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영원한 사랑
(2012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2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영원한 사랑 21 (2012.2.26 주일오전설교)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영원한 사랑 22 (2012.03.11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3 (2012.03.18 주일오전설교)
21. 신령한 은사들의 한계(고전13:8) 2012.2.26 주일오전 1
22. 떨어지지 않는 사랑(고전13:8) 2012.3.11 주일오전 10
영원한 사랑 24 (2012.03.25 주일오전설교)
23. 온전한 것이 올 때에(고전13:9-10) 2012.3.18 주일오전 19
영원한 사랑 25 (2012.04.15 주일오전설교)
24. 온전히 알게 되는 날에(고전13:9-10) 2012.3.25 주일오전 30
25.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릴 때(고전13:11) 2012.4.15 주일오전 41
영원한 사랑 26 (2012.06.10 주일오전설교)
26.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릴 때 2(고전13:11) 2012.6.10 주일오전 53
27. 지금은 희미하게 알지만(고전13:12) 2012.6.17 주일오전 61
영원한 사랑 27 (2012.06.17 주일오전설교)
28.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고전13:12) 2012.6.24 주일오전 70
영원한 사랑 28 (2012.6.24 주일오전설교)
29. 믿음 소망 사랑(고전13:13) 2012.7.1 주일오전 80
30. 사랑은 영원히(고전13:13) 2012.7.8 주일오전 91
영원한 사랑 29 (2012.07.01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1
영원한 사랑 21 (2012.2.26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2 (2012.03.11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3 (2012.03.18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4 (2012.03.2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5 (2012.04.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6 (2012.06.10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7 (2012.06.17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8 (2012.6.24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9 (2012.07.01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30 (2012.07.08 주일오전설교)
21. 신령한 은사들의 한계
I. 본문해설
II. 신령한 은사의 한계
A. 탁월한 은사들
- 예언, 방언, 지식
- “예언들이 있다 해도 폐지될 것이며(katargethesontai)
방언들이 있다 해도 그칠 것이며(pausontai) 지식이
있다 할지라도 폐지될 것이다(katargethesetai)"
B. 하나님의 뜻을 알게함
- 예언(propheteiai): 신약의 예언
- 방언(glossai): 변화, 계시성x
- 지식(gnosis): '지식의 말씀‘ 8절
C. 은사의 한계
- 은사의 일시성
- 은사의 수단성
III. 결론
22. 떨어지지 않는 사랑
I. 본문해설
II. 본문의 정확한 의미
A. 떨어지다: "piptei"
1. 문자적: 떨어지다, 넘어지다, 박살나다, 붕괴되다
2. 상징적: 멸망하다, 없어지다, 실패하다
B. 언제까지나: “oudepote"
- (어떤 경우에도) 결코
C. 사랑은: “heagape"
- (모든 사랑이 아닌) 그 사랑
III. 떨어지지 않는 사랑
A. 떨어지는 은사
- 불완전함과 관련
1. 예언, 방언, 지식: 아는것
2. 아는 것의 한계: 영혼의 어둠, 지성의 눈멂(죄+계시+약함)
3. 구원과 완성 사이에서 유용함
B. 떨어지지 않는 사랑
- 완전함과 관련
1. 기원: caritas 사랑은 하나님의 agape로부터 와서 그분 께로 돌아감
2. 대상: 시간속에도 사랑의 대상 있으나 시간을 초월함
3. 영원: 구원의 완성 후에도 유용
IV. 천국 - 사랑의 나라
A. 사랑: 관계의 성향
- 선을 흘려보냄
- 타자의 행복을 위함
- 그 안에서 사랑을 받음
- 사랑하고 받음: apape 안에서
B. 교회: 그 나라의 모형
- 그 사랑의 선취적 모형
- 은혜를 통한 감화
- 사랑을 받고 사랑함
- 교회의 아름다움: 관계의 아름다움
- 사랑으로 진리의 가치를 보임
V. 결론: 은혜를 사모하라
23. 온전한 것이 올 때에
I. 본문해설
II. 부분적인 은사들
A. 부분적으로: Ἐκ μέρους
- 부분으로부터
- 온전하지 못함
B. ‘아는 것’과 ‘예언하는 것’
1. 지식과 예언의 은사
- 정확하고 신뢰할만함
- 당시로선 꼭 필요했음
- 두 은사의 교회적 의존성
2. 부분적인 계시였음
- 탁월한 은사지만 한계 있음
- 지식과 예언 자체가 부분적인 계시에 의존함.
주어진 계시를 모두 알아도, 알게 한 계시를 모두
이해해도 부분적임
III. 온전한 것이 올 때
A. 온전한 것: τὸ τέλειον
- 목표에 도달한, 달성된, 다자란
- 탁월한 은사들의 지향점을 보여줌
- 지도와 목적지의 비유
B. 온전한 것이 올 때
1. 시기에 대한 두 해석
a. 신약계시가 종결될 때
b. 육체가 부활하는 영화의 때
2. ‘때’에 대한 올바른 해석
a. 그때: 영화의 때를 가리킴
b. 성경계시의 완성은 그 중요과정
c. 사도시대와 그 후 시대의 차이
- 완전히 무시할 때: 은사주의
- 완전히 단절할 때: 의문에 매임
d. 지식과 예언의 계시성의 변화
- 그때처럼 초월적이고 직접적x
- 복음에 대한 탁월한 통찰과 주어진 성경계시에
대한 해석에 성령의 조명과 은혜의 초월적 신비임
- 새로운 계시가 더해지는 것 아니라 주어진 계시를
깨닫고 통찰하게 하심: 오성과 이성을 도우심
IV. 결론
24. 온전히 알게 되는 날에
I. 본문해설
II. 지금과 ‘그때’ 아는 것
A. 지금 아는 것
1. 점진적 계시의 과정
2. 구원 완성 이전의 앎
a. 인간의 생래적 한계
- 영혼의 어둠
- 지성의 눈멂
- 죄의 내재함
b. 창조세계와 저주
B. ‘그때’ 아는 것
1. 점진적 계시의 완성을 넘어섬
2. 영화의 날의 앎
a. 새로 도입되는 앎의 방식
- 모형-실체-영광의 완성
- 성경 완성을 기다리는 앎x
- 성경을 통한 간접적인 앎x
- 조명을 통한 앎 아닌 vision
b. 새로운 지식의 내용
- 하나님을 아는 지식: 점증적
- 구속사에 대한 지식: 완전함
- 자연사물과 영적사물에 대해
- 모든 지식의 통합: 모든 지식의 중심에 그리스 도가 있음. 그를 통해 삼위를 사랑함
III. 천국, 지식과 사랑의 나라
IV. 결론
25. 어린아이의 일을 버릴 때
I. 본문해설
II. 어린아이와 장성한 자
A. 두 용어의 의미
1. ‘어린아이’: νήπιος
- νή(부정어)+ πιος(말하는것)
2. ‘장성한 자’: ἀνήρ
B. 비유의 의미
1. 생각하는 것: 지식
2. 말하는 것: 예언, 방언
III. 하나님 나라의 성장
A. 하나님 나라 성장의 국면들
- 영역, 통치, 기쁨
- 영광, 사랑, 계시
B. 그 나라: 지식의 확장
1. 계시방식의 변화
- 구약(모형) → 신약(실체)
- 신약(실체) → 완성(영광)
- 계시방식의 변화: 지식의 증대
IV. 하나님 나라와 지식의 증대
A. 성육신~부활까지
- 구약의 새 해석
- 하나님 나라를 보이심
B. 성령강림~영화까지
- 성경계시의 완성까지: 계시성격
- 성경계시의 완성이후: 조명성격
C. 영화시대 이후
- 직접적 전달(비전)
- 하나님의 영과 영혼, 영혼과 영혼
- 지식, 예언, 방언: 원시수단이 됨
- 장성한 자와 같은 지식을 가짐
- 지성의 분량 외 장애 없이 확장
- 지식을 통한 사랑의 확장
- 아름다운 그물망: 존재와 아름다움, 영광, 지식의 충만
V. 결론
26. 어린아이의 일을 버릴 때(2)
I. 본문해설
II. 구원의 도상에 있는 성도
A. 순례자의 신학
- 순례자와 지복자
–지식의 크기와 방식
B. ‘어린아이의 일’
- 복수(τὰ τοῦ νηπίου)
- 말함, 깨달음, 생각함
–지식 획득수단으로서의 은사: 구원의 완성 이전까지만
–완성의 빛에서 보면 유치한 단계: 사랑이 더욱 절실히 요구됨
III. 어린아이의 일을 버릴 때
A. 지식 획득의 방식의 한계를 앎
1. 고린도 교회의 오류
a, 지식 획득 방식의 유치함 모름
b. 영원히 가치 있는 것을 무시함
2. 고린도교회의 유치함
- 지식과 사랑의 결핍
B. 어린아이의 일을 버릴 때
1. 찬란한 영화의 빛 앞에서 생각함
2. 두 가지를 대조함
a. 영화의 날에 사라질 유치한 신적 지식의 획득방 식 vs 그 날 갖게 될 직접적이고 영광스러운 방식
3. 사랑은 변함없이 지속됨
IV. 결론
27. 지금은 희미하게 알지만
I. 본문해설
- 지금과 그때의 보는 것
II. 지금 보는 것
- δι᾽ ἐσόπτρου ἐν αἰνίγματι
- “불분명함 안에서 거울을 통해”
A. 당시 거울: 석경, 동경
B. 은사의 한계
1. 지식의 은사에 집중함
- 방언, 예언, 지식, 믿음(1-2절)
- “구제와 불사르게 내어줌”은 은사가 아님(3절)
2. 불분명함 안에서 봄
–방언, 통역, 예언에 대해 자세하게 다루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14장)
–방언은 통역을 필요로 함
–예언하는 영은 또 다른 영의 제제를 받아야 함 (14:32)
–그러는 가운데 더욱 주님을 의지함
3. 완성된 성경계시 안에서는
–당시와 비교할 수 없는 분명함
–성경의 명료성과 충분성
–그러나 모든 것이 완전히 분명치는 않음
–그러는 가운데 더욱 주님을 의지하고 질서 안에서 사랑을 따라감
III. 그때 보는 것
- πρόσωπον πρὸς πρόσωπον
-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A. 분명함 안에서 봄
- 하나님을 마주 대하여 본다는 의미가 아님
(신적본질은 볼 수 없음)
- 인성을 가지신 그리스도는 볼 수 있을 것임
(외관적 봄+지상에서 남기신 말씀의 뜻을 온전히 앎)
B. 친밀한 사랑 안에서 봄
- 단지 알기만 하는 지상의 지식 아님
- 보는 것 안에 있는 모든 지식은 사랑의 정동을 동반 함
- 이 땅에서도 그 지식의 방식을 부분적으로 경험함
C. 결국 지식과 사랑은 통합을 이룸
- 사랑 없는 지식, 지식 없는 열심은 모두 오류이거나 영적 미성숙
IV. 결론: 겸손함과 사랑
28.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I. 본문해설
- 지금과 그때의 보는 것
II. 지금 보는 것
- γινώσκω ἐκ μέρους
- “한 부분으로부터 알고 있다”
A. 부분적인 앎 ← 명백성과 대조
B. 은사의 한계
1. 부분 안에서 봄
- 방언, 통역, 예언이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있음
- 그러나 그것은 해석을 필요로 함
- 한 부분으로써 전체를 읽어야 함
2. 완성된 성경계시 안에서는
–당시와 비교할 수 없는 통일성
–성경의 완전성과 대비됨
–그러나 모든 것이 완전히 알려진 것은 아님
–아직도 부분적으로 알기에 더욱 주의하고 질서 안 에서 사랑을 따라감
III. 그때 아는 것
- ἐπιγνώσομαι καθὼς καὶ ἐπεγνώσθην
- “온전히 알 것이다 내가 온전히 알려질 것처럼”
A. “온전히 알 것이다”
- 에피스테몌와 독사의 지식
- 명료성 아닌 전체성의 문제임
–하나님의 성품과 의지에 관한 지식: 믿음으로 순종하 던 것이 이해됨.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 더 느낌
B. “내가 알려진 것처럼”
- 하나님께.. 나 자신에게.. 성도들에게..
C. 영원히 계속될 사랑
- 결국 완전한 지식 안에서 은사의 필요성은 사라짐
–그러나 사랑은 지금처럼 계속됨
IV. 결론: 사랑은 영원하다
29. 믿음 소망 사랑
I. 본문해설
- 지금과 그때의 보는 것
II. 지금 있는 것들
A. “항상 있는 것인데”
- Νυνὶ δὲ μένει πίστις, ἐλπίς, ἀγάπη, τὰ τρία ταῦτα
“그런데 지금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머물러 있는데”
- ‘그때’(τότε) 와 ‘지금’(νυνὶ)
B. 은사와 신망애
1. 남겨진 세 가지: 신망애
- 온전히 알게 될 그 날이 올 때까지
- 은사 남겨져 있지만 신망애로 삶
2. 은사의 경륜과 신망애
–어떤 은사 폐지되거나 변함
–영원하고 온전한 주의 뜻 알 때까지 우리를 살게 하심
:신망애
–은사로써 주의 뜻을 부분적으로 앎
–살게 하시는 것: 은사 아닌 신망애
III. 믿음, 소망, 사랑
A. 영광의 지식에 이르기까지 삶
B. 신망애로 살아감
1. 신망애는 은사 아님: 사도가 보여주겠다고 한 ‘탁월 한 길’(12:31)
2. 여기 ‘믿음’은 12:9의 은사들 중 하나로서의 믿음X
- 믿음의 두 용례: 은사+일반적 믿음
–온전히 알 때까지 사는 법: 계시와 선하심에 대한 신뢰
3. 여기 ‘소망’은 은사가 아님
- 온전한 지식과 지복에 대한 소망
- 그 나라의 앎과 행복을 바라며 살아감
–부분적으로 맛보나 그 때문에 더욱 온전한 지식 과 행복을 갈망함
- 그 소망을 가진 자는 덕스러운 삶으로 자기소망 을 입증해야 함
4. 여기 ‘사랑’은 은사가 아님
- 은혜의 결과로서의 사랑
- 새로운 정신능력의 도입 아니라, 인간의 사랑의 방향을 바꿈
: 오직 은혜로만 가능
5. 함께 있는 신망애
IV. 결론
30. 사랑은 영원히
I. 본문해설
II. “그 중 제일은 사랑이라”
- μείζων δὲ τούτων ἡ ἀγάπη
“그런데 그것들 중에서 더 탁월한 것은 그 사랑이다”
A. 불완전한 인도 안에서 삶
- 하나님의 뜻: 은사, 성경, 성령인도
-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게 하심
–객관적 은혜는 주관적 은혜로 발현
B. 은혜작용과 신망애
- 은혜의 저자이신 성령
–은혜의 삼위일체적 작용, 믿음은 지성, 소망은 감정, 사랑은 의지에 우선적으로 관여함
–성부, 성자, 성령이 세 위격이시나 한 본질인 것처럼, 믿음, 소망도 은혜작용의 결과이나 은혜작용의 본질은 사랑이다.
- 영화의 때에는 더 이상 순례자의 길에서의 믿음x, 소망x, 오 직 사랑만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남을 것임
III. 사랑은 영원히
A. 영원으로부터 온 사랑
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사랑이심
– 삼위일체 안에서, 완전성과 사랑
- 위격적 사랑이 곧 자기사랑이심
B. 시간 속으로 온 사랑
1. 인류 속으로 온 사랑
- 사랑과 지혜로 세상을 창조하심
–하나님 아는 것, 사랑하는 것 전부임
–하나님 사랑의 최고봉,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 가의 죽음
2. 교회 속으로 온 사랑
- 구원은 그 사랑 때문에 회심하는 것
- 중생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생명주심
–성화는 그 지식과 사랑 안에서 자라감
–사랑으로 하나님과 이상 인류 알게 함
–시간 속에서 사랑하나 영원을 향하여
C. 영원 속으로 돌아가는 사랑
- 육욕적사랑(cupiditas)은 자기와 시간 세계 안에서 소비됨↔그러나 아가페 사랑은 모두를 사랑하나 누구에게서도 멈추지 않고 영원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흘러감: 하나님의 자기 회귀적 사랑에 참여함(원수까지 사랑함)
- 믿음, 소망은 영원을 바라보나 거기로 돌아가지는 못함(영원하지 않음) 그러나 사랑은 영원을 단지 바라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영원을 시간 세계 안으로 끌어들여 누리고 있는 것임
–이 사랑 안에서 살라고 교회를 주시고 그 안에서 진리와 성령으로 은혜를 누려 시간 안에서 영원을 향해 살게 하심
IV. 결론: 영원한 사랑의 힘으로
영원한 사랑 1
영원한 사랑 21 (2012.2.26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2 (2012.03.11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3 (2012.03.18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4 (2012.03.2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5 (2012.04.15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6 (2012.06.10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7 (2012.06.17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8 (2012.6.24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29 (2012.07.01 주일오전설교)
영원한 사랑 30 (2012.07.08 주일오전설교)
21.신령한 은사들의 한계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알고 있었습니다.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였기에 하나님은 영적인 은사들을 풍부하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약점이 있었는데 은사들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 우월하다고 생각해서 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목적대로 은사를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모든 문제들을 고치기 위해 고린도전서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습니다. 12장에서 신령한 은사를 거론하면서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것이고, 이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것이지 은사를 받은 사람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은사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고린도전서 12장을 이렇게 마무리 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
그리고 바로 위대한 사랑장 고린도전서 13장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약 20주에 걸쳐 13장 1절부터 7절까지의 본문을 생각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고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거론한 후 4절부터 사도는 그 위대한 사랑의 속성에 관한 강화를 시작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고전 13:4)로 시작하여 마지막에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는 이야기까지 언급하면서 사랑의 속성을 거론하였습니다. 8절에 와서 사도는 앞의 담론을 토대로 사랑이 어떻게 모든 영적인 은사들보다 월등하고 탁월한지를 서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위대한 본문을 해설하기 전에 먼저 이 은혜가 무엇인지 다시 정리를 한 후 은사 문제를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성경에서 은혜라고 할 때에는 크게 세 가지 용례로 사용이 됩니다. 첫 번째는 은혜를 객관적인 의미로 사용을 하면 쓸모없는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분에 넘치는 호의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용례입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를 통해 제시된 구원의 길 자체를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릅니다. 세 번째가 보다 일반적인 용례인데 이것은 주관적으로 사용이 되는 경우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 주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런 등등의 표현은 세 번째 용례를 가리키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하여야 할 바를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신학자는 이 은혜를 성령과 동일한 의미로 보았습니다.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할지어다’와 ‘성령이 너희에게 함께 할지어다’는 동일한 것이고 요즘 우리말로 하자면 ‘은혜가 떨어졌구나’ 라는 말은 ‘성령이 떨어졌구나’ 라는 말과 같은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은사는 은혜와는 달리 일을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의 결과는 사랑이고, 은사의 결과는 효용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면 그 은혜는 우리에게 항상 사랑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공식이 하나 성립하는데 신령한 경험은 은혜로운 사랑을 동반합니다. 그러나 은사는 일을 위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II. 신령한 은사의 한계
성경에서 영적인 은사는 일시적인 것과 영속적인 것으로 구분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사도는 9가지의 영적 은사를 말하였습니다.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예언, 영분별, 방언, 통역 같은 은사를 이야기했습니다. 이 은사들은 어떤 면에 있어서는 중단되었고 어떤 면에 있어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은사들 중 어떤 것들은 완전히 종결되어서 더 이상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또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탁월성의 방식으로 전달되는 은사라는 점에 있어서는 지금도 이 은사에 상응하는 은사는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은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 신령한 은사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A. 탁월한 은사들
그리고 사도는 8절에서 신령한 은사의 한계를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거론된 세 가지 은사는 탁월한 은사들입니다. 9가지의 영적 은사 중 8절에서 거론되고 있는 은사는 사랑과 비교되고 대조될 수 있는 탁월한 은사로서 예언과 지식과 방언입니다. 사도는 이 세 가지가 사랑해 비해 어떻게 열등한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그 다음 구절은 희랍어 성경에서 읽겠습니다. “만약 예언들이 있다고 해도 폐지될 것이며 방언들이 있다고 해도 그칠 것이며 지식이 있다 할지라도 폐지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이에 비해서 사랑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피토”라고 하는 동사는 ‘떨어지다’라는 뜻이며 ‘파괴되다, 파멸되다, 멸망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사랑은 영원히 계속되지만 예언들은 있다고 할지라도 폐지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지 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의 뜻을 알게함
예언과 지식과 방언의 은사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얼핏 보기에 병 고침의 은사나 능력이나 이런 것에 비해서 열등한 은사처럼 보이지만 교회 안에서 이것들은 매우 높이 여김을 받는 탁월한 은사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 은사는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는 은사였기 때문입니다.
1. 예언(propheteiai)
예언이라고 나오는 ‘프로페테아이’(προφητεία)는 신약시대의 선지자들이 행하던 예언을 가리킵니다. 신약시대의 선지자들의 활동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의 활동과 매우 유사한 계속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때는 신약의 계시가 아직 종결되지 않고 계속 됐기 때문에 신약 선지자들의 예언 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이루어졌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신약의 선지자들에게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을 통해 계시를 받아 미래의 일을 예언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전체예언 사역 중 지극히 작은 일부분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대부분의 예언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는 일반적인 말씀 선포도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일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후대에 내려가면 ‘prophesy’라는 영어의 ‘예언하다’라는 단어가 영어권에서 ‘설교하다’ 라는 단어와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일반적인 말씀 선포와 유사하지만 그렇게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탁월한 역사 그리고 통찰과 직접적인 권위 때문에 이 당시에도 예언과 일반적인 말씀 선포는 구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 활동의 연속성 안에서 검토되어야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두 가지 직무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적인 계시를 받아서 이스라엘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모세 오경을 기초로 당대에 모세가 살았다면 어떻게 믿고 살라고 가르쳤을까를 생각하며 오경을 해석해서 백성들에게 종교와 시민적인 삶에 적용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점에 있어서 신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과 현저히 달랐습니다. 첫 번째는 권위에 있어서 달랐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왕, 제사장과 삼직을 이루면서 신정국가 전체를 솥발처럼 떠받친 직분자들이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인 계시를 받고 전달함에 있어서는 왕이나 제사장들이 따라올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때로는 동등한 권위를 가지고 예언활동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선지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구약의 권위가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 소위 타로기아라고 하는 당대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 성경에도 나오고 전승 속에서 교회에 유포되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권위 아래 있었습니다. 더욱이 사도들의 권위아래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의 가르침과 충돌이 되는 예언활동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선지자들은 한정적인 범위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풀어서 설교함으로써 예수님의 말씀을 적용할 수 있도록 예언활동을 하였다는 점에서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과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 구속사역의 전개의 현실에 집중되어서 과도기적인 성격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성경이 완성되고 교회에 널리 받아들여지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잠정적인 선지자의 직분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을 이해하고 보면 고린도 교회에서 예언이 얼마나 중요했는가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세운 고린도교회지만 그가 늘 붙박이처럼 담임 목사로 목회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았다는 신탁의 예언은 매우 중요한 권위를 갖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는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2.. 방언(glossai)
이뿐만 아니라 방언도 하나님의 뜻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나라와 미국에서 일어난 방언에 관한 활발한 논쟁들을 일부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방언이 하늘의 언어라고 말하고 한쪽에서는 절대로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방언이 끝난 것인지 아니면 지금도 계속 되는지, 방언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하는 것은 쓸모없는 신앙적인 행동인지에 대해 혼선을 느끼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신약 성경 안에서도 방언이 변천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방언이 처음 등장한 것은 사도행전 2장이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에 사람들은 불에 혀같이 갈라지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고 이 임재의 경험 후 첫 번째 쏟아져 나온 것이 방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방언 사건은 창세기 10장의 빛 아래서 구속사적으로 연결하여 이해해야지만 그 사건의 독특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1장에서는 그 유명한 바벨탑의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이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비록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였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들과 관계를 맺으셨고, 그들을 복 주셔서 번성하게 하셨으니 이 땅에 충만하여 정복하라고 한 하나님의 명령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행한 행동은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과는 완전한 반대의 길이었습니다. 그들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문화적으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하나님의 마음에 맞도록 돌보고 가꾸어 자연세계와 도덕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인간의 존재의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인지 그들은 흩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그것을 면하기 위해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늘에까지 닿게 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널리 드러내자고 도모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심각한 불순종을 징계하는 수단으로써 주신 것이 언어의 혼잡이었습니다. 이때에는 온 땅에 구음이 하나였더라고 되어 있는데 ‘라숀에하드’라고 하는 히브리 단어는 원래 혓바닥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어의 tongue이라는 의미에는 지금도 언어라는 말이 들어있고 방언을 tongue이라고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언어의 저주가 내리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서로 말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흩어지게 되었고 자신의 경계를 가지고 각각 언어의 장벽 속에 갇혀서 단절된 가운데 살아갔습니다.
이러한 저주가 풀리는 구속사적 사건이 사도행전 2장의 방언 사건입니다. 이 방언을 통해서 언어에 있던 저주가 풀리게 되었습니다. 두 본문을 비교해 보면 놀라운 일치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이 원래의 시도와는 정반대로 흩어지게 된 것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의 문제가 아니라 청취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강림하시자마자 제일 먼저 하나님이 방언을 주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들이 방언을 토하기 시작 했을 때 각 나라에서 모인 많은 나라 사람들이 한결같이 자신의 말로 방언을 하는 것처럼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발화의 방언이 아니라 청취력의 기적이었습니다. 더욱이 이 방언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행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는 구속의 대업을 송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매우 특별한 성격의 방언이었습니다. 하나님방언을 주셨고 이들은 방언으로 일제히 말했고 수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자기네 말로 방언을 알아들었기 때문에 통역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방언은 고린도전서 14장에 오면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에서는 이 땅의 외국어인지 이 땅의 나라에 속하지 않은 또 다른 언어인지는 모르지만, 언어로 사람들이 말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였습니다. 그래서 언어를 통역해 주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방언을 주신 것은 당시의 복음 전파의 급박성 때문이라고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무식한 사람들에게 언어의 훈련을 시킬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방언을 주셔서 어느 나라에 가도 방언으로 전도하도록 방언을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틀린 해석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에 있는 사람들은 코이네 희랍어를 만국공용어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마케도니아 제국 시대 때에 마케도니아가 이루어 놓은 업적 중 하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넓은 로마 제국 어느 땅에 가든지 코이네어는 공용어로 대접을 받았고, 평민들까지 모두 사용을 했습니다. 그래서 코이네라는 말 자체가 평민의, 보통의, 공통적인 이런 뜻입니다. 그런 희랍어가 일반화되었기 때문에 선교의 수단으로 방언의 은사를 주셔야 할 필요는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저도 누군가로부터 직접 들었는데 자신은 원래 ‘I'm a boy’ 도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방언을 영어로 받아서 그 다음날부터는 자유롭게 미국 사람들하고 얘기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결코 방언은 그런 식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는 이미 방언 때문에 혼란이 일어나고 있었고 방언의 내용도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크신 구속의 업적,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찬송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린도서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는 통역이 필요했습니다.
그렇다면 궁금한 것은 오늘날 우리의 방언은 어떤 성격의 것인지에 대해서 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오늘날의 방언은 완벽하게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에 나오는 방언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방언은 똑같은 성격의 성령의 방언이기 때문에 커다란 유익을 가지고 있으며 지금도 누군가가 통역을 하면 방언이 닮고 있는 매우 신비로운 하나님의 지시사항들이 파악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쪽으로 너무 치우친 것입니다. 또한 반대의 의견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증거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습을 통해서도 방언을 하고 이방종교나 완전 이교들 안에도 심리적으로 종교의 심취 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이야기를 하는 그런 종류의 방언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은 영적이고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것이라고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놀라운 역사 속에서 방언을 하는 것은 종교적인 감정이 업 되는 상태에서 느끼는 주관적인 체험이고, 이런 방언은 이미 끝났고 사라진 것이기 때문에 하늘의 언어도 아니고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반대편으로 너무 튀어 나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방언은 어떻게 생각해야 될까요? 우선 우리의 방언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청취력의 방언과는 다르고,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방언과도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본질에 있어서 지금 우리가 받는 방언의 은사도 넓은 의미에서 성령의 은사로 주어진다고 하는 것에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들이 양보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핵심적인 신학적 문제가 있습니다. 비록 고린도전서 14장에서는 방언이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여전히 계시를 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약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방언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올바르게 통역이 되면 그 계시는 교회에 하나님에 관해서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지를 분명하고 새롭게 알려주는 추가적인 계시를 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방언은 그러한 계시가 담겨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그렇기 때문에 통역이 필요가 없는 방언입니다. 그리고 통역의 은사는 완벽하게 종결되었습니다.
방언을 할 줄 아는 어느 신학생이 통역의 은사를 받았다는 사람에게 가서 “내가 기도를 하면서 방언을 할 테니 당신이 통역을 해주세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한참 기도를 하다가 헬라어 성경으로 주기도문을 읽기 시작했답니다. 통역자가 통역을 했는데 “내년에 장가를 가고 아들을 낳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답니다. 어떤 사람들은 통역의 은사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통역을 받았냐고 물었더니, 자신이 말하는 방언 기도가 무슨 의미인지를 다 안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방언이 쏟아져 나오는데 머리로는 언어가 차례대로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방언을 자신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으로 성령이 해석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통역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방언을 할 때 통역의 은사가 있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다면, 통역의 은사가 없는 사람들은 머리가 하얗게 되면서 무의식 상태 속에서 방언만 하는 것입니까? 방언을 해도 머릿속에 생각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의 은사는 워낙 탁월했기 때문에 통역이 필요 없었고, 14장의 은사는 혼란스러웠으나 계시 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통역의 필요가 있었고, 지금은 그런 계시성이 없기 때문에 통역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넓은 의미로 보면 방언은 여전히 성령의 은사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큰 기쁨과 하나님과의 친밀함 속에서 방언이 주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저는 26살 때에 혼자 조용히 기도하다가 아무도 없는 예배당에서 방언을 받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느꼈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 넘치는 기쁨 속에 방언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심스럽게 이런 결론을 냅니다. 오늘날의 방언은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과는 다른 방언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사도행전 2장과 고린도 14장과 오늘날의 방언 모두 본질적으로 성령의 은사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방언은 우리에게 새로운 계시를 주는 수단으로서의 방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방언이라고 말입니다. 즉, 영적 세계를 믿지 못하던 사람들이 방언을 경험하고 나면 영적인 세계가 있고 성령이 실제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일단 영적인 세계와 성령의 실제를 믿게 되면 하나님을 향한 보다 깊은 믿음이 생기고, 영적 세계에 대해서 증거 하는 성경을 신앙하는 마음이 돈독해지게 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방언은 비록 효용성은 끝났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로 남아서 믿음을 격려하고 우리를 성경으로 향하게 만들어 주는 유용한 기능을 하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방언은 의사소통을 위하거나 복음을 전달하는 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누군가 방언을 녹음해서 조사를 해보면 아주 적은 수의 단어가 배열을 바꾸면서 반복되기 때문에 통역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종결된 것입니다. 오늘날의 방언의 문제는 방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방언에 계시적인 성격을 부여하려고 하는 것에 있습니다. 방언은 직접적인 계시적 성격을 갖고 있고 성경은 간접적이기 때문에 권위적인 면에 있어서 내게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방언이 성경을 능가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온갖 은사주의에 무질서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3. 지식(gnosis)
또 한 가지는 지식의 은사입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2장 8절에서 언급했던 지식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노시스’입니다. 눈에 띄는 것은 예언과 방언은 복수로 되어 있지만 지식은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식의 은사 하면 공부 잘하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이 부분을 해설하면서 그노시스는 복음의 신비에 대한 특별한 통찰력을 가리키는 것이며 성령의 매우 탁월한 방식으로 주어지는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충분히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인데도 복음의 신비를 깨닫도록 놀라운 방식으로 통찰력을 주시면 구약을 읽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도들의 설교를 들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비밀을 가르칠 수 있는 탁월한 지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은 은사로서의 그노시스는 목회 직에 필수라고 했습니다. 목회자에게 지식의 은사는 아주 중요하고 이것이 없으면 목회의 기능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까지 이야기 했습니다.
C. 은사의 한계
당대의 맥락에서 보면 이 은사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주는 탁월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예언과 지식과 방언은 병 고침과 능력을 행하는 것보다 훨씬 탁월한 은사였습니다. 그러나 은사는 은사일 뿐입니다. 은사는 사람을 바꾸어 놓지 못하며 다만 그가 잘 섬길 수 있도록 도구로 받은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방언의 은사를 경험하면서 큰 기쁨과 하나님의 사랑에 눈물 흘리고 감격한다면, 그것은 방언을 받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방언과 함께 나타난 은혜가 그런 효과를 우리에게 준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은사는 우리를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만, 은혜는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줍니다. 은사에 대한 호기심은 은혜에 대한 호기심을 능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에 잠겨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모든 호기심은 그림자처럼 되고 맙니다.
예를 들어, 어느 못생긴 남자가 마술을 하니까 많은 자매들이 모여듭니다. 그 중 한 자매가 마술이 신기하니까 이것저것 계속 물어 봅니다. 후에 그 남자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더 이상 마술에 관심이 있을까요? 마술보다 못생긴 남자친구 얼굴 쳐다보는 게 훨씬 재미있어 진 것입니다. 은사와 은혜의 관계가 이렇습니다.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게 하는 것은 은혜이며, 은사는 하나님을 잘 섬기게 하는 도구입니다. 은사는 어디로 흘러갈지 방향을 정하지 못하지만 은혜는 정해줍니다. 그래서 영적인 은사를 받았어도 은혜가 떨어지면 가진 돈으로 돈벌이를 합니다. 하지만 은사는 없지만 은혜가 있으면 100원짜리 하나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려고 합니다.
바로 고린도교회에는 은사는 있지만 사랑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은사의 한계입니다. 은사는 두 가지 면에서 한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은사의 일시성의 한계입니다. 본문 8절 하반 절은 희랍어 성경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예언들이 있다 해도 폐지될 것이고 방언들이 있다고 해도 그칠 것이며 지식들이 있다 할지라도 폐지될 것이다.” 여기서 폐지될 것이며 그칠 것이라고 하는 종결의 시점이 언제인지를 놓고 은사중지론과 은사계속론, 중간입장으로 나눠지게 됩니다. 철저한 중지론자들은 ‘폐지될 것이고’ 이 말이 성경이 종결되고 사도 시대가 끝나는 지점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은사는 사도시대로 국한이 되어 끝나고 종결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그와 비슷한 것이 있다고 해도 은사라는 말을 붙이면 안 되며 특히 영적 은사라는 말을 붙이면 안 됩니다. 그것은 성령의 은사와는 상관이 없이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편견 없이 고린도전서 13장을 여러 번 읽어보면 이것은 사도 시대의 종결을 가리키는 의미에서의 폐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사도는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고 말합니다. 사도시대가 종결되어서 이제는 온전히 알게 되었나요?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폐지될 것이며, 그칠 것이며’의 종결의 시점이 사도 시대라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고,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우리가 모두 부활하여 마지막에 완성될 영화의 그날이라는 데서 보편적으로 일치를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기는 문제는 그때까지 고린도서의 예언이나 지금의 예언이나 계속될 것이고 그때 방언이나 지금의 방언이나 마찬가지니까 모든 것이 똑같은 권위를 갖고 살아 있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견해입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떤 은사들은 완전히 종결됐고 어떤 은사들은 직접적인 전달과 탁월성의 방식으로는 중단되었지만 그와 상응하는 은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라고 불러도 무방하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다만 방언에 있어서 계시성이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는 아주 중요한 분별의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비록 폐지의 시점이 완성이 되는 그날이라고 할지라도 그것 또한 유한한 일시성의 한계를 가지고 있는 날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 날들은 아주 잠깐 지나는 짧은 날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생각과 의지를 가르쳐 주는 탁월한 은사라 할지라도 영원한 흐름에서 보면 그 시간은 짧은 박막의 시간이며 그 시간 안에 모든 은사들도 종결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마지막 완성의 날의 전망을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고 노래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모습이며 충만한 지식은 곧 출렁거리는 사랑의 물결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에는 육신의 핏줄과는 상관없이 모든 인류가 함께 그리스도 예수의 몸을 이루며 서로에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이 오기 직전까지만 은사가 소용되는 것입니다. 물이 덮음과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가득하게 되는 그 날에는 교회도 종결되기 때문에 은사도 종결되고 성경의 도움도 더 이상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때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할 것이며 하나님의 탁월한 아름다움과 영광을 찬송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점증 될 것입니다. 지금은 성령의 역사와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자발적으로 공부하며 터득하는 방식으로 주님을 마주 대하면서 우리의 지식은 점증이 아닌 상승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지성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도록 충만한 지식을 갖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은사는 모두 성취되어 종결되어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오히려 더욱 치열하게 계속될 터인데 영원히 지속될 영광스러운 사랑을 오늘 미리 맛보게 하는 방법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놀라운 사랑을 영원한 나라에서 한없이 맛볼 것인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에게 먼저 그 사랑이 침투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며 사랑의 감화를 받아 부끄러운 자기 사랑을 버립니다. 사랑의 감화를 받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깨닫고 세상의 헛된 것을 버립니다. 그러면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꿈꾸는 그 나라의 완성은 초자연적인 사랑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서 다른 종류의 은사들이 반복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필요 없으리만치 완전한 사랑의 나라가 되며 그 안에서 완전한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께로부터 그 사랑을 받아서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은 바로 미래에 이루어질 아름다운 천국을 오늘 우리들이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은사는 폐지되고 그치고 폐지될 것이지만 사랑은 떨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우리가 얼마나 열렬히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마지막 둘째는 은사의 수단성입니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히 세우기 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많은 문제들은 은사를 받은 사람이 은혜가 떨어졌을 때 교회에 심각한 위협으로 등장하게 될 때 생깁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를 버리고 포기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에 자기를 복종시키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자기가 이바지하는 것을 자신의 존재의 가치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은혜가 사라지고 탁월한 은사만 남았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 예언이 주어졌을 때, 방언이 주어졌을 때, 계시가 임했을 때, 탁월한 지식이 주어졌을 때 그 사람은 지식이 없는 사람을 무시할 것이며 방언 못하는 사람을 하찮게 여길 것입니다. 예언하는 자신을 예언 듣는 사람보다 우월하게 여길 것 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이런 최악의 상황이 현실화 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은사는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은사는 주님의 몸을 섬기고 주님의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데 매우 유용한 수단이지만 그것이 질서 있게 사용되기 위해서는 은사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은사만이 한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는 부모님으로부터 좋은 머리를 물려받아서 다른 사람은 이해 못하는 것을 한 번에 이해하는 탁월한 지성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능력이 있어서 돈을 많이 번 사람도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붙잡힐 때 그 지성은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데 사용되고 물질은 교회를 위해 쓰일 것이고 재능은 교회를 위해 소비될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에서 멀어질 때나 은혜가 충분하지 못할 때 머리좋은 사람들은 머리 나쁜 사람을 무시합니다. 돈 많은 사람이 은혜가 떨어지면 가난한 사람을 무시합니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재주가 없는 사람들을 보며 한심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은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랑은 모든 한계를 극복하게 만듭니다.
III. 결론
하나님은 다윗에게 영적인 은혜와 하늘의 궁창에까지 미치는 여호와의 진리를 보도록 탁월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은사를 사용하는 것은 은혜에 달린 것입니다. 그는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그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지만 은혜에서 멀어지자 육욕을 위해 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은사는 수단에 불과한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교회에서 존중하는 탁월한 은사일지라도 사랑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충만하게 받아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이야말로 모든 은사와도 바꿀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나라에서 우리가 할 일은 은사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 성령을 영원토록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 나라에서도 영원히 계속되어야 할 일이기 때문에 모든 신령한 은사들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갈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탁월한 신령한 은사들조차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사랑은 언제까지 떨어지지 않는 영원한 가치를 갖는 것일까요?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22.떨어지지 않는 사랑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본문에서 사도는 은사는 폐하지만 사랑은 떨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은사는 눈에 띄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보다 못하다고 사도는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II. 본문의 정확한 의미
A. 떨어지다: "piptei"
먼저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의 정확한 의미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떨어지다’라는 단어는 희랍어로 ‘핍테이’(πίπτει)라는 단어인데 ‘핍토’(πίπτω)라는 동사에서 나온 변형입니다. ‘핍토’는 문자적으로 말하자면 ‘떨어지다, 넘어지다, 박살나다, 붕괴되다’라는 뜻이고, 상징적으로 사용이 되면 ‘멸망하다, 없어지다, 실패하다’를 의미합니다. 특별히 고전 희랍어에서는 연기하던 배우가 무대 아래로 끌려 내려오는 것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표현은 ‘사랑은 없어지지 아니하며, 혹은 실패하지 아니하며’ 라는 정도의 의미가 될 것입니다.
B. 언제까지나: “oudepote"
우리말 성경에서 ‘언제까지나’로 번역된 이 단어는 희랍어로 ‘우데포테’(οὐδέποτε)입니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언제까지나 라는 길이를 말하기 보다는 ‘어떤 경우에도 결코 〜아니다’ 라는 정도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없어지지 않는다, 망하지 않는다, 끌어내려지지 않는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종종 성공한 사랑과 실패한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가 남에게 좋은 것을 베풀었을 때 그가 나의 고마움을 알고 사랑과 감사로 반응을 하면 성공한 사랑이고, 우리는 많이 사랑했는데 그는 전혀 알아주지 않거나 심지어는 배신을 하면 우리의 사랑이 허비되었거나 낭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 의하면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나의 이익의 관점에서 보면 그 사랑은 실패한 사랑이고 보답 받지 못한 사랑일지 모르지만,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큰 사랑이 사랑을 모르는 사람에게 흘러 들어갔기 때문에 그 사랑은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 때 언제나 그 은혜를 알고 올바르게 반응을 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주지 않고 감사로 반응하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오히려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그런 사랑의 기억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슴 저미는 사랑이고 완전한 사랑임을 깨닫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이처럼 어떤 경우에도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습니다.
C. 사랑은: “heagape"
우리말 성경에는 ‘사랑은’ 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희랍어 성경에 보면 정관사 ‘헤’(ἡ)가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아가페는, 그 사랑은’ 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들 속에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사랑은 실패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떨어지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살아있으나, 어떤 경우에는 실패합니다. 모든 사랑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그 사랑만이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종합을 해보면 13장 8절의 전반부는 이렇게 번역을 하면 가장 은혜롭습니다. ‘그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실패하지 아니하고’, ‘그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떨어지지 아니하고’ 라는 뜻입니다.
III. 떨어지지 않는 사랑
A. 떨어지는 은사
그래서 사도는 사라지는 은사와 대조하여 떨어지지 않는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는 떨어지는 은사와 떨어지지 않는 사랑을 아주 날카롭게 대조하고 있습니다. 떨어지는 은사이기에 사도는 말하기를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며, 지식도 폐하리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신령한 모든 은사는 불완전함과 관련이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가 8절에서 사랑과 대조하고 있는 세 가지 은사, 예언과 방언과 지식은 공통적으로 아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우리의 아는 것의 한계를 극복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아는 것의 한계는 이중적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완전한 표준인 성경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성경이 비록 완성된 후에도 우리는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의 아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한계들을 보충시켜 주실 목적으로 예언, 방언, 지식 같은 은사들을 맨 처음 주어질 때와는 좀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마는 여전히 같은 은사로서 우리에게 남겨두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한계는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영혼의 어두움입니다. 죄는 우리의 영혼을 어둡게 만들고, 마땅히 사랑해야 할 것 대신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사랑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사물과 가치의 질서들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어두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알도록 계시의 말씀을 주셨지만, 우리는 이 계시를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또한 자연 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증거와 흔적들을 주셨지만 우리는 그것을 모두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알라고 주신 것조차도 알지 못하는 지성의 눈멂 때문에 우리의 아는 것은 한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존재와 아름다움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후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세계에 하나님의 저주가 내렸고, 그리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본래의 하나님을 보여주는 찬란한 빛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아는 것은 하나님이 아는 것처럼 무한하고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지만, 인간에게 알라고 지정해 주신 것조차도 영혼의 어둠과 지성의 눈멂, 천지의 저주 때문에 올바로 알 수 없는 비천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불신자들에 비해서는 낫지만, 여전히 영혼의 어두움과 눈멂의 한계와 약함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언과 방언과 지식을 주셔서 그들이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하셨던 것입니다.
B. 떨어지지 않는 사랑
그러므로 예언과 방언과 지식의 은사는 구원과 모든 구원의 완성 사이에서만 유효한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떨어지지 않는 사랑은 폐지되는 은사와 대조를 이룹니다. 떨어지지 않는 사랑은 완전함과 관련이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은 하나님의 아가페(agape) 사랑으로부터 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그 사랑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 결국은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하시지만 당신 자신도 모든 피조물들을 통하여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사랑을 받으시는 그러한 사랑의 회기 속에 우리 인간과 모든 세계를 두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고,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무한한 사랑의 대상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은 시간 속에도 많이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의 대부분은 시간 속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거의 시간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 우리가 사랑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체들, 우리가 사랑하는 불쌍한 영혼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도덕적인 가치들, 이 모든 것들이 시간 속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 속에 사랑의 대상이 있으나 우리의 사랑이 이 세상에 붙잡혀 매이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해 전 짤막한 소식이 신문에 보도되었습니다. 30대 부부였는데 남편은 고시에 합격해서 정부 부처에 중견 간부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고시에 합격할 정도니까 재능이 있고 똑똑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직장에서 체육 대회를 하는 동안 뇌출혈로 급사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 일이 있고 17일이 지난 후 남편이 다니던 직장 근처에 있는 어느 호텔에서 24층에서 한 여자가 창문을 열고 투신하여 죽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죽은 사람의 아내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있어야만 가능하며 그 사랑은 성향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그 사람에게로 한 사람의 사랑이 흘러갑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버렸습니다. 대상이 사라지고 사랑만 남을 때, 남겨진 사람의 존재 전체를 뒤흔들어 놓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의존의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사랑할수록 강해지는 측면과 약해지는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있고 사랑의 관계가 돈독하면 그것 때문에 살아갈 놀라운 힘을 얻게 되어 강한 자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생명의 능력을 본뜬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사람을 사랑할수록 현저하게 의존적이 됩니다. 그래서 사랑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강한 자가 되지만 사랑 그 자체에 대해서는 매우 의존적인 자가 되어서 그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든지 혼자 살 수 있었던 사람이 오히려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지탱하지 못하고 투신하여 목숨을 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에게서 시작된 사람의 사랑과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아가페 사랑의 차이입니다.
이처럼 시간 속에도 사랑의 대상이 있지만 까리따스의 사랑은 시간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사랑이 우리를 감화시켜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하게 할 때에는, 이 사랑이 아주 놀랍도록 사람을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의 근거와 이유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게 함으로써 이 사랑은 실망하지도 않고, 실패하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는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구원과 완성 사이에만 유효한 사랑이 아니라 모든 구원이 완성된 후에도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사랑으로 엮어진 나라입니다.
IV. 천국 - 사랑의 나라
A. 사랑: 관계의 성향
그래서 천국은 사랑의 나라입니다. 사랑은 형이상학적으로 관계의 성향입니다. 그리고 관계는 어떤 존재와 존재 사이에 있는 위치와 의미를 뜻합니다. 그래서 완전한 선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에게 선을 베푸시는데, 베푸시는 그 선을 통해서 우리도 하나님에게 선을 행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통하여 사랑을 받지만 그 사랑은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흘러온 사랑이고 흘러가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타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선을 입은 것처럼 다른 사람도 이 선 안에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사랑은 일렬로 서서 흘러 들어오고 흘러 나가는 것이 아니라 거미줄처럼 서로 엮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아 지체들에게 사랑을 흘려보내고 그들에게 선을 베풉니다. 그들도 또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사랑을 받아 우리를 사랑하기도 하고, 우리로부터 흘러 들어간 선을 덧입기도 하고 우리에게 자신들이 받은 선을 덧입혀 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나라가 바로 천국이며 그 안에서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아가페의 사랑의 거미줄 같은 연결이 하나님의 사랑 전체가 흘러 들어오고 흘러 들어가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지만 하늘나라에서 당신의 사랑이 어떻게 성도들에게 연결을 이루어서 그 관계의 탁월한 아름다움을 통해 서로가 어떻게 당신 자신이 가지신 사랑을 보여주는지 감상하시며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이런 사랑의 나라이고, 이 사랑은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입니다.
B. 교회: 그 나라의 모형
하나님이 세상에 주신 교회는 바로 그 나라의 모형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질 완전한 사랑의 관계를 세상에서 먼저 선취적으로 맛볼 수 있도록 모형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천국에서의 사랑과는 달리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유지되고 증진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 사랑이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점증하는 사랑입니다. 위대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책 속에서 ‘인간의 참된 행복은 사람의 지성 안에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늘나라에서 누리는 행복도 인간의 지성 속에서 누리는 참된 행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천상에서 우리의 행복을 증진시키고 사랑을 증진시키는 독특한 방법을 가지고 계십니다. 만약에 천상에서 사랑이 증진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싫증나는 곳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천국에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무한하고 영원한 복락을 누리고, 우리의 사랑이 어떻게 천국에서도 증진되게 하시는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모든 사랑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죄인들에게는 두 가지 방법으로 사랑을 주십니다. 하나는 힘적인(physical) 방법으로 하나님이 사랑을 주십니다. 우리 인간의 설득과 동의와는 상관없이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이 사랑을 사람 속에 불어넣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초월적으로 사랑을 심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과 함께 시작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에게 중생한 이후에도 당신의 사랑을 초월적인 방법으로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어느 한 순간 매우 특이한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의 영혼을 밀고 들어오는 것처럼 커다란 힘으로 우리 속에 주어집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우리들은 개인적으로 부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에는 구원받은 이후에 하나님이 설득적인(persuasive) 방법으로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 주십니다.
예를 들어, 아무 기대도 없이 예배를 드리면서 졸다 깨다를 반복하면서 예배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펼쳐지고 집중을 해서 듣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에게 선하고 아름다운 일을 행하셨는지를 구속의 사건들을 통해 설명을 듣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후 실망한 채로 엠마오로 올라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성경 속에서 메시아가 와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 대신 죽어야 할 것에 대해서 풀어서 설명하여 해석해 주기 시작했을 때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진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설득적인 방법으로 사랑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교회에 와서 어디에서도 가르쳐 줄 수 없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배울 수 있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많이 탐구해서 성도들에게 보여주고 가르쳐 줘야 합니다. 마치 클래식 음악을 그냥 들으면 시끄럽기만 한데 해설가가 나와서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고 역사를 이야기 해주면 그 음악이 귀에 아름답게 들리는것처럼, 누군가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진리의 말씀을 통해 설명해 주는 만큼, 이해되고 그 아름다움이 눈에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진수를 모아 놓은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성경을 제대로 펼쳐서 보이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고 그 아름다움을 보게 될 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추루한 자기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속에 불같이 일어나는 때에는 항상 하나님에 대한 발견이 있습니다. ‘아, 하나님이 정말 이런 분이시구나.’ 그러면서 그 사랑의 빛으로 나의 삶을 비춰보면 이전에 내게 일어났던 많은 일들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게 됩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나를 오래 참으셨고, 내가 받았던 고난은 하나님께로 부르기 위한 사랑의 회초리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하늘나라에 가면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우리의 지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랍고 탁월한 명료성으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고 했던 진리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도 아주 탁월한 지식을 갖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 지식이 끝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천국에서도 하나님은 지상에서 사물들의 질서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보여주던 방식과는 다르게 매일매일 예전엔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한 새로운 지식들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 있을 때에는 지성이 현저하게 어둡고 마음이 거짓된 사랑으로 불결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성경 속의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셔도 어떤 사람은 그것을 보고 사랑이 생기고 어떤 사람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서는 이런 방해물들이 전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 자신에 대해서 직접 초월적인 방법으로 당신의 존재와 성품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시는데, 그것이 사람들 속에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무한히 계속 되어도 하나님에 대해서 더 이상 알려줄 것이 없는 상태는 이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무한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매 순간 전율하듯이 하나님의 새로운 아름다움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 나라가 복된 나라이며 천국입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지상에서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 그 은혜를 신실하게 간구하는 사람들도 이렇게 아침마다 새로운 주의 성실하심을 발견하고 감격하는데 그 나라에서는 점증하는 사랑이 얼마나 아름답고 무한하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교회는 이런 사랑을 선취적으로 경험하고 맛보도록 하나님이 부르신 곳입니다.
지금은 다 사라졌지만 우리 어렸을 때는 애들이 가난해서 땅바닥을 기며 놀다가 엿장수 가위 소리가 나면 새카맣게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아저씨가 널따란 엿판에 엿을 가위로 툭툭 쳐서 그야말로 눈곱만큼 띠어서 아이들의 입에 넣어줍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너희는 가라. 그리고 고물을 찾아오너라.” 맛보기로 조금만 준 것입니다. 간식도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할머니 고무신부터 시작해서, 형이 아직 보는 책, 구멍 뚫어졌지만 아직은 쓸 만한 대야에 이르기까지 집에 있는 물건을 다 찾아서 갑니다. 그러면 엿장수가 큰 엿을 줍니다. 맛있게 먹고 저녁때는 타작을 받습니다. 이것이 맛보기입니다.
세상의 교회가 바로 천국의 이런 맛보기입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이 함께 관계를 맺고 사랑하고 사랑을 받며 사슴처럼 기대며 사는 것, 어린 양들이 서로를 기대며 체온으로 몸을 녹이고 의지하는 것처럼 교회에서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며 의지하는 것은 이 맛보기를 보고 천국이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인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시 있다가 사라질 세상을 사랑하는 대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고, 잠시 있다 없어질 세상의 가치를 사랑하지 말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가치를 따라서 살라고 가르쳐 주시려고 교회를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성도들에게는 천국의 맛보기이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맛보기입니다.
최근에도 마음이 아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일평생 목회하시다가 목사님이 은퇴하시게 되었는데 한쪽 교인들은 목사님이 일평생을 교회에서 애쓰셨으니까 집도 드리고, 퇴직금도 드리고, 생활비로 제대로 드리자고 하고 다른쪽 교인들은 집도 주지 말고, 퇴직금도 조금만 주고, 생활비도 먹고 살 만큼만 드리자면서 편이 갈라져서 다투는 교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또 어느 교회에서는 아버지가 원로 목사로 물러가시면서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었는데 아들이 아버지를 대상으로 원로 목사 교회 접근 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냈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아버지를 고소하는 것 자체가 치리의 대상인데 치리 받을 목회자가 어떻게 법원에 고소를 할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새는 줄을 모른다고 말입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은 죄에 대한 자유가 늘 억제되어 있습니다. 교회에서 징계의 칼을 들었기 때문에만 억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양심이,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해서 억제하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에 제한이 풀어지고 나면, 세상 사람들은 늘 하는 행동이니까 심하지 않지만 교인들은 그동안 안하던 것이기 때문에 날 새는 줄도 모르고 죄가 폭발하듯이 솟구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천국의 맛보기임에는 틀림없지만 제대로 된 맛보기가 되기 위해서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입술로 결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감화가 계속 지속될 때에만 이 사랑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거지도 삼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부자였던 때가 있고 부자도 삼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거지였던 때가 있다는 이야기는 너무 유명한 속담입니다. 오늘 쓰레기처럼 살아가는 성도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 사랑하던 때가 있었고, 오늘 하나님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사람 부러워하는 죄인 못지않게 주님께 악하게 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차이는 무엇일까요? 혈육이나 육정이나 사회적인 지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에 주님의 은혜가 강물처럼 흐를 때에는 교회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국의 맛보기가 되지만, 하나님이 그 은혜를 거두시고 나면 교회는 이 세상보다도 훨씬 더럽고 억제가 없는 죄악의 도가니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에 있어서 은혜의 전적인 의존을 배우게 됩니다. 누가 우리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교회가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가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며, 천사와 같은 성도들이 모여 있는 교회도 주님이 하늘을 닫고 은혜를 거두시면 짐승들이 모인 곳과 같은 동물원이 될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은사를 받은 사람은 교만하여 자랑할 수 있는데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은혜 자체가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백하도록 만들어 주는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건물이나 그런 외적인 것 아니고 관계의 아름다움입니다. 적은 수의 성도들이 사랑으로 뜨겁게 연합되어 있는 모습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수의 성도들이 사랑 없이 분열하고 갈등하며 엮어진 모습보다는 훨씬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또한 적은 무리가 사랑으로 엮어진 관계의 아름다움보다는 무한하게 많은 성도들이 빛나는 사랑으로 연결을 이룬 것이 하나님에게는 훨씬 아름다워 보입니다. 마치 어두운 밤하늘에 망원경으로 보는 하나의 별도 아름답지만 공기가 맑은 대자연에서 쏟아질 듯이 별떨기가 하늘에 가득한 모습을 볼 때에 더욱더 그 별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되는 것과 유사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를 통해서 우리는 개교회가 아니라 세상에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교회들의 연합, 보편 교회가 교파와 피부 색깔, 모든 것을 초월해서 함께 관계를 맺고 사랑하는 아름다움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주님께 대적하고 악을 행한 짐승과 같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피를 발라 구원해 주신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구원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어둠 속에 사라질 추루한 인간들을 밤하늘에 별처럼 교회에 한 지체로 삼으셨습니다. 우주 이 끝부터 저 끝까지 무한대로 펼쳐지는 무한한 별들의 합창 속에 우리들을 박아 넣으시고, 많은 별들 속에 하나가 되어서 아름다움을 더하게 하셨습니다. 놀라운 구속의 은혜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랑하며 살아온 날들을 후회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의 소원은 우리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때문에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되었습니다. 나 같은 미말의 찌끼 같은 인간을 통해서 주님의 선이 불행한 이웃들에게 전달되고, 교회의 지체 중 누군가에게 내가 통로가 되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그들이 누리는 것이 우리의 간절한 소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지체들과 이웃이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행복을 누리게 되는 그곳에서 우리 또한 함께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원은 하나였습니다. 저마다 악악거리며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피비린내 나는 투쟁 속에서 살아갈 때에 나를 통하여 사람들이 덕을 입고 누리면서 그 안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가치를 느끼는 것입니다.
(찬양)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얻은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비교적 은혜 안에 있을 때에도 불쑥 불쑥 솟구치는 이기심,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짓밟고라도 행복하고자 하는 나 자신의 욕망과 이기심, 이욕들, 그리고 하나님보다 나 자신에게 나의 사랑을 더 받으려고 하는 정욕 같은 것들이 매우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생각하고 나의 더러움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발견하며 그리스도 예수께서 피 발라 주신 우리의 심장을 그리스도의 보혈에 깊이 담가서 주님밖에 영원히 사랑하실 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없이는 누구도 이 교회의 한 지체로서 하늘나라의 맛보기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떨어지는 은사보다 떨어지지 않는 사랑을 하나님 앞에 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고 이것 없이는 우리가 일반 섭리 안에서 하나님께 받은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은혜의 결과이기에 사랑을 원하는 사람마다 어린 아이같이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주께 은혜를 구하며 은혜를 사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꿈꾸는 교회는 지금보다 열배나 많은 성도들이 모이는 그런 교회가 아닙니다. 제가 꿈꾸는 교회는 성도들이 다른 교회에 비해서 탁월하게 성경을 아는 지식을 가진 교회만이 아닙니다. 제가 꿈꾸는 교회는 사랑의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물처럼 교회를 덮고 있어서 가장 짐승 같은 사람도 교회에서 사랑의 물에 녹아져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교회, 언제나 하나님이 목회를 통하여 그 은혜를 거두지 않고 자기밖에 몰랐던 인간들을 예수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바꿔 놓을 수 있는 초월적인 은혜가 언제나 깃들인 교회, 그래서 성도들이 죄악 된 세상을 살면서 서로 사랑의 관계로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아름다움을 드러내 보여주는 그런 교회가 제가 꿈꾸는 교회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가진 무엇으로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을 열고 그 열린 하늘을 통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주님의 은혜에 목말라 하며 이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신령한 은사도 사라지지만 사랑은 영원히 떨어지지 아니하고 실패하지 않으니 사랑의 사람이 되어서 숨 쉬는 날 동안 여러분이 이 땅에 있는 것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티끌만큼이라도 더 빛나도록 그래서 주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보여줄 수 있는 보석과 같은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23.온전한 것이 올 때에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9-1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끝날 때가 있지만 사랑은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고 사도는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이제 우리들이 아는 지식과 그리고 예언의 은사들이 어떻게 해서 한계를 갖고 있으며 또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그것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가르쳐 줌으로써 은사와 사랑을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12장에 언급되었던 많은 은사들 중 유독 지식과 예언의 은사만을 집어서 사랑과 대조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이 지식과 예언의 은사가 가지고 있는 계시적인 특성 때문이었습니다. 병 고치는 것과 능력이 행하는 이러한 은사들과 구별되는 이 특별한 은사는 하나님께서 이 은사들을 통하여 교회에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될지를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II. 부분적인 은사들
A. 부분적으로: Ἐκ μέρους
그러나 오늘 사도는 이것들이 부분적인 것들이라고 못 박아 말합니다. 즉, 부분적인 은사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 여기에 ‘부분적으로’라고 하는 말은 ‘에크 메루스’(Ἐκ μέρους)라고 하는 단어인데 직역을 하면 ‘부분으로부터’ 라는 뜻입니다. 하나하나 이 모든 예언과 그리고 모든 지식의 은사는 중요하고 가치 있기는 하지만 부분으로부터 부여받은 계시를 부분적으로 교회에 가르쳐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온전하지는 못하다는 의미입니다.
B. ‘아는 것’과 ‘예언하는 것’
1. 지식과 예언의 은사
이 아는 것과 예언하는 것, 이 두 가지를 지금 온전한 것이 오는 날에 완전하게 알게 되는 것, 곧 충만한 계시의 지식과 대조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지식과 예언의 은사는 당시 아직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사로서 교회에 주셔서 그것을 의지하며 신앙생활하게 만드셨습니다. 이 지식과 그리고 예언의 은사는 그것이 올바르게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은사인 한 정확하고 신뢰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서 사도바울은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권고하였습니다. 이 무슨 의미입니까? 12장에서 혼란스러운 은사의 무질서 문제를 책망하면서 다루었고, 그 은사들보다 더 훌륭한 사랑을 13장에서 다룬 후에 다시 14장에 가서는 할 수만 있으면 특별히 예언을 하도록 하라고 고린도 교회에 권면한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처럼 당시에는 이 예언이 매우 중요한 교회에게 주시는 계시의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약 성경 밖에 없었지만 복음의 말씀 중 일부를 붙들고 또 이렇게 수시로 은사 받은 자들을 통하여 주어지는 지식과 예언의 말씀을 가지고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고, 하나님이 앞으로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떻게 이끌어 가실지에 대한 지식을 얻으며 신앙생활을 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이 두 은사에 많이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은사, 지식과 예언의 은사는 교회로 하여금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그 표준을 가르쳐 주는 계시의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교회가 의지하는 지식과 예언의 은사도 부분적인 계시였습니다.
2. 부분적인 계시였음
우리는 어렸을 때 읽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그 비유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매우 커다란 코끼리가 있고 그 코끼리는 보통 한 5톤 정도 합니다. 황소가 450kg에서 550kg 사이니까 황소 10마리의 크기죠. 어마어마하게 큰 짐승입니다. 장님이 이제 그 코끼리를 만지기 시작했습니다. 다리를 만지던 장님이 말했습니다. ‘코끼리는 벽처럼 생겼구나.’ 라고 말입니다. 코끼리 다리가 벽처럼 생긴 것은 틀림이 없지만 그것은 일부일 뿐이고 코끼리가 모두 벽처럼 생긴 것은 아닙니다. 참된 지식이었으나 부분적인 지식이었습니다. 코를 만지던 장님은 ‘코끼리는 물렁물렁하고 길다랗구나.’ 그러면서 그 사람은 코끼리가 호수처럼 생겼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코끼리의 코가 물렁물렁한 호수처럼 생긴 것은 틀림이 없지만 그것은 일부일 뿐이지 몸의 전체는 아닙니다. 이때에도 하나님이 이들에게 분명한 지식과 예언의 은사를 주셔서 교회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탁월한 은사였고 그리고 정확한 것이었지만 언제나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지식과 예언 자체가 부분적인 계시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계시를 모두 안다고 할지라도 또 알게 된 계시를 모두 이해한다고 해도 부분적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당시 이 탁월한 지식과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도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이 지식과 자기가 전하고 있는 이 지식과 자기가 말하고 있는 이 예언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 신앙 전체에서의 의미를 잘 모르는 체 예언을 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은사는 부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정확하고 신뢰할 만 했지마는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완전한 그 무엇을 필요로 하고 그곳을 향해 가고 있는 한 과정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III. 온전한 것이 올 때
A. 온전한 것: τὸ τέλειον
이러한 불완전한 지식과 예언의 은사를 대조하면서 사도바울은 그것을 온전한 것이라고 에둘러 말합니다. 그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이 지식과 예언의 은사가 폐하리라고 단언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온전한 것이란 무엇일까요? 희랍어 성경에 이 온전한 것이라고 번역된 원어는 ‘토텔레이온’(τὸ τέλειον)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목표에 도달한 것, 달성된 것, 다 자란 것, 어른이 된 것, 혹은 도덕적으로 완전한 것, 이런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이제 무엇인가 완전히 성취된 그런 상태를 가리키죠. 그래서 희랍어에서 이제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어른이 된 사람을 이 단어를 사용을 해서 불렀습니다. 그게 에베소 같은 데에 자주 등장하는 온전한 사람이 되라, 온전에 이르라고 할 때에 사용된 단어가 바로 이 단어입니다. 이것은 지식과 예언의 은사가 탁월하고 교회가 의존하고 있는 은사이기는 했지만 이것들은 바로 보다 더 완전한 것을 향하여 가는 과정이고, 이 지식과 예언의 은사는 보다 더 완전한 지식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은 제가 그렇게 집회를 다닐 수가 없는데 초창기 열린 교회 시작했을 때만해도 정말 많이 다녔습니다. 전국 안 다니는 데가 없을 정도로 제가 스스로 혼자 운전을 하고 그렇게 집회를 다녔는데 그땐 내비게이션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니까 이제 항상 저에게는 길눈이 좀 어두워요. 그 나를 초청한 교회를 찾아가는 게 하여튼 숙제였습니다. 근데 언젠가는 한번 길을 찾아가는데 지도를 팩스로 받았습니다. 팩스를 들고 그리고 이제 그 근처까지 갔습니다. 근데 차가 굉장히 빨리 다니는 길입니다. 그러면서 잘 알 수가 없어서 창문을 내리고 이렇게 기웃거리다가 그만 이 종이가 바람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거기 떨어졌으면 주웠을 텐데 이제 뭐 차가 쌩쌩 달리니까 막 공중에 날라가지고 어디로 갔는지도, 하늘로 막 연처럼 막 날아가더니 어디로 가버렸습니다. 정말 난감하더라고요. 만약에 여러분이 가보지 못한 어느 도시로 여행을 떠난다면 차를 준비하겠죠. 그리고 기름을 잔뜩 넣고 먹을 것과 마실 것 등등 모든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차에 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도입니다. 그 지도를 보고 목적지를 찾을 때까지는 차 안에 있는 어떤 물건보다도 그 지도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도착했습니다. 이 지도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왔기 때문에 이 지도는 쓸데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지식과 예언의 은사는 온전한 것, 우리에게 하나님에 관하여 가르쳐 주고 우리에게 주신 이 모든 지식의 계시의 목적을 완성하는 바로 그것이 올 때에는 이 모든 것들이 쓸모없게 된다고 하는 뜻입니다.
B. 온전한 것이 올 때
1. 시기에 대한 두 해석
그러면 “온전한 것이 올 때에”그랬는데 이때가 도대체 언제를 가리키는 것인가? 이 시기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신약의 계시가 종결될 때라는 해석입니다. 즉, 이 지식과 예언의 은사는 아직 신약 성경의 계시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교회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신약의 가르침을 충분히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한시적으로 하나님이 이런 은사를 교회에 주셔서 그래서 이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교훈을 가르쳐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신약의 계시가 완성되자 이제 이런 은사들은 종결되었고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이런 은사는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철저 종결론 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은사 철저 종결주의라고 이야기 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주장들을 상당히 근거가 있고 일리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의 계시인 신약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하나님은 사도들의 시대를 주시고 그리고 그 사도들의 시대 때에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복음의 의미를 통찰할 수 있는 지식의 은사와 그리고 놀라운 이 예언의 은사를 주셔서 인간의 지성을 초월하는 그곳에 속하는 지식들을 전달해 주셔서 신약 성경이 없던 때에도 신약 성경의 정신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고린도전서 13장 9절과 10절을 해설하고 있습니다. 12절, 13절의 맥락을 정직하게 읽어보면 이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 성경의 계시가 완성된 때를 가리킨다고 해석을 하기에는 너무나 본문이 거리가 멉니다.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 같고” 쭉 말하면서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 이 당시의 거울은 청동으로 만든 거울이거나 돌멩이를 반질반질하게 닦아서 사용하던 거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희미하게 보였죠.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물론 신약 성경의 계시가 완성되고 난 후에 복음에 대한 우리의 깨달음들은 아주 탁월하게 되었고, 또 성령이 오심으로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매우 독특하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주께서 우리를 아는 것같이 지금 우리가 주님을 안다고 말하기에는 모자란 것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이 그런 시대라고 한다면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날에 우리가 주님을 아는 것과의 차별은 어떻게 될까? 많은 의문들이 떠오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온전한 것이 올 때라고 하는 이 시기는 신약의 계시가 종결될 때가 아니라 믿는 자의 육체가 부활하는 영화의 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때가 바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때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우리의 구원이 성도의 죽음과 함께 우리가 하늘나라에 감으로써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구원의 개념 자체가 우리의 영혼만의 구원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 모두를 아우르는 인간 존재 전체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어떤 상태에서 죄를 짓고 그리고 어떻게 회복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의 육체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흙으로 모두 육체를 만들었으나 그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영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고 영혼을 그 사람의 육체와 함께 결합시킴으로써 그는 비로소 살아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영혼과 육체가 아울러 있는 참다운 인간이 된 것입니다. 그 참된 인간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죄를 짓고, 악이 들어오고 인간은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비참한 결과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바로 그 죄로부터 인간을 구하고 죄의 결과인 비참함으로부터도 인간을 건져내서 온전하게 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믿으면서 날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분투하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는 그 순간까지 완전히 성화되지 않습니다. 죽고, 육체는 썩어 흙으로 돌아가고, 그리고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으로 단숨에 깨끗케 하셔서 그래서 완전히 순결한 상태에서 하늘나라에 옮기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늘나라에도 죄와 불결이 존재하게 될 것이고, 죄와 불결은 하나님을 향한 도전과 악이니 그런 것들이 천국에 남아있다면 거기가 어떻게 완전한 하늘나라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우리의 영혼은 완전히 순결하게 성화되어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의 완전한 상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혼과 육체로 창조되었고, 그 영혼과 육체가 함께 만나 참다운 인간의 몸을 이루기까지는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고 이제 하나님께서 큰 능력으로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부활하게 하십니다. 믿는 자들을 부활하게 하셔서 그들의 육체와 영혼을 만나게 하십니다. 이럼으로써 그들은 이제 죄와 죄의 결과인 비참으로부터 완전히 구원이 되어 새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몸은 지금과 같은 몸이 아닌 불멸의 몸으로 덧입게 될 것이고, 영혼은 지금과 같이 오류와 거짓 그리고 죄가 함께 묻어 있는 불결한 영혼이 아닌 완전히 순결한 영혼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그는 이제 구원이 최종적으로 완성된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2. ‘때’에 대한 올바른 해석
그러나 이제 그렇게 영화롭게 된 상태에서 이제 이제껏 까지 걸어온 구원의 길을 되돌아보면 이것은 놀라운 완성이지만 앞으로 있을 영원무궁한 미래를 바라보면 이것은 겨우 시작일 뿐입니다. 특별히 이렇게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영화의 몸으로 다시 새 사람이 될 때에는 이제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지금 대면하여 그리스도를 아는 것 같은 이 놀라운 지식을 얻지 못했던 때에 간접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 가장 중요한 방법이 바로 지식과 예언의 은사였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초대 교회 성도들을 예수를 알아 하나님을 믿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모든 계시들이 집적되어서 하나님이 성경이 완성되게 하셨습니다. 성경이 완성되게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때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우리의 몸이 부활하여 영광스럽게 변화될 그 영화의 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경 계시의 완성은 바로 그렇게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이 온전한 지식으로 우리에게 나타나기까지 이르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은 성경 계시를 중심으로 아주 중요한 분기점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지식과 계시의 은사를 주셨는데 그러면 지금도 이 지식과 계시의 은사가 주어지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명을 잘 듣고 여러분이 기억을 하셔야 합니다. 사도 시대와 사도 이후의 시대 즉, 성경이 신약 성경이 완성되기 전의 시대와 신약의 계시가 종료된 시대의 차이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렇게 되면 우리들이 매우 무질서한 은사주의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여러분 우리는 사도행전은 28장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우리는 29장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하니까 진짜로 사도행전을 막 펴 봐요. 29장을 찾는 것입니다. 없지. 당연하지 28장에서 끝났는데. 물론 사도시대의 그리스도 교회가 말씀과 성령과 기도를 의지하여 전심으로 하나님을 따랐을 때에 커다란 성령의 역사, 복음 전파의 역사가 나타났던 것처럼 지금도 그렇게 주님을 의지하며 따른다면 초대 교회에 행하셨던 놀라운 복음 전파와 그리고 놀라운 능력이 교회를 통해 나타날 것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기 위하여 그런 표현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가능한 것이고 괜찮아요.
그러나 지금과 사도 시대는 아무런 차이가 없고, 그리고 심지어 은혜를 많이 받고는 내가 바로 13번째 사도로 하나님 앞에 세움 받은 사람이다 이러는 사람들이 중국과 남미를 중심으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그리고 자신이 사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운동을 사도 운동, 혹은 신사도 운동이라고 불러요. 그렇게 되면 이제 사도행전과 고린도서에서 주어졌던 이 모든 은사들이 똑같은 수준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도 주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성경을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이런 지식과 계시의 은사가 그때와 똑같은 권위와 똑같은 방식으로 주어진다고 말하면 주관적으로 자기의 마음에 밀려와 다가 온 것을 중시하겠습니까? 객관적으로 자기 밖에 놓여있는 글로 쓰인 성경을 중시하겠습니까?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열린 교회에서는 모든 성도들에게 이런 말을 하지 말도록 교육을 받습니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다면 그는 아직 열린 교회에서 제대로 훈련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주님이 오늘 기도하는데 말씀하시기를, 오늘 내가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이 내게 말씀하시기를, 주님이 나에게 보여주셨는데 등등의 표현은 성숙한 열린 교회 성도들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 언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런 말의 위험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 특별히 교사나 구역장, 순장 그리고 권사님, 장로님, 집사님 이런 분들이 아주 조심해야 됩니다. 자, 이제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성도가 구역예배에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이말 저말 합니다. 구역장이 성경을 피더니 ‘오늘 아침에 내가 성경을 읽는데 주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여태까지 자기들은 말을 많이 했지만 자기가 생각나서 한 말인데 이 사람이 주께서 말씀하셨다고 한 마디 함으로써 앞에 한 모든 이야기들은 깔아뭉개고 권위에 있어서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한 말에 토를 달면 사람에게 토를 다는 것이지만 주께서 말씀하셨다는 사람에게 토를 달면 주님께 토를 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영적인 허영심 내지는 교만입니다. 목사도 그런 말을 사용하지 않는데 그냥 정직하고 순수하게 ‘오늘 기도하다가 생각이 났는데’ 그렇게 말해도 내용이 워낙 은혜롭고 신령하면 듣는 사람들은 ‘저게 지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니라 성령께서 그 순간을 일러주신 걸 거야’ 라고 받아들여요. 성경을 읽다가 떠오른 생각인데 라고 말해도 그 해석이 워낙 탁월하면 저 사람이 원래 지가 아는 지식으로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 순간에 성령으로 특별한 감동을 주셔서 알게 하실 것이라고 인정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쓰는 사람을 여러분이 만약에 만나면 그러면 ‘아, 저 사람은 성숙하지를 않았구나. 아직은 열린 교회 교인이 충분히 되지 않았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시면 되요. 뭐, 교역자에게 고발하셔도 괜찮고요.
그러면 사도 바울 당시에 주어졌던 이 지식의 은사와 계시는 지금도 주어지는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먼저 정답은 지금도 지식과 예언의 은사가 있는가 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대답은 있다. 단, 그 은사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방식은 성경에 기록되기 이전의 사도 시대의 방식과 지금의 방식과 다르다고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선 이 커다란 차이는 뭐냐 하면 사도시대 때 주어진 이 지식과 예언의 은사는 계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여태까지 주어진 구약 성경 계시에 보탤만한 새로운 계시들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 성경 중 상당한 부분이 바로 이런 지식과 계시의 은사를 통해서 남겨진 흔적들이 성경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하실 수 있죠? 그러나 이후에 성경이 기록된 이후에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지식과 예언의 은사는 이런 계시성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방식에 있어서 이 사도들의 시대 때에 주어졌던 지식과 예언의 은사는 아주 초월적이고 개인에게 아주 직접적인 방식으로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주어졌고 그렇게 주어지면서 평범한 인간들이 그 신학 책도 없고 교리서도 없던 때에 복음에 대해서 아주 깊이 있는 통찰, 부분적이기는 했지만 아주 정확하고 틀림이 없는 아주 깊은 통찰을 하나님이 갖게 해 주셨고, 또 예언의 내용도 이제 우리로 하여금 그 위에 교회에 기초를 세워도 좋을만한 확실한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있는 새로운 종류의 예언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사실은 초대 교회가 거의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은사 때문에 그렇게 문제를 일으키는 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그래도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예언을 하는 자는 교회에 덕을 세우나니’ 무슨 뜻이냐 하면 교회는 예언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덕을 보나니 그런 뜻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런 까닭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이제 초대교회의 지식과 예언의 은사가 가지고 있었던 새로운 계시는 오늘날의 이 지식과 예언의 은사 속에 담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지식과 예언의 은사는 성경이 기록되기 전 초대교회는 성경을 향하는 지식과 예언의 은사였는데 이제는 성경을 토대로 출발하는 지식과 예언의 은사입니다. 그래서 이 은사는 성경을 중심으로 주어지던 은사죠. 그래서 하나님이 이러한 지식의 은사를 주시면 이미 기록된 성경의 복음 진리에 대한 탁월한 이해와 통찰을 갖게 되고, 또 성령의 각별한 조명을 받으면서 이 은사를 받기 전에는 알 수 없었던 복음의 진리에 대한 해박한 이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공부를 안 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공부가 수평적인 것들을 아는 거라면 이 은사는 수직적인 의미들을 깨닫게 해주는 탁월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에 선생님이 한분 계셨습니다. 이 분은 유학을 안 하시고 한국에서 자기 혼자 공부를 하셨는데 꽤 지식을 많이 습득하셔서 신학생들에게 많은 은혜와 감화를 끼치던 선생님이었습니다. 학교 전체가 그 분을 의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과목을 가르치고 학생들에게 신학적인 영향을 끼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또 목회도 하셨습니다. 한 3~400명 정도 모이는 교회를 바쁘게 목회를 하셨습니다. 근데 신학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시고 주간도 가르치고 야간도 가르치고 하니까 이 목회 하는 일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근데 목회 하는 일 중 다른 거는 그래도 즉석에서 할 수 있겠는데 즉석에서 못하는 게 있죠. 설교입니다. 그래서 인제 설교를 준비를 해야 될 거 아닙니다. 근데 시간이 너무 없는 것입니다. 그 분 표현에 의하면 밤을 새워서 준비해 놓으면 홀딱 써먹고, 또 새벽에 일어나서 준비를 하면 홀딱 써 먹고, 이제 도저히 설교하는 횟수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안 나오고 자기가 거기를 따라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생각하기를 이렇게 해서는 도저히 목회도 못하고 신학교 학생들을 가르칠 수도 없겠다. 그래 둘 중의 하나를 내려놓을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을 특별히 깨달을 수 있는 은사를 달라고 기도해야 되겠다. 우리가 대게 목회자가 금식기도 할 때에는 교회 건축을 한다든지 뭐 교회가 큰일을 앞둔다든지 이럴 때 하잖아요. 그런데 이 분은 건축도 아니고 질병도 아니고 하나님이 제발 좀 이 설교 준비 좀 빨리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열흘을 금식 기도를 하셨대요. 그리고 기도하는 과정에서 어느 한 순간에 눈이 열리면서 성경을 보면 이것을 설교하라고 성경 본문들이 막 일어나는 것이 느껴지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사의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탁월한 것입니다. 이것을 받은 사람과 안 받은 사람은 비교할 수 없는 질적인 차이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해설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전의 지식의 은사는 성경을 쓰기 위해서 주시는 은사였는데 이번에 지식의 은사는 써진 성경을 깨닫는 은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말로 서서히, 서서히 공부함으로 성장하는 것도 물론 있지만 이 은사가 주어지는 것 없이는 서서히 공부하면서 발전하는 그것은 아주 미미한 것입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이 쓰신 시편 130편 강론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여러해 전에 거의 한 10년쯤 됐을까요. 제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는 길” 이라는 제목으로 사경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여러분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서 꼭 구입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근데 시편을 이 분이 해설을 하셨습니다. 근데 시편을 해설하면서 그것에 영적인 의미들을 드러내셨는데 그 시편이 다른 곳이 아니라 130편이었습니다. 그리고 130편 시편은 6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체를 한 250페이지 내지 300페이지 정도 조금 넘을까요? 그렇게 쓰신 걸로 기억을 하는데 4절 한절만, 4절의 그 내용이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 이다”라는 짧은 구절인데 4절 한절을 해설하는데 150페이지인가 200페이지를 쓰셨습니다. 그래서 탁 받아드는 순간 헉 했죠. 아니 어떤 사람은 시편 150편을 전체를 150개의 시편 전체를 200페이지에 쓰는 사람도 있는데 이 분은 어떻게 한 절을 150페이지에서 200페이지를 쓸까? 그리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엄청 은혜를 받았죠. 그때에는 지금보다 체력도 있었으니까 거의 밤새워서 책을 읽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깊이 은혜를 받고 울고 감격에 빠진 후에 깨달은 게 뭐냐 하면 그 다음에 제 반응이 뭐였냐면 어떻게 이 4절을 겨우 200페이지로 설명을 할 수 있을까? 이건 개요에 지나지 않는다. 개요에 지나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 일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뭐 한 10년 정도 됐을까요? 10년 정도 됐는데 이제 예배의 새 가족 안내 위원이겠죠. 그 사람이 새 가족 안내 위원이 이제 그 안내를 하는데 새로운 새 신자가 온 것입니다. 방문자가. 그래서 이제 열린 공간에 가서 차를 한잔 권하면서 항상 물어 보는 게 있잖아요. 그죠? “오늘 예배가 어떠셨습니까?” 그랬더니 그 분이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성경 한 절을 90분 동안을 설교할 수 있습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그때에 설교한 내용이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죄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로마서 6장 14절이었습니다. “어떻게 한 절을 90분 동안을 설교할 수 있습니까?” 그랬더니 거기에 있던 우리의 지체가 뭐라고 그랬냐하면 “성도님 오늘이 14절 9번째 시간입니다.” 오늘날 주어지는 이 지식의 은사는 이처럼 성경을 토대로 성령의 특별한 은사로서 조명해 주셔서 그 사람이 이 성경을 읽을 때에 성경이 이야기하는 그 배후에 있는 탁월한 지식들을 깨우치도록 만들어 주시는 그런 종류의 은사라는 점에서 지금도 이 은사는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은사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이해를 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당시에는 성경을 바라보는 예언이었습니다. 지금은 이 예언이 주어진 성경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언하다’라고 하는 이 단어가 ‘프로페튜오’라는 단어입니다. 구약 성경에 이미 예언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잖아요. 이게 이걸 사실 예언이라고 번역을 한 이 번역이 문제가 많아요. 왜냐하면 ‘우리들이 예언한다’ 라고 말할 때는 우선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는 것은 뭐냐 하면 알려지지 않는 사실을 미리 말하는 것을 예언이라고 하잖아요. 근데 사실은 이게 원래의 의미는 그런 뜻이 아니라 맡겨진 말을 말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래서 요즘 와서는 ‘미리 예’자를 쓰지 않고 예금을 맡긴다고 그럴 때 그 예자를 사용해서 예언이라고 말을 해요. 그러니까 구약 시대의 예언 때부터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은 예언자의 역할 중에서 아주 일부분이었습니다. 아주 일부분. ‘언제 전쟁이 난다. 언제 적군이 쳐들어온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예언 말입니다. 그거는 전체의 예언 중에서 아주 특별한 일부분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예언자의 본 직업이 아니었다 이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예언자의 훨씬 더 많은 역할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그 성경 말씀을 자기가 사는 시대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자기 시대는 모세의 시대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똑같은 고민을 선지자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고민 똑같이, 예수님이 지금 오신다면 우리의 이 외국인 노동자 학대의 문제, 그 다음에 남북 문제, 그 다음에 청소년 왕따현상, 그리고 그 다음에 오늘날 동성애의 문제 이런 걸 어떻게 보셨을까? 고민을 우리가 많이 하면서 답을 찾으려고 하잖아요. 구약 시대에는 예언자들이 이렇게 질문한 것입니다. 지금은 8세기이고, 모세는 15세기 사람인데 모세가 다시 살아나서 우리 시대에 온다면 무어라고 외칠까? 그거를 우리하고 똑같이 고민을 하면서 메시지를 선포했던 사람이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때의 이 예언이 바로 그런 방식으로 구약을 해설해서 신약 시대의 백성에게 들려주고 새롭게 주어지는 계시를 전달해 주는 역할들을 신약 시대의 선지자, 예언자들이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구약성경은 있었지만 신약성경을 바라보고 예언을 한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는 신약성경과 구약 성경이 완성됐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바라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성경을 뒤돌아보면서 오늘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그것을 신약 성경에서 답을 찾으면서 구약 성경의 도움을 받으면서 오늘 우리 시대에 새로운 말씀으로 선포해주는 역할, 이것이 예언입니다. 이 예언은 특별한 은사를 받음으로서 아주 효과적이고 권위 있고, 능력 있게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은사를 받지 않고도 성경을 해설하고 설교하고 할 수 있겠죠. 효과는 매우 미미할 것이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파고드는 힘이나 위력들은 현저하게 줄어들 것입니다. 비교될 수 없는 축복의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여러분 생각이 어떻게 보면 ‘야, 그러면 그 사도바울의 시대 때에 지식과 예언의 은사를 받았던 사람들은 아주 초월적이고, 직접적이고, 그리고 또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주어졌다고 했고, 우리는 그만 못하다고 했으니 그럼 오늘날에는 그런 지식과 예언의 은사를 받아도 그게 그렇게 신비한 게 아니겠구나. 우리가 거의 그냥 공부해서 아는 것이나 은사 받아 아는 것이나 기술을 많이 해 가지고 설교를 잘하는 걸 하는 것이나 아니면 그저 은사를 받아서 한 것이나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렇지 않죠. 비록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토대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식의 은사를 사용하게 해 주신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이고 아주 신비한 것입니다. 왜? 나의 이 지식과 이런 것들로는 충분히 알 수 없는 내용들인데 어느 순간 성령이 나의 어두운 지성을 밝혀주시는 것입니다. 이거를 조명이라고 말을 해주죠. 이렇게 우리를 조명해 주실 때에 놀랍게 이 성경에 대한 탁월한 통찰이 생겨나요. 그러면서 이러한 통찰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경지를 이해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냥 지성에 불만 들어와서 마치 캄캄한 방에 불만 들어오면 사물만 보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느낌도 함께 생기듯이 성경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실 때에는 성경의 의미만이 다가오는 게 아니라 성경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마음도 함께 전달되면서 그렇게 일어나는 이해와 정동의 과정들이 아주 신비하고 초월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988년돈가 9년도 지금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는데 1988년도 아니면 9년도일 거라고 생각이 되요. 그때에 저희는 딸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구요. 세 식구가 살았습니다. 전세 살다가 사기 당하고 길거리로 쫓겨나서 그래서 이제 언덕위에 다시 연립주택 1층을 얻었습니다. 그 사이에 제가 기도를 정말 많이 했는데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34살에 교수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월세는 낼 처지가 됐습니다. 그래서 이제 거기서 사는데 19평짜리 연립주택이었는데 복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쬐그만 방한 칸이 있는 연립주택이었죠. 화장실이 없어서 바깥으로 나가서 일을 봐야 하는 그런 불편한 곳이었는데 10시쯤 고단한 일이 있었는지 세 식구가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말똥말똥하고 잠이 안 오는 것입니다. 10시 반에. 10시 반. 10시 20분쯤 됐을 때 일어났습니다. 창가에 놓여있는 책상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작은 스탠드를 켜놓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에 읽었던 본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우시는 장면이었습니다. 근데 한순간 이 성경이 한 번도 나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놀라운 진리들을 막 빗줄기처럼 쏟아 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한 대여섯 번 읽고 묵상을 하다가 기도가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그 책상 위에 무릎을 꿇고 배게를 품에 안고, 불을 끄고 그리고 소리를 내서 기도를 하면 이제 가족들이 깰까봐 그리고 그 베게에 얼굴을 묻고 엎드려서 몇 시간을 울면서 기도했는지 몰라요. 그러고 나서 언제쯤 되었는지 시계도 안 봤는데 이렇게 깨달은 것을 꼭 적어놓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노트를 펴고 깨알 같은 글씨로 메모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이 정도면 내가 깨달은 거를 다 쓰지는 못했지만 줄거리는 써서 읽어보면 알 수 있겠다 그러고 점을 찍고 시계를 보니 아침 7시가 훨씬 넘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시간이 빨리 간줄 몰랐습니다. 8시간, 9시간을 그 책상위에서 무릎을 꿇거나 앉아서 그 여섯 절정도 되는 성경 한 절을 가지고 씨름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전에 신약 성경이 주어지기 전에 성경 계시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지식과 예언의 말씀을 주시던 그때가 초월적이고 직접적이고 특이했지만 그리고 지금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깨닫게 하셔서 지식을 갖고 예언을 하게 하시지만 그것을 깨닫고 우리에게 감화를 끼쳐주시는 방식은 그때 못지않게 초월적이고 아주 신비로운 방식으로 성령의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지식과 예언의 은사는 당시의 지식과 예언이 주어졌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또 다른 은혜로운 방식으로 오늘도 우리에게 계속되고 있으며, 성경을 기초로 이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예전에는 예언하는 자들이 또 다른 예언하는 자들에 의해 통제를 받았지만 지금은 누가 무슨 지식의 은사를 얻었든지, 누가 무슨 예언의 말씀을 받았든지 간에 이 성경 계시에 의해서 통제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이 성경을 깨닫고 해석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이 지식과 예언의 은사를 계속 우리에게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것이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 이런 지식과 계시의 충만한 은사가 임하면 수만 명, 수십만 명의 사람이 어둠 속에서 빛으로 돌아옵니다.
어느 우편배달부가 소포를 배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포를 포장을 했는데 책을 찢은 걸로 포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편배달부가 저 멀리 있는 집에 배달을 하러 가면서 심심하니까 그 우편물을 포장한 포장지를 읽으면서 갔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배달할 그 집에 이르기 전 길거리에서 무릎을 꿇고 회심하고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의 설교집이었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줍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냥 신학교를 돕고 책을 사고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기도를 많이 해서 하나님이 이러한 은사들을 당신의 말씀의 종들에게 충만하게 부어주시기를 아울러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헌금만 하는 게 아니라. 그때에 그 모든 책이나 자료들이 빛나고 의미가 있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 함께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은사의 가치는 그 우리가 부활의 날에 이제 성경이 필요 없게 될 그때까지 유효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이 오게 되면 이런 모든 것들 필요 없습니다. 지금 교리를 가장 잘 알고 신학에 밝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때에 가장 지성이 미약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가 이 지식과 예언의 은사의 탁월성을 이야기하면서도 언젠가는 이 지식과 예언의 은사가 폐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IV. 결론
이렇게 하나님이 구약 시대의 지식과 예언의 은사 다르고 또 다른 층차로 신약 시대의 성령 강림 이후에 이 지식과 예언의 은사를 주시고, 성경이 완성된 다음에는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주어진 방식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기록된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 이 은사를 우리에게 주시지만 이 기록된 말씀을 향하여 우리에게 이런 은사를 주셔서 이것들이 층차를 가지고 오지만 신약 시대로부터 여기 사도 시대를 지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구분 없이 계속 똑같은 본질을 유지하며 계속되고 있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뭐예요? 사랑입니다. 사랑. 사랑은 이런 층차가 없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계시의 말씀을 직접 받을 때에 마음이 뜨거워지고 하나님 사랑하게 된 것이나, 오늘 이 성경을 읽으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닫고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나 본질에 아무 차이가 없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지식과 지식의 풍성함과 함께 이 사랑의 합치를 이루면서 불꽃처럼 타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 지식과 예언도 그쳐요. 그러나 그 그치는 그 지점에 사랑은 오히려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할 것이고 그 사랑은 예전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받았다는 그 모든 하나님의 사랑과 똑같은 본질을 유지하면서 계속되는데 이것은 폐지되지 않고 영원히 계속될 것이기에 오늘도 사도는 우리에게 보다 완전한 하나님의 선물, 이 은혜를 사모하라고 이 사랑을 사모하라고 그래서 이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사를 교회와 이 세상에 흘려보내고 섬기고 봉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이 온전해지는데 이바지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며, 이런 지식과 예언의 은사가 교회에 가득하도록, 그러나 이 지식과 예언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이 지식과 예언이 불러일으키는 하나님과 성도와 이 세상 사람들 향한 사랑만이 영원하다는 사실을 믿으며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4.온전히 알게 되는 날에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9-1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저는 지난 시간에 지식과 예언의 은사가 왜 폐하여지는 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랑이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여러분에게 가르쳐 드렸습니다. 저는 오늘 “온전히 알게 되는 날에”라는 제목을 가지고 사도가 대조하고 있는 지금 아는 것과 그때에 아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함으로써 천국이 지식과 사랑의 나라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가 왜 그렇게 은혜를 사모하고 모든 은사보다 사랑을 마음에 더 품어야 되는지에 대해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II. 지금과 ‘그때’ 아는 것
지금과 그때에 아는 것 사이에 대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사도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는 현재의 아는 것과 온전한 것이 오게 되는 그날에 알게 되는 것 사이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도의 진정한 의도는 아는 것을 대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 부분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것은 언젠가 폐하여 지는 것이고 사랑은 폐지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이 이 지식과 예언의 은사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왜 지식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가 필요 없게 되는지를 알려면 지금 아는 것과 영광스러운 그날에 알게 되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지를 깨달아야지만 이 모든 대조가 명료해지게 되겠죠.
A. 지금 아는 것
먼저 지금 아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고 한 이 시기는 아직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입니다. 그래서 은사의 형태로 주어지는 지식과 예언 등은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가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었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이 지식과 예언의 은사로 말미암아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고린도 교회를 다루면서 14장에서 예언을 사모하도록 그들에게 권고했던 이유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보여주신 계시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구속이라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속을 위한 계시도 또한 필요 없었습니다. 인간은 타락했고 죄가 들어왔습니다. 이제 인간은 구원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법은 지식을 통해서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심으로써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식의 빛 아래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1. 점진적 계시의 과정
이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의 계시는 처음에는 희미하게 촛불처럼, 그리고 나중에는 횃불처럼, 나중에는 크게 타오르는 모닥불처럼 더 나중에는 불기둥처럼 비추었지만 역시 그 주위에 있는 어두움에 비하면 이 빛은 지극히 작은 빛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 빛은 한 번에 주어지지 않고 앞에 있는 빛에 또 다른 빛을 더함으로, 더함으로 점진적인 계시의 형태로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보면 아주 희미한 불빛이었지만 이 계시의 불빛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구원받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희미한 불빛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든 계시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빛은 찬란한 빛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셨으니 구약에서 계시된 모든 것들을 능가하는 신약 구원의 계시의 빛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역사는 구약과 신약으로 전개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찬란한 불빛이라고 본다면 그 예수 그리스도에 가까이 있는 시대가 가장 환하게 보일 것이고, 거기로부터 멀어진 구약 시대는 점점 희미해질 것이고, 거기로부터 더 멀리 있는 미래의 시대도 희미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를 담은 신약의 책, 그 중에서도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빛을 충만히 누렸던 사도들에 의해 기록된 복음서 속에 구원의 계시가 풍부하게 담겼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완성된 뒤에도 우리가 그 이전 시대에 비하면 훨씬 더 나은 구속의 계시를 가졌지만 역시 그것도 완성될 날의 우리에게 주어질 온전한 지식에 비하면 부분적인 지식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사람들은 이러한 구원의 계시를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의 상태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어둠 속에서 살고 있고, 하나님의 계시에 담겨진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대하여 반항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아는 것은 훨씬 더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2. 구원 완성 이전의 앎
그러나 신자인 우리들은 하나님이 이런 구원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래서 하나님의 구속의 방법이 기록되어 있는 이 성경책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의 지금 아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그 위에 내린 저주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를 지었고,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이 사람만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도 그 저주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이 깃들여 있던 이 모든 피조물들은 본래의 아름다운 광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영광을 완전히 거두지 아니하시고 일부에 희미한 흔적이나마 남겨두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타락한 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 속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이며, 사람들은 이 자연과 공간의 아름다움을 찾아 많은 돈을 들여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인간의 생래적인 한계 때문에 우리의 지금 아는 것은 부분적일 수밖에 없고, 성경의 계시가 완성된 이후에도 우리의 아는 것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받았으나 여전히 우리 안에 죄가 남아있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은 수시로 어두움에 휩싸이게 되고 이러한 영혼의 어두움은 지성의 눈멂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꼭 알도록 허락하신 이 지식들을 한편으로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얻지 못하고 또 한편으로는 능력은 있으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올바로 터득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커다란 어두움 속에서 지금 아는 것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신자들 안에 있는 죄는 수시로 융성해지기를 갈망하고 이 죄가 신자의 마음 안에서 융성해질 때에 은혜는 사라지게 됩니다. 별빛처럼 빛나던 신앙의 눈동자는 흐려지기 시작하고, 마음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의하여 자극을 받고 도전을 받던 마음이 변하여 이 세상 헛된 사물에 대한 욕망으로 꿈틀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의지는 하나님을 향해 용기 있게 굴복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지만 은혜에서 멀어지고 이 죄에 영향을 받음으로 충동에 굴복하는 완고한 의지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런 굽은 우리의 태도는 우리의 영혼의 어두움을 더하게 되고 이러한 악순환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지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안다고 하더라도 그 아는 것이 부분적일 수밖에 없고 그때 영광의 날에 우리에게 비취는 참된 아는 것에 비하면 희미한 그림자일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몰라도 되는 것들에 대하여 지식이 없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될 것을 모르는 것은 죄입니다. 법에서도 인간의 죄를 규정할 때 작위의 죄와 부작위의 죄로 나눕니다. 작위의 죄는 그 일을 안했더라면 죄가 없었을 텐데 그 일을 했기 때문에 죄인이 되어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마음속에 욕심을 가지고 있어도 마음속에 있는 생각 때문에 재판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이 민주 국가의 양심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가 남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가 돈을 훔쳤을 때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였기 때문에 작위의 죄를 짓고 이에 따르는 형벌을 담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부작위의 죄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안했기 때문에,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행했기 때문에 범죄를 구성하게 되고 이에 대해서 형벌의 책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반드시 한 달 이내로 출생신고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태만해서, 혹은 게을러서, 혹은 잘 몰라서 출생신고를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심하면 벌금을 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안 한 것에 대한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몰라도 되는 지식을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마는 인간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지식은 하나님이 가지라 명하신 지식이기 때문에 이 지식을 모르는 것은 알지 아니하기를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죄를 구성하게 되고, 이에 대해서 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그 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분께 어찌 순종할 수 있겠으며 알지 못하는 분을 어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과 순종과 더불어 가장 첫 번째 중요한 의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를 우리의 맨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지 않으셨고, 오히려 하나님은 당신의 구속의 사건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마지막 날에 될 세상이 어떠한 세상이신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모든 지식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이 성경은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살기에 충분하고 유일한 기준이 됩니다.
B. ‘그때’ 아는 것
1. 점진적 계시의 완성을 넘어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지식은 그때에 알게 될 지식에 비하면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영광의 날, 그때에 아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 영광의 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고 우리가 부활하는 그날, 우리의 흙으로 돌아간 육체의 몸이 다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재탄생하고 하늘에 있던 우리의 영혼이 결합하여 완전한 몸을 이루게 될 때에 그때에 우리의 앎은 점진적으로 주어지던 구속의 계시의 성경을 넘어서는 완성적인 지식이 될 것입니다. 그때에도 우리가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점진적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가르쳐 주던 성경 계시를 넘어설 것이고 성경 이루에 펼쳐질 이 구속의 역사적 전개를 통하여 깨닫게 되는 지식을, 능가하는 지식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2. 영화의 날의 앎
우리의 몸이 모두 썩어지지 아니할 영광스러운 몸으로 덧입고 영혼이 육체와 다시 만나 환희하게 되는 그 날에 우리의 앎은 어떤 종류의 앎일까요? 무엇보다도 그때 우리의 앎의 방식은 오늘날 우리들이 아는 앎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지식을 갖게 되는 앎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 성경의 기록이 끝나고 오늘날에게까지 계속되는 하나님에 관해서 알게 되는 이 모든 방식들이, 사물에 대해서 알게 되는 방식들이 그 영광스러운 날에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아는 것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a. 새로 도입되는 앎의 방식
구약에서는 신약에서 주어질 실체를 바라보는 모형이 제시되었고, 이 모형은 신약시대에 완성된 실체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이 모형과 실체의 관계를 통해 예표된 대로 우리의 역사와 삶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전개되었습니다. 우리를 구원받게 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은 성경의 기록과 함께 완결되었지만 완결된 구속의 하나님의 의지가 역사 속에서 실제로 실현되는 것은 이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지식들은 계시의 완결과 함께 종결하셨지만 그 계시가 역사 속에서 전개되는 일을 세상 끝 날까지 전개하심으로 이 세상의 역사 속에서 당신의 아름다운 성품과 이 세상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모형에서 실체로, 그 실체에서 영광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이 모든 과정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자신을 알리시는 과정입니다. 구약에서는 모형을 보고 겨우 실체를 예측했지만 신약에서는 실체를 바라보고 미래의 전개를 예상했지만 그날에는 이 모든 것들이 이루어진 영광 안에서 이 모든 이 지구상에 펼쳐졌던 구원의 역사를 한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이때에 지식을 습득하는 방식은 성경의 완성을 기다리며 지식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와 같은 부분적인 지식에 의존하는 그런 방식의 앎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은 성경이 완성되었으나 이 성경을 통하여 배우고 익히고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간접적으로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영광스러운 날에는 이 성경도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니 왜냐하면 이 성경을 통한 간접적인 방식의 앎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우리 인간 지성에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과 이 세계에 대해서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또한 우리가 아무리 탁월한 열심으로 성경을 대한다고 할지라도 성령께서 우리의 지성을 조명해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경에 관한 중요한 진리들을 거의 깨달을 수 없게 됩니다. 이처럼 오늘날 성경에 대한 앎은 성령의 조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성경의 뜻을 알고, 성경의 뜻을 앎으로써 하나님과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을 겨우 갖게 되는 간접적인 방식의 앎입니다. 그러나 그 날에는 조명을 통한 앎보다는 비전을 통한 앎입니다. 이상이 드러나듯이 한 번에 이 모든 계시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꿰뚫어 바라볼 수 있는 직적접인 방식의 지식이 신비롭게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b. 새로운 지식의 내용
그러면 이 영화의 날에 주어질 새로운 지식의 내용은 어떤 것일까요? 이 지식의 내용은 네 가지 범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우선 첫째는 하나님 자신을 아는 지식입니다. 이 지상에서는 우리가 간접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탐구하게 하셨고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씩, 하나씩 깨우쳐 알게 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은사를 받고 깨달은 지식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 깨달은 지식이나 모두 한계를 가진 지식이었고 부분적일 수밖에 없는 지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탐구하고 이 하나님 말씀을 해석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렇지 못한 사람이 태만하여 성경도 탐구하지 않을 때에 그가 아는 하나님과의 지식과는 짐승과 사람의 차이처럼 비교될 수 없는 높은 층 차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그 영광의 날에 주님을 아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당신 자신을 알게 하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은사를 받은 사람의 도움을 받고 또 이렇게 성경을 부지런히 탐구하고 신학을 연구하여 하나님에 관한 학문에서 도움을 받는 사람들의 조력을 힘입어 우리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그날에 우리가 주님께 대해 알게 될 그 찬란한 지식에 비하면 이것은 태양 볕 아래에 있는 아주 작은 촛불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날의 지식은 탁월한 지식이 될 것입니다. 그 날의 지식은 한 번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지식이 될 수 없으니 하나님은 무한하시기 때문에 당신 자신을 전부 가르쳐 주시지도 않지만 가르쳐 준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그 계시의 빛을 감당해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못된 짓이었는데 어렸을 때 우리는 땅에서 놀았잖아요. 그래서 땅을 캐면 별 신기한 게 다 나왔습니다. 우선 총알, 구리, 못, 이런 것들이 나와서 엿 바꾸어 먹기도 했고, 땅을 막 파다가 보면 땅 강아지 나와서 땅강아지를 실로 열댓 마리씩 묶고 끌고 다니면서 놀기도 하였습니다마는 더 놀라운 것은 수챗구멍 옆 같은데 부지런히 파면 가끔 두더지를 잡는다는 것입니다. 두더지는 쥐하고는 좀 달라요. 쥐보다 약간 작고 얼굴이 좀 두툼해요. 그리고 쥐보다는 훨씬 잘 생겼습니다. 요 못된 애들이 이 두더지가 햇빛을 못 본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손바닥이 아주 독특하게 생겼습니다. 갈기를 씌운 것처럼 생겼습니다. 그거를 땅속에서 두더지를 꺼내놓고 “야, 우리 두더지 햇빛 보여주자” 그러고 햇빛에다가 막 흔들어대요. 나는 수의학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두더지가 햇빛을 얼마나 볼 수 있는지, 햇빛이 눈을 감은 상태에서 비췄을 때에 그의 시각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상세한 정보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그렇게 햇빛을 향해 두더지를 치켜들면 이 두더지가 죽겠다고 막 고개를 젓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면 이 햇빛을 두더지가 감당하지 못하는 것처럼 인간은 이 하나님의 햇빛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러하고, 영광의 나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러해요. 오늘날에 두 가지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은 첫째는 감당할 수 있는 크기의 지적인 능력이 안 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우리가 부패하고 하나님 앞에 죄가 남아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 진리의 빛은 더더욱 감당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십시다. 아침에 비취는 찬란한 햇빛은 건강에 매우 좋은 것이지만 안질이 있는 사람에게 그 햇빛을 쳐다보는 것은 자지러질 정도로 괴로운 일입니다. 달콤하게 무친 회 무침은 많은 사람에게 식욕을 돋우는 아주 감미로운 음식이지만 입안이 헐어버린 사람에게 고추장으로 무친 그 달콤한 회를 먹는 것은 고문을 받는 것일 것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서는 죄가 우리의 지성 속에 남아있기 때문에 주님의 찬란한 빛이 비췰 때에 오히려 우리에게 커다란 고통이 될 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적절하게 이 지식의 빛을 조절하신다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광의 날에는 이 모든 죄들은 사라지고 인간은 순결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부패성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하나님의 영광을 담지 할 수 있는 지성의 크기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이 감내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 당신 자신에 관하여 점증적으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그렇기 때문에 고정된 나라가 아니라 약동하는 생명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에 관하여, 하나님이 당신 자신에 관하여 지식을 보여주시면 그 지식은 찬란한 빛으로 우리의 지성에 다가오게 될 것이고, 우리는 그 지식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더욱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도 지성이 뛰어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층차가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지상에서처럼 많이 배운 사람들이 조금 아는 사람을 멸시하거나, 적게 배운 사람들이 열등감에 빠지게 되는 그런 법은 없습니다. 이렇게 가르쳐 주면 어떤 사람들은 서로 지성의 크기가 차이가 나는데 천국에서 느끼는 행복의 크기에도 차이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것은 있다고도 말할 수 있고 없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내용이지만 아주 쉬운 예를 들어 보일 테니까 여러분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천국과 지옥도 모르고 이 세상을 방황하던 여러분이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복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날 주님을 깊이 만나고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달았고 예수님이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사랑에 마음이 녹아내리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생애 최초의 경험입니다. 행복하겠습니까? 안 행복하겠습니까?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또 이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는데 예전에 자기가 알던 것들은 너무나 간단하고 기본적인 사실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깊이 있는 교리를 터득하고, 신학을 공부하고, 성경의 진리를 더 많이 믿고 터득하였더니 정말 예전에 믿은 것들은 아주 작은 헛간과 같은 지식이었고 지금은 웅장한 궁궐과 같은 지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이 알게 되었으니까 하나님을 그 아는 지식만큼 뜨겁게 사랑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는 행복하게 되었습니다. 행복합니까? 안합니까? 행복하죠. 그럼 물어봅시다. 이렇게 주님을 새롭게 알고 예전과는 비교되지 않는 찬란한 지식의 빛을 가지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이 첫사랑이 그리울까요? 안 그리울까요? 첫사랑 타령하는 사람들 치고 요즘 사랑 신통한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데 나 자신을 포함해서 아내에게 자꾸 옛날 사랑을 회상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면 안 돼요. 요즘 사랑에 감격하게 만들어야 되지. 강퍅한 남자들이 아멘을 안 해요. 그래야죠.
그런데 이 상태에서 행복한 사람은 여기를 가 본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덜 행복하다고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이 상태에 간 사람이 여기를 갔기 때문에 이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은 지식으로 터득한 이 사람의 행복이 이 사람의 행복과 못하다는 것은 객관적으로는 그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본인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엔 지성이 뛰어난 사람이나 뛰어나지 않은 사람이나 모두 완전한 만족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매일매일 하나님이 새롭게 비춰주시는 당신 자신의 계시를 보면서 주님을 더 알고 사랑하게 됨으로써 예전에 자기가 주님을 사랑하고 알게 된 것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매일매일 새롭게 깨닫게 되는 나라가 바로 천국입니다. 이 천국에도 의지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을 수 없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이 의지를 새끼줄로 묶었기 때문에 죄를 못 짓는 게 아니라 이러한 지식으로 끊임없이 사랑하게 하시기 때문에 죄를 지을 능력이 있다고 할지라도 죄를 지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되는 나라가 바로 그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에 대해서 충격적으로 새로운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고 할지라도 보여주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당신 자신에 대해서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모두 알았다고 할 수 있는 날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그 아름다움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영원히 보여주셔도 무한대만큼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범주는 구속사에 대한 지식입니다. 구속사는 성경 안에서는 구원의 길을 보여주기 위한 구속사이지만 성경계시가 끝난 후에는 이 세계를 창조한 목적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구속을 전개하시는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구속사는 끝났지만 그 하나님이 구원을 작정하신 영원한 작정은 성경이 종료된 이후에도 계속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구속사도 우리의 제한된 지식 때문에 모두 알지 못하고, 역사 속에서 흘러가는 구속의 역사는 그 속에서 우리가 함께 떠내려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고, 누구도 그것을 유이라고 정확하게 해석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날에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하여 위에서 한 번에 이 모든 역사를 바라볼 것이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구속사는 물론이거니와 종말까지 줄달음쳐 온 인류 안에 이루어진 구속시련의 역사까지도 정확하게 꿰뚫어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나라와 나라 사이에 있었던 전쟁과 평화의 역사, 여러 나라에 있는 흥망과 성쇠, 그리고 제국의 부흥과 침체 같은 것들이 어떻게 하나님이 전개해 가지는 구속의 역사와 정확한 고리를 이루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이바지하였는지에 대한 오류가 없는 확실한 지식을 갖게 될 것입니다. 마치 하늘 높이 떠 있는 비행기에서 높은 산을 오르고 내리는 차의 과거와 미래를 한 번에 바라보듯이 이렇게 우리는 구속 전체의 역사에 대한 지식을 하늘나라에서 영광스럽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갖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 범주는 사물들에 관한 지식입니다. 자연적인 사물들과 영적인 사물들에 대한 지식이 그것인데 자연 사물들은 생명이 없는 물건들에 관한 지식이고, 영적 사물들은 영적 생명을 가진 사물들입니다. 인간과 천사와 같은 피조물들을 이르는 것입니다. 지금은 자연 사물들을 우리들이 온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학자들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분야에서 사물들의 원인과 결과를 공부하는 일에 헌신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보다 많은 학식을 가지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들을 통하여 우리들이 사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물들에 관하여는 우리들이 성경을 통하여 배웁니다. 또 인간이 만든 학문 속에서도 철학이나 윤리학 같은 학문을 통하여 심리학 같은 학문을 통하여 인간 존재의 심리에 대하여 배우기도 합니다. 키케로라는 로마의 사상가는 자기의 의무론이라는 책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자연 사물을 사용하여 인간을 어떻게 이롭게 할까하는 것이 기술이라면 자기를 사용하여 이웃을 어떻게 이롭게 할 것인가 하는 덕의 문제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덕은 바로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오늘날 학문이 발달되고 과학이 폭발적으로 발달하면서 사물들을 이용하여 어떻게 우리 인간을 이롭게 할지에 대한 기술은 폭발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불행의 원인은 반드시 이 물질의 사용의 부족에만 달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근원적인 불행은 덕의 문제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자신이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자신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어떻게 이바지하고 다른 사람을 통해 어떤 섬김을 받음으로 자신은 행복한 존재가 되겠는지에 대한 질문은 덕에 대한 질문이고 이것은 사랑에 대한 질문에 다름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지식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특히 영적 사물들 간의 이 지식에 관해서는 극히 제한적인 지식밖에는 갖지 못합니다. 사랑에 빠진 모든 사람이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도 아니고 정의를 행하는 사람이 정의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도 아닙니다. 동물적인 감각들로 이런 일들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아는 지식이 우리에게는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스러운 날에는 이 자연 사물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때에 다시 과학이나 의학 그리고 생물학이나 물리학, 심리학이나 이런 것들에 대하여 공부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구원론이나 기독론에 대해서 우리는 공부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성경의 지식, 학문에 학자들의 도움이 없이도 우리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이 모든 사물들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 범주는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지식입니다. 계시가 드러난 하나님의 뜻이라면 섭리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입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해야 되는지 지금은 모릅니다. 세월이 흘러가 보면 시간의 전개 속에서 하나님이 무슨 뜻을 품고 우리에게 이런 일을 행하셨는지가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섭리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일어난 과거의 일들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마는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것들을 잊어버리게 하셨습니다. 최근에 저는 재미있는 사실을 접하게 되었는데 미국에 있는 희귀한 정신 질병 가운데 절대로 과거를 잃어버리지 않는 질병이 있답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이 꽤 여러 명이 있었는데 그 중에 심한 여성 한 사람을 취재했습니다. 40대 정도 되어 보이는 가정 주부였는데 이 사람은 태어나서 기억을 하게 된 나이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잊혀지지 않는 여자입니다. 그래서 기자가 황당한 질문을 했습니다. “1975년 몇 월 며칠은 무슨 요일이었으며 어떤 날씨였습니까?” 이렇게 간단한 것을 물어봤습니다. 이 여자가 조용히 눈을 감더니 “그날은 화요일이었습니다. 아침부터 눈부시게 찬란한 햇빛이 비췄습니다. 10시쯤 돼서 엄마와 나는 슈퍼에 물건을 사러 갔었고, 우리가 찾는 물건을 슈퍼 가게가 구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신 다른 것을 두 개 사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날 오후 2시에 오빠가 오랜만에 우리 집을 방문했고, 세 시에는, 네 시에는, 다섯 시에는, 여섯 시에는, 그리고 10시 반에 잠들었습니다.” 모든 날을 다 기억하는 것입니다. 근데 처음에는 너무 부러웠습니다. 왜 요즘은 책을 분명히 읽었는데 그 다음날에는 생각이 안나, 책을 두 번을 읽었는데도 저자 이름이 기억이 안나. 그런데 그 여자가 남긴 마지막 날이 의미심장해요. “여러분은 아무것도 망각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인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잊어버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예요, 은혜. 아멘하기에는 아는 것이 별로 없으니까 참 쑥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참 놀라웠습니다.
근데 하나님이 그래도 과거에 대해서는 우리가 노력을 하면 기억을 할 수 있게끔 해주셨는데 미래에 대해서는 전혀 알게 안 해주셔요. 과거는 잠시 전의 일은 많이 기억나고 시간이 지날수록 망각곡선의 원리에 의해서 이게 우리의 기억 속에서 소멸되어 가잖아요. 특별한 것들만 기억에 남잖아요. 그러면 미래는 가까이 있으면 좀 알고 멀리 가면 잘 몰라야 하는데 100년 후의 일이나 0.00001초 후의 일이나 우리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알게 된다면 그것은 확률에 의해서 좀 더 많이 알게 된다는 거지 실제로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아서 아는 게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 있으니까 1초 후에도 계속 설교하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뿐이지 그것이 진짜 아는 게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그리고 하나님은 미래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셔요. 그런 것들을 알고, 그런 것들을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냐 하면 만약에 미래에 일어날 일들이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알면 교만해질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을 덜 의지할 것이고 미래에 일어날 일들이 안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알면 낙심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포기할 것이기 때문이고, 만약에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고 제시된 것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한다면 우상을 섬길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허락을 안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다? 내일 일은 모르니까 어떻게? 매일매일 주님을 의지하며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 섭리가 무슨 뜻이었는지 몰라요. 내가 왜 우리 집안에 태어났을까? 내가 왜 이 사람을 만나서 결혼했을까? 내 생애 중 가장 필요 없어 보이는 이 사람을 왜 만나서, 아니 부부를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도둑이 발 저린다고 왜 그래요? 우리 인생을 보면 안 만났으면 좋았을 거 같은 사람 있잖아요. 그런 사람을 왜 만나서 내가 괴로움과 고통을 당했을까? 이런 것들을 지금은 다 몰라요. 그런데 그 영광스러운 완성의 날에는 한 번에 이 모든 것들을 보면서 왜 그런 일들이 우리에게 꼭 필요했는지를 알게 될 것이고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이어졌든지 간에 그 영광의 날에는 우리의 인생을 두고 펼쳐졌던 모든 일들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찬양) 내 인생 여정 끝내어 강 건너 편에 이를 때 하늘 문 향해 말하리 예수 인도 하셨네
III. 천국, 지식과 사랑의 나라
그래서 지금은 미래에 대해서 몰라도 어린 아이처럼 주님의 손을 꼭 붙들고 때로는 폭풍과 시련의 계곡도 지나가고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를 선하게 이끄실 것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됐는데 모든 것들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천국은 지식과 사랑의 나라입니다. 그때에 그 영광스러운 날에 우리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하나님과 구원의 역사와 그리고 이 모든 사물들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지식들을 갖게 될 것이고, 그때 우리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아주 탁월하고 영광스러운 방식으로 이 모든 세계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이 모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만물, 하늘에 떠 있는 큰 별들로부터 이 땅에 있는 아주 작은 돌멩이와 같은 피조물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연결을 이루고 있으며 그 안에 인간들도 또한 적절한 연결을 가지고 사람과 사람이 연결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교회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자연 세계와 그리고 인간들이 서로 다른 층차에서 아름다운 그물망을 이루면서 찬란한 빛을 드러내게 될 것이고, 그 끝없이 펼쳐진 존재들의 그물망 가장 높은 곳에 찬란하게 빛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광채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물들에 대한 지식은 통합될 것이고, 이 모든 지식의 중심에 탁월하신 그리스도 예수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계시될 것이고, 그 아름다움을 발견할수록 모든 인류들은 하나님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다시는 지식이 사랑과 결별하여 교만해지거나 혹은 사랑이 지식과 결별해짐으로 무모하게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지식은 언제나 사랑과 하나를 이룰 것이고, 아는 것만큼 사랑하고 사랑하는 것만큼 알게 될 것이니 알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을 멸시하거나 혹은 지식의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받지 못한 사람을 무시하는 것과 같은 이러한 불합리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은 하나님 안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되는 인간들 안에서도 발견될 뿐 아니라 이 모든 존재들의 찬란한 그물망 속에서 하나님의 휘황찬란한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매일매일 한 번도 도달해보지 못한 기쁨과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고, 그 안에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겪은 모든 시련과 고난에 대한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점증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찬란한 영광 아래서 우리의 사랑도 함께 점증해 갈 것이며 매일매일 우리는 첫 사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과거의 사랑을 기억할 필요 없이 아침마다 새롭게 주어지는 그 찬란한 사랑의 빛 아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인도하시기까지 부분적으로 알게 하셨던 지식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가 얼마나 부분적이고 한계를 가진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고, 완성된 성경을 통해 아는 이 지식들이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사모했다고 할지라도 영광의 상태에서 얻게 되는 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비하면 그것은 얼마나 희미한 촛불이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지식이 폐하고, 예언도 사라지지만 그러나 우리는 또 한 가지 사실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찬란한 영광, 이전에는 발견한 적이 없고 접해본 적이 없었던 신적인 지식에 대하여 영광이 정동되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랑의 경험은 순수하고 완전한 사랑이기는 하지만 이 사랑의 품질이, 이 사랑의 본질이 죄 많은 세상에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사랑할 때 누렸던 그 사랑과 동질의 사랑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크게 감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날마다 새로울 수 있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일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경건한 성도들은 불완전한 이 세상에서도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지식을 붙들고 하나님을 사랑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영원한 나라에서 맛보게 되고 누리게 될 그 사랑에 다름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복된 사람들입니까? 이런 영광스런 약속을 유업으로 받았으니 말입니다. 이런 영광스러운 지식과 사랑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눈물 흘림을 며칠 더 당하며 우리의 행할 길을 가야 합니다.
IV. 결론
주님이 우리에게 지워주신 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신명을 바치며 우리는 이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때까지 주님을 끊임없이 사랑하고 이 모든 지식을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그 일에 소용되도록 여러분이 사용하며 주님의 영광스런 주님과의 만남을 기다리며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5.어린 아이의 일을 버릴 때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사도는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게 된다고 말하면서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는다고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문득 자기가 어린 아이였을 때와 장성한 사람이 된 지금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였을 적에는 말하는 것과 깨닫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 같았지마는 장성한 후에는 그때의 일을 버리게 되었노라고 말합니다. 사도가 갑자기 어린 아이의 비유와 장성한 자의 비유를 끌어들이는 것은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지식과 방언과 예언의 은사에 집착하는 것이 바로 어린 아이의 일에 집착하는 거와 같으며 이것은 언젠간 폐하고 그치고 사라질 것이지만 그때가 되어도 영원히 가치 있는 덕목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어서였습니다.
II. 어린아이와 장성한 자
A. 두 용어의 의미
그러면서 사도는 어린 아이라도 모두 이해할 수 있을 아주 쉬운 비유인 어린 아이와 장성한 자의 비유를 가지고 오늘 이 본문을 풀어가고 있습니다. 두 용어의 의미를 살펴보십시다. 어린 아이라고 우리말 성경에서 번역된 단어는 희랍어로 ‘네피오스’(νήπιος)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네’(νή)는 ‘아니다, 없다’ 하는 부정어이고 여기에 ‘피오스’(πιος)라고 하는 단어는 ‘말하다’에서 온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희랍 사람이 생각하기에 어린 아이는 말을 잘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어린 아이다 라고 여겨졌던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아직 언어를 잘 모르기 때문에도 말을 못하지만 전달하여야 할 만큼 성숙한 사고가 자신 안에 없기 때문에 그것을 전달하지 못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성숙한 사고를 언어로 전달하려고 해도 아이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죠. 그래서 나이가 어릴수록 아이들은 대게 표현하는 언어들이 동물적인 욕구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배고프다, 용변이 마렵다 혹은 춥다, 자고 싶다 등등의 육체적이고 본성적인 욕구를 언어로 표현하죠. 그 아이가 성숙해 가면서 이제 정신의 세계에 대해서 눈을 뜨고 감각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엄마 이 꽃이 참 예뻐요.”, “아빠 내가 그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나를 어떤 장소에 데려다 주세요.” 하는 욕구들은 이미 어떤 사고가 아이 속에서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안에 성숙된 사고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전달할 수 있을 때 같은 수준의 사람들 속에 성숙한 사고를 자기가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과정이 어린 아이에서 장성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과정입니다.
사도가 굳이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너희들이 오늘 지식의 은사냐, 방언의 은사냐, 예언의 은사냐를 가지고 우월을 다투고 있지. 그러나 그것은 모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는 수단인데 이것은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전달해 주시는 것이 아니란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방식은 한시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언젠가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그 날에는 너희들이 지금 자랑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탁월한 방식으로 하나님에 관한 지식들이 전달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지금 이 지식의 은사를 가지고 싸울 것이 아니라 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이 모든 지식의 은사들이 폐하고, 그치고, 종결되는 때에도 여전히 유일한 덕목으로 남는 사랑이다’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장성하면 어린 아이의 일을 벌입니다. 여러분과 같이 성인이 다 된 사람이 예배 끝나고 집에 가서 “여보 나 맘마 줘” 라고 말할 사람 없을 것입니다. “여보 어디 가세요?”, “쉬 하러 가” 이런 남편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 어린 아이의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비되는 사람으로 장성한 자가 등장하는데 장성한 자라고 번역된 희랍어 단어는 ‘아네르’(ἀνήρ)라는 단어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어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어른은 어린 아이와 대비되는 것입니다. 세 살 먹은 아이라도 모를 것이 없을 아주 당연한 이야기를 사도는 풀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수사학적으로 매우 교묘한 코드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말하는 것과 깨닫는 것과 생각하는 것을 평범하게 나열한 것이 아니라 사랑과 대비하였던 그 세 가지 즉, 지식과 예언과 그리고 방언의 은사와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은 방언의 은사와 연결을 시키고, 깨닫는 것은 예언의 은사와 연결시킵니다. 왜냐하면 이 예언의 은사는 당시 예언이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그 예언이 모든 사람이 의심할 수 없는 그런 명백한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예언은 해석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사가 예언은 사사로 풀 것이 아니요, 예언을 잘못 풀 때에 예언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가르침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깨닫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에 이것은 명백하게 사도의 마음속에 있는 예언의 은사를 지칭하는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 이것은 지식의 은사입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지금 예언이냐, 방언이냐, 지식의 은사냐 이것을 자랑하고 있지만 이 모두 영원히 우리들이 도달하게 될 그 영화의 때에 비하면 이것은 모두 어린 아이 때의 일과 같이 하나님이 어린 아이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당신 자신에 관한 계시를 전달해 주시는 수단이다. 그러니까 그 한계를 알라고 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B. 비유의 의미
얼핏 생각하면 참 모순된 일을 사도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 때문에 온통 혼란을 겪었고 그래서 서로 각자가 자기가 받은 은사 때문에 교만해져서 교회의 질서를 심각하게 흩트려 놓았습니다. 우리 같았으면 그까짓 은사 없어도 충분히 교회 된다, 오늘부터 그거 다 집어 치워 버리고 이제 인정 안 해. 신앙생활이나 똑바로 하라고 이렇게 책망했을 거 같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지루할 정도로 인내심을 발휘하면서 모든 복음의 이치를 설명하면서 은사의 무질서의 문제를 정리한 후에 14장에서 불쑥 이렇게 말합니다. “방언을 멸시하지 말고 그리고 할 수 있으면 방언을 금하지 말고 할 수 있으면 예언을 하려고 힘쓰라.” 그러면서 다시 “그래도 너희들은 은사를 받아야 된다. 그리고 강격하게 그들에게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도가 이런 모순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사도가 보기에 영원히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달해 주실 그 놀라운 지식에 비하면 이렇게 간접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전달되어지는 은사를 통한 지식의 전달은 아주 유치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당시 교회에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구약은 있었지만 아직 신약 성경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새 언약의 새로운 경륜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새 경륜 속에서 새 언약 속에서 새로운 경륜으로 펼쳐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사도에게는 하나님의 계시가 절실하게 필요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워갈 요량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방언과 예언, 지식의 은사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파편적인 말씀들을 붙들고 그것을 성경 전체와 조화시키며 다른 사도들과의 가르침을 비교하면서 예언의 진실성 여부, 계시의 적시성 여부를 시험하고 판단한 후, 그것으로서 믿음의 기준을 삼고 행위의 표준을 삼았던 것입니다. 사도가 정말 마음으로 하고 싶었던 것은 이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은사 문제로 커다란 혼란을 가져왔지만 이것은 은사를 금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은사 때문에 생겨난 문제가 아니라 바로 그 모든 은사를 흘러가게 하여야 할 고린도 교회에 맨 처음에는 충만하게 있었던 까리따스의 사랑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방금 이런 비유가 생각났습니다. 개울을 건너게 되었는데 예전에는 개울에 물이 가득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배로 건넜었습니다. 그런데 오랜 가뭄이 계속 되면서 강바닥이 모두 드러나자 뜻밖에 그 강바닥 밑에는 집채만 한 바위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람들이 강을 건널 때 힘들게 바위를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하면서 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돌멩이가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물이 사라진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만약에 물이 가득 있다면 밑에 돌멩이가 있든지 뭐가 있든지 문제가 안 될 것입니다. 왜? 배를 타고 건널 것이니까요. 사도는 지금 이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공격대상은 은사가 아니라 사랑이 사라진 것이 그의 공격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III. 하나님 나라의 성장
이 손바닥만 한 고린도 전서 13장은 그렇게 간단한 성경이 아닙니다. 신약 성경 전체를 보게 만드는 위대한 하나님의 성품의 계시를 담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13장은 13장 자체를 가지고 해석할 성질의 것이 못됩니다. 이 13은 보다 더 큰 구도인 성경 전체를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사상 그 도식위에 놓고 해석을 하여야지만 올바른 좌표를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의 성장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성장에는 다양한 국면들이 있다고 신약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자, 한번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과 씨를 컵에다가 흙을 담아서 심었습니다. 그랬더니 시간이 지나자 이 씨가 터지고 파란 싹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틀림없는 사과나무입니다. 그러자 다시 그 나무가 한 3년 자랐더니 어린 아이 키 만해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4 ~ 5년 자랐더니 어른 키 만해졌습니다. 그 다음에는 더 시간이 지났더니 파란 잎이 나오고 탐스러운 사과가 주렁주렁 맺히는 나무가 되었습니다. 더 오래 두었더니 이제 고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살아있습니다. 자 이렇게 다섯 시기마다 저는 성장 과정에 있는 사과나무를 보여드렸습니다. 어느 나무도 불완전하거나 모자라는 나무가 아닙니다. 모두 사과나무라는 본질은 작은 싹이었을 때나 고목이었을 때나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장해 가고 있는 도상에 있는 나무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렇게 성장하고 있는 나라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A. 하나님 나라 성장의 국면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실제적으로 도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느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구약에도 이 하나님의 나라의 씨앗은 존재했고 결코 하나님의 나라가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 하나님의 나라가 현실적으로 도입되어서 그래서 생생하게 새 언약의 경륜 속에서 시작된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의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활짝 개화하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 강림을 통해서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인데 이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해서 성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 가루 서 말에 넣은 누룩에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누룩이 그 가루를 부풀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성장해 나아가는 것을 말씀하셨고 그리고 겨자씨와 같이 작은 씨앗이 큰 나무를 이루는 것도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이것도 하나님의 나라의 성장하는 성격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성경은 크게 여섯 가지로 하나님의 나라의 성장의 국면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각 사람들 마음속에 임하여 오는 나라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사람이 일정한 시간 안에서 공간 속에 살고 그 공간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에서 공간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역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역이 정신과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영역이라는 점에서는 총, 칼로 말뚝을 박고 영토를 그리는 이 세상 임금들의 땅 덩어리와는 같은 개념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영역의 국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통치의 국면입니다.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모두 그 사람들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같은 정도로 임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많이 이루어진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통치에 더 많이 복종합니다. 이 세상 임금은 황금과 칼을 양손에 들고 유혹하고, 협박하며 우리를 자기의 뜻에 복종하도록 가르쳐도 우리는 황금도 가지고 계시지 않고 그리고 칼도 가지고 계시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께 복종하기를 더 즐거워합니다.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모습입니다. 세 번째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성장의 또 다른 국면은 기쁨의 상승입니다. 그래서 자기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더 충만하게 순전하게 이루어지면 이루어질수록 그 분의 다스림 아래에 살아가는 교제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은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이 자신들 안에 있는 소망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해 갈수록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무릎을 꿇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효과적인 영광입니다. 이런 영광을 인정하는 것들이 계속 일어나게 될 때에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선교입니다. 이 영광이 인정되는 곳에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경배가 생겨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갈수록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면 이루어질수록 그는 사랑의 원리 아래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 속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사랑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 죄가 물러나고 성령의 통치가 충만하게 이루어지면 이루어질수록 성령의 법이 다스리게 되는데 이 성령의 법은 사랑의 법입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가 지식의 측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성장은 지식 곧 계시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식의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나라의 성장의 국면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달되는 방식의 발전 국면과 유사하다고 말씀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으로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그 지식과 사랑의 확장입니다.
B. 그 나라: 지식의 확장
우리는 종종 성경 신학을 공부하면서 이런 내용을 배웁니다. 구약은 모형이고 신약은 실체입니다. 구약은 그림자이고 신약은 실물입니다. 그리고 구약은 뿌리이고 실체로 신약은 그 뿌리에서 나온 진액으로 열매를 맺은 나무의 실과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어느 명제 중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없습니다. 분명히 구약은 그림자이고 신약은 실체 그리고 구약은 모형이고 신약은 실물입니다. 그리고 뿌리이고 열매예요. 그러나 우리가 이 이중의 도식에 갇혀 버리게 되면 그러면 마치 구약의 예표가 신약의 실체로 완성되었으니 이것으로 끝이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사도는 지금 바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영화의 때에 이루어질 완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구약이 모형이 신약에서 실체로 이루어지고 이 실체가 끝이 아니라 이 실체는 영화의 상태에서 우리가 만나게 될 또 다른 영광스러운 상태를 향한 한 도상에 있는 것입니다.
일평생 잊을 수 없는 아주 분명한 비유를 여러분에게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구약에 보면 성막이 나옵니다. 이 성막은 직사각형의 텐트였고, 그 소제는 물돼지 가죽이었습니다. 눈 오고 비바람을 맞으면서 틀림없이 많이 빛이 발하였을 것이고, 멀리서 사람들이 바라보기에는 군용 텐트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18평의 그 직사각형 방은 12평짜리 방과 6평짜리의 방으로 나뉘었고, 작은 방이 지성소였고, 큰 방이 성소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흠모할만한 아무런 아름다운 것이 없었지만 일단 제사장이 휘장을 열고 성소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거기에는 바깥에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청색, 홍색, 자색실로 공교히 짠 천들이 있었고 그리고 금으로 만든 기구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가지런히 놓여있고, 밝은 불빛이 이 모든 것을 찬란하게 빛나게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동식 성전이었고, 하나님이 이제 이것을 솔로몬 때에 완성된 건물로서의 성전을 짓게 허락을 하셨습니다. 지금 금값을 기준으로 솔로몬이 성전에 투입한 금만 120조원 어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마어마한 양의 금이 들어갔고, 은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무게의 은이 소용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인류 역사상 유래가 없는 화려한 성전이었습니다. 그 성전을 보면서 온전한 구약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 성전의 아름다움 자체에 도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에서 정말 지식이 있고 하나님의 성경을 아는 사람들은 그 화려한 성막의 내부, 그리고 휘황찬란하고 아름다운 성전의 그 내부를 보면서 그들은 틀림없이 이 성전이 바라보고 있는 예표로서의 이 성전이 전망하고 있는 어떤 실체를 희미하게나마 의식했을 것이고, 그것이 메시야와 연결되어 있고 또 하나님의 구속 사건과 연결되어 있으며 궁극적으로 이 성전은 천상에 계신 거룩한 하나님 아버지의 아름다운 성품을 유한한 인간의 공작물로 예표로 만든 것에 불과하다고 하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지식 안에서 그들은 구원을 받았을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자, 지금은 더 이상 그런 성막도 존재하지 않고 또 그런 성전은 우리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을 다시 만들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 유치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는 이미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 바로 그 성전의 아름다운 양식들을 통해서 그 화려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자 하시는 실체가 무엇인지를 그리스도와 복음 안에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시련 속에서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자비로운 성품,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나타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성품, 그리고 우리의 죄를 위해서라면 당신의 아들도 기꺼이 십자가에 못 박으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성품, 그리고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같이 홀로 두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간섭하시는 세밀하신 사랑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구약 시대의 성전에 그 아름다운 시간과 그 모습들이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어서 그와 함께 누리게 될 이 교제의 기쁨, 영적인 비밀, 은혜의 세계의 아름다운 신비들, 이것이 바로 구약의 성전의 아름다움을 통해 예표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우리에게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이 재미있느냐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껍질로 볼 때 주일날 교회에 나가는 우리의 재미없는 삶은 마치 거무칙칙한 물돼지 가죽으로 뒤집어 쓴 군용 텐트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교회에 와서 그 분과 나누는 기쁨, 그 분의 은혜의 세계에 참여하는 즐거움, 나 같은 인간을 통해 이 세상에서 자기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위대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 동참하는 기쁨 그래서 우리는 고백합니다.
(찬양) 우리 서로 받은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그러나 영화의 상태에서는 이렇게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영적인 은혜의 세계에서 기쁨을 누리고 하나님과의 교제의 신비를 느끼는 이 일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아름답고 그리고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신비스러운 일처럼 보이기 때문에 굳이 구약의 성막의 아름다운 광경을 다시 보고 싶거나 금으로 꾸며 만든 그 성전에 들어가 보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그 영광스러운 때에는 그때에 주님의 은혜의 세계, 신비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세계,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지식의 세계에서 비치는 그 빛이 너무 찬란하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렇게 주님을 알고 은혜를 받았던 것을 부러워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구약을 보는 것처럼 유치하게 느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의 성장의 국면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어떻게 전달되느냐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1. 계시방식의 변화
구약 시대에는 모형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전달되었기 때문에 그 나라는 그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의 씨앗에 불과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생생하게 당신 자신의 성육신 안에서 전달해 주셨기 때문에 이것이 신약의 도입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이 오셔서 아주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면서 그러면서 당신을 아는 지식과 은혜가 홍수처럼 퍼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점증하는 성장의 국면이고, 이 모든 성장이 이제 완성을 향하게 될 때에 그 영화의 상태에서는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달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지식의 은사나 방언이나 예언의 은사들이 모두 끝난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IV. 하나님 나라와 지식의 증대
하나님의 나라와 이 지식의 증대는 이처럼 밀접한 연관 관계에 있고 이 하나님의 나라와 지식의 증대라고 하는 신약적인 도식 위에서 고린도 전서 13장에 이 구절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의견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도입이 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 영화에 이르기까지 크게 세 가지 시기 동안에 각각 약간 차별적인 경륜을 가지고 이 지식이 증대됩니다.
A. 성육신~부활까지
우선 성육신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실 때까지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쉬지 않고 계속 하신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을 새롭게 해석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평범한 말을 하실 때에도 구약에서 인용하여 당신 자신의 말처럼 하셨고, 당신의 가르침을 선포하실 적마다 항상 구약을 인용하거나 해석함으로써 예수님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은 말씀 자체에 감동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받은바 감동을 가지고 구약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만약 어떤 사람이 구약 야훼의 신앙을 제대로 가지고 있었다면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느니라, 회개하라’라고 선포하셨을 때 그 메시지가 낯설지 않았을 것이고 예수가 오셨을 때 그 분이 메시야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당시의 많은 유대인들이 유대주의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유대주의는 구약 여호와의 신앙을 왜곡시켜서 만든 유대인의 기대를 담은 새로운 해석의 틀이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핍박을 받으신 것은 나쁜 일을 해서 핍박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왜곡된 틀로 구약을 해석했던 유대인의 기대에 어긋나는 일을 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미움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일평생 구약을 새롭게 해석하셔서 유대주의의 안경을 벗겨 버리시는 일에 헌신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런 유대교의 그릇된 가르침에 빠져서 구약 야훼의 신앙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시므온과 안나 같은 사람이 대표적입니다. 예수가 많은 일을 행하신 때가 아니라 아직 갓난아기 때였는데도 그들은 그가 바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심지어 그는 하나님께서 이제 이 메시야를 보게 해 주셨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고백을 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또 하나의 일은 바로 이 구약의 가르침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도식 속에서 가르쳐 주시기만 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그 하나님의 나라를 도입하심으로 영적인 세력들이 또 다른 영적인 세력인 사단의 왕국을 쳐부수고 들어오는 기이한 역사를 예수님이 친히 도입하셨던 것입니다. 병든 사람은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이 놀라운 일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도입된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를 보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B. 성령강림~영화까지
마태복음 10장은 예수님의 생애를 두 토막으로 가르는 매우 중요한 분기점입니다. 10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죠? 제자들을 불러서 사도로 삼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도로 삼으실 때에 말로만 삼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모든 병든 것과 약한 것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을 수 있는 큰 능력을 주셨습니다.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그들에게 주셨고, 그들은 어느 정도 예수님께로부터 흩어져 이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님처럼 선포하기 시작했고, 예수님이 하실 때에 보여주셨던 동일한 일들이 자신들을 통해 일어난 것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는 확신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강림하시고 그리고 성령의 큰 권능이 임하여 사도들이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내어 쫓는 역사를 행했습니다. 사람들은 사도들이 새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 그 일은 이미 예전에도 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도 한 그 일을 잠시 쉬었다가 성령이 강림하신 후 계속 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 강림하기 이전에 귀신을 내어 쫓고 병든 자를 고치던 그 능력은 성령 강림한 후에 일어나는 거보다 더 후지거나 열등한 것이었을까요? 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우리에게 어떤 암시도 주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어쩌면 외적으로는 동일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다? 성령의 큰 권능은 주어졌으나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실 뿐이고 이 모든 것들은 성령이 오셔서 생각나게 해 주시고 그리하여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실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이 친히 예고하신 바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살아나신 부활체를 직접 보고 마지막 승천하시는 중요한 시점인데 질문을 하는 겁니다. “예수님 그 나라를 이스라엘에게 회복하시는 때가 언제입니까?” 여기에서 “The Kingdom"은 유대인들에게는 모두 통하는 말이었습니다. 다윗 왕국이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 이제 주님 하늘로 올라가시는데 그러면 그 다윗 왕국은 언제 오나요? 이스라엘을 그 다윗 왕국으로 이렇게 회복시키시는 때가 언제입니까?” 그들 마음속에 분명하게 살아있는 것은 현실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다윗 왕국이었습니다. 그래서 희랍어에 보면 다윗 왕국이 오는 게 아니라 다윗 왕국은 거기 서 있고 이스라엘이 다윗왕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때가 언제입니까? 라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도 답답하셨을 것입니다. 왜?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하는 시점에 말도 되지 않는 질문으로 예수님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시는데 이스라엘이 로마를 때려눕히고 큰 왕국이 되어서 영영한 군주가 나와서 큰 땅 덩어리를 차지하고 떵떵거리는 때가 언제 옵니까? 물어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답답하시니까 “그거는 아버지의 기한에 있고 너희는 기도나 해라” 그리고 그냥 올라가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그들은 어쨌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로부터 귀신을 내어 쫓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권능을 받았을 때에 없었던 일이 이러난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지식과 사랑의 홍수가 난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지식과 사랑이 소낙비처럼 확 쏟아, 소낙비는 어울리지 않아요. 쓰나미처럼 확 밀려온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이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그렇게 탁월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던 사도들의 마음속에 성령이 오시자마자 사람들 마음속에 깨닫게 해 주신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신학적인 의미입니다. 그것을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나니까 지난 주 설교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매달려 죽으신 것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거지만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인류의 죄를 위해서 저주를 받으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인정하셔서 다시 살리셨다. 그래서 이 세계의 모든 창조의 경륜은 구속을 통하여 다시 회복이 되고 이 구속의 중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서 있다고 하는 사실을 어느 한 순간에 지성을 찢으면서 빛줄기가 감당할 수 없는 빛이 확 쏟아져 들어오고 이것이 지식과 사랑의 홍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가 설교하나 집사가 설교하나 내용이 다 비슷해요. 왜? 내용 자체가 비슷한 게 아니라 신학이 비슷한 것입니다. 평범한 신자에 불과했던 스데반에게 이 놀라운 일들이 임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놀라운 일들이 초대교회 집사였는데 이것들이 임하면서 그는 원고도 없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창세기부터 시작을 해서 막 달음질하면서 설교가 시작하는데 이것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중심으로 구약의 그리고 신약 성령 강림까지 찬란한 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역사적 사건들이 의미를 가지고 하나의 연결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막 한없이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나에게 스데반의 설교에 제목을 붙이라면 나는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붙이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가 설교 한 것은 설교를 다 못 마치고 죽잖아요. 그가 왜 순교했는지 아세요? 설교를 길게 해서 순교했대요. 설교를 길게 해서. 어느 목사님이 나보고 조심하라고 그러더라고요. 근데 그렇게 길게 했는데 절반밖에 안 왔습니다. 절반. 이제 막 본론이 시작되려던 참에 돌멩이가 날라 온 것입니다. 피투성이가 돼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모든 죽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십자가 빼놓고 제일 힘든 죽음이 맞아죽는 거래요. 뼈가 깨지고 장기가 터지면서 죽는 것입니다. 근데 누가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그는 공교롭게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하셨던 똑같은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저희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시옵소서.” 이것은 단순한 사실에 대한 지식만 들어온 것이 아니라 사랑이 막 홍수같이 쏟아져 막 들어온 것입니다. 쓰나미처럼 확 밀려온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일어난 것입니다.
성령 강림 사건은 한 마디로 그 정체를 이야기하자면 하나님의 사랑과 지식을 물 붓듯이 이 지상에 쏟아부어주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성령이 강림하시고 나서부터 그 다음에 우리의 구속이 모두 완성되는 영화에 이르는 그날까지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당신 자신에 관한 지식을 전달해 주시는데 이 방식은 구약 시대에 전달되는 방식과도 다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달해 주시던 방식을 능가하는 탁월하게 영적인 방식으로 이것들이 전달이 되는 것입니다. 근데 사실은 예수님이 다 깨닫게 하시지 못한 제자들을 성령이 오셔서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근데 이것이 사실은 예수님과 성령의 능력의 비교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을 성령이 오셔서 계승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들이 성령을 예수의 영이라고까지 부르는 것입니다. 이거는 처음부터 예수님에게 이미 예상되고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이 당신 자신에 관한 지식을 우리의 교회에 전달해 주시는 방식에 이제 두 가지의 경륜 속에서 이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뭐냐 하면 성경 계시가 완성될 때까지는 이런 방언과 예언과 그리고 지식의 은사 속에 계시의 성격이 묻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이 주어지면 그 예언 속에 아직까지 구약 성경을 통해서 주시지 않는 새로운 계시가 전달되는 것입니다. 혹은 방언을 통해서도 전달이 되고 지식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도 전달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있어야지만 신약시대 새 언약 하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하나님이 이제 통솔해 가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새 언약 하에서 살아야 할 신앙의 지침, 신앙생활의 지침 그리고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규칙들이 제시가 되고 이것들이 쌓이면서 신약 성경을 이루어 갔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가 은사 때문에 그렇게 많은 문제가 일어난 교회에 또 다시 은사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다 이 얘기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완성된 후에는 하나님께서 이제 새로운 경륜으로 우리를 인도하심으로 교회가 하나의 진리의 터전 위에 경영되도록 그렇게 섭리하십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주어진 성경, 완성된 계시 위에 또 다른 계시의 성격을 은사를 통해 도입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지고 완성된 그 계시를 조명을 통하여 더 잘 이해하게 하심으로써 그럼으로써 성도들을 한 성경 아래 공동체를 이루게 하시고, 그 가르침과 믿음의 규칙 위에서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세워 가시는 것이 하나님이 이 시기에 이루신 경륜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날에도 이런 은사는 존재합니다.
그러나 지식의 은사는 더 이상 성경과 상관이 없이 직접적인 신적 교통을 통하여 아직까지 주어지지 않는 새로운 지식을 보태는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의 은사는 지금도 있지만 그것은 이미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사람들에게 감화력 있고 영향력 있게 전달하는 은사이지 이제껏 완성된 성경에 주어지지 않았던 새로운 추가적인 계시가 예언의 은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새롭게 전달되는 것, 그래서 더 믿어야 할 것이 있고 그리고 더 살아야 할 또 다른 표준이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이런 방식으로 은사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러한 특성 때문에 방언도 역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신비한 언어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 언어가 가지고 있는 목적 자체가 새로운 계시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방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정도의 목표를 가진 그런 은사로서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런 은사에 이런 측면들을 생각하게 될 때에 궁극적으로 사도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자랑하고 서로 우열을 다투고 있는 이 방언과 지식과 예언의 은사도 결국은 한시적이다. 성경이 완성되면 그 계시적인 성격도 사라지고 은사는 남지만 그 은사는 동일한 성경으로서 집약되고 또 다른 의미를 가진 은사로 변모할 것인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는 날까지 계속될 가치가 있는 것이며,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 재림하시고 우리가 모두 부활하여 영화의 상태가 된 후에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될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달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너희들이 은사를 하나님의 은혜보다도 소중하게 여기고 우월하게 생각하는 이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영원한 것보다 한시적인 것을 더 높이는 것이고,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보다 일정한 시기 안에서만 가치가 있는 것을 너희들이 더 높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떨어지지 않는 사랑을 입증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C. 영화시대 이후
그러면서 사도는 이제 말합니다. “어린아이였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았다. 지금 우리는 방언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또 예언의 은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고 계시를 깨닫게 되고 또 지식의 은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생각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어린 아이의 일이다. 영화의 때에는 어른과 같이 될 터인데 그때는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알지 않을 것이다.” 사도가 그걸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천국에서는 언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언어는 우리에게 편리한 의사 전달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수많은 오해를 만들어 내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자, 오늘 아침 교회를 나오기 전 새벽에 샤워 실에 들어가서 수도가랑이에 물을 머리에 붓고 샴푸를 발랐습니다. 그리고 문질러 낸 다음에 물로 씻어냈습니다. 이것을 우리말로 머리를 뭐한다고 그러죠? 감는다. 북한 사람들은 머리를 감는다고 말하면 그것은 파마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우리처럼 머리를 감는다는 것은 뭐라고 말하죠? 머리를 빤다고 그래요. 우리보고 빤다고 그러면 갑자기 머리털이 걸레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거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는 인간은 원래 언어를 가지고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 근데 그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무한한 동정심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동정심이. 화자에 대한 동정심이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조금 현대 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20C에서 철학의 방향이 확 틀어진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프레게, 버트란트 러셀 이런 사람으로 이어져서 비트겐슈타인에 이어서 꽃이 피게 된 언어 철학, 분석 철학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게 왜 그렇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을까요? 비트겐슈타인은 책을 많이 쓰지도 않았습니다. 유명한 책은 두 권이입니다. 단 두 권. 하나는 그 후에 생각이 바뀌어서 자기가 수정한 것이고 한 권이 유명해요. 근데 그거를 전 세계를 흔들어 놨습니다. 그 이유가 뭐죠? 예전에는 사람들이 말로 이야기를 하면서 말은 생각을 안 하고 전달되는 생각을 가지고 서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언어 속에 담긴 것이 제대로 말과 그 사람 생각 사이의 연속성이 있느냐에 의심을 갖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이제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말하려고 했던 의도가 아니라 이 사람의 말이 객관적으로 뭘 의미하느냐가 이 사람이 뭘 말하고 싶어 했느냐 보다 더 중요해요. 왜? 이 사람이 말하고 싶었던 것을 다른 사람은 알 길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이 보기에 이제까지 있었던 모든, 그 사람은 플라톤도 읽지 않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안 읽었습니다. 그 사람은 보기에는 모두 뜬 구름 잡는 일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언어를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수학적으로. 그러면서 이것들이 과연 신뢰할 수 있을 만한 것인가, 생각과 언어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분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제 오늘 현대의 분석철학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건 뭘 보여 주냐 하면 우리에게 언어가 얼마나 유한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럽에서 영어권과 불어권이 교차하는 마을이 있었대요. 한 사람이 막 산을 산책하다가 맑은 옹달샘을 발견했습니다. 가서 목마른 김에 막 퍼먹었습니다. 그리고 바가지를 놓고 들어보니까 여기에다가 팻말이 탁 쓰여 있는데 ‘poison’ 그렇게 쓰여 있는 것입니다. 독! 갑자기 배가 아프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병원을 달려갔습니다. 그래 내가 독을 먹었다고 그러니까 눕혀 놓고 벌써 위부터 꺼내려고, 아무리 세척을 해도 아무것도 안 나와. 뭘 먹었냐? 독을 먹었다니까 그러니까 무슨 독을 먹었냐? 그러고 얘기를 했더니 아, ‘poison’ 똑같은 스펠이 불어로 샘물이입니다. 샘물. 이런 언어 사이의 불일치와 모순들이 천국에서도 계속 되어서 그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언어 소통, 우리와 우리 사이의 언어 소통에서 다시 언어 해석학으로 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면 거기가 어떻게 천국일 수 있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옛날에 신학자들은 ‘비지오’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vision’이입니다. 비전. 뭐라고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영혼이 영혼을 직접 바라보는 방식으로 의사가 전달되는 것입니다. 지상에서도 좀 통하지 않아요? 우리는 눈빛으로 통하는 사이야, 뭐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얼마나 통할지는 모르지만. 그런 것들이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영과 인간의 영혼과 인간의 영혼과 인간의 영혼 사이에 오가는 지식 전달이라고 볼 때에 이렇게 예언이나 지식, 방언 같은 것들은 아주 원시적인 수단이 될 것이고,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성경의 진리를 깨닫는 것은 그것에 비해서 훨씬 종합적이고 총체적이고 비교할 수 없이 영적인 방식으로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지만 그것도 visio를 통해서 알게 되는 그때의 그 앎의 방식에 비하면 아주 미개한 방식의 앎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장성한 자들은 지식을 갖게 될 것이고, 지성의 크기 이외에 어떠한 장애도 없이 이 지식은 확장될 것이며 여기서는 지식과 사랑이 분리되는 일이 있지만 거기서는 지식이 있는 곳에 사랑이 없고, 사랑은 있는데 지식이 사라진 맹목적인 파토스 같은 것들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광스러운 부활의 날에 영화의 때에 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온 세계가 우리의 의식 속에 아주 아름다운 그물들로 이루어져 씨줄과 날줄로 이루어진 그물들이 이 지상으로부터 저 천상까지 펼쳐지고, 자연 세계로부터 도덕 세계까지, 그리고 물체의 세계로부터 영적인 세계에까지 그물망처럼 쫙 펼쳐지고, 그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는 곳에 모든 사물들이 자리를 잡고 이 사물과 저 사물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내가 저 이웃과 타자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그리고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자연 세계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지금은 모두 끊어진 멜로디처럼 희미했지만 그때에는 모두 아름다운 그물망 속에서 모두 가장 아름다운 상태가 되고 선한 상태가 되고 그리고 그물망들 사이사이에 하나님의 영광의 찬란한 빛이 흘러넘칠 것이고, 이 그물망들이 출렁거리면서 우리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 깃든 아주 아름다운 영광을 직시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인지를 의심할 여지없이 목격하게 될 것인데 그때에 우리는 그 지상으로부터 천상에까지 펼쳐진 그 영원세계까지 펼쳐진 그 아름다운 지식의 그물, 존재의 그물망들을 보면서 그 찬란한 영광의 빛을 목격하면서 우리는 이제까지 이 사물과 세계에 대해서 알았던 지식, 특히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지식들이 사실은 거의 모르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찬란한 빛들을 보면서 우리는 이 모든 지식의 정점 위에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아름답고 찬란한 이 지식은 넘치는 사랑과 함께 우리에게 정동으로 다가올 것이며 그때에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선하고 아름다우며 사랑할만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일체의 죄악이 없을 것이니 거기에는 완전한 지식과 그리고 끊임없이 증진하는 사랑이 있을 것이고,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이 세계를 알고 사랑하는 것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서 지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자, 이 같은 가르침의 빛 아래에서 우리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이 사도의 요점으로 다시 한 번 돌아가 봅시다. 사도는 이렇게 제가 말씀드리는 것과 같은 찬란한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이 사랑을 설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이 없으면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는 사물, 그리고 우리와는 아무 연관이 없어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부은바 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우리에게 대해서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향하여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희생하여서라도 그들의 존재의 의미에 이바지하고 존재의 행복에 기여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바로 이렇게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분쟁의 원인이 되었던 많은 은사들이 사실은 그 사랑의 나라로 가는 사닥다리에 불과했는데 이 사닥다리는 밟고 밟히고 지나감으로써 마지막에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것인데 이 사람들은 오히려 본말을 전도하여 궁극적으로 목표가 될 것을 수단처럼 생각하고 수단이 되어야 하는 것을 목표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 속에 사라진 것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사랑을 배우는 것을 가지고는 고민하지 않고 오히려 그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한 지식 전달의 수단의 우월성을 가지고 서로 다투고 분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사도는 이 모든 것들이 요긴하고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영원한 사랑에 비하면 이것은 비교할 수 없이 사소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그러면서 이 모든 은사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도록 사랑하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타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V. 결론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많은 문제들이 우리의 삶을 괴롭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궁극적인 뿌리를 캐 들어가 보면 결국은 고통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올바로 알고 그 분의 충만한 은혜를 받는 것이야 말로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궁극적인 해결의 길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은혜를 통해서만 우리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종 하나님의 은혜는 쓰라림과 함께 다가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아를 죽이는 쓰라림과 함께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도는 어린아이였을 때에 말하는 것과 깨닫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였지만 이제는 그 일을 버린 것처럼 언젠가는 주님을 아는 이 미개한 방식을 버릴 날이 올 텐데 그때에는 이 은사는 떨어지고 폐한다. 그러나 그때에도 이 모든 은사를 사용한 마지막 결과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한 사랑은 영원히 계속 될 것이고, 그 나라에서 우리들이 경험하게 될 사랑이 분량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 사랑의 성질에 있어서는 동질의 것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하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도전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장 커다란 고민은 무엇입니까? 정말 그를 알고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까? 오히려 여러분이 직면하고 있는 인생의 많은 실제적인 문제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했던 바와 같이 바로 그렇게 진리의 생명의 원천이신 그리스도 사랑을 떠났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힘으로 여러분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했지만 그것은 터진 웅덩이요, 그리고 물을 가둘 수 없는 터진 웅덩이였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아는 일을 가지고 더 고민하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인생의 벼랑 끝에 섰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오게 된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에는 항상 예수님에 관해서 새롭게 알게 되는 지식의 증진이 있었고, 그 지식이 여러분의 영혼에 주어졌을 때 여러분의 마음 안에서는 그 지식이 사랑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환경이 바뀐 것이 없는데도 여러분은 그 지식과 사랑을 의지해서 고난도 이기고, 시련도 견디면서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승리하였습니다. 지난 길을 우리들을 하나님이 복음 안에서 그렇게 우리의 인생을 인도했다면 앞으로도 우리의 인생을 그렇게 인도하실 것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는 일에 여러분의 마음을 쏟으시기를 바랍니다.
26.어린 아이의 일을 버릴 때 2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지난 시간에 저는 이 고린도 전서 13장 11절을 강론하면서 어린 아이의 일을 우리들이 버리게 되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도는 어린아이와 성인의 비유를 도입하면서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자랑하고 서로 다투고 있는 이 은사의 문제를 이 비유 속에서 설명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 깨닫는 것,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어른이 된 뒤에는 어린 아이와 같은 방식으로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완성의,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영화의 날에는 은사를 통해서 지식을 획득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는 이제 구약 시대와 신약시대, 성육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셔서 이 땅에 계실 때까지, 그 다음에 계신 다음, 구원의 완성 전까지, 구원이 완성된 영화의 때까지 세 시기로 나누어서 어떻게 하나님이 당신을 아는 지식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는지에 대해서 상세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물론 모두 잊어 버리셨겠지만.
II. 구원의 도상에 있는 성도
그러면서 오늘 사도는 이러한 지식의 성장이 바로 사람의 성장이듯이 마지막에 하나님이 이런 은사를 종식시키고 당신 자신에 대해 직접적인 지식으로 우리에게 전달해 주실 때에 그때에는 이 모든 은사들이 종결될 것이라는 사실을 사도가 말하면서 종결되는 은사와 이후에도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을 대조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의 도상에 있는 성도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A. 순례자의 신학
다시 말하면 아무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고.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성령이 우리를 조명하시고 목회 사역을 통해 진리의 말씀을 드러낸다고 할지라도 역시 우리는 구원의 도상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있는 중인데 이것을 학자들이 순례자의 신학이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이 순례자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지복자의 신학과 대조가 되는 말입니다. 순례자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땅에 나그네와 같이 아직 죄와 더불어 싸우며 살아가고 있는 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못한 성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갖는 지식입니다. 이에 비해서 지복자의 지식은 이제 모든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고, 마지막 부활의 영광과 함께 천국에 이르게 되었을 때에 그때에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을 지복자의 신학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지식의 크기와 방식에 있어서 현저히 다른 것입니다.
지금은 지식의 크기가 그 하늘나라에서 우리들이 얻게 될 지식에 비해서 아주 일부분일 뿐입니다. 또 지식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방식도 훨씬 더 간접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우리들이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지만 하나님의 뜻을, 말씀의 뜻을 깨달을 수 있고, 열심히 공부를 해야지만 이 말씀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 갑니다. 이렇게 잘 믿고, 성령의 조명을 받고 열심히 공부를 하고 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가는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과의 차이는 거의 짐승과 인간의 차이에 이를 정도로 현저한 지식의 차이가 있고, 이것에 의해서 삶의 질도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에 대해서 공부하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이것은 여러분의 자유로운 선택사항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난 인간에 대한 의무입니다. 그리고 이 의무는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의무에 충실한 사람들만이 참으로 하나님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을 생각해 보십시오. 훨씬 더 복잡하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왜요? 아직 성경 계시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은사라는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 하나님의 행하고자 하는 뜻, 이미 주어진 계시에 대한 해석들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지식과 방언과 예언의 은사입니다. 그런데 이 예언과 지식과 방언의 은사는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언제나 인간의 과오가 섞일 수 있었고, 또 그것을 해석할 때에 인간의 해석이 오류에 빠질 위험이 항상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만약에 성경의 계시를 완성시키시고, 성령으로 조명해 주는 것이 전깃불 아래에서 하는 것이라면 이 은사를 통해서 교회가 인도를 받으며 사는 것은 호롱불로 산 것이었죠. 구약으로 넘어가면 이제 그것은 훨씬 더 빛이 희미해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 우리들이 모두 복 받은 완전한 성도의 상태에 이르게 될 때에, 다다르게 될 때에 얻는 지식은 햇빛과 같은 것입니다. 호롱불, 전깃불, 밝은 햇빛으로 대비될 수 있는 이런 지식의 크기가 이 순례자의 신학과 지복자의 신학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B. ‘어린아이의 일’
사도 바울은 이미 이렇게 성경 계시가 종결될 때에 그 풍부한 하나님의 계시, 그리고 그것에 접근하는 성도의 축복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지금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은사로 말미암는 다툼을 어린 아이의 일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단수로 되어 있는데 희랍어 성경에는 ‘타 투 네피우’(τὰ τοῦ νηπίου)라고 되어 있어서 “어린 아이에게 속한 일들”이라고 복수로 나옵니다. 이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말하는 것, 깨닫는 것, 생각하는 것, 이 세 가지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어른스럽다고 하는 것은 단지 키가 크고, 몸무게가 나가고, 주머니에 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른인 것만은 아닙니다. 말하는 것, 깨닫는 것,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구별된 사람이기 때문에 어른이라고 우리들이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작년에 세계에서 제일 다리가 긴 여자를 뽑았고, 제일 조그만 남자를 뽑았습니다. 그랬더니 다리가 제일 긴 여자가 뽑혔는데 하여튼 무지하게 깁니다. 다리가. 그런데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남자가 뽑혔는데 이 사람은 40대 정도 된 사람이었는데 중국 사람인데 72cm입니다.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는데 그 사람과 그 여자가 키를 대고 섰습니다. 그랬는데 이렇게 다리를 벌리고 다리 사이에다가 남자를 세웠는데 무릎 약간 위로 올라왔습니다. 남자의 키 크기가. 지금 치수가 정확히 생각 안 나는데 여자는 하체의 길이가 1m 몇 십 cm 될 정도로 키는 1m 8~90cm 정도 되겠죠. 비교도 되지 않아요. 그래도 그 사람은 어른입니다. 왜? 몸집으로는 대 여섯 살밖에 안된 아이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생각하고 말하고, 그리고 깨닫는 것이 어른이기 때문에 음식점도 경영하고 돈도 벌고 어른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어른이다, 어른이 된 의미입니다.
III. 어린아이의 일을 버릴 때
A. 지식 획득의 방식의 한계를 앎
지금 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큰 착각에 빠져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이렇게 많은 은사들을 한 성령이 교회를 섬기도록 주셨는데 이 은사를 가지고 서로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는 지식의 은사를 가지고 사람들이 우열을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렇게 지식을 획득하는 수단으로서의 은사는 너희들이 그렇게 크고 아주 높아 보이고 위대해 보이지만 이거는 잠시 하나님이 쓰시는 유치한 수단일 뿐이고, 완성의 빛에서 보면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획득하는 것은 아주 유치한 것이고, 아주 낮은 단계일 뿐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이런 유치한 단계의 지식획득 수단으로써의 은사와는 대조가 되는 영원히 계속될 무한한 가치가 있는 그 어느 한 하나님의 선물을 제시하는데 이게 바로 은혜고, 이 은혜의 열매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신령함의 최고의 표지는 은사가 아니라 사랑이다.” 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곧 하나님께로부터 충만한 은혜를 받은 증거이고, 그 은혜는 은사와 비교될 수 없는 사랑의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시간에 이 은사와 사랑이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에 대해서 아주 그림 같은 비유를 여러분에게 하나 들어 드렸습니다. 물론 잊어버리셨겠지만. 저는 이 비유를 생각해 내면서 무릎을 쳤습니다. ‘야, 이거 기가 막힌 비유다’라고 말입니다. 자, 어느 마을이 있습니다. 반복하겠습니다. 잊어버린 분들을 위해서. 어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꽤 큰 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강은 그렇게 넓지는 않는데 아주 깊은 강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배를 타고 건넜습니다. 그런데 여러 달 가뭄이 들었고, 그리고 물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강바닥이 모두 드러나게 되었고, 오랜 세월동안 사용하던 배는 이제 쓸모없게 되었습니다. 물이 모두 사라져 버린 강바닥을 보고 이 동네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까지 너무 물이 깊어서 강바닥 속까지 가본 적은 없는데 알고 보니 강바닥이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집채만 한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물이 사라지고 나니까 이제 그들은 걸어서 강을 건너야 했는데 이거는 매달려서 바위 위를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가는 또 다시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는 하면서 강을 건너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투덜대기 시작했습니다. “아유, 제길 강바닥이 평평한 모래와 같았더라면 우리가 건너기 얼마나 좋았을 텐데. 웬 놈의 바위가 이렇게 많아서 귀찮게구나.” 사실 문제는 거기에 바위가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뭐가 사라진 것이 문제죠? 물이 사라진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 바위는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아주 오래전에도 언제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물이 가득 차 있는 동안에는 바위가 물 아래에 있는 것이 아무 문제가 안됐습니다. 왜? 배를 타고 그 강을 건너다녔기 때문입니다.
방언의 은사, 지식의 은사, 그리고 예언의 은사가 어느 날 갑자기 사도 바울이 편지쓰기 직전에 생겨난 겁니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이곳에 와서 복음을 전한 이후에 언제나 있었던 은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은사가 큰 문제를 일으켜서 교회를 온통 찢어놓고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 은사가 도대체 무엇이냐고, 그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오늘날처럼 이런 은사 때문에 교회가 어려움을 당해본 사람들은 이런 은사를 멸시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방언을 금하지 말고, 그리고 예언을 하기를 힘쓰라, 그러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증거가 아닙니까? 그러나 이들은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는 지금 이 은사의 문제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고린도 전서 13장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은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가? 모든 은사들은 그냥 있었고, 사랑 하나가 사라졌을 뿐인데 이렇게 커다란 문제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모든 은사 다 있는데 사랑 하나가 더 있고 나니까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사도는 대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B. 어린아이의 일을 버릴 때
그러면서 사도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릴 때가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도 바울과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이 은사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교회에 전달해 주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지만 그러나 이 지식이 획득되는 방식과 그 지식의 크기에 대한 한계를 이해하여야 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빠졌던 오류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이런 식으로 은사를 통해서 지식이 획득되는 이것이 탁월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앞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에 대해서 가르쳐 주실 방법, 첫째는 성경을 완성하심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쳐 주실 미래의 방법, 두 번째는 구원의 완성 이후에 우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이 성경의 도움 없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영과 교통하며 알게 될 이 지식, 이 지식의 방식에 비하면 이것은 매우 유치하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고린도 교회의 오류를 되풀이하며 이러한 영적인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성경을 겸손하게 가까이 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그 말씀을 깨닫고 또 이전에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신 사람들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과 결과들을 탐구하여 자기 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을 쌓아가는 이 일들은 도외시하고, 아직도 이러한 은사 안에 계시적인 성격과 예언적인 성격이 있다고 믿고 그런 방식으로 주어지는 지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중요한 것은 지성이 아니라 어떤 신비한 체험과 느낌으로써 성경을 제쳐놓습니다. 이것은 바로 이렇게 성경을 완성하여 우리에게 주시고 성령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는 것이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알게 하는 방법보다 훨씬 완성도가 높은 방법이고, 성령이 우리를 지도하시는 탁월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의 시간표를 거꾸로 돌리는 것입니다.
지금도 여러분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말도 되지 않는 신비적인 사상들을 전파하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하나님의, 우리의 영혼을 움직이는 모든 하나님의 은혜를 신비주의라고 생각하면서 거절하는 극단적인 이성주의자들과, 또 한편에서는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서는 어떠한 이성도 필요 없는 것처럼 주장하는 극단적인 신비주의자들이, 직관주의자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최근에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까 지옥에서 울부짖는 칼빈의 기도라는 게 나와요. 칼빈만 있는 게 아니라 유명한 사람은 지옥에 다 있습니다. 루터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교인이 자기가 칼빈이 되어서 거기에서 울부짖으면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속았다, 그리고 나는 많은 사람을 속였다. 그러니까 내가 가르쳐 준거 믿지 말고 내가 가르쳐 준 대로 믿으면 반드시 지옥에 온다.” 이렇게 마르틴 루터와 칼빈이 일생에 자기가 가르친 것을 번복하는 기도를 지옥에서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거를 동영상으로 만들어가지고 소리만 들리게 해 놓은 것입니다. 그거를 또 따르는 많은 교인들이 있고 그러한 교리를 따라가면서 모이는 이단적인 교회를 구성하는 상당수의 신자들이 기존의 교회에서 나간 사람들이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신자가 교회에서 올바른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깨달으면서 그 분을 아는 것과 함께 사랑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이런 오류에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종종 이단들을 사용하셔서 교회를 세탁하십니다. 예수님 말씀하셨죠.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아나니” 그런 이단적인 가르침들이 교회를 휙 휩쓸고 지나가면서 하나님께서는 누가 정말 그리스도께 속한 양인지 아닌지를 가려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험에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리고 은혜의 신비를 체험하면서 하나님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질문 하나 할게요. 우리 교회를 너무 염두에 두지 말고 일반적으로 생각을 하고 이야기 해봐요. 세례 받을 때에 교리공부를 열심히 합니까? 2종 보통 운전면허 시험 볼 때 그거 공부를 더 열심히 합니까? 전자예요? 후자예요? 뭐가 잘못됐잖아요. 그죠? 그건 아닙니다. 그렇죠? 그건 아닙니다. 결국 이 고린도 교회가 저지른 또 하나의 오류는 그러한 무지 때문에 정말 영원히 가치 있는 것들을 멸시한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랑이입니다. 사랑. 하나님이 은혜가 우리를 사랑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을 무시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은혜는 기본일 뿐이라고 생각하죠. 그거는 누구나 다 받는 것이고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죠. 모두 그렇게 은혜를 받으면 나날이 사랑의 사람이 되고 거룩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어 갈 건데 그렇지 않죠. 그런 사랑을 기본이라고 생각하고 그 위에 이제 은사를 가지고 서로 대조하면서 교만해지기도 하고, 혹은 자기가 그들만 못한 사람이라는 영적인 열등감을 갖기도 하고 하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죠.
글쎄,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가정의 시리즈가 다 끝나지만 아내들이 남편으로부터 충분히 사랑을 받으면, 그리고 아이들로부터 충분히 사랑을 받으면 자기네 아파트가 크기가 좀 작다는 것 때문에 더 큰 아파트 사는 여자들을 만났을 때에 심정적으로 그렇게 많이 쭈그러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뭐 근데 여자들이 아니다, 그래도 찌그러진다 그러고 큰 소리 치면 저는 할 말 없습니다. 저는 남자니까 할 말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을 거다 생각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근데 목회자들도 비슷해요. 목회자들이 교인들에게 누가 잘했든지, 잘못 했는지 그런 거 따지지 말고 어쨌든지 간에 교회에 충분히 인정을 받고 성도들의 사랑을 받는 목회자들에게는 형언할 수 없는 자신감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자기네 교회가 조그매서 큰 교회 목회자를 만났을 때에 이렇게 찌그러지는 느낌을 받는다든지, 기를 못 편다든지 나는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 교만해질지 모르지만 나는 한 번도 그런 걸 느낀 적이 없습니다. 뭐 그런 걸 왜 느끼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그렇지 못할 때에는 목회자들이 그런 거를 많이 느끼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 은혜를 많이 받고 충분한 사랑을 받습니다.
(찬양)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더욱 섬길수록 더 귀한 주님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1. 찬란한 영화의 빛 앞에서 생각함
그렇게 주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쁨, 이런 것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막 한없이 솟아날 때 무슨 신비를 체험하고 싶은 그런 게 있을까요? 그 자체가 정말 형언할 수 없는 신비인데 그래서 참된 경건이 사라진 그 모든 자리에 성경에 대한 의심과 신비에 대한 그릇된 관심이 폭증하게 되요. 고린도 교회는 그런 점에서 영원히 가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였습니다. 결국 고린도 교회의 유치함은 지식과 사랑의 결핍 이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릴 때에 대해서 말합니다. 장성한 사람이 어른이 된 후에는 생각하고, 말하고, 깨닫는 것들을 어린 아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던 것을 버리게 된 것처럼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는 때가 있다, 그때가 바로 찬란한 영화의 빛 앞에서 주님을 배울 때, 그때 우리는 이것을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식의 은사, 예언의 은사, 방언의 은사는 제일 먼저 성경의 계시가 완성되면서 계시와 그리고 비밀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예언의 성격을 완전히 상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더 잘 깨닫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탁월한 은혜를 우리는 갈망하면서 성경을 읽고, 성령의 도움을 받으며 충분히 믿음 생활을 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이런 식의 어린 아이의 일은 이미 성경이 완성되면서 버리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영화의 때에 우리들이 우리의 영혼으로 주님을 직접 알고 주님과 교통하게 되고 지식을 전달받는 그때에는 우리들이 완전히 이런 은사의 형식조차도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2. 두 가지를 대조함
그러면서 사도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대조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광의 날에 우리들이 획득하게 되는 이 지식의 방식과 지금 유치하게 습득하고 있는 이 지식의 방식이 어떻게 영광에 있어서 다른지를 대조함으로써 오히려 우리들이 이렇게 은사를 통해서 지식을 얻고,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게 되는 이것들은 그들을 교만하게 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겸손하게 하여야 할 성질의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완성된 성경이 주어졌는데도 하나님의 뜻을 잘 몰라요. 그래서 명백한 하나님의 뜻은 성경을 통해 깨닫지만 깨닫지 못할 때에는 깨닫지 못한 만큼 교회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게 되죠. 우리들이 부지런히 교리와 성경을 익히고 배우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고,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줄 가장 확실한 자산이 지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우리의 자녀들의 교육에 힘쓰는 이유도, 그리고 우리가 신학자들을 돕고 미래의 목회자들을 양성하는 일에 마음을 쓰는 이유도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가 사람들을 통하여 이 진리의 빛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화의 날에는 이런 신학자들과 그리고 이런 성경, 그리고 이런 식으로 교리를 공부하며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방식이 아닌 직접적인 방식으로 이 계시들을 이해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교통하며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에 비해서 오늘 이렇게 성경이 주어진 속에서도 주님을 알아가는 것이 유치하고 원시적인 것처럼 보인다면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은사들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파편적으로 주님에 대해서 전달해 주는 이 지식 전달의 방식은 얼마나 유치한가 하는 것을 대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은사들을 주셨을 때에도 이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고 겸손해져야 했고, 성경이 완성된 계시를 우리에게 주셔서 이제는 틀림없는 우리의 신앙과 삶의 규칙들을 소유하게 되었고, 성령이 우리에게 그 빛을 비춰주신다는 약속도 가지고 있게 되었고,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책들과 신학의 결과물들을 우리에게 주셨지만 이것 때문에 하나님을 덜 의지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아주 희미한 불빛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걸어가는 신앙생활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책이 많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덜 의지하거나, 탁월한 설교자가 있기 때문에 주님께 덜 기도하거나, 성경을 해설한 책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마음 놓고 이제는 주님을 덜 의지하면서 이렇게 사람들이 가르쳐 준 지식을 가지고 믿음 생활 할 것이라고 그렇게 믿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수십만 권의 책이 있는 도서관에 들어섰다고 칩시다. 수십만 권 아니 수백만 권, 아니 1억 권의 책이 있는 하버드 대학 도서관에 들어섰다고 쳐봅시다. 그러나 여러분 그 지식이 정말 다 참된 지식일까요? 오류가 얼마나 많을까요? 또 참된 것을 가르쳐 준다고 할지라도 수준 높지 못한 평범한 지식들을 알려주는 책들은 얼마나 많고, 올바른 지식이기는 몰라도 되는 것들은 얼마나 많이 책이 쓰여졌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알고, 성경의 진리를 깨달은 후에도 인간의 지식들에 대해서 이런 한계를 느끼게 된다면 그날에 갖게 될 직접적이고 영광스러운 방식의 앎과 오늘날 이 한계가 있는 앎 사이에는 얼마나 무한한 격차가 존재하는 것일까요?
사도는 또 한 가지를 대조하죠. 오늘날 우리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이 사랑은 참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이기는 하지만 끊임없이 방해를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은 마치 끊어진 노래와 같고, 이어지지 못하는 노래의 가닥과 같아요. 그러나 마지막 날에는 무엇도 방해를 받지 않고, 찬란한 지식과 함께 아침마다 새롭고 뜨거운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용솟음치게 될 것입니다. 지식이 전달되는 방식은 이제 완전히 달라졌고, 옛날에 이 은사를 통해 주는 지식의 빛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가 되었지만 사랑은 지금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는 이 은혜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꼭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아는 것은 새로운 방식으로 주어져도 사랑의 본질과 그 방식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마음이 녹으며 주님의 은혜에 잠겨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 영화의 날 이후에도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비춰오는 지식의 빛을 받으며 이 땅에서 그렇게 감격하던 방식과 꼭 같은 방식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그리고 주님을 믿게 되는 이런 은혜의 정동들이 무한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3. 사랑은 변함없이 지속됨
그러면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보다는 영원히 지속된 영속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 더 존귀하게 여김을 받아야 된다는 사실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변함없이 지속되는 사랑의 영속성입니다. 여기서 주님을 알기에 낯설었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서도 주님 아는 것이 낯설겠죠. 그러나 이 땅에서 주님을 사랑했던 사람들, 그 사랑의 기쁨과 행복이 무엇인지 알았던 사람들은 그 나라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은혜를 받으며 주님을 섬기게 된다는 사실에 감격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신자의 영적인 아름다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의 아름다움이고,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그 사랑 안에서 신자는 자기를 온전히 버리고 이타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그 사랑을 자기 안에서 소비시키는 사람들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이 흘러가고자 하는 또 다른 목적지인 사랑하는 성도들, 이 땅에 있는 인류와 그리고 이 땅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도록 이바지하기 위해서 자기를 소비하게끔 받은바 사랑을 흘려보내는 사람들은 자신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나 하나님 사랑 안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사랑이 지식과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고, 우리에게 들어온 이 사랑은 또한 지식과 사랑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가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의 마음에도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또한 누구도 이 사랑에서 소외되지 않고 그 사랑 안에 있게 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인간과 우주를 휘돌고 하나님 자신으로 돌아가고, 돌아간 그 사랑은 다시 인간들에게 전달되는 자기 회기적인 사랑 안에서 인간들은 가장 커다란 지복을 느끼며 그 안에서 인간의 참된 인간다움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천사의 말을 하고 삼층 천의 비밀을 목격했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모든 사람을 능가하는 지식을 소유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가 사랑이 아니면 그는 중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혜는 언제나 우리에게 사랑을 남겨놓습니다. 신령한 지식은 우리에게 은혜로운 정서를 가져다주고 이 은혜의 정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의 사람으로 만들어 갑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우리를 통해서 당신 자신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탁월한 은사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 사랑이 사라지자 고린도 교회는 예전의 유치함으로 돌아가 버렸고, 교회는 오히려 교회를 교회되게 주신 은사 때문에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IV. 결론
그러므로 우리는 성숙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실 은혜를 간절히 사모함으로써 우리에게 이미 주신 많은 은사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유익하게 봉사하도록, 이 사랑을 구하며 이 사랑 안에서 성숙한 사람이 되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27.지금은 희미하게 알지만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사도는 11절에서 어린아이와 어른의 비유를 사용하였습니다.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일 적에는 어린아이와 같지만 장성한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일 적의 그 방식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II. 지금 보는 것
이와 같은 사실을 12절에서 다시 한 번 쐐기를 박듯이 거울의 비유를 사용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라고 말입니다. 지금 보는 것과 그때에 보는 것을 다시 한 번 대조함으로써 이 지식의 문제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다고 되어 있는 이 구절이 희랍어 성경에는 “불분명함 안에서 거울을 통해 보지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불분명함 안에서 거울을 통해서 보지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A. 당시 거울: 석경, 동경
당시의 거울은 석경 아니면 동경이었습니다. 즉, 돌멩이를 반질반질하게 갈아서 거기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보아 거울로 사용했고, 혹은 구리판을 아주 깨끗하게 닦아서 거기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던 것입니다. 비록 구리로 만든 거울이라고 할지라도 사람의 모습은 비췄겠지요. 그렇지만 윤곽만 드러났을 뿐 이렇게 선이나 이런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나오지 않았죠. 그렇기 때문에 희미하게 보이는 그 거울을 보면서 어렴풋이 자신의 옷매무새나 혹은 색체 같은 것들을, 옷차림새 같은 것들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그 희미한 윤곽을 해석해서 선명하게 그리며 자기의 원래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그 거울을 통해 유추하였던 것입니다. 이 비유를 사도가 드는 이유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자랑하고 있는 이 은사의 한계를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B. 은사의 한계
12장에서 은사를 광범위하게 다루었지만 13장에서는 사랑을 다루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 유명한 사랑 장을 쓰면서 12장에서 언급되었던 은사 중 특정한 일부의 은사와 이 사랑을 대조시키는 작업을 합니다. 이것은 바로 이 사랑의 은혜와 사랑을 가져다주는 은혜와 은사로서의 이 지식을 대비시키는 것과 함께 참된 지식과 사랑이 서로 나누어질 수 없는 것임을 입증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 유명한 사랑 장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라고 말합니다. 즉, 사랑을 말하기에 앞서 지식의 은사에 집중합니다. 방언, 예언, 지식, 믿음 이런 종류의 은사에 집중하면서 이 은사들과 대조를 이루는 사랑의 은혜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는 이런 말도 합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구제도 나오고 자기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이것은 은사가 아니라 헌신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랑과 함께 대조하고 싶었던 은사는 방언, 예언, 지식, 믿음 이런 종류의 은사였던 것입니다. 이 은사들은 모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데 있어서 당시에 없어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한 은사였으나 그러나 이것은 모두 불분명함 안에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생각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방언, 통역, 예언에 대해서 사도가 자세히 다루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였습니다. 방언은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내포하고 있으나 통역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통역 없이는 그것은 교회에 활용될 수 없는 것이었고, 예언하는 영은 그 하나만으로 충분히 예언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영이 제제를 받으며 둘 사이에 모순이 있을 때에는 이것을 해석하여 어느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판단하는 복잡한 절차를 밟아야만 했습니다. 무엇을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래서 사도는 이러한 방언이나 통역, 예언의 은사를 멸시했나요?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그래서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에게 덕을 세우고, 예언을 하는 자는 교회에 덕을 세운다 라고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이러한 방언, 예언, 지식 은사는 그 당시에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 없이는 당시 교회가 교회답게 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희미하게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조심스럽게 해석 되어야 했고, 과연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예언인지, 인간이 짐짓 지어낸 예언인지를 점검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과연 올바르게 점검되고 확인 될 수 있었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아주 이 은사 사용에 있어서 조심스러움과 그리고 엄격성을 가지고 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이러는 가운데 교회는 이런 풍부한 은사가 주어져도 오히려 이 은사 때문에 하나님을 덜 의지하기는커녕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분별하기 위해서는 더 많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더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사를 주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배치하는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사가 충만했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더 부흥을 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사람 가운데 하나 되고 하나님을 더 의지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도움을 받으며 그 은사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계획과 뜻들을 교회에 올바르게 전달하여 교회를 세우는데 유익을 끼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마음속에서 사라지자 이 은사를 인하여 서로 다투게 되었고, 오히려 이 은사를 받은 사람이 저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무시하고, 또 이 은사를 받은 사람이 받지 못한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는 이러한 육적인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사도는 이렇게 너희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주님이 주신 이 놀라운 지식의 은사들이 사실은 한계를 가진 것이고, 그것은 매우 불분명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이 사람들에게 일깨워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떻습니까? 물론 지금은 당시 이런 방언이나 예언, 지식의 은사에 의존하여 하나님에 관해서 겨우겨우 알아가던 때와는 비교될 수 없는 커다란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고린도 교회를 보면서 이들은 이렇게 직통 적으로 하나님과 통하는 은사들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진리의 빛을 누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완성시키셨습니다. 신약 성경까지 모두 완성된 계시로서 우리에게 주셨을 때 우리에게는 당시와 비교할 수 없는 아주 확실한 분명한 지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초대 교회 때 하나님이 큰 은사를 주시고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사도들로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했고, 계시를 받게 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신적인 은사들을 통해 그 계시들을 계속해서 받고, 또 계시들을 교회에 전달하고 신앙의 체계 안에서 보존하게 하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에 비해서 놀라운 권위를 가지고 있는 계시였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계시는 부분적이었고, 그리고 한정적인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성경과 관련된 교리 중 명료성의 교리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라도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과 믿음으로 성경을 대한다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인가에 대한 명료한 최소한의 지식을 갖게 된다고 하는 교리입니다. 그런가 하면 성경의 충분성의 교리가 있습니다. 이 성경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충분한 교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이 충분히 해석되고 그 의미가 올바르게 우리에게 전달되고 우리가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여 순종할 때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은 한권인데 성경을 해설한 책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인류 역사상 아마 수천만권도 넘는 어마어마한 책들이 성경을 둘러싸고 발간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끊임없이 그 책들이 나오고 있고,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어떤 구절은 매우 분명하여 시대가 많이 흘러가도 대부분의 해석가들이 일치된 해석을 내놓지만, 또 어떤 구절은 몇 천 년 동안도 해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또 다른 의견이 나오는 어려운 구절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쉬운 구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발견했고, 어려운 구절 속에는 겸손을 배우면서 부지런히 탐구해 감으로써 더 많은 진리의 빛, 지식의 빛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 시대의 교회가 이렇게 신학 연구를 위해 헌신하고 성도들이 그 결과들을 잘 이해함으로 성경을 더 잘 깨닫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는 이 당위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충만한 지식의 빛을 누린다고 할지라도 특별히 노력을 하고 특별히 우리가 헌신하지 않으면 우리의 자손들은 어둠속에서 지낼 수도 있습니다. 또 우리의 조상들은 어둠속에서 지냈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신학을 탐구하고, 교리들을 배우고, 그 진리의 내용들을 성령의 은혜 안에서 체험할 때 우리는 우리의 조상을 능가하는 찬란한 지식의 빛 속에서 생활할 수 있습니다. 같은 시대에 있으면서도 이 진리의 등불을 밝히는 교회에서는 많은 성도들이 진리가운데서 믿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지만 그렇지 못한 교회에서는 많은 성도들이 성도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무지한 삶 속에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살아갑니다. 이 진리의 빛은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그러한 기계적인 빛이 아니기 때문에 진리의 찬란한 빛이 있는 교회에서도 이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 진리 때문에 하나님을 오히려 미워하게 되고 그 진리 앞에 드러나게 되는 자신의 부끄러움 때문에 오히려 그 진리의 빛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희미한 진리의 빛 밖에 없는 교회에서도 진리를 워낙 사모하는 사람들은 작은 빛이라도 붙들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더 많은 진리의 빛이 있으면서도 그 진리의 빛을 외면하고 사는 사람들보다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든지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성경이 더 이상 해석될 수 없을 정도로 그 모든 뜻을 완벽하게 분명히 드러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린도 교회와는 비교될 수 없는 명료하고 충분한 계시를 성령 안에서 성경을 통해 갖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덜 의지하거나 주님을 덜 사랑할 수는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이해하고, 신학을 공부하여 지식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우리가 더욱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진리를 아는 우리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진리 되신 주님이 위대한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자기를 의존하는 마음을 버리고 주님께 더욱더 의존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의존하는 마음은 곧 사랑의 마음이고, 사랑의 마음은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무지한지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고 주님의 은혜를 열렬하게 간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을 더욱더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라고 하나님께서 은사에서도, 성경에서도 이런 은사를 통해서도, 성경의 해석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이런 한계를 우리에게 지워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이 고린도 교회의 교만함을 꾸짖고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속에서 인간의 모든 죄의 뿌리는 자기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기 사랑이 자기의 실제적인 삶 속에서 거리낌 없이 발휘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행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 사랑이 그렇게 만든 것이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 보다는 나의 판단이 훨씬 더 낫다고 하는 이 지적인 교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라는 해석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고린도 교회에 대한 사도바울의 이 깊은 책망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며 우리가 비록 이렇게 성경 계시를 하나님의 선물로 받았고, 부지런히 탐구하고 공부하여 우리들이 상당한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그 지식의 빛으로조차 다 파악되지 않는 위대하고 높으신 하나님께 대한 의존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랬더라면 은혜에서 멀어져 이 은사 때문에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보는 것입니다.
III. 그때 보는 것
그러면 사도는 그때에 보는 것을 대조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희랍어 성경에도 거의 같이 나옵니다. “얼굴 앞에 얼굴을 마주 대하며” 라는 것입니다.
A. 분명함 안에서 봄
이것은 최소한 세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분명한 안에서 직접 본다는 것입니다. 자, 아까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아는 것을 뭐라고 표현했나요? 불분명함 안에서 거울을 통해서 우리가 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지금이 보는 방식인데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는 방식으로 보기 때문에 거울과 같은 매개체가 필요가 없고, 거기에서 비춘 것을 다시 해석해야 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그때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신적 본질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들도 하나님의 본질을 볼 수 없습니다. 피조물은 신적 본질을 볼 수 없습니다. 아직 죄가 남아있는 불완전한 상태이기 때문에 못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죄로부터 완전히 정결하게 된 천국에 있는 우리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이 신적 본질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마 하늘나라에서 인성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는 뵈올 수 있겠죠. 왜냐하면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성도들이 천국에서 그리스도를 뵈올 것이라고 말하며 심지어 그를 찌른 자도 예수를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어떤 예수님의 외관, 겉모습을 보는 것을 볼 때에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본다고 하는 의미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자, 다음 시간에 할 내용입니다마는 하반 절에서 사도는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시는 것처럼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 말입니다. 자, 주님이 여러분을 아신다고 칩시다. 뭘 아신다는 걸까요? 여러분이 생긴 얼굴, 외모, 이것을 아신다는 것일까요? 그러면 젊었을 때 열렬히 기도하다가 침체에 빠져서 방황하고 절대 기도 안하다가 늘그막하게 주님께 와서 회개하면 주님이 몰라보실 수도 있겠네요. 젊었을 때 예쁜 얼굴은 어디 가고 늙은 얼굴로 와서 기도하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보면 주님이 우리를 아신다, 보신다고 할 때에 그렇게 우리의 겉모습을 보고 우리의 외형을 기억한다고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물론 포함할 수는 있겠지만 그걸 가리키는 것은 아니겠죠. 더욱이 그 사람이 성형 수술을 했을 때에는 더 헷갈리시지 않으실까요?
아이들은 정확합니다. 주일이면 복도에 뛰어다니던 아이들이 담임 목사실 앞에서 인사를 합니다. 그러면 이제 내가 얼른 사탕을 하나 냉장고에서 꺼내다가 줍니다. 그러면 그렇게 좋아할 수 없습니다. 이게 학습이 돼서 이제 애들이 와서 거기 지나갈 때마다 손을 흔듭니다. 얼마 전에도 어떤 애한테 사탕을 하나 줬더니 두 손을 배꼽에다 대고 교육을 참 잘 받았습니다. 공손히 인사를 하면서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걔네들은 정확합니다. 정확합니다. 아주머니라고 불리워질 성도들을 절대로 언니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정확합니다. 그런 식으로 안다는 것은 아닙니다.
더 헷갈리는 이야기가 있죠. 우리가 죽습니다. 그러면 중간 상태에 들어가게 되겠죠. 그래서 우리의 육체는 땅에 썩고, 그리고 우리의 영혼은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없습니다. 그때에도 주님이 우리를 아십니다. 뭘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없는데. 그래서 이 하나님의 아심의 대상이 영혼의 다름입니다. 나라는 존재, 나라는 존재를 나 되게 하는 다른 어떤 사람과도 구별되는 영혼, 그것을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본다고 하는 이것은 어떤 불분명함도 없이 분명한 방식으로 우리 하나님의 뜻,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 계실 때에 남기신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한계 안에서 충분히 알게 된다고 하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온전히’ 라는 말은 모두라는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알아도 하나님의 그 뜻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지상에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얼마나 현저한 차이가 있을까요?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교리를 배우고, 신학을 탐구해서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얼마나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에서 아무리 탁월한 신학적인 지식을 습득한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이 지성이 미약한 사람도 그 사람보다 뛰어나요. 아마 기독교 역사상 아주 지성을 가진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라면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하는 신학자일 것입니다. 그 탁월한 신학자가 파헤쳐 보여준 하나님에 관한 그 놀라운 지식의 체계들도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연약한 지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조차도 그것보다는 더 뛰어난 지성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있었던 모든 기독교 신학자들의 지식을 모두 합친다 할지라도 하늘나라에서는 주님을 희미하지 않게 직접 대면하며 주님의 뜻을 헤아리는 가장 어린 신자보다도 못한 지식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는 다시는 성경도 필요 없고, 교리 서적도 필요 없고, 신학서적도 필요 없고 이 땅에 있는 성도들이 부지런히 하나님을 탐구했던 어떠한 책의 도움도 필요가 없는 지식의 나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은사를 통해 교만해지기는커녕 하나님 앞에 겸손해져야 했던 것입니다.
B. 친밀한 사랑 안에서 봄
두 번째는 친밀한 사랑 안에서 보는 것, 이것이 바로 그때에 보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하고 보는 방식입니다. 이 지상에서는 단지 알기만 하는 지식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식의 은사, 방언과 예언의 은사는 모두 하나님에 관한 어떤 앎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신적인 수단이기는 했지만, 이 은사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다가도록 만들어 줄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 지상에서는 지식과 사랑이 자주 분리가 되어서 단지 알기만 하는 지상의 지식이 유행하고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받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열등한 방식의 지식입니다. 오히려 천상에서는 보고 아는 것이 있을 때마다 함께 사랑의 감정들이 솟구치면서 지식의 빛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는 더욱더 충만한 사랑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천국의 그림입니다. 그래서 이 천국은 지식의 나라인 동시에 사랑의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지식들을 습득할 때에 그 방식이 어떤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잠시 전에 사탕 이야기를 했습니다마는 아이들이 형형색색의 색깔이 있는 사탕 중 한 개를 고르고 그거 껍질을 까서 입에 넣고 빨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즐거워집니다. 왜냐하면 그 사탕에서 보라색의 포도맛 사탕에서는 이것이 사탕 성분이 녹으면서 달콤한 맛과 함께 포도의 맛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고, 노란색은 오렌지의 맛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사람의 입에 그 사탕처럼 똑같이 생긴 유리구슬을 넣어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을 입에서 아무리 열심히 굴려도 어떠한 맛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탕도 없고 맛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은혜로부터 멀어진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배우기는 하고 열심히 그것을 배우면 기억에는 남는데 그것들이 어떠한 영향도 마음에 미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천국의 아름다운 풍미와 그 아름다운 향취를 마음속에 느끼게 만들어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말씀은 깨달았지만 이 마음속에서 말씀이 역사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 순종하고 사랑하게 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절름발이 지식, 친밀한 사랑이 없는 그런 종류의 아주 차가운 지식들이 습득되고 이것들은 예리한 칼이 되어서 이런 지식을 못 가진 사람들을 이 지식으로 멸시하고 이 지식의 빛에 비추어 보아 자기에게 동의가 되지 않는 사람들은 찔러 공격을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람을 세우고, 교회를 위해 봉사하도록 주신 이 공동체에 주신 지식들이 오히려 그 공동체를 깨뜨리고 허무는 일들이 이바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모두 매우 잘못된 방식의 지식과 사랑이 분리된 극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불행한 일들을 이 고린도 교회가 바로 사도바울의 당시에 경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런 하나님이 은사를 주신 깊고 넓은 뜻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만하게 되었고, 오히려 은혜가 사라져 사랑이 식은 것을 안타까워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은혜가 사라졌기 때문에 자신의 은사에 대해서 더더욱 자랑하고 그 자신의 은사를 가지고 섬기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그 은사를 통해 지배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 교회가 처해있던 문제였습니다.
그러면 한번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이 친밀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워가고 있습니까? 혹시 이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의 마음속에 쌓여가고 있으면서도 그것은 단지 지성 안에 축척될 뿐 어떠한 사랑도 불러일으키지 못해 무지한 사람들을 멸시하고 오히려 무지한 사람들을 비웃는 교만으로 우리를 데려가고 있지는 않은가요? 이렇게 비록 하나님에 관한 신학적인 지식이라고 할지라도 그 지식이 은혜의 물에 잠기지 않으면 이 지식은 아주 날카로운 칼이 되어 오히려 자기가 알고 있는 이 지식을 이데올로기화 하는 것입니다. 이데올로기의 특징은 그 사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을 비판하되 자신은 누구의 비판도 받지 않으려고 하는 우상화의 현상이 바로 이데올로기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데올로기화 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나의 신앙과 삶이 빚어져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독단적인 어떤 신학적인 편견이 성경을 빚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우리는 그 안에서 참된 친밀한 사랑이 지식 속에 역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은혜의 물에 잠긴 지식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고 십자가의 사랑이 가득했을 때 그 교회에 부어주신 모든 은사들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교회답게 세워 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도구들로 사용되었고, 아주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이 사라지자 이 모든 은사들은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쓰이질 못하고 이 은사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이 분열하고 오히려 그 속에서 갈등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천상에서는 이 친밀한 사랑 안에서 주님의 뜻과 하나님의 생각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 보는 방식을 생각하며 고린도 교회가 겸손해져야 했던 것처럼 또한 오늘 우리는 이 성경을 부지런히 탐구하고 이 성경의 교리들을 배우면서도 우리는 이렇게 마지막 날에 이 지식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운 방식으로 주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더더욱 의지하는 겸비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C. 결국 지식과 사랑은 통합을 이룸
세 번째는 결국 이지식과 사랑이 통합을 이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 지식이 없는 열심은 모두 오류이거나 영적인 미성숙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지식과 사랑은 한 수레에 매달린 두 개의 수레바퀴와 같아서 이 두 개가 함께 움직이면서 결국은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마차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몰랐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방황했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예전보다 많이 알게 되었고, 교리를 배우게 되었고, 신학적인 지식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항상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지식 말고 이 지식과 함께하는 진실한 인격적인 사랑이 그 사람 마음속에 역사하여야지만 이 지식이 과연 지식다운 빛을 드러내고 하나님 앞에 이 지식이 없었던 때와는 비교될 수 없는 남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IV. 결론: 겸손함과 사랑
결국 사도는 오늘 이 거울의 비유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두 가지를 결정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겸손함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늘을 열고 큰 은사를 부어주었던 고린도 교회도 영적으로는 그렇게 탁월했지만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질 때에 그들은 교만에 빠져 자기들에게 주신 이 은사의 한계를 몰랐던 것처럼 그들보다는 뛰어난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는 탁월한 방식으로 성경의 지식들을 배우고 교리들을 익히고 위대한 신학자들의 도움을 통해서 성경 속에서 더 많은 교훈을 발견해 간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이 지식들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이 원래 지식을 주신 목적에 부합하도록 살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겸손해져야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 주님을 알 때에는 교만해지고 싶습니다마는 더 많이 주님을 알고 그러면서 주님이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배우게 될 때마다 우리는 그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비천한 죄인이고 무지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으며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성경을 공부하십시오. 부지런히 교리를 배우시고, 부지런히 신학 책을 읽으면서 올바른 믿음의 지식들을 쌓아 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겸손을 배우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 많은 지식들을 올바로 알게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아직도 너무나 부족한 사람이고, 지금 우리가 아는 것은 희미한 것들이고, 그때에는 우리가 주님의 뜻을 보다 더 밝히 알게 되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겸손하게 더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두 번째는 사랑입니다. 이 고린도 교회가 가지게 된 방언의 은사, 예언 지식의 은사, 믿음의 은사 어느 것 하나도 그 자체가 문제가 된 것은 없습니다. 문제는 이 은사를 배라고 한다면 이 상류에 있는 배를 띄워서 하류로 흘러가게 하는 것은 강의 가득찬 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물이 사라지자 배는 땅바닥에, 강바닥에 가라앉게 되었고, 큰 배든지, 적은 배든지, 비싼 배든지, 싸구려 배든지 하류에까지 이동하는 데는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하는 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깨달을 적마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져 이전보다 우리가 주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땅에 얼마를 살게 하시든지 살게 하시는 날 동안에 우리는 매일매일 어제와는 다른 하나님에 관한 새로운 지식들을 습득해야 하고, 이 지식들을 습득하는 매 순간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이 우리를 가득 채워 우리의 모든 의지를 그 분께 복종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모든 것들을 하나님과 이웃들을 흘러가도록 사용하게끔 그렇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많은 지식의 빛 아래서 겸손과 사랑을 함양함으로써 고린도 교회가 교회는 주님께 근심을 끼쳐 드렸지만, 여러분은 교회의 한 지체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28.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이어서 사도는 지금 아는 것은 부분적인 것이고, 그때에 아는 것은 온전히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사도는 앞에서 어린 아이와 어른의 비유를 통해서 은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영화의 날에 알게 되는 것을 대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난주에는 거울의 비유를 가지고 은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 이 둘을 서로 비교하였습니다. 돌, 혹은 구리로 만든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것은 매우 희미한 것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명료성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아주 명백하게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사도는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II. 지금 보는 것
전반부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사도는 이 후반부에서도 지금 아는 것과 그때에 아는 것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거울의 비유를 통해서는 보는 것을 가지고 설명을 했지만 이제 오늘 이 12절 하반 절에서는 그 보는 것에서 비롯되는 아는 것이 어떻게 은사를 통해서 아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영화의 날에 알게 되는 것이 대조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A. 부분적인 앎 ← 명백성과 대조
먼저 그는 지금 아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알지만” 희랍어 성경에는 “나는 한 부분으로부터 알고 있습니다” 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이제 지식의 문제에 있어서 은사를 통해 주어지는 지식이 부분적인 앎이라고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자, 거울의 비유에서는 이제 부분이냐, 전체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명백하냐, 흐릿하느냐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니까 거울의 비유를 통해서는 은사를 통해 하나님의 어떤 뜻에 대해서 알게 해 주는 것이 마치 구리거울로 사람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영화의 날에는 우리가 우리의 영으로서 영이신 주님을 직접 대하며 그 분의 뜻에 대해서 아주 명백한 이해를 갖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지금과 그때가 대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아는 것은 부분인데 그 영화의 날에 하나님의 뜻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은 전체적일 것임을 통해서 이 두 가지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오래전 일입니다마는 영국인이 나이지리아에서 피살을 당하는 살인사건이 있었습니다. 영국 경찰은 이 사건을 집요하게 추적했고, 거의 10년 가까이 추적해서 범인을 결국은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 범행 현장에 남겨진 중요한 단서 하나는 깨진 남자 바지의 단추였습니다. 그 단추를 가지고 남겨져 있는 그 글자와 단추 모양을 가지고 전 세계의 의료 메이커를 뒤져서 이 단추가 어느 의류에 사용되는 건지를 찾았고, 그리고 그 단추 디자인을 다시 조사해서 그 바지가 얼마가 생산되었고, 그 나이지리아에서 그 바지를 파는 데가 어디인가 하는 것을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하여튼 집요하게 찾아서 결국은 범인을 잡아낸 것입니다. 수사는 부분적으로 어떤 단서들이 남아있고, 그것은 fact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이 당시 범행현장에 대해서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 작은 fact들을 모아서 다른 것들과 연결을 시키며 논리적으로 그 범죄 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추정해 내는 것입니다.
B. 은사의 한계
결국 사도는 오늘도 부분적으로 아는 것과 전체적으로 아는 것 사이를 대조함으로써 은사의 한계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든 은사, 특히 지식과 관련한 은사, 방언, 통역, 예언, 지식 이런 은사들은 각각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고, 그리고 그 중 어떤 것들은 정확하게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뜻의 일부분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해석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고, 이 해석은 두 가지로 이루어졌는데 그것이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사실이 무엇이냐는 문제와 전달된 그 사실을 다른 사실들과 연결해서 이 문제에 대한 우리 하나님의 의지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시절에 어느 학생한테 선물을 하나 받았습니다. 자기가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인쇄소에서 찍어낸 책 중에 하나인데 나한테 선물하노라고 가지고 왔는데 꽤 구하기 어려운 책이었습니다. 통일교의 원리강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을 반나절 꼼꼼히 읽었습니다. 두 가지 사실에 대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첫째는 뭐냐 하면 통일교의 원리 강론에 엄청나게 많은 성경 구절이 나온다는 점, 그리고 두 번째는 그 성경 구절 가운데 제대로 해석된 구절이 거의 없다는 것, 그것이었습니다. 어떤 성경 구절을 꺼내놓고 그 꺼낸 것을 다른 성경 구절과 수없이 연결시키는데 이렇게 연결된 체계들이 우리가 보기에는 아주 해괴한 책입니다. 그 중의 하나를 1부에서는 안했는데, 한 가지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종말에 관해 예고하신 말씀에 인자가 올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인자가 오는 것이, 인자가 올 때에 그것이 인자를 어디서나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모든 사람들이 보게 될 것이라고 하는 이 예언이 방송의 현대화를 의미하는 거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미 그렇게 방송을 통해서 이미 온 어떤 메시야가 전파되고 있다는 것을 은근히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자, 그러면 고린도 교회는 아직 신약 성경이 완성되기도 전이었고, 은사가 주어지고 이 은사는 어떤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전달될 수도 있고, 오해될 수 있는 많은 소지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해석이라는 과정이 필요했고, 예언 같은 것은 또 다른 예언과 대조하여 서로 충돌하지 않는지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더듬듯이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아주 부분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전체적인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지를 발견해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는 오히려 이런 은사를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간절한 열망을 가져야 하겠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애써서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러한 지식과 관련된 은사들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에 대하여 우열을 이야기하고, 그래서 결국은 이 교회를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주신 이 은사가 올바로 사용되지 못하여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은사의 한계는 완성된 계시인 신약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짐으로써 상당부분이 극복이 됩니다. 구약 성경밖에 없고, 여기저기에서 방언 통역, 예언, 지식 이런 은사들이 주어지고 그 속에서 산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어떤 부분들이 우리에게 전달되었죠. 그런데 성경이 완성됨으로써 신약을 통해 구약의 뜻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구약을 통해서 신약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가르침들을 신약 성경의 빛 아래에 놓고 해석함으로써 그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신앙의 체계 속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계시에 대한 앎은,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이해는 이 고린도 교회가 은사를 겨우 의지하면서 교회를 이끌어 가던 때와는 비교될 수 없는 계시의 큰 축복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비록 성경이 이렇게 산발적으로 주어지던 이러한 은사를 통한 하나님의 뜻보다는 훨씬 더 통일적으로 주어지고 명백하게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이 모든 것이 완전히 알려진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열심히 해석이 되었지만 잘못 해석되는 적이 있고, 또 어떤 부분들은 올바로 해석된 것 같지만 그것들을 다른 해석과 연결할 때에 잘못 해석함으로써 그래서 신앙을 올바른 곳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오류를 야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비록 성경이 주어졌고, 또 성령께서 우리를 조명하여 성경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또 신앙의 발전을 통해서 성경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 간다고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덜 의지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교회는 이 은사를 받았던 고린도 교회 못지않게 주어진 이 성경을 가지고 해석하고 신학의 체계를 세우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일에 있어서 주님을 더 많이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17C의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프란시스 튜레틴이라는 사람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이 성경을 부지런히 탐구하면서 겪었던 역사들을 회고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그 분들은 쉬운 성경 구절 속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배웠고, 어려운 성경 구절에서는 주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신앙을 배웠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III. 그때 아는 것
그러나 마지막 영화의 때에는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가득할 것이고,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를 이렇게 은사를 의지하거나 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과는 비교되지 않는 직접적이고 완전한 방식으로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 받은 사람들의 예언이나 방언, 혹은 지식의 은사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겨우 겨우 하나님의 뜻을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성경의 뜻을 이해하고, 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성경을 해석하여야 했습니다. 모두 매개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직접 하나님의 뜻을 아무 매개 없이 직접 보게 될 것이고, 그리고 그것을 부분이 아닌 전체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되는 때가 올 것이라고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 완전한 지식의 명백성, 그 완전한 지식의 전체성의 빛 아래에서 보면 지금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희미하게 그리고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은사를 통해 알게 된 것이 그렇게 교만할 이유가 없는 것임을 사도는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배우면서 우리는 이미 방언과 통역이나 예언, 이런 은사들을 통해서 성경의 계시를 능가하는 어떤 특별한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비록 완성된 성경의 계시를 가지고 있고,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들이 성경을 탐구하고 결과들을 얻어낸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여야 할 탐구와 해석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래전 설교에서 여러분에게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설교자를 위해 기도하지 않고 주일날 교회에 와서 예배 시간에 은혜를 바라는 사람은 하나님 보다는 설교자의 재주를 신뢰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과 설교자, 그리고 목회자를 주신 하나님의 경륜과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간절히 오히려 하나님이 은사와는 비교되지 않는 분명한 계시를 주셨기 때문에 더욱더 간절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해야 할 것이고, 예배 시간에 은혜를 받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설교자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막대기에 불과하고, 그 막대기를 사용하셔서 여러분을 때리기도 하고, 또 어루만지시기도 하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은혜의 간섭이 있어야지만 여러분이 진리의 빛을 받고 하나님 사랑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 교회에게 깨닫게 해주고 싶었던 은사를 통해 지금 아는 것이었습니다.
A. “온전히 알 것이다”
그러나 사도는 그때에 아는 것이 그렇게 아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시는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희랍어 성경에는 “내가 온전히 알 것이다. 내가 온전히 알려질 것처럼” 수동태로 나옵니다. ‘온전히 알 것이다’ 라는 단어는 ‘에피그노소마이’(ἐπιγνώσομαι)라고 하는 단 하나의 단어입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실을 인간이 앎에 있어서 그 아는 것이 어느 정도 혹은 어떤 식의 앎이냐에 대해서 희랍 사람들은 두 가지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온전히 알지 못하고 섣부르게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들은 독사라고 불렀습니다. 희랍어로 독사는 개인의 의견, 혹은 사적인 입장 이런 뜻입니다.
자, 예를 들어보십시다. 여기에 이런 컵이 있고 뚜껑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렇게 보여 주었을 때 사람들은 각각 이것에 대해서 어떤 인상을 가지고 한 마디씩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에 대한 지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 좋은 예가 있습니다. 자,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사람마다 경험한 시간에 길이와 교제의 깊이는 달라도 누군가 몇 번 만나고 나면 각각 받은 인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니까 나는 그 사람이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저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는 개인적인 견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과는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지요. 이런 지식들을 가리켜서 독사의 지식이라고 부릅니다. 희랍어로 진리라는 말을 ‘알레데이아’라고 하는데 이것은 ‘드러나 알려진 것’이란 뜻입니다. 즉, 드러나서 알려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드러난 그것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고 잘못된 견해를 얼마든지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에 근접하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희랍 사람들이 보기에는 온전히 아는 것이라고 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온전히 아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온전히 아는 지식, 사물을 전체적으로 온전히 아는 지식, 그래서 모든 것이 정확하게 사실이고, 그리고 충분히 그것을 알고 있는 이 지식을 가리켜서 누군가에 의해서도 이것이 뒤집힐 수 없는 그런 확실한 지식을 가리켜서 에피스테메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에게 아주 좋은 예를 들어 보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경주마입니다. 1등을 하면 돈을 많이 법니다. 그래서 1등을 너무 하고 싶어 하니까 어떤 사람이 힌트를 줬습니다. “내버려두면 절대 1등을 못하고, 아침에 빨간 당근 두 개, 저녁 때 파란 오이 두 개씩 주십시오. 그러면 1등을 할겁니다.” 이 사람은 안 믿었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한번 당근 두 개와 오이 두 개를 아침, 저녁에 줬더니 그 다음날 1등을 했습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1등을 했습니다. 이건 아마 우연일 거야 하고 생각하고 그 다음날은 안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1등을 못했습니다. 이상하다 하고 그 다음날은 다시 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1등을 했습니다. 수없이 실행을 했는데 정확하게 준 날은, 당근 두 개, 오이 두 개 준 날은 1등을 하고 안 준 날은 1등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확고하고 아, 이 당근 두 개와 오이 두 개를 주면 이 말은 1등을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었고 그것은 정확하게 fact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는 당근 두 개와 오이 두 개를 주면 이 말은 다음날 경주에서 1등을 한다는 지식을 갖게 되었는데 이 지식은 참일까요? 거짓일까요? 참입니다. 사실이니까. 그러나 이것은 에피스테메가 합니다. 온전히 아는 것이 합니다.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온전히 아는 것이 합니다. 그러면 온전히 알려면 어떻게 해야죠? 간단하죠. 빨간 당근 두 개와 아침에 주는 빨간 당근 두 개와 저녁 때 주는 파란 오이 두 개가 그 다음날 말이 1등을 하는 것과의 사이에 무슨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있는지를 모두 정확하게 사실로서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해요. 그것이 에피스테메예요.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의학지식은 대부분 에피스테메가 아니라 이상한 독사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의학 지식을 섣부르게 너무 신뢰하면 안 돼요. 자, 요즘 조금 사라진 듯 하지만 아침마다 사람들이 막 녹즙을 갈아서 신선하게, 그것도 유기농을 사다가 갈아서 먹잖습니다. 파란 거 한 잔을 꽉 채워서 쭉 들이키면 맛이야 별로 좋지 않지만 건강해질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갖게 되죠. 콩팥 나쁜 사람들에게는 큰일 나는 일입니다. 여러분 토마토가 몸에 좋다는 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고, 토마토는 소위 얘기하는 항산화식품입니다. 산화는 우리를 노쇠하게 하는 모든 주범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산소입니다. 산소가 이 안에서 없어지는. 그래서 요새 수소 음료라는 것이 그렇게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이 수소 음료를 먹으면 물속에다가 수소를 많이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잘못 보관하면 날아가요. 들어가면 H가 함께 들어가는 것입니다. 일부가. 그래서 몸에 남아있던 O와 결합을 해서 물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노화 활동을 못하도록 이 수소 음료가 우리 몸을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항산화식품입니다.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콩팥이 나쁜 사람들에게는 매우 위험한 식품입니다. 이런 것들을 전체적으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지 못하고 하나 단선적인 지식 하나만을 가지고 무언가를 하게 될 때에 그때에 우리의 몸은 회복할 수 없는 손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신문을 읽었는데 깜짝 놀랄만한 기사가 나왔습니다. 한 페이지 가득 써 놨는데 읽었는데, 뭐냐 하면 잇몸을 잘못 관리하면 심장병과 신장병에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 잇몸에서 자꾸 피가 나와요. 그래서 병원에 갔습니다. 그랬더니 그 의사한테 “아니 잇몸을 관리를 잘 못하면 심장병으로 죽을 수도 있고, 신장이 현저히 나빠진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그랬더니 “아, 목사님, 그것 모르셨습니다?” 잇몸에서 피와 함께 고름, 균이 나오는데 소량이 계속해서 몸속으로 들어가요. 이게 우리의 몸이 그리고 핏속으로 들어가요. 이 불순물을 걸러서 산소를 공급해서 피를 맑게 하는 기능이 우리 몸에 두 가지가 있는데 폐와 그리고 콩팥입니다. 콩팥은 정수기와 똑같은데 이 멘브레인을 통과해서 걸러내는데 여기에 물이 들어오다가 갑자기 뜨물이 들어온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 고름이나 피가 섞여 있는 불순물들이 들어가면서 이 콩팥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원인과 결과 사이를 모르면서 망가져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심장에까지 영향을 주어서 잘못하면 심장병으로 사람이 죽게 됩니다. 그래서 깨끗이 치료를 받고 왔습니다. 이게 바로 온전히 안다 라고 하는 뜻입니다.
여기서 온전히 안다는 것은 주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게 된다든지, 예수님처럼 전지전능해진다든지 하는 뜻이 합니다. 무엇을 하나를 알아도 의심할 여지없이 제대로 모든 것을 알게 된다 라고 하는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에피스테메는 부분적으로 아는 것은 에피스테메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료성이나 명백성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성의 문제예요. 그래서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과 의지에 대해서 어떤 지식이 주어지면 그것을 믿음으로 순종을 하던 것들이 이때에는 부분적이어서 어떻게 연결되는지 모르고 살던 그것이 이 마지막 영광스러운 날에는 모두 이해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충만하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자, 믿지 못하던 것들을 이성으로 알게 될 때에는 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을 수 있는 것들을, 믿었던 것들을 이성으로 이해하게 되었을 때에는 충만한 기쁨이 이 안에서 솟아 나오게 됩니다. 자, 예를 들어보십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여러분을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여러분의 죄를 구속하셨습니다. 그 짧은 복음에 성령이 감동을 주어서 그거를 확 믿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 굳센 믿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때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그리고 이 속에서 신앙의 감격이 막 넘치게, 이 신앙의 우리 안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후에 이미 믿었습니다. 믿었는데 그 후에 예수님이 왜 그렇게 십자가에서 심한 형벌을 당하고 죽으셨는지를 하나하나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는 죽으셨다고 그러는데 그냥 감격하고 눈물을 흘렀는데 왜 우리가 그런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지, 왜 우리가 죄인으로 태어났는지, 그래서 우리들이 어떤 죄를 지으면서 살고 있고, 그리고 그 죄 때문에 이 세상이 얼마나 비참한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상세하게 이성적으로 알게 될 때에 그때에 우리들이 믿었던 것들이 이성에 의해서 세밀하게 이해되면서 우리가 믿었던 이 사실들이 우리에게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오 톨스토이는 누구보다도 참된 인생의 도가 무엇인지를 가지고 고뇌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기독교 신앙이 깊어지고 난 후에 말년에 참회록을 쓰게 됩니다. 그 톨스토이의 참회록에서 그 마지막에 그가 묘사하는 장면이 굉장히 감동적이었습니다. “나는 어느 날 내가 하늘 위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커다란 반석 위에 자신이 있었고, 그래서 때로는 이 반석이 이 공중에 떠있는데 흔들리지 않을까 염려하며 반석 끝으로 가서 밑을 내려다보았지만 끝없는 하늘과 구름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반석과 지상을 연결하고 있는 다리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반석에 서서 뛰어 보기도 하고 굴러보기도 했다. 그러나 반석은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여기서 무한한 평화와 안식을 얻게 되었다.” 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해석을 하자면 뛰어난 지성을 가진 이 사람이 기독교 신앙에서 안정을 찾고 쉼을 없었는데 이 쉼의 근거가 무엇인가? 이성으로 그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 내가 느끼고 있는 이 모든 영적인 안식과 행복의 근거를 확인할 수 있을까 하고 하늘 위에 떠 있는 그 반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까 자기 생각에는 반석에 커다란 책상다리 같은 것이 있어서 땅하고 연결될 줄 알았는데 그런 거 없더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거를 다 해명할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내가 이 위에서 뛰고, 구르고, 넘어져도 안전하다는 것, 그렇게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 이것을 내가 믿게 되었노라 아멘 이 얘기죠.
그러면 보십시오. 아무리 수많은 신학자들의 지식을 참고하여 삼위일체에 관해 연구하고 탐구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우리가 안식하고 있는 하나님과 그리고 이 지상이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를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다리 같은 것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책상 다리 같은 것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성경과 교리, 신학을 통해 알고 또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내가 하나님을 믿어야 할 필요가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은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하는 것, 그리고 더 많이 하나님을 의뢰하고 성경을 신뢰하여야 되겠다는 믿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해 공부하고 신학을 공부하고 믿음이 약해지는 사람은 잘못된 방식으로 신학을 공부합니다. 그래서 요구되는 게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더 충만하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지상에 사는 동안 성도의 행복은 성경을 잘 믿고, 성경을 믿음으로 성경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는 믿음으로 받아들인 이 진리가 어떻게 해서 참된 하나님의 말씀인가 하는 것을 부분적으로 이성을 통해서 그것들을 알게 됨으로써 믿음은 돈독해지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그 속에서 아주 뛰어나게 탁월하게 우리에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때에 하나님을 예전보다 더 많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B. “내가 알려진 것처럼”
그러면서 사도가 말합니다. “내가 알려진 것처럼 말입니다.” 수동태로 나옵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내가 “주님에게 알려진 것처럼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주님이 나를 모두 아시는 것처럼 나도 주님을 속속들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은 주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러한 겸손에 대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이야 나에게서 당신을 숨기실 수 있지만 나는 당신에게서 모두 드러났고, 숨길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고백을 하든, 고백을 아니하든 주님은 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아십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더 의지해야할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가 주님에게 알려졌을 때에는 나에 관한 모든 지식들이 나의 행동이나 주변의 소문을 통해 예수님께 알려지는 게 아니라 그런 거 하나도 도움 없이 예수님이 우리를 직접 보시고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그와 꼭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그 영광의 날에는 주님의 의지를 분별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의지라든가 혹은 하나님에 관한 모든 속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해 주시는 어느 부분에 있어서 그 한도 안에서는 다른 것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직접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오늘 고린도 교회가 방언이나 통역, 예언이나 지식의 은사 같은 것들을 통해서 파편적으로 그들에게 보여주었던 하나님의 뜻에 관한 어떤 교훈들은 얼마나 불완전한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삼중 적으로 불안한데 우선 첫째는 그것을 인식하는 인간의 지성이 영화의 때보다는 현저히 미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불완전하고, 두 번째는 그렇게 쏟아놓은 하나님의 계시가 해석되는 점에 있어서 올바른 해석이 필요해야 했기 때문에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었고, 해석된 것을 다른 진리들과 연결하는 것이 불완전했기 때문에 이것은 삼중 적으로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정말 중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고, 이 하나님이 주신 이 불완전한 은사를 가지고 서로 교만해 하고 그것으로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대신 자신을 높이는 이런 분쟁의 태도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사도는 쐐기를 박듯이 고발하고 있습니다.
요즘도 시간 나는 대로 책을 한 권 쓰고 있지만 늘 그렇지만 그래서 여러 가지 책들을 볼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보다가 보면 참 마음을 상하게 하는 책들이 많습니다. 표지를 겉뚜껑을 열어서 보면 저자 이름이 나오는데 이름이야 나하고 상관없고, 얼굴도 상관없지만 나이도 보니까 나보다 한참 어려. 그런데 이 책의 내용은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탁월한 것입니다. 그때 마음이 상해요. 나는 이 사람보다 10살을 더 먹었는데 나는 어떻게 이거를 보고 무릎이나 치고 앉았나? 이 쓴 녀석은 누구고 읽는 사람은 누군가? 이런 책들을 보면서 마음이 상하고 어떤 때에는 하나님 나에게는 왜 이런 걸 안 주십니까? 그러고 마음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마당에서 이거를 이렇게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심지어 요새 책을 쓰는데 꼭 그럴 필요가 있어서 이슬람 신학자들의 글을 좀 읽고 있는데 아, 이 사람은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도 잘 믿지 않는 사람인데 어떻게 이렇게 탁월할까? 그것도 아주 오래전의 사람이 1000년도 넘은 사람이 이렇게 해서 천 년 후에 읽는 나를 이렇게 가르치고 있으니 이 도대체 뭔가? 하나님 이 이교도에게는 이런 놀라운 능력을 주시고, 나는 그래도 참교도인데 이렇게 밖에 안 해 주십니까? 오늘 반성이 나온 게 뭐냐 하면 사도는 지금 12장에서 은사를 가지고 다 이야기한 다음에 13장 들어오기 전에 뭘 얘기 했냐 하면 “너희가 다 은사를 가진 사람이겠느냐. 너희는 더 커다란 선물을 사모하거라. 내가 너희에게 가장 좋은 길을 보여주겠노라” 그러면서
(찬양)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고
쭉 위대한 사랑의 장에 대해서 노래를 합니다. 그때 내 마음 속에 어떤 반성이 들었냐 하면 내 주위에는 이렇게 지식이 뛰어난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목사인 나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단 말입니다. 근데 그 사람들을 보면서 “아, 저 사람은 나보다 공부도 못했고 평신도 이지만 어떻게 저렇게 은혜가 충만할까?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구나” 그거를 보면서 “하나님 나는 왜 저런 은혜를 안 주십니까?” 그러면서 마음이 상했던 적은 없지는 않지만 그보다 훨씬 더 덜하다는 얘기입니다. 이 사도바울이 고린도 전서 13장을 쓴 의도와는 정반대되는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았습니다. 바늘로 찔리면 안 되고 창으로 푹 찔려야 회개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이 남다르게 누군가에게 주신 은사, 고린도 교회처럼 이런 영적인 은사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많은 은사들이 있잖습니다. “야, 쟤는 어떻게 저렇게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을까?” 아니면 “쟤는 어떻게 같은 여자지만 어쩜 저렇게 예쁘게 태어났을까?” 또 같은 남자지만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튼튼하고 질병도 없고 저렇게 씩씩할까?” 어떤 사람은 “아,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지식이 뛰어날까?” 이런 거 가지고 우리들이 마음 상해하고 혹은 비교하면서 자기 자신을 자각하는 때가 있잖습니다. 그런데 그거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사도는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너 방언 받았어? 통역하는 나 도움 없이는 너 아무것도 아니야. 그게 방언이나 통역이 있어봐야 너희가 예언을 당할 수 없지, 야, 그럼 지식의 은사는 출장 갔냐?” 이렇게 사람들이 자기의 은사의 우월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에 사도는 정말 너희 교회에 너무 너무 필요한데 잃어버린 게 있단다. 그것이 뭐냐 하면 은혜예요. 처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고 한 그 결심 속에서 선포하던 그의 선포를 듣고 은혜를 받던 그 은혜, 그리고 그 은혜의 결과에는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 이것이 사라져 버렸는데 이것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부러워 한 적이 없고, 이 은사를 가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당시 서로 다툴 수 있었지만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다투는 법은 없습니다. “네가 은혜 많이 받았냐? 내가 더 많이 받았지. 지금 한 번 해보자는 거야? 뭘 보더라도 내가 은혜를 더 많이 받았지.” 이런 경우에 목소리 큰 사람이 진짜로 은혜를 많이 받았을 경우는 거의 없는 것입니다. 은혜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남을 위해 흘러가게 하고, 자기를 버리게 하고, 죽게 하고, 남을 유익하게 하고, 자기를 버리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C. 영원히 계속될 사랑
그래서 오늘 아침에 마음에 깊은 찔림을 느꼈습니다. 결국 영원히 계속될 사랑을 사도는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이렇게 완전한 지식 안에서 이런 종류의 방언이나 통역, 예언, 지식과 같은 은사는 그 필요성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사랑은 지금처럼 계속될 것입니다. 정도에 있어서는 탁월하지만 방식에 있어서는, 본질에 있어서는 지금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이 사랑과 동일한 본질의 사랑을 그 영화의 날에도 계속 할 것이기 때문에 사도는 이 아는 것에 대한 불완전함과 부분적임을 그 당시 그 이후에 완전한 지식과 비교하면서 너희들이 정말로 사모해야 할 것이 은사를 인해서는 겸손해지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서는 갈망해 가진 사람이 되라고 오늘 이 교회를 간절히 타이르고 있습니다.
IV. 결론: 사랑은 영원하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이 나와 함께 우리 모두 다 같이 하나님의 탁월한 은사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거룩한 시기심을 느끼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 사람은 비록 나만큼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얼마나 사랑이 많은가? 그리고 그 사랑은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인가? 에드워즈가 말했던 것처럼 결국 기독교의 영성은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신령한 사람인가 라고 하는 것은 은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은혜를 통해서 입증이 되요. 그리고 그 은혜의 열매는 하나님의 사랑, 까리따스의 사랑이 신자들의 마음속에 가득 있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그것을 주신 주님의 의도대로 사용하고, 주님을 위해 그것을 쓰는 것입니다. 바로 이 아름다운 모본을 남기신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셨죠.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땅에 오셔서 주님이 자신에게 주신 모든 것을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사용하셨고, 마지막에는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옥체를 깨뜨려서 우리를 위한 대속의 제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은사가 시킨 것이 아니라 예수님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순수한 사랑이 그렇게 자기를 온전히 버리는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늘 향해 두 손을 들고 간절히 빌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온전히 주셨던 것처럼 그렇게 오늘도 우리가 온전히 주님과 이웃을 내어주며 살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의 삶의 동기가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 자신의 만족이 아니라 주님과 주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의 형제요, 자매들, 우리의 이웃들이 되기 위하여 그런 충만한 은혜를 우리에게 물 붓듯 부어주시도록, 그래서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 안에서 이 세상 어디까지든지 흘러가는 사람들이 되도록 도와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매달림으로 다시 한 번 사랑의 부흥을 경험하는 성도들이 되도록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29.믿음 소망 사랑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13장 전체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의미 깊은 이 구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한 이 구절을 상반 절을 중심으로 오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사도는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로 지금 있는 것과 그리고 그때에 있는 것, 다시 말해서 지금과 그때의 보는 것과 아는 것을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몇 주간에 걸쳐서 12절의 설교를 들으셨습니다. "그는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는 비전을 피력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때와 지금이 비교될 것이라고 하는 말인데 그때 그렇게 전체적으로 온전히 분명하고 명백하게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알게 되는 그때와는 대조적으로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바울의 시대에는 은사를 의지해서 방언이나 예언, 통역이나 믿음과 같은 은사를 의지해서 겨우겨우 하나님의 뜻을 희미하게 부분적으로 분별해 가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워 갔던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러한 때이고, 그래서 지금은 그때와는 대조되는 방식으로 주님을 알고 또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II. 지금 있는 것들
A. “항상 있는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고린도 전서 13장 13절은 그렇게 좋은 번역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있는 것들을 대조하고 있는 것인데 오늘 우리말 성경은 "항상 있을 것인데" 라고 말합니다. "그런 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희랍어 성경을 좀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이런 정도의 번역이 근접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즉이 아니라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머물러 있다 이런 번역입니다. 여기에 ‘항상’이라고 하는 부사는 나오지 않고, 또 있을 것인데 라고 하는 미래형이나 추측형도 사실 희랍어 원문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오히려 여기에 나와 있는 ‘누니’(νυνὶ)라고 하는 단어 "지금은" 이라는 이 단어는 12절에서 두 번이나 등장하는 그때라는 단어 ‘토테’(τότε)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온전히 알리라고 한 그때와 대조되는 지금으로서의 ‘누니’(νυνὶ)이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명백하게 알게 되는 때가 아니다. 그런데 지금은 바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머물러 있는 그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이 안에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세심하게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고린도 전서 13장 전체를 통해서 사도가 우리에게 갈파하고자 하는 중요한 요지를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B. 은사와 신망애
1. 남겨진 세 가지: 신망애
그때 이러한 지식의 은사들을 통해서 신약 성경도 완성되기 전에 겨우겨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살아가던 그때에는 믿음 소망 사랑 세 가지가 항상 있다. 지금은 그런 계시의 방식이 종료되고, 성경을 통해서 우리들이 성령의 조명을 받아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은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그때가 어두운 방속에서 벽을 더듬으며 입구를 찾아가는 것이었다면 지금 희미한 등불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때보다는 훨씬 더 전체적으로 이 건물의 구조에 대해서 알고 더듬으면서 입구를 찾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성경이 완성되기 전 이러한 특별한 계시에 의해서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과 성경이 완성된 후에 주님의 뜻을 분별하게 된 것은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진전입니다. 자, 이런 이야기입니다. 물론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도 초대교회 성도들이 구약의 경륜이 신약으로 이어져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을 구원하고 교회를 만드시는 경륜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 경륜의 신학적인 틀을 가지고 구약을 해석할 수 있는 지식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평범한 성도는 아니지만 스데반 같은 사람들은 손에 성경도 들지 않은 채 구약의 역사 전체를 꿰뚫으며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속의 역사를 관통하는 설교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들 중 대부분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과 역사에 대해서 핵심은 알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전체의 우주적인 계획을 보지는 못한 사람들이 태반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신약 성경이 완성되고는 누구든지 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고, 교회를 세우시고, 마지막에 구속을 완성하사 창조의 목적의 뒤를 잇게 하시는 이 위대한 인류 구속 역사의 대드라마가 한권의 책으로 주어지고, 우리가 그 성경을 통해서 그 진리의 말씀을 대하게 될 때에 이 지식은 파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던 은사를 통해서 인도받던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계시의 진전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것이 과거 은사를 통해 주님의 뜻을 겨우겨우 분별하던 때와는 비교될 수 없는 놀라운 명료성과 전체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마지막 영광의 그날에 우리가 부활한 몸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성경이나 은사의 도움 없이 직접적으로 알게 되는 그때의 영광스러운 방식에 비하면 비교가 되지 않는 때라는 것입니다. 이런 때를 살아가는 성도의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망애 즉, 믿음 소망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은사와 믿음 소망 사랑의 관계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겨진 세 가지가 있는데 이것은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주님의 뜻에 대해서 온전히 알게 되는 그날이 올 때까지 은사가 남겨져 있고, 우리에게 성경도 남겨져 있지만 그러나 사실은 은사와 성경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 불러 일으켜진 믿음 소망 사랑 그것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된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은사의 경륜과 신망애
많은 사람들이 이 고린도 전서 13장의 화룡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가장 중요하고 결론이 되는 이 구절을 잘못 해석합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 중에서 사랑이 최고이고, 마치 믿음과 소망은 사랑에 비해서 매우 열등한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는데 이 구절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은사의 경륜과 믿음 소망 사랑의 관계를 살피자면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고린도 전서 12장에 나오는 어떤 은사는 폐지되었거나 그리고 그 용도가 변경이 되었습니다. 그때에 비하면 성경을 가진 우리들이 훨씬 낫지만, 여전히 그 영광의 날에 비하면 우리는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영원하고, 온전한 주의 의지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명백히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불확실한 때에 우리로 하여금 참 하나님이 주신 계시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 살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이 바로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 소망 사랑은 바로 믿음 소망 사랑으로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사도가 12장 마지막 두 절에서 고린도 전서 13장을 도입하기 전에 우리에게 말했고, 또 보여주고 싶다고 했던 바로 그 길이 바로 이 길인 것입니다. 12장 30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 병 고치는 자겠느냐,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했는데 이 말이 희랍어 성경에는 탁월한 방식, 혹은 탁월한 길, 혹은 탁월한 방식, 탁월한 방법, 더 뛰어난 우둔함, 더 뛰어나고 탁월한 길 이런 식으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은사와는 대별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들이 그렇게 은사를 가지고 우열을 다투고, 너희들이 특히 지식의 은사를 가지고 너희들이 다른 은사를 가진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너희들이 말하는데 그런데 사실은 그 모든 은사는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 그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너무 훌륭하고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탁월하다. 그런데 나는 너희에게 더 뛰어난 방식을 보이겠노라고 한 그것이 바로 은사와 대조되는 은혜이고, 그 은혜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13장에서 사랑의 속성을 제시하면서 풀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너희에게 새로운 더 탁월한 길을 보이겠노라고 할 때에 그것은 너희들이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가지만 더 탁월한 삶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을 받아서 믿음 소망 사랑 이것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다. 이것이 바로 너희에게 보여주는 더 좋은 길, 더 훌륭한 길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은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기에 유능하게 만들지만,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그 유능함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고, 또 하나님이 그 은사를 주신 목적에 합당하게 하나님을 위해서 쓸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은혜와 은사는 무엇을 버리고 취하거나 혹은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은사는 하나님이 섬기도록 주시는 재능과 특별한 하나님의 선물이고, 이것은 그 자체가 올바르게 흘러갈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 은혜의 물에 은사의 배를 띄울 때에 그때에 은사를 주신 그 목적대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고, 우리가 받은 은사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하나님의 경륜에 이바지하게 된다고 하는 것을 사도가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III. 믿음, 소망, 사랑
A. 영광의 지식에 이르기까지 삶
그러면서 사도는 믿음 소망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영광의 지식에 이르기 까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날 동안 우리들이 어떤 방식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가지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방식의 삶을 살 것인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믿음 소망 사랑이 서로 분리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물론 언젠가는 이것이 분리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런데 지금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머물러 있다. 여기에서 사용된 희랍어 “메누모”라고 하는 것은 장시간동안 체류합니다. 장시간동안 체류합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 “메누모”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 동치어가 “굴”이라는 단어이고, 이것이 분사로 “겔”로 쓰여지게 됩니다. 이거는 머무르는 것입니다. 머무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 소망 사랑은 쉽게 흐트러지거나 이러지 않고 이 세 가지가 머물러 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서 만족스럽진 않지만 “항상”이라는 말을 집어넣고 싶어 했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 소망 사랑은 세 가지가 머물러 있다. 이것은 무엇을 가리키나 하면 언젠가는 믿음과 소망 사랑이 분리될 때가 오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이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믿음이 있는 곳에 항상 소망과 사랑이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에 믿음 소망 사랑이 있지 믿음을 배제하고 소망만, 사랑과 믿음을 배제하고 소망만 있고, 소망과 믿음을 배제하고 사랑만 따로 존재하는 이런 식의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 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진정한 믿음이요, 소망이요,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레오 10세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교황이여, 믿음은 우리의 마음을 불같이 뜨겁게 만들어 주는 힘이 있습니다. 이 믿음은 언제나 사랑을 동반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언제나 믿음을 동반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하반 절에서 이야기하는 이 사랑이 언제나 믿음을 동반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의 이 사랑은 인도주의적인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보면 발생론적으로 보면 믿음이 먼저예요. 그러나 일단 주님을 향한 자기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자기를 의탁하는 이 믿음,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창조주의 위대한 진노 아래에 있다는 믿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믿음, 그 분을 믿고 의지할 때 그 분이 나를 구원하고 영원히 생명으로 동행하실 것이라는 믿음,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있는 그 속에는 완전한 신뢰를 동반하고 그리고 이것은 반드시 사랑을 내포해요. 만약에 이런 사랑을 내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사랑이 이런 종류의 까리따스의 사랑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양심의 기능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도덕적 판단 능력이 상당부분 살아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도 인간이 양심의 작용에 의해서 도덕 감각을 가지고 무엇이 경우에 맞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고, 때로는 사람을 향한 깊은 연민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런 인도적인 사랑은 반드시 믿음을 동반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인간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불같은 믿음이 함께 생겨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꼭 이 복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사랑이, 이러한 믿음 소망 사랑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예요. 은혜의 결과. 그런데 놀라운 것은 뭐냐 하면 이렇게 하나님이 은사가 아니라 은혜를 주시면 이 사람의 본성이 변화되면서 이 은혜는 의지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와요. 이 의지의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는데 이 의지의 놀라운 변화의 본질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고 싶은 사랑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혹은 계시가 우리의 이성을 깨운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이 모든 것을 포괄하면서 우리의 의지를 감화시켜서 기쁘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만들어 주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하게 하시는, 마땅히 행할 의무를 이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예요. 그래서 결국 영광의 지식에 이르게 되는 그날까지 성도의 삶은 나그네의 삶이고, 이 나그네와 같이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를 받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믿음과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마물러 있게 하셔요. 이것이 바로 주님의 뜻을 찬란한 햇빛처럼 알게 되는 그 영광의 날에 아직 도달하지 않은 지금의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방식이고 방법입니다.
B. 신망애로 살아감
여기에서 믿음 소망 사랑은 은사가 아닙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이 은혜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은사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고린도 전서 12장의 맥락에서 얘기하는 그런 영적 은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것은 사도가 보여주겠다고 말한 탁월한 길이고, 그리고 이것은 은사와 대비되는 은혜의 결과로서의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소망과 사랑은 문제가 없는데 여기에서 나오는 믿음은 어떤 종류의 믿음일까 하는 의문이 떠오릅니다. 왜냐하면 이미 12장 9절에 은사중의 하나로서 믿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도는 지금 모순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와 대비되는 은혜를 이야기하면서 그 은혜의 결과가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니까 그러면 도대체 이 믿음은 무엇이냐 라고 하는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믿음을 두 종류로 나눕니다. 물론 더 많은 종류로 나누기도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지금 언급하려고 하는 은혜냐, 은사냐는 문제와 관련해서 성경은 이 믿음을 둘로 나누는데 하나는 은사로서의 믿음, 두 번째는 은혜의 결과로서의 믿음입니다. 은사로서의 믿음은 하나님이 아주 특별히 교회에 당신의 뜻을 알리기 위하여 주시는 탁월한 은사 중의 하나입니다. 이 믿음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확고하게 그것을 아주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 속에서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분명한 이해를 갖게 하고, 확신을 갖게 하여 교회를 진리 안에서 세우는 역할을 합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바로 이러한 믿음의 은사를 특별히 받았던 사람 중 한 사람을 마르틴 루터로 꼽았습니다. 어떠한 여건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이 믿음은 평범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믿음을 크게 극대화 시킨 것이라기보다는 은사로서 하나님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주어진 매우 특이한, 아주 매우 비범한 신앙이라고 이렇게 평가했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믿음이 있는데 그것은 은혜의 결과로서의 일반적인 믿음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촉구하는 많은 명령형들, 그리고 믿고 의심치 말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권고, 믿음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사도들의 여러 차례의 격려, 심지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그 믿음, 이것이 은사로서의 믿음을 배제한다고 말할 수 없으나 그러나 11장 전체의 문맥에서 보면 이것은 은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구약 시대부터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바랄 수 없는 가운데 소망을 품고, 그리고 이성적으로는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고 증명할 수 없지만, 그 분의 선하심과 사랑하심 때문에 그 분을 의지하며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시련과 고난을 이기고 마지막 승리하는 위대한 영광의 날까지 믿음을 지켰는가 하는 것을 서사시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믿음으로 나뉘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장 9절의 믿음은 은사로서의 믿음이고, 여기에 나오는 믿음은 일반적인 은혜의 결과로서의 믿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지금은 희미하고 부분적으로 알 수밖에 없지만 언젠가는 영광의 날이 올 것이고, 그때에는 주님의 뜻이 찬란하게 드러나 온전히 알게 되는 때가 오고, 그때는 은사도 필요 없고, 심지어는 이 모든 성경의 계시조차 필요 없게 되는데 그때까지는 이 희미한 계시들을 붙들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깊이 의지하며 살아야 할 신뢰와 확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종종 어떤 사람이 자신의 구원의 문제에 관해서 상담을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혹시 구원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구원의 확신이 예전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졌습니다. 그때에 확신을 갖고 있었던 것이 착각입니까? 아니면 지금 확신을 못하고 있는 것이 비정상입니까? 이런 질문들입니다. 자기가 이미 받은 구원에 대한 확신은 성화에 비례합니다. 그리고 이 성화의 정도는 지금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정도예요. 그러니까 이전에 아주 뜨거운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졌어도 은혜가 식으면 확신이 사라지는데 이거는 결국 믿음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신자가 이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을 아주 심각한 죄요, 불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종교개혁 이후로 더 멀리 보면 기독교가 발생한 이후로 우리들은 하나님을 믿으며 사는 생활을 믿음 생활이라고 표현해요. 신앙생활, 사실 신앙이 다가 아니잖아요. 윤리도 있고 사랑도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믿기만 하면 모든 게 다 끝나는 거는 아니잖아요. 동의를 좀 해요. 그렇잖습니까. 그런데 우리들이 신앙생활, 믿음생활이라는 말로 이 기독교란 종교를 설명하는 이유는 그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사실은 맨 앞에서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언제? 이 나그네와 같은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믿음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르틴 루터 같은 사람이 이신칭의를 새롭게 발견하고 그러면서 이 믿음의 중요성을 이끌어 낸 것은 이 개신교의 정신 전체를 규정해 주는 아주 중요한 특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신을 의존할 수 없다고 하는 완전한 자신에 대한 불신, 그 속에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이 주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다 그 분의 손에 맡기고 던지는 그 믿음, 여기에서 개신교 신앙의 대의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신교에서 처음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성경에 있는 것이었고, 이미 구약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우리 여호와의 종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 기독교 신앙의 거의 본질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화의 상태에 들어가서 하늘나라에서도 어떤 식으로든지 주님을 섬기며 살겠죠. 그리고 주님에 대해서 우리가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거기도 주님을 향한 신뢰가 있어야 하겠죠. 우리는 천상에서의 생활을 믿음 생활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굳이 표현한다면 사랑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에 관해서 지금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는 그날까지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계시에 대한 깊은 신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흐려지는 것은 결국은 은사가 모자라서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은사가 모자라서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에서 물러가게 될 때에 어제는 불같이 뜨거웠던 신앙을 가진 사람이 오늘은 그 신앙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더 탁월한 길, 더 탁월한 길은 은사도 좋지만 은혜를 많이 받고
(찬양)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우리 구주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그러면서 믿음 하나로 주님의 말씀을 확 붙들고 시련과 고난이 와도 이를 악물고 믿음으로 살아가요. 이게 은사를 가지고 살아가는 그 길보다 훨씬 더 훌륭한 길이라는 것을 사도가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두 번째 언급되고 있는 소망은 은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12장 목록에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보면 소망을 누가 주십니까? 하나님이 주시죠. 그래서 이제 시련과 고난이 막 닥치고 시험의 물결 속에 휩싸여. 그러면 제일 먼저 인간의 지성이 혼란해지는 것입니다. 시험을 닥치게 되면 혼란해져요. 시험을 많이 당했는데 이 정신은 또렷하고, 지성에 아무런 흔들림이 없다. 그건 그냥 고생이지 시험이 아닙니다. 시험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Temptation”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시험에 대해서 정의를 내렸습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기 부족한 모든 상태, 이게 시험입니다. 정신 혼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감정이 변합니다. 감정이 정말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께 많이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는데 이 마음이 변합니다.
세 번째는 의지가 하나님의 말씀에 잘 굴복했었는데 이게 흔들리면서 이제는 굴복할 기운이 없고, 그 다음에 언뜻 언뜻 감정으로 마음속에서 콱콱 하고 흔들리는 이것을 따라서 의지가 자꾸 가려고 합니다. 이렇게 모든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무엇 때문이냐 하면 은혜가 사라질 때 이런 일들이 일어나요. 그렇게 살면서 인제 온전히 지치고 어떻게 다시 일어나야 될 줄을 모르는 무기력한 상태를 경험하다가 교회에 와서 말씀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회개해요. 그러면 주님이 어두웠던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내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이고,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인지를 보여주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같은 인간을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세요.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지성에 성령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면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확 주어질 때,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자리에서 탁 일어난 후 집으로 돌아가면 바뀐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전히 가족을 에워싼 환란과 시련 그대로고 예수 안 믿고 그렇게 까부는 남편 그대로 있고, 말 안 듣는 애들 그대로 있고 셋방살이 그대로 있고, 그리고 가게의 빚도 그대로 있고 모든 거 하나 변한 거 없는데 이상하게 이 마음속에서 희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찬양) 마음 괴롭고 아파서 낙심될 때 내게 소망을 주셨으니 인생 살다가 죽음이 꿈같으나 정녕 내 꿈은 참되리라
그러면서 내가 이 시련을 당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표라는 마음이 이 새로운 해석이 생겨나게 되요. 사랑은 언제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다른 해석을 남기는 것입니다.
요번에 교역자 수련회를 갔습니다. 교역자들이 쉬는 시간에 소요학파와 운동파로 나눠서 소요학파는 저와 함께 산책을 하고, 운동파는 발톱이 빠지도록 축구를 하는 게 전통입니다. 근데 그 중에 교역자 한 사람이 두 골을 넣어서 그 팀이 이기는데 이바지 했대요. 그 이야기를 하니까 옆에 있는 사람이 “그런데 목사님 저 전도사가 두 골 넣은 건 사실이지만 자살골 한골을 넣었습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한골 넣은 겁니다. 그 얘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옆에 있던 어느 자매가 얘기합니다. 부인입니다. 부인이 뭐라고 하냐 하면 “여보 그럼 당신이 모두 세 골이나 넣은 거야?” 이게 사랑입니다. 이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두 골은 상대방에 집어넣었는데 한골은 자기 골대에 집어넣었다고 그래서 결국 한골 밖에 못 넣었다고 그러는데 이 아내는 그게 아니라 어느 골이든 무슨 상관이 있어. 슛을 쏘고 골인이 됐다는 게 중요하지. “그러면 당신이 세 골이나 넣은 거야?” 그래서 다 뒤집어졌습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다른 해석의 성향입니다. 다른 해석의. 설교했습니다. 이미 여러 달 전에.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사랑은 신뢰하고 다른 해석을 통해서 그를 믿어주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받으면 이렇게 현실에 대한 다른 해석이 나오면서 이 안에서 소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욥이 대표적인 인물이었죠. 인간의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모든 시련을 한 번에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친구들로부터 치열하게 비난을 당하고 있을 그때에 말로서는 어떻게 그들의 이론을 반박할 수 없었을 그때에 그는 오히려 조용히 하나님 앞에 시선을 그 분의 보좌에 고정하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은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연단하신 후에는 정금과 같이 나아오리라”고 했습니다. 이게 바로 은혜가 우리에게 주는 소망의 은사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떨어지면 절망하게 되는데 이 절망이 키에르 케고르가 얘기했던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입니다. 키에르 케고르의 이 결론은 성경적입니다. 많은 증거가 있지만 하나만 얘기해 볼까요? 욥이 졸지에 재산과 모든 소유와 자녀들까지 잃어버리고 이제는 몸까지 저주를 받아서 온 몸에 헌데가 나서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믿음이 있는 이 욥은 주신 이가 주님이시니 취하시는 이도 주님이 아니시겠느냐 하며 그 분의 주권을 의지했지만 은혜가 모두 사라진 이 아내는 절망을 했고, 절망을 하며 남긴 마지막 말이 무엇인지 압니까?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어버리십시요” 이게 바로 절망이 가라고 하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그래서 키에르 케고르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 인간이 지을 수 있는 최고의 죄와 악이 절망하는 것, 특히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종종 신자라고 불리는 사람도 자살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절망이 극대화 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우리에게 소망을 주고 은사를 많이 가지고 절망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 은사 없어도 이 은혜 안에서 소망을 품고 하나님 앞에 사는 게 훌륭한 사람입니다.
한때 제가 전도사 생활을 할 때 정말 나를 많이 울리는 찬송이 있었습니다. 고난이 겹치고 시련이 에워싸고 미래의 나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는 불안 속에 있을 때마다 불렀던 찬송입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주저앉으면서 걸어온 모든 길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아래 있어서 지금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믿음을 따라 그 뜻대로 살려고 할 때에 이 모든 것들이 협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고 하는 이 믿음은 고난을 받으면서도 미래에 대해서 소망을 갖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치 있는 것입니다. 믿음하고. 당연히 여기에 사랑은 은사가 아닙니다. 물론 이 사랑도 우리 자체 안에서 끌어 올려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셔야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야지만 우리 안에서 생겨난다는 점에서 볼 때에는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모든 게 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고유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뭐라고 했죠? 죄. 오직 죄만이 고유한 의미에서 우리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나머지는 다 주님께 빚진 것입니다. 모두 주님께 빚진 것입니다. 누가 그랬대요.
어느 과학자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말하지 마라. 우리 과학도 흙으로 사람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보여드리기로 했대요. “하나님 당신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죠. 우리가 드디어 당신의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이제 제가 보여드리겠습니다.” 과학자가 막 흙으로 사람을 빚으니까 하나님이 그러셨대요. “내 것 쓰지 말고 해봐. 그것도 내거야. 내거 쓰지 말고 해봐. 내 거 쓰기 없기” 모든 게 하나님께로부터 우리들이 받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랑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당연히 그래서 누구도 자기가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자랑하면 안 돼요. 왜? 그건 뭐냐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자랑해야죠.
그런데 이 사랑은 예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는 방법이 셋이 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첫째로는 창조 당시에 하나님이 사랑, 그 자체를 우리에게 주셔서 그래서 우리를 사랑의 사람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내가 ‘원애’라고 불렀습니다. 지금은 그런 용어 많이 안 쓰지만. 원애라고 불렀습니다. ‘original love’ 입니다. 사랑입니다. 원애. 그런데 이러한 사랑은 처음에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정말 순수하게 질서대로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제일 먼저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질서에 따라서 사물들을 사랑할 수 있는 균형 잡힌 사랑이었다는 말입니다. 이것들이 죄가 들어와서 깨지면서 이 사랑이, 이 질서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이 모든 사랑의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자기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세상 사랑을 이야기 하는데 세상사랑은 자기 사랑의 연장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이냐, 자기 자신이냐 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간에 그렇게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그게 첫 번째 사랑입니다.
사랑이 다 깨져요. 사랑의 크기가 줄어든 게 아니라 사랑의 질서가 무너지면서 방향이 하나님에서 사람으로 확 바뀐 것입니다. 거기에서 인간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존재거든요. 우리가 자연적인 질서만 거슬려도 몸에 이상이 오고 이 질병이 생기게 되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정하신 사랑의 질서가 있는데 그 질서를 거슬러서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그 사랑 때문에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여 온 인류 모두가 서로를 대하여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하면서 살게 하고 싶은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주님이 인류 전체를 하나의 가족으로 만들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그 죄 때문에 무너진 이상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하여 실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한 핏줄입니다. 한 가족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 다 깨져버렸기 때문에 인간은 그 비참함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때 하나님이 두 번째로 사랑을 주시는 방법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중생을 통해서 그 사람 속에 사랑의 성향을 심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고 회심하는 그 즉시, 이 마음속에서 일평생 사라지지 않는 하나의 성향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많으면 이 사랑이 활활 타올라요. 그래서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도 내가 주님만 마음껏 사랑할 수 있으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 확신이 이 마음속에서 생겨나요. 언제나 이것이 유지되는데 신앙에 따라서 사라지기도 하고 유지되기도 하고 그래요.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정신의 능력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사랑의 성향의 방향을 바꾸시는 것입니다. 올바르게 자기가 아닌 올바르게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도록 사랑의 성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사랑의 크기가 변한 게 아니라 예전에 하나님을. 회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예전에 사랑하던 많은 것들에 대한 실증이 생겨나요. 즉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회심하기 전에 팝송과 샹송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특히 팝송을. 그래서 그때 어렸을 때 영어도 좀 했겠다. 그거 번역해서 마음속에 읊조리는 오늘 성경구절 외우듯이 벽에다가 새카맣게 써 놓았습니다. 그런데 회심한 그 다음 날부터 그 곡조가 싫은 것입니다. 그거를 내가 멀리 해야겠다 그러는 게 아니라 완전히 그 곡조가 싫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성향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세 번째 주시는 방법이 있는데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심으로 성령의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우리를 감화시켜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랑의 감화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이 세 가지 방식으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미 신자가 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충만하게 역사하는 이 방법이 결국은 세 번째의 방법으로 대게 집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많이 받을수록 이 안에서 감동이 일어나면서 그래서 나를 사랑하던 사랑을 버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 안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spiritual하다는 것은, 영적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은혜의 비밀을 많이 가져서 그래서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인격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 그게 영성에 대한 최고의 증거입니다.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이제 이 위대한 13장 끄트머리에 와서 결국 우리는 무엇을 하나님 앞에 간구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죠. 고린도 교회가 이런 저런 은사를 많이 받았는데 그런 은사를 받았다는 거를 비난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 받은바 은사들이 이 사랑들이 충만한 은혜가 있을 때에는 이 받은바 은사들이 모두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데 이바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사라지고 나니까 이 모든 은사들은 서로 갈등과 충돌을 일으키면서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예수 믿기 전에 가졌던 정신, 파당을 만드는 분쟁의 정신, 세속주의적인 정신, 부도덕한 정신들이 감염이 되면서 온통 문제들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실제로 봤습니다. 자기가 병을 고치는 특별한 은사가 있다고 하면서 기도해 주고 돈을 받고 안주면 따라와서 당신에게 저주가 있을 것이니까 집을 팔아라, 통장을 깨라 이렇게 요구하는 사람을 난 내 눈으로 수없이 봤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그 은사를 진짜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특별한 은사를 받은 그 사람이 은혜가 떨어지면 그 은사를 그렇게 자기 돈벌이를 위해서 사용을 합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하나님이 은사를 싹 거두시면 될 텐데 하나님은 그렇게는 또 안하세요. 결국은 사도가 말하는 것은 이 은사를 폐기하자는 게 아닙니다. 폐기하자고 하는 거였으면 왜 14장에서 다시 한 번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도록 하라 이렇게 다시 또 은사를 강조했겠습니까? 폐기하자는 게 아니라 이 모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은사를 주신 목적대로 사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가 우리에게 있어야만 믿음으로 소망을 가지고 사랑으로 살 수 있다. 이것은 은사 자체에서 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서 오는 것이다.
IV. 결론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에 지난날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여러분에게는 은혜의 추수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가 내 마음에 있어서 고난도 이기고, 형언할 수 없이 내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기쁨 때문에 나 자신 다 주어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봉사하여도 아깝지 않은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이 여러분을 그렇게 살게 했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불만족과 많은 불행이 이 세상의 자원의 결핍 때문에 오는 것이고, 이것들이 채워지면 우리는 평안하고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이 모든 우리의 불만족과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은 그리스도 없는 삶,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진 삶을 사는데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그렇게 은사를 열렬히 구했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얼마나 더 사모하여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은혜에서 멀어진 여러분의 영혼의 처지 때문에 눈물 흘리신 적이 있습니까? 왜 나의 마음은 이렇게 말라깽이가 되어 버렸는가? 내 마음속에 흐르던 주님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의 그 은혜의 강물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지식과 교리와 신학의 지식의 파편들은 예전보다 더 많이 남아있지만 왜 나의 마음속에는 차오르는 희열,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동 그리고 내 마음속에 밀려드는 사랑의 물결 이런 것들이 사라졌을까? 무엇 때문일까? 하는 그 어떤 반성이 여러분에게는 없습니까?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같이 주님의 은혜에 목말라 합니까? 최근에 여러분의 기도의 시간 중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하나님 나의 심령은 마른 장작과 같고, 그리고 나의 심령에는 뼈만 남았습니다. 하나님 나를 죽이시던지 은혜를 주셔서 살게 하시든지 주여 나에게 은혜를 주시옵소서.” 눈물 흘리며 은혜를 구한 적이 언제입니까?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의 가장 탁월한 표징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그리워하고 그 은혜를 의지합니다. 그래서 은혜 없이 살기보다는 은혜와 함께 죽기를 바라는 것이 성도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하늘 높이 계셔서 당신이 하시기에 가장 좋아하는 일이 있으십니다. 그것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 달 동안 빠짝 가물어서 아예 어디 가보니까는 벼를 심었다가 다 갈아 엎어버리더라구요. 그리고 밭작물을 심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틀 동안 단비가 펑펑 내렸습니다. 돈으로 몇 천 억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단비가 전국에 쏟아질 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러니까 온 지면의 풀들과 곡식들이 힘차게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되셔야 합니다. 이 은혜로서 주님을 믿고, 소망하며 사랑하며 사는 거 말고 또 다른 어떤 탁월한 길이 있겠습니까? 어린 아이처럼 이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며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30.사랑은 영원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로써 저는 이 성경의 위대한 장, 고린도전서 13장을 30주 동안 설교했고, 오늘로서 이 13절 마지막 하반 절을 설교함으로써, 이 위대한 성경에 대한 장에 대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와 같이 “지금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머물러 있을 터인데 그것들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우리말 성경에서 번역된 “그런즉”이라는 말이 희랍어 성경에 “지금은” 이라고 나와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드렸습니다.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주님의 뜻을 아는 때이고, 전체를 보는 대신 부분으로서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해야 하는 한계를 가진 때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희랍어 성경에 ‘μείζων δὲ τούτων ἡ ἀγάπη’라고 되어 있는 이 구절은 직역을 하자면 “그런데 그것들 중에서 더 탁월한 것은 그 사랑이다” 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 중에서 더 탁월한 것은 그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II. “그 중 제일은 사랑이라”
A. 불완전한 인도 안에서 삶
우리는 여러 주에 걸쳐서 불완전한 인도가운데 살아가는 성도의 삶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 인간들에게 알리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 은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모든 은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온 것이고, 그 중에서도 특별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식과 관련된 은사, 예언, 방언, 통역, 믿음, 지식의 은사 등등은 교회를 교회되게끔 세우는데 있어서는 없어서 안 될 매우 중요한 은사라는 사실을 여러 번 강조하였습니다. 그 은사들을 붙들고 교회는 마치 어둠 속을 한 발짝, 한 발짝 걷듯이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에 도입된 신약 구속의 경륜을 이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직접적이고 신비하기는 했으나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전달함에 있어서 미래에 나타날 영화의 때에 비하면 그것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한 것이었고, 부분으로 아는 것처럼 한계를 가진 것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의 계시가 완성되고 난 뒤 이 은사들은 종료되었거나 혹은 의미를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완성은 이 은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명료하고 포괄적인 것이었지만, 그러나 이것도 영화의 때에 우리가 주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에 비하면 희미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 완성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지성의 부지런한 탐구를 필요로 할 뿐 아니라, 또 과거에 이 성경을 대면하였던 많은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의 해석의 결과물들을 참고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서 모두 성경의 뜻을 바르게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매순간 성경을 대하는 우리에게 비추어 주시는 성령의 조명과 인도를 따라서 이 모든 것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믿고 살아가기에는 충분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모두 알았다고는 말할 수 없으니 영화의 때에 우리가 우리의 영혼으로 직접 하나님에 관하여 알게 되는 것에 비하면 이것 역시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고 부분으로 보는 것처럼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놀라운 은사를 이 초대교회에 주셨고, 또 우리에게 성경을 아는 탁월한 지식과 신학적인 빛을 우리에게 주셨으나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덜 의지하게 만들지는 않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 12장에서 더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한 바로 그 길입니다. 곧 이런 은사와 하나님의 뜻을 아는 하나님의 수단들이 많이 주어지면 주어질수록 오히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의지하며 살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향해 가지고 계신 탁월한 객관적인 은혜 즉,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들에게 한없는 자비를 베푸시는 그 구원의 은혜는 주관적인 은혜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진리를 허공에 쳐다보는 사람 없이 매달린 별처럼 만들지를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진리가 인간의 마음속에 받아들여지고 작렬하는 불꽃처럼 그 작용을 일으켜 죄인들을 변화시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모든 과정을 통하여 진리의 영광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러한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객관적인 증거를 각 사람 마음속에 은혜의 작용으로 나타내심으로써 입증하사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게 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은혜의 작용 없이는 그 어떠한 은사라고 할지라도 본래 그 은사를 주신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게끔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니 원래 이 은사는 배와 같아서 넘치는 은혜의 강물 위에 띄워져 흐르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B. 은혜작용과 신망애
여기에서 그러면 사도가 무엇 때문에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지금은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말했을까 우리는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생각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과 믿음 소망 사랑의 관계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은혜 “카리스”라고 할 때에 이것은 크게 세 가지 용례로 사용이 됩니다. 첫째는 비천한 죄인들을 위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객관적인 자비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구원의 길로서 은혜라고 제시됩니다. 성경에서 보다 널리 쓰이는 용례가 바로 세 번째인데 이것은 바로 신자의 마음 안에서 작용하는 하나님 사랑의 강화예요.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은혜를 곧 성령의 다름이 아니다 라고 못 박아 버렸습니다. 이 은혜의 저자는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이 은혜는 신자의 마음에 불러 일으켜지는 거룩한 감동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우리의 마음에 거룩한 감동으로 남아 있을 때에 이 은혜는 신자의 마음 안에서 삼위일체적인 작용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신자의 마음속에 임하게 되면 이 하나님의 은혜는 삼위일체 적으로 신자의 영혼과 온 마음에 작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은 지성에, 소망은 감정에, 사랑은 의지에 우선적으로 관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좀 더 설명을 드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자체가 믿음, 소망 사랑으로 나눠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은 소망의 나타남이고, 소망은 사랑의 발현이며, 사랑은 믿음과 소망의 또 다른 측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곳에 소망과 사랑이 없는 은혜의 경험은 적어도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이 소망의 사람들이 될 수 있고, 그 소망 때문에 믿음을 따라서 고난도 당하고 시련도 견디는 것입니다. 사랑은 의지에 관여하지만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믿게 만드는 성향이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동안 그 사람은 소망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자주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지만 한 인간이라도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절망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이는 마치 성부, 성자, 성령이 한 하나님이시지만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것과 아주 유사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원래 성부 한분만 계셨지만, 그 성부에게서 그 성자가 나시고,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 나오십니다. 영원 전에 이 성부, 성자, 성령이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지만 그러나 그 세 위격 모두 한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꼭 같이 믿음도 은혜의 작용이고, 소망도 은혜의 작용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은혜를 받으면 믿음이 생기고, 은혜를 받으면 절망밖에 없어 죽고 싶던 마음이 변하여 희망을 갖게 됩니다. 믿음도 소망도 은혜의 작용의 결과이지만 이 은혜의 작용의 본질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고, 성부와 성자는 성령이 아니시지만 세 위격이 하나의 본질로 세 인격을 가지고 서로 교통함으로써 서로 사랑이신 것처럼 또한 신자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신자의 마음에 같이 있어서 그래서 믿음 때문에 소망을, 사랑 때문에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의 은혜 작용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에 오늘 사도는 그것들 중에 더 탁월한 것이 그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사도는 이 위대한 13절 전반부에서 ‘메노’(μένω)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머물러 남겨져 있는 것이다. 언제? ‘누니’(νυνὶ) 즉, 영화의 때와 대비되는 지금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머물러 남겨져 있다 이 얘기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여 영광스러운 몸을 덧입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영혼으로 직접 뵈옵고 그 분의 뜻을 분별하게 되는 그때에는 이런 순례자의 길에서 은혜와 함께 우리 안에 머물러 있던 믿음, 소망 이런 것들은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그때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순례자의 길에서 우리들이 은혜를 받으면 믿음이 생겼던 것처럼, 이 순례자의 길에서 은혜를 받으면 소망이 생겼던 것처럼 그런 식으로 그 영광의 나라에서 이런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사랑은 지금과 꼭 같은 방식으로 영화의 날에도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믿음, 소망, 사랑이 함께 있지만 그때에는 사랑이 제일이라, 그때에는 사랑만 남기 때문에 그 중에 가장 탁월한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III. 사랑은 영원히
그러면서 우리는 이 위대한 장을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하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속에 주신 이 까리따스의 사랑도 영원하다는 이 위대한 사실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기게 되는 것입니다.
A. 영원으로부터 온 사랑
원래 이 사랑은 영원으로부터 온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사랑이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홀로 존재하셨다면 사랑할 대상이 없으심이 사랑일 수 없으셨겠지만 하나님은 이미 영원 전부터 하나님은 아들과 함께 성령과 함께 계셨고, 그래서 삼위일체 안에서 이 삼위는 서로의 완전성으로 말미암아 완전하신 이 삼위를 서로 사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서 사랑으로 말미암아 성자가, 그리고 그 성부와 성자에게서 사랑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나시고, 성자는 하나님의 이 위대한 사랑을 보여주고, 구속의 길을 열어주셨고 성령은 바로 이 사랑을 전달해 주는 매개자가 되셨던 것입니다. 이 삼위 안에서 하나님은 서로 교통하시는 사랑과 생명으로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고, 이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이 바로 이 세계를 창조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위격적 사랑,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 있는 이 위대한 사랑은 곧 타자를 향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향한 자기 사랑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 창조세계를 창조하도록 존재하도록 만들었고, 특별히 하나님은 이 창조세계 안에 유일하게 영혼을 가지고 당신처럼 당신과 사랑하고 사람들과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인 인간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감히 온 땅과 만물위에 지극히 높으신 위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낮고 비천한 인간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그들에게 삼위 하나님이 서로 사랑하신 것 같이 당신도 사랑을 베푸시고 그들로 사랑하게 하셨으며 그들이 서로를 서로로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마치 하늘에서 하나님이 사랑하셨던 것처럼 이 땅에 있는 인간들도 하늘에 있는 그 사랑을 구현하며 하늘로부터 온 사랑 때문에 땅에서 서로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다시 하늘을 사랑하는 하나의 완전한 사랑의 세계를 이루기를 의도하셨던 것입니다.
B. 시간 속으로 온 사랑
1. 인류 속으로 온 사랑
이러한 영원으로부터 온 사랑이 시간 속으로 온 사랑으로 나타나셨으니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고, 당신의 사랑과 지혜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을 당신 닮은 사랑과 지혜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창조의 목적을 구현해 가도록 인간을 지으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탁월한 지혜가 필요했기 때문에 인간에게 지성의 능력을 주셨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 인간들에게 사랑이 필요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들에게 사랑을 불어넣어 주셨고 서로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하나님처럼 사랑하고, 하나님처럼 지혜롭게 이 모든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피조세계를 다스림으로 하나님이 이 모든 우주와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을 구현해 가고 그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최고의 행복을 누리도록 인간을 배려하셨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전부인 존재로 창조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주님께서는 처음 인간들에게 베풀어 주셨고, 그래서 하나님이 한 사람을 한 사람의 갈비뼈를 취하여 만드셨고, 모든 인류를 한 몸으로 빚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는 이 고백은 아담과 하와 사이에만 오고갈 고백이 아니라 태어난 모든 인류 사이에 통용될 고백이 되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를 사랑함으로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안에 한 가족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한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사랑을 잘못 사랑했고, 사랑하여야 할 하나님은 버리고 사랑하지 말아야할 자기를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도 모든 인간도 굴복시켜 자기를 사랑하는 노예로 삼고자 하였으니 이는 사랑할 능력을 주신 하나님에게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악에 대한 벌로 말미암아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비뚤어진 사랑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존재가 되어서 사람이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위대한 선물인 사랑 때문에 인간은 불행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번 우리 자신과 우리의 이웃을 돌아보십시오. 모든 인간의 불행과 고통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물질의 결핍이나 건강의 부족이나 지식의 모자람 때문에 이런 불행이 생긴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넘치는 사랑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탐욕과 어리석음 그리고 자기의 뜻을 이루지 못하는 이 세상의 현실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들이 인간을 끊임없는 불행의 구덩이로 몰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분노는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반응이고, 어리석음은 올바른 것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잘못된 것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찾아오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이러한 이치들을 이 세상 종교에서도 어렴풋이나마 깨달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이교인 불교도 이 탐진취를 그토록 미워하는 것입니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이 세 가지가 인간을 끊임없는 불행의 늪으로 끌고 가는 업보라고 믿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성경의 진리를 희미하게나마 발견한 결과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수도를 통해서 자기 절제와 그리고 끊임없는 반성을 통해서 어느 정도 인간의 모습을 회복해 갈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러 인간에게 본래 주신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을 정도까지 인간성을 회복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의 힘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났으나 하나님을 올바로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여 본래 자기를 지으신 목적으로 돌아갈 수는 도저히 없는 이 인간들을 위해서 당신의 최고의 사랑을 보이셨으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서른 세 해 동안 이 세상에 사시면서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 사셨고 그들에게 듣기만 하던 하나님의 사랑을 당신의 온몸으로 보여주셨으니 이는 어느 교부가 말한바 무한하신 하나님이 한 뼘의 크기로 우리 인간들이 볼 수 있도록 줄어드신 것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이실 때에는 우리가 감히 그분을 알 수 없었지만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의 몸을 입고 종의 형체를 가져 인간들과 같이 되어 멸시와 욕을 당하며 죄는 없으시지만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과 아픔을 경험하면서 사신 그의 생애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 같은 죄인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을 보여주셨을 뿐 마지막 한 가지 일을 하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다만 그의 영광과 행복을 바라보기만 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모든 결박을 깨뜨리고 우리를 지복의 나라로 인도하여 생명이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다시 맺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같은 더러운 인간이 보좌에 이르는 새롭고 산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찬양)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걸음씩 나가네
2. 교회 속으로 온 사랑
흠 없고 죄 없으신 그 분이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당신의 몸에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보좌에 이르는 휘장은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고,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 구원의 공로를 의지해서 인간의 모든 의의 신발을 벗어버리고 맨발로 주께서 죽으심으로 뿌리신 보혈의 길을 걸어 휘장을 지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어 그 분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이 십자가의 사랑을 안 사람들로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 이 땅에 교회를 이루게 하시고, 바로 하나님은 그 교회 속으로 이 위대한 사랑을 도입하셨던 것입니다.
멸망 받을 죄인의 구원은 바로 그 사랑 때문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형벌 때문에 무서워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살아온 나의 인생의 날들이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철저히 배반하며 살아온 무도한 삶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원통하여 그 사랑 앞에서 뉘우치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회개라면 중생은 그렇게 할 능력이 없는 인간에게 영적인 생명을 주시는 것이 바로 중생입니다. 성화는 그렇게 알게 된 지식, 그렇게 알게 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지식도 자라고 사랑도 성장하는 그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예수를 믿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구원의 감격을 누렸지만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평탄한 모든 날만 있을 것임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믿고 살아온 우리의 인생의 길에는 여전히 시련과 고난이 있었고, 때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시련과 고난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이런 사랑을 알고 이 지혜와 사랑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두신 자리에서 사명을 따라 살기 위해서 고난과 역경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만약 그런 시련과 고난 속에서 우리 홀로 외톨이로 남았더라면 어떻게 이길 수 있었을까요? 나를 위해서도 그 고난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손들고 십자가 앞에 나왔는데 남을 위해서 그런 삶을 매일 살 수 있다고요? 가당치 않은 말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 부어주신 그 사랑을 그의 몸된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고난과 역경이 올 때마다 우리는 은혜를 간구하였고, 주님이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실 때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하였습니다.
(찬양)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그것이 바로 은혜였습니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 믿음을 주었고, 그 은혜가 우리에게 절망 중에 소망을 주었고, 그 은혜가 바로 사랑으로 이 모든 시련들을 이기며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많은 선물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원래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들인데 주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충만할 때에 이 모든 것들은 본래 하나님이 그것을 주시는 목적대로 쓰였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을 붙들고 있는 동안 하나님이 주신 돈 때문에 여러분은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넘치는 동안 주님이 여러분에게 높으신 지위 때문에 여러분이 교만해 질 수는 없었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을 때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지식 때문에 무지한 사람들을 멸시하는 일 같은 무도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오직 그 모든 것들보다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었고, 또 그 은혜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가 사라져 버리자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축복으로 주신 모든 것들은 여러분을 찌르는 칼이 되어 버렸습니다. 돈 때문에 세상 사랑을 알았고, 건강 때문에 하나님 의지하지 않는 교만을 배웠습니다. 지식 때문에 지식이 없는 사람들을 멸시하며 우월해지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그래서 주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많은 것들을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기보다는 자기를 섬기는데 사용하여 주님의 그 모든 사랑이 여러분 자신 안에 소비되어 버리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런 한계를 가진 사람들임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교회에 진리와 은혜를 주셔서 어두운 마음에 이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경륜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이 사랑을 주셔서 은혜가 없을 때에는 주 앞에 굴복할 수 없었던 사람을 복종시켜 하나님 앞에 살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사랑을 교회 안에서 서로 나눔으로써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시고, 그리고 우리가 관심 갖지 않고 있는 이 모든 이 세상의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이상적인 계획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사랑하고 거짓을 치를 떨듯이 미워하지만 그 이유 때문에 이교도들을 저주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이교의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오류와 거짓입니다. 우리는 악을 미워하고 범죄를 혐오하지만 죄인을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죄와 거짓의 피해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모본을 이 세상에 계셨던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배웁니다. 죄는 사랑하되 죄인은 미워하는 이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혀온 이 여자를 용서하시면서 하나님 안에 있는 이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으나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에게 머무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고, 아버지께 사랑을 더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 자신이 평화의 도구가 되셨던 것입니다.
(찬양)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C. 영원 속으로 돌아가는 사랑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사랑합니다. 사랑하던 우리의 지체들은 늙어가고, 우리의 마음으로 너무 사랑하던 지체들을 이 생애에 생명 건너 죽음의 강 건너편으로 홀로 떠나 버려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시간 속에서 사랑하나 우리는 이 사랑이 시간에서 머무는 사랑이 아니라 영원을 향해 머무는 것인 줄 압니다. 지금 여기에서는 사랑이 믿음과 소망을 동반하며 머물러 있지만 그때 그 영광의 날에는 믿음과 소망을 동반하지 않고 사랑은 지금 여기 있는 것처럼 거기에서도 영원히 그렇게 있을 것이기 때문에 사도는 믿음의 가치를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면서도, 소망이 주는 유익을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그것들 중의 제일이 사랑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시간 속에서 누리고 있는 이 사랑은 영원으로부터 온 사랑이고, 동시에 시간 속에 있는 이 사랑은 결국 영원 속으로 돌아가는 사랑입니다.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과 대비되는 육욕적인 사랑인 ‘꾸삐띠따스’(Cupiditas)는 시간과 자기 안에서 소비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아가페의 사랑은 모두를 사랑하나 인간 누구에게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사명을 사랑하나 그 사명에서 멈추는 법이 없고, 교회를 사랑하나 교회가 그 사랑의 최종적인 소비처가 아니라 영원이신 한 분 하나님을 향하여 흘러가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 자신에게서 나와서 이 세계와 관계를 맺고, 이 시간이 세계를 훑으며 마지막 영원이신 당신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하나님의 자기 회기적인 사랑에 우주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라를 뜨겁게 사랑하는 애국자는 적국의 원수까지 사랑할 수 없습니다. 가족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가족을 해치는 원수까지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당신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 소망은 영원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사랑과 함께 있지만 막상 영원 속으로 돌아가면 믿음 소망은 더 이상 그리로 다다르지 못할 것이니 믿음은 실현되고, 소망은 성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여기에서 영원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고유한 영원을 시간 세계 안에 미리 앞당겨 지금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2000년 전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 때문에 우리들이 아픔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렇게 영혼이 가진 초시간적인 성격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영원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들만이 이 세상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알고 영원에 대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만이 시간이 얼마나 무의미하며 동시에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영원을 통해서 시간을 올바로 알게 되는 지혜를 알게 되고, 무한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유한의 의미를 파악하게 되는 것이니 유한과 무한, 시간과 영원은 정반대의 것이지만 정반대의 것을 통해서 또한 정반대의 것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고,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만큼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을 뿐이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아는 것만큼만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 안에서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에게 교회를 주시고, 이 교회 속에 저희를 두신 것은 우리가 이 진리와 성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이 세상사는 동안에 구도의 눈빛이 흐려지고, 우리의 마음이 부패한 사이에 복종될 때마다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우리를 일깨워 진리로 돌아가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하여 연약한 우리들을 하나님이 이 세상에 흩어져 살지 않고 한 교회의 지붕에 모여 결함이 많은 목회자의 도움을 받으며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신앙생활 하게끔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IV. 결론: 영원한 사랑의 힘으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이 위대한 장을 초라한 설교로 30회 동안 증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가르쳐주신 것을 다 전하지도 못하였고, 내 마음에 있는 것을 여러분에게 다 알리지 못한 30번의 설교였으나 이 설교를 마무리 하면서 나는 여러분과 함께 깊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회개하게 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우리에게서 소비하고 버리라고 주신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가슴에 품으셨던 그리스도가 자기를 모두 버려 당신의 살을 찢어 우리의 입에 넣어주시고, 당신의 피를 흘려 우리의 입술을 적셔 주신 것처럼 우리도 그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는 자기를 찢어 자기를 흘려 이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가 주님이 자기를 버리셨던 것처럼 우리도 사랑으로 자기를 버리라고 우리에게 하늘의 모든 좋은 것을 주셨건만 우리는 주님이 사랑하신 그 사랑의 목적에 벗어나서 육욕적인 사랑으로 하나님의 이 사랑을 소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섬기라고 주신 많은 은사들은 주인 노릇하는 데에 사용되었고, 남을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맡기신 많은 달란트들은 나를 위해서 소비하고 나를 기쁘게 하는 데에 낭비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끝없는 탐욕으로 우리를 기쁘게 하기 위한 자원들을 모으는데 혈안이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입으로는 진리를 말해도 마음으로는 진리로부터 멀어져 어둠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진리는 우리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나 허공중에 흩어져 사람들의 마음에까지 다다르지 못했고, 주님이 우리를 빛으로 부르셨으나 우리는 불 꺼진 등불이었으며, 소금으로 주님은 우리를 부르셨으나 사실은 맛 잃은 소금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맨 처음 우리의 어두운 지성을 찢고, 빛보다 찬란한 복음의 진리가 비췄을 때 자기에 대한 사랑으로 돌처럼 굳어졌던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으로 녹이시사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마음에 부어주셨을 때 우리는 어린 아이처럼 주님을 따랐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감격했고,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원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그리고 이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어두움 속에서 사는 사람들, 이 사랑이 없기 때문에 죽음 속에 있으면서도 사실은 생명이 아닌 것들 때문에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많은 사람들에게 목이 터지도록 외치고 싶었고, 우리의 손가락을 잘라 혈서라도 써서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죄악이 우리를 삼키고 우리의 영혼이 갈 길을 잃어버려 우리의 마음은 그 본래의 아름다운 사랑으로부터 상당히 멀어졌고,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랑은 현저하게 우리의 마음속에 사라져 버려 하나님의 복음을 들으면서도 우리의 삶은 복음적이 아니하였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셨던 십자가의 길은 우리들이 입술로는 자랑하는 길이 되었지만 우리도 따라가고 싶지 않은 그런 길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창궐한 비극의 궁극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더 많이 과학이 발달되고 물질문명이 융성해지게 되면 인간의 슬픔은 끝날까요? 이 모든 고통들을 종식될까요? 아닙니다. 인간의 고통의 원인은 수없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이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이 사랑을 가지고 이 세상에 돌아가 주님이 주신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허비하셨던 것처럼 자기를 버리고 온전히 허비함으로 내가 하나님 때문에 행복해졌던 것처럼, 또한 나도 나 때문에 그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그 안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은 여전히 어둠속에 있고, 물질은 많으나 참된 사람이 없어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의 본질이 아닌 것들에 목 메이며 살아왔던 많은 날들의 허욕과 어리석음,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분노와 미움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당신을 모두 버려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버려 고린도전서 13장 14절부터 새롭게 써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연필로 쓰는 성경은 13절에서 위대한 장이 끝났으나 이제 여러분은 눈물로, 피로, 그리고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그 은혜 때문에 우리 자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써내려가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을 통해 주님이 우리에게 주셨던 말씀 “누구든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했던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 이외의 우리 마음에 있는 모든 우상을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의 본을 따라 죽기까지 이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사랑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