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의 두 표지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다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오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신30:20)
흔히 모세는 우리에게 율법을 전해준 사람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피할 수없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모세가 우리에게 전해준 것은 율법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의 자녀의 진실한 사랑을 함께 전해주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율법하면 단지 차가운 법조문, 그리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시기 위한 잣대정도로 생각하지만 정작 그 율법을 전해준 모세는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는 우리에게 율법을 전해준 사람이었지만 개인적으로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온 그 율법은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요구하시는 표준을 일깨워주는 훌륭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성격이 과격하고 직선적이고 다혈질적인 사람이었습니다만은 그런 인간적인 연약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이 신명기서는 모세가 이제 가나안땅을 눈앞에 두고 유언적으로 남긴 설교들을 모은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제 광야에서 40년 동안에 지도자의 생활을 통해서 많이 연단을 받았고 그래서 그 과정에서 훌륭한 지도자의 길도 걸어갔지만 자기 자신도 한 사람의 하나님의 자녀로서 많이 성화되었습니다. 출애굽기 3장, 4장에서 맨 처음 하나님께 소명 받았을 때에 보여주었던 그 혈기 충만함은 많이 사라지고 이제 그는 백발의 노령의 나이에 하나님을 진심으로 깊이 사랑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이야기가 참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사랑하라는 명령에는 어김없이 붙어 나오는 수식구가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성품을 다해서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죠. 시대가 아무리 많이 바뀌고 흘러가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도리는 불변합니다. 그리고 그 근본은 보이는 인간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처럼 더 깊이 경험하고 그 분의 인격을 체험함으로서 보이지 않는 그 분을 온 인격으로 느끼면서 그 분을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이 기독교 신앙의 대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서는 모세가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라. 그리고 그에게 부종하라. 세 가지를 말하는데 사실 뒤에 나오는 이 두 가지는 사랑하는 사람의 삶에 구체적인 표징입니다. 그래서 이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의 가장 커다란 의무가 하나님을 진실 되게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사람의 신앙이 깊어졌다라고 하는 것은 단지 교회생활에 요령이 생겼다 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사람의 신앙이 깊어졌다라고 하는 것은 열렬한 어떤 은사를 체험한 것을 가리키는 것도 더더욱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사람의 신앙이 깊어졌다라고 하는 것은 교회 중심부에 깊이 들어와서 실세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면 한사람의 신앙이 깊어졌다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랑이 깊어졌다” 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신앙이 어렸을 때에는 평안한 때에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신앙이 깊어지면 고난이 와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신앙이 어렸을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흔들어놓는 어려운 시련을 주셔야지만 겨우 주님을 사랑했는데 신앙이 깊어지면 평탄한 환경에서도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거룩한 삶의 추구는 바로 그런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 하나님과 더 가까이 하고 싶고 그리고 그 하나님과 더더욱 영적으로 연합된 삶을 살고 싶은데 그 연합을 가로막는 최대의 걸림돌은 우리의 불결과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떡하면 이 죄로부터 떠나서 순결한 사람이 되어서 그래서 주님과 연합된 삶을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그 하나님을 향한 추구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거룩을 추구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화의 목표 자체가 거룩한 삶이지만 거룩한 삶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목적과 목표는 다릅니다. 목표는 단지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목표는 거룩해지는 것이지만 목적은 거룩 그 자체가 아니라 그렇게 거룩해짐으로서 하나님과 온전한 연합 속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거룩한 삶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주님 사랑하십니까?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 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정말, 정말 주님 사랑하십니까? 우리는 험한 길을 걸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대들 앞에 서있는 저도 상상할 수 없는 험한 길을 걸어서 죽지 않고 여기까지 걸어 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남은 인생도 평탄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적은 한번도 없고 그리고 앞으로의 남은 그 길이 예전보다 더 안락할 것이라고는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할 때도 있고 육신의 연약함으로 덜 열심히 할 때도 있고 주님이 높여주셔서 유명해지는 때가 있는가 하면 무명한 자로 지내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사업이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큰 축복을 누리는가 하면 때로는 사업의 위기를 만나서 빈털터리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가난한 마음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인생의 지나가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을 향한 사랑을 어떻게 펼쳐내 왔나 라는 것입니다. 한번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래프를 그려보십시오. 뜨겁게 주님을 만나서 회심한 그 이후로 이제껏 까지 살아오면서 더 좁게는 열린 교회에 와서 주님을 만나고 깊이 은혜 받은 때에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해졌던 때를 시작으로 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러분들이 어떻게 주님을 향한 사랑이 증가했다가 쇠퇴했다가 했는지 한번 마음속에 그래프를 그려보십시오. 우리에 이 신앙의 최고의 목표, 가장 고상한 가치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주님을 진실 되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주 깊이, 깊이 어디까지? 주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주님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모든 것이 되도록,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사랑받는다는 그 감격이 우리의 온 삶을 지배한 나머지 환경과 우리의 삶의 모든 여건들이 도무지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없는 주안에서 확정된 우리의 주님을 향한 이 사랑을 흔들어 놓을 수 없는 그런 정도까지 주님을 사랑하는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서 우리들이 성화를 배우는 거예요. 성화를 배우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성도는 누구일까요? 주님께 크게 쓰임을 받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주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주님이 한 시대에 자기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크게 쓰는 사람도 필요하고 적게 사용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그 일의 가치가 그 사람의 중요도를 좌우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별로로 생각했는데도 큰일을 한사람들 많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별로로 생각한 사람들이 큰일을 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이 버린 사람들도 큰일을 한사람이 많습니다. 여러분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이 세상에서 순간순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 밖에 없는 것처럼 그 마음이 하나님께 온전히 점령된 사람. 그래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사랑하고 그 사랑의 힘으로 이 어두운 세상을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들만큼 행복한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요? 정말 어디 있을까요? 험한 인생의 길을 두루두루 걸어오면서도 그 인생의 높낮이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변함없이 그분을 사랑하고 지금도 그 사랑 안에서 자라가고 있는지, 아 내가 일년 전에는 내가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보니까 일년 전에는 내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랑도 아니었구나. 무슨 사랑이 그런 사랑이 있나. 희생도 없고 주님을 향한 눈물도 없고 그 사랑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도 없는 그런 시시한 사랑이 어떻게 사랑일 수 있었을까? 아 지금 내가 주님의 사랑을 받고 또 주님을 사랑하고 보니 정말 행복하구나. 그런 깊은 사랑이 가슴에 간직하고 주님이 이 세상에 살라고 명령하시는 동안에 그런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는 거예요. 물론 많은 부를 누리다가 죽을 수도 있고 가난하게 살다가 죽을 수도 있어요. 그건 어느 정도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죠. 그러나 그거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게 중요한 겁니다. 그래 모세가 마지막 죽을 때가 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도 계속해서 반복해서 하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은 “너희는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서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율법 중 가장 큰 것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율법 중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님은 율법 중 가장 큰 계명은 “마음과 뜻과 성품과 내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한 그 계명이 최고의 제일가는 계명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 엄격하게 말하면 그것은 제일가는 계명이라기보다는 모든 계명 속에 공통적으로 깃들여야할 정신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없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랑을 하면 사람의 얼굴이 달라집니다.
(예화) 늘 그저 허름한 바지짝이나 꿰차고 머리는 산발을 해서 폭탄 맞은 여자처럼 그냥 세수나 눈곱이나 띄고 그냥 그러고 바지 뒷단이 뜯어진 것도 그냥 입고 어떤 때는 말이지 심하면 말이지 내복도 겉으로 삐져나오고 그러고 다니던 자매들이 형제를 만나서. 심해 어떤 사람들은 고추장 흘린 바지도 입고 다니고 말이지. 자매들 이야기에요. 자매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형제를 만나요. 그래 사랑에 빠져요. 그럼 달라져요. 뭐 이만큼 불편하던 치마도 입고 그다음에 스타킹도 신고 그다음에 거울을 몇 번씩 쳐다보고 정장을 할래니까 또 머리도 힘을 주고 머리에 힘주니까 얼굴에 뭐도 찍어 발라야 되고 그러면서 점점점점 사랑스러운 여성의 모습을 갖춰가는 거예요.
근데 세상에 말이죠, 신자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그분께로부터 받는 인격적인 사랑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생기가 돌아요. 교회에 나오는 발걸음부터가 달라요. 늦었는데도 터덜터덜 걸어와요. 하필이면 항상 맨 뒷자리. 앉자마자 팔짱을 끼고 기도하는 자세로 고개를 숙이는데 예배가 시작돼도 그 고개는 들 줄을 몰라요. 이게 민방위 교육이나 영화관에 들어간 태도란 말이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요. 그 사람 속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말은 안하지만 모두 알 수 있어요. 사랑을 하지 않으면 냄새가 나요. 사랑하지 않은 냄새가 나요. 아주 더럽고 쾨쾨한 냄새가 나요. 자기 영혼을 단정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치장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러고 살아가요. 그러니 오늘날 대부분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것 아닙니까?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셔도 그 말씀을 감미롭게 듣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서서히 식어가요. 아내가 남편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식어가고 연인을 향한 진실한 사랑인 식어 가면 그가 부정한 사람이 되는 것은 순간의 문제에요. 사랑이 떠났는데 뭐는 못하겠어요. 그러기 때문에 성경적으로 볼 때 신자가 순결한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의 마음속에 가득 차있는 상태, 그것이 순결의 상태에요. 순결한 상태에요. 그러니까 주님을 향해서 진실하게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은 항상 불결해 있어요. 불결해요. 그리고 거기에는 죄가 기생하고 악을 품고 있어요. 그리고 그것을 부둥켜안고 있어서 참회와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그것들을 내려놓지 않아요. 그러면서 하나님 사랑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것이지요. 지금 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강력히 원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겨냥한 것이죠. 누구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주님만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나 소수이니까 그것이 문제인 것이죠.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자신의 전인격을 지배하지 않으니까 삶의 동기가 항상 부정직하고 올바르지 않아요. 오염돼 있단 말이죠. 거기에서 그 일들을 해나가고 살아가는 삶의 모든 열매들이 순결하고 깨끗한 열매가 맺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항상 눈물이 있습니다. 사랑에는 터질 듯한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에는 반드시 질투도 있습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희망이 있습니다. 사랑에는 견디기 힘든 시련을 이기며 견디며 살아가게 만드는 커다란 감동의 원천입니다. 사랑하는 관계는 항상 감동을 주고받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여러분들이 이렇게 주님을 깊이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성도들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주님 사랑 때문에 웃고 주님 사랑 때문에 눈물 흘리고 주님 사랑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주님 사랑 때문에 통곡하고 주님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그런 성도들의 삶이 여러분들 안에 풍성하게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그런 사랑을 내가 가지고 있는가 안 가지고 있는가? 내가 정말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나 안하나 그것을 판가름해주는 시금석이 두 가지가 제시되고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고, 또 하나는 그 하나님께 부종하는 삶이에요. 그러면 첫 번째로 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 이것이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그 사람 속에 있는지 없는지를 가리키는 것이죠. 에스겔 선지자는 자기의 글 속에서 말하기를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인자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지 않을 리가 없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런 하나님의 그 사죄하시는 그런 은혜가 필요하다 그렇게 말로는 고백하면서 너희는 계속해서 한편으로는 악을 행한다. 그런 내용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오늘 성경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그 어떤 감상주의적인 사랑의 느낌과는 다른 것이에요. 감상주의에서 말하는 사랑은 전인격적인 사랑이 아니라 감정이 어느 순간에 기형적으로 예민하게 되어서 품게 되는 그런 종류의 사랑을 얘기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사랑은 오늘은 있지만 내일은 없을 수도 있는 거죠. 그러나 사람에게 주는 느낌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과 너무 유사해요. 왜냐하면 우리의 이 인격 속에서 사랑을 가장 잘 느끼는 기관이 바로 우리의 정서이기 때문이죠. 정서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은 그런 지정의 가운데 특별히 정적인 부분만 어느 순간에 과민하게 일시적으로 발달해서 그래서 그 사랑에 자극을 받고 그래서 사랑을 풍성하게 느끼는 것 같은 일시적인 감정의 극대화의 경험이 아니란 말이죠.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인격적인 사랑이에요. 인격적인 사랑이에요. 지정의가 동반된 사랑이에요. 그러니까 아침 구름같이 있다가 사라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애나 에스겔 선지자가 말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호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그런 모든 것들은 감상주의적인 사랑이라는 거죠. 진실한 사랑이 아니라. 그런 것입니다. 마치 사춘기의 소녀가 한번도 만나보지 않은 탤런트를 어느 잡지에서 보면서 밤에 잠 못 이뤄하면서 그를 사랑하는 그런 종류의 사랑. 그리고 몇 칠이 지나고 나면 그 사람을 새까맣게 잊어버리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라 이거죠. 그런 싸구려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적용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만약에 어떤 순간에 예배를 드리거나 기도를 하면서 순간순간 사랑의 정서를 약간씩 느낀다는 그 자체가 여러분 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 라고 하는 증거라고 스스로 생각을 한다면 면밀하게 점검을 해봐야 된다는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인격적인 사랑은 그런 감성적인, 감상적인 그런 사랑과 어떻게 다른가? 감성적인 사랑은 자기 자신의 사랑에 정서적 느낌에 충실한 것이지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사랑은 그분과의 관계에 충실한 사랑이에요. 반복하겠습니다. 감성적인 사랑은 자신의 느낌에 충실한 사랑이지만, 그러나 성경이 이야기하는 인격적인 사랑은 그 관계에 충실한 사랑이 진정한 의미에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우리사이의 관계를 정위하실 때에 두 가지를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유지해 나가십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알고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이해하시는 그런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가 그 유대를 유지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유대를 유지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런 관계를 이런 유대를 유지해가면서 나아가는데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진실한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고 그 다음에 자기의 뜻을 하나님께 아뢰는 일에 열심을 품는 거죠. 여러분들이 이것은 명백한 증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명백한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이 언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모하면서 듣고 그 말씀의 은혜를 받고 그 다음에 언제 여러분들이 그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서 기도하면서 시간가는 줄 모르게 하나님과 교제하며 기도할 수 있었습니까? 언제였습니까? 요약하자면 시련의 때, 평안할 때 그런 때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여러분들 자신이 충만해져 있을 때 그때가 가장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에 충실하게 헌신할 수 있었던 때라 이거죠. 그걸 오늘 여기서 얘기하는 거죠.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 그것이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라고 하는 가장 확실한 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이치를 요한복음에서 아주 명백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느니라. 누구든지 예수님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고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주신 새로운 계명을 지키는 것이 그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그 하나님 내가 인격적으로 깊이 사랑하고 어떻게 하든지 내가 그분을 행복하게 해드릴 수는 없지만 그러나 어떻게 하든지 간에 그분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뭐냐 하면 그 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거예요. 순종하는 삶을 사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그분에 명령에 순종하면서 살면 살수록 우리 안에 기도의 은혜는 더 커다란 힘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풍성한 기도 생활을 해나가는 거죠. 제가 여러분들이 열심히 기도 생활을 하지 않으면 왜 이렇게 가슴 아파하냐면 여러분들이 열심히 기도 안하면 여러분들이 하루 종일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지 훤히 보입니다. 하나님을 슬프게 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왜 기도 하는 게 그렇게 힘드냐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면목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너무 슬픈 거예요. 쉽게 얘기하면 하나님을 직선적으로 대면하고 싶지가 않은 것이에요. 바쁘다, 시간이 없다, 일과에 쫓긴다, 그건 모두 핑계일 뿐이고 여러분 정말 우리가 아무리 바빠도 우리 하고 싶은 것은 다 해요. 아무리 바빠도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납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생활이 없기 때문에 기도의 영도 함께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순종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소극적인 순종의 삶과 적극적인 순종의 삶입니다. 소극적인 순종의 삶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일은 안하고 하라는 일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순종의 삶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하나님을 조금 사랑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조금 사랑하는 사람들은 순종의 의미를 매우 축소시켜서 하지 말라는 것만 안하면 순종하는 것이라고 순종을 정의하기를 좋아합니다. 그것 보다는 조금 더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보다는 훨씬 났게 하지 말라는 것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하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도 불순종이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선결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신자로서 삶에 있어서 지켜야하는 최소한입니다. 우리나라 법체계로 말하자면 하지 말아라 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형법 정도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생각되면 됩니다. 만약에 그것을 어기면 현행범으로 즉각적으로 체포되고 투옥되고 그리고 신문을 받는 것입니다. 형벌을 받는 것이죠. 그러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 그러는 것을 먼저 안하는 것이에요. 하라는 것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지 말라하는 것을 먼저 안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지 말라고 하신 일을 행하면 양심에 견딜 수 없는 가책이 밀려오고 그 양심의 가책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기를 피지 못하게 만들어 주고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자신이 없어지고 주님 앞에 당당하게 나아가지 못하는 마음에 어두운 그늘을 만들고 그리고 하라는 것을 안했을 때보다도 하지 말라는 것을 범했을 때에 우리의 마음은 더 급속하게 굳어집니다. 더 급속하게 굳어집니다. 그걸 버려야 됩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착잡하게 마음에 오가는 생각이 많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 명백하게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그러시는 어떤 일들을 반복해서 계속하고 있는데, 기억하십시오. 그거를 빨리 버리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영혼은 서서히 죽어 갑니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은 우선 우리들이 완전한 삶을 살 수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으므로 일단은 양심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지만 우리들의 적극적인 신앙생활이 가능해집니다. 그걸 버려야 됩니다. 끊어야 됩니다. 물론 힘들겠죠. 힘들지만 지금 끊는 것이 제일 쉽습니다. 오늘 결단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아무리 다른 방면에서 잘 해보려고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계속하고 있는 한 여러분들은 날개 부러진 새가 하늘을 향해 날려고 하는 것처럼 비참한 처지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공할 수 없습니다.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담대히 정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혜를 받아도 여러분 안에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그 성령님이 살아계시려고 하면 양심을 거슬리는 그 죄가 그 성령을 근심시켜서 그 성령을 소멸하게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은혜를 간간히 받는다고 할지라도 받을 때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여러분 안에서 불순종의 죄로 말미암아서 그 은혜의 영이 소멸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속하게, 신속하게 과거로 돌아갑니다. 밑이 빠진 독에다가 계속 물을 붓는 것과 똑같은 생활입니다. 거기에서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전심으로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그것을 끊으십시오. 여러분들이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거기에 달콤한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쓰디썼더라면 그걸 버렸을 것입니다. 달콤합니다. 그때는 여러분들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불순종의 달콤함보다는 이 죄가 몰고 올 비참한 결과에 대해서 더 많이 느낄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그리고 그 지속적인 불순종에서 벗어나야 되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뭐냐 하면 적극적인 순종입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이번에는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시나,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시나 그걸 헤아리면서 적극적으로 그 명령을 따라서 살려고 애를 써야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 앞에 뉘우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행하여야 할 도리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뻔뻔스러운 태도가 몸에 배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뉘우침은 공개석상에서 대표 기도할 때나 쓰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개인의 기도생활에 있어서도 주님은 저에게 성결에 힘쓰라고 명하셨지만 오늘 하루 성결한 삶을 위해서 애쓰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저에게 한 뜻을 가지고 서로 연합하라고 촉구하셨지만 오늘도 저는 지체들과 연합하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으나 기도하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라는 진실한 참회가 몸에 배이도록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에요. 그러고서 적극적으로 순종해 가야 돼요. 적극적으로 순종해 가야 돼요. 그리고 크게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순종은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만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은 자기 스스로가 버리고 기뻐하시는 일은 스스로 찾아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드리는 그러한 헌신이 진정한 의미의 수준 높은 순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자기의 서신 속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그에게서 받나니 이건 우리가 그의 계명에 순종하고 그의 기뻐하시는 바를 행함이라. 두 가지를 같이 말하고 있어요. 그래서 기도 응답을 받는 요건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기 때문이고 거기에는 적극적, 소극적 순종이 포함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분이 기뻐하는 일을 행하는 것이죠. 노래방에 가서 놀지 말라는 이야기 성경에 안나옵니다. 그러나 누가 봐도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안하는 것이죠. 그죠? 음주나 흡연이나 노름이나, 도박, 이런 것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 어느 교회에 우리 교회에 있었던 지체가 무슨 신혼여행 가서 빠징고를 해서 돈을 땄다고 자랑하는데 그런 것 하면 되겠어요? 십일조는 냈는지 모르겠어요. 항상 그런 생각을 해야 되요. 내가 지금 이 장소에서 이러한 대화를 나누며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하나님이 화만 내시지 않으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진실 된 삶에 이를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되요. 그러니까 널려있어요. 눈을 들어서 보면 너무 너무 널려 있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조금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만한 일들이 너무 너무 널려 있어요. 너무 너무 널려 있어요. 이렇게 많이 널려 있는 그 일 가운데 대부분의 일들은 우리들이 방치한 그거는 진정한 의미의 수준 높은 삶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누가 순종을 그렇게 곡해시켰어요? 바리새인들이 바로 이렇게 순종의 의미를 최소한으로 약화시켜서 그래서 그것을 마음도 없이 지키는 것으로서 순종의 의무를 대신한 사람들 아니에요. 그래서 결국은 인격적인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살 수가 없었잖아요. 순종하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그래서 내가 손해나더라도 하나님께 깊이 순종하고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며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순종하면서 하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그래서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적절한 적당한 불합리함이 있어요. 순종을 먼저 생각하면서 살다가 보니까 가끔 불합리한 삶이 있는 거예요. 불합리한 삶이 있는 거예요. 도저히 그럴 수 없는데 순종하는 삶을 사는 불합리한 삶이 따르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다가 직장에서 외톨이가 된다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면서 살려고 애쓰다가 경제적으로 손해를 본다든지 이런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에요. 그러나 언제나 일시적인 것이에요. 반드시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어떠한 방식으로서든지 축복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신명기 29장 그 앞에서 30장까지 계속 얘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이 반드시 벌주신다는 것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반드시 축복하신다라고 하는 것을 이 모세가 계속 강조해서 이야기하다가 오늘 주님을 사랑하라는 말을 거론하고 있는 겁니다.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삶 전체를 보면서 정말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지 한번 보십시오. 모든 일에 있어서 주님 제일주의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 그렇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여러분이 모든 삶의 영역에서 입증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많이 아는 사람들의 나라가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그 사람들이 누리면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순종하는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보십시오. 정말 우리가 그런 점에 있어서 성장해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전에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주어져도 우리가 우리의 일을 개선하면서 그 말씀을 안 지킬 그 담대함을 가졌는데 이제는 주님이 안 기뻐하시니까 순종하는 삶을 살아요. 그런 삶을. 이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표입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우리가 순종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굉장히 힘듭니다. 순종하면서 산다 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힘듭니다. 예를 들자면 제가 늘 여러분들에게 안타깝게 얘기하는 너희는 기도하라 하는 그 계명에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그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선 여러분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삽으로 뒤집어엎어야 됩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든지 밤에 늦게 자든지 자신의 삶을 재편해서 기도할 시간을 마련해야 됩니다. 근데 여러분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고는 순종할 수가 없다 라고 하는 것을 성경이 거듭 말하는 거죠. 그러면 그렇게 순종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또한 주님을 향한 사랑에 마음이 세워지도록 우리를 갱신시키십니다. 갱신시키십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정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삶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되요. 욕심을 정말 버리고 내 인생의 참된 가치는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예배를 통해서라도 주님의 어떤 사랑을 느꼈으면 그거는 여러분들에게 엔조이하라고 주신 사랑이 아니에요. 무슨 하나님이 3류 배웁니까? 그렇게 주신 사랑이 아니에요. 그건 뭐냐 하면 그렇게 여러분들이 느낄 수 없고 받을 수 없었던 인격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꼈으면 그것은 험한 세상을 살아가라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선물이에요. 그 사랑을 가지고 이길 수 없는 육신을 이겨라. 그 사랑을 가지고 이길 수 없는 너의 고난의 삶을 이겨라. 그 사랑을 가지고 우리가 견딜 수 없는 시련과 고난들을 이기면서 살아가라.
(예화) 제가 옛날에 알고 있던 성도 한분 가운데 자매 한사람이 있었는데 벌써 오래전의 얘기입니다. 열린 교회하기 전에 험하게 시장에서 험한 일을 하면서 아주 힘겹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그런 자매였습니다. 또 남편도 여의고 아이들 여럿 데리고 혼자 살아가니까 보통 힘든 인생이 아니죠. 이 시장의 일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늦게 끝납니까? 더구나 재래시장이니까 밤 11시는 넘어야지 일이 끝납니다. 그런데도 또 아침이면 얼마나 일찍 엽니까? 그러니까 물건 띠러 오는 사람들도 있고 하니까 아침이면 벌써 5시 반이면 가게 문이 확 열려요. 그러니까 그 뭐 하루 종일 육신을 꿈지럭거리며 살아야 하니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죠. 그런데도 그 일 다 감당해 나가요. 그러면서도 충만한 삶을 살아요. 여러분 오늘 얘기 잘 들어보세요. 사업이 직장이 뭐, 그 길이 있다고요. 여러분들이 마음속에 정말 그것을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되겠다. 그런 그 각오가 있으면 하나님이 그 상황을 극복하게 하십니다. 보세요. 현실적으로 무슨 시간이 나겠어요? 그 자매가. 밤 11시 반에 그 험한 일하고 좌판 열고 막 가게 열고 물건 띠러 오는 사람 물건 나눠주고 그러면서 뭐 부리는 일꾼도 별로 없이 그렇게 혼자 뛰어다니며 그렇게 험한 삶을 사는데 5시 반서부터 어떻게 좌판에 앉아서 그냥 아침이나 떠먹고 시켜서 점심 먹고 저녁 먹고 애들도 못 돌보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삶인데 얼마나 힘들겠어요? 근데 그게 내 궁금했어요. 그렇게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그렇게 밤늦게 까지 하면서 당신 건강이 탁월하냐? 그랬더니 그게 아니라. 비결이 뭐냐?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새벽 기도가서 1시간 동안 진짜 비지땀을 흘리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하루를 이기면서 살 수 있는 힘을 주신다는 거예요. 그래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1시간이라도 더 퍼질러 자야지 그래야지 하루를 감당하잖아요. 그런데 그 자매하는 얘기가 재미있어요. 자기가 만약에 그런 식으로 삶을 선택했더라면 벌써 쓰러졌을 것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뭐가 달라도 달라요. 순종할 수 있는 어떤 능력의 원천을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는 어떤 통로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순종하며 살아요. 순종하며 살아요.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이제 저는 그래요. 재능이 많아서 크게 하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주님이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정말 아름답게 순종하면서 사는 사람. 그런 아멘의 세계를 사는 사람. 예수님의 별명이 아멘이요, 충성된 증인이요, 창조의 근본이신 이었습니다. 아멘이었습니다. 완벽한 순종의 삶에 모본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순종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많이 느껴요. 예수님을 참 많이 느껴요.
(예화) 제가 알던 어떤 선교사가 그런 얘기를 해요. 아프리카로 선교를 갔는데 두 아들이 말라리아에 걸려서 죽었어요. 이 말라리아가 아직도 무서운 병입니다. 1년에 3백만명씩 죽습니다. 말라리아로. 근데 한 애를 묻었는데 묻고 왔는데 두 번째 아이가 또 시름시름 앓아요. 아내는 벌써 갔고 아이 둘도 이제 보냈어요. 그러면서 그 선교사가 그런 얘기를 해요.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주신 그 사랑을 자기는 아직 몰랐다는 거예요. 근데 선교지에 두 아들을 묻으니까 우리를 향한 그 아들을 주신 사랑이 얼마나 뜨거운 사랑이었는지 그거를 아주 뼈저리게,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어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정말 새로 보게 되었어요.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예수님에 대한 많은 이 공감을 누리면서 살아가요. 예수님의 생애자체가 순종하는 삶, 왜 예수님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셔야 됐어요, 하나님이 가라고 그러셨으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순종하면서 내려오시고 그리고 순종하시면서 일평생을 사셨어요. 십자가를 지신 것도 결국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순종의 마지막 결론이 십자가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이 굳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불순종을 아주 하찮게 생각해요. 마음이 부드러운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작은 불순종에도 가슴아파하는 거예요. 그게 인격적인 특징이라고. 그리고 마음이 굳은 사람은 큰일을 꿈꾸지만 마음이 부드러운 사람은 커다란 순종을 꿈꾸는 거예요. 온전한 순종.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하나님 제가 능력이 없어서 주님을 위해서 큰일은 해드릴 수 없지만 지금도 죽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것 밖에 안모이잖아요. 그러잖아요. 내가 능력이 없어서 그렇게 다른 사람들처럼 몇 천 명, 몇 만 명을 모아서 감화를 끼치는 일은 못하지만 그러나 하나님 그것도 못하는 주제에 하나님이 뭔가를 하시겠다고 그러는데 나 때문에 그 일이 안 이루어진다면 제가 어떻게 가서 주님을 뵈 올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적극적으로 큰일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는 못해드려도 하나님이 뭔가 하시려고 할 때 거기에 대들고 반항하지는 말아야 되잖아요. 그 최소한의 신자로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 이전에 예의 아니에요. 예의. 그래야 되잖아요. 정말 순종하는 삶을 저와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마지막에 여호와께 부종하는 삶인데 이 부종하다 라고 하는 말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에요.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신자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특권과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청교도들이 입을 모아서 이야기 한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에요. 동행하는 삶. 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 많거든요. 에녹이 그런 사람이었잖아요. 그죠?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그가 일생 사는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 그게 뭐냐 하면 히브리말로 히트할라트라는 건데 함께 가는 거예요. 함께 걸어가요. 그것은 결국 뭐냐 하면 그 하나님이 매우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오셔서 그와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완전한 유대를 이루시면서 그 사람과 혼연일체가 되어서 살아가는 신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꿈꾸는 최고로 가치 있는 삶이에요. 어떻게 보면 거룩한 삶이라고 하는 것도 그런 삶을 위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거룩해져야지만 그런 삶이 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렇게 연합된 삶을 살고자하는 거기에서 그것을 위해서 거룩도 필요하고 죄를 죽이는 것, 마음을 지키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이 필요합니다. 그런 순종의 삶을 살아가요. 그리고 연합된 삶을 살아가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특징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진실하고 깊은 사랑은 반드시 하나님과의 깊은 연합을 가져옵니다. 여러분들은 종종 바쁘게 허덕거리며 살다가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너무 낯설게 느껴지는 그런 때를 경험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너무 낯설게 느껴지는 때, 기도하려고 하나님을 불러도 그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느낄 수 없는 때, 분명히 형식은 그 하나님을 경배하는 때인데 경배를 받으시는 그 하나님을 느낄 수 없는 때, 분명히 지금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그런 하나님과의 분리를 경험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연합된 삶에 정반대의 삶인 것입니다. 신자의 이 내면의 세계는 바로 이렇게 하나님과의 온전한 그리스도와 혹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을 통해서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간증거리가 많습니다. 왜? 나 혼자 살아가면 특별한 일이 일어날게 별로 없고 일이 있다고 그래봐야 뭐 엄마 나 사고 쳤어, 뭐 그런 것 밖에 없는데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이 우리를 위한 의외의 일들을 행해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동행할 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길지는 않지만 우리의 교회에 이제껏 지내온 역사도 하나님과 동행한 역사였거든요.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이 매순간 일하십니다. 심방을 다니면서도 종종 그렇게 하나님이 동행하는 사람들의 그 놀라운 이야기들을 들을 때에는 다시 한번 그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요. 정말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걸 니가 보여줬구나. 니가 보여준 것이 아니라 엄밀하게 말하면 너와 함께하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이다. 그렇게 동행하는 삶. 사랑하는 여러분, 보십시오. 얼마나, 얼마나 행복한 삶입니까?
주 내안에 늘 계시고 나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주님과 늘 동행하면서 인생의 위기가 뭐가 오겠습니까? 그분과 함께하면 어려움을 만나면 하나님 이런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아프면 스스로 가슴을 두드리면서 하나님 너무 아픕니다. 누군가로부터 미움을 받으면 하나님 사람들은 나를 미워합니다. 주님은 저를 사랑하시지요? 죽음이 가까 와 오면 이제 주님 제 인생의 고단한 날개를 접고 주님께로 갑니다. 이게 동행하는 삶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이 세상에서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것들과 영원히 사라지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한 구분을 분명히 하고 전자에 대해서는 좀 넉넉한 마음을 갖고 후자에 대해서는 인색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재물은 조금 잊어버리고 내 명예는 조금 상실해도 내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 그 연합 속에서 그 험한 인생의 길을 헤쳐 왔던 그 행복한 삶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그 단호함, 어떡하든지 나의 영혼이 내 생명에 있는 그 날 동안 내 영혼을 돌보고 하나님과 나와의 그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에 헌신하면서 살고자 하는 정절이 있는 결단의 삶, 이런 것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사경회로 향하는 이제 새 날을 맞으면서 여러분들이 전심으로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정말 오늘도 교인들이 많이 나왔죠? 그죠? 얼마 안 있으면 교회당이 꽉 찰 겁니다. 두고 보십시오. 그러나 하나도 기쁘지 않습니다. 제가 정말 보고 싶은 것은 교인이 너무 많아져서 미어 터져서 마당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새벽기도에 그렇게 사람들이 나오는 걸 그걸 보고 싶습니다. 와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울어주고 구원받지 못한 가족을 위해 가슴을 쥐어뜯고 그리고 주님과 부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날마다 자기 깨어짐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기를 원하는 그 진실한 참회의 눈물들, 그리고 지체들을 위한 헌신적인 기도와 그리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저와 같은 목자를 위한 여러분들의 간절한 중보의 기도 소리를 듣고 싶어요. 정말 듣고 싶어요. 정말 듣고 싶어요. 지금이라도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면 교회 대문에 간판을 써 붙이고 나, 목사 김남준은 지금 모이는 신자들도 신자를 제대로 못 만들고 있사오니, 여러분들은 다른 교회로 가시기 바랍니다. 정말 하고 싶습니다. 정말. 정말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진정한 삶의 가치가 이 세상에 명예나 부가 아닌 것처럼, 목자인 저의 인생의 가치도 큰 교회가 되는 것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정말 이젠 예배당이 70미터가 되니까 잘 모르지만 사람들이 우려합니다. 왜냐하면 예배시간에 정말 예배자의 태도를 갖추지 않은 사람들이 이제 꽤 눈에 띤 다는 거죠. 그리고 걱정합니다. 근데 기억하십시오. 그 걱정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앞으로 그런 사람들이 더 많이 올 거고 그것보다 더 질이 나쁜 사람들이 올 겁니다. 걱정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잘못됐다고 느끼는 여러분들이 위기의식을 느끼는 여러분들이 새벽마다 나와서 깊은 밤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들이 그러 했을 때에 제가 그러 했던 것처럼 여러분들도 그렇게 매달려야 합니다. 그래서 지체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래도 얼마나 가능성이 있습니까? 어쨌든 그들은 복음이 울려 펴지는 장소에 있지 않습니까? 언젠가는 깨어나지 않겠습니까? 언젠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의 마음을 울리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그 은혜가 그들을 사로잡지 않겠습니까? 언젠가는 주님의 복음이 그들의 가슴을 찌르지 않겠습니까? 그날을 위해서. 그들은 스스로 울 수 없는 사람이니까 우리가 울어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간절히 기도하는 그러면서 아버지 앞에 매달려서 짐승과 같은 사람들이 돌이켜져서 회심하고 예수님 대적하며 살던 사람들이 변화되어서 그래서 예수의 사랑과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막 되먹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에요. 선물이에요. 그들을 끌어안고 눈물 흘리면서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교회도 주시고 주님의 은혜도 주시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주시고 그리고 주님을 향한 사랑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지 모르지만 남은 생애를 정말 설교 듣고 예쁘게 잘 하는 여러분을 위해서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나는 그 짐승 같은 사람하고 살다가 죽고 싶어요. 정말 그런 주님이 자기들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 사랑을 모르고 하나님과의 어떠한 부종된 연합도 경험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그 불쌍한 사람들, 은혜 많이 받은 사람들조차도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끌어안고 제 인생을 살고 싶어요. 능력은 없지만 그들을 위해서 많이 울어주고 온 삶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시는지를 보여주고 숨지는 그날까지 그들을 위해서 울고 싶어요.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들은 교회 온 첫 날 깨뜨려져서 이런 연합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있지만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은 그런 얘기 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날들을 성령을 슬프게 하고 저를 힘들게 한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그래도 버리지 아니하였더니 지금 돌아와서 하나님의 품안에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얼굴이 우리의 모습이. 어느 지체가 기도회 시간에 한 없이 잠자는 옆에 있는 지체를 보면서 가슴이 너무 찢어지는 것 같아서 통곡을 하고 울면서 기도하면서 저 영혼이 눈을 떠서 자기의 곤고함을 보게 해달라고 한참 기도했더니 몇 주후에 그 지체가 하나님 만나고 변화 받았다는 간증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그렇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이루신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들이 한편으로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 속에서 살아요. 살아가요. 오늘 아침에도 눈 뜨면서 그런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 거룩해지고 싶습니다. 내 모든 것을 다 가져가셔서라도 거룩해지고 싶습니다. 그리고 주님만 사랑하고 싶습니다.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아무래도 관계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기도에 동참하지 않으시렵니까? 우리의 인생이 무엇입니까? 바람같이 날아가고 이슬같이 사라져가는 것입니다. 생명 있는 날 동안에 우리의 모든 것을 드려서 전심으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부종된 삶을 사는 것, 온전한 그분과의 연합 속에서 그분이 사시고 싶으셨던 삶을 마음껏 살아드리고 그래서 우리를 통해 그분이 충분히 나타나시도록 그렇게 사랑하면서 그 사랑 때문에 그 사랑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눈물 흘리며 그들에게도 이러한 연합을 주시도록 그렇게 살아가는 그런 성도의 삶이 바로 주님이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진실한 삶으로 돌아오게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