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2.19 주일설교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라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눅6:32)
I. 본문해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교훈들 가운데 가장 빛나는 교훈이지만 우리가 따라가기 힘들어하는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교훈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들이 당신 앞에 나와 왔을 때에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예수님이 저들의 병을 고치는지 시험적으로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그들은 안식일에 병을 고쳐서는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덜 사랑하고 율법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안식일에 병중에 고통 하는 사람들을 고쳐주심으로 율법의 대의가 사랑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 사랑의 정신으로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를 고쳤고 이어서 천국백성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가르쳤는데 그 클라이막스가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빛 된 생활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시면서 그 원수를 사랑하라는 본격적인 계명에 이르기 전에 우리에게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우리가 사랑한다면 칭찬받을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죄인들도 그렇게 사랑한다고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본문의 문맥입니다.
II.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함
그러면 우리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먼저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것만 해도 아마 상당한 사람입니다. 옛 말에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은혜는 흐르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에게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고 은혜를 입었을 때는 그것을 기억하기는 하는데 흐르는 물에다 글씨를 쓰는 것처럼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물은 흘러가고 나면 흔적도 남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게서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원한을 살만한 일이 생기면 그것은 섭섭한 것을 돌멩이에 새긴다는 것입니다. 돌멩이에 일단 글자가 새겨지면 몇 천 년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가슴에 깊이 새겨두고 있는 것이 인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은혜를 받았을 때는 쉽게 잊어버리고 뭔가 원한이 맺혔을 때는 오래도록 기억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 보면 이렇게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한 인간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심지어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있다고 하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덧 이제 이 세상에서는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알아보고 그 사랑하는 사람을 그에 상응하는 사람으로 사랑하기만 해도 대단히 덕성스러운 사람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오늘 이 말씀은 이 세상에 불신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언약백성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백성들의 살아가는 삶은 이 세상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표준을 넘어서야 합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언약의 백성들이고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거듭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이 정도는 사랑을 해야지 된다고 가르치시는 그 표준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에 만족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가슴에 깊이 아로새겨야 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들이 하나씩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어려운 논리일지 모르지만 쉬운 언어로 여러분들에게 설명을 드릴 테니 여러분들은 정신을 집중해서 이 논리를 따라오면서 이 설교를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자,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정의를 내려드렸습니까? 몇 번에 걸쳐서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정의를 내려드렸습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하자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대상을 궁극적인 목표로 정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붙어있고 그것을 즐거워하려고 하는 마음과 정신의 작용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사랑이기 위해서는 그 목표가 끝이 되어야하지 그 목표 위에 또 다른 목표가 있어서 그 사랑하는 목표가 수단이 될 경우에는 사랑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분이 있는데 딸들이 둘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초등학교 1학년입니다. 보통 영특한 아이가 아닙니다. 제가 보니까 그 애는 정말 영특한 아이가 아닙니다. 하루는 가방을 챙기는데 필통인가 숟가락 통인가 넣게 되어있는데 엄마 그것을 빨리 넣어, 이미 넣었잖아. 아니야. 엄마가 네가 넣는 것을 봤는데. 아니라니까. 정말 엄마가 봤어. 에이, 엄마가 신기루를 봤겠지. 그래서 이 엄마가 신기루가 뭔 말인지 알고 한 말인가. 시간이 없어서 어째든 챙겨주면서 야 너 신기루가 뭔지 아니? 그러니까 쳐다보면서 환상이야. 그리고 가방을 싸서 나가더랍니다. 그래서 환상은 더 어려운 말인데 그래서 뒤에 대고 야, 너 환상이 뭔지나 알아? 그랬더니 막 뛰어가다가 뒤를 돌아보면서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는 보이지 않는 것, 참 대단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며칠 있다가 하는 말이 엄마, 언니하고 나하고 있는데 유산을 누구에게 물려줄 거야. 그래서 너희들에게 공평하게 물려주어야지. 엄마, 그러지 말로 언니는 내버려두지 말고 나에게 다 물려주면 안돼? 그래서 왜? 그러니까 그냥 내가 혼자 다 갖고 싶어. 엄마, 엄마는 날 사랑하잖아. 나도 엄마를 사랑하고. 엄마 나에게 다 물려줘, 엄마가 하도 기가 막혀서 그래, 우리 작은 딸 다 물려줄게. 그랬더니 애가 엄마를 쳐다보면서 하는 말이 그런데 엄마, 엄마는 언제 죽어. 아무도 안 웃었습니다. 얼마나 우스운지, 자, 엄마 사랑해. 너 정말 엄마 사랑하니? 그럼 내가 엄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엄마 정말 좋아. 그럼 엄마. 엄마 어디에 가고 눈에 안 보이면 싫어. 싫어, 엄마. 정말 내가 좋아. 그럼 엄마. 왜 그렇게 좋은데, 돈이 많잖아. 그러면 그 순간에 그 사랑에 사랑일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말할 때는 그것 말고 다른 목적이 없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그것이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A. 사람을 향한 사랑이 가치가 있으려면
그러면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왜 그렇게 예수님이 가치가 적은 것처럼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런 원리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많은 것을 우리도 사랑함으로 그에게 나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를 많이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과의 관계를 깨트리고 싶은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들을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여러분들도 그 관계를 지속하고 싶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그를 위해 봉사하고 물질을 나누고 기회를 함께 갖고 시간을 함께 하고 많은 희생을 할 때 그것은 반드시 불결한 사랑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내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내가 덜 먹고 그를 먹이고 내가 귀한 시간을 쪼개어서 그를 위해 시간을 내어주고 이러는 것들이 그렇게 불결하고 더러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여기에서 이런 사랑에 관해서 가치가 적은 것처럼 말씀하시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이치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사랑합니다. 많이 사랑하면 내가 사랑받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런 사랑을 많이 받기 때문에 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나에게 선하게 대해주기 때문에 나도 이 사람을 선하게 대해줍니다. 그래서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하는 것은 결국은 그 사랑이 끝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뭐가 끝인가 하면 아까 엄마를 그렇게 사랑합니다. 왜? 돈 때문에 엄마를 사랑해.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는 나를 선대하는 사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사랑해주는 이유는 그 사랑해주는 사람 때문에 내가 좋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니까 사랑하는데 돈 때문에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참된 사랑이 될 수 없듯이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데 나 때문에 사랑한다고 그러면 그 사랑이 참 사랑이 될 수가 없습니다.
B.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함의 맹점: 그 사랑은 확장된 자기 사랑일 뿐임
그런데 이제 여기에서 그럼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해야지 되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을 사랑하는데 다른 또 다른 목표가 내가 아니고 그 사람 자신이 목표가 될 수 있겠다. 그것은 될 수가 없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될 수가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하겠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내가 사랑하는 것은 결국은 이 사람이 목표가 아니라 내가 목표가 된다고 한다면 이 사람이 잘못된 사람이요, 자기 사랑의 확장이라고 한다면 내가 사랑하는 이 사랑이 최종적인 목표가 될 수 있을까?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안 되는가? 결국은 인간이 최종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은 딱 둘밖에 없습니다. 누구라고 그랬습니까? 하나님과 자기 자신입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 자신이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질문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지요. 목사님, 우리 주위에는 어떤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를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면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요. 라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것은 자기가 좋기 때문에 하는 일입니다. 자기가 그것을 원하고 자기가 그것을 바라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고 그래서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바라시는 사람을 향한 사랑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최종적으로 목표가 되시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깊이 사랑하는데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만 내가 사랑할 때는 그 사람이 결국은 그 사람을 수단으로 해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를 전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아프게 하고 고통을 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내가 마음이 계속 끌리고 그냥 자연이 마음이 끌리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 내가 본성적으로는 싫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럴 경우에는 그 사람을 그렇게 끝까지 사랑함으로서 마지막에 궁극적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치가 이렇게 됩니다. 이해가 되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 이 사랑이 굉장히 가치 있는 사랑이 되고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고 싶으셨던 지순의 사랑인 까리따스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세계를 벗어나서 불신 세상에 가도 자기를 끔찍이 사랑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볼 수 있기 때문에 믿는 하나님의 자녀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가지고는 이 세상에 빛으로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랑은 이 세상 어디에서든지 흔히 볼 수 있는 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제가 이제 선교지로 집회를 하러 갑니다. 여러분이 선교지를 가는 저를 위해 기도를 더 많이 해주시겠습니까, 아니면 지금 저를 기다리고 있는 선교지에서 기도를 더 많이 해주시겠습니까? 집회 끝날 때까지만 그렇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백령도로 집회를 가시는데 옛날에는 그 백령도를 가는 배가 일주일에 두 번밖에 안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가면 11시간씩 배를 타고 가고 통나무배니까. 이게 집회 날짜를 정해나도 포스터를 붙여나도 강사가 오면 하는 것이고 배가 안 들어오면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저히 풍랑이 일어서 못 갈 것 같은데 기가 막히게 뱃길이 열려서 간다고 합니다. 올 때까지 온 교인들이 기도하면서 뱃길을 안전하게 지켜주시도록, 때로는 말도 안 되는 기도를 합니다. 절대로 피곤하지 않게 도와달라고. 그게 가능합니까? 육신인데. 그런데 끝났는데 뱃길이 막혀서, 그래서 큰일 났다. 그랬더니 주최측에서 백령도에는 속담이 있습니다. 강사가 올 때는 주최 측의 믿음으로 오시고 가실 때는 강사 자신의 믿음으로 갑니다.
내가 어느 날 여러분들에 물어봤습니다. 여러분, 저를 사랑하십니까? 아, 목사님 사랑합니다. 저희가 목사님을 얼마나 사랑하는데요. 정말 사랑하십니까? 그럼요. 저 가고 다른 사람이 오면 안 될까요? 안되지요. 저희는 꼭 목사님이 필요해요. 목사님 사랑해요. 정말 사랑하십니까? 네. 왜 그렇게 절 사랑하십니까? 그렇게 물어볼 때 설교에 은혜를 받잖아요. 그럼 또 이것은 옆으로 나간 사랑입니다. 그러면 이제 은혜가 떨어지면 저 인간 왜 안가나. 소형 가치가 있는 동안까지 사랑합니다. 성도들의 기도는 잔인한 것을 아십니까? 수술을 하고 누워있는데 아파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상상하기 싫을 정도로 아픈데 어느 청년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대표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목사님이 이렇게 병중에 누워계신데 이 고통의 순간을 통해서라도 주님을 많이 만나서 다음 주일에 은혜로운 설교를 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래서 나 자신을 향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안 느껴집니다. 그래서 내가 아, 진짜 성도는 잔인하구나. 그 고통의 순간까지 이용하려고,
자, 상상력을 발휘해서 조금만 더 풀어보겠습니다. 사실 많이 하고 싶은데 조금만 더해보겠습니다. 자, 여러분들이 아직 결혼을 안 하셨다고 합시다. 그래서 이제 자매님들이 어떤 아주 멋있는 남성에 프러포즈를 받았습니다. 자매님 사랑합니다. 그런데 정말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매일 도시락 싸갖고 와서 대문 앞에서 기다립니다. 제가 왜 그렇게 좋으십니까? 장인어른 될 사람이 재산이 많잖아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금방 모욕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경우에, 정말 사랑합니다. 너무 너무 사랑한다고 합니다. 제가 왜 그렇게 좋으십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저도 사실 이렇게까지 사랑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당신을 그렇게 사랑하도록 만드시네요. 그럼 여러분은 기분이 나쁠까요, 좋을까요? 아까는 아버지 재산이었고 이번에는 하나님이니까 똑같이 기분이 나빠야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거기에 해당이 안 됩니다.
언젠가 어떤 형제가 저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내용은 내가 소개를 하지 않고 제목만 소개하겠습니다.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김남준 목사님께, 기분이 좋았을까요, 나빴을까요? 자기도 사랑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는데 무엇인가 그 힘에 의해서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형제에게 저녁 한 끼 얻어먹은 적은 없지만 마음이 고맙습니다. 그러니까 이처럼 우리가 인간을 향한 사랑이 참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 자신이 목표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형식일 뿐이고 실제에 있어서는 자기가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짜 온전한 사랑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그런 사랑이 아니고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지 됩니다.
III.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함
그러면 이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자,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해보십시오. 우리들이 가끔 어떤 때는 우리보고 사랑이 없다고 꾸짖는 사람들이 종종 나타납니다. 어떤 때는 우리의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듭니다. 마음이 축 녹아내리면서 이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이 얼마나 많고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 억눌리고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에게 가서 나 자신을 다 쏟아 부으며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 사람들은 온전한 사랑을 이야기할 때 그렇게 자기 사랑을 모이 주듯이 베푸는 그래서 사랑이 필요한 많은 사람들이 내가 베풀어주는 이 사랑, 그 자체에 감격해서 모이주어 먹듯이 허겁지겁 먹으면서 나를 존경하는 그런 종류의 사랑의 현상을 기대합니다. 꿈 깨십시오. 최고 멍텅구리 같은 생각입니다. 나는 그런 것은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감상입니다. 사춘기 소녀 때 낙엽만 떨어져도 눈물이 쭉 흐르는 게 왜 그렇습니까? 감상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생애 중에 그 사춘기 때가 가장 사랑이 풍성해서 원수도 사랑할 때인가 하면 안 그런 것은 여러분이 애를 길러봐서 알 것입니다.
A. 희생
그러면 자, 봅시다. 테레사 수녀처럼 그 비참하고 정말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내려가서 사랑을 한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여러분들이 그냥 희생만 하면 그 사랑을 다 드리고 그 사랑을 다 받아주는 그런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예화: 반 뉴엔이라고 하는 선교사 내용- 나병 환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자신이 들어 가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면서 복음을 전하지만 이상하게 전도가 안 되는데 하루는 그들의 하는 말을 듣게 되었는데 그것은 선교사가 건강하니까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하지 아마 자신들처럼 나병에 걸리면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반발심이 가득 찬 말을 들었다는 내용)
그러면 여러분들이 정말 낮고 어두운 자리에 내려가서 그들에게 여러분들 자신을 다 드려 사랑하는 그런 정말 전설적인 희생의 삶을 실천하면서 산다면 그것은 절대로 여러분들이 베풀기만 하고 그냥 여러분 자신을 소비하기만 하면 되는 그런 종류의 사랑은 아닙니다. 그들이 아무리 무가치한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자기를 다 버리고 그들을 위해 희생을 해도 그렇게 여러분들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 사랑을 원수로 갚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러분 가슴에 못을 박는 그 사람들까지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낮은 자리에 내려가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 여러분 주위에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도 사랑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사람들만이 그런 비참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느끼는 그 사랑이 참된 사랑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눈에 보이는 부모, 자기의 마음에 아픔을 준 형제는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으면서 자기가 그렇게 극단적으로 비참한 사람들에게 내려가면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생각은 사랑의 감상입니다. 실제가 아닙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그냥 자기의 소유를 주고 자기를 다 퍼주는 것은 자기에게 순종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호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퍼주는 것은 그냥 물질을 주면되고, 시간을 주면되고, 노력을 바치면 되는 것입니다.
B. 자기 완성
그러나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심지어는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물질가지고 안되고 자기가 죽어야 됩니다. 자기 죽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있는 물질을 사람들에게 막 퍼주고 내 사랑에 감격해하는 사람들에게 쏟아부어주는 그런 것이 사랑이 아니라 자기를 죽임으로서 남을 이롭게 하는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의 진수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해서는 자기 안에 있는 이 사랑이 완성될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이 사랑의 완성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 심지어는 자기를 잔인하도록 미워하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 속에서 이 사랑은 완성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의 감화 없이는 불가능하고 또 이런 사랑을 통해서만 우리는 사람을 목표로 사랑하지 아니하고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설명 드린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아름다운 가르침, “너희는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한 이 가르침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자기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데는 반드시 희생이 따르게 됩니다.
자, 조금 더 생각해봅시다. 희생이 따르게 된다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내가 나를 많이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지만 나는 그 사람에게 곡식 한 톨도 해택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내 재산의 일부를 처분해서 그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희생이 아닐까요? 물론 그것도 어느 정도는 희생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물질을 죽인 희생이지 자기를 죽인 희생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 자기에게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해봅시다. 이것이 진정한 희생이기 위해서는 자신이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면서 자신에게 무엇도 보상해줄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희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계속 살아있으면 나를 계속 미워할 것이고 나의 고통은 증대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원수를 주릴 때 먹이고 목마를 때 물을 마시게 합니다. 그렇다면 결국은 내가 그 사람에게 베푸는 선행으로 인해서 나는 더 고통을 받을 수도 있는데 그런데도 바보같이 그런 식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랑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이 아니면 불가능한 종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사랑은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 이외에는 누구도 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을 사랑을 통해서는 빛을 나타내보여줄 수 없지만 그러나 자기를 그렇게 미워하고 원수처럼 대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을 통해서는 그 사랑의 빛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스무 가지를 편지지에 써서 네 아버지 앞에서 읽어주고 와라. 이게 숙제입니다. 그랬더니 애들이 핑계를 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아버지 외국에 출장가신데요. 국제전화 해서 읽어드려라. 우리 아버지 밤늦게 오시는데요. 기다려, 그 중에 어떤 애는 전 싫어요. 차라리 숙제를 해오지 않아서 맞는 것이 좋지 나는 우리 아버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한 가지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이 다 설득해서 그러지 말고 해라. 그랬더니 눈물 많은 사연이 나옵니다. 한 애가 아버지를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아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우리 아빠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첫째, 우리 아빠가 엄마를 안 때리는 날도 있기 때문에 나는 아빠를 사랑합니다. 가끔은 우리에게 욕하시지 않기 때문에 난 아빠를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중에 한 애가 아빠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20개를 썼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빠에게 해주려고 그랬는데 일부 아빠를 좋아하는 애가 아닙니다. 아빠가 너무 이기적입니다. 안방에서 TV만 보시는 것입니다. 아빠, 왜? 저 숙제를 해야지 되는데요. 자식아. 숙제를 네가 해야지 애비를 왜 불러, 아빠하고 같이 해야지 되는 것인데요. 뭘 아빠와 같이 해. 너 혼자 하지. 그냥 아빠가 들어주시기만 하면 되는데요. 그럼 빨리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뭔데 그래. TV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뭔데 그래. 빨리 해. 끄니까 자식아 TV를 보는데 왜 꺼, 자식아. 그냥 잠깐 듣기만 하시면 됩니다. 그러더니 내가 아빠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스무 가지 이유, 그리고 막 읽으려고 그러더니 아빠가 손을 확 뻗치더니 아이의 멱살을 잡아 끌더랍니다. 그래서 애가 얻어맞는가보다. 그런데 이 아빠가 아이를 끌어안고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울먹이기 시작하더랍니다.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냉함을 아느뇨
곳곳마다 소리 질러 사랑 요구 하도다
그렇게 폭력적이고 폭언을 하는 아버지인데도 그 마음이 있는 사랑의 갈망은 숨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격에 차이가 많이 나서 결혼하고 신혼 초에는 부부싸움을 참 많이 했습니다. 싸움을 한다고 해야 별거는 아니고 툭탁거리고 말다툼을 하거나 그저 제가 많이 참아주는 편이었습니다. 그때는 성화가 참 열심히 되던 때라 전 이렇게 큰소리 내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잘했다고 우리 집 사람이 막 떠들면 그때는 가만히 있습니다. 며칠 다 모아서 밤에 잘 때 마음을 다 가라앉히고 이야기를 해줍니다. 당신이 사실 이렇게 했는데 나도 잘못했지만 당신도 이런 것은 잘못했다고 생각해. 왜냐하면 그리고 쭉 이야기를 합니다. 얼마나 조용히 불 꺼진 방에서 경청하면서 귀를 기울이며 듣습니다. 야, 드디어 호소가 되는구나.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해줄까? 드르렁! 언제 잠이 들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냥 확! 저기로 팽개치고 갔습니다.
한 10년 전에 부부싸움을 했습니다. 대게 싸움을 하면 애들 교육 이런 것 가지고 싸웁니다. 그런데 제가 참 나쁜 사람인 게 저는 한번 말을 하지 않으면 안 합니다. 저는 한 달 안 해도 능히 견딜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얘기까지 해야지 되겠습니다. 재미있습니다. 부부싸움을 했는데 아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내는 수긍이 안 가는 면이 있었는지 이제 아침에 예배를 드리러 오는 시간까지 싸웠습니다. 나는 정당하니까, 나는 괜찮으니까 설교할 수 있다고 왔는데 우리 집 사람은 오면서 그랬다고 합니다. 내가 네 설교를 듣나봐라. 그리고 이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제가 예배시간에 제일 싫어하는 게 고개를 숙이거나 자기 모습을 기둥 뒤나 사람 뒤에 가리고 있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그런데 안 보입니다. (뒤편 넘어가면서 잘렸습니다.) 설교 시간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 마음으로 결심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당신 설교를 듣나봐라. 삶이 설교를 따라가야지. 그러고 있는데 전 자유합니다. 설교단에 올라가면 다 털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설교에 은혜를 막 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재미있는 예화가 수없이 생겨났습니다. 가만히 재미있더랍니다. 그래서 기둥 뒤에서 설교를 듣다가 얼마나 배를 잡고 웃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그랬다고 합니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 그렇게 결심이 약할까. 그리고 이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항상 우리 집 사람이 입을 열기 시작합니다. 며칠 동안 신경도 안 쓰더니 갑자기 아침 먹을래요? 생선을 구워줄까요? 그래서 내가 속으로 생선을 굽든지 깍두기를 굽든지 네 마음대로 하라. 그리고 이제 집회를 가서 하고 돌아옵니다. 평소에는 안 그런데 오늘 집회가 은혜로웠습니까? 기도를 많이 했는데, 속으로 그런 것 말고 그것보다 짧은 얘기, 딱 한번만 하란 말이야. 여보,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면 내가 설거지도 해주고 밥도 해주고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발 마사지를 해줄 용의도 있는데 왜 그 본론은 빼놓고 쓸데없는 생선 굽는 얘기, 집회하는 얘기, 그런 얘기만 하는지, 나를 많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손가락을 하나 잘라주는 것은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그 손으로 악수의 손을 내미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운 것입니다. 왜 사랑하니까.
화요일 날은 제가 광주로 집회를 갔습니다. 목사님들이 많이 모이셔서 세미나를 하고 비행기를 타고 올라오면서 가만히 생각을 했습니다. 저도 인간인데 어떤 사람은 사랑이 많이 가는 사람이 있고 덜 가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사랑하면 없는 건수라도 만들어서 밥이라도 한번 먹고 싶고 여러분들이 마음에 안 내키고 마주치기 싫으면 꼭 그렇게 밥이라도 한번 먹어야 될 자리가 있는데도 어떻게 하든지 회피합니다. 그게 여러분들이나 저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제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여러분 가운데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정도는 아니지만 어째든 나를 힘들게 한다. 그런 사람들이 직원들이나 교역자들이나 일꾼들이나 없겠습니까. 있겠지. 그 중에 몇 사람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한번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아봤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진짜 안 찾아집니다. 발견이 잘 안됩니다. 그래도 한번 머리를 싸매고 한번 발견해보려고 하는데 그때 그런 노력 속에서 중요한 교훈을 하나 얻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나도 사랑하는 사람은 이상하게 결점을 발견하려고 해도 안 되고 장점을 발견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툭툭 튀어나옵니다. 그런데 내가 마음에 내키지 않은 사람은 발견하려고 애를 써도 장점이 잘 발견이 안 되고 장점은 잘 보입니다. 그런데 몇 사람에게 찾아냈습니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세 가지씩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묵상을 하면서 기도를 하니까 진짜 그 사람이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우리에게는 끊임없는 이 시각교정이 필요하구나. 왜냐하면 보는 눈은 사랑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음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잘못되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고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 시간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오늘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꼭 담임목사의 뜻을 받들어서 여러분들이 실천을 하겠다고 아멘을 하면 내가 계속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 두겠습니다. 그럼 하겠습니까? 아니 어려운 일이 아니라 아주 쉬운 일입니다. 하겠습니까? 네. 세 사람씩 사람을 정해. 그래서 그 사람에게서 생각을 많이 해서 그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세 가지를 적어 그래서 이번 주에 터키, 그리스를 갖다 올 때까지 문자 메시지를 보내십시오. 세 사람에게, 그러면 받은 사람은 그것을 받고 다시 세 사람에게 보내십시오. 그러면 내가 3월 1일 날 와서 검사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아니 해보십시오. 내가 해봐서 하는 이야기인데 어떤 사람을 정해놓고 그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찾아보면 내가 예전에는 도저히 발견하지 못했던 그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이 보입니다. 사랑은 무엇인가 하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희생이 들어갑니다.
일본에 가가와도요이코 라고 하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사창가에 있는 창녀들, 포주들, 마약 중독자들 이런 인간쓰레기가 다 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사실은 잘 받아들이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선교의 성과가 미미합니다. 어떤 기자가 물었습니다. 목사님, 그 불량배들, 그리고 몸을 팔아서 먹고 사는 창녀들, 그 업을 포기할 수 없는 포주들 이런 사람들에게까지 내려가서 학대를 받고 때로는 두들겨 맞으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주시는데 무슨 효과가 있습니까? 그랬더니 가아와 도요이코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을 끝까지 기다려주는 것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또 있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게 사랑입니다. 기다려주는 것, 그게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종류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 죽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는 별로 성화가 안 됩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자기를 너무 실망시키고 아프게 할 때까지 그를 사랑함으로서 성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을 늘 사랑하기만 하는 사람들, 조금도 여러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해주는 적이 없는 사람을 여러분들이 많이 헌신하고 희생해도 그렇게 성화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자식을 길러 어떤 때는 이 자식이 말을 듣는데 어떤 때는 안 듣습니다. 어떤 때는 가슴에 그렇게 못을 박고 아프게 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자식을 포기하고 싶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그 아이를 용서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가 하면 자기는 용서하지 말아야 하고 자기는 미워해야 합니다. 이 아이를 사랑으로 살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가 그 사랑 속에서 죽어야 합니다. 이런 것을 통해서 오히려 부모인 우리가 성화되어갑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희생이 뒤따릅니다. 이런 사랑을 온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런 사랑을 나누면서 살기를 원하셔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죄 때문에 모든 인간들이 이기적인 사람으로 돌아서서 이제 이런 종류의 사랑은 완전히 낯선 사랑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기껏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아내나 남편, 그리고 가족 물론 그것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만 해도 굉장한 덕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뛰어넘어서 사랑을 아무리 해도 아무런 보상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심지어는 내가 많이 사랑해도 그것을 전혀 알아주지 못하고 나에게 끊임없이 못을 박고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구해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외에는 다른 곳에서는 거의 발견될 수가 없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랑을 가지고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붙어있는 몸인 교회가 세상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이 세상에 나아갈 때 그들을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 심지어는 자신을 핍박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조차도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어떤 보상을 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자체가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을 그냥 사랑해주는 것입니다. 때로는 핍박과 고난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고통을 받는 자신을 염려하기보다는 자신에게 고통을 줌으로서 심판을 받을지도 모르는 그들을 염려하면서 사랑해주는 이런 종류의 사랑이 아니면 망가진 이 세상을 고쳐질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여 세상으로 나아가서 그런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가게 되는데 그 삶의 모본을 누가 보여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그 삶에 그대로 복사판인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한 몸이 되어서 이 세상에 나아가서 그렇게 그들을 사랑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고 때로는 우리를 불사르게 내어주지만 그들이 우리의 사랑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궁극적인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그렇게 세상으로 나아가서 온전히 자기를 미워하고 오히려 자기를 원수처럼 여기는 사람들을 사랑해줄 수 있는 몸이 바로 이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여 세상으로 나아가서 그런 사랑으로 세상을 보듬어 안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지체들이 이 교회가 공동체 안에서 그 사랑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완성해 나아갈 때 이 세상의 지평에서 교회가 그런 사랑을 성취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 교회의 한 몸이 되었으면서 함께 접붙여진 지체들 가운데 어떤 지체를 깊이 미워하거나 아니면 다투고 불화하거나 심지어는 저 사람이 존재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나 그런 정도가 아니더라도 저 사람이 나와 함께 교회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붙어있는 것이 불편하다고 느끼는 이 모든 생각자체가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말할 수 없이 커다란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그런 미움과 불화의 원인이 옳고 그름에 대한 견해의 차이 때문에 그런 미움과 다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미움과 다툼이 없다고 할지라도 서로가 아름답게 보이고 그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마음을 갖지 않는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는 자기 사랑에 빠진 마음입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 때문에 그것이 동기가 되어서 누군가를 미워하고 누군가를 싫어하게 되었다면 옳고 그름에 대한 차이는 한쪽이 옳을 경우에 작은 덕밖에 세울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을 이유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커다란 범죄를 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얼굴에서 비추는 아름다운 은총의 빛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은 번듯하게 교회생활을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영혼에는 이미 하나님의 따사로운 은총의 햇살로 죄인인 나를 지극히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목 매이는 사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값없는 사랑. 이런 것들은 이미 느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고 자기에게 선을 행해주지 않는 사람들을 냉대하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 속에 물같이 녹아내리는 심령, 신령한 은혜의 말씀이 영혼의 빛을 가르고 들어오는 기이한 기쁨, 예배 중에서 지존하신 하나님을 뵙는 말할 수 없는 영혼의 감격과 뛰놂, 이런 것 없습니다.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뵈올 것이며” 여기에서 이 청결한 마음은 온전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 마음, 심지어 끔찍한 죄를 내 눈 앞에 지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죄는 미워하지만 그 사람을 향해서는 말할 수 없이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마음이 바로 청결한 마음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이 시간에 눈에 비늘이 모두 벗겨져서 사람을 미워하고 특별히 교회의 지체들 속에서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고 그 사람의 존재를 내 마음에 껄끄러운 존재로 생각하는 자체가 살인이나 간음, 이런 것보다도 더 큰 죄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볼 수만 있다면 아마 여러분들은 통곡하며 가슴을 찢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특별히 하나님께서 이 교회 안에서는 무제한의 용서와 조건이 없는 사랑을 나누도록 하나님이 부르신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것을 이 공동체 속에 들어오기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시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 무한히 용서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의 은혜와 그리고 값없이 한없이 제한 없이 베푸시는 그분의 은총을 받으면서 여러분들이 교회에 한 지체가 되어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기에 희생이 뒤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희생은 바로 자기 죽음의 희생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향한 사랑이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 죽음을 모두 싫어합니다. 그러니까 자기에게만 덕이 되는 사람들만 사랑하고 자기에게 선대해주는 사람들만 사랑하고 이렇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두 번째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이것을 통해서만 자기가 완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 처음부터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맨 처음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혐오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고 또 하나님을 향한 사랑 자체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애성인데 그것을 주셨기 때문에 이 사람이 하나님을 끊임없이 사랑하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도 사랑하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미워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죄가 들어오게 되고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런 가치판단이 다 틀려졌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해야지 되는데 지독히 미워하는 본성을 가진 존재로 태어나게 되었고 하나님이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는 이 중생과 회심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고쳐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할 때 그 회개가 무엇인가 하면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사랑했던 것에 대한 깊은 회개입니다.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의 일생은 하나님이 우리에 주신 애적 능력, 즉 사랑할 수 있도록 주신 그 능력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일에 바쳐지도록 힘써야 할 의무를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언젠가 서커스를 한번 본적이 있는데 14살 쯤 되어 보이는 여자앤데 이렇게 해서 뒤로 이렇게 고개를 넘겨서 이 얼굴이 무릎 사이로 나왔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몸이 활처럼 휘어서 머리가 다리 사이에 있어서 무르팍을 가지고 자기의 얼굴을 탁탁 치는 것입니다. 여러 명이 그렇게 서있습니다. 그게 무슨 착시현상을 일으키거나 마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뼈가 노골 노골하게 아이들에게 식초를 많이 먹인다고 합니다. 그리고 살인적으로 연습을 시킨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등학교 때 체력장 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이런데 올라가서 손 깊이 내리기라는 항목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해보면 고등학교 때니 배도 안 나왔는데 이게 발끝에까지 손이 안 갑니다. 몽둥이를 맞으면서 체력장 연습을 하게 되면 한 한달, 두 달 연습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고개를 숙이고 손을 쑥 내리면 이만큼까지 손이 내려갑니다. 그때까지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이게 뻣뻣하던 근육들이 늘어나는 통증이 시작됩니다. 몇 번을 내려 보내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며칠 연습하며 내려 보내면서 이 장단지에 있는 근육들이 전부다 다시 늘어나면서 몸이 유연해지기 시작합니다. 거기는 반드시 고통이 동반됩니다.
그러니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손을 잘라주는 것은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악수하도록 손을 한번 내미는 것보다 쉽습니다. 훨씬 쉽습니다. 우리는 항상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와 원수 맺거나 나와 상하여 감정이 틀어진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와서 잘못했다고 딱 한마디만 해라. 그러면 내가 네가 나를 위해 봉사한 것보다 더 많이 봉사해줄 수 있다. 네가 나에게 100원을 도와주었으면 나는 천만 원을 도와줄 수 있고 네가 나를 위해서 조금 불편했다면 나는 너를 위해 장기를 떼어줄 수 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사랑에 마음을 가지고 먼저 손을 내미는 그것보다 다 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가 안 죽어도 됩니다. 다 쉬운 일입니다. 문제는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 자기가 도저히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을 향해서 아무런 목적도 없이 주님이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생명을 모두 버리시고 멸시와 욕을 당하시고 그래서 사랑의 모본을 보이신 그분이 나에게 그렇게 간절히 부탁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향하여 사랑의 손을 내밀 때 그 상급이 자기를 사랑한 사람을 위해서 큰 제물을 허비한 것보다 더 큰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게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성화의 길을 간다고 많이 애를 씁니다. 그런데 여러분, 골방에 흐느끼는 기도, 말씀에 집중하는 단정한 태도,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봉사하려고 하는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성화에 진전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죽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신자가 하나님을 향해서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 누구도 나는 추호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은 여러분들 가운데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내 안에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모두 진짜 그 사랑이 아닙니다. 어떤 한순간에 그럴 때도 있습니다. 저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목회를 하다가 속이 상하고 너무 힘들면 그냥 그만두고 저기 선교지에 가서, 진짜 가난한 중국 오지에 가서 얼마를 살든지 간에 아낌없이 다 나누어주고 그리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다가 죽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감상에 그칠 경우가 많습니다. 어디서든지 사랑은 자기가 아닌 다른 물질들을 통해서 완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철저히 포기하는 자기희생을 통해서 완성이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 사랑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사랑은 골방에서 흐르는 눈물, 말씀을 듣는 가운데 깨닫는 기쁨, 사람들이 나의 삶을 보고 존경한다는 평판 이런 것에 의해서 확증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 안에 정말 까리따스의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는 공동생활의 지평 속에서 나타내 보여줍니다. 그가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고 그가 아무리 진리를 많이 깨달아서 현자의 혀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삶을 가까이 보는 가족이 그에게서 사랑을 느낄 수 없으면 그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 속에서 그 사람이 공동체적인 차원에서만 입증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먼저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그 순간부터 여러분들이 배워야하는 것은 자기포기의 길입니다. 여러분들은 절대로 이제 혼자가 아닙니다. 떨어질 때도 여러분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모두 한 공동체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 속에서 자기를 포기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나는 너무나 하고 싶은데 저 지체의 유익을 위해서 나는 너무나 싫은데 저 지체가 받을 유익을 위해서 내가 그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어떤 가치도 부여하지 않고 자기를 다만 용서받은 죄인으로 여기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서 죽으시고 그 피로 자기를 살리신 것이 바로 이렇게 자기를 깨트려서 남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집 팔아서 건축헌금 내고 분에 넘치는 엄청난 선교헌금을 하고 누구도 잘할 줄 모르는 엄청난 일을 하는 그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여러분이 가서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속에서 미워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여러분들이 자기를 깨트리지 않고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찾아가서 사실은 내가 당신을 많이 미워했고 그리고 마음속으로 당신이 없었더라면 하고 생각할 때도 많이 있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의 몸인데 따라서 당신은 내 몸인데 내가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당신에게 용서를 빌어야 할 죄인입니다. 나를 용서해주십시오. 이것보다는 잡 팔아서 헌금하는 게 쉽다는 것입니다. 왜 집 파는 것은 자기가 안 죽어도 됩니다. 그런데 아직 자기에게 찾아와서 용서도 빌지 않은 지체들에게 가서 차라리 내가 손해를 보고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더라도 지체들은 건강하고, 나의 명예는 더럽혀지고 부끄러움을 당해도 교회의 명예는 보전되고, 내가 깨어지고 찢어지더라도 교회는 상하지 않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아니면 그 일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사랑은 사람에게서 멈추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니면 그런 식의 자기희생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다행이 가서 정말 내가 당신을 미워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이렇게 지내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나를 용서해주십시오. 빌었는데 그 사람이 무릎을 더 꿇으면서 아닙니다. 형님, 제가 더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펑펑 울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이 자식이 그것을 이제 알았어. 이럴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용서를 빌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여러분 매일 기도하실 것입니다. 주님, 우리가 예수의 고난을 받게 해주시고 우리가 주님 위해서 짐을 지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니 우리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게 해주십시오. 거기부터 시작하십시오. 왜냐하면 이 세상 어디에 가도 자기를 죽이지 않고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나서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말씀하십니다. 말로만 주님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자기 죽음 없는 그 처절한 고난의 길을 원하지 않으시고 피 흘리는 길 아니어도, 전 재산을 바치는 길이 아니어도, 신학교 가겠다고 서원하는 길이 아니라도, 생명 버리는 길 아니라도 자기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지체, 그들을 용서하고 그래서 그것을 풀어서 그를 자유롭게 해주는 그것입니다. 교회는 그러니까 아주 신비스러운 곳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히포에서 수도원을 할 때 소박한 식탁으로 유명했는데 수도사들이 모두 가서 동역자들과 함께 식탁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아주 소박한 반찬으로 밥을 먹습니다. 그때 그 탁자 식탁 바로 옆에는 테이블마다 표어가 하나씩 붙어있습니다. ‘여기에 없는 사람을 나쁘게 말하지 말거라.’ 그러면서 서로를 위해서 십자가를 져주는 것입니다. 저희 결점과 단점 때문에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고 저런 결점과 단점이 있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을 보내주셔서 저 결점과 단점을 고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저 결점과 단점을 부러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 결점과 단점을 보충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 그래서 형제의 모자라는 부분 때문에 그 속에서 자기 소명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헌신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들어온 첫 순간부터 자기를 찢어 지체의 유익을 주고 그리고 용납할 수 없는 형제들을 용납하면서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께 어떻게 용납된 죄인인지를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철저한 자기 죽음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이 세상을 갈수 있는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그곳에 사랑을, 멸시와 천대가 있는 그곳에서 기쁘게 십자가를 지고 존귀와 영광은 그분께 돌려드리고 자신은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그런 지순의 사랑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의 목자로서 그대들 모두가 나의 손가락과 같은 자녀들입니다. 부모의 가장 큰 기쁨이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자녀들이 서로를 희생해서 동기간들을 이롭게 하고 동기간의 결점과 그리고 과오를 볼 때 자기가 그것들을 만회하게 해주는 희생의 제물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서로를 섬길 때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그대로 실천하기 어려울 때 많지만 가슴에 늘 새겨야 합니다. 13년을 여러분과 함께 이 길을 걸어오면서 깨달은 작은 깨달음이 그것입니다. 나는 모욕을 당해도 주님의 교회는 영광스러워야 하고 내가 상처를 다 받아도 주님의 교회는 아프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치욕거리가 되어도 지체들은 성도로서 명예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보호해주어야 합니다. 그때 많은 아픔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아직 우리가 많이 살아있기 때문에 많은 아픔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입술을 깨물고 그렇게 자기희생을 통해서 당하는 아픔을 하나님이 당신의 가슴에 눈물로 다 새겨놓으십니다. 아마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정말 상 받는 사람들은 큰 교회를 지은 목회자, 그리고 교회역사에 길이 남는 위대한 일을 한 돈 많은 성도들이 아니라 이렇게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며 자기를 포기하고 십자가의 죽으신 주님을 본받아서 자기를 무가치하게 여기고 지체들을 세우고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케 한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더 많은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에이즈라고 하는 것은 후천성 면역 결핍증입니다. 이것은 그 병 자체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면역의 체계가 모두 붕괴되고 면역력이 사라집니다. 그럼 작은 병 하나에 걸려도 낫지를 않습니다. 비근한 예로 에이즈 걸린 사람들은 걸어가다 돌부리에 치여서 못에 찔려서 무릎에 상처가 나면 그것 때문에 죽습니다. 온 몸이 그것을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그대로 독이 퍼져가면서 죽습니다.
IV. 결론과 적용
이 세상에 있는 지상 교회는 항상 교회에 상처를 준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한때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지체들이 이런 사랑으로 온전히 무장되어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몸인 한 곳이 못에 찔립니다. 피가 철철 납니다. 그래도 주위에 있는 세포가 건강하기 때문에 몸 전체에 퍼지지 않고 그 다음날 멎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많은 백혈구들이 균과 더불어 싸워서 거기서 죽어가는 것을 아십니까?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잘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세상에서도 통하지 않는 경우를 교회에 갖다 들이대면서 자기 유익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에 그 사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백혈구처럼 희생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것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많은 은혜를 주시고 남이 알지 못하는 세계를 보게 하시고 남이 듣지 못하는 말을 듣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뜨겁게 사랑함으로 자신 안에 있는 지순의 사랑을 공동체의 집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공동체의 지평 속에서 입증하면서 매일매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무슨 소원이 있겠습니까? 그대들 앞에 있는 이 목회자는 유명한 목자가 되는 꿈도 없고 우리나라의 최대의 교회를 만드는 꿈도 없습니다. 정말 이 땅에 태어나서 눈감기 전에 마지막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정말 주님의 몸에 아름다움을 이룬 그 교회, 참으로 교회가 이 세상에서 그 추루한 인간들이 모인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 사랑으로 아름다운 길을 보여줄 수 있는 것, 그것이 제가 여러분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같은 마음일 것이고 또 주님이 우리의 교회를 바라보실 때 마음도 동일할 것입니다. 이렇게 설교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으로 여러분들이 사랑할 수 없는 지체에게 찾아가서 내밀어지지 않은 손을 내밀고 그리고 떨어지지 않은 입술을 열어 용서를 빌고 사랑을 말하고 그래서 우리는 깨트려져도 주님의 교회는 세워지고 이런 원리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