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59
목 차
나를 드소서 구원하소서(시 59:1-2) 1
무고히 고난당할 때(시 59:3) 7
악인을 긍휼히 여기지 마소서(시 59:4-5) 12
원수를 비웃으시는 하나님(시 59:6-8) 16
핍박 받는 자의 소망(시 59:9) 22
인자하심으로 영접하소서(시 59:10-11) 26
야곱 중에 다스리시는 하나님(시 59:12-13) 30
주님은 나의 피난처(시 59:14-17) 34
시편59편 강해 1
시편59편 강해 1
시편59편 강해 1
시편59편 강해 1
시편59편 강해 1
시편59편 강해 1
시편59편 강해 1
시편59편 강해 1
나를 드소서 구원하소서
“(다윗의 믹담 시,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사울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킨 때에)
나의 하나님이여 내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사악을 행하는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시 59:1-2)
티끌로 만들어진 인간의 존재
시편에 보면 “하나님이 나를 드신다.”라는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나를 드소서”라는 하나님께 대한 간구의 형태로 자주 나옵니다. 여기서 ‘든다’는 것은 높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엎드려져 있는 것은 비굴한 것이고 아무것도 없는 땅바닥에 엎드려져 있는 것은 엎드린 사람과 흙의 동질화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흙으로 만드십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아파르’(rp;[;)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흙덩어리가 아니라 흙먼지, 티끌입니다. 흙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입자로 이루어진 티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하찮은 티끌로 빚으심은 자신들이 원래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후에 “티끌만도 못한 것이.” 아니면 “티끌만큼도 없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크기에 있어서도 티끌은 가장 작은 것이고 가치에 있어서도 아주 작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크기에 있어서도 무한하시고 존재의 가치에 있어서도 끝이 없는 무한량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완벽한 대조를 이루는 인간으로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를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비교해볼 때 완전히 무가치한 것이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가장 먼 것은 자연세계에서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인식도 하지 못하는 티끌일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은 우주에 존재하는 피조물 가운데 가장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존재입니다. 모든 피조물 중 가장 뛰어난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가장 끝에 있는 티끌을 사용하셔서 만드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은 맨 처음에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질료로부터 나왔고 그 질료 자체는 하나의 반(半)실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거의 없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질료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인간에게 아무리 상기시켜도 질료 그 자체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모릅니다. 무(無)가 아닌 티끌을 사용해서 만듦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모든 피조물 중 가장 뛰어난 존재이지만, 티끌에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인간에게 양면성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재료는 티끌인데 하나님이 손으로 빚으십니다. 다른 것들은 “나오라.”는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셨는데 가치 없는 티끌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손으로 빚으셔서 사람을 만드십니다. 사람은 이런 존재론적인 이중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드시는 하나님
인간이 모든 만물위에 뛰어나고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은 두 가지 용도 때문입니다. 한 가지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자기인식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인데 이렇게 살아서 되겠는가?’라는 자기인식과 또 하나는 그러한 자기 인식에 기초해서 다른 사람을 존귀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는 것, 이 두 가지입니다. 나 자신은 티끌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깊이 생각하면서 살아가라고 하나님이 인간을 허무한 티끌로부터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회개할 때 땅에 엎드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동북아시아의 사고에서도 나옵니다. 황제나 임금에게 간절한 소원이 있거나, 커다란 잘못을 했을 때, 땅바닥에 엎드리는 석고대죄(席藁待罪)를 합니다. 그것이 흙의 무가치함과의 동질화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이 내려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그를 드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높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사물들 위에 높이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매장되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비하 중 최하위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흙과의 동질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격으로는 하나님이시지만, 인격 없이 사람의 인성을 취하십니다. 그 인성이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하고 무덤에 매장되셨다는 것은 흙과의 동질화 개념입니다. 그가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지만 육신으로는 우리를 위해 죽으셔서 흙과 동일하게 무가치하게 취급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존귀하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흙과의 동질화 개념으로 무가치해지신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우리가 다 연구를 못하고 밝혀내지 못해서 그렇지 놀라운 구속사적 일치가 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나타납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히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다음에 즉시 영광스럽게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살리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흙까지 내려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이 드시는 것입니다. 빌립보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 그리고는 “이러므로 하나님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사 만물을 그 발아래 무릎을 꿇어 주라 시인하게 하셨으니”라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높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드시는 것입니다.
인간들도 흙과 거의 동질하게 엎드려져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드셔서 건지십니다. 높이 드심으로 말미암아 티끌 같은 아무 의미 없는 존재인 그들을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들로 만들어주시고 높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이시기만 하는 사람도 없고 지극히 낮추시기만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높아질 때는 기뻐하고 감사하고 영광스럽지만, 계속 높여지기만 할 때 인간은 마치 자기가 하나님이 된 것처럼 느끼기 때문에 하나님은 또 다시 그를 낮추십니다. 모든 사람의 발에 밟히도록 낮추실 때도 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우리의 내면에서 스스로 낮아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스스로 발견할 때 지극히 겸비해져서 나는 아무 가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이제껏 쌓아올린 의와 영광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식 속에서 하나님 앞에 낮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힘을 잃어버릴 때
오늘 시인은 그렇게 땅에 짓밟히는 것 같은 비참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자기가 왜 그렇게 땅에 엎드려진 것 같은 상황이 되었는지를 고백을 하는데 원수와 자기를 치려는 자들에 의해 패배하고 힘없이 엎드려져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고 신앙을 이어가면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힘입니다. 힘은 육체의 힘과 정신의 힘으로 나누어지겠지만, 사실 육체의 힘이 조금 없어져도 정신적으로 사람이 깊이 침체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머리가 맑고 육체의 힘이 잘 보전되어 있으면 정신도 상쾌합니다. 자고나면 몸이 개운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십대에 그런 일들은 거의 끝나지만 일요일에는 몸살이 나도록 운동을 하고도 푹 쓰러져서 자고나면 월요일 아침에는 개운합니다. 그렇게 건강하면 정신도 많은 격려를 받습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배는 꽉 뭉치고, 소화는 안 되고, 머리는 안개가 낀 것처럼 아프고, 허리가 아프고, 온몸이 쑤시고, 잠에서 깨어 일어났는데도 한번 푹 쉬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정신도 침체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젊을 때의 대부분의 침체는 밖으로부터 들어옵니다. 호기심도 많고 유혹도 많이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많아서 오는 침체는 대부분 안으로부터 옵니다. 육체의 연약함, 과거의 상처에 대한 기억, 이런 것들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자기반성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침체로 가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가라앉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것이 바로 육체의 힘입니다.
정신의 힘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의 힘은 어떤 일들이 우리에게 발생했을 때 그것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무례한 일을 했습니다. 정신의 힘이 많을 때는 ‘뭐 나를 무시해서 그랬겠어? 바쁘니까 그랬겠지.’ 혹은 모욕을 받을 때도 ‘뭐 내가 싫어서 그랬겠어? 저 사람도 얼마나 마음에 맺힌 것이 많았으면 그랬겠어?’ 이렇게 달리 생각하게 만들어주고 극복하게 만들어주는 게 정신의 힘입니다. 정신의 위대한 힘이고 정신의 위대한 크기인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을 때는 인생을 올바르게 영위해 나가는데 도움이 됩니다. 도움이 아니라 그것은 아주 결정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의지하지 않고 잘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미끄러져서라도 당신을 의지하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섭리가운데서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때로는 우리를 미끄러지게 내버려두시고 악을 행하고 죄를 짓도록 우리의 의지를 자유롭게 놔두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에는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속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지게 됩니다. 우리가 흙과 동질화된 존재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존하고자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의존하는 마음
인간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께 대한 가장 강력한 의존의 감정을 가질 때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용서받을 수 있는 은총이 오직 그분에게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영혼이 그분께 열렬히 매달릴 때입니다. 그것이 본래 인간이 창조된 목적에 가장 합당하도록 인간의 영혼이 움직이고 작용하는 순간입니다. 아담도 이 정도까지는 경험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큰 섭리 속에서 죄가 들어오도록 허락하시고 그 죄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반역하지만, 한편으로는 더 깊은 경지로 들어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온전히 구현해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은 정말 오묘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자가 주님 앞에 깊이 엎드려져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생애적인 회개를 할 때 그의 마음속에는 티끌만큼도 그분을 거슬러 살려는 의지와 소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유지하면서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내재하는 죄와 끊임없이 가변적인 마음 때문에 구원은 확실하지만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게 어려워지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매일 주님을 붙들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이 나를 높이 드시도록 그분을 의지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환경으로 우리를 낮추실 때도 있지만 환경에 아무 문제가 없을 때도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보게 하셔서 한없이 낮추십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들도 사실은 나쁜 일이 아니며, 우리에게 일어나는 좋은 일들도 모두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것을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사울로부터 핍박을 받으면서 죽임을 당할 위협까지 겪게 하시는 것은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극한적인 상황 속에서 공격과 고통을 받게 하심으로 결국은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정신과 신앙의 크기를 갖추게 하셔서 한 나라를 주님의 나라로 이끌게 하시기 위하여 준비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그 기도가 무슨 기도인줄 알면 함부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쓰임 받는 영광의 이면에는 거기에 합당하기 위해 가혹할 정도로 긴 세월을 하나님이 그를 다루시는 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무고히 고난당할 때
“저희가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가 모여 나를 치려하오니
여호와여 이는 나의 범과를 인함이 아니요 나의 죄를 인함도 아니로소이다”(시 59:3)
다윗의 인간관
다윗이 사울로부터 받았던 모진 미움과 박해는 다윗으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하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인간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하는 가장 커다란 세 가지 사건을 든다면, 첫째는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사건, 특히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사건이고, 두 번째는 사울로부터의 모진 박해와 고난, 세 번째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를 깨달은 사건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외에도 압살롬의 반역사건이나 세바의 반란이라든지, 형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한 어릴 적 경험들이 모두 포함될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통해서 깨닫게 된 인간에 대한 이해는 일관성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뼈 속까지 깊이 부패한 존재라는 인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다윗이 구약에서 신학자로서의 아름다운 모델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하늘위에 높이 들리신 주님과 궁창에 미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볼 수 있을 정도의 놀라운 자연과 철학, 신학을 아우르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학자였습니다. 그러한 자연과 우주와 하나님에 관한 학문을 아우를 수 있는 지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개혁신학적인 이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 앞에 돌아갈 수도 없고 설 수도 없는 완전하게 부패한 인간이라는 인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인간관은 필연적으로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비, 즉 헤세드만이 언약백성들에게 유일한 희망이라는 인식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희망이 구원에 대한 소망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철저한 이해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은총을 필요로 하는 피조물로서의 인식을 부각시키게 됩니다. 다윗은 그것을 철저하게 깨달았습니다. 그 점에서 다윗은 굉장한 인물입니다.
시편이 이상적으로 자연학과 논리학과 철학, 신학, 이 모든 것을 담고 있으면서도, 위대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뼛속까지 부패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아무런 힘이 없는 인간에 대한 관점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부패, 하나님을 향한 선천적인 대적의 성질을 사울과의 관계 속에서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무고히 당하는 고난
그러면서 고백을 합니다. “저희가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가 모여 나를 치려하오니”, 자기의 생명을 해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가 모였습니다. 강한 자가 한명씩 와서 시인을 해치려고 해도 시인에게 치명적일 텐데, 시인은 외톨이가 되어서 도망 다니는데 강한 자들이 모여서 그를 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미워한 이유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고 다윗을 택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에게 있어서 그것은 스스로 자기를 어떻게 고쳐서 사울의 마음에 들게 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언제 기름부음을 받겠다고 했습니까? 아니면 왕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까? 그런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치열하게 미워하였습니다.
다윗은 아주 중요한 고백을 합니다. “이는 나의 범과를 인함이 아니요 나의 죄를 인함도 아니로소이다”, 이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보고 다윗의 신앙과 인격의 미성숙함을 보여준다고 해석을 하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누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시편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인간의 허물을 감찰하신다면 누가 주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때 ‘선다’라고 하는 말이 히브리어로 ‘아마드’(dm'[;)인데 견딘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의 허물과 잘못을 보자고 하신다면 누가 하나님의 시선을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라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죄
이런 고백은 다윗에게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고백입니다. “나에게 범과가 없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라는 말은 죄에 대한 이야기인데, 성경에서는 죄를 두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고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죄들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이후로 인간은 필연적으로 이런 죄에 물들어있습니다. 모든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죄에 사로잡혀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마치 사람이 귀신에 들린 것처럼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도록 죄에 사로잡혀있다는 것이 전적 타락의 개념이 아닙니다. 물론 사람의 상태에 따라 죄에 전적으로 사로잡혀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해도 사고를 하거나 느낄 때 하나님의 뜻에 가까이 가는 것 같은 사고나 행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고기능이나 정서기능, 의지기능, 모든 것 중, 죄가 미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적타락의 개념입니다. 전적타락을 기준으로 어떤 사람은 악함이 극단적으로 나타나고, 어떤 사람은 그것보다 조금 덜하고, 어떤 사람은 이쪽 방면으로 어떤 사람은 저쪽 방면으로 죄 아래 있는 영향력의 크기가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치 지문처럼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두고 시인이 나의 범과를 인함이 아니라고 할 때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죄가 자기에게 절대로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런 뜻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의미에서 죄에 대한 고백입니다. 인간의 이해를 초월해서 인간이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죄가 있고, 어떤 것은 인간이 피할 수 있는 죄가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고범죄(故犯罪)라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계획을 세워서 짓는 죄가 그런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양심을 심하게 거스르는 죄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거나 묵상할 때 모든 죄가 방해를 가져오지만,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죄는 그렇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몸속에 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적당히 균이 있는 곳에서 살아갑니다. 요즘 자라나는 아이들은 면역력이 아주 약해졌다고들 합니다. 너무 청결한 환경에서 자라서 아이들의 몸이 균과 싸워본 경험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저항력이 약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넉넉히 살아갑니다. 이것이 많이 들어오면 문제가 됩니다. 예를 들어, 암세포가 우리 몸에 있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십만 개가 넘어서 그것이 모이기 시작하면 문제가 됩니다. 어느 정도는 우리들이 가지고 살고 있고, 면역력으로 이기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생기기도 하고 번식하기고 하면서 그냥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바이러스나 세균 같은 병적인 요인이 우리 몸 안에 있을 때 우리 몸이 그것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이유
우리는 잘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 자신을 깊이 성찰해보면 우리가 잘했다고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심을 거스르는 고범죄, 혹은 실행죄의 경우에는 우리의 의식 속에 끊임없이 남아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현저하게 방해합니다. 그런 것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절대순결을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나는 일부러 계획을 세워서 하나님 앞에 죄를 짓거나 악을 행한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시인의 고난은 인간이 의식할 수 없는 죄를 발견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이런 고난을 당하게 하신다기 보다는 시인을 해치려고 하는 악인들의 본성적인 악함 때문에 비롯되는 고난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고난과 어려움이 악인들의 악함 때문에 비롯되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비록 죄를 짓지는 않았지만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존하는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악인을 긍휼히 여기지 마소서
“내가 허물이 없으나 저희가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하오니 주여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사 감찰하소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일어나 열방을 벌하소서
무릇 간사한 악인을 긍휼히 여기지 마소서”(시 59:4-5)
본문해설
시편을 보면 시인의 고백가운데 “내가 허물이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여러 번 나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고 누구도 하나님 앞에 자신 있게 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고백이 너무 자기 의(義)에 가득 찬 고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아직은 희미한 복음의 빛
이런 문제들을 살피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이상의 사실을 숙고하여야 합니다. 첫째는 시인이 누렸던 진리를 아는 빛은 당시로 볼 때 아주 커다란 빛이었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이 쉽게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복음의 계시를 통해 알고 있는 우리의 이해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서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께로 구원해주시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의 점진적인 발전 속에서 그 극치를 본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 안에서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의 극치를 본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앞으로 점점 더 성취될 것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극치에 도달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구원의 성취를 가져올 구속의 대업은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과 그의 고난 안에서 이미 극치를 이룬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구속의 대업은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과 죽음 안에서 극치를 이루었고, 이루어진 구속의 사실을 통해서 그것이 성취될 구원의 극치는 미래에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고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참된 사랑으로 돌아오지 않는 인간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구약의 시인인 다윗이 궁창에까지 가득 찬 하나님의 진리와 그의 자비하심을 알았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을 통해 알고 있는 하나님의 큰 사랑에 대한 인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커다란 하나님의 사랑과 놀라운 자비, 은혜를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 사람들은 우리가 아는 것만큼은 알지 못했다는 것을 먼저 전제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갈망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이것입니다. 본문에서 시인은 악인을 멸하시고 긍휼이 여기지 말아달라는 극단적인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시인은 “내가 허물이 없으나 저희가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하오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준비한다’는 말은 자기를 치기 위해서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마지 전쟁에서 적을 공격하기 위해 준비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렇게 말은 했지만 자신에게 정말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시편 여러 곳에서 인간의 죄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그리고 죄악을 감찰하신다면 하나님 앞에 설자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다윗이 하나님 앞에 “나는 허물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자기가 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악인을 사용하셔서 징벌을 당해야할 만큼 현저하게 양심에 거스르는 죄를 자신의 삶 속에서 찾지 못했다는 고백입니다.
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명백하게 의식할 수 있는 양심을 거스르는 죄와 우리의 양심을 거스르지 않기 때문에 명백하게 죄에 대한 기억이나 의식을 찾아낼 수 없는 죄가 있습니다. 모든 죄가 같은 성질의 것이고 우리의 영혼에 나쁜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후자의 죄는 우리 몸 안에 남아있는 균과 같습니다. 균들이 우리 몸에 있지만 대개는 있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것이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심각한 생명의 위협을 주지는 않습니다. 의식적으로 자기가 양심을 거슬러 지은 죄는 그와는 반대로 끊임없이 그 사람의 마음에 남아서 실제로 그의 영혼의 작용들을 끊임없이 방해합니다. 현저히 눈이 멀고 어두워졌기 때문에 양심에 거슬러 악을 행하고 죄를 지으면서도 무감각한 상태에서 그것이 악이고 죄인지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벌써 깊은 침륜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시인이 “내가 허물이 없으나”라고 고백하는 것은 자기 안에 어떠한 죄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악인이 나를 들어서 징계하실만한 죄가 내 안에 없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악인을 긍휼히 여기지 말아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악인에 대한 복수심에 가득 찬 기도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시인은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일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가 되고자 끊임없이 자기를 하나님께 합치는 노력을 진리 안에서 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부속되어 있을수록 하나님을 거스르는 세력들은 자기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반감은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들에 대한 반감이요 대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반감과 대적이 끊임없이 계속 될 때 시인은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고난을 받고 괴로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이 부분을 해석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적용해봅시다.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맞서고 대적하는 자들로 인하여 언제나 고난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면서 사람에게도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과 동일한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인간을 너무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교회 안에서도 항상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대신 반대로 사람들로부터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형식상 언약백성들이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사는 사람들이 항상 교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사람들의 비유를 맞추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환영과 인정을 받기 위해 살았던 사람들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살려고 했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서도 고난을 당했습니다. 선지자들의 역사를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와서 백성들에게 전해주었고, 이것을 위해 온 마음을 다하여 설교하고 외쳤지만, 끊임없이 박해를 받고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죽어갔습니다. 하나님을 원치 않고 싫어하는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믿음으로 살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교회 안에 남아서 진리를 대적하고 하나님 말씀을 맞서며 살아갑니다.
한 사람이 신앙의 이름을 가지고 있고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그것이 자신의 영혼에 안전함을 가져다주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진실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생활이 삶속에서 날마다 반복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교회는 떠나지 않아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떠날 수 있는 존재이고, 신앙의 형식은 포기하지 않지만 거룩함은 싫어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서 신앙으로 사는 생활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원수를 비웃으시는 하나님
“저희가 저물게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고
그 입으로 악을 토하며 그 입술에는 칼이 있어 이르기를 누가 들으리오 하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를 웃으시리니 모든 열방을 비웃으시리이다”(시 59:6-8)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고˛
성경에서 ‘개’는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됩니다. 개는 무법하고 무도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 많이 사용됩니다. 시편 22편, 고난의 시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고하는 가운데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라고 시인이 고백하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에워싸던 수많은 대적자들, 특별히 십자가에서 못 박히실 때 그분의 고난의 주역이 되었던 무도한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스데반은 불법한 자들의 무법한 행실을 개라고 묘사했고, 사도바울은 복음진리가 선포되는데 그것을 끊임없이 대적하는 완고한 유대인들을 가리켜 개들이요 행악자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고”, 여기에서 ‘개’는 집에서 기르는 사랑스러운 애완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집을 나간 고양이들, 집에서 버림받은 동물들을 보면 야생화되어버린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개들처럼 울면서 성으로 두루 다닌다고 묘사합니다. 시인을 대적하고 고통을 주는 원수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의 마음의 법
마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가슴에 법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지 못하는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원수가 미워도 감히 그를 해치지 못하고 마음속에 욕망이 넘쳐도 선을 넘지 못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공경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나면 가슴속은 무법이 됩니다. 신약의 정신에서 보면 사랑 없음이 모든 무법의 근원입니다. 사랑은 수많은 법을 찾아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많이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마음의 질서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 저 사람이 싫어할 텐데, 이렇게 하면 저 사람이 좋아할 거야.’ 하면서 그 사람 안에 있는 많은 생각들을 찾아내어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 법과 질서를 기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마음에 있는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들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무법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수많은 질서들이 가슴속에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그 법과 질서를 따라서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확언하건대, 만약 한사람이 진정으로 성경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자연을 해칠 수 없습니다. 친환경주의자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중학교 1학년 때의 일로 기억됩니다. 교회에 있었는데 “우리 주일예배 끝나고 새 잡으러 가자.” 그러면서 애들이 새총을 가지고 왔습니다. 새를 잡으러 가려고 하자 어느 집사님이 저를 부르더니 “애야, 나는 새를 잡으러 안 갔으면 좋겠다.”라고 하십니다. “왜요?” “걔네들도 하나님이 살라고 창조하신 것인데 그것을 잡아서 무엇 하려고 주일날 새를 죽이러 가니?” 그분은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나온 집사님이셨지만 그런 감각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설득되어서 포기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질서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질서가 너무 좋아서 자연과 세상으로부터 시작해서 교회와 내 영혼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아름다운 질서들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 질서들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질서들 안에 자기가 있다는 것이 그렇게 행복하고 좋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속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질서들이 예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에게 수많은 구속을 주는 것입니다. 자신이 남편과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을 위해 자기가 수고하고 애쓰고 의무를 다하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겠습니까? 그렇게 수고하고 애쓸 사람이 있다는 것 때문에 기쁨이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 살던 집이 철거되어서 대토(代土)를 받아서 이사를 갔습니다. 여덟 평씩 잘라서 주고 알아서 집을 짓고 살라고 했으니까 형편이 없었습니다. 그런 빈민촌에서 사는데, 길 건너편에 여덟 평을 주었는데도 돈이 없어서 지붕을 씌우는 집도 못 짓고 텐트를 치고 사는 집이 있었습니다. 그 집에 사는 아줌마가 어린 제가 보아도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줌마가 며칠에 한 번씩 남자 옷을 가지고 나와서 먼지도 없는데 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동네사람들이 “아이고, 저것도 자기 서방이 있다고 과시하는 것 좀 봐라.”고 합니다. 어린나이에 그것이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알고 보니까 그 아줌마는 택시 운전하는 사람의 첩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이 동네에서 사마리아여자와 비슷했습니다. 며칠 동안 남편이 본처의 집에 가서 애들하고 있다가 며칠에 한 번씩 거기에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옷을 가지고 밖에 나와서 털면서 나도 남편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어려서는 그 의미를 몰랐는데 나이가 드니까 이해가 됩니다. 지금으로부터 사십년도 넘는 세월의 이야기지만 그 여자의 얼굴이 아련하게 떠오릅니다. ‘얼마나 사는 게 부끄럽고 고통스러웠으면 남편이 오면 온 동네 사람이 보도록 큰소리로 그 옷을 털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남편을 사랑하고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을 위해서 져야하는 의무란 법에 대한 복종입니다. 어미로서 어미가 지켜야 할 법에 복종하는 것이 의무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웠으면 한 남자에게 소속되어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먼지도 나지 않는 옷을 그렇게 막대기로 때리면서 털었겠습니까? 사랑은 법을 즐거워하고 그 법에 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를 오래도록 믿어왔어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날마다 위협받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변하는 것입니다. 제가 「마음 지킴」이라는 책속에서 이야기하기를 성도의 별명은 ‘사랑지킴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원수가 끊임없이 빼앗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연조가 깊기 때문에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법입니다.
˚그 입으로 악을 토하며 그 입술에는 칼이 있어˛
시인이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법하고 불법하게 행하면서 개처럼 성을 두루 다니고, 그 입에서는 악을 토하고 입술에는 칼이 있는 것입니다. “그 입으로 악을 토한다.”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하나의 습관적인 악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서에 보면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근본적으로 돌이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의 비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복해서 죄를 짓는 것을 가리켜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돼지가 씻었던 곳에 다시 눕고 개가 토하였던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그리는 개의 특징은 무법하고 자각하는 마음이 없어서 자기가 토한 것을 먹고 그것을 다시 토하는 것을 반복합니다. 여기서 그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악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보여줍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도 말의 실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십여 년 전에 그런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의 물에 성화될 때 물에 가장 늦게 들어가는 것이 어디일까요? 입술입니다. 마지막까지 성화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입술입니다. 온 몸을 다 집어넣고 마지막으로 들어가는 것이 입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의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도 말의 실수나 허물로 인해서 차마 해서는 안 될 이야기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악을 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끊임없이 반복해서 토해내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악을 토하고 또 다시 먹고, 먹은 것을 다시 토해내는 일을 반복적으로 계속하니까 그 안에 더러움에 대한 감각의 기준이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악인의 특징입니다.
그 입술에는 칼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연약함으로 어쩌다가 한번 쏟아져 나와서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후회하는 그런 종류의 칼이 아닙니다. 그것은 달고 다니는 칼입니다.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비참한 삶입니까? 오히려 개 같은 인간들에게 악을 당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피하고 그분께 호소하고 은혜를 구하면서 주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들에게 가까이에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개처럼 두루 울며 다니고, 악을 토하고 토한 것을 다시 먹고, 그 입에 칼을 달고 다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위로, 긍휼, 사랑이 없습니다. 머릿속으로 생각할 뿐, 자신에게는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오래 믿으면서도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갈가리 찢겨지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기업이 얼마나 큰데 왜 그런 식으로 살고 주님의 구원을 욕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아프게 하는 것일까요?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이 갈가리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보다 완전하신 주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그런 것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픈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주님을 더 의지하고 사람을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더 신뢰합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
고통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그렇게 고난가운데 주님께 더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 친구들이 나를 버려도 예수는 내 친구, 나를 버리질 않네.” 그런 고백을 하면서 이 세상은 잠시 머무는 나그네 길이요, 나는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사람 자신에게는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 사람 안에 계신 성령이 마음 아파하시는 탄식을 그는 느끼지 못하지만 저는 느낍니다. 어떻게 그 영혼에 햇볕이 들 수 있겠습니까?
˚주께서 저희를 웃으시리니 열방을 비웃으시리로다˛
시인은 말하기를 “주께서 저희를 웃으시리니 모든 열방을 비웃으시리이다”라고 합니다. 그들은 악으로 선을 이기는 것 같고, 악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공의를 가로막는 것 같고, 불법으로 사랑을, 행악으로 진리를 차단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쓰이는 도구가 되고, 도구가 되었던 그들은 하나님께서 싫어 버린바 되어서 심판을 받는 것을 시인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고난 받으면서도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마음이 아픕니다. 한번 가면 다시 오지 못하는 것이 인생인데,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하며 살아도 다 못할 인생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하고 섬기며 그들을 위해 희생해야할 수많은 영혼들이 기다리는데, 왜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몰랐을 때는 몰라서 그렇게 산다고 하지만,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안 후에도 우리는 왜 그렇게 사는 것일까요? 시인은 이런 사람들은 검불과 같고 바람에 나는 지푸라기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 고난과 시련이 잠시 왔지만 하나님께서 주님을 붙들고 사는 자신과 함께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핍박 받는 자의 소망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니 저의 힘을 인하여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시 59:9)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니˛
시인은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박해를 받고 고난을 당할 때 그것을 대응하던 방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니”라고 고백합니다.
성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로 재성과(在城) 나성(羅城)이 있습니다. 재성과 나성이라는 것은 성을 축조하는 목적과 관계된 것입니다. 이것들은 어느 지역 전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쌓은 성입니다. 이런 성은 도시나 어느 지역, 국경, 이런 것들을 막기 위해 쌓은 성입니다. 또 다른 종류의 성이 있는데, 그것은 왕궁을 보호하거나 전쟁을 하기 위한 장소를 보호하기 위해서 쌓은 성입니다. ‘산성’은 전투를 위해서 쌓은 성입니다.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국민의 생명과 나라의 주권을 보존할 방책을 세우게 될 때 이러한 성의 축조 방식들을 계획하게 됩니다. 시인은 전문적인 군인이었습니다. 이런 산성에서 외적을 물리쳐본 경험도 있을 것이고, 산성에서 강력하게 저항하는 적군을 섬멸하기 위해 공격해본 경험도 있을 것입니다. 산성에서의 싸움은 굉장히 어려운 싸움입니다. 이러한 성을 쌓을 때는 단순히 성을 쌓는 것이 아니라 공격하기 어려운 지형을 택해서 성을 만듭니다.
몇 년 전, 고구려시대의 옛 영토에 가보고 고구려가 어떻게 큰 나라들을 상대로 오랜 세월 버틸 수 있었는지를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고구려가 앞에 큰 산이 있어서 다른 외적이 쳐들어오기가 어렵고, 만약에 성이 함락되면 사람들이 도망갈 수 있는 성이 있었습니다. 그 성이 참 신기한 것이 아주 가파른 길을 걸어서 올라가면 봉우리 위에 쟁반을 놓은 것과 같은 지형물이 나왔습니다. 많이 들어가면 거기에 오만 명이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거기는 사면이 전부 다 깎아지른 벽이고 올라가는 길이 한 통로밖에 없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 산꼭대기에 샘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먹고 버티는 것입니다. 전쟁이 나서 불리해지면 마지막으로 그곳에 올라갑니다. 먹을 것을 모두 갖다 쌓아놓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조금만 버티면 겨울이 옵니다. 그곳의 겨울은 혹독하게 춥습니다. 쌀 같은 먹을 것들을 전부 다 불사르고 꼭대기로 올라갑니다. 그러면 먼 길을 온 병사들이 보급을 받으면서 겨울을 나야되는데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합니다. 결국은 스스로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라를 지켰다고 합니다.
산성의 세 가지 개념
시인이 하나님을 나의 산성이시라고 불렀을 때 그것은 이러한 개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산성이라는 것은 최소한 다음 세 가지 이상의 개념들을 보여줍니다.
첫째는 환란 중에 피할만한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산성은 마지막 피난처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우리의 힘으로 삽니다. 그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인생의 진정한 힘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때로 당신께 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할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형통할 때는 자기에게 대단한 능력이 있는 줄 알고 얼마든지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꾸려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환란이 올 때 마지막 피할 수 있는 분이 하나님뿐이시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환란을 당해보면 압니다. 평소에 신앙이 있는 사람인 것 같아도 신앙이 없는 사람은 마지막에 극한 환란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께 피하지 않습니다. 환란을 당할 때 진짜 신앙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께 피하게 됩니다. 이것이 산성이라는 말이 보여주는 첫 번째 의미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보호를 의미합니다. 평지에서 싸우면 일대일로 물리칠 수 있는 적들도 산성에 숨어버리면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열 명에서 백 명을 투입해도 불가능한 상황이 됩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성중의 하나가 서울 근교의 남한산성입니다. 도저히 공격할 수가 없습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수준이고 그것으로 적군이 올라오면 정확하게 눈에 띕니다. 산성에 나 있는 구멍으로 화살을 쏘고, 뜨거운 물과 기름을 끼얹고, 돌을 굴리면서 적군의 침입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그러한 산성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병사를 희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십니다.”라고 했을 때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난과 원수들의 끊임없는 대적과 공격 속에서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산성에서 보호해주시는 것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는 여러 곳에서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반석이시라”고 하나님을 전쟁과 관련지어서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호가 되어주십니다. 우리의 인생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 같아도 인생의 문제가 무엇이든지 우리가 마지막으로 피할 곳은 주님뿐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문제가 무엇이든지 주님의 품안에서 해결되는 것입니다.
산성이라는 말의 세 번째 의미는 환란 속에서 하나님께로 피하고 거기서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언약백성들은 환란 속에서 하나님과 특별한 교제를 경험하게 됩니다. 산성은 아주 작은 곳입니다. 거기로 피하면 멀었던 사람들이 가깝게 느껴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환란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과 매우 가깝게 교제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나게 됩니다. 물론 믿음으로 하나님의 품으로 피하는 사람들만 그렇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평소 같으면 우러러볼 수도 없는 왕이나 황제가 작은 산성에 백성들과 함께 피해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매우 가까이에서 그분을 뵙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환란을 당하여 산성과 같은 하나님께 피하게 될 때, 우리는 그분과의 인격적인 교제의 깊이를 경험하게 됩니다. 시인은 이것을 환란 속에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시인은 자기를 고치시는 하나님의 은혜, 시련가운데서 건지시는 특별한 보호를 경험합니다.
결론과 적용
그는 노래합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는 유익이라”고 말입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더니 고난을 당한 후에는 하나님 앞에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고 노래합니다. 형언할 수 없는 지혜가운데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과의 관계 속으로 돌아와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게 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다루십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도 여전히 환란과 시련을 만나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도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누구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께 피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언약백성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인자하심으로 영접하소서
“나의 하나님이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내 원수의 보응 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시리이다
저희를 죽이지 마옵소서 나의 백성이 잊을까 하나이다
우리 방패 되신 주여 주의 능력으로 저희를 흩으시고 낮추소서”(시 59:10-11)
대적을 향한 기도
시인은 원수들에게 고난 받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으로 영접해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인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특별히 언약을 맺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기초로 베푸시는 자비입니다. 이것은 언약관계 안에 있는 백성들만 알 수 있는 종류의 사랑이고 이것을 신약적인 말로 표현한다면 십자가의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큰 자비의 사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는 놀라운 자비의 사랑으로 대해주시지만 대적에게는 심판하실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시인이 하나님께 대적을 진멸하고 죽이고 파멸에 이르게 하시고 환란가운데서 그들의 생명을 끊으시기를 간구하는 극단적인 기도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정반대로 “저희를 죽이지 마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편에 나오는 대적을 향한 저주의 시들이 단순한 보복의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반증이 되는 것입니다.
“저희를 죽이지 마옵소서 나의 백성이 잊을까 하나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만약에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신다면 그들은 없어질 것이고, 죽어 없어지면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잊어버리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심판을 받고 큰 고통 속에서 죽는다면 그의 행한 악에 대한 징벌은 되겠지만 그가 죽는 것을 보는 사람들 외에 누가 그들을 알겠습니까?”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시인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까? “주의 능력으로 저희를 흩으시고 낮추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들을 당신의 큰 능력으로 낮추십시오. 낮아진 그들을 보면서 하나님을 대적한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언약백성으로 하여금 친히 보게 하셔서 그들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며 사는 행복을 알게 해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그런 고백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원수에 대한 증오심에서 우러나온다기보다는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복 주시는 이심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악인을 위한 심판의 기도가 선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린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고난 중에 일깨우심
하나님께서는 매 순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당신의 통치아래서 살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통치아래 살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도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항상 고난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본질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면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가고자 하는 길은 선한 길이고, 본질적으로 이 세상은 악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때때로 물러가 침체에 빠지고, 경우에 따라서 악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그들 안에는 중생과 함께 하나님이 심으신 선한 삶을 살고자하는 강력한 욕구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파도치는 바닷가에 있는 바위와 같아서 큰 파도에 가끔 가려질 수는 있어도 사라지는 법은 없습니다. 파도가 쳐서 해변을 뒤덮을 때는 잠시 바위가 보이지 않지만 얼마 지나고 나면 물이 빠져나가면서 다시 바위가 보이는 것처럼, 신자 안에 두신 선한 본성도 그러합니다. 그는 가끔 세상의 사람들과 비슷한 사람이 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해 돌아선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살아가려고 끊임없이 몸부림치는 것이 신자의 모습입니다. 세상은 이러한 이중성을 정확하게 압니다. 세상은 신자를 미워하고 신자는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면서 살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부패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신다면 그가 세상에서 한없이 행복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뜻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합니다. 진리의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시련을 당함으로 죄 많은 세상이 당신의 자녀들의 영원한 집이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일깨워주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이전에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든지 하늘 가치를 따라 인생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매 순간 그를 일깨우시고 깨우쳐서 우리가 세상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충분히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두 발은 딛고 살지만 하늘을 향해 살게 하시기를 마치 망망대해에 떠 있는 배에 탄 사람들이 그 물을 마실 수 없는 것처럼 하십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내리는 단비를 고대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 세상에서 살게 하십니다.
칼빈의 생애를 보면서 깊이 감동을 받고 마음으로 많이 울었던 대목이 이것입니다. 조용히 대학에서 공부만 했더라면 학자로서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주님을 만나고부터 가톨릭교회와 결별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비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세네카’라는 유명한 철학자의 「관용론」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여기에 주석을 씁니다. 정식으로 학자로 데뷔를 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파리에 있는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주님을 깊이 만나는 회심을 경험합니다. 그는 루터와는 달라서 개인적인 경험을 많이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받고부터 끊임없는 핍박과 시련에 직면하게 됩니다. 간사하고 악랄한 사람들의 모함이 있었고, ‘볼쉐’라는 사람과 논쟁을 벌이는데 나중에 그는 칼빈을 색광, 동성애자로 소문을 냅니다. 엄청나게 많은 인쇄물을 만들어서 전 유럽에 돌렸습니다. 치열하게 논쟁을 하고 엄청난 대적들이 자기를 에워쌉니다. 칼빈을 자기 말을 안 들으면 불태워 죽이는 악랄한 폭군으로 묘사합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세르바투스’를 화형에 처할 때도 그는 어떻게 하든지 그것을 막아보려고 애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의회가 결정을 해서 죽여 버립니다. 그 속에서 몸부림치면서 마지막에는 사랑하던 아내도 먼저 죽게 됩니다. 아내가 죽어갈 때 아내 옆에서 손을 꼭 잡고 아내에게 가르쳐준 것이 하늘나라의 소망입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절절히 배여 있었습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우리의 집이 아닙니다. 우리의 참된 위로와 행복은 하늘나라에 있다는 소망을 절실하게 피력합니다. 그런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잠시 있다가 가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모든 것을 아는 것 같지만 오늘밤에라도 “너희 수고를 그치고 너희는 내게로 오라.”고 하면 모두 버리고 떠나게 되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결국 나와 상관없게 됩니다. 일도 사라지고 관계도 사라지고 심지어는 교회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원히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방패가 되신 주
시인은 주님을 표현하기를 “우리 방패 되신 주여”라고 합니다. 전쟁에서 비 오듯이 화살이 쏟아져도 방패를 세우고 그 뒤에 우리의 몸을 은닉하면 충분히 수많은 화살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매 순간 고난이 오고, 대적하는 자들에게 시달리고, 세상에서 끊임없이 갈등이 일어날 때마다 이상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것이 죄 많은 세상이 우리의 집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으로 알고, 오직 방패가 되시는 주님의 뒤에 피하는 성도들이 되어야합니다.
야곱 중에 다스리시는 하나님
“저희 입술의 말은 곧 그 입의 죄라
저희의 저주와 거짓말을 인하여 저희로 그 교만한 중에서 사로잡히게 하소서
진노하심으로 소멸하시되 없기까지 소멸하사
하나님이 야곱 중에 다스리심을 땅 끝까지 알게 하소서(셀라)”(시 59:12-13)
본문해설
시인은 계속해서 악인의 정체를 하나님 앞에 폭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을 아실진대 악인들의 속을 모르실리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하나님이 악인을 누구인지 모르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악인의 어떠함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 이렇게 아뢰는 것은 하나님이 악인을 모르시기 때문에 일깨워 드리겠다는 생각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악인이 누구인지 고백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악인의 정체를 일깨우고, 동시에 하나님께 부름 받아 언약을 맺고 그분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악인과 대조하는 것입니다.
악인들의 죄악
“저희 입술의 말은 곧 그 입의 죄라”, 악인들은 수많은 말로 시인을 모함하고 시인에게 있지도 않은 죄를 덮어 씌워서 큰 고통을 겪게 합니다. 입술의 많은 말은 그 사람의 내면에 가득 차 있는 하나님을 싫어하고 대적하는 죄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인이 바라본 악인의 정체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의로운 자녀들도 화가 나고 분노하면 험한 말을 해서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속들이 그러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악인은 시인을 미워하고 싫어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자기를 향한 독한 말과 악한 표현들은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의 발로라는 이야기입니다.
시인은 “저희의 저주와 거짓말을 인하여 저희로 그 교만한 중에서 사로잡히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을 통치하시기 때문에 시인은 악한 사람들도 다스려주실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저주하고 거짓말을 하는 악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죄입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 안에 있는 악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주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축복하신 백성들입니다. 축복받은 언약백성 중 하나가 하나님께 축복받은 백성을 저주하게 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축복하신 자를 저주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주겠다고 축복하신 사람을 저주하니까 이것은 하나님과 맞서는 행동인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미움의 죄가 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의 지체들을 깊이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는데, 어떤 사람이 어느 지체를 미워한다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맞서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데 그가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지체들을 미워하게 될 때 그것은 “하나님은 참 모르시는군요. 실수하시는 것입니다. 그 인간을 왜 축복하십니까? 그는 나쁜 놈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하면서 하나님을 꾸짖고 나무라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교만의 죄입니다.
곧이어 “교만한 중에 사로잡히게 해주시옵소서”라고 합니다. 이것은 전쟁의 문맥입니다. 전쟁에서 군인들이 전투를 하다가 싸움에 지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옛날에는 전쟁에 나가서 군인이 지면 스스로 자결을 하든지 아니면 처단되었습니다. 싸움에 지는 것은 큰 수치였습니다. 죽음은 비참한 종말이기는 하지만 수치를 모릅니다. 만약에 살아서 적군에게 사로잡히면 목숨도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처지가 됩니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수치입니다. 다윗은 수없이 전쟁터를 누빈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로잡힌 것의 수치를 알았습니다. 표제에 보면 “사울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킨 때에”라고 하는데, 설마 도망 다니는 와중에 썼겠습니까?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그때 하나님 앞에 마음속에서 노래했던 것들을 가슴에 담아 두었다가 나중에 정리한 것일 것입니다. 전쟁에서의 사로잡히는 수치를 알고 있는 다윗이 오늘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야곱 중에 다스리시는 하나님
“진노하심으로 소멸하시되 없기까지 소멸하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없애주시도록 간절히 호소하는데 그 목적이 원수에 대한 독한 미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야곱 중에 다스리심을 알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함으로써 결국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무기력하시고 모르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알고 능력 있게 다스리신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악인에게 고난을 당하면서도 시인의 관심사는 자신의 개인적인 고통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악인이 횡횡하고 하나님께 속한 자신이 끝없이 고통을 받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무데도 없구나.”라고 말하며 당신의 영광을 가릴까봐 야곱 중에 다스리심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이스라엘의 애칭입니다. 야곱이 옛 이름입니다. 후에 하나님이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시며 이름을 고쳐주십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이 그 후에도 불립니다. 나쁜 뜻으로 불리기보다는 애칭으로 불렸습니다. 야곱은 이스라엘 백성의 또 다른 별명이었습니다. ‘야곱 중에 다스리심을’이라고 할 때 이것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 이스라엘, 오늘로 말하면 “교회를 다스리심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땅 끝까지 알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모든 항로 가운데 주님을 꼭 붙들고 주님이 친히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고 의지하며 걸어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나의 피난처
“저희로 저물게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게 하소서
저희는 식물을 위하여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밤을 새우려니와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시 59:14-17)
본문해설
시인은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는 악인을 우연적인 악이 아니라 뿌리 자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악을 행하는 것에서 찾았습니다. 시인은 악인을 만나 고통을 받을수록 자신은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확신하게 됩니다. 시인이 악인을 향하여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는 단순한 마음의 정욕에서 우러나오는 파괴적인 기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구함
그는 말합니다. “저희로 저물게 돌아와서 개처럼 울며 성으로 두루 다니게 하소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개’는 무도하고 의식이 없는 짐승으로 여겨졌습니다. “개처럼 자기의 토한 것으로 돌아갔고”라는 사도 베드로의 표현이 성경에 나옵니다. 시인은 굶주림이나 목마름이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방황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을 개처럼 울며 성을 두루 다닌다고 표현했습니다. 날이 저물었다는 것은 더 이상 개들을 돌봐줄 사람들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저희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역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는 악인의 결국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강하지 못하고 악인은 득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악인은 식물을 위하여 유리하다가 배부름을 얻지 못하면 밤을 새우는 처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신은 비록 연약한 것 같지만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를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앞 절의 무대는 밤인데 시인이 노래하고 있는 것은 미래형으로 주의 힘을 노래하고 아침에 주의 인자를 찬송한다고 되어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악인에게 지는 것 같고 해를 당하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 주의 힘을 노래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힘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큰 능력을 언제 찬송했습니까? 하나님이 그 능력을 행사하셔서 언약백성을 위하시는 당신과의 관계를 드러내보여 주셨을 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언약백성들의 찬송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시인이 이런 역사를 염두에 두며 여호와의 힘을 찬송할 수 있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악인에게 해를 당하는 것 같고 원수가 자기보다 강한 것 같고 자신은 악인이 갖고 있는 종류의 힘이 없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주시고 이길 것이라는 불굴의 확신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부르리니
하나님의 큰 힘이 나타나서 공의를 펼치실 때 악인은 멸하나 자신은 하나님의 공의 아래 희생되지 않고 오히려 주님의 이름을 높이게 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공평을 펼치도록 구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분께 속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만이 자신 있게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은혜를 구할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힘을 노래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힘의 행사는 악을 행하는 악인들에게는 엄격하게 나타나는 공의의 소산이지만, 은총을 바라며 산 언약백성들에게는 주님의 인자하심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인자는 언약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분의 인자한 마음으로부터 비롯됩니다.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것처럼, 어미가 자식을 돌보는 것처럼, 그런 사랑의 마음으로 언약백성들을 돌보시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현재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것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미래에도 그런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에 대한 확신에 붙들려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느끼지 못하는 것을 내일 느끼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미래의 불안에 대한 해소와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에 대한 확신은 오늘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오늘 주님과 화목한 가운데 살아가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지금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고 지켜주시는 것이 미래에 투영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느낄 수 없이 관계가 깨뜨려졌을 때 절망적이고 파괴적인 생각들이 밀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내일에 대한 염려와 불안은 오늘 하나님과의 관계의 결핍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인은 비록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하고 악을 행하는 원수들에 의하여 고통을 받고 있지만 오늘 하나님과의 돈독한 관계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지금은 아무 증거가 없어도 내일 아침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노래할 것이라는 확신에 붙들렸습니다. 상황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현실을 해석하면서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산성이며 피난처이신 하나님
그는 고백합니다.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이심이니이다” 많은 군사들을 이끌고도 도저히 점령할 수 없는 깎아지른 절벽위에 서있는 산성,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 자신의 처지를 산성에 피난하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했습니다. 환난 날에 난리가 미치지 아니하는 피난처, 거기를 주님의 품으로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시련과 환난을 당하시게 하시면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붙들어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악인이 처처에 횡행하고 악이 나에게까지 미치지만 주님의 손에 붙들려 사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품이 산성이요 환난 날에 피할 피난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품안에서 쉬노라면 성난 파도와 같이 출렁거리듯 나를 에워싼 수많은 상황들이 잠자고, 나는 그 환난과 풍랑을 인하여 주님의 품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문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과 고통을 통해 언약백성들을 당신의 품으로 다시 불러들이시고, 당신 앞에 사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의지할 만한 이는 우리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깊이 신뢰하고 의지하며 오늘도 이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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