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간음의 죄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약 4:4-5).
사실 이 구절을 놓고 많은 주석가들이 심지어 어떤 주석가들은 주님 오실 때까지 이 구절을 해석할 수가 없다고 까지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하나의 문학적 표현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우리 안에 주님의 성령이 계신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얼마나 탁월하고 놀라운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시기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문학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자기의 백성들을 향한 사랑이 너무 탁월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사랑받는 자녀들에게 순결한 삶을 요구하신다고 하는 문학적 표현입니다. 왜 그것을 이런 식으로, 성령이 시기하기까지라는 표현을 썼는지를 간단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은, 전체적인 문맥에서 볼 때, 성령님과 하나님이 우리를 두고 시기를 하신다라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겠어요? 사랑하지 않는 사이에서 배신이 일어나면 상처가 그렇게 심할 것이 없습니다. 내가 특별히 잘 아는 사람도 아니고 네가 그렇게 되었으니 그건 네 일이고 이건 내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독점적으로 사랑하시는 것처럼 당신도 또한 독점적으로 사랑받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독점적으로 사랑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사랑을 독점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신자라고 부르는 이 여자들이 간음을 합니다. 그들이 전혀 신앙이 없어서 간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있어요. 신앙이 있어도 그런 일을 행할 수 있고 신앙이 없어도 그런 일을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을 행한 거에요. 그것은 오늘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입니다. 반역하는 것이란 말이죠. 그것은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신자의 세상 사랑의 극치가 간음입니다. 그보다 더한 세상사랑은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장 즉각적으로 가장 강렬하게, 한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는 가장 강력한 죄이면서도 가장 끊기 어려운 범죄가 간음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랑의 극치가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면 우상숭배입니다. 그래서 그 두 가지가 성경에서 보면 항상 따라 붙습니다. 세상 사랑의 극치가 간음이고 하나님 버림의 극치가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여인들이 입술로 신앙을 고백해도 간음합니다. 이것은 불신자들을 두고 한 이야기가 아니라 신자들을 두고 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과 원수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에요. 야고보 사도가 아주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세상과 짝함의 가장 극치가 간음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과 원수를 맺는다.”
그런데 믿음 이야기를 죽 하다가 왜 지금 이런 도덕적인 이야기를 합니까? 뒤편에 보면 고용주가 직원들 월급을 주지 않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런 것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로 다 유야무야하면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삶이 도덕적이지 않다 이거죠. 중요한 것은 도덕적인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라면 거룩함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죠. 거룩함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말하자면, 도덕의 한 결과로서 아름다운 도덕들을 만들어냅니다. 비유로 하자면, 거룩함이 태양이라면 도덕은 거기에서 비취는 빛입니다. 빛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 빛은 비취지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걸 꺼버리면 빛도 함께 사라지는 거에요. 그러니까 빛은 하나의 현상이고 빛을 비추는 그 실체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비춰오는 하나의 결과요, 하나의 부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간이 이용합니다. 그러니까 단지 도덕적이 되어야 된다는 것을 야고보 선생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이란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 믿음을 소유하면 거기에는 거룩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닮아가려고 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동기에서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려고 하는 거룩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의 결과로서 사람의 성결해지고 도덕적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없다, 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에 대한 오해는 반드시 일반적 은총의 교리에 대한 오해를 동반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지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어떻게 믿든지 간에 주님의 크신 사랑에 비하면 우리의 오류는 하찮다. 그러니까 우리는 안전하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에요. 이것이 사실은 전통이 굉장히 오래 된 것이에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자신들이 어떻게 살든지 은혜 아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유대인들과 똑같은 것이에요. 그러면서 야고보 선생이 하는 이야기가, 하나님과 원수 맺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시기하기까지 사랑하신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그런 독점적인 사랑입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간음한 것은 하나님을 배신하는 어떤 순서의 절차를 밟은 것이라기보다는 최악의 것을 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하고 괴롭게 하고 이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적대관계에 서더라도 나는 이 간음이 주는 쾌락을 맛보아야겠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누구든지 간에 이러한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간에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꼭 실행에 옮긴 간음만이 간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경종을 울리면서 하신 말씀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그 마음으로 간음한 것이니라” 그래서 우리 자신을 그러한 환경에 노출하지 않도록 각별히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음란한 영화나 잡지를 보는 것이 죄가 되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 자체가 죄가 되냐, 안 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마지막에 몰고 오는 결과가 너무 비참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자체를 멀리 해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 신자가 마음을 지키면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매순간 자기의 연약한 부분을 미혹케 하는 것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냥 세월이 흘러가면 흘러가는 대로 생각 없이 사는 것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을 지키고 삶을 파수하는데 공을 들이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미국을 갔다 오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어요. 우리가 오늘날 예수 믿는 것이 옛날에 우리 어머니들이 자식을 군대 보내고 혹은 서방님 타지에 보내고 새벽에 마당 장독대 옆에서 정한수 떠놓고 비는 것만큼도 우리의 신앙생활에 공을 안 들인다고 생각했어요. 도를 찾아가는 모든 종교가 자기의 마음을 쏟는 공을 들이지 않고 도를 성취하는 종교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도를 찾던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한 것이 속세와 인연을 끊는 것입니다. 성경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런 정신들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더 주님 찬송하면서 영광을 돌리며 살기를 원하시지 우리의 신앙의 고삐를 늦추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의 방종의 기회로 삼으면서 살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해서 공을 들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지키는 일에 공을 들이지 않아요. 왜? 너무 힘들다 이거죠. 그렇게 하고 살면서 마지막에 도달하는 결론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여인들도 처음부터 그러지 않았을 거에요. 어떻게 하다 보니 마음이 무너지고 물밀듯이 밀려오는 정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악에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악한 사람들이 이런 죄에 빠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특별히 악한 사람들이 빠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그럴 수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 기회를 피해간 것이에요. 이런 죄에 안 빠진 사람들은 피흘리기까지 이런 유혹과 더불어 싸웠느냐? 어떻게 본다면, 이런 유혹에 빠져 넘어뜨려야 한다고 하는 자기의 정욕과 마귀의 시험에 표적이 되지 않았다는 것뿐이지, 누구든지 모두 이런 죄와 악에 빠질 수 있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정말 매순간 우리는 살았다고 말할 수 없고 매순간 온전히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매순간 우리는 우리를 이겼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지키고 우리에게 오는 많은 시험들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기며 살기 위해서 분투하고 애쓰고 그렇게 살아야 되는 것이에요. 어제도 비행기 타고 오면서 그런 묵상을 했습니다. 뒤에 보면 나오지만 기가 막힌 공식입니다. 정말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든 삶이 마치 네덜란드의 역사 이야기에 나오는 어린 아이와 같이, 네덜란드는 육지보다 바다가 높아서 제방이 나오는데 이 아이가 학교 갔다 오다 보니까 조그만 구멍에 물이 새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아이가 손가락으로 물을 막다가 점점 커져서 팔목이 들어가고 팔이 들어갔다 이 이야기에요. 그러면서 끝까지 그 아이가 막아서 그 마을을 건졌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마치 그 지면보다 높은, 강둑을 타고 오르는 거대한 죄의 물을 두 손으로 그 강둑을 받치면서 막고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손가락으로 우리의 팔로 혹은 온몸을 집어넣어서 그 구멍을 막는 것 같지만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죄와 더불어 싸우고 자기를 지키면서 산 사람들은 그 사람이 자기를 자랑한다면 아직도 은혜 아래서 죄와 투쟁하는 성도의 삶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뭐가 필요하냐 하면 하나님의 전폭적인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댐을 막고 있어도 우리의 팔이 들어가고 우리의 몸 전체가 들어가서 그것을 막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해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그렇게 노출된 적이 있었다면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죄인들이 자신에게로 돌아올 때, 이전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는 그런 용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항상 기도해야 해요. 오늘도 우리의 마음이 죄가 주는 달콤함을 생각하지 말고 죄가 가져다주는 비참함과 영혼의 황폐함을 명상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매순간 자기의 마음을 지키면서 걸어야 해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에서 죄로부터의 완전한 승리, 그리고 그 죄로부터의 완전한 자유가 없기 때문에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신자들은 항상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눈물만 흘리는 것이 그렇게 싸우는 사람들에게 시시때때로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해요. 그러면서 믿음으로 자기의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에요. 여러분들도 오늘 아침에 기도할 때, 정말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신 것을 기억하고 우리도 하나님을 그렇게 독점적으로 사랑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