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회복함
(2016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6년 10월 10일 - 10월 14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7년 1월 7일
목 차
1. 사랑과 사명(요 21:15-17) 2016.10.10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3
2. 사랑과 힘(시 18:1-3) 2016.10.11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8
3. 충성과 사랑(계 3:7-9) 2016.10.12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12
4. 헌신과 사랑(마 26:6-13) 2016.10.13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17
5. 재물과 사랑(마 6:24) 2016.10.14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22
사랑을 회복함 1 (2016.10.10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사랑과 사명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 21:15-17)
녹취자: 김세나
새벽 시간마다 이제 주님을 향한 사랑의 회복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요한복음 21장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인 동시에 사복음서 전체의 마지막 장이고, 또한 사도행전과 복음서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이기도 합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사적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사도행전은 이제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후에 이 땅에 있는 사도들과 교회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1장은 어떤 면에서 한 사람을 위해서 기록된 성경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가 누구냐 하면 베드로입니다. 만약 21장이 없었다면 상당히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서에서 사도들의 우두머리 격인 제자로서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 하고 실패한 베드로가 사도행전 1장에서부터 새로 세워지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베드로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제자들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하고 배반을 하였는데 그들도 똑같이 지도자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요한복음 21장은 베드로를 겨냥하고 있지만 그를 대표자 삼아서 그를 회복시켜 주심으로써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사도들이 사도행전에서 지도자가 어떻게 될 수 있었는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더 놀라운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실패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회복시키시고 교회 역사에 위대한 지도자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일반적인 정의의 감정에 비춰 본다면 모든 제자들이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목숨이 아까워서 도망쳤을 때 제자 한 사람이 남아서 온갖 수모와 고통을 다 당하고 마지막엔 순교 직전까지 갔었는데 천사가 도와서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그렇게 해서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그 사람이 사도행전 첫 장에서 예루살렘 지도자로 등장을 하였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던 제자들은 다 죽어버리거나 아니면 살아나서 그 사람 밑에서 말하자면 부하가 되어 활동하였더라면 얼마나 은혜로운 성경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참 놀라운 지혜 속에서 이렇게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활동 사이에 있는 마지막 한 장 밖에 안 되는 요한복음 21장에서 복음이 얼마나 위대한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실패한 사람을 사용하셔서 예루살렘 교회의 위대한 일꾼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 성경 구절을 아주 깊이 만난 것은 한 12-13년 전입니다. 캐나다에서 집회에 불렀는데 그 당시 교회가 영혼이 많이 침체되어 있었습니다. 견디기 힘든 시간들이었는데 그날 가서 성경을 펴면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요한복음 21장이 제 마음을 강력하게 사로잡았습니다. 아, 그렇구나.
(찬양)
약한 자를 부르시어 하늘 뜻을 이루신다.
찬송이 떠올랐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당신이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하실 때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노라고 공헌을 한 사람이었고 모든 제자들도 그러한 공헌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공헌에 별로 그렇게 관심을 갖지 않으시고 베드로의 실패를 예고하시면서 “네가 돌이킨 후에는 형제를 굳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을 하고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제자들 없이 홀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고 중간에 자신의 도망 길에서 돌이켜 달라온 제자 단 한 사람, 요한과 눈을 마주치며 십자가에 매달리셨고, 그와 한 마디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장사되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또 한 번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 분이기 때문에 공간을 건너 뛸 수도 있고 통과할 수도 있고 무엇인가를 잡수실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분이셨습니다.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디에서 준비하셨는지 숯불을 피워 놓고 그 위에 생선도 올려놓고 떡도 올려놓으며 그것을 제자들을 주기 위하여 굽고 계셨습니다. 숯불이 피는 광경은 아마 베드로에게 그 예수님을 부인할 때 그 모닥불을 생각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베풀어주신 만찬을 먹고 그 새벽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던 제자들인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아침상을 차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불러 함께 밥을 먹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서부터 내려오는 아주 심오한 의미를 가진 전통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누가 누군가에게 밥상을 베푼다고 하는 이야기는 가족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이중 한 사람도 부활하신 후에 나타난 예수님 면전에서 “제가 며칠 전 주님을 모른다고 도망간 일은 비겁하고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빈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께 잘못을 빌기 전에 이미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밥상을 베푸시고 그들에게 떡과 생선으로 대접하셨습니다.
아침이 모두 끝난 후에 시몬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 이름은 예수님이 그에게 지어주신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지어주신 믿음의 새 이름은 베드로였습니다. 그 이름을 치우시고 맨 처음 제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 자연인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만약에 우리 같았다면 그 첫 만남에서 할 이야기가 이것 말고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저 같으면 웃으면서 그랬을 것입니다. “죽기까지 따라온다는 사람 여기 살아있네.” 100% 그렇게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 농담이라도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죽기까지 따라 온다더니 여기 살아있네. 어디로 갔었어? 어디로 따라 갔었어?” 다른 제자들에게도, “너희들도 베드로 따라 온다더니 여기 다 모였네. 그래서 여러분은 아직 멀었어.”라고 얘기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 치워 버리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실패한 베드로를 예루살렘 교회의 위대한 지도자로 삼으시는 단 하나의 질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15-17절의 ‘사랑하느냐’라는 이 단어가 희랍어로 각각 다른 단어라는 뜻 때문에 의미가 다르다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거의 같은 의미로 예수님께서 세 종류의 사랑에서 물으신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왜 이런 질문을 하셨겠습니까? 긴 시간 설명해도 다 할 수 없는 방대한 의미를 담고 있지만 아주 간략하게 이야기 하면 첫째로는 이 사랑이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며칠 전에도 설명 드린바와 같이 참된 믿음은 곧 사랑입니다. 믿고자 하는 성향은 사랑하고자 하는 성향이고 사랑하지 않고는 믿을 수 없고 믿은 사람들은 반드시 그 믿는 대상이신 주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놀랍게도 이 과거형 시제가 아니라 현재를 묻습니다. 과거로 물었다면 베드로가 답변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네가 나를 사랑 했니?”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네가 그렇게 사랑했는데 왜 나를 버렸니?” 어떻게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심으로써 현재의 상태, 현재 그가 예수님을 사랑하는지를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지금 주님을 사랑하느냐?” 하는 실존적인 물음, 이것에 매일 매일 “그러하옵나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도록 살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질문하신 것은 미래에 있을 어떤 한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어떤 것인가 하면 이제 예수님은 잠시 머무시다가 승천하실 것 아닙니까? 제자들은 무슨 계획을 주님이 가지고 계신지 깜깜하게 몰랐지만 예수님은 이미 다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승천하시면 그 다음에 성령을 보내실 것이고, 성령이 오시면 신약의 교회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오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 분이 메시아로서 당신의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구원받는 사람들을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영적으로 연합시켜서 하나의 교회를 이루게 하실 텐데 그 때 넓게 말하면 교인의 자격이 좁게 말하면 영혼을 돌보는 목양자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머리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랑을 많이 받아 그와 한 몸을 이룬 교회를 똑같이 사랑하게 될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가 “주님 그러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전에는 주님을 버리고 주님보다 목숨을 사랑해서 주님 배반하였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잘못한 것이고 이제는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지금 나를 사랑하는 네가 며칠 전에는 나를 버렸느냐고 물으신다면 할 말이 없지만 저는 지금 주님을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직분을 사랑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필요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이 바로 성도로 하여금 성도의 고유한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는 힘이 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이 말씀을 마치시고 승천하신 후에 보내시는 그 성령은 바로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 할 뿐 아니라 사랑하게 해 주심으로써 그 사랑의 힘으로 이제 신약의 시대를 살아가고 핍박 속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데 이바지하도록 경륜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 제자들과 함께 그러한 경륜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세 번을 물으셨는데 이것은 셋이라는 완전 숫자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당신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였던 이 제자 베드로의 마음의 양심의 고통을 하나씩 하나씩 세 번에 걸쳐 씻어주신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 베드로를 모든 제자들이 모든 앞에서 당신이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을 여전히 사랑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그 실패한 자를 다시 부르셔서 사명을 주셨다는 것을 모든 제자들이 보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허물 많은 베드로는 다시 신약의 교회의 최대 지도자가 되었고 사도바울과 함께 기독교의 역사를 다시 쓰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찬양)
새벽 닭 울 때 난 괴로웠어 풍랑이 일면 난 무서웠어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아 이 세상 끝까지 주님을 위하여 죽을 텐데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남겨두고 가는 이 세상과 교회를 이끌어갈 일꾼들을 다시 한 번 당신을 사랑하도록 모든 것을 풀어 주심으로써 그들을 통하여 교회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또 다른 지체들 가운데 충만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때에는 제자들이 아직 십자가의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밝히 알게 된 것은 성령이 강림하심으로써 입니다. 성령이 강림하심으로써 제자들이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을 때 예수님이 베드로를 용서해 주신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하는 것도 더 큰 감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놀라운 영적인 회복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율법이 정죄하고 양심이 우리를 송사하고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마음대로 보이지 않는 현실들이 우리의 마음에 찌르듯이 고통스럽게 할 때 우리는 위축된 영혼으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이 말씀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도 “아멘”이라고 대답할 수 있지 않습니까? 최소한도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겠습니까? 그래서 잠시 우리의 마음을 에워싸던 많은 문제들을 과감하게 떨쳐버리고 그리고 주님 앞에서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서 정말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숙제는 이 사랑이라는 것, 우리가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님을 사랑할 수 있고 좌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이면서 주님 앞에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한 가지에 집중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과 대답이 이루어진 곳이 어디였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갈릴리 바다 혹은 호수라는 곳이었습니다. 호수라고 하기에는 너무 컸습니다. 바다도 깊고 바람이 불면 2-3미터 높이의 파도가 칠 정도의 바다입니다. 이것도 이른 새벽이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새벽 바닷가에서 조반상을 놓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아닌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맨 처음 주님의 부름을 받았던 어부의 모습, 그 때 그 이름으로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당신께 나아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바닷가에서 만나셨습니다. 왜 그러셨겠습니까?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셨겠지만 이들과만 만나고 싶지 않으셨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을 홀로 대면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입니다. 염려와 근심, 걱정과 많은 우수 사례들이 파고들어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깨끗이 치워버리고 주님을 대면하며 주님 앞에 마주 앉은 그 시간, 그렇게 마음속에서 누구도 범접하지 않은 갈릴리 바다와 같은 마음으로 바닷가의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을 오늘도 만나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만약 여러분이 오늘 한주간 동안 이 새벽을 비우고 주님을 간절히 찾는다면 거기가 주님을 새롭게 만나고 영적으로 회복되는 바로 갈릴리 해변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모든 당신의 자녀들에게 이 질문을 던집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셨던 예수님이 오늘 우리 목사야, 장로야, 권사야 가 아니라 맨 처음 이 세상에서 방황하던 용서받지 못한 죄인이었던 우리들의 이름을 따뜻하게 부르시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을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장 큰 본분은 우리 같은 사람들을 살려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해 주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 십자가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던 제자들도 이렇게 예수님의 질문에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대답하였다면 그 십자가를 체험하고 그 십자가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 안 우리들은 어떻게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해야 할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 주간 동안 잃어버렸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사랑을 회복함 2 (2016.10.11 가을말씀사경회 새벽)
사랑과 힘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시 18:1-2)
녹취자 : 김세나
아마 다윗이 지은 시 중에서 가장 사랑을 받고 있는 시 중 하나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 시는 아마도 성가대의 지휘자의 지시에 따라 부르던 회중 찬송이었던 것 같습니다. 표제에 보면 어떻게 이 찬송이 생겨났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일렀다고 나옵니다. 실제로 이 시는 사무엘하 22장에 나오는 시와 거의 똑같습니다. 사무엘하 22장에서 이제 하나님이 다윗의 모든 왕국을 평안하게 해 주신 때, 그 때에 이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그러한 다윗의 찬송이 있기 직전에 블레셋 침공이 있었습니다. 그 블레셋과의 싸움에 다윗은 출정을 하게 되었고 그때 이스비드놉이라고 하는 블레셋 장수중 골리앗과 같은 장수를 만나게 되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서 그 이스비드놉을 죽이고 기적적으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때 다윗을 따르던 무리들이 다윗에게 간절히 간구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이제 왕은 다시는 전쟁터에 나오지 마십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등불입니다.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당신의 옥체를 보존하십시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일이 있고나서 다윗이 이 찬송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3년 동안 커다란 가뭄이 와서 온 나라가 곡식이 부족하여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시련과 환란을 다 겪고 결국 하나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난관에서 다윗을 구원하여 이제 그 나라를 평정하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 때 시인이 가슴 벅찬 감격으로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제일 먼저 우리가 살아갈 힘이 어디로부터 오는가 하는 것을 고백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자신에게 힘이 되실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자신이 주님을 사랑할 때였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충만한 힘이십니다. 충만한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충만한 능력이십니다. 그분께로부터 어떤 사람이 능력을 많이 받았었다고 해서 그분의 능력이 감소되었다는 이야기는 우리는 들은 적이 없고 그분이 성도 중 어떤 사람을 사랑하신다고 해서 그분의 사랑이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은 무한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도 생명도 은혜도 모든 것이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충만한 능력을 받고 살지 못합니다. 만약에 그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충만한 능려과 은혜, 충만한 자비와 사랑, 이러한 것들을 받으며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러한 충만한 능력이고 사랑이고 힘이시지만 특정한 사람들만 그것을 누리며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인은 언제 하나님이 그렇게 자신에게 큰 힘이 되었는지를 고백하는데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힘이 되어 주셨기 때문에 이제 겨우 주님을 사랑할까 합니다.”라는 뜻이 아니라 이 시인이 지금 주님 앞에 올리고 있는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은 표현은 현재적이지만 다윗이 성경을 읽어 보면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 시달리던 날과 그리고 사울의 손에 억압받던 때, 시련과 고통으로 도망자의 삶을 살았던 그 때 조차도 주님을 사랑하였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힘을 보여 주셔서 하나님 안에 있는 힘이 자신의 힘이 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사실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살아있으면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우리의 명제입니다. 도저히 그렇게 살 힘이 없어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이 없지 않지만 우리가 그것을 바람직한 선택으로 볼 수 없습니다. 신앙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서는 물론 그러한 선택을 권장할 수 없고 그러한 선택에 마음이 끌리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중대한 반역입니다. 그렇다면 믿지 않는 불신자들의 입장에서 본다고 한다면 결국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권은 힘입니다. 힘. 주어진 인생을 살아내야겠는데 거기에는 힘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그냥 겨우 목숨을 부치고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엄청난 힘을 필요로 합니다. 한 사람이 가만히 물 위에 떠 있는 것은 그렇게 많은 체력과 산소를 소모하지 않지만 그렇지만 파도치는 바다에서 그 파도를 헤치고 어디엔가 힘차게 헤엄을 치고 가는 그 일은 보통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영에서 들어가는 한 시간의 칼로리가 권투를 하는 것과 비슷한 칼로리가 들어갑니다. 엄청난 힘이 들어갑니다. 겨우 목숨만 붙어 있다면 그렇게 엄청난 에너지가 드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의미 있는 삶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의미 있는 삶은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자신이 설정하고 그것을 위해서 사력을 다하여 몸부림치며 그 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살아있는 사람의 삶입니다. 살 힘을 모두 잃어버렸던 세상 사람들도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혹은 꼭 해야 할 어떤 일이 생겨날 때 힘이 솟구칩니다. 불행과 시련이 겹치고 많은 환란이 닥쳐도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는 힘이 솟습니다. 행복하고 좋아서만 힘이 솟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새끼들을 어떻게 하랴. 내가 아니면 누가 돌보랴.’고 하는 마음 때문에 힘이 솟습니다.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우리에게 정신과 마음에 힘을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어떤 목표에 대한 아주 뛰어난 집착이 있으면 그까짓 어려움쯤은 능히 견디면서 그 일을 감당해 나갑니다. 그게 바로 사랑이주는 힘입니다.
그러한 힘이 바로 이 시인이 경험하였던 힘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 분께 사랑을 받는 것, 거기에서 우리는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 수 있는 힘을 공급받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더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은 정말 자기가 주를 사랑하는 고백이 아니라 “주님께 이미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사랑을 받을 때 무한한 에너지가 부어지게 됩니다. 그 에너지는 분노나 원한, 사무치는 욕망, 이러한 데서 오는 힘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오는 힘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 이 시인은 역경과 시련을 이길 수 있었고 고난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치욕스러운 날에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우리 주님을 찬송하고 그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2절에 보면 ‘반석’ ‘요새’ ‘구원자’ ‘피할 바위’ ‘뿔’ 이런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새벽에 단어들 모두 해설할 시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들이 모두 전쟁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입니다. 그러면 시인이 실재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전쟁에 참전해서, 왕이 된 후에도 그러한 전쟁에 참여해서 백성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였고 늘 죽음을 옆에 두고 친근하게 죽음과 함께 하며 싸웠습니다. 그리고 아마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살아있는 삶보다 더 가까이 느끼는 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 전쟁터를 누비며 살았고 전쟁터가 아니더라도 왕이 되기까지 걸어야 했던 한 인간 다윗으로서의 기구한 인생길은 그야말로 전쟁터와 같았을 것입니다. 주님을 몰랐더라면 상처투성이의 인생을 살았을 이 사람, 가족들에게도 결코 따뜻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이 사람 다윗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아마 그는 어쩌면 끊임없는 전쟁을 용감히 치룰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이 세상에 별로 사랑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랬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가 이제 그 모든 시련과 환란을 겪고 주님이 자기에게 기름을 부으실 때 그 언약을 따라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 된 후에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위대한 전쟁의 승리, 그리고 인생의 승리를 회고하면서 하나님을 이렇게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 자주 등장하는 ‘바위’ 혹은 ‘반석’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쭈르’라고 하는 이 단어는 구원을 암시합니다. 왜냐하면 그 반석은 아무리 그 위에서 뛰고 커다란 무게를 가해도 주저앉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반석이 구원을 의미하는 바입니다. 홍콩이나 맨하탄을 보면 바로 바닷가 근처인데 어마어마하게 높은 빌딩들이 서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만 몰려 있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 밑이 커다란 바위 덩어리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어마어마한 무게를 땅이 견디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반석이라고 부르는 이유, 바로 그것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주저앉거나 흐트러지거나 무너지지 않는 삶의 기반, 생각의 토대, 그리고 승리하는 삶을 위한 기초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모든 역경과 시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시인은 깨달았습니다. ‘내가 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힘으로 사는 것이구나.’라고 말입니다. 아버지의 편애로 아버지에게는 거의 아들이었고, 엄마에 대한 기록도 거의 나오지 않고 형제들에게는 따돌림을 받아 외톨이가 되었고 사랑하는 아내는 자신을 버렸고 자신이 그렇게 애지중지 하던 자식들은 아버지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반역까지 일으킵니다.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였던 여자는 불행히도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불륜의 관계였습니다. 주님이 없었더라면 상처로 얼룩진 인생을 살았을 그 사람이 위대한 인생의 승리를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을 하는 것 같은 마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시련과 역경, 고난과 환란, 미움과 고통, 수많은 난관을 겪었고 그것은 전쟁터와 같았고 수많은 원수들이 자신의 목숨을 노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경험에 의하면 하나님은 꺼지지 않는 반석이었고, 그리고 작은 군사로 수많은 적을 물리칠 수 있는 요새였고, 결국 하나님은 시련과 패배가 가득한 전쟁에서도 자신을 건져 주시는 구원자였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은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힘을 가지신 능력의 하나님이셨고 도저히 전력으로 이길 수 없는 적군들에게 에워싸여 비 오듯 화살을 맞을 때 그 분은 시인의 피할 바위가 되셨습니다. 아무의 눈에 뛰지 않도록 주님이 그 큰 능력의 손으로 이 시인을 감추어 주셨고 그 피한 바위 아래서 그는 오히려 주님의 따뜻한 품을 느끼며 쉼의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개활지에서 얘기치 못한 곳에서 수많은 화살들이 날아올 때 그는 방패 뒤에 몸을 숨기고 그 방패가 자신을 대신하여 고슴도치가 되도록 수많은 화살을 맞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시인은 당신의 등 뒤에 감추고 당신이 대신 고난을 받으시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더욱이 그가 아무 힘이 없고 아무런 능력이 없는 사람처럼 보여 무시를 당할 때에도 주님을 마치 투구에 솟은 뿔처럼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할 만한 사람으로 나타나게 만들었고 그래서 이 시인은 마음속에 그 뿔을 들어 노래하고 싶은 기쁨에 가득 차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렇게 진홍빛 피가 방자한 전쟁터에서도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경험했고 견디기 힘든 인생의 시련과 그만한 역경을 사랑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내가 이렇게 어려운 시련 가운데 있는데 왜 그분은 돕고 침묵하시냐고 말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몇 번 드리고 난 후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어떤 도움도 기대하지 않고 그냥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다가 거꾸러지는 일들을 되풀이합니다.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것은 실천적인 무신론자입니다. 그러나 왜 우리는 묻지 않습니까? 그렇게 다윗을 도우셨던 위대한 하나님, 그에게 산성이었고 반석이었고 피할 바위였던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변하신 것입니까? 이제는 은혜 베풀 길을 잊으신 것입니까? 그 능력이 끝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찬양)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기르리라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하나님의 능력 없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필요한 물질과 바뀌지 않는 환경 때문에 아파하지만 언제 우리가 주님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고통스러워한 적이 있습니까? 그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고 마지막에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시는 데까지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러한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무슨 그렇게 대수로운 일인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살아가지만 사실은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으로 그렇게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시련과 역경이 와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고난을 당하셔도 우리는 이 시인이 감격하였던 것처럼 그렇게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요 요새요 나의 구원자요 하나님이요 피할 바위요 방패요 구원의 뿔이요 산성이라.”고 노래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신의 힘으로 이긴 줄 알고 운이 좋아서 재수가 괜찮아서 극복한 것으로만 압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이 시인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노래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분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분을 깊이 의지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사는 그러한 삶,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바로 실행해야할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살아계심을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감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진한 핏빛 사랑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기며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인생의 가장 큰 대업으로 여기며 그 힘으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을 회복함 3 (2016.10.12 새해말씀사경회 새벽)
충성과 사랑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신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계 3:7-9)
녹취자 : 김세나
계시록의 도입은 밧모 섬에서 요한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이어서 2장부터는 일곱 교회를 향해 편지를 쓰라는 예수님의 당부를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일곱 교회가 교회의 일곱 시대를 가리키는 것이고, 그래서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가 마지막 라오디게아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덥지도 차지도 아니하여 주님의 입에서 토해 버릴 것 같은 교회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사실 이것은 어느 시대에 해당되는 이야기라기보다는 모든 교회의 시대에 공통적으로 교회가 직면할 수 있는 영적이고 현실적인 어려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 일곱 교회는 그 당시 실재로 존재하였던 교회들이고, 예수님께서는 그 시대에 실제로 존재하였던 교회들에게 교회를 향해 주님의 평가를 보이심으로써 이후에 모든 교회가 귀감을 삼아 하나님 앞에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지 일깨우시기 위해 이 편지를 주신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가 있고난 후에, 그리고 주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야기가 그 뒤에 나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교회야말로 더욱 하나님 앞에서 교회답게 되어야 할 하나님의 기관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일곱 교회가 있었는데, 두 교회는 칭찬만, 두 교회는 책망만, 나머지 세 교회는 책망과 칭찬을 아울러 받은 교회였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바로 그렇게 칭찬만 받은 교회였습니다. 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 일부를 오늘 우리가 읽었습니다.
제일 먼저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편지하라 하시면서 그 말씀을 주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묘사를 7절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예수님은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분”이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시고 진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교회를 당신을 닮아 거룩하게 하십니다. 온갖 세속으로부터 구별되게 하시고 또 그들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모든 사람들 앞에 구별된 자가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그 거대한 위엄 앞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을 알고, 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완전함을 위해서 애쓸 줄 아는 교회로 만드시는 이유도 바로 당신이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진실한 분으로 묘사하십니다. 진실은 진리에 합치한 성품과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 분의 인격과 삶이 모든 종교 지도자들과 구별되었던 이유는 그분이 그렇게 당신 자신이 진리이셨고, 그 진리로서 그 진리에 당신 자신이 합치한 분으로 사셨기 때문에 그 분은 모든 종교지도자들 위에 뛰어나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분이 되셨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 성경은 예수님을 진실한 분이라 묘사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라 묘사하는데,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위, 즉 통치의 열쇠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왕위가 영원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유대인들은 실재로 다윗 왕국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하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번영을 누리고 영광스럽게 나라를 다스렸던 것처럼 또한 그의 뒤를 이어 이루어지게 될 영적인 이스라엘, 신약의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보좌에서 다스리실 것이라 예고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 더 넓게는 세상에 대한 통치를 의미합니다.
네 번째는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하늘 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늘 문을 열고 닫으시는 분이시고 그 분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하늘 아버지께로 나아올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쏟아지는 모든 진리의 빛과 모든 은총, 성도를 향한 모든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그것도 없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하늘 아버지의 좋은 것들이 아들을 통해서 문을 통과하듯이 지상에 부어지고, 지상에 올린 하나님을 향한 모든 섬김과 봉사, 올리는 기도와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아버지께로 올라갑니다. 그러한 점에서 그분은 하늘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또한 교회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교회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권세를 누리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해 하늘 문을 열어두신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내가 내 앞에 열린 문을 두었다, 능히 닫을 사람이 없다.”라고 빌라델비아 교회를 격려하십니다. 땅에서는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하늘을 향해서는 그 문이 열려진 교회,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하나님이신 그 분이 그 열려진 문을 누구도 닫을 수 없게 하시고 그 열려진 문을 통해서 하늘의 온갖 복과 자원을 부워 주실 때 누가 그것을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 교회가 다른 교회는 누리지 못하는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복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미 모든 것을 가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로서의 존재의 가치를 드러내는 것은 교회의 크기에 달린 것은 아닙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 크기를 주목할지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그 크기에 의해서 그 가치가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통해서 이 세상이 받는 유익은 교회의 크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순수함을 통해서입니다. 적은 수의 사람이라도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을 때 그 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그 무리를 보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깨닫게 되고 인간이 거룩하게 살아야 할 부르심에 대해서 이해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 백성들 중 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늘 문을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향해 열린 문을 두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이 세상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열린 문을 두셨고 닫을 사람이 없는 처지의 교회가 바로 빌라델비아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하나님 앞에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오늘 아주 짧게 기록하고 있는데,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버가모 교회나 두아디아 교회, 그리고 에베소 교회를 비롯한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비록 아주 작은 능력 밖에 없는 그러한 교회였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 이름의 영광을 위해 사는 일에 있어서는 예수님을 배반한 적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큰 능력을 가진 사람이 큰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그 능력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고 주님의 뜻대로 이 지구상 한구석에서라도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살려고 애쓰는 아주 연약한 한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큰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함과 하나님을 향한 순전함에 대해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르십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십시오. 밤하늘에 있는 모든 별들의 밝기가 똑같다면 어찌 그 하늘이 아름다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밝은 별도 매 다시고 흐린 별도 매 다시고 불은 빛깔의 별들도 빛나게 하시고 푸른 빛깔의 별들도 빛나게 하십니다. 멀리 있는 것, 가까이 있는 것, 큰 것, 작은 것, 이 모든 것들을 하늘에 매 다심으로써 우리 모든 사람들이 볼 때 경탄을 금할 수 없는 아름다운 밤하늘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교회를 똑같이 빚지 않으시고 그 교회마다 하나님이 다른 빛깔을 주셔서 이 세상에서 빛나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공통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부르심이 있습니다. 모두 그리스도께로부터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들의 무리이고, 그 교회는 거룩하고 진실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는 하나님의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교회마다 각각 다른 빛깔을 주십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차이 있게 하시고 그래서 무지갯빛처럼 큰 교회, 작은 교회,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은 교회, 저렇게 부르심을 받은 교회, 각기 자기의 고유한 사명들을 감당해 나가게 하심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이 교회가 바로 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고유한 사명에 충실하였고 그래서 예수님이 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평가하시기에,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않은 교회”라는 인정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칭찬의 말씀을 베푸실 때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뜨거웠겠습니까? 그리고 사도요한을 통해서 예수님의 통가를 두루마리로 받았을 빌라델비아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적은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많은 고난을 받았던 이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 서신이 읽혀지는 순간 눈물바다가 되었을 것입니다. 적은 능력을 가지고 분투하며 주님의 말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당하고 그 이름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 핍박을 당하는 우리들을 우리 예수님이 알아 주셨다고 하는 감격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간 모든 행위가 그 분께 아신바 되었고 또 어떤 처지에서도 그 말씀을 지키며 그 이름을 배반하지 않고 그 이름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우리 주님의 마음에 기억됩니다. 왜 입니까? 그 분이 바로 교회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새로운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는 일도 매우 귀한 일이지만 아울러 이미 주님이 내게 주신 은혜, 내게 주신 재능, 내게 주신 은사를 주님 앞에 내가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반성하는 일은 새로운 능력을 구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적은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였습니다. 그리고 적은 능력을 가지고 우리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고 핍박과 시련을 능히 견디며 그 분의 이름의 영광에 목숨을 건 교회였습니다. 어찌 주님이 이런 교회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우리가 바로 이런 교회가 되기를 원하시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 예수님이 사랑을 보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사단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확실치는 않지만 유대인이라는 이름으로 교회에 와서 무리를 짓고 교회에 해를 입히는 악한 무리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빌라델비아는 그 시대에 포도가 많이 나는 지역에 있었고, 그 당시 이미 많은 이방의 신들을 섬기는 도시였다는 사실이 고고학적인 발굴물들을 통해서 입증이 된다고 합니다. 토착 이방신들을 섬기고 나중에는 황제를 섬기는 그러한 말하자면 이교가 성행하였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러한 이단과 이교가 황제 숭배와 같은 악한 종교를 강요받던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진 교회였으니 그들이 당하게 될 수치와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우리는 짐작하게 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 이외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이 교회를 아프게 하고 교회에 고통을 주지만 교회는 그들을 처단할 수 있는 사회법적인 권세가 없습니다. 그 옛날 중세시대처럼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고 고민하고 죽이고 그럴 수 있는 권세가 없습니다. 그가 가진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굉장히 커다란 무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의 어두움에 비칠 때 그 말씀과 상관없이 살아가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아 새로운 사람들이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그 말씀 앞에서 변화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대인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그러니까 교회를 해롭게 하던 그러한 나쁜 사탄의 회당의 무리에 속한 몇 사람을 하나님께서 놀랍게 회개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교회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절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냥 단순히 정치적인 항복인지 혹은 그들을 진정으로 회심하게 하는 것인지 사람마다 각기 해석이 다르겠지만 저는 이것이 아마도 그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을 진실로 복음을 듣고 회개하게 만들어서 자신의 죄를 진실하게 깨닫고 교회의 일원이 되는 모습을 그려낸 것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교회가 진정으로 저들에게 절을 받는 그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승리는 바로 이렇게 교회에 의해 선포되는 복음과 진리를 깨닫고 그래서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잘못하였는지, 죄인이었는지 깨닫고 회개하는데서 바로 교회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사랑하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사탄의 회당 중 어떤 유대인들이 빌라델비아 교회에 무릎을 꿇고 회개할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사랑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언제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의 마음에 새겨져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핍박을 받고 있을 때나 고난을 당할 때나 혹은 이단과 이교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으며 거짓신앙을 강요받을 때조차도 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대항할 수가 없고 그렇지만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 말씀을 지키려고 애쓸 때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고 그 이름에 매인 삶을 살려고 애쓰는 그 순간, 매 순간마다 빌라델비아 교회 그 이름은 예수님의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이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셨고 빌라델비아 교회가 자신들이 주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모르고 있을 때조차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진정으로 사랑받는 교회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가 바로 빌라델비아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우리 자신에게 보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웃들, 심지어 우리를 해치고 미워하던 원수들에게까지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그때 교회는 주님의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응답을 받을 때 그렇게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기도하는 그 제목을 들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기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 큰 기쁨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주님이 나를 멀리 하시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간절한 기도를 결국 들어주시고 그리고 나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으며 우리는 감격하게 됩니다. 아주 작은 사건에 대한 응답, 그리고 아주 큰 일에 대한 응답, 그것이 어느 것이든지 우리는 응답하셔서 우리에게 주시는 어떤 사물이나 사건 뒤에 계신 우리 예수님의 마음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종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하고자 하실 때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아주 작은 것이지만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리고 우리의 이름이 여전히 당신의 마음에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힘을 잃어버렸던 사람들이 그 은혜 때문에 다시 힘을 얻게 하시고 그 기도의 응답을 통해서 때로는 멀리 있는 것 같은 하나님을 다시 가까이 느끼면서 그분의 사랑을, 그 분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갈 용기를 얻게 하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분투하고자 하는 의욕을 갖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크게 임할 때 우리는 온 세상을 향하여 외치고 싶습니다.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을 기억합니다. 다섯 번이나 결혼을 하고도 지금 있는 그 남자도 사실은 자신의 남편이 아닌 그 여자, 율법에 의하면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해 마땅한 그 여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부끄러움이 없이 온 동네 사람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내가 예수를 만났는데 그 분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구나. 그 분은 내가 무엇을 했는지 어떤 사람인지 다 말씀하셨다! 와서 한번 보라! 그 분을 믿으라!”고 전도하였습니다. 정말 무미건조한 우리의 삶, 우리의 인생의 참된 목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 인생의 갈 길도 희미해지고 알게 된 그 길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힘도 없는 그 때에 우리 주님 앞에 안타깝게 부르짖어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그때 바로 우리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시기를 기도해야 할 때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간절히 원하는 바는 여러분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사랑의 증거를 가진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처음 주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던 그 순간부터 이제까지 시련과 역경을 딛고 살아온 이날까지 하나님이 우리의 삶 굽이굽이 어떻게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는지 큰 능력을 가지신 위대한 일꾼들은 아니지만 적은 능력을 가졌을 때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 같은 인간을 통해서라도 섬김을 받고 싶어 하였고 작은 분투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지켰을 때 우리에게 당신의 기쁨을 크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조금 섬겼을 때 주님께서는 지극히 기뻐하시며 우리에게 당신의 큰 사랑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간절히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가 이 사경회에서 이렇게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놀라운 증거를 받아 갖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어떤 시련과 풍랑, 우리를 힘들게 하는 모든 고통과 시련이 있을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우리 주님만 사랑하고 그 분의 사랑을 받는 성도들이 되십시오. 주님은 적은 능력으로도 충성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러한 사랑을 보이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찮게 여기는 그것,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의무와 그리고 섬김의 자리가 어디인지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 주님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고 섬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헌신과 사랑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기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마 26:6-13)
녹취자 : 김세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실 때가 가까이 왔을 때 일어난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의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계셨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나병 환자는 이스라엘 회중 속에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아마 이 나병 환자는 문자 그대로 나병 환자라기보다는 나병을 앓았다가 나은 시몬이라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예수님이 계셨다고 하였으니까, 아마 이 사람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청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병을 나았는지는 모르지만,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것은 예수님과 어떤 중요한 관계를 이미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청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이 나병 환자를 고쳐 주셨기 때문에 그 감사한 마음으로 자기의 집에 불렀을 수도 있지만, 성경을 통해 그것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 당시에 식사를 초대해서 함께 식사한다고 하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 대한 상당한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일이었습니다. 베다니 나병 환자의 집에 여자도 있고 예수님도 계셨지만 오늘 이 이야기에 나오는 또 다른 한 여자가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한 여자라고 되어 있는 이 사람이 다른 복음서에는 죄인인 한 여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아마 이 여자가 종사했던 직업과 관련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창녀요 기생이었던 여자였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여자가 아주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식사하시던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 여자는 시몬의 식사 자리에 초대를 받았던 사람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 역시 예수님과 이미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 여성이었고 그 예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향유 한 옥합을 가직 와서 예수의 머리에 부은 것입니다. 당시 이 향유는 금과 은처럼 재산을 모으는 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원하면 시장에 가서 현금화 할 수 있는 아주 값진 물건이었습니다.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식사하시던 예수의 머리에 부었을 때 다른 복음서에서는 그것이 300 데나리온은 되겠다고 하는 가치의 평가를 매깁니다. 한 데나리온이 이른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장정 남자가 일해서 벌 수 있는 품삯이었으니 한 10만 원정도만 치면 한 3천만 원이나 되는 장정 남자의 일 년치 연봉이 되는 매우 큰 액수의 향유였습니다. 그것을 식사하시던 예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갈등이 일어나고 예수님께서 깨끗이 정리를 해 주는데, “이 여자가 행한 일은 잘 한 것이다.” 칭찬을 하시면서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이 여자가 행한 일도 기념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그렇게 칭찬하셨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여자의 향유를 부은 사건 그 자체를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그렇게 당신에게 향유를 붓도록 만들어 준 이 여자 안에 있는 그 무엇을 칭찬하시고, 그것에 대한 항구적인 가치를 높이 사셨던 것입니다. 복음서를 읽어 보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받는 인상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이 결코 사치스러운 분이거나 혹은 모든 것을 낭비하는 분처럼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당신 식사하시는 자리에 와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 예수의 머리에 부었는데 그것이 약 3천만 원이나 되는 돈이었다면 당연히 예수님이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고 굶주렸던 사람들에게 오히려 식품을 사서 그들의 굶주림을 면하는 일을 예수님이 더 좋아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보면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라고 함께 있는 제자들이 분개하여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제자들의 합리적인이야기의 편을 들지 않으시고 이 여자의 편에 서서 이 모든 일들을 정리해 주십니다. 이 여자는 잠시 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렇게 되면 그분의 죽음 때문에 우리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고 하는 것, 그리고 예수님은 죽으신 후에 삼일 만에 다시 부활하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자의 아름다운 헌신을 당신의 죽음과 연결을 시키셨습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중요성을 잘 모르고 그냥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겼지만 세월이 지나가고 나면 그때 누군가가 주님을 섬겼던 그것이 얼마나 결정적이고 중요한 사건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렇게 심각하고 중요한 사건인지를 모르다가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깊이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께서 그때 우리가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주님을 섬겼던 것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주십니다. 그래서 아주 적은 섬김이었는데 주님이 그 의미를 크게 부여하시면서 당신의 자녀들을 칭찬하시는 일은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 여자의 섬김이 어떤 섬김이었기에,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극구 칭찬하시며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기념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그녀의 섬김은 어떤 것이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우선 첫째는 침묵하는 섬김이었습니다. 짧지 않은 긴 기사 속에 이 여자의 대사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조용히 자기가 우리 주님 앞에 행하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그 일을 행하였을 뿐입니다. 아마 어쩌면 이 향유는 이 여자의 희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매일 매일 천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조금씩 번 돈으로 이 향유를 채워가며 일정한 분량을 모았을 때 그것을 현금화해서 이렇게 복잡한 도시를 떠나 어딘가 한적한 곳으로 가서 고향과 같은 곳으로 가서 새로운 삶을 준비하기 위한 자금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아마도 죄 사함의 은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놀라운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났더니 그는 이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물질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조용히 침묵하는 가운데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그것을 가져와 예수님께 바칠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구와 의논을 했다거나 혹은 자신이 이러한 섬김을 감당할 것이니 많은 사람들은 주목을 해달라는 그러한 어수선한 메시지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여자는 조용히 예수 그리스도의 식사 하시는 그 뒤로 다가와 눈물을 흘리고 이 향유를 붓고 그리고 푼 미역과 같은 검은 머리로 예수님의 발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습니다. 이것이 진정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섬김입니다. 빈 수레가 빠른 속도로 지나갈 때에는 매우 요란한 소리가 납니다. 그러나 값비싼 보화를 잔뜩 실은 마차는 그렇게 소리 나지 않고 그렇게 빨리 달려가지도 못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작은 섬김인데, 물론 사람들이 볼 때에는 깜짝 놀랄만한 큰 섬김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아주 작은 섬김입니다. 또한 그것이 사람 보기에 매우 큰 섬김으로 보여도 그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받은 구속의 은혜에 비춰 보면 그것은 아주 작은 것입니다. 그러한 작은 것을 보면서 그것을 모든 사람들 앞에 드러내고 자랑하고 과시하고 그렇게 하면 이미 그 섬김은 하나님을 향한 주님을 위한 섬김이 아니라 섬기는 자기 자신을 위한 섬김입니다. 이미 상을 받은 것입니다. 이 여자는 자기의 생애에 가장 소중한 것을 예수께 한 번에 모두 바치면서도 그는 일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제자들이 와서 이 여자를 그렇게 분개하며 야단을 쳤습니다. 원래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 논리가 많고 목소리가 크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께 바치는 사람들은 조용합니다. 오늘날 정말 필요한 헌신이 이러한 헌신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많이 섬겼지만 그러나 권세를 가지고 주관하지 않는 섬김, 조용히 주님을 섬기는 침묵하는 섬김이 그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도 이 본을 따라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침묵하며 섬기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최선의 것을 드린 섬김이었습니다. 아마 이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이 향유를 붓기 전에 면밀히 계획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주님께 귀한 은혜를 받고 그리고 죄의 용서함을 받고 그 사랑을 알고 나니까 자신의 인생에 대한 새로운 의미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사랑이 자신의 인생에 가장 소중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을 위해 자신의 최선의 것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아마 자기의 생명도 예수님을 위해 내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명 또한 최선의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아무 때나 함부로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 다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여자에게서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 이것은 어쩌면 전 재산이었고 가장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자들도 비싼 값이 나가는 물건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것을 주님을 위해 바쳤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압니다. 주님께 자신의 최선의 것을 드려본 사람은 그 기쁨이 얼마나 큰 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자신이 최선의 것을 드릴 때 비로소 주님이 자신에게 현실적으로 얼마나 소중하신 분인지 그렇게 자신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마땅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위대한 일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는 것도 마땅하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 여자가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 예수께 부었습니다만, 이것은 하나의 상징이었습니다. 내게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당신께 바치는 것이 아깝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이것이 제일 소중했으나 주님의 사랑을 받은 이후에는 주님이 제 인생에 가장 소중하기 때문에 이 최선의 것을 당신은 받으실만합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께 최선의 것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작은 향유 한 옥합은 사실 하나의 상징이었으니 그것이 예수님의 몸에 부어졌을 때 사실은 이 여자가 언제든지 자기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 예수님께 자기 자신을 모두 드릴 수 있다고 하는 한 헌신의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날마다 섬김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최선의 것을 주님께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그 최선의 것을 주님께 드려 주님이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그러한 사람들이 최선의 것을 주님께 드릴 때, 소중한 것을 드린 것은 자신이지만 그러나 주님이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분이신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섬길수록 소중한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사랑은 이렇게 최선의 것으로 주님께 헌신하도록 우리를 돕습니다. 주님을 사랑함으로 최선의 섬김으로 우리 주님을 기쁘게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세 번째, 마지막으로 이 섬김은 오랜 세대를 두고 기념이 될 만한 섬김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온 천하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혹은 기념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십니다. 성령님이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안 구원받은 성도들과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그 복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집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게 하리라, 기억하게 하라, 이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자연스럽게 일어날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그녀를 기억하리라.”고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복음이 전파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구나, 나를 그렇게 사랑하셨구나, 그러한 사실을 깨달으며 회개하고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이 여자가 경험한 것 같은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 주님의 사랑이 가슴에 사무쳐 말없이 그리고 최선의 것을 드려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기록되어 있는 이 여자의 사건을 색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자신에게 지금 복음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입니다. 요약해서 이야기 하면 복음이 참답게 전파되고 그 복음을 믿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그 사람이 이 여자처럼 나를 진실로 사랑하게 되고 그러면 침묵하며 최선의 것으로 나를 섬기게 될 것이다, 그 뜻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그 복음으로 말미암아 변화된 사람들 속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성질의 나라가 될 것인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각자는 재능도 다르고 달란트도 다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를 깊이 만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은혜를 받습니다. 그렇게 될 때 그들이 하고 있는 일도 다르고 재능도 다르고 사는 곳도 다르고 교회도 다릅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서로 다르지만 한 분 예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자기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고난, 그 공로로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서는 자리, 하는 일, 가진 은사는 다 달라도 그것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모든 동기가 하나에 붙잡힙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 서로 다른 사람들은 서로 다른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찬란하게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여자가 행할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왜 그렇게 기념할만한 사건이 되었겠습니까? 예수님이 향유 한 옥합에 너무 큰 감동을 받으신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감동시킨 것은 향유 한 옥합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이 여자 안에 있던 예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은 감동을 받으셨고 그 섬김이 예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고 고결한 섬김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최선의 것을 우리 주님께 드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여러분이 이런 십자가의 사랑,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돌아오기를 원하시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한 마음이 되어서 우리 주님을 섬기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이 바로 주님을 위해 헌신하게 됩니다. 자신의 소중한 것을 바쳐 헌신해 본 사람들의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불붙듯 솟아오르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니 헌신과 사랑은 나누어 질 수 없는 복음의 가치입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의 크기만큼 우리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재물과 사랑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녹취자 : 김세나
예수님이 마태복음 5장부터 산상수훈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토막토막 천국 백성이 어떠한 사람들이고 또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내용으로 7장까지 이어집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이 내용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주제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재물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설명하시면서 궁극적으로 그들의 소명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서 사는데 있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7장까지 나오는 내용들 중에 단일한 가르침을 이렇게 길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으로서는 아마 이 내용이 가장 긴 내용이라 여겨집니다. 바로 그 앞에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는 장면도 나오기는 하지만, 길이 면에서 하늘의 보물을 쌓아 두라는 이 내용은 가장 긴 내용으로 나와 있습니다.
먼저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미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이 된 사람들이 어떤 윤리로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믿기 전에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전에는 세상의 윤리의 기준을 따라 살았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그 윤리의 기준을 잘 충족해서 비교적 선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살았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반대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보여주시는 윤리는 이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의 안녕을 위해 혹은 자신들의 이익과 자신들의 사랑을 따라서 만들어 놓은 윤리의 질서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된 사람들이 살아야 할 삶의 윤리를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위대한 성인은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이 세상 나라의 백성들과 구별되는데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랑의 질서라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사람은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가 모두 사랑 때문에 이루어지는 나라라고 보았습니다. 세상 나라는 사람 사랑, 다시 말해서 자기 사랑의 확장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이고, 또 하나님의 나라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 세상 나라에 속해서 자기 사랑의 질서를 따라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자기 질서를 버리고 하나님의 질서로 돌아온 사람들이 사는 나라라고 보았습니다. 세상 나라는 평화를 원합니다. 그렇지만 각자가 모두 자신이 그 자라의 중심이 되려고 하기 때문에 그 나라에는 실질적으로 평화가 성취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중심을 이루어 사는 나라이기 때문에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평화도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분을 사랑하던 사람들도 변심하면 하나님 나라에서도 자기 사랑의 깃발을 들기 때문입니다. 권력이 있고 힘이 있는 사람은 세상 나라에서도 깃발을 높고 크게 꽂고 그 힘 아래 작은 깃발들을 꺾어 버립니다.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반기들을 들고 일어나지만 힘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꺾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회개하고 우리 주님께로 돌아오게 될 때 스스로 그 깃발을 꺾으며 주님의 사랑의 질서로 복종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질서의 차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결국 하나님 나라의 질서 안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반기를 들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를 여기에서 길게 서술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재물에 대한 사랑입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가난을 미덕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전통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이라기보다는 역사적으로 금욕주의가 가르쳐 준 전통입니다. 그러한 금욕주의적인 전통을 따라서 로마시대에 스토아주의나 4-5세기 시작된 수도원 운동 같은 것들, 10세기, 13세기 있었던 신비주의 운동, 가톨릭 종교개혁을 부르짖었던 13세기 가톨릭 안에서의 종교개혁자들에 의한 청빈운동이 가져다주는 하나의 청빈운동, 그리고 물질을 죄악시하고 그러한 것들을 버리면 신령해 질 수 있다고 믿는 그러한 신비주의 내지는 내세주의적인 사상들이 가난에 대한 숭배, 부요함에 대한 비판 같은 것들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전통에서 보면 부자가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은 그 자체가 미덕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창녀와 기생 같은 하층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신 것은 그들이 마음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만 만나지 않으시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 가운데는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아주 부유한 사람도 있었고 이후에 복음이 전파될 때에도 정치적으로 고위직에 있던 사람들부터 시작해서 하층에 있던 모든 사람들까지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에 마음을 여는 사람들에게는 사도들이 다가가고 그리스도인들이 다가가서 총체적인 선교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먼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렇게 물질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래서 부요한 사람들이 얼마나 탐욕이 가득한 사람들일까 봐서도 안 되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청빈할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성경은 겉으로 청빈하면서도 마음에 탐욕이 가득한 사람들도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고 겉으로 부하지만 마음으로 주님을 목마르게 찾는 가난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도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렇기 떄문에 나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앙심을 품거나 열등감을 갖는 것은 성경적인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그런 모든 것을 인정하면서 예수님께서는 그 보물을 누리는 것은 괜찮지만 사랑하지는 말라는 의미로 말씀하십니다. 어떤 것이 내게 주어져서 그리고 그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의 영혼에 커다란 문제를 가져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원래 성경에 보면 지금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을 것이다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인간의 마음이 보물과 밀접한 연관관계에 있는 것인가 보여줍니다. 여기에서 마음은 우리가 사용하는 마음이 아니라 인간의 지성, 감정, 의지, 이런 모든 것이 전부다 실제적인 행동과 관여하는 정신 기능을 영혼부터 우리 일반적인 정신구조에 이르는 모든 것들을 다 통칭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마음이 우리의 영혼의 기능인 동시에 우리의 심정을 자극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런저런 행동을 결정하게 하는 정신적인 기능까지 모두 포함한 것입니다. 거기에 마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뜬금없이 예수님이 눈과 등불 이야기를 하십니다. 캄캄한 밤에는 등불이 있어야 합니다. 등불 하나를 들고 등불이 빛을 비추면 그 비쳐진 빛을 보고 판단을 하고 그러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게 됩니다. 우리의 눈이 그러한 역할을 합니다. 만약에 이 눈이 정상적으로 있으면 우리의 온 몸이 눈의 도움을 받으면서 올바른 길을 걸어가게 되지만 눈이 나빠서 그것을 잘 보지 못하게 되면 어두움이 생겨나게 됩니다. 물리적인 어두움이야 해가지고 전등이 없으면 어두움이 오지만 이러한 어두움은 영적이고 도덕적인 어두움을 가리킵니다. 결국 영적인 어두움, 혹은 도덕적인 어두움이 생겨나는 이유는 결국 사랑이 올바르지 않다는 이야기가 예수님의 이야기를 골자입니다. 올바르지 않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의 눈은 밝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이 그 눈을 어둡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또한 눈의 이야기를 하신 후에 섬김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여기에서 나오는 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노예를 가리킵니다. 노예 혹은 종입니다. 종과 노예는 다릅니다. 종은 비교적 자율성이 있어서 그 집에서 대가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노예는 그 집에 복속된 사람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이 주인을 섬깁니다. 그 사람은 그 집안의 노예 혹은 종입니다. 그래서 섬깁니다. 그 관계는 단순히 돈을 주고받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이미 인간적으로 관계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 주인 보다 훨씬 낮은 사회적 지위와 신분의 사람이 주인에게 은택을 입으며 그 주인의 집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돈을 지불해 주는 그 사람을 주인이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종관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주인을 섬기는데 이 사람에게 또 다른 제안이 들어옵니다. “그 주인을 섬기지만 말고 나도 너에게 일정한 대가를 줄 테니까 나도 섬겨라.” 그렇지만 이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 당시 종이라고 하는 것은 급여를 받으며 그 집에 들어와 옛날 우리나라의 머슴처럼 살거나 가까이 있어서 출퇴근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한 집을 마음을 다해 가족처럼 챙기며 섬기는 그 사람이 동시에 또 다른 집을 섬길 수 있느냐, 이것은 사회적으로 볼 때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물리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그리고 실제로 그 사람의 당시 사회 관습으로 보나 모든 것으로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마음을 다해 일해보자고 정당한 연봉을 주고 지극히 사랑하고 신뢰해서 사람을 썼는데 와서 계약하는 조건이 3시에 퇴근하겠다고 해서 3시 이후에는 경쟁사에 가서 다른 사람을 섬긴다면 여러분은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그 사람과 계약을 하겠습니까? 당장 그만두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게 섬기지 못한다, 혹시 마음으로 그렇게 섬긴다 할지라도 결국 두 주인 중 한 사람을 미워하거나 사랑하고 중히 여기거나 경히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같은 말의 반복입니다. 미워한다고 하는 것은 진짜 미워한다고 하는 것이라기보다 히브리 사람들의 독특한 표현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있습니다. 두 아이가 있는데 엄마가 동생한테 과자를 주면 첫째 아이가 삐지면서 “엄마는 나만 미워해.”라고 이야기 합니다. 상대적으로 덜 사랑을 받는 것, 그 이야기입니다. 혹은 이를 덜 사랑하거나 저를 사랑하거나 혹은 이를 더 귀하게 여기거나 저를 하찮게 여긴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최고의 가치입니다. 감히 다른 것들이 견줄 수 없는 최고의 가치로 하나님은 거기에 계시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과 함께 우리의 섬김을 받도록 경쟁하는 단 하나의 경쟁자가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처럼 섬기고 싶어 하는 또 다른 신이 있습니다. 그게 맘몬 신입니다. 물신입니다. 물신. 물신은 물질을 신화 시켜서 그것을 맘몬이라고 부르는데 마치 신을 경배하듯이 물질을 경배하여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그것보다 소중한 가치를 낮게 취급하고 짓밟아 버리는 생활을 우리들이 맘몬주의라 부릅니다. 그러면 그것 이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재물, 우리는 흔히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세상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상 사랑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결국 이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즐거움을 누리고 거기에서 쾌락을 찾고 이 세상에서 더 많은 만족을 얻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이 여기를 떠나 문 밖에만 나가면 모두 그러한 만족을 위해서는 육체와 우리의 정신의 만족을 위해서는 반드시 돈을 요구합니다. 날씨도 쌀쌀하고 해서 한 2km되는 거리를 걸어갈 수 없어 편하게 가고 싶다 생각해서 택시를 부르는 순간 메타기는 꺾이고 돈은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특히 이러한 자본주의를 살면서 우리는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모든 것에 대해서 돈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돈이 없다고 하는 이야기는 그렇게 사회로부터 유익을 받을 수 있는 굉장히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당장 여러분이 2시간 후에 아침을 먹을 텐데 그것도 여러분에게 물질을 지불하도록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결국 이러한 세상 안에서 자기의 육신을 봉양하고 정신적으로도 어느 정도 고통과 외로움을 경감시키면서 살기 위해서는 물질이 필요하고 우리나라같이 사회보장제도가 잘 안 되어 있는 나라에서도 각각 자력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통장에 혹은 처분해서 쓸 수 있는 재산이 얼마나 있느냐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관건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른 아침서부터 늦은 밤까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을 재쳐 놓으면서 까지 그렇게 재물을 모으는 것에 열심을 갖고 재물에 대한 소유권이 약간이라도 충돌을 일으키기만 하면 가족이라도 칼부림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염려입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결국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마실까 입을까 먹을까 그러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살아야 할 가치가 아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합니까? 그것에 대하여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는 더 큰 소명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펼쳐진 것이 의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의 펼쳐짐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그러면 너희들이 다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너희에게 필요한 것들을 아셔서 너희를 위해 공급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파격적인 말씀을 해 주시고 계십니다. 마치 기도를 안 해도 될것처럼 말씀하시는 아주 중요한 구절입니다. 암시가 무엇입니까?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위해 기도하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도 자기 자신의 양식이 아닌 공동체의 양식, 좁게는 가족이라는 공동체, 좀더 넓게는 교회라는 공동체, 보편교회라는 공동체, 더 넓게는 보편적 인류라는 공동체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양식을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러한 진실한 기도속에서 오히려 공동체가 먹을 것들을 나눌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것들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을 배우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안다. 그러므로 그의 나라를 구하라. 이 모든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모든 것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아도 나는 너희에게 이것을 더하여 줄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만약에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삶의 목표로 제시한 것을 따라 산다면 하나님인 나는 너희에게 필요한 먹고 입고 마시는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여기에서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게끔 만들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재물에 대한 사랑은 인간의 마음 속에서 집요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아직 하나님 앞에 고르고 굳세지 못할 때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이 바로 이 세상에 대한 염려와 근심입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염려와 근심은 현재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부실하기 때문에 그래서 왠지 하나님이 그렇게 믿을만하고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실 것같은 생각이 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미래에 변화된 어떤 상태를 우리가 감당하기 위해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재물밖에 없다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일단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놀라운지 보십시오. 일단 한 사람이 어둠 속에 살다가 복음의 빛을 받고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 십자가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 알게 되면 마음이 한 곳에 꽂혀 격류처럼 쏟아 쓸려서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집에서 과보호를 받으며 세상 전혀 모르고 살았던 애들이 자라서 좋아하는 이성이 하나 생기면 목숨을 걸고 꽂혀 빠기게 되듯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재물에 대한 사랑도 누가 재물에 대해서 완전히 무관심한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만은, 어느 정도 재물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계획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덕을 위해서도 꼭 필요합니다. 있을 때 쓰고 없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빌리러 다니고 필요한 때에 제대로 갚지 못하니까 신용이 떨어지고, 그러면서 손가락질을 받는 것은 하나님 자녀의 삶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따라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커다란 목적과 대의를 훼손하지 않고 오히려 이것들을 더욱 세우면서 적절히 물질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 물질을 위해서 애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이쪽으로 쏠리면서 본래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살아야 할 그 결심들이 좀 먹습니다. 결국 마귀가 우리 인간들에게 하나님 버리도록 유혹하는 강력한 도구가 바로 물질입니다. 이러한 물질로서 우리들을 흔들어 놓아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버리도록 만듭니다. 살인이나 도둑질은 즉각적인 양심의 고통을 가져오지만 은근히 물질을 사랑하고 거기에 집착하는 것은 우리에게 수많은 핑계거리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래서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중요한 것은 이 물질을 누리는 사람들이 될지언정 그것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정해진 범위 안에서 그 물질을 누리면서 사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도해서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뒤 흔들어서 우리의 사랑을 바꿔 놓을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탐닉하는 것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놀라운 구원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쓸모없는 사람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재물에 대한 사랑이 어느 순간 막 불붙는 욕망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염려, 오늘과 특히 내일에 대한 염려, 미래에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염려, 이것이 단순한 생각과 계획을 넘어서서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 시작할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재물에 굴복하고 무릎을 꿇게 되고 재물을 누리고 재물을 사용하는 것에서 지나쳐서 그것을 섬겨서 그것을 붙잡으려 합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그러한 물질도 사람에게로 돌리고 삶에 있어서 규모가 엇없어지게 됩니다.
때로는 매우 교회에 열성적이고 헌신적인데 하나님 앞에 물질생활에 있어서는 매우 인색해서 주변을 돕거나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해야 할 물질적인 의무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항상 웨슬리의 설교를 기억합니다. 웨슬리가 한창 부흥운동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면서 당신 설교 진짜 좋다고 사람들이 칭찬을 할 때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지갑이 회개하지 않는한 나는 당신들의 회심을 믿지 않겠습니다.” 그 말은 당시 영국 상황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고아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았습니다. 빈부의 격차가 산업혁명 초기에 어마어마하게 일어나서 가난한 사람들은 하루에 16시간씩 노동을 해도 밥을 먹기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그럴 때에 나라가 모든 것들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영국의 복지제도가 잘 되어 있는 이유 중 하나가 그러한 자본주의와 산업화의 폐해를 가장 먼저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제하는 일을 오늘날 교회보다 훨씬 더 열심히 했습니다. 사람들이 헌금을 안하는 그것을 보면서 이제 웨슬리가 한 침을 놓습니다. “너희의 지갑이 회개하지 않으면 나는 너희들의 회심을 믿지 않겠다. 너희의 회심을 너희의 지갑으로 입증하라.” 그 뜻입니다. 지갑이 돈 만의 문제이겠습니까? 결국 그 마땅히 행해야 할 이웃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는 물질적인 헌신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삶 전체적으로 총체적인 고백에 만족하며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 않다는 아주 중요한 표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강력하게 이야기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겉모습으로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고 그분 앞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소망을 두고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그분을 의지하며 사는 어린 아이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호하고 책임지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너무 많이 의지하였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버림을 받아먹고 입고 마시고 쓸 것이 거의 없도록 그렇게 만드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를 살면서 생활에 대한 염려, 이러한 것들로 우리의 마음을 쏟을 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다.” 오늘 내가 그렇게 살았구나. 이것으로 끝이고 불변하는 나의 인생의 목적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의를 위한 것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을 회복함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