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
2023년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설교기간 | 2023 01월 16일 – 01월 18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3년 05월 31일
목 차
1. 사랑하는 자 안에 계심(요일 4:11-13) 2023.01.16.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6
2.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요일 4:14-16) 2023.01.17.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0
3. 두려움이 없는 사랑(요일 4:17-21) 2023.01.18.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35
<설교 프레임>
사랑하는 자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1 2023.1.16 새해말씀사경회 첫째날
< 사랑하는 자 안에 계심 >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 …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4:11-13)
I. 본문해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다. 화목제물로 바쳐지셨다.
이는 범죄로 인하여 불화(不和)하게 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다시 화목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 앞에 돌이길 수 없는 죄를 지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값을 치르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대속제물로 자신을 바쳐 하나님은 진노를 푸시고 다시 화목하게 해주셨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까지 해서 우리와 화목(和睦)하고자 하셨을까? 우리와 화목하지 못한 것이 그분께 무슨 큰 손해라도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다. 하나님 떠나 허무(虛無)와 고통 속에서 사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 사랑으로 모든 인류를 서로 사랑하며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II. 사랑하는 자 안에 계심
A. 먼저 사랑하심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love)이시다. 세상을 창조하신 동기도 사랑이다.
인간을 창조하신 것도 사랑으로 교제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당신과 소통할 수 있는 당신의 형상(形狀)을 주셨다.
최초의 조상은 창조된 세상을 보며 하나님의 지혜(智慧)와 능력에 감탄하며 그 사랑 안에서 교제하였다.
그러나 타락한 후에는 망각의 강물을 마신 것처럼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그 후 인류는 이성(理性)으로 만물의 이치는 알아도, 그것들을 내신 하나님은 잊었다. 사랑의 근원이신 분을 떠나 사랑하게 되었다.
타락했어도 사랑의 크기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사랑의 방향이 자기(自己)를 향하도록 바뀌었다.
인간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알고 사랑함으로써만 행복(幸福)하도록 창조되었는데, 그 행복을 하나님 밖에서 찾고자 했다.
그리하여 인간은 사랑할수록 불행하게 되었으니, 그릇된 사랑으로 불행해지는 운명 같은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여전히 하나님 사랑에 대한 기억(記憶)은 가지고 있었으나, 너무나 희미해서 그것만으로는 스스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인간이 타락하자마자 죄(罪)는 세상에 쓰나미처럼 물밀듯이 들어왔고, 아담에게 경고하신대로 형벌이 시작되었다. 고통과 죽음이었다.
불멸하도록 창조된 인간의 육체는 필멸(必滅)하게 되었고, 영혼은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렸다.
불행 속에서 느끼는 허무란 “모든 것이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져 매우 허전하고 쓸쓸함”이다. 자기가 어디로부터 왔고, 어디를 향해가고 있는지를 모르는 데서 오는 외톨이가 된 감정이다.
인간은 그 허무감를 잊기 위해 무엇이라도 사랑하고자 했으나, 사랑의 원천인 하나님을 버렸는데 어디서 참으로 행복하게 할 사랑을 찾겠는가?
인간은 타락했어도 하나님의 사랑은 계속되었다. 육체의 죽음을 유보해 주시고, 메시아(Messiah)를 약속하셨다.
그 후로 구약시대에 선택된 조상(祖上)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많은 자비와 선(善)을 베푸셨다. 그러나 그것들은 앞으로 나타날 더 크고 위대한 사랑의 그림자였다.
그 사랑은 마치 죄악으로 어두워진 밤하늘에 불꽃과 같은 것이었으니,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었다.
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절절한 지를 보여준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하나님 사랑의 나타남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이었다. 그리고 그 극치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었다.
이 사랑을 받아서 안 사람이 신자(信者)다. 그래서 그 사랑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살지 않고는 결코 행복할 수 없게끔 새롭게 태어난 피조물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하나님이 먼저 사랑을 보여주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 죽음으로써 보여주셨다.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입증하신 것이다.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그 안에서 창조의 목적(目的)을 따라 살게 하셨다.
신자의 인생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을 이전보다 더욱 사랑하는 것이다.
B. 사랑하는 자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은, 그 사랑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행복(幸福)하게 살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 사랑 안에 살아감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행복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사물에는 육체(肉體)의 눈으로 보는 것이 있고, 마음의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이 있다. 하나님은 볼 수 없다.
그러나 그 사랑이 우리들의 사귐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는 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 4:12)
육신(肉身)의 눈으로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하자면,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파악되지 않는 분이시다.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갈 때, 사람들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다.(요일4:12)
그것으로써 육신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음(heart)의 눈으로 보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시간의 본질과 있음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그 사랑은 우리 영혼(靈魂) 안에 심겨졌다. 그러나 그 사랑은 우리의 의지를 통하여 행사된다.
그래서 성경은 가정법을 사용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요일 4:12上)
이 서신서는 에베소에서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말하는“우리”가 누구인가? 교회(敎會)라는 공동체가 아닌가?
따라서 이것은 신자 각 사람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러나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다.
교회 공동체의 교제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첫 열매이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이 당시 영지주의자 같은 이단(異端)으로 뜯겨져 나가는 교회의 지체들을 보면서, 교회가 참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발견한 것이다.
그 사랑은 진리(眞理)와 나뉠 수 없었다. 그런데 예수를 더 잘 믿겠다고 하면서 그들은 교회를 찢고 갈랐다. 그러나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 그들은 진리도 잃어버렸다.
신자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거하신다. 이 말씀을 뒤집어 해석하면 이런 뜻이 되지 않는가? “너희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너희 안에 없을 것이다”라는 뜻이 된다.
형제들을 사랑하는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임재와 친밀함이 충만해진다.
만약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형제(兄弟)를 미워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친밀한 사랑 속에 살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교회(敎會)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 사랑을 보여줄 수 없다.
그러면 신자는 어떻게 그 사랑(love)으로 충만하게 되는가? 그것은 성령의 은혜다.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은혜의 열매가 사랑이다.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마땅히 해야 할 선한 의무를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다. 성령(聖靈)을 통해서 주어진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4:13)
믿지 않고는 사랑을 알 수 없다. 참 믿음(faith)이 참 사랑을 낳는다. 하나님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던 인간이 어떻게 믿음을 갖게 되는가?
성령이시다. 믿음도 사랑도 성령의 역사로 주어진다.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이심이 믿어지게 하신다.
구원받을 때, 한번 우리 안에 오신 성령(聖靈)은 영원히 떠나지 않으신다.
그러나 어떤 때는 충만하게 계시고, 어떤 때는 미약하게 계신다. 이는 성령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느냐에 달렸다.
성령 충만은 신자의 성화(聖化)에 비례한다. 성화된 만큼 사랑하게 된다.
은혜(恩惠)가 사라지면 사랑의 기쁨도 사라지고, 추악한 자기 사랑이 드러난다. 우리가 끊임없이 죄죽임과 순종을 실천해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아들을 화목제물(和睦祭物)로 주심은 항상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 안에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 사랑의 확증으로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구약시대에 아무도 본적이 없던 그 찬란한 사랑을 보게 하셨으니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 …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 5:9-1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랑하며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할 수 있다. 존 칼빈(J.Calvin)은 말했다. “구원의 기쁨이야말로 모든 선한 삶의 근원적 동기다.”
III. 적용과 결론
신자의 삶이 무엇인가? 십자가의 현재적인 감격 속에 사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믿는 순간에 우리에게 성령(聖靈)을 주셨고, 대지에 살던 우리에게 하늘을 살게 하셨다. 성령을 통해 은혜를 주셨다.
그 은혜는 마치 샘물과 같았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욱 큰 물 되어 솟아난다.
자신의 마음을 적시고 삶을 거룩하게 할 뿐 아니라, 온 이웃을 두루 적셔 그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자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2 2023.1.17 새해말씀사경회 둘째날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 >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4-16)
I. 본문해설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교회(敎會)에 출석하는 회원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그 문화에 익숙해지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예수를 믿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다. 그것은 믿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는 영적 생명(生命)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또한 그 생명으로 죽은 영혼이었을 때는 살 수 없었던 삶을 사는 것이다.
그 생명은 아담이 범죄함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다. 하나님의 생명이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II.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
A. 예수를 믿음
1. 구주로 보내심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이 세상의 유일한 구주로 보내셨음을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 외에 또 다른 구원의 길이 없음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리고 비참하게 되었다. 인간은 다양한 방법과 수단으로 인생의 비참과 고통에서 벗어나 보고자 애썼다.
인류 역사의 종교나 철학, 도덕이나 예술, 학문과 정치 같은 것에서 자기 존재의 근원과 인생의 의미(意味)를 찾고자 하였다.
타락한 인간은 불행하기는 했지만, 무엇으로부터 구원(救援)받아야할지 몰랐기 때문에 그런 것에서 구원의 길을 찾았다.
심지어 극단적인 쾌락(快樂)조차도 그들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몸부림이었으니, 그 추구가 집요할수록 그들이 느끼는 허무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준다.
2. 구주를 보았음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아버지가 보내신 아들을 믿은 사람들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요일4:14)
여기서 “보았다”는 것은 단지 육신의 눈으로 본 것만이 아니라, 마음으로써 본 것이니,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효과였다.
신약성경에는 “보고 믿었다”라는 말과 “믿어서 보았다”는 표현(表現)이 둘 다 나온다.
어떤 경우도 “보았다”라는 말은 육신(肉身)의 눈으로 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죽은 영혼으로 어두워진 마음의 눈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보았고”는 그리스도에 대한 취소될 수 없는 앎을 의미한다. 보았으니 보지 못했던 때와는 다른 삶을 살지 않을 수 없다.
3. 성자를 시인함
그리스도인에게는 반드시 신앙고백(信仰告白)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온 존재를 걸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 고백은 사랑(love)의 고백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일 4:15)
당시 문맥에서 볼 때, 이 고백은 개인적인 고백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특히 교회 공동체(共同體) 앞에서 진심으로 자원하는 마음의 고백을 가리킨다.
핍박이 심하던 그 당시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공적으로 고백하는 것은 때로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출세의 기회를 잃는 것이고, 친족들로부터 끊어지거나, 재산을 빼앗기며, 때로는 생명의 위협까지 무릅써야 하는 일이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얼마나 진지한 것인지도 보여준다.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준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告白)하는 것은 이제껏 살아오던 삶에 기독교 문화를 보태는 것이 아니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관과 인생관을 가지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다. 더 큰 비밀이 있다. 그것은 그 사람 바깥이 아니라 영혼(靈魂)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그에게 부어지는 것이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과 함께 영적 생명이 부어졌다.
죽은 영혼이 다시 살아나게 하셨는데, 이를 “하나님의 생명”, “예수의 생명”, 혹은 “영생(永生)”이라고 불렀다.
이 생명은 영혼의 영원한 생명이었으니, 인간의 타락과 함께 이것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 생명을 잃어버린 채 살았기에 하나님을 대적하고 이웃에게 악(惡)을 행하며 자연과 불화하였던 것이다.
당신 안에 영생이 있는가? 그 생명은 신자답게 살게 하기에 충분한가?
B. 사랑에 거함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그 신앙(信仰)을 공중 앞에서 고백해야 한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구원받은 그들에게는 죄의 용서뿐만 아니라 성령의 생명을 함께 하게 하셨다. 이를 “영원한 생명”이라고 부르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도 부른다.
생명은 자신의 존재답게 지탱하게 하는 힘을 가리키고, 사랑은 타인과의 관계를 맺고 심화하는 힘을 가리킨다.
1. 하나님은 사랑이심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love)이시니,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고 우리 모두가 사랑이신 당신 안에서 모든 신령하고 좋은 것들을 누리게 하신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므로 사람이 그 사랑을 받지 않고는 그분과 연합할 수 없고, 그 하나님 사랑의 연합(聯合) 없이는 결코 무엇으로도 행복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가장 큰 의무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으로 정하신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2. 사랑 안에 거하는 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은혜로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심겨진 자다. 그 사랑이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그들을 결코 떠나지 아니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불변하나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은 가변적이다. 죄를 죽이고 은혜가 살아서 성령 충만하면 사랑도 충만해진다. 예수의 생명도 충만해진다. 그 사람이 사랑 안에 거하는 자다.
“… 하나님은 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下)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 하나님도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삶이다.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생각과 정서와 의지가 일치하는 기쁨의 삶을 살게 하시려고 구원하신 것이다. 거기에 우리의 행복이 있다.
현대인의 비참(悲慘)은 물질이나 기술의 부족이 아니라, 참된 사랑이 없는 것이다.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살지 못하는 것이다.
허무와 어깨동무한 불행이 깡패처럼 인간이 행복(幸福)해질 수 있는 길목을 막아선다. 인간은 더욱 비참해진다. 세상 물질의 풍요로움이 무엇을 도와줄 수 있겠는가?
밖으로는 지상자원의 결핍 때문에, 안으로 하늘자원의 결핍 때문에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필요하다.
신자의 가장 큰 의무는 구원과 함께 이미 받은 사랑(love)을 자신 안에서 더욱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풍성한 사랑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사는 것이 우리가 누릴 행복(幸福)이다. 그런 신자의 마음 안에 하나님은 즐거이 거하신다.
III.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자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3 2023.1.18 새해말씀사경회 셋째날
< 두려움이 없는 사랑 >
“이로써 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 … 보는 바 그 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17-21)
I. 본문해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生命)이 심겨지는 것이며, 그 생명은 관계 속에서 사랑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다.
믿음의 열매는 사랑이다. 신자의 본분(本分)은 그 사랑 안에 거할 뿐 아니라, 그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는 것이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 1:9)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지 교회(敎會)에 소속되는 것이 아니다. 불신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관과 인생관을 갖는 것이다.
그 관점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영적 생명은 그것을 위해 주신 것이다.
비록 영혼에 생명(生命)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다른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쉽지 않다.
더욱이 보이는 세상 속에 살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또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설득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II. 두려움이 없는 사랑
A. 두려움이 없음
1. 사랑을 온전히 이룸
신자는 그 모든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담대할 수 있다.
사랑 때문이다. 온전한 사랑을 이룰수록 더욱 담대해진다.
이는 우리가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
예수 그리스도는 칼 한 자루 휴대하지 않으셨다. 아무 세상 권력도 없으셨다. 그러나 담대하셨으니,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2. 심판 날에 담대함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 우리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무 근거도 없이 용기를 내라고만 말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허무(虛無)한 인간에게 닥쳐오는 운명에 눈 감은 만용이다.
성경은 진정한 용기가 사랑에서 온다고 말한다. 그 사랑 때문에 지금 여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에게는 세상(世上)에兄弟서 잃어버릴까봐 두려운 것이 없다. 그가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밖에 없는데, 누구도 그분을 빼앗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 끝날에 임할 심판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심판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분을 사랑하기에 심판받을 두려움이 없다. 그것이 사랑의 힘이다.
엄위하신 하나님이 온 세상을 심판(審判)하시는 것이 두렵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죽음을 앞 둔 때에도 그렇게 두렵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이 아무 잘못 없이 충분히 의롭게 살았기 때문인가? 아니다. 자기를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3. 두려움의 형벌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에게 늘 따라다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두려움이다. 그것은 크기와 정도에 따라 세상 염려와 근심, 걱정과 불안으로 나타난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공간 안에 있고 그것들은 시간이 흘려가면서 사라진다.
“공간은 우리가 사랑할 것을 제시하나 시간은 그것을 빼앗아 가버린다.”
A. Augustinus, De Vera Religione, 35. 65
하나님의 사랑(love)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의 날의 엄습하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한 현재의 두려움도 이기지 못한다.
일찍이 예수께서 예루살렘이 심판받는 날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백성들에게 임할 두려움에 대해 예언하셨다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눅 23:29~30)
B. 형제를 사랑함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십자가 사랑으로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화목제물로 자신을 바치심으로 그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하나님 사랑에 사랑으로 반응하여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幸福)을 누릴 수 있다.
1. 신자의 거짓말
당시에도 거짓말을 하는 신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실천적인 무신론자(無神論者)들이었다.
입으로는 하나님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삶으로는 하나님 사랑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한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곧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람을 사랑한다. 그 둘은 결코 나뉘지 않는다.
그것은 믿음에서도 사실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은 같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분의 말씀을 믿는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 자신으로서 믿을 뿐 아니라 그분이 믿으라고 하신 말씀을 또한 믿는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말씀에 에 대한 믿음은 분리되지 않는다.
사람을 향한 사랑도 그러하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사람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a.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과 의지의 일치하는 것이다.
b. 형제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때문이다. 그 형상은 모든 피조물들 중 가장 하나님을 닮은 것으로서 영적이고 정신적인 특성이다. 인 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 자신에 대한 사 랑은 나뉘지 않는다.
2. 하나님을 보는 삶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불신자(不信者)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신령한 눈을 갖는다는 것이다.
오늘날은 기독교 신앙에서 영적(靈的) 특성이 무시되고 있다. 사람들은 점점 감각할 수 있는 것만 믿으려고 한다.
그래서 오직 이성에만 의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이 맹목적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참된 것을 보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연적인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마음의 눈으로 본다. 믿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는 신령한 것을 육신(肉身)의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더욱 믿게 된 것이다.
3. 형제를 사랑함
여기에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라. 그 사람이 형제(兄弟)를 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랑 안에 하나님 말고 도대체 누가 계시겠는가?
“… 보는 바 그 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下)
이는 형제를 사랑해야 비로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또한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니 형제 먼저 사랑하고 나서 그 다음에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은 더욱 아니다.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이 나뉠 수 없이 하나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둘 중 하나가 제외된 사랑은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사랑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생애를 생각해보라. 한 사랑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셨다.
III. 적용과 결론
1. 사랑하는 자 안에 계심
사랑하는 자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1 (2023.01.16.새해말씀사경회 저녁)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요일 4:11-13)
녹취자: 장미연
Ⅰ. 본문해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화목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이는 범죄를 인하여 불화하게 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다시 화목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값을 치르시고 그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대속제물로 자기를 바쳐 하나님의 진노를 푸시고 다시 우리와 화목하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까지 하면서 우리와 화목 하고자 하셨을까요? 우리와 화목하지 못한 것이 그 분께 무슨 큰 손해라도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단 하나 하나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인생의 목적도 모른 채 허무하게 고통 속에서 사는 우리를 차마 두고 보실 수가 없어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아는 사람들을 하나의 교회로 모으시고 그 교회를 통해 앞으로 이루어질 사회의 모판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류를 그들처럼 서로 사랑하며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Ⅱ. 사랑하는 자 안에 계심
A. 먼저 사랑하심
오늘 사랑의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 안에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우리가 먼저 시작한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이십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것도 당신 안에 넘치는 사랑 때문에 당신과 교제함으로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사람을 창조하셨고 당신과 소통할 수 있는 당신의 형상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최초의 조상은 창조된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의 지혜에 감탄했을 것입니다. ‘어쩜 이런 놀라운 능력으로 이 세계를 창조하셨을까?’ 감탄하며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행복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완전하게 창조하셨지만 안전하지는 않았습니다. 언제든지 스스로 죄를 택하면 악에 빠질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맡겨두셨으니 이것은 범죄 할 때 인간은 누구의 도움으로 범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타락하도록 지으신 것입니다. 타락한 후의 인간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런 자유의지를 주지 않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반대로 그 자유의지가 없었더라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자기 마음껏 가꾸며 우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분의 이름을 높이면서 살 수 있는 능력도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악을 택했고 타락한 후에는 망각의 강물을 마신 것처럼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그 후 인류는 이성으로써는 만물의 이치를 알아도 그것을 내신 하나님은 잊었습니다.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타락했다고 해서 사랑의 크기가 줄어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던 사랑. 그래서 자신에게서 시작되어 자신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올라가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다시 내려오면서 모든 만물을 그 질서대로 사랑하고 모든 이웃을 그 질서대로 사랑함으로써 하나님 안에 있었던 그 행복한 상태는 바뀌었습니다. 이 사랑이 하늘을 향하지 않고 이제 자신을 향하게 되고 자신이 온 우주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자기 발아래 두고 모든 만물을 자기 사랑에 본위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창조될 때 하나님을 기억하고 알고 사랑함으로써만 행복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행복을 하나님 바깥에서 찾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불행하게 되었으니 그릇된 사랑으로 불행해지는 운명과 같은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아무리 부인해도 결국은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는 존재입니다. 설령 내가 자식을 위해서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할지라도 자기가 그게 좋으니까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우리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과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 안에서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큰 사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행해진 모든 사람은 모든 불행해지려고 하다가 불행해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행복하기 위해서 애를 썼는데 그 행복이 잘못된 길이었기 때문에 행복에 대한 추구가 강하면 강할수록 불행의 정도가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결국 인간은 그 사랑을 어떻게 올바르게 해야 할지를 몰랐기 때문에 인간은 불행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의 스토리를 보면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 두 왕국으로 대치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 세상 나라가 모두 무너지고 하나님의 나라로 완성되는 것이 구속의 대 드라마의 완결판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이 죽고 다시 태어나 아무리 바뀌어도 여전히 세상 나라입니다. 그리고 신자가 태어나고 죽고 목회자가 바뀌고 선교 지도가 바뀌어도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이유는 각 사람 개체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나라는 질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사랑이라는 하나의 질서로 동심원을 그리며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는 아주 아름다운 질서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서로 피부색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생각하는 바가 다르고 살아온 배경이 달라도 하나는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모두 사랑하기 때문에 그 똑같은 물결 속에 하나의 파문을 그리면서 질서 정연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나라는 각자가 다 자기가 원을 그리려고 합니다. 비유하자면 하나님의 나라는 진심으로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는 잔잔하고 넓은 호수에 하나의 큰 돌멩이가 떨어져서 하나의 파문을 원으로 그리면서 호수 주변으로 퍼지는 것이고 세상 나라는 수많은 돌멩이를 우박 쏟듯이 쏟아놓은 것입니다. 수많은 동심원들이 그려지면서 서로 충돌하는 것이 세상 나라입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품으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에 이 영혼속에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희미해서 그것만으로는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타락하자마자 죄는 쓰나미처럼 물밀듯이 이 세상에 들어왔고 아담에게 경고하신 대로 형벌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과 고통이었습니다. 원래 인간은 영혼과 육체가 모두 불멸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육체는 필멸하는 존재가 되었고 영혼은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육체의 필멸과는 다른 의미에서 죽은 영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속에서 인간은 불행을 운명처럼 여기며 살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인류 최초의 조상이 낳은 자식은 인류 최초의 살인을 저질렀고 그 살인은 한 조상 안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에게 전가되면서 끊임없이 죽고 죽이는 끔찍한 살인과 불행을 만들어내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누가 누구를 죽일까요? 죽인 그 사람은 자기도 행복하기 위해서 그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죽인 것이고 죽은 그 사람도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 행복하고 싶어서 살고 싶어서 몸부림쳤던 것입니다.
저는 21살에 무신론자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섰습니다. 난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예수 믿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웃에게 봉사하려고 예수 믿지 않았습니다. 난 고상한 인격을 가지려고 예수 믿지 않았고 많은 사람을 섬겨서 하늘나라에서 상급 받으려고 예수 믿지 않았습니다. 난 행복 하려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 모두에게 묻습니다. 난 행복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여러분은 행복합니까? 나만이 이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가운데 회심하고 예수 믿은 이가 있다면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옳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예수 믿은 사람이 있습니까? 인류 평화를 위해서 예수 믿은 사람이 있습니까? 세계 선교의 꿈을 품고 예수를 믿은 사람이 있느냐 이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 신앙이 자라면서 갖게 된 비전입니다. 그전에는 모두 예수를 안 믿고 사는 것이 너무너무 불행하고 허무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입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한 행복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하나님 사랑함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요, 나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쉽게 풀어서 말하면 나를 그릇되게 사랑하는 것은 결국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나를 참되게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불행을 운명처럼 짊어진 인간은 할 수 없이 태어날 때부터 그 불행이 자신의 운명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의 처지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인간은 그 불행 속에서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그 불행의 가능성과 불행이 수없이 일어나는 이 죽음의 현실과 고통의 바다를 두 눈으로 직시하고는 맨정신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파스칼은 팡세에서 “사람들이 이 세상을 보면서 미치지 않는 이유는 이미 미쳤기 때문에 못 미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제정신을 가지고 인간의 운명을 들여다보면 너무 무섭고 공포스러워서 살 수가 없어야지 그게 정상적인 정신을 가진 상태의 인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이러한 인생의 심각한 불행의 위험을 보면서 고안해낸 방법이 있습니다. 자, 인간에게는 지금 이순간에도 수많은 불행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죽고 병들고 암에 걸리고 사고로 죽고 여기저기에서 화재가 나고 살인을 당하고 또 총에 맞아 죽고 전쟁 속에서 죽어가고 예상치 못했던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는데 그들 중 절반은 아침에, 오후에 자기가 죽을 줄도 모르고 나간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그런 일이 그 사람들에게는 일어났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왜 안 일어날 것이라고 믿습니까? 그것이 현실적입니까? 그것이 정말 우리에게 합당한 생각인지 한 번 물어보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고안해낸 방법이 더 이상 자신의 인생의 행과 불행,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한사람이 기차 철로 길에서 놀고 있습니다. 아직 놀이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저 멀리서 한 점이 보이면서 기적 소리를 울리며 큰 기차가 전속력으로 달려옵니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더 화투를 치면서 친구와 더 놀고 싶은 것입니다. 빨리 피해야 될 텐데 기차가 막 오는데 너무 무서우니까 눈을 가리고 ‘기차 없다’ 그러는 겁니다. 잠시 후 시간이 지나고 없어진 것은 기차가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그렇게 달려오는 기차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묻어 있습니다. 어떤 피는 이미 굳어서 엉겨져 버렸습니다. 얼마나 더 많은 피를 묻히며 불행이라는 열차가 달려가고 어디서 멎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게 인간의 처지입니다. 그런 불행 속에서 결국은 인생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니까 그다음에 하는 일은 무엇이냐 하면 끊임없이 정신을 분산시키고 위락에 빠져서 그 불행한 현실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허무를 느낍니다. 허무라는 것은 모든 것이 무가치하고 의미 없이 느껴져서 매우 허전하고 쓸쓸한 것이 허무입니다. 그 허무를 들여다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주를 보아도 무섭고 자기 인생의 미래를 생각해도 무섭고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인생의 허무함을 들여다보아도 너무 외롭고 힘든 것입니다. 자기가 어디로부터 왔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데서 오는 외톨이가 된 감정이 허무감입니다.
여러분들은 허무감이 없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은 전혀 허무함을 안 느낄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허무감을 느낍니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 허무감을 느끼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은혜 안에서 충만한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매일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이 여러분이 하고 있는 사역이 그 허무감을 없애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허무감을 잊기 위해서라도 무엇이라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버렸는데 어디서 참으로 행복하게 할 사랑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원래 우리의 창작품이 아닙니다. 모든 사랑이 자신이 만든 창작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그 사랑이 그 사람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그 채운 그 사랑이 샘물처럼 흘러서 또 다른 사람들에게로 흘러가고 그 사람을 채워서 그 사랑이 또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는 그것이 사랑입니다.
인간이 타락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계속되었습니다. 육체의 죽음을 유보해주셨습니다. 즉, 타락한 즉시 하나님은 죽이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살려두셨습니다. 그리고 후손을 끼치게 하셨습니다. 그 후손들이 다시 번성하면서 원래 인간들을 창조하신 목적을 이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죄에서 영원히 구원해주실 메시아를 약속해주셨습니다. 이 모두 하나님이 먼저 사랑해주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후 구약시대에 접어들며 선택된 조상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많은 자비와 선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앞으로 나타날 더 크고 위대한 사랑의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그 사랑은 마치 죄악으로 어두워진 밤하늘에 불꽃 같은 것이었으니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절절한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4장 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나타냄의 절정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랑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극치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이 십자가 아래서 뚝뚝 떨어지는 그 피에 온몸을 적시며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그 사랑 때문에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고백한 사람이고 이제 자신에게 남은 모든 것들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자기의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를 위한 것이라고 고백한 그 사람이 신자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고백이 없는 사람은 교인이 아닙니다. 그 사랑을 무엇 때문에 주셨을까요? 자기 아들의 옥체를 깨뜨리는 그 사랑을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주셨을까요? 그 사랑을 즐기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흘러와서 우리를 적셨고 적신 그 사랑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렇게 받은 사랑으로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상승하고 상승한 정신이 다시 모든 만물의 질서를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강하면서 모든 사물을 하나님 앞에 더욱 소중한 것은 더 많이 덜 소중한 것은 조금 그리고 아주 소중하지 않은 것은 전혀 사랑하지 않는 그런 사랑을 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그렇게 사는 것일까요? 그 대답을 해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구약시대는 선지자를 통해 말로 보여주셨지만 신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그 사랑의 질서대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당신의 온 생애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참된 삶의 도리라는 사실을 알고 그렇게 사랑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고는 결코 행복할 수 없게 태어난 피조물입니다.
11절을 읽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이 먼저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고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입증하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그 안에 창조 목적을 따라 살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이 충만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많이 사랑해주심으로 더 행복해지시거나 인간이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이 불행해지는 따위의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어떻게 완전하신 하나님이실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자기가 회심하고 나서 하나님의 그 사랑에 감격하면서 이런 반문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더러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까?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마치 큰 벌을 내리시기라도 하실 것처럼 위협하시면서까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물은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하나님 자신이 필요해서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창조하신 이 모든 인간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에 아니 불행과 허무한 인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당신을 사랑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미끄러졌을 때 주님이 우리를 징계하시고 때리시는 그 자체가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친자녀라고 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고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번뇌하고 있는 모든 인생의 괴로움. 그리고 잡다한 시름들, 그리고 우수사려와 근심. 마음을 가르고 찢고 지나가는 고통스러운 기억들 모두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질서가 여러분 속에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거스르기 때문에 끊임없는 시련과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증명해볼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윤동주 시인의 고백대로 행복한 사나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생애는 꽃길만 걸어가신 생애였습니까? 붉은 양탄자가 깔린 길을 금 신발 신고 비단옷을 입고 그렇게 걸어 다니신 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었지만 그분은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먹을 것이 모자라 배고프기도 하셨고 목마르기도 하셨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보며 눈물을 흘리시기도 하고 가슴 아파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행복한 분이셨습니다.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결핍과 고통 속에 사셨어도 그것이 행복을 없이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생각해볼 케이스가 있습니다. 사도들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눈이 열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의 역사와 신약의 역사를 이어가는 거기에 찬란한 빛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 빛을 통해서 구약 저 끝을 바라보고 그 빛을 통해서 신약 저 끝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 계획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도저히 그냥 잠잠하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외친 것이 “너희가 나무에 매달아 죽인 그 예수가 우리의 구세주이시니라” 하고 외쳤습니다. 그 결과 돌아온 것은 심한 몽둥이질과 모욕 투옥 그리고 끔찍한 고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너무 행복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그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핍박받는 것으로 인하여 영광으로 알고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지극한 기쁨 속에서 충만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들이 예수를 믿으면서 꿈꾸는 행복이 예수가 이 세상에서 누린 행복을 능가할 수는 없을 것 아닙니까? 능가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의미에서 신성모독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의 행복이 어디 있는지를 생각하고 찾아봐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떤 행복을 꿈꾸냐 하면 돈도 잘 벌고 몸도 매우 건강하고 육체도 매우 아름답고 아무리 먹어도 배도 안 나오고 살도 안 찌고 아무리 화장품을 안 발라도 얼굴이 꾸겨지지 않고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부러움을 사는 그런 종류의 행복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행복을 꿈꾸면서 예수를 믿는다면 다른 종교에 문을 두드려 보십시오. 기독교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아무리 훌륭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도 눈물 꼴짜기를 지납니다. 세상은 고통의 바다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가슴 아픈 사연을 안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말해서 50세가 될 때까지 우울증 걸린 사람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데 왜 우울해요? 기쁨이 충만하고 하면 되지. 그런데 지금은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무슨 생각이 드냐면 ‘평범한 사람들이구나’ 우울증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 특별한 사람들이구나. ‘예외적인 사람들이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럴 정도로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런 식의 행복을 꿈꾸는 것은 미신입니다. 그것은 현실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참된 행복은 우리가 다양한 삶의 상황을 겪습니다. 당연히 불행해질 길을 피하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많이 가르칩니다. 특히 잠언이 그렇습니다. 그걸 잘 지키면서 살면 불행을 덜 만납니다. 그런데 무지해서 길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다닙니다. 그래서 자의적으로 불행해지는 사람들이 대부분 아주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고 단정한 삶을 살면 덜 불행해집니다. 그런데 그도 아무 불행을 만나지 않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이 인생의 가는 모든 길들을 수고라고 했고 성도가 죽을 때는 모두 그를 환송했습니다. ‘인생의 수고가 끝날 때에 주님을 섬기다가 평안히 가리라.’ 모든 사람이 이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본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그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먼저 사랑해주신 그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행복한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사랑하는 자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자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화목 제물로 보내신 것은 그 사랑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삶으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고 그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행복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물에는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있고 마음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랑이 우리들의 사귐 속에서 이루어지게 하심으로 당신 자신을 사물을 보는 것 같은 방식이 아니라 느끼고 경험하는 방식으로 당신이 거기에 계시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12절을 읽읍시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하자면 하나님은 아무 데도 안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사랑할 때 사람들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으로써 육신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음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 이치가 하나님에게만 해당 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면서 우리에게 그 당신 자신을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나타내 보여주시지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았다는 사람은 거짓말이거나 혹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그 어떤 매개체를 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보여주시지를 않으십니다. 그런 방식으로 나타내 주시지를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그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사물보다 더 확실하게 느껴져서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이 내 손안에 이 컵에 뚜껑이 들려있다는 사실보다 더 확실하게 믿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에는 내가 생명을 걸 수 없지만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에는 나의 생명을 걸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입니다.
물리학자들은 이 우주를 물리 현상으로 설명해보려고 합니다. 모든 학자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물리학자가 특히 교만합니다. 자기가 보고 측정할 수 있는 물리 현상을 모든 우주의 다 적용을 해서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물리학자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물리학자가 그렇게 세계를 모두 설명할 수 있을 것처럼 떠드는데 그게 아니꼬우면 딱 하나만 질문을 해라. 그러면 물리학자는 얼굴이 빨개진다. 그 질문이 “당신이 그렇게 사물의 이치와 우주의 공간과 이 천체에 대해서 완벽하게 설명하는데 그럼 시간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물리학자 누구도 시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과학자들은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깨끗이 정리합니다. 어거스틴 같은 사람은 현재라고 하는 것은 이론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과거는 과거에 대한 현재의 기억이고 현재는 현재의 현재에 대한 기억이고 미래는 미래에 대한 현재의 기억이다. 인간의 기억의 장난질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구분하게 만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확실한 사실 하나는 어쨌든지 간에 시간은 흘러가고 있습니다. 자기 피부를 보면 느껴집니다. 얼굴을 보면 세월이 흘러간 게 느껴집니다. 나온 배를 보면 나도 20대 때는 허리가 27밖에 안 됐는데 바지마다 다 작습니다. 세월이 흘러갔다는 게 느껴집니다. 온몸이 써금써금 하고 일어날 때마다 곡소리를 내며 뭘 붙들어야지 일어납니다. 이게 시간을 증명합니다. 현재, 과거가 없다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시간은 자신의 본질은 보여주지 않습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시간이 있다는 증거를 남기면서 시간은 흘러갑니다. 하나님도 똑같이 어디에서도 하나님을 증명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우주선을 제일 먼저 쏘아 보낸 나라가 소련입니다. 스푸트니크호를 쏩니다. 우주인이 올라가서 점과 같이 된 지구를 내려다보면서 한 말이 있습니다. “God is nowhere” “하나님은 아무 데도 없다. 신은 아무 데도 없다” 그랬습니다. 그 후에 아폴로 우주선을 타고 3명의 우주인이 올라갑니다. 다른 고백을 합니다. “God is everywhere”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다” 똑같은 싸늘한 우주 공간 푸른 빛의 별 하나를 보면서 어떤 사람은 거기서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신은 없구나라고 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은 눈으로 보면 하나님은 아무 데도 안 계시지만 정신으로 보면 하나님은 당신이 계신 효과를 모든 것을 통해서 나타내 보여주시면서 가는 겁니다. 마치 시간이 자기 본질을 감춘 채 시간이 있다는 효과를 모든 만물을 단 하나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음으로써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듯이 하나님은 아무 데서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면서 모든 일들을 바꾸시고 우리의 인생사를 움직이시고 세계의 역사를 흘러가게 하시면서 당신이 살아계신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흘러가는 것입니다.
이번에 팬데믹이 일어나면서는 어떻게 됐는지 제가 국제적인 통계를 접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911사태가 있었을 때 미국의 쌍둥이 빌딩이 폭파된 그 광경을 보셨잖아요. 빌딩이 무너지는 거. 무너지고 거기는 지금 메모리얼 파크가 굉장히 엄숙하고 아름답게 건축했습니다. 물이 흘러가는 장면을 만들고 3천 몇 백 명 사람의 이름을 거기다 새겼습니다. 그 911테러가 일어나고 3천 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는데 진주만 폭격 때 죽은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이 911테러에서 죽었습니다. 미국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고 정신이 아찔해지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나서 실제로 뉴욕 교회에 출석한 신자가 30%가 늘었습니다. 그렇게 그 빌딩이 무너지면서 죄 없는 수천 명이 깔려서 시신이 못 찾는 걸 보면서 하나님이 어디 있냐? 이렇게 할 것 같은데 그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면서 또 하나의 신비한 사건은 그 빌딩이 무너지면서 골조가 높은 꼭대기에서 막 흔들리면서 땅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H빔이 붙어 있는 건데 공교롭게 십자가 모양이었습니다. 땅에 떨어졌는데 십자가로 딱 꽂혀 버렸습니다. 그걸 보고 사람들이 엄청난 충격을 받고 그게 미국의 주요 메이저 일간지에 대문짝만하게 앞 장에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30%가 넘는 교회에 안 나오던 사람들이 다시 나와서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보이는 눈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삶의 다양한 사태들을 하나님이 살아계신 사실과 어떻게 연결을 짓고 해석할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러면서 비로소 현실에 대한 나의 판단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할 것인가? 하는 판단이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것들을 성찰하고 나서 마지막에 도달하는 결론은 우리의 삶에 흔들리지 않는 닻을 내리는 것은 결국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우리의 인생에 닻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결은 칠 수 있는데 닻을 내린 배는 최소한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파도가 치면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이탈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침몰하지 않습니다. 부두에 와서 그 어마어마하게 큰 배를 단단히 묶었습니다. 그러면 그 배는 결코 침몰하거나 폭풍을 만나서 뒤집히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사랑의 닻을 내릴 수 있는 거기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그 사랑은 우리 영혼 안에 심겨집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우리의 의지를 통하여 행세 됩니다. 오늘 성경은 가정법을 사용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무슨 뜻입니까? 믿는 우리도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서신서는 아마도 에베소에서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수신자가 누구일까요? 그게 교회라는 공동체 아닙니까? 개인적이고 사적인 편지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것은 신자 각 사람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특정한 개인에게 준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를 향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교제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첫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당시 영지주의 같은 이단으로 뜯겨져 나가는 교회의 지체들을 보면서 교회가 참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발견한 것입니다. 그 사랑은 진리와 나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더 잘 믿겠다고 하면서 그들은 교회를 찢고 갈랐고 떠났습니다. 그들이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 그들은 진리도 함께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신자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거하십니다. 자기 자신의 본질은 보이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그들 안에 거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뒤집어서 해석하면 이런 뜻이 되지 않겠습니까? 너희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너희 안에 나는 없을 것이다. 그것입니다.
조선 시대 구한말에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왕가들을 의료로 고쳐주며 접근하면서 어느 정도 선교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 때 기독교인들을 아주 천하게 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욕하던 그 죄명이 있었습니다. 유교 사회의 고루한 것으로. “저 예수쟁이들은 통화통색하는 무리다” ‘통’은 ‘통한다’는 뜻이고 ‘화’는 ‘돈’입니다. ‘색’은 남자, 여자를 이야기합니다. ‘통화통색’입니다. “저 무리들은 돈을 내것 네것 없이 함께 쓰고 남녀의 구별이 없이 섞여서 지내는 무리다. 그러니 이 얼마나 위험한 인간들이냐” 하고 공격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공격을 하면서도 두 가지 모순된 사실이 함께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통색은 당시 유교로 볼 때 비난받을만한 것이었습니다. 남녀가 유별하니까. 옛날에 남쪽에 세워진 교회에 제가 직접 가봤는데 예배당이 ‘ㄱ’자 입니다. 여기 강대가 있고 ㄱ자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는 이렇게 커튼이 쳐져 있고 여기는 남자 이쪽에는 여자. 날개처럼 되어 있는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비난을 막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남녀칠세부동석이 고정관념으로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남녀가 함께 몰려다니고 양반과 상놈이 형제자매라고 부르면서 살아가는 그 꼴을 보니까 양반들이 이건 말세가 왔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비난을 하면서도 사실은 비난의 이유가 될 수 없는 것이 유교에서 기본적으로 내리는 가장 높은 최고의 덕목이 ‘인’입니다. ‘인의예지신’이 ‘인’에 묶이지 않으면 그러면 그것은 바탕을 잃어버린 윤리가 됩니다. 누가 그 시대에 돈을 나눕니까? 그런데 자기 것과 남의 것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내놓으면서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쓰고 돈 많은 지주 부자들이 그 재산을 다 내놓아서 종들에게 나누어주고 가난한 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보면서 ‘통화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 무엇이 그렇게 생명처럼 아까운 재물을 통화하게 하느냐? 함께 나누게 하느냐?’ 거기서 의문을 갖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살아계심을 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경건한 사람도 좀처럼 회개하지 않는 죄가 둘 있습니다. 게으름의 죄와 미움의 죄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셔서 피 묻은 손으로 두 사람을 서로 악수를 하게 해도 결국은 악수를 안 할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매우 큰 죄라고 생각을 안 합니다. 오히려 자기 주관이 뚜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그런 사람들이 모인 사회가 오늘 사도 요한의 표현에 의하면 “너희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너희 안에 없느니라” 그것은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과 반대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들을 사랑하는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친밀함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은 자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강아지 새끼라도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 목숨을 끊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겠습니다. 수많은 사람에게 애틋한 사랑을 한없이 받는 사람도 자살을 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그 사람은 절대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우리는 이것을 수동태로 해석합니다. ‘나는 모든 이웃에게 그들의 몸처럼 사랑받아야 하느니라. 이에서 벗어난 것은 죄니라.‘ 나는 갈 길을 막고 묻는 겁니다. “그럼 당신에게 물어보자. 어떤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당신에게 그런 사랑을 받았느냐?” 이런 사람들이 온통 돌아다니면서 사랑이 없다며 떠드는 겁니다. 그런데 사랑을 하는 사람은 온 세상이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함으로써 행복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으로 온 세상이 희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자기가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될 사람이 있는 그 자체가 자기가 이 세상에서 삶을 계속해야 할 하나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희망을 줍니다.
우리 옛날에 보면 가슴 아픈 일이지만 사람들 중에는 아주 젊은 나이에 아이들이 많은데 남편이 일찍 돌아가시잖아요. 아니면 내가 큰형인데 부모님이 다 한꺼번에 사고로 돌아가셔요. 내가 너댓 명 되는 동생들을 돌봐야 되거나 남편 없이 홀몸으로 아이들 일곱, 여덟 명씩 키워야 되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그때는 맨정신이 아닌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사랑의 힘입니다. 그래서 아주 강한 사랑의 힘이 나와서 그 가족들을 끌고 나가게끔 만드는 겁니다. 그게 사랑의 놀라운 힘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랑하는 것이 있는 사람은 삶을 등지지 않습니다. 삶의 가치를 느낍니다. 사랑받는 사람은 허무를 느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교회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다면. 가장 사람들이 별로 회개하지 않는 죄가 게으름으로 인생을 낭비한 죄와 누군가를 미워한 죄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가슴에 상처를 준 것 때문에 마음 아파하면서 회개한 적이 있으면 한번 스스로 자신에게 대답을 해보십시오. 오늘 하루 허공에 날려버린 시간들 때문에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이 생명의 양초를 태워버리는 이 잘못을 회개하는 것에 대해서 한번 경험을 이야기해보십시오. 가장 죄 같지 않게 여기는 것이 미워하고 시간을 낭비한 것입니다. 신자는 받은 사랑이 없이는 누군가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만 사랑을 주십니다.
그러면 신자는 어떻게 그 사랑으로 충만해질까요? 그것은 성령의 은혜입니다.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은혜의 열매가 사랑입니다.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마땅히 해야 할 선한 의무를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13절을 우리 모두 같이 읽읍시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믿지 않고는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참믿음이 참사랑을 낳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믿음을 갖게 되는가? 성령이십니다. 믿음도 사랑도 성령의 역사로 주어집니다. 성령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이심을 믿어지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랑하게 하십니다. 구원받을 때 한 번에 우리 안에 오신 성령은 영원히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충만하게 계시고 어떤 때는 미약하게 계십니다. 이건 성령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신자의 성화와 비례합니다. 기도 많이 하고 말씀에 은혜를 받고 회개하고 죄를 죽이고 은혜가 불같이 일어나는 만큼 사랑하게 됩니다. 은혜가 사라지면 사랑의 기쁨도 사라지고 추악한 자기 사랑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죄를 죽이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아들을 화목 제물로 주시는 항상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 안에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 사랑의 확증으로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구약시대 아무도 본 적이 없던 그 찬란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게 해주셨으니 이제는 우리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으니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랑하며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이 말합니다. “구원의 기쁨이야말로 모든 삶의 근원적인 동기가 되어야 한다.” 구원의 기쁨.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은혜. 그리고 내가 지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지내고 오늘 내가 하나님 사랑 안에서 숨 쉴 수 있는 이것이 나의 공로로 된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이루신 그 공로를 생각하며 그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타락은 구원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데서 시작이 됩니다. 신자의 타락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인데 결국은 어제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면 그가 신앙 안에 있는 것이고 덜 사랑하면 미끄러져 가는 것이니 이것이 타락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Ⅲ. 적용과 결론
신자의 삶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현재적인 감격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믿는 순간에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고 대지에 살던 우리에게 하늘의 생명을 누리며 살게 해주셨습니다.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지금은 약해져 있지만 모두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아로새겨진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 은혜가 우리 안에서 샘물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욱더 큰물이 되어서 솟아나고 그 사랑은 우리의 마음을 적시고 삶을 거룩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 사랑이 흘러 들어가서 이 삶의 불행한 현실에 허무를 느끼며 흐느껴 우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집니다. 여러분들이 그 사랑을 처음 알았을 때 그 감격이 어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저는 전도하는 사람 없이 교회를 찾아가고 회심의 은혜를 경험했을 때 그때 생전 처음 경험했습니다. 내 몸에 지구의 중력이 없어진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걸어가는데 구름 위를 걸어가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것이 절대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나의 신체가 그것을 한동안 느꼈습니다. 그걸 보면 어거스틴이 얘기했던 “우리의 사랑이 우리의 영혼의 무게다”라고 한 것이 생각이 납니다. 땅을 사랑하니까 그렇게 가볍게 걸을 수 있는 인생의 발걸음을 마치 모래주머니를 찬 것처럼 쇠 차꼬를 찬 것처럼 무겁고 힘겹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끊어버릴 시간 아닙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들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기억해 보십시오. 한때 여러분들은 모두 그 사랑에 눈물 흘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 맨 처음 교회를 방문하고 그것이 생전 처음 교회에 들어온 순간이었는데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에 감격하며 울었던 사람들이 여러분입니다.
한 15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교회에 복사기를 수리하러 오는 업자가 있었습니다. 교회 직원이 주일날 복사기가 망가졌으니 큰일이었습니다. 와서 황급히 복사기를 고쳐서 정상으로 만들어 놨습니다. 직원이 전도했습니다. “사장님 교회 다니세요?” “옛날에 다니다 요즘 안 다닙니다.” “지금 시간이 딱 예배 시간인데 한 번만 예배드리고 가세요.” 하며 친절하게 인도했습니다. 예배당 저 한가운데 기둥 뒤편에 앉아서 예배드렸습니다. 십수 년 만에 교회 나온 사람이었는데 그날 예배를 드리면서 통곡하면서 울었습니다.
보십시오. 십수 년 동안 교회를 떠나서 세상에 빠져 살던 사람에게도 예수를 한때 믿었기 때문에 사랑의 씨앗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마음에 임하자 폭발하듯이 터지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그럴 수 있는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까? 나는 여러분이 어떤 인생의 상황에 놓여 있든지 한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 말에 ’아멘‘ 해야 됩니다. 다른 건 다 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 없이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이 여러분들의 인생에 대한 대답입니다. 두 팔을 벌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한없이 구합시다. 빈 손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듭시다. 그 사랑으로 충만해집시다. 그 사랑으로 사랑합시다.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거하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자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2 (2023.01.17._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4-16)
녹취자: 백지영
Ⅰ. 본문해설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지 교회에 출석하는 회원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 문화에 익숙해져서 개업 예배 때 고사 대신 목사님을 모셔다가 예배를 드리고, 준공되었을 때 술 파티를 하기보다 예배를 드리는 것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믿지 않고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영적인 생명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기독교에 있어서 이런 신앙의 영적인 특성들이 매우 무시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형식적으로 따르고, 그리고 무늬만 그리스도인이지 실제 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없는 사람들로 교회가 넘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적실성이 있는지를 현실이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주신 생명으로 죽은 영혼이었을 때는 도저히 살 수 없었던 삶을 살아가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아담이 범죄함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 생명의 원천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또 그 생명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져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의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Ⅱ.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
그러면 지금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어야 합니까?
A. 예수를 믿음
제일 먼저 예수를 믿는다는 것에 대하여 오늘 성경은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구주를 보내신 것을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이 세상의 유일한 구주로 보내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이외에는 또 다른 구원의 길이 결코 없음을 믿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린 인간은 결국 서로를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처음 사람인 아담과 하와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하와도 넉넉히 창조하실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비록 몸은 둘로 나뉘어져 있지만 사실은 그 뼈와 살이 하나이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를 자신처럼 사랑하도록 그렇게 창조된 것입니다. 그것을 안 아담이 하와를 향하여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고 둘이 한 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그렇게 자신을 향한 사랑이 곧 그 남편과 아내를 향한 사랑이었으니, 이것은 남녀 간의 사랑을 뜻하는 것만이 아니라 온 인류가 이렇게 사랑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자,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그래도 아이를 낳았을 것입니다. 당연하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타락하고는 상관없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해산의 고통은 없었겠지요. 환희 속에서 기쁨 속에서 행복감과 함께 아이를 낳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이가 태어났으면, 그 아담과 하와는 “우리 둘이는 서로 살과 뼈의 사이지만 너는 각질이다.”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너는 언제든지 깎아버려도 되는 각질이다.”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동생이 태어났습니다. 아벨이. 똑같이 네 식구가 모두 우리는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이야기했겠지요. 그 다음에 셋이 태어났습니다. 그 다음에 그 자손들이 자손을 낳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서로를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처럼 여기면서 사는 사회가 예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이루고 싶던 사회입니다. 그게. 그것을 원하셨는데 사람들이 타락해서 그렇게 못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결국은 사랑이 사라진 이유는, 그들의 영혼 안에 있는 그렇게 사랑하게 하는 하나님의 생명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셔서 그들만이라도 그런 사회를 만드시기 위해서 애쓰시고,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시고 때로는 말씀을 보내시고 또 성령을 보내시고 은혜를 주셔서 그렇게 살게 하셨지만 그들도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정말 하나님 사랑하고 경건했던 사람들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경건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전수되어 내려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결국 이스라엘은 세상 나라와 똑같은 나라가 되어버렸고,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육적인 이스라엘은 부서져서 산산이 흩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그 육적인 이스라엘을 보내신 것은, 성공하시려다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보다 더 완전한 공동체를 보이기 위하여 하나님이 예고편으로 들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부활하심으로 다시 하나님의 생명을 받으시고, 그 생명을 우리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심으로서 그들도 하나님을 다시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모든 사람이 너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여기면서 사는 나라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인데, 이 교회는 그런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맛보기로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먼저 샘플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가 그렇게 은혜를 많이 받고 예수의 생명으로 충만해지는 성도들로 가득 차면 그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도저히 찾을 수 없었던 행복을 그리스도인 교제 속에서 발견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이 어두운 세상에 맛을 내는 소금이고 이 어두운 밤바다 같은 세상에 많은 배들을 항구로 돌아오게 하는 등대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그 역할을 하도록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리자 인간은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인 그런 고백을 유지하며 살아야 할 사람이 서로를 살인하고 죽이는 처지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매우 비참하게 되었고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났고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미치도록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들은 불행의 길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삶은 고통스러웠고 불행은 항상 그들 앞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 인생의 비참과 허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쳤습니다. 인류 역사의 종교나 철학, 도덕이나 예술, 학문, 정치 같은 것에서 자기의 존재의 근원과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였습니다. 타락한 인생은 불행하기는 했지만 자기가 무엇 때문에 불행해졌는지, 그리고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다시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그따위 것들에서 구원의 길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탁월한 열심으로 종교의 도리를 좇은 사람도 있고, 탁월한 열심으로 자신을 모두 잊은 채 예술에 몰두했던 사람도 있었고, 머리가 돌아서 결국은 정신이상이 될 때까지 철학에 매진한 사람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은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의 참된 생명이 우리에게 이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은 끊임없이 그렇게 잃어버린 행복을 찾아가 보려고 몸부림쳤지만 결국은 찾을 수가 없고 누구도 대답을 내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제 저는 여러분에게 물리학자가 얄미우면 시간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라고 말했지요? 마찬가지로 똑같이, 무엇인가 근원적인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못하는데 그것들은 끊임없이 그 효과를 남기면서 흘러갑니다. 시간이 무엇이라고 딱히 본질을 말할 수 없는데, 그 시간은 흘러가면서 수많은 흔적들을 남기며 미래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과거로 기억을 남기며 흘러갑니다. 강물처럼 흘러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명히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공간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공간은 분명히 있기 때문에, 그 공간 속에 공간의 본질은 알 수 없으나 공간이 있기에 우리도 있고 우리가 있기에 그 공간을 생각할 수 있으니, 이것이 공간이 우리를 있다고 규정하는 것인지 우리가 공간을 규정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지만, 그러나 공간은 분명히 있기에 우리도 육체를 가지고 이 공간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런 생각에 몰두하다 보면 우리의 마음은 자지러지고,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아주 비감한 마음이 들면서 우리의 마음은 마치 깊고 추운 어두운 밤에 길거리로 내어 쫓긴 한 어린아이처럼 고독감 속에 인생의 길거리를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에게 그런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이 시간에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대답을 얻고자 교회의 문을 두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런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어야 됩니다. 무슨 사업을 하면 돈을 벌고 어떤 일을 하면 출세를 할 수 있는지 그것은 교회가 가르쳐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당신이 어디로부터 왔고,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흘러가고 있고, 그리고 어떻게 살면 불행의 늪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어떻게 살면 그 불행을 피하는 길이고, 불행을 만났어도 어떻게 살아가면 그 불행의 고통을 줄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교회입니다. 인생에서 고통은 피할 수 없습니다. 인생은 고통의 바다입니다. 그러나 통증은 줄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은 객관적인 것이고 통증은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터득해가는 과정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주님을 믿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넘쳐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러한 우주와 세계와 인간과 하나님과 그리고 우리의 마음과 그리고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에 궁극적인 목표에 대한 지식입니다. 이것들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는 것을 알고, 알수록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할수록 하나님을 알고 싶은 열망이 교회 속에서 넘쳐날 때, 비로소 이 교회가 이 세상이 알 수 없는 그런 지혜의 보고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주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 지식의 빛으로 어두운 곳을 비추고, 그 지식의 빛으로 어두운 곳을 환하게 하여 가게끔 비추는 것입니다.
밤에 청계산 길을 제가 자주 갑니다. 혼자서. 걸어가는데, 항상 데크 옆으로 불빛이 죽 나와서 어려움 없이 걸을 수 있는데 무슨 일인지 한쪽 구간이 데크의 불이 다 꺼졌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걸어오는 것이지요. 그 사람이 폰의 불을 켜서 계단으로 올라가는 내 앞을 비춰줍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그 불빛이 보고 계단을 한걸음, 한걸음 밟으면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이제 폰을 켜서 그다음서부터는 내 폰으로 걸어갔습니다. ‘아, 이렇게 키면 되는 거구나.’ 그리고 걸어갔는데, 어둡지 않을 때는 그 빛의 고마움을 모릅니다. 그런데 진짜 어두워지고 나면 작은 불빛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사명입니다.
자, 보십시오. 아까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래서 사람들이 구원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이 상태에서는 불행하니까 행복을 찾아서 몸부림친 모든 노력이 결국은 그것이 그들이 생각했던 구원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벌면 그게 구원이라고 믿었고, 어떤 사람은 자기가 예쁘게, 예쁘게 가꾸면 그게 구원이라고 생각을 했고, 수많은 사람에게 자기의 재능으로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영광을 받으면 행복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십시오. 결국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진정한 행복을 찾아가는 것이 인간인데, 자기 자신조차도 성공을 위한 도구로 소비를 해버립니다. 그러면 자기를 그렇게 소비하고, 성공을 위해서 자기 자신의 행복을 모두 소비했을 때, 궁극적으로 누구를 행복하게 하고 싶은 것입니까? 의문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없이 행복을 찾았던 인류의 오류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극단적인 쾌락을 추구했습니다. 입에도 담을 수 없을 정도의 끔찍한 쾌락을 추구하면서 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로마 황제 같은 사람들이 대표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중국의 황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조차도 사실은 그들은 그것이 자신을 구원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몸부림을 쳤던 것입니다. 그 추구가 집요하면 집요할수록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서 느끼던 허무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를 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아버지가 보내신 아들을 믿은 사람이고, 믿는 그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 14절을 우리 모두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여기서 보았다고 하는 것은 육신의 두 눈으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본 것이니,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의 효과였던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보고 믿었다는 말과 믿기 때문에 보았다는 표현이 둘 다 나옵니다. 어떤 경우도 보았다는 이 말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죽은 영혼으로 어두워져 버린 마음의 눈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보십시오. 눈은 정상인의 눈인데 바깥의 빛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러면 맹인이나 맹인이 아닌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것도 안 보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다릅니다. 빛이 들어오면 맹인이 아니었던 사람은 다시 볼 수 있으나 맹인인 사람은 빛이 들어와도 볼 수가 없습니다. 시신경까지 완전히 사라져버린 사람은 캄캄한 암흑입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어두움이 두 가지입니다. 객관적인 어두움은 우리가 아직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몰라서 어두운 것입니다. 가르쳐 주었더라면 알았을 텐데 안 가르쳐주었기 때문에 몰라서 어두운 것이 객관적인 것입니다. 시편 119편에서 시인이 “나의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한 것은 이런 종류의 어두움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알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게밖에 못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르쳐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을 보면서 주님의 뜻에 대해 눈을 뜨게 되면 사라지는 어두움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특히 신앙에 있어서는 공부를 해야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 땡중과 고승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땡중은 공부를 안 합니다. 목탁만 두드립니다. 그것도 오래 못 두드립니다. 힘드니까. 그러니까 딴 생각만 하는 것입니다. 그게 땡중입니다. 그런데 이 기독교에도 땡교인이 있습니다. 교회는 다닙니다. 그것도 오래 예배도 못 드립니다. 배우려는 의지도 없습니다. 그러면 기독교라는 문화에는 익숙해져 있는데 진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지금 다니는 이 교회가 내 인생에 대해서 무슨 답을 주고 있는지, 기독교가 내 인생과 이 세계에 대해서 어떻게 보라고 생각하라고 가르쳐주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교리반에서 늘 말씀하지 않습니까? 라틴어 써서 미안합니다. “스튜데오, 에르고 숨(Stúdĕo, ergo sum).” “나는 공부한다, 고로 존재한다.” 공부하려고 태어난 것입니다. 이 공부라고 하는 것은 그저 아무거나 막 배우는 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경계했던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쓸데없는 것에 대한 알고 싶은 호기욕(好奇欲), 그것은 결국 세상 사랑의 표현이라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자신의 인생의 진실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배워나가는 것을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공부하지 않는 교인은 땡교인입니다.
그런데 고승은 누구인지 아십니까? 공부를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자기가 믿는 불교의 신앙과 끊임없이 연결을 시키면서 확신에 확신을 더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종교적인 확신 사이를 공부로 메우면서 그 확신에 확신을 더해가면서 그렇게 불도를 따라서 살아가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고승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고승은 수천 명의 땡중 중에 몇 명 안 됩니다. 공부를 하면 모두 다 그렇게 되느냐? 아닙니다. 그래서 학승이 있습니다. 학승은 뭐냐 하면 학식이 높은 스님입니다. 거기까지입니다. 그런데 고승이 된다고 하는 것은 학식에서 뛰어넘어서 우주와 인생의 근본적인 이치를 깊이 깨뜨리고 그것을 자기가 체화한 것입니다. 불행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그래도 인간이 그 불행을 이기면서 살아가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통일된, 자기 자신을 움직이는 아주 통일된 정신과 세계관 속에서 일관성 있게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가끔 그럽니다. 엉뚱하게 교인이 와서, “목사님, 제가 기억은 못하는데 한 10여 년 전에 이렇게, 이렇게 설교를 하셨는데 지금 설교하고 모순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내가 그럽니다. “나는 다 기억을 할 수 없지만 가서 찾아봐라. 나는 절대 그렇게 설교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 사상에서는 절대로 그렇게 설교했을 리가 없다. 궁금하면 출판실에 가서 7만2천편의 녹취원고가 다 텍스트로 풀려져 있으니까 인덱스로 한번 찾아달라고 해라.” 찾아보면, 찾아본 적도 있습니다. 진짜인가. 그런데 찾아보면 자기가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뭔가 하나의 통일된 사상을 가지고 죽 이야기를 하고, 똑같은 눈으로 세계를 보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 것의 유익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간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시련과 환난이나 때로는 죽음이 와도 그 모든 것들이 다 교통수단이 되어서 나를 여기서 저기로 옮겨가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 어딘지 모르기 때문에 죽음이 너무너무 무서운 것이지, 사실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끝난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죽음이 그렇게 무섭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 무엇이 행복한 곳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죽음이 무서울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 통일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그나마 불확실하고 불안하고 불행으로 가득 찬 이 현실을 이기면서 살아가는 방법이다 이것입니다. 기독교는 원래 그런 것을 통일적으로 가르쳐주기 위해서 주어진 종교라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것이 그 위대한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그 문을 열면서 비밀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바로 우리가 어떻게 이 세계와 인간과 교회와 하나님을 바라보고, 우리가 어떻게 일관된 삶을 살 수 있는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보았고”라는 말은 그리스도에 대한 취소될 수 없는 앎을 의미합니다. 믿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으로 보았으니 마음으로 보지 못했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까 어두움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 아닙니까? 어둡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속에 시신경이 살아있는 맹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개안수술이 가능한 것입니다. 개안하기 전에는 어떠냐 하면, 깜깜한 게 아니라 빛이 없는데 들어가면 깜깜하고 빛을 갖다가 비추면 밝게 느껴질 뿐 사물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마치 눈 감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개안수술을 합니다. 그러면 개안수술을 하고 붕대를 풀면 세상의 풍경이, 중간에 잃어버렸던 사람들은 이것을 푸는 순간에 이전에 보았던 아름다운 세상이 다시 죽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어두움이 내적인 어두움입니다. 그런 어두움이 영적인 어두움입니다.
제가 시력이 마이너스 19 디옵터였습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3미터 앞에서 제일 큰 글자가 하나만 보이면 그게 0.1입니다. 3미터를 그것을 센티로 나눕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앞으로 계속 가면서 보여야 되는데, 그 0.1이 보이려면 나한테 거의 30센티 가까이 갖다 놓아야지만 시력검사에서 제일 큰 글씨가 보일 정도로 그렇게 눈이 어두웠던 것이지요. 제 사무실에 있는데 아내가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그래서 “어디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안보이니까. 대답이 너무 걸작이었습니다. “집에서 가정일로 왔습니다.” 그러다가 눈 수술을 했습니다. 다 모든 병원에서 안 된다고, 어떤 의사는 명예를 걸고 목사님 눈은 못 고친다고 그러는데, 그런데 그냥 살았는데 너무 못 살겠습니다. 그래 가지고 어느 병원을 소개 받아가지고, 소개받은 게 아니라 직접 찾아갔지요. 그래 가지고 갔더니 거기 과장님이, 연세 드신 교수님이 “아니, 누가 이 눈을 못 고친다고 합니까? 목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수술해 드리겠습니다.”
수술하고 나니까 환해지는 데 달에 토기를 그날 처음 보았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봤습니다. 그런데 진짜 토끼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내가 청년인 줄 알았던 사람들은 여전도회 회원이고, 그리고 중년인 줄 알았던 분들은 노년이고, 노년인 줄 아셨던 분들은 노파이셨습니다. 그리고 들어왔는데, 교회를 누가 편의점처럼 등을 수없이 달아놓은 것입니다. 제가 눈이 어두우니까, 어두우니까 계속 등을 달게 한 것입니다. 대낮처럼 밝아지고, 열린 신문이 나는 노란색인 줄 알았는데, 미색지를 참 오랫동안 쓰는구나 그랬는데 하얀색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다시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내가 드는 느낌이 뭐냐 하면 “아, 이렇게 우리의 마음의 눈도 누군가가 고쳐주어서 우리가 보지 못했던 그리스도를 보고 신령한 것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놀라운 인생으로 변할까?” 그것이었습니다. 그 마음이 지금도 절절하게 전해져옵니다. 차를 몰고 밤에 나가면 신호등이 여섯 개로 보이는 것입니다. 차가 세대씩 네 대씩 똑같은 차가 지나가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운전하지 말았어야 됩니다. 여러 번 교통사고를 냈습니다. 사람은 다행히 안 다쳤는데, 그러니까 그런 정도였었는데 그게 눈이 밝아지니까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놀라운 역사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믿음을 가질 때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셔서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이 우리의 이 마음의 눈을 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성자를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대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자신의 온 존재를 걸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고백은 마음의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만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15절을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한번 보십시다. 성경에 오늘 뭐라고 말합니까?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을 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있느니라” 뒤집으면, “누구든지 예수를 아직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 안에 없고 그도 하나님 안에 있지 아니함이라”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그럼 여기에서 “시인 하면”이라는 조건이 붙었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 당시의 문맥에서 볼 때 이 고백은 그냥 개인적으로 “아, 예 그렇지요 저도 그렇게 시인합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마치 죄지은 범죄자가 명백한 증거에 못 이겨서 고개를 끄덕이는 그런 시인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그렇게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앞에서, 특히 교회의 공동체들을 증인으로 하여 그 앞에서 진심으로 자원하는 마음의 고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세례를 줄 때는, 교회 모두 모였을 때는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 그렇게 못하지만, 세례 면접을 할 때는 반드시 자기가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고 자기가 왜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인지를 고백을 해야 됩니다.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그렇게 당시에는 그것을 공동체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핍박이 심하던 그 당시에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나는 그분을 유일한 구주로 믿고, 그분이 나의 주인이십니다.”라고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은 때로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출세의 기회를 잃을 수도 있었고 친족들로부터 끊어지거나 재산을 빼앗기거나 심지어는 생명의 위협까지 무릅써야 하는 일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얼마나 진지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이제 무슨 의미냐 하면, “이제 나를 중심으로 삼았던 모든 삶을 포기하고, 그분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고 이 온 우주와 모든 세계의 최고의 통치주이시므로 나뿐만 아니라, 내가 그분의 주되심 앞에 복종할 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일생이, 이 모든 인류가, 내가 만나는 모든 이웃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를 따라 살아가는 일에 이바지하며 살아가는 것을 나의 삶의 보람으로 삼겠습니다.”라고 하는 선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을 하는 그것은 이제껏 자기가 살아오던 삶을 내버려둔 채 기독교를 살짝 거기다 덧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관과 인생관을 가지고 다른 방식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더 큰 비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 바깥이 아니라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그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더 이상 흘러들어오지 않아서 영혼을 비틀어지도록 메마르고 죽은 상태로 만들었던 그 생명이 다시 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하는 진실한 믿음의 고백과 함께 하나님은 그의 영혼을 회심시키시고 그에게 영적인 생명이 부어집니다. 죽은 영혼이 다시 살아나게 되는데, 이것을 하나님의 생명이라고도 부르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이시기에 예수의 생명이라고도 부르고, 혹은 이 생명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영원히 살게 하는 생명이기 때문에 영생이라고까지 불렀던 것입니다.
이 생명은 영혼의 영원한 생명이었으니, 인간의 타락과 함께 그것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그 생명을 잃어버린 채 살았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이웃에게 악을 행하며 자신에게 나쁜 결과를 가져다줄 일들을 하면서 자연과도 불화한 채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을 원수 삼고 사람을 원수 삼으며 자연을 자신의 적수로 삼아서 고립된 채 살아가면서도, 자기 자신을 우주의 중심에 놓고 모든 질서를 자기중심으로 만들려고 살았던 사람들이 만든 그 현상이 이 사회의 악이요 비참이었습니다. 여러분 안에 생명이 있습니까? 그 생명이 여러분을 신자답게 살기에 충분합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당신이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냐고 우리에게 묻는 도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되새겨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문화를 살짝 입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그것이 결코 아닙니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 사랑으로부터 거듭나서 예수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 어두운 마음의 눈이 열려 예전에 보지 못했던 세상을 새롭게 보고, 그 하나님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이 상승하여 그로부터 다시 하강하면서 모든 만물들의 질서를 올바르게 정하고, 많이 있는 것들은 많이 사랑하고 덜 있는 것들은 덜 사랑하고 그리고 없는 것들은 사랑하지 않는 그것이 진정으로 예수를 믿었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가슴에 깊이 새기고 그 처음 회심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다시 그 마음을 회복하고 진정으로 여러분들의 영혼으로 예수를 알고 믿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사랑에 거함
마지막 두 번째는 사랑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그 신앙을 공중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9절을 우리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자, 한번 성경을 보십시오. 자, 뭐라고 지금 말하고 있습니까? “네가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그랬습니다. 그리스어로 호모게오라는 단어입니다. 이게 바로 나 혼자 조용히 하나님 앞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앞에서 결혼식의 선서를 하듯이 그렇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뭐라고? “이제는 나의 임금님은 오직 예수뿐이십니다. 모든 이 세상의 만물은 그분의 것이며 나도 그분의 소유입니다.” 이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우리의 마음에 굳게 믿을 때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그들에게는 죄를 용서해주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성령을 함께 주십니다. 그래서 영원히 그들 가운데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 안에는 성령이 계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체를 성령의 전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을 주실 때 이 생명이 자기를 그리스도인으로 지탱하게 하는 힘이라면, 그 힘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났을 때 그것이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사람들을 만나면 악악대면서 사는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악에 받쳐서 사는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이게 교회 바깥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교회 안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 똑같습니다. 뭐라고 보면 되느냐 하면, “아, 생명이 없구나.” 그렇게 보면 됩니다. 세상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예수의 생명이 원래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런데 예수의 생명이 없어도 그와 유사한 생명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려서부터 온화하고 자기의 마음을 잘 다스릴 줄 알고, 양심의 기능이 살아있고, 풀 한 포기 동물 한 마리도 가엾이 여길 수 있는 인정이 있습니다. 예수의 생명하고는 상관이 없는데, 그런 마음까지 하나님이 일체 주시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 세상은 약육강식으로 서로를 뜯어먹는 동물의 세계가 되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생명이 없어도 그런 기본적인 기능들을 사람들에게 남겨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양심이라는 것이 있고 측은지심이라는 게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유사한 생명도 좀 넉넉하게 있는 사람이 있고 그런 생명이 아예 바닥까지 바짝 말라서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떤 것을 참지 못하고 그것을 왈칵 하면서 자신의, 말하자면 감정들을 쏟아내어서 평생 후회할 일들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똑같이 예수 믿는 사람들 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 안에 이 두 가지는 어느 하나가 사라지고 있는 게 아니라 같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도 이 두 가지를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그랬습니다. 뭐냐면, 은혜가 좀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심성이 워낙 곱고 신중하고,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이런 기본적인 소양과 마음의 품격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떨어졌어도 바닥이 드러났는데 그냥 맨바닥이 드러날 뿐이지, 그런데 이 바닥이 아주 거칠고 더럽습니다. 그래서 은혜가 떨어지고 나면 세상에 처음에는 볼 수도 없었던 것들이 눈에 띄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일반적인 덕성과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이 덕성은 이 은총이 그 일반의 덕성들을 완성해 가는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는 것과 함께 한 사회의 시민으로서 어떻게 양식 있게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함께 터득하면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되시겠습니까?
그러한 생명이, 예수의 생명이 우리를 예수 믿는 사람으로 지탱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니, 이 생명이 충만하면 진짜 예수 믿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이고, 이 생명이 사그라지면 그러면 변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이 충만하면 그것이 사람들과의 관계서 사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할 때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 남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뭘 해도 남을 위해 하는 게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은혜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어지면 이기적이 되어서 그래서 자기만을 위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고, 또 우리 모두가 사랑 안에서 모든 신령하고 좋은 것을 함께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심으로 사람이 그 사랑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과 연합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의 연합 없이는 결코 무엇으로도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가장 큰 의무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으로 정하신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숨질 때까지 우리가 힘써야 할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실하게.
(찬양)
내 평생에 힘쓸 그 큰 의무는 주 예수의 덕을 늘 기리다가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가장 행복했던 때도 사랑하던 때입니다. 사람과 사랑에 빠져도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데 무한하신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면 그 세상이 달라 보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사랑도 아니지요. 사랑은 근거 없는 힘을 우리에게 줍니다. 모든 것이 부서지고 망하고 사라지고 멸망했는데도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멸망 당한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충만히 느꼈습니다. 그래서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니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라고 찬송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의 가장 큰 의무는 그 사랑에서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남녀가 요즘은 이혼의 비율이 아주 높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혼한 것이 그렇게 흉이 되지 않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또 흉볼 필요도 없습니다. 각자 자신의 인생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 그런 생각을 가질 필요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서 그런 분들 있으면 조금도 그렇게 기죽거나 그럴 필요 없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없습니다. 당당하게 “저는 이혼했습니다.”하고 말해도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각자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것도 참 어렵습니다. 요즘. 그런데 사랑하고 그 사랑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처럼 뜨겁게 사랑하면 헤어질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그렇게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면 옆에 있는 아내가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격하게 고개를 끄덕입니까? 얼마나 힘드시면 그랬을까? 그분에게 위로를 보내드려야겠습니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그런 말이 있습니다. 의학자들이 조사를 했더니 결혼을 안 한 남자는 통계적으로 5년 빨리 죽더랍니다. 수명이 5년이 짧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혼했다 이혼했다 그게 아니라 결혼을 안 한 사람. 수명이 조사를 해보니까 평균 5년이 짧더라 이 이야기입니다. 여자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여성은 아마 좀 더 오래 살지 않을까? 어쨌든 모르겠는데, 남성 통계만 봤는데 5년을 더 산답니다. 결혼 안 한 남자는 5년을 더 사는데 결혼한 남자들 중에는 죽고 싶은 사람이 많답니다.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해서 나온 사회적인 농담입니까? 가십이라는 것이 세태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을 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그 사랑을 지속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에게도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화두가 뭐냐 하면, 그 사랑 안에 거하자, 그 사랑 안에서 계속 살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심겨진 사람입니다. 그 사랑은 결코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그들을 결코 떠나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향한 그 하나님의 사랑은 불변합니다. 언제나. 그런데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우리가 느껴지면 그러면 우리가 주님을 멀리 떠날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죄를 지었는데도 하나님의 사랑이 매일 감격적으로 느껴지면 우리는 계속 죄와 사랑을 양립하며 살아도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가정(假定)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교훈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면서 사랑하며 살면 하나님이 우리를 많이 사랑하시는 것이 느껴지게 하시고, 그 생명을 충만하게 유지를 못하고 우리가 사람을 미워하거나 사랑하지 않으면서 살면 하나님이 우리를 싫어하시는 것이 느껴지게끔 하나님이 만드셔서 우리에게 그것으로 교훈을 하시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자녀들을 교육시키는데 잘하면 잘했으니까 칭찬해주는데, 못했어도 변함없이 계속 똑같이 그렇게 모든 것을 다 해준다면 그 아이에게 도덕교육이 가능하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하나님 사랑에서 멀어지면 사는 게 너무 팍팍하고 힘이 든 것입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있어서 그렇게 위로가 되었던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 생명의 에너지를 쪽쪽 빨아들이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자기를 지탱할 수 있는 생명이 없으니까, 그 생명이 부족하니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사랑이 고갈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를 지탱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은 불변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은 가변적입니다. 그래서 죄를 죽이고 은혜가 충만하게 우리 안에 있으면 사랑도 충만해지고 그 사랑 안에 거하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인생의 무게가 안 느껴지리만치 가벼운 것입니다. 물론 이런저런 모든 일을 만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더 놀랍기 때문에 넉넉히 그것을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 하반절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삶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생각과 정서와 의지가 일치하는 기쁨의 삶을 살게 하시려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비참은 물질이나 기술의 부족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참된 생명이 자신 안에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복수심에 불타고, 그리고 형제의 눈의 티를 찾아내고, 한번 마음에 틀어진 사람은 죽어도 용서하지 않고, 그리고 하나님보다 더 엄한 정죄의 칼로 형제들을 난도질하는 그런 것은, 결국 그 사람 안에 사라진 하나님의 생명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의 관계 속에 살아가지 못하기 있기 때문에 겪는 불행이요 고통인 것입니다. 허무와 어깨동무하고 불행이 깡패처럼 여러분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목을 막아섭니다. 인간은 그때 더욱 비참해집니다. 세상의 물질의 풍요로움이 도대체 무엇을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대부분 우리의 육체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이지 우리의 정신의 문제까지 해결해 주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밖으로는 지상 자원의 결핍 때문에, 안으로는 하늘 자원의 결핍 때문에 인간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 자신이 어떠한 생명도 일으킬 수 없고 어떠한 사랑도 스스로 솟아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바깥으로부터 오는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입니다. 신자의 가장 큰 의무는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을 때 이미 주신 그 사랑 그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자신 안에서 점점 더 풍성해져서 마치 샘에 물이 가득하면 그 샘이 넘쳐서 그 물길을 따라 흘러, 흘러 산 아래 있는 모든 밭과 논을 두루 적시며 곡식을 무르익게 하듯이, 그렇게 그 사랑이 점점 더 솟아나서 자신의 마음을 적시고, 모든 사람의 마음을 적시고, 모든 사람의 심정을 적셔서, 그래서 그들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풍성한 사랑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사는 것이 우리가 누릴 행복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도 힘겨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녀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월 첫 번째 주일날 여기서 성년식을 했습니다. 고등부 학생들이 올라와서 처음 청년예배에 참석하는 건데, 한 자매가 성년이 되어서 소감을 이야기하는데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저희 집에는 첫돌 기념이라고 쓴 목사님이 사인하신 성경책이 있습니다. 저는 영아부 때 그 책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유아부를 다녔고 유치부를 다녔고 그 들어가기 어렵다는 등불학교에 치열한 경쟁을 뚫고 들어갔고, 그리고 회심을 했고, 중학교 때 마음이 좀 삐뚤어져서 예배 시간에 딴 생각을 많이 하다가 고등학교 때 와서 다시 신앙을 되찾고 이렇게 어른이 되었습니다.”하는데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첫돌 성경이라고 쓰여진 것을 가지고 놀면서 자란 아이가 어른이 된 것입니다. 거기서 제가 느꼈던 게 뭐냐 하면, “아, 중학교 때 마음이 약간 꼬부라졌었구나.” 정확하게 중학교 때잖습니까? 그것도 중2, 외계인 시기를 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그것을 평범하게 고백을 하는데 나는 그 엄마 아빠가 너무 가엾은 것이지요. 그때 얼마나 힘들었을까? 자기도 힘들었겠지만, 그 아이를 보는 엄마 아빠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데 어떻게? 그래도 그것을 엄마 아빠가 사랑으로 감싸고 참아주면서 기다려주니까 그렇게 신앙 안에서 곱게 자라서 교회 안에서 성년식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 부모의 사랑 속에서 살아가는 그것이 그런 사랑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얼마나 소중한지를 모릅니다. 그런데 자기가 하나님을 만나고 자녀를 길러 보고 인생의 쓴맛을 보다 보면 그게 얼마나 고마운가 하는 것이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스러울 때, 홀로 이 쓰라린 세상의 상처를 받고 눈물을 흘릴 때 엄마 아빠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분이 살아계시든 돌아가셨든지 간에 어려운 인생의 고비에서 그분들의 이름이 생각난다는 것은, 그분들이 자기 자녀들을 자기 사랑 안에서 살게 해 준 것입니다. 그게 그 아이들을, 부모는 몰라도 그 아이들을 붙들어 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부모가 자녀들에게 자기가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때로는 낯간지러워서 다 말을 못 하듯이, 자녀도 사실은 많이 부모를 사랑하는데 그것을 다 고백을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세월이 흐르면서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녀들한테 섭섭하다고 그러는 교인 가끔 만나면 내가 얘기하는 게, “절대 그것은 당신의 오해다. 왜냐하면 사랑은 시간이 걸리면 반드시 누군가에게 이해되게끔 되어있다. 그리고 설령 우리가 죽은 다음에라도 사랑을 받았던 그 사람들은 그 사랑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그런 믿음을 가져야지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기지, 그런 믿음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그 희망으로 자기를 설득하면서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을 뭐라고 부릅니까? 희망으로 자신을 설득하는 것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게 믿음입니다. 따라 해보십시오. “믿음은 희망으로 자신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희망? 내가 만든 희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희망, 그것으로 나 자신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Ⅲ. 적용과 결론
결국은 이 긴 세월을 예수님 믿으면서 살아오는 동안에 우리는 온갖 것들을 다 겪어봤습니다. 그래서 마음대로 고집하며 주님을 멀리멀리 떠나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행복했습니까? 그래서 울며불며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집대로 살아봤습니다. 행복했습니까? 결국은 울며불며 주님께로 다시 돌아옵니다. 결국 행복했던 때는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던 때였고, 불행했던 때는 그 사랑에서 멀어지던 때였습니다. 이것은 동의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만약에 우리가 다른 것은 몰라도 이 한 가지 사실, “맞습니다. 주님의 사랑에서부터 멀어졌을 때는 우리 영혼의 생명이 없는 때였고, 그때는 불행했으며 잠시는 행복한 것 같았지만 나중에는 쓰디쓴 열매로 돌아왔습니다. 그래도 행복했던 때는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던 때였습니다. 기도하면 들으시는 하나님이 느껴지고, 말씀을 들으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내 마음에 느껴지고, 어려움을 만났을 때 기도하면 그분의 품 안에 내가 있는 것이 경험되어질 때 그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던 때입니다. 그 사랑 안에 거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나에게 심지어 악을 행하던 사람까지 사랑하면서 살던 그때가 가장 행복하던 때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멘? 그러면 마지막 내리는 결론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진짜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이런저런 일을 만났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은 그 사랑으로 돌아가고 그 사랑 안에 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 마음을 모아서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 오늘 깨달았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생명이 심겨진다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생명이 사랑하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사랑 안에 거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것은 우리의 환경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사랑 안에 거하지 않기 때문에 불행하게 느껴지는 것이오니, 하나님 그 옛날 회심 때의 처음 사랑을 오늘 저녁 우리의 마음에 회복시켜주시고 더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달라고, 그렇게 살지 못했던 것들을 회개하며 은혜를 달라고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겠습니다.
3.두려움이 없는 사랑
“이로써 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하노라 하고 그 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를 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하는 자는 또한 그 를 할지니라.”(요일 4:17~21)
녹취자 : 오희열
I. 본문해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심겨지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관계 속에서 나타날 때 사랑으로 드러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영적 생명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어떤 나무의 뿌리를 보지 못합니다. 땅 속에 묻혀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열매를 보면서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믿음과 사랑의 관계가 그러합니다.
신자의 본분은 하나님의 그 사랑 안에 거할 뿐 아니라 그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감옥에 갇혀 사형의 날을 기다리고 있는 늙은 사도 바울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매일 비는 기도의 제목 잘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빌립보서 1장 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여기서 “풍성하게 한다”의 그리스어 단어는 샘물 같은 것이 아구까지 차고 더 많이 차서 바깥으로 흘러넘쳐 내리는 의미의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되 그 사랑 안에 있을 뿐아니라 그 사랑이 우리 안에서 충만해져서 그 사랑이 바깥으로 흘러넘치기까지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마치 시편 23편에서 다윗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한 것처럼 그렇게 넘치는 사랑으로, 그 사랑 안에서 넘치는 기쁨을 가지고, 그 기쁨 안에서 모든 이웃에게 자신이 받은 사랑을 흘려보내며 살기를 주님은 기대하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셔서 그 생명으로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지 어떤 교회에 소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그 순간 그의 영혼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고 감겨졌던 심령의 눈이 뜨여지면서 불신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관과 인생관을 갖게 됩니다.
제가 직장에 다니던 20대에 열심히 전도했는데 타이핑을 하던 여직원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저보다는 나이가 열 살 이상 많은 아줌마였습니다. 신우회에 모여서 같이 이야기를 하다가 예수를 믿고 나서 가장 크게 변한 것이 무엇이냐고 했더니, 그 자매님은 굉장히 은혜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아주 신비한 이야기를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내가 예수를 최근에 믿고 가장 변화된 것은 돈이 없어도 마음에 근심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전에는 항상 집에서 나올 때 최소한 1만 원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1만 원은 굉장히 큰돈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잘 모르긴 해도 30~40만 원 정도할 것입니다. 그렇게 현찰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마음이 늘 불안했는데 이제는 토큰 하나만 있어도 마음이 편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바뀐 관점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입니다. 하나님이 죽은 우리의 영혼을 살려주신 것은 그렇게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놀라운 변화는 사랑의 변화로 설명됩니다. 집착하는 것들을 내려놓게 되면 인간의 번뇌는 훨씬 줄어듭니다. 탐욕과 어리석음, 나태함, 이런 것들이 우리의 인생에서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불행을 스스로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영적 생명은 바로 그것을 위해 주신 것이고 이 생명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랑으로 나타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사랑으로 나타나는데 이 사랑을 통해서 사람들은 우리가 다른 생명을 지닌 사람들임을 알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방법이고 이것이 선교입니다. 선교 그 자체는, 존재가 최고의 선교입니다. 존재, 현존, 내가 나로서 있는 것, 그 자체가 최고의 선교입니다. 그렇게 내가 곧 선교가 되려면 내가 그 생명을 충만히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이치를 이렇게 조목조목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원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옛날 선배님들이 입만 열면 하는 말이, “은혜를 받아야 해, 은혜를 받아야 해.”, “계곡에는 물이 흘러야 하고 교회에는 은혜가 흘러야 해.” 이 말을 노래처럼 계속했던 이유는 그 생명이 없이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보여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현존이 선교가 될 수 없습니다.
비록 영혼에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 사랑을 가지고 나와는 전혀 다른 신념을 가진, 또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관, 나와는 전혀 다른 인생관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그 정도는 모두 각오해야 합니다. 그렇게 다르기 때문에 살아가는 어려움보다 주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서 그 모든 것을 이기며 살아가는 기쁨이 훨씬 크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앙을 지금도 지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보이는 세상 속에 살면서 눈만 뜨면 수많은 것들이 우리에게 밀려 들어옵니다. TV를 켜고 폰 하나만 열면 “너 이거 있어?, 이거 없으면 사는 게 아니지. 이거 없어서 불행하지? 그렇지? 이거 사봐, 엄청 행복할거야. 돈이 없어? 그러면 외상으로 줄게, 할부로 줄게, 빌려줄게, 대출해줄게.” 합니다. 이런 식으로 사회가 굴러갑니다.
오늘 점심 때 교인 한 분을 심방 했는데 처음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명품까지는 아니더라도 명품에 가까운 좋은 옷을 삽니다. 자기 형편으로는 살 수 없는 옷, 잘 모르겠지만 외투 하나에 한 100만 원짜리, 그렇게 비싼 옷을 삽니다. 그 옷을 텍을 떼지 않는다고 합니다. 레떼를 뗄 수 없는 것이라 이해가 되는데, 가격이나 회사, 날짜 등등이 쓰여서 달려있는 텍을 옷 안에 잘 넣어서 스카치 테이프 같은 것으로 붙여서 한 달 정도 입다가 깨끗하게 해서 텍이 붙은 채로 다시 판다고 합니다. 100만원 주고 산 옷을 한 달 정도 그렇게 입다가 80만원에 받고 판답니다. 처음부터 그 옷을 살 형편이 안 되니까 20만 원 정도 자기 돈을 주고 한 달 정도 빌려 입는 것처럼 입다가 다시 한 20만원 보태서 다른 친구들이 부러워할 만한 다른 옷으로 건너 타서 또 그렇게 입다가 다시 판다는 것입니다. “그걸 그렇게 까지 해야 하나?” 생각했는데, 그렇게 묻는 사람들은 꼰대라고 합니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세계관 속에서 “수많은 소비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하며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사는데 우리도 사람입니다. 우리는 원래 하늘에서 온 사람이 아니라 땅에 있는 사람인데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구원받고 하나님을 너무 뜨겁게 사랑했는데도 이 안에는 땅의 본성이 남아있습니다. 그것이 기도 많이 하고 사경회 참석해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충분히 통제할 수 있도록 저 아래에 눌려있어서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은혜 생활을 게을리 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이것이 살아납니다. 옛날에 다 해봤던 즐거움들이 단박에 살아나면서 예수 믿는 사람이지만 예수 안 믿는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 저 사람은 예수쟁이다. 너무 신실하게 교회 다니고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후하게 도와준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 알고 보니까 은행 돈을 600억원 빼먹었습니다. 아주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말입니다. 어떻게 지킬과 하이드 같은 두 개의 얼굴을 할 수 있느냐고 하며 놀랍고 충격적이라고 하지만 오늘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든 사람에게 전부 이런 이중성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 이중성을 은혜 안에서 어떻게 통제하고 살아가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자신과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더구나 그렇게 다른 그들을 다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때로는 그들이 자신을 박해하는데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아주면서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설득하며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어렵습니까? 웬만한 사람들은 그런 삶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그 사랑으로 살아가면 그 사람은 굳이 내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며, 내 안에 있는 사랑이 이런 종류의 것이라고 마이크를 잡고 떠들며 다니지 않아도 사람들이 그 모습 속에서 무엇인가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사랑의 아우라를 느끼게 됩니다. “저 사람은 나와는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고, 저 사람의 가슴 안에 심장을 뛰게 하는 그 무엇은 내게는 없는 또 다른 것, 그것이 저 사람에게는 있는 것 같다.라”고 느끼게 만듭니다. 그 정체가 무엇입니까?
II. 두려움이 없는 사랑
A. 두려움이 없음
1. 사랑을 온전히 이룸
그것을 오늘 “두려움이 없는 사랑”이라고 사도는 설명합니다. 두 가지로 생각해볼 텐데, 우선 “두려움이 없다”고 말합니다. 신자는 모든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고 나서 내가 이렇게 변화되면 이 세상에서는 나는 외톨이가 될 텐데 어떡하지?”, “불교 믿는 우리 엄마는 내가 예수 믿는다는 사실을 알면 난리 날 텐데 어떡하지?” 이런 염려해 본 사람 있습니까? 염려하지 않습니다. 왜?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물밀듯이 밀려오니까 아무것도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너무 고전적인 이야기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 왜 그렇습니까? 여자는 그냥 사람이고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뭐든지 견디고 이길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식들의 못된 성질머리, 질풍노도와 같은 사춘기도 엄마는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못 이깁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온전한 사랑을 이루면 이룰수록 그 사랑은 담대해집니다. 이는 우리가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의 힘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면 정신과 영혼에만 힘이 생기는 게 아니라 육체에도 힘이 생깁니다. 마음에 슬픈 일이 있으면 온몸이 아프고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기쁜 일이 생기면 씻은 듯이 낫습니다. 어디서 솟아났는지 활기가 솟아납니다. 이것은 의학적으로 모두 입증됩니다. 사람으로 실험할 수 없으니까 침팬지의 입을 벌려 내시경을 넣고 간지럼을 태우거나 괴롭히면 위장에 피가 몰려 시뻘겋게 됩니다. 마음 상하는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증상이 소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몸은 다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하려면 30분을 해도 다 못합니다. 우리 몸의 대부분이 물로 되어 있는데 사랑의 감정이 있을 때는 물의 분자구조 자체가 바뀝니다.
사랑은 우리 정신과 마음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몸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편안하게 사는 사람들이 질병도 훨씬 적게 걸리고 스트레스 많이 받고 외톨이로 외롭게 살고 고독 속에서 시달리게 되면 빨리 죽습니다. 재작년 한 해 동안에도 통계로 나온 고립사 320건이 넘습니다. 언제 죽었는지 모릅니다. 하도 냄새가 나서 아파트에서 신고한 것을 듣고 가보면 구더기가 있고 언제 죽었는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이 방에 들어가보면 예외 없이 “너는 꽃보다 귀해, 너는 할 수 있어, 너는 행복할 거야.” 이런 책들이 꽂혀있습니다. 이런 걸 보면 인간이라는 것은 얼마나 고독한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랑을 우리 안에 충만히 주시고 우리가 그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에게는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진정한 용기는 원한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사랑에서 나옵니다. 다시 한 번 하겠습니다. 진정한 용기는 원한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사랑에서 나옵니다.
2. 심판 날에 담대함
요한1서 4장 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칼 한 자루도 휴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이 붙잡히실 때 칼을 들고 설치는 베드로를 말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칼을 가진 로마 병정에게 힘없이 체포되어 가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세상을 지배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아무 권력도 없으셨지만 담대하셨으니 그분 자신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 우리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무 근거도 없이 용기를 내라고 족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지난해와 지지난 해 8개월 동안 프리드리히 니체를 거의 매일 읽다시피 하며 보냈습니다. 덕분에 제가 많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20대 때 내가 탐독했던 니체와 40년이 흐른 지금 탐독하는 니체 사이는 정말 거리가 멀었습니다.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당연히 그의 모든 사상에 전적으로 다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책을 읽고 명상도 하면서 들었던 항의하고 싶은 것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인간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도 잘라버리고 어디로 가는지도 잘라버립니다. 그런 것은 우리의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고 하고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라고 합니다. 그러고 나면 인간이라는 것은 어떤 튜브가 있고 튜브를 타고 들어와서 삶이라는 구간을 지나 죽음이라는 구간으로 끝나고 그 다음에 어디론가 가야 인간에 대해 무엇인가 설명이 될 텐데 양쪽을 잘라 토막 내어 보여주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나무를 그대로 보여줘야 그것이 무슨 나무인지를 알 텐데 껍질을 다 벗기고 잘라서 가래떡처럼 만들어놓고 이게 무슨 나무냐고 이야기하는데 답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반문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용기를 내라고 자꾸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무엇을 근거로 용기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용기를 내라고만 합니다. 허무한 사실을 직시하고 그 허무를 씹어버리고 토해내듯이 용기를 내라고 하는데 20대 때의 저도 그 사람을 탐독하면서 그렇게 해보려고 했지만 됐으면 예수를 안 믿었을 것입니다. 그 때는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한 6년 동안을 지독한 무신론자로 지냈는데 그때 나와 붙어서 한두 시간만 이야기하면 교회 다니던 사람을 안 다니게 해 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하듯이 용기를 내는 삶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게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불과 6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뭔가 우리에게 용기를 내라고 말한다면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근거가 없이 용기를 내라고 하는 것은 허무한 인간에게 닥쳐오는 운명에 대해서 눈을 감는 만용을 부려보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성경은 진정한 용기가 만용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혈기입니다. 혈기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용기는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지금 여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몇 해 전에 영국으로 집회를 갔을 때였습니다. 한 부부가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남편도 사업을 자 하고 부인도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책을 읽고 은혜를 많이 받고 열린교회 설교를 들으면서 자기 남편이 새 사람이 되었다고 뛸 듯이 좋아하면서 저를 처음 만났는데 펑펑 울었습니다. 저도 너무 기뻤습니다. 생전 처음 만난 사람들이지만 남편이 그렇게 독실한 신앙을 갖게 되었다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몇 달 후에 그 남편이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출장 중에 심장쇼크로 갔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데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두려워하지 않는지 아십니까? 꼭 가져야 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짜 없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집에 가려면 차를 타야 하니까 차도 있어야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뭔가를 하기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닙니다. 없으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서 잃어버릴까봐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마지막 대상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는데 그 하나님을 누가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뺏기지 않으시고도 다른 사람을 충분히 사랑할 수 있는 분입니다.
참 우스운 것이, 저도 경험했지만 남자들 사이에도 셋이 늘 같이 몰려다니다가도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두 친구가 똑같이 좋을 수는 없습니다. 둘 중에 누구 하나가 그 사람을 기쁘게 한 것도 아니고 가슴 아프게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 일이 있으면 누구 하나가 더 좋거나 싫어지는 게 당연한데 똑같이 잘 지니면서도 누군가에게 더 마음이 기우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 눈에 띄게 됩니다. 그러면 나는 소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이런 점에서 네가 잘못했다고 이야기할 것은 없지만 느낌이 뭔가 저들 둘이 더 가깝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아이들 키우다 보면 형제 둘이 있는데 하나에게 잘 해주면 다른 하나가, “엄마는 나만 미워해!” 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미워한 게 아니고 다른 아이를 조금 더 예뻐한 것인데 그것을 자기는 미워한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친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것이 결국 시기가 됩니다. 사람의 사랑은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물처럼 어디론가 흘러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사랑의 감정입니다. 그런데 제가 예수 믿고 나서 발견한 신기한 것이, 내가 하나님을 사랑했고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똑같이 느끼는데, 세상에 나밖에 없는 사람처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밖에 없었어도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못 박혀 죽으셨을 것이라는 확신까지 생겼습니다. 그런데 저 사람도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상한 것은 그분이 그렇게 사랑하면 나에게 시기가 생겼을 텐데 이 사랑은 더 많은 사람이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을수록 내 마음에는 더 기쁨이 가득 찹니다.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지하교회에 있을 때, 수요예배 설교를 보통 90분에서 100분 했습니다. 시간도 늦게 8시에 시작했습니다. 하고 나면 10시가 됩니다. 마치고 나면 저는 빨리 집에서 쉬어야 하는데 교인들이 가지를 않습니다. 여기저기 서고 앉아서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하나님의 은혜 받은 이야기를 하니까, 이 은혜는 사람들이 나누어 가질수록 점점 더 내 마음속에 사랑의 기쁨이 넘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특성입니다. 세상 끝날에 임할 심판이 있지만 그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심판하시는 분이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두렵지 않습니다. 그분을 사랑하기에 심판받을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엄위하신 하나님이 온 세상을 심판하셔도 두렵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그렇게 평화롭게 죽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이 아무 잘못 없이 충분히 의롭게 살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선하시면 나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혹시 내가 연약하여 넘어지고 심지어 죄를 지었을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나를 악인 중의 한 사람처럼 여지기 않으시고 하나님의 자녀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주신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잘못하고 회개했는데도 하나님의 심판이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내가 잘못했다고 때리셔도 그분의 품으로 파고들 마음을 갖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3장 2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느니라” 성경을 보십시오.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을 말미암아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속량”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것은 로마 시대 노예제도를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그림같이 묘사하면 이렇습니다. 돈 많은 부자가 종들이 모는 호화로운 마차를 타고 가는데, 시장 옆을 지납니다. 거기 보니 노예시장이 섰습니다. 옛날에 우리 소파는 우시장처럼 말입니다. 예쁜 노예를 찾는 불량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당시에는 일을 시켜야 하기 때문에 보통 젊고 힘세고 건강한 남자 노예를 찾았습니다. 노예가 얼마나 튼튼한지를 보여주려고 노예상은 채찍으로 노예들을 때리면서 시험 삼아 보여줍니다. 채찍이나 몽둥이에 맞으면서도 자기 힘이 넘쳐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펄쩍펄쩍 뜁니다. 상품 가치를 높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날 밤에 무슨 일을 당할지 모릅니다. 그런 노예시장에 엄마 노예, 아빠 노예, 자식 노예 둘까지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그 노예들을 보면서 흥정합니다. 한 사람이 노예 넷은 필요 없고 남자 노예와 여자 노예 둘만 사가고 싶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자지러질 듯이 울고 엄마 노예는 눈물이 쏟아집니다. 이제는 생이별하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마차를 타고 가던 부자가 그 광경을 보다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종을 시켜서 가서 노예 값이 얼만지 알아보고 가격과는 상관없이 모두 사오라고 지시합니다. 종이 노예상에게 가서 가격을 물어보고 값을 지불하고 지불증서를 쓰고 노예 넷을 모두 사옵니다. 부자 주인의 집에 모두 오게 된 노예 넷을 헤어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기면서 그 집에서 노예로 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새 주인이 그 노예들을 깨끗하게 씻기고 옷을 주고 잘 먹이고 재우라고 합니다. 다음 날 아침에 주인이 노예들을 불러놓고 뜻밖의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집에는 노예가 더 이상 필요 없는데 너희가 너무 불쌍해서 샀다.” 하며 노예 해방 증서를 써줍니다. 주인이 보증하는 그 증서만 있으면 어디를 가도 자유인입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노예 가족에게 여비까지 챙겨주면서, “이제는 가서 노예로 살지 말고 편안하게 살아라.” 하며 내보냅니다. 이것이 속량입니다. “속”이라는 것은 본인이 지불 할 능력이 없을 때 대신 지불 해주는 희생입니다.
성경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죄는 우리가 지어 죄의 노예가 되었는데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속전으로 지불하시고 우리를 속량해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속량해주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 주인에게 물어보면 같은 답을 할 것입니다. 자유롭게 살게 하려고 속량한 것입니다. 노예는 그렇게 놓아주면 자유롭게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은 진짜로 자유로우려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아멘 입니까? 인간이 진짜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받지 않으셔도 되는데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엄하게 명령하신 이유는 자기 아들로 값을 주고 사셔서 노예에서 해방시켜준 우리가 다시 노예처럼 살아가는 것을 보실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그렇게 말씀하시고 계속 말 안 듣고 까불면 한 대 때리셔서 정신 차리게 만들어서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고 무서운 분이시구나!”하고 무릎 꿇고 떨게 만들어서라도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도 하나님께 얻어맞아서 곤고하게 사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혼나고 뭐 하나 되는 일이 없어서 근심과 걱정으로 사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최고의 진노는 버리시는 것입니다.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맘껏 죄인들이 타락하도록 더 이상 간섭하시지 않고 내버려 두신다고 말씀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 과정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3. 두려움의 형벌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에게 늘 따라다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두려움입니다. 크기와 정도에 따라 세상 염려와 근심, 걱정과 불안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원리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것들이 있는데 우리는 그냥 좋아하면 개나 소나 다 사랑한다고 표현합니다. “나는 컵라면을 사랑해!”, “나는 명품을 사랑해!” 온통 사랑의 이야깁니다. 심지어 114에 전화를 해도 “고객님 사랑합니다.” 합니다. 나는 사랑 필요 없습니다. 엘지 유플러스에 전화를 걸어도 “엘지 유플러스입니다. 고객님, 사랑합니다.” 자기가 나를 언제 봤다고 사랑합니까?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옴이 돋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왜 그렇게 상업적으로 사용합니까? 사랑할 필요 없습니다. 사랑하지 말고 일이나 빨리 처리해주면 됩니다. “고객님, 사랑합니다.” 하지 말고, 빨리빨리 일이나 처리해주고 돈 더 받아가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 걸 보면, 조금만 좋아하면 다 사랑한다고 표현하는데 부정확한 말입니다. 원래 사랑이라는 말은 영혼을 가진 존재끼리만 할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인간은 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나는 우리 코코를 사랑하지 않느냐? 사랑합니다. 사랑하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부부나 형제와 나눌 수 있는 동일한 관계에서 보면 안 됩니다.
개 화장터를 아십니까? 개 납골당도 있습니다. 돈을 주면 다 있습니다.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는 눈물을 별로 안 흘리고 유산이 어떻게 분배될지를 가지고 병풍 뒤에서 형제들이 다투는데 개가 죽으면 주인이 우울증에 걸린다고 합니다. 이것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너무 좋아하면 안 됩니다. 언제든지 떨어져도 괜찮을 정도로 좋아하면서 자신을 통제해야 합니다. 따라해 봅시다. “하나님 이외에는 풍덩 빠질 사랑이 없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오류입니다. 그렇게 풍덩 빠지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제가 대학에서 강의할 때 어린 학생들이 들어오면 인생 살아오는 이야기를 하면서 특히 여학생들에게 항상 이야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너희들이 불행해지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 어떤 시커먼 형제가 와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너 없으면 죽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과는 절대 엮이지 말아라. 그리고 오히려 네가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그 말을 듣고도 ‘그래? 나를 사랑한다고? 너하고 나하고 어울리는지 생각해보자.’ 이런 형제와 사귀어라.” 실제로 이렇게 말하면 사귈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어쨌든 풍덩 빠지는 그런 사랑, 금사빠, 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런 사랑은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데 두 종류의 것을 주십니다. 하나는 사용해야 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누려야 할 대상과 사용해야 할 대상을 나누어서 주십니다. 사용해야 할 대상은 그것을 사용해서 사랑해야 하는 것을 더 사랑하게 될 때 인간의 사랑의 질서가 바로잡히게 됩니다. 그것이 인간이 불행해지지 않는 비결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뀝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랑할 대상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둘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입니다. 사람을 향한 사랑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 안에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충돌을 일으키는 경우에는 참답게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충돌하지 않을 때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동일한 사랑입니다. 나머지는 그 사랑을 위해서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용할 것을 사랑하려고 하고 사랑할 것을 사용하려고 할 때 가치의 질서가 뒤바뀌면서 인간의 삶이 뒤틀리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뒤틀린 사랑을 가리켜서 악(惡)이라고 합니다. 악은 하나님의 질서에 항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서를 이기지 못합니다. 그 하나님의 질서에 어긋난 것만큼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우리의 몸을 보십시오. 우리 몸의 모든 것은 질서를 요구합니다. 먹을 만큼만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먹었으면 먹은 것만큼 운동해야 합니다. 운동한 만큼 쉬어야 합니다. 이것을 잘 조절하면서 살 때, 이 사람도 늙고 이 사람도 죽지만 이런 질서를 잘 지키는 사람은 늙는 곡선이 천천히 늙습니다. 그런데 이런 질서를 안 지키며 사는 사람은 올라가지 않고 콱! 콱! 하다가 어느 순간에 건강을 잃고 만신창이가 되어 죽습니다. 곱게 늙는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좋은 말입니다. 안 늙겠다는 게 아니라 몸과 모든 것들을 관리해서 천천히 늙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 안에 거해야 하는데 그 사랑에서 떠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다른 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아라. 만약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없느니라.” 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까? 예를 들어, 내가 사랑하려면, 사랑하는 것이 계속 있고, 내 사랑이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나만 그러면 안 됩니다. 상대방도 그대로 있고, 아니 그대로 있으면 안 됩니다. 그대로 있으면 지루합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맛있는 갈비찜을 해 오셨는데 너무 맛있습니다. “엄마 또 해줘, 또 해줘.”했는데 3일만 계속해주면 토할 것입니다. 먹기 싫고 냄새도 맡기 싫을 것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가만히 있는 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사람에게 매력이 있으려면 사귀면 사귈수록 아름다운 것이 계속 보여야 합니다. 얼마나 까다롭습니까? 사람이 계속 있어야 하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아름다운 것을 보여줘야 하고 나는 아름다운 것을 보더라도 그것이 아름다운 것인지 모를 수 있기 때문에 나도 그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것이 쇠퇴하지 않고 그것이 아름답다고 계속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를 계속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을 나만 하면 안 되고 그 사람도 나를 보면서 나를 계속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나도 계속 아름다움이 점점 더 만개하듯이 꽃이 피면서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이게 신이지 인간입니까? 예쁜 영화배우도 한참 보고 있으면 지루합니다. 우리 얼굴이야 보자마자 지루한 얼굴 아닙니까? 예쁜 영화배우도 모든 프로그램마다 그 사람이 나오면 짜증납니다. 그런데 그런 아름다움을 어떻게 그렇게 끊임없이 쏟아내며 살 수 있겠습니까?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한 것만큼 똑같은 정도로 실망하게 됩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 아닌 곳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것에서 인간의 불행이 시작됩니다.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질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런 우리의 생각에 대해서 1600년 전에 살았던 어거스틴은 우리의 폐부를 가르는 비수 같은 말을 던집니다. 저는 이 문장 하나를 읽고 몇 달 동안을 충격 속에서 보냈습니다. “공간은 우리가 사랑할 것을 제시하나 시간은 그것을 빼앗아 가 버린다.” 그의 책 “참된 철학”, “참된 종교”라는 책의 35장 65절에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가만히 곱씹어보십시오.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은 우리의 눈으로 보거나 만져지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제시하는데 이런 것들은 공간을 필요로 합니다.
어제 이태리 배우인 지나 롤러 브리지타 라는 할머니가 95세로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모르실 것입니다. 그분의 전성기가 1955년, 60년대였기 때문에 대부분 태어나지도 않은 때입니다. 엄청난 미인이었습니다. 당대 최고 미인의 심볼이었습니다. 그 배우들은 대개 늙었을 때의 모습을 잘 안 보여줍니다. 시간이 그 아름다움을 빼앗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데 사랑하는 인간의 비극은, 공간에 나타난 어떤 것이 있고 그것을 사랑하는데 시간이 그것을 빼앗아 갑니다. 그것은 없어졌지만 내 안에 사랑은 남아있습니다. 그때 인간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버릇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친구가 죽었을 때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이유는 그 친구가 없는 버릇보다 그 친구와 함께 있는 버릇이 든든하게 내 마음에 심겨져 있기 때문에 마치 살을 잘라내는 것처럼 무섭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인생의 의미가 하나도 없는 것처럼 인생을 보는 관점 자체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이런 사랑의 비극이 있습니다. 심판의 날에 엄습하는 두려움도 이기지 못합니다. 현재의 두려움도 이기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이 심판받는 날을 경고하시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백성들에게 곧 임하게 될 두려운 심판에 대해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하는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때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여기 뒤구절은 이런 뜻입니다. 심판이 너무 무서우니까 산을 이불 삼아서 숨고 싶은 것입니다. 그 두려움이 얼마나 극도에 달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확실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인간은 철이 들면서부터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우기 시작하고 그 사랑을 시작하면서 비극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행복했을 때는 사랑이 아직 무엇인지를 모를 때입니다. 사랑과 미움의 관계는 빛과 어두움의 관계와 같습니다. 어두움을 경험한 사람은 비로소 빛이 무엇인지 압니다. 사랑을 알게 됐다고 할 때는 이미 주체성이 생긴 것입니다. 그때는 미움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에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이때는 벌써 인간이 행복하지 않은 때입니다. 빛과 어둠의 대조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두려움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지만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그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슨 인생의 문제를 가지고 있든지 간에, 낚시줄처럼 많은 그 문제들은 모두 다 한 군데로 모여서 묶입니다. 그 하나에 달려있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의 사랑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하게 하심으로 여러분이 하나님 대신 세상을 사랑했다는 것, 그리고 염려하는 것을 통해서 여러분이 집착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생에서 두려움이 없는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 이것은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그런 자유를 줍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랑 속에 사는 여러분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형제를 사랑함
마지막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신 그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사람 사랑을 배운 것입니다. 예수께서 화목제물로 자신을 바치심으로 그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에 반응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1. 신자의 거짓말
당시에도 거짓말하는 신자들이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교회 출석하고 있지만 실천적인 무신론자들이었습니다. 무신론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사상적인 무신론과 실천적인 무신론이 있습니다. 사상적인 무신론은 그 생각 속에 이미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실천적인 무신론은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 삶 속에서는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먼저 심판하셔야 할 사람들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삶으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데 “고르반”이라고 말합니다. “고르반”은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뜻입니다. “내 모든 것을 주님께 다 바쳤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할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계속 쓰고 넉넉하게 사는 것입니다. 결국 고르반은 부모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부모를 위해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겠다는 방패막이인 것입니다. 그런 종류의 바리새인들은 이 시대의 교회 안에도 많이 있었고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의 핵심을 찌르면서 유명한 요한복음 4장 20절이 나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거의 아는 성경구절 아닙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합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왜? 하나님 없이도 사랑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람을 사랑합니다. 둘은 결코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믿음에 있어서도 사실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은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성경은 성경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성경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이 성립됩니까? “난 그 사람은 신뢰하지만 그의 말은 믿을 수가 없어.” 말이 안 됩니다. 그 사람을 신뢰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말을 신뢰하는 것을 통해서 그 사람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둘이 나누어질 수 없는 것처럼 사랑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 믿는 것도 똑같이 하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 때문에 믿는 것은 나누어질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믿어지는데 성경은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성경이 이야기하는데 그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가 성경을 읽었든지 안 읽었든지 상관없이 이 성경이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어지는데 이게 안 믿어진다고 하는 것은 형용모순, 논리적인 모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격적으로 만난 가장 중요한 표가 있습니다. 성경이 읽히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달콤하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마치 사랑하고 나면 어제까지는 고객과 사원의 편지였는데 사랑을 고백하고 난 후에는 연애편지가 됩니다. 처음에는 문서로 읽혔는데 주님을 사랑하고 나면 연애편지처럼 읽힙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 성령을 경험하고 나면 놀라운 것이, 이 성경이 통일성이 있게 읽혀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 성경을 통해 확신이 더해집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더 믿게 됩니다. 사랑하는 것만큼 믿게 되고 믿은 것만큼 사랑하게 되기 때문에 사랑과 믿음은 함께 가는 것이고 기찻길의 두 철로와 같은 것이고 결코 하나가 아닙니다.
사랑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랑 안에 형제가 있기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사람을 향한 사랑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사람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고? 그러면 눈에 보이는 너희 형제를 사랑하거라. 그러면 네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니라.”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입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이미 몇 십 년이 지났지만, 모든 것을 나를 위해 다 주셨습니다. 다 주실 수 있는 분이셨고 목숨까지도 주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안 들어주셨습니다. 예수 믿으시라는데 끝까지 안 믿으셨습니다. 아무리 전도를 해도 안 됐습니다. 어느 날 할머니를 불러놓고 이야기했습니다. “할머니, 이 세상에서 나를 제일 사랑하시지요?”, “그럼, 내가 널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줄 수 있지.” 사실 주실 수 있는 게 없으셨습니다. 사랑만 있으셨습니다. 내가 무릎을 꿇고, “내가 만약 간절한 소원이 하나 있는데 할머니가 들어주실 수 있는 거라면 들어주시겠어요, 안 들어주시겠어요?”, “아니, 내가 할 수 없는 거라면 못 하지만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못 해주겠니?”, “할머니, 간절한 소원이 하나 있어요. 그걸 할머니가 안 들어주셔서 내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그게 뭐냐?”, “할머니가 예수를 믿으시는 거에요.”, “그래?” 즉석에서, “내가 믿을게. 네가 그렇게 마음이 아프도록 내가 예수 믿기를 원하는데 내가 왜 못하겠니?” 그리고 그 다음 주부터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셨습니다. 항상 헌금을 가지고 오셨는데 천원은 이쪽 주머니에 넣으시고 3천원은 저쪽 주머니에 넣으셔서 3천원은 나에게 주시고 천원은 헌금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혼자 한글을 터득하셔서 성경을 읽기 시작하시고 그렇게 예수를 믿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사랑하면 믿게 되어있고, 그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이 사랑하기를 바라는 것을 같이 사랑하게 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생각과 의지의 일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형제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비유를 들어 설명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꽃이 있으면 풀이 있고, 파란 꽃이 있고 노란 꽃이 있고, 이렇게 설명을 하면 되는데 하나님과는 비슷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물건을 가지고 하나님을 설명하려는 것은 모두 다 성공하지 못합니다. 오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정말 닮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꼭 빼닮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영혼입니다. 인간의 영혼의 작용입니다. 영혼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형상이라고 해서 이런 이미지가 아니라 하나님을 닮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특성을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면 그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음악회에서 연주를 하는데 어떤 사람은 비싼 돈을 내고 와서 코를 골며 잡니다. 그런데 옆에서 어떤 사람은 계속 손수건으로 눈물을 씻으면서 1막이 끝나면 일어나서 박수를 치며 브라보를 연발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누군가에게 억지로 끌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음악을 아는 것입니다. 아는 것만큼 보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을 알고 나니까 형제 속에 있는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 형제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 자신에 대한 사랑은 나뉘지 않습니다.
2. 하나님을 보는 삶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불신자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신령한 눈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 있어서 이런 영적인 특성들이 점점 무시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감각할 수 있는 것만을 믿으려고 합니다. 이성만을 최고로 의지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맹목적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참된 것을 보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면 그 너머에 있는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속지도 않고 안전한 인생을 삽니다. 와서 살랑거리면 비비면 마음을 홀딱 빼서 다 줘버립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사기꾼이었습니다. 그 행동 너머를 볼 수 있는 것이 지혜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다른 사람들이 자연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마음의 눈으로 보는데 믿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가는데 위에 하나님이 계셔서 하나님이 모든 질서대로 움직이시면서 이 질서를 따라 사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시고 거스르는 사람들을 고통 받게 하시면서 하나님이 후려치지 않으셔도 모든 사람들이 도덕이 법칙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갖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는 신령한 것을 육신의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3. 형제를 사랑함
여기에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십시오. 하나님 이외에는 사랑하는 것이 없고 하나님을 위해서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는 그 사람이 형제를 사랑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나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나 모두 하나입니다. 쉽게 말하면,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람의 마음 안에는 형제가 있고 형제를 그렇게 진심을 사랑하는 그 사람의 마음 안에는 하나님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20절 하반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깨끗이 결론을 내립니다. 교회에서 정말 회개를 잘 안 하는 죄가 두 가지 있다고 했습니다. 게으름의 죄와 미움의 죄, 좀처럼 회개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오래 믿은 사람일수록 원한이 한번 새겨지면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몇십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나중에 “그때 분쟁하시던 분들 어떻게 됐습니까?” 물었습니다. “몇 분 돌아가시고 이제 남은 분들도 돌아가실 때가 다 됐습니다.”, “그럼 평화가 오겠네요?”, “김 목사님, 그렇게 오래 목회하셨는데 순진하십니다.”, “왜요?”, “자손이 있잖습니까?”하는 것입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 아들, 딸, 며느리, 손주들이 있는데 어떻게 평화가 오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 깊은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신앙이 깊은 게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형제를 사랑해야 비로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또,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니 형제부터 먼저 사랑하고 나서 그 다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이 나눌 수 없이 하나임을 말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러니 둘 중 하나가 제외된 사랑은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누구를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덜어지거나, 하나님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천덕꾸러기 취급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충만한 사랑으로 충만하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과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시는 사랑은 예수님께 항상 하나였습니다. 죄가 없으셨으니 항상 전 생애를 충만한 사랑 속에 사셨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예수님은 그 사랑으로 오류에 빠진 자는 꾸짖어 진리로 돌이키시고, 그 사랑으로 주린 자에게는 기적의 떡을 먹이시고, 그 사랑으로 외로운 자에게는 친구가 되어주시고, 그 사랑으로 고통받는 자를 치료해주셨습니다. 각기 다르게 대해 주셨지만 동기 그 자체는 하나님을 향한 넘치는 사랑이었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해주셨기 때문에, 당신도 하나님을 사랑하셨기에, 당신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당신의 마음에 기쁨이었기에 사랑의 삶을 사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런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라고, 당신만큼 완벽하게 이룰 수는 없지만 당신이 북극성처럼 하늘에 떠 있을 테니 우리는 그 별을 향해 노 저어 가는 뱃사람처럼 그렇게 하나님 사랑, 형제 사랑으로 노 저어 가라고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렇게 사랑하셔서 구원의 은혜를 주셨으니 그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서 주님께 은혜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