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0월 14일 새벽예배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 10:27).
그래서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에 다시 짐짓 범죄한 사람. 어제 해설을 드린 바와 같이 배교를 의미하는 건데. 그렇게 배교하게 되면은 그러면 다시 돌이킬 수가 없다. 성경에서 이야기합니다. 이거는 하나님에 자비를 차단하는 거라기보다는 배교를 통해서 자기가 멸망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사실을 입증한 그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를 하나님께로 이끌기 위해 붙들고 있던 모든 은혜의 줄을 끊으시고 그리고 심판에 떨어지게 하시는 것이죠. 그렇게 될 때에 그 사람은 아주 무서운 상태에 떨어지게 되는데 그게 뭐냐하면 아주 치열한 두려움 속에서 심판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은 뭐라고 나왔냐 하면은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우선 그 심판은 맹렬한 불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충분한 지식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 의도적으로 스스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서 배교에 길을 가는 사람에게 향해 예비된 마지막 심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는 맹렬한 불 속에 던져질 것이고 거기에서 그는 육체와 마음이 함께 불타는 육체와 영혼이 함께 불타는 끔찍한 심판이 처해질 것이다 라는 것이죠. 이것은 곧 믿지 않는 자들이 처해질 형벌을 가리키는 것이고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받은 후에 짐짓 범죄해서 배교에 길을 가는 사람들은 그가 일시적으로 신상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할지라도 그가 받아야할 심판이라는 측면에서는 전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일평생동안 주님을 대적하며 살았던 사람들의 받을 심판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이 받을 심판은 그 심판보다도 훨씬 크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을 받은 후에 다시 의도적으로 범죄 해서 스스로 선택하여 배교에 길을 갔기 때문이죠. 누가복음 십 오장에 보면은 이른 잃어버린 자에 대한 비유가 세가지가 나와요. 첫 째는 드라크마의 비유가 나오고 그 다음에 잃은 양에 비유가 나오고 그 다음에 탕자에 비유가 나오죠. 드라크마는 드라크마 자신이 무생물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잃어버림 받은 거죠. 양은 의도적으로 목자를 떠 났다기 보다는 연약함으로 인해서 목자로부터 멀어졌고 탕자는 의도적으로 아버지에 집이 싫어서 멀리 떠났습니다. 그러니깐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불신 가운데 거하는 것도 사람마다 다 다른다는 거죠. 어떤 사람은 정말 거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 없어서 잃어버림 받은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너무 미약해서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떠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상당히 많이 비축을 받았는데도 스스로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품을 멀리 떠나는 사람도 있어요. 그들이 받아야할 심판은 각각 다 다르다 이 얘기죠. 이 사람은 최악의 상황에서 심판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였어요. 두 가지 점에서 그랬는데 첫 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충분히 받은 사람이였고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라는 거죠. 이런 사람들에게는 다시 돌이킬 수 있는 길이 없다 라는 것이죠. 그 터키에 갔을 때 제가 그곳을 안내하는 사람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거기가 동로마 제국이였어요. 그러다가 이제 오스만 터키에게 망하고 그러고 투르크 족이 들어와서 이슬람 세계를 구축하고 그 기독교 세계를 다스립니다. 그런데 사실 싸움이야 창 칼을 가지고 해서 무너뜨려 버리면 나라는 차지할 수 있겠지만 사실 이 이라크 사태에서 보는 바 같이 전쟁 못지 않게 큰 문제는 지속적으로 지배권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야 하는 것이거든요. 그거는 보통일이 아니라는 거죠. 근데 이 사람이들이 얼마나 지혜로우냐 하면 말이죠. 그 많은 백성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어요. 근데 그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 그 마지막에 교회에 타락이라고 하는 것은 뭐 이루 말할 수가 없고요 그런 속에서 참된 복음이 가리워 진다라고 하는 것은 그건 두 말할 필요도 없고요. 그러면서 십자군 전쟁을 거치면서 그 칠천자에 걸쳐서 십자군 원정이 이루어지면서 그래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악을 행합니다. 그래서 처음은 신앙적인 동기에서 출발하는 것 같았지만 후에는 신앙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양민을 학살하고 괴롭히는 그 무자비하고 끔찍한 일들을 행하게 됩니다. 그게 사실은 중세에 기독교가 무너지는 직접적인 원인을 그 십자가 원정이 제공한 거예요. 그 십자가 원정이. 근데 이 오스만 터키가 점령하고 나서 얼마나 그 놀랍게 통치하냐 면은 이슬람 세력이 들어왔으니깐 철저하게 기독교를 박해할꺼다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전혀 예상을 깨고 자유를 주는 거예요. 그게 신앙이 별로 없는 많은 사람들에 입장에서 보면 그 굉장히 새로운 정책이에요. 그래 놓고도 그거가지고는 안되거든요.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이슬람 세계속에서 산 사람들은 기독교 세계 사람들을 몰라요. 기독교 세계를 다스릴 수가 없어요. 그러니깐 얼마나 교묘하냐면 말이죠 예수님을 잘 믿는 집안에서 한 열일곱살쯤 되었을 때 그집 자녀를 데려다가 군사 학교 같은데를 집어 넣어요. 요즘으로 말하자면 육사나 간부후보학교를 집어 넣어요. 특별 대우를 해줍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그들에게서 기독교 신앙을 포기 시켜요. 그리고 이슬람 교육을 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이슬람신자로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이 한 스물여섯살쯤 될 때 십년정도 자라게 된다면은 완전히 이슬람 신앙에 불타는 사람으로 만들어요. 그렇게 해가지고 요즘으로 말하자면 구청장이나 이렇게 동장이나 이렇게 보내는 거예요. 이 지역을 군사적으로 행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줘가지고 보내는 거예요. 이게 거기에 간 젊은 지도자는 이게 이중 세계를 다 가지고 있는 거예요. 뭐냐면 문화와 생각 그런 면에 있어서는 모두 기독교적이고 헌신되고 자신에 인생에 가치면에 있어서는 이슬람 신앙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깐 얼마나 기독교 인들을 잘 다루겠냐 이거에요. 그래서 기독교인을 모두 이해하는 것 같으면서도 궁극적으로 이 젊은이를 사로잡고 있는 가치는 이슬람적인 가치. 그렇게 해가지고 이슬람 세계 통치에 이바지 하도록 만드는 거예요. 이런건 아주 정치적으로 정교하게 준비된 배교에 한 방법이죠. 그렇게 배교한 사람들 가운데 다시 기독교 신앙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라는 것이죠. 그 불가능한 이유가 뭐 때문이냐면 여건이 그를 다시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게 아니라 그것도 물론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다시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에 심판이다. 그리고 거기서 마지막에는 무서운 마음 무서운 마음 무서운 마음 거기서 심판하는 맹령한 불을 기다리게 된다 이거죠. 이것이 배교자에 마지막이에요. 물론 진정한 신자는 성도의 견인의 교리에 따라서 결코 결코 그가 배교에 빠질 수 없지만 그러나 역설적으로 참다운 신자는 항상 자신이 배교할 위험을 생각하고 겸손해 지는 사람이여야 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혈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이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세상 끝날까지 나를 붙드실 것이라는 확신이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게 살게하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이 세상에 유혹과 시련을 이기게 하는 그런 쪽으로 나아가야지 그런 쪽으로 나아가야지 마음 놓고 뒤로 미끄러지게 하고 오늘 죄를 짓는데 나를 격려하는 교리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거죠. 그거는 가장 사악한 거예요. 그리고 그런 은혜의 교리 하나님이 우리를 끝까지 붙들어 주실 것이라고 하는 이 성도의 견인의 교리를 잘 못 사용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로 미끄러지고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타락과 시련에 떨어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붙들고 있던 끈을 놓아주는 그런 역할을 한다는 거죠.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많은 은혜 앞으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실 큰 구원과 은혜 이러한 것들에 대한 확신을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미끄러지는 것을 정당화 하는데 쓰여서는 안된다 이거에요. 하나님이 나를 끝까지 붙들어 주실 것이기 때문에 내가 죄를 선택하고 내가 미끌어지고 그저 내 욕심이 원하는데로 흘러 가도 결국은 하나님이 나를 주님에 자녀로 끝까지 붙들어 주시고 천국에 이르게 할 것이다. 바로 그런 생각을 강력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택하지 않은 사람들에 특징이다 이거죠. 진실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럴 수 없다 이거죠.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부패한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참 된 신자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우리가 오늘도 마음을 지키고 진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더 온전한 믿음 생활을 해 나아가지 않으면은 내가 그런 온전한 생활을 해 나아가지 않으면 내가 뒤로 미끌어지고 그렇게 되면은 내가 하나님 앞에 배교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역설적인 가능성을 생각하고 그 속에서 두려워 하면서 사도 바울이 고백한 바와 같이 두려움과 떨림속에서 자기 성화를 이루어 가는 기회로 삼는 그것이 오히려 진실한 신자의 표라. 그래서 우리에 신앙은 어제나 내일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이에요. 오늘. 실패한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예수님께서 물으신 질문이 바로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했느냐도 아니고 사랑할래도 아니고 그리고 오직 지금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질문 끝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를 맡겨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깐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에 신앙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참 중요한 것은 현재. 지금 어떻게 어떤 상태로 내가 있느냐? 지금 내가 주님을 사랑하느냐? 지금 내가 성결해 지기를 힘쓰느냐? 지금 내가 은혜 안에 있는가? 지금 내가 주님과의 교통 속에서 진실한 신자가 되어가고 있는가?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게 하면서 매 순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 그것이 바로 세상 끝날 까지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그날 까지 계속되어야 할 우리에 신앙의 종말론 적인 긴장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인정해 주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