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50
목 차
온 땅에 가득한 하나님의 위험(시 50:1-3) 1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영광(시 50:2) 6
아름다운 시온(시 50:2) 12
불처럼 바람처럼(시 50:3) 16
제사로 언약한 백성들(시 50:4-6) 20
이스라엘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새 성품(시 50:7-12) 25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언약백성의 삶(시 50:13) 29
진정한 제사(1)(시 50:14-15) 33
진정한 제사(2)(시 50:14-15) 38
사는 것과 아는 것(시 50:16-21) 45
새로운 제사(시 50:22-23) 52
감사로 제사(시 50:23) 59
시편56편 강해 1
시편50편 강해 1
시편50편 강해 1
시편50편 강해 1
시편50편 강해 1
시편50편 강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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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50편 강해 1
시편50편 강해 1
온 땅에 가득한 하나님의 위엄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발하셨도다
우리 하나님이 임하사 잠잠치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불이 삼키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시 50:1-3)
본문해설
시편 50편도 찬송시입니다. 1절에서는 온 땅에 가득한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2절에서는 언약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시온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을 보여주고, 3절에서는 그 위엄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능력 있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온 땅에 가득한 하나님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라는 것은 그 당시의 세계관으로 볼 때 온 세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해 돋는 곳에서부터 시작해서 해지는 데까지라는 것은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지상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은 땅은 평평하고 하늘은 투명한 바가지를 엎어 놓은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평평한 쟁반 같은 땅에 투명한 유리 바가지를 엎어놓은 것이 하늘이고, 그 하늘에 별을 달려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우주관이니까 조잡하긴 하지만 그렇게 생각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해도 투명한 바가지와 같은 하늘에 붙어서 도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우주관을 가지고 있었던 히브리인들의 생각을 염두에 두면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라는 것은 세계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히브리인은 태양이 지고 나면, 그 다음에도 같은 동쪽에서 뜨는데 이것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태양에 대한 기록은 보지 못했지만 달에 대한 기록을 보았는데 달이 매번 완전히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히브리어로 ‘달’이라는 말은 ‘호데쉬’(vd<jo)인데, 똑같은 어근에서 나온 말 ‘새롭다’라는 단어가 ‘하다쉬’(vd'j;)입니다. 한 달이 지나면 완전히 다른 모양으로 변해서 초승달이 뜨지 않습니까? 옛날 사람들은 달이 변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달이 완전히 죽고 손톱이 나듯이 새 달이 뜬다고 보았습니다. 어쩌면 이 사람들은 태양도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라는 것은 그 당시의 우주관으로 보면 인간의 사고가 미칠 수 있는 지상의 모든 세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여기서 ‘부르셨다’라는 것은 해 돋는 데부터 해 지는 데까지, 다시 말해 창조된 모든 세계 중 어느 사람 어느 만물과도 하나님이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이나 사물이 없이 관계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선 창조에 있어서 그러합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지상의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분은 세상과 관계를 맺고 계십니다. 창조된 것들은 창조된 다음부터 홀로 자신 안에 있는 원리만을 가지고 하나님과 단절된 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들을 붙들고 계심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물 안에 있는 모든 법칙은 그것이 독자적인 법칙을 가지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법칙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만물을 붙들고 계시는 규칙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세상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람과 모든 사물들이 창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라지기도 하고 다시 나타나기도 하지 않습니까? 생성과 소멸도 결국은 하나님에 의해 주관되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인간과 사물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공중에 나는 새한마리도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
그런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라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상기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과 ‘여호와’가 함께 두 명칭이 함께 따라오는 것입니다. 획일적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대체적으로 볼 때 하나님은 보편세계에 계시는 모든 만물위에 뛰어난 능력으로서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고, 여호와는 언약백성들과 관계를 가지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든지 땅에 있는 모든 사물이든지, 모든 세계와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여호와는 그 안에 있는 자기 백성들과 언약을 기초로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우주적인 하나님과 언약백성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함께 부르고 있는 대목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정하게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가장 큰 위무는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을 잘 믿고 세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발견하면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하는 사람들은 행복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찮은 삶을 살게 되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전능하신 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은 무능하거나 불능한 것이 없이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힘과 의지를 보여줍니다. 중세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절대적인 능력과 규정된 능력으로 나누었습니다. 절대적인 능력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악한 자들에게 상을 주시고 의로운 사람들에 고통을 주시는 일도 하실 수 있는가? 하실 수 없는가?” 이러한 논의들을 개혁주의자들이 한 번에 부숴버린 것입니다. “그런 질문은 쓸데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은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성품과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선한 자들을 벌주시고, 악한 자들에게 커다란 행복을 주시는 것을 하실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모든 논의는 쓸데없는 것입니다. ‘전능하다’라는 의미는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성품의 빛 아래서 질서 지어진 능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전능하신 능력입니다.
구속주를 통해 창조주를 앎
이러한 하나님의 위대하고 전능하신 능력은 누가 잘 경험했겠습니까? 악을 행하고 질서를 어기며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잘 경험하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도 하나님의 인격적인 성품의 빛 아래서 규정된 질서를 따라 살 때 하나님의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능력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potentia ordinata’라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일평생의 기도제목이 “하나님이여 내 안에 사랑을 질서롭게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질서롭게 하다.’가 ‘ordinata’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은 ‘ordinata’, ‘질서’가 지어진 능력입니다. 질서를 넘나들면서 아무렇게나 사는 악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질서를 따라서 사는 사람들은 질서의 빛 아래 찬란한 하나님의 인격적인 성품들이 다가오면서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모든 세상과 거기 있는 사물과 인간들을 내가 불러내었다. 내가 그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을 피할 수 있는 사물과 인간은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에서만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서는 안 되고, 삶의 모든 곳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를 맺고 계시다고 생각을 하고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도구가 되도록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전능하시고 아름다운 존재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시 않습니까? 그러니까 제일 먼저 창조주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받지 못한 인간이라도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실 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을 것이다.’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드신 이가 없다면 어쩌면 이렇게 현명하고 아름답고 질서 있게 꽃이 필까?’ 꽃잎과 잎사귀가 나는 것도 정확한 수열로 납니다. ‘이런 질서들이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작은 꽃의 무늬까지도 엄격한 질서를 따라서 이루어집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명료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깊이 만납니다. 그러면 구속주를 아는 지식을 통해 창조주를 아는 지식이 선명해지는 것입니다. 구속주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올라가 그분을 볼 수 있게 된 사람이 다시 구속주의 빛 아래서 창조세계를 보면서 창조세계로 내려와 창조세계에 담겨진 신비한 하나님의 질서와 아름다운 계획과 하나님의 성품들을 감상하면서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노래하고 그분의 영광을 찬송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중의 ‘신지식’이라고 합니다. 창조주에 대한 신지식과 구속주에 대한 신지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온 세계 안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아는 만큼 들린다, 음악의 비밀』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음악에 많은 가락이 쏟아져 나와도 아는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만 모르는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창조의 아름다움이 비취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와 관계를 맺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높이고 사랑하고 노래하며 사는 것이 일평생 성도의 의무입니다. 모든 것 가운데 가장 탁월하게 아름다우신 분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의 영혼과 마음을 하나님 앞에 순전하게 드리면서 사는 삶,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진리를 통해 그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은 모든 아름다움의 진수입니다. 끊임없이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그 아름다움의 빛 아래서 거룩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인간의 행복입니다.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영광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발하셨도다”(시 50:2)
본문해설
1절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온 땅과 그리고 온 나라에 미친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해 돋는 데부터 지는데 까지, 다시 말해서 존재하는 땅 끝에서 땅 끝까지 하나님께서 세상을 부르셨는데 부르신 세상에 나타나는 당신의 영광이 시온에서부터 발하기 시작한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보면 ‘시온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빛’이 두 개가 짝을 이루면서 등장합니다.
진리의 빛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빛’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관련해서 ‘빛’이라는 용어가 사용될 때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진리를 가리키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영광을 가리킵니다. 때로는 이 둘이 주의적으로 사용될 때도 있습니다. 빛 자체는 사람들이 볼 수 없지만 오히려 그것이 사물에게 비추어서 빛의 효과 때문에 사물을 볼 수 있습니다. 빛이 가득 차 있을수록 빛이 잘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잘 보이게 됩니다. 그것이 빛의 효과인 것처럼, 진리의 효과는 어두운 지성을 비추어서 진리가 없었더라면 보지 못했을 많은 것들을 보게 만들어줍니다. 이 방에서 불을 모두 끈다면 아마 아무것도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빛이 모두 없어진다면 전혀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때는 소경이든지 뛰어난 시력을 가지고 있든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빛이 들어오면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세상에 물리적인 빛은 우리로 하여금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을 보게 만들어줍니다.
우리는 육체의 눈으로만 사물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지성의 눈으로 사물들을 봅니다.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사람들의 겉모습에 모두 속지 않습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선하게 대하는 것 같아도 그 마음에 나를 싫어한다는 것도 알 수 있고, 저 사람이 나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극한 사랑으로 나를 대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 것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없는 것을 지성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것은 어두움이 사물을 볼 수 없도록 방해하지만, 지성의 눈으로 보는 것들은 우리의 욕망과 사물들의 헛된 표상이 주는 효과에 의해 수시로 가려져서 바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진리는 바로 그런 빛의 역할을 합니다. 흐리고 어둡던 사물에 물리적인 빛이 비쳐지면 윤곽이 또렷해지고 없다고 여겼던 사물이 거기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진리의 빛이 우리의 마음을 비추면 우리는 비로소 그 진리의 빛 때문에 없는 것처럼 여겼던 것들은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되고, 있는 것처럼 여겼던 것들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이 친구들과 만나서 먹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장면은 “의정부에서 포천 가다가 잘하는 집이 있고, 한식은 어디에 잘하는 집이 있고.” 그러다가 “우리 생선회나 먹으러 가자.” 한 사람이 “회를 먹으려면 부산으로 가야지.” 결국 그렇게 즉석에서 군산을 가기로 결정하고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고속도로가 꽉 막히는 것입니다. 보니까 교통사고가 나서 사람이 피투성이가 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차 돌려서 집에 가자. 우리가 지금 뭐 하러 가는 거냐? 거기 가서 먹으면 뭐하냐?” 정신이 들어 온 것입니다. 먹으러 가는 것이 나쁜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죽음의 빛으로 인간을 비춰보니까 회 한 점 먹으러 서울에서 부산까지 내려간다는 것이 허무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 것입니다. 진리의 효과는 이런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진리는 일반적인 진리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와 있는 진리는 단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는 인간을 심판하신다. 인간은 죽는다. 죽음은 허무한 것이다.” 이것만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진리는 그 이상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고,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주는 놀라운 진리의 빛을 성경 속에서 비추고 있습니다. 그것이 여기에서 진리를 빛이라고 할 때에 성경에서 흔히 사용되는 의미입니다.
영광의 빛
두 번째는 본문이 두 번째 용례와 관련되어 쓰였습니다. 그것은 영광의 빛입니다. 영광은 하나님이 거기에 계신 효과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물질과는 완전히 다르신, 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물질과 관련해서 생각하면 하나님은 어디에도 안계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질의 차원에서 보면, 물질과 하나님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무한한 질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디에도 안계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시다면 어디에나 당신의 영광이 있어야 할 텐데,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발하셨도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지만 세계 어느 곳에서든 균등하게 당신이 살아계신 효과를 드러내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지만, 당신이 살아계신 효과를 이 세상 어디에서나 똑같은 정도로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악인들에게 드러내시는 영광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곳에서 당신의 살아계심을 드러내실까요? 우선 악인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살아계심을 보이십니다. 악인이 있는 곳에서는 악인을 심판하시는 소극적인 방법으로 당신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 자신의 뜻과 생각을 거슬러서 행하는 죄인들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심판을 행하심으로 당신이 살아계신 효과를 드러내십니다. 넓은 의미에서 이것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박국서를 보면 ‘어떻게 악인이 성하고 의인이 고통을 받을 수 있는가?’를 고민하던 하박국이 마지막 장에 가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는 상황에서 기뻐합니다. 그러면 포도나무가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고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어진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는 그 성경구절만을 떼어내어 가난하거나 일이 잘 안 풀릴 때에도 하나님으로 인해 좋아한다고 말하는데, 그게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미래에 일어날 심판을 미리 보고 이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언적 과거’라고 하는데, 미래에 일어날 일의 확정성이 너무 분명하기 때문에 이미 일어난 것처럼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나라를 심판하셔서 싹 쓸어버리고 초토화시키신 것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폭격을 받아서 도시와 나라가 전부가 다 진멸이 되고 포도나무든 무화과나무든 감람나무든 싹 쓸어 없어져 버렸고, 외양간의 송아지는 다 죽어서 초토화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때 하박국 선지자는 “나는 즐거워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즐거워하는 것입니까? 나무의 열매나 곡식, 심지어는 농사를 짓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소, 그런 것들이 모두 없어져서 입에 풀칠 할 것도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하나님을 거스르고 악을 행하는 인간들을 징벌하심으로서 만천하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선하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땅뿐만 아니라 악을 행하는 인간들의 땅도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친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인해 선지자는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회의주의자였습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성행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데 도대체 이것은 무엇인가?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성품을 보면서 회의주의자가 깊이 깨뜨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인들이 있는 곳에서 소극적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면, 왜 오늘날도 악을 징벌하심으로서 당신의 영광을 펼치지 않는 것입니까?” 소극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징벌을 통한 영광의 나타남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시고 영광을 해치려고 할 때 그 영광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이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도전하는 인간을 향한 방어적 성품입니다. 그것을 자꾸 두드리면서 깨고 들어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즉각적으로 진노를 발하셔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지는 않으십니다. 죄인을 참으시는 하나님의 오랜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하나님의 또 다른 성품을 자극하여 만인을 향하여 오래 참으심으로, 징벌을 통해 당신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대신 오래 참으심으로 죄인들을 향해 또 다른 종류의 도덕적인 영광을 발하시는 것입니다.
의인들에게 드러내시는 영광
또 다른 경우는 당신을 향해 선을 행하는 인간들을 향한 호의를 보이시는 영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백성들을 좋아하시는 최고의 표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영광은 무엇이라고 정의하기가 어려운 개념이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이 거기 살아계신 효과입니다. 영광의 빛이 비치면 영광이 아닌 모든 것을 어둡게 만들어서 존재에 있어서 거의 없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만들거나, 중요성에 있어서 아주 가치가 없는 것처럼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은 인간의 최고의 행복이며 특권입니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누구든지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전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참다운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난다.”라는 말의 의미는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이 영광은 하나님의 존재나 속성의 어는 한 부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 전체를 포괄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해 주시는 것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영광의 본질적인 개념은 거룩함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피조물과는 비교될 수 없는 질적인 차이를 가지신 초월적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의 도덕적인 성품과는 비교될 수 없는 탁월한 완전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이 어느 한 순간 지성을 압도하면서 밀려오게 되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개념입니다. 영광의 빛 앞에서 인간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에 깊이 압도되어 그분의 살아계심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고 자기를 떠나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는 우주의 최종적인 주권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게 되면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개념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해서 그의 존재와 성품에 압도당해본 경험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의외로 아주 소수입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비극중 하나입니다.
아름다운 시온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발하셨도다”(시 50:2)
본문해설
본문은 하나님의 빛이 발하여지는 중심이 ‘시온’이라고 말합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산지를 가리킵니다. 그 뜻은 ‘마른땅, 요새’입니다. 시온이 하나님에 의해 당신을 만나는 장소로 지정되면서 이 산지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은 부분인데 ‘예루살렘’의 뜻은 지금까지 밝혀진 의존할 만한 학설에 의하면 ‘우르’라는 말과 그다음에 ‘살라인’이라는 말의 합성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로는 ‘이르’(ry[i)라는 말이 됩니다. 예루살렘이 평화의 성이라는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장소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하나님이 언약백성들과 만나시는 장소가 예루살렘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당신의 언약백성들을 만나주시기로 약속하신 장소이고, 그러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구체적으로 성취되는 자리가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성취되는 중심지입니다. 시온은 그 성을 보호하듯이 에워싸고 있는 산지이니까 시온은 언약백성들이 하나님과 만나는 영광을 제일 먼저 경험하는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시온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시온에서 발하시는 하나님의 영광
본문은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발하셨도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당신의 영광이 시온에서부터 가득 찰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원리는 하나님이 어디에나 안 계신 곳이 없으시지만 해 돋는 데부터 해 지는 모든 곳에 당신이 살아계신 효과를 동일하게 나타내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약백성들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당신의 존재와 성품을 알려주십니다. 선택된 당신이 백성들의 땅이 먼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사람들의 지성과 마음 안에 가득 차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나타났을 때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알고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라고 고백하며 엎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먼저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이 그분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시온’이라는 단어 앞에 두개의 묘사가 붙습니다.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이라고 나옵니다. ‘아름답다’라는 것은 두 가지로 설명이 될 수 있는데, 우선 하나님이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만나주시는 곳이라는 점에서 선택받은 것 자체가 구별을 의미하고 하나님과 맺은 특별한 관계를 뜻합니다. 여기에서 ‘아름다운’이라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고 지정되었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름답다’는 말은 여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질서를 뜻합니다.
성경을 보면 항상 하나님이 시온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삼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항상 아름답게만 보셨느냐 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그들을 아주 아름답게 보시는가 하면, 어떤 때는 마치 손에 붙은 징그러운 거미를 보는 것처럼 끔찍하게 생각하시던 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시온을 다시 깨끗하고 정결하게 하시는 일을 수행하기도 하시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 혹은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은 해 돋는 데부터 해 지는 데까지의 모든 세상보다 이스라엘을 염려했습니다. 해 돋는 데부터 지는 데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사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이스라엘의 영혼의 상태가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관심사는 이스라엘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에 집중되셨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웠을 때 그것은 질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이 해 돋는 데부터 해지는 데까지의 온 세상에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는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모든 인간이 자신이 돌아갈 자리로 돌아가는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한 나라가 되고,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이 그러한 나라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될 때 시온은 아름다운 시온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의 빛을 언약백성들의 중심지인 예루살렘과 시온에 찬란하게 비추시고, 거기에서 백성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구현되기를 바라고 온 땅과 나라가운데서 당신 의 영광이 구현되기를 사모하면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발하셨도다”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역할
시인은 시편 68편에서 “주는 당신의 도를 당신의 얼굴빛을 당신의 백성들에 비추사 그 도를 만방에 알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얼굴빛’이라고 이름 하는 영광을 자기 백성들에게 충만하게 비추실 때 비추신 그 빛으로 인하여 백성들은 충만하게 됩니다. 충만한 은혜와 영광 안에서 그들은 해 돋는 데부터 해 지는 온 땅이 주님이 부르신 세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하나님의 도가 무엇인지를 삶으로 가르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백성들을 통해서 나타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시온이 세상과 맺고 있는 관계는 명백하게 신약시대의 교회와 세상이 맺게 될 관계를 예표 합니다. 해 돋는 데부터 해 지는 데까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온전하게 전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영적인 상태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의 이름의 거룩하심과 위엄과 영광을 알고,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이며 하나님의 계명을 받들며 그 통치 아래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참된 행복인지를 알게 될 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을 보여주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번영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에 결정적인 도움이 됩니다. 교회의 참다운 영적 번영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소망이 없는 세상을 향해서도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리의 빛을 통해 주님의 영광을 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영적인 번영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입니다. 교회에 돈이 많고 사람이 모인다고 해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이 잘못되어있고 변화되지 못한 교인들이 교회에 가득 차게 되면 온 땅에 흩어져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교회가 계획하고 목표로 삼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상관없는 것들이 됩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영광이 해 돋는 데부터 해지는 데까지 충만하게 되는 일을 위해 이바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역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영적인 번영을 위해, 그리고 세상나라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전파를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이 목회자이고, 여러분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며 목회자와 함께 교회의 참다운 영적인 번영과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불처럼 바람처럼
“우리 하나님이 임하사 잠잠치 아니 하시니 그 앞에는 불이 삼키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시 50:3)
소멸하는 불이신 하나님
3절에 나오는 불같이 바람같이 하나님을 묘사하는 대목은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의 빛을 시온에서 발하실 때 영광의 빛이 전파되는 방식입니다. 불은 기존의 것을 태워버립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불이 태우고 나면 재만 남습니다. 그러니까 불이 의미하는 바는 소멸입니다.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요”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불은 태우는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붉은 꽃, 푸른 잎, 갈색 나무, 이렇게 여러 가지 색깔이 있어도 태우고 나면 모두 다 소멸되어 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아름다운 시온에 비취실 때 시온에서든 이방의 땅에서든 소멸하는 불로써 당신과 상관없이 세워진 당신이 원하시지 않는 모든 질서를 소멸하시는 일들을 하십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경험할 때 은혜는 우리에게는 소멸하는 불이 되어 하나님 없이 인간의 욕망과 죄에 의해 수립된 우리 안에 있는 많은 질서들을 태우십니다. 허물어져 버리고 소멸됩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성령을 불로 묘사합니다. 물이나 바람으로도 묘사합니다. 물로 묘사하는 것이 정결하게 하는 것이라면, 불로 묘사하는 것은 태워 없애버리고 파멸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속에 세워진 잘못된 사상들과 인생관, 사회의 제도, 마음, 편견,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불로 삼키시면서 파멸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일들이 있기 전에 하나님은 먼저 시온을 아름답게 하십니다.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관계에 있는 예루살렘과 시온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돌아오도록 하십니다. 그들을 먼저 태우셔서 정결케 하시고,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사상과 삶과 예배의 질서들을 파괴하시고 언약의 중심인 교회가 아름답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운 시온에서 당신의 영광의 빛을 충만하게 발하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덩치를 키운다고 해서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교회에 사람들이 많아도 그 크기를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과 다른 영혼과 마음,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요소입니다. 우리가 쓸어버려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 이런 것들을 알려주는 도구일 뿐입니다. 캄캄한 밤바다에서 배가 길을 잃어버렸을 때 온 항구가 수천 개의 조명탄을 쏘아 올려서 훤하게 보여야만 항구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등대 하나라도 바르게 켜져 있으면 그 등대 하나를 보고 수많은 배들이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논리입니다. 세상이 타락하고 어둡다고 하는데 그럴수록 온전한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은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배가 그 등불을 보고 항구로 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는 결국은 하나님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힘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 힘이 많아지고 커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힘과 위력을 가지고 자신들이 원하는 질서를 세상에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사회에서 촉진되고 있습니다. 요즘은 목욕탕 하나를 만드는데 100억, 150억, 심지어는 300억씩 들인다고 합니다. 옛날 동네 골목골목에서 보이던 목욕탕들은 다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구멍가게도 다 사라지고 이제는 들어서면 자기 차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규모의 건물들이 들어서는 것입니다.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커지면 경제적으로 돈을 많이 번다.” 이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인간 안에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은 크게 많게 해서 뒤덮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떠난 자신들이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가인이 타락한 후에 그 자손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큰 건물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잘못 세워진 것들을 소멸하는 불로써 태워 버리십니다.
광풍을 부시는 하나님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문맥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는 바람이 많이 분다고 합니다. 1986년도쯤 여름에 어마어마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둑 위를 지나가던 봉고가 뒤집힐 정도였으니까 어마어마한 바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바람이 불 때는 일단 창문을 다 열어서 바람의 영향을 최대한 덜 받아야 합니다. 포천 쪽에 가면 몇 십 년 동안 서있던 가로수가 전부다 넘어져서 뿌리가 뽑혔습니다. 바람이 지나간 다음 한 번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바람이 계속 부니까 뿌리가 흔들려서 땅 사이에 간격이 생긴 것입니다. 그때 강한 바람이 부니까 몇 십 년씩 심겨왔던 나무가 뿌리를 드러내면서 쓰러지는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나무가 그렇게 쓰러져 있었습니다. 무서운 바람이었습니다. 시인은 그러한 바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것은 오랫동안 세워져 있던 잘못된 질서들이 뿌리가 뽑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형태의 파멸을 의미합니다. 일단 뿌리가 뽑혀서 나무가 쓰러지고 뿌리가 땅위로 올라오면 그 나무는 더 이상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구약학자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엘로힘’이라는 단어인데, 이것이 아마 ‘엘론’(@/lya)이라는 단어에서 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엘론’은 도토리나무입니다. 도토리나무가 하나님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바람이 불어서 수많은 나무들이 쓰러질 때 끝까지 쓰러지지 않는 나무가 상수리나무, 도토리나무라고 합니다. 뿌리가 특별한 모양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엘론’ 하면 아주 강한 것으로 인식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복수형이 되어서 ‘엘로힘’이 되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사방에 광풍을 불러일으키십니다. 무엇으로도 쓰러지지 않던 인간의 사상, 사람의 마음, 인생, 이런 것들을 쓸어버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사방에 부는 광풍으로 묘사가 되는 것입니다. 중국정부 이런 데서 기독교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북한은 더 두려워합니다. 아마 한 사람 당 10억씩 주면 북한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도록 해주겠다고 하면 한국에 10억 주고 사람을 보낼 교회가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못하는 것입니다. 가끔 북한에서 부흥회를 합니다. 어마어마한 돈을 받고 그 일을 하는데 사람을 다 골라서 보냅니다. 거기에 가서 은혜 받을 만한 사람은 안 보냅니다. 그런데도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무서워합니다. 특히 이슬람 같은데 복음이 들어가면 사회가 뿌리 채 뽑혀버립니다. 우리나라의 첩실제도가 사라진 것이 기독교의 힘이라고 합니다. 남녀평등을 가져온 것이 기독교의 힘입니다. 내버려뒀으면 지금도 어림없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에 맞지 않는 사회의 모든 것들이 믿음이 들어가게 되면 다 부셔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광풍과 같이 부는 바람의 힘입니다. 그런 강력한 바람은 하나님의 언약의 도성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되어 아름다운 질서를 가지고 그분 앞에 기쁨이 될 때 일어나게 됩니다.
결론과 적용
세상을 변화시키는 현존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은 언약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교회가 올바르게 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가 참된 진리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에 의해 쇄신된 모습으로 있을 때 하나님의 임재의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부흥의 원리입니다. 세상을 진정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교회의 덩치를 키워서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있는 사람들이라도 주님을 잘 믿고 변화되고 한 사람 한 사람 들어올 때 교회의 덩치에 관심을 갖지 말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으로 주님 앞에 복종된 사람으로 변화될 때 이 세상은 놀라운 변화들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제사로 언약한 백성들
“하나님이 그 백성을 판단하시려고 윗 하늘과 아래 땅에 반포하여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너의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
하늘이 그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셀라)”(시 50:4-6)
본문해설
여기에 나오는 ‘셀라’라는 단어는 아마도 음악적인 부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셀라’가 음계를 높여서 부르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은 ‘셀라’라는 정확한 뜻을 거의 다 잊어버렸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야곱이 사닥다리를 만난 내용이 나옵니다. 거기에 쓰인 단어하고 앞에 두 글자가 같습니다. 끝에 한 글자가 틀린데 그것은 동사 끝에 오는 문자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사라지거나 바뀔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음을 높여 부르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술람’(!L;s)이라는 단어는 사닥다리가 아니라 고속도로입니다. 왕들이 다니는 도로를 의미하는데 그런 큰 길이 하늘을 향해 맞닿아 있는 것처럼, ‘셀라’도 음을 높여 부르라는 뜻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시편을 읽을 때 읽지 않는 것이 관례입니다.
언약백성을 먼저 정결하게 하심
1절과 3절에서 아름다운 시온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한 후에 갑자기 시의 초점이 시온을 향해 클로즈업됩니다. 하나님이 온 땅과 온 세계위에 당신의 영광을 펼치시는 분이심을 공표한 후에 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먼저 자기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을 보여줍니다. 거기에서 백성들을 향한 당신의 성품을 보여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당신의 백성들을 판단하시려고” 하는 말에서 나타납니다. 당신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온 땅에 두루 비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백성들을 통해 발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판단하시고 정결하게 하시는 작업이 일어납니다.
한 사람이 주님을 믿고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제대로 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비결은 교회가 참으로 교회답게 되는 것입니다. 배들이 어두운 밤바다에서 항구로 피하기 위해 수천 개의 조명탄이 쏘아 올려져서 항구를 대낮처럼 밝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등대의 불빛 하나만 제대로 빛나고 있어도 그것을 보면서 배들은 피할 수 있습니다. 미국사람들이 즐겨 쓰는 속담가운데 “현존이 가장 훌륭한 선포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떠한 상태로 세상에 살아있는가 하는 것 자체가 최고의 외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당신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고 싶어 하시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올바르게 말씀을 붙들고 살지 않으면 은혜를 부어 주셔도 은혜는 그 안에서 부패하게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육신의 생명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물질과 마음 안에 있는 은혜, 사랑, 하나님을 향한 직분과 사명까지도 모두 은혜로 주신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은 은혜로 주어진 것들인데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참된 신앙으로 살면, 하나님이 주신들을 통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이것들 때문에 우리가 뒤로 물러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부귀와 영화를 주셨지만 그는 부귀와 영화 때문에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셨어도 신앙이 바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웃시야를 왕으로 삼으신 것은 하나님이시지만 그가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버린 것은 하나님이 주신 왕이라는 높은 지위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의 어떠함이 가장 커다란 외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땅을 불로 삼키고 광풍을 불러 일으켜 당신의 위엄과 존귀와 영광을 드러내시기 전에 먼저 그 일을 하고자 부르신 당신의 교회와 언약백성들을 정결케 하십니다.
제사로 언약함
“윗 하늘과 아래 땅에 반포하여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너의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 이것은 하늘과 땅을 향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고대 근동지방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이것은 재판할 때 증인으로 삼는 모습입니다. 사람을 증인으로 삼으면 늘 자기에게 유리한대로 거짓말을 하고 위증을 합니다. 그래서 재판을 굽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은 위증을 하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명명백백한 것을 가리켜 “하늘도 알고 땅도 안다.”라고 합니다. 그런 표현이 성경에도 여러 번 나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을 불러서 증인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변할 수 없는 당신의 선포를 들려주시기 전에 하나님은 하늘과 온 땅을 불러 선포하십니다.
“이 백성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들이다.” 이 제사로 언약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제사는 하나님이 언약을 맺은 백성들에게 계시된 것입니다. 제사제도는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신 백성들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 율법이 들어오기 전에도 이미 제사가 있었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율법이 들어온 것은 후이고, 제사는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아담과도 언약을 맺으시고 노아와도 언약을 맺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언약을 맺으시는 것이 나옵니다. 그것들을 토대로 모세와의 언약이 나오는 것입니다. 제사는 결국 하나님 당신과의 특별한 관계, 언약을 맺은 백성들에게 당신을 섬기고 만날 수 있는 수단으로 주신 은혜의 제도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제사를 통해 실제적으로 하나님과 맺은 관계들이 구체화되어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속죄의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죄를 용서받게 됩니다. 화목의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고 백성들 안에서 그 화목을 함께 구현합니다. 번제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헌신을 표합니다. 그것이 바로 제사를 주신 목적입니다. 제사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에게 주신 것과 동시에 그 언약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게 하는 훌륭한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이 되었습니다. 구약의 예배 중 어떤 것들은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에 신약의 예배와 연결이 되지 않지만, 대부분의 것들은 그 정신에 있어서 신약의 예배의 뿌리가 됩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배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가 구체화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제대로 은혜를 받으면 자기가 얼마나 커다란 죄인인지를 깨닫게 되고 자기가 얼마나 비천한 인간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배를 통해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경험하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나의 모든 인생을 드려 섬길만한 존귀하신 분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 매우 소중한 모습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이 뒤로 물러갈 때 하나님이 항상 문제로 삼으신 것은 제사였습니다. 제사를 왜 그렇게 드리냐고 하시고, 또 성경에 보면 “나는 제사를 안 기뻐한다.”라고도 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제사 제도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릇된 방식으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로 인한 하나님의 슬픔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삶이 예배의 핵심적인 표현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예배의 삶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면 그의 받으심 직한 삶 때문에 좁은 의미의 예배가 빛나게 되고,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게 되면 넓은 의미에서의 예배인 삶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연속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것을 끊임없이 상기해야 했습니다.
한 시대의 교회가 모든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기 위해서는 교회가 하나님 자신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도 기뻐하지 않는 하나님을 무슨 목적으로 전파하겠으며, 또 전파한들 전파 받은 사람들이 교회에 왔을 때 하나님에게 싫증난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보면서 무엇을 배울 수가 있겠습니까? 교회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먼저 당신의 교회를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불이 삼키고 사방에 광풍이 불게 되는 일을 세상에 행하시기 전에 먼저 교회에 임하게 하십니다. 당신을 바르지 않게 섬기고 믿는 사람들을 혼내고 쇄신시키고 정결케 하셔서 그들을 통해 온 세상에 당신의 법을 선포하십니다.
재판하시는 하나님
6절에서는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라고 하는데, 그 때 재판하시는 하나님은 제일 먼저 자기의 백성들을 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자기의 백성들을 깨끗하게 하신 후에, 이 세상에 있는 백성들을 심판하셔서 해 돋는데 부터 해 지는 데까지 온 세상이 하나님의 것임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임재의 영광을 교회에 채우고 그 교회를 통해 온 땅위에 당신의 임재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시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거스르고 반항하며 사는 것을 죄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고 바라시는 삶은 온전한 순종과 사랑으로 그분을 섬기고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공경하는 기쁨 속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당신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본이요 도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들에 의해 전해지십니다. 해 돋는 데부터 해 지는 데까지 온 세상을 판단하시고 당신이 재판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 속에서 하나님이 정말 아름다우신 분이시고, 은혜를 충만하게 내려주시는 분이심을 모든 사람들이 깨닫고 기뻐하며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삶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새 성품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시 50:7-12)
제사에서 드러나는 언약관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어진 언약관계는 제사에서 가장 잘 나타났습니다. 언약관계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특별히 부르심을 받아서 그분과 약속을 맺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약속은 양쪽 당사자들이 서로 의무를 지고 어떤 일을 위해 약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우리의 언약은 일방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워낙 크고 위대하시니까 특정한 백성들을 불러 당신과의 관계 속으로 끌어들이시는 것입니다. 일방성 안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향하여 은혜를 베푸시고 죄를 용서해주시며 도와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언약을 맺은 백성은 그분 앞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스럽게 살 것을 약속한 것입니다. 그런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인간이 자꾸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이 상기시키시는 방법 중 하나가 제사입니다. 제사를 통해 인간은 우리는 이 땅에 있는 수많은 백성들과는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우리는 매우 특별한 은총을 입은 무리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제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맺어진 언약관계를 상기시키는 정도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 이상의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사를 통한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있어서 실제적이고 중대한 약속들이 현실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한한 은혜의 공급과 죄사함의 약속입니다. 그들이 어떠한 죄를 지었든지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빌면 하나님이 제사를 통해 백성들을 용서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사 속에서 구현됩니다. 속죄의 제사는 그것의 대표적인 예였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제물에게 옮기고 제물이 자신들을 대신해서 죽이는 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렇게 제물을 하나님 앞에 태워드리는 과정을 통해서 죄의 현실성과 무서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결과를 생생하게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뿐 아니라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신앙이 식어질 때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가 하나님 앞에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을 때는 훌륭하게 하나님께로 이끌고 주님 앞에 세우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신앙이 나태해지면 이것이 형식으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일단 제사가 형식으로 흐르게 되면, 제사 제도 안에 깃들여있는 하나님과의 은혜언약이 보증하는 바를 재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사모하는 심정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예배라는 것이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훌륭한 은혜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갈망이 없으면 예배만큼 지루하고 힘든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차라리 어디에 가서 땅을 파는 것이 쉽지, 긴 시간동안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우리가 믿음이 있고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으면 기도는 죄 있는 사람이 기도하면 죄의 용서를 경험하고, 지혜가 없는 사람이 기도하면 판단력을 주시고, 은혜의 힘이 모자라는 사람들이 간구하면 은혜의 능력을 주시는 은혜의 수단이 됩니다.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사라질 때 기도는 아무 힘도 능력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진정한 감사과 믿음을 잃어버려서 아무 유익도 없이 관습을 따라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일이 비일비재 했습니다. 사실 제사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도 당신이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에 대해서 불충실하거나 변절하거나 잊어버리시지 않습니다. 문제는 항상 우리 편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깨뜨리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편에 문제가 있습니다. 항상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깨뜨리려 합니다. 그런 제사를 통해 다시 한 번 주의 사랑의 줄에 매여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이방에서 나그네 되었을 때,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주셨구나. 이 제사 제도는 광야시절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죄가 많아서 이 짐승처럼 피 흘리며 죽었어야 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대신 이 짐승을 죽게 하고 우리를 주님 앞에 살게 하셨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이 식어지면 차가운 형식만 남게 됩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은 이 제사를 하나님을 위해서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 내가 짐승의 피를 마시겠느냐? 내가 배가 고파서 짐승들을 먹으려고 하겠느냐? 혹시 그렇다 할지라도 굳이 그것이 필요하다면 너희들에게 준 많은 제물들, 짐승들, 산에 있는 새들과 이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냐? 내가 필요하다면 너희가 바치지 않아도 얼마든지 내가 취할 수 있지 않느냐?”라고 물으시며 당신의 성품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제사는 그것이 아니라고 상기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항상 우리의 마음속에 이러한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든, 기도를 하든, 봉사를 하든,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에게 그것을 받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섬겨야하는 무거운 의무감만 듭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으신 분이시지만, 예배를 드리면서 나 자신이 주님 앞에 새로워지고 새로워지는 나를 바라보시며 당신이 기쁨을 얻으시기 위해 예배를 드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섬김을 받는 것도 필요하지 않으신 분이지만, 나를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시려는 것이기 때문에 섬김으로 부르셨다. 그래서 이 섬김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구나.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영이신 하나님의 성품에 부합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언약 백성의 삶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시 50:13)
이방과 다른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
본문에서 하나님이 질문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과 구별되는 영적인 분이시며 거룩한 분이시라는 것을 스스로 표명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모든 참된 경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데서 출발합니다. “제사를 형식적으로 드려서 나를 만족시키고 내가 그 제사를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나는 음식에 주린다든지 피에 굶주리지 않는다. 설령 주린다 하더라도 세계와 거기에 있는 충만한 것이 다 나 여호와의 것이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겠느냐? 내가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참된 경배는 하나님이 어떤 분 이신지를 아는 정확한 지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대 근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제사 제도는 어느 나라에나 다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계시의 통일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섬기도록 제사를 계시해주셨는데 제사에 관한 규례는 주전 15세기, 모세 때에 주어지지만 실제로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한 것은 훨씬 오래전 일이었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즉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증거는 그 후에 태어난 가인과 아벨에게부터 제사가 발견됩니다. 율법은 훨씬 후에 주어졌지만 제사는 율법이 있기 전부터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제사가 세계 일류의 보편적인 의식이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전부 시대가 흘러오면서 변한 하나의 약식이고, 원래 궁중에서 드리던 제사의 방법을 보면 성경의 제사의 방식과 상당히 유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섬뜩할 정도로 유사합니다. 중근동 지방에서도 이러한 제사 제도가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거룩하고 무한하시고 완전하시며 불변하시고 높은 도덕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고대 중동 지방의 다신교적인 사상에서 신은 완전하고 도덕적이고 인간과 언약을 맺는 신이 아니라 떼거리로 몰려다니면서 걸근대는 존재였습니다. 신들이 복을 준다는 개념은 약하고 오히려 신들이 심술을 부립니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제사를 지내서 신들을 달래야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신관도 유사합니다. 큰 빌딩 지을 때 지하실을 파고 거기에 돼지머리를 놓고 절을 합니다. 건축비가 덜 들게 해달라든지, 3층을 지었는데 자고 일어나니까 5층이 되게 해달라든지, 그런 황당한 소원을 갖고 비는 것이 아니라 “제발 가만히만 있어다오. 네 땅을 판다고 심술부리지 말고 제발 가만히 있어다오. 우리 사업에 방해를 놓지 말아다오.” 그런 정도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될 때 제사는 다분히 뇌물의 성격을 띠게 됩니다.
신앙이 떨어지자 이런 이방 제사의 개념이 이스라엘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방신들을 섬길 때 그들에게 뇌물을 바치는 것처럼 제사를 드리는 것을 따라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뇌물을 줄때 마음과 뜻과 성품을 바쳐서 뇌물을 주지 않습니다. 마음속으로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그러면서 던져줍니다. 중심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 없이 드리는 모든 예배는 뇌물입니다. 생각 없이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입니다. 주일날 예배를 안 드리면 찝찝해서 마음에 부담을 느낄 자기 자신의 양심의 가책을 털어버리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뇌물의 개념으로서의 예배, 제사의 개념이 들어오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의존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제사는 뇌물이 되는 것입니다. 차라리 제사를 안 드리는 것이 낫지, 당신 자신이 언약백성들에게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을 견디지 못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전 문을 닫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제사를 통해 나는 매일 모욕을 받는다.” 하나님께 대한 진지한 생각,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성경의 명백한 진술, 거기에 기초한 진지한 사색, 이것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알고 싶어집니다. “나는 당신을 뜨겁게 사랑해. 내 온 생명을 주고 싶어. 그런데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개의치 않아. 어느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든 어디에 살든지 출신이 어디든지 성격이 어떻든지 나는 아무상관 없어.” 이것은 몸을 파는 여자들의 고백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저는 당신이 누구시든 아무 상관없어요. 저는 그저 뜨겁게 사랑할 뿐이에요.” 그것은 진정한 신앙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과거를 돌아보면, 어떤 때는 생애적으로 지독하게 방황을 합니다. 거의 죽을 지경까지 갑니다. 나중에 주님 앞에 돌아와 자유함을 얻게 될 때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도 예외 없이 모두, 하나님은 무엇이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대답에 정확하게 연결이 됩니다.
아무렇게나 막삽니다. 그러다가 큰 환난을 당합니다. 그러면서 깨닫는 것은 ‘아,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하기를 원하시는 분이구나.’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답을 깨닫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 지독하게 몸부림을 치는데 아무 일도 안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자기 같은 인간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놀라운 일을 발견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방황하던 사람이 영혼에 생기를 회복하고, 올바른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인도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답 때문에 생애적으로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직분을 맡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두려운지 모르고 자기에게 맡겨주신 직분을 헌옷 보따리 팽개치듯이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하나님의 부르심과 아무 상관없이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인생의 깊은 위기를 만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각성하고 회개하고 돌아오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구나. 우리가 그 일을 위해 충성스럽게 살 때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무엇이며, 하나님 자신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이신가?’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이것은 성품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게 귀결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데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의 한 쪽만을 발견하고 치우쳐서 잘못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래전에 하나님이 용서하신 죄를 가지고 깊이 고통을 받으며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포기하고 방종한 삶을 살며 원망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의로운 성품은 발견했는데 진실하게 간구하는 자를 용서하시고 다시 부르시는 성품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구원파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들은 성화를 안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멀리 떠난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것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돌아온 다음, 그 은혜에 감사하며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면서 살아야 하는 성화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의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삶이 온전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모든 삶은 철저하게 한 치의 예외도 없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이 무엇이시며 누구이신지에 대한 질문에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가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나는 영이신 여호와 하나님이기 때문에 너희가 내게 나아올 때 이 세상 잡신들에게 뇌물을 바치듯이 제사를 드려서 너희의 인생의 보험을 들려고 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그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나를 예배하는 길이 있다.”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제사(1)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4-15)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제사
제사도 하나님 마음에 안 들고, 짐승을 드려서 바치는 헌신도 하나님이 안 받으신다면 하나님은 어떤 방식의 예배를 원하실까요? 14절과 15절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훨씬 내면화된 것입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른 것은 우리는 마음 안에 일어나는 것과 마음 바깥에서 행동으로 일어나는 것들을 쉽게 구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음 안에 있는 것이든 마음 밖에 있는 것이든 한 번에 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마음 안에 있는 것이든 마음밖에 있는 것이든 한 번에 보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마음 안에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나 경외가 없이 행동으로만 그분 앞에 예물을 드리는 제사는 당신을 위한 제사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한 것이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주일날 예배를 안 드리면 일주일 내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찝찝함입니다. 무엇인가 해야 될 것을 안 했다고 생각하는데서 오는 자신에 대한 용납하기 어려운 감정입니다. 그 사람은 예배에 참석한 것만으로 다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떨쳐버리고 일주일을 살 수 있으니까 다 받은 것입니다. 이런 식의 예배는 결국은 자기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고, 설령 제물을 잘 구별해서 좋은 것을 드린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 제사는 자신에게 유익을 끼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뇌물개념의 예배입니다. 그것이 지구상에 신을 섬기는 많은 사람들의 사고 속에 있었던 제사의식입니다. 터줏대감에게 고사를 지내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더 크고 더 화려하고 더 많은 제물을 드리는 것은 그것을 통해 덕을 받기를 바라는 자신의 행복의 추구입니다. 하나님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불결하고 가증한 것입니다.
저는 9년 정도 대학에 있었는데 학교에 있을 때 아주 엄격하게 학생들을 지도했습니다. 제가 학교에 있을 때 별명이 검찰총장이었습니다. 김남준 교수가 시험감독 들어가는 것에 따라 장학금 수혜자가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저는 시험시간에 커닝하고, 레포트 베껴 쓰고, 출석 부르고 도망가는 일들이 너무 싫었습니다. 어떤 학생을 잡아서 졸업을 안 시키겠다고 했더니 3일 동안을 교수실에 와서 매일 한 번만 봐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안 된다.” 마지막에 “교수님은 학교 다니면서 그런 적 없습니까? 교수님은 의인입니까?” 대답을 안 했더니 “교수님은 학교 다니면서 그런 적 없습니까?” 그래서 “난 의인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런 적은 없다.” 그런 것들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습니다. 학생들을 보면 선생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가르침에 감사해서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고, 목적을 갖고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수하고 친하게 지내서 점수를 잘 받으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 의도를 아는 순간 너무 불결하게 느껴집니다. 그것은 목회를 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는 교역자들도 대하면서 진심으로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 신앙, 본보기들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고, 그냥 가까이 해서 덕을 보겠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가 무슨 덕을 베풀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것이 일체 없으신 분이십니다. 아첨이라는 것은 자기를 위한 것 아닙니까? 헌 돈, 더러운 돈, 아무 돈이나 구겨서 비닐봉지에 넣어서 주는 뇌물을 보셨습니까? 봉투에 넣을 때 그런 것의 기본은 항상 새 돈입니다. 깨끗하게 하얀 종이로 싸서 안 보이게 해서 전해주지 않습니까? 목적이 무엇입니까? 봉투를 찔러주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높여서가 아닙니다. 90도로 허리를 숙이고 음식점에 가서 무릎을 꿇고 고기를 구워서 바쳐도 그 사람에 대한 존중심과 사랑은 추호도 없고, 한자리를 하고 싶다든지, 아니면 나쁜 짓을 한 후에 그 사람의 권력의 도움을 받아서 책임을 면해보자는 것 아닙니까? 겉으로 볼 땐 얼마나 놀라운 공경의 행위입니까? 자기 행복에 대해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그 공경의 행위는 아주 정성스럽고 헌신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내 인생 망가지면 망가지지고 아무렇게나 살지. 내가 꼭 하나님께 도움을 받아야 되나?” 이런 식으로 하면 정성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 정신이 자기 사랑에 딱 꽂혀 있으면, 나머지 모든 것들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일으키는 헌신된 태도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간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더 세련되고 더 간절할수록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너무 불결하고 더러운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제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애를 원하노라. 나 여호와를 아는 것을 원하노라. 내가 누구인지를 너희들이 안다면 그렇게 살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서든 나 자신에게서든 그런 태도를 발견하게 될 때 역겹게 느껴지는데, 완전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당신에 대한 진정한 감사 없이 짐승을 끌고 와서 죽여 피를 흘리고 제사를 바치면서 하나님께 아첨해서 자신의 행복을 도모하려고 하는 모습이 얼마나 역겹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처음에 교수 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지하실에 살 때인데 학생 둘이 찾아왔습니다. 선물을 잔뜩 사서 쌓아놓았습니다. “강의도 잘 하시고 존경합니다.” 그때는 전혀 경험이 없었으니까 “아 그렇습니까? 고맙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결론은 낙제를 안 하게 점수를 조금 올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 고아원에 갖다 주고는 편지를 써서 호통을 쳤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스무 살은 많은 학생이었는데 너무 불결한 것입니다.
삶과 마음의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
겉으로 볼 때는 성실하게 교회에 다니던 사람을 안 만나주시던 하나님이 쓰레기같이 살던 인간을 만나 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불공평한 것이 아니라 공평한 것입니다. 창녀, 세리,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산 사람들을 만나주십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예배와 제사를 통해 하나님 앞에 아첨하고 자신의 행복을 도모하려는 사특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는 지었지만 이 순간 깊이 깨뜨려져 고통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용납해달라고 자기가 범죄하고 악을 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주님 없이는 도저히 살수 없게 되었다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갈망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없는 제사로 형식에 맞게 희생을 드림으로써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도모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14절에서 15절은 하나님이 새로운 방식의 예배를 제시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 스스로 제사 제도를 만드시고 당신이 스스로 그것을 부인하시는데 우리한테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이 제사제도를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인가? 그것이 아닙니다. 14절의 내용을 잘 보십시오. 제사를 드리는 행위가 있고 그것보다 더 넓은 삶이 있고 그것보다 좁은 마음이 있습니다. 이 세 개가 일직선상에서 일치를 이루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뭔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영적 예배’는 영적 제사라는 뜻입니다. 더 넓은 의미의 예배가 있습니다. 제사보다 좁은 의미의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있습니다. 이 세 개가 일직선상에서 일관되게 일치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제사를 문제 삼으신 것이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데 두 가지가 없는 것입니다. 삶도 잘못되었고 그것을 드리는 마음도 잘못된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변화시키시는 하나님
이 제사는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넓은 의미의 제사의 집약으로서의 제사입니다. 좁은 의미에서 짐승을 바치는 이 제사는 마음 안에 일어나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의 표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제사는 삶의 핵심이고 마음으로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의 표출입니다. 그것이 일직선상에 있을 때 이 예배는 안쪽으로는 그 사람을 새롭게 합니다. 바깥으로는 그 사람의 삶을 새롭게 합니다. 그것은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일직선상에 있지 못할 때는 제사를 드릴수록 영혼이 더 망가지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십니까?” 그럴 수 있지만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경배의 정신과 상한 마음,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진정한 마음의 각오, 그런 것 없이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를 드리는 순간에 나는 예배를 드렸다는 의식이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의’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더 만나지 못하도록 가로막습니다. 예배 때문에 그 사람의 마음이 더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마음이 굳어지고,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신의 의로 가득 차 있으니까 거기에서 우러나오는 삶이라는 것은 더 좋아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말씀드리는 것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삶은 엉망인 이유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심지어는 새벽예배까지 나오지만 거의 기도하지 못하고 마음에 어둠이 쌓여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배가 제대로 드려질 때 갖고 있는 파괴력은 굉장한 것입니다. 수십 년 동안 아집에 갇혀 살던 사람이 한 번의 예배로 그것을 버리게 됩니다. 엄청난 이익이 걸려 있어서 포기를 못 하고 살던 것을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그 감격이 그 사람의 삶 자체를 바꿔 놓습니다.
지방으로 집회를 내려갔습니다. 그날 저녁에 어느 집사님 한 분이 와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저에게 밥을 사 주고 그 다음날 가는 것입니다. 목사님하고 둘이서 대화를 합니다. “목사님 저 어떻게 하죠?” “포기해요 포기해.” “그래야 되겠죠.” “지금 전화를 하세요. 포기하세요.” 전화를 걸더니 “무슨 건설 아무개 사장입니다. 제가 그 공사를 못할 것 같은데 당신이 대신해주면 안 되겠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건설업을 하는 사람인데 절에서 40억짜리 공사가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 하는 말이 공사를 하면 교회는 돈을 잘 안 주는데 절은 너무 잘 준다는 것입니다. 잘 깎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교회는 믿음으로 집을 짓고 절은 돈으로 짓기 때문에 수입이 괜찮다는 것입니다. 어제 집회에 참석하고 은혜를 받고 보니까 자기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40억짜리 공사를 하면 돈이 얼마나 남겠습니까? 20프로만 잡아도 8억은 남는 것 아닙니까? 누가 공갈 협박을 하면 그 돈을 포기 하겠습니까? 예배에 한번 참석하고 나서 오랫동안 고민했던 문제인데 ‘내가 손가락을 빨더라도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가 삶을 그렇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예배입니다. 새로운 방식의 제사인 것입니다.
진정한 제사(2)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4-15)
감사로 드리는 제사
하나님께서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제사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든지 사람의 행복을 위해 이용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공경하게 될 때 우리의 삶에 행복과 기쁨이 찾아오는 것은 그 결과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마음이 없이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에게 이용되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의 내면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다면, 인간의 행동, 제사를 드리고 짐승을 잡고 절기를 지키고 성전에 나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행위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진정한 제사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 은혜에 대해서 감사로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인간이고 주님이 자신과 맺으신 언약 안에서 베푸신 구원과 영혼의 은총, 자비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지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감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신앙의 근본입니다. 거기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환란을 당하며 핍박을 받아 생명의 위험을 받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감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깊이 아는 데서 나오는 감사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복은 두 종류가 있는데 일반섭리의 복과 영적인 복이 있습니다. 일반섭리의 복은 하나님이 사물들의 질서를 움직여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그것들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들이 그 복을 오래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거친 광야에서 삼백여 명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을 것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처음 만나를 받게 되었을 때 얼마나 감사했습니까? 그러나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맛없는 만나만 먹고 살아야 되는 것을 곧 불평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혼을 어루만져주시는 복이 없이 물질의 복을 오랫동안 기억하면서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며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감사는 하나님이 영혼을 직접 어루만지는 큰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영혼으로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는 진리와 함께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참된 지식과 은혜 안에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의 근본이고 하나님께 드릴 진정하고 새로운 제사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삶의 제사
두 번째 제사는 지극히 높은 자에게 서원을 갚는 것입니다. 서원이란 하나님께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큰 환란과 어려움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고 그 환란에서 벗어나게 해주실 것을 바라며 서원을 하거나, 베푸신 은혜가 너무 커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서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새로운 방식의 제사는 하나님께 삶을 드린다는 것입니다.
어렵고 곤고할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바라면서 드린 대표적인 서원으로는 야곱의 서원을 들 수 있습니다. 밧단아람으로 도망가다가 너무 막막하여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평안하게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고 내가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여기는 바로 하나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렇게 약속하는 것은 바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을 높이는 것이 없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삶이 예배를 따라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일에 예배에 나와서 찬송가를 따라 부르고 기도하고 설교가 시작되면 앉아서 그저 듣고 예배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 갈 수는 있지만, 그 정신을 따라 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찬송했던 것처럼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가 되고, 기도했던 것처럼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말씀이 울려 퍼질 때 잠자코 있었던 예배의 정신으로 성경을 읽을 때나 묵상할 때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부복하며 전심으로 살수는 없는 것입니까? 예배시간에는 하나님을 찬송했지만 삶 속에서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욕보이고, 예배 시간에서는 자신이 비천한 죄인이라 고백했지만 삶 속에서는 ‘내가 뭘 그렇게 잘 못했나?’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내적으로 어떤 복종도 없었기에 예배와 하나님의 말씀과 나의 삶은 별개의 것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살고 생각하면서 어떤 것에도 꺾이지 않는 막되어먹은 망아지 같은 마음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미래의 불안이나 마음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일종의 보험을 드는 것과도 같은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쓰레기와도 같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과 은혜가 쏟아지는 것도 교회요 하나님의 분노가 불같이 쏟아지는 곳도 교회입니다.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탄식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내 성전 문을 닫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저희들이 모이는 대회와 그들의 절기가 지겹고 싫다.”
예수님을 믿고 얼마 안 된 젊은 시절에 여의도에서 십만 명 정도가 모인 집회에 참석 한 적이 있었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교회버스가 와서 사람들을 싣고 가며 귀가를 돕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가 밤늦은 시간이었고 가까운 버스 정류장도 없고 그곳 지리가 어두운 저에게는 집에 갈 일이 막막했습니다. 교회버스가 텅 비어서 나가기에 태워달라고 했는데도 자신의 성도가 아니라고 쳐다보지도 않고 ‘획’ 지나가버렸습니다. ‘믿음의 형제끼리 왜 그 작은 배려조차 없을까?’ 하는 생각에 같은 개신교인임이 수치스러워졌습니다. 주위에는 흩어진 쓰레기들만이 어마어마하게 남아있었습니다. 상징적인 두 상황 속에서 ‘어마어마한 대회에 모인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는 이런 식으로 예수를 믿을까? 이래서 교회가 욕을 먹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젠가 어떤 분이 신우회 때문에 직장에서 핍박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분은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예수를 믿는 것으로 핍박을 할 수 있느냐며 정식으로 회사 측에 따졌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회사의 책임자가 “나는 너희가 예수를 믿든지 부처를 믿는지는 아무 관심도 없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점심시간에 예배를 드리고 모두 근무하는 한 시에 밥을 먹으러 가느냐?”라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그러한 비상식적인 삶으로 인해 예배를 한 시간 드려서 영광을 돌리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교회에 오면서도 그런 마음을 느꼈습니다. 교회입구에서부터 교회까지 길가가 차로 꽉 막혀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들어오기 불편할 정도로 교회 앞에 주차를 해놓은 그 사람들은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백 미터만 들어가면 주차장이 있는데 자신이 일분을 걷더라고 다른 사람들이 편안하게 드나들게 하는 것이 덕의 근본이 아니겠습니까? 가끔 주일에도 교인들끼리 주차문제로 서로 말다툼이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과 배려가 없는 사람의 마음 안에 진정으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공명의 마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와 자기 복종이 있을까 의문이 듭니다. 오히려 그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가 화려하고 규모 있는 예배일수록 그 격차는 너무 현저해서 짓밟히는 하나님의 영광은 훨씬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제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짐승들의 목을 부러뜨리고 배를 갈라서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자신의 심령 속에 있는 짐승 같은 기질을 꺾고 그 배를 가르고 죽여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은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시니 하나님이 제사를 기뻐하셨다면 내가 제사를 드렸을 것이며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넓은 의미의 예배인 삶과 좁은 의미의 경배가 일치를 이룰 때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받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책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마음깊이 우러나오는 통회의 기도라고 고백했습니다. 제 시간에 교회에 나오고 헌금도 준비하고 평일에 입지 않던 좋은 옷도 입고 화장도 하고 단정하게 나왔어도 그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면 모두 자신을 위한 보험이나 과시에 불과합니다. 좁은 의미의 예배가 수치스러워지며 하나님께서 모욕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서원은 항상 자신에게 손해가 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 맹세할 때는 나름대로 감동이 있어서 했지만 실제 삶에서 이행하려하니 엄청난 손해가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손해로 느낀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에 대해 충성스러운 헌신을 마다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부가 함께 살면서 ‘내가 뼈가 부러지도록 번 돈을 저 아내와 자식을 먹여 살리는데 써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면 이미 자신의 가족에 대한 티끌만큼의 사랑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헌금에 대해서 크게 강조하지는 않지만, 교회를 몇 번 이전하고 건축하면서 사람들이 약속헌금을 해놓고선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교회를 떠나간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초신자도 아니고 교회의 직분을 받은 사람들이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약속을 하고 그것을 불이행한다는 것은 결국 그 삶의 수준을 드러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살아가면서 드린 예배는 끊임없이 자기만족을 찾아다니는 쓰레기 같은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화려한 건물에서 복잡한 절차를 거쳐 웅장한 주악에 맞춰서 드린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가슴을 치며 자신의 문제를 아파하는 사람이 드리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서원의 핵심은 회심과 함께 이루어집니다. “이제 나의 삶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 주님이 생명을 버리고 언약을 따라 나를 구원해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이제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고백하며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고 삶을 드렸을 때 그것이 가장 큰 서원입니다. “이제는 나의 생명,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내게 베푸신 것이며 주님 것입니다.”라고 고백할 때는 더 이상 손해를 본다거나 자신의 것이 박탈당한다는 느낌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입은 무한한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내가 가는 길이 주님을 위한 길이면 고난과 시련, 멸시와 욕, 원하지 않는 질서 속에서 받는 고통, 이 모든 것을 달게 지고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신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환난 날에 하나님을 의지함
15절에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말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삶의 서원을 그분께 드리지 않는 사람들이 환란을 당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사람들은 절대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혹시 하나님께 나와서 정신 차리고 예배생활을 새롭게 시작하려는 것처럼 보여도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아첨에 불과합니다. 환란을 면해보고자 꼬리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다가오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중심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찾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비록 이 세상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실 때가 있고, 하나님의 큰 경륜이 있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 하고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시련과 핍박이 가득한 곳을 지나가게 하신다 할지라도, 자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진정한 공경과 사랑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을 영광으로 알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여기 계셨으면 당하셨을 쓰라린 고통과 시련을 내가 대신 짊어지면서 살아가는 것, 그 모든 것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지나면서 예수님께서 나 같은 인간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그것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작 환란의 날에 자신들의 방법을 의지하고 다른 나라의 군대를 의지하고 심지어는 이방신들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무 슬픈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잘못 살아서 매를 맞는다고 해봅시다. 사업에 어려움이 생기고 삶이 고통 속으로 들어가고 우리 마음에 끊임없이 고통이 일어나서 하나님이 우리를 치신다고 생각해봅시다. 환란 날에 우리가 티끌만이라도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어디로 돌아가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 돌아오시게 하기 위한 부르심인데 그 속에서 누구를 찾아야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원하지 않는 시련과 고통을 만나 환란이 가까워온 것을 느낄 때 하나님께서는 환란 속에서 당신께 간절히 부르짖게 하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가까이 하시고 다시 관계를 회복시키실 기회로 삼고자 하셨지만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방법을 의지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마음에 아픔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당신의 성품을 상기시키십니다. “환난 날에 너희가 나를 부르라 그러면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라” 다시 말하면 환란 날에 그 백성이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건지시는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때 “영화롭게 한다.”라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깊이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더 높게 할 수 없습니다. 이미 이 세상의 만물과 상관없이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은 인간들이 제 멋대로 교만하던 마음을 버리고 분에 넘치는 자리에서 돌아와 각자 제 자리로 가게 될 때 하나님이 높아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삶을 백성들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제사는 우리의 내면에서 시작되어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언어로 흘러나오고 우리의 삶으로 고백되는 것입니다. 그 삶이 우리의 마음을 다시 쇄신시켜 삶과 고백, 우리의 심령이 온전하게 일치를 이루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요 삶입니다. 좁은 의미의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면 일주일의 삶을 잘 살다가 와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서는 안 됩니다. 또한 제대로 하나님 앞에 살고 싶다면 좁은 의미의 예배를 하나님 앞에 제대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중심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는 것과 아는 것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 내 율법을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도적을 본즉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며
네 입을 악에게 주고 네 혀로 궤사를 지으며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미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시는도다”(시 50:16-21)
본문해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악인, 의인’은 이스라엘 백성 밖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안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 안에서 의로운가 아닌가를 나눌 때는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이냐 아니냐 하는 것 이상의 기준이 적용됩니다. 이 기준은 단순히 외형적으로 제사를 드리고 율법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도 인간의 내면에 있는 마음과 그것이 흘러나오는 삶,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 이 세 가지가 일치할 때 그 사람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만약에 그런 것들이 일직선상에 있지 않다면 결국은 자신을 위해서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는 것과 아는 것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먼저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이 먼저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 없이는 예배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는 것과 예배하는 것 사는 것, 이 세 가지가 놀라운 일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은혜를 받으면 똑바로 살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악인은 마음의 본성자체가 악해서 악의 길로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가 반드시 옆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본성자체가 그렇게 되어서 계속 옆으로 갈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변하지 않고 새로워질 수 있겠습니까? 은혜를 받아야만 그 사람이 변화되고, 새로운 삶을 살수 있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살기도 하지만, 또 한 가지는 어떻게 사느냐에 의해 아는 것이 결정되기도 합니다. 이런 순환관계에서 은혜가 먼저냐, 자신의 의지의 결정이 먼저냐를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의지 안에서 은혜로 역사하시고, 은혜 안에서 의지를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몫을 하시면 되고 인간은 자신의 몫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내 힘으로 했다고 하지 않기 위해서 마음을 움직이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그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겉모습만 언약백성인 악인들
본문을 보면 여기에 있는 악인은 껍데기는 이스라엘 백성이고, 겉모양으로는 제사도 드리고 예배도 드리고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인데, 그 마음 안에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경외의 정신과 그분을 향한 성심의 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악인으로 낙인찍힌 것입니다. “네가 어찌 내 율법을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하나님께 탄핵 받고 있는 이 사람의 살아가는 모습은 이러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율법을 전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나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신 사람이다. 하나님은 나와 맺은 약속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많은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언약 안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나에게 보증해주셨다.”라고 되뇌면서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도적을 본즉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며 네 입을 악에게 주고 네 혀로 궤사를 지으며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미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족 관계부터 다 깨트려진 것입니다. 이기심이 발동해서 형제들 간에 다투고 삶으로 전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너는 마음으로 그렇게 악을 품으면서 내 율례를 전하고 입술로는 어떻게 나와 맺은 언약을 말하느냐?” 왜 그렇습니까? 마음에는 하나님 향한 진정한 경외심도 없는데 율법을 이야기하고, “나는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는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이다.”라고 이야기는 하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행복입니다.
이런 현상들이 이미 구약시대에도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율례를 이야기하지만 자신에게 불리한 것을 이야기하겠습니까? 남의 돈을 사취하는 사람이 악을 행하여 남의 것을 빼앗지 말라는 율례를 이야기하겠습니까? 간음하는 사람이 간음하지 말라는 율례를 이야기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율법 전체를 놓고 제 마음에 드는 것만 곶감 빼듯이 빼서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형성한 하나님은 우상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자기가 원하는 성경구절을 뽑아서 만들어낸 하나님, 그것이 하나님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입니다. 그 우상에게 예배하고 경배하는데 형식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형식을 빌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견딜 수 없는 모욕이 됩니다.
만약 여러분의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뜨겁게 안아주면서 마음속으로는 다른 사람을 상상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렇다면 안아주는 것 자체가 모욕적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다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모두 다 받아들이지 않든지 둘 중 하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곶감처럼 걸려있는 수많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한 번 찔러보고 자기한테 맛있는 것만 빼서 그것을 꿰어서 그려내고 있는 하나님이 바로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경배했을 때 하나님은 그런 경배를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믿든지 말든지 둘 중 하나이지 그렇게 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아주 오욕스럽고 불결하고 더러운 것입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라고 하시면서 그들을 탄핵하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라고 하십니다. 잠잠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는 자와 무신론자가 함께 이야기를 합니다. “너는 나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를 댈 수 없지만 나는 너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를 많이 댈 수 있다.” 그러면서 “내가 앞으로 10분 동안 하나님을 욕할 것인데 하나님이 나한테 어떻게 하는지를 보아라.” 그리고는 10분 동안 하나님을 욕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보아라. 이렇게 하나님을 욕하는데도 아무 일이 없는 것을 보니 하나님은 없지 않느냐? 이것이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이다.” 그 때 신앙을 가진 사람이 말했습니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잠잠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 깨닫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렇게 잠잠하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마음 놓고 악을 행하다가,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언약 안에 있다고 떠들고 하나님의 율례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면서 ‘이렇게 전하면서 살기만 하면 된다. 삶과 말하는 것이 뒤집혀도 하나님은 크게 문제 삼지 않으신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까? 제사를 드리니까 자신이 이런 삶을 살아도 하나님 앞에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뇌물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삶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화합하지 못해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으니까 이것으로 하나님이 씻어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절대 너 같은 인간이 아니다. 너라면 그렇게 너에 대해 악을 행하고 나쁜 짓을 했을지라도 뇌물을 바치면 그것으로 그 사람에 대한 공정하고 도덕적인 평가를 접어버렸겠지만 나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진실하게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압니다. 고난가운데 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흔들리지 않는 판단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그려냅니다. 결국 없는 신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상숭배입니다.
징계를 통해 영혼을 깨우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시는도다”라고 하십니다. 오랫동안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던 사람들은 결코 자기의 죄와 악을 알 수 없습니다. 이미 그 안에 가득 찬 죄가 자신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볼 수 없도록 그의 눈을 어지럽히기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 안에 들어와서 활동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의 전 영혼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의 의지는 하나님께 굴복하지 못하게 하고, 우리의 마음은 육욕에 불타게 만들고, 우리의 지성은 죄로 더럽혀져 혼탁하게 만들어서 유리창에 흙을 잔득 발라 유리창은 있지만 밖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죄의 역할입니다.
그런 삶을 살면서 도저히 깨닫지 못하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징계하십니다. 언약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보복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가 고난을 당하고 시련을 당하는 것보다 그의 영혼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를 내리셔서 그의 영혼을 깨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깊은 잠에 빠질수록 더 많이 흔들어야 합니다. 깊이 잠이 들면, 일어나라고 해도 안 일어납니다. 나중에 따귀를 때리면서 일어나라고 해도 안 일어납니다. 그렇게 곤하게 잡니다. 결국은 깊이 잠들면 하나님이 아무리 말씀하셔도 그 말씀에 대해서 깨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깨우기 위해 흔드시는 장면입니다. 때려서 마음을 일깨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악인에게 무슨 평강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듯이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의 삶에 복을 달라고 하는데 후안무치(厚顔無恥)한 것입니다. 존 오웬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신자가 죄를 짓는 순간 그는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다.” 수없이 하나님을 버리고 그분의 면전에 침을 뱉으면서 그 침이 마르기도 전에 나에게 복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후안무치입니다.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기대해라. 너희들에게 어떤 죄가 있는지 볼 수 있도록 하나씩 보여주리라.”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큰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는 백성을 향해 가지고 계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한한 죄의 용서와 선을 행하며 살기 원하는 백성들에게 주시는 무한한 은혜의 공급입니다. 그러나 그런 용서를 구하지 않는 백성들은 이미 하나님이 용서하셨어도 끊임없는 정죄 의식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의 용서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끊임없이 죄를 지으면서 입으로 말하기를 “교리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순간, 우리의 지난 죄뿐만 아니라 현재 짓고 있는 죄,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해주셨어.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통한 죄의 용서는 단번에 영원히 이루어진 것이야.” 정확하게 맞았습니다. 문제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이야기하는 것은 동기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돌아가고 섬기기 위한 용서가 아니고 계속 자기 갈 길을 가기 위함입니다. 바로 죄가 그 사람을 속여서 부패한 추론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입술로는 그렇게 말했고 교리적으로는 전혀 틀린 것이 없지만 그의 양심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정죄 아래서 괴로워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결론과 적용
신앙의 근본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근본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끊임없이 살피며 내가 정말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있는지를 고민하면서 기도하고 은혜와 도움을 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제사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2-23)
징계,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
하나님은 당신을 잊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찢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짐승이 사냥감을 물고 살을 찢는 장면을 묘사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당시 독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섬뜩한 묘사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의 언약백성들을 향해 그렇게 과격한 표현을 하실 수 있을까? 결론부터 이야기 하면, 표현이 과격한 만큼 사랑의 깊이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이 백성들을 찢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당신과 언약관계로부터 이탈되어서 바른 길로 가지 않는 백성들을 향한 마음입니다.
하나님 자신은 부족한 것이나 모자란 것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마치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실하게 필요하신 것처럼 “너희들이 나를 떠나고 나를 아는 지식을 버리면 내가 너희들을 찢어 버리겠다.”라고까지 강력하게 촉구하는 모습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그것은 하나님에게 손해가 나서 그러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관계를 맺고 사랑의 교통 속에서 그렇게 살기를 원하시는 그분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스승의 날이면 한번 씩 만나 뵙고 인사를 드리는 고등학교 때 은사가 계십니다. 그때 학교 선생님들의 월급이라는 것이 하찮았습니다. 제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하루는 그 선생님께서 “아무개는 왜 학교를 안 나오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등록금을 못 내니까 자존심이 상해서 못나왔던 것입니다. 저 보고 그러십니다. “가서 내가 학교에 나오라고 한다고 그래라. 연락을 해라.” 담임선생님도 아니었는데 그러시는 것입니다. 찾아가서 “선생님이 등록금이 어떻게 되었든 널 보자고 하신다.” 그러니까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함께 학교에 갔습니다. 오자마자 선생님이 친구의 뺨을 후려갈기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차례가 아니라 서너 차례 후려갈기면서 “너 이놈의 자식, 너는 정신상태가 썩어 먹었다. 등록금을 못 내서 학교에서 나가라고 그래도 복도에다 가방을 놓고라도 유리창 틈새로 공부할 생각을 해야지. 이 나쁜 놈의 자식.” 하는 것입니다. 등록금을 못 낸 것도 서러운데 후려갈기니 얼마나 서러웠겠습니까?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선생님이 등록금을 내준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그것이 강력한 사랑의 초청이 되는 것입니다. “아이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어떻게 하냐? 그래. 되는 대로 마련이 되면 다시 공부를 하도록 해라.” 이러면 굉장히 점잖습니다. 그런데 오자마자 뺨을 후려갈기면서 “이 썩어빠진 놈의 자식.”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인격적입니까? 사랑의 표현은 후자입니다. 강력한 애정의 표현입니다.
진정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라
“썩은 예배를 드리는 너희들은 나를 버린 사람이다. 마음에도 없는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보호를 받아 보려고 하는 것은 모두 쓸모없는 노력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새로운 제사가 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는 나를 영화롭게 하리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결국은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감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감사는 “Thank you”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혜택을 받고 도움을 받으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영혼과 직접 관계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받은바 혜택을 고마워하면서 감사의 표시를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영혼의 행동입니다.
마틴 루터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을 때, 우리의 영혼은 마치 펄펄 달아오르는 용광로에 쇠가 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 쇠가 예전의 시커멓던 쇠가 아니라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쇠가 되어 용광로의 물과 일치를 이루듯이 우리가 그분을 진심으로 믿는 순간에 우리의 영혼에 참된 변화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참된 사랑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더 주목할 만한 표현은 “참된 믿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사랑이 있지만, 사랑은 믿음을 불러 오지 못한다.” 굉장히 의미심장한 이야기입니다. 고행을 하고 성지순례를 하고 면죄부를 사는 것은 영혼의 행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말하는 ‘감사하다’라는 말은 ‘찬양하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것을 읽으면서 ‘Thank you’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전존재적인 하나님을 향한 의존과 그분 안에서 즐거워하는 진정한 경배의 표현입니다. 사실 이것은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전적으로 의지해서 자기는 티끌만큼도 가치가 없는 인간이요 하나님 앞에 철저한 죄인이라는 것을 느끼는 사람 외에는 누구도 진정으로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될 때 그는 자기의 것이라고는 추호도 없는 사람이 되고, 자기에게 있는 모든 좋은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유이며 혜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 숨 쉬는 것까지도 하나님께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Thank you’ 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한 번의 예배, 진리의 말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교제, 주님이 주신 사명, 이 모든 것들이 감격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제사를 올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런 것입니다.
행위를 옳게 하라
더 재미있는 것은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두 개가 병행 꼴로 짝을 이루면서 등장합니다. ‘감사를 드리는 자’와 ‘행위를 옳게 하는 자’가 짝을 이루면서 등장합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올바르게 살아가는 율법적인 삶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참된 감사의 자연스러운 표출이라는 것입니다. 비난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의미도 없는 제사를 드리며 형식적으로 성전을 들락거리고 있을 때, 그들의 행동이 그러하다면 그들의 마음과 내면의 세계는 어떻다는 것입니까?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막보는 삶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기보다 현저히 지위가 낮고 그의 하는 짓이나 모든 것들이 거슬려서 ‘이 인간과 관계를 끊어도 추호도 내가 손해 볼 것이 없다.’라고 생각되고, 관계를 계속할 때 결국은 내가 손해를 볼 것이라고 생각될 때 그 사람을 막보게 됩니다. 그 말은 “너는 하찮고 가치가 없는 존재이고 너와는 관계가 끊어져도 나에게 아무 상관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막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보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막보는 사람이 교회는 왜 나오는 것입니까? 자신을 위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한 주간 동안 자기를 에워쌀지도 모르는 두려움, 양심의 가책, 무엇인가 할 일을 안 한 것 같은 자신에 대한 자괴감, 이런 것들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참석하는 즉시 그는 이미 받아야 할 모든 것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추호도 그에게 빚진 것이 없으십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 중 절반 이상이 구원과 아무 상관도 없고 구원의 ‘구’자(字) 근처에도 못간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신앙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두려워하고 그분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티끌과 같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신에 대한 의식은 막연한 의식이지 성경에서 계시하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아닙니다. 참된 영혼의 행위가 아닌 제사,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는 그릇된 동기들은 하나님 앞에 탄핵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막보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참된 사랑을 동반한 믿음이라든지, 하나님 앞에 자신을 전심으로 드리는 것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행위를 하면 할수록 그 행위는 하나님을 향한 현저한 무시이며 멸시입니다.
선지자를 통해 교회를 먼저 깨우심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의 방향과 똑같았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교회를 하나님께서는 제일 먼저 심판하시고 당신의 교회를 정결케 하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거기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성경 속에 나타나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에 나타나셔서 “너희는 어떻게 그렇게 나를 막보는 삶을 사느냐? 어떻게 너희는 나를 이렇게 막보며 예배하느냐?” 할 때 “오, 주님. 예상하던 지적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모두 거기 묻어서 ‘그렇게 하나보다.’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선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증거 해주는 메시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윌리엄 퍼킨스’라는 영국의 청교도는 그러한 선지자의 기능이 신약에서 목사들에게 계승되었다고 믿었습니다. 목회자라는 말처럼 애매모호한 말이 없습니다. 18세기의 전설적인 설교자 ‘조지 휫필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굉장한 사람이었습니다. 3만 명을 동시에 놓고 육성으로 설교를 해서 또렷이 알아들을 수 있게 설교를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었는가를 실험했습니다. 1마일, 1.65km 정도 거리까지 또렷하게 설교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전설적인 설교역사를 남겼던 분인데, 그분이 평생 설교하면서 지킨 철칙이 있습니다. ‘우리가’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설교자들에게 강권했습니다. 그 말이 성도들로 하여금 애매하게 숨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도 지금 하려고 애를 쓰는 중인데 하물며 우리 같은 사람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평생의 설교 속에서 ‘우리가’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당신들이, 그대들이’ 그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면 자신은 완전한 사람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메시지를 들고 교인들에게 똑바로 하라고 외칠 때, 설교자는 자신이 이미 그렇게 하고 있든지, 못했을 때는 회개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계에서 해결된 것이고, 자신은 설교할 때만큼은 하나님 편에 있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하나님과 마주하면서 설교를 듣기 때문에 ‘우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나타나서 그것이 아니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와는 지나치게 인간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좋은 것이 없습니다. 여러 가지 손해가 있는데 목회자와 친밀하면 말씀을 잘 안 듣게 됩니다. 교제의 기초가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진정으로 목양 받는 사람들은 늘 목회자와 식탁을 마주하고 가까이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라, 먼발치에서 그 말씀을 들으면서 감격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생각을 많이 해야 합니다. 목회자와 가까이에 있어서 늘 붙어 다니고 가족처럼 지내는 사람들은 “회개하라.”는 메시지가 선포될 때 자기는 목사 편에 붙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해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평생 외로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와서 다 털어놓을 수 있지만 목회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이 우리에게 너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시는 것입니다.
큰 문제는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외치는 자의 소리가 문제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과 미련한 처녀들이 있었는데 반은 등불을 잘 준비하고 반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에는 다 졸며 잤다고 합니다. 등불을 준비한 처녀나 빈 통을 들고 온 처녀나 다 자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깨어 있어서 슬기로운 처녀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슬기로운 처녀들이라고 해서 모두 다 깨어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보라. 신랑이라.” 그것은 누가 외치는 소리였을까요? 그런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마음속에서 강하게 반발할 때 그것은 둘 중 하나입니다. 중생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그 마음이 지금 사단의 강력한 지배아래 놓여있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세 번째는 없습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 영혼은 대단히 위험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시편 50편에서 하나님은 물을 쏟듯이 당신의 분노와 슬픔을 표현하신 다음에 마지막으로 내린 결론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싱겁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그런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의 참된 변화, 주님께 붙어있는 사랑과 온전한 믿음의 합일,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절대의존의 신앙,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그 형상이 주님을 닮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그러한 영혼과 내면세계를 가지고 좋으신 하나님께 전심으로 경배하는 것이 주님이 받음직한 제사입니다. 그러한 제사의 삶을 사는 사람은 모든 삶이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온전해지고 참되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감사로 제사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
하나님을 향한 믿음
마지막 절에서 시편 50편 전체의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헛된 제사를 드리지 말고 감사로 제사를 드리라”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감사가 대체 무엇이기에 이것이 결론이 되는 것일까요? 여기서 말씀하시는 ‘감사’란 흔히 일상 속에서 누군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 때 고맙다고 말하는 단순한 호의의 표시가 아닙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당신은 나를 믿습니까?”라고 질문한다면 그것은 신뢰감이나 미더운 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까?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우리들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할 수 있는 믿음이란 하나의 선입견과도 같은 것입니다. 한 사람이 나에게 신뢰할만한 행동을 계속 하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게 되고, 그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며 그 동기도 그릇되지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선입견을 갖게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그와는 다른 것입니다. 전자의 믿음이란 영혼의 변화라고 말할 수는 없고 단지 내 마음속에 있는 하나의 전제일 뿐입니다. 과거의 일들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대해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영혼의 움직임은 아닌 것입니다.
물론 모든 정신의 작용을 넓은 의미에서의 영혼의 움직임에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무엇을 보고 인상을 느끼고 맛을 보고 기뻐하고 싫어하는 모든 것도 영혼의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활발한 움직임이다.”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우리 영혼의 강한 변화이며 보다 더 강력한 움직임으로서 도덕적인 방향을 결정하게 하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물론 사람에 대한 믿음도 도덕의 변화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사기를 쳐서 물건을 판다고 하더라도 내가 신뢰하고 나를 위해 배반하지 않을 사람에게까지 거짓으로 물건을 팔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사람 사이에서서 오가는 믿음도 도덕적 방향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훨씬 중요한 차이점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자체가 우리 영혼의 중대한 변화입니다. 마틴 루터는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과의 새로운 영적 관계를 갖게 되는데 그 상태를 활활 타오르고 이글거리는 쇠가 붉은 빛을 내며 가열되는 것에 비유를 합니다. 믿음을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단순한 호의의 표시가 아니라 도덕적 방향까지 결정하게 하는 영혼의 강력하고도 매우 활발한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감사의 제사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제사를 강요하고 제물을 탐내시는 분이시라는 이방신 개념을 하나님에게 적용하면서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현저히 느슨하게 만들고 거기에 충성하고자하는 의무를 상실했습니다. 더욱 그들은 악을 행하고 동족간의 자비와 선행이 사라진 패역한 일들을 벌이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모든 것의 문제가 감사가 사라진 것에 기인한다면 그 감사는 단순한 호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릇된 방식으로 하나님께 제사하고, 하나님께 대한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언약에 충실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모든 것들이 근본적으로 감사가 없는 데서 출발한다고 경고하십니다. 일상적으로 사람에 대한 감사는 우리 삶 전체를 바꿔놓지 않습니다. 사람에 대한 감사는 사람에 대한 인상이나 생활에 대한 영향을 미치기는 합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불평이 많았던 사람이 커다란 불행을 당해 생사를 오가는 사람의 처지를 보면서 현재 나의 삶은 그렇지 않는 것에 대해 감사할 때는 그 순간 자신에게 다가오는 현실들이 예전과 현저히 다르게 다가오는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는 영혼의 강력한 움직임으로서의 진정한 감사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나름대로 도덕적 효과를 주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감사는 보다 더 강력하고 본질적인 감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전에 행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잊지 않기를 경고하십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이란 하나님의 존재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백성에게 보이신 당신의 도덕적 성품입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거룩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함을 당신의 백성들의 원수를 심판하거나, 당신의 백성들에게 커다란 구원행동을 보이실 때, 또 당신의 백성을 크게 책망하실 때 보이십니다. 그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할 때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크기만큼 인간의 영혼은 강력한 움직임을 통해 자신의 생명과 나라와 운명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헌신을 유발하는 감사
감사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의존을 동반한 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존재가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고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고 있고 지극히 영광스럽다고 하는 자각 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입니다. 자기와 하나님과 맺은 관계에 대해 기뻐할 때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 감사 속에서 사랑과 믿음과 헌신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달라고 요구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기초가 아니겠습니까? 지극히 큰 위엄을 알았다 할지라도 그분이 나와 맺으신 관계에 대해 한없이 떨리는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인식하는 행동들은 노예적인 공포에서 행하는 것이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경건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감사는 하나님과 백성사이에서 있어야할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해 가슴이 시릴 정도로 온전한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될 때 마음에 녹아내리는 정서의 경험은 마치 자기의 죄를 인식하고 가슴아파하며 회개하여 하나님이 그 죄를 용서해주실 때 일어나는 마음의 경험과 유사한 것입니다. 죄의 깊은 용서를 경험하고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구원행동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감사로 그 심정이 녹아내릴 때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은 하나님에 대한 무제한의 복종과 헌신의 마음에 형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것만큼 자신의 삶 속에 적용하고 끝임 없이 순환하는 생각을 하게 될 때 신앙의 지식들이 증가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경험은 이차적으로 알 수 있을 뿐이지만 자신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경험의 확실한 주인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신앙의 경험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올바르게 판단되기만 한다면 그것은 성경 다음으로 훌륭한 정보가 됩니다. 꿈꾸는 것 같은 놀라운 일이 일어나서 하나님을 향한 말할 수 없는 깊은 감사가 흘러나옵니다. 그 감사의 마음이 우리의 영혼을 가득 채워서 나 같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대우를 받는 것이 감당할 수없는 큰 특권임을 알게 되고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감사의 정서를 느끼게 될 때 무제한의 헌신과 복종, 순종을 수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마음이 바쳐졌을 때 그 마음을 통해서 흘러나오게 되는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행동은 하나님 앞에 다 드러나게 됩니다. 이 감사가 하나님께 놀라운 기쁨을 드리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사명감이 없이는 올바르게 그분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위치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통해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게 되는 것이기에 사명감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과 구원하시고 이렇게 세워주신 것이 말할 수 없는 큰 은혜요 감당할 수 없는 특권이라는 하나님께 기울어진 감사의 마음과 은혜의 작용 없이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명감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감사와 헌신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항상 함께 움직이는 것입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자, 그 사람이 바로 행위를 옳게 하는 자와 병행을 이루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의 경건한 의무 중 하나는 하나님께 은혜로 받은 것에 대해 매 순간 현재적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쁜 일이라도 그 당시에는 극도로 기쁨을 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영혼은 그 상태에 금방 익숙해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현재적으로 느끼고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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