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55
목 차
간구할 때 나타내시는 하나님(시 55:1) 1
악인에게 고통 받을 때(시 55:2-3) 6
마음이 심히 아플 때(시 55:4-6) 10
죄악과 분쟁이 가득할 때(시 55:7-10) 14
사랑하는 자가 배신할 때(시 55:12-14) 17
악인을 하나님께 맡길 때(시 55:15-16) 21
회고하는 은혜로 이김(시 55:17-18) 24
영원하신 하나님(시 55:19) 28
불변하시는 하나님(1)(시 55:19) 33
불변하시는 하나님(2)(시 55:19) 39
악한 자들의 실상(시 55:20-21) 44
붙드시는 하나님(시 55:22) 48
주를 의지하라(시 55:23) 52
시편56편 강해 1
시편55편 강해 1
시편55편 강해 1
시편55편 강해 1
시편55편 강해 1
시편55편 강해 1
시편55편 강해 1
시편55편 강해 1
시편55편 강해 1
시편55편 강해 1
시편55편 강해 1
시편55편 강해 1
시편55편 강해 1
시편55편 강해 1
간구할 때 나타내시는 하나님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시 55:1)
˚하나님이여 숨지 마소서˛
시편의 분류상 시편 55편은 탄원시에 속합니다.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탄원하는 내용들로 이루어진 시라는 뜻입니다. 시인은 1절에서 제일 먼저 주님을 뵈옵기를 원하는 소원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라고 탄원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어떻게 보면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 분이신데 어디 계신들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를 듣지 않으실 리가 있겠으며, 또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 분이신데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에게서 숨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인간도 하나님 앞에서 숨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어디로 피한들 하나님 앞에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곳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이 어디로 간들 하나님 당신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께 순종하면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뵈옵고,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니, 인간이 어디서 무엇을 하든 당신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간구할 때에 숨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탄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존재론적으로 본 설명이라기보다는 경험적으로 본 기도입니다. 어디든지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고 인생도 하나님 앞에서 피할 데가 없지만, 하나님께서 간절한 기도를 풍부한 임재 속에서 들으시는 것 같은 경험을 주실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이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풍성하게 교제하고 교통을 누리는 때와 그렇지 못한 때로 나눠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시인의 관점에서 표현하면,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고 내가 간구하여도 주님은 숨으셨습니다.”라고 문어적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해 멀어짐
신자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로부터 너무 멀리 계시다는 느낌, 어떤 때는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고 얼굴을 보이시지 않는다는 경험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요? 이것은 둘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기도 속에서 오는 하나님과의 단절된 느낌은 인간 자신 안에 있는 문제로 말미암아 생길 수 있습니다. 우선, 인간이 죄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도 당신의 친밀함을 우리에게 보이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죄가 영향력이 있어서 죄의 힘 때문에 하나님과의 교통이 축출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이 마음으로 죄를 선택하고 불순종하게 될 때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인간에게 주신 은혜를 거두시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은 죄의 힘을 보여준다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거두시는 것입니다. 그걸 현상적으로 표현할 때는 죄의 힘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은혜를 거두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죄와 은혜의 싸움이라는 것은 선택의 갈등 이후에 역사하는 죄의 힘이 더 강력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소멸되는 것처럼 현상적으로는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으로 설명할 때 인간 안에 있는 죄의 크기는 결국 인간이 선택하는 의지와 관련이 됩니다. 그것을 보시고 공정하신 하나님이 그만큼 은혜를 거두시는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설명할 때는 이해하기 쉽게 우리 안의 죄와 은혜가 싸우고 죄가 강해질 때 은혜가 소멸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관련하여 통합적이고 우주적인 사유를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훨씬 쉽게 다가오는 이야기입니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집니다.”라고 할 때 그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사실이 아닙니다. 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도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 설명을 틀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일상 속에서 “아이고, 해가 떴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과학 선생님도 “해가 떴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고, 천문학자도 “별이 나타났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원래 있었던 것이고 날이 어두워지니까 보이고 훤해지니까 안 보일 뿐입니다. 그러한 표현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보다 엄밀하게 설명하면 그렇습니다. 인간이 마음으로 죄를 선택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교통의 은택을 상실하게 됩니다.
무지로 인해 멀어짐
두 번째는 비록 자기가 죄를 선택하진 않았어도 무지할 때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삽질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무지하면 신앙생활을 삽질하듯이 하는 것입니다.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인데 목숨을 걸고서 계속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지식에 기초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렇게 예배하면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한쪽으로 진리의 요소를 제쳐놓고 감정으로만 예배했기 때문에 주님을 만날 수 없었고, 예루살렘 사람들은 의문(儀文)에 적힌 대로 예배하고 영으로 예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은 성령은 있었지만 진리가 없는 예배를, 예루살렘 사람들은 진리는 있었지만 성령이 없는 예배를 드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가 올바르지 않으면 나머지는 없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열광은 있었지만 그것이 성령이라고 말할 수 없고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은 의문으로 예배를 드렸지만 그것이 진리라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주님을 찾는 사람이나 저렇게 주님을 찾는 사람이나 주님을 만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무지 가운데 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섭리 속에서 훈련시키기 위해
때로는 이 두 가지에 해당되지 않는데도 섭리 속에서 하나님 당신의 얼굴을 가리우실 때가 있습니다. 자기가 어떤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안 만나 주시는 것이 이해가 됩니다. 불순종함으로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의 교통이 없습니다. 기도하러 나오지만 긴밀한 기도가 안 됩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러한 죄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회개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단번에 기도의 세계가 복구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커다란 죄 가운데 있었던 사람이 어느 한 순간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다고 해서 기도의 문이 확 열리고 은혜의 빗줄기가 쏟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두 가지 정도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인간이 부분적으로 회개했어도 한 번의 회개로 마음의 성향으로 남아있던 죄에 대한 사랑, 악한 의지가 뿌리 채 뽑혀 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 안에 있는 성향은 의지 안에 있는 성향입니다. 그러한 의지는 악한 의지입니다. 한 사람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에 있고, 한 사람의 가치는 그가 지니고 있는 선한 의지의 크기에 비례합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의지가 선한 의지가 아닐 때 겉으로 보기에는 그 사람이 회개하고 단정한 삶을 사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그와의 교통을 미루십니다.
이 모든 것들에 해당이 안 되는데도 하나님이 섭리 속에서 당신의 교통을 상당한 시간 동안 미루실 때기 있습니다. 많이 부르짖고 기도하지만 어떠한 응답도 없는,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신 때와 같은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기도하는 바가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반영하지 못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기도 중에 대면하심으로써 이러한 기도를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과연 옳은지를 스스로 다시 생각하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사도 바울이 아시아로 복음을 전하러 가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성령께서 막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게도니아 사람이 나타나서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유럽으로 복음의 물줄기가 옮겨지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섭리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가리우심으로써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고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도 얼굴을 가리우시는 것이 우리에 대한 보복이나 복수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키셔서 당신의 공정한 성품을 알게 하시기 위한 훌륭한 훈련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영혼의 상태, 의지의 선악의 여부,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 이런 것과 상관없이 언제든지 우리가 풍부한 교통을 누릴 수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인간이 과연 하나님을 절실하게 찾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공기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고 사는 것처럼 그렇게 살게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매우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깨뜨려지고 고통을 겪고 나서야 그 사실을 한 동안 굳게 붙듭니다. 기도가 안 되고 나서야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간구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유혹이 올 때 그것을 다시 잃어버리고 옛날처럼 고통 속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죄를 버리고 선을 선택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를 향한 자기반성의 촉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자녀들 훈련시킬 때도 따끔하게 야단을 친 다음에는 금방 용서해주지 않습니다. 방에 혼자 울고 있든 말든 문을 쿵 닫고 내버려 둡니다. 왜 그렇습니까? 혼자 생각하면서 각성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완성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그렇게 다루십니다. 그래서 숨는다는 의미를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다급하게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라고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매우 특별한 상황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악인에게 고통 받을 때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치 못하여 탄식하오니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의 연고라
저희가 죄악으로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시 55:2-3)
하나님께 드리는 절박한 기도
하나님은 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지만 시인이 절실하게 자신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탄원하는 내용이 2-3절에서 나옵니다. “내게 굽히사 응답하옵소서”, 여기에서 ‘굽히다’라는 것은 허리를 수그려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동작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위, 아래라는 표현이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설명하는 방식에 있어서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바라보시는 것같이 묘사를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특별한 처지를 하감해 달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만물과 인간들을 돌아보시지만 특별히 자신을 향하여 허리를 구부리시고 그를 바라보시는 동작을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응답해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시인이 얼마나 다급하고 절박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하나님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때는 없지만 아주 절박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잘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평소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신앙생활을 해왔다면 갑자기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놀랍게 응답해주셔서 친히 교통해 주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맑고 투명하고, 그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원수의 소리와 압제 속에서
시인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탄원하고 있습니다. 그 때 시인의 마음의 상태가 어떠한지 나오는데 근심하는 마음과 탄식하는 상태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원수들, 자신을 에워싼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받는 고통과 괴로움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줍니다. 시인이 끊임없는 근심과 탄식 속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이유가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의 연고라”, 여기서 ‘원수의 소리’, ‘악인의 압제’, 이런 표현이 나오는데 1차적으로 전쟁을 연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크게 나느냐에 따라서 군대의 수를 판단하게 만듭니다. 군인들은 적군을 공격할 때 고함을 치면서 큰 소리를 내며 심리적으로 상대방을 압박합니다. 이것이 전쟁의 문맥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원수의 소리’라는 것은 그를 에워싼 적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련을 만나면서 원수의 수는 많아지겠지만 자신은 홀로 외톨이가 된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악인의 압제’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전쟁에 져서 끊임없이 공격을 받고 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항상 승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삶에서의 모든 패배가 항상 그 사람의 죄나 허물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바르고 의지하는 사람도 때로는 수많은 원수에 에워싸이게 하시고 적들에게 압제를 당하게 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렇게 불리하고 싸움에 질 것 같은 위기를 만나야 절실하게 주님을 붙들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종종 이 세상에서 소망이 끊어진 사람처럼 시련 아래 두실 때가 있습니다. 시인처럼 절실하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의 악함과 모든 것들을 주님 앞에 토해놓는 시간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더 충성하도록 격려하시고, 정결한 사람들을 더 정결해지도록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시인의 절실한 기도였습니다.
이들이 시인에게 적군처럼 덤벼들고 압제해서 근심과 탄식을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악한 의도 때문이지만 그들은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무엇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이 말하기를 “저희가 죄악으로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라고 합니다. 악을 행하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이 악하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들은 시인과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사람이라기보다 시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악한 사람들이고 성향 자체가 하나님을 거슬러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전체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 그 뜻을 대항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 이미 그들의 마음과 경향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시인은 절실하게 하나님 앞에 그들의 정체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내가 근심으로 편치 못하여 탄식하오니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의 연고라”, 이것은 피할 수 있는 구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이들과 타협할 수 없는 종류의 선악의 대결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힘으로 이 일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나를 굽어보아 달라고 특별한 간청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나무를 부러트리고 싶다고 아무데나 꺾는다고 해서 대나무가 분질러지지 않습니다. 중국에 가보니까 건물을 짓기 위해 바깥에 철골로 ‘아쉬바’를 만듭니다. 그것을 대나무로 만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위험해 보이기는 하는데, 그 사람들 생각에는 대나무가 휠지언정, 웬만해서는 부러지지 않으니까 그걸로 7층에서 10층 정도 되는 높이의 아쉬바를 만들고 거기에 사람들이 매달려서 공사를 합니다. 웬만하면 부러지지 않습니다. 굳이 대나무를 자르려면 마디에 칼을 대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인생을 살다 보면 결정적인 때가 옵니다.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옵니다. 그 때가 대나무의 마디와 같은 때입니다. 그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마음과 뜻을 모아 기도할 때 우리는 그 인생의 위기를 넘으면서 하나님이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 당신을 드러내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 묻었던 많은 때들을 털어내고 하나님을 절실하게 의지하고 매달리게 됩니다. 결정적인 때 주님이 기도하라고 부르실 때 하나님을 찾는 여러분들 되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심히 아플 때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미쳤도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황공함이 나를 덮었도다
나의 말이 내가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시 55:4-6)
본문해설
시인은 자신의 마음이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미쳤다고 하나님께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이렇게 아파하고 고통 하는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근심 때문이고 또 하나는 원수들의 많은 압제 때문이었습니다. 원수들의 끊임없는 압제가 외부로부터 오는 공격이라면, 근심은 시인 안에서 생겨나는 괴로운 감정이었습니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근심이 시인의 뼈를 마르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작용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우리의 인생에 무한하고 영원한 행복만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세상에서 살아가는 신자의 삶은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근심과 마음의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걱정과 근심들은 사람 안에 있는 독특한 정신의 기능과 연결됩니다. 상상이라고 하는 작용입니다. 짐승들처럼 어떤 일이 있고나서 그것이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상상의 작용이 그를 지배하지 않는다면 아마 그렇게 심한 근심과 염려, 뼈가 썩는 걱정들이 없을 것입니다. 상상의 기능은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시는 놀라운 기능입니다. 세상의 있는 짐승들도 어느 정도는 이러한 연상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창조적인 작용인 상상과는 다른 것입니다. 인간은 외부로부터 모든 정보가 완전히 차단된 캄캄한 어둠과 침묵 속에 있을 때 마음속에 외부로부터 어떠한 정보도 날아 들어오지 않지만 마음 안에서는 창조적이 작용이 일어나서 수많은 생각과 연상들이 끊임없이 솟아나게 됩니다. 인간의 마음은 새로운 정보와 사실들이 없어도 끊임없는 심상들을 그려냅니다. 마음에 솟아나는 많은 심상과 연상의 작용들은 자신의 마음의 경향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새들이 똑같이 소리를 내어도 마음이 우울하면 “새가 운다.”라고 하고, 마음이 밝으면 “새들이 노래한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음 안에 비관적이고 깊은 슬픔이 있으면 밖에서 들어오는 정보뿐만 아니라 마음에서 일어나는 기억들이 꼬리를 물면서 우리를 불안하고 슬프게 만듭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하나님께 계속 의탁하여야 할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한 사람의 선하고 악함은 그의 마음의 어떠함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바로 이러한 근심으로 인해 마음의 평안을 잃어버리고 깊이 아파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아픔을 더하기라도 하듯이 수많은 원수와 악인들이 시인을 공격하고 압제하였습니다. 이것은 상상 속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외부적인 환경을 통해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고통스러운 일들을 끊임없이 당하면서 시인은 마음의 고통을 느끼며 사망의 위협과 두려움이 그를 덮쳤습니다.
마음이 아플 때
신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이러한 근심과 걱정, 슬픔과 괴로움이 철회되지 않습니다. 근심과 슬픔,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것들을 사용하셔서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보여주시고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수 없는 지극히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많은 은혜, 계시의 말씀, 좋은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이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과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하셔서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면서 살게끔 만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피조물들을 통해 영광 받으시는 것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한 사람의 마음 안에서 온전히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더욱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사랑 받는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속에 근심, 밖에 걱정들을 만나게 하셔서 어느 한 순간도 자력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한 분만을 온전히 앙망하며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아프고 근심이 내게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큰 은혜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고 매달리도록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의지하게 하시는 은혜
시인은 “내가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가정법을 사용해서 고백합니다. 될 수 없는 일을 소망하고 있는 시인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그가 당하고 있는 마음의 고통과 괴로움의 크기를 보여줍니다. 이런 소망을 품지 않는 사람이 없지만 우리가 이러한 시련과 괴로움을 당할 때 어디로 피할 수 있겠으며 누구에게 도망칠 수 있겠습니까? 정작 우리를 근심하게 하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때문인데 우리가 아무리 멀리 도망친들 마음과 결별 할 수 있겠습니까? 어디에 가든 거기에는 이미 우리가 있고, 어디로 피하든지 거기서 나의 존재를 외면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대면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 충분히 절망하고 낙심할수록, 믿음만 있다면 오히려 그것은 주님을 의지하게 만드는 귀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탄한 길을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때로는 시련을 주셔서 마음이 심히 아프고 심령의 고통을 받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아픔과 괴로움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전심으로 의존하며 살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얼마 안 되는 우리의 인생길을 걸어갈 때 주님 앞에 기도하고 의지하면서 주님의 손을 꼭 붙들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죄악과 분쟁이 가득할 때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거하리로다(셀라) 내가 피난처에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내가 성내에서 광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주여 저희를 멸하소서 저희 혀를 나누소서
저희가 주야로 성벽 위에 두루 다니니 성중에는 죄악과 잔해함이 있으며
악독이 그 중에 있고 압박과 궤사가 그 거리를 떠나지 않도다”(시 55:7-10)
본문해설
시인은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에 고통이 가득한 가운데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으면 멀리 날아가서 쉬고 싶은 소원을 피력했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7절부터 9절까지는 복합적인 점층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으면 멀리 날아가서 편히 쉬고 싶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있고 싶다. 내가 피난처에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고 싶다.” 이렇게 문장의 요소들이 짝을 이루면서 전진하는 복합적인 점진적 대구법입니다. 이것은 시인이 얼마나 절실하게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에서 떠나 자유를 누리며 살고 싶었는지를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인은 다시 한 번 대적하는 자들의 도성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진술합니다. 그것은 모두 부정적입니다. 강포와 분쟁이 일어나고 저희가 수많은 말로써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주야로 죄악과 잔해함이 있고 악독이 있고 압박과 괴사가 그 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온 성이 아비규환이 되어서 서로를 물고 뜯는 무법한 세상이 된 상황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세상
시인을 향한 악인의 압제와 괴롭힘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도시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하나님 없는 삶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이렇게 피력함으로써 이 나라의 정신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살아가는 세계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 뜻대로 살고 율법을 좇아 살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그러한 삶의 환경 자체가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경건한 사람들은 깊은 괴로움과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면서 교회를 잘 섬기고 교회의 몸의 지체로서 이 세상을 섬기는 것은 우리 자신에 유익이 돌아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이 세상을 복음으로 섬기지 않는다면 세상은 아마도 허무하게 변해가고 자라나는 세대들이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너무 어려울 것 일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법적으로 거의 무한정의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그런 종교의 자유가 주어져도 그 사람이 살고 있는 환경이 신앙을 지키기 어려운 환경이면 법적으로 보장된 종교의 자유는 의미가 없습니다. 실제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 그 신앙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하고 하나님 없는 사상을 학교에서 가르칩니다. 직장 다니는 사람들에게 부정과 부패, 비리들이 성행해서 법대로 살아가려는 사람이 외톨이가 되는 세상이 된다고 한다면 신앙생활은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이 세상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유익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돌아와서 신앙생활을 올바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영국에 가서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인생을 즐기십시오.” 이러한 문구를 개시하는데 25만 파운드가 순식간에 모금되었다고 합니다. 환산하면 약 10억입니다. 그 돈을 가지고 차라리 집 없이 노숙하는 사람들을 돌보지, 왜 하나님이 계신 게 걱정거리가 되는 삶을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허무합니다. 반(反) 하나님적인 것들이 가득합니다. 우리가 믿는 전통적인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논문을 써서 학위를 받을 수 있는 학교가 거의 없습니다. 그 정도로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니까 선조들이 남겨놓은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들이 후손들에게 누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좋은 유산들을 다 버리고 하나님 없는 삶을 택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곤고함과 허전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삶은 정말 아니라는 것입니다. 개인이 하나님께로 나오는 삶과 함께 이 세상을 변화 시키는 일들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도구
시인은 어디를 가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악독과 죄악이 가득한 도성에서 외톨이가 되어서 하나님께 홀로 호소하며 도움을 구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잠시 이 세상에 악이나 하나님 없는 번영들을 놓아두시는 것 같지만 한없이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악인들의 번성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기에 적합한 준비입니다. 악인들이 가득하고 처처에 하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자들이 가득해서 세상이 충분히 어두워지면 하나님 당신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한 훌륭한 배경이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악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많이 볼 때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고, 그렇지 않을 때는 믿음의 필요성을 많이 느낍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고 제멋대로 살아가면서 경건한 자들을 박해하지만 그 너머의 하나님의 통치의 손길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의지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바입니다. 신앙생활하기 적합 한 때는 그렇기 때문에 잘 해야 하고, 적합하지 않을 때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더욱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가 배신할 때
“나를 책망한 자가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찐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찐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롭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하여 하나님의 집안에서 다녔도다”(시 55:12-14)
본문해설
다윗의 표현을 보면 아마 이것은 다윗이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해서 피난을 가던 때의 회고가 아닐까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만큼 아들에 의한 반역사건은 다윗에게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긴 하지만 이 사건이 다윗에게 준 충격은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평범한 한 사람의 신앙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왕이면서 선지자였습니다. 더 나아가서 다윗은 당대 최고의 신학자였습니다. 어쩌면 구약의 유일한 철학자이자 신학자였을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 있어서 자기의 아들 압살롬에 의해 이루어진 반역은 그로 하여금 인간론을 다시 쓰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새롭게 보게 만들어 준 사건이었습니다.
인간의 존재를 깨닫는 자원
다윗에게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는 네 가지의 큰 자원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빛 앞에서 인간이 누군가를 깨달았습니다. 다윗은 다른 사람이 따라 올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아는 탁월한 지식을 소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의 어떠함과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의 어떠함을 통해서 그 빛 아래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는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계시의 말씀이 중심이 됩니다. 또 하나는 자연을 통해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시편에서 보면 자연과 인간을 비교하는 것이 많이 나오고 자연을 통해서 인간에 대해 새롭게 깨닫는 것이 나옵니다. 솔로몬이 잠언의 글속에서 자연세계를 통해 인간에 대한 많은 지혜를 습득하는 방식도 아버지를 통해서 받은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다윗이 인간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깨닫는 세 번째 통로는 자기성찰이었습니다.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함으로써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다른 사람들을 살핌으로써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늘 사람들을 경험하며 살면서 그가 하는 행동, 내뱉는 말, 그가 하고자 하는 계획들을 대하고 그 뿌리를 추적하면서 그의 마음을 살피는 가운데 그가 어떤 존재인지를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압살롬의 반역 사건
이렇게 더듬어가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이 누구인가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는데, 압살롬에 의한 반역의 사건은 다윗으로 하여금 인간론을 새로 쓰게 만들 정도로 큰 충격을 주었던 사건이었습니다. 다윗은 예전에 사울에게 위험과 시기를 당하면서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기 뱃속으로 나은 자식이 아비를 죽이고 왕이 되겠다고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편에 선 많은 사람들이 한 때 자신이 사랑하던 지체들이었고, 자기와 함께 신앙생활 하던 지체들이었습니다.
시인은 말하기를 “나를 공격하는 자가 원수는 아니다. 만약에 원수였다면 내가 참았으리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원래 나를 미워하는 인간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라는 것은 교만한 것을 말합니다. 다윗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나를 원래부터 미워하는 자였다면 내가 차라리 상대도 하지 않고 피하여 숨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한때는 나를 높이고 사랑하고 존경하고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종으로 여기던 사람들이 이제는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교만한 얼굴을 치켜들고 악을 행하면서 나의 원수로 행동하는구나.” 과거를 돌아보니까 그들이 자기와 함께 고생하면서 나라를 일으킨 사람들이고, 자기와 함께 기쁨으로 하나님의 집에 드나들면서 예배하고 주님을 경배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넓게 보면 하나님이 다윗을 징계하기 위한 섭리였지만, 가깝게 보면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의 본성의 악함을 사용하셔서 그리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악한 존재들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인간에 대해 앎
우리가 “인간에 대해 안다.”라고 하는 것은 인간 보편존재에 대해 아는 것과 개별적인 자기 자신에 대해 아는 것, 두 가지를 포함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하나님을 통해, 자연을 통해, 다른 사람을 통해, 또 자기 자신을 관찰하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남’이라는 존재와 다르지만 나와 남이 모두 하나의 인간이라고 하는 테두리를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항상 인간 전체가 누구인지 알고 이웃을 보면 인간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를 알아야 나라는 존재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자각을 통해서 다윗은 인간이 뼛속 깊이 악하고 절망적인 존재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의 인간관은 복음적입니다. 인간은 철저하게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하지만, 사실은 이것이 다윗의 범죄를 통한 하나님의 아픔에 대한 보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것은 축복이었습니다. 이런 징계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인간을, 좁게는 다윗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계시를 한 몸에 받고 하나님과의 깊은 교통 속에 살던 사람이 교만해지지 않고, 노년이 될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의지하고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겸비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작품에 연대를 매긴다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후기 작품으로 분류되는 이 부분에 있어서 예전과 비교될 수 없는 현저한 신학적 깊이와 철학적인 깊이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 살았던 삶과 내면의 결과를 말해줍니다. 말만 잘하고 삶은 개떡인 경우는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이 참되도록 그를 그렇게 데려가신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과 적용
다윗에게 있어서 가장 친한 친구요 동료요 동지였던 사람들이 다윗을 배신하여 다윗의 마음에 칼을 꽂았습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늘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만 보면 원한과 미움이 쌓여서 마음으로 범죄 하게 되지만, 높은 하늘에서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내려다보면, 이런 일들은 일생에서 언제나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원망하고 미워하고 마음의 상처를 받고 복수를 꿈꾸는 삶은 하나님이 없는 삶입니다. 인생은 원래 그런 모순과 악이 가득 찬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불완전한 세상을 볼수록 완전한 하늘나라를 그리워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지만 불완전한 인간을 보면서 오히려 그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된 만족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사에서 일어나는 모순과 갈등을 통해 완전하고 사랑스러우신 당신께로 회귀하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신앙이 필요합니다.
악인을 하나님께 맡길 때
“사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임하며 산 채로 음부에 내려갈지어다
이는 악독이 저희 거처에 있고 저희 가운데 있음이로다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시 55:15-16)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
본문에서 시인의 신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처처에서 악인에게 둘러싸여 고난을 받을 때 그는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복수하고 원수를 해하려는 시도를 하는 대신, 궁극적으로 인간의 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맡겼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인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사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임하여 산 채로 음부에 내려갈지어다”, 시인이 자기의 소망을 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원수들에게 사망이 임하고 그들을 음부로 내려가게 하는 일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도 넓게 보면 하나님의 섭리 속에 일어나는 일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라고 하면서 사망이 홀연히 임하기를 비는 사람들과 자신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소망이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자기에게 유익하고 좋은 일이 일어날 때만 발휘되어서는 안 되고, 자기에게 손해가 되고 어려운 일들이 일어날 때도 공정하게 발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악인들을 하나님께 맡김
시인은 자신의 인생에 극심한 어려움이 닥쳐서 사람들이 자기를 대적하고 원수처럼 대하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집에 함께 드나들던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원수가 되어서 은혜를 복수로 갚고 악을 행하는 일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 이면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불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악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신문을 보니까 노대통령 구속영장을 다음 주에 신청하겠다고 합니다. 이런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하는 것이 너무 슬프고, 한국에 태어난 것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습니다. 결국 악인들의 의리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익이 서로 오가는 동안에는 그것이 굉장히 단단한 줄처럼 여겨지지만 그 이익이 사라지고 나면 줄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사라진 곳에서 인간의 의리는 오래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결국 자기사랑에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될 때 어느 지점까지는 참겠지만 자기 인생의 뿌리가 뒤흔들릴 때 인간들은 그 끈을 놓게 되어 있습니다.
시인은 인간의 악한 뿌리들을 보았습니다. 동무들이었고 더군다나 하나님의 집에서 함께 예배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자신에게 애매히 악을 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권력의 저편에 붙어서 기회를 노리는 것을 통해 밑바닥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불신앙이 있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자신의 인생을 단호하게 하나님께 맡기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해주시고 당신의 공의를 세우시도록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인은 하나님 앞에 언제나 옳은 사람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옳지 않지만 시인의 뿌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은혜를 내려주시도록,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시도록, 간절하고 절실하게 하나님 앞에 호소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었습니다.
16절 상반절이 그의 기도에 대한 결단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하반절은 그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내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여기에서 앞에서는 ‘하나님’, 뒤에서는 ‘여호와’라고 하나님을 부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언약의 하나님을 상기하는 것입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나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도 인생을 살다보면 상황과 환경이 우리의 마음에 맞게 움직일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악인을 통해 오히려 시인을 연단하사 그로 하여금 절실하게 하나님 앞에 매달려 의지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 인생에도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 한 분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그분의 큰 섭리 속에서 나를 이끄시도록 고백하며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입니다.
회고하는 은혜로 이김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그가 내 생명을 구속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시 55:17-18)
본문해설
원수들에게 에워싸이고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여 깊은 고통을 겪을 때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세 때, ‘저녁’과 ‘아침’과 ‘정오’라고 부르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시간관과 관계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해가 뜨면서부터 시작해서 해가 지면 그것이 날이 바뀌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사람들은 해가 떨어지고 저녁이 오면 저녁부터 하루가 시작을 하는 것이고 날이 바뀌는 것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녁을 먼저 거론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너무 고통스러운 시기를 지나고 있기 때문에 하루가 끝나고 다시 돌아오는 그 날은 지금 있는 날과 같지 않기를 원하는 시인의 소원이 묻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자기의 모든 날이 하나님 앞에 근심하고 탄식하는 날들이고, 되풀이 되고 싶지 않은 날들의 반복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탄식하고 근심하는데, 그러한 근심과 탄식이 하나님 앞에 기도처럼 되어서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기도가 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고통을 받을 때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아도 아프고 괴로운 일이 일어나면 마음이 쓰리고 고통을 받습니다. 쓰리고 고통 하는 마음이 될 때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마음을 느끼는 방법이 있고, 하나님과 상관이 없이 그것을 느끼는 방법이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만드는 마음이지만, 전자의 마음은 그렇게 고통을 느끼고 아파할수록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여러분이 살면서도 많이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많은 고통을 겪고 힘들어할 때 은혜가운데 있고 하나님을 많이 생각하게 되면 그 고통이 어디에서 왔든지 아파하고 고통 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 은혜에 더 많이 기대게 됩니다.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을 더 많이 구하며 그분의 품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모든 것이 준비되지 못할 때 고통과 괴로움, 사랑하는 자의 배신, 이 모든 것은 불평과 불만을 일으키고 삶의 희망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절망에 들어가게 합니다.
그러한 사실을 시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고통 받을 때 살아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면서 주님께로 가까이 다가가는 마음의 경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자신의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절실한 기도의 제목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연약한 것을 아시기 때문에 때로는 하나님 이외에 아무에게도 호소할 곳이 없는 처지에 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다하였는가 이제는 나를 버리셨는가”라고 탄식하지만 사실은 그 상황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지금도 붙들고 계시는 확실한 증거이고 표징이며 확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붙드셔서 당신의 큰 사랑으로 이끄시고 아버지 앞에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회상함
그러면서 갑자기 앞의 기도와 어울리지 않는 전쟁의 문맥이 등장합니다. “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그가 내 생명을 구속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이것은 얼핏 보면 지금 자기가 처하고 있는 상황, 자기를 가장 가깝던 친구요 동료이던 사람들이 발꿈치를 들고 자기를 대적하는 상황이 전쟁으로 묘사되는 것처럼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고대의 경건한 사람들이 위기에 처할 때 하나님 앞에 사용하던 경건의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회상이라는 방식입니다. 회상은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자신을 도와주셨던 과거를 회상함으로써 확정되지 않은 미래에 대하여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만들어 주는 경건의 기법입니다. 특별히 시편에 보면 수많은 경건에 관한 기법들이 등장합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 절망하고 좌절하는 현실보다는 과거에 더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웠던 상황에서 자기를 건져 주었던 하나님의 큰 역사를 회상하면서 오늘 새 힘을 얻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런 일이 있기 전에도 전쟁터를 누볐던 사람이었습니다. 수많은 전쟁 속에서 하님이 자기를 어떻게 도우셨는지를 회상하였던 것입니다. 지금보다 더 많은 원수들, 더 많은 대적들이 자기를 치기 위해서 일어났을 때도 하나님은 생명싸개에 자기를 감추어서 칼과 극한 전쟁과 화살로부터 자기를 보호해주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전투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구해주신 것은 자신을 특별히 사랑하시고 인생을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치열한 전쟁에서 수많은 대적들이 자기를 해치지 못했다면 그것보다 못한 배신의 상황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실 리가 없다는 신념을 다시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기법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처럼 느껴지고 나 홀로 시련과 고통을 온 몸에 당하고 있는 것 같은 괴로움이 넘쳐날 때 회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베푸셨던 크고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인 것이고 믿음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로 말미암는 ˘샬롬˙
오늘 시인은 “나를 치는 전쟁에서 하나님이 내 생명을 구속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에서 ‘평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날마다 하는 인사, ‘샬롬’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로 말미암아 사람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평화, 안녕의 상태, 이것이 바로 ‘샬롬’입니다. 시인은 진정으로 그것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쓰라린 배반과 영혼의 아픔을 통해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룩되고 사람들과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변화가 오기를 간절히 갈망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는 평안한 삶은 그저 잠시의 일락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있는 가운데 사람들 속에 이루어진 평화, 그 속에서 우리는 삶 속 곳곳에 침투해 있는 하나님을 의존하는 사상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것들이 그분의 뜻대로 이루어진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가장 작은 인생사 속에서도 가장 큰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배하고 있는 것을 터득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 구석구석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며, 그분이 받으시며 흠향할만한 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면서 전포괄적인 주권사상을 터득하게 됩니다.
결론과 적용
시인에게 일어난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일은 시인이 당장에 지은 죄 때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과거에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사건이라도 이것은 하나님이 시인을 향하여 퍼붓는 보복의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말할 수없는 큰 섭리 속에서 그를 어루만지시고 지키시는 큰 능력을 보이고자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고 사랑하며 살게 만드시는 섭리를 시인은 발견을 했습니다. 그때까지 시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신앙이 필요하다고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사는 세상은 항상 불완전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오고 고통이 오면 오히려 완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태고부터 계신 하나님이 들으시고(셀라)
변치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리로다”(시 55:19)
영원하신 하나님
시인은 악한 자들이 행하는 악과 고통을 통해 제일 먼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회고합니다. 인간사는 복잡하고 어려운 것 같아도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결국 인간사 속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은 하나님에 대한 질문으로 귀착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질문은 둘로 요약이 되는데 “하나님은 어떤 존재이신가?” 또 하나는 “하나님은 어떤 성품을 가진 분이신가?” 입니다. 인생의 문제에 대한 답이 이 두 가지 질문 속에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은 당신의 성품을 어떻게 우리에게 나타내보이시는지에 대한 앎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이 제일 먼저 회상하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의 영원성입니다. “태고부터 계신 하나님”이라고 할 때 ‘태고’라는 것은 창조의 시작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모든 만물 있기 전부터 존재했던 무한한 과거로서의 끝없는 시작을 가리킵니다. 만약 그것이 창조시점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계신 것은 거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시점에서 봐도 하나님은 과거로부터 계속 계셔 오셨습니다. 결국 그 끝은 우리가 추론해 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계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시인의 회고입니다.
일시적인 악인들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당연한 사실인데 그것을 회고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놀랍게도 하나님의 영원무궁한 존재는 들풀처럼 잠시 번성한 것 같으나 사라지는 악인들의 제한된 시간성과 날카로운 대비를 이룹니다. 성경에서는 악인을 벤 풀과 같다고 묘사합니다.
시골에 살아본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논둑에 풀들이 많습니다. 그것들을 베어서 꼴을 주겠다고 낫으로 벱니다. 그것들을 풀밭에 쌓아두면 살아있는 풀들과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벤 풀은 더 이상 습기와 양분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에 뜨거운 태양 볕 아래서 모두 시들어갑니다. 그리고 나면 이튿날 지푸라기로 변해있습니다. 커다란 잔디밭을 관리할 때 잡초들을 제거하거나 잔디를 깎습니다. 깎은 잔디를 거두지 않고 그냥 내버려둡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지저분해 보여도 삼일만 지나면 다 마르고 썩으면서 거름이 됩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악인의 일시성입니다. 일시적인 악인들과 달리 하나님은 태고적부터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인간의 악에 의해 영향을 받거나 인간의 배반에 의해서 고통을 받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땅에 있는 사물들이 어떤 변화를 가할 수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인은 번성한 것처럼 자기를 향하여 발꿈치를 들고 배반하는 무리들의 일시성과 하나님의 존재의 영원성을 날카롭게 대비시키는 것입니다.
성도의 영원한 행복, 하나님
그런데 문제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일시성을 가지고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악인들 사이에 성도라는 사람이 존재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처럼 영원한 존재는 아닙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 덕으로 그분 안에 있을 때 그 행복은 영원히 보장됩니다. 그것이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변함없으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과 악인을 대조하기보다는 하나님 안에 있는 축복받은 성도와 하나님 밖에서 악을 행하며 살아가는 악인을 대비시킵니다. 악인에게도 즐거움이 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성도에게도 즐거움이 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것입니다. 성도는 악한 즐거움을 꿈꾸지 않습니다. 성도의 진정한 복은 하나님으로 비롯되는 복입니다. 악인의 복은 하나님으로 비롯되는 복이 아니라 세상 안에 있는 복이고 욕망 안에 있는 복입니다. 끊임없이 변천하는 인간의 욕망의 변화에 따라 어제 복이었던 것이 오늘은 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은 세상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욥처럼 한 번 재앙이 임해서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리면 비참한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런 것에서 행복을 구하지 않습니다. 성도의 진정한 행복은 영원하신 하나님에게서 구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성도가 진정한 행복을 하나님 이외에 다른 곳에서 찾고 있다면 그는 이미 영혼이 중대하게 망가진 것입니다.
주신 것을 통해 하나님을 기뻐함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누리고 살 수 있는 많은 분복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누리고 즐거워하는 것은 성도의 특권입니다. 칼빈 선생은 자기의 책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많은 것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받은 유업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것은 성도의 복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누리는 것은 정당하다.”라고 말입니다.
금욕주의와 정통신앙은 이렇게 다릅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금욕주의는 맛을 느끼고 즐거워하는 것 자체를 정죄합니다. 그런 것들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데 현저한 방해가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음식을 취할 때도 맛있는 음식인줄 알면서 그것을 피하는 것입니다. 빵도 이것저것 발라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텐데, 빵만 먹습니다. 반죽할 때 계란도 넣고 설탕도 넣으면 맛있는데 소금만 넣어서 굽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혀끝에 도는 맛을 느끼며 ‘아, 감사하다. 하나님은 어쩌면 이렇게 일반은총 속에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발견하게 하셔서 즐겁게 식사하게 해주실까?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구나. 음식도 조금만 탐구하면 혀끝에서 현란한 맛을 내는데 거룩하신 하나님을 지성으로 탐구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우실까?’ 이렇게 음식을 먹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도 함정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점점 더 아름답고 좋은 것을 발견하고 누릴수록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위대하심을 생각하게 되지만, 그 연결이 끊어지게 되면 입맛의 노예가 되어서 깊은 심연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번 육체를 미워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육체를 따라 생각하지 않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면서 「고백록」에서 자기 안에 있을 지도 모르는 다섯 가지 죄에 대해 깊이 성찰하며 회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 없이 더 아름다운 것을 보고자 하는 눈, 하나님 없이 달콤한 냄새를 맡고자 하는 코, 하나님 없이 입맛에 취하는 미각, 하나님 없이 가락에 취하고자 하는 귀, 하나님 없이 보드라운 것 자체에 탐닉하고자 하는 살갗, 이 다섯 가지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문제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연결시키지 못하는 우리의 영혼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시인은 그런 방식으로 영원하신 하나님과 일시적으로 사라지는 죄인들을 대비합니다. 환란과 시련을 통해 시인은 다시 한 번 깎고 다듬어지면서 자기의 진정한 행복이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 진정한 복이 우리 아버지 밖에 없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됩니다. 짧은 인간적인 안목만을 가지고 본다면 다윗의 생애에 일어났던 가슴 아픈 일, 자기가 가장 믿고 사랑한 사람의 배신들은 불필요하고 고통스러운 일일뿐이겠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들은 다윗으로 하여금 자신의 진정한 행복이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훌륭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많은 시험과 어려운 일,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배신, 이 모든 것들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악인처럼 살도록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태고부터 영원하신 당신께 속한 사람들로 남겨두시기 위해서 끊임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
불변하시는 하나님(1)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 들으시고(셀라)
변치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리로다”(시 55:19)
본문해설
앞에 보면 “셀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시편 여러 곳에 이 말이 등장합니다. 이 말은 읽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셀라”는 음악적인 부호입니다. 시편전체는 곡조가 있는 시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그 곡조를 알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느 정도 알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에게도 거의 잊혀졌다고 합니다. 56편에 보면 “요낫엘렘 르호김에 맞춘 노래”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모두 아는 가락이 있었는데 그것이 ‘요낫엘렘 르호김’이라는 가락입니다. 그 가락에 맞추어서 이 시편을 읽으라고 되어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제가 안 붙여진 곡도 있습니다. ‘마스길’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시편의 종류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라고만 되어있지 무슨 곡조인지는 모릅니다. 그 곡조를 부르다가 “셀라”라는 부호가 나오면 옥타브를 올려서 불렀을 것이라고 봅니다. “셀라”라는 단어는 읽어도 문제는 없지만 대부분 읽지 않고 음악적으로만 참고하는 단어라는 말씀입니다.
의인과 악인의 차이
그 다음에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 들으시고 변치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리로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변치 않는다는 것은 악인들을 두고 하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태도를 고치지 않고 경외하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이 징벌로 갚아주실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의인과 악인의 대비는 시편에서 첫 번째 관심사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고 시작되는 시편 1편의 희랍어 본문은 “이렇게 하는 사람의 행복이여”라고 되어있습니다. 이러한 문학적 구조가 신약에서 그대로 반복되는 구절이 있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나오는 첫 번째 말씀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것이 시편 1편의 희랍어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도 시편 1편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편 1편에 나오는 것은 구약의 성도들의 행복이 어떤 성격의 행복인지를 보여준다면, 마태복음 5장 3절 이하에 나오는 예수님의 팔복은 구약성도의 행복이 신약의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어떤 행복으로 전환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것들에는 놀라운 연속성과 유사성이 있습니다.
시편 1편에서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이라고 하면서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악인’, ‘죄인’, ‘오만한 자’ 이렇게 발전을 합니다. 그 다음에 ‘꾀를 좇으며’, ‘길에 서지 아니하며’, ‘자리에 앉으며’ 이렇게 발전을 합니다. ‘악인’에게는 꾀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에차’(hx;[e)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counsel’로 번역이 됩니다. 악인의 계획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이 가지고 있는 이 계획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발전된 사람은 ‘죄인’인데, ‘오만한 자’는 죄를 지을 뿐 아니라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멸시하는 사람입니다. 그 중간에 있는 사람이 ‘죄인’인데 히브리어로 ‘핫타’(aF;j)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이야기겠지만 아는 사람들한테는 참 신기한 것입니다. ‘핫타’라는 세 글자로 되어있는 죄인이라는 명사 가운데 점이 찍힙니다. 히브리어에서 단어에 점을 찍습니다. 예를 들면, ‘아’라고 적어놓고 동그라미 속에다가 점을 탁 찍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어떤 죄를 계속해서 짓는 사람, 죄를 짓는 것이 인격적인 특성이 되어버린 종류의 죄인을 가리킵니다.
죄인의 불변함
시편 1편에서 두 번째 나오는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에서 ‘죄인’이라는 것은 단지 연약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 사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서 죄를 짓고 그것이 인격적인 특성이 되어버린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성도는 죄를 지어도 쉽게 변하는 사람들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전에 죄를 지었지만 오후에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면서 회개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고 불변하는 사람,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오지 않는 가운데 죄를 짓는 것이 죄인의 특징입니다. 죄인의 불변함은 성도의 불변함을 능가합니다. 성도의 불변함은 본성을 따르는 불변함이 아니라 은혜의 효과를 따르는 불변함입니다. 성도 안에 여전히 부패성과 연약함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부패성과 연약함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하나님 앞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도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붙들어 줄때만 가능하다는 단서가 붙는 것입니다. 악인의 불변함은 자신의 본성을 따르는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그러니까 변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모양은 더 강렬하고 약하게 이런저런 형태로 나타날 수 있지만 기본적인 방향에 있어서는 항상 같은 것입니다.
오늘 시인은 많은 경험을 통해서 불변하는 것을 죄인의 특징이라고 봅니다. 불변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시인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악인이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변하지 않는 불변함의 성격도 하나님의 불변하심을 악한 방식으로 본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이 아무리 악을 행하는 일에 있어서 자기의 즐거움과 존재의 과시를 위해 하나님의 불변함을 본받는다 할지라도 인간의 그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실 뿐 아니라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악인의 불변함이 일시적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가 영원히 하나님께 선택받지 못하고 멸망 받을 악인이라 할지라도 불변하고 끊임없이 악을 행하는 성품 자체가 영원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죽이시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벤 풀과 같아서 속히 말라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속히 지나가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모두 사라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살려두시는 동안에 하나님은 섭리 속에서 그들의 악을 사용하셔서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그들을 가르치시고 그들을 사용하셔서 사랑하는 자기 백성들을 향해 유익을 끼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용도가 끝나고 나면 하나님은 변치 않는 그들을 멸하십니다. 그래서 악인이 계속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그 생명을 멸절시키십니다. 또는 환경을 바꾸셔서 그들로 하여금 많은 악을 토하지 못하도록 놀라운 방법으로 막아주십니다. 어떤 경우이든 악인에게는 그것이 커다란 파멸이요 보응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변하심과 지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불변하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불변할 뿐 아니라 그의 성품도 불변해서 하나님의 존재의 불변함은 그의 성품의 불변함에 놀라운 방식으로 투영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가 불변하다.”라는 것을 존재자체를 직시함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서 흘러나오는 성품의 지속적인 행사를 통해 어렴풋이 추론할 뿐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불변하심을 알기보다는 믿음을 통해서 불변함을 알게 되고, 우리의 짧은 삶을 통해서도 불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불변하심이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소망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섭리 속에서 악인을 살려두시고, 악인에게 고통 받는 자신을 외면하시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 속에서 악인들의 악을 사용하시고, 이 모든 것들을 통해 유익을 이루신 후에 당신의 불변하심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불변함이 끊임없이 악을 행하는 악인의 불변함을 능가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바꾸려고 시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존재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태도를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이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약이라는 것도 우리가 먹거나 신체에 접촉해서 도움이 되면 그것을 이로운 약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도와준다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유지되는데 있어서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신진대사를 통해서 생명이 유지되는데 ‘메타볼리즘’(Metabolism)이라는 신진대사가 활발한 것이 생명이 충만한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밥을 많이 먹습니다. 만약에 지금 우리가 그렇게 한 달만 먹는다면 배가 땅에 끌릴 텐데, 애들은 밥그릇에 하나 가득 먹어도 살이 안찝니다. 신진대사가 활발해서 그것을 다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하루 칼로리 섭취량이 2400kcal라고 해도 그것은 젊은 사람들을 두고 하는 이야기이고, 나이가 많이 들면 1800kcal 정도면 충분합니다. 몸의 생명력이 떨어져서 신진대사가 활발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이상 먹으면 계속 축척이 됩니다. 방앗간 기계에 쌀을 집어넣는데 벼를 다 못 빻는 것입니다. 그런데 벼가 또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몸에 계속 쌓이면서 체형이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배가 고프니까 먹었지만 나이가 들면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온갖 음식에 혀가 닳아서 맛있는 것만 만나면 꼭 과식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독이라고 분류하는 것들을 보면, 절대적으로 이것은 독이고 이것은 약이라고 분류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약으로 분류되는 대부분의 것이 독입니다. 비타민이 좋다고 하는데 지나치면 독이 됩니다. 어떤 목사님의 사모님이 비타민 요법을 한다고 하루에 6000mg씩 먹었다고 합니다. 매끼마다 한주먹씩 먹는 것입니다. 비타민 잔여량이 빠져 나갈 때 나쁜 것도 빠져 나간다고 합니다. 대학병원에 가서 정기검진을 받는데 의사가 도대체 무엇을 먹었기에 간수치가 이렇게 높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비타민을 먹었다고 했더니 당장 그만 두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했답니다.
좋은 것도 많이 먹으면 독이 됩니다. ‘안궁우황환’이라는 약이 있습니다. 졸도하는 사람에게 딱 떠서 먹이면 금방 살아나는 약입니다. 거기에 주토라는 성분이 들어갑니다. 주토라는 것은 티스푼으로 한 술만 먹으면 즉사하는 독약입니다. 그것을 아주 미량 첨가하면 우리 몸에 활기를 돋우는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미량이 첨가되면 약이 되고 거기서 조금 더 많아지면 사람을 죽이는 독이 되는 것입니다. 복어국이 왜 그렇게 맛이 있는지 아십니까? 속설에 따르면 거기에 미량의 독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게 맛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이치가 있습니다.
결론과 적용
악이라는 것 자체는 나쁘지만 그것을 조금 사용해서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방법으로 유익을 끼칠 수 없으시다면 그분이 어떻게 지혜로운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악인은 그렇게 살면서 자신은 불변하고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악인은 불변하는 것 같아도 그 불변함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 앞에 망할 것이고, 악인이 본받지 못하는 하나님의 불변하심은 의로우심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악인은 불변함으로 인해 징벌을 받지만 하나님께 속한 의인은 끊임없는 회개와 참회, 말씀의 깨달음과 자기반성 속에서 끊임없이 바뀌어서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지금은 불완전하고 연약하지만, 그리고 때로는 악하게 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은혜 아래 사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묵상하면서 시인은 악인의 멸망을 기대하고 자신의 구원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불변하시는 하나님(2)
“태고부터 계신 하나님이 들으시고(셀라)
변치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리로다”(시 55:1-9)
무한하신 하나님
유구한 세월을 흐르는 우주와 이 세상 만물들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하루살이와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신 무시무종(無始無終)하신 분이십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시간과 관련해서 생각하면, 하나님은 존재의 기원을 무한히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게 하고 미래로 가게 하는데, 이것이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계속 움직이는 개념입니다. 어디가 끝이라고 정하면 하나님은 거기에서 더 멀리 계신 것이고, 거기가 끝이라고 생각하면 하나님은 거기서 더 멀리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존재입니다. 과거만 그런 것이 아니라 미래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길게 시간의 길이를 정하고 여기부터 여기까지라고 말해도, 하나님은 앞뒤로 무한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길이는 하나님에게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수학에서 “무한대분의 일은 영으로 수렴한다.” 이렇게 배웠습니다. 무한대분의 일은 영을 향해 계속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한대라는 분모위에 분자를 일로 올리든 천을 올리든 백억을 올리든 모두 똑같이 영으로 수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적으로는 무한하신 분입니다.
시간의 개념을 초월하시는 하나님
인간이 영원을 생각할 때는 두 가지 개념 밖에 없습니다. 직선적인 영원과 끊임없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회귀적인 영원입니다. 원을 놓고 그것을 따라 가면 한없이 돌아도 제자리에 돌아오면서 계속 돌게 됩니다. 영원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불교나 힌두교의 영원관은 원적인 영원관이고, 기독교의 영원관은 직선적인 영원관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말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원적인 영원관, 직선적인 영원관은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선적인 시간관이냐 원적인 시관관이냐 하는 말은 가능하지만 하나님은 영원자체로서 이 두 가지 모두를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현재, 과거, 미래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바라보는 시간 안에서의 개념을 뛰어 넘으십니다. 꽃을 심으면 싹이 나고, 싹이 나면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떨어지고 죽어 다시 살아나는 계기적인 발생이 없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변함없으시며 영원하신 분으로서 세계와 관계를 맺으십니다.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에게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든지, 깜짝 놀랄만한 사건이라든지, 하나님의 생각을 벗어난 사건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말하기를 “하나님은 오래된 분이시다.”라고 합니다. 예전에 사람들을 만나주셨던 그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우리를 만나주시면서 그 사이에 변하셨다든지 성숙하셨다든지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래된 분으로 묘사가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행하고 어떻게 살아가든지 하나님에게는 다 똑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에 빠지든 하나님을 잘 공경하든 그것이 하나님께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그렇게만 이 세상을 바라보시고 대하신다면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펼치는 세상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유한한 시간과 공간속에 존재하는 유한한 존재로서 하나님께 자기를 굴복시키고 주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해서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기쁨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직선적인 시간관과 원적인 시간관을 모두 초월하시는 분이시면서 이 모든 것들을 당신 밖에 두지 아니하시고 당신 안에 가지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영원하신 분이시면서 시간과 상반되는 존재로 따로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 시간까지도 영원 속에 포함되어서 모든 사물의 흐름을 알려주는 시간을 당신 자신 안에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 안에 있지만, 또한 하나님은 당신을 덕 입어 영원히 있게 하신 사물들도 당신 안에 두시고, 뿐 아니라 시간 안에서 태어났다 사멸할 모든 사물들도 당신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시므로 모든 것이 그분 안에 있음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셔서 모든 것들을 바라보실 수도 있고, 시간 안에서 우리를 바라보실 수도 있습니다. 당신 자신은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계시면서도 어떤 일이 일어날 때 그 일에 대해 하나님께서 느끼시는 기쁨과 슬픔과 분노와 자비와 긍휼과 사랑이 우리에게 느껴지게 하심으로 우리가 매순간 하나님께 돌아오고 그분의 통치에 복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불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불변하고 영원하신 성품의 빛 아래서 시인은 악인을 관찰합니다. 악인은 변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시인의 마음에 고통을 주고 억압하고 배신했습니다. 인간이 자신이 가는 길을 쉬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는 것은 악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불변하심을 흉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변함없이 사랑이시고 자비하시고 불변하시는 것처럼 악인들은 그릇된 방법으로 하나님을 본뜨는 것입니다. 악을 지속시키고 하나님의 불변성을 흉내 내는 가운데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불변성은 하나님 자신이 불변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계속되는 불변성이지만, 인간의 악함의 불변함은 변하지 않기로 의지적인 선택을 함으로 불변하는 악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악인은 악하게 존재하는 것만으로 하나님 앞에 진멸당하는 도덕적인 보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올바르고 주님을 섬기며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충성스럽게 변함없이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면, 매순간 그를 격려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은혜에 화합하는 인간의 의지적인 선택이 어우러져서 성도는 하나님 앞에 견인되는 것입니다. 물살이 강하게 흐르는 커다란 개울이나 강에 서있어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물살이 워낙 빠르게 흐를 때는 앞으로 가는 것은 그만두고 제자리에 서서 그 물살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소모됩니다. 흔들리지 않고 충성스럽게 주님을 사랑하며 서있는 사람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님 앞에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부패한 인간으로서는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이고, 사단의 특별한 역사가 없어도 하나님의 은혜가 제거되면 우리는 강물처럼 떠밀려서 파괴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변하지 않는 악인들은 하나님 앞에 보응을 받을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악한 길에서 변하지 아니하니, 당연히 그는 하나님을 경외할 수가 없습니다. 그의 삶은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끊임없이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보응하신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악을 행하면서 불변할지라도 하나님은 인간이 흉내 내는 불변함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하고 영원히 불변하는 분이십니다. 악인은 아무리 하나님의 불변을 악하게 본뜰지라도 불변하시는 하나님을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이 우리에게 돌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께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해볼 때 눈을 들어 파란 하늘을 바라보고 지난해와 다름없이 솟아나는 만물의 소생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아야할 이유와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은 영원한 생명에 속하는 것이지만, 그분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것은 고통밖에 우리에게 남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고 우리를 보면, 티끌 같고 들풀처럼 사라져갈 하찮은 인생이지만 시간을 넘어서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주님께 바치는 우리의 사랑과 헌신과 섬김이 영원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의 모든 것들은 지나가고 사멸하는 것들입니다. 그것들도 지나가고 사라지는 것들이니, 그것을 향한 사랑도 사라지고 소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요한 사도는 “이 세상도 지나가고 그 정욕도 지나가고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영원히 있느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악한 자들의 실상
“저는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 그 언약을 배반 하였도다
그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시 55:20-21)
본문해설
시인은 본문에서 다시 한 번 악한 사람들의 정체, 혹은 실상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20절이 악한 사람들의 외적인 행위를 보여 주는 것이라면, 21절은 악한 행위를 하는 악인의 내적인 특성을 보여줍니다.
화목한 자를 침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라고 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 잘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징계를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고, 다윗이 그들에게 잘못한 것은 없지 않습니까? 넓게 보면 하나님의 섭리 속에 일어난 일이지만 이유 없이 선한 다윗을 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원래 화목했던 사이였고 자신에게 피해를 준일이 없는데 그 사람을 미워하고 해친다면, 그 사람과의 관계 이전에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진 사람일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화목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토대로 이루어지는 언약백성들과의 평화입니다. 이것을 이유 없이 깨뜨렸습니다. 악한 사람들의 정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진 사람입니다. 그것이 시인이 바라본 악인의 정체입니다.
언약을 배반함
“그 언약을 배반 하였도다”라고 할 때 ‘그 언약’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윗과 사람들 사이에 맺은 언약도 포함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입니다. 시편에서 이야기하는 악인의 외적인 특징은 하나님의 율법에 개의치 않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외적으로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상관없이 자유롭게 사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은 자신 밖에 율법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안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도록 힘을 주지는 못하고 가까이에서 보면 율법과 은혜가 모순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율법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목적과 이어지고 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은 넓게 보면 율법과 은혜는 용도적인 연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속에 하나님의 은혜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악인이 바로 그렇게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해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관계는 율법 속에 나타나 있는데, 율법과 성경의 진리는 언약백성으로서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악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전쟁터입니다.
마음에 숨긴 적의
“그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여기에서 ‘우유 기름’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유제품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번역에 차이가 있겠지만 ‘버터’라고도 나오고 ‘요구르트’라고도 나옵니다. 아마 여기에 나오는 우유 기름도 그런 유제품의 기름을 가리키는 것일 것입니다. 이런 기름의 특성은 미끄럽다는 것입니다. 그 입이 우유 기름보다 미끄럽다는 것은 너무 자연스럽게 선한 말, 사람들의 마음을 좋게 하는 표현에 익숙해진 사람들이어서 저들이 지어내고 있다는 느낌이 안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전쟁은 시인과 벌이는 전쟁입니다. 바탕이 선하고 은혜로운 사람은 거짓을 말할 때 금방 표가 납니다. 그런데 거짓을 진실인 것처럼 기가 막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본성에 거짓이 철저하고 자연스럽게 깃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거짓말도 자주 하다보면 분명히 거짓을 말하면서도 눈물을 펑펑 흘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리학적으로 증명이 됩니다. 자기 자신도 의식 속에서 속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연기하는 것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연기라고 하는 것이 배경은 가상세계입니다. 그 속에 자기가 들어가서 본래 자기인 듯한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짓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울수록 악인의 악함은 마음속에서 깊은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 입은 우유기름보다 미끄러워서 사람들의 귀에 듣기 좋고, 사람들이 볼 때 그 사람에게는 흠잡을 데 없는 자연스러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 동일한 사실을 말을 바꿔가며 강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병행법이라고 합니다. ‘입’과 ‘말’과 ‘우유 기름’과 ‘기름’, 그리고 ‘미끄러워도’와 ‘유하여도’와 ‘그 마음은 전쟁’과 ‘실상은 뽑힌 칼’ 이렇게 비교되는 것입니다. 무사가 칼을 뽑았다는 것은 그냥 한번 뽑아 본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죽이고자 하는 그의 마음의 적의를 드러낸 것입니다. 겉으로는 유하게 사람들을 속이고 방비 하는 마음을 누그러트린 다음, 이미 마음속에서 뽑은 칼로 그를 찌르는데, 사람들이 시인에게 그런 일을 행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시인에게 악을 행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지만, 시인은 그들을 신뢰했던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어떠한 대비책도 세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받을 때 자기편에 섰던 충성스런 신하들이 자기를 향해 발꿈치를 들고 악을 행하는 것을 보면서 그일 이후로 다윗은 굉장히 현명해집니다. 사람을 쉽게 믿지 않고 지혜로워집니다. 그 후에 사울의 자손 므비보셋이나 일행들을 관리하는 것에서 잘 나타납니다.
결론과 적용
이것 또한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악인들이 베푸는 끔직한 악과 눈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뿐 아니라 지혜로워지게 됩니다. 인생을 살면서 이런 일들은 언제나 일어납니다. 시인은 잘못했기 때문에 섭리 속에서 하나님께 징계를 받았지만 이 일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하시고, 당신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가슴 아픈 일들을 허락하십니다. 그 때 우리는 악인의 실상을 분명하게 배우게 됩니다. 부드러운 말, 우유기름 보다 미끄러운 입술 너머에 있는 그들의 정체를 보게 됩니다. 악이 사람들에게 나타났을 때 그 악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순간 악인들이 의지하지 못하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붙드시는 하나님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려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 하시리로다”(시 55:22)
본문해설
하나님을 향한 탄원으로 이어지다가 갑자기 누군가에게 권고하는 말이 나옵니다. 갑자기 시 속에서 노래하는 대상이 바뀌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되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가능성은 두 가지라고 봅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계속하다가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리라”고 할 때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음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시는 시인이 하나님을 향해 써내려간 시이지만 시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과의 교통, 교감에서 나오는 응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시인이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리라”고 한 것은 하나님을 찬송하다가 갑자기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해있는 많은 언약백성들에게 주는 교훈적인 시구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다른 사람을 향해 위로하고 격려하는 내용이 하나님을 향한 찬송 속에 삽입되어 있다고 보게 됩니다.
우리가 시를 놓고 어떤 것은 하나님께 직접들은 음성이고, 어떤 것은 다른 사람을 향한 교훈이 삽입된 것이라고 정확하게 판단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2인칭으로 표현되는 인간을 향한 교훈들이 시인에게 개인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신탁의 말씀으로 기억되었다가 후에 시를 쓸 때 삽입된 형태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설명이 가능합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밑기라˛
그 내용을 보면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려라”고 합니다. 이것이 시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인지, 아니면 자기가 스스로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든지 우리에게는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면서 하나님을 거스르는 악인들로부터 집요하게 공격을 받는 사람은 그 상황자체가 고난 속에서 짐을 짊어진 것 같은 상황입니다. 그 속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갈 때 하나님은 시인을 통해 위로하십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려라” 할 때, 짐을 여호와께 맡긴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성경에 이런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현실적으로 악인이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배신을 해서 시인을 곤경으로 몰아넣을 때, 그 짐이라는 것은 견딜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이고 아픔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호와께 맡겨 버린다는 것입니까? 이것을 여호와께 맡겨버린다고 했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를 배우신 것이 기억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와 유사한 형태가 구약 속에서도 나타난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악인들에게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과의 진실한 사랑의 연합 속에서 그들을 나의 대적으로 보지 않고 공동체를 향한 대적이자 하나님에 대한 대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것을 보여주는 대목이 많이 나타납니다. 특히 시편과 잠언에 나타나는 악인과 의인의 날카로운 대조가 나타납니다. 악인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언약백성이라고 하더라도 물러가서 언약관계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의인은 그것을 기뻐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형태는 구약에서도 이미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숨으며 자신의 개인적인 대적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전체를 향한 대적으로 보는 문학적인 플롯이 구약에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도 이러한 구약적인 생각에 의해 뒷받침되는 교리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린다.”라는 것은 최소한 2가지를 포함합니다. 시인이 환난과 시련을 통해서 자신을 하나님께 더욱 합치시키고 순종함으로 자기를 공격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 피한다는 개념입니다. 마치 아이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도망쳐서 엄마 뒤에 숨듯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뒤에 숨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개념이 여호와께 짐을 맡기는 개념입니다.
이러한 개념 속에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의 신앙, 하나님을 향한 순수하고 절대적 의존의 마음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과 그 분께 의지하는 마음 안에서 우리가 당하고 있는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자신은 하나님 안에서 그분과 더불어 악인들을 맞서는 상황으로 가는 것입니다. 혼자 그것을 당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나의 편이 되셔서 하나님이 그것을 맡으시고 인생에 어떤 일이 생기든지 주님을 의지하며 산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신앙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가운데 그분 앞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붙들어주심
시인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 하시리로다”, 하나님이 붙드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그분을 신실하게 의지할 때 그의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그를 붙드시고 도와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 하시리로다”라고 할 때, “요동한다”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를 벗어나서 악인에게 공격을 받아 삶이 뿌리 채 흔들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 일들은 일어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이 견고하고 요동하지 않을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은혜로 붙드시기 때문에 잠시 고난을 당하지만 삶이 뿌리 채 흔들리는 일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것을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악인이 공격하고 자신의 삶의 기반을 뒤흔들 것 같은 커다란 위력을 과시할 지라도 그것을 보며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피하는 것,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그래서 인생의 환란과 시련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요동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십니다.
시인이 환란과 고난을 당하게 된 것이 그의 범죄로 말미암는 징계 때문이었지만, 그는 여기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신앙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걷게 되는데, 이것을 통해 시인은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해야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주를 의지하라
“하나님이여 주께서 저희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저희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시 55:23)
본문해설
마지막으로 시인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기도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자기를 괴롭히는 악인들의 마지막에 대한 기도와 악인에게 고통을 받는 자신은 그런 환경 속에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 것인지를 나누어 고백하고 있습니다.
악인을 파멸에 빠지게 하시는 하나님
“주께서 저희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우선 자신을 많이 괴롭힌 악인에 대한 기대를 보여줍니다. 이 기대는 두 가지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우선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끊임없이 고통을 주고 괴롭히는 사람의 악한 행동은 악한 행동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무게 때문에 무거운 물건을 경사진 곳에 두면 흘러내리듯이 하나님이 정하신 도덕적인 법칙에 따라 그가 지금은 번성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파멸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직접 징벌하심으로 하나님이 그를 파멸의 웅덩이에 빠뜨릴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모든 자연만물들을 다스리실 때 당신이 정해놓으신 법칙으로도 다스리시고, 당신 자신이 직접 행하심으로 다스리기도 하십니다. 법칙 자체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에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무거운 것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같이, 하나님이 법칙을 만드시고 그 법칙 안에서 법칙을 따라 하나님이 자연만물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십니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가을이 지나가면 겨울이 오듯이 하나님께서 자연의 순환을 법칙으로 정하시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움직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법칙에 묶이거나 메이지 않고 그 안에서 자연의 법칙과 사물들을 움직이십니다. 그러므로 자연법칙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만물을 움직이는 규칙이지, 하나님과 상관이 없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규칙으로 다스리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법칙을 초월해서 직접 통치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닷물을 갈라지게도 하시고, 기적을 일으키셔서 자연만물들을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도덕의 법칙을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라 해도 하나님이 만드신 법을 거슬러 살면 고통과 괴로움을 느끼고 그 법에 부합하게 살면 평안을 느낍니다. 그러한 도덕법칙에서 볼 때, 시인은 자신을 괴롭히는 악인들을 향해 “주께서 저희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섭리 가운데 파멸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신다.”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인 다윗을 파멸시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웅덩이입니다. 시인을 비롯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파멸시키기 위해 악인들이 만들어 놓은 웅덩이인데, 거기에 자신들이 빠질 것이라는 의미합니다. 성경을 보면, 악인의 꾀는 결국은 자신을 옭아매는 줄이 되고, 악인 파놓은 함정은 결국 자신이 빠지는 도구가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보호하십니다.
사랑과 공의를 버린 악인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저희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시인은 악인들이 행하는 일과 그들의 미래의 불행에 대한 기대를 고백합니다. 그들은 피를 흘리게 하는 자이며 속이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특징 중 가장 중요하고 고전적인 덕목 두 가지를 위반한 것입니다. 사랑과 인애, 혹은 자비와 공의입니다. 미가 선지자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구인지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신탁을 빌었습니다.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는 사람의 내면적인 모습이 삶속에서 드러나게 될 때, 그는 하나님과 사람을 향하여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지금 공의를 행한다.”라고 할 때 자신 과연 그렇게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며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사랑하는 것만큼 힘들고 어려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사람이라도 끝까지 사랑해 본 사람은 절대로 자기 자신에 대해 낙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히 동행하는 것은 공의와 사랑으로 그의 내면의 세계가 가득 찼을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삶의 발현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함께 하나님의 백성 된 사람들에게 파멸의 웅덩이를 파고 피를 흘리게 하는 잔인함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장 중요한 인자와 거리가 먼 삶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거짓에 대해 철저히 탄핵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계시록 21장으로 넘어가면 거짓말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일에서 제외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악이 거짓입니다. 사람들은 왜 거짓을 행할까요? 끊임없이 거짓을 행하고 그것이 그의 인격에 밸 때까지 악을 행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 따라 그때 변해가며 산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에는 공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사랑 없이 사는 것을 탄핵하십니다. 사람들의 피를 흘리고 파멸의 웅덩이를 파서 그들을 빠뜨려 죽게 만들 때, 하나님이 그들을 미워하시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거짓이 얼마나 심각하기에, 누구를 죽이거나 약탈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거짓을 철저히 미워하셨을까요? 하나님의 백성의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산다는 것은 사람답게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다운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 뒤에 하나님다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람답게 만드심으로 하나님 당신을 알리십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함입니다.
세상의 나라는 정신은 하나님을 떠난 다음부터 하나님과 겨루는 것이 목표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악하게 흉내 내려고 합니다. 세상 나라가 많은 권력을 추구하고 악인들이 권력을 탐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흉내 내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끔찍하게 악을 행하면서도 많은 돈을 벌려고 하는 이유는 많은 재물은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소비할 수 있도록 자원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흉내 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건강하게 오래살고 싶어 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건강하게 장수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흉내 내는 것입니다. 악인이든 언약백성이든, 모든 사람은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복되심을 흉내 내는 것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세상의 인간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고자할 때 일관되고 정직하게 살수 없습니다. 이익의 문제가 날마다 걸려있으므로 끊임없이 변신합니다. 그런 식의 삶을 살면 하나님이 누구신지 보여주는데 실패하게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알리는 일에 있어서 방해가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비추어 볼 때 세상의 모든 상황들이 하나님의 성품에 맞도록 진행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하나님의 법칙에 의하면 의인은 언제나 잔치를 벌이면서 기뻐하고 악인은 날마다 초상집 분위기에 고통을 받아야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잘못된 구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때로는 이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신실하게 믿는 사람들에게 고난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잘못된 질서가 압박처럼 다가올 때도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려고 하면 그것이 어두운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고 썩어가는 세상의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세상의 이상, 바벨론의 가치는 하나님을 흉내 내어서 더 강하고 크고 행복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세상의 가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보여줄 때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최고의 가치이며 행복입니다.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의무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아는 것입니다. 그분을 통하지 않으면 하나님께로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탁월하신 그리스도 앞에서 인간의 의무를 다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보실 때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갈 때 그 아름다움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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