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58
목 차
경건한 자의 탄식(시 58:1-2) 51
완고한 자의 독(시 58:3-5) 55
악인을 위한 기도(시 58:6-8) 59
악인을 보복하시는 하나님(시 58:9-10) 64
갚으시는 하나님(시 58:11) 68
시편58편 강해 1
시편58편 강해 1
시편58편 강해 1
시편58편 강해 1
시편58편 강해 1
경건한 자의 탄식
“인자들아 너희가 당연히 공의를 말하겠거늘 어찌 잠잠 하느뇨 너희가 정직히 판단하느뇨
오히려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의 강포를 달아 주는 도다”(시 58:1-2)
본문해설
시인이 언제 이 시를 썼는지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시라는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시편 58편 전체가 사회 속에서 굽어있는 하나님의 공의와 그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실추, 이런 것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건한 자의 탄식
“인자들아 너희가 당연히 공의를 말하겠거늘 어찌 잠잠 하느뇨”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언약백성들을 향해서 하는 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공의를 행하며 살아야 할 의무가 있지만 특별히 언약백성들은 그렇게 살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간섭하심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대충 살아도 편안했는데, 하나님을 알고 말씀의 법을 깨닫고 나면 그대로 살지 않을 때 많은 고통과 어려움이 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의무가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려보내는 삶이라는 것을 보면서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올바르지 않게 되어가는 언약백성들 안에서 누군가 그 삶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강력히 탄핵하고 믿음으로 살아야한다는 것을 외칠 때 비로소 공의가 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은 모두가 올바르게 살지 않는 일에 있어서 이익을 얻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예언자적인 기능입니다. 시인은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뒤에 망가진 언약백성들의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외치지 못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오히려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의 강포를 달아 주는 도다”, 이것은 시장이나 거리에서 물건을 사고 팔 때의 모습입니다. 물건을 달고 저울에 단 물건을 서로 흥정하면서 돈을 주고 물건을 건네는 광경입니다.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상거래가 사회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것처럼 공의가 무너진 가운데 강포하고 힘 있는 사람들이 법이 되어서 약한 자들을 꺾고 이익을 취하며 살아가는 삶에 조금도 가책을 느끼지 않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대개 강포와 포학은 이익의 문제를 가지고 일어납니다.
언약백성들의 삶의 특징
언약백성들의 삶의 특징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거기에 자신이 복종하는 것입니다.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이익의 문제가 서로 얽혀있을 때조차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자신을 꺾고 이익을 배제한 가운데 언약백성의 본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언약백성들의 삶이고 그런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건지시고 많은 시련과 환란 속에서 그들을 보호하고 이끄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야할 삶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언약백성들의 삶을 보고 그들의 선포에 귀를 기울이면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자신들의 처지보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복을 보고 느끼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언약 밖에 있는 사람들을 시기 나게 하는 방법이었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백성으로서 하나님을 말할 뿐 아니라 삶으로 하나님을 보여주는 백성들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언약백성이 아닌 사람들은 누릴 수 없는 언약적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무리 많은 죄를 짓더라도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도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과 힘을 끊임없이 공급해주셔서 하나님 앞에 살게 만들어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언약백성들에게 주신 은혜였습니다. 이러한 은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에게 필요한 물질적인 것과 지상의 자원들을 공급해 주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섭리 속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모든 축복들을 하나님과의 언약의 매우 특별한 시행으로 보고, 거기에서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고 경건이 사라지게 되면 하나님께서 일반섭리 속에서 복을 많이 베풀어 주실수록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하나님의 뜻과 다른 반응이 나오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효성스러운 자식은 부모가 무엇을 해주면 그것을 통해 부모의 마음을 함께 느끼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불효한 자식은 부모가 무엇을 해주면 부모로부터 받는 이익에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언약백성들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경건의 가장 큰 대의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경건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올바른 대의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당신의 백성으로서 올바르고 의에 넘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약 안에 있지 않은 사람들은 전혀 알 수 없는 원천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승리,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 사랑, 용서, 이런 모든 영적인 자원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세상에서 섬길 최고의 섬김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가운데 마음의 성향을 따라 사는 삶은 하나님 앞에 공의로운 삶이 되고 자비로운 삶이 됩니다. 그 때 그 사람 자신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 모를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통해 섬김을 받으십니다.
완고한 자의 독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저희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저희는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곧 술사가 아무리 공교한 방술을 행할지라도 그 소리를 듣지 아니하는 독사로다”(시 58:3-5)
본문해설
다윗은 개혁주의 신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전적타락에 대해 사도 바울이 그 교리를 설파하기 훨씬 전부터 터득했던 사람입니다. 시편의 대부분은 다윗에 의해 지어졌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커다란 섭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위대한 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통하여 세상의 인간들을 깊이 꿰뚫어 볼 수 있는 신학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이 이러한 교리를 깨닫는데 있어서 유대인으로 익숙하게 알고 있었던 시편이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공교롭게도 신학의 역사를 보면 종교개혁 1세대들과 2세대, 3세대들을 포함한 신학자들이 시편의 주석을 많이 썼습니다. 시편이 개혁주의 신학의 모태가 되는 근본적인 담론들, 즉 “인간이란 누구인가?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세상의 본질은 무엇인가? 죄란 무엇인가?” 이런 것들에 대해 풍부하게 보여주는 구약의 책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죄 된 인간의 본성
다윗은 본문 첫 절에서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모태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은 모태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언약백성들이 강포를 행하고 악을 행하는 것이 자신들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본성에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언약관계를 파기하고 악과 강포를 행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천성이라는 것입니다. 부모의 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대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으며”, 자신이 얼마나 죄와 필연적인 관계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면서부터 곁길로 가고 거짓을 행했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고 인간에게 가라고 지시하신 분명하고 명백한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빠져나와 곁길로 가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언약백성들은 하나님과 특별히 언약관계를 맺은 사람들이지만 그들조차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하며 본성적인 악을 따라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자연스러움을 이기기 위해서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 때도 초자연적인 은혜가 필요했습니다. 원래 ‘자연’(自然)이라는 말은 몸 밖에 있는 것으로는 산이나 강이나 물, 들, 인간에 의해 가공되지 않고 원래 그대로 존재하는 세계를 말합니다. 자연이라는 말을 인간과 관련하여 이야기한다면,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본성을 가리킵니다.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본성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악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근원이 결국은 자기를 주인삼은 삶입니다.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끊임없는 악을 행하며 불순종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언약백성에게 주신 약속
죄인의 본성과 관련해서만 본다면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으신 언약관계는 넓은 의미에서 보면 은혜의 언약관계입니다. 언약백성들이 당신과의 언약관계에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자연적인 힘이 그들에게 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두 가지를 약속하십니다. 첫째로, 죄에 대한 끊임없는 용서와 두 번째로, 언약관계에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약속하셨습니다. 바르게 살지 못했을 때는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바르게 행할 수 있는 힘이 없을 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경건이라고 하는 것은 그 초자연성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경건입니다.
독사와 같은 악인
악인들은 자연스럽게 곁길로 가고 거짓을 말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들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 모습이 뱀과 같다는 것입니다. 뱀은 자신 안에 독을 간직합니다. 독사는 이빨에 미세한 구멍이 나있습니다. 꽉 무는 순간, 주사바늘을 통해서 몸에 들어가는 것처럼 독이 주입됩니다. 반사작용에 의해 우리가 신 사과를 먹으면 침이 확 나오는 것처럼 꽉 물면 이빨을 통해서 독이 살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독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최근에 과학자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는데, 어떤 뱀은 음파를 발생한다고 합니다. 물고기가 좋아하는 음파를 발사해서 물고기로 하여금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오게 해서 포획하는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는 아주 신비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계획을 열심히 보여주는 세계입니다.
당시에도 뱀을 길들여서 부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라비아에서는 코브라나 뱀을 놓고 피리를 불면 그 소리를 따라 뱀이 올라오고 춤도 추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악기나 피리로 소리를 낼 때 뱀은 거기에 맞춰서 춤을 춰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뱀은 훈련이 전혀 안 됩니다. 뱀이 그러는 것처럼 하나님이 아무리 그들을 향해 옳은 것을 행하고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셔도 전혀 미동도 안 하고 흔들리면서 자기 원하는 바를 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유한 것입니다. 독한 악을 품고 있으면서도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자기 스스로 주인삼아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절망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이 모습이 어떻게 보면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뱀의 독과 같은 하나님을 향한 미움, 하나님을 대항하려는 본성을 깊숙이 간직한 채 무엇에 의해서도 통제되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경건한 신앙생활은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절망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는 이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악인을 위한 기도
“하나님이여 저희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 내시며
저희로 급히 흐르는 물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살이 꺾임 같게 하시며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기되지 못하여 출생한 자가 일광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시 58:6-8)
악인을 향한 저주의 기도
시인은 악인의 정체를 드러낸 후에 악인을 향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악인을 꺾으시라는 간절한 간청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습니다. 이런 구절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다소 혼란을 느낍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에 붙잡혀있는 사람이 어떻게 악을 행하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저주할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특히, 마지막 구절을 보면 섬뜩해집니다. 만삭하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가 햇빛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같이 악인을 멸해달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시편에 나와 있는 저주의 본문을 해석하는 일단의 학자들은 이 문제를 다윗의 영적성숙과 관련지어서 설명합니다. 이 사람은 신앙은 있었지만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혈기가 담긴 저주를 원수를 향해서 쏟아내고 있으며 이것은 하나님께 합당한 것이 아니었다는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시인이 악인을 향해 퍼붓는 저주의 기도가 담긴 본문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이런 해석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관점 1: 구약시대의 제한된 계시 안에서
악인의 저주를 비는 저주의 본문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져야 되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최소한 세 가지 정도의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는 당시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충분히 계시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합니다. 이 세계를 구속하시고 통치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한 번에 모두 알려진 것이 아니라 서서히 구약의 인물과 역사, 축자적인 전달들을 통해 알려졌습니다. 처음에는 상징과 비유로 불분명하게 주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상징과 비유들은 더욱 뚜렷한 계시의 형태로 주어지고 마침내 이 모든 것들이 완전한 실체로 드러나게 된 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을 통해서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렇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성취되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구약의 사람들이 경험했던 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의 계시의 깊이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게을러서 이 계시를 외면하고 살 경우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인간을 구원하고자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죄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보여줍니다. 이 구속의 사건을 통해서 어두운 하늘에 찬란한 불빛이 빛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크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그런 것들을 아직 충분히 계시 받지 못한 상태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합니다. 물론 다윗은 궁창에까지 가득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영광을 노래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구약의 최대의 철학자였고 신학자였고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던 성도였습니다. 그러한 훌륭한 탁월성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놀라운 증언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것만큼은 누리지 못했다고 보아야합니다.
관점 2: 본질부터 악한 악인을 향해
두 번째로 시인이 멸해달라는 간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려고 애를 쓰다가 잠시 실수해서 넘어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사람이 파멸해주시도록 구하고 있는 사람들은 본질까지도 철저한 악인입니다. 시편 1편도 다윗의 시라고 믿어지는데 거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악인의 꾀를 좇고”라는 구절의 다음단계가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이고, 세 번째 단계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나옵니다. 문제는 두 번째 나오는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길’은 히브리말로 ‘데레크’(&r,D,)입니다. 이것은 통행하는 길을 뜻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의 인생길을 가리킵니다. 그 사람이 어떠한 길을 걷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사람됨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일평생 죄인이 걸어온 길입니다. ‘죄인의 길’에서 ‘죄인의’, 이것이 히브리어로 ‘핫타’(aF;j)인데 여기에는 히브리어에만 있는 독특한 문자표식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동사 속에 반복되거나 특징이 되어버린 특정한 행동을 가리킬 경우에는 거기에 점을 찍습니다. 이 점 하나로 인해서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라고 할 때 이 죄인이 어떤 종류의 죄인인지를 암시한다는 것입니다.
늘 바르게 살던 사람도 개별적인 사안에서 실패를 해서 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크게 잘못했을 때는 “제가 죄인입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개별적인 사안에 대해 죄를 지었을 때 스스로를 개별적으로 여깁니다. 오늘날의 문제는 죄를 개별화하지 않고 죄 자체를 인간이 저지를 수밖에 없는 약점이라든지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연약성이라고 얼버무려버려서 너나 나나 다 같은 인간이라는 식의 애매모호한 견해가 유행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핫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종류의 죄인이 아닙니다. 올바르게 살려고 하다가 실수를 하고 죄를 지었거나, 의도되었다고 하더라도 순간의 충동으로 죄를 범하고 개별적인 사안에서 넘어진 죄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늘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썼지만 그도 역시 인간인지라 범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 것이 특징이 되어버린 사람, 악을 행하는 모든 동기가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것이 되어버린 뼈 속까지 악인인 사람을 향한 기도입니다. 그런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관점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세 번째는 이 기도가 시인이 곤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기도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더럽혀지고 주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고 있는 것에 대한 신적인 영광에 대한 갈망에서 나오는 기도라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아주 독한 말을 퍼붓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할례 받지도 못한 짐승 같은 이방백성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사신 백성들을 모욕하는구나!”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분연히 일어나 악인을 처단하러 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기 이익에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 나라의 존귀함에 해를 입히고 있는 원수를 통해 깊은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갈망이고 그 본질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사랑입니다. 그러한 기도로 이해해야 합니다.
결론과 적용
오늘날 우리에게 이것을 적용할 때는 이것이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은 풍부한 사랑의 계시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합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문 가운데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니라가 임하시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짐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는 있지만 악인을 형벌해달라는 기도는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달라는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해 충만하게 계시된 시대에 사는 우리는 시인이 가지고 있는 이 전망을 넘어서야 합니다.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오히려 기도하고, 그들이 악에 사로잡혀 살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며 살아가는 그 영혼의 불쌍한 상태에 대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빌 수 있는 사랑을 그리스도의 모본을 통해 우리에게 충분히 보여주셨습니다. 불공평하다고 생각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일을 행할 수 있는 은혜가 구약의 사람들에게는 충만하게 주어지지 않았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간구하고 주님께 빌면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놀라운 의지의 크기와 사랑의 힘을 우리에게 부어주셨습니다. 누구도 우리가 그런 일을 했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때문에 이겼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훼방하고 악을 행함으로 주님의 질서를 더럽히는 사람들 속에 있는 죄의 본질, 그들이 행하고 있는 악한 행동의 본질에 대해서는 우리가 동일하게 미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존 오웬 목사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죄는 미워하되 죄를 짓는 그 사람은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시인의 정신을 복음적으로 계승하고 해석한 신약시대의 성도들의 윤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악인을 보복하시는 하나님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덥게 하기 전에 저가 생것과 불붙는 것을 회리바람으로 제하여 버리시리로다
의인은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시 58:9-10)
하나님의 심판을 구함
계속해서 악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악인에 대해 강력한 하나님의 심판을 토로하는 기도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지난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본문을 보면 가시나무가 땔감으로 사용되어서 물을 끊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이 끊기는커녕 가마를 뜨겁게 덥히기도 전에 불붙은 가시와 아직은 불붙지 않는 가시를 회리바람으로 제하여 버리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가시나무는 성경에서 여러 곳에서 우리를 찌르는 이웃으로 묘사됩니다. 여기에서 가시나무라는 것은 시인을 찌르듯이 고통을 주는 이웃들을 가리킵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 은총을 입은 자로 살아갈 때, 자기에게 끊임없는 고통을 주는 이웃이 있는데 이 고통이 그 사람의 악함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가시나무라는 비유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를 읽는 히브리인들은 시의 비유에 담겨있는 의미를 실감나게 느끼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저가 생것과 불붙는 것”이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가시나무를 가리킵니다. 가시나무 중에서 아직 타지 않은 것과 타는 것을 회리바람으로 제하여 버리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대명사로 표현되는 ‘저’가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석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때문에 타오르고 있는 가시와 같은 시인의 이웃들, 그리고 아직은 타지 않았지만 잠시 후 불이 당겨지면 타오를 이웃들을 하나님께서 제거해 버리신다.”라는 뜻입니다. 그 대적들을 제거해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시인이 표명하고 있습니다. 가마솥 밑에다 불을 때면 가마가 뜨거워지면서 물이 끊기 시작합니다. 의로운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괴로움을 주는 가시와 같은 이웃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고생하고 힘들면 “끊는다. 끊어.” 이렇게 말합니다. 괴로움과 고통을 받은 내면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회리바람으로 이것을 제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회리바람’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많이 나타납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 홍해를 건너는 사건에서 회리바람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한 상징입니다. 시인을 현실적으로 괴롭히고 있는 대적들과 아직 타오르고 있지는 않지만 잠재적인 대적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기대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은 우리 자신의 죄성에 비추어 보아도 적합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세상을 보더라도 적합하지가 않습니다. 그런 고통과 이중성이 있게 마련입니다. 깊은 고통 속에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이 우리 자신의 삶에 간섭하고 개입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그런 간절한 기도와 몸부림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악인들을 제거하시고 자신이 받는 모든 고통을 하나님께서 끝내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갈망과 연결됩니다.
악인을 보복하시는 하나님
시인은 “의인은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의인과 악인의 대조가 등장합니다. 시편, 특히 다윗의 시에서 인간관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의인’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의인과 악인의 대별(大別)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과 세상나라의 백성을 가리킵니다. 세상나라에도 하나님의 백성처럼 사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 나라에도 세상백성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그들의 축은 현저히 다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종종 세상나라 백성처럼 살 때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심점이 하나님입니다. 세상나라의 백성 중에도 가끔 하나님 나라의 백성처럼 사는 도덕적인 사람들이 있을지라도 그들의 중심은 결국은 자아이고 세상입니다. 궁극적으로 두 종류의 사람들은 나눠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의인은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맺고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의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악인은 언약관계를 끊임없이 파기하고 자기를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우시고 당신의 통치를 확고히 하시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속성 때문에라도 악인이 끊임없이 당신을 대적하며 살아갈 때 보복하십니다. 그들은 잠시 번영한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것을 보면서 의인은 기뻐합니다. 개인적으로 고소하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악인들의 파멸을 통해 확장되어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통치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악인이 멸망되는 것 자체를 보고 행복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이룩되는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 때문에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그 발’은 어떤 의미일까요? 다윗은 원수의 압제로 인해서 수없이 도망 다녀본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끊임없이 도망 다녀야 했던 끔찍한 과거는 악인들의 끊임없는 도전 때문이었습니다. 악인들이 파멸당하고 그 속에 자신의 발을 씻는다는 의미는 고난이 끝나고 그에게 고난을 준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징벌하심으로 이제 그 고난을 하나님이 속상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면서 이제 더 이상 자기를 추격하고 고통을 줄 이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쉬게 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에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이상한 것은 우리의 생애에 있어서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고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준 사람들도 마음에 남지만 우리를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몰아넣고 아픔을 준 사람도 우리의 마음에 남습니다. 누가 더 진하게 마음에 남습니까? 사람의 마음이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긴다고 합니다. 그저 가슴에 잊혀지지 않도록 따뜻하게 남아있지 불같이 뜨겁게 남아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원수들이 우리를 괴롭힌 것에 대한 원한은 언제든지 생각하면 다시 그 정동 속으로 들어가리만치 선명한 기억으로 뜨겁게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아주 심할 때는 우리의 마음에서 복수를 꿈꾸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시인의 삶에 대해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윗이 이렇게 기도했지만 자기 손으로 원수를 죽이려고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끊임없이 의지했습니다. 그는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를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종을 손대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 아들에게 반역을 받아서 도망을 갈 때도 자기를 욕하는 사람들을 처단할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주권에 맡깁니다. 법궤도 두고 갑니다. 이것이 바로 원수의 멸망을 열렬히 구하는 기도 이면에 있는 다윗의 하나님 주권 사상을 보게 됩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그의 신앙의 위대함을 보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바와 같이 어차피 인생을 사는 것이 시련 아니겠습니까? 스스로 피할 수 없는 모든 고난을 감당하면서 사는 것이 인간의 도리입니다. 즐거움과 고난, 시련과 고통의 시간을 하나님의 주권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기회로 삼으면서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이웃들을 오히려 용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로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들고 지난날 나를 아프게 했던 사람들이 떠오를수록, 깊이 기도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갚으시는 하나님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시 58:11)
하나님의 통치
시편 58편의 끝에서 하나님이 악인을 보복하시고 시인의 발을 악인의 피에 씻을 정도로 처결하실 때 그것이 결국 무엇을 가져오는가를 말합니다. 두 가지를 드러내는데, 살아계셔서 모든 만물을 선악 간에 통치하시는 하나님과, 당신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입니다. 이것은 앞에 나온 악인이 심판을 받는 것과 대조가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세계를 당신의 도덕적인 의지를 가지고 다스리시되 다스리시는 수단은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표준으로 놓고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로 다스리십니다. 불신자들은 율법을 통해 다스리시고 믿는 자들은 계시의 표준을 주실 뿐 아니라 은혜를 주셔서 당신의 도덕적인 의지를 이해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살아가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은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의 통치는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를 우리의 삶속에 드러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광을 드러내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좇아 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고 보상해주셔서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내심으로 영광을 받으십니다. 반면 하나님은 돌이키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악인들을 징벌하심으로 당신의 도덕의지를 그들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본질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인정이기 때문에 악인의 형벌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지혜 속에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악인이 형벌을 받음으로써 드러내는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오히려 의인이 하나님께 상급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드러내는 영광이 보다 적극적인 의미의 영광입니다. 선한사람이든 악한사람이든 결국은 인간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던 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악인처럼 살다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음으로써 간접적으로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고 하나님의 법도를 행함으로써 적극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시인은 악인에 대한 징벌을 통하여, 그리고 언약의 백성인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와 보상 속에서 하나님이 모든 일들을 판단하신다는 사실을 모든 이들에게 드러냈습니다. 또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한 자들은 가끔 고난을 당하고 고통을 받지만 결국은 하나님께 보상이 있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악인에게 고난을 받으면서도 시인이 늘 붙들고 살아왔던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결론과 적용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보이는 모든 것들에 에워싸여서 살아가는 인생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분이 가지고 계신 도덕적인 의지가 때로는 우리의 그것과 현저히 다르다고 할지라도 마지막에 판단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것은 옳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잠시는 기쁜 것 같으나 후에는 쓰디쓴 고통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나의 판단보다는 하나님의 판단을 더욱 신뢰하고 나의 유익보다는 하나님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눈만 뜨면 눈을 감는 순간까지 들어오는 세상의 수많은 삼라만상들이 있습니다. 그 중 대부분의 것들은 우리들에게 끝없는 상념을 불러일으켜서 사랑하고 미워하고 결별하고 싶고 붙들고 싶은 수많은 감정들을 만들어냅니다. 그 속에서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판단을 구하면서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준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요동치고 고통 받는 생활이 될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은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쉬운 길입니다.
지금은 세상이 좋아져서 예전에 맞던 천연두 예방주사는 거의 없어졌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그 예방주사를 맞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모릅니다. 특히 옛날에 BCG나 천연두 예방접종 같은 경우는 그 주사를 맞고 나서 며칠을 앓았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너무 고통스럽고 괴로워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결국은 인생전체를 흉악한 질병으로부터 보호하는 길이기 때문에 어른들은 그 아이를 위해서 그런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들이 때로는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 같아도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되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좇는 신앙생활을 해나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는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평안한가? 고난을 당하는가? 이런 문제가 아닙니다. 고난을 당하고 끊임없이 고통을 받아도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면 결국 하나님은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갚아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고, 주님이 우리에게 가지라고 말씀하시는 확신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을 우리가 설명할 수가 없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한 번에 모두 설명하려고 하면 모든 것들이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설명되지 않고 설명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분의 손을 붙들고 매일매일 걸어갈 때 결국은 우리가 설명할 수 없어도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십니다. 그리고 돌아보면 모두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이런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편58편 강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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