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56
목 차
하나님을 의지하리이다(시 56:1-3) 1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시 56:4) 5
악인을 낮추시는 하나님(시 56:45-7) 8
주께서 기억하시는 날에(시 56:8-9) 11
의지하는 자의 찬송(시 56:10-11) 15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시 56:12-13) 19
시편56편 강해 1
시편56편 강해 1
시편56편 강해 1
시편56편 강해 1
시편56편 강해 1
시편56편 강해 1
하나님을 의지하리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나의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히 치는 자 많사오니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시 56:1-3)
믿는 자들의 고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간다 하더라도 여전히 고난은 있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표 자체가 우리를 이 세상에서 건져내어서 분리시키시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는 분리된 사람들이지만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이 세상에 함께 살게 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나면 오히려 고난이 더 많아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 없이 살아갈 때는 부모든 자식이든 남편이든 아내든 형제든, 가족 중 누군가가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괴로움을 주면 우리도 똑같이 행동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고 나면 십자가를 져야 되지 않습니까? 부모가 내게 깊이 상처를 주었다면 그 부모를 용서하고, 자식이 날 아프게 해도 자식을 용서하고 동기간에도 자기가 손해를 봐도 화합을 도모해야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그렇게 사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을 믿고 나면 오히려 고난이 더 많아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차이는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살아가는 삶은 행복한 삶입니까? 그렇게 말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가 손해를 보지 않고 희생을 당하지 않는 삶이라고 해서 행복한 삶은 아닙니다. 아무리 단기적으로는 고생을 덜하고 그것을 회피할 수 있고 자신의 욕심대로 행하면서 산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는데 그것을 모두 불문에 붙이고 부모를 용서하고 효도하면서 사는 것이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상처를 부여안고 부모와 척(隻)지면서 살아가는 것을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고난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기를 순경(順境)에 처할 때에는 역경(逆境)에 떨어질까봐 두려워하고 역경에 빠졌을 때는 순경을 향해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는 것이 어떻게 시련이 아닌 것이 있겠습니까? 산다는 것 자체가 끊임없는 고통이고 괴로움이 아니겠습니까? 악을 악으로 갚으면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십자가 없이 그저 자기사랑으로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가족들을 향해 그런 식으로 살아가노라면 거기에 좋은 끝이 있겠습니까? 서로 원망하고 미워하다가 죽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경험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사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은혜는 그 속에 사명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을 위해 자기가 희생을 하고 자기에게 고통을 준 부모를 용서하고 살아간다고 합시다. 거기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설령 그 일이 끝까지 잘 안 이루어지게 된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목표가 있고, 그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셔서 그 은혜를 따라서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인데 해야 할 일을 만났을 때 자신의 능력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과정을 통해서 종교의 진수가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을 낳아보지 않은 사람에게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과 애틋함을 수 없이 이야기한다고 그것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해산의 고통을 모르는 사람에게 그것을 설명한들, 그것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제가 몇 해 전에 편도선 수술을 했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그렇게 아픈 건 처음이었습니다. 예전에는 편도선 수술한다고 하면 심방도 안 갔습니다. ‘생명에 아무 지장이 없으니까 그저 병원에서 푹 쉬다가 나오면 된다.’ 이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저는 조금 특별한 경우이기는 했습니다. 열꽃이 편도선부터 시작해서 안까지 돋았고, 20년 의사생활을 했던 사람이 나더러 기록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커다란 편도는 처음 봤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밥을 먹으면 밥알이 들어갈 정도로 편도가 곪아서 구멍이 뚫어져있었습니다. 그 정도로 심했습니다. 그것을 떼어냈는데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아팠습니다. 저도 어느 정도는 참을 수 있는 사람인데 너무 아픈 것입니다. 어느 자매가 심방을 왔습니다. “좀 어떠세요?” 그래서 “너무 아프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자매 하나가 “목사님, 그게 얼마나 아픈지는 모르지만 애 낳는 것은 그것보다 훨씬 아파요.” 그럽니다. “나는 안 낳아봤으니 할 말이 없지.” 그랬는데 나와 똑같은 상황에서 수술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그거 어마어마하게 아파요. 애 낳는 것보다 더 아파요.”라고 합니다. 그 사람은 둘 다 경험을 했으니까 나의 증인이 되어 준 것입니다. 그렇게 설명으로 옮긴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세속주의와 이단이 어디에서 생겨나는지 아십니까? 믿지 못하는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믿으면 많은 말이 필요 없고 단순합니다. 그런데 안 믿으려고 결심하면 그 다음에는 말이 아주 많아지게 됩니다. 설명할 수 없는 경험 속에서 전수되어야 할 지식을 이성으로 받아들여야 하니까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도저히 이야기가 안 통하는 사람에게 우리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먹어봐야 맛을 알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먹어서 혀로 맛을 느낄 수 있는 음식에 대한 경험을 말로 설명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무지하게 말이 많아질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것을 그 사람에게도 먹이고 그 사람이 ‘음’ 하고 느낀다면 언어가 별로 필요 없습니다. 이것도 똑같은 것입니다. 만져서 알 수 있는 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라고 하면 이게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코로 냄새를 맡으면 될 것을 말로 해보라고 하면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육체의 감각도 서로 통하기가 어렵습니다. 영혼과 정신에 속하는 감각이 믿음인데 그것을 육체의 감각으로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보라는 것은 많은 무리가 따르는 것입니다.
신앙의 핵심, 하나님을 의지함
우리는 그런 신앙의 정수를 경험하면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앙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핵심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땅과 하늘에서 영광을 받으시기 전에 먼저 당신을 의지하는 마음 안에서 영광을 받고 싶어 하십니다. 이렇게 의지하면서 살면 좋을 텐데 인간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인간 안에 있는 타락한 죄성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독립하려고 하는 본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절실하게 매달리며 기도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셔서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악한 인간인가를 알게 되면 우리 눈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둔감해져 있는 우리의 영적인 사고가 일깨워지지 않을 때 예민해져 있는 우리 육신의 감각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은혜가 떨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둔감한데 망해서 가난해지고 고난과 시련이 오는 것에 대해서는 예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전체적으로 만지시고 돌보시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자동차를 ‘보링’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몇 만km를 타고나면 엔진을 열어서 몇 가지를 교체하고 엔진에 새 힘을 내게 하는 기술입니다. 지금은 차를 타기 싫을 때까지 써도 엔진이 아무 문제를 안 일으키니까 ‘보링’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가끔 하나님이 우리를 보링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내적인 고통을, 환경적인 어려움을 주셔서 당신만 의지하게 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시인은 지금 악인들에게 에워싸여서 고통을 받고 두려움을 느끼는 때에 주님을 의지하겠다고 결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시인에게 신앙세계의 정수를 알려주시는 기회로 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시 56:4)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의지한다.”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무엇을, 어떻게, 의지한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몸이 불편할 때 무엇을 의지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대부분은 자기의 힘을 거기에 빌어서 그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다리를 저는 사람이 지팡이를 의지하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자기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설 수 없는 사람이 그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고, 지팡이를 의지해서 몸을 가눕니다. 그렇게 의지하는 것은 결국 힘을 거기에 기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힘에 기대어서 자신의 힘을 거기에 얹고 그것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이며 말씀생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생활이 매일매일 삶의 연속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시는 분도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지팡이나 그런 것들을 의지하는 것과는 현저하게 다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어떤 분이시고 어떻게 행하실 것이라는 뜻을 당신의 음성으로 계시해주십니다. 그 음성이 기록된 형태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약속의 말씀도 있고 명령의 말씀도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도둑질하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거기에는 도둑질하지 않고 사는 자들은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명령을 거슬러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맞서시겠다는 메시지가 이미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주겠다.”라고 약속을 하시면,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그 방향으로 역사하실 것을 보여주는 예고입니다. 이런 것을 의지하고 믿는 신앙,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고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순종하고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야말로 믿음의 핵심인데, 성경에 의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아는 데서 믿을 마음이 계속 생겨난다는 뜻입니다. 본문은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그 말씀이 말할 수 없이 소중하고 귀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충만히 깨달아져서 역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고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풍성하게 배울 때 거기에서 하나님의 큰 은혜,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큰 능력이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그렇지만 시인이 에워싸여 있는 환경은 만만한 환경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고통과 시련, 자기를 치려는 수많은 사람들의 악한 시도와 고통스런 과정들이 끊임없이 제시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하고 반문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사람들이지만 시인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자기를 해치려는 수많은 사람들의 악보다도 자기를 지키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훨씬 크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라고 말합니다. ‘혈육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를 해치려는 원수가 시간 속에서 태어났다가 사라질 무력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표현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들이 큰 힘과 권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 검불 같은 사람들일 뿐인데 그들이 나에게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기 때문입니다.”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행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고 향하며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매일매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을 해나가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원수와 대적들, 역경들이 우리를 여전히 에워싸고 있지만 이것보다 더 큰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따라 나를 다루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은 순종하는 신자의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주님을 거스르는 동안에는 주님을 의지할 마음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살아갈 때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고자 하는 착한 마음들이 심령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악인을 낮추시는 하나님
“저희가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내게 대한 저희 모든 사상은 사악이라
저희가 내 생명을 엿보던 것과 같이 또 모여 숨어 내 종적을 살피나이다
저희가 죄악을 짓고야 피하오리이까 하나님이여 분노하사 뭇 백성을 낮추소서”(시 56:5-7)
시인을 해하는 악인들
사람이 마음속에 미움이 있게 되면 그 사람의 삶, 그 사람에 관한 모든 생각, 그 사람과 관련한 모든 것이 바뀌게 마련입니다. 사람을 사랑할 때는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사람을 미워하게 되면 그 사람의 동기나 모든 것들을 의심하고 악하게 말하게 됩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자기를 대적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는 것이 종일 자신의 말을 곡해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무엇이라고 말을 하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말속에 담긴 시인의 말을 이해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비틀고 변형해서 그 설명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시인을 악인이라고 생각하게끔 만든다는 뜻입니다. 이런 일들은 다윗이 인생을 살면서 많이 겪었던 일이었습니다.
말을 곡해할 뿐만 아니라 “내게 대한 저희 모든 사상은 사악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사상’이라는 것은 ‘생각’ 정도의 뜻입니다. 사람들이 시인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모든 생각은 사악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악에 빠지기를 빌고 시인의 일생에 큰 어려움이 생겨나기를 바라며 목숨을 노리는 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시인에게 권력이 있고 힘이 있다면 이 모든 것들을 꺾어 버리고 징벌해버리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고난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종종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실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으로도 어떻게 저항해볼 수 없는 고난을 주십니다. 시인은 왕이 되기 전에도 이런 고난을 많이 받았고 자신의 힘과 권력으로 물리칠 수 없는 고난이었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하나님께서 그를 진정으로 변화시키시고자 고난을 허락하셨을 때는 그것을 물리칠 수 있는 권력이나 힘까지도 뺏으셔서 고난을 당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앙망하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절에서는 악한 사람들이 시인을 어떻게 노리고 있는 지를 보여줍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저희가 내 생명을 엿보던 것과 같이 또 모여 숨어 내 종적을 살피나이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쉼 없이 다윗을 추격했던 원수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추적하고 추격해서 그를 죽이고 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시인은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지금은 자기를 죽이려는 원수들을 피하여 도망을 다니는 신세이지만 그들을 뒤쫓고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악인을 낮추소서
시인은 “저희가 죄악을 짓고야 피하오리이까”라고 합니다. 저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시인의 목숨을 노리면서 먼 길을 추격해오는 근본적인 동기는 하나님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거절하는 것, 그것이 바로 다윗을 핍박하는 그들의 속마음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기를 해치고 죽이는 것은 곧, 자기와 동행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요 도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벌하실 것이고, 그들은 하나님의 징벌을 결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나를 해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사람들이며, 나에게 핍박을 가하고 죽이려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맞서는 악인입니다.”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통해 그가 얼마나 하나님만을 순수한 마음으로 의지하고 따랐는지를 생각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전심으로 따르고 사랑하고 의지하는 절실한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과 끊임없이 동행하는 법을 배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수의 압제와 고난을 통해서 다윗의 신앙을 더 정결하고 순수하게 만드는 계기로 삼으신 것입니다.
겁 없이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반역은 그들이 교만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판단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신앙생활이 없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이 백성을 낮추어 달라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범사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하늘처럼 교만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의해 낮아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백성과 그를 떠난 백성의 차이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마음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백성들은 그분이 당신의 안타까운 심경을 보여주실 때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 때문에 후회하고 가슴아파하고 뉘우치는 사랑의 교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등진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을 도구로 쓰셔서 당신을 위하여 일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고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이러한 마음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 앞에 호소합니다. “저들의 마음을 낮추시옵소서” 두려움 속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끔찍하게 잘못된 일인지를 깨닫도록 하나님이 낮추어 달라고 주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면서 살 때 오히려 그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절실한 존재이신 것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붙들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를 대적하는 이들이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로 여김을 받기까지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기억하시는 날에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가 물러가리니 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인 줄 아나이다”(시 56:8-9)
유리하는 시인
시인이 유리한다고 표현한 것은 끊임없이 원수들에게 압제를 당하고 고통을 당하면서 피해 다니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 사울에게 쫓기면서 도피하는 생활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유리한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유리한다고 할 때 이것이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속에서 신앙으로 인해 박해를 받고 유리하는 경우와 자신의 욕심에 의해 고난을 받으면서 유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영어에는 적절한 표현이 없지만 우리말에는 이 두 가지가 아주 분명합니다. 목적을 찾아가면서 유리하는 것은 방황한다고 하지만, 목적도 없이 떠도는 것은 배회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특별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 속에서 원수의 압제를 인해 유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이러한 방황이라고 하는 것은 미끄러지고 죄짓고 하나님 앞에서 악한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을 따라 살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끊어진 사람인 것처럼 우리를 홀로 두셔서 방황하고 배회하게 하실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이 인생에서 얼마나 소중한 분인가를 알게 하십니다.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그러면서 시인은 아마 많은 눈물을 흘렸던 모양입니다. 그런 큰 고난은 우리에게 항상 감정의 움직임을 가져옵니다. 그렇게 경험하는 것이 큰 슬픔이요 고통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와 유사한 표현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시인이 이렇게 표현을 했을 때는 최소한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주의 병’이라고 할 때 ‘주의’라는 소유격을 살펴봅시다.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그분의 계획을 따라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병’이라는 것은 용량의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특정한 목적으로 자신에게 고난을 주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자기가 지금 흘리는 모든 눈물이 하나님의 작정하신 분량을 채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에 적합하게 되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그런 경험을 많이 하게 됩니다. 오랜 세월 동안 가족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데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열렬하고 간절히 기도해도 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직도 가족을 위한 나의 기도와 고난이 가득차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똑같은 표현은 아니지만 사도 바울도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나의 육체에 채우려고 한다.” 마치 일정 분량 가득 차고 나면 더 이상 그런 고난이 허락되지 않는 것처럼 표현을 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인생의 종말을 바라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속에서 우리의 고난과 슬픔에 분량이 있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또 하나는 시인이 하나님 앞에 흘리는 눈물을 “주님의 병에 담으십시오.”라고 할 때 이것은 향품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귀한 향유나 포도주와 같은 값진 액체를 담는데 병을 사용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인하여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면서 흘리는 눈물이 하나님께 드리는 의미 있는 향품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흘리는 눈물이 하나님 앞에 바치는 하나의 중요한 예물과 같은 기능을 한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책 속에서 매번 반복해서 눈물로 드리는 성도의 기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살아있는 제사라고 묘사했습니다. 눈물이 하나님 앞에 고귀한 이유는 하나님 앞에 자기를 쏟아 놓는 기도는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빚으시든 하나님의 손에 의해 충분히 빚어지겠다는 마음의 강력한 소원과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라는 것은 내가 원수를 인하여 받는 많은 고난이 하나님 앞에 열납 되고, 한편으로는 자기가 원수를 인하여 당하는 고난을 통해서 그 속에 담긴 주님의 뜻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두 가지 소원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인도하심을 바람
그는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합니다. 대명사로 나오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바로 앞 절에 있는 내용과 연결을 이루면서 자기의 눈물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눈물 자체가 주님의 책에 기록 되었다기보다는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했던 자신의 행위가 기록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을 미루어보면 하나님의 책에 기록하는 것은 우리의 어떠한 행동이라기보다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름입니다. 구약에서 두 군데에서 이러한 묘사가 나타나는데 하나는 말라기 3장에 나타나고, 또 하나는 모세의 고백 속에 나타납니다. 모세는 자기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두 번째 해석이 더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주님은 나의 이름을 당신의 생명책에 기록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나는 비록 모자라고 부족하지만 당신의 언약백성이며 자녀입니다.” 이런 고백입니다. “내가 흘리는 많은 눈물을 기억하시고 나의 인생을 인도해주십시오.”라는 고백을 주님 앞에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가 물러가리니”라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깊은 인생의 고난 속에서도 오히려 그것을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향하여 태도를 바꾸셔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향하여 태도를 바꾸시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무언가 못 깨닫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기도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꾸기 위해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사실 바꾸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고 있는 우리의 생활과 믿음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잘못된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짧은 순간으로만 보면 나쁜 일이고 가슴 아픈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이끌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의 길을 걸어가도록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하시는 일입니다.
결론과 적용
시인은 자신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달라고 애원할 정도로 고난에 넘치는 삶을 살았지만 그가 잃지 않았던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원수들에 의해 압제와 공격을 많이 당하는 괴로운 날을 오히려 주님께 피하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소중한 기회로 삼았습니다. 우리도 고난과 시련이 넘칠 때 주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의지하는 자의 찬송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시 56:10-11)
하나님을 의지함
시인은 앞 절에서 자기의 눈물을 주님의 병에 담아달라는 처연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눈물은 고통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처연한 고통 속에서 원수를 인해서 아파하고 괴로움을 당하던 이 사람에게 위로가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견뎌낼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할 때 그것만 당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위로도 함께 주십니다. 시인은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 달라는 기도를 드리면서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께로부터 깊은 위로를 받으며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그 찬송은 하나님을 의지하는데서 오는 찬송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지한다고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데서 오는 위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어디에도 안 계십니다. 사방으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이는 육관으로 볼 때 하나님은 어디에도 안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가 떨어지고 신앙이 식게 되면 그 사람의 삶 속 어디에도 하나님은 안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데도 안 계시기 때문에 결국은 육신으로 행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은 진리의 참 빛으로부터 멀어지면 자기를 사랑하되 육체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이 진리의 빛이 찬란하게 비췰 때 “우리가 육신만을 가진 인간이 아니요 영혼을 아울러 가진 존재이며, 우리의 영혼의 아름다움이 육신의 삶을 좌우하고, 우리 안에 있는 선한 의지의 크기가 하나님 앞에서 신앙을 따라 살아가도록 만들어 준다.”라는 생각을 분명하게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굳게 붙들린다.”, 또는 “하나님께 강하게 사로잡힌다.”라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되 우리에게 주관적으로만 알려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주관적인 경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객관적인 진리에 토대를 두고 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알아감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리이다”라는 것은 하나님을 마음으로 의지하는 가운데 진리의 말씀이 눈부시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고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고난을 받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 성품이 행사되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을 이해하면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깊은 침체에 들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졌을 때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아, 나는 하나님께 버림 받았나보다. 하나님은 나 같은 인간에게 관심을 갖지 않으시나보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고 나면 분명하게 보여주셨지만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성품이 나의 인생의 과정에 드러나고, 그 성품으로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끊임없이 인도해 오셨다는 사실들을 터득하고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깨닫고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깊은 깨달음과 은혜를 터득하면서 예전에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성품의 나타남을 자신의 삶 속에서 아주 놀랍고 새로운 방식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과 성품이 행사되는 방식에 대한 지식을 말씀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은 하나님에 대해서만 보여줄 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 관해서도 알려주어서 우리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런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바꾸어 놓고 새롭게 하는 강한 힘입니다.
시인이 큰 고난과 위기를 만났을 때에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시인은 시편 여러 곳에서 “주의 말씀이 고난 중에 나의 위로입니다. 주의 말씀이 환란 가운데 나를 건지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나의 영혼이 소생하였나이다.” 이런 고백들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면 거기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위로하시고 돌보시고 진리로 이끄시고 의로 교육하시는 하나님의 풍부한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인격적인 것입니다. 인격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인격적으로 대해주신다는 것을 이해할 뿐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대함에 있어서도 인격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격적이라는 것은 계획과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인격적이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행하시든지 보다 더 큰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어떤 일도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날 수 없으니 우리에게 미치는 고통, 괴로움, 시련, 아픔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은 일이 없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고자 하는 계획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면서 계획을 알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의지하는 자의 찬송
마지막으로 시인이 고백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입니다. 자기 자신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온전히 던져서 맡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온전히 던져서 주님께 맡기는 신앙생활, 믿음생활, 이것이 바로 진리를 붙들고 사는 사람의 신앙생활입니다. 원수들이 끊임없는 도전과 괴로움, 아픔, 시련을 안겨주어서 자신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달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할 것입니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시인이 추호의 잘못도 없이 눈같이 순결하고 깨끗한 삶을 살아왔다면 자신 있게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자신이 무엇인가 잘못해서 고난을 당하거나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지 않은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거치는 것들이 발견되었다면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키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고난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께로 피하면 하나님은 그 속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지키실 것이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께서는 매순간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을 의지하게 하십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당신을 의지하게 하심으로 그들의 마음 안에서 사랑을 받으시고, 그는 주님 안에서 사랑을 받게 하십니다. 주를 더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주님의 사랑을 더 많이 깨닫는 사람일수록, 주님을 더 많이 의지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그 사람의 마음속에 드러내셔서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하십니다. 자기 마음에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만큼만 그것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내어 빛 가운데 살게 하고 싶어 하십니다.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시 56:12-13)
본문해설
시편 속에는 두 개의 시제가 섞이기 마련입니다. 시편을 공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논리적인 에세이가 아니기 때문에 시제가 섞입니다. 고난을 당하고 있는 그때의 상황을 현재적으로 묘사하기도 하고, 고난이 모두 끝난 다음의 회고를 현재적으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원수들에게 압제를 당하면서 도망 다닐 때 시를 썼다고 하더라도 칼이 날아오고 화살이 날아오는데 시를 쓰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상황이 끝나고 나서 마음을 돌릴 만할 때 시를 썼든지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어떤 이유에서 과거를 회고할 때의 자신의 심경을 또 다른 현재시제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것 말고도 헷갈리는 이유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직접 들어오는 것입니다. 시편을 보면 갑자기 하나님의 대사가 나옵니다. “나 여호와가 이러이러 하노라.” 이런 것들은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직접화법으로 인용했을 수도 있지만, 또 하나의 가능성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재 속에서 직접 그 음성을 들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인인 동시에 선지자였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에게 계시를 전달하는 두 가지 양식이 있습니다. 보여주는 것과 들려주는 것입니다. 보여주시는 것이 초기의 형태이고 들려주시는 것이 후기의 형태입니다. 성경에서 선지자를 말할 때 ‘선지자’라고 되어 있기도 하고 ‘선견자’라고도 나옵니다. 히브리어로 ‘나비’(aybin:)와 ‘로에’(haero)로 나오는데, ‘나비’는 여러 가지 학설이 많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그것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소명감이 끓는 상태를 가리키고, ‘로에’는 ‘라아’(ha;r)라는 히브리어 동사에서 나오는 분사형태인데 ‘사물을 본다.’라는 뜻입니다. 그런 이상을 하나님께로부터 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외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말씀에 자극이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것이 시편 속에 뭉텅뭉텅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시제가 과거인데 현재로 쓰고, 현재인 것도 현재로 쓰고, 하나님이 과거에 주신 말씀인데 현재로 쓰면서 시제가 들쑥날쑥 합니다. 그런 것들은 잘 보고 선후관계를 생각하면서 시편을 읽어야 합니다.
은혜를 회고함
12절의 상황은 원수들을 이기고 승리한 다음의 고백이라고 여겨집니다.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이것은 “주께서 나를 원수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신다면 내가 주께 이렇게 감사의 제사를 드리겠습니다.”라는 서원입니다. 원수들에게 공격과 압박을 받을 때 서원을 했는데 이제는 성취가 되었으니 주님 앞에 감사의 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기억입니다. 하나님께서 늘 “말씀을 잊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외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잊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애굽의 종 되었던 땅에서 너희를 건져내시고 독수리가 새끼를 업어 나름과 같이 너희를 업어 가나안 땅으로 날랐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게 받은 은혜를 잊지 말라.”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메시지였다면, 오늘 우리를 향한 메시지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너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너희를 건져내었다. 너희는 그리스도를 통해 너희에게 베풀어진 구속의 사실을 잊지 말고 그 은혜를 잊지 말아라. 너희는 아들의 피로 샀노니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다.” 이런 메시지가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신앙은 그것을 끊임없이 회고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 같은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회고하는 것입니다. 회고의 이유는 오늘 감사의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
어젯밤에도 설교할 원고를 쓰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신자로서의 거룩한 생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진실한 삶은 한 가지에 뿌리를 둡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기억함으로 감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기억할 사건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그런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흉내 낸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마치 사과나무에 배를 매달아 놓은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입니다. 조국 교회가 회고할 것을 만들어 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회상하면서 ‘나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 큰 은혜를 어떻게 감당을 할까?’ 이런 결론에 이르러야 하는데 회고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출애굽의 사건을 회고하게 하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했지만 그렇게 못했습니다. 회고할 삶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교회는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쉼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인간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기억을 토대로 감사의 삶을 살게 되고, 그것이 우리를 진리 앞에 꺾어지게 만들고 고난과 시련을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도록 만들어 줍니다.
진리의 빛 앞에서 살게 하심
시인은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리겠다고 합니다. 감사제를 드리는 이유를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사망’이라는 것은 원수들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고비를 말하는데, 하나님이 여기에서 나를 건져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건져주신 이유와 경륜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에 대한 해석으로부터 자신이 내린 결론입니다.
시인은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실족한다’는 것은 원수의 원대로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빛’이라고 하는 것은 밝은 것입니다. 빛은 밝은 것입니다. 성경에서 ‘빛’이라고 하면 두 가지를 뜻합니다. 물리적인 빛과 영적인 빛, 둘 중 하나입니다. 물리적인 빛은 훤하게 비취는 대낮같은 빛입니다. 모든 영적인 빛은 하나님께로 부터만 오는 것인데 그 빛이 바로 영광입니다. 영광의 빛이 진리의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췸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말씀을 깨닫고 진리의 빛 가운데서 살게 되는데, 그것은 생명의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는 생명의 빛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생명의 빛’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진리가 있는 곳에 하나님과의 생명에 잇닿은 충만한 빛이 있으니 그것이 곧 영생의 빛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를 맺는 사람들에게 비취는 진리의 빛, 이것이 바로 광채입니다. 이 빛은 공간에 비취는 빛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비취는 빛이요 특별히 인간의 지성에 비취는 빛입니다.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18C에 일어났고, 미국에서는 19C 중엽에 일어났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은 20C 중반정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산업이 일어났지만 사회 전체에 파장을 미치는 산업이 되기까지는 그 정도의 세월이 걸리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미국이나 영국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교회가 약화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이 문제와 관련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19C 중엽, ‘찰스 피니’의 시기 이후로부터 교회 설교에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지금까지의 설교가 논리적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설교를 잘하는 목사님이 있고 못하는 목사님이 있겠지만 어느 교회에 가든지 설교가 논리적이었습니다. 그것을 2차 대각성운동 후에 던져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교회의 중대한 변화입니다. 그리고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부터 대중화하고자 하는 유혹들이 일어납니다. 산업화 자체가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니까 물건을 팔아도 대중화시켜야 팔 수 있는 것입니다. ‘두통’ 그러면 ‘무슨 약’ 하고 머리에 툭 떠오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똑같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 대중화입니다. 대중화되기 위해서는 간단하고 쉬워야 하는 것입니다. 장중한 진리의 구조를 벗어 던져버리고 자기가 하나님 만난 경험,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 당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자극들이 설교 속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19C에는 천천히 계속 되다가 20C에 들어오면서 ‘무디’ 같은 사람에 의해서 급속도록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이후에 그런 설교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몰랐습니다. 그렇게 전개되면서 20C 중반을 넘어서 1차 대전을 치루고, 2차 대전을 겪으면서 “이제는 객관적인 진리 같은 것은 없다.”라고 하며 이성주의 시대의 종말을 고합니다. 논리라는 것은 객관적인 진리를 입증하는데 쓰는 도구이지, 객관적인 진리 자체가 있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는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논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면 ‘메타담론’이라고 해서 우리 현실에서 늘 볼 수 있는 이야기 이면에 있는 더 높은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것을 거부합니다. 그 자체가 우리밖에 어떠한 객관적인 기준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든 인간의 사상이기 때문에 그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논리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냥 간증이나 하고 슬슬 흘러가는 이야기를 하는 풍조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한번 기회 닿으면 미국의 TV 방송을 보십시오. 강단에 서서 설교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주머니에 손을 꽂고 무대를 왔다 갔다 하면서 성경하나 들고 떠듭니다. 이런 식으로 논리를 집어 던지니까 설교를 들으면서 마음에 감동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진리에 기초한 것이 아닙니다.
어제도 어떤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친척들 집에 가서 잠깐 열린교회 홈페이지에서 설교를 들었는데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라는 말씀이 나오자 옆에 있던 사람이 “정말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설교네요.”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그렇게 안한고 “요즘 세상은” 이렇게 시작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진리를 전달하려면 논리적이어야 합니다. 논리라는 것 자체가 진리를 전달하는 훌륭한 도구입니다. 나머지가 보조적인 수단으로 쓰일 수는 있지만 그것 없이는 사상형성이 안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꾸 벗어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벗어버리고 이야기처럼 설교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가끔은 그럴 수 있겠지만 늘 그런 설교를 하면 벽돌을 쌓지 않고 확 쏟아놓은 것 같은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라고 합니다. “원수를 만나게 하신 것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진리가 얼마나 귀한 줄 알고, 그 앞에 살게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 앞에 사는 것이 곧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시인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56편 강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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