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53
목 차
어리석은 자의 기도(시 53:1) 21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는 세상(시 53:2-3) 25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 자(시 53:4) 29
하나님이 버리실 때에(시 53:5) 33
시온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시 53:6) 36
시편56편 강해 1
시편53편 강해 1
시편53편 강해 1
시편53편 강해 1
시편53편 강해 1
시편53편 강해 1
어리석은 자의 기도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53:1)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어리석은 자들
다윗이 말하는 악인의 정체는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은 사람입니다. 본문에서는 그런 사람을 ‘어리석은 자’라고 부릅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렇게 살라고 하시는 표준을 떠나서 사는 사람들을 악인이라고 말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기를 원하시는 표준을 떠난 마음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악인이라고 부른다고 배웠습니다. 악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하시는 교훈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두 가지 지식이 있는데, 그것이 믿어야할 규칙과 살아야할 교훈입니다.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믿는가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어떻게 사는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마음에 생각하는 사람들은 삶도 그것과 어울리는 생활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악한 사람들은 삶에서 하나님의 교훈을 저버린 사람들이라면, 믿음의 규칙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지혜의 기초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는 믿음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이시라는 사실을 확고하게 믿게 될 때 비로소 나 자신은 물론이고 이웃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에 대해 질서라는 것을 알게 되게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 비로소 ‘이 세계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운 마음이 있을 때 ‘이 교회는 하나님 앞에 참 소중한 것이로구나.’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당신을 향해 충성스럽게 사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 ‘주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사명이 참 귀하구나.’ 이런 것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판단은 흔들리게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기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편하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한때 기독교 신앙을 꽃피웠던 나라인데, 오늘날은 시민들이 돈을 모금해서 이층버스에 글자를 써 붙인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 편하게 사십시오.” 이러한 광고를 내겠다고 했더니 사람들이 엄청난 돈을 기부했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이 걱정될까요? 자신들의 삶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길에서 현저히 떠나 있으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이 걱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이 위로가 됩니다. 거기에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신약의 성도들이 용기를 얻습니다. ‘사람은 다 알지 못해도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나를 아신다.’ 이것이 큰 위로와 용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악한 자’는 생활의 측면에서 본 것이고, ‘어리석은 자’는 지성의 측면에서 본 것입니다. 머릿속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니까 혼란과 무지 속에서 어리석은 자가 되어 ‘하나님은 없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성적인 판단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
이 세상에서 우리가 ‘무엇이 있다, 없다’를 판단할 때 무엇을 가지고 판단하겠습니까? 우리의 몸에는 바깥에 있는 사물에 대한 정보가 들어오는 것이 다섯 가지 통로밖에 없습니다. 눈, 귀, 입, 코, 피부입니다. 살갗은 접촉을 통해서, 귀는 들리는 것을 통해서, 입을 맛을 통해서, 코는 냄새를 통해서, 눈은 보는 것을 통해서 바깥 세계의 정보와 사물들에 대한 지식을 실어 나릅니다. 이 다섯 가지 그물에 걸리면 우리가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바람은 눈에 안보입니다. 코로 냄새를 맡을 수도 없습니다. 혀를 내민다고 바람이 쓰고 달고 신맛을 내는 것은 아닙니다. 바람은 때로는 귀에 들리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바람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어떻게 압니까? 눈, 코, 귀, 입으로 바람을 느낄 수 없어도 살갗에 스치는 바람의 감각을 통해 바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있는 것 가운데 지극히 일부입니다. 수많은 빛의 파장 가운데 가시광선은 아주 적은 부분에 속합니다. 우리는 소리의 파장이 너무 커도 못 듣고 너무 작아도 못 듣습니다. 우리 몸의 구조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눈이나 코, 입, 귀로 파악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정신으로 볼 수 있는 영이시기 때문에 육신의 감각에 의지해서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사랑도 있고 미움도 있고 양심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양심이나 사랑, 미움을 찾기 위해 우리의 배를 가르고 장기를 뒤져 본다고 해서 거기에 사랑이나 미움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해부학적으로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습니다. 실제로 그것들은 있습니다. 그래서 작용을 합니다. 우리 마음에 사랑이 있다는 것을 믿음이 가르쳐 주고, 양심이 있다는 것도 본 사람은 없지만 믿음이 그것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은 육신의 다섯 가지 기관으로 뵈옵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지성으로 뵈올 수 있으신 분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더 놀라운 일치가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판단을 내리고 나면 그 다음에는 이 사람들의 본성이 부패하고 가증한 악을 행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는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믿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이후에 어떤 삶을 사느냐 하는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을 매일매일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입니다. 비록 우리의 믿음이 연약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살라고 가르쳐 주신 생활의 교훈을 따라 매일매일 순종하며 생활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나는 이러한 하나님이다.”라고 가르쳐 주시고 “너희는 이렇게 믿어라.” 하고 교훈해주신 믿음의 규칙을 배워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교리를 배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 은혜를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은 어리석은 자들과는 멀어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지혜로운 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는 세상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53:2-3)
하나님의 시각으로 봄
우리가 사물을 볼 때 눈으로 봅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가끔씩 당신의 시각으로 사물을 볼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전에는 한 가지 밖에 볼 수 없었는데 성령이 역사해주시면 우리가 보던 것들이 아닌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사물을 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분명히 그 사람이 밉지만 기도를 하면 그 사람이 내게 행한 악한 일이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혼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 눈물을 흘리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보게 하시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러한 변화가 마음속에서 일어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과 시각으로 사물을 보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도 그런 식으로 사물을 많이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안에 품고 계신 마음이 죄에 물들어서 하나님의 마음과 다른 마음을 품으신 적이 없으신 분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물을 볼 수 있는 시야를 갖게 되셨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사물들을 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비관적으로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보니까 비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은혜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반대로 이전에는 모든 것이 잘 되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바라보니까 그 일이 굉장히 가슴 아픈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보면 모든 사람들이 태평하다고 노래하는 시기에 탄식하고 통곡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평안하다고 하는 시기에 위기를 외치고, 모두가 위기이고 큰 환란의 때라고 할 때 오히려 다가올 미래의 행복한 때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낙관을 전해주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시각과는 다른 눈과 마음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입니다.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
여기서도 다윗이 그러한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볼 수 있는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절망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악이나 죄를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에 도달하게 된 결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한 경험을 통해 겉으로 보이지 않지만 마음 깊은 곳에 뿌리박고 있는 많은 악과 더러움들을 발견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겉으로 보이는 삶과 다른 죄의 뿌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본성의 빛 앞에서 비춰보면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더러워지고 뒤로 물러가 있는 비참한 상태에 빠져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비참하고 더러운 상태에서 세상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땅을 바라보니, 하나님을 아는 지각도 없고 한 결 같이 뒤로 물러가 선을 행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소위 언약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리를 보면서 그 안에서 절망과 낙심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깊은 어려움과 고통스러운 상황을 바라보면서 시인은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과 자신 안에 어떤 소망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인간이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속속들이 부패해서 자신의 힘으로는 물질이나 자원들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사용해서 진정한 행복에 이르게 하는데 이바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그것을 통해 다윗은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는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야기합니다. 칼빈주의의 첫 번째 특성이 인간의 전적인 타락입니다. 전적인 타락 때문에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칼빈주의의 특징이라면 다윗은 고유한 의미에서 칼빈주의자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희망 없는 절망적인 상태를 확신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인간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인간관이 여기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시각에서 바라보는 인간은 한 결 같이 물러가 있습니다. 사람의 시각으로 보면 사람마다 살아가는 삶도 다릅니다. 그중에 하나님 앞에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진실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왜 없겠습니까? 그런데 결국 이면으로 들어가 보면, 그 사람이 정말 절망적인 사람이고 아무 희망이 없는 비참한 처지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소유나 물질이나 세상의 자원 때문이 아니라 자신 안에 갖고 있는 비참한 죄성 때문에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삶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너무 어렵고 환란이 많고 시련이 있어서 하나님을 제대로 못 믿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에 여유가 있고 충분하기 때문에 주님을 믿을 여력이 없습니다.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잘 믿던 사람이 형편이 넉넉해지고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면 신앙생활을 안 하게 됩니다. 여유가 있을 때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다가 환란과 어려움이 오면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면 이런 환경을 능가하도록 새 힘을 얻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자원들은 인간이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시련을 이기게 만드는 힘, 뼛속까지 사무친 절망적인 죄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따르게 하는 은혜의 힘은 하나님께로 부터만 주어집니다. 돈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권력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자기에게 가져달라고 하나님에게 명령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이 뼛속 깊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매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진솔한 결심 속에서 주님만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희망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 자
“죄악을 행하는 자는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시 53:4)
본문해설
하나님이 지상 세계를 굽어 살피실 때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4절에서는 악한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하나님께서 살피고 계십니다.
악인의 특징 1: 무지함
여기에서 “죄악을 행하는 자는 무지하뇨”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에게 지혜가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악하게 살아가고 신앙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뱀같이 지혜롭습니다. 악을 행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도 이 세상에 살아남는 사람들은 아주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의 어둠 가운데 살아가는 악한 자들의 지혜가 빛 가운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지혜보다 뛰어날 때가 많습니다. 그들은 무지한 게 아니라 아주 지혜로운 것입니다. 다만 그 지식과 지혜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식과 지혜가 아니라 자기를 공경하는 지혜와 지식입니다. 그래서 그 지혜와 지식을 따라 악하게 살아가고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무지하다고 할 때, 세상의 악한 지혜는 슬기롭고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도 하나님을 공경하고 살아가야 할 기본적인 지혜가 없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하도다” 이러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니까 결국은 하나님이 자신의 삶의 모든 방면에서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무지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 되는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나머지 모든 하위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악을 행하는데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입니다. 내게 이익이 돌아오느냐 고통이 돌아오느냐 이것만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내가 억울해도 하나님이 나의 억울한 것을 갚아주실 것이라는 기대가 생겨납니다. 주님의 심판에 맡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모든 사물과 인간에 대한 하위의 판단들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게 됩니다. 결국 불신앙이라는 것은 또 다른 현혹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모든 지혜의 근본이 되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한편으로는 전혀 무지하지 않으며 또 한편으로는 완전히 무지한 사람입니다.
악인의 특징 2: 강포함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행위를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묘사합니다. 여기에서 ‘먹는다’는 말이 나옵니다. 구약성경에서 ‘먹는다’라는 동사의 목적어를 사람이 취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가진 하나님이 가진 형상을 해치며 불법과 불의를 행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에서 ‘먹는다’라고 표현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음식이 먹는 사람에 대해 항거하거나 불순종하지 않습니다. 아무 힘없이 삼켜집니다. 힘이 없는 백성들이 힘이 있는 사람에게 불법과 불의를 그대로 당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이 그들에 의해 파괴되고 고통당하는 것을 이런 식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우리말에도 그런 말이 있습니다. “누워서 떡 먹기”라고 하는데 실제로 누워서 떡을 먹는 것은 굉장히 힘듭니다. 특히 그것이 찰떡일 경우에는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 의미는 편안한 자세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에 의해 제재를 받지도 않고 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을 때 그것은 쉽지 않은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아합의 경우입니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떡 먹듯이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합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아는 모종의 지식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를 끓이면서도 차마 신앙의 일부가 남아 있어서 그 포도원을 강탈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민하는 것을 보고 이세벨이 가볍게 쳐 죽이고 빼앗아 버립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완전하게 자유로운 것입니다. 그것은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죄에 매인 것이고 악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악인의 특징 3: 하나님을 부르지 않음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합니다. 그 사람들의 또 다른 특징은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은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처음 하나님을 예배하는 기록이 나오는데, “에노스가 하나님을 불렀더라”에서 나옵니다. 이것이 예배하는 것입니다. 진지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없는 것이 그런 사람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한 사람은 실제로 이 무지 속에서 자유롭게 악을 행하고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을 상하게 하지만, 사실은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는 죄악에 시달리며 자기 욕망에 사로잡힌 자가 되어서 일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생각하고, 그 지식의 빛 아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버리실 때에
“저희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하여 진 친 저희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신고로 네가 저희로 수치를 당케 하였도다”(시 53:5)
두려워하는 악인들
하나님의 백성을 떡 먹듯이 하는 악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저희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라고 합니다. ‘두려움이 없는 곳’이라는 것은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는 생활을 한다면 조금도 두려워해야할 이유가 없는데 하나님을 등지고 악을 행하기 때문에 스스로 두려워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실한 신앙의 유익이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가장 큰 유익은 하나님 앞에 두려움이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가장 커다란 유익 가운데 하나입니다. 세례요한이 출생했을 때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세례요한의 앞길을 예언하는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화목함이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신실한 신앙의 유익은 하나님 앞에 구김 없는 마음, 잘 살든지 부족하든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신실한 생활, 주님을 의지하는 아름다운 믿음, 이것이 두려움 없이 살아가는 내적인 비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선악 간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향해 사는 사람들은 시련이 오면 그분의 품으로 피하고, 환난과 핍박을 받으면 하나님은 내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혹시 불순종하거나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충심으로 뉘우치며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두려워해야 할 환경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이요 믿음입니다.
시인을 압박하는 원수들은 두려움이 없는 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일시적으로 힘이 있고 더 많은 자원을 가지고 악을 행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끊임없는 두려움 속에 시달리면서 살아갑니다. 세상의 역사 속에는 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고 생명도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렇게 큰 권력과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일수록 두려움은 훨씬 더 큽니다. 그래서 어마어마하게 높은 궁궐을 짓고, 수시로 죽음의 위협을 느끼면서 주위에 무사들을 배치하고 감시하는 사람들을 감시하는 사람들을 두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큰 힘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과의 평화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악인들을 패하게 하심
그들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것을 시인이 말합니다. “너를 대하여 진 친 저희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진을 친다’는 것은 전쟁에서 보는 광경입니다.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공격을 하기 위해 대열을 갖추고 진을 치는 것입니다. 진을 치고 군인들을 야영시킬 정도니까 이것은 우발적인 전투가 아니라 조직적인 계획 속에서 일어나는 큰 전쟁을 암시합니다. 악한 사람들의 수는 매우 많고, 그 공격은 조직적인 커다란 전쟁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저희의 뼈를 흩으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뼈’라는 말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지만 ‘뼈’는 전쟁과 관련해서 힘을 나타냅니다. 우리의 힘이 뼈에 있다고 봅니다. 에스겔의 환상에서 군대가 형성될 때 죽은 자들의 뼈가 맞추어지고 거기에 살이 덧입혀지면서 조각조각 굴러다니던 뼈들이 큰 군대를 이루는 광경을 보여줍니다. 이 뼈는 그런 종류의 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뼈를 하나님이 흩으셨다는 것은 그들의 힘을 무너뜨리셨다는 의미입니다. 군대가 일어나서 진을 칠 정도로 엄청난 세력을 이루게 되었는데 그것을 무너뜨리고 그 뼈를 흩어 버리심으로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자신의 힘과 권능으로도 크게 패하는 것을 보면서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구나.”라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 광경을 보여줍니다.
결론과 적용
참된 신앙의 유익은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도우심을 힘입으며 그분을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담대함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언제나 행복하고 언제나 형통하고 모든 것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모든 기회들을 주님과 동행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고난도 시련도 주님을 찾는 기회로 활용하고, 시련과 핍박 속에서도 주님을 붙들면서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온에서 경험하는 하나님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시 53:6)
공동체를 통해 경험하는 하나님
악인으로부터 끊임없이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는 비극 속에서 시인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국가적인 지평으로 확장해서 그 의미와 계획들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라고 하면서 한 장소가 나오는데 ‘시온’이 등장 합니다. 우리가 인생의 역경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도움을 통해 그 역경을 이깁니다. 악한 자들에게 에워싸여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꺾으시고 거기에서 우리를 구원해 내십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기보다는 우리가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는 백성이라는 사실을 증거 해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신앙의 간증들을 낳으며 믿음생활을 해나갑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를 입는 것은 공동체적으로 언약백성들을 택하시고, 특별히 그들에게 당신 자신에 대한 앎을 주신 것입니다. 그 앎을 통해 언약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지식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지식 속에서 인생의 여러 문제들을 헤쳐 나가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알게 된 지식은 개인의 소유라기보다 공동체의 소유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공동체를 통해서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될 때 그들과 함께 나누어야 할 지식이요 앎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은 우리가 직접 하나님의 본질을 보아서 알 수는 없습니다. 무한하고, 영원하고, 불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불가해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은 모르지만, 하나님이 세상의 인간들과 맺으시는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는데 이것을 ‘속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속성이 행사되는 방식에 대한 앎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결코 우리에게 혼합되어서 경험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실 수 있는 수많은 속성 가운데 하나와 만나는 것입니다. 두 개가 혼합되어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형언할 수 없는 분이시지만 피조물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에서 어떠한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하나님의 속성들이 그 사람에게 경험되는 것입니다. 비참한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비가 경험됩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경험됩니다. 불의한 자들에게 고통을 받으면서 주님께 호소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정의를 보이십니다. 요동치는 삶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나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이십니다. 하나님의 많은 속성은 하나님이 피조물과 맺으신 관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동시에 두 사람이 기도해도 한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에 강한 경험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알게 되고,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똑같은 십자가의 설교를 들으면서 어떤 사람은 죄의 심각성에 부들부들 떨고, 어떤 사람은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성품이 경험되고 두 번째 성품이 경험될 수는 있지만 두 개가 혼합되어서 우리에게 경험되지는 않습니다. 종종 우리가 두 가지 성품이 함께 경험되는 것 같은 착각을 하는데 그것은 첫 번째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속성이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가 회상의 작용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 정동을 일으키면서 경험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두 가지가 함께 경험되는 것 같은 착각을 느낄 수 있는데, 그렇지가 않고 항상 순서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이런 것들이 기억 속에 많이 있어서 상황에 따라 정동과 회상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면서 나타나게 될 때 하나님의 속성이 우리의 심령 안에 아주 충만하게 경험되는 것입니다.
속성에 대한 경험은 반드시 이러한 속성이 행사되는 방식에 대한 지식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에 대한 앎은 속성에 대한 지식과 속성이 행사되는 방식에 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나와 상관이 없는 지식으로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개인의 삶 속에서 어떻게 행사되더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공동체 속에 어떻게 행사되더라. 하나님의 사랑이 인류역사 속에서, 교회역사 속에서 어떻게 행사되더라. 이렇게 하니까 하나님이 이런 지식들을 부어주시더라.” 이러한 앎이 풍부할 때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앎과 속성이 행사되는 방식에 대한 앎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즉각적으로 실천력을 갖게 됩니다. ‘이런 사랑을 알았는데, 그 사랑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만들어주고 순종하게 만들어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맛본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더 올바르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어서 불의를 버립니다. 이런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신앙이 좋은 사람입니다.
우연적으로 헌신을 한다든지 어떤 결단을 내리는 한두 가지를 보고 신앙의 깊이를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때 신앙이 좋은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경험을 하면 경험은 지식을 남깁니다. 그리고 그것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기억으로부터 잊혀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주 좋은 것이든지 나쁜 것이든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감을 보면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음식을 가리는 것이 거의 없는데 절대로 못 먹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감입니다. 어렸을 때는 감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할머니께서 감의 떫은맛을 없애기 위해 감을 쪄주셨는데, 그것을 먹고 크게 체했습니다. 며칠 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감을 삶던 부뚜막만 보아도 토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감을 보기만 해도 그때의 기억이 올라와서 속이 메스껍습니다. 45년 전 기억인데도 그때 생각만 하면 속에서 올라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그 속성을 경험하면 기억이 속으로 내려갑니다. 언제나 움직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한 번 경험한 사람이 늘 뜨겁게 사랑하면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 대신 기억 속으로 내려갑니다. 이것이 있는 사람이 있고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없는 사람은 아무리 불러오려고 해도 잘 안 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기억 속에 있습니다.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그것이 확 올라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추억이 쌓이는 것입니다. 추억이 쌓이면 못 헤어집니다. 끊임없는 사랑의 기억이 있어서 그 기억을 불러일으키기만 하면 마음을 건드려서 사랑의 정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고 깨뜨려지는 사람은 옛날에 깨져봤던 사람이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 사람들이 깨뜨려지는 경우가 드문 이유도 이것 때문입니다. 기억이 불러 올려져서 정동을 일으키는 것이 얼마나 일반적인가를 보여줍니다. 이런 기억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크기입니다. 그 지식들을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풍부한 정동 속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시온에서 구원하심
하나님은 당신을 아는 지식을 특정한 사람들에게 많이 주고 싶어 하시는데 그들이 바로 언약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 중 특별히 선택받은 언약백성에게 당신을 아는 은혜와 지식을 풍부하게 주십니다. 이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당신 앞에 거룩하게 살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알리고 싶어 하십니다.
시인은 개인적인 지평에서 악한 자들로부터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을 노래하다가 이스라엘을 이야기합니다.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몰라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답을 찾아낸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누가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건지시리요?”라는 대답은 이미 시인의 마음에 있는 노래를 한 것입니다. 그 장소가 제시되는데 바로 ‘시온’입니다. 시온은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는 산지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의 장소로 묘사됩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임재는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데 이 성전과 예루살렘이 일치되지 않습니다. 후에 솔로몬의 성전이 지어지면서 완전히 일치됩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효과가 가장 강력하게 나타나는 곳이 예루살렘과 시온입니다. 하나님의 왕권적인 통치를 처음으로 나타내 보이시는 공간이 예루살렘과 시온입니다. ‘시온에서’라는 부사구를 붙여서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맺으신 언약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건져주시고 도와주시고 힘주시고 도와주셨다고 할 때, 어떻게 힘을 주시고 도와주십니까? 원수를 물리치시고 우리를 거기에서 건져내십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속성과 속성이 발휘되는 찬란한 방식들이 언약백성의 가슴속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백성들에게는 “무기가 딸려서 졌다. 군인들의 수가 모자라서 패배했다.” 이렇게 이해되겠지만,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건져주신 모든 과정들을 통해서 그분의 속성이 계시되고 속성의 방식들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하게 됩니다.
공동체의 역사를 기억함
그러면서 시인은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뜬금없는 이야기 같지만 이스라엘 역사 속에 있었던 많은 전쟁을 회상하면서 개인적으로 베풀어주신 큰 은혜를 공동체를 향한 구원의 행동과 연결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종종 나에게 하나님께로부터 도움이 끊어진 것 같을 때도 공동체의 역사를 생각하면 하나님이 절대로 나를 버리시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나 역시 떼어놓을 수 없는 공동체 속에 속한 언약백성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이것은 같은 말입니다. 야곱은 개인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칭입니다. 이 두 가지 말이 반복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즐거워하고 행복해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오늘날 잃어버린 경건의 기술들입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과 시련을 만날 때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지 않고 버려두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공동체의 역사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깝게 생각하면 우리 교회로 인도하신 방법, 멀게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의 교회를 이끌어 오신 방법,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방식을 생각하면서 주님이 당신의 교회를 버리지 않으시고 언약백성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으니 그 안에 속한 나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께 버림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도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훈련시키시기 위한 방법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안에 있는 나를 버리실 수 없다는 신앙을 갖게 만들어줍니다. 이런 경건의 기술들이 오늘날 거의 사라졌습니다. 이런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회복해서 공동체적인 신앙을 가지고 나아갈 때 우리의 신앙은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리고 시인이 처한 것과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의 영혼을 손해 보지 않고 극복해갈 수 있는 길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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