부분의 기도가 기도로 이루어진 것은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기도의 생애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저희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또 그렇게 우리를 용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어떤 삶을 살기를 바라셨는지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II. 십자가의 처형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계십니다. 십자가의 처형을 받고 계신 것입니다. 원래 이 십자가는 죄인을 나무에 매달아 죽이는 형 집행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 앞에 보면 예수님이 재판정에서 사형에 해당한다는 언도를 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재판은 불의한 재판이었습니다. 재판장인 빌라도도 예수의 무죄를 확신하였지만, 수많은 인파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두려움 속에서 내린 판결이었습니다.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의 유죄를 입증하지 못했는데, 거짓 증인들의 맞지 않는 증언을 토대로 이 재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은 종교지도자들에게 조종을 받았고, 예수를 사형에 처해달라고 요구하는 대신 구체적으로 예수를 죽이는 방법까지 제시했던 것입니다. 당시에도 죄수들을 목에 매달아 죽이거나 칼로 참수 하는 등 다양한 사형 집행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굳이 나무에 매달아 죽이는 십자가 형벌을 예수님께 요구했던 것은 아주 교묘한 종교적인 음모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죽임을 당하고 난 뒤에 그 죽음이 억울한 죽음이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는 신명기 말씀에 입각해서 나무에 매달려 죽은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는 종교적인 신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저주를 해서 죽인 사람을 만약에 불쌍히 여기거나 그의 죽음이 억울한 죽음이라고 항거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무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는 십자가 처형에 당하게 됩니다. 당시 이 십자가는 너무 끔찍한 형벌이었기 때문에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적용이 되지 않았고 다른 죄수 중에도 밀란을 일으키거나 상습적으로 살인을 하는 등 아주 치명적인 범죄 이외에는 이 형벌을 적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히라버러스타우르스라고 불리는 이 십자가 형벌은 로마 사람들이 야만인이던 시절에 만든 사형집행 방법입니다. 당시에는 이 십자가 틀이 여러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 세 가지가 바로 X자형 십자가와 그리고 타우형 십자가 즉, 우리가 오늘 보는 T자 형태의 십자가와 그리고 오늘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가로 세로 두 개의 막대가 겹쳐진 그런 종류의 십자가 세 가지였다고 합니다.
성경의 예수님의 유대인의 왕이라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가 머리 위에 있었다는 성경의 기록을 토대로 가로막대와 세로 막대로 만들어진 이 십자가에 예수님이 매달리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T 자형 십자가 위에도 명패를 세웠기 때문에 예수님이 매달린 십자가는 타우형 십자가, T자형 십자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이 십자가는 먼저 세로 막대를 땅에 세우고 그리고 죄수를 그 나무에 가로 막대에 못 박아서 도르래로 꿰어 높이 들어 올린 다음 이미 세워진 세로막대에 끼워놓는 방식으로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다리에 큰 못을 박아서 세 개의 대못으로 사형 받을 사람들을 고정하였고 거기에서 죄수들은 목숨이 붙어있는 동안에는 최대한의 고통을 받도록 형벌 당하였던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형벌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규례가 있었는데 죽도록 채찍에 맞는 것이었고,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는 스스로 짊어지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그 자체가 너무나 끔찍한 형벌이기 때문에 누구에게 그것을 대신 지워주는 것은 매우 심각한 모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두 가지 규례 위에 조롱을 당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하는 명패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꾸미고 조롱한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채찍에 맞으신 후 가시 면류관을 눌러 쓰시고 온 얼굴에 피가 흐르는 가운데 그들은 예수님의 어깨 위에 붉은 보자기를 씌워 왕의 홍포를 흉내 내었고, 손에는 갈대를 들려주어 임금들의 손에 들린 지휘봉을 흉내 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몰골을 모든 사람 앞에 웃음거리가 되게 만들고, 그래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멸시와 욕을 당하며 그 십자가의 형벌에 처해졌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쁜 일이라고는 하신 적이 없으신 그분인데 그 끔찍한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의 형벌을 당하였을 때 순순히 그 십자가를 지시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끌려가신 것은 사단도 모르고 인간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을 위한 커다란 구원의 길을 예수를 저주하심으로 열어주신다는 대속의 지혜였던 것입니다. 죄는 우리가 졌으나 하나님은 그 죄를 그리스도 예수에게 짊어지게 하시고, 그 십자가 형벌을 당하게 하심으로써 큰 고난을 겪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지혜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악인에게 굴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승복해서 자기를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기를 십자가에 바치셨으니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처형이었던 것입니다.
하고 많은 사형의 방법 중에 인류가 고안해 낸 가장 끔찍한 형벌인 십자가 처형을 통해 죽음을 맞이하심은 우리 인간의 지은 그 죄의 심각성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 죄와 그리고 그 죄의 크기가 너무 끔찍하기 때문에 그 끔찍한 죄를 인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는 가장 끔찍한 처형을 택하심으로 죄인 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를 당신의 고난 속에서 녹여내셨던 것입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기독교 신앙의 많은 진리의 요소들을 짜고, 짜고, 짜서 한줌에 쥐게 될 때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구약의 그 많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들이 한 사건을 향해 달음질쳐왔으니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시는 십자가 사건이요.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 사건이 불꽃처럼 온 하늘에 퍼져 신약의 시대에 나타났으니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의 신비인 것입니다.
이 놀라운 지혜는 천사들에게도 감추어진 것이었고 오히려 우리를 통해 이루어져 가는 구원의 역사의 전개를 통해 천사들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더욱 확실히 발견하며 주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 펼쳐지는 이 구원의 역사는 천사들도 그것을 통해 배움으로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공경하게 되는 그런 영광스런 하나님의 성품의 펼쳐짐인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떨리는 두려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십자가를 통해 우리 낮고 천한 인간들을 포기하지 않고 찾아오시는 이끌리는 사랑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그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발견하는 것만큼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우리를 향한 사랑의 깊이를 아는 만큼 나를 향한 이 사랑이 온 인류에게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예전에 우리가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대의인 것입니다.
III. 예수님의 기도
A. 죄사함을 빌으심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을 때에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기고, 피가 흐르는 큰 고난 속에서도 말할 수 없는 통증을 온 몸에 느끼시사 결국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까지 울부짖으셔야 했던 상황인데도 예수님은 그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용서 받아야 할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였습니다.
이 기도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대신 빌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장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아버지께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빌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간악한 로마 병정들과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고함치며 예수의 생명을 요구했던 유대인들과 마지막에는 그 분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게 만들었던 우리 같은 모든 죄인들에게까지 해당되는 말이 바로 ‘저희의 죄를 용서해 달라’ 는 기도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이 십자가의 끔찍한 형벌을 당하셨는데 이러한 끔찍한 고통의 형벌이 끝까지 하나님이 용서해주시지 않는 모든 우리 같은 인간들이 당하게 될 형벌이라는 것을 온 몸으로 경험하고 계셨습니다. 머리에는 가시관을 써 피가 흐르고 온 몸은 채찍에 터져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겨 피 흘리시고 계셨지만, 육체의 고통보다 큰 것은 하나님의 부들부들 떠시는 진노의 형벌을 당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고통이었습니다. 이런 엄위한 하나님의 심판이 용서받지 못한 모든 인간들에게 떨어질 것을 생각하셨을 때 예수님은 당신의 육체의 아픔을 넘어서서 하나님께 버림받는 인류의 영혼에 대한 고통에 몸서리 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간절한 기도를 아버지께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의 군인들이나 그렇게 해 달라고 요구했던 유대인 모두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의미에서는 어불성설인 핑계를 대시면서까지 우리 편에 서셨습니다. ‘저희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왜냐하면 저희는 자기들이 하는 일의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끔찍하게 죄 지은 인간 사이에서 마치 양편을 향하여 모두 잘못이나 하신 것처럼 아버지께는 우리의 죄를 핑계 대며 용서를 빌었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이 아프도록 우리를 위해 일평생 가르치셨고, 마지막엔 십자가에서 자기의 찢으신 살과 흘리신 피로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지를 보여주어 완악한 우리를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찬양)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우리는 과거의 아름다운 신앙의 간증으로 오늘을 살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그 과거의 신앙을 가지고 살았고, 오늘은 오늘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에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주님께 돌아왔다 할지라도 늙은 지금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어린 아이처럼 주님이 나를 향한 그 큰 사랑과 그 사랑의 합당하게 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인하여 아파하고 주님이 자기를 위해 죽으신 고난을 기억하면서 매일매일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 없이는 누구도 오늘날 주님의 크신 사랑에 부합하는 성도의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장 큰 의무는 그리스도 예수의 탁월하심을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배우고, 그렇게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랑에 깊이 감격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의무요, 책임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간절히 우리의 죄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빌어주셨습니다. 죄인들이 죄를 지었지만, 자기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할 줄도 몰랐던 그때에 그들이 모르는 임박한 심판을 예수님은 아시고 죄인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아버지께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비셨으니 우리도 불쌍히 여길 줄 모르는 영혼을 위하여 예수 홀로 우셨던 것입니다.
B. 용서하시는 사랑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왜 하나님 아버지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아들을 사람의 몸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시고, 아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같이 쓸모없는 인간들을 위해서 고결하신 몸을 십자가에서 노예의 몸처럼 찢고 피 흘리셨을까요? 성령님은 무엇 때문에 돌 같은 우리의 마음을 오늘도 녹여서 우리의 힘으로는 사랑할 수 없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사랑하게 하고, 한때는 우리가 버리고 배반하였던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하시는 그 놀라운 감화는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주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사랑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용서는 바로 우리의 죄를 통해 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의 죄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큰 사랑 때문에 그 관계가 끊어지지 않고 지속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용서를 통해서라도 그 관계가 끊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영혼의 힘이 있는 작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끊어졌던 관계를 다시 이어지도록 만들었고, 하나님의 영적인 생명이 우리의 몸과 마음속에 물 붓듯 부어지도록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으로 우리를 어루만지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된 것은 참으로 기이한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저주의 상징이었던 이 십자가가 오늘 우리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기독교의 표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은 거기에서 끔찍이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으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관계를 지속하게 하는 사랑의 힘을 보여줍니다.
IV. 관계를 지속하게 하는 사랑
사랑은 관계를 지속하게 하는 힘입니다. 두 사람이 사랑할 때 사랑하는 마음이 없거나 적은 사람은 언제든지 그 관계를 통해 얻는 즐거움이 희생보다 작다고 판단될 때에 그 관계를 포기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많은 사람은 자신 안에 있는 사랑의 성향 때문에 그 관계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혹은 고난을 당하거나 손해를 보고 상처를 입을지라도 그 관계를 지속하기 위하여 용서하고 불쌍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우리와의 관계를 계속 하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와 넓이와 깊이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지은 죄와 지금도 주님을 거스르고 사는 반역을 고려한다면 진즉에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를 끊어버리셨어야 당신에게 도움이 되셨을 텐데 하나님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끝없는 사랑의 성향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면서 까지 우리와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힘없는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것은 세상의 권력 면에서는 그 분의 힘없음을 보여주지만, 끝없는 사랑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인간의 죄와 모든 허물을 능가하는 우리와의 관계를 계속하고자 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들이 끔찍이 죄를 지었고,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인간인줄 아셨기 때문에 오히려 듣지 않는 우리를 녹이는 대신 들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의 진노를 푸시고 우리 불쌍한 인간들의 죄를 용서해주시도록 마치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께 형벌을 받으시는 것처럼 눈물로 간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는 거룩하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이 간절한 중보의 기도와 희생을 통해서 죄인을 향해 품었던 진노의 당신의 버리시고, 그리고 당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돌이키기를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돌리는 것처럼 그렇게 당신 자신의 마음을 바꿔 우리를 사랑하게 되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용서는 우리의 진한 죄를 단순히 용서해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과 우리 사이에 죄가 없었던 것처럼 앞으로 계속해서 ‘나 하나님이 너희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는 나를 사랑하고 내 사랑 안에서 내 생명과 은혜를 누리며 살도록 부르시는 아버지의 초청’ 하시는 음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입으면서 우리는 두 가지로 이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선 제일 먼저는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신 것을 일평생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어린 주일 학교 학생의 때나 회심하여 처음 주님의 사랑을 알던 초신자의 때나 다름이 없이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사랑으로 나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1740년 영국 캄버스랭이라고 하는 곳에서 큰 부흥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지혜를 버리고 복음으로 돌아오고 있었고, 냉대 받던 십자가의 교리가 아름답게 선포되고 있었습니다. 많은 회중들이 모여 기도할 때에 맨 뒤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 한 사람이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강단에는 어떤 젊은 설교자가 십자가를 외치고 있었고, 그 뒤에서 흰 머리를 한 노인이 통곡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그 고을의 유명한 신학교의 교리학 선생님이었습니다. 노년의 이 신학자는 눈물을 흘리며 ‘일평생 그리스도를 내가 가르쳤지만 오늘 그 속죄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이렇게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 줄을 알았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이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커다란 의무요, 행복인지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주 저는 영국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여러 교회를 돌아보고, 또 수많은 목회자와 영국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옛날에는 그렇게 하나님의 복음이 울려 퍼지던 그곳에 이제는 교회가 싸늘히 식어가고, 문 닫고 있고, 담임 목사 한 사람이 8개 내지, 12개의 교회를 담당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이 큰 사랑이 잊혀지는 곳마다 교회는 무너졌고 생명의 샘은 말랐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손들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은 이 복음이 조국의 교회에 변함없이 울려 퍼져 그들도 이 오래된 복음을 들으며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십자가에서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만을 공경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 은혜를 일평생 잊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끔찍한 죄인이요, 한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알고 내가 죄인임을 고백했던 그 순간을 잊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알고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는 교인들은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겸손합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분수를 압니다. 주님을 위해, 주님의 교회를 위해, 고난을 당할 때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임을 알아 오히려 감사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마다 이렇게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하는 것이 없을 때 신앙의 싫증에 빠지게 될 때 그때에 우리는 십자가의 감격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빚진 자인 줄 깨달으십시오. 변함없이 그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예수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한 가지는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죽이시기까지 용서하신 것은 우리와의 관계를 계속하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당신과 관계를 맺는 우리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동일하게 당신과 관계를 맺는 모든 인간들과 관계를 맺으시길 원하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시 십자가를 통해 용서해 주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계속할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과도 사랑의 관계를 계속하게 하기 위하여 예수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고난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지속하고 싶으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깨달은 모든 사람들은 지체들을 또한 용서하여야 합니다. 용서가 없이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의 교통이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만족을 준적이 없고, 충분히 그 사람에게 자신을 바친 적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이렇게 보여주심으로써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힘들 때마다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까지 우리에게 오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사람의 허물을 보고 나에게 악을 행하는 결점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와의 관계를 계속 하기 위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느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못 박히신 그 십자가에서 ‘너희는 서로 용서하라’ 는 주님의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용서하는 일이 힘들고 다른 사람의 결점을 담당하는 일이 고통스러울 때마다 우리는 잊지 맙시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그 분이 당하신 저주의 고난이 내가 당해야만 했던 형벌임을 깨달았을 때 그 때부터 이후에 우리의 인생은 덤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백한 바와 같이 ‘내가 사는 것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입니다.’ 덤으로 사는 우리들을 낙원에 데려가지 아니하시고 아직까지 이 땅에 남겨 두시는 것은 그 십자가 사랑의 마음을 품고, 오늘도 우리로 하여금 평화의 도구로 살게 하시기 위하여 주님이 여기에 우리들을 남겨 두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V. 결론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모두 버려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과 같이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그 큰 사랑을 입었으니 그리스도의 그 크신 사랑을 깨닫고 아버지 앞에 용서를 빌면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다른 지체들을 충심으로 용서하여 부족하고 때로는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그것 때문에 우리에게서 끊어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들어와 추로했던 자기의 욕망을 버리고 성도의 사랑 안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기쁨으로 알도록 우리는 기회를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 과연 십자가가 있습니까? 우리의 생애에 과연 고통이 있습니까? 마지막 살 한 점, 피 한 방울까지 우리를 흘려주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 보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살을 찢고 피를 흘려 죽었으니 내가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너희는 서로 용서하라 그리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난의 주간에 그리스도 예수의 이 음성 안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9.죽음으로 용서하신 하나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
I. 본문해설
사도는 1장부터 4장까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구원의 진리를 묘사하였습니다. 특별히 3장부터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칭의의 교리를 설명한 후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고 말하면서 실제의 삶에 있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이 칭의를 어떻게 성취해 가야할 지를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게 된 사람들입니다. 예전에는 낯섦과 거리감이 있었고, 반감과 적대하던 사이였던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화해를 경험하고 주님과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삶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에게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도 때로는 연단과 그리고 시련이, 환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소망이 있기 때문인데 이 소망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부어진 소망입니다.
II. 사랑을 확증하신 하나님
그러면서 사도는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인지를 설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 때나 모를 때에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하나님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어떤 설교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통해 나타낸 자기의 사랑의 나타냄보다 더 잘 좋은 방법으로 자기의 사랑을 보여주실 수 없는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어차피 사랑의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풀포기 하나에도,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 하나에도 믿음으로 보면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이 묻어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파생적인 것이고, 이 사랑의 원천이 있는데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의 보이는 원천이 바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를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이 아주 명백하게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만나서 화해를 누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찬란한 복음진리의 핵심이며, 그 십자가의 빛은 참으로 놀랍고 찬란하여서 그 진리가 적용되는 수많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마다 복음의 아름다운 빛깔들을 각각 다르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만과 교만에 빠졌던 사람들은 십자가 때문에 겸손해 집니다. 낙심하고 실패하여 주저앉은 사람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이 세상에서 잃어버릴 것들 때문에 두려워하고 떠는 사람들에게 이 십자가는 말할 수 없는 담대한 용기를 줍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다양한 환경과 상황 속에 놓인 사람들에게 놀라운 힘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던 때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고 있었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율법도 몰랐으며 하나님의 사랑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이방의 백성들이 다 개처럼, 돼지처럼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올바른 정신의 힘을 가지고 있는 많은 이방사람들은 욕망대로 살기를 거절하고 참되고 영원한 것들에 대한 갈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영혼을 향한 갈망은 논리로 나타날 때 철학과 사상으로 나타났고, 감각으로 나타났을 때에 예술과 문학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기에서 비춰오는 영혼의 한줄기 빛을 발견하며 위로와 용기를 얻고 그것으로 자기 자신들의 세계관을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빛들은 참된 영혼이시며 사랑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온 작은 쪼가리들이었습니다. 그것들을 자기의 세계관 속에서 해석하고, 그리고 그것으로 다시 영원한 세계에 있는 것처럼 역투사하여 그들은 왜곡된 세계관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래서 엄격하게 자기를 절대하던 사람들도, 인류애를 부르짖던 평화주의자들도 하나님과의 진정한 화목은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율법이 없는 사람들이었으나 아주 율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 하나님이 유대인에게는 돌 판에 새겨진 율법을 주셨고, 이방인들에게는 그 마음에 새겨진 율법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본성의 빛 아래에서 율법의 빛을 따라 살던 사람들은 그나마 덕 있는 삶을 다소간 살았습니다만 그 빛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희미한 양심의 빛과 인간의 사상과 철학으로 죄악과 허물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는데서 오는 죄악의 증상들을 어느 정도 누그려 뜨릴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기대하시는 바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로 이런 백성들을 깨우쳐 참된 진리의 빛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소명된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돌판의 율법은 지키고 있었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도록 그를 택하신 언약은 이방 백성들을 향하여 교만의 토대가 되었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그 율법은 지키며 삶으로 오히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필요로 하지 않는 마음의 부요함을 가져다주는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유대인들에게도 그리고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은 당신이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셨으니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구세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으셨던 그 분이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까? 아버지의 보좌 우편에 계시며, 하나님과 교제하시고, 모든 성도들의 천사들의 경배와 찬양을 한 몸에 받으시는 아버지와 동일하신 성자께서 굳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우리 인간을 화목 시키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를 향하여서는 우리 인간들이 지은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으심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풀어드리고, 인간을 향하여는 당신 자신이 지고 이 사랑을 보이심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감각을 통해서라도 알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던 것입니다.
신앙이 좋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렇게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바로 그 십자가 아래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이고,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되는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정수인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석가모니 없이도 존재할 수 있고, 그리고 마호메트교는 마호멧 없이도 존재할 수 있지만 기독교는 그리스도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하나님께서 확증해 주셨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던 때에 우리가 직접 그분을 뵈었더라면, 우리의 귀로 직접 그 분의 음성을 들었더라면 우리의 손으로 그 분을 만져보았더라면 훨씬 더 좋은 믿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 반대입니다. 살았을 때 주님을 본 많은 사람들은 주님을 보고, 듣고, 만졌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잊혀지기 쉬운 육체의 감각 기관을 통해 우리에게 들어온 것들이었습니다. 감각 기관을 통해 그분의 소리와 그 분의 빛깔과 모양, 그리고 그 분의 보드라움이 우리의 감촉 속에 느껴져 마음에 전달되고 그래서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미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감각은 종종 오해될 수도 있고 또 바르게 인식된다고 하더라도 감각을 통해 습득된 것들은 쉽게 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잊어졌다,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방법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것입니다. 즉, 성령을 통해서 복음의 진리가 선포될 때 감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영혼의 지성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믿음으로 그 분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육신의 감각에 의존하면 아무데도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성령을 통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 분을 우리의 지성으로 직접 믿음 안에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은 감각을 통해 만지고 듣고 그리고 보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한 것이고 사라지거나 잊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감각을 통해 들어온 기억은 상실 될 수 있지만, 믿음을 통해서 들어온 기억들은 우리 속에서 결코 잊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약성도들의 유익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례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중에 세계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요한 보다 크다” 고 말씀하신 이유가 이러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뵈옵는 영적인 축복에 관련된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이 이 온 인류를 어떻게 사랑하시는 것과 그리고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것과 그 교회의 지체인 내가 교회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랑을 부여받고 있는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를 그 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뛰어넘어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가슴 저미는 사랑을 증거 받는 것입니다. 돌 같은 마음이라도 이 증언에 녹지 않을 수 없고, 쇠 같은 가슴이라도 이러한 주님의 사랑에 변화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은 우리 안에 충만히 계신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날로 더욱 새롭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령 충만하게 살수록 바로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선명하게 느껴집니다. 그리스도가 커 보이면 세상은 작은 것이고, 세상이 커 보이면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는 왜소한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는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크게 느껴지도록 만들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날마다 우리가 누구였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III. 사랑을 확증하신 방법
그러면 하나님이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를 향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을까요?
A. 그리스도의 죽으심
오늘 성경은 제일 먼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합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참 사람으로서의 모본이 무엇인지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셨지만 동시에 인성으로는 사람의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 인성이 순종을 통해서 더 온전히 고난을 통해서 주님을 향한 더 온전한 순종을 배워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의 몸 안에서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으신 그 분이 굳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주 친히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셨습니다. 아들을 죽인 것은 어떻게 보면 로마 병정들인 것 같고,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유대인들인 것 같고, 또 어떻게 보면 예수를 사형 판결한 빌라도의 소행인 것 같고 더 본질적으로 보면 사단이 그들 모두를 움직여 예수를 죽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도구일 뿐이고 궁극적으로 예수를 죽이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하나님이 당신과 본체이신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시고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면서 까지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싶으셨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죽으시는 십자가를 통해서만 그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푸실 수 있었고, 또 그 십자가를 통해서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기가 스스로 원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날 때에는 자신의 능력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타락한 죄인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타락하자마자 하나님께서는 제사 제도를 만드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뵈옵고자 하는 사람들은 성막으로 가야 했고, 거기에서 자기의 죄를 위해 대신 피 흘리고 죽는 어린 양으로 제사하여야 했습니다. 제물들마다 피를 흘리고 죽었으니 피는 곧 생명의 상징이요, 그 피를 쏟았다는 것은 생명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끊음은 바로 그가 짊어진 우리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은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지은 죄대로 갚으시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렇게 짐승들을 향하여 당신의 진노를 쏟으심으로 인간에게 자기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등지고 산 죄의 심각함과 무서움을 깨닫게 해주시는 한편 그런 죄에도 불구하고 결국 죄인들은 하나님이 용서하셔서 교제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동시에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렇게 예수의 죽음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과 함께 시작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으신 것이 당신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죽이신 죽음 때문에 죽으신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죄도 없으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며, 흠도 없는 완전하신 인간이신 그 분이 죽으셔야 했던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신 것인데 그것은 자기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받게 된 저주가 아니라 우리 인간이 지은 죄를 대신 감당하시기 위해서 죽으신 고난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분이 십자가에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손과 발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모두 쏟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피 묻은 두 손으로 한 손으로는 하나님의 손을, 한손은 우리 인간들의 손을 잡아 그 두 손을 맞잡도록 만들어 주셨으니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이루신 화목의 섬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을 얻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거저 죄 용서를 받고 의롭다 함을 얻은 우리 인간들의 최대의 사명은 그러므로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주님 등 뒤에서 행복하려고 하는 모든 파괴적인 시도를 버리고 순전하고 단순하고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즐거움을 배워 가는 것, 그 분과의 완전한 평화 속에서 구김이 없이 살아가는 참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 이것이 바로 주님이 자기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까지 우리에게 보고 싶으셨던 모습이신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부활의 아름다운 의미는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의 의미의 깊이를 터득한 사람들에게만 다가오는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면 우리의 기억도 희미해지고,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던 기쁘고, 슬프고, 분노하고 아름다웠던 일들도 점차 잊혀져 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흐르고 우리의 정신이 희미해져도 잊을 수 없는 사실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말할 수 없이 추악한 죄인들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를 그 피로 구원하셨다는 이 두 가지 사실입니다.
(찬양) 손과 발 날 위해 못 박혔네 왜 날 사랑하나
죄 용서 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했나 왜 날 사랑하나
그래서 요한은 말하였습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독생자를 화목재물로 주셨음이라” 고 하였습니다. 인간 사회 속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은 바로 이 영원에 속한 하나님의 사랑의 희미한 반영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시간과 공간 안에서 찬란하게 뿜어낸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랑의 본보기입니다.
그런데도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원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발견하려고 하지 않고 매우 헛되고 조잡스러운 이 세상일에서만 하나님의 사랑을 찾으려 하는 것이니 이는 광맥을 버려두고 개천에서 금을 찾으려고 하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는 이 복음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야 했던 동기가 우리같이 더러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큰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가슴 깊이 주님이 죽으신 것이 바로 나를 위함이었음을, 주님이 죽으신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한 몸으로 이루게 하시기 위해서 죽으신 것이었음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교만한 사람은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만, 주님이 자기를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허탄한 것을 쫓던 사람들은 그 일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없이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목숨을 건 사랑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어디까지 사랑해야 될지를 여기에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싫증 날 때까지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참고 싶을 때까지만 인내하는 것은 진정한 인내가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얼마만큼 사랑해야 될까요?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주님이 너무 크고 위대하기 때문에 우리는 티끌같이 느껴질 때까지 그분께 봉사하며 사는 것이 우리에게 최고의 행복이 되어서 주님이 가득 차실 수 있다면 나라는 존재는 없어져도 좋은 것 같은 그런 존재가 될 때까지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사랑의 표징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그 분의 십자가를 볼 때마다 우리가 주님을 충분히 사랑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렇게 죽기까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또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확증하셨는데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그렇게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 빛나는 것입니다. 밝은 빛 아래의 조명탄은 빛날 리 없지만 그러나 캄캄한 밤하늘의 조명탄은 찬란하게 대낮처럼 빛납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아직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 분께로 돌아가야 할 필요를 느끼지도 못하던 그때에 조차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던 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눈은 어둡게 하였지만, 사랑은 하나님의 눈을 어둡게 하여 당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천한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 때 그것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인간을 향한 최고의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여인에게 태어나시어 거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이신 그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분이 연약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때가 아무도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로 가득 차던 그때였고, 우리도 또한 죄인, 그리스도를 떠나서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한 덩어리의 인류로서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언약을 따라서 구원을 얻은 우리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그때에 내려 오셔서 못 박히셨습니다.
C. 용서로 관계를 여심
오늘 성경이 말합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것이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해 용감히 죽는 자들이 가끔 있지만, 죄인을 위하여 죽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그런데 주님은 오히려 스스로 의롭다고 믿고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서 낮고 천한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죄악을 이기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가 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고난이 자기의 죄를 위한 하나님의 해결 방법이었다는 사실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그 피가 보혈이 되어서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게끔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고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그 분이 짓이겨지도록 처참하게 살 찢기고, 피 흘리시고, 물을 쏟으시며 죽어 가신 그것이 나의 죄 때문임을 알았을 때 우리는 죄를 지은 나를 원수처럼 생각하고 그리고 나의 욕망에 종노릇하며 살아왔던 지난날들을 통절히 후회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즐기던 그 수많은 죄악들은 더러운 버러지처럼 징그러웠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이 계속되었지만 십자가를 만난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을 향하여 변함없이 계속되지는 않았습니다. 한 때는 복음의 감격하였고 깊이 녹아내리는 그 마음 안에서 피 묻은 십자가 하나로 만족했지만.
(찬양) 그러나 죄악이 나를 삼키고 내 영혼 갈 길을 잃었네
IV. 결론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고난 주간을 맞이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주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기도의 문이 막히고, 말씀의 빛이 그쳤습니다. 마음은 굳어지고, 정욕으로는 쉽게 움직이지만 하나님의 진리에 의해서는 요동하지 않는 자신의 돌 같은 마음을 발견하는 사람들에게는 다가오는 고난 주간이 정말 괴로운 주간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대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때에도 계속되고 있고, 그대들이 느끼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과 화목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당신께 나아오는 길도 십자가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찬양)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주님의 품으로 한 걸음씩 나가네
우리가 불순종해서 잠시 이 세상의 유혹으로 떨어져서 주님과의 실제적인 화목을 잃어버릴 때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우리의 공로가 아닌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를 통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이 자체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이 없으십니다. 오직 이렇게 죄를 떠나서는 살 수 없고 생명인 하나님 자신께 붙어서 사는 길을 알 수 없는 해갈을 한 수많은 인간들을 당신의 임마누엘의 샘에 불러 그 피로 속죄함을 얻고 그 피를 먹고 그 피안에서 살게 하시는 것, 그래서 너는 이제 고쳐졌으니 자유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로 참된 인간으로 살아가는 그것이 자기의 아들의 임마누엘 샘에서 그 피를 마시게 하시는 하나님의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실제적인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리고 영혼의 어두움이 그리고 마음의 굳어짐이 지성의 눈멂이 정서의 완고함이 느껴질 때마다 우리는 영혼의 게으름과 영혼의 싫증과 육체의 게으름을 떨쳐버리고 다시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하는 유일한 그 길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하나님이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리어진 휘장을 찢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좌에 이르도록 뿌리신 그 핏기를 인간에 의해 모두 신발을 벗고 맨발로 그 핏기를 걸어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에 할 수 없는 죄인이 이르게 될 때 아버지의 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우리를 사랑하신 자비의 주 아버지 주께로 나갈 때에 기도 들으사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이름난 죄인들이 모두 그 핏 길을 걸어 하나님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갔습니다. 주님은 할 수 없는 죄인들을 아들의 피를 발라 용서하시고, 다시 당신과의 화목 속에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교회 안에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지체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사실 그들이 지체인 것은 틀림없지만 타박상을 입어 죽어가는 세포처럼 교회에 붙어있습니다. 옆의 세포들이 열심히 자기의 자원들을 나눠주며 그를 섬깁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의 살을 갈기갈기 찢으시고, 그리고 물과 피를 모두 쏟으셔서 이루고자 하셨던 것이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여러분의 그 손은 그리스도께서 피 묻은 한 손으로 여러분을 붙들어 피 묻은 하나님의 손과 다시 맞잡게 해 주는 손입니다. 그 손으로 범죄한 것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 분이 여러분을 끌어안으신 놀라운 사랑 때문에 용서를 받았거늘 어떻게 여러분이 이 세상의 품에 안길 수 있겠으며 그렇게 모질게 주님을 욕하던 세상의 입술에 입 맞출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께로부터 난 사람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으며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리는 사람들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용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잠시 머무는 나그네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으로 우리에게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주신 그 분의 십자가의 확증은 바로 용서로 우리와의 막힌 관계를 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용서는 또 다른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한 가지 속성에서 빛이 뻗쳐나가 자기에게 죄를 짓는 사람들과 그 사랑의 관계를 맺을 때 나타나는 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그래서 붉은 색의 불꽃이 구리와 맞닿을 때에는 푸른빛을 내고, 그리고 고무와 맞닿을 때는 그을음을 내면서 더 붉은 빛을 내며 타오르듯이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 죄 지은 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만날 때 그것이 용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사랑으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통해서 사랑이 그 사람에게 있다는 것이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러한 용서를 우리에게 베푸심은 한 편으로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부은바 되었으니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는 고백 속에서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영혼의 싫증과 육체의 게으름을 물리치십시요. 주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의 열렬함을 본받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한국 교회 초기의 신앙을 지탱해 오던 두 개의 신앙의 기둥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순교 신앙이고 하나는 종말 사상이었습니다. 종말 사상이 다가올 하나님의 왕국의 승리를 예견하는 것이라면 일사각오의 신앙 곧 죽음의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으니 이번에는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차례라는 신앙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용서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견딜 수 없는 상처를 주는 가족들, 교회안의 지체들, 심지어 여러분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철천지원수까지도 마음에서 녹여내서 용서해야 합니다. 그 용서를 뛰어넘어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미 여러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정말 십자가가 있나요? 고생이 십자가가 아닌 것을 안다면 정말 주님을 위해 치는 그 고생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예수가 아니라면 절대로 지지 않았을 건데 오직 예수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가슴 저미는 그 사랑 때문에 오직 그 사랑 때문에 내가 지지 않을 수 없는 그 짐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그리고 그 짐을 사랑하시나요? 주님이 자기의 십자가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그것을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시고, 우리를 위해 못 박히시면서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던 것처럼 마지막까지 그 십자가를 지고 ‘다 이루었다’ 하고 승리하신 것처럼 그렇게 여러분은 져야하는 그 십자가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통해서 예수를 배우나요? 그것을 통해서 나의 죽음,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에 참여하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영광으로 삼는 그 무엇이 나에게 있나요?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그 분의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우리를 위해 다 쏟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용서받은 인간인 줄 알고 겸손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고 사랑하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그렇게 우리로 할 말 없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지체들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은 이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공급해 주십니다. 이 십자가의 샘에서 마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10.기도하려면 용서하라
“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마가복음 11:25)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는 가운데 나온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말씀하시면서 먼저 믿음의 필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잎만 무성하고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꾸짖으셨을 때에 이튿날 제자들이 보니까 그 무화가 나무가 말라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명하신 대로 되어진 사실을 기이히 여기며 예수님께 그 사실을 고했더니 주님은 ‘너희가 믿음이 있으면 그 믿음으로 산을 명하여 바다에 던 지우라 하여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 ‘서서 기도할 때에 뉘게 든 혐의가 있거든 그를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의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고 말씀하심으로써 기도에 있어서 믿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용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II. 영적 교통과 기도
기도의 이와 같은 놀라운 영적 특성은 기도의 성격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 자체가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 교통과 기도는 하나님 보시기에 거의 일치를 이루는 중요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이 모든 피조세계와 관계를 갖고 계십니다. 자연과 우주 속에 있는 수많은 사물들은 서로 힘을 주고받고 운동하는 관계입니다. 이런 것들이 원인이 되고 또 결과를 만들고, 결과는 또 다른 것들의 원인이 되고 또 다른 결과는 또 다른 것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든 힘의 작용, 궁극적인 원천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피조세계의 어떤 사물 중 섞여 있을 수 있는 분은 아니시지만, 그러나 어느 피조물도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으니 모든 만물이 하나님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를 맺고 계시기 때문에 그것들은 봄이 오면 잎이 나고 꽃이 피는가 하면 여름이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결실을 하게 됩니다. 계절의 정확한 변화와 그리고 모든 자연의 순환도 이처럼 하나님이 그 피조물과 맺으신 관계의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 중 당신을 가장 닮은 인간의 영혼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신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자연의 모든 만물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원한다면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이 인격적인 교통은 다른 무엇보다도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로 하는 욕구이고, 또 성향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인간과 교통하시는 훌륭한 방편을 두 가지를 주셨는데 하나는 진리의 말씀이고, 또 하나는 기도의 교통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객관적인 지식과 사실들을 가르쳐 주지만 기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전 인격적으로 경험하게 만들어 주는 성령의 훌륭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많이 배우고 거의 기도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조금 배우고 많이 기도하는 사람이 기독교의 참된 본질에 대해서 더 많은 이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한 10여년 저는 미국에 설교하러 갔을 때 알라바마마라는 곳에 갔습니다. 거기에는 멀지 않은 곳에 헬렌 켈러라고 하는 그 소설 속에 나오는 소녀, 눈멀고 귀도 먼 그런 장애인으로 태어난 소녀가 자란 집이 100여년이 넘도록 아주 훌륭하게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설리반이라고 하는 선생님이 희생적으로 그 아이를 교육하였습니다. 나면서부터 눈멀고 귀 먹었기 때문에 그는 사물을 볼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이 그 아이에게 Water라고 써주고, 그리고는 보지 못하는 이 아이의 손을 이끌고 마당 한 가운데 있는 펌프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시원한 물이 쏟아질 때 아이의 손을 그 물에 대게 하면서Water가 어떤 것인지를 이 아이에게 체험시켜줌으로써 사물 하나하나에 대한 이해를 갖게 한 것입니다.
기도생활은 지식을 통해 배운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영혼과 전 인격 안에서 경험하게 만들어 주고, 나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해석하게 만들어 주는 훌륭한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의 본질이 지식이나 의지나 감정에 있지 않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앎에 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이처럼 지식으로 습득하는 기독교의 진리의 내용들의 설명할 수 없는 영적인 실제를 경험하도록 만들어 주는 고귀한 은혜의 방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공부해도 자신이 그 말씀 앞에 기도 속에 깨뜨려 지고 그 은혜에 의해서 젖는 그러한 신앙의 경험이 없으면 그는 그 지식으로 자기만 못한 사람들을 섬기기는커녕 깔보게 되고 그 지식 때문에 오히려 교만하게 되는 것이니 이는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는 한참 거리가 먼 행동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영적인 특성인 무시되고 있는 때에는 더더욱 기도생활에 힘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설명할 수 없는 신앙의 실체인 경건을 그 깊은 기도의 세계 속에서 붙들고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뜻을 영적인 감각으로 헤아리며 확신하게 될 때에 우리는 이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소망되신 그리스도 예수를 굳게 붙들고 믿음으로 싸워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적인 교통으로서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현실들을 극복하게 만들어 주시고 또 우리 자신으로서는 알 수 없는 비밀스런 은혜의 세계들을 체험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을 많이 알면 알수록 그는 겸손해지게 되고, 신비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도의 교통 속에서 경험하고 그 앞에 깨뜨려질수록 그는 하나님 앞에서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도 지식은 살아있어 마음에 남아있으나 전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 깨뜨려지지 않은 사람은 마치 김장철에 절이지 않는 배추와 같습니다. 가을이 되면 예전에는 먹고 살기가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찬을 김치로 해결했습니다. 그래서 겨우내 봄까지 김치 하나 가지고 모든 상을 차렸습니다. 김치찌개, 김치복음, 김치 국 이렇게 끊임없이 김치를 먹었기 때문에 김장을 많이 했어요. 저희 집도 200포기씩 김장을 했습니다. 작은 거는 절반을 쪼개니까 400 포기가 되고 큰 것은 네 토막을 내니까 800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거를 하여튼 겨우내 다 먹었습니다. 그러면 큰 배추를 사다가 대충 씻어서 칼로 치면 벌어지잖아요. 그거를 가지고 커다란 다라니에 집어넣고 그 다음에 소금물을 부어요. 그때까지는 이 배추가 뻣뻣해. 그래서 뭘 하나 뚝 잘라서 좀 이렇게 휘어보려고 하면 뚝 하고 부러져요. 그래서 거기에다가 소금물을 붓고 하룻밤만 자고 그 다음날 일어나면 노골 노골 해져서 배추가 숨이 푹 죽어요. 그러면 그거를 찬물에다가 깨끗이 씻고 한 쪽에서는 김장을 담근다고 김치 속을 만들어요. 그러면 그거를 가운데 들어있는 노란 거를 하나 딱 잘라서 거기에다가 이 김치 속을 맛있게 새우젓 이런 거를 넣고 이렇게 말아요. 김밥처럼 된 걸 하나 콱 깨물면 이 양쪽에 그 배추 즙이 쫙 퍼지면서 그래서 그 빨간 속에서 나오는 젓갈과 양념들이 입안에 확 퍼져요. 침 삼키는 거 좀 봐요.
그렇게 배추가 변하듯이 여러분이 아무리 교리를 배우고, 성경을 많이 배우고, 책가방을 들고 교회를 다녀도 기도를 해서 여러분이 은혜의 물에 그 지식이 잠겨야지만 하나님이 그 지식을 쓰실 수 있는 지식이 되고, 이웃과 그리고 지체들을 위해서 무릎을 꿇고 봉사할 수 있는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 지식이 참된 진가를 발휘하게 되고 그 지식 때문에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 앞에 빛나게 되고 영광을 돌려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 기도생활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전의 우리 신앙생활은 자녀들에게 성경을 읽게 하고, 기도를 하게 하는 것이 신앙 교육의 가장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부모인 여러분이 자녀들에게 심각하게 ‘너 기도 열심히 해야 된다’ 이렇게 충고한 적이 언제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안타깝고, 또 어려운 일을 만나거나 심령이 곤고한 사람들에게 기도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 중에 상당수가 지난 한 주간 동안 단 20분도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신앙생활을 해서는 절대 신앙의 경건의 능력을 유지할 수가 없어요. 여러분의 기준은 세상에 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이나 혹은 이 시대에 물들어 있는 평균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아닙니다. 세상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대로 흘러갈 때보다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흘러갈 적이 많았어요. 항해하는 뱃사공들이 바다물결을 보고 노를 젓는 법이 없습니다. 항해를 하면서 여러분이 배 난간에 기대어서 30분만 바다를 쳐다 보십시오. 울컥울컥 멀미가 쏟아지고 그리고 골이 터지는 것처럼 아파질 것입니다. 항해하는 뱃사공들은 밤중에도 노를 젓고, 그리고 돛을 높이 올려 항해했습니다. 그들은 출렁거리는 물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하늘 높이 떠 있는 별자리를 보고 운행하였습니다. 이 시대를 바라보면서 그들에게 적당히 맞추어 신앙생활을 하면 그 사람들이 잘못된 길로 갈 때에 우리도 모두 함께 떠내려갑니다.
기도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이처럼 변하는 세상에서 불변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우리의 마음속에 기도의 시간을 통해 각인시켜 줍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은 없다, 예수님은 죽었다고 말해도 기도하는 사람은 매일 그 분을 만났기 때문에 그런 자유주의적인 사상에 동조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비평주의자들이 세계에 가득해도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을 배우고, 그 속에서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이 무어라고 말하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아버지의 음성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기도는 얼마나 놀라운 신앙생활의 능력입니까? 이 능력의 통로를 통하여 세상을 이길 힘을 공급받고 악한 세상과 마주하며 싸울 수 있는 용기가 주어집니다. 원수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고 자기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을 위해 두 손을 높이 들고 그를 복주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만들어 주는 통로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그리스도인은 고통을 받거나 핍박 받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가난한 요인이 아닙니다. 정말 불쌍한 사람은 오늘 우리 뉴스 시간에 보는 바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장애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육체의 장애는 잠시 부끄럽고 잠시 불편하지만 그러나 영적인 장애는 정말 부끄럽고, 그리고 영혼이 불편하기 때문에 온전한 삶을 살 수 없어요. 그렇게 기도의 세계가 막혀져 있는 사람이야 말로 하나님 앞에 불쌍한 사람입니다.
III. 기도가 막힐 때
그런데 이 기도가 막힐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오늘 예수님께서는 명료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너희가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A. 사랑과 기도
이것은 사랑과 기도의 관계를 아주 분명하게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원래 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성향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 마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나게 되면 그 사랑이 없을 때에는 무관심하던 사람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고 이미 맺은 좋은 관계들은 더 풍성하게 하고 싶고 아직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들과는 선한 목적을 위해서 관계를 맺고 싶은 열망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오지랖이 넓어져요. 그래서 자기하고는 피도 살도 안 섞였는데 그 사람은 굶고 배곯는 것이 너무 가엾어서 내 먹던 것이라도 갖다 주어야 하고 일가친척도 아닌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그 사람이 고통 가운데 내 고통처럼 여겨져서 그가 편안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기까지는 내가 편안하지를 않아요. 이게 사랑이 가지고 있는 성향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랑의 기원은 하나님입니다. 삼위 안에 있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일체간의 이 사랑이 이 지구상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사랑의 원천입니다. 태양 하나로 말미암아 모든 지구의 생물이 생명을 유지하는 것처럼 태양 같은 삼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모든 자연 세계의 인간 세계 속에서의 사랑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제일 먼저 사랑이라고는 몰랐던, 올바른 사랑이라고는 몰랐던 인간이 어느 날 자기밖에 사랑하지 못하던 추루한 상황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깨닫게 되는 것은 자기 같은 죄인을 위해서 용서하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 자기 아들을 죽이기까지 우리를 위해서 구원의 길을 여신 이유는 하나님이 당신께 배반한 우리 인간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맺고자 하시는 사랑이 시킨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B. 용서 : 관계를 새롭게 함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용서가 끝이 아니라 용서를 징검다리 삼아서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면 우리는 그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나를 그렇게 용서해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자기가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존귀하신 주님이 자기를 사랑하시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를 깨달으며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깊고 진실하게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주님만 사랑할 뿐 아니라 주님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주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심지어 자연의 세계들도 그 분의 마음에 합당하도록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게 될 때에 그 주님을 향한 사랑 안에는 사랑하는 형제들이 있습니다. 이 그리스도 예수의 몸인 교회에는 한 사람 한사람 모두 자기 혼자인 줄 알다가 자기가 하나님 앞에 버림 받은 죄인인데 자기를 용서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회개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 사람 하나, 하나를 용서해 주시는 경험 안에서 회심을 경험하고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의 일부가 됩니다.
그래서 여기 모여 있는 이 성도들은 각자 각자가 하나님 앞에 자기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으로부터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 받았다는 신앙의 고백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 깊은 용서의 경험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또한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습니다. 전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 안에 형제들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순수한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한다면 그 형제 안에 하나님 빼놓고 누가 계시겠습니까? 라고 말함으로써 참된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지체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교통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한다 말하고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랑이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끊임없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종족을 보존하게 하시기 위하여 혈육을 사랑하는 본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기 부모를 끔찍이 사랑하고 모든 부모가 자식을 자기 살이나 뼈같이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올바르지 않은 자기 사랑에 붙잡혀 있으면 너무너무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도 자기와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 속에 사랑이 식어지고 자기의 사랑으로 오그라들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가정 복음화의 첫 번째 비결은 여러분이 은혜를 많이 받고 예수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를 낳아준 내 엄마, 아빠가 지옥에 가는 것을 볼 수가 없어요. 나와 함께 매일 아침상을 마주 대하는 사랑하는 나의 아내와 그리고 내 형제들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끊어진 가운데 음식을 먹어야 할 사람이 모래를 퍼 먹고 생수를 마셔야 할 사람이 오줌을 마시면서 살아가는 그런 영혼의 형편을 지켜볼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들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 속에 부족한 사랑 이외에 다른 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상당히 많은 분들은 이런 처음 사랑이 영혼에 대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어떻게 일치를 이루는지를 생생하게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깨닫고, 그 용서하시는 사랑에 떨려서 이 벌레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참회와 그리고 용서로 말미암는 감격의 눈물을 흘릴 때 그 눈물 안에 우리는 수많은 잃어버린 영혼들이 들어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한 방울의 눈물 속에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 내 인생에 스쳐가면서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혈육관계로 만났던 끊어질 수 없는 지체들, 그 수많은 사람들의 핏기 잃은 얼굴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는 행복했지만 기도 시간에는 슬펐습니다. 주님의 그 사랑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부어주시는 이유는 그 사랑을 받아야지만 그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과 관계를 올바로 맺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관계를 바로 맺고 하나님 앞에 사랑의 삶을 살아갈 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유무형의 자원들이 그 사랑의 통로를 통해서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흘러 들어가 행복하게 하고 그리고 그들을 유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돈이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밖에 사랑할 줄 모릅니다. 그러면 그 돈은 나에게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나에게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가 사랑하셨던 나의 지체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 사랑의 통로를 통해 나의 물질은 그에게 흘러들어갑니다. 그는 결핍하고 궁핍했는데 은혜 받은 나 때문에 그 사랑의 통로를 통해 그가 풍족함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물질을 주셨지만 저에게는 진리의 빛을 주셨습니다. 그가 진리의 빛을 받았어도 나를 사랑하는 통로가 없더라면 진리가 자기 자신에게서 최종적인 용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기 때문에 어둠의 빛 가운데 있는 나를 보고 불쌍한 마음이 생기고 나와 관계를 맺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그가 나에게 진리의 빛을 나누어 줍니다. 나는 그에게 물질을 주어 궁핍을 면하게 했지만 그는 나에게 진리의 빛을 주어 어둠 속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것이 나 하나의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통로를 타고 모든 사람 속에 흐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뜻이고, 이렇게 교회에서 흐르는 풍족한 흐름들이 차고 넘쳐서 이제는 불신자들이 있는 이 세상까지 흘러들어가게 해서 결국은 이 사람들이 주님을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넘쳐나는 세상에 살게 되는 것이 주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사랑으로 성도들을 교통케 하신 이유입니다.
기도 역시 하나님께서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필요를 채우는 것처럼 기도하지만 사랑의 교통 속에서 공동체적인 필요를 공동체적으로 끌어안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랑이 충만할 때에는 나는 변화 받았는데 변화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도 위해서 울지 않는 영혼을 위해 나를 위해 울어줍니다. 그리고 나는 섬기지 못하는 일은 저 사람이 섬기는데 그 사람이 잘 섬겨서 하나님께 유익을 줄 때 우리는 내가 그 일을 한 것보다도 하나님께 더 기쁘게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 자체가 사실은 공동체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아주 훌륭한 은혜의 통로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기도의 전범을 가르쳐 주셨어요.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그 주기도문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모두 복수로 부르시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사랑의 통로 됨과 기도의 통로 됨은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언제 기도가 가장 잘 되었는고 하니 시간이 많고 여유가 있을 때 기도가 잘 된 것이 아니라 나의 작은 마음이 주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 그때가 가장 기도가 풍부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할 때 기도의 언어도 충만해 집니다. 사랑이 식으면 기도는 수많은 언어의 공작을 필요로 하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이 가득 찰 때 언어를 공작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시간을 따로 구획 지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모든 삶에 즉각적인 기도에 준비할 수 있는 준비된 마음을 갖추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시련을 당한다는 가슴을 찢는 소식들이 들려올 때에도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우러러 바라보며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면 위로를 주십니다. 유혹과 정욕이 불같이 일어나는 시험의 상황 속에서도 두 손을 가슴에 포개고 내가 바로 짓고자 하는 이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살을 찢으시고, 피를 쏟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렇게 밀물처럼 밀려오는 유혹들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성도가 험악한 세상을 이기면서 사는 비결입니다. 기도 자체가 바로 이렇게 사랑을 흐르게 하기 위한 하늘과 이 땅의 자원을 흘러하게 하기 위한 통로로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체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바로 그것을 끊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용서하지 않으므로 끊으면서 기도를 간절히 하고자 하는데 기도 자체가 이렇게 유통하고 흐르기 위해서 주시는 수단인데 기도는 하면서 이거를 끊어놓으니 결국은 이 용서하지 않는 마음에 끊긴 이 교통의 줄은 결국은 기도를 고사시키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댐에서 수문이 열리고 물을 막 쏟아내다가 어느 순간 딱 멈춰요. 그러면 아래는 물 한 방울 없이 개울이 마르기 시작합니다. 강이 마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물속을 헤엄치던 고기들이 맨 바닥에서 펄쩍펄쩍 뛰기 시작합니다. 더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면 수초들이 마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고기들은 썩기 시작합니다. 생물하나 살 수 없는 황량한 모래밭으로 변합니다. 그런데 다시 수문이 열리면 파란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온 강을 두루 메우고 나면 그러면 생명의 기운이 강바닥에서부터 다시 뻗쳐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기도보다는 용서가 먼저예요. 그래서 오늘 예수님 말씀하셨어요.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이 혐의라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와 그 사람 사이에 막힌 것이 있는 것이 생각이 나거든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용서하라, 마태복음의 표현에 의하면 ‘화해하라 그러고 난 후에 하나님께 예물을 드려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비밀들이 사랑과 기도의 관계 속에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중요한 사실에 대해서 잘 몰라요. 그래서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용서하지 않고 원망을 품고 있는 것 자체를 그렇게 대단한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을 안 합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여러 가지 이유로 기도생활을 안하기 때문에, 원래 막혔었기 때문에 또 막혀도 그게 막힌 건지 안 막힌 건지 몰라요.
부부의 예를 들어봅시다. 부부가 서로 사는데 너무 사랑해. 그리고 금술이 너무 좋아. 그런데 뭔가 어느 날 일이 있어서 의견이 틀어져서 싸웠어요. 그러면 부부가 말은 안하고 서로 떨어져 있지만 너무너무 괴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저녁 때 와서 할 수 없이 둘 중의 한 사람이 잘못했노라고 용서를 빌면 그 다음에 옆의 사람이 아니야 내가 잘못했다고 그러고 용서를 빌고 화해를 해, 그리고 그 날 저녁에 잠이 들 때면 천국에서 자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사이가 안 좋아. 원래 앙숙이야. 그런데 낮에 대판 싸웠어. 그럼 밤에는 시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감정이 안 좋았는데 퍼 부을 새가 없었는데 한 판 하는 바람에 마음에 있는 할 얘기, 못할 얘기 다 쏟아놓은 거야. 저녁때는 마음이 시원해서, 체증이 내려가서 시원한 거야.
IV. 결론
제가 이 설교를 열 번째 하고 있습니다. 오늘 끝내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이 설교의 수많은 외침들이 여러분을 책망할 겁니다. 어느 교회에 목사님이 계셨대요. 이 목사님이 30년을 한 교회에서 목회를 했는데 30년을 교회도 떠나지 않고 붙어 앉아서 목사님을 일평생 가시처럼 괴롭혔던 남자 성도 하나와 여자 성도가 있었대요. 목사님이 돌아가실 때가 됐어요. 돌아가실 때가 됐는데 사모님을 부르더니 ‘여보 내가 이제 죽을 거 같은데 그 두 사람을 불러줘’. 그래서 이 사모님 생각에는 ‘아 목사님이 이제 결국은 이 사람과 화해하고 죽으실려나보다’ 그렇게 생각을 해서 전화 연락을 해서 두 사람이 달려오면서 서로 의논을 한 거야. ‘그 목사가 우리보고 정말 잘못했다고 그러면 그냥 괜찮다고 그러자’ 그러고 둘이 온 것입니다. 그러고 당연히 자기 둘이 와서 양쪽에 앉아 있으면 당연히 거의 목사님 돌아가시니까 당연히 손을 딱 붙잡으면서 ‘두 분께 제가 너무 미안합니다. 더 잘 섬겨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러면 ‘이해합니다’ 이렇게 해 드리려고 했는데 말을 안 하는 거야. 그러고는 서서히 죽어가는 거야. 그래서 이 사람이 하도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목사님 그렇게 말씀도 안하고 돌아가실 거면 우리 둘을 왜 부르셨어요?’ 그랬더니 ‘저는 예수님처럼 죽고 싶습니다. 두 강도 사이에서 죽은 예수님처럼’ 누가 웃자고 만들어 낸 이야기지만 우리가 그렇게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성경은 우리를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의 백성이요 불러주어도 우리는 그걸 너무 마음에 많이 담으면 안 돼요. 그거는 옷이고, 정체는 용서받은 죄인들입니다. 용서받은 죄인들입니다. 그 언제나 잊지 말아야 됩니다. 나는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라. 이 용서는 하나님이 죄가 들어온 이래로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고 악을 행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것은 교회에서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용서라고 하는 방편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용서는 그래서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새롭게. 한 사람의 사랑의 분량은 자기에게 악을 행하고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해 주는 깊이에 정확하게 비례합니다. 그 용서가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랑을 넘어설 수도 없고, 미치지 못하는 일도 불가능합니다. 종교적인 신념에 붙잡힌다는 것과 진리의 확신 속에 산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신념에 붙잡힌 사람들은 뻣뻣한 완악함이 항상 거기에 함께 있어요. 그러나 진리에 붙잡힌 사람의 강인함 속에는 언제든지 주님의 사랑에 꺾어질 수 있는 유순한 지성의 성격이 담겨져 있어요. 그래서 굴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만히 보면 우리의 마음속에 기도가 강물처럼 솟아나는 때가 있어요. 둘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있을 때와 죄를 회개할 때, 그 때 하나님의 용서의 경험을 통해서 물밀듯이 기도가 우리의 마음속에 확 밀려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와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교회 안에서 지체들의 관계는 바로 이렇게 미래에 이루어질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을 한 몸으로 만들어 가시려고 하는 그 일의 예고편입니다. 이것이 모판입니다. 그래서 이 속에서 그들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하나님의 참 사랑으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그런 진정한 용서가 있을 때 잘못되었던 관계들은 언제나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누군가를 진실하게 사랑한다 라고 할 때에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그 벽을 뛰어넘어서 그를 용서하고 용납하는 그 속에서 진정한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으로도 나누어 놓을 수 없는 그런 사랑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를 하나님과 누리고 그리고 우리와 함께 누리면서 살아가는 그 하나님 안에서의 복됨이 성도의 분복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살려면 기도해야 하고, 기도하려면 용서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교통경찰에게 걸렸어요. 사이드카를 타고 따라오면서 거기 서라고 그러더래요. 술을 좀 먹었습니다. 안 되겠다, 그러고 그냥 막 엑셀레이터를 밟았어요. 게이지를 보니까 180km로 달리는데 계속 경찰 오토바이가 똑같이 따라오면서 차 세우라고 계속 그러는 것입니다. 200km로 까지 올렸는데 옆에 똑같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진흙에 쳐 박혀서 술 취한 상태에서 계속 엑셀을 밟은 것입니다.
기도가 헛바퀴가 될 때가 있어요. 그때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내가 종종 그런 얘기를 합니다. 가족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전도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통계를 내보니까 10명의 등록 교인 중 6~7명은 다른 교회에서 오신 분들이고, 3명 내지 4명은 전도 받아서 처음 예수를 믿으시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처음 오는 분들이야 그런 게 없지만 교회를 떠나온 분들은 아주 문제없이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가 오신 분들도 계시지만 이사를 왔다든지 직장을 옮겼다든지 등등 또 개중에 어떤 사람들은 굉장히 마음 상하는 홍역을 치르고 교회를 옮기신 분들이 있어요. 이런 분들은 깨끗이 은혜 받고 깨끗이 정리해야 합니다. 나 때문에 아프게 했던 교회에 용서를 빌고 마음속에 묶였던 사람들은 기쁨으로 다 용서해서 풀어주고, 그리고 사랑하는 지체들에게 행여라도 잘못한 것이 있다면 진심으로 용서를 빌고, 그래선 안 되겠지만 목회자에게 잘못한 것이 있다면 충심으로 가서 사과하고 이해를 구하고 해서 마음에 얽히고설킨 줄들을 모두 끊어버릴 때 그때 우리의 기도가 피어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기도의 제목들이 있습니까? 우리가 기도하면서 이 세상과 상황을 움직이고 교회가 주님을 섬기는 이 일에 수종들 수 있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이번에 미국집회에도 가서 보니까 토요일 날 제일 열심히 기도를 하셨더라고요. 토요일 날은 정말 기도하는 것이 느껴졌어요. 여러분은 비행장도 안 나가고 나 혼자 대표로 갔는데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여러분이 섬김에 동참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여러분은 거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고 만약에 구원을 받았으면 하나님이 네가 잘했다고 절대로 안 그러세요. 여러분 모두가 그 일을 위해서 섬긴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서 그렇게 해서 기도해 주고 그래서 다녀왔어요. 그러니 여러분이 거기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가 잘 되면 아무데도 안 가도 주님을 열심히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가 끊어진 곳에서는 사방팔방 돌아 다녀도 아무 곳에서도 하나님을 섬긴 적이 없는 것입니다. 왜? 기도하는 사람은 가장 세속적인 일을 맡겨줘도 가장 신령하게 영광을 돌리지만, 그러나 기도 안하는 사람은 가장 영광스러운 신령한 일을 맡겨줘도 가장 세속적인 일로 바꿔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요.
얼마나 기도할 제목이 많은 지 한 번 보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사용하고자 하실 때 여러분의 몸은 여기에 있어도 여러분을 통해 아프리카를 바꾸고, 영국을 바꾸고, 미국을 바꾸고, 그리고 남미를 바꿀 수 있어요. 변화시킬 수 있어요. 중국을 변화시킬 수 있어요. 기도하면 자기는 못 움직여도 이 모든 일에 하나님 사업에 동참하면서 주님께 영광을 돌려요. 어떤 삶을 선택할 것입니까? 살려면 기도해야 하고 기도하려면 마음에 거리끼는 그림자 없이 충심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를 다 버리셨던 것처럼 그런 진실한 사랑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허물을 덮는 사랑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