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로 나타난 사랑
(2018년 성탄절&주일오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8년 12월 23일-2019년 2월 3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20년 2월 18일
목 차
1.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요일 4:9) 2018.12.23. 성탄주일 1
2. 여기 있는 하나님 사랑(요일 4:10) 2018.12.25. 성탄절 9
3. 사랑으로 완성되는 인생(요일 4:11-12) 2018.12.30. 주일오전 19
4. 성령을 통한 사랑의 확신(요일 4:13) 2019.1.6. 주일오전 29
5. 고백을 통한 사랑의 확신(요일 4:14-15) 2019.1.13. 주일오전 38
6. 그 사랑 안에 거하라(요일 4:16) 2019.1.20. 주일오전 48
7. 사랑과 담대함(요일 4:17-19) 2019.1.27. 주일오전 55
8. 사랑의 두 지평(요일 4:20-21) 2019.2.3. 주일오전 65
성탄절 절기설교 2018. 12. 23 주일 낮 예배
<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 >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요일 4:9)
I. 본문해설
- 정통교회들이 잘못된 이단에 빠져가는 상황.
- 영지주의(gnosticism) 이단: 예수가 참 사람임을 부인하였음.
- 요한은 예수를 만난 증인으로서 예수가 참 사람임을 증언함.
성탄절에 우리가 축하하는 예수의 탄생이 무슨 의미일까?
II.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
A. 하나님 사랑이 나타남
- he agape tou theou: “그 하나님의 그 사랑”
이것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이 세상에 나타났음.
그러면 “그 사랑”(he agape)은 무엇인가?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과 가족처럼 사랑하게 하심임.
epanorothe “나타난 바 되었으니” 사랑이 감각으로 알 수 있게.
di autou: “그로 인하여” 그 사랑이 예수를 통해 나타남.
en touto, “이것 안에서”는 이후에 설명하는 바를 가리킴.
그러면 그전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지 않았는가?
우리를 사랑하셨으나 “나타남”은 언제나 간접적이었음.
능력과 기적, 전쟁의 승리, 복을 주심으로 나타내심.
더욱이 경건한 자는 율법을 통해 인자하심을 묵상함.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구원을 내게 임하게 하소서” (시편119:41)
but, 구약은 하나님의 그 사랑을 보여주기에 충분하지 않았음.
성자를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 우리와 함께 살게 하심(Immanuel).
출생, 성장, 섬김, 죽음, 부활의 과정을 통해 “그 사랑”을 보여주심.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을 위해, 행복해져야 할 인간을 위해.
성육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게 하시려고.
인간의 모든 불행의 뿌리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모르는 것.
그 사랑이 … “나타난 바 되었으니” 명백하게 드러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신 이유임.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통해 그 사랑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심.
B. 우리를 살리려 하심
- hina zosomen “우리를 살게 하시기 위해서” hina - 강한 이유.
그러면 우리는 죽어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모든 인간은 죽는다. 육체를 가진 인간이 모두 죽게 하셨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한번 죽은 육체는 썩어서 흙으로 사라짐. (49년, 23년 전 유골)
죽은 영혼은 고유한 기능 수행치 못함. 생명의 결핍.
영혼의 죽음은 사랑 없음으로 나타남. 살아갈 힘이 없음.
우리가 목적 없이 태어났을까? 세상은 이유 없이 존재할까?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의미 없이 만났을까?
영혼이 죽은 자는 죽은 자의 삶을 산다. “죽은 행실”(히6:1).
진정으로 살고 싶은 고매한 삶 대신 저열한 삶을 산다.
부모, 부부, 자녀를 사랑하는 사람은 비교적 덕스럽다.
인간이 그렇게 사는 게 주님의 뜻이기에 덜 불행하게 하심.
but, 그 사랑들은 “하나님의 그 사랑”이 아니다.
죽은 자가 자기 육체를 어찌할 수 없듯이 영혼이 죽은 자도 그렇다.
- 근원적 생명은 밖으로부터 온다. 죽음의 기운 때문에 불행함.
- 세상에는 죽음의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는 방법들로 넘쳐남.
but,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까지 행복할 수 없음. 생명의 근원임.
예화: “병의 증상과 원인”
그 사랑을 공급받으며 사는 것이 영혼의 생명을 누리는 것임.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심은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하심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지금도 믿는 자들을 살게 하신다. 은혜를 주심으로써.
III. 적용과 결론
-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랑은 이미 보이도록 나타났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 그 사랑이 나타났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함으로 그 사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왜 아기 예수로 오셨는지를 기억하라!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는 자를 살리신다!
성탄절 설교2 2018. 12. 25 성탄절 낮 예배
< 여기 있는 하나님 사랑 >
“사랑이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10)
I. 본문해설
- 하나님 사랑은 우리를 하늘 생명으로 살리려 하셨음.
- 하나님 사랑에 대한 구약의 증언들은 충분하지 않았음.
-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심.
-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죽은 우리 영혼을 살리시려 하심임.
- 어떻게 하나님이 이 일을 이루셨을까?
II.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심
A. 하나님이 사랑하심
- 먼저 하나님의 “그 사랑”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심.
“사랑이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10)
- 인간도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나 그것은 근원적 사랑이 아님.
- “여기 있나니”라고 한 사랑은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신 바임.
-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것임.
- 원래 사랑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격들 간에 사랑에서 옴.
- 그래서 사랑의 대상인 인간이 있기 전에도 사랑이셨음.
- 우리를 사랑하심은 창조에서도, 구원 계획에서 나타남.
- but, 성육신 통해 나타날 사랑을 예표함. 그림자.
a. 형벌(죽음)의 집행의 연기.
b. 제사로 한시적 교통.
c. 메시야를 약속함.
-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예수의 성육신과 사랑.
- 인생의 모든 불행은 “그 사랑”을 알지 못하는 데서 옴.
-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그 사랑”으로 돌아오라고 부르셨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사 55:7)
- 신약에서는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나타남.
- 하나님의 “그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기 때문에.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행 3:19-20)
-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극치. “그 사랑”으로 부르심.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
B. 화목제물로 보내심
-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심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10下)
- 화목제는 희생제물을 바침으로 화목을 회복하는 제사.
- 세 종류의 화목제가 있음(레 7, 22장).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
a. 감사의 제사.
b. 헌신의 제사.
c. 서원의 제사.
- 화목은 하나님과의 평화 통해 사람들 속에 이뤄진 안녕(安寧)임.
- 이 화목은 반드시 대신 죽임 당하는 희생제물을 요구함.
- 화목제의 이상(理想)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성취됨.
- 수많은 화목제물이 바쳐졌으나 그것의 효과는 일시적이었음.
- 영원히 단번에 드려져 완전한 화목을 가져올 제사가 필요함.
- 독생자가 친히 헌제자와 영원한 화목제물이 되심.
- 영원하고 완전한 속죄를 위한 조건.
a. 무한한 속죄를 위해 하나님이셔야 함.
b. 제물로 죽기 위해 사람이어야 함.
c. 흠없는 제물이기 위해 죄 없어야 함.
-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신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함.
* 첫 아이의 유아세례와 함께한 성찬의 경험.
* 선교사와 두 아들의 죽음.
- 신자는 이 사랑에 입 다물지 못해 “그 사랑”으로 돌아간 사람.
- 하나님과 화목한가? 사람과 화목한가?
III. 적용과 결론
-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먼저 나타났다.
- “그 사랑”의 눈부신 절정은 십자가에 죽으심이다.
- 이제 이런 큰 희생으로 이루신 십자가 사랑으로 돌아오라!
- 하나님을 사랑하고 화목하라!
아들로 나타난 사랑3 2018. 12. 30 주일 낮 예배
< 사랑으로 완성되는 인생 >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요일 4:11-12)
I. 본문해설
-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임.
- 여기저기 흩어진 사랑들은 “그 사랑”의 오해된 파편들임.
-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사 “그 사랑”을 보이셨음.
우리 죄를 속하심으로써 우주적 화목을 이루심.
II. 사랑으로 완성되는 인생
A. 서로 사랑하며 살라
- “그 사랑” 주신 계획은 그것을 세상에 흘려 보내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 “마땅하도다” opeilomen “빚지다” 회피할 수 없는 당연한 의무.
- 신자는 그 사랑에 빚진 사람으로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 “그 사랑”의 대상:
a. 하나님을 (amare Deum)
b. 하나님 때문에 (amare Deo)
화목제물로 주심은 인류를 한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이다.
- 사람의 장점 때문에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사랑함.
- 잊지 말라. 먼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아야 그 사랑으로 살아간다.
- 이것이 오늘도 우리가 은혜 받기를 사모하는 이유다.
B. 사랑을 온전케 하라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있으나 육신의 눈으로 본 자는 없다.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근거가 하나님이나, 볼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독특한 방식으로 보여주심.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 4:12)
신비 체험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함.
그것은 일상적 방식이 아니고 신뢰할 수 없는 것들이다.
하나님은 인격적 관계 속에서 당신의 성품들을 보여주신다.
사랑은 죄와 비참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탁월하게 드러난다.
“하니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신자의 가장 이상적인 삶이다.
하나님과의 연합을 뜻함. 성경에서 다양하게 표현된다.
a. 하나님과 동행함.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창 5:22)
이것이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나타남. “세례와 성찬.”
b.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심.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 6:56)
c. 내가 주님 안에 있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상)
그 연합의 본질은 성령으로서 “그 사랑” 속으로 들어간 연합이다.
천상에서의 사랑과 달리 지상에서의 사랑은 완전하지 않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 4:12하)
그 사랑의 부족 때문에 도덕적 의무와 현실 사이에서 고민한다.
새로운 철학이 아니라 사랑 없음을 인정하는 겸손이 필요한다.
지금처럼 사랑이 필요한 때가 없지 않나? 사랑은 어디서 오나?
왜 그 사랑 받은 사람들조차 그렇게 살지 않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은혜의 경험이 사랑의 원인이다.
신령한 체험은 은혜의 정동(情動)을 동반함. 말씀을 통해서 온다.
그 은혜의 정동의 반복될 때 사랑은 깊고 뜨거워진다.
처음 신자가 될 때는 그 사랑을 일방적으로 심어 주신다.
그러나 그 후에는 은혜와 지식 안에서 그 사랑이 온전해져 간다.
우리를 구원하심은 나쁜 나무에서 좋은 나무로 바꾸신 것이다.
* 좋은 과일(배)의 비유
그 나무에 최상의 열매를 기대하시니 “그 사랑”의 열매다.
아직도 우리 안에는 “그 사랑” 아닌 것들이 있다.
그래서 미워하고,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하는 것이 힘들다.
하나님은 사랑하도록 도와 달라는 기도를 거절하지 않으신다.
참 사랑에는 자기희생이나 자기부인이 없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약 2:8)
자기의 몸을 위해 하는 일을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자기가 한 몸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할 때 내가 너를 위해 하는 일 중 아무 것도 희생이 아니다.
나 자신에게 행하는 것으로 너의 유익이 곧 나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든 인류가 서로를 자신의 몸처럼 여기며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 사랑은 아직 그런 온전함에 다다르지는 못했다. 은혜가 필요함.
그러나 온전히 사랑하게 되는 것만큼 행복하게 산다.
참 사랑을 위해 아픈 것은 버려야 할 자아의 죽음에서 오는 아픔이다.
그래서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고 은혜를 간구한다. 다시 사랑을 주신다.
우리는 이렇게 이미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완성해 간다.
이렇게 살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누리며 이웃에게 보여준다.
우리가 어찌 하늘로부터 온 "그 사랑"을 온전하게 할 수 있는가?
예수 생각하며 은혜를 구할 뿐이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도우신다.
III. 적용과 결론
그릇된 사랑 때문에 우리는 비참하게 되고 고통을 받는다.
너무나 분명하게 나타난 사랑이 여기 있으니 예수 십자가 사랑이다.
우리 인생은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해져 가며 완성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자. 그 사랑을 뜨겁게 사모하자!
아들로 나타난 사랑4 2019. 1. 6 주일 낮 예배
< 성령을 통한 사랑의 확신 >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요일 4:13)
I. 본문해설
지난주에는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완성되는 인생을 다뤘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랑”,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면서 인생도 완성되어 간다.
이런 사랑은 하나님과 하나 되었다는 확신 속에서 완성되어 간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런 확신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II. 성령을 통한 사랑의 확신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가능했다.
a. 아들을 사람의 몸 입혀 보내심.
b. 생애 동안 “그 사랑”을 보여주심.
c. 화목제물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심.
d.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게 하심.
e.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성령을 주심.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됨 속에서 사는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사랑과 생명의 충만함을 누리기 때문이다.
이 확신은 그리스도와의 실제적 사랑 안에서 누릴 수 있다.
A. 성령으로부터 주심
우리말 성경에는 이것이 하나님이 성령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4:13)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을 통해 서로 안에 있음을 알게 된다는 뜻.
oti ek tou pneumatos autou dedoken hemin
우리말 성경: “그의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KJV: because he hath given us of his Spirit
NIV: because he has given us of his Spirit
여기서 “of”는 근원, 출처 등을 지시하는 소유격임
KNJ 사역(私譯): “왜냐하면 그가 그의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성령으로부터 주셨다”에서 목적어가 없다.
주신 것은 사도 요한의 서신의 전체문맥에서 보면 넓게 세 가지임.
a. “하나님의 사랑”, (1:9), “진리”(5:6),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4:2)
그러나 본문에서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그 사랑”을 가리킴.
즉, “성령으로부터의 사랑을 주셨기 때문에...안다” 는 것이다.
예수를 화목제물로 보내셨음을 믿을 때 그 사랑으로 돌아간 것임.
그 믿음은 성령으로부터 왔음: 진리를 믿음+사랑을 받음
성령은 세 위격 중 하나인 동시에 성부․성자 사이의 사랑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성령을 사랑하라”는 말이 없다.
왜냐하면 사랑이 곧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구원받을 때 신자에게 성령을 주심
a. 하나님과의 교통이 시작됨: 중생
b. “그 사랑”을 심으심: 내주
c. “그 사랑”을 풍성하게 하심: 성화(성령 충만)
하나님께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우리를 하나로 연합시키심.
그러한 영적 교통의 본질이 하나님의 “그 사랑”이다.
우리가 성령 충만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령 충만할수록 하나님과의 상호내재를 실제적으로 경험한다.
지성으로는 확신, 감정으로는 은혜, 의지로는 사랑의 힘이 넘친다.
성령 충만이 경시되고 있는 오늘날 신앙의 풍조를 개탄한다.
성령 충만으로서 신자로서 구별된 사랑의 삶을 살 수 있게 한다.
B.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앎
신자는 성령으로부터 받은 “그 사랑”을 통해 확신 가운데 살아간다.
“거하시는”(menomen) “안다”(ginoskomem). 현재 계속되는 동작이다.
한때 주 내안에, 나 주안에 있음을 확신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성령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령으로부터 받은 하나님 사랑의 감격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상호내재를 확신하지 못한다.
이렇게 약화된 확신 때문에 혼란스럽고 은혜가 없는 삶을 산다.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힘겹게 살아간다. 기쁨 없음.
세상에 뺏긴 에너지와 성령 충만을 통해 받는 힘을 비교해 보라.
모든 신자는 원리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 안에서 실제적으로 경험해야 한다.
이는 실제적 연합의 경험 안에서 생명과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말씀으로 진리를 깨닫고 회개할 때 다시 성령 충만함을 주신다.
그러므로 다시 회개하고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 사랑을 주셨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하나님 안에 우리가 있게 하신 것이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다시 한번 생명력 있는 삶을 살자.
아들로 나타난 사랑5 2019. 1. 13 주일 낮 예배
< 고백을 통한 사랑의 확신 >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요일 4:14-15)
I. 본문해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므로 우리는 상호내재를 확신하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 사랑의 확신은 오직 성령으로부터 온다.
예수가 구주이심을 고백할 때 사랑의 확신이 생긴다.
이 사랑의 확신은 신자의 고백을 통해서 강화된다.
II. 고백을 통한 사랑의 확신
A. 세상의 구주로 오심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구원자로 오셨다는 사실을 강조함.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요일 4:14)
‘구주’ soter는 신적 존재, 인간 모두에게 사용되었다.
‘세상’은 세상 사람을 뜻함. 예수가 인류의 구원자이심을 강조.
이 구절은 다음 네 가지 사실을 증거한다.
a.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심.
b. 예수는 세상을 구원하려고 오셨음.
c. 그 예수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셨음.(無罪)
d. 사도가 예수의 십자가 구원 사건을 보았음.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으로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셨음.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14). 예수님이 인간이심을 강조함.
예수가 가현적인 육체로 왔다는 영지주의 이단을 비판한 것임.
초대교회의 많은 이단들이 예수와 우리의 육신이 다르다고 보았음.
그러나 죄를 제외하고는 예수의 육체는 우리와 동일하다.
“…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그러면 하나님이신 성자가 왜 사람이 되셔야 했을까?
a. 속죄 제물로 죽으시기 위해
b. 하나님을 보여 주시기 위해
c. 참 사람을 보여 주시기 위해.
중세 초기 스콜라신학자 Anselmus(1033-1109)
“왜냐하면 한 사람의 불순종을 통하여 사망이 인류에게 들어왔기 때문에 한 사람의 순종을 통하여 또한 생명이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저주를 받게 한 죄가 여인으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우리의 의와 구원을 이루어 낼 분이 여인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합당합니다. 악마가 사람을 유혹하면서 나무열매의 달콤함으로 그를 정복하였으므로 사람이 나무에 달려 고통을 감수함으로써 악마가 정복되는 것이 합당한 일입니다.”「인간이 되신 하나님」Anselmus, 1장 3절
두 개의 동작임. “보았고 tetheametha ‥ 증언하노니 marturoumen‥”
“보았다” 완료형. “증거하노니” 현재형.
a. 본 것은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
b. 증거한 것은 그 사실에 대한 의미(意味)임.
이것은 두가지 사실을 보여준다.
a. 증언하는 동작이 현재적이고 반복적임.
b.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내적 증거가 현재적이고 반복적임.
이는 육신뿐 아니라 믿음으로써 세상의 구주이심을 본 것임.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눈부신 계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이 무엇일까?
a. 그의 성육신의 의미를 아는 것.
b. 거기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
성령 충만한 신지는 그리스도를 현재적으로 반복해서 경험한다.
왜 세상을 사랑하는가? 육체 사랑을 끊지 못하는가?
예수의 생애와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 경험의 결핍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라. 그를 영적으로 보고 증언하는 삶을 살라.
B. 하나님의 아들이심
성령으로부터 온 사랑이 어떻게 신자의 마음속에 역사하는가?
어떻게 내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내 안에 있음을 확신하는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연합이 실제적으로 고백을 통해서 온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일 4:15)
여기서 “시인하다” homologese는 공중적(公衆的) 고백을 의미한다.
당시의 문맥에서 세례와 공적 고백의 의미를 생각해 보라.
이것은 매우 큰 확신과 용기, 그리고 결단을 요구한다.
이제 자신에게는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 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 고백은 그를 그릇된 세상 사랑의 모든 대상에 대한 포기이다.
이 고백은 신자의 본성이나 개인적 결심에서 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13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것은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요일 4:2)
이런 고백적 신앙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와 계심을 확신하게 된다.
구원의 감격 속에서 살자. 이런 은혜 경험 속에서 살자.
III. 적용과 결론
왜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는 신앙으로 사는가?
사랑은 현재적 고백을 낳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자.
아들로 나타난 사랑6 2019. 1. 20 주일 낮 예배
< 그 사랑 안에 거하라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일 4:16)
I. 본문해설
성령 충만한 생활은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한 고백은 사랑의 확신을 더한다.
하나님과의 하나 된 경험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진수다.
II. 사랑 안에 거하라
A. 믿음으로 시작됨
그러한 연합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통해 시작된다.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믿음으로 시작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요일 4:16상)
이 구절은 “‥알았기 때문에 믿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KNJ 사역(私譯)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갖고 계신 그 사랑을 우리가 알았고 또한 믿었다.”
1. 믿음과 사랑의 관계
“갖고 계신” ekei는 현재형, “알았고 또한 믿었고” egnokamen
kai pepisteukamen는 현재완료형.
믿음과 함께 우리 안에 “그 사랑”이 시작되었다.
구원을 통해서 하나님 사랑이 내 안에 경험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이웃 안에 산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살고 사랑을 통해 이웃 안에서 산다.”
마르틴 루터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제57절.
이것이 무슨 뜻인가? 참된 믿음은 반드시 참된 사랑을 가져온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이 참된 믿음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따라서 참된 믿음 없이 참된 사랑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초월하여 하나님 속으로 끌어 올려지고,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는 자기 아래로 내려와 이웃 속으로 내려간다. 그러나 그는 항상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다.”
마르틴루터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제57절.
2. 지식과 믿음의 관계
“알았고 또한 믿었나니” 아는 것과 믿는 것을 함께 제시한다.
믿음은 지식을 배척하고 지식은 믿음을 방해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믿음은 지식을 통해서 온다. 믿기 위해서는 믿어야 할 내용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예배와 설교에 있어서 생각과 이해의 중요성을 생각하라.
믿음은 이성(理性)의 이해를 초월하는 성경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지식 수납의 행위다.
하나님 사랑을 알았고 믿게 되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함.
“알았고 또한 믿은 것”은 완료된 동작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현재적이다.
“우리 안에 갖고 계신” 그 사랑을 현재적으로 갖고 계신다.
신앙은 “그 사랑”으로 돌아가 그것을 현재적으로 소유하는 것임.
B. 사랑 안에 거하라
이어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사는 비결을 제시한다.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하)
여기서 사랑은 모든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사랑”이다.
“거하는 자” menon는 현재분사형. 현재 계속하고 있는 동작을 뜻한다.
우리는 순종하고 싶다. 믿고 싶다. 깨닫고 싶다. 무엇보다 기쁘고 싶다.
기쁨, 감격, 환희, 가슴 벅차는 희열 같은 것을 언제 느꼈는가?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랑”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사랑의 효과를 누린다.
하나님 사랑을 잃어버리고도 마음 아프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세상 사랑, 자기 사랑 모두 사라질 것들에 대한 사랑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세상도 지나가고 사랑하던 자기도 사라진다.
없어질 것들을 사랑하는데 어찌 행복할 수 있는가.
거기에 매여 출렁이는데 어찌 영원한 평안이 있겠는가.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돌아오라. 거기서 인생을 살아갈 힘을 얻으라. 그 힘은 생명의 힘이다.
그 문장 사이에 삽입된 것 같은 선언이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 사랑은 영원하고 완전한 사랑이다.
사랑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섞여있다.
달콤함과 기쁨, 소유와 사랑 받음, 쓰라림과 아픔, 이별과 상처.
그러나 하나님 사랑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분 안에는 성격차이와 갈등, 버림 받음이 없다.
사랑에서 멀리 떠난 사람들에게조차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이시다.
더 이상 메마른 광야 같은 세상에서 한모금의 물도 없이 방황하지 말라. “그 사랑”으로 돌아오라.
III.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은혜를 받으라. 성령 충만하라.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신뢰하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아들로 나타난 사랑7 2019. 1. 27 주일 낮 예배
< 사랑과 담대함 >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 …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17-19)
I. 본문해설
예수를 믿음으로써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그 사랑”이 우리의 마음과 생활에 미치는 효과에 대해 말한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 희망에 반(反)하는 현실 속에서 산다.
현실의 큰 힘이 나를 휘두를 때 우리는 자신의 인생인데도 거기서 소외된 느낌을 받는다.
어떻게 하면 내가 좀 더 인생을 당당하게 살 수 있을까?
II. 사랑 안에 담대하라
A. 사랑 안에서 담대함
“이로써” -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함으로써”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거함으로 “그 사랑”은 온전히 이루어진다.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
1. 사랑과 심판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17절)
여기서 “사랑”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모두 포함한다.
온전한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 심판날도 두렵지 않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있는 “그 사랑”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임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이 어떠한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애를 통해 보여주셨다. 아버지와 하나 됨 - 두려움 없이 사셨음.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예수 그리스도는 핍박과 고난, 결핍에 복종하셨으나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2. 심판과 담대함
이 “심판 날”은 이중적이다. 우주적 종말로서의 심판과 개인의 죽음으로서의 심판이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갖는 담대함의 근원은 무엇인가?
이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사랑의 현재적 경험에서 오는 담대함이다.
이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불변하는 사랑 안에 있다는 확신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7-39)
하나님이 그 심판의 주체이시며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랑 안에서 그가 명하시는 바를 행하며 살기를 원한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양심에 반하는 악을 행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B. 두려움을 내쫓는 사랑
이어서 온전한 사랑과 두려움의 관계에 대해 설명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자기가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은 하나님 자신뿐이신데, 그는 우리에게서 빼앗길 수 없는 존재이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는” 이유는 이중적이다
a. 미래적으로 심판 날에 우리를 인정하심. 여기서 “형벌” kokasis는 종말론적 의미로 사용됐다. 심판은 모든 사물을 본래의 질서대로 되돌려 놓는 신적 행위이다.
b. 현재적으로 책망을 두려워하지 않음. 사랑 안에 있는 신자도 완전하지는 않으나 어떠한 악도 의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고전 13:5)
하나님과의 온전한 사랑 안에 사는 신자의 최고의 유익은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平安)이다.
모든 두려움은 하나님께 대한 무지(無知)나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찾는 그릇된 사랑에서 비롯된다.
만약 두려운 것이 있다면 최고선(最高善)이신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사랑이 없는 것이다.
참 사랑이 모자라는 것만큼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서운 것 때문에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만을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사랑의 연합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신앙에서 오는 완전한 자유를 누린다.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 담대할 수 있다.
모든 두려움은 하나님만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헛된 사랑을 버리라. 십자가의 사랑으로 돌아오라.
아들로 나타난 사랑8 2019. 2. 3 주일 낮 예배
< 사랑의 두 지평 >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0-21)
I. 본문해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때 그는 담대해 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벌 받을 일을 욕망하지 않음.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두려움이 없음.
이런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온 것임.
II. 사랑의 두 지평
A. 하나님을 사랑함
예전에 우리는 자신을 기쁘게 하는 사랑을 했음.
구원받기 전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음.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영원 전부터 사랑하셨으나 구원받음으로 우리가 그 사랑을 알게 됨.
죄인을 구원하신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에게 하나님 사랑을 알게 하심.
복음을 믿음으로써 그 사랑을 받게 되고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됨.
B. 형제를 사랑함
하나님의 사랑은 구원을 통해 개인적으로 경험되었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나면 그 사랑 안에 온 세상과 인류를 향한 우주적 사랑이 있음을 알게 됨.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세상은 사랑을 알지 못함. 하나님 사랑을 아는 사람들로 교회 삼으심.
개인의 신앙의 모습은 다양해도 교회는 오직 하나의 사랑으로 일치를 이룸.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으로 나타난 하나님 사랑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사랑을 가짐.
십자가의 구원을 통해 이루시려는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인데 그 나라는 사랑의 나라임.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그 나라를 먼저 구현할 공동체를 주심 -> 교회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용납하기보다 모든 것을 치료하는 사랑임. 질서로 돌아감.
교회는 마지막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통치를 미리 보여 주도록 부르심.
III. 두 지평의 융합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됨.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 세상 사랑, 형제 사랑을 알게 됨.
그래서 하나님 때문에 세상 사람과 형제를 사랑하게 됨.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1)
이는 사랑에 있어서 두 지평의 융합임: agape + eros
하나님 사랑(Agape) 때문에 사랑(Caritas)이 생기고 그 사랑으로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함. 자연만물을 선대(善待)함.
그러므로 신자에게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나뉠 수가 없음.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순전한만큼 형제를 순전히 사랑하게 됨.
하나님께 대한 회개는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사랑을 동시에 회복시킴.
매일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매일 형제를 사랑하게 됨. 사람 사랑이 하나님 사랑에 의존함.
自己가 용서받은 罪人임을 기억하며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해야 함.
IV.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자.
그 은혜로 이기적인 자아를 깨뜨리자.
하나님의 참된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자.
아들로 나타난 사랑(2018.12.23. 성탄감사예배1)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요일 4: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요한 사도가 이 편지를 쓸 때는 정통교회들이 이단으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신앙의 근본, 구원의 조건을 지식에 있다고 믿는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세력을 떨쳤습니다. 그들은 우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그분은 참 사람이고, 참 하나님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냥 평범한 인간으로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는데 세례를 받을 때에 성자가 그 분의 몸속에 오셨고, 그러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성자는 떠나시고 그는 평범한 인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참 사람이며 참 하나님으로 믿던 정통 교회의 신앙에 매우 커다란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랫동안 예수를 직접 경험하고 함께 살았던 사도 요한이 이러한 가르침들을 반박하며 그리스도 예수가 참 사람임을, 참 하나님임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아기 예수로 오신 것이 우리 인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전체가 하나의 주제에 대해 논술하고 있습니다. 그 진술은 바로 하나님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II.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
A. 하나님 사랑이 나타남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희랍어로 ‘헤 아가페 투 쎄우(he agape tou theou)’인데 직역을 하면 ‘그 하나님의 그 사랑’입니다. 즉, 여러 신의 사랑이 아니라 단 하나의 사랑이 이 세상에 나타난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 ‘헤 아가페’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것은 그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마치 가족처럼 관계를 맺으며 살게 하시기 위해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주지 않은 영혼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나타난바 되었다고 했는데 희랍어로 ‘에파노로데(epanorothe)’입니다. 이 말은 두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아주 명백하게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디아우토(di autou)’, ‘그 사람을 인하여’, ‘그를 인하여’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전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이전에도 여전히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타락한 아담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은 역정을 내는 목소리가 아니라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들을, 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범죄한 이후에도 여전히 사랑하셨고, 그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큰 능력으로 자기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기적을 베푸셔서 민족들을 이끄시고, 질 수밖에 없는 전쟁에서 승리를 주시고, 그들의 필요를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채워주심으로써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간접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경건한 자들은 더욱이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묵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 4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구원을 내게 임하게 하소서”(시 119:41). 그렇지만 구약은 하나님의 그 사랑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영어도 들리지 않는 사람이 아주 복잡한 외국 영화를 자막 없이 보는 것처럼 그 내용을 쉽게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태어나게 하시고 이제 우리 위에 우리를 초월해서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사시는 하나님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태어나기 전부터 그 이름을 예수라 하였고, 또한 ‘임마누엘’이라 하였으니 이는 ‘구원자’,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다.’ 라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의 몸을 빌어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과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성장하신 것과 공생애에 들어서서 당신의 온 마음을 다해 사람들을 섬기셨는데 바로 그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그 분이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받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무덤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그 사랑을 인간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되셔야 했고, 구원 받아야 할 인간을 위해서 죽으시기 위해서는 참 사람이 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으니 이것을 가리켜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분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고, 그래서 성경은 그가 하나님과 본체이시나 그와 동등됨을 여김을 받을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니 그 분이 바로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시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게끔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그 사랑을 깨닫게 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의 뿌리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구약에서 희미하게 비춰졌으니 보통 뛰어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난 것을 보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그 사랑이 나타난바 되었으니…”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구약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 몸 입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전에는 희미하였으나 이제는 명백하게 드러나게 된 것이 바로 하나님의 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바로 이렇게 하여 하늘 높이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슬픔과 고통, 질병과 가난, 고독과 소외감에 사로 잡혀 있는 인간들을 위해서이고, 인간들 가운데 오셔서 함께 계시고, 그들을 가족처럼 받아주심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당신의 인격과 보이는 육체의 삶을 통해 드러내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그 인간의 모든 불행의 뿌리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모르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지난주에 학교가 종강을 했고, 늘 하는 것처럼 저는 학생들의 시험 답안을 채점해야 했습니다. 이번 학기에 제가 가르친 과목은 ‘기도’였습니다. 그 중에 스무 살 난 어느 한 여학생이 답안에 그런 글을 썼습니다. “교수님 저는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깊이 앓았습니다. 손목을 면도칼로 수없이 그었고, 그리고 감옥 같은 정신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습니다. 한강에 뛰어들었으나 구조대에 의해 목숨을 건졌고,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저는 하나님을 지독하게 대적하고 미워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 학기에 들어와서 하나님에 대해 배우게 되었습니다. 1분도 기도할 수 없었던 제가 이제는 간절히 5분이나 계속해 기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었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글자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지만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보십시오. 그렇게 우울증과 공황 장애를 앓고, 수없이 손목을 그어 목숨을 끊으려고 하고, 보통 사람의 담력으로 한강에 뛰어드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지독한 원망과 미움 속에 살았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지금은 이렇게 사랑하게 될 예수를 그렇게 대적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그 사랑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불행의 원인을 여러 방식으로 규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 제 2, 제 3의 원인들이지 제 1의 원인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를 불행하게 할 만한 일이 일어나지만 그 풍랑을 인하여 오히려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갑니다. 견디기 힘든 고통, 혹은 질병에 시달리지만 그 풍랑 인하여 아버지께 더 가까이 갑니다.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런 삶을 실제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서 그런 사랑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 하나님의 하나의 그 사랑으로 돌아가는 길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독생자를 사람의 몸 입혀 이 세상으로 내려 보내셨으니 그분이 이 땅에서 사시고, 가르치신 것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묻어 있습니다. 그분이 설교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신 그 섬김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은 찬란하게 드러났고, 그분이 멸망당할 우리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은 어두운 밤하늘에 작렬하는 불꽃처럼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고, 인간의 믿지 아니하고자 하는 불신앙의 고집만 없다면 누구든지 신실하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알고 싶다고 주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사랑은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바로 이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기 예수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 이 사랑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돌아올 수 있도록 그분을 보내셨고, 그분의 생애를 성경에 기록하셨고, 그 기록으로 설교하게 하셨으니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장 큰 숙제는 바로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이 사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B. 우리를 살리려 하심
그러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그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일까요? 성경은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정확하게 말하면 “살게 하시기 함이라”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하시니라’고 하는 이 구절은 희랍어 ‘히나(hina)’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히나’는 영어의 ‘because’와 같은 강한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입니다. 하난미은 우리를 살게 하시기 위하여 자기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전까지 죽어있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죽어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우리는 허물과 죄 때문에 죽어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죽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육체의 죽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육체로 태어난 인간간이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9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라고 말입니다. 한번 죽은 육체는 살아나지 아니하고 썩어서 흙으로 사라집니다.
할아버지 돌아가신 지 29년, 할머니 떠나가신지 23년이 되던 해에 정겨웠던 두 분의 묘지가 도시 계획에 들어가 이장을 하라는 통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족들과 함께 그 무덤을 파고 이장하는 광경을 지켜보았습니다. 당연히 할아버지 옆에 할머니의 유골이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마지막 돌아가실 때 자신은 평생 얽매이며 살았으니 자신이 죽으면 절대로 베옷을 입히고 묵지 말라고 유언을 하셨습니다. 유언을 따라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혀 드리고, 그리고 줄 없이 관에 조용히 눕히고, 빈 틈새만 메워서 시신이 흔들리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 관, 그 옷, 그리고 그 무엇인가 하다못해 할머니 쓰시던 뭐라도 넣어드렸을 텐데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앙상한 유골만 남았습니다. 49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유골이나 23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유골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생각보다도 빠른 시간 안에 모든 것이 흙으로 돌아가는구나.’ 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한번 죽은 육체는 썩어서 흙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유골을 수습하여 분골하여 유리 항아리에 넣어 선산 납골당에 보관하였지만 그곳도 여러 세월이 흐르고 나면 흔적 없이 모두 원소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육체의 끝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죽었다고 하는 말은 이런 식으로 사라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악한 영혼이든 선한 영혼이든 영혼을 불멸의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은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고유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생명의 결핍입니다. 영혼의 죽은 상태는 사랑 없음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으로서 의미를 찾아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막대한 생명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무 목적 없이 우리가 태어났을까요? 세상은 이유도 없이 그냥 존재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아무 뜻도 없이 만난 것일까요? 그렇게 뜻도 없이 만난 사람들이 왜 함께 얽혀 서로에게 고통을 주고 혹은 세상에서 얻기 쉽지 않은 기쁨을 주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으며, 또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만나 서로를 빚어가는 이 신비한 만남의 비밀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영혼이 죽은 자는 죽은 자의 삶을 삽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6장 1절에서는 ‘죽은 행실’, 곧 ‘죽은 영혼의 육체의 행위’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혼이 죽어 있어서 영혼의 고유한 기능을 올바로 수행하지 못할 때 그것은 수많은 악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영혼이 죽은 사람은 마음으로는 진정 고매한 삶을 꿈꾸지만 실제의 육체로는 저열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모님은 진심으로 자기가 낳아준 이들로서 공경해야 하지만 그 부모를 야멸차게 미워하고 원수처럼 대하고 의절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남편과 아내가 함께 사랑하고 변함없이 살아가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그런데 그 아름다움을 버리고 추루한 삶을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신의 모양을 닮아 자신의 몸으로 태어난 그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신 본능이고, 그들을 보호하는 것은 하찮은 짐승에게도 주신 본성인데 이것을 저버리며 부모가 자식을 버리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자식의 행복을 짓밟아 불행하게 만드는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모두 죽은 영혼에서 비롯되는 악한 행실입니다. 그리고 잠시는 그렇게 해서 행복할 지도 모르나 일평생 그렇게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실패한 인생의 짐을 지고 살아야 하고, 그런 사람들을 사랑할 수 없었던 죽은 영혼의 상태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사상가 체스터턴은 이러한 인간 욕망의 난해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한 남자가 사창가의 문을 두드릴 때 사실 그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생명이 없을 때는, 다시 말해서 그가 영혼적으로 죽어 있을 때는 진정으로 살고 싶은 삶 대신 저열한 삶을 이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부부간에 신의와 사랑을 지키고, 자녀를 전심으로 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 것이 주님의 뜻에 가깝기 때문에 비교적 덜 불행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들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그 사랑은 아닌 것입니다.
죽은 영혼이 다시 살아나 하나님의 사랑이 물 붓 듯 부어지기 전까지는 이 충만한 생명을 누릴 수 없고, 그는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는 인생의 기쁨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자신의 육체에 대하여 어찌할 수 없듯이 영혼이 죽은 자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죽어있는 영혼을 다시 살아나게 하는 근원적인 생명은 자기 자신에게서 솟아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생명은 밖으로부터 옵니다. 죽음의 기운이 맹렬하기 때문에 인간은 불행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생명이 없고, 죽음의 기운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고통을 받습니다. 사람이라는 사실과 지금 사람답게 살 수 없다는 현실, 그렇게 살 수 없는 자신의 정신과 영혼의 상태가 그대로 자기 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이 죽음의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수많은 방법들을 제시합니다. 이런 것들이 책을 통해서, 방송을 통해서, 인터넷을 통해서 수없이 번져갑니다. ‘못 살아도 괜찮아.’, ‘남 생각하지 말고 너만 생각하며 살아.’ 어느 사이트 불륜을 조장하는 세계적인 사이트에는 이렇게 글이 떴습니다. ‘짧은 인생입니다. 바람피우세요.’ 그 사이트가 해커의 공격을 받아서 모두 털려서 그 명단이 이제 공개되고 그것으로 수많은 사람이 협박을 받고, 가정이 깨졌습니다. 사회적인 명예와 지위를 잃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어디 이런 것들뿐입니까? 어느 한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미국에서는 상당한 돈을 내면 500만원, 천만 원 정도를 내면 그럴싸한 자동차를 창고에 넣고 해머로 두드려 부술 수 있는 권한을 줍니다. 그렇게 해서 어떤 것에든 복수심과 증오심을 해머로 그럴싸해 보이는 자동차의 유리창을 깨고 철판을 박살내면서 스트레스를 풉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이런 속에서 사람들은 성적인 쾌락에 탐닉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우리의 이 고통의 증상들을 완화할 수 있을까요? 잠시 잊게 해줄 수 있을지는 모르고, 자신을 정당화해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죽음의 증상이 자신 속에 있기 때문에 영원히 그 죽음은 그의 마음과 정신, 삶, 행동 속에 넘치게 역사합니다. 완전히 죽은 자처럼 살기까지 죄와 죽음의 기운은 멈추지 않고 인간을 덮칩니다. 그래서 이런 방법을 택해서 삶의 허무와 고통을 잠시 잊어보려고 합니다. 이것이 마치 인생의 커다란 사상이라도 되는 양 포장을 하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헉슬리라고 하는 미국의 위대한 작가, 유명한 작가뿐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익히 잘 알고 있는 스티브 잡스까지 그들은 젊은이에게 마약을 권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현실 세계에 탈피하고 초월적인 세계를 맛보는 것이 인생의 삶을 비옥하게 한다고 가르쳤고, 그리고 인간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다고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해결책이 될까요?
요즘 독감이 무섭습니다. 유의하십시오. 어제도 병원에 갔는데 약 29여명의 환자가 독감 때문에 방문했다고 합니다. 지독한 독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독감이 걸리면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온 뼈마디가 쑤시고, 콧물이 쏟아지고, 눈물이 나고, 심하면 귀에서 소리까지 들리고, 엄청난 고열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연세 드신 많은 분들은 독감에 돌아가십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궁극적인 이유는 눈이나 귀, 코, 뼈마디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게 아닙니다. 독감 바이러스가 온 몸에 퍼져서 일어나는 증상입니다. 해결의 길은 무엇일까요? 당연합니다. 가서 주사를 맞아서 항바이러스제를 주입하고 그래서 핏줄을 타고 들어가서 온 몸에 있는 바이러스와 맞붙어 싸워 그것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콧물도 안 나오고, 뼈가 쑤시지도 않고, 온 몸의 열도 그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 죄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손해를 보는 측은 하나님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리고 그 죄라는 바이러스 증상은 여러분들의 비참한 상황들로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 바이러스를 근원적으로 치료하려고 하지 않고, 흐르는 콧물을 막기 위해서 애를 쓰고, 뼈마디가 쑤시고 아픈데 뜨거운 찜질로 해결해 보려고 하고 신신파스를 붙입니다. 해결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몸속에 바이러스 균이 죽기까지는 만족하지 않고 계속 자기를 퍼트려 여러분 몸 전체를 독감 바이러스로 가득 채워서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그 사랑을 공급받으며 사는 것이 이 죽음의 기운을 이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이 바로 우리의 영혼에 넘쳐나는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도대체 우리가 불신자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이 하나님에게 아쉽기에 우리에게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가르칩니까? 그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마다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전심으로 그를 사랑하며 살라고 가르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돌아가는 길이고, 그 생명을 충만하게 누려서 그 모든 죽음의 증상에서 해방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꿈꾸던 고매한 삶 대신 짐승과 같은 삶을 사는 삶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소중한 가르침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신 그분을 비천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게 하신 이유가 오직 단 하나의 이유, 우리가 잃어버린 그 생명을 우리에게 다시 주시게 하기 위함이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주님의 구원을 마음 깊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도록 처음부터 그렇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분 곁에서 그분을 의지하며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충만한 사랑을 받으며 살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그 충만한 사랑 안에서 살아가도록 그렇게 창조되었습니다. 이미 구원을 받고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그 사랑이 자신의 마음에서 불순종과 죄로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지난 한주동안 충분히 그리스도를 사랑하셨습니까? 그리고 그분에게 충만히 사랑을 받으셨습니까? 여러분들을 하나님을 아는 자녀로 불러주시기 위해 죄 없으신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그렇게 감격스럽게 느껴졌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끊임없이 여러분들에게 그 모든 죽음의 증상에 집착하는 대신 그 속에 있는 죽음을 가져오는 근원적인 병의 원인을 고치도록 끊임없이 하나님 말씀과 사랑을 주사하려고 하지만 여러분들은 그것을 뿌리치고, 지독하도록 온 몸에 돋아난 죽음의 기운들이 만들어 낸 죽음의 징조들과 싸우며 하나님 원망하고 죄 지으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 행복하십니까? 그러면 그 길로 계속 가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은 불행합니다.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여행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보지 못했던 곳을 구경하며 다녀도 그것은 잠시 잊는 것뿐입니다. 생명 없는 것은 없는 것이고, 있는 것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나같이 미약한 설교자를 불러서 여러분들에게 당신을 향하여 생명을 얻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를 살리려 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났으니 곧 내 아들 예수가 너희에게 온 것이라. 너희는 그를 믿으라.’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믿는 자들을 살게 하십니다. 신실하게 주님을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충만한 생명을 주시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덜 주십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은 살아있으나 활동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병든 몸이 되어 세상처럼 세상 사람처럼 살지도 못하고, 신자답게 살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도 불행하고, 저렇게 해도 불행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이런 삶을 계속해야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삶의 끝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들을 부르십니다. 당신이 필요해서 여러분들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야 할 삶을 죽은 자처럼 이어가는 여러분들이 너무 가엾어서 여러분들을 살게 하시려고 당신께 부르십니다. 오늘 그분께 돌아가 이 생명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보이도록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은 보이도록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그 사랑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무엇 때문에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을까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생명이신 당신이 육체로 죽임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적인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아기 예수 그리스도로 오시는 날이 우리에게 기쁜 것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 속에 하나님이 이 충만한 생명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 때문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 충만한 생명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들로 나타난 사랑(2018.12.25. 성탄감사예배2)
여기 있는 하나님 사랑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녹취자: 김세나
Ⅰ. 본문해설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하늘 생명으로 살리려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이 기적으로 혹은 전쟁에서의 승리로 필요한 것들을 주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지만,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 나타날 사랑의 희미한 그림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사람의 몸을 입은 하나님에 의해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Ⅱ.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심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사랑을 이루셨나요? 오늘 여러분들이 읽은 이 본문은 한 가지 주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밖에 없는 당신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셨겠습니까? 그것은 먼저 하나님이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A. 하나님이 사랑하심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인간도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고 예쁜 것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원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 여기에 있으니…”라고 한 말씀은 그러한 사랑 비슷한 모든 것들을 밀쳐 버리며 그 참된 사랑이 여기에 있다는 선언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데서 사랑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 특히 인간을 창조하여 사랑의 대상을 가지시기 전부터 사랑이셨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셨고 그 하나님은 서로를 인격으로서 완전히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 바깥에 사랑할 대상이 없어도 하나님 자신은 사랑이실 수가 있었습니다. 영원 전부터 사랑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만드신 것은 이러한 당신의 사랑을 통해서 인간을 사랑하시기를, 마치 삼위 하나님이 서로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함이었고, 당신의 완전한 사랑을 본받아 인간들이 서로를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처럼 여기는 사랑의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인류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창조에서 이미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무한한 지혜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사랑이 모든 피조물 중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닮아 창조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창조와 구약의 선택, 하나님의 인도, 보호를 통해 나타난 사랑은 앞으로 나타날 위대한 사랑에 비하면 희미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육신을 통해 나타날 하나님의 큰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을 당신과의 언약을 깨뜨린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 일이 일어나기 전 하나님은 당신의 법을 공표하셨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17). 그런데 이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고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였습니다. 그랬으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 했는데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들이 이러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은총으로 나타났습니다.
세 가지로 나탔는데, 첫째는 형벌입니다. 즉시 반드시 죽어야 할 인간을 집행유예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죽기는 반드시 죽지만 즉시 죽게 하시지 않으시고 살아있는 동안 자손을 번성하여 이 땅에 인류를 남겨두셔서 하나님의 창조하신 뜻을 무효로 돌려놓지 않으셨습니다. 또 하나는 그렇게 남아있는 인류 중 당신이 선택한 백성들에게 제사의 제도를 계시하시고 그 제사를 통해 한시적이나마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통하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보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영원히 죄에서 이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를 약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로부터 수많은 구약의 백성들이 언젠가는 이 모든 하나님과의 불화를 깨고 그 상태는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완전한 복락으로 자신들을 구원해줄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라고 선언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원래의 그 사랑이 우리가 흔히 경험하고 있는 사랑이 아님을 선언한 것입니다. 예쁘고 좋아 보이는 것들을 사람들이 사랑하지만 그것은 자기에게 유익하기 때문이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온 인류를 그 한 사람 안에서 행복하게 하시려는 그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알지 못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도록 부르셨습니다. 이사야에서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7)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비록 희미한 사랑이었으나 그 사랑은 주님께 회개하고 돌아가기에는 충분한 사랑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다시 여호와를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신약에 와서 이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구약에서 희미했던 당신의 위대한 사랑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눈부시게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음으로써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되었으니 사도행전 3장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행 3:19-20). 그리스도 예수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 만약 하늘로 쏘아올린 불꽃놀이라면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한 것은 어두운 밤하늘 정점에서 눈부시게 작렬하는 그 불꽃의 폭발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이고 하나님은 그래서 이제는 희미한 것들을 통해 우리를 당신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시지 않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어두운 하늘에 눈먼 자도 볼 수 있도록 작렬하게 눈부시도록 빛나는 불꽃과 같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랑으로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로마서 5장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확증’하였다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추가적인 증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백해졌다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시도록 비춰준 그 사건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이 그렇게 어두운 밤하늘에 작렬하는 것처럼 눈부신 정점의 폭발이었다면, 지금도 여전히 그 하나님의 사랑에 눈감은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까?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랑의 원수로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는 비밀이 있습니다. 그 비밀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을 통하여서만 알 수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혹은 누명을 썼기 때문에 억울하게 죽어간 한 평화주의자의 죽음이었습니다. 그것은 맨눈으로 보아도 모두 보아도 모두 인정할 수 있는 이성적인 추론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를 온 인류가 사대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눈으로 본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의 올바른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보는 사람 마음 안에 하나님이 오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3년 동안이나 함께 먹고 자며 공들여 말씀을 가르친 제자들도 성령을 받기까지는 그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고, 주님이 하늘로 승천하시는 순간에도 그들은 이스라엘 왕국이 다시 번영하여 그 나라에서 영광을 누릴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내신 당신의 영, 성령이 오시자 그들은 비로소 눈이 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얼마나 눈부신 하나님의 사랑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해마다 한강에서, 그리고 부산 앞바다에서 세계적인 불꽃놀이가 이루어집니다.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미디어를 통해 보면 그 불꽃놀이는 굉장합니다. 아마도 수억, 또는 10억 이상의 아주 고가의 불꽃들이 하늘을 아름답게 장식합니다. 우리는 그 불꽃을 보며 마음속에 새로운 정동을 느낍니다. 그러나 시신경이 죽은 사람은 폭발소리를 귀로 들을 수 있으나 그 찬란한 불꽃은 단 하나의 줄기도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까 여러분들이 질문하였던 것에 대한 답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성령님은 오늘도 그 사랑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 어두운 영혼을 고쳐주셔서 어두운 밤하늘에 작렬하도록 눈부신 그 사랑의 불꽃을 보게 만들어 주십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이고, 어떻게 보면 하나님도 그 이상은 당신의 사랑을 인류에게 보여줄 수 없을 정도, 최고의 방법으로 당신이 인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보내주신 것이라면 여러분들의 가장 큰 의무는 무엇이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이 해야 할 가장 큰 일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셔서 눈부신 당신의 사랑을 더 이상 증명하실 필요가 없을 정도로 보여주셨다면 그 다음 여러분들의 의무는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렇게 믿음으로써 예전에 그 사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스스로 어두운 길을 걸어 불행히 살았던 날들을 진심으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 회개를 통해서 그 사랑이 아닌 잘못된 사랑을 버리고 참 사랑인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어거스틴이 고백했듯이 하나님이 무엇이 아쉬워서 여러분들에게 사랑을 구걸하시겠습니까? 그분 자신이 무한하고 완전하시기에 누구에게 사랑을 받으실 필요도 없고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않으셔도 당신은 모자라신 것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여러분들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이유는, 그리고 사랑하지 않을 때 하나님이 큰 벌을 내리실 것처럼 채찍을 드시는 이유는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여러분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주에 가득 찬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 위대한 하나님의 우주적 사랑을 노래했던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그 위대한 사랑을 노래하고 16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
하나님을 위해서 당신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행복한 길이 그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그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창조될 때부터 사랑 안에 태어나 무한한 사랑을 받으며 또 사람들을 그렇게 사랑하며 진정한 인간이 되어가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서로 사랑하는 부모 밑에 태어나서 무한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는 그 엄마, 아빠가 서로를 얼마나 진실하게 사랑하는가 보며 성장해야 합니다. 자란 후에는 좋은 형제간들을 만나 서로 사랑하고 친구들과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서 한없는 사랑을 받고 거기에서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 배워야 합니다. 나이든 후에는 자녀들로부터 한없는 사랑을 받고 그러면서 인간이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어디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소설에서도 그러한 사람은 그려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세상에서는 그러한 사랑의 환경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랑이 불가능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그 모든 사랑이 하나의 그 하나님의 그 사랑에서 온 것인데, 사랑하는 자나 사랑을 받아야 할 자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으니 어디에서 그렇게 사랑할 사람이 솟아난다는 것이겠습니까? 만약 하나님이 그러한 인간의 비참한 처지를 그냥 내버려 두셨더라면 인간은 거의 짐승들이 모여 사는 집단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전히 인간의 양심 안에 그런 희미한 사랑의 본성을 두었기 때문에 많은 부모들이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버리지만 어떤 부모들은 생명처럼 자신의 자녀들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으로 남을 수 있게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혜택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모자란 사랑을 채움으로써가 아니라 완전한 그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심으로써 구겨지고 모자란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대신 채우셔서 그래서 비록 망가졌으나 고치시고 상처를 받았으나 영광스럽게 하시고, 수치스러웠으나 다시 소망을 갖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자, 이 이야기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제가 그리스도를 만나고 경험하면서 살아온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때가 아니라 지금 이 사랑이 여러분들 속에 살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십자가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큰 본분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일을 좋게 해 주신다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의 좋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찬양)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네
주님과 함께 있을 때 두려움 사라지네
주님의 그 사랑 함께 하시네
주님이 항상 나를 지켜주시네
하나님이 무엇이 모자라시겠습니까? 그런데도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하시는 것은 그것이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살아있으나 살아있는 자 같지 않아서 죽을 것처럼 된 자로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피 묻는 십자가를 붙들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내 사랑하는 것을 좇아, 내 좋은 대로 산 결과였고 생명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죽음의 땅으로 걸어간 이유였습니다. 찬란한 진리의 빛을 버리고 스스로 오류와 무지의 어두움 속으로 걸어갔기 때문입니다. 이제 빛을 받았습니다. 의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이 참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입증하였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신 성령이 그 사랑을 증거 하였기 때문에 이제 바깥에서 빛나는 찬란한 사랑의 불꽃은 여러분의 마음에 작렬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그 사랑에서 멀리 떠나 이미 걸어갔던 생명이 없는 그 어두움의 땅으로 나아가는 것입니까. 인간의 모든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은 사랑할 것을 사랑하는 대신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 자신이 행복의 근원이기에 당신 자신에게로 모든 인류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 부름 받은 인류 중 특별히 선택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이 사랑으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B. 화목제물로 보내심
마지막 두 번째는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겠습니까. 요한일서 4장10절은 하반절에서 이 질문에 답합니다.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라고 말합니다. 화목제는 희생제물을 바침으로써 하나님과의 불화한 관계를 청산하는 제사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는 은총으로 바뀌게 된다고 로마서 3장25절에서 말합니다. 원래 화목제물은 화목제에 바쳐진 희생제사를 배경으로 합니다. 레위기 7장에는 바로 이 화목제사에 대한 상세한 규례가 나옵니다.
이 화목제사는 크게 세 가지 동기에서 드려졌습니다. 첫째는 감사의 동기에서 드려진 감사제사가 있었고, 하나님께 자기를 온전히 바치는 헌신을 뜻하는 헌신제사가 있었고, 마지막 하나님께 매우 특별한 것을 약속할 때 그 신실성에 자신을 묶기 위해 드리는 서원의 제사가 있었습니다. 이 세 종류의 제사를 포함하는 화목제는 결국 화목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화목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과의 불화를 전제로 합니다. 불화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화목하면 거리감이 없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늘 그립고 가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불화하면 살갗을 마주 닿아 있어도 헤아릴 수 없이 먼 거리에 떨어있는 사람으로 느껴집니다. 이 불화가 주는 것은 거리감입니다. 불화하면 서로 반감을 갖게 되고 거리감을 갖게 됩니다. 당연히 그 거리감 속에는 친밀감의 상실이 있습니다. 그래서 화목은 이 모든 것을 없애버리고 다시 불화한 두 당사자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화목입니다. 이 화목이 원래 구약의 제사를 배경으로 하는데 이 화목이 구약에서 ‘샬롬’입니다. 이 ‘샬롬’은 원래 온전한 것을 뜻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주식은 빵입니다. 우리처럼 속에 단맛 나는 팥이나 꿀이 들어간 빵이 아니라 아무것도 넣지 않는 그냥 커다란 빵입니다. 그 빵을 꽤 큼직하게 만들어서 팝니다. 집에 구워서 먹는 사람들도 있지만 요즘은 대부분 빵집에서 빵을 사다가 먹습니다. 그때 배가 고프거나 식구가 여럿이어서 큰 빵 하나를 원할 때는 히브리말로 ‘텐리 샬롬’이라 말합니다. 그러면 빵집 주인은 빵틀에서 나온 온전한 빵을 포장하여 줍니다. 혼자이거나 양이 적을 경우에는 반만 달라고 말하는데 ‘텐리 핫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칼로 빵을 반을 갈라서 줍니다. ‘샬롬’은 그처럼 온전한 것, 흠집이 없고 훼손되지 않은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간의 죄와 불순종에 의해서 훼손됩니다. 그것들을 인간 자신이 다시 온전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화목제사를 통해서 희생제물을 보고 헌제자의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써 당신과의 관계를 다시 온전한 관계로 만들어 주십니다. 물론 이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이었던 것이었지만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화목인데, 이 화목은 하나님과의 화목과 사람사이의 화목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화목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 하나님과의 화목을 자신 안에, 이웃과의 관계 속에 구현함으로써 진정으로 하나님이 주신 ‘샬롬’을 누리게 됩니다. 이 샬롬이 인간에게 적용될 때 어울리는 번역어가 없습니다. 다행히 우리나라 말에 ‘안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 중 가장 샬롬에 가깝습니다. 원래 우리나라 말의 어법에서 ‘안녕’이라는 말이 임진왜란에서부터 시작해서 이후 많은 전란을 겪으면서 “안녕하십나까”라는 말은 “안 죽고 사셨네요.” 혹은 “큰 일은 안 당하셨네요.”라는 의미로 바뀌어졌지만, 원래 안녕이라는 말은 이렇게 몸과 마음의 모든 상태가 안정되고 평화로워서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참 인간의 만족스러운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굉장히 훌륭한 단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룬 사람들은 그 화목 안에서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하기 때문에 자기 안에서 안녕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과 관계에서 안녕한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화목의 효과였습니다. 그런데 이 화목을 위해서는 반드시 죄를 속하는 제사가 필요했고 그래서 화목제사가 필요했는데 이 화목은 반드시 죄 지은 자를 하나님과의 화목을 깨뜨리고 이웃과의 화목을 깨뜨린 자의 죄를 대신해서 죽임당하는 희생제물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구약에서 수많은 화목제물이 희생으로 바쳐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져다주는 화목의 효과는 언제나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화목제만으로는 인간이 본래 하나님이 주시고 싶으셨던 완전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원히 단번에 드려져 무궁하고 완전한 화목을 가져올 화목제사가 필요했고, 거기에 바쳐질 제물은 매우 특별한 제물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바로 이 제물로 바쳐지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제사에서는 제사를 드리는 헌제자가 따로 있고 바쳐지는 제물이 따로 있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이 헌제자가 되어 자기의 몸을 스스로 헌제물로 삼는 독특한 제사를 드리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평화를 가져다주기 위해서는 그 속죄가 화목을 위한 대속이 영원하고 완전한 성질의 것이어야 했습니다.
인간이 지은 죄는 무한히 큽니다. 행위로는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지만, 의미로는 하나님께 대한 전면적인 반역이었습니다. 누가 가르쳐 준 것은 아니고, 중국을 여행하면서 저 스스로 발견해 낸 예화를 즐겨 사용합니다. 어떤 파출부가 남의 집에 와서 집안을 소제하다가 그 집에 가장만 앉는 응접실 중앙의 화려한 소파에 한번 청소복을 입은 채로 앉아서 몸을 끄덕끄덕 움직여 보았습니다. 마침 집에 들어오는 주인아주머니께 들켰습니다. 주인아주머니는 당연히 “거기에 앉지 마세요. 우리 남편 나리입니다.” 그러면서 그날 기분이 상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 다음날 용역회사에 전화해서 그 아주머니 싫으니 그분 말고 다른 사람을 보내달라고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앉은 의자가 황제의 의자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청소를 하려고 황제의 집무실에 들어갔다가 꼭대기 올라가서 먼지를 터는 것까지는 허용이 되는데 거기에 청소복을 입은 채로 한번 앉아서 양쪽 팔걸이에 손을 얹고 온 몸을 뒤로 재끼며 ‘에헴’하는 그 순간 황제가 왔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사형입니다. 왜 입니까? 똑같은 의자인데 거기에 앉은 의미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따 먹은 선악과가 남의 집 과수원에 있는 과일이었다면 욕이나 먹고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미가 달랐습니다. 결국 그 죄의 결과로 온 인류가 하나님과의 화목에서 끊어지게 되었고 그리고 죽음이 쓰나미처럼 밀려 들어왔고 죄가 온 땅을 뒤 덮었습니다. 그리고 만물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본래 아름다운 영광의 상당한 부분을 상실하고 인간이 죽도록 고생하며 이마에 땀을 흘려야 겨우 겨우 먹고 사는 비참한 존재로 전락되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하여 총명하게 알던 사람이 그 총명의 빛 되신 어두움의 그늘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죄가 무한하였기 때문에 속죄의 가치가 무한해야 했습니다. 더욱이 화목제물은 죽어야지만 제물로서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이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제사가 흠없는 제사이어야 했기 때문에 사람이지만 죄가 없으신 분이셔야 했습니다. 이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제물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밖에 없었고 그 아들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야지만 가능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과의 완벽한 화목 속에 살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이 되셨고, 생명이신 그 분이 죽음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신앙은 언제나 자기 같은 죄인을 위해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신 아버지의 마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이 언제나 그를 지배하기 때문에 내가 그러한 하나님의 눈물겨운 사랑을 입은 사랑이라는 의식이 그의 모든 삶을 지배하는 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이천년 전에 이미 이루어진 사건이지만, 그러나 지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현재적으로 느끼는 데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실제적으로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질문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완전하신 아들을 보내어 무한한 속죄를 이루시고 영원히 단번에 우리에게 화목을 주셨다면 우리가 오늘날 경험하며 살아가는 하나님과의 불화한 상황은 무엇입니까?”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엄마가 자기 아들을 끔찍이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부모를 떠나 돈을 훔치고 가출하고 죄를 짓고 결국 부모의 도움으로 경찰서에서 찾아옵니다. 다시 부모는 자식을 전심으로 사랑하지만 자식은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가지고 또 다시 가출을 시도합니다. 그것입니다. 주님과의 불화는 주님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스스로 여러분들을 온전히 화목하게 하시고 사랑하시는 그 주님의 품을 스스로 떠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불화를 경험하는 것이고, 그 불화 속에서 영혼은 그 샬롬을 잃어버리고 죄를 짓고 악을 행하고 미워하고 원수 맺고 악한 말을 토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처럼 여겨야 할 수많은 사람들을 말의 칼로 찌르고 상처의 창으로 찌르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과 반대의 삶을 살아가는데서 오는 불행입니다. 그것이 어찌 하나님의 책임이겠습니까?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은 당신과의 화목으로 돌아오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화목제의 이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수많은 화목제물이 드려졌으나 이것은 일시적이었습니다.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신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린 삶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바로 이 화목을 위하여 그냥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라 자기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온갖 고난과 고초를 겪게 하신 후 죽기까지 복종하시다 십자가에서 돌아가게 하심으로 열어놓으신 화목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바로 자기같이 무가치한 인간을 위해 무한히 가치가 있으신 독생하신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신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화) 저는 결혼 하고서 6년 동안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마음으로 한 번도 조바심 내 본 적이 없고, 또한 반성해 보면 아기를 갖게 해 달라고 절실하게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할머니도 별로 아이를 좋아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너희 둘이 행복하게 살면 그것이 좋은 것이지, 그렇게 너무 애써서 아기를 가지려고 안타까워 할 필요는 없다.” 절반은 위로의 말씀이셨겠지만, 그렇게 우리는 6년이 넘는 세월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정말 기적적으로 7년 만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12월에 태어난 아이를 이듬해 4월 부활절에 제가 다니는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잠시 교역자 생활을 쉬고 있는 몇 달 동안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목사님이 그 아이에게 세례를 주시고 이어서 성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떡과 포도주를 받으면서 생전 처음으로 뼛속 깊이 파고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아이를 낳기까지는 아들을 내어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알기는 하였고 눈물도 흘렸지만, 그렇게 뼈를 후벼 파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 품에 있는 이 아이를 내가 사랑하는 것보다 무한히 사랑하는 하나님이 우리 같은 죄인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생각하니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나왔습니다. 한손으로 아이를 안고 한손으로는 예배당의 기둥을 붙들고 복음의 진수를 경험하였습니다.
(예화) 아프리카의 선교에 헌신하였던 한 선교사의 간증이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선교사역을 하였지만 열매가 별로 없었고 열정도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사랑하는 두 아들을 한꺼번에 풍토병으로 순차적으로 잃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선교사는 깊은 영혼의 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주일학교부터 외었던 이 평범한 성경구절이 이 선교사의 가슴을 관통하고 지나가 온 영혼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야말로 그러한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을 증언하는 열렬한 전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신자가 누구입니까? 신자는 모두 한때 이 엄청난 사랑 때문에 차마 입을 다물지 못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발에 짓밟혀 뭉개져도 가치가 없을 하찮은 인간들을 위해 그 고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의 동등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의 생애는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생애이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그 분이 이 세상의 비참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그 분이 마치 이 모든 것이 당신의 책임인 것처럼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가 만든 세상에서 나그네처럼 취급을 받으며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시고 마지막에 자신이 그토록 눈물로 사랑하던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셔야 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불화하게 살아가는 불행한 여러분을 차마 보실 수 없어서 자기를 주심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기 위해 죽음을 택하셨던 것입니다. 강요하는 사람 없이 스스로 자기를 주심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없는 그러한 사랑에서 돌이켜 완전한 행복에 이루게 하는 그 사랑으로 돌아가게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이 여러분들에게 하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합니까?” ‘내 아들을 너희를 위한 화목제물로 주어 제물로 죽게 하기까지 너희에게 화목을 주었다. 너희는 그 화목을 누리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화목을 등지고 생명 아닌 것들을 찾으며 그 사랑 아닌 것들에 현혹되어 인생길을 걷는 여러분들의 허무함은 지금 슬픔과 고통으로 여러분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에서 떠난 여러분들은 티끌만큼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지금 만약 행복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 마취 기운이 안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마약의 기운이 떨어지고 나면 보다 깊은 나락에 떨어지는 불행의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화목이 우리에게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하나님을 등지고 스스로 빛을 떠나 어둠으로 가고 행복을 떠나 불행으로 멀어져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이것을 통해 우리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현대의 크리스마스는 미국 자본주의에 의해서 모두 소비적이고 향락적인 문화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 날이 우리에게 진정 기쁜 날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불화해진 것은 우리가 그리하였으나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돌아갈 아무 길이 우리에게는 없었는데, 하나님이신 그 분이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아기 예수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아기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이루신 화목의 길을 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그 아기 예수의 오심을 너무 기뻐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보면 그 죄 없고 흠 없는 아들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하여 제물이 되기까지 걸어가셔야 할 그 인생의 길은 얼마나 아프고 험난한 고난의 길이었겠습니까? 자기 땅에 오셨지만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셔야 했던 이유도 결국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럼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이 주시는 메시지는 두 개도 아니고 하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화목 때문에 모든 불행한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고 그 때문에 사람들 속에 안녕이 이루어지도록 화목의 도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화목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Ⅲ. 적용과 결론
이 사랑은 우리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이 여기에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입니다. 온 인류가 돌아가야 할 그 하나의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을 통해서 먼저 나타났습니다. 그 사랑의 눈부신 절정이 바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었고 그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그 찬란한 빛은 영원한 별이 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은 이 큰 희생으로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도록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내 아들을 깨뜨려 너희에게 화목제물 삼았으니 너희는 그 피로 나와 더불어 화목을 누리자고 말씀하십니다. 곤고한 자들은 하나님이 다시 평안을 주실 것이고, 죄 지은 자들은 하나님이 당신의 무한하신 자비로 용서하실 것입니다. 표범은 자기의 빛깔을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고 구스인도 어떤 비누칠로도 피부 색깔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화목의 제사의 이 피를 받은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은 불행할 운명에서 행복할 운명으로 바꾸십니다. 이 성탄절에 주님께 올릴 최고의 선물은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찬양)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이렇게 주님이 여러분들을 위해 이미 이루신 화목을 받아들이며 다시 주님을 뜨겁게 살아가며 그 화목안에서 안녕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들로 나타난 사랑(2018.12.30. 주일오전3)
사랑으로 완성되는 인생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요일 4:11-1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인간의 모든 불행은 결국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가끔 기쁘게 하는 수많은 사랑들이 있으나 이것은 그 사랑의 오해된 파편들입니다. 하나님은 의심할 수 없이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자기 사랑을 보여주셨으니 그 사랑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사랑은 바로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신 사랑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보이지 않는 사랑을 모든 사람들을 섬기면서 보여주셨고, 마지막 화목 제물로 죽으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샬롬을 이루셨습니다. 인간의 희망은 이 화목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그 생명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II. 사랑으로 완성되는 인생
A. 서로 사랑하며 살라
오늘 우리가 읽은 짧지 않은 이 두 구절은 하나의 주제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완성으로써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사랑으로 완성되는 인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오늘 성경은 “서로 사랑하며 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하늘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그 사랑을 누리게 하신 것은 자기만족에 빠지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사랑이 우리 속에서 흘러가 모든 세상을 하나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마땅하도다’라고 번역된 이 부분은 그리스어로 ‘오페이로멘(opeilomen)’ 이라는 단어이고, 이 단어는 원래 ‘빚지다’ 라는 뜻입니다.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재물을 빌림으로서 채무관계가 형성이 됩니다. 그러면 그에게는 회피할 수 없는 의무가 생깁니다. 그것은 돈을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땅하도다’라고 번역된 단어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미 하나님의 그 사랑을 받았고, 그것은 마치 빚진 것과 같아서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깥에서 어떤 위협으로 우리에게 가하는 요구가 아니라 그 사랑을 안 사람들은 그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살 때 그가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에 빚진 자로서 신자가 누구를 사랑해야 할까요?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모든 대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두 개의 사랑 같지만 대상이 나뉠 뿐 ‘그 사랑’은 하나의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모든 것을 진심으로 사랑할 의지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아들을 화목 제물로 주신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모든 인류를 바로 이 하나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바로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사랑의 시원은 하늘로부터 내려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으나 그 사랑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는 하나님이 사랑하게 하시는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으니 사랑은 두 대상이지만 한 사랑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장점이나 유익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는 사랑이야말로 참된 십자가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랑은 인간에게서 출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속에서 시작되는 사랑은 기껏해야 영원한 그 사랑을 흉내 낸 인간의 반짝이는 이성의 빛, 감성의 빛에서 시작되는 사랑이니 그 사랑의 주체가 끊임없이 흔들리는 인간인데 거기에 어찌 영원한 사랑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성경이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하며, 그것이 마땅한 것이라고 말할 때 이미 그렇게 명령을 받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그 사랑을 받은 사람임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사랑하는 일이 매우 힘들다는 사실을 매일매일 느낍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는 이유입니다. 머리로는 그 사랑으로 그 생명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너무나 분명한데 내게는 그런 삶을 살 자원이 없으니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다시 강화시키도록 주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 안에 있는 은혜에 대한 갈망의 정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너희는 서로 사랑하며 살라” 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렇게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에 선택이 아님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고, 사랑하며 살지 않는 그 삶은 사실 우리의 삶의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 보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며 우리 안에 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완성해 가는데 이것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도 함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부딪히는 현실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힘입어 서로를 사랑하며 살기 힘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B. 사랑을 온전케 하라
마지막으로 두 번째는 그 사랑을 온전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요한 1서 4장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 4:12).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육신의 눈으로 그 분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 근거는 하나님이나 하나님은 육신의 감각으로 인식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존재를 다른 사물과는 달리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신비체험을 한 사람은 자신이 유별난 방법으로 하나님을 감각으로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보여주신 일상적인 방식이 아니고 대부분 신뢰할 수 없는 주관적인 느낌들입니다. 오히려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이는 바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인격체 속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격 대 인격의 관계 속에서 당신의 존재를, 당신의 성품을 통해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하나님 홀로 가지고 계시는 성품으로부터 시작해서 인간과 함께 공유하고 있는 성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다양한 성품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영원 자체로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당신의 다양한 성품을 인간이 처한 상황을 통해서 우리에게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처한 여러 가지 상황을 통해서 당신의 성품의 어떤 빛들을 분명하게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시간이 있는 것들과 관계를 맺을 때는 하나님의 영원성을 보여주십니다. 끊임없이 변덕스럽게 변하는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하나님은 당신의 신실하심을 보여주십니다. 있다가 사라지는 잠시적인 존재들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당신이 불변하는 존재임을 보여주십니다. 비참에 처한 사람들에게는 당신의 긍휼을 보여주시고, 또 당신의 자비를 나타내십니다. 이런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은 불완전한 세계, 그리고 죄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오히려 무한함을 드러내시고 완전한 당신의 도덕적 성격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성품을 알고, 이 성품이 세계 속에서 어떻게 실행되는지에 대한 방법을 아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유일한 성품은 아닙니다. 그러나 또 계시를 받는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많은 성품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만물이 있기 전부터 삼위 하나님이 서로를 사랑하심으로 창조물이 있기 전부터 영원히 사랑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랑을 이 세계 속에 가장 찬란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불의한 세상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공의도 빛났고, 시간 속에 사라져가는 허무한 세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원성도 눈부셨지만 사랑은 더욱 빛났습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세상은 결국 인간의 죄와 그 죄의 비참으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본래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것은 모두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참은 자연계보다 도덕 세계에서 더욱 뚜렷했습니다. 그러한 죄와 비참으로 가득 찬 세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탁월하도록 눈부시게 빛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눈부신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아름다움과 선하심, 이것을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구원 역사의 파노라마 속에서 찬란하도록 전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 찬란한 수많은 사랑의 불꽃의 최고봉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다른 많은 책들을 뒤적거릴 필요가 없이 신약을 통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남과 지상의 생애, 죽음과 부활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라고 말합니다. 신자의 가장 이상적인 삶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다양하게 표현됩니다. 먼저 구약을 봅시다. 구약에서는 이러한 하나님과의 연합이 ‘동행함’이라는 단어로 묘사됩니다. 창세기 5장 22절은 구약의 위대한 믿음의 사람 에녹에 관해 다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창 5:22) 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동행했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탁월한 평화 속에서 그분을 향하여 살았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보지 아니함으로 그렇게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와 동행하는 사람들이 하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될 것을 미리 예표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특히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그림처럼 기독교를 대변하는 상징이 있는데 그것이 세례와 성만찬입니다. 세례는 한 사람이 물속에 들어감으로 예수와 함께 죽고, 그 물에서 나옴으로 예수와 함께 사는 그 죽음과 부활을 뜻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예수와 운명을 함께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라면, 성만찬은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그것이 살과 피가 되어 우리의 몸과 하나인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으로 그와 함께 영적인 한 몸이 되었음을 표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연합을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다.’라고도 표현하고, ‘내가 주님 안에 있다.’라고도 표현합니다. 요한복음 6장 56절은 말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 6:56)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내가 주님 안에 있는 것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상) 고 말합니다. 그 영적인 연합의 본질은 성령이십니다. 그 성령이 영이신 그리스도와 영혼을 가진 우리를 서로 연합시키셔서 그리스도 예수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몸을 이루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분여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연합은 간단하게 말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간 연합입니다.
천상에서의 사랑은 흠집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사랑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천상에서의 사랑은 끊어지고 다시 이어지는 법이 없지만 이 세상에서의 사랑은 바람 부는 날에 두 손을 가리고 있는 촛불과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는 어떤 사람도 자신의 사랑에 대해서 자신만만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음은 모두 주님 때문이며 어떠한 때도 내 안에 이미 주님의 사랑이 너무 크고 견고하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놓으셔도 된다는 고백을 가질 정도로 대담한 신자는 없습니다. 그렇게 사람의 사랑과는 달리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약하게 하고, 우리보다는 사랑의 원천이신 주님을 의지하게 합니다. 두려움은 없으나 사랑을 잃어버리는 두려움은 갖게 하셔서 충만한 사랑 속에서 충만한 겸손을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12절 하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 4:12하). 왜 그럴까요?
우리는 오래전부터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누구에게도 자랑거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것도 그래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는 현실이 무겁게 다가옵니다. 나는 오늘 이 소중한 설교 시간에 사회학적인 분석을 시도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자본주의 후기 시대, 그리고 이성주의가 무너진 탈근대시대를 아무리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결을 하려고 합니까? 사람들은 의무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주는 데에 인간의 진정한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도덕이라는 미명하에 부모 공경에 매달리며 자신의 인생이 고통 받는 것은 자기 정체성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자식을 부양하는 것이 과연 이것이 엄마 아빠의 의무인가에 대해서 질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국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 같은 논의들이 오고 갑니다. 그런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지원의 망들이 구축되는 것이 나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그 마음속에 있는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현실은 이런 무너진 도덕의 가치들이 무너진 이 현실을 정당화할 수 있는 철학을 요구합니다. 그거 하나에 대한 답이 해체주의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정당화시키는 사상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묻고 싶은 것은 그래서 결국 모든 도덕적인 의무와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데 그 문제의 핵심은 결국 사랑이 부족한 것, 그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사상이나 이런 가치가 무너진 현실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의 출현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사랑이 모자란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느 때에나 사랑이 필요 없는 때는 없었고, 너무 많은 사랑이 있었던 적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앞에 전개되는 현실은 우리에게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보여주지 않습니까? 이제 더 이상 자녀는 부모를 사랑하지 않고,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럼 그는 누구에게 사랑받으며 살고 있을까요? 노바디. 아무에게도 사랑받으며 살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일까요? 더욱이 왜 한때는 그런 사랑을 받았다는 사람들조차도 그렇게 살지를 않는 것일까요? 질문은 많지만 대답은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 다시 그 사랑으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체험은 은혜의 정동을 동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은혜의 정동을 통해서 우리들은 사랑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스치고 지나갔더라면 아무 인연도 없었을 남녀가 만납니다. 그리고 사랑은 한순간의 시선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들을 함께합니다. 그러면서 저 사람이 누구인지를 새롭게 깨닫습니다. 그런데 참 예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도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깨달을 때 그것은 고요한 수면 위에 던지는 돌멩이 같습니다. 그 돌멩이 때문에 출렁거리는 파문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감정이라고 부릅니다. 사랑하는 감정이 출렁거립니다. 살면서 또 다른 사실을 발견합니다.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면을 발견하며 참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또 한 번 파문이 일어납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이러한 삶의 접촉점들을 통해 사랑의 감정의 파동이 치고, 이것들이 반복될 때에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은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웬만한 결점, 예전 같으면 한 번에 헤어지게 만드는 결점들이 이제는 더 이상 그 사랑을 흔들어 놓을 수 없을 정도로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스치고 지나갔더라면 남이었을 그 사람을 나의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처럼 느껴지도록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한하게 반복되는, 수없이 반복되는 사랑의 감동이라는 파장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감동의 파장이 없이 긴 세월을 보냈다면 오늘 헤어지고도 밤에 편안히 잘 수 있고, 내일 아침에는 해방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이별해야 할 때 눈뜨는 아침은 얼마나 생경스러운 아침일까요? 그가 없는데 아침이 밝았고, 그녀가 사라졌는데 태양이 떴습니다. 얼마나 낯선 세상일까요? 물론 이것은 불완전한 인간의 사랑을 예로 든 것입니다만, 사랑 그 자체의 방향은 달라도 육적사랑이나 은혜의 신령한 사랑이나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그것이 작동하는 원리는 동일합니다. 한 사람이 현재적으로 주님을 곧게 사랑해서 웬만한 시련에 흔들리지 않고 웬만한 사람들의 결점 때문에 마음의 요동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그것은 오늘 아침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예레미야가 ‘아침마다’ 고백하는 때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말발굽 아래 짓밟힌 그 다음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러한 현실과는 상관없이 아침마다 새로운 주님의 성실하심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인자, 곧 ‘헷세드’ 속에서 그런 성실하심을 발견했으니 그것은 사랑에 대한 매일매일 새로운 발견이었습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그 은혜의 정동을 경험해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에 크게 파도칠 때 다른 아무것도 또 다른 파도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고요할 때 수많은 것들은 수많은 방향에 파문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말씀 드리려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에게서 자가 생산되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처음 신자가 될 때는 이 사랑이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심겨집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은혜의 경험과 지식의 새로운 발견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이 은혜의 정동을 통해서 점점 더 온전한 사랑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들이지만 완전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그 사랑도 있고, 그 사랑이 아닌 것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해야할 사람은 미워하고, 미워해야할 것은 사랑하고, 그리고 그 사랑하는 것이 즐거워야 할 대상은 힘겹습니다. 많은 사람은 사랑하며 살아온 삶의 과정에서 자신이 얼마나 많이 희생했는지 그리고 자기를 얼마나 부인했는지를 기억합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 안에는 희생도 없고, 자기 포기도 없습니다. 이것을 야고보 2장 8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약 2:8).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사랑은 하나의 사랑으로써 자기를 사랑하신 사랑이며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그 참된 사랑은 자기와 남을 구분할 수는 있으나 나누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몸과 같이’ 라는 미묘한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잊히지 않도록 예를 들어 보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날 저녁쯤 매우 허기졌습니다. 집으로 빨리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냉장고를 뒤져 음식을 꺼냈습니다. 배는 고프지만 맛나게 먹고 싶어서 부지런히 요리를 했습니다. 얼마 후 아주 정성껏 차려진 밥상이 우리 앞에 있고 그리고 우리는 예쁜 등불 하나를 켜놓고 혼밥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밥 한 그릇에 숟가락으로 떠 입에 넣을 때 감미로운 식감과 그리고 느낌들이 온몸에 짜릿하도록 전해집니다. 그때 우리는 ‘내 입을 위해 나의 팔과 발이 많은 희생을 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참 사랑에는 희생이 없는 것입니다.
(찬양)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예전에는 이 찬송을 부르면 참 예쁜 소리가 났는데 이제는 잘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런 사랑으로 그리스도인은 당신을 우리를 위해 화목 제물로 주심으로써 자신이 손해를 본다든지 당신 자신이 우리를 위해서 애매하게 희생이 되시든지 하는 그런 의식을 가지고 우리에게 속죄 제물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생명이신데 죽고, 우리는 죽음에 처해야 할 인간인데 살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것이 그분에게는 당신 자신이 사는 것과 꼭 같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할 때 내가 너를 위해 하는 일 중 아무것도 희생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 자신을 향하여 행하는 것으로써 너의 유익이 곧 나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랑하는 네가 내 사랑의 원인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신 그리스도가 사랑의 원인이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는 아직 그런 온전한 사랑에 다다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그리스도의 그 완전한 그 사랑 앞에서 우리의 사랑이 잘못된 것을 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회개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시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수없이 거치면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사랑을 조금씩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내가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그분 때문에 그 사랑을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랑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담지하고 있는 내가 완전한 인격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 완전한 사랑이 나의 인격이 담기는 순간부터 그 사랑은 결핍의 요소와 오염의 요소를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주신 그 사랑이 자신 안에서 점점 더 풍성하게 되기 위해서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더욱 더 순전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질문할 것입니다. ‘아니 도대체 오늘날 그 힘든 삶을 살아갈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훨씬 더 쉬운 삶을 선택하고 싶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사랑하는 일, 특히 그 사랑이 온전한 사랑이 되기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일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많은 글을 쓰는 분들의 책을 읽으면서 가장 해박한 지식을 다방면에 가지고 계실 것이다 믿었던 분이 이어령 교수입니다. 딸의 전도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세례까지 받고 신앙 고백을 하셨습니다. 최근에는 매우 큰 병에 걸리셔서 힘겨운 투병의 시간을 보내고 계시다고 합니다. 그 분이 병석에서 들려준 한 토막의 이야기는 제 가슴을 크게 울렸습니다. 인생을 살아보니 우리에게 큰 비극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젊은 사람들이 자신이 늙는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요, 두 번째는 늙은 사람이 잠시 후 곧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서겠습니까?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 그까짓 인간의 사랑이 그리우시다면 그분이 어찌 신이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불가능해 보이는 그 사랑으로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가장 쉬운 삶이기 때문에 주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나의 능력이나 이성, 감정의 구조를 가지고 자기의 몸처럼 타인을 생각하는 완전한 사랑에 도달하라고 요구한다면 그것은 개가 선녀가 되는 것만큼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일을 아주 신비한 방법으로 수행하십니다. 그래서 죄인 중의 괴수와 같은 자들을 변화시켜서 그 위대한 철학자들도 일평생 도를 닦은 수도사들도 이르지 못했던 그 사랑에 단박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비밀을 알게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눈빛으로 교환할 수 있는 성질의 신령한 정보입니다.
그렇게 주님은 우리에게 그런 사랑을 주십니다. 그렇게 사랑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이 최초의 최고의 수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그 사랑으로 돌아가지 않으니까 펄펄 살아있는 자기 사랑으로써 의무라고 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족쇄입니다. 제가 미래에 대해서 한 가지를 예고한다면 결혼하는 비율이 점점 낮아져서 이제 결혼하는 사람들이 신비하게 느껴지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사랑의 힘을 어떻게 터득하는지에 대한 경험이 없는 것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그런 사랑을 받고 그런 사랑으로 남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늙음에 대해서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안 나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가 많은 분들은 아무리 가까운 인척이라도 장례식에 가지 않는 것이 결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늙은 나이에 죽음을 직면하는 것은 남다른 고통이기 때문에 예절에서 면제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식의 죽음에 엄마가 아빠가, 남편의 죽음에 아내가 나타나지 않아도 하나도 예의에 어긋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까붑니다. 자기가 곧 늙을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젊음 속에서만 자신의 젊음을 보니까 까부는 것입니다. 정확한 표현입니다. 까불면서 삽니다. 그런데 곧 늙습니다. 그리고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텐데 그렇게 까불며 살다가는 젊은 시절을 그렇게 보내다가는 늙었을 때 자기를 찾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정체성이 와해되는 것을 경험하는데 그때 정신적인 혼란은 사춘기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무슨 인생입니까? 인생은 순간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면 늙음의 빛에서 젊음을 보아야 젊음의 의미가 규명되는 것이고, 생명은 생명 자체로 보아서는 생명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죽음의 빛으로 보아야지만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도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전 7:4)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비로소 그 사랑이 아닌 조각나고 오해된 사랑의 파편을 붙들고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 영원한 행복일 것처럼 살 때 어느 한 순간 눈을 떠보니 자신의 모든 육체의 부분들이 자기를 배반하는 현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육체의 지체가 자기를 배반합니다.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곱게 늙는 경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까불며 젊은 시절을 보내다가 한방에 얻어맞고 ‘암 4기입니다. 2주 정도 사실 것 같습니다.’ 라는 선언을 들었을 때 앞이 캄캄하고 인생이 통째로 날아가 버리는 것 같고, 방에서 벽을 바라보고 땅을 치며 통곡을 하며 우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그것이 무슨 인생입니까? 그리고 여태까지 무엇을 위해서 산 것일까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든지 기억하여야 할 바입니다.
예쁘고, 키 크고, 아름답고 능력 있고, 매력 있고 모든 것은 삶의 양태입니다. 젊고, 늙고, 노쇠한 것, 모두 삶의 양상입니다. 그 양상이 무엇이든지 인간을 인간으로 지탱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그분께로 나서 그분의 사랑 안에서 그분의 사랑에 이끌려 이런 저런 삶을 살며 변함없이 그분을 섬기다가 그분의 품안에서 그분의 뜻을 따라 삶의 한 양태를 보고, 또 다른 생명의 양태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요동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젊은 시절 아직은 내게 소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시절에 그 사랑을 붙들고 살지 않은 인생의 마지막 대가는 너무나 크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 밀려오는 그 무한한 영원으로부터의 소외의 감정은 무엇으로도 해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아들을 화목제물로 주심으로써 그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을 가지고 있으니 우리는 비록 온전한 사랑을 하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우리 자신이 어찌 하늘로부터 온 그 사랑을 이 땅의 사람으로 온전케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사랑하는 삶을 살면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 마음속에서 사랑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활기찬 젊음도 지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에는 죽음의 기운이 생명의 기운을 이기게 될 것이고, 그리고 우리는 무대와 같은 인생의 시기를 지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평범하게 행복하게 인생을 산 사람들의 예의입니다. 예기치 못한 질병, 불행, 사고, 죽음, 정신질환, 수많은 것들이 우리의 인생의 항로에 암초처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번의 파산으로 인생 전체가 파산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슬픈 것일까요?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변하는 세상 속에서 불변하는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을 붙들며 살아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너무 행복하고, 그리고 나의 인생이 그 예수의 손 안에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나에게 무한한 위로가 되어서 많은 사람을 사랑하나 누구로부터 사랑 받기를 고대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니 사랑하는 자는 이미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는데 무슨 사랑이 더 많이 필요하겠습니까? 그 속에서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이 우리 안에서 변질되지 않도록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끊임없는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너무나 긴 세월동안 운명과 같은 영혼의 침체와 어두움 속에서 살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시는 것은 그만큼 비례해서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지만 살아날 때 다시 사흘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나사로야 일어나거라’ 주님 한 마디 말씀에 나사로는 일어났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절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주님은 마른 뼈도 일으켜 세우시고 죽은 지 사흘 된 사람도 반드시 3일 만에 일으켜 세우시는 것은 아니라 즉시 살리실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기운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도달할 수 없으리만치 높은 사랑을 여러분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전하는 이 하나님의 말씀은 허위가 아닙니다. 어쩌면 설교자도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 아무도 이 사랑을 포기하는 사람은 없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사랑받기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니 어떻게 내가 나에 대한 사랑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의 사랑인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생각하며 매일매일 이 사랑의 은혜를 구할 뿐입니다. 그러면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여러분들이 이 사랑이 여러분 안에 완성되어 가면서 여러분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는 그릇된 사랑 때문에 비참하게 되고, 그 사랑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고통의 경험을 통해서 거의 배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시 돌아가야 할 그 사랑보다는 헛된 사랑으로 돌아가며 그 사랑의 대가로 고통을 돌려받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십시오. 너무나 분명하게 나타난 그 사랑이 거기에 있습니다. 아들을 화목제물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그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해져가면서 완성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한순간도 우리는 이미 그 사랑에 도달했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랑에 끝을 보았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전심으로 나에게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눈을 들어 이 세상의 수많은 헛된 것들을 보며 놀라고, 발견하고, 기억하고, 감동을 받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눈뜨고, 그의 진리에 빛나는 빛깔에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마음 안에는 우리의 영원한 사랑이신 하나님을 향한 은혜의 물결이 계속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반복되는 은혜의 경험을 통해 묘목과 같던 우리의 사랑은 거목과 같이 굳세어지는 것이니 그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요,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굳세게 붙드시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지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약해지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폭우로 가도록 부는 물결과 바람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얻는 유익이 무엇일까요? 이것입니다. 완전한 평화, 그 무엇에도 흔들리거나 소멸되지 않는 완전한 하나님과의 화목, 그것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잠시 머무는 이 세상을 지나면서 그의 육신은 점점 쇠하여 죽음의 기운이 뒤덮지만 그의 눈은 그 사랑의 완전한 성취에 빛납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것을 가엽게 여기며 인간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불쌍하게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자신을 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안 신자의 생활입니다.
아들로 나타난 사랑(2019.1.6. 주일오전4)
성령을 통한 사랑의 확신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요일 4:13)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결국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을 온전히 완성해 감으로써 그의 일생도 함께 완전해져 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하나님 안에 내가 있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동행의 확신 속에서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확신이 우리를 참 사랑으로 완성되어가게 하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런 확신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본문이 다루고자 하는 바입니다.
II. 성령을 통한 사랑의 확신
의심할 여지없이 오늘 우리가 읽은 짧은 한 본문은 성령을 통한 사랑의 확신이라는 한 주제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사도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거저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가능해졌던 것입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자신의 인격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영원히 화목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서 화목 제물로 드렸을 때 그 사랑은 가장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함으로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에게는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 성령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너를 나 하나님이 결코 떠나지 않겠다는 보증으로써 주신 성령입니다. 그래서 그 성령 안에서 우리는 천국에서나 맛보게 될 그 영원한 생명과 사랑을 이 땅에서 맛보며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행복하게 신앙생활 하는 비결은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는 그 확신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속에서 우리는 그 충만한 사랑과 충만한 생명을 누리며 확신 있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A. 성령으로부터 주심
오늘 성경은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이 이러한 사랑의 확신을 갖게 해주시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성령으로부터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4장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4:13) 고 되어 있습니다. 이 번역에 의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나 희랍어 그리스어 본문은 좀 다릅니다. 긴 희랍어 본문을 제가 읽어서 여러분들을 피곤하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가장 권위 있는 영어번역 King James Version과 그리고 현대인을 위한 성경 중에서 제가 확인한 바로 가장 잘 번역된 NIV, 두 성경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화면에 보면 바로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라고 하는 것을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영어로 읽을 필요는 없지만 보시면 ‘왜냐하면 그가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of his spirit’ 그의 성령의 이렇게 나옵니다. 흔히 쓰이는 영어는 아닙니다. 위 번역과 아래 번역은 ‘has’를 고어체로 쓴 것 이외에는 동일한 번역입니다. 여기에서 ‘of’는 근원, 출처 등을 지시하는 소유격입니다. 그래서 그리스 성경에 ‘애크투 프뉴마토스 아우투(oti ek tou pneumatos autou)’ ‘그의 그 성령으로부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다시 번역을 해보면 성경 본문과는 사뭇 다른 이런 번역이 나옵니다. KNJ 사역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의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번역입니다. 그러면 우리말 성경과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셨다고 되어 있는데 목적어가 없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생략된 목적어는 무엇일까요? 무엇을 주셨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그 사랑’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요한 서신의 전체의 맥락에서 보면 넓게 생각해서 세 가지를 하나님이 신자에게 주십니다. 첫째로 1장 9절에 의하면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신자에게 주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4장 2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4장 6절에 의하면 진리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랑, 진리,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 세 가지는 삼각형처럼 딱 붙어서 어느 하나나 둘이 빠지면 나머지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일 수가 없게끔 삼위일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미 침투해 들어오고 있는 영지주의라는 극단적인 이단을 겨냥하며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설명하면 길지만 영지주의는 이렇게 아주 높고 초월적인 지식을 갖는 데에 구원이 있다고 봤고,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를 입고 오신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정통 교회의 설교를 들으려고 하지 않고 그 가르침을 거부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요한 사도는 아주 명쾌하게 그 이유를 4장 6절에서 제시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이렇게 결론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를 이루고 있다면 그리고 듣는 사람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면 그 진리를 들을 것이요, 미혹의 영에 속한 사람이라면 그것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성령으로부터 주신 것은 넓게 보면 이 세 가지지만 본문에서 좁게 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그 사랑입니다. 즉, “그의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이런 해석이 나오는 것입니다. 즉, ‘성령으로부터 사랑을 주셨기 때문에 이러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기 위해 희생 제물로 주셨다는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이제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때 흘리는 회개의 눈물은 올바르지 못한 사랑을 하며 살아왔던 수많은 날들에 대한 가슴을 찢는 아픔의 표현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이 믿음은 당연히 성령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또한 그 성령이 진리를 증거하셨기 때문에 또한, 사랑도 그 성령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그 화목 제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죽음을 믿는 순간 동시에 진리를 알게 되고 동시에 사랑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 중 한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령은 하나님과 아들 사이에 사랑, 그것이 곧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성부를 사랑하라, 성자를 사랑하라는 표현은 있으나 성령을 사랑하라는 표현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그 사랑 자체가 이미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사랑하라 하면 사람을 사랑하라는 이상한 명령이 되기 때문에 성령을 사랑하라는 말이 성경에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이 성부나 성자보다 열등하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경륜 속에서 바로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신데 성부, 성자 간의 사랑 그 자체가 성령이시게 함으로써 이 성령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삼위일체 사랑 속으로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적인 특징은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사랑의 사람이 되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성령 받은 사람만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성령 받은 사람만 그릇된 자기 사랑과 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이 구원 받을 때에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을 통해서 한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를 시작합니다. 이것이 중생입니다. 그렇게 그 사랑의 교제를 우리 안에 심으셔서 어떤 경우에도 그 사랑이 사라지지 않게 하시니 이것을 우리는 ‘성령의 내주’라고 부릅니다. 말씀과 기도와 순종을 통해서 이 사랑은 우리의 인격 안에서 점점 더 풍성해져 가는데 이것을 가리켜 ‘성화’라고 부릅니다. 이 사랑이 아주 놀랍도록 마음을 가득 채운 상태를 가리켜서 ‘성령 충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그리고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시키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하시고, 아들에게 주신 그 성령을 우리 모든 교회에 부어주심으로써 하나님의 그 사랑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충만한 성령의 은혜와 사랑은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령을 통하여, 성령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 모든 지체들에게 분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복은 바로 이것을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와 성도의 영적 연합니다. 그리고 그 연합의 본질은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하나의 하늘 생명을 가진 한 몸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충만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실질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게 되면 지성적으로는 확신이 들게 되고, 감정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고, 의지로는 사랑의 힘이 가득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길 수 없는 현실을 이길 수 있는 생명의 힘이 그 마음과 삶 속에 넘치게 되고, 육체에도 그 힘이 부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삶의 단 하나의 이유입니다. 다른 것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 안에 있는 그 충만한 성령, 그 충만한 사랑 때문에 그는 세상 속에 있으면서 세상 사람과 다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놀라울 정도로 이런 명백한 복음적인 진리가 무시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함이 경시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또 성령 충만을 강조하면 무슨 신비주의적인 교회가 아닌가 하는 그러한 반응들을 보이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풍조는 우리에게 참된 경건을 심각하게 약화시키고, 교회에 와서 그저 인생을 가볍게 사는 길이 무엇인가나 배우는 그런 처세술의 학습 전당으로 전락하게 만들기 십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지런히 광부가 곡괭이로 탄광을 캐며 그 속에서 탄을 생산해 내듯이 우리는 그렇게 지금은 시대에 풍조에 묻혔지만 성경에 엄연하게 남아있는 이 복음의 진리들을 캐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기독교를 통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행복을 누리는 길이기도 합니다.
성령 충만함으로써 신자는 구별된 삶을 삽니다. 그리고 그 삶은 바로 사랑의 삶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들을 잊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사랑이 없을까요? 사랑하며 살아야 된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아는데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없음을 자신에게서 발견합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믿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리고 예수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그 없는 사랑이 어떻게 우리에게 임하는지를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가고 싶어 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많은 죄를 용서하신 후에는 다시 당신의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의 충만함이었습니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도 성령 충만하지 않은 사람보다는 적은 지식을 가지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 훨씬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성령을 통해 그 충만한 하나님 사랑이 온다는 것을 기억하며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앎
마지막 두 번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성령을 주심으로” 올바른 번역에 의하면 “그의 성령으로부터 하나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줄을 아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신자는 성령으로부터 받은 그 사랑을 통해 확신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새로운 교훈을 받는 것도 좋지만 열 개의 교훈을 받고, 아무것도 우리의 마음에 남지 않는 것보다는 하나의 교훈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확신을 줄 때 우리는 견고하고 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거하신다.’ ‘안다’라는 희랍어 동사는 ‘메노멘(menomen)’과 ‘기노스코멘(ginoskomem)’입니다. 모두 현재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한번 ‘알았다, 머물렀다’는 뜻이 아니라 반복해서 계속 일어나고 있는 동작임을 지시하는 것입니다. 한때는 우리도 주 내 안에, 나 주 안에 있음을 확신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찬송을 즐겨 불렀습니다.
(찬양)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 주님 안에 있어
이렇게 친절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주 내 안에 계시고, 나 주님 안에 있어’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도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저는 21살에 회심을 하고 집에서 교회까지 한 20여분을 걸어가야 되는 길이었습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이 그래도 그때 체중이 한 55kg 정도 됐을 때인데 체중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여러 날을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마치 하늘을 떠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고, ‘아마 구름타고 주님이 오실 때 주님의 느낌이 이런 느낌이시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 몸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으면서 예배당을 새벽에, 금요기도회 그리고 철야 기도회, 그리고 저녁 기도회 그렇게 걸어 다녔습니다. 거의 매일 교회에 갔습니다. 그것이 결국 무엇이냐 하면 그때는 그런 경험을 했는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현재적으로 계속해서 주님이 내 안에 계속 계시는 것이 또 내가 주님 안에 계속 있는 것이 계속해서 내가 알게 되는 현재적인 경험, 이것에 의해서 우리는 이 세상의 수많은 유혹을 뿌리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때 주 안에 있고, 나는 주님 안에 있는 것을 확신했으나 지금은 아닙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여러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환경이 어렵고, 건강이 나쁘고, 여러 가지 마음 상하는 일이 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 대답은 모두 제 2원인이나 핑계에 불과하고, 마지막 한 마디로 말하면 성령 충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잘 믿으면 모든 것이 좋게, 좋게 되어 그리고 번영과 복만 기다리는 것처럼 복음을 설명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fact가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고, 믿음의 삶을 살아도 어려운 일도 있고, 힘든 일도 있고, 그리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삶의 상황이 전개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면 즉, 성령 충만하면 그것 때문에 그런 현실이 힘겹게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속에서 기대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일들을 통해서 어떻게 일해 나가실까?’ 그리고 ‘하나님이 얼마나 멋있는 결과를 우리에게 가져오실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올까요? 그게 생명의 힘이고 사랑의 힘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개의치 않고 그것들을 이기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이 바로 사랑의 삶이고,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결국 성령으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사랑의 감격이 사라질 때 우리에게는 커다란 인생의 무게가 우리 속에 느껴집니다. 그 무게가 결국은 사랑의 무게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의 무게는 우리를 위로 들어 올리지만 세상사랑, 자기 사랑의 무게는 우리를 땅 아래로 끌어내립니다. 그래서 우리를 한없이 가라앉게 만들고, 주저 앉아있는 것이 편하게 만들고 그리고 누워있는 것이 편하게 만들어서 결국은 우리의 인생의 모든 진실한 도전을 포기하게 만들고, 그리고 자기의 인생도 아니고 남의 인생도 아닌 것 같은 주체성을 잃은 삶을 불만족 속에서 살아가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매번, 매주 이렇게 여러분들에게 참된 신앙을 갖도록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돌아오도록 간절히 외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이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의 감격이 사라졌을 때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게 되고, 이런 확신이 사라질 때 혼란스럽고 은혜가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 채 힘겹게 살아가기 때문에 그 안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있다고 해봐야 가끔 육체적으로 느끼는 쾌락이나 세상 욕심을 만족시키는데서 오는 기쁨이니 그러한 종류의 기쁨은 사막을 가로질러 목마른 사람이 마시는 한잔의 진하고 차가운 설탕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한 모금 마시는 동안에는 시원한 것 같으나 끝나고 나면 당분이 더 많은 물을 몸에서 요구하니 더 깊은 갈증을 느끼는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날 뿐입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은 이 모든 우리들이 의식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가장 탁월한 대안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 충만이 무슨 비상한 영적인 세계에서 하나님과 직통 계시를 주고받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전혀 신뢰하지 마십시오. 만약 어떤 사람이 성령 충만하다고 주장하면 그 사람이 넘치는 사랑과 겸손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면 됩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이 사랑의 충만한 상태이기 때문에 성령 충만한 사람은,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자식 길러놓고 입에 붙어 다니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네 자식을 어떻게 희생하며 길렀는데’ 이제는 그런 말도 하지 마십시오. 정말 진심으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 자식을 사랑한 부모는 자기의 희생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한 힘이 그 자식의 예쁜 얼굴이나 공부 잘하는 탁월성이나 말 잘 듣는 순종적인 성품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하지 못한 사람은 성령 충만하지 못한 사람을 낮게 보거나 혹은 그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 충만은 사랑의 충만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지식의 빛을 가지고 있다고 그 지식의 빛이 현저히 모자라는 사람을 낮게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히려 지식의 빛이 찬란하게 비취면 비췰수록 다른 사람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그 지식의 빛이 사랑의 열을 통해 오히려 자신 안에 있는 더 깊은 어두움을 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람은 죄가 확실히 적을 텐데 더 많이 애통합니다. 지식의 찬란한 빛을 받은 사람은 틀림없이 무지가 덜할 텐데 무지한 사람보다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더 절실하게 느끼고 통절하게 아파하며 더 많은 지식의 빛을 구합니다. 마치 괴테가 마지막에 죽을 때에 남긴 유언, ‘창문을 열어 더 많은 빛을 내게 비추게 해다오.’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뛰어난 직관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과 직통으로 통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사도행전에서 놀라운 증거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20장 23절과 24절에서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이게 성령의 증거였습니다. “바울아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각 성에서 환란과 결박이 너를 기다린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이 분명한 음성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원리에 의해서 그의 인생은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놀랍게도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성령의 계시는 결박과 환란이 기다린다고 했으나 그를 움직인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원리, 그 사랑 때문에 자신이 구원을 받고 사망의 몸에서 새 생명을 입었으니 이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그가 사랑하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소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보면 성령을 무시하고 사랑의 원리를 따랐습니다. 넓게 보면 성령을 무시했다기보다는 성령이 그런 증거를 하시지만 그것은 더 큰 각오를 가지고 이 사명을 완수하라는 말씀으로 들었지 그러니까 가지 말라는 말씀으로 듣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를 움직이고 있는 충만한 성령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그를 실제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함은 곧 사랑의 충만입니다. 모든 신령한 은혜의 경험의 진실성은 그의 사랑에 의해서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아는 것처럼 판단하게 됩니다.
한번 살아가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일주일 동안 사는 동안에도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빼앗겼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견디기 힘든 중압감, 혹은 무기력에서 오는 모든 그 힘의 사라짐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일은 물론 어려운 일입니다. 더욱이 성령 충만하지 않고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께 돌아가기 위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진리의 빛을 좋아하지 않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데 세상을 사랑하는데 그것을 부인하고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해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 기도하며 내게는 없는 그 사랑을 다시 한 번 부어달라고 아버지 앞에 매달려야 하고, 그리고 자신의 지난날들 아직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은 날들을 끊어버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많은 에너지가 들어갑니다. 그러나 어차피 에너지는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돌아와 참된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니까 한 주간 동안 견딜 수 없는 수많은 에너지의 탈진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자, 예배드리는 시간, 65분이 지났습니다. 벌써 2명이 자살했습니다. 36분마다 한명씩 자살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배고파서일까요? 아닙니다. 눈앞에 전개된 현실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랑이 그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사랑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거의 없을 때는 선과 악의 구분이 없이 짐승처럼 삽니다. 그러다 조금 정신이 들고 양심이 회복되면 그 다음에 관심사는 어디까지 해야지만 죄가 안 되나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대개 물어보는 것이 죄의 경계선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죄입니까? 아닙니까? 그러나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그런 유치한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죄를 안 짓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입니다.
자, 남녀가 사랑에 빠졌다고 쳐봅시다. 말로는 둘이 죽고 못 살 정도로 너무 사랑합니다. 그런데 내 행동을 통해서 상대방이 불같이 화를 내지 않는 한 나는 그 관계에 만족하면서 삽니다. 그것은 분명히 말할 수 있는데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저 사람이 싫어하는 일이 어디까지일까? 그 직전까지 내가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 사랑하면 그가 화 안내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고 나 때문에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선물을 주고, 편지를 쓰고, 때로는 유치한 행동을 해서라도 그를 웃게 하고 기쁘게 해주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면 성령 충만한 사람의 관심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무위도식 하지 말라는 말을 요새는 덜합니다. 무위도식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결국 여러분들의 노동력을 하나님의 교회가 필요로 한다는 뜻이 아니라 무위도식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그 삶의 태도가 가르쳐 주는 그 영혼의 심각성 때문에 말하는 것입니다. 자,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이고 그가 엄청나게 화낼 그 지점까지는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파탄에 이를 정도로 화를 내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삽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는 사이이고 아니 이 마음속에서는 이미 이별을 한 사이입니다. 헤어진다고 누군가가 먼저 말해도 눈물 한 방울 날 이유가 없고, 오히려 홀가분할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사랑입니까? 사랑은 생사를 오가야 그것도 사랑이지 그것이 무슨 사랑입니까? 사랑하는 마음은 그를 기분 나쁘게 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할 수 있을까? 그 사랑이 너무 가득차면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기쁨을 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기쁨을 여러분들에게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러분들을 초청하십니다. 그래서 그 말씀으로 여러분들의 어두운 마음을 깨우고, 심령을 변화시켜서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셔서 새로운 기쁨을 느끼게 만들어 주십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수준을 생각하셔서 때로는 예기치 않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시고, 사람을 통해서 위로와 격려를 받게 하심으로써 기쁨을 주십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생각하며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결국은 성령 충만하게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사랑이 충만한 것이고, 이 사랑의 충만에서 멀어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을 우울하고 불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내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계신 것을 계속해서 계시는 것을 매순간 새롭게 압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 성령의 충만함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가져다줍니다. 성경에는 성령을 사랑하라는 말만 안 나오는 게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라는 말도 안 나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명령하실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받아서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은 이미 충만한 사랑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삶은 남을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자신은 아무에게도 사랑 받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삶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무릇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충만하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아무에게서도 내가 소외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충만하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소외시키지 않는다면 누구도 나를 소외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 세상이 전혀 알 수 없는 사랑의 비밀을 터득한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이렇게 힘겹게 인생을 무겁게 살아가는 여러분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언제든지 당신의 사랑을 충만하게 부어주셔서 그 충만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계속해서 알아가며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리 많은 죄가 있다 할지라도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빛으로 깨닫고 자신의 죄를 회개할 때 다시 성령의 충만함을 주십니다. 그래서 다시 예전에 없었던 사랑으로 생명으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삶이 그립지 않습니까?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속에 충만하게 있어서 세상의 누구로부터도 상처 받지 않고, 소외되지 않고,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그 주님의 품안에 내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행복해하고, 기뻐하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이기며 사는 삶이 그립지 않습니까?
제 나이가 이렇게 노인이 다 되었는데 마음이 너무 애틋한 날에는 이 나이에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고, 하루 동안 내게 있었던 억울하고 마음 아픈 일을 고자질 한다면 여러분들은 믿으시겠습니까? 그 안에서 하나님이 마음을 녹이시고 모든 것을 쓸어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싹 쓸어내려집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주님이 저를 아빠로서 이렇게 사랑해 주시고, 내가 마음 아파했던 일을 주님께 고자질 할 수 있고, 주님은 사랑으로 내 마음을 녹이셔서 미워하는 사람이 없게 해주시니 당신의 사랑으로 충분합니다.’ 모든 것들은 지나가는 것들이니 영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영원히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기쁨의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복은 그렇게 주신 그 사랑이 충만한 가운데서 사는 것입니다. 이미 자기를 십자가에 버리신 은혜를 생각해도 그 분을 사랑해야 하지만 오늘도 그 사랑을 우리에게 간권하셔서 우리로 슬픔과 고통의 삶을 이겨내고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격려하시는 성령 때문에라도 우리는 그런 사랑의 삶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성령 충만을 받으시기를 간곡히, 간곡히 당부 드리는 바입니다.
아들로 나타난 사랑(2019.1.13. 주일오전5)
고백을 통한 사랑의 확신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요일 4:14-1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으로부터 옵니다. 그 사랑을 받으면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성령으로부터 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렇게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확신이 또한 고백을 통하여 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확신은 고백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속에 보다 더 확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II. 고백을 통한 사랑의 확신
A. 세상의 구주로 오심
오늘 읽은 이 두 절의 성경 본문은 고백을 통한 사랑의 확신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세상의 구주로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구원자로 오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요한1서 4장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라고 말입니다. ‘구주’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소테르(soter)’인데 이 ‘소테르’는 그야말로 구원자, 구세주 등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꼭 신을 가리키는 데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에게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마를 위기에서 건져낸 사람들에게 ‘소테르’라는 호칭이 주어졌습니다. 나라를 잘 다스려 다시 평화를 이루었던 황제, 혹은 전쟁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장군들에게도 ‘소테르’라는 명칭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구주로 오셨다고 말합니다. 로마의 구원자가 아닙니다. 한 나라나 한 민족, 백성을 위한 구원자가 아니라 세상을 위한 구원자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상’, 즉, ‘코스모스’는 그냥 물질적인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셨을 때에는 세상은 곧 세계의 인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소테르’, 구원자이신 예수가 온 세상을 위한 구세주이심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셨다.’ 라고 할 때 그것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였도다.’ 할 때에 이것은 최소한 네 가지 사실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이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니 사람이 아들을 낳는 방식으로 낳은 아들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인간의 죄가 한없이 컸기 때문에 사람으로서는 이 죄를 속할 수가 없었기에 완전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자기의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렇게 보냄 받은 예수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한 나라나 한 민족, 부자나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오지 않고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셋째는 그렇게 오신 예수는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이셨습니다. 죄는 없으셨으나 우리와 꼭 같은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사도는 우리가 보았고 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구원 사건을 이루셨는데 사도는 그 사건의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이 짧은 구절 속에는 이렇게 많은 구원론적인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사람으로서 우리와 함께 사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았고’라고 하는 이 말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으로 이 세상에 계셨던 인간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예수가 참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와 꼭 같은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거부하는 영지주의라고 하는 당시의 이단을 염두에 둔 비판입니다. 그들의 주장을 중요한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은 물질세계를 초월하는 천상의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이 물질세계로 내려오셔서 물질인 사람의 몸을 입으셨다는 것은 곧 완전하고 선한 신이 불완전하고 악한 인간이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철저한 정신 물질 이원론에 입각해서 영지주의라는 이단을 세웠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신 그 분이 육신을 입으셨다는 것은 물질을 입으신 것이고, 물질을 입었다고 하는 것은 악에 오염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의 참 하나님 되심이 무너진다고 보았습니다. 물론 영지주의에도 여러 갈래의 분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사실을 부인하는데 있어서는 일치한 의견을 보였습니다.
당시에 있었던 영지주의에 큰 세 이단은 예수님의 육체에 대해서 이렇게 부인하는 견해를 내놓았습니다. 말키온(Marcion) 이단은 예수님이 육체로 계셨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환상이었다, 보는 사람의 환상이었다고 주장을 함으로써 부인하였고, 아낄레라는 이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는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다른 별나라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눈에 보일 때에는 인간이 육체처럼 보였어도 완전히 성질이 다른 것이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발렌티누스(Valentinus) 이단은 예수님의 이 육신은 사람의 몸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영으로부터 온 육신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역시 예수님의 몸이 인간의 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정통 교회는 이 사실을 사력을 다해 변증하고 그리고 논증하였습니다. 요지는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다는 점에서는 우리와 다른 분이시지만 그가 입으신 육체는 우리 인간의 육체와 꼭 같은 사람의 몸이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그 분은 참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은 3절과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고 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하나님이 그 위에 우리의 죄를 모두 얹으시고, 그 죄 때문에 예수를 형벌함으로써 우리의 죄의 대가를 율법의 요구대로 치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죄 지은 것에 대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신 성자가 왜 하필이면 사람이 되셔야 했을까? 제가 처음 기독교에 문을 두드리던 회심 전야에 물었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왜 그렇게 오해받을 여지가 많은 방법으로 처녀의 몸에서 탄생했다고 그렇게 주장하여야 하는 그런 방식으로 사람으로 오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크게 세 가지를 답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속죄의 제물로 죽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이니 죽으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위해서 화목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체의 생명을 가지고 계셔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야 했습니다.
인간이 지은 죄는 그 크기가 무한합니다. 왜냐하면 무한히 높으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고, 그 불순종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가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그 죄의 크기는 무한했기 때문에 속죄의 제물은 무한한 속죄의 가치를 지녀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분은 동시에 사람이어서만은 안 되고 하나님이셔야 했습니다. 죽기 위해서는 사람이어야 했지만 죽음의 효력이 무한한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하나님이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속죄의 제물로 죽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약 시대부터 족장들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다른 사람이나 천사의 모양으로 나타나기도 하셨고, 직접 음성을 들려주시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그야말로 지극히 드문 예였고, 하나님은 형상을 가지신 분이 아니니 모든 전달하는 내용이 오디오였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함으로써 하나님을 보여주었으나 그들이 증거하는 분은 하나님이셨으나 그들 중 어느 증거도 하나님 자신은 아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제사를 드림으로써 죄인을 당신 앞에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으나 그것도 하나님에 관한 증거일 뿐이지 하나님 자신은 아니었습니다. 왕들이 있었습니다. 많은 왕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도록 세워졌지만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땅에 구현하는 대신 자기의 뜻을 성취하는 일에 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임금들의 표준이라고 할 수 있는 다윗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위대한 다윗도 간음죄를 짓고 살인까지 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그러나 그들이 보여준 것은 오히려 인간의 더러운 탐욕이었습니다. 그러니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것만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공생애를 사시면서 희로애락의 생애를 지내셨습니다. 그 모든 만남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여주셨고, 이것은 비디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환생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분신으로서 눈에 보이는 사람의 몸 안에서 눈부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빛나는 그의 사랑의 계시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서 작렬하는 불꽃처럼 눈부시게 빛납니다. 모든 죄인들이 눈이 어두워 볼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하게 빛나도록 하나님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의 죄는 신약 시대에 하나님을 믿지 아니한 사람들의 죄보다도 조금 덜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가 하나님이신 성자로서 사람이 되셔야 했던 이유는 참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 이후에 인간으로서 참으로 진정한 인간의 모본을 이 땅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한때는 경건했던 사람들도 타락했고,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도 그 경건이 완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 중에서는, 죄인들 중에서는 누구도 참 인간으로 이런 사람이 되고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최종적인 본을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참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그리고 실제로 자신의 몸처럼 남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하여 땀과 피와 눈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액체의 생애였습니다.
사람으로서 죄는 없었지만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연약함을 그대로 담당하고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당연히 죄 없었지만 예수님은 늙어가셨습니다. 30세가 갓 넘었는데 사람들은 예수를 가리켜 50이 좀 안 됐다고 생각할 정도로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고난과 풍파를 겪으며 늙어가는 모습이 얼굴에도 나타났습니다. 그렇게 사시면서 모든 것들을 인간과 함께 똑같이 겪으시고, 히브리서 기자에 의하면 우리와 꼭 같이 시험을 당하시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죄 이외에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시고 희생하시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바로 그렇게 그리스도를 배우며 참 인간의 모본을 보게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야 했습니다.
1033년에 태어나서 1109년에 세상을 떠난 기독교의 위대한 학자가 있습니다. 캔터베리의 대주교를 지냈던 이태리 출신의 신학자, 안셀무스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라는 유명한 책, 제 1장 3절에서 우리가 지금 거론하고 있는 이 성육신의 진리를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묘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불순종을 통하여 사망이 인류에게 들어왔기 때문에 한 사람의 순종을 통하여 또한 생명이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저주를 받게 한 죄가 여인으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우리의 의와 구원을 이루어낼 분이 여인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합당합니다. 악마가 사람을 유혹하면서 나무 열매의 달콤함으로 그를 정복하였으므로 사람이 나무에 달려 고통을 감수함으로써 악마가 정복되는 것이 합당한 일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읽은 요한 1서 4장 14절에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라고 하는 이 구절은 두 개의 동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보았고’, ‘타대아메타’라는 그리스어이고, ‘증언하노니’ ‘마르투루 맨’이라는 희랍어입니다. ‘보았다’는 완료형 시제이고, ‘증거하노니’는 현재형입니다. 사도를 포함해서 그 당시에 있던 사람들이 본 것은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이 두 동사의 목적어는 각각 다릅니다. 사람의 몸으로 입고 오신 예수를 두 눈으로 본 것입니다. 더욱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어린 제자였습니다. 그 분의 품에 기대어 함께 식탁을 나눌 정도였으니 예수님이 이 사도를 많이 사랑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모든 사도들이 죽음이 두려워 예수님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 다 도망갔습니다. 요한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십자가로 돌아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남기신 마지막 유언을 받들었고, 그가 십자가에서 고난당하며 죽어가는 과정을 통곡하는 여인들과 함께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지막 예수 죽으시고 군인이 창을 찔러 예수 그리스도를 확인 살인할 때에 그때의 광경을 요한복음 19장 34절과 5절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3인칭을 쓰고 있지만 그러나 사실은 목격자로서 요한이 예수 죽으시던 마지막 광경을 술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는 직접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마지막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쏟으며 죽어 가시는 광경을 모두 보았습니다.
그러나 증거한 것은 바로 이 fact가 아니라 이 fact에 기초한 의미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것은 fact고, 그렇게 죽으신 것은 바로 죽어야 할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용서하고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해서 하신 화목 제물의 죽음이었다 이것은 의미입니다. 이것을 증거하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본 것은 완료형이지만 증거하는 것은 현재형으로서 지금도 현재적으로 반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최소한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암시합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증언하는 일이 계속 반복적이고, 현재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엇 때문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안하는데 왜 사도는 그리고 사도와 함께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현재형으로 ‘증거하노니’라고 말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내면세계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내적인 증거가 그들의 마음 안에서 현재적으로 반복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증언을 계속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행히 우리는 이렇게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사람들의 증언과 그리고 해석한 사람들의 증언이 있기 때문에 2000년이라는 시간과 그 먼 거리라는 공간을 뛰어넘어서 신약의 기록을 통해서 성령 안에서 우리는 그 예수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육신으로 본 사람보다도 더 분명하게 믿음을 통해서 세상의 구주가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아는 지식은 본 사람들의 지식보다도 더욱 분명하니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지만 사람으로 계셨던 모든 기간이 그렇게 동일하게, 찬란하도록 빛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강보에 쌓여 아기 예수로 오셨을 때 그것은 틀림없이 반짝이는 빛이었습니다. 그래서 시므온과 안나는 아기 예수께서 결례 받으시는 날에 그를 경배하며 이제 눈을 감아도 좋겠다는 마음을 갖기까지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린 시절에 자랐어도 그것도 빛났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오신 것이 찬란하게 빛난 것은 하나님이신 그 분이 죄인이나 받으시는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우리와 하나 되셨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는 공적인 생애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공적인 생애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멸시와 천대, 욕과 고난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친히 말씀하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하나님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지만 당신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죄인을 구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으나 그는 마치 남의 땅에 나그네로 오신 것처럼 멸시와 욕을 당하시며 사셨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한순간 한순간은 모두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었고, 특별히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분의 모습을 본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다고 생각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생생하게 보여주었으나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으로 오신 그 분을 오히려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도 역시 믿음이 함께 필요했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들과 함께 사시는 그 모습을 뵈오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실물처럼 분신처럼 생생하게 보면서 하나님이 자기들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화목하게 하기 위한 마지막 제물이 되실 그때에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죄인 눈 어두워 볼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그 빛이 얼마나 놀랍고 강렬한 영광의 빛인지 그 빛을 한번 본 사람은 다른 것들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마음에 가득 차게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많은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에서 늘 있게 마련이고, 그 문제로부터 해결을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라고 배워왔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죄인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두 가지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의미를 깨닫고 나면 사실 우리들이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했던 이 세상의 많은 문제들은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그의 성육신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나를 이토록 사랑하셨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고,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당신을 통해 보여주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느 바다 한 가운데 표류하고 있다고 칩시다. 아니면 깊은 산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고 칩시다. 그래서 고립되어 죽을 위기에 놓였는데 다행히 여러분 손에 통신기가 들려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통신이 이루어졌습니다. “내가 죽을 처지에 있으니 구해주십시오” 라고 말하면 당연히 저쪽에서 무엇을 물어보겠습니까? “몇 살이세요?” “얼굴 예뻐요? 미워요?” “늙었어요? 젊어요?” 그런 거 물어보겠습니까? 아닙니다. 무엇을 물어볼까요? “어디계세요?” 그런데 알 수가 없습니다. 망망한 바다에 판자때기 하나 위에 놓여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위에 태양 이외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 아래 있습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산 속에 있습니다.” “어딘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보고할 수는 없습니다. “소나무가 아주 많습니다.” 어딘 줄 알고 구하러 가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좌표계가 있다면 동경 몇도, 몇 분, 몇 초, 서경 몇도 몇초 라고 말하면 보이는 거리 안에서 그 사람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머리를 싸매고 나 자신을 들여다본다고 하지만 볼수록 그 속은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입니다. 문제는 좌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그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고 이렇게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좌표가 설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이 왜 이렇게 꼬였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리고 어디에서부터 자신의 인생이 망가지기 시작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거기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것, 그래서 자신을 불행하게 했던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리고 그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야 할 사람이라는 존재를 깨닫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인생의 문제는 해결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디 하나님이 그것만 보여주십니까? 그런 눈부신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을 통해 나타났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는 자기같이 하찮은 인간이 그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 아니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 없이 살았던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합니다. 나 가진 것 없으나 빼어난 미모와 그리고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지 못하고 모든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평범한 사람이지만 나를 어떤 의미를 가지고 창조하고 구원하셨는지를 하나님 사랑의 관계 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이 너무나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그렇게 생각해 줄 필요도 느끼지 않고, 어떤 사람을 그렇게 부러워하며 떠받들 이유도 발견하지 않고 그리고 나 자신이 나 자신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바로 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사람들이 어린 애들처럼 그렇게 까불며 인생을 살까요? 지각이 없이 철도 들지 않은 채 그렇게 허무한 것에 몰두하며 죄짓고 악을 행하고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예수를 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누구도 그의 성육신의 이러한 놀라운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없고, 누구도 한번쯤은 그 찬란한 복음의 계시 앞에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 찬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똑같이 살아가는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이 복음의 진리가 현재적으로 자기 안에서 반복하여 경험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한 신자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는 사랑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그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 충만한 사랑 속에서 그는 누구에게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의 그 사랑이 자신 안에 가득하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람에게 소외되어도 그는 자신이 외톨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떠한 죄인이라도 당신이 구원한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세상을 사랑할까요? 여전히 육체에 대한 사랑을 끊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죄가 너무나 좋고 세상이 너무 좋아서만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경험에 대한 결핍에서 오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내 안에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는 동안에는 그렇게 세상 사랑하며 살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랑이 내게 증거하여 나를 눈물 흘리게 하는 동안에는 내가 육체의 사랑에 종처럼 매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은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예수는 한 민족, 한 백성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다시 깊이 만나십시오. 그리고 그를 신앙 안에서 발견하고 증거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하나님의 아들이심
마지막 두 번째는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성령으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신자의 마음속에 역사하는가? 어떻게 내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내 안에 있음을 확신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고백이 바로 그 일을 한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15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일 4:15) 여기에서 ‘시인하다’라는 우리말 번역의 그리스어는 ‘홈어루게세(homologese)’라는 가정법입니다. 이 ‘시인하다’라는 말은 곧 ‘고백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말로 ‘시인한다’라고 하는 것은 조금 이렇게 소극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누가 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데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골방에서 하는 고백이 아니라 공중 앞에서 하는 고백을 뜻하는 것입니다.
자, 기독교가 박해를 받고 있고, 처처에서 순교자가 나오는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구주라고 고백하는 이 고백을 모든 사람들 앞에 들리도록 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겠습니까? 당시 문맥에서 자기가 그런 공적인 고백을 하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 세례를 받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세례를 받고 기다리고 있던 군인들에게 끌려가 순교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공적인 고백, 예수가 세상의 구주로 오신 것을 고백하는 이것은 매우 큰 확신과 용기, 그리고 생사의 결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제 예수 이외에 모든 것을 버린다는 고백입니다. 이제 자신에게는 온 세상의 왕이신 그리스도 예수 밖에 없음을 고백하고, 자신의 삶을 그 왕 되심 앞에 바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따라서 그로 하여금 모든 그릇된 세상 사랑의 대상에서 자기를 포기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 고백은 신자의 본성이나 결심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13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성령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1서 4장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라고 하였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그 사람 안에 역사하는 영이 참 성령이시라는 것을 증명해 준다는 것입니다. 바꿔서 말하면 이것은 누구든지 성령의 내적인 감화 증거가 없으면 다시 말해서 확고하게 믿지 않는다면 누구도 공중 앞에서 그 모든 위험의 가능성을 무릅쓰고, 예수는 세상의 구주로 오셨습니다 라고 대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바로 이렇게 고백하는 신앙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고백 속에서 하나님과 내가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된 것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충만한 사랑과 하나입니다. 이런 고백적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과 내가 동거함을 깨닫게 되고 그 연합 속에서 무한한 생명과 사랑을 공급받으며 험한 세상을 믿음으로 헤쳐 나가는 것입니다.
말씀 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으나 그 분의 본질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이것은 포기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속에 정말 나무에 매달려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나는 그 분을 나의 왕이라고 고백하고, 내가 사랑하던 모든 것을 그 분께 내려놨고,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빼앗길 수 있는 것은 빼앗겨도 두렵지 않은 것이 되었는지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은 잃어버려도 되는 것들이고, 정말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십시오.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십시오. 여러분들의 꼬인 인생은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풀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충분히 그것을 실험해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이 좌표상 어디에 있는지 깨달아 보십시오. 어디서 떨어졌고 어디서 미끄러져서 어떻게 하다가 고통스러운 자리에 홀로 남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가 어디든지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가장 쓰레기처럼 살았던 사람들에게도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핏빛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그 임마누엘의 샘에서 모든 죄를 씻으십시오. 그리고 나를 실패할 곳으로 이끄는 세상과 손잡지 말고 그리스도와 굳게 손잡고 인생을 살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사람들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런 믿음 생활을 그렇게 오래도록 계속할까요? 남는 것이라고는 끊임없는 고통과 괴로움, 그리고 죄 짓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는 것 이외에 남는 것이 없는데도 왜 긴 세월동안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그리고 어느 날 저절로 그때가 끝나는 날이 올까요? 아닙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 오오 어서
그렇습니다. 때리십니다. 그래서 곤고한 것입니다. 왜 때리실까요? 여러분은 화가 나서 자식들을 매질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을 멀리 떠나 소외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 가엾기 때문에 그 분은 엄한 부친으로서가 아니라, 엄격한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어린 아이처럼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아빠로서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게로 돌아오거라. 그리고 내 품 안에서 쉬거라. 무거운 짐을 벗거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성령으로부터 온 사랑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현재적인 고백을 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면서도 당신이 우리에게 한 일을 회상할 때 당신을 향하여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찬양할 때 하나님은 당신의 기쁨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이 삶은 매순간 육신으로 오신 예수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핏방울 앞에서 좌표를 발견하고 내가 다만 그 분의 사랑을 통해 용서받은 죄인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분명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은혜를 받으십시오. 예수를 깊이 만나십시오. 행복하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아들로 나타난 사랑(2019.1.20. 주일오전6)
그 사랑 안에 거하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일 4:16)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성령 충만한 생활은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구원의 고백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마음에 느끼게 해줍니다. 이미 우리가 구원 받았어도 그 구원의 감격이 우리의 마음속에 매일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마음으로 그 구원의 은혜를 고백할 때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 속에 거할 수 있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런 은혜의 경험 속에서 하나님과 내가 하나 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정수입니다.
II. 사랑 안에 거하라
A. 믿음으로 시작됨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짧은 한 구절은 우리에게 사랑 안에 거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특히 믿음과 이 사랑의 관계를 아주 또렷하게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이 믿음으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는 이 영적인 연합은 믿음을 통해서 시작이 됩니다.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믿음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은 요한 1서 16절 상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얼핏 보면 알았기 때문에 믿었다고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리스어 원문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상반절을 다시 번역을 해보면 다음과 같이 명료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갖고 계신 그 사랑을 우리가 알았고 또한 믿었다”입니다.
여기에서 먼저 믿음과 사랑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갖고 계신’은 그리스어로 ‘에케이’인데 현재형입니다. 그리고 ‘알았고 또한 믿었고’는 완료형입니다. 알았고 믿은 것은 이미 완료된 동작인데 하나님의 사랑은 현재형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가 경험하는 사랑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현재적으로 경험하지만 이 경험의 강도는 성화 생활에 달려 있습니다. 즉,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성령의 은혜를 받으며 순종하는 삶에 비례해서 하나님의 이 현재적인 사랑은 강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희미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험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구원 받을 때 우리에게 이 사랑을 주셨고, 그리고 주님은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믿음을 통해 우리의 마음속에 최초로 경험이 되었고,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구원 받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에 일생동안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성향을 심으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셔서 그 성향이 작동되게 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사랑의 성향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사랑을 가져오는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아무 사랑이나 하면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먼저 오고 이어서 그 결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경험된다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1520년에 당시 교황이던 레오 10세에게 한통의 편지 형식의 책을 보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라는 제목이 붙은 서간문 형식의 글입니다. 거기서 그는 로마 카톨릭의 인간의 선행에 의해서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교리를 비판하면서 선행이 믿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사랑을 가져오고 사랑의 열매가 선행이라는 사실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 믿음과 사랑의 삶이 분리될 수 없음을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제 57절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초월하여 하나님 속으로 끌어 올려지고,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는 자기 아래로 내려와 이웃 속으로 내려간다. 그러나 그는 항상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참된 믿음이 참된 사랑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이 결코 참된 믿음을 가져올 수 없고, 참된 믿음으로 구원을 얻지 않은 사람은 누구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자신이 하나님께 사랑받는다는 사실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 없이는 참된 사랑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요? 마르틴 루터는 그림과 같은 묘사로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초월하여 하나님 속으로 이끌려 올려지고,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는 자기로 내려와 이웃 속으로 내려간다. 그러나 그는 항상 하나님과 그 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즉, 믿는 순간에 자기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 속으로 이끌려가고 그 사랑을 알고 나면 그는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와 이웃에게로 흘러들어가게 되는데 그러면서도 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결국 참된 믿음이 참된 사랑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잘 믿는 마음이야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고,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하나님의 진리는 더 잘 믿어지고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지식과 믿음의 관계입니다. ‘알았고 또 믿었나니’ 아는 것과 믿는 것을 사랑의 조건으로 함께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은 지식을 배척하고 지식은 믿음을 방해한다고 생각합니다. 잘 믿기 위해서는 지성을 무시해야 하고, 그리고 잘 알기 위해서는 쉽게 믿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지식은 믿음을 통해서 옵니다. 믿음은 지식을 통해서 옵니다. 믿기 위해서는 믿어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이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만큼 많이 나오는 명령형 동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억하라’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기억을 무엇이 할까요? 인간의 지성입니다. 지성 안에 기억의 기능이 있어서 옛날에 일어난 일을 상상 속에서 불러오는 것이 기억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현재적으로 알게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잊지 않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믿으라는 말만큼 많이 나오는 동사 명령어가 있습니다.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 특히 베드로는 생각하라는 수없이 많은 명령을 자신의 글 속에 남겼습니다. 생각하는 기능도 지성의 몫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무엇을 알고자 하는 지식의 활동이 왕성할 때 믿음도 견고하게 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궁금해 합니다. 예전에는 지금보다도 아는 것이 적었고, 그리고 믿음도 매우 약했는데 그때는 열렬하게 기도하고, 감격이 있는 예배를 드리고, 그리고 눈물이 있는 기도를 했는데 모든 면에서 그때보다 발전했는데 나는 왜 그렇게 살지 못할까 궁금해 합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관한 새로운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새로운 지식은 몰랐던 것을 새롭게 아는 것과 이미 알고 있었는데 새롭게 느끼는 것입니다. 어려서 제 잘난 맛에 살 때에는 부모가 그렇게 소중한 줄 몰랐습니다. 나이가 들고 부모님이 연로해지면서 부모님이 이렇게 살아계신 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선물일까를 생각합니다. 부모가 늘 살아있었으나 그러나 깨닫고 나니 그 부모가 살아계신 것이 큰 선물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깨닫고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매일매일 경험할 때 그때 여러분들의 사랑은 식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비록 지금처럼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을 때에도 주님을 깊이 만나고 감격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아주 작은 지식이지만 그것을 열렬한 믿음으로 굳게 붙들었기 때문에 아주 작은 지식이지만 그것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불을 붙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와 설교 모든 신앙생활의 중심에 와야 할 것은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믿음도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알 때에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이미 알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아도 나는 내가 살아있는 것을 이성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아내가 내 아내라는 것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성이, 기억이 그것을 명증하게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이성의 한계를 초월하는 진리를 성경에 입각해서 받아들이는 지식의 수납 행위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믿음은 이성의 이해를 초월하는 성경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지식 수납의 행위입니다. 그럼 무엇에 근거해서 이성을 초월해서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데도 받아들일까?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입니다. 나는 다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으로 그렇다고 말씀하시니까 그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에 대해 내가 믿음으로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알고자 하는 사람이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도 배울 수 있고, 또 믿으려고 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고 또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믿음이 생기게 되었을까요? “너희가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시다”라는 복음의 선포가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를 믿을 수 있었을까요? 누군가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했을 때 그것은 우리 이성의 이해를 초월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내가 믿어야 할 지식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되고, 내 마음 속에 성령이 역사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알았고 믿었던 것은 완료형 동작이지만 사랑하시는 것은 현재적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갖고 계신 그 사랑을 우리가 알 때도, 우리가 모를 때도 하나님은 언제나 갖고 계십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새로운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전에 몰랐던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내 인생에 대한 답을 찾는 것입니다. 답을 단지 찾을 뿐 아니라 그 사랑을 현재적으로 내 안에 소유하고 사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B. 사랑 안에 거하라
마지막으로는 그렇게 알게 된 사랑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사는 비결을 하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느니라” 여기에서 사랑은 그냥 모든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거하느니라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순종하고 싶습니다. 믿고 싶습니다. 그리고 깨닫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행복하고 싶습니다. 기쁨, 감격, 환희, 가슴 벅차는 희열, 이런 것들을 느끼면서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왜 우리에게 멀게만 느껴지는 것일까요? 그리고 왜 예전에 우리의 마음을 두드렸던 하나님의 사랑, 은혜 이런 것들이 우리 속에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요? 오늘 성경에 의하면 우리가 사랑 안에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경험하며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예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의 효과를 누립니다. 사람의 사랑을 잃어버리면 여러 날 가슴이 아픈데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도 우리가 마음 아프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결국 우리의 마음이 병들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찬양)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자 주를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합니까
이것이 살아있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소외되었다고 느낄 때 그는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는 것처럼 그렇게 시냇물을 갈망하며 하나님을 찾습니다. 마음의 병은 사랑의 병이니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1서 2장 15절 17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그렇게 사랑하던 세상도 지나가고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도 죽어갑니다. 심지어 그 모든 것들 사랑하던 주체인 자신의 육신도 없어져 버립니다. 행복은 사라지지 않을 것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없어질 것을 사랑하는데 어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아닌데 어떻게 사랑하며 기쁠 수가 있겠습니까? 영원히 있는 것들이 아니고 항상 거기에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출렁거리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어찌 평안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들의 인생의 문제를 알고 계십니다. 그 모든 해결의 길은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의 질서에 맞지 않는 모든 것을 가슴 아파도 버리게 하십니다. 여러분들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래서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후에는 누구도 자기가 믿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불신앙으로 굳어졌던 내가 하나님을 믿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문제는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인생을 살아갈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 힘은 여러분들을 인간답게 살아가게 하는 생명의 힘입니다.
이 문장 사이에 삽입된 선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아마 성경 중에 하나님의 존재에 관해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한 말씀만큼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설명한 말씀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에 관하여는 오늘 이 말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하는 이 말씀보다 더 명백하게 하나님에 관해 말하는 구절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은 인간처럼 변하는 사랑이 아니라 불변하는 사랑이며 인간처럼 잠시 있다 없어지는 사랑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이고 인간처럼 불완전한 사랑이 아니고 영원한 사랑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사랑 받기를 싫어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랑에 대한 이 세상에서의 경험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섞여 있습니다. 달콤함과 쓰라림, 소유와 상실, 그리고 기쁨과 슬픔, 사랑받음과 버림받음, 만남과 이별,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기 때문이고, 우리는 누구도 하나님을 떠나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는 성격 차이로 갈등을 일으키는 법이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버림받음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가까이 계신 사람들에게만 사랑이실 뿐 아니라 당신을 버리고 멀리 멀리 떠나 외롭게 된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사랑이십니다. 성령 충만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에게만 사랑이 아니라 비참한 눈물 흘리고 쓰라린 맘으로 탄식하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주님의 진리의 길을 정결하고 굳세게 걸을 때에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멀리 떠나 길을 잃고 가시밭길을 방황하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제발 그가 당신이 그를 사랑하시는 것을 알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메마른 광야와 같은 세상을 방황하지 마십시오. 한모금의 물도 없이 더 이상 갈 길을 못 찾아 헤매지 마십시오. 목자를 떠난 양처럼 유리하고 고생하며 방황하지 마십시오. 이미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를 통해 알았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에게 남은 것은 그 사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사랑이 현재적으로 여러분 속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이미 쓰라린 맛을 모두 보았고,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를 구주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분과 운명적인 사랑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종종 세상을 더 사랑하고 자기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 분을 멀리 멀리 떠나는 적이 있었지만 주님은 한 번도 여러분들을 버리거나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나와 나 사이의 거리는 멀지만 나와 하나님과의 사이에는 거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지금 이 순간이라도 마음을 오롯이 하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종종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싶은데 기도할 수 없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위한 매우 유용한 충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입술로 찾는 분이 아니라 마음으로 찾아야 할 분이라는 것입니다. 장시간 기도하지 못할지라도 마음의 시선을 우리 하나님께 고정하고, 마음을 빨래를 짜듯이 꽉 짜십시오. 마음을 깊이 응축시키고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부르십시오. 한 번 하나님을 부르는 일은 우리의 마음을 꽉 짜는 일이고, 이것은 많은 에너지가 들어갑니다. 성령 충만할수록 에너지는 많이 나와서 간절히 오래 많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그렇지 못할 때는 그 일 자체가 매우 힘들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제일 싫어하는 기도가 그렇게 진심으로 마음을 간절히 집중시키며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한 번, 두 번, 세 번, 간절히 해보십시오. 마음속에서 피의 펌프질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치 말랐던 펌프에 마중물이 들어가고 물이 솟아오르는 것처럼 마음속에 예수의 피가 솟아오르는 것을 기도 속에서 느끼게 됩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죄는 죽고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유로워지는 것은 규칙을 어기고, 법칙을 깨고, 모든 인간의 도덕에 항거하는데서 인간이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진정한 자유는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에게로부터 나와서 모든 인류를 휘감고, 다시 온 우주를 감싸고 돌아가지만 모든 자기를 사랑하는 인간을 당신 안에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사랑 안에서 인간은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간절히 마음을 모아서 마음을 여러분들의 생각 속에 꼭 쥐고 빨래를 짜듯이 마음을 짜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간절히 찾으십시오. 많은 언어, 화려한 수식어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여, 나를 도와주소서. 내가 하나님 참 사랑으로 돌아가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내 힘으로는 갈 수 없사오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메말랐던 마음에 은혜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눈물이 흐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모르게 소리 높여 목 놓아 울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이 사랑을 잃어버리고 내가 무엇을 누리고자 하였던가? 이 사랑이 없는데 그 나머지 모든 것들이 나에게 무슨 가치가 있는가 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도 찾고 싶은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은혜를 받으십시오. 성령으로 충만해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끊임없이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 안에 거하게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들로 나타난 사랑(2019.1.27. 주일오전7)
사랑과 담대함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17-1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희망에 반하는 현실에 직면합니다. 때로는 원하지 않는 이 현실이 매우 큰 힘을 가지고 우리의 인생을 흔들 때가 있습니다. 이때에는 분명히 내가 내 인생의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남의 인생을 사는 것 같고, 마치 내 인생에서 내가 소외된 것처럼 느껴지고 위축됩니다.
II. 사랑 안에 담대하라
A. 사랑 안에서 담대함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러한 현실에 휘둘리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사랑 안에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사랑 안에 담대해지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졌다”라고 말합니다. “이로써”라는 말은 바로 앞에 나오는 16절을 받습니다. 16절에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 것, 그렇게 사랑의 하나 됨을 이루는 그것으로써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함으로써 이미 하나님이 구원과 함께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 사랑과 심판
17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 고 말합니다. 저는 먼저 사랑과 심판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충만한 사랑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사랑은 사랑이 무엇일까요? 어떤 해석자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사랑이라고 해석을 하고, 어떤 사람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사랑, 혹은 이웃을 향해 가지고 있는 사랑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좋은 해석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사랑은 그 모든 것을 포함하는 사랑입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진 사랑,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가진 사랑, 그리고 우리가 이웃을 향해 가지고 있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방향은 다르지만 그러나 이것은 모두 하나의 사랑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는 순간 우리는 우리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끌어져 올라갑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은 후 우리는 제일 먼저 우리 자신에게로 내려오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기 전까지는 우리는 ‘참’ 우리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는 나인데 사실은 내가 아닌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는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기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한 그 사람은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니 방향은 세 방향이지만 그 세 방향을 향하고 있는 사랑은 모두 하나의 사랑이니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온전할 때 그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심판의 날도 두렵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하나님이 원하는 질서에 어긋나 있는 것들을 제자리로 돌려놓으시는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심판은 대부분 파괴를 동반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보복적인 파괴라기보다는 보다 나은 것을 창조하기 위한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게 되면 그는 먼저 자신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질서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나쁜 마음을 미워하고 좋은 마음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추한 것을 혐오하고 아름다운 것을 애호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 안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질서를 가리켜서 성경은 ‘우리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자기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면 이러한 하나님의 질서가 자기 바깥의 세상에도 그대로 실현되기를 갈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예전에 빠진 세상의 잘못된 질서를 미워하게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질서대로 돌아가 있지 않은 세상을 보며 가슴 아파하게 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갈망’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갈망’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심판 날에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심판 날에 두려운 것은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어떤 질서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자신의 양심이 알고 있기 때문에 심판 날을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런 질서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심판을 통해 하나님이 세우시려는 그 질서를 마음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심판은 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대로 세상을 돌려놓으시는 하나님의 커다란 선한 행동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루살렘이 멸망했는데도 그 파괴된 예루살렘을 보며 주의 성실이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롭다고 노래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 심판으로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고 그리고 포도밭에 포도가 없고 그리고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는데도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리라고 노래한 이유는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도입되는 새로운 질서에 대한 사랑이 가져온 찬송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가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질서가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나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나 모두 평화를 원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의 질서를 가지고 있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주체가 수도 없이 많기 때문에 그 사랑의 질서들이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인에게 일어날 때 다툼이 되고, 그리고 나라 사이에 충돌을 이룰 때 이것이 전쟁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심판이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그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믿게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 당신의 사랑이 영원하리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증하셨습니다. 그 보증이 바로 우리 안에 주신 성령님이십니다. 그 성령님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히 계속 될 것임을 보증하십니다. 어떻게요?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용서해 주심으로, 순종하며 살 때 기쁨과 새 힘을 주심으로써, 그리고 어둠 속에 있을 때에 우리에게 그 성령 때문에 진리의 빛을 보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할 것임이라는 것을 현재적으로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성령을 통해 경험할 때마다 이 사랑이 순간에 그치지 않고 영원히 계속될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사랑이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경험은 영원에 대한 경험을 동반합니다. 이 세상에서 남녀가 뜨겁게 사랑하면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인간의 사랑도 결국은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을 어설프게 본뜬 것이기는 하지만 그 사랑의 감정이 영원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헤어져 홀로 있는 고통을 겪을 바에야 둘이 함께 죽기를 바라는 것도 사랑의 경험 안에 있는 영혼의 특성입니다.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는 엄마는 그 자식을 위해 죽는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줄 수 있으니 그 자식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영원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완전하고 잠시 있다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인간의 육정에서 우러난 사랑이 이처럼 영원을 반영한다면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은 어찌 영원의 특성을 가지지 않겠습니까? 사랑 그 자체는 하나님이시고, 그 사랑은 영원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영원에 대한 모든 눈 뜨는 것은 사랑에 대하여 눈뜨는 것입니다. 죽음을 통하여서는 무한히 끝도 없는 어두움의 세계를 깨달을 뿐이지만 사랑을 통해서는 무한히 있는 완전하고 영원한 세계에 대해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며 사는 사람은 이미 영원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한순간에 그치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이고,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자신은 하나님의 편에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담대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당신의 지상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자기의 세상에 왔건만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하는 대신 박해했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수많은 어린 아이들의 죽음으로 그렇게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그런 세상에 오셔서 주님은 일생 동안 환대와 섬김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멸시와 욕을 당하시고 죽음과 핍박 속에서 일생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악한 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싫어한 것은 오직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이 진리의 빛이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진리의 빛으로 오셔서 당신의 인격과 삶, 말씀으로 진리의 빛을 주셨고 사람들은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했습니다. 자기를 향한 어마어마한 죽음의 음모가 대적이 기다리고 있는 세상에 오시는 것을 알면서도 그분의 손에는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할 한 자루의 칼이나 혹은 한 자루의 창도 들려있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러한 죽음을 추호도 두려워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일생을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 된 가운데 사셨고, 하나님이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하셔서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심판은 물론이거니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일들, 심지어는 당신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까지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마지막에 죽으실 것을 가르치시기 시작하면서 제자들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마음에 근심이 밀려왔습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예수 그리스도는 핍박과 고난, 그리고 결핍과 죽음에 복종하셨으나 그 중 아무것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들 안에, 아들이 하나님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예수님에게 두려워할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대목을 두고 이 성경은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 힘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핍박과 고난의 시대를 지나고 있었고, 이단들이 교회에 심각한 위협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배교자들이 나오고 믿음을 지키는 순교자들이 나오는 때였습니다. 그때 사도 요한은 우리 안에 있는 사랑 때문에 심판의 날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노니 예수가 그러셨고 우리가 또한 그렇게 사느리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영원한 생명을 좌우하지 못하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렇게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 안에 온전하지 않은 것을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전심으로 하나님께 그 사랑이 온전해질 수 있도록 간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심판과 담대함
그 다음에는 심판과 담대함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심판 날’이라고 하는 것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우주적 종말로서의 심판’입니다. 주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처럼 또한 주님은 구원하실 것이고, 또 주님은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 완성된 상태는 반드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심판을 동반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들이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방식으로 자기의 질서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질서 때문에 인간은 오늘도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끔찍한 고통을 현실 속에서 당하면서도 그들은 또한 자신들을 불행하게 하고, 이웃을 불행하게 하고 후손을 고통스럽게 할 잘못된 질서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질서에 대해서 하나님이 우주적인 심판을 행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고 인간이 행복하게 할 질서가 도입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주님이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고 큰 나팔이 울려나며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지금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은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파괴하실 잘못된 질서에 자신이 속하지 않았고, 새롭게 세우실 질서 안에 속해 있으니 오히려 그는 심판 날이 하나님의 해방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개인의 죽음으로서의 심판’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이 살아서 이 최종적인 심판의 날을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우리는 그 이전에 대부분 죽음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 죽음은 개인적인 심판입니다. 죽는 모든 사람들은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이고, 그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이유, 어떻게 살았는지를 설명해야 할 것이고 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지를 해명해야 할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좋은 은혜와 은사들을 왜 그렇게 밖에 사용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변명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각자 행한 바를 따라 하나님의 판단을 받을 것이고, 불신자는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될 것이고, 신자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하나 된 사람들은 이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완전한 삶을 살아서 어떠한 죄도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교리입니다. 아무리 순전하게 하나님을 사랑한다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고 그의 선행에 결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는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뚜렷이 양심에 거스른 악을 행하지 않을 것이며 행한다 할지라도 그는 즉시 회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갖는 담대함의 근원입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완전한 사랑을 현재적으로 경험하는데서 오는 양심의 담대함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불변하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확신에서 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확신을 로마서 8장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7-39)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 마지막 날에 심판의 주체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며 그가 명하시는 바를 행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이런 사람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고, 삶의 모든 동기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한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 한 스스로 양심에 반하는 커다란 악을 행하여 심판의 날을 두려워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매순간 자기 희망에 반하는 현실 속에 살며 느끼는 무력감은 우리가 사랑 안에 살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지금 느끼면서 사십시오. 이것이 바로 이렇게 변화무쌍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쫄지 않고 담대하게 살 수 있는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담대해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두려움을 내쫓는 사랑
마지막 두 번째는 두려움을 내쫓는 사랑입니다. 이어서 성경은 온전한 사랑과 두려움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느니라”(요일 4:18)고 말합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다고 하는 이 말씀은 두려워하는 자는 그 두려워하는 죄 때문에 형벌을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형벌 받을 잘못을 했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자체가 그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은 대부분 영원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는 것은 영원한 구원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상실할까봐 무서워하는 것은 천국에서 받을 생명의 유업이 아닙니다. 우리가 대부분 두려워하는 것은 잠시 있다 사라지는 이 세상 속에서 있는 것들을 잃어버릴까봐 우리들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병원에서 건강 검진을 끝내고 의사 선생님과 대화를 나눌 때 일이었습니다. 나는 여의사 선생님께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집안은 암에 대한 가족력이 매우 나쁩니다. 할머니, 아버지, 고모, 모두 암으로 돌아가셨거나 혹은 암을 겪으셨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그래서 이렇게 매년 건강검진을 하시잖아요. 이렇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내가 목사이니 죽는 것이 두렵지는 않지만 그러나 암이 갑자기 생겨서 검진과는 상관없이 속히 발전하여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봤습니다.” 그랬더니 의사선생님이 하는 말씀이 “아, 기습적인 암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예”, “어쩔 수 없습니다. 그냥 당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저도 지금 진료하고 있지만 암투병 중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 우리들이 두려워하는 것들은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암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영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소멸하고 없어질 우리의 육체에 깃들인 결함입니다. 왜 우리가 두려워할까요? 그것은 우리의 육신에 대한 애착 때문입니다. 오늘 이 세상과 작별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런 암이 두렵지 않습니다. 희망이 끊어진 사람들도 죽음이 무섭지 않습니다. 죽음 너머에 있는 영원한 세계의 복락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죽음을 더 좋아합니다. 이 세상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럽에서 65세쯤 된 노부부가 인터뷰 하는 방송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이제 스위스로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두 분 모두 아직 젊고 건강해 보였는데 스위스로 가서 거기에서는 합법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안락사를 할 예정이었습니다. 생활의 여유도 있어 보이는 두 분이 그렇게 아직 젊은 나이에 죽기로 결심한 것에 대해서 의아했습니다. 그래서 기자가 물었더니 그 중에 아내 분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살았습니다. 더 이상 기쁨이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선택하겠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살아있는 현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그들은 충분히 살 수 있는 나이인데 그리고 이런 저런 즐거움도 있을 텐데 그 두려움 때문에 그들은 안락사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깊은 허무를 느낍니다. 깊은 허무를 느낄 때에 그들은 그렇게 살아있는 것 자체가 무서움입니다. 그래서 사랑 없는 사람은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은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빼앗길 수 있는 것은 그의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이 아니고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행복한 것은 하나님 때문인데 그 무엇도 자신에게서 하나님을 빼앗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살고, 죽고, 건강하고, 병들고, 혼자 살고, 같이 살고 하는 것은 모두 삶의 양상일 뿐이고 그것은 충분히 빼앗기기도 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더 얻어야지만 하나님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고, 또 하나님이 자신 안에 있을 때에 무엇으로도 하나님을 빼앗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상실할 수 없는 행복의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그로 하여금 모든 두려움을 내쫓은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바로 이렇게 변화무쌍한 삶의 현실에서 어떠한 경우에도 내가 이 현실의 사태에 노예가 되지 않고 주체적으로 그런 삶의 파도를 헤치며 살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무엇으로요? 어떤 힘으로 그렇게 요동치는 현실의 파도를 헤치며 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일까요? ‘The power of love’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는 이유는 이중적입니다. 미래적으로는 심판 날에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형벌이라고 되어 있는 이 그리스어 단어는 ‘코카시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었습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심판은 모든 사물을 본래의 질서대로 되돌려 놓으시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그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고, 전심으로 그렇게 되기를 원하고 자기뿐만 아니라 모든 이웃과 온 세계가 그렇게 되기를 갈망하며 살았기 때문에 심판 날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심판 날이 위로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현재적인 책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그분이 온전한 사랑 안에 있는 신자는 비록 완전하지는 않으나 어떠한 악도 의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특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고린도전서 13절 5절에서 사랑의 특성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고전 13:5) 원래 이 의미는 사랑은 나쁜 방향으로 해석하지 아니하며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사랑 안에 사는 신자의 최고의 유익은 아무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담대한 평안입니다. 모든 두려움은 하나님께 대한 무지나 혹은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찾는 그릇된 사랑에서 유래하는 것입니다. 만약 신자의 마음에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최고 선이신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사랑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그 참된 사랑이 모자라는 것만큼 하나님 아닌 것들에 대한 사랑이 침투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마지막 심판 날에 제거의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에 현재적으로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심판을 마지막 날까지 모두 유보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도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복을 주시고,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현재적으로 심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변천하는 세상 속에서 불변하는 평안을 꿈꾸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사랑의 연합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 안에서만 그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면서 삽니다. 그리고 그 자유는 하나님이 나로 만드신 나로서의 완전한 자유입니다.
어제 여러 해 동안 열린 교회를 섬기던 목사님 한분이 해외에서 교회를 목회하겠다는 목적으로 출국을 하게 되어서 함께 교제를 하였습니다. 그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열린 교회에 와서 목사님에게 신앙과 신학을 배우며 나도 모르게 목사님을 많이 닮아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나 설교하는 것이 목사님과 닮았다고 그렇게 말하는데 평생 갈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큰 섭리 속에서 나 같은 사람을 만나게 하셔서 무엇인가 하나님이 배우게 하셨다면 그것은 나를 본받게 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을 하나님이 당신답게 살게 하기 위해서 나라는 사람을 만나게 하셨으니 이제 나는 잊어버리고 진정한 자신이 되는 삶을 사십시오. 그것이 나를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저는 천국에 가서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제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비록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을 많이 받고 그리고 풍부한 환경 속에서 살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이 위대한 스승들을 만나게 해주신 것입니다. 저는 헤아릴 수 없이 위대한 많은 스승들을 만났고, 그들 중 대부분은 이미 오래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간 사람들입니다. 칼빈을 만나서 그의 신앙과 신학에 감탄했고, 어거스틴을 만나면서 나 자신이 정말 티끌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한 사람의 위대한 지성 앞에서 깨달았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을 만나서 나는 평생 그 교회 교인이나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에드워즈를 만나면서 끝없이 넓은 사상의 세계에 눈을 떴고, 이후에도 일일이 매거할 수 없는 수많은 위대한 인물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들 중 누구도 내가 흉내 내도록 하나님이 만나게 해 주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섭리 속에서 그런 위대한 인물들을 만나게 하시고 심히 슬퍼하게 하시고, 용기를 갖게 하시고, 무지를 깨우쳐 진리를 아는데 도움을 주신 것은 나로 하여금 그런 위대한 인물 중 어떤 사람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김남준을 김 남준답게 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런 섭리 속에서 만나게 해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위대한 인물을 만나며 나답지 않은 것을 매일 버립니다. 성경을 통해서 매일매일 하여야 할 일은 하나님 앞에 기쁘지 않은 것은 나다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화는 우리로 하여금 죄로부터 우리의 본성을 순결하게 하셔서 가장 나다운 나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작용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가 참으로 사랑해야 할 하나님 대신 사랑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너무나 사랑해서 거기에 우리의 인생이 매여 스스로 노예가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현실도 무섭고, 이 현실을 고치시는 하나님의 심판도 두렵습니다. 지금 마주하는 현실도 내가 원하는 현실이 아니고, 내가 바뀌기를 바라는 현실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욕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그런 영원한 기쁨 대신 두려움 속에 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어차피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시간에 종속되어 있고, 공간에 묶여 있습니다. 내가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도 결국은 죽을 것이고, 내가 그렇게 애착하고 갖고 싶었던 것들도 시간 속에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렇게 모든 것을 사랑하며 살고 싶어 하던 나 자신의 육체도 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공간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사랑할 것을 제시하나 시간은 끊임없이 그것을 앗아가 버린다.” 공간 속에서는 우리가 사랑하고 싶은 것이 매일매일 제시되지만 그러나 그것들도 그것을 사랑하는 우리의 육체와 함께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없어질 것이 사라질 것을 사랑하며 요동치는 것이 출렁거리는 것들을 사랑하고 집착하는데 거기서 어떻게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겠으며 행복하다고 느끼는 그 자체가 영원한 것이 아닌데 어떻게 그 행복 속에서 진정한 평안을 찾을 수가 있습니까?
신앙은 이 세상을 향하던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잠시 있는 것에서 눈을 떼어 영원히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잠시 있는 것을 영원히 있는 곳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살고 그리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소비하고 그것들과 관련을 맺고 살아가는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들 중 아무것도 하나님처럼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랑은 결국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없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고, 눈을 끊임없이 현혹하는 것들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서 사랑해야지만 그 대상이 사라져도 그 사랑은 허무한 사랑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의 죄는 끊임없이 우리를 속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공간 속에서 하나님보다 이것이 사랑스럽지 아니하냐 라고 제시합니다. 그래서 희미하게나마 천상에 고정되어 있던 우리의 눈을 옮겨 그 땅의 것으로 유혹을 받게 하고 그리고 그 유혹은 상상할 수 없는 강한 힘으로 우리의 영혼을 하늘에서 이 땅으로 끌어내립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아닌 삶을 살게 만들고, 그 속에서 자기가 자신에게서 찢어지는 설명할 수 없는 분열을 겪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이 한숨과 눈물, 원망과 회환, 그리고 아픔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이유가 바로 이러한 현상에서 오는 것입니다. 어느 때까지입니까? 언제까지 진리가 명백한데 그렇게 거짓에 속고 하나님의 은혜가 분명한데 그 은혜를 떠나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아보려고 하겠습니까?
무서운 것 때문에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모자라기 때문에 그만큼 두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지 말아야 될 것들을 사랑하는 집착 때문에 그것에 임하게 될 하나님의 현재적이고 미래적인 심판을 양심이 의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삶의 비전은 자유입니다. 그리고 이것과 바꿀 수 있는 더 높은 가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가장 큰 죄는 이 자유를 잃어버린 삶을 정당화하는 것이고, 어떤 이유에서든지 다른 사람을 이런 노예의 상태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국가의 권력이면 그 국가의 권력의 정수리에 하나님의 심판의 도끼가 임할 것이고, 그것이 사회의 구조면 그런 사회는 반드시 무너지고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개인이면 그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중 누구에게도 이런 자유를 침해하고 짓밟고 그것 때문에 자기 자신이 하나님 바깥에서 인간의 분량을 넘어서는 행복을 누리도록 권한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존귀하게 알고, 그를 예수님처럼 생각하며 그가 어찌하든지 완전한 자유 속에 살아가는데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사람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 자유가 없을 때 인간은 두려움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두려움 없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우리의 인생을 담대하게 사는 것은 세상이나 세상이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육체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고, 한편으로는 죄를 섬기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악의 도구로 바쳐질 수 있다는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체 자체에 깃들여 있는 성질이 아니라 영혼의 상태에 달린 것입니다. 영혼이 하나님의 진리의 빛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영혼과 육체 중 육체를 편애하게 되고, 거기에서 모든 악과 불순종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 대한 사랑을 버리는 것은 이미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살을 에이는 것 같은 고통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긴 세월동안 그 사랑에 의해서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것은 죄와 슬픔, 고통, 잃어버릴 지도 모르는 두려움, 이런 것들 밖에 없어서 결국은 우리의 삶에 어떠한 평안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무엇의 노예 되어 사는 삶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과의 하나 된 연합 속에 살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두려움은 내어 쫓기고 그 사랑이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담대할 수 있습니다. 모든 두려움은 오직 하나님만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헛된 사랑은 참된 고통을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무지하기 짝이 없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이 어떤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의 몸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19절의 말씀에 기록된 대로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헛된 사랑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사라질 것들을 붙들고 악을 쓰며 그렇게 죄를 지으며 살지 마십시오. 어떠한 평화도 그 안에는 없고, 여러분들이 모든 것을 다 가져도 여러분들은 우주 공간에 내동댕이쳐진 것과 같은 끝이 없는 외로움과 무서움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하고 완전하셔서 지금도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안아주시는 분이니 그분의 품으로 돌아가 완전한 행복을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사랑의 두 지평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0-2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때 그는 담대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그 사람은 하나님이 싫어할 어떤 일을 욕망할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담대해지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우리 자신 안에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주신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하나님께 받은 사랑은 자랑할 수 있으나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에 대해서는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II. 사랑의 두 지평
A. 하나님을 사랑함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이 시리즈의 마지막 설교를 할 본문입니다. 여기서는 사랑의 두 지평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두 지평이란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십시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을 사랑하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타락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마음 안에 사랑의 본성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기 전에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사랑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지만 그 모든 것은 나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그것들이 나를 즐겁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사랑했기 때문에 세상도 사랑하고, 사람도 사랑하고, 또 권력이나 물질도 사랑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에 그 사랑이 우리에게 충분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많이 사랑했는데도 우리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졌고,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죽게 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올바른 사랑을 물 붓듯 부어주셨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구원 받기 전에도 이미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으니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요한1서 4장 19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우리를 영원 전부터 사랑하셨고” 우리의 구원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 같은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를 섬기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열심히 사랑하며 살았지만 그 어떤 사랑도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만이 이제까지 자신이 경험했던 모든 사랑의 끝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추루한 자기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갔습니다. 거기서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래서 우리도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나를 사랑하며 살았으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되자 내가 사랑한 것은 껍질뿐이었음을 깨닫게 되고, 진정한 나는 이 껍질을 깨고 탈출하여 하나님께로 이끌려 올려졌고, 거기에서 우리는 우리를 당신 자신처럼 사랑하시는 아가페의 사랑을 만난 것입니다. 그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난 다음에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우리는 참다운 나 자신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아가페의 사랑 안에서 다시 나에게 돌아와 보니 나는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육체의 껍질의 우리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 먹고 입고 마시고 보고 만지고 누리는 이 모든 것 위에 또 다른 하나님 사랑의 세계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중 구원 받은 모든 사람들은 이 경험을 했고, 이 경험이 없다면 그것은 구원 받은 사람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의 부으심입니다. 그 사랑이 사람들마다 다양한 경험으로 나타날 수 있으나 그러나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은 한 가지이니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먼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먼저 나를 사랑해 주셨고, 그 사랑이 물처럼 내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에 그 넘쳐나는 사랑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가 여러분들 중 어떤 분들에게는 초등학교 때일 수도 있고, 그리고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들이 그런 경험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랑은 동일한 경험을 우리에게 가져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항한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사랑입니다.
성도는 그 별명이 ‘사랑 지킴이’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랑을 부어주셨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지만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자신의 마음은 수없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가장 큰 싸움은 사랑과의 싸움입니다. 회심하고 구원을 받을 때에는 그런 사랑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어두워지고, 진리의 밝은 빛에서 멀어지고 은혜의 수단에서 점차 멀어지게 되면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 사라진 것만큼 마음에 빈 공간이 남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랑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과 맞서는 사랑입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사도 요한이 무엇 때문에 자신의 신실한 영적인 자녀들에게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경고하였겠습니까? 그래서 신자의 사랑의 한 지평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동안 우리의 간절한 소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형제가 자매를 너무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연애에 깊이 빠지는 사람은 신앙이 없는데 이 형제는 신앙이 매우 두터웠습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은 집안이 별로인데 그는 집안도 매우 훌륭했습니다. 집안이 훌륭한 사람은 인격이 좀 부실한데 그는 인격적으로도 너무 훌륭합니다. 이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사람은 대개 외모가 떨어지는데 외모도 정말 깎아놓은 듯한 미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겸손하게 자매를 뜨겁게 사랑하고 성실하게 헌신했습니다. 그 정도면 프러포즈를 받아줄만 합니까? 안합니까? 왜 대답을 안 하세요. 받아줄만 합니까? 안합니까? 그런데 그렇게 해주는 자매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러면 받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수한 사랑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악을 규정할 때 어긋난 질서에 대한 사랑이 악이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어긋난 질서에 대한 사랑,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이 정하신 위치와 분량에 맞게끔 그 사랑의 속박 아래서 다른 것들을 좋아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이 매우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자연을 즐길 수 있고, 문화를 누릴 줄 알고, 사람들을 사랑할 줄 알고, 그리고 어떤 사물들이나 취미들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삶을 매우 활기 있게 하고, 우리의 육체와 영혼에 살아갈 수 있는 생기를 주는 것입니다. 신앙도 없으면서 수녀처럼, 수도사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나뉘지 않는 순수성이 그게 제일 중요한 조건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일평생의 숙제입니다. 누구도 ‘나는 이미 온전히 하나님만을 사랑한다. 그리고 거기에 도달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서 그 말씀의 빛을 따라 하나님과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이 있어야 할 위치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에 합당한 좋아함을 부여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좋아하는 것들은 하나의 완전한 사랑 앞에 굴복합니다. 그 사랑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푸신 십자가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그런 불붙는 사랑이었으니 이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해서 하나님 이외에는 사랑하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나님이 주시든지 그것을 누릴 수는 있으나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이외의 모든 것들은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이니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마음이 불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것을 쇠와 불의 비유로 그림처럼 묘사했습니다. 대장장이가 이제 그 쇠를 이용해서 연장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려면 그는 그 쇠를 뜨거운 불길 속에 넣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예 도가니에 녹여버려서 쇳물을 부어 원하는 도구를 만들거나 아니면 그것을 달구어서 그래서 두들겨서 원하는 연장을 만들거나 하는 것입니다. 쇠는 쇠고, 불은 불입니다. 그런데 그 쇠를 뜨거운 불 속에 넣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그리고 불길이 뜨겁게 오르면 오를수록 검은 쇠는 붉은 빛을 내며 그 불과 꼭 같은 색깔로 변합니다.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쇠와 불을 구별할 수 없이 됩니다. 불타는 순간에도 쇠는 쇠고, 불은 불인데 그러나 그 쇠가 불에 가열됨으로써 쇠가 불의 일부가 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함을 얻는 순간에 하나님의 사랑과 신자의 마음이 그렇게 하나가 된다는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에는 일체의 인간의 이기심이 없는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나 인간은 인간인데 그 사랑이 그렇게 하나의 사랑이 되어서 내가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B. 형제를 사랑함
두 번째 지평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에게서 이끌려 올라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에 불붙게 되면 이제 비로소 다시 자신에게로 내려옵니다. 그때 그는 비로소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자신의 영혼은 물론 영혼을 감싸고 있는 자신의 육체를 어느 분량만큼 어떤 방식으로 사랑해야 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무한하고 영원하신 하늘의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는데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순전한 사랑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은 우리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것이 우리를 향해 유혹하며 손짓해도 그 유혹에 반응할 우리의 마음이 없는 한 그 아무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방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 사랑은 단체적으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개인적으로 경험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는 깨닫게 되고, 나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개인적으로 우리의 마음에 물 붓 듯이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개인적으로 경험했지만 그렇게 경험을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나면 바로 하나님의 사랑 그 안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비유를 하자면 그 사랑으로 들어갈 때는 혼자 하나님의 사랑으로 들어갔는데, 들어가서 하나님의 마음과 같아지고 나니까 그 하나님의 마음 안에는 하나님 자신 뿐 아니라 이 온 세계에 수많은 인류에 대한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 안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우주적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사랑에 대해서 친히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구원과 함께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일생은 사랑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넓게 보면 하나님은 일반 은총의 차원에서 사랑을 통해 사람을 형성하십니다. 사람마다 사랑을 많이 받으며 산 사람이 있고, 그보다 사랑을 못 받고 외롭게 자란 사람이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을 통해서 그 사람을 만들어 가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는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 그리고 형제들로부터 받은 사랑, 선생님으로부터, 친구들로부터 받은 사랑에 의해서 여러분들이 여러분으로 빚어져 온 것입니다. 좁게 들어가면 특별 은총의 영역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을 만나게 하심으로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부모의 하해와 같은 사랑, 그리고 선생님의 관대한 사랑, 친구들의 따뜻한 사랑, 연인의 불타는 사랑은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참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한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물론, 우리가 죄인이고 불완전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가르쳐 주지 못하고, 그리스도 이외에 참 사랑으로 돌아갈 길이 없다는 것도 가르쳐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특별 은총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참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 사랑은 언제나 진리를 동반한 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깊어지고,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밝을수록 사랑은 깊이를 더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하면서 우리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아무도 사랑받지 않은 채 그렇게 사람이 되어가지는 않습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에게 증명해 보일 수 있습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들이 지나온 일생, 충분히 사랑 받았다고 느끼든, 소외된 채 외롭다고 느끼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인생에서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사랑해 주었던 사람들과의 만남을 빼버리고 나면 그때에 여러분은 누구일까요? 아마도 지금 여러분과는 사뭇 다른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면서 우리는 사랑을 받으면서 우리는 자신이 형성되어 왔습니다. 그런 사랑을 받으면서 또한 우리도 사랑하면서 우리 인생이 형성되어 오는 일에 일정하게 기여를 하였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일생은 그런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사랑을 받고, 또 우리가 사랑하면서 우리 자신이 오늘날에 내가 되어 온 것입니다.
여러분 중 어떤 분들은 어머니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한없이 넓은 사랑을 받으며 그렇게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배운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혹은 그분이 할머니일 수도 있고, 혹은 또 다른 친척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친구나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지 간에 분명한 것은 그러한 만남이 우리의 일생에 준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사랑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놀랍게 변화된 인생을 살게 됐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엊저녁에도 소파에 누워서 쉬고 있는데 강아지가 무릎에 올라왔습니다. 올려달라고, 올려달라고 그래서 올려줬더니 내 무릎에 기대고 자기 턱을 내 무릎에 놓고 안식을 취합니다. 그래서 내가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내 문 밖에 기다리고 있다가 나오면 발가락을 막 핥습니다. 그게 개의 언어로 ‘어디 갔었어? 걱정했잖아.’ 그 뜻이랍니다. 그러면서 그 개를 안아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네가 나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얼마나 사뭇 다른 개의 일생을 살고 있었을까?’ 그런 것입니다.
이 세상은 결국 두 종류의 사람들로 나뉩니다. 한 종류의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한 종류의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십자가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이고, 세상을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용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개인마다 신앙의 모습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사랑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단 하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서로 다르고, 견해도 같지 않지만 하나님 사랑에 의해서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한 곳에 모으셔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삼으셨습니다. 장소적으로 먼저 모신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구원 받는 순간, 그리스도 예수께 그의 영혼이 접붙여지게 하시고, 그 접붙여진 영혼의 연결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진 것이니 먼저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지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경험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고, 그렇게 일체의 성실함과 긍휼하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셨고,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보이는 형제들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도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불붙여져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하나님 마음 안에서 수많은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것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당신의 사랑으로 일치하게 하셨기 때문에 미워하던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원수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하나님이 부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랑을 사랑 모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으로 불붙여져서 까리따스의 사랑을 갖게 된 사람들의 존재와 삶이 얼마나 행복하고 이웃들에게 기쁨이 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세상적인 사랑은 용납하는 사랑이고, 자신의 질서에 맞지 않는 것은 배척하는 미움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의 원하시는 질서대로 고쳐주시는 치유하는 힘이 있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당신 앞에 돌아오게 되었을 때에 그의 모든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쇠는 쇠고, 불은 불인데 쇠가 불처럼 달아오르기 전에 쇠 표면에 붙은 모든 것이 불타 없어지는 것처럼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올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병인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랑하는 질병을 고쳐주시면서 우리를 당신의 사랑 속으로 데려오십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갈 때 일시적으로 마음에 원하는 바와 양심에 가책 같은 것들이 충돌을 일으키면서 때로는 아픔을 동반하기도 합니다. 그 아픔의 크기는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랑한 깊이에 비례합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마음을 정복하고 난 후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꼭 같은 빛깔이 되고, 똑같은 불길중의 하나가 되면서 그는 비로소 이 세상 어느 것을 사랑하면서도 느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의 행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닌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은 항상 허무가 따라다닙니다.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하고, 열정을 불사른 후에 밀려오는 허무감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했는데 채워지지 않는 가슴의 목마름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인간의 영혼은 만들어질 때부터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 아니면 만족을 얻을 수 없도록 그렇게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눈으로는, 귀로는 그리고 접촉하는 피부의 접촉으로는, 냄새 맡는 후각으로는 다른 것들을 사랑하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 안에 정보를 실어 나르지만 그러나 실행에 옮겨보면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완전한 만족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사랑한 것만큼 우리의 마음에 후회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랑하고 거기에서 쓰라린 공허를 맛본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이 왜 완전한 사랑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나라는 마치 땅 끝까지 펼쳐진 곡식이 무르익은 수확할 밭과 같은 것이 그 나라라면 그런 풍성한 하나님 나라의 수확을 가져다주는 첫 번째 곡물의 씨앗은 각 사람의 마음 안에 뿌려집니다. 그 씨는 우리의 마음 안에 떨어져서 바람에 불려 날아가기도 하고, 혹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켜서 마지막에 이 땅에 이루시려고 하는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로 가득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통치의 본질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놀라운 질서를 가져다줍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을 사랑하면 세상을 사랑하는 대로 그렇게 그릇된 질서가 여러분의 마음 안에 심겨지게 되고, 여러분의 생활도 그 질서를 따르게 되고 심지어 여러분들이 손에 가지고 있는 모든 물질도 그 질서를 향해 소비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게 되면 그는 마음 안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가 구축되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예전에 좋던 것들은 좋아하지 않게 됩니다.
제가 18, 19살에 그렇게 팝송을 좋아했습니다. 팝송뿐만 아니라, 샹송 그리고 칸초네도 좋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깊이 변화된 후에 그런 가락 자체가 싫어졌습니다. 어쩌면 그런 변화가 불과 한 한주, 두주 사이에 일어났는지 정말 놀라울 정도입니다. 귀에 음악 방송을 꽂지 않고는 살 수 없었던 사람이 한순간에 그 모든 음악이 싫어집니다. 내 마음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분 자신이 노래였고, 찬송이었고, 그리고 곡조는 없어도 내 마음에 끊어지지 않는 사랑의 멜로디가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마음의 질서를 바꿔놓을 뿐만 아니라 당연히 우리의 삶의 질서를 바꿔 놓습니다. 그리고 “네 보물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우리 물질의 소비의 패턴도 바꾸어 놓습니다. 세상을 사랑할 때는 남을 도와줄 여유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나니 그 다음에는 쓸 일이 없습니다. 남을 위해 돈 벌고, 남을 위해 노동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한없는 만족을 가져다가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마지막 나라는 사랑으로 가득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사람을 향해 “너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며 하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사회입니다. 그런데 그 날은 조금 먼 미래로 유보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전히 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 땅에 또 다른 사랑의 삶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로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행복해 하는 사람들, 행복해 하며 살아야 할 사람들을 한 곳에 모으십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구원 받았어도 여전히 연약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본성을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모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진리의 눈부신 빛을 그리스도의 교회 속에서 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알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의 사랑의 상태를 그 진리의 빛 아래서 보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빛을 보면서 비로소 자신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사랑을 향한 사랑의 경험을 통해서 사실은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결함투성이인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찬란한 진리의 빛을 우리에게 나누어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한 지체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 일은 성경 하나만이 아니라, 설교하는 목회자 한 사람뿐 아니라 그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있는 모든 성도들의 참여를 통해서 이 진리는 그리스도의 교회 구석구석을 밝히게 됩니다. 그래서 목회자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들의 도움을 받으며 진리의 빛을 소유하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깨닫게 될 뿐만 아니라 그 사랑과 멀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 바로 형제 사랑입니다.
오늘은 내가 누군가를 돕고 있지만, 얼마 후에는 내가 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서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섬기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경험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바로 교회는 이렇게 형제들을 사랑하는 또 다른 사랑의 지평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현재가 어떠한지를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III. 두 지평의 융합
이렇기 때문에 결국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지평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두 지평은 융합을 이루게 됩니다. 융합이라기보다는 두 지평이 인간의 연약함에 의해 갈라진 것처럼 보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것이 나뉜 것이 아니라 하나임을 깨닫고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는 사랑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 마음 안에는 하나님만이 아니라 나뿐 아니라 형제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세상 사람과 형제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경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진실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21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 때문에 까리따스의 사랑이 생기고,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세계의 모든 만물들을 학대하거나 약탈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자연 만물의 고통과 아픔을 자신의 고통의 일부로 여기며 그 만물을 선하게 대우해 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하여 신자에게 하나님 사랑과 형제의 사랑은 결코 나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20절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순전하면 순전할수록 형제를 순전하게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는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을 동시에 회복시킵니다. 이 사랑은 자기를 가장 자기답게 하는 사랑이지만 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에 자기를 잊어버리게 만드는 사랑입니다. 자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랑이고, 사랑을 받음으로 자기가 완성되기보다는 사랑함으로써 완성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사랑이 무한하고 크기 때문에 더 이상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지 않아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랑 때문에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죽게 하신 하나님처럼 자기를 모두 내어줄 마음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의 도구가 되어서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 사랑을 모르던 사람들이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삶의 이유인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찬양)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아무도 이 사랑에 도달했고 이 사랑이 내 안에서 완전해졌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 중 가장 뛰어난 모델이 되었던 사도 바울조차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을 날마다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 곧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게 하기 위하여 사노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지키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미 받은 사랑은 잃어버리지 않도록 은혜 안에서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아직 받지 못한 더 큰 사랑을 받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에 더 크게 눈뜰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부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어느 한 순간의 죽음은 낯선 방문객처럼 찾아올 것입니다. 예상치 못했던 이웃처럼 그렇게 불시에 우리를 방문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삶의 모든 동기가 십자가의 사랑이었던 사람들은 얼마나 평안할까요? 왜냐하면 잃어버려야 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랑하고 거기에 인생을 속박했던 모든 사람들은 그날이 얼마나 두려운 날이 될까요? 왜냐하면 그토록 사랑했던 것은 버려야 하고, 낯선 하나님과 심판대에서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매일매일 찬란한 진리의 빛 앞에서 자신이 사랑해야할 바를 사랑하며 살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 사랑에 어긋날 때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만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는 그냥 용서받은 죄인에 불과하다는 마음으로 주님을 향해 믿음을 가지고 다시 새 출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가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를 순결하게 하고,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우리를 하늘의 기쁨을 누리며 이 땅에 살게 합니다. 고난과 슬픔을 능히 이기게 만들고, 모든 잃어버릴 것들을 사랑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며, 잠시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나 고통을 순식간에 치료해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 이외에는 우리를 참 사람답게 하는 것이 이 땅에는 없습니다. 모두 소멸하고 사라질 것들이니 그것들을 향한 사랑이 어떻게 우리를 영원한 행복으로 이끌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한 것이 우리의 가장 큰 허물이며 주님이 나를 향한 사랑은 매우 큰데 내가 하나님을 조금 밖에 사랑하지 못한 것이 우리 오늘의 회개의 제목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떤 의로운 삶도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동기가 지워지지 않는 한 그것은 완전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매일매일 형제를 사랑하고, 그 안에서 자신에게는 없는 사랑의 힘을 발견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는 것도 배우고, 사랑할 수 없는 형제를 용납하고 사랑하면서 자기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도 배우게 됩니다. 어느 경우든 우리는 이 사랑이 내 안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요, 우리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살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 의존의 마음이 진리를 탐구하게 만들고, 그 의존의 마음이 하나님의 더 깊은 사랑을 경험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 형제를 향한 사랑의 이 두 지평이 융합되는 기쁨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아플 때도 있으나 그것은 이후에 찾아올 하나님의 사랑의 완전한 행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정도의 작은 고통입니다. 잠시 기쁨을 누리고 영원한 행복을 잃어버리시겠습니까? 잠시 아픔을 겪으면서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 은혜로 날마다 이기적인 자신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앞에서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나를 향해 베푸신 무한한 사랑에 빚진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찌 하든지 내가 살아있는 날 동안에 희미한 불꽃이지만 이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참된 사랑의 불꽃을 작은 불씨라도 비추어 내가 없었더라면 만들어질 세상보다는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드는데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IV. 적용과 결론
잊지 마십시오. 인생을 인생답게 살아가는 모든 힘은 하나님의 사랑의 힘입니다. 나는 이것으로써 아들로 나타난 사랑 이 시리즈를 마무리합니다. 시작할 때나 끝맺을 때나 제 마음에는 동일한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시련, 역경, 혹은 상처 속에 있다 할지라도 그보다도 더 크게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에 여러분들의 이름은 그리움이 되었고, 그분은 여러분들을 지명하여 불러 ‘너는 내 것이라’ 한 사람들입니다. 이미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당신은 사랑하지 않고는 행복할 수 없는 사람으로 여러분의 내면의 세계를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헛된 데서 행복을 찾지 말고 하나님의 이 참 사랑으로 돌아와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