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사랑치 말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녹취자 : 윤은정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 중에, 사람뿐만 아니라 삼라만상 모든 것들이 저마다 자기만이 자랑하는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그러고 아무런 자랑거리도 하나도 없는 사람들은 이 세상은 살맛이 나지 않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흘러가는 시냇물은 재잘대면서 노래하는 재주가 있는가 하면, 또 나귀는 자기의 힘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바닷가에서는 들리는 파도소리가 자기의 가락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 앞에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신앙고백가운데 가장 위대한 신앙고백가운데 하나라고 불리 울 수 있는 바울의 고백 앞에 우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2천 년 전에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입었던 우리와 꼭 같은 하나님의 자녀였던 사도는 이렇게 자신의 자랑거리를 고백을 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각기 자기의 것들을 자랑하고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것들은 정말 자랑거리가 될 수 없는 것들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까짓 당나귀만큼도 되지 못하는 인간의 완력을 자랑하는 가하면, 10년도 가지 못하는 권력을 뽐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15년도 채가지 못하는 육체의 미모를 자랑하기도 하고, 한줌 흙덩어리만도 못한 물질을 자랑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저마다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세상에 살아가면서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을 자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보다 좀 나은 사람들은 자녀의 똑똑한 것을 자랑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또 훌륭한 부모를 둔 것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후 10:17)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자랑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자랑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비밀이 신앙 안에 있기 때문에 신앙 안에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밖에 있는 사람들은 신앙 속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참된 성도의 분깃의 복됨을 모르기 때문에 언제나 이 세상에서 자기의 자랑거리를 찾는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이 바울은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그렇게 고백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왜 바울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게 되었겠습니까? 먼저 우리가 이 질문하기에 앞서서 도대체 그 당시에 십자가가 무엇이기에 사도바울이 이렇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자랑한다고 말하지 아니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라고 말할 수 있었는지 오늘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속에 깨어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이 우리를 주관하고 우리가 변화된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갈 때에 그때에 우리 속에는 이 십자가의 정신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어제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에게 처음 사랑의 때에 가졌던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회복해야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처음 사랑의 때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언제를 가리켜서 처음 사랑의 때라고 말합니까? 교회에서 권찰에서 집사로, 집사에는 안수 집사로, 안수 집사에서 장로로, 한창 잘나가던 시절을 첫사랑의 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가서 축복을 받아서 우리의 재산이 늘어나고, 우리의 자녀들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우리의 사업이 번창하던 때를 가리켜서 첫사랑의 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첫사랑은 그런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첫사랑의 때, 우리 속에 있었던 것이 지금 없는 것이 있었으니, 우리의 첫사랑의 때에는 지금 있는 것이 없었던 것이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처음 사랑의 때에 있었던 공통된 감격은 바로 십자가와의 만남이었던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존귀한 십자가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분토와 같이 여겨졌습니다. 이 세상에서 생명을 걸고 사랑하던 것들이 사실은 사랑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바로 그 십자가 아래서 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사람의 사랑밖에는 더 큰 것이 없다고 믿었지만은 사랑의 사랑보다 더 크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내 인생을 감동시켰을 때에 우리는 그 사랑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까? 우리가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였습니다. 세상가운데 가치 없는 것들을 쫒아 다니며 인생을 허망하게 보내던 미련한 죄인들의 삶은 분명히 무언가에 눈이 먼 삶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에 주님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필이면 우리를 택하셔서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피 묻은 손으로 두드리시고 우리에게 위대한 우리의 믿음의 비밀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비밀의 발견은 온 우주를 발견하는 것보다 더 크고 놀라운 일이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는 죄인이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때 우리는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그 고난의 보혈 앞에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천사의 경배와 성도들의 찬양소리가 있는 아름다운 천상의 나라를 버리고 죄와 슬픔으로 가득한 이 낮고 천한 땅에 자기의 영광을 버려 이 땅에 내려오신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나 같은 죄인을 향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피로 물든 십자가에서 우리는 발견한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의 마음이 이 세상에서 돌같이 굳고 강퍅하던 마음, 바로 녹아진 것이 이 십자가였습니다. 그것이 이유가 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오늘 우리는 여기에 서있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과 똑같이 이 세상을 살아가나, 그러나 세상 사람들처럼 살 수 없는 단 하나의 이유, 모든 사람과 똑같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숨 쉬고 있지만, 그러나 살아가는 삶의 이유가 이 세상에 있는 이유가 같을 수 없는 단 하나의 이유, 그것은 바로 우리가 남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고, 남이 보지 못한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의 몸에서 발견됬던 것입니다.
(찬양)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한번 그 인생이 녹아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 때문에 여기에 살아있고, 그 사랑을 의지해서 살다가 그 사랑을 붙들고 그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될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제는 십자가의 사랑을 말해도 눈물 흘릴 줄 모르고, 십자가에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무덤에서 다시 부활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말해도 감격할 줄 모르는 냉담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회가 잠들어 있던 시대는 언제나 피 묻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십자가 보다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행복하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 더 관심 많았습니다.
왜 존귀한 그리스도 예수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어야 했는지 그 의미를 캐물으면 우리의 손에 묻은 예수를 못 박아 죽인 그 피를 보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인,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앞에 그 샘에서 우리의 더러운 죄악의 손을 씻고, 임마누엘의 샘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 구원의 위대한 역사를 듣기 보다는 어떻게 이 세상에서 성공하며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영악한 신앙들이 판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조국의 교회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무쳐져 있던 십자가에 대한 설교들이 다시 한 번 불꽃처럼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반짝이는 모든 것이 금이 아니고, 타오르는 모든 것이 불길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거룩한 복음으로 타올라야 비로소 죄 많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되는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확실히 개인의 신앙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깨어있을 때는 이 십자가에 대한 그 감격이 언제나 살아있습니다. 저도 20살 때가 제 첫사랑의 때였거든요. 그런데
(찬양)
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뭐, 찬송 한절을 부르기 전에 마음이 물같이 녹았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존귀한 그리스도께서 그 거룩한 몸을 찢으시고, 이렇게 밖에 살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피 흘려 죽으셨으니, 보배피를 흘리니 오, 주여, 우리 같은 죄인을 받으시옵소서.” 신앙이 식어지고, 세상에 대한 사랑들이 우리의 마음들이 우리 안에 차지하게 되면,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얘기를 들어도 아무 슬픈 생각이 들지 않고,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의 진리는 우리 안에 끊임없이 체험되지 않으면 보수도 아무것도 아니고, 전통도 아무것도 아니고, 자유도 아무것도 아니고, 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느끼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하는 진리를 위해서 생명을 걸 수 있겠습니까? 생명을 걸 수 없고, 그 진리를 붙들고 살아가지 않는데 그 사람이 뭘 믿으면서 살든지 하나님이 무슨 관심이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죄악 된 세상을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일에 소홀합니다만,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선배들의 역사를 읽어보면 때로는 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아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렸던 믿음의 위대한 선배들이 있습니다.
인간으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룩한 헌신과 고난으로 하나님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 하나만을 위해서 자신을 다 불살라 드렸던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질그릇과 같이 연약한 사람이었지만 한 세상을 사자처럼 살았습니다. 그리고 세상 속에 살았지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생애를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일제 강점기 때, 신사참배의 고난을 받으면서도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던 순교자들, 공산군이 내려와서 신앙과 생명을 택하라고 말할 때에 기꺼이 그 총 앞에 원수들을 위해 축복하며 죽어갔던 위대한 신앙의 선진들의 공통점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봤느냐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여러분보다 오기가 많거나 배짱이 세서 자기의 생명을 거룩한 하나님의 단 앞에 산제사로 드린 사람들이 아닙니다. 진리가 그들을 주장했습니다. 복음이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들 속에 있는 진리가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 속에 있는 복음의 진리가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진리를 알아야지만 보수주의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얘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리에 붙잡혀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붙잡았던 공통된 진리가 무엇이냐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사랑을 안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나를 구원하셨는데 그 놀라운 사랑을 받은 내가 어떻게 한 목숨을 살자고 주님을 찬송하던 이 입으로 주님을 부인할 수가 있느냐고 하는 것이 순교의 유일한 이유였습니다. 바울이 오늘 이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의 십자가는 죄인을 죽이는 형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요즘 만약에 누군가가 서대문 교도소에서 사형했다는 오랏줄을 하나씩 들고 다니면서 “내게는 이 목 메인 밧줄 이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마산시를 돌아다닌다면 6시간도 돌아다니지 못해서 정신병원으로 끌려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랑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주께서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그 무덤도 아니고, 빈 무덤도 아니고, 영광스러운 천사의 경배를 받으며 이 땅에 내려오신 말구유도 아니고, 베드로로부터 장엄한 고백을 받았던 가이사랴 빌립보도 아니고, 갈릴리 해변도 아니고, 하필이면 피 흘려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말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그것으로 어리석은 사도바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을 보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도바울도 한때는 이렇게 십자가가 아닌 다른 것들을 자랑하던 때가 있음을 여러분은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는 이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이 십자가 말고, 이 세상의 자랑거리들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십자가를 자랑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는 이전에 한때 이 십자가를 도저히 자랑할 수 없고, 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미친놈 취급하던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에 속해 있을 때 세상을 자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러나 나도 육체를 사모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만한 있는 것이 있는 줄을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라.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의 중에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고 자랑을 하였습니다.
그의 평생 자랑은 자기가 유대인중의 유대인이라는 것, 베냐민의 지파라는 것, 엄격한 율법의 도를 따라서 살아온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는 것과, 당대 최고의 석학인 가마리엘의 문화에서 공부를 했다는 이 지식과, 그리고 열심으로 말하자면은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생명을 바친 젊은이였다는 사실이 바로 이 사도가 이전에 자랑하던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들이 자랑거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서 죽으신 이 십자가의 구속의 비밀을 알고 나니까 이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 앞에 자기가 자랑하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도, 우리와 그리고 이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십자가에 붙들린바 되지 않은 사람들이 무엇을 자랑하면서 살아가는지 보십시오. 그들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모든 자랑은 세상에 속해있고, 그들의 즐거움은 이 세상에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보화를 쌓아두는 대신 이 세상에서 자신의 육체를 위해 보화를 쌓아두는 일에 열심을 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이 세상에는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한 가지 진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함을 얻은 사람들은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꿈꾸며 그리워하는 갈망이 우리 속에서 사라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과 더 깊이 만나고 그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셔서 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아서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그리워하고 꿈꾸며 살아가지 못하는 이 모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들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사도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놀라운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그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결코, 우리가 변화 받지 못하고는 세상에 있는 사람과 다른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루는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주위에 하루는 세상 사람과 다른 삶을 살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루 이상은 세상 사람과 다른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질 수 있는 선한 것들이 우리 안에 결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 자녀답게 살 수 있다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아무런 자원도 소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아니할 때, 그것은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귀한 포도나무로 역사 속에 심었습니다. 그리고 무화가 나무로 심으셨습니다. 메마른 땅에서 한그루의 포도나무를 만난 것처럼 하나님은 그 작은 이스라엘을 보며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물을 주고, 걸음을 주고, 햇빛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와서 보니까 포도원의 열매는 맺지 않고, 들포도가 무성해 맺었습니다. 무화가 나무는 열매는 하나도 없고, 잎이 무성한 채 땅만을 더럽히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이 세상을 향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향해 실망하시던 하나님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분노하셨던 이유는 그만큼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이스라엘을 향해 거는 기대가 크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본받지 마십시오. 세상은 언제나 진리를 따라 흘러가기 보다는 자기의 욕심과 정욕대로 흘러왔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교회 안에서 얼마든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 진리를 따라서 이 세상의 물결을 역류하고 거스르며 살지 아니하고, 더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물결과 타협하며 그리고 시대의 정신을 따라서 옛 신앙의 유산들을 팔아먹으며 살아가기를 좋아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세대가 그렇고, 세월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시대는 변했고, 세월은 변하고, 역사는 변천하고, 인간의 풍조는 한량하지만, 우리의 믿음의 거룩한 도리는 변하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다가오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식이 온 땅에서 많으면 많은 수록, 믿음을 지키며 사는 일들이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우리는 특별한 하나님의 능력을 위로부터 공급받고, 특별히 거룩하고 정결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가 무장되어 살지 아니하면, 우리는 마지막에 주님 오시는 날에 맞으러 나아가는 등불을 잃어버린 미련하고 어리석은 처녀들이 될 가능성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아니하면, 하나님 앞에서는 짐승과 같은 삶인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를 보십시오. 어디에 신앙이 있습니까? 어디에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피 뿌림을 위한 신앙을 파수했던 순교의 복음이 보존되고 있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교통순경이 떼는 딱지가 무서워서 지키는 교통법규만도 못하게 취급되고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은 성경에 쓰여 있는데 이런 것들이 자신의 삶을 주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데 그런 것들은 사람들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고, 그래서 세상은 복음을 들어도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든지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잠들어 있게 만들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모두 잠들어있는 가운데도 하나님은 언제나 깨어있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보존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잠들어있고, 모든 사람들이 코골며 잘 때에도 한 구석에서 하나님을 향한 정결한 신앙과 복음을 잃어버린 조국의 교회를 붙들고 흐느껴 우는 진리의 종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자들을 7천이나 남기셨던 하나님께서 어느 시대든지 그 사람들을 남겨두셨습니다.
오늘 선택하십시오. 여러분은 인구의 93%가 예수를 믿고 있지 않는 이 마산시에서 잠자다가 죽는 다수의 사람이 될 것입니까? 시대를 역류하고 이 교회에 세속 된 풍조를 거스르며 깨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소수가 되어서 구름같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의 반열에 서게 될 것인지 둘 중에 하나 오늘 갈림길을 택하시고, 전자의 길이 선하게 여겨지게 되거들랑 내일부터 새벽집회에 나오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가면, 그래서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참된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사라져 가면 우리는 깊은 죄악의 잠으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때 은혜를 받고 왕년에 십자가의 사랑에 붙잡혔던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입니다. 옛날엔 주님을 만났습니다. 십자가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고난주간이면 금식도 했습니다. 십자가 앞에 나아와 나의 죄를 씻고 하나님이 그 십자가의 공로로 나를 죄악의 사슬에서 풀어주시는 해방도 경험했습니다.
(찬양)
그러나 죄악이 나를 삼키고
내 영혼 갈 길을 잃었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만족할 수 없는 사람들은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온 우주를 다 주어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인간을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범한 것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보다 높아지고 싶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세상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범죄의 출발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하필이면 그 실과가 보암직하고, 먹음직했습니다.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의 자랑, 세상의 사랑과 안목의 정욕은 같은 것입니다. 한 순간에 안목이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것이 곧, 사랑의 불을 담겼습니다. 그래서 따먹고, 범죄 했습니다.
오늘도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욕망을 보십시오. 욕망의 끝이 있습니까? 욕망의 끝이 있습니까? 마음에 원하는 바의 끝이 있습니까? 마음에 원하는 바의 끝이 없고, 눈은 보아도 차지 않고, 귀는 들어도 족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엔 합법적인 욕망들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보다 더 좋은 집, 보다 더 좋은 차, 보다 더 편안한 생활, 보다 좋은 직장, 보다 나은 보수, 보다 좋은 차, 보다 좋은 별장, 보다 좋은 장래, 보다 더 좋은 미래, 보다 좋은 묘지, 그러다가 이제는 만족이 없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욕망을 펼치기 위해서 상대방의 욕망을 죽여 버리고, 자기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짓밟고자 하는 욕망이 싹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인하고, 범죄하고, 그러면서 이 어두운 세상을 짐승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살인사건들은 극도의 인간의 욕망의 노예가 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랑의 극치를 우리는 살인에서 보는 것입니다. 나라와 나라가 이런 이기심이 충돌하면 전쟁이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끝없이 벌어지는 재판과 끝없이 벌어지는 고소, 그리고 끝없이 사람들 속에 싹트고 있는 미움과 분노, 이 모든 죄악의 뿌리들이 바로 세상 사랑의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들은 어찌해도 만족하지 않는 속에서 불꽃처럼 타오르는 육체의 욕망, 세상을 향한 사랑의 불꽃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불태워 버려야지만 만족을 얻을 것 같은 유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사도의 표현대로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세상을 그렇게 사랑하려고 하는 마음의 작용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매일 매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용서하여 주옵소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아십니까?
(예화) 개척교회 한 20명 정도 앉을 수 있는 교회에서 제가 처음 은혜를 받았습니다. 새벽기도를 드리는데 통금이 해제가 되면 이제 교회가 주위에 인가가 없는 허허벌판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새벽에 가정주부가, 그 때 얼마나 가난하던 때였습니까? 목도리를 두 번씩 두르고, 낡은 외투를 걸치고, 그리고 털신을 신고, 그 미끄러운 눈길을 종종 걸음을 치며, 손을 호호 불며 새벽 4시 반에 교회에 나올 때 믿음 없이 그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교회를 왔는데, 박 집사님이 새벽기도시간에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듣는데 자꾸 방석이 왼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게를 삶아먹고 왔나? 왜 왼쪽으로 자꾸 갈까나?’ 목사님이 생각하고, 계속 가는 것입니다. 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설교가 끝난 다음에 다시 찬송을 부르는데 “우리 마음은 연약하여 범죄 하기 쉬우니 하나님이 받으시고 천국인을 치소서.” 찬송을 부르는데, 갑자기 그 집사님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통곡합니다. 방석 밑에 5천 원짜리가 나옵니다. 교회 바닥에 5천원이 떨어져 있는데 그때는 큰돈이었습니다. 너무너무 인생 살기가 곤고하고 가난하니까 누구 돈인지는 몰라도 그것을 보는 그 순간 방석이 자기도 모르게 옮겨가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하지만, 제게는 그런 마음이 없겠습니까?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매일 이렇게 말씀을 들으면서 입술을 깨무는 것입니다. ‘아, 그렇습니다. 하나님, 죄 많은 이 세상은 우리가 사랑하며 살 집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손에 있는 이 세상 사랑보다 더 존귀한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내려갑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일 이렇게, 이렇게 자기를 깎고, 깎고, 정결케 하고, 정결케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살아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을 사랑하는 그 순간, 단순히 그 맛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새벽기도, 나중에 얘기합시다. 새벽기도 걸어올 때, 멀리 빛나는 그 개척교회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눈물이 돕니다. 그러면서
(찬양)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비록 시장바닥에 나가서 골목에서 아이들에게 떡볶이를 만들어서 팔아먹으며 사는 신세지만, 새벽기도 나와서 십자가를 바라보니까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눈물이 주륵, 그리고 교회에 와서 텃밭 난로가 타는 그 교회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당하셨네” 찬송 부를 때쯤 이 속에서 한없는 감격, 정말 예수님처럼 살고 싶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고 싶은 내 마음을 감싸는데, 그 5천 원짜리를 딱 보고 방석을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서부터 기도도 마르고, 찬송도 마르는 것입니다. 이게, 세상 사랑의 비밀입니다. 세상사랑은 예수의 사랑과 꼭 같습니다. 예수의 사랑이 한 번 맘에 부어지기만 하면은 이건 뭐, 약 먹은 사람 같습니다. 먹기는 먹었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먹었으니까. 약 먹은 사람. 미치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 못 가게 작대기로 두드려 패고, 성경책을 갔다가 아궁 속에 집어넣어도 어떡하든지 철장이라도 뜯고 뛰어나가서 교회에 가야 합니다. 이게 예수 사랑이 한번 부어지기만 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세상 사랑이 부어지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반대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사랑을 잃어버리고 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마 5:13; 막 9:50; 눅 14:34) 밖에 버립니다. 짜지 않은 소금을 뭐하겠습니까? 바깥에 버리니까 사람들이 밟고 다닙니다. 여러분, 얼마나 우리들이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가기 쉬운 존재인지 모릅니다.
(예화) 염전을 하신 장로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분 말씀을 들으면서 참 교훈을 많이 얻었습니다. 여러분, 바닷가에 사니까 잘 아실 것입니다. 김장철에 여러분, 펌프 물을 퍼가지고 이제 굵은 소금을 집어넣고 소금물을 만들어야지 김장을 담글 것 아닙니까? 그때, 소금이 잘 풀어집디까? 안 풀어집니까? 추운 겨울에 펌프 물을 퍼가지고 소금을 드리다 붓고 흔들어 보니까 풀어집니까? 안 풀어집니까? 하긴 뭐 김치를 사 먹기나 했으니 아실 것입니다. 풀어집니까? 안 풀어집니까? 안 풀어집니다. 그래 나중에는 빨래 방망이 같은 거라 마구 휘저어도 잘 안 풀어집니다. 물을 뜨거운 물을 분다고 잘 풀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안 풀어집니다. 소금은. 설탕은 차이가 나는데, 소금은 차이가 안 납니다. 안 풀어집니다. 그렇게 물에 안 풀어지는 소금인데, 염전을 하는 장로님이 가끔 염전에서 이제 배에다 소금을 싣는답니다. 바짝 마른 소금이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어차’ 하다가 갈고리로 집다가, ‘아차’ 하는 순간에 풍덩 바닷물에 빠진답니다. 그러면 아까우니까 그거라도 건지려고 얼른 꼬챙이로 그것을 찍어가지고 건지면, 단 2분 만에 건졌는데 가마니밖에 안 남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분 하시는 말씀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성도가 뭐냐?” 성도가 원래 하늘에서 데리고 온 것이 아니라, 죄 많은 세상에서 취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만 떨어지고, 예수 사랑 떨어 지면은, 세상에 착 달라붙어서 살고 싶어 하는 것이 이게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을 보면서도 무슨 타령했습니까? 애굽으로 돌아가서 고기 가마 옆에서 국 먹고 싶다고 그러는 게 그게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라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안일하고 나태하게 생활해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겠습니까? 부흥회나 한번 해가지고 다 불꽃처럼 일어나는 것 같으면 부흥회만 하고 말겠습니까? 여러분,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뭔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왜 구속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셨는가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위로부터 내리는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 10년 전, 5년 전의 추억이 아니라, 오늘 무릎을 꿇고 내가 기도할 때에 하늘로부터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험악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게 하는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 진리로 말미암는 은혜를 매일 붙들고 살아가야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멀리서 옵니다. 심방 가서 어떤 때는 눈물이 납니다. 도대체 우리교회가 무엇이관데 3시간 반을 차를 타고 옵니다. 수요예배를 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심방가면 눈물이 핑 돕니다. 우리 전도사님들이 “목사님, 거긴 너무 먼데 가지 맙시다.” 내가 “매주 오는 사람도 있다. 가자.” 갑니다. 그런데, 그러고 이제 사모하면서 오니까 사람들이 딱 어떤 때는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 앞에 한 없이 울며 회개합니다. 그랬더니 누가 그랬습니다. “체, 맨날 울면서 회개하는데, 아이고, 사는 것 보니까 꼴 나데?”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매일 통곡하며 울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도 그 모양인데, 그것도 못 받고 살아가면 저 사람이 무슨 사건칠지 하나님밖에 아는 분이 아무도 없다.” 그런데, 남의 얘기, 서울 동네 사람들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불꽃처럼 타오를 수 없습니다. 불꽃처럼 타오르지 못하게 하는 요소는 핍박하는 남편이나, 속 썩이는 부인이나, 말 안 듣는 애들이나, 가난함 때문이 아닙니다. 불꽃처럼 타오르게 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는 우리 안에 있었습니다. 언제나 우리를 억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매일 이 속박을 끊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서, “하나님, 이 인생을 하나님, 불꽃처럼 살도록 도와주시든지, 하나님,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 믿음을 지키면서 살 길이 없습니다. 주님, 도와주시옵소서.” 하면서 뭔가 인생을 거는 신앙의 결단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사도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그래서 세상도 지나가고, 정욕도 지나가고, 다 지나갑니다. 다 일시적인 것입니다.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영원히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는 오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모든 사람들 앞에 말했습니다. 그는 때로는 예수라고 말한 적도 있고, 그리스도라고도 말한 적도 있지만,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이름을 모두 검열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그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전에 자랑했지만, 그러나 그렇게 자랑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이었는가 하는 것을 예수 안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사도바울이 예수를 믿었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사도바울에게 축복해 주신 것이 무엇 입니까? 이 세상에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빨리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도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그리스도께로부터 무엇을 받았습니까? 그는 우리들이 다 타고 다니는 그 흔한 승용차도 없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전도가 창창한 한 종교인 젊은이가, 동족에게 추앙을 받고, 민족에게 존경을 받았을 사회 지도자가 되었을 젊은이가, 다메섹에서 나타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그가 받아야 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가 받아야 했던 것은 오히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난 이후로, 굶는 것과, 배고픔과, 육로의 위험과, 해로의 위험과, 사망의 위협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모함과, 유대인의 간교와, 순교의 위협과, 5번이나 돌로 침을 당하고, 그리고 광주리로 버림을 당하고, 마지막에는 말미에 가장 찌끼와 같은 자가 되어서 사망가운데 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주일을 흑암가운데 있으며, 죽음의 폭풍우를 지나야 하는 그런 인생밖에는 그를 기다린 것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그는 말하는 것입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노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훌륭한 종교 지도자의 길은 세상이 지나가면서 함께 사라져 버릴 것이었습니다. 세상에서의 환영은 잠시 있다가 사라져가는 이슬 같은 것이었지만, 그는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수많은 세월을 복음을 전하러 다니는 동안에 검은 머리는 흰 머리가 되었고, 젊고 팽팽하던 얼굴은 후패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울을 쳐다보며, “오, 사라져가는 나의 젊음이여”하고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뭐라고 말했습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5:17) 또한 말합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말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만약에 성경에 이 경고를 무시하고, 세상을 더 많이 사랑하며 살아가면, 우리는 그 세상으로부터 대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우리를 유혹하는지. 추객들이 빨갛고, 노란불이 잔뜩 켜져 있는 술집 옆을 지나갈 때 술집의 처녀들이 그 취객들을 유혹하는 장면들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름다운 말로, 존댓말로, 좋은 말로, 노래로, 그들을 유혹합니다. 세상도 그렇게 유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의 유혹을 받을 때 세상이 원하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손을 놓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손 놓고, 그 품에 안기는 순간에 우리의 뺨을 날리고, 땅바닥에 집어던집니다. 그게 바로, 너희가 짠맛을 잃으면 밖에 버리어지고, 밖에 버리어졌더니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다는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없이 한탄하고 원망하며,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몸부림쳤지만,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선택은 둘 밖에 없습니다. 주의 십자가 사랑아래에 영광의 십자가를 사랑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다가 죽든지, 그래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며,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신 것들을 보여주어서 슬픔과 죄 가운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참된 주님과의 행복에로 불러들이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든지, 아니면 메추라기와 고깃국 타령을 하다가 먹어보지도 못하고 고기가 잇 사이에 낀 채, 눈을 부릅뜨고 멸망을 받고 죽어가든지, 두 가지가 그리스도인에게 남은 선택입니다. “아, 너무 어렵습니다. 목사님, 우리는 사례금 받는 목사도 아닌데, 예수 믿는 게 어렵습니까?” 예,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건 내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책임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를 괜히 믿었네요.” 여러분, 후회해야 소용이 없습니다. 신앙은 일수불퇴, 물러주지 않습니다. 실수를 했다면, 그건, 여러분들이 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의 길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께서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부르심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으며, 또 함께, 목자 되신 하나님과 함께 넘치는 사랑을 이 세상에서 힘 있게, 세상에 있는 사람과는 전혀 종류가 다른 그런 사랑을 우리가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그토록 우리를 그토록 오라고 부르고 있는 세상이 도대체 뭣 하는 것입니까? 그 세상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우리의 존귀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세상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세상의 손과 악수할 수 있겠으며,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한 세상의 가슴에 안길 수 있겠으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던 존귀한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침 뱉던 그 세상과 더불어 입 맞출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십자가를 깨닫는 그 순간, 그리고 그 십자가를 깊이 깨닫는 그 순간에 그는 세상을 사랑하던, 세상을 향해 쫒아가던 그 발에 못 박혔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던 그 가슴에 못 박혔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옆구리를 찌르고 들어왔던 그 창은 허파를 뚫고 심장을 터트렸습니다. 이게 바로, 물과 피 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사랑하던 자기를 철저히 죽이는 경험을 했습니다. 어디서?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는 그 순간에 그는 한번 일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일평생 이 십자가의 감격을 가지고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서는 사도 바울이 사도가 된 후,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에 순교할 시기가 2-3년밖에 남지 않은 그 인생의 말년의 쓴 옥중의 편지, 그 속에서 그는 뭐라고 말합니까?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30년 동안 하나님 한분만을 위해 몸 바쳐 살아왔고, 죽은 자를 살리는 위대한 선교의 업적을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그 손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 설 때마다 그는 예수 죽인 것을 십자가에서 발견하고, 예수 죽인 것을 몸을 짊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 지신 주님, 그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자기는 이렇게 주님을 위해 살아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방백의 노사도 고난의 길을 걸어온 이 복음의 사도가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석양 무렵에 십자가 앞에 흐느껴 울며, “하나님이여, 예수 죽인 것을 용서하옵소서. 나 같은 죄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셨으니, 오, 주님, 내가 죄인 중에 괴수이옵나이다.”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는 단번에가 아닙니다. 매일매일 고백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나는 매일 나를 쳐서 복종시키고, 그러면서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람인 것을 확인한, 죄 많은 세상이 아니라, 이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살아가야 할 사람인 사실을 확인하며, 그 십자가를 지며 살아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와 더불어 낙원에 이르자”라고 말씀하실 때에 쌍수를 들고 달려갈 사람들은 많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축복을 누릴 사람 나오라”라고 할 때에 나올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더불어 고난을 받자.”라고 말할 때에 눈물을 흘리며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 중에 괴수이오니 주여, 주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시옵소서.” 하나님의 교회는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든든히 서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 가슴속에 십자가의 사랑이 불꽃처럼 타오르는 그 사람들만이 어두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