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 17일 새벽예배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히 6:7-8).
아주 절묘한 비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깐 당시 농경 사회니깐 농사를 짓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농사꾼에 마음을 하나님에 마음과 비교한 것이죠. 농사를 짓는 일에 매우 익숙하고 그 문화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니깐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니깐 이제 그렇게 말 할 때 잘 이해 할 수 있었겠죠. 근데 그것이 뭐냐면은 땅에다가 채소를 심었단 말이죠. 그래서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그리고 물을 주고 이렇게 하면서 애써서 농부가 가꾸는 거죠. 그러면은 그렇게 할 때에 채소를 잘 가꿔서 자기 식생활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 심었는데 거기에 가시도 나고 그 다음에 풀도 나고 그럽니다. 그러면은 가시가 좀 나고 풀이 좀 나고 잡초가 돋아 난다고 해서 그거를 다 갈아 엎어버리는 건 아니잖아요. 가서 쭈그리고 앉아서 열심히 김을 매주죠. 그리고 그것을 이상하다 내가 왜 이 채소를 심었는데 왜 이게 채소도 아닌 이상한 풀이 올라오나 이상하다 난 이런 씨를 심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가시가 올라오나 엉겅퀴 같은 게 이런 게 조금 올라오나 그게 농부는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 안하죠. 왜냐하면 늘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깐. 그러니깐 쭈그리고 앉아서 밭이랑을 하나씩 하나씩 지나가면서 그러면서 풀을 다 뽑아 내잖아요. 김을 맨다고 그러잖아요. 그러죠. 네 그렇게 하면서 쭉 하나씩 하나씩 이렇게 걷어서 올라가면서 김을 매는 거죠. 그렇게 김을 매면서 이제 그 하는데 그 마찬가지고 그렇게 하는데 그 반대로 말이죠. 심었는데. 그냥 이렇게 채소 사이에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난 정도가 아니라 이게 엄청나게 많이 가시와 엉겅퀴가 번성해서 그래서 그것이 다수가 되어 버리고 그렇게 해서 가시와 엉겅퀴가 천지가 되어 버린다면은 그러면은 밭을 버리고 포기하지 않겠느냐 그런 이야기죠. 왜냐면은 농부가 원하지 않는게 자라나는 것 보다는 땅 위에 아무것도 안 자라나는 것이 농부에게는 좋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식물이라는 것이 지력을 빨아먹고 자라는 거기 때문에 거기에서 식물들이 자라게 되면은 결국 땅에 영양분을 빨아 먹고 자라는 거거든요. 그러면 그 다음에 농사를 지을 때 땅을 버리죠. 그럴 경우에는 어떻게 하겠어요? 그거를 하나하나 솎아 내려고 하지 않고 아예 불질러 다 태워 없애버리지 않겠느냐 그거죠. 그러니깐 신자에 삶에 있어서 온전하려고 애를 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많이 분토하지만 그러나 늘 허물이 남아있죠. 부족한 것들이 남아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때때로 말씀을 주셔서 깨닫게 하시고 성령에 빛으로 우리 깊이 깨닫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 회개 하게 하시고 그래서 마음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뽑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게 하시고 이렇게 하면서 계속 우리를 고쳐나가시죠. 그래서 우리를 사용하시죠.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 하는 배교라고 하는 것은 인제 주된 경향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순종하고 이러는 건데 이거에 간간히 잡초가 섞이는 것처럼 죄와 불순종 허물 이런 것들이 개입 되는 것이 아니라 방향 자체가 완전히 바뀌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그래서 마음이 간박해지고 절대적으로 완고해져서 그래서 거기에 흔한 성향이 생겨나는데 그 성향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성향이 생겨나는 거죠. 그래서 거기에서 각양 많은 죄들이 생겨나면서 거기에서 인제 악한 열매들을 맺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포기하시고 그리고 심판에 내어주신다는 거죠. 그래서 불사른 다고 하는 것은 심판에 대한 비유적은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그래서 혼돈을 느낄 필요가 없고 결국 신약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보면 구원받은 신자라고 할지라도 항상 마음속에서 자신이 이런 배교자가 될 수 있다 그걸 생각하면서 경개하는 거죠. 그래서 다른 사람에 아름다운 신앙에 본을 보면서 본받으려고 하고 한편으로 악한 본보기를 보면서 절대로 본받으려고 하지 않는 이런 노력들이 필요하는. 그래서 역설적으로 오히려 참된 구원을 소지하지 못한 자는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참 된 구원을 소유한 사람들은 자신이 이렇게 배교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신앙에 실패 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자만하지 않고 매일매일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면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이에요. 그러니깐 이러한 성도에 신앙 생활은 잠깐동안 우리들이 훌륭하게 잘살았다고 해서 이루었다 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또 잠깐 잘 살았다고 해서 우리가 이제 완전하게 안전한게 아니야 그래서 성경에 보면은 말이에요 정말로 훌륭하게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범죄에 빠지게 되잖아요. 그죠? 노아와 같은 사람은 당세에 완전한 자요 의로운 자라 그랬잖아요. 그렇게 인정을 받고 많은 계시를 받고 그 사람 밖에는 하나님께서 살려두고 싶은 사람이 없어서 그 사람에 의를 보시고 오히려 그 가족들까지 건져 주셔서 인류에 새 조상으로 삼으시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홍수가 모두 끝나고 나서 경건을 다 잃어버리고 술에 취한 채 그 방탕한 모습이 되는 것을 보잖아요. 그뿐만 아니죠. 아브라함과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죠. 그죠? 안에 사례들로 인해서 아뷔멜레에게 아내가 잡혔을 때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 그걸 하나님 앞에 그렇게 인정을 받았는데 결국은 믿음이 없어서 아내를 동생이라고 속이고 그 어려움을 당하잖아요. 그죠? 그뿐만이 아니죠. 그 사람뿐만이 아니고 다윗 같은 경우는 좋은 예죠. 하나님 앞에 그렇게 큰 은혜를 받고 계시를 누렸는데 미끄러지잖아요. 사울은 말 할 필요도 없고. 그죠?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죠. 뭐를 자고 하지 못하게 하리라 하여 사단에 가시를 두셨느니라 그러고 보니깐 그렇게 하나님에 담에 세계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에 놀라운 은혜를 받았음에서 불구하고 다윗 속에는 교만해지려고 하는 성질이 계속 있었고 그거를 사도도 느꼈단 말이죠. 이것이 바로 지루할 정도로 많죠.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에 아들이십니다. 이 고백을 하고 최고의 칭찬을 받은 후에 즉시 사탄은 내 뒤로 물러나라 그러면서 예수님이 혼내시는 장면이 나타나죠. 그러니깐 이렇게 많은 은혜를 받은 다음에 이렇게 되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죠. 왜냐하면은 그릇된 안전감에 사로 잡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내가 이런 놀라운 은혜를 받았으니깐 아마 나는 안전 할꺼다. 또 이렇게 놀라운 은혜를 누리는 상태가 아마 영원할 꺼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이에 교만해 지는 거죠. 이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렇게 깨닫고 나서 사도 바울의 고백이 다른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나는 버림을 받을 까봐 두려워한다.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이런 일 때문인 거죠. 그래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우리에 구원을 확실히 믿지만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 신앙에 길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껏 내가 잘 살았다고 해서 마지막까지 잘 산다는 보장은 없다. 히스이아나 아서 같은 사람들도 그렇게 영명한 믿음에 사람들 이였지만 그러나 나중에 그렇게 육적인 사람들로서 인생을 마치잖아요. 그러니깐 항상 그런 확신과 그런 경계를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구원에 확신이 있기 때문에 오늘 내가 이렇게 안전하다 이런게 아니라 그렇게 구원에 확신이 있기 때문에 내가 나를 온전히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에 섭리를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내가 방해가 되지 않는 삶을 살아야 되겠다. 애를 쓰면서 많이 분토하고 그리고 애쓰는 그런 삶을 매일매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