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4
목 차
억울한 일을 당할 때(시 4:1-3) 35
주께서 마음에 두신 기쁨(시 4:4-8) 43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내 의의 하나님이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이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인생들아 어느 때 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시 4:1-3)
내 의의 하나님이여
4편도 3편과 마찬가지로 탄원의 시입니다. 탄원의 시에는 내용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간절한 부르짖음이 담겨있습니다. 시인은 난관에 처해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여서 고통 받고 있습니다. 그렇게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가운데 시인이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시인이 하나님을 매우 독특한 표현으로 부릅니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라고 부릅니다. ‘의’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큼 올바르고 선하게 된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의’는 하나님이 그에게 정해 놓으신 기준에 부합한 삶을 사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시인이 주전 10세기, 구약시대의 사람이었지만, 다윗을 포함한 많은 구약의 인물들은 스스로 노력해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분의 거룩한 성품의 빛 아래에서 자기를 비춰볼 때 끊임없이 불결하고 더러워 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은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이 보이는 동시에, 자기의 불결과 더러운 죄악이 함께 다 보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불결과 죄악이 보여도 그것을 다 돌이키고 고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완전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나가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자기의 죄와 불결 더러움들을 제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간절한 소원은 내가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해서 의로운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의롭게 될 때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기도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흠 없는 사람들과 깊이 교통을 하시지, 불결한 삶을 사는 사람들과 교통하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아주 흉악한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깊이 교통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법도에 맞게끔 살지 못했지만 회개와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은총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은총으로 인해 하나님이 그를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서 지금 시인이 호소하고 있는 “내 의의 하나님이이여”라고 부를 때, 의에 하나님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나는 불결한 것이 많아서 온전해지려고 애쓰지만 결국은 주님께 온전히 열납 될 수 없는 그런 사람인데, 하나님께 용서를 빌고 은혜를 구했더니 주님의 나의 회개를 들으시고 나를 당신의 의로 덧입혀 주시는 것이 바로 복음적인 의입니다. 그것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내의의 하나님이여”라는 뜻입니다. 우리들이 어차피 온전해질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더 온전해 지려고 애를 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삶은 살면서도 우리의 힘으로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를 의롭게 인정해주시는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의롭다고 불러주시고 기도할 때 당신과의 깊은 교통의 세계로 데려가 주십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든지 온전해지려고 애를 써야지만 비로소 사람의 마음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덧입고 싶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열망이 생겨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간절한 열망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많이 애를 쓸 때 생겨나지, 그렇지 않을 때에는 은혜에 대한 갈망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영광을 욕되게 함
두 번째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시인을 에워싸고 시인의 영광을 욕되게 하고 있었습니다. ‘영광’은 사물이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좋은 장점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그것을 자꾸 빼앗아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 이런 소문이 났다고 쳐 봅시다. “아 그분이 참 그렇게 신실하신 분이래.”, “아 그분이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신대.”, “그분이 그렇게 사람이 성품이 너그러우시고 사람들을 그렇게 사랑해 주신대.”, “그의 성품이 누구한테 무언가를 빌리면 안 갚고는 못 베기는 그런 성품이래.”, “그분에게는 집문서를 맡겨도 아마 상관없고 유산을 맡기고 죽어도 아마 공정하게 관리를 해줄 거야.”
그러면 그 소문을 말하는 사람이 상당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당사자는 보지 못했었어도 “아 그런 분이 있었구나. 그런 분이 우리 동네에도 하나 있으면 참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만약에 보통 사람과 마주치면 고개만 까딱하겠지만, 그런 훌륭한 분과 만나면 90도로 인사할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면 종이컵에 물 갖다 줄 사람이 아마 유리컵에다 잔 받침에 공손히 드릴 것입니다. 이것이 영광입니다. 그런데 다들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 알고 있어서 사람을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는데 누가 나타나서 근거도 없이 그의 영광을 훼손한다고 칩시다.
세상에서 가장 비열한 짓은 사람들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호해줄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근거도 없이 사람들을 막 비난하고 나중에 “아님 말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굉장히 비열한 짓이고 성경에서 경고하는 죄입니다. 개인적으로 감정이 나빠서 사람을 비난 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감정이 생겨서 누군가에게 한마디를 들었는데, 전달하는 과정에서 둘 셋 넷 보태서 더욱 그 사람의 영광을 욕되게 할 수 있습니다. “아니야. 너그럽긴 뭐가 너그러워.”, “그 뭐 듣자하니 성깔이 보통이 아니래.”, “정직하긴 뭐 개 코가 정직해. 안 그렇대.”, “나도 어디서 들은 이야기인데 엄청 해 먹었대.” 이런 식으로 사람의 영광을 욕되게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생애에서 몇 번의 반란이 있었지만 이 시의 배경은 압살롬의 반란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일국의 왕이 되고자 할 때에는 전임자인 왕을 비난하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정권 바뀔 때마다 자신들을 의롭게 보이기 위해서 바로 앞 정권이 나라를 다 말아 먹고 아주 나쁜 놈들만 모였던 거처럼 묘사를 합니다. 그리고 돌고 돌면서 다음 정권이 나타나서 다음에 자기를 그렇게 씹어댈 것입니다. 그래서 국민의 마음속에서 아무도 존경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시인이 왕위에 있었으나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 그런 식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압살롬과 그를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이 그렇게 악한 소문을 내면서 결국은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도망갈 때 시모이라는 작자가 나타나서 흙을 던지면서 감히 저주를 퍼 부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영광을 다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럼 영광이 자신들에게 돌아가는가 하면 아닙니다. 그래서 자신을 의롭게 보이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헐뜯고 비난하는 것은 더더욱 비열하기 짝이 없는 짓입니다. 그것은 돈을 훔치는 것보다 더 더러운 죄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다윗
시인이 그러한 억울한 일을 당하였습니다. 말할 수 없는 깊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것은 영광을 욕되게 하는 수모였습니다. 예전에는 백성들이 다윗을 정말 아버지처럼 여기고 따랐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무리들이 발란에 동참하면서 다윗을 개같이 여겼습니다. 어떻게 감히 왕이 지나가는데 흙을 뿌리면서 저주를 퍼 부을 수가 있습니까? 다윗은 참 훌륭한 신앙인입니다. “저주를 퍼붓는 저놈의 목을 단칼에 베겠습니다.”라고 장군이 애기하니까, 다윗이 “그러지 말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혹시 아냐? 하나님이 저 사람을 시켜서 욕하게 하시는지 누가 알겠느냐?”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습니다. 크고 넓은 틀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며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사람이 저렇게 비난하는 것은 진상을 모르고 욕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 마음이 아프지만, 이 모든 것이 사실은 하나님이 나를 정결케 하시기 위해서 하시는 일인지 누가 알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숙한 반응을 보이는 다윗의 신앙을 정말 훌륭한 신앙입니다. 저는 점점 나이가 들면서 나는 저 상황이면 저렇게 반응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원수들에 의해 명예가 더렵혀질 때 우리도 분한데 하물며 다윗은 한나라의 왕입니다. 온 백성이 우러르는 왕이니,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옛날에 제가 알던 한 사람이 코미디언이었는데 굉장히 잘 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인기가 하락했습니다.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인기를 가져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자기가 크리스찬인데도 불구하고 매일 자살하고 싶다고 고백했습니다. 인간의 영광도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아이들이 자살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영광과 관련이 있습니다. 자기가 잘못했는데 엄마 아빠가 완전히 짓밟아 버리는 것입니다. 부모의 한마디가 콱 꽂히면서 마지막으로 버티고 있던 자존심 같은 것들이 와르르 무너져 버립니다. 그러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경험해보셨을 것입니다. 남편이 돈도 못 벌고 무능한데, 어느 날 아내가 아주 표독스럽게 몇 마디 확 쏘아 붙이면 가슴에 확 박히면서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부모가 아이들한테 잘못 말하면 부모까지도 죽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존속살인 같은 범죄들이 발생합니다.
지난 시간에 명예는 생명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이렇게 볼 때 아주 쓰레기처럼 살면서 명예는 무슨 얼어 죽을 명예하면서 자기를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아내가 분명히 잘못하긴 했는데 남편이 말 한마디로 떡을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때는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겁니다. 가난할 때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아니라 힘들 때 죽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아니라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시인이 원수들에 의해서 자신의 영광이 욕됨을 당할 때 나라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의 존재의 기반 자체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이 불같은 시련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날 이야기 했던 목사님의 예화 같은 것은 아주 극단적인 경우에 속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한꺼번에 영광을 빼앗기는 뼈아픈 경험이었습니다. 그것만큼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 정말 신앙이 없으면 살인도 저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누군가가 몰래 돈을 훔쳐간 것과 명예를 실추시켜서 많은 사람들에게 비웃음꺼리가 되게 만들었다고 할 때, 전자의 사람은 용서해 줄 수 있지만 후자의 사람은 용서가 안 됩니다. 전자의 사람은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감옥소에 왜 들어왔냐?”, “그냥 줄 하나 잘못 잡았는데, 뭐가 그리 큰 죄라고 여기까지 집어넣네.”, “줄 끝에 뭐가 달렸는데”, “남의 집 소가 한 마리 달렸다고나 할까” 이렇게 누군가 물건을 가져도 물론 속상하지만, 명예를 훼손당한 시인이 더 뼈저린 고통을 당했습니다.
경건한 자의 명예를 지켜주심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의 명예를 하나님이 보존해 주십니다. 이것도 굉장히 커다란 주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명예를 보존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의 이름을 높여서 당신의 뜻대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시인이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런 상황일지라도 시인이 하나님이 자기를 받아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께서 경건한 자의 간구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자는 히브리어로 ‘하씨드’(dysij)인데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의 간구를 하나님이 들어주신다. 하나님은 은혜를 입은 자들의 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는 창기와 세리와 같이 짐승처럼 살아온 사람들에게도 베풀어집니다. 그러면 무엇을 보고 하나님은 이런 은혜를 베푸십니까? 은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물이지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실만한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비유컨대, 가뭄이 들어서가 물이 없는데 때마침 하늘에서 단비가 내립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큰 양동이를 갖다 놓고 어떤 사람은 작은 사발을 갖다 놓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넓적한 그릇을, 어떤 사람은 길고 뾰족한 그릇을 갖다 놓았습니다. 어느 그릇이건 간에 양의 차이는 있지만 빗물이 담깁니다. 그러나 업어놓은 그릇에는 빗물이 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만한 사람들에게 베푸시고.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만한 사람들에게 베푸십니다.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았어도 자신이 은혜를 받기에 합당하다고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은혜의 단비를 내려주신 주님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솔직히 다윗이 이런 일을 당한 것이 징계라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다윗은 비록 죄를 지었으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면서 참회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편입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께로 기울진 마음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올바로 살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지만 이런 사람들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시인의 애절한 소원이 5편에 이렇게 녹아 있습니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시리
오 주여 아침에 내가 기도하고 주께 바라리다
결론과 적용
죄 가운데서도 시인은 내 심사를 통촉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깨끗하고 의로워서가 아니라 비록 내 안에 죄가 있을지라도 내 마음의 깊은 소원은 당신께 기울어져 있습니다. 어떤 때는 부분적으로 하나님보다 죄가 좋아서 선택한 경우가 있지만 내 마음의 깊은 본성은 당신 앞에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깊이 매달리면서 처절하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기도를 즐겨 들으시는데 오늘날 사람이 왜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마음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울지 않으니까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주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온 마음을 다 드리지 않습니까? 마음이 고장 나서 하나님 앞에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깊이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그렇게 주님께로 가까이 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필요합니다.
주께서 마음에 두신 기쁨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셀라)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할지어다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시 4:4-8)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모든 환란, 시련, 고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면 하나님께서 지켜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4절부터 8절까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보여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면서 사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지는 것은 우리의 범죄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절실하게 매달리지 않고 그런 기도의 제목 없이 살아갈 때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된 것이 우리의 인생의 결정적인 문제가 되는 줄은 잘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큰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영적으로 깊은 고통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세상에서의 물질이나 잘 나가는 내 생활, 이런 것들이 별로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어려움이 찾아오게 될 때 하나님 앞에 간구하게 됩니다. 환경의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도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고 영혼이 너무 곤고할 때도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는데, 어느 경우든지 간에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매달려도 주님이 자신의 기도를 잘 듣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되고 자기가 범죄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시인이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라는 말은 “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거라. 그래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면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이 되거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한편으로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더 뜨겁게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것이냐는 문제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떻게 하면 우리 자신을 잘 지켜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의 삶 전체를 실어서 마음과 뜻을 바쳐서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아갈 때에 유지됩니다. 기도제목도 없고 문제도 없다고 자기 좋은 대로 살다보면 금방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집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인생을 살다가 어려운 일을 만나고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 한 번씩 찾아오는 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그런 삶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의뢰
두 번째로 하나님께 대한 의뢰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할 때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살아갈 때 삶이 더 온전해지기를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데 저절로 그럴 마음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이치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모님께 효도한다는 모양도 참 천차만별입니다. 그중에 하나는 부모를 뒷방에다가 모셔다 놓고 부모의 뜻, 부모의 생각, 부모의 요구 이런 것들을 아는 것을 헤아리는 것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삼시 세끼 밥 해드리고 필요한 것을 드린다고 해서 그분들과 의사소통이 안 됩니다. 아버지가 무엇을 필요로 하시는지, 어머니가 무엇을 필요로 하시는지 살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식으로써 내 할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좀 기분 나쁠지 모르지만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그것은 효도가 아니고 적선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더 비난조이지만, 마치 애완동물을 가둬두고 말 못하는 짐승에게 자기 기분에 따라서 먹을 것도 주고, 마실 물도 주고, 뼈다귀도 하나 주고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부모님들이 나이가 들어서 집안에서 경제권이 없어지고 힘이 없어질수록 외로운 사람들이 됩니다. 그분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분이 필요로 하는 것이 꼭 먹고 입고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느 때에 외로우신가?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이렇게 생각하며 효를 행하는 것이 진정성 있는 공경적인 효도입니다.
하나님을 공겸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경의 첫 번째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주님의 마음을 전수받고 또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 속에 담겨진 뜻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중심점 자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게 되면 오히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저한테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어떤 것이 하나님께서 기쁨이 되겠습니까? 저에게 너무 마음 쓰지 마시고 어떻게 우리가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겠고, 또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겠습니까?” 내가 그렇게 살도록 도와주십시오.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도할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 이런 것들은 아랑곳도 없이 자기의 요구만 이루면 된다는 식으로 하나님 앞에 가서 매달리는 것들은 믿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내 아픔을 좀 알아달라고 내 서러움을 알아 달라고 매달리잖습니까? 한순간이라도 ’한번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오늘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내 가정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실까? 요즘의 나의 게으르고 나태한 삶을 보면서 주님이 얼마나 아프실까?’라고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그러면서 “하나님 죄송합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가 바로 기도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의 여정들을 돌아보십시오. 정말 기도가 열렬하게 잘 될 때가 있었습니다. 문제가 많아서 잘 된 것이 아니라 회개를 했기 때문에 잘 된 것입니다. 기도의 문이 열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서, 하나님 앞에서 새로워 졌던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변화의 인생 살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죄가 있으면 의지가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이 신자가 자꾸 죄에 심각하게 빠지면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 자체의 성분이 독립하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 자체가 하나님과의 의존을 떠나서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해서 독립하려는 속성이 죄 안에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깊이 깨뜨려질 때, 자기가 독립하려는 의지도 파괴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회개 속에서 자기가 깊이 깨뜨려질 때, 아주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즉, 하나님 없이 살 수가 없습니다.
주 없이 살 수가 없네 내 주는 아신다 ♬
결론과 적용
세상에 태어나서 커다란 부를 누리고 높은 지위를 갖고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아도 다 공허합니다. 주님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 마음은 자기가 깨뜨려지고 죄로부터 멀어질 때 속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활은 늘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제가 묵상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님, 목회가 무엇입니까?” 내가 한참 동안 똑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목회란 마음의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 그것이 목회다.” 그런데 목회만 그렇겠습니까? “누군가 나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 무엇입니까? 혹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생활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역시나 대답은 같습니다. “마음의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 그것이 성화의 삶입니다. 자기에게 아무리 큰 물질이 있고 먹고 살 돈이 있고 모든 행복한 조건이 있어도 그 모든 거짓된 표상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찾아서 날마다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처럼 그렇게 신앙생활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 정욕에 굴복하는 삶. 둘째, 거짓된 영상에 현혹된 생활. 하나는 애정에 관계된 것이고, 또 하나는 지성의 인식에 관계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언제 파괴되느냐 하면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할 때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할 때, 자기는 그런 것들을 의지하며 살아가야할 사람이 아니라 진짜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살아가야할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우리는 거기에 깊이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기 위해서는 의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의의 제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 대한 반응으로서 어떻게 하든지 자신의 삶과 존재를 그분의 뜻에 합치시키려는 삶의 제사입니다. 우리가 분투하며 살 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지, 방만하고 게으르게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은 거룩한 삶의 친구이지, 죄악 된 삶의 벗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지막에 시인이 이야기 합니다. 이렇게 많은 일들이 일어나도 자신의 마음에 두신 기쁨은 곡식과 포도주보다 더 큽니다. 그것들이 주는 기쁨보다 훨씬 큽니다. 우리 문맥에서는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먹는 것 자체가 너무 불안했습니다. 저희 어렸을 때도 생각납니다. 어릴 적 할머니가 이웃집에 마실을 다녀오셔서 늘 부러워하십니다. “야, 아무개네 집에 갔더니 쌀을 가마로 놓고 먹더라.” 옛날에 짚으로 짠 가마니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부엌 같은 곳이 아니라 방에다가 놓았습니다. 쌀이 워낙 귀하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은 두 말, 말 쌀 사다 먹는 집, 그리고 더 가난한 집은 봉지쌀을 사다 먹었습니다. 저녁이 되어 퇴근하는 사람이 왼손에는 연탄 하나 들고 오른손에는 쌀 한 봉지 들고 들어오는 광경을 동네 어귀에서 늘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가난하던 시절, 겨울에 연탄을 한 3백장을 뒤뜰에 잔뜩 싸놓고 겨울을 나는 사람은 동네의 부러움을 사는 집이었습니다.
좋은 포도주가 가득 있고 곡식이 잔뜩 있어서 겨울이 오는 것이 두렵지 않을 때 사람들의 마음은 기쁩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획득되는 기쁨은 그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우리의 인생에 살아온 과거를 돌아보면, 가장 행복한 때에는 하나님 때문에 행복했고, 가장 불행했던 때는 나의 죄 때문에 불행했습니다. 환경적인 문제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그토록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간직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러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시편4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