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52
목 차
항상 있는 인자하심(시 52:1) 1
악한 자의 정체(시 52:2-5) 5
악인이 의지하는 것(시 52:6-7) 9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는 자(시 52:8) 13
주의 이름을 의지함(시 52:9) 17
시편56편 강해 1
시편52편 강해 1
시편52편 강해 1
시편52편 강해 1
시편52편 강해 1
시편52편 강해 1
항상 있는 인자하심
“강포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시 52:1)
본문해설
모든 시편이 그 시가 어떤 상황에서 쓰여 졌는지를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시편 51편처럼 다윗이 그 시를 언제 썼는지 기록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시를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됩니다. 이 시를 ‘다윗의 마스길’이라고 부릅니다. ‘마스길’은 히브리어로 ‘교훈’이라는 뜻인데, ‘샤칼’(lk'c)이라는 ‘지혜롭게 하다.’라는 히브리 동사에서 온 명사입니다. 이 시를 많이 읽으면 하나님 앞에 지혜로워질 것이라고 생각되는 신앙과 인생의 교훈을 담고 있는 시를 가리켜 ‘마스길’이라는 표제를 붙인 것 같습니다.
본문을 보니까 이 시대의 배경이 나옵니다. 사울이 정권을 잡고 있고 다윗이 아직 왕이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진심으로 공경했습니다. 그러나 시기심에 가득 찬 사울이 다윗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이때 다윗이 에돔 사람의 땅으로 도망을 가게 됩니다. 아히멜렉이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고 음식도 공궤 받고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에돔 사람 중 한 사람이 사울에게 고자질을 한 것입니다. 결국은 사울의 추적을 받게 될 때에 지은 시입니다.
하나님 주권사상
1절은 하나님께만 피하는 다윗의 신앙을 보여줍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강포한 자여 네가 어찌하려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강포한 자가 자기를 해하기 위해 악한 계획들을 만들고 그것을 자랑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나가다 보면 악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지혜롭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종종 신문이나 매체를 통해서 세상의 어두운 면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면, 세상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지혜와 모략은 믿는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효과적입니다.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불리한 경우가 훨씬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런 악한 궤계와 악한 꾀와 모의, 이런 것들을 보면서 자신도 그것을 배워서 악한 꾀를 짜고 악을 악으로 갚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원리에 어긋납니다. 잠시 지는 자 같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주심으로 궁극적으로 이기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를 위해서 신자는 늘 하나님의 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장 큰 재산은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고, 우리가 주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 대통령의 새로운 취임과 함께 그가 정신적인 스승으로 생각하는 아브라함 링컨에 대해 새로운 조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도 원래는 흑인을 차별대우하는 사람이었지만 후에 마음을 깊이 바꾸고 흑인을 해방시켜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동족 간에 전쟁을 벌여야 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그때 그가 즐겨 하던 말이 있습니다. “적이 얼마나 강한지, 적군의 수효가 얼마나 되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환란도 만나고 시련도 만납니다. 때로는 악을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불행한 일이지만 그런 사람을 교회 안에서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악을 악으로 갚고 악한 꾀를 더 악한 꾀로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신자가 자신의 삶속에서 하나님을 추방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마음에 있었던 하나님 주권사상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아도 우리가 하나님께 있고 그분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악을 행하실 수 없는 분이라는 믿음, 그분을 의지하고 사랑할 때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베풀어 주실 것이라는 신앙, 이것이 바로 하나님 주권사상입니다. 하나님 주권사상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전심으로 의지하는 사람들만 가질 수 있는 사상입니다. 아무렇게나 가질 수 있는 사상이 아니라 그렇게 될 때에만 하나님께서 가장 선하신 분이라는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히멜렉의 집에 숨어 있다는 사실이 사울에게 전해졌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 다윗은 무기를 준비하고 자기를 찾아오는 사울 군사들을 공격할 채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제일 먼저 한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악인은 자신의 악한 꾀를 자랑하지만 나에게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항상 있도다.” 하는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사람의 보기에는 꼼짝없이 악인에게 당하는 것 같지만 마음을 쏟아 부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시인에게는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더 뚜렷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고난 중에 있는 나에게 보이실 것이라는 신앙이었습니다.
신앙의 연단
신앙의 참된 가치는 환란과 시련을 당할 때 보석처럼 빛나게 됩니다. 환란과 시련을 당할 때 보석처럼 빛나기 위해서 우리의 신앙이 어떠해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어떤 때는 마음이 이탈되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주님의 말씀을 거역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행하심이 내 마음에 맞지 않아서 주님께 불평하고 원망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해서 때로는 넘어지고 미끄러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하나님 편에 있을 때 신자는 악인의 계획 아래에서 오히려 그것 때문에 자신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넘친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왕으로 삼으시기 전에 그를 철저히 연단하셨습니다.
지도자의 크기는 몸집이나 그가 가지고 있는 돈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도자의 크기는 정신의 크기입니다. 정신의 크기가 매우 커야 자기와 의견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을 끌어안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목표를 향해 갈 수 있습니다. 지도자는 행복해 보이지만 끊임없는 고통과 형극(荊棘)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정신의 크기가 제왕에게는 얼마나 더 많이 요구되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제왕으로 삼기 전에 먼저 큰 시련과 환란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하는지를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악인의 치밀한 계획 앞에서 더 악한 계획을 꾸미는 대신에 하나님께 피하는 자들에게 자비하심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의존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시인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 편에 선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는 내편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천만인이 나를 에워쌀지라도 여호와는 내편이시라 방백을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 낫도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 자신의 모든 사정을 아뢰고 의지하면서 주님 앞에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은혜와 넘치는 사랑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악한 자의 정체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셀라)
간사한 혀여 네가 잡아먹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 그런즉 하나님이 영영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취하여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생존하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셀라)”(시 52:2-5)
악한 자의 정체
시편에서 이야기하는 ‘악인’이라는 것은 단순히 악을 행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의 기반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할 때는 두 가지입니다. 바탕이 선한데 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다가 죄를 짓게 되는 경우가 있고 바탕 자체가 아예 악해서 아주 자연스럽게 악이 흘러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편은 두 번째 사람들이 악인이라고 규정합니다. 바탕 자체가 악해서 거기에서 악이 흘러나온다면 그 바탕 자체가 악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대한 무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반감,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 사람은 악한 바탕을 가지게 됩니다. 악한 삶이라는 것은 그런 것들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시인은 악한 사람을 지칭하면서 자기에게 끊임없이 고통과 시련을 안겨주고 자기의 생명을 노리는 원수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하나님 앞에 밝힙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형식상으로 보면 자신이 누군가에게 핍박과 괴롭힘을 당하지만, 좀 더 크게 보면 고통을 받는 뿌리가 하나님께 대한 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시인을 괴롭히는 무리들은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럴수록 하나님께 더 많이 피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도망치면서 하나님과의 연합의 계기로 삼는 사람과 대조를 이룹니다. 단순하게 악인으로부터 고통을 받는 문제가 아니라 그 뿌리를 더듬어 가보면, 자기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그 뿌리 자체가 하나님을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그분을 거스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구도를 가지고 악인을 보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하나님께 피하는 시인
악인에게 고통을 받으면 받을수록 시인은 더 많이 하나님께 피하고 그분께 속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행실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과 자기를 대적하고 고통을 주는 것들이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적대감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편에서 의인들이 고난을 당할 때 착념했던 사항입니다. 악인에게 미움을 받아서 고통을 당하고 시련을 당할 때 악하게 마음을 먹고 그들에게 복수를 할 수도 있을 텐데,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악을 행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 바깥에서 악인들끼리 싸우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이 이러한 구도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을 반드시 지키시려니와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자신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며 하나님께로 피하는 사람들이 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원수들에게 악을 당할 때 자신의 악을 돌아보고 하나님께 속하고 싶어 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있을 때 완벽한 승리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고, 악인이 자신에게 악을 행할 때 주님께 붙어있음으로 말미암아 그것 자체가 악인의 악함을 드러내는 훌륭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악인들에게 악을 당할 때 하나님께 호소하라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이나 사도 바울이 로마서, 고린도서에서 가르치는 가르침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악인에게 차라리 악을 당하는 것이 낫다. 원수들에게 고통을 당할 때도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더욱 하나님께 간구하라”고 하는 가르침들은 시인의 경건한 가르침과 연속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악인을 하나님의 손에 맡김
누군가로부터 악을 당했을 때,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을 적극적으로 실행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악한 기대를 꿈꾸면 자신의 내면의 세계가 망가집니다. 누군가를 마음속에서 진심으로 용서할 때 가장 큰 유익을 얻는 것은 용서받는 사람이 아니라 용서해주는 사람 자신입니다. 그에게 영혼의 자유가 주어집니다. 교회 개척 초기에는 용서에 대한 설교 시리즈가 참 많았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이런 문제에 걸려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많은 교인들의 영혼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악을 행하면 그 악을 당한 사람이 해를 입는 것보다 더 큰 악을 행하는 우리 자신 속에서 해를 보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선을 행하면 그 해택을 입는 사람보다 선을 행하는 자신이 먼저 유익을 얻게 됩니다.” 그는 인생을 이끌어가는 근본적인 뿌리가 우리 안에 있고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환경이 망가지면 더 좋은 환경을 찾아가면 되지만, 마음이 망가지면 그것을 고칠 수 있는 곳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6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에 너희 마음의 등불이 꺼져서 어두우면 무엇으로 그것을 밝게 하겠느냐?” 인간의 욕망에 의해 마음에 어두움이 도입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인이 거친 대우를 받으면서 고난의 시기를 지나고 있을 때 악인들의 정체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말, 생각, 마음에 있는 의도,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기 때문에 그분을 향한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거침없이 자기 마음에 솟구치는 대로 악을 행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갖춘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그 사람을 해코지 할 수 있는 능력도 없었지만, 혹시 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손으로 그 사람들이 자기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들의 미래를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그런즉 하나님이 영영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취하여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생존하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악한 것과 관련하여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두 방향에서 해석이 가능하다고 보여집니다. 첫째는 다윗은 굉장히 오랜 시간에 걸쳐 시를 써내려갔고 이 시를 쓸 때 그의 영혼의 상태도 각각 달랐습니다. 어떤 부분에서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원수들을 향해 쏟아놓는 격한 감정은 미숙한 신앙에서 비롯된 격정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시편의 많은 곳에서 시인은 자기에게 개인적으로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만 분노를 쏟아놓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악인들, 자기의 이익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의 이름을 더럽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쏟아 놓는 비난과 분노는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심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악인들을 징벌하는 모든 주권이 주님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분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 실제로 다윗은 사울의 일행이 자신에게 악을 행해도 악을 악으로 갚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며 의로우신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들을 다루어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충분한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주님의 주권에 자신의 인생을 맡깁니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들이 깊이 감명을 받게 되는 대목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아가려고 하면 반드시 악인들에게 에워싸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고통입니다. 하나님께 속할수록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 생겨나는 수많은 갈등과 악인들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고통 속에서 그들과 똑같이 악을 생각하고 악을 마음에 품으며 산다면 그것은 자신의 영혼에 큰 불행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에 모든 것을 맡기고 주님의 통치가 자신의 삶과 악한 원수들에게 실현되기를 기대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곳에 신자의 평안한 삶이 있습니다.
악인이 의지하는 것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시 52:6-7)
하나님으로 성을 삼지 않는 악인들
본문은 악인의 정체에 대해 상세히 설명합니다. 악인의 존재는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일단은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이나 많은 권력을 가지고 악하게 살아가는데 그들이 그리는 삶의 질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통치의 질서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상충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악인의 이익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이 때 악인은 자기 자신의 악함을 드러내게 되어있습니다. 악을 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의인에게는 현실적인 권력과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의 행하는 것을 보면서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 사람의 삶의 뿌리를 봅니다. 그 때 그를 비웃을 수 있게 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힘’이라고 되어있는 부분이 우리 성경에는 ‘성’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시대의 ‘성’이라는 것은 ‘공격’보다는 ‘방어’ 개념입니다. 성에는 도시 전체를 에워싸고 있는 나성과 궁궐을 에워싸고 있는 재성으로 나뉩니다. 이 성은 방어의 개념입니다. 적군의 입장에서 보면 파죽지세로 달려왔다 할지라도 가장 많은 병사를 희생시키면서도 점령하지 못하고 난관을 맞이하는 것이 성 앞입니다. 아주 높은 성벽을 쌓고 그 위에서 화살을 쏘거나 바위를 떨어트리거나 불을 던지거나 끓인 물을 부어서 방어하기 때문에 많은 희생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성이라는 것은 저항하는 힘과 보호의 상징입니다. 악인은 겉으로는 큰 힘을 발휘하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 이면에서는 하나님을 성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한 나라가 있고 전투하는 군인들이 있는데 파죽지세로 적군들이 몰려올 때 성 안에 있지 않고 성벽도 없는 벌판에 서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대세를 휘몰아 달려오는 적군에게는 밥이 되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겉으로 보기에 자원과 권력을 가지고 자기 질서를 강요함으로써 의인들을 핍박하고 두렵게 만들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의 성으로 삼지 않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번성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지켜주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에게는 의인들로 하여금 잠시 두려워하게 하는 큰 힘과 권력이 있지만 그들에게는 자기를 보호해줄 하나님의 기업이 없습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니”,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니”, “주님은 우리 하나님이시오”, “우리는 그의 손에 기르는 양이니”, “우리는 주께 피할 것이니”, “우리가 피할 때 주께서 친히 싸우시리니” 악인에게는 이런 고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의지하는 것은 오로지 이 세상의 재물과 권력의 풍부함 뿐인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한 번 불면 날아가는 바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들이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던 사람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어디 재물뿐이겠습니까? 권력도 재물도 명예도 불변하는 것이며 영원한 것들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입니다. 자기는 항상 3반만 맡겠다고 하신 선생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 선생님은 항상 1학년 3반 담임이었습니다. 그리고 독신이었습니다. 옛날에 국가대표 아이스하키 선수였는데 무슨 이유였는지 장가를 안 갔습니다. 그 당시에 자가용을 타고 다녔으니까 돈은 많았던 모양입니다. 학생들을 올바로 교육해보려고 했던 분이었던 것은 인정을 합니다. 학생을 차별하지 않았고, 따뜻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잘 가르쳐보려고 하는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분이 학급지를 매달 발행했는데 학교가 발칵 뒤집히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친구 하나가 거기에 논설을 하나 썼는데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61년도인가 일어났던 5.16쿠데타를 두고 고등학생이 이런 글을 쓴 것입니다. 그 때는 무서운 시절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학교가 발칵 뒤집혔고 그 책을 모두 회수했습니다. 그 때는 모두들 고등학교 학생의 객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뒤, 정확하게 3년 후에 육영수 여사가 먼저 죽고 5년 뒤에 대통령 자신이 죽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회고록에 보니까 박태통령을 처음 봤을 때 ‘저 사람은 스스로는 절대 안 물러날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누가 그렇게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악인은 있는 것 같아도 한 순간에 사라지고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고 의지하는 사람은 사라지는 것 같아도 영원히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최고의 특권은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요 여호와는 나를 지키시는 자시요 세상의 방백을 의지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낫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기업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고의 특권인 동시에 행복입니다.
자기 자신이 기반인 악인들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 악인은 기반 자체가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힘을 허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악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설정한 질서들이 끊임없이 위협을 받고, 그 위협의 한 복판에는 자기 자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자신의 존립을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악인은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의인은 이따금 잘못했을 때 자신의 삶의 기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자신의 부분적인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부족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깊이 생각하면서 결국은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악인은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삶의 기반 자체가 자기 자신이고, 자신조차 끊임없이 물 위에 떠다니는 풀처럼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에 돌아갈 최종적인 종착점이 없습니다. 그때 그때 생각과 욕망을 따라 변하기 마련입니다.
결국 악인은 궁극적으로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입니다. 악인은 스스로를 든든하게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악을 행합니다. 이것이 악인의 정체입니다. 악인의 삶에는 안정과 평화가 없습니다. 물질적인 부는 누릴 수 있고 권력의 정점에 설 수는 있지만, 진짜 평화를 누리는 것은 권력에 의해 압박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비록 삶이 불완전할지라도 돌아갈 수 있는 구심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한 기업이 되신다고 고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는 자
“오직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리로다”(시 52:8)
감람나무에 관하여
시인은 악인과 대조해서 자기를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감람나무는 올리브나무를 말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던 팔레스타인 땅 뿐만 아니라 지중해 연안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습니다. 그리스에도 올리브나무가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것을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말할 정도로 올리브를 다양하게 활용합니다.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1등을 하면 월계수 잎으로 월계관을 만들어 씌워준다고 하는데, 그 나라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올리브 가지로 관을 만들어서 우승자에게 수여했을 정도로 올리브에 대한 존중심이 대단합니다. 오죽했으면 이 나무를 신이 내린 나무라고 생각했을 정도입니다.
올리브는 그들의 일상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열매입니다.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이 열매를 가지고 약용으로 쓰기도 하고, 기름을 짜서 식용으로 쓰기도 합니다. 열매는 우리 입맛에 잘 안 맞지만 그 사람들에게 올리브는 떼어 놓고 살 수 없는 식품입니다. 감람나무는 폭넓게 사용이 됩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지 감람나무를 심어 놓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감람나무는 약용이나 식용으로 사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한 사람, 하나님이 선택한 종을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로서 감람나무로 상징됩니다. 그 정도로 소중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신을 감람나무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존귀하고 유용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부심이 들어 있는 소중한 표현입니다. 자신이 감람나무와 같다고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
세상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악을 당하고 많은 고통을 겪을 때 하나님이 어디에도 계시지 않는 것 같은 낙심되는 상황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 생각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권력과 재물과 이 땅의 자원으로 무기를 삼고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확인합니다. 이런 것들을 넉넉히 갖지 못한 사람들은 자존감이 낮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바깥에서 살던 때의 삶의 방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구원을 받은 후에는 우리 자신을 새로운 시야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중히 여기는 것만큼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수 있는 영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분이 돈이 많고 세상의 권력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는 것은 그분이 가지고 계신 독특한 아름다움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선택된 그분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지만 하나님이신 그분 안에는 영혼과 육체의 독특한 결합이 있습니다. 온전하심,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되신 영광스러운 모습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높이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의 아름다움과 높으심을 찬송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똑같은 눈으로 자기 자신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거짓말이든지, 저것이 거짓말이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적인 방식으로 바라보면서 높이고 경배하면서도 자신은 그러한 시각으로 보지 못하고 세속적인 시각으로 자기를 바라보면서 낙심에 빠지고 좌절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육적인 시각 밖에서 볼 수 없으면 그리스도도 그렇게 소중하게 보지 않는 것입니다. 복잡한 이야기를 할 필요 없이 세상이 커 보이면 그리스도가 작아 보이고, 그리스도가 커 보이면 세상이 작아 보이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악인에게 늘 공격당하고 시련과 어려움을 당해서 일방적으로 악인에게 고통을 당하는 무능한 사람인 것 같지만 시인은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선택하여 주신 사람,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무리 중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인격적인 큰 사랑을 경험하면서 자신을 하나님의 집의 감람나무라고 묘사합니다. 자신이 존귀한 존재임을 하나님의 선택 안에서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번영을 누리는 의인
여기에서 ‘푸르다’는 것은 번성을 뜻합니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식물도 번성할 수 있고 쇠퇴할 수 있습니다. 번성하는 감람나무는 짙은 푸른색입니다. 짙은 푸른색이 싱싱하게 솟아나면 그 감람나무가 생명으로 충만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충만해서 푸른 이파리가 가득 달리고 이어 아름다운 감람열매가 가득 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있어서 생명이 있고 푸른 잎사귀와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감람나무와 같은 존재라고 자신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도 하나님의 선택 안에 있지 않았다면 악인 중의 한 사람처럼 되었을 텐데, 주님의 선택을 받고 하나님의 보호 아래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면서 시인은 하나님의 생명과 은택을 입으며 하나님께 매우 귀중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감람나무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선택하시고 당신과 가까이 할 수 있도록 은택을 입히신 결과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시인이 깨닫는 것은 그러한 번영 속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더 많이 의지하고 살아야 할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인과 악인의 차이입니다. 악인은 번성할수록 하나님께로부터 점점 멀어지지만 선택된 사람들,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백성들은 번영을 누릴수록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인과 구별되는 점입니다. 주님께 대한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살아가고, 번영을 누리면서도 모든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생각을 하며 모든 번영보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고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의 삶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의지할수록 그는 하나님께 더 많이 순종하는 사람이 될 것이고, 더 많이 순종할수록 하나님께서 그에게 더욱 번영을 주셔서 하나님과 이웃에게 요긴한 존재가 되게 하십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고 그 안에서 내가 복되어 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얻고, 하나님께서 나로 말미암아 유익을 얻으실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우리 인생의 복입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에게는 없는 기업으로 인해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택 안에서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감람나무와 같은 존재인 것을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의 이름을 의지함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영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함으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시 52:9)
하나님께 감사함
마지막 절에서 시인은 이러한 일들을 행하신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일이란 첫 째로, 악인이 이 땅에서 번성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정하신 때에 멸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5절에도 나와 있는데, “하나님이 영영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취하여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생존하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행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하심을 따라 세상의 악인들을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것이 큰 상관없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하고 의롭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통치하시는 질서를 잡아주시면 사람과 모든 만물들이 제자리를 찾게 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거스르는 것이 시인에게 끔찍한 고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인해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비록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속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 의지하면서 사는 것이 자신에게 기쁨이 된다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두 번째는 앞 절에 나옵니다.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리로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왜 감사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자기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처처에 있는 수많은 악인들,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악한 무리들을 볼 때 자신도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를 붙드셨다는 고백입니다. 악인들이 행하는 악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게 하시고, 주님을 의지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가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족한 사람을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당신 앞에 번성하며 사는 백성이 되게 하신 것이 큰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행하셨기 때문에 내가 영영히 주님에게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감사하는 삶입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많은 불만과 불만족들은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으며 살지 못하는 삶 속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함없으신 분이고 언제나 계신 분이십니다. 육신의 눈으로는 혼란과 시련이 오고 악이 미치게 되면 하나님을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 자신을 기업으로 삼고 거기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보고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육신의 눈은 만져지는 물건들만 보지만 영혼의 눈은 모든 것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요 기쁨인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것에 인해 내가 영영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감사의 삶입니다. 감사의 삶은 실제로 무엇을 누리기 때문이 아니라 누리지 못해도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성도의 삶이고 신앙생활입니다.
주의 이름을 의지함
시인은 한 가지를 마지막으로 결심합니다. “주의 이름이 선함으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당신의 이름을 이 땅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높아지지도 않고 낮아지지도 않으시지만 당신의 이름은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동일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보고 가슴이 뛰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보고도 가슴이 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향한 사랑은 곧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보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열심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가 끊임없이 역사하게 되자,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깨달은 성도의 삶입니다. 많은 시련 속에서 주님의 손에 선택된 푸른 감람나무같이 주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게 된 시인의 삶은 하나님을 향한 넘치는 감사와 그분을 향한 전적인 의존의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요 사랑의 효과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 살게 하신 것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그분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삶이 우리의 신앙의 삶입니다. 주님을 향한 전적인 의존의 마음이야 말로 사랑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때는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독립하려는 마음은 악을 향해 가는 마음이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시인은 인생에 있어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에서 두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주님께 대한 감사와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56편 강해 1
시편52편 강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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