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줄로 이끄신 하나님
2021년
가을말씀사경회(저녁)
설교기간 | 2021년 10월 25일 – 10월 27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1년 10월 27일
목 차
1. 추억 속의 사진(호 11:1-3) 2021.10.25. 가을말씀사경회 저녁1 7
2. 사랑의 줄로 이끄신 하나님(호 11:4-7) 2021.10.26. 가을말씀사경회 저녁2 16
3.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호 11:8) 2021.10.27. 가을말씀사경회 저녁3 27
<설교 프레임>
사랑의 줄로 이끄시는 하나님1 2021. 10. 25. 가을말씀사경회
< 추억 속의 사진 >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호 11:1-3)
I. 본문해설
솔로몬(Solomon)왕이 죽은 후 한 나라였던 이스라엘은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분열(分裂)되었다.
호세아는 북왕국의 선지자로서 두 나라 모두에 대해 말씀을 선포하였다.
그때는 여로보암 2세 시대였다. 그는 영명(英明)했지만 신앙이 없는 군주였다. 그의 치하에서 이스라엘은 최고의 번영한 시기를 구가하였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소문난 창녀 고멜과 결혼하였다(호 1:2).
그녀는 수시로 남편을 버리고 떠나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기까지 방탕했다.
그러나 호세아는 마음이 불타기까지 고멜을 사랑했다. 형벌 같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방탕한 고멜을 사랑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II. 가르치고 안아주신 하나님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에게 추억(追憶) 속의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걸음마를 시작하는 어린 아이와 그의 손을 붙들어주며 행복(幸福)해 하는 부모와 가족이 함께 있는 사진이었다.
A. 걸음을 가르치심
호세아는 타락의 길을 가는 이스라엘의 멸망(滅亡)을 예고하면서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의 추억을 담은 사진이었다.
1. “에브라임”
에브라임은 북왕국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애칭(愛稱)이었다. 이는 애굽에서 태어난 요셉의 둘째 아들의 이름이었다(창 41:52).
가나안 정복 후 에브라임 지파는 북쪽 이스라엘의 중심부에 위치한 크고 비옥한 땅을 기업(基業)으로 받았고, 왕국이 분열될 때도 큰 영향력을 가진 지파였다.
에브라임이 므낫세의 동생임에도 야곱은 팔을 엇바꾸어 에브라임을 장자처럼 축복하였다(창 48:14).
에브라임은 야곱에게 사랑스러운 이름이었다. 이 이름은 후일 북왕국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사랑스러운 애칭이 되었다.
여기서 하나님은 깊은 애정(愛情)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에브라임”이라고 부르신다. 그와의 인연(因緣)이 애틋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낳으셨고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비록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죄 짓고 분열(分裂)하였으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께 “사랑하는 아들 에브라임”이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낯선 분이셨으나, 하나님에게 이스라엘은 여전히 사랑스럽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子息)이었다.
그 이름은 바로 당신의 이름이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영적 침체 속에서 살아가던 당신을 이렇게 생각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라.
2. 가르치심
하나님은 이제 막 일어서서 걸음을 떼기 시작하는 어린 아기 같은 에브라임에게 신앙(信仰)과 삶을 가르쳐 주셨다.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는 사랑으로 돌보며 가르쳐 주셨다.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호 11:3)
이것은 대견한 아이의 모습에 온 가족들이 박수치며 기뻐하는 따뜻한 가정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걸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져야할 신앙과 생활을 가리킨다.
그들은 이방인과 다름없었으나 그 걸음을 하나님께 배웠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신념이나 생활과는 너무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믿는 신앙의 초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참 사람으로 사는 발걸음을 가르치셨고 이스라엘은 배웠다.
하나님은 엄마처럼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쳐주고 아빠처럼 대견해 하셨다. 그를 통해 세상 사람들이 당신께 돌아오기를 기대하셨다.
추억의 사진 속에 아기의 모습은 주님을 처음 사랑할 때에 우리의 모습이다.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셨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났다. 갓 태어난 어린 아기 같은 우리는 하나님께 신앙(信仰)의 걸음마를 배웠다.
아버지 하나님은 어머니 같은 교회(敎會)를 통해 우리에게 걷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두 다리를 곧게 펴고 서는 법을 배웠다.
뒤뚱거리며 걸을 때 넘어질까 무서웠으나 하나님이 붙잡아 주셨다. 우리는 그렇게 걸을 수 있다는 사실에 신기해하며 열심히 배웠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우리를 가르쳐 주셨다. 성령을 스승 삼아 교회를 통해 인도해 주셨다. 어떻게 믿고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셨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을 기뻐했고 행복해했다. 말씀은 입술에 꿀과 같이 달콤했고 그분을 믿고 사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다.
이 기쁨은 곳간에 “곡식과 새 포도주”가 가득한 것에 비할 수 없었으니 세상이 주는 어떤 쾌락도 이에 비할 수 없었다(시 4:7).
우리는 그렇게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첫사랑의 시기에 예배(禮拜)는 감격스러웠고 말씀은 달콤했으며 기도는 뜨거웠다.
우리는 순종하기를 기뻐했으며 그럴수록 하나님은 더 많은 은혜(恩惠)를 주셨고, 그때의 교회 생활은 꿈같았다.
B. 두 팔로 안아주심
하나님과 함께 했던 처음 사랑의 때에 감격은 그뿐이 아니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를 안아주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품에 있었다.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호 11:3)
1. 안아주심
“내 팔로 안았음에도” 이것은 현재 “그의 팔들”()이다. “팔”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복수다. 즉 “그의 두 팔로 그들을 안았다”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3인칭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손바닥이나 손목이 아니라 두 팔(arms)로 안았으니 이는 하나님의 친밀한 자식 사랑의 표시다. 그때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품에 있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전까지 우리는 세상에서 버려진 자들이었다. 목자 잃은 양(羊)같이 고생하고 유리하며 방황하던 자들이었다.
우리는 버려져 홀로 있는 외로운 자들이었다. 사랑해주는 이도 없이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도 않던 인생(人生)의 밤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품에 안아주셨다.
우리가 살아온 삶이 어땠는지 얼마나 당신을 멀리 떠나 있었던지 상관없이 사랑(love)으로 안아주셨다.
세상 모든 것을 주어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그처럼 하나님께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는 사실에 감격했다.
우리는 그 품에서 처음 진정한 사랑을 받았으며 행복(幸福)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음을 배웠다. 그 안아주심을 기억하라.
2. 고쳐주심
세월은 흘렀고, 이스라엘(Israel)은 하나님의 사랑을 떠났다. 경제적으로는 번영했으나 신앙적으로 병든 나라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큰 사랑과 능력을 경험했다. 그러면 이제 자신의 병든 영혼을 하나님 앞에 고침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아니, 그들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나님의 품이 싫고 세상의 품을 더 좋게 여겼다.
질병은 속박(束縛)이 되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육체와 정신이 죄로 피폐해져 갔다.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질병 상태에 있었다. 그것은 죄(罪)의 결과였다. 하나님 사랑의 품을 떠나 타락(墮落)했기 때문에 생긴 병이었다.
이는 선지자 아내, 타락한 고멜의 마음속에 있던 죄의 질병과 같았다.
이스라엘 자기들을 더없이 사랑해주신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 번영에 취하여 음란하듯이 우상을 섬겼다.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호 11:2)
이스라엘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이 병들었다. 이는 마치 온몸과 마음이 괴질에 걸린 것과 같았다. 이는 마치 기왓장으로 종기를 긁던 욥의 몸과 같이 된 것이었다(욥 2:8).
그들을 고치실 분이 하나님 밖에 없건만 그들은 고침 받기를 거절하였으니 불신앙 위에 완고함을 더했다.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을 보내어 주셨다. 그들을 치료하고자 하셨다.
병든 이스라엘에게 약(藥)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죄 많고 악한 사람이라도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겔 33:11).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겔 33:11)
당신은 지금 어디 있는가? 여전히 상한 몸 병든 영혼으로 죽은 자처럼 비참하게 살고 있지 않은가? 다시 고침 받고 새 삶을 살라.
사랑의 줄로 이끄시는 하나님2 2021. 10. 26. 가을말씀사경회
< 사랑의 줄로 이끄신 하나님 >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호 11:4-7)
I. 본문해설
이스라엘(Israel)은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 육적으로는 번영하였으나 영적으로는 피폐(疲弊)해지고 병 들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책망(責望)하시고 타이르셨다. 자기 영혼(靈魂)의 비참한 처지를 깨닫고 돌아오도록 설득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우상을 숭배했다. 죄(罪)로 병든 영혼을 고쳐 하나님(God)을 향하여 살기보다는 세속적 번영(繁榮)을 누리기만을 원했다.
그들은 넓어진 영토와 부강한 경제력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누가 주셨는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다.
심지어 바알(Baal)에게 바친 제물도 하나님이 은총으로 주신 것이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호 2:8)
신앙(信仰)은 주시는 모든 좋은 것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이고 불신앙은 그것들만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상을 숭배(崇拜)하면 복을 받으리라는 것은 마귀의 꾀임이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탐욕(貪慾) 때문에 속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Israel)의 어린 시절에 당신이 어떻게 그들을 사랑하시고 돌보셨는지 말씀하신다. 추억(追憶)에 잠긴 듯이 말씀하신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호 11:4)
II. 사랑의 줄로 이끄신 하나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품을 떠났으나, 하나님(God)은 그들을 잊지 못하신다. 특별한 사랑으로 기르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랑의 줄”이었다.
A. 인격적인 사랑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린 아기였을 적에 걸음을 가르치셨다. 그때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끄셨다(호 11:4).
1. 사랑의 줄
“사람의 줄들로”()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解析)이 있다.
첫째는, 부드러운 줄이라는 해석이다. 이스라엘을 “길들인 암소”로 보고(호 10:11), 그 줄이 짐승의 목에 매다는 거친 줄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문학적으로, 이어지는 하반절의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라는 표현과도 어울려 보인다.
둘째는, 이것을 걸음마를 돕도록 고안된 줄이라고 보는 해석이다. 그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는 줄이라는 것이다.
사람을 묶는 줄이라는 것이 결코 긍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점은 이러한 해석을 지지하게 한다.
걸음마를 위해 붙잡는 줄이라는 해석은 “사람의 줄”이라는 표현(表現)과 어울린다. 또 “짐승의 멍에”와도 대비된다.
이는 이스라엘에게 걸음마를 가르치시던 하나님의 인격적(人格的) 사랑을 보여준다. 강압(强壓)하는 줄이 아니라 스스로 붙들고 걷게 하는 줄이니, “줄들”이라는 복수(複數)는 그것을 강조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사랑해 주신다. 당신 뜻대로 하실 수 있으시지만 우리의 마음에 설득하신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타락(墮落)하여 하나님 가슴에 못질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으로 다가오신다. 이것이 사랑이다.
하나님은 알아듣도록 말씀하시고, 만약 우리가 듣지 아니하면 듣도록 마음이 변화(變化)될 때까지 기다려 주신다.
비록 마음 아프실지라도 강제로 하지 않으시고 깨달아 인격적(人格的)으로 돌이키게 하신다.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신다.
2. 죄의 멍에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등에서 죄의 멍에를 벗겨 주셨다. 불순종한 그들의 죄(罪)는 언제나 무거운 노예(奴隸)의 멍에가 되었다.
그들은 고통 받을 때 부르짖었고 그러면 하나님은 죄를 용서해 주셨다.
이런 일이 반복되었다. 하나님은 속임을 당하는 것 같으셨을 텐데도 언제나 용서(容恕)해 주셨다. 그들의 죗짐을 벗겨 가볍게 해주셨다.
이제껏 우리가 살아온 삶에 대한 묘사(描寫)는 이것이다. 세상을 사랑하여 죄(罪) 짓고 불순종하여 무거운 멍에를 짊어진 채 살았다.
불순종한 이스라엘은 죄짐에 등이 벗겨지고 피가 흘렀는데도 또 다시 죄를 지었다. 우리도 그랬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悔改)할 기회를 주셨고, 또한 뉘우치면 용서(容恕)해 주셨다.
음란한 아내가 배반(背反)했어도 선지자(先知者)는 그녀가 다시 돌아올 때마다 변함없이 사랑하고 용서해 주었다.
그 점에서 호세아(Hosea)는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容恕)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豫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용서해 주셨다. 그때마다 우리의 무거운 죄의 멍에를 벗겨 주셔서 자유(自由)를 누리게 하셨다.
우리가 회개하는 시간은 얼마나 복된가?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는 얼마나 행복(幸福)했는가?
우리의 무겁던 영혼은 깃털같이 가벼웠으니, 몸은 땅에 살고 있으나 마음은 하늘을 날지 않았는가?
무엇 때문인가?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하였는가?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사 용서해 주시는 은혜(恩惠) 때문이었다.
언제나 죄 짓고 불순종(不順從)한 자는 우리였고, 용서하시고 구원(救援)해주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우리가 현실(現實)을 이토록 무겁게 느끼는 것이 단지 세상(世上)의 무게 때문일까? 회개하지 않는 우리 영혼의 무게가 아닐까?
언제까지 죄의 멍에를 지고 힘겹게 노예(奴隸)처럼 살겠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주신다. 이제 그 사랑의 품으로 돌아가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3. 양식주심
하나님은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밭 갈기 위해 하루 종일 애쓴 가축에게서 멍에를 벗겨준 후, 먹을 것을 주는 농촌의 풍경이다.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호 11:4하)
소는 주인의 농사(農事)에 유익(有益)을 줄 목적으로 멍에를 짊어졌으니 밭을 간 후에는 양식(糧食)을 먹을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단지 우상을 숭배하고 불순종함으로 멍에를 짊어졌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을 뿐이니, 자기들이 대적한 분에게서 양식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범죄(犯罪)한 이스라엘의 죄 짐을 벗기시고 양식까지 주신다.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의 양식까지 주신다.
무엇 때문인가? 하나님의 사랑(love)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도(聖徒)들뿐만 아니라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罪人)들도 사랑하신다.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 가슴에 칼질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주님은 멍에를 벗기시고 안식을 주신다.
굶주린 영혼(靈魂)을 위해 생명의 양식을 주신다. 육신의 양식 뿐 아니라 영혼에 생명을 주셔서 다시 살게 하신다.
오랜 세월 동안 죽었던 자도 하나님은 하루아침에 다시 살려내신다.
우리가 무슨 힘으로 인생을 살아왔는가? 풍랑이는 바다위에 위태로운 쪽배처럼 가련한 우리가 어떻게 파선하지 않고 살아왔는가?
굶주린 우리 영혼에 주신 말씀 때문이 아닌가? 그 말씀의 은혜(恩惠)가 우리를 살게 했고 마른 뼈 같던 영혼(靈魂)을 구원하지 않았는가?
죽은 영혼으로 살아온 우리의 날들은 얼마나 힘겨웠는가? 하나님께로 돌아와 말씀의 은혜를 받으라. 다시 살리시는 주님을 만나라.
B. 돌아오지 않음
그러나 이스라엘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죄의 멍에로 등이 벗겨져 피가 흐르고 영혼이 핍절하게 되었어도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았다.
“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호 11:5)
여기서 호세아는 영적으로 죽어가는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육적으로 죽어가던 이스라엘과 오버랩(overlap) 시킨다.
옛날, 저들은 궁핍 속에서 죽어갔고, 이들은 타락(墮落) 속에서 죽어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되었다.
그들은 약속(約束)의 땅을 유업(遺業)으로 받았다. 기적의 만나를 먹었다.
그러나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들 중 아무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 모두 광야(曠野)에서 죽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향하고 있었으나 그곳은 결코 그들의 목적지(目的地)가 될 수 없었다.
신자가 세상(世上)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거기로 돌아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구원 받았을 때 거기를 이미 떠났기 때문이다.
신자에게는 두 가지 선택(選擇)밖에 없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세상을 위해 사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에게 세상(世上)은 이미 불타서 끊어진 다리 저 건너편에 있는 것이니 어찌 그리로 갈 수 있으랴?
신자(信者)는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을 향해 있는 사람이다. 살아도 주님 앞에서 살고 죽어도 그분 앞에서 죽도록 운명(運命) 지워진 사람이다.
교만한 이스라엘은 번영(繁榮)을 구가하고 있으나 결국은 새로 일어나는 신흥 강국인 앗수르(Assyria)에게 멸망 당할 것이었다.
그럴수록 하나님의 마음은 불탔고 선지자는 목 놓아 우는 울음으로 외쳤다.
“사랑하는 이스라엘아, 너는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라!”
하나님은 자녀(子女) 같고, 또한 연인(戀人) 같은 이스라엘을 부르신다.
III. 적용과 결론
신앙(信仰)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사랑하기보다 마음(heart)으로 그분의 음성(音聲)을 듣는 것이다.
그에게 걸음마를 위해 줄을 잡아주던 어린 시절을 추억(追憶)하시면서 목 놓아 울 듯이 부르신다.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하나님을 떠난 채 살아갈 것인가? 또 그렇게 해서 얻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죄의 멍에를 지고 어찌 행복하겠는가?
눈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사랑의 품으로 지금 돌아오라.
사랑의 줄로 이끄시는 하나님3 2021. 10. 27. 가을말씀사경회
<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 >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
I. 본문해설
호세아의 아내 고멜(Gomel)은 수없이 가출하고 외간남자들과 정(情)을 통하고 자식까지 낳았다. 그러다가 자기가 아쉬울 때는 집에 돌아왔다.
이런 음란(淫亂)한 삶은 이스라엘의 타락한 신앙생활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호세아는 그런 아내를 하나님 명령(命令) 때문에 할 수 없이 데리고 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마음은 고멜을 향한 순수(純粹)한 사랑으로 불타고 있었으니 이는 육정(肉情)의 사랑이 아니라 영혼의 사랑이었다.
이것을 통해 호세아는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을 온몸으로 체험(體驗)하였다.
호세아는 더욱 불타는 심정(心情)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II.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변심(變心)하였다. 그들은 이제 아버지 같은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신앙의 걸음마를 배우던 시절의 이스라엘이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은 오래 전에 하나님을 떠났고 물질적 번영의 쾌락과 우상숭배(偶像崇拜)에 빠져 있었다.
비록 들어주는 이 없어도 호세아는 심장(心腸)이 타들어 가는 안타까움으로 타락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였다.
A. 버리지 않으심
그들은 죄(罪) 짓고 불순종하였다.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나 타락하였다. 순결한 처녀(處女)와 같던 이스라엘이 영적으로는 창기(娼妓)처럼 되어버렸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차마 이스라엘을 버리실 수가 없었으니, 이는 그들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호 11:8)
이는 그냥 던져 주시는 말씀이 아니었다. 차라리 당신에게 무심(無心)해져버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절규였다.
이스라엘(Israel)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있어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놓아버리실 수 없었다. 그것은 사랑의 힘이었다.
슬픈 선지자(先知者), 호세아의 마음도 타락한 고멜을 향해 똑같았다.
여기 나오는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성이 심판을 받아서 멸망할 때 불타서 파멸된 도시다(창 10:19, 신 29:23).
“…옛적에 여호와께서 진노와 격분으로 멸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무너짐과 같음을 보고 물을 것이요”(신 29:23하)
그 두 성들은 타락(墮落)하여 하나님의 심판(審判)을 받았는데, 지금 이스라엘이 그들과 똑같은 죄(罪)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아닌가?
하나님은 그들의 죄와 불순종은 미워하셨으나 이스라엘은 미워하실 수 없었다.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심정으로 그들을 사랑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죄(罪)에서 돌이키지 않았다.
“그들이 …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 너희 딸들은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을 행하는도다”(호 4:13)
우상숭배 자체도 끔찍한 죄였으나 그들은 성적(性的)으로도 타락하였다.
우상숭배는 세상(世上) 사랑의 극치였으니, 이는 우상의 제의(祭儀) 안에서 성행위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 바알종교와 성적 타락
정의(正義)로우신 하나님이시기에 그들을 심판(審判)하셔야 했지만 그들이 멸망(滅亡)의 고통을 당하는 것을 차마 보실 수 없었다.
이는 이스라엘에게 어떤 장점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기고자 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종교적 혼합주의를 미워하셨다.
하나님은 마땅히 우상숭배(偶像崇拜)로 타락하고 음란한 그들을 심판(審判)하셔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의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간직하고 계셨기에 그들을 차마 버리실 수가 없었다.
당신이 살아온 날들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누가 불붙는 하나님 사랑에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곤고(困苦)해진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罪) 때문이다. 하나님을 위해 살다가 힘들어진 것이 아니다. 스스로 불순종하여 은혜에서 미끄러짐으로 곤고해진 것이다.
아내 고멜(Gomel)을 차마 버리지 못하던 호세아의 마음은 하나님의 심정이 아닌가? 선지자는 찢어지는 가슴으로 타락한 아내를 찾아다녔다.
그때 그 선지자의 마음이 바로 세상을 사랑하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신앙(信仰)이 무엇인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느끼는 것이 아닌가? 그에 비해 냉담한 채 불순종하는 것이 불신앙 아닌가?
우리가 아무리 어두운 인생(人生)의 밤을 지날지라도 두 가지 사실만 잊지 말고 붙든다면 우리는 반드시 다시 살 수 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B. 불붙는 긍휼
그때 이스라엘은 마치 하나님의 손끝에 붙은 더러운 벌레와 같았다. 하나님은 그들을 떨쳐서 심판(審判)의 불구덩이에 던지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 말한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
여기서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라는 말의 의미(意味)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어찌 돌이킬 일을 하시겠는가?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민 23:19상)
이스라엘의 죄악을 생각하면 공의(公義)로써 심판하셔야 마땅했다. 그러나 또 다른 하나님의 성품이 참고 기다리시게 하였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矜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나의 긍휼”()이라고 하셨다. 긍휼(compassion)이란 자신의 성품의 자비함 때문에 남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다.
사랑이 다이아몬드(diamond)라면, 그것은 세 국면(局面)을 가지고 있는데 오래참음, 자비와 긍휼이다.
긍휼은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인데 이 사랑 받는 사람의 가치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의 박애(博愛)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죄는 이스라엘이 지었는데 긍휼은 하나님이 베푸신다. 다시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오직 주 하나님(God) 안에서 발견된다.
그들이 받을 형벌(刑罰)을 생각하시며 마음 아파하신다. 이것이 긍휼이다.
긍휼은 죄인을 자비롭게 여기는 마음이다. 자비는 비참하게 된 책임(責任)을 주목하기보다는 비참(悲慘)한 상태 자체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간(時間)을 초월한 채 그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것이다.
이는 당신은 십자가(十字架)의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못 박혀 죽어 가시면서도 자기를 죽인 죄인(罪人)들이 받을 형벌을 생각하며 기도하셨다.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눅 23:33-34)
지금 하나님은 영적으로 곤고(困苦)하게 된 이스라엘의 비참한 영적 상태를 보며 찢어지는 마음으로 탄식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이 면류관이라면 긍휼은 그 관에 박혀 빛나는 보석과 같다.
우리는 죄에 미끄러져 영혼이 비참(悲慘)하게 되어도 자신을 위해서 울지 않는다. 이스라엘을 닮지 않았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가슴 아파하신다. 우리를 향한 사랑과 긍휼 때문이다.
이렇듯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 없이 어찌 신앙(信仰)을 말할 수 있겠는가? 번영할지라도 거기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 하나님의 긍휼(矜恤)을 아는 것이 신앙이다.
그 마음으로 자신의 영혼(靈魂)의 비참한 상태를 공감하는 것이 신앙이다. 그래서 신앙이 깊은 사람에게는 향상 하나님의 심정(心情)이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우리는 망가진 자신을 고칠 희망(希望)이 우리에게 없음을 알아야 한다. 스스로에게 놀라 자지러지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한다.
“은혜(恩惠)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고 죄(罪)는 하나님 없이 살게 한다”
부모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것이 효도(孝道)다. 철없던 때는 부모(父母)가 제 마음 몰라준다고 원망했다.
그러나 자신도 부모가 되어보면 그 심정(心情)을 알게 되지 않는가?
하나님의 그 마음을 기억하고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라. 그분께 신앙의 걸음마를 배우던 사랑스럽던 시절로 돌아가라.
III. 적용과 결론
우리의 모든 비참과 절망(絶望)은 우리 자신의 죄(罪) 때문에 생긴 것이다.
회개하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발견된다.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 이것을 믿는 것이 신앙이다.
자식의 비참(悲慘)함을 알고 아파하지 않는 부모(父母)가 어디 있겠는가?
당신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기억하라. 더 이상 하나님을 떠나 비참하게 살지 말고 그분의 품으로 돌아오라.
사랑하시고 부르면 부르실수록 하나님을 멀리 떠났었다. 이제 돌아오라.
사랑의 줄로 이끄시는 하나님(2021.10.26._가을말씀사경회(저녁))
1. 추억 속의 사진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호11:1-3)
녹취자 : 허혜숙
I. 본문해설
오랜 세월이 흘러 빛바래고 낡았지만 언제나 그 사진은 우리를 오랜 기억 속으로 데려갑니다. 거기엔 따뜻한 가족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왕이 죽은 후 한 나라였던 이스라엘은 북 왕국과 남 왕국으로 분열되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북 왕국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두 나라 모두에 대해 말씀을 전함으로 그의 마음에 하나의 하나님의 나라만 있었던 것을 보여줍니다. 이 때는 여로보암 2세 때로서 북 왕국 이스라엘 국운이 융성하던 때였습니다. 왕은 영명한 군주였습니다. 세속적으로는 영명했으나 신앙적으로는 믿음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육적으로는 부강한 나라가 되었고 영적으로는 가난한 나라가 되었던 것입니다.
호세아는 모든 선지자 중에 탁월한 선지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 사랑의 화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온 몸으로 하나님 사랑을 예언했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소문난 창녀인 고멜과 결혼했습니다. 그녀는 이 애틋한 남편의 사랑을 저버리고 수시로 떠나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기까지 방탕 헸습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마음이 불타기까지 고멜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었을 뿐 아니라 그 사람 마음 안에 불타고 있는 진정한 사랑이었습니다. 형벌 같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방탕한 고멜을 끝까지 사랑했으니 그래서 찢어지는 그의 가슴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II. 가르치고 안아주신 하나님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에게 추억속의 사진 한 장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어린아이와 그의 손을 붙들어주며 행복해하는 부모와 가족들이 함께 하는 사진입니다. 그 사진을 보여주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여기까지 인도했는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들을 설득하고 돌이키게 하여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안기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A. 걸음을 가르치심
그 사진 속에는 제일 먼저 걸음을 가르쳐주신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타락의 길을 가는 이스라엘에게 멸망을 예고하면서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고멜을 향해 자신이 마음에 타들어가는 그 사랑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역사의 초기 추억을 담은 사진이었습니다.
1. “에브라임”
하나님은 이 북 왕국을 가리켜 에브라임이라고 부릅니다. 이 명칭은 북 왕국 이스라엘에 대한하나님의 애칭이었습니다. 원래 이 에브라임이라는 것은 사람 이름으로부터 왔고 애굽에서 요셉이 낳은 두 아들, 큰 아들은 므낫세였고 둘째 아들은 에브라임이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지파가 되었고 출애굽을 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간 때에는 북 이스라엘의 중심부에 위치한 크고 비옥한 땅을 기업으로 받았고 왕국이 분열 될 때에도 큰 영향력을 가진 강력한 지파였습니다. 요셉에게는 므낫세라는 장자와 그의 동생 에브라임이 있었는데 아버지께로 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축복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당연히 아버지 야곱이 오른손을 큰 아들 위에 얹고 왼 손은 작은 아들 위에 얹어 축복해 줄 줄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야곱은 손을 어긋 맡겨 오른손은 차자에게 그리고 왼손을 장자에게 얹으며 축복했습니다. 요셉은 이것을 못 마땅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 좋은 대로 그 둘째 아들에게 한없이 축복하였습니다. 에브라임이 므낫세의 동생임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큰 축복을 받았다고 창세기 18장 4절이 말합니다. 야곱에게 이 생명같이 사랑했던 요셉의 자녀 특히 마음이 기울였던 이 에브라임은 얼마나 사랑스런 손자의 이름이었을까요? 아마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자였을 것입니다. 이 이름은 후일 북 왕국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사랑스런 애칭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에브라임이라고 부르실 때에 말할 수 없는 깊은 애틋한 정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인연이 애틋하였으니 하나님이 에브라임을 낳았고 또한 그들을 기르시고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이 나라가 갈라지기 전 애굽에서 출애굽 하던 때까지 회상시키시면서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보여주셨으니 이는 에브라임으로 호칭하지만 북 왕국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애틋한 추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죄를 짓고 징벌을 받아 나라가 둘로 쪼개졌지만 이스라엘은 역시 아직까지도 하나님께 여전히 사랑하는 아들 에브라임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 낯선 분이셨을 수 있었지만 하나님에게 이스라엘은 여전히 사랑스럽고 너무나 소중한 자식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범죄 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마음으로 오늘 여러분들을 바라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전에 받았던 구원의 은혜, 하나님이 나를 시험에서 건져주셨던 사랑, 그리고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때 그 고통을 능가하는 기쁨으로 채워주시던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불신앙은 바로 이것을 잊어버리는 것을 우리가 불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보시면 기독교는 끊임없는 회상의 종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해를 두고 계속해서 모세를 비롯한 선지자들이 상기시켰던 것이 하나님이 너희를 어떻게 애굽에서 건져내셨는지를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몇 백 년이 흘렀는데도 계속 같은 이야기인 것입니다. 광야에서 너희를 어떻게 먹였는지 기억해보라, 어떻게 너희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어떻게 광야에서 수많은 전쟁에서 왕들을 이기게 하시고 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셨는지를 기억하라, 그래서 성경에는 기억하라, 기억하라, 잊지 말라, 잊지 말라, 가슴에 새기라 이런 명령어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신앙이 복잡한 것 같지만 하나님이 일찍이 이 인류를 위해, 나를 위해 하신 일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효도도 똑같은 것입니다. 부모와 같이 살다보면 이런 저런 일이 왜 없겠습니까? 상처 안 받은 자식이 어디 있겠으며 섭섭하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효도는 그 중에서 진짜 중요한 것을 기억하면서 그 부모로부터 받은 은덕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효도입니다. 불효는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신앙도 똑같습니다. 신앙은 그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불신앙은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사경회를 하는데 여러분들에게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 사경회를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뭔가 기적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 정신이 팔려서 잊고 있었던 하나님,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위해 어떤 놀라운 일을 하셨고 어떤 구원의 은혜를 주셨고 그리고 여러분들의 신앙이 어린아이였을 때에 어떻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돌보고 사랑하셨는지를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2. 가르치심
하나님은 에브라임이라고 부르시면서 그들에게 걸음을 시작한 그 광경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막 걸음을 떼어 시작하는 어린아이 같은 에브라임에게 신앙과 삶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더 이상 더 어떻게 할 수 없는 그 최고의 사랑으로 에브라임을 돌보며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이것은 대견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걷지 못하던 아이가 간신히 일어서서 한걸음, 두 걸음 떼어놓을 때 온 가족이 기뻐하며 박수를 치며 좋아하는 따뜻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걸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이방인과 다름없었으나 그 걸음을 하나님께 배웠습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신념이나 생활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믿는 신앙의 초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참 사람으로 사는 발걸음을 가르치셨고 이스라엘은 배웠던 것입니다. 신앙은 인간성을 회복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인간이 아니라는 애기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인데 짐승 같은 것이 섞여있습니다. 그래서 그 짐승 같은 것을 모두 버리고 참 인간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신앙을 가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우리가 처음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했을 때에 우리가 배웠던 것들입니다. 추억 속에 있는 하나님은 엄마처럼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쳐주셨고 아빠처럼 대견해 하셨습니다. 그들의 믿음과 삶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대하시며 에브라임에게 발걸음을 가르쳐주셨던 것입니다. 추억 속에 담겨있는 아기의 이 모습은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나게 하셨고 하나님은 갓 태어난 어린아이 같은 우리를 인도하셔서 하나님을 향해 사는 신앙의 걸음마를 배우게 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어머니 같은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걷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손을 잡고 일어섰습니다. 두 다리를 곧게 펴고 걷는 법을 배웠습니다. 뒤뚱거리며 걸을 때 넘어질까 무서웠지만 하나님이 붙잡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걸을 수 있다는 사실에 신기해하고 놀라워하며 열심히 그 걸음마를 배웠습니다. 그 때 여러분들은 얼마나 순수했었는지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에서 방황하고 온갖 쓴 물을 마시다가 주님께 나와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모든 것이 신기하기 짝이 없었고 그렇게 무가치하고 자신도 버리고 싶을 만큼 의미 없고 값어치 없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이 하나님 앞에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고 비로소 삶에 자존감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어디서부터 왔고 어떻게 살아야 하고 마지막에는 어디로 돌아가야 할 것인가를 예수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를 통해 우리는 그 걸음마를 배웠습니다. 성령을 스승 삼아 교회를 통해 우리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때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신기했고 기뻤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배부르고 행복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입술의 꿀과 같이 달콤했고 기도시간은 향기로웠으며 지체들과 함께 교제하는 시간은 낙원에서 휴식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분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즐거웠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그 기쁨은 우리의 곳간에 우리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가득한 것에 비할 수 없었으니 세상이 주는 어떠한 즐거움도 이 신령한 은혜의 기쁨에 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그렇게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첫사랑의 시기에 예배는 감격스러웠고 교회의 교제는 달콤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꿀 같았고 우리의 기도시간은 우리의 영혼이 맘껏 숨 쉬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나 같은 죄인을 빌어서 하나님을 위해 사용해 주시는 은혜에 감격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신 것에 감사했습니다. 순종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고 그럴수록 하나님은 더 많은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교회 생활은 꿈같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왜 이런 사랑과 은혜를 잃어 버렸느냐고 물으면 현실이 너무 힘들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묻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사람 중 힘들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혼자만 힘든 척 하지 마십시오. 아무도 그런 식으로 인생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여러분들을 가엾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생이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이 외로움과 단독자로 서 있는 이 서러움은 사람이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한 이불을 덮고 사는 부부도 목숨까지도 기꺼이 줄 수 있는 부모조차도 그 자식의 고독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살아있다는 것은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 말고 누가 인생을 대신 살아주겠습니까? 현실이 힘들다. 그러면 묻고 싶습니다. 언제쯤 현실이 만만하던 때가 있었습니까? 그리고 그 만만하던 때는 여러분들이 열렬하게 주님을 사랑하던 때였습니까?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려울 때는 어려워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며 은혜의 부흥을 누리고 모든 것이 평화로울 때는 모든 것이 감사했기 때문에 은혜의 감격을 누렸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모든 것이 평화로우면 그래서 미끄러져 시험에 빠져 유혹에 떨어졌고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불평과 불만으로 마음이 강퍅해졌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냉정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현실을 핑계 댈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역사 중 가장 부강한 때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심판을 앞두고 있었고 그들의 영혼은 말라깽이가 되어버렸습니다. 현실이 힘들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지금 이 순간에도 예배 시작하고 벌써 한 사람이 목숨을 끊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34분마다 한 사람씩 자살을 합니다.
말씀을 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끊임없이 현실 핑계만 대면서 자신의 믿음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을 합리화하면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쯤 그것이 끝나겠으며 끝날 때쯤이면 여러분들이 뜨거운 믿음생활을 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은혜의 부흥을 누렸던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모두 꽃밭을 걷던 때가 아니었습니다. 모두 시련이 있었고 고난이 있었던 때였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책이나 혹은 인터넷에 들어가서 한 번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고 있는 목사님들의 간증을 들어보십시오. 그 중 아무도 쉬운 인생을 살아오신 분들은 없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정말 곱게 자라서 꽃길만 걸어가는 것 같지만 그러나 죽음을 넘나드는 고통이 그 때도 있었고 지금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서 순수한 신앙으로 단련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그 처음 사랑, 말씀드린 그 은혜의 감격, 첫 걸음을 떼어놓으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교회를 기뻐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교제를 기뻐하며 믿음으로 섬기던 그 때가 언제입니까? 그리고 지금은 여러분들이 왜 은혜에서 미끄러졌는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B. 두 팔로 안아주심
어디 그 뿐입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르쳐주셨을 뿐 아니라 두 팔로 안아주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했던 처음 사랑하던 그 때 그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안아주셨습니다.
1. 안아주심
우리말 성경에는 ‘내 팔로 안았음에도’ 라고 나오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그가 그 팔들로 안아주셨지만’이라고 나옵니다. 즉 하나님이 자신을 3인칭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손바닥이나 손목이 아니라 두 팔로 가슴에 꼭 안기도록 안아주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친밀한 자식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품 안에 있었습니다. 그 분의 심장의 박동소리를 들으며 그 분의 체온을 느끼며 그 분의 사랑 안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사랑 안에서 행복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전까지 우리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우리를 안아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품에서 진정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행복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받는다는데 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신앙은 주님의 품 안에 안겼던 때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품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 그 분의 품을 파고드는 것이 신앙입니다. 시련과 고난을 만나면 그것 때문에 주님의 품으로 피하고 좋은 것을 주시면 그 좋은 것들 보다도 좋은 것들을 주심으로 나에게 당신의 넘치는 사랑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품으로 파고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께 감사하고 주님이 주신 것들을 소유하는 기쁨보다도 더 큰 하나님께 사랑받고 하나님을 소유한 그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2. 고쳐주심
그 뿐입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고쳐주시는 분이십니다. 세월은 흘렀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하나님이 그들을 내버려두시지 않으셨습니다. 구약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의 믿음이 융성하고 타락했던 역사가 있고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신 역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대조를 해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영적인 어둠 속에 있을 때마다 하나님은 더 능력 있는 선지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같은 시대가 바로 아합의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타락하고 타락할수록 더 강력한 말씀을 가진 더 뜨거운 사랑을 가진 선지자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지를 그들에게 모두 알게 하시고 거기에서 깨닫고 돌아오도록 그들을 더 강력하게 부르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더 부강한 나라가 되었지만 신앙적으로는 더 골병이 든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은 큰 사랑과 능력을 경험했지만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병든 영혼을 하나님 앞에 고침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습니다. 아니 그들은 그렇게 고침 받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품이 싫고 세상의 품을 더 좋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질병은 속박이 되었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질병적인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육체와 정신은 죄로 피폐해져 갔으니 이스라엘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의 품을 떠나 타락했기 때문에 생겨난 마음의 병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선지자의 아내 타락한 고멜의 마음속에 있었던 죄의 질병과 같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한없이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 번영에 마음을 뺏기고 우상을 섬기기에 골몰하였습니다. 그래서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마음 깊이 병들었고 모든 정신이 썩었습니다. 이는 마치 온 몸이 괴질에 걸린 것과 같았으니 마치 욥이 기왓장으로 자신의 종기를 긁으며 괴로워하던 모습과 꼭 같았습니다. 그들은 고치실 분이 하나님밖에 없는 분인 줄 알고 그 분께 돌아가 새로운 삶을 살아야 했으나 그들은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헌데를 고쳐 치료받는 그 과정에 고통을 겪기 보다는 그냥 죽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살아가던 우리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이 그렇게 처음 사랑으로 우리를 맞이해주시고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하나님이 기적처럼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피할 길을 주시고 고난의 계곡에서 우리를 건져주셨는데 그 사랑을 잊어버린 채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처음 사랑의 때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두 팔로 우리를 안아주셨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전까지 우리는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이었습니다. 목자 잃은 양 같이 유리하고 방황하였으며 우리는 버려져 흩어져 홀로 살아가고 있는 외로운 자들이었습니다. 사랑해 주는 이도 없이 홀로 이 세상에 버려진 자들이었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던 인생의 밤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그 세상에서 건져 번쩍 들어 우리를 당신의 품에 안아주셨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삶이 어땠는지 얼마나 괴롭고 곤고했는지는 상관이 없이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으로 안아주셨고 그 품 안에서 우리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난 날 우리의 곤고한 인생 때문에 서러움에 흘린 눈물이었고 주님을 만나고보니 이 모든 것이 남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주님을 버리고 멀리 멀리 떠났던 나 자신 때문에 생겨난 불행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눈물을 흘렸고 회개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사랑해 주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꿀같이 달았으며 기도의 시간이 천국의 향취처럼 느껴졌습니다. 언제나 돌아오면 하나님은 거기에 계셨고 거기에서 언제나 변함없이 탕자를 기다리던 것처럼 우리를 맞아주셨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주어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는 사실에 대해 깊이 감격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서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고 그래도 하나님은 이 세상에 내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더 아름답기 때문에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지금도 나를 붙들고 계시다는 사실을 깊이 터득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는 그 품에서 난생 처음으로 진정한 사랑을 깨달았으며 모든 인류가 마지막으로 돌아가야 할 궁극적인 사랑의 품이 하나님 품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학문이나 철학, 인생의 모든 견해 속에서도 쉴 곳을 찾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결국은 이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에 슬픈 자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한 번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 그리고 다시 주님을 만나던 때의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들은 어디에 가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번영하면 번영할수록 하나님을 버렸고 그 옛날 광야에서는 어려운 일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고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을 붙잡을 것이니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나쁜 일도 좋은 일이 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좋은 일고 모두 나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이 곤고하고 어려운 때를 지나면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언제쯤이면 우리 인생의 숙제가 모두 끝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숨을 거두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우리는 이런 저런 일에 시달릴 것이고 기쁨이 약간 있겠지만 슬픔과 고통 아픔 속에서 우리의 인생은 흘러 갈 것입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아프기 때문에 아파하고 슬프기 때문에 슬퍼해야 한다면 신앙이 도대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은 이것입니다. 신앙은 이 모든 인생의 희 노 애 락에 메이지 아니하고 그것이 주는 의미를 붙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두움 속에서도 빛을 발견하고 좌절하는 가운데서도 일어설 수 있는 용기와 이유를 발견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힘을 주고 그것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고 그것이 우리에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가도록 만들어주는 믿음이고 확신이요 신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어디에서 여러분들의 믿음이 떨어졌는지를 되돌아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해 지십시오. 그리고 모든 핑계를 버리고 주님 앞에 자신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고 여러분들의 믿음이 어느 지경에 와 있는지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처음 사랑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있습니까? 그 뜨거운 감격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살아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여전히 여러분들의 마음에 그렇게 달콤한 양식이 되고 있습니까? 생수와 같은 주님과의 만남이 여러분들의 기도 속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너는 어린아이였을 적에 내가 너를 가르치고 두 팔로 안아주었던 것을 기억하고 내 품에 돌아오라. 추억 속의 사진을 보여주시면서 여러분들은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신앙은 인격적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믿기 싫어하면 아무도 여러분들에게 믿음을 강제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고요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회상하는 것입니다.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했던 날이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웠으며 주님을 멀리 떠나서 살던 날들이 얼마나 곤고했는지를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아보십시오. 인생의 무게가 가벼워집니다. 마음을 쏟으며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해 보십시오. 인생의 무게가 가벼워집니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내가 느끼는 인생의 모든 무게가 하나님을 멀리 떠난 내 영혼의 무게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고치실 분이 하나님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병든 몸을 고치는 것도 거절했고 불신앙 위에 완고함을 더했습니다. 하나님은 차마 그들을 버리시지 못하시고 선지자를 보내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들을 치료하고자 하셨습니다. 영혼이 병든 이스라엘에게 약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두 팔로 안아주신 그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 품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그 사랑의 힘으로 모든 현실을 이겨나갔습니다. 우리가 만난 어려움들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무지개처럼 펼쳐지는 한 신호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습니다. 그 때도 우리의 약함을 알았습니다. 은혜 받을 때 치고 우리가 언제 인생에 대해서 자신만만하던 때가 있었습니까? 그렇게 연약함을 느끼면 느낄수록 우리는 주님의 품을 파고들었고 주님의 안아주심을 사모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어여삐 보시고 그런 우리를 안아주시고 죄가 있으면 용서해 주시고 연약하면 힘을 주시고 무지한 우리에게는 눈을 뜨게 하셔서 진리를 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순수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이 품으로 돌아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아무리 죄 많고 악한 사람이라도 그들이 죽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여전히 병들고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멀리멀리 떠나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래서 곤고한 삶을 힘겹게 이어가고 있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져서 사는 그 삶의 끝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희망은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있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는데 있으니 오늘 이 말씀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고 다시 영혼의 고침을 받고 새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사랑의 줄로 이끄신 하나님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칼이 그들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하리니 이는 그들의 계책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호11:4-7)
녹취자: 이새봄
I. 본문해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서 제11장 4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칼이 그들의 성읍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 하리니 이는 그들의 계책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4절입니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아멘.
이스라엘은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육적으로는 번영하였으나 영적으로는 피폐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면서 또한 타이르셨습니다. 자신의 영혼의 비참한 처지를 깨닫고 우리 하나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간곡히 설득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더 하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우상을 섬겼습니다. 죄로 병든 영혼을 고쳐 하나님을 향해 살기보다는 세상의 번영에 취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넓어진 영토와 부강한 경제력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누가 주셨습니까? 심지어 바알에게 바친 제물까지도 하나님이 은총으로 주신 것이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쁨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오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는도다” 탄식하셨습니다.
신앙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은혜로운 일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기억을 오늘에 되살리는 것입니다. 과거에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오늘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억 속에서 오늘을 헤쳐나갈 용기와 새 힘을 얻는 것이 신앙입니다. 불신앙은 이것을 잊어버리고 까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하나님이 행하신 은혜를 잃어버리고 오늘 자기를 위하여 세상을 위하여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기억하라’ ‘잊지 말라’는 동사가 수없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가장 중요한 본분인 것입니다.
신앙은 모든 주시는 좋은 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이고 불신앙은 하나님 대신 그것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이 바로 이런 죄에 빠졌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면 세상의 복을 더 많이 받으리라고 하는 것은 우상의 꾀임이었습니다. 마귀의 유혹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탐욕 때문에 이 유혹에 빠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린 시절에 어떻게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고 가르치시고 사랑하셨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면서 추억에 잠긴 듯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II. 사랑의 줄로 이끄신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의 줄로 이스라엘을 이끄신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품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잊지 못하십니다. 특별한 사랑으로 그들을 낳으시고 기르셨기 때문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사랑의 줄’이었습니다.
A. 인격적인 사랑
이것은 제일 먼저 인격적인 사랑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걸음마하던 시절에 그 추억 속의 한 사진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 아이가 어떻게 걸음마를 배웠는지를 ‘사람의 줄,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끄셨다고 4절에서 말합니다.
1. 사랑의 줄
여기에서 ‘사랑의 줄’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이라고 말씀하시니까 두 가지가 동격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사람의 줄’, 히브리어 성경에는 ‘사람의 줄들’이라고 나와 있는 이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부드러운 줄이라는 뜻입니다. 호세아서 10장 11절에서는 이스라엘을 길들여진 암소에 비유하십니다. 그 암소의 목에 매다는 줄이다, 이런 뜻입니다. 그 줄은 짐승에 매달은 줄이니 거친 줄이지만 이스라엘을 위해 매단 줄은 사람을 위한 줄이다, 이런 뜻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얼핏 보면 문학적으로 이어지는 하반절에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라는 표현과도 어울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두 번째 견해가 있습니다. 이것은 짐승을 묶는 줄이 아니라 사람이 어린 시절에 붙들고 걸음마을 배우도록 설치하는 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복수로 되어 있어서 한 줄이 아니라 여러 개의 줄로 되어 있는 손잡이용 줄입니다. 아이는 그것을 붙들고 일어나고 그 줄을 붙든 채 걸음마을 연습하는데 바로 이 줄이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이라는 해석입니다.
사람을 묶는 줄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긍정적인 뜻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걸음마를 위해 붙드는 줄이라는 해석이 훨씬 더 좋은 표현이라고, 해석이라고 여겨집니다. 사람의 줄이라는 표현은 또한 짐승의 멍에와 의도적으로 대비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신앙의 걸음마를 가르쳐 주시던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강압하는 줄이 아니라 스스로 붙들고 걷게 하는 줄들이니 이 줄이, 줄들이 복수로 되어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 그리고 반복적인 연습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타락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났고 하나님의 가슴에 못질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멸망을 향해 치달아가고 있는 그들을 위해서 말씀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장 타락하고 가장 무자비한 시대에 가장 신령하고 가장 순결하며 가장 충만한 사랑을 가진 최고의 선지자 중 한 사람을 이 시대에 보내십니다. 바로 우리에게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호세아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알아듣도록, 하나님은 알아듣도록 말씀하시고 만약 특정한 때에 우리가 고집을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면 내버려 두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마음이 변화될 때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비록 마음이 아프실지라도 하나님은 강압으로 짐승의 줄을 묶는 것처럼 억지로 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깨달아 인격적으로 돌이키도록 하나님이 기다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의 지성에 말씀하시고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뜻으로 기쁘게 받아들이며 하나님 앞에 결단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전에 내가 좋아하던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싫어하게 되고 예전에 싫어하던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도록 그렇게 우리에게 감동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몽둥이와 매질로 바꾸지 아니하시고 사랑으로 어루만지셔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주님을 멀리 떠났던 것을 스스로 회개하고 돌이키며 우리 주님께로 돌아오도록 만들어주시는 인내의 하나님이시며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기다림의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탕자의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는 부자였습니다. 힘이 있었습니다. 그까짓 그 사람을 사든지 무사를 사면 그까짓 아들 하나 잡아오는 것이 문제겠습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 힘이 없는 사람처럼 동구 에서 매일 기다렸습니다. 아들이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자기의 발로 자기에게 돌아오기를 그렇게 기다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계속 여러분들이 고생하는 길을 걸어가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길을 걸어간다면 걸어가십시오. 아무도 말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쓰디쓴 머루를 게 될 것이고 피 흘리게 될 것이고 가시에 찔리게 될 것이고 결국은 무릎을 꿇고 ‘그때 내가 주님께로 돌아갔어야 되옵나이다 예수여 나를 용서하소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2. 죄의 멍에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등에서 무거운 죄의 멍에를 벗겨주십니다. 멍에가 무엇인지 알죠? 쟁기를 지게 하기 위하여 어깨에 매는 그런 틀입니다. 아주 무거운 나무로 되어 있는 틀입니다. 그것을 짊어지고 그 나무 뒤에다 쟁기를 매달아서 밭을 갈고 논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무거운 무게를 견뎌야 되니 얼마나, 얼마나 튼튼한 나무를 목에다 매달아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일하는 소 등 뒤에 가보면 멍에를 맨 그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까져 있습니다. 굳은 살이 딱딱하게 벽에 있습니다.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밭을 갈았는지..
불순종한 그들의 죄는 언제나 무거운 노예의 멍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고통받을 때 부르짖었고 그러면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용서해주면 다시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해주셨고 축복해 주시면 그들은 다시 불순종하고 죄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러면 무거운 멍에는 다시 짊어지게 되고 그들은 또다시 고통 속에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다시 그들의 기도를 들으셔서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반복되는 이 짓거리에 하나님은 속임을 당하시는 것 같으셨을 때도 언제나 그들이 눈물 흘려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고 그들의 죄 짐을 벗겨 가볍게 해주셨습니다. 이제껏 우리가 살아온 삶에 대한 묘사는 이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며 죄를 짓고 불순종하여 무거운 멍에를 짊어진 채 살아왔습니다. 불순종한 이스라엘은 죄짐에 등이 벗겨지고 파이고 피가 흐르기까지 했는데도 또다시 죄를 지었습니다.
여기에서 선지자가 탄식하고 있는 이 이스라엘의 모습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이 세상에 핑계를 대고 현실의 구실을 대며 하나님 앞에 미끄러지고 죄에 지는 삶을 사는 것에 대해서 합리화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으로 신앙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 않으시는 분이시니 그러한 기도가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언정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리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진실하게 회개하는 죄인에게 희망이 있습니까? 아니면 부정직한 의인에게 희망이 있습니까? 여기서 의인은 진짜 의인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의 편이시겠습니까? 누구의 눈물을 씻어주시겠습니까? 눈물을 흘려야 닦아주시겠죠. 그렇게 자칭 의인인 사람들에게는 눈물이 없습니다. 자기의 죄를 알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크며 자신이 살아온 모든 삶이 얼마나 하나님을 거스르는 삶이었는지를 깨달은 그 사람들에게는 회개의 눈물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뉘우치는 울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다시 죄의 멍에를 벗겨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뉘우치면 또다시 용서해 주시기를 반복하십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이제까지 살아온 모든 삶이 바로 이런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에 빚진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탁월하게 깨달은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회개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깨달았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을 주시는 물질의 축복을 통해 그것을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그 신령한 복을 통하여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달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용서의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음란한 아내가 끊임없이 자신을 배반하고 그리고 이름도 알 수 없는 사람의 아이를 낳아가지고 집으로 돌아와도 선지자는 그녀가 다시 돌아올 때마다 변함없이 사랑하고 용서해 주었고 손수 그녀를 찾아 나서기도 하였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훌륭한 예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갈 때마다 우리의 무거운 죄의 짐을 벗겨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가장 깨끗해지는 두 번의 순간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죄를 눈물로 회개할 때와 하나님의 큰 사랑에 감격할 때, 그때 우리의 영혼이 가장 맑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는 시간은 얼마나 복되었습니까? 주님을 대적하고 짐승처럼 살면서도 울부짖어 고통을 받으면서도 주님 앞에 돌아오지 않다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주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쏟아놓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던 때는 얼마나 복된 때입니까? 바로 이 때를 기점으로 우리는 무거운 죄의 짐을 내려놓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으로 옷 입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은 두 팔로 우리를 안아주셨고 그리고 그 품에서 마음껏 슬피 울고 서러움을 토하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회개하던 때 아름다운 영혼을 가졌던 것을 한번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 우리는 얼마나 행복했습니까? 우리의 무겁던 영혼은 깃털처럼 가벼워졌으니 몸은 땅에 살고 있으나 우리의 마음은 하늘을 날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어떻게 그 일이 가능했겠습니까?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용서해 주신 하나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언제나 죄짓고 불순종한 자는 우리였고 그리고 용서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는 현실의 핑계를 끊임없이 댑니다. 그러나 나는 다시 말합니다. 도대체 살아있는 사람 중 현실이 쉬운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있으면 잠시 착각에 빠진 것입니다. 너무 궁금해하지 마십시오. 금방 현실이 무거운 게 여러분 마음에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현실이 무겁게 느껴진다면 언제쯤 이 현실이 저절로 가벼워지겠으며, 그렇게 가벼운 때가 되면 우리는 주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쏟으며 눈물로 주님을 찾겠습니까? 주님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이 충만해지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미 살아온 삶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지 않습니까?
신앙이 있으면, 신앙이 있으면 좋은 일이 일어나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해서 감격하고 나쁜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더욱 간절히 하나님을 찾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좋은 일이 일어나면 주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교만해지고 나쁜 일이 일어나면 너무 실망하고 낙심해서 주님을 찾을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결국은 좋은 일이 될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나쁜 일입니다. 결국은 그를 죄로 데려가고 교만으로 데려가고 파멸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지 않습니까? 주님이 이들에게 복을 주셔서 부강한 국력을 갖고 그리고 강대한 나라를 이루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에서 떠났고 우상을 섬기며 그 넉넉한 경제력을 가지고 우상을 꾸미는 데에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보다 이 세상의 재물을 더 사랑하고 이 세속에 빠진 사람들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한 영적인 특징을 모두 상실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주님이 복을 주신 것 때문에 결국은 타락하게 된 예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현실은 언제나 무겁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여러분처럼 현실을 무겁게 짊어지고 허덕거리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신앙이 없었을 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현실의 무게를 못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무게를 느끼면 느낄수록 하나님의 품을 파고듭니다. 그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의 이 짐을 벗겨주시도록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동행해 주시도록 내가 마지막 붙잡아야 될 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모진 현실을 헤치고 믿음으로 지나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기쁨이 현실의 고통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그들은 한편으로는 아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넘치는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의 찬송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을 믿는 자녀의 삶입니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이길 수 있고 이 세상에서 시련을 당하나 그가 아주 패배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반드시 일어서고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신앙을 가지라고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위로, 나 자신에 대한 연민 이런 것들을 모두 거절하고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멍에를 벗겨주신 것 같이 여러분의 멍에도 벗겨주실 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언제까지 죄의 멍에를 지고 보람도 없이 힘겹게 노예처럼 살아가겠습니까?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사랑의 품으로 돌아가십시오. 선지자는 말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오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하였으니 이는 미래에 고난을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깨닫고 하나님 앞에 뉘우치면서 하게 될 고백인 것입니다. 이 고백이 오늘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양식주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들에게 양식을 주셨습니다. 밭을 갈기 위해 하루 종일 애쓴 가축에게서 저녁 때쯤 되어 멍에를 벗겨준 후 먹을 것을 풍성히 갖다 주고 그리고 소는 그 음식을 맛있게 먹는 농촌의 저녁 풍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4절 하반절이 말합니다.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느니라”
소는 주인의 농사의 유익을 끼치기 위해 멍에를 짊어졌습니다. 그리고 밭을 간 후에는 양식을 먹을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단지 우상을 숭배하고 불순종함으로 죄의 멍에를 짊어졌으니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위해 멍에를 진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들이 대적한 그분에게서 양식을 받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의 죄짐을 벗기시고 양식까지 주십니다. 그들의 육신의 양식뿐 아니라 영혼의 양식까지 주셨으니, 가장 대적하는 시대에 가장 가슴 저미는 사랑을 가진 눈물의 선지자 호세아를 보내어 당신의 진심을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 때문에 스스로 죄를 짓고 불순종해 하나님의 마음에 대못질을 하고 스스로 멍에를 짊어진 우리들을 그렇게 용서하시고 다시 그 멍에를 벗겨주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성도들, 교회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들을 더욱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의 가슴에 칼질하며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처럼 그분이 부르면 부를수록 주님을 욕하며 멀리멀리 도망갔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가슴에 수많은 상처를 주며 멀리 멀리 주님을 떠나 세상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셔서 여러분들을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주님은 이전에 그가 무엇 때문에 죄의 멍에를 지게 되었든지 그것을 벗겨 가볍게 해주시고 그에게 쉼을 주시며 그의 육신의 양식을 주시고 영혼의 식량을 주셔서 영육 간에 그를 배부르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굶주린 영혼을 위해 생명의 양식을 주시나니 육신의 양식뿐만 아니라 영혼이 큰 힘을 받아서 하나님을 향하여 의를 위해 다시 살 수 있도록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죽어 있어서 죽어 있는 것이 자신의 운명처럼 생각하던 사람들도 하나님은 하루아침에 살려내실 수 있는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이제껏 무슨 힘으로 우리의 인생을 살아왔습니까? 풍랑이는 바다에 간신히 떠 있는 위태로운 조각배 같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가련한 우리가 어떻게 파선하지 않고 그 모진 파도를 견디며 살아올 수 있었습니까? 우리의 영혼에 말씀을 주신 이유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넘어질 때마다 우리를 말씀으로 붙들어주시고 쓰러졌을 때마다 그 말씀의 양식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이 아니었습니까?
그 큰 능력의 선지자 엘리아도 한때는 주리어 주저앉아 자기가 죽게 되었노라고 아버지 앞에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물과 그리고 고기와 떡을 주셔서 이 선지자를 살리셨고 하나님 앞에 새 생명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못하실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들이 쓰러지고 넘어지면서도 이제껏 신앙을 버리지 않고 그 붙들고 지금까지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말씀의 은혜가 우리를 살게 했고 마른 뼈 같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여 주님을 위해 사는 사람들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죽은 영혼으로 살아오는 우리의 날들은 얼마나 힘겨운 날들입니까? 주님께로 돌아가지 못하고 자기 고집대로 살면서 삶의 목적도 찾지 못하는 방황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인생의 고귀한 시간들을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마침내 낮이 지나고 나면 저녁이 올 것이오, 저녁이 끝나고 나면 어두움이 내리리니 그때는 후회해도 우리의 인생에서 다시 살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날 동안, 이렇게 기력 있는 날 동안 하나님께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죽은 영혼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를 의지하여 그 말씀으로 다시 살리라는 결심을 갖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돌아오지 않음
그러나 이스라엘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죄의 멍에로 등이 벗겨져 피가 흐르고 영혼은 핍절하여 굶어 죽게 되었어도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5절은 말합니다. “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겠거늘 내가 내게로 돌아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의 임금이 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호세아는 영적으로 죽어가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옛날 광야에서 육적으로 죽어가고 있던 불순종하던 이스라엘 백성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고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강한 나라가 되었는데도 그 하나님이 주신 축복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는 이 불쌍한 이스라엘이야말로 과거의 광야에서 방황할 때에 애굽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울부짖던 이스라엘 백성과 같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울부짖으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광야의 길이 너무 고달팠기 때문에 그들은 다시 애굽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애굽에서 그들이 행복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루 종일 시달리며 벽돌을 굽고 막일을 하며 그들은 노예처럼 부림을 당하고 채찍에 맞는 것이 그들의 일생이었고 그렇게 태어났다 그렇게 죽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었습니다. 도대체 그리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잊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그 애굽에서 먹던 따뜻한 고깃국 그리고 노예들에게 힘내어 더욱더 혹사 당하라고 주는 마늘과 외와 그런 애굽의 토속 음식들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돌아갔습니까? 아무도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원망하며 애굽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울부짖던 사람들은 모두 광야에서 두 눈을 부릅 뜨고 죽어버렸습니다. 그걸 거울로 삼으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구원해 주시고 그리고 한 번 믿은 우리들을 하나님이 결코 버리지 않고 붙들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은 실제로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성도로 살려는 사람들에게만 유효한 믿음입니다. 불신자가 그 믿음을 가져봐야, 가질 리도 없지만, 그건 껍데기로 보이는 믿음일 뿐 구원받은 신자는 그렇게 살다가 죽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안에 있는 생명이 그걸 허락하지 않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을 향하고 있었으나 세상은 결코 그들의 목적지가 될 수가 없었습니다.
신자가 세상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도 사실은 정확한 말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영혼을 가진 인격체끼리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만 세상이 우리를 사랑해줍니까? 세상을 사랑한다라는 말은 엄밀하게 말하면 세상이 좋아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좋아하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세상 사랑의 목적은 세상을 받들어주고 위해주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자기가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세상 사랑입니다. 그 세상 사랑의 대표적인 것이 육신의 사랑이고 쾌락입니다.
신자에게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세상을 향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세상은 이미 불타서 끊어진 다리 저 건너편에 있는 곳이니 어찌 그리로 돌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신자는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을 향해 있는 사람입니다. 살아도 주님 앞에서 살고 죽어도 그분 앞에서 죽도록 영원히 운명 지어진 사람이 신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의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힌 채 신앙에 미끄러져서 살아간다고 칩시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신앙을 버리는 대가로 여러분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설령 백 번 양보해서 신앙을 버리고 여러분 손에 들어가는 것이 있다고 칩시다. 그것이 과연 여러분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겠습니까?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은 삼십에 팔고 삼십의 은을 받았지만 그는 그걸로 술도 사 먹을 수 없었고 맛있는 음식을 사 먹지도 못했고 타락하여 쾌락을 즐기지도 못했습니다. 쓰지도 못하고 전대를 버렸습니다. 그게 하나님을 팔아서 받은 보수의 끝입니다. 신앙을 팔아서 결코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그렇게 속으면서 불행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게 마귀가 여러분들에게 원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교만한 이스라엘은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고 그 번영이 영원할 것 같았지만 결국은 새로 일어나고 있는 신흥 강국인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할 것이었습니다. 그럴수록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불탔고 그 마음을 전수받은 호세아 선지자는 목놓아 우는 울음으로 이스라엘을 향해 이렇게 외쳤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스라엘아 너희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라”
한 편은 자녀 같고 한 편은 연인 같은 이스라엘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제발 다시 돌아오도록 어릴 적에 걸음마를 배우던 추억의 사진 한 장을 보여주시면서 그때로 돌아오도록 이스라엘을 눈물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그렇게 부르셨던 하나님이 오늘은 여러분들의 마음 앞에 오셔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시니, 열든지 닫아두든지 그것은 여러분들이 결정할 일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좋으면 그렇게 닫아걸고 사시고 그것이 괴롭고 슬프면 문을 열고 주님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의 죄를 주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를 받으십시오. 회개의 눈물을 흘리십시오. 하나님의 마음 아프게 해드린 여러분들의 죄에 가슴 아파 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인격적인 사랑을 이제 더 이상 배신할 수 없음을 깊이 자각하고 주님의 부르시는 그 음성에 응답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스라엘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여러분들은 돌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Ⅱ. 적용과 결론
신앙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사랑하기보다 마음으로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그 줄을 붙잡아주시던 추억,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이 추억의 사진 한 장을 내밀며 목놓아 울듯이 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줍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끊임없이 부르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외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보다 더 여러분 가까이 계셔서 여러분들을 당신의 품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언제까지 하나님을 떠난 채 방황하며 살 것입니까? 또 그렇게 해서 얻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죄의 멍에를 지고 주님을 대적하는 가운데 어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처럼 완강히 고집하다가 징계를 받는 사람들이 되지 마십시오. 오히려 오늘 눈물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품으로 돌아와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 기도할 때 하나님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십시오. 짐승의 줄이 아니라 사람의 줄로 우리를 붙들어 이끄시고 일어서게 하시고 걸음마를 배우게 하시는 주님, 오늘 인격적인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시는 것을 알게 해주시고 오늘 우리가 더 이상 반역을 멈추고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은혜의 마음을 주십시오. 회개의 심령을 주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죄가 진홍같이 붉으나 양털같이 희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사옵니다. 오늘 우리를 깨끗게 하사 주님의 품으로 다시 불러들여 주님 때문에 살게 해달라고 우리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3.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호11:8)
녹취자 : 박나리
Ⅰ. 본문해설
이어서 호세아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은 수없이 가출하고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하고 자식까지 낳았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아쉬울 때면 집에 돌아왔습니다. 이런 타락한 삶은 이스라엘의 신앙생활을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호세아는 그런 아내를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에 억지로 순종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마음은 고멜을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 불타올랐고, 그가 타락하고 방탕하면 방탕할수록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선지자의 가슴은 찢어졌습니다. 이것은 육정의 사랑이 아니라 영혼의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호세아는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을 온 몸으로 체험하며 주님의 말씀의 통로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더욱 불타는 사랑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나님의 눈물 젖은 음성을 들려주었습니다.
Ⅱ.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
오늘 선지자가 호소하고 있는 것은 하나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변심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아버지 같은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신앙의 걸음마를 배우던 처음 사랑의 이스라엘이 아니었습니다. 오래 전에 이미 하나님을 떠났고 물질적인 번영의 쾌락과 우상 숭배의 죄에 깊이 빠져있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런 어려운 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는 찢어지는 심령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였으니, 이는 고멜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 가정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며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들어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호세아는 심장이 타들어가는 심정으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타락한 백성에게 하나님의 울음 섞인 음성을 들려주었습니다.
A. 버리지 않으심
그는 제일 먼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죄짓고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기에는 너무나 타락했습니다. 순결한 처녀와 같이 하나님과 처음 사랑을 나누었던 이스라엘은 이제 창기의 몸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이미 떠났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심정을 선지자는 이렇게 토로합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아드마와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이는 단지 그냥 던져주시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당신에게 무심해진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슬픈 절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있어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눈동자처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이 많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추억의 사진 한 장을 보여주며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셨습니다. 사랑의 주를 붙들고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 아이 이스라엘의 처음 사랑의 때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기뻐하셨고, 그리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마음에 잊을 수 없는 사랑의 불꽃이었습니다. 슬픈 선지자 호세아의 마음은 타락한 고멜을 향해서도 똑같은 마음을 품었으니,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마다 이 고멜을 향한 자신의 가슴 찢어지는 절절한 사랑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여기 나오는 아드마와 스보임이라는 단어는 마을 이름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멸망할 때 함께 불타서 소멸된 마을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29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옛적에 여호와께서 진노와 격분으로 멸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무너짐 같음을 보고 물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스보임과 아드마는 타락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지금 이스라엘과 그들과 똑같은 우상숭배와 음행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여 멸망하실 수 있었지만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고 그들을 당신의 자녀로 낳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아니었습니까. 그들의 죄와 불순종은 미워했지만 이스라엘은 미워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이 낳아서 당신이 걸음마를 가르치고 당신을 경외하는 길로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심정으로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결코 자신이 사랑하는 죄에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이런 형편을 호세아 선지자는 4장에서 통곡하듯이 말합니다. “그들이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너희 딸들은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을 행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우상 숭배도 끔찍한 죄였으나 그들은 성적으로 심각하게 타락했습니다. 우상숭배는 세상 사랑의 극치였으니 이 우상을 섬기는 제의 안에 바로 이 성행위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원래 바알 종교는 페니키아 쪽에서 들어왔습니다. 이 바알 종교는 비록 이스라엘에서의 고유하게 생긴 종교가 아니고, 또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바알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구약의 사진들을 보면 바알신의 신상들이 나오는데 대부분 여자입니다. 그리고 아주 몸집이 비둔합니다. 골반이 크고 허리가 굵고 가슴이 달려있습니다. 굉장히 풍만한 가슴이 2개, 심지어는 4개, 5개씩 달린 석상들이 나옵니다. 농경문화에서 다산의 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셨을 때 그 가나안에 있는 이방신상을 모두 없애고 다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다 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도망을 갔습니다. 높은 산꼭대기 같은데 있다가 세월이 흐르고 이제 그들 사이에 교역이 이루어지고 이스라엘의 신앙이 해이해지면서 다시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그 다산의 신을 아주 폭넓게 이스라엘에 퍼뜨렸습니다. 이세벨 같은 사람은 아예 이 종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사명감을 가지고 파송된 선교사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산당에 그 바알신을 섬기는 신당이 있습니다. 이 바알신이 왜 중요하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떠난 이후로 그들은 정착지가 없이 계속 가나안을 향해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보니까 놀랍게 문명이 발달했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의 발달한 문명을 본 사람들은 벌써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만 살다가 여기에 와서 보니까 엄청난 문명이 발달했습니다. 문명의 뒤에는 농업이 있었습니다. 농업이 있고, 농업의 뒤에는 그것을 풍요롭게 해주는 농경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 생각에는 여호와를 섬기지만 굳이 바알신에게 밉보여서 우리가 해를 받을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생각하면서 하나님도 섬기고 바알신을 섬기기 원했습니다.
이 바알 종교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엄청난 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바알신당에 가면 바알에게 제사를 드립니다. 그렇게 제사를 지내고 나면 신전에 아주 작은 방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신녀들이 있었습니다. 제녀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제사를 드린 사람과 신전에 신녀로 있으면서 몸을 파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바알 종교 안에서는 합법적으로 허용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제사를 드리고 바알을 숭배할 때 남자들이 거기에 제사를 드리러 와서 신녀들과 함께 짝을 이루면서 격렬하게 성행위를 할 때 바알이 굉장히 기뻐합니다. 그렇게 해서 농사를 풍요롭게 해준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농사는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적당한 때에 비가 내려주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이른 비가 내려 파종을 하고 비가 내리면 결실을 하고 수확기에 접어들게 됩니다. 기후를 조절하는 권한을 바알이 가지고 있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제사 드리는 속에서 신전 창녀들이 제사 드리러 온 사람들과 성행위를 하는 동안 바알은 그것을 보고 아주 흥분하고 기뻐하면서 비를 내려주고 농사에 복을 준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너무너무 매혹적인 종교입니다. 합법적으로 자신의 정욕을 마음껏 풀고 신에게 복도 받을 수 있는 이중의 유용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시면서 우상 숭배의 죄와 간음의 죄를 나란히 말씀하시는 이유가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이 고멜이 그냥 유곽에서 몸을 팔던 창녀가 아니라, 그 신전에 있던 창녀였을 것이라고 짐작을 합니다. 어느 정도 근거가 있습니다. 그런 신전에서 몸을 파는 창녀들 중에서도 아주 유명했던 한 사람이 호세아와 결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이스라엘 속에 일어났기 때문에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바알에게로 가져가고 싶어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문제라는 것이 ‘내가 이 허무를 어떻게 극복합니까? 어떻게 내가 진실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내가 이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와 같은 고민이 아닙니다. 어떻게 계속해서 나라가 부강하고 번영하고 농사가 잘 되고 그것으로서 산업을 일으키고 교역이 잘 되고 이러한 모든 복을 이 땅에서는 여호와가 주실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알신을 강력하게 추종했습니다. 이 바알신을 숭배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욕을 마음껏 풀고 이 세상의 복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은 네가 내 앞에 올바로 살았는지를 생각해보라, 나와의 관계를 돌이켜보라고 복잡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바알은 제물을 가져오면 그 헌제자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뇌물 개념으로 바치는 제사이기 때문에 도덕성을 묻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신앙이 없는데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자기가 살았던 삶을 반성하고 율법을 갖다놓고 자기를 비판하면서 회개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바알에게 비위를 맞추고 그렇게 복을 비는 사이에 자기 쾌락도 즐기고 하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이 종교가 옴처럼 급속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퍼져나갔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아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고 징계를 받아도 이스라엘이 쉽게 놓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을 오늘날 적용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돈으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얼마나 쉽습니까? 물질이 없고 사업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돈이 있다면 그것을 밀어 넣으면 됩니다. 그런데 신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복잡합니다. 나와서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 앞에 죄가 있는지 없는지 살펴야합니다.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돌아보니 내가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뉘우치고 회개하고 용서 빌 사람에게는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자기의 잘못을 주님 앞에 회개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그 다음날 즉시 복을 주신다는 보장을 없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이 길이 너무 아득하게 먼 길로 보입니다. 돈이 있으면 사실 어떤 면에서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고민하는 문제들 가운데 절반 이상은 돈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돈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이 항상 밑바닥에 깔려있어서 결국은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노태우 대통령이 돌아가셨습니다. 한 때 하늘에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신문을 도배하고 온 천하를 권력으로 호령하고 직선제에 당선되고 나서 정말 엄청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렇게 간단하게 사라집니다. 오늘 뉴스를 들으면서 인생의 비애를 느꼈습니다. 저렇게 인간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중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유명해지는 것을 조심해야하고, 돼지는 살찌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고 합니다. 인간은 다 그렇게 인생이라는 것은 하찮은 것입니다. 그런 문제들은 해결이 안 됩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많은 사람들은 물질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에 빠집니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이키는 것이 어렵고, 힘든 길 보다는 쉬운 길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그것이 오늘 날 돈 문제와 관련해서 수많은 범죄가 일어나고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이유가 바로 그 인생관에 있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지 한 번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B. 불붙는 긍휼
정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에 그들을 심판하셔야 했지만 그들이 멸망을 당하는 것을 차마 보실 수 없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에게 어떤 장점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기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마땅히 우상숭배로 타락하고 음란한 그들을 심판했어야 했지만, 이스라엘과의 추억을 간직하고 계셨기에 그들을 차마 버리실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날들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하나님께 자랑스러운 날이 얼마나 드물었습니까? 그리고 주님 앞에 부끄러운 날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누가 이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에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고 감히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곤고해 진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다가 힘들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불순종하고 은혜에서 미끄러짐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품을 떠났기에 곤고해 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물으면 현실의 힘듦과 고단함을 가지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다시 말해 현실이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모든 사람에게 산다는 것은 고통의 바다를 지나는 것입니다. 신앙은 바로 이런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고통을 피해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그 고통스러운 현실을 맞이할 때조차도 두 가지, 이렇게 인생에서 만나는 고통스러운 현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알기 때문에 시련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면서도 보다 더 높은 의미를 찾아서 살 용기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주님을 믿음으로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마음과 정신의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육체의 힘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이 기쁨이 사라지고 즐거운 것이 없으면, 사람의 몸도 까불어지고 병자처럼 됩니다. 병들었던 사람도 마음에 매우 기쁜 일이 있고 희망이 생기면 생기가 돌고 웬만한 병에서 회복됩니다. 그것이 육체와 영혼의 오묘한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을 사랑하고 의지하며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그런 은혜를 주셔서 그 은혜의 힘으로 하나님 앞에 현실을 이기며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그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이 우리에게 그렇게 희망을 잃어버렸던 절망의 상태에서 희망을 갖게 만들어주는 것이었습니까? 주저앉았던 우리로 하여금 다시 일어나서 살아야 할 삶의 의지를 불태우게 만들고 어려움 속에서도 의미를 찾으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살도록 만들어준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희망을 줍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고멜을 차마 버리지 못하던 호세아의 마음은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찢어지는 가슴으로 타락한 아내를 찾아다녔고, 하나님은 당신을 버리고 멀리 떠난 이스라엘을 찾으셨던 것입니다. 그 때 선지자의 마음이 바로 세상을 사랑하며 끊임없이 세상의 번영을 꿈꾸고 그것으로서 현실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며 세상에 올인하며 살아왔던 우리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그 선지자의 마음이야말로 그런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신앙은 공감입니다. 신앙이 충만할 때에는 야단치는 사람이 없어도 눈물을 흘립니다. 혼내는 사람이 없어도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통해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뉘우치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공감입니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도구 삼아서 거기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 받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 전수 받은 신앙의 사랑을 가지고 불쌍하고 고통 받고 외로운 사람들의 마음을 공감하며 그들의 슬픔과 고독을 자신의 것처럼 여기면서 함께 느껴주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중심부에는 하나님을 향한 공감이 있고 사람을 향한 공감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사라지고 나면, 할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일체 공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지 못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더 깨달을 수가 없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니까 하나님과 공감할 수 없습니다.
시집가기 전에는 집에서 맨날 엄마 속 썩이고 힘들게 하던 딸이 시집을 갑니다. 그리고 이제 살림을 해보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도 겸손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습니다. 연년생을 낳고 키우면서 죽을 고생을 합니다. 시댁과의 갈등 등을 짊어지고 몸부림을 치다가 비로소 엄마 생각이 납니다. 그러면 옛날에 잔소리라고 생각하고 흘려들었던 엄마의 이야기가 새록새록 떠오르면서 엄마의 훈계에 담겼던 그 마음이 무엇인지 격하게 공감합니다. 그래서 시집, 장가가고 개과천선해서 효자, 효녀가 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놀라운 은혜입니다. 실제로 제가 청년 시절에 양육했던 한 자매가 나중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시집가서 애기 둘을 낳았는데 너무 유별나서 매일 울었습니다. 그 때 생각난 것이 엄마였습니다. 어쩌면 이 아이들이 옛날에 자기가 엄마한테 했던 것과 똑같이 자기에게 하기 때문에 자기가 절절히 엄마의 심정이 생각이 나서 그 때 엄마를 생각하면서 많이 울었답니다. 그것이 공감입니다. 효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돈 갖다 주는 것이 효도가 아닙니다. 어버이날 카네이션 열 송이 갖다 주면서 십 년 치라고 하는 것이 효도가 아닙니다. 효도는 부모의 마음을 공감해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뭘 원하겠습니까. 저는 아이들에게 티끌만큼도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공감해주는 것이 고맙고 사랑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효도와 같습니다. 효도의 첫 걸음은 자기 좋은 대로 자기 의에 들떠서 부모에게 퍼붓듯이 뭘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마음을 공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있어서 외롭지 않다고 느끼고 딸이 있어서 슬프지 않다고 느끼게끔 만들어주는 것이 효도입니다. 신앙의 중심은 하나님을 향한 공감과 사람을 향한 공감입니다. 이 두 가지는 비례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많이 느끼면 느낄수록 사람에 대해 많이 공감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의 아픔과 슬픔, 기쁨에 동참하게 됩니다.
제가 구약의 선지자들 가운데 가장 존경하는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사람이 호세아입니다. 온 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사람입니다. 가슴 저미는 하나님의 심정을 절절하게 느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해 가지고 계신 마음을 백 번 공감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님의 심정으로 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공의로 생각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진작 심판을 받고 멸망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성품이 참고 기다리게 했으니 그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나의 긍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긍휼이란 자기 자신의 성품의 자비함 때문에 남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입니다. 아주 반짝이고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있습니다. 그 면이 세 면으로 되어 있다고 합시다. 하나의 빛나는 다이아몬드인데, 그것이 사랑이라면 그 다이아몬드가 세 개의 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쪽 면은 오래 참음, 또 하나는 자비, 또 하나는 긍휼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사랑인데, 그 사랑을 어떤 면에서 보느냐, 그 사랑이 누구와 관련이 있느냐에 따라서 누구에게는 오래 참음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로 긍휼로 나타납니다. 긍휼은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인데, 이는 사랑받는 사람의 가치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안에 박애에서 비롯됩니다. 죄는 이스라엘이 지었는데 긍휼은 하나님이 베푸십니다. 죽을 길을 걸어간 것은 이스라엘인데 그들을 다시 살려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처지에 있던지 우리가 다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오로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발견됩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고 이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서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성경 공부한다고 매일 교재 끼고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는 이혼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둘이 손잡고 새벽기도 나오는 부부 중에는 헤어지는 부부가 없습니다. 그만큼 기도가 중요합니다. 마음 깊은 곳을 파헤치고 주님 앞에 쏟아놓는 이 기도는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느끼는 지름길이고 자기가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해서 살고 있다고 하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한 번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이 불붙는 긍휼을 얼마나 느끼고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아무리 자신을 불쌍히 여겨도 인생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불쌍히 여겨준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께 돌아올 때 인생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들이 받을 형벌을 생각하시며 하나님이 오히려 먼저 마음아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보여준 긍휼이었습니다. 죄인을 자비롭게 여기시는 긍휼의 마음이 있으시기에, 그렇기에 하나님은 그 마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지금도 부르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선지자는 때를 얻던지 못 얻던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그 전하는 말씀 갈피갈피에 당신 자기 자신의 피를 바르고 살을 저미어 거기 사이사이에 끼어 넣으면서 이스라엘에게 전했으니 이런 선지자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장 비참하게 타락했던 악한 시기에 모든 선지자들 중 가장 찬란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호세아 선지자를 택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똑같은 심정으로 찢어지는 마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긍휼은 죄인을 자비롭게 여기는 마음이고 자비는 비참하게 된 책임과 관계없이 그가 비참하게 된 상태 자체를 바라보며 가엾이 여기는 것입니다. 이 긍휼의 감정은 시간을 초월한 채 아픔을 공감하게 만들어줍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어느 순간 자신의 죄를 회개합니다. 그 때 예수님이 여러분들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고백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던 그 모든 고통이 여러분 자신이 당하는 것처럼 전해집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회개하는 것은 지금이고 예수님은 이천 년 전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늘에 승천해서 주가 되셔서 우리가 다스리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시간을 초월하는 사랑의 경험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시면 부르고 계십니다. 이것은 십자가에 매달리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못 박혀 죽으시면서도 당신의 아픔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렇게 자신을 처형하는 그들이 하나님과 심판을 받을 그 때의 형벌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변명하는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라고 하는 자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간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에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인생이 그렇게 괴로운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받을 때보다 사랑을 할 때 우리에게 놀라운 힘을 줍니다. 그 사랑의 힘이 우리에게 희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인간이 어떻게 알게 됩니까?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시간 안에 묶여 있는 인간이 어떻게 파악할 수 있습니까? 공간 안에 계시지 않는 하나님, 그러면서도 어느 한 공간도 그 분 없이 있지 아니하는 이 신비한 세계를 그 하나님을 이해하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시간과 공간 안에 묶여있는 인간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알게 되는 것이고 아는 것만큼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니,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나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은 영적으로 곤고하게 된 이스라엘의 비참한 영적 상황을 보며 탄식하십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다 버렸고 결국은 영혼은 말라깽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곤고하기 짝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물질적인 번영에 마음을 빼앗겨 이제 이 세상 사랑에 딱 달라붙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슴 아파하십니다. 우리는 죄에 미끄러져 우리의 영혼이 이렇게 비참한 상태가 되었는데도 그것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공감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 없이는 신앙을 말할 수 없습니다. 변명할지라도 그것 없이는 신앙을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고 복을 주셔서 세상적으로 번영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마음을 뺏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 마음으로 자신의 영혼의 비참한 상태를 공감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깊은 사람에게는 언제는 하나님의 심정이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 때문에 기뻐하고 주님의 마음 때문에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갖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을 향하여 모든 가르침을 집약해서 이렇게 충고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망가진 자신을 고칠 힘이 자신에게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떠날 능력은 있어도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놀라 자지러지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은혜를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고 죄는 끊임없이 하나님 없이 살게 합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약한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말씀의 은혜를 갈구합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사는 사람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의 은혜에 목말라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씩씩하게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이유가 없습니다. 마음은 점점 강팍해지고 강팍한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표독한 마음이 되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앙탈을 부리고 심지어 하나님을 향하여 적개심을 품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수 있겠으며 행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 신데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면서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말입니까. 부모의 마음을 공감해드리는 것이 효도입니다. 부모를 향하여 효도하는 마음을 보면 그 한 인간이 얼마나 성숙해 가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철없던 때는 부모가 제 마음을 몰라준다고 원망했고 미워하는 사람의 1순위였습니다. 부모가 되어 보면 결국 그 심정을 알게 되고 자식에게 죄지은 것도 없이 눈치를 보며 한 없이 기다려야 하는 부모의 처지를 겪어 보고 나면, 부모가 자신을 향하여 참아준 그 사랑과 인내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해도 부모가 그렇게 해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희미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부모보다 훨씬 더 우리를 참아주시고 기다려주시고 돌보아주셨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방황하는 우리들을 가엾이 보셔서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보다 못해 하나님은 저같이 미혹한 종을 통해서 당신의 마음을 느끼게 해주시고 여러분들을 위해 눈물 흘릴 마음을 주셨으니 이것이 결국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분의 마음에 공감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 분께 신앙의 걸음마를 배우던 사랑스럽던 시절이 여러분에게는 있었습니다. 처음 사랑의 때, 은혜 안에 있던 때, 여러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여러분들은 기쁨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살아가는 모든 삶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그 열매는 여러분들의 인격 속에 더욱더 빛났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이 여러분을 보며 예수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신앙을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목회의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비결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도 하나 꼽자면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는 성도를 보는 것이 쓰러지지 않고 여기까지 오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 여기로 이사 와서 여러분 알다시피 우리 1층의 본당이 텔레비전 8개를 매달고 예배드리던 99미터짜리 예배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설교자는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설교를 하지만 많은 성도들이 주님을 만났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문을 열고 먼저 인사하기 위해서 나가면 매 주일마다 내 가슴이 찢어지게 하셨습니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하고 회개하며 은혜를 받고 눈물로 예배를 드리지만 어떤 사람들은 전혀 하나님 앞에 마음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나의 십자가였고 공감하며 하나님 앞에 돌아와 기뻐하는 사람들이 저에게 희망을 주고 꿈을 주었습니다.
결국 그 마음이 우리 같은 죄인들에게도 선명하게 다가온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죄짓고 타락하여 영적인 수렁 속에 빠져가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한 설교자가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면 완전한 사랑의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셨을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을 알아드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꾸짖는 사람이 없어도 그 주님의 마음에 공감하면서 주님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주님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그분의 슬픔을 내 슬픔으로 받아들이면서 주와 함께 서고 주와 함께 걷고 주와 함께 멈추고 주와 함께 나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 여러분들이 어떠한 처지에 있던지 간에 똑같이 지금도 그렇게 여러분이 마음을 알아달라고 아우성치지도 않지만,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세우고 있는 여러분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의 행복은 내 마음을 공감하는 데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공감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 때 비로소 자신의 모든 마음을 주님이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기도한 것 같이 않았던 모든 것 까지도 그분에게 알려줬고 그분이 긍휼이 여기셨고 자비를 베푸시기 때문에 자기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들이 갖는 담대함의 근거입니다. 내가 그분께 알려졌고 내 모든 형편이 그분께 받아들여지고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는 마음을 내가 공감하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오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불붙는 긍휼로 꺼지지 않는 긍휼의 타오르는 사랑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지 못하고 안타깝게 부르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처음 사랑의 때로 돌아가십시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미 오래 전부터 여러분들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셨고 여러분들에게 주실 복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 사랑의 품으로 돌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Ⅲ. 적용과 결론
우리의 모든 비참함과 절망은 하나님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니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이 모든 비참과 절망은 우리 자신의 죄 때문에 불순종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회개하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긍휼이 얼마나 큰지 활활 타오르는 거센 불길과 같으니 무엇으로도 이 불을 끌 수 없습니다. 자식의 비참함을 알고 아파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사랑이 그림자라면 원래 사랑은 얼마나 큰 사랑이겠습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멀리 멀리 떠났어도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들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결코 여러분들을 버리시지 않습니다. 여러분 없이 살 수 없는 마음으로 지금도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떠나 비참하게 살지 마십시오. 그리고 바로 오늘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삶을 그대로 고백하고 주님께 스스로 돌아갈 힘이 없는 것까지도 고백하십시오. 그래서 우리를 일으켜 주시고 우리를 다시 주님의 품으로 달려갈 수 있도록 간구하십시오. 추억 속에 사진 한 장처럼 그렇게 다시 아버지와 가족들에게 사랑받는 어린 아이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고 고백하십시오. 이스라엘은 사랑하는 하나님이 부르면 부를수록 멀리 떠났습니다. 여러분들은 결코 이스라엘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만났고 주님이 당신의 드넓은 사랑을 당신의 은혜를 여러분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을 낳으셨고 손을 잡아 걸음마를 가르쳐주셨으니 두 팔로 안아 여러분들을 사랑해 주셨고 세상에 거친 파도 속에서도 그 긴 세월 모진 시간을 이기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눈동자처럼 보호해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을 의지할 때만 보호해주신 것이 아니라, 멀리 멀리 떠나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살려고 할 때도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부지불식간에 지키고 보호하셔서 여기까지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의 마음을 전수 받으십시오. 그리고 제발 여러분들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첫 사랑의 착한 마음으로 돌아가십시오. 여러분들이 어떤 처지에 있던지 하나님은 달려가실 것이며 그 하나님이 깊은 수렁에서 여러분들을 건져내실 것입니다. 광야와 같은 인생길에서 생수를 내시고 여러분에게 생명의 만나를 주실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가벼운 인생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