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 24일 새벽예배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히 5:7-10).
8절에 보니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은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그랬습니다.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드린 기도가 나오고 그리고 그가 아들이시라도 권한으로 순종을 배워. 이렇게 되있거든요. 순종을 배워. 여기서 우리들이 이런 의문이 떠오르거든요. 아들이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예수님께 불순종하렴이 있었나 하나님께 예수님이 불순종 하던 것이 있었나. 그런 의문이 하나 떠오르고 두 번째 뭐냐 하면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 그랬는데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예수님께 뭐 모르는 것이 있으셨나 그런 두 가지 의문이 떠오릅니다. 이제.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이것이 예수님에 고난이 순종과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나 이런거죠.
차례대로 대답하자면 우선 첫째는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 그랬는데 예수님에 삶에 어떤 불순종이 있었을까? 그런 의미는 아니다 이거죠. 첫째는. 그런 의미는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어떤 불순종하던 것들이 있었는데 그 불순종 하던 것들을 꺾고 그러면서 이렇게 순종을 배웠다 그런의미는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였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죄를 지으실 마음도 없었고 또 죄를 지으실 수도 없는 분이셨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완고하고 반역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서 그래서 우리들이 참회를 통해서 깨트려지고 그래서 자기를 자기 자신에 잘못 나가던 길에서 후회하고 돌이켜 서서 자기를 꺾고 그래서 순종을 배우고 그렇게 걸어가는 그런거 하고는 다르다 이거죠.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분이라지만 그러나 죄는 없으신 분이셨기 때문에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 그럴 때 그 순종을 배워가는 그것이 우리처럼 불순종을 통해서 순종을 배워가는 그런 것은 아니였다. 라는 것이죠. 그렇게 해석을 해야지만 예수님에 성품에 어울리는 것이다. 두 번째는 뭐냐하면 고난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 라고 그랬으니깐 예수님이 뭘 모르시는 것이 있었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죠. 근데 그거는 사실이다 사실이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런 혼란에 빠지죠. 예수님이 예수님이 모르시는 것이 있었다. 그분이 하나님이셨는데 모르시는 것이 있다면은 어떻게 그 분을 신뢰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데 이렇게 보는거죠. 그러한 모든 연약함도 예수님이 스스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에 몸을 입으신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셨지만 이 세상에 오시기 위해서 사람에 몸을 빌어 태어나시고 거기에서 사람에 몸을 입으신 것 그 자체가 예수님에 말 할수 없는 수치이며 모욕이였으며 낮아지심에 표상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 몸을 입으신 그 한계 안에서 자연스럽게 인성 그 밑에다가 신성을 감추셨기 때문에 인간이 가지고 있던 죄 이런 것들은 없었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지식에 한계 같은걸 그대로 갖고 계셨다 이거죠. 그러니깐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취하셨지만 그러나 우리 인간들처럼 오류가 뒤섞여 있는 그런 지식을 가지신 분은 아니였다 이거죠. 대게 오류는 죄와 그 다음에 이 부패와 무능 이러걸로 말미암는 무능 이런 것들 영향이거든요. 그러는데 예수님은 그런 죄가 없으신 분이였기 때문에 마치 하나님이 이 세상에 창조했던 아담이 모든 것을 알고있지는 않았지만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면 그건 하나님이죠. 그죠? 전지하니깐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 마음과 지성 이런 것들이 가지런해서 영적으로 하나님께 잘 승복할 수 있었고 그리고 실질적으로는 우리보다 훨씬 정확하게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라는 사실은 우리가 의심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사람에 몸을 빌으시기는 했지만 죄 없는 하나님에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그 분이 가지고 있었던 지식들은 한계는 있었지만 그러나 오류는 없으셨다 이렇게 봐야한다 이거죠. 그래서 예를 들자면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언제 세상에 끝나게 될 것인가 그거 아들도 모른다 아버지만 아신다 사실 그 분이 부활하고 승천하셔서 하느님의 보좌 우편에서 이 온 우주를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지금에서 그 아들이 그 세상에 끝 날을 모른다는건 말이 안되거든요. 통치하시는 분이니깐. 그거는 사람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있을 때에 인간에 몸을 입으심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지니셨던 그런 한계. 지식에 한계였다. 그런 말이죠. 그런 점에서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그러니깐 오류가 있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였지만 사람에 몸을 입으시는 그 순간 참답게 이 몸을 입고 그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한다 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삶을 통해서 배워 나가셨다 삶을 통해서. 그래서 온전하게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 순종을 통해서 자신이 온전에 오류는 없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 온전해지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경험하게 되신거에요. 예수님은 그 하나님에 형상을 가진 인간으로서 온전한 형상을 가진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델이 되시는 분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참 신자가 된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느냐? 참신자가 되면 그 상태가 어떠하고 어떻게 살고 그리고 무엇에 관심을 가지며 무엇을 위해서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되는가 하는 또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 그런 훌륭한 그 모델을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이죠. 우리들이 언감생심 형편없는 죄인으로서 예수님을 닮겠다고 하는 그것자체가 그 말할 수 없는 모순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본 받는다 그렇게 말할 때에는 이미 경건한 성도들에게는 두 가지가 전제되어 있는 거예요. 우선 뭐냐면 상태적인 면에 있어서 우리가 노력하면 예수님과 똑같아질 수 있을 것이라 하는 그런 생각을 안하는 거죠. 끊임없이 바라보고 가야할 목표점 이라고 보는 거죠. 결국 도달하지는 못하죠. 그런 것이 전제되어 있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그런 닮아가는 것이 자기 자신 혼자만에 결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자신이 성화되어져 가는 작용을 통해서 그렇게 되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을 많이 닮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 자신이 자랑할 수 있는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같은 것이라고 생각 안하는 거죠. 많이 주님을 닮았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은혜다 라고 하는 그렇게 고백할 것이다 라고 하는 전제가 이미 깔려 있는 거라 이거죠. 그런데 인제 이런 이야기죠. 예수님이 지식에 한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누가복음 2장에서도 입증이 되잖아요. 아이가 자라매 아이가 지혜와 키가 자라며 그러잖아요. 무슨 이야기냐면 자라간다 이거죠 이렇게. 근데 우리는 우리도 자라가는데 문제는 우리가 마치 순전한 씨로 뿌려지지 않은 밭처럼 잘못된 오류에 씨앗이 뿌려져서 같이 자라는 거죠. 그니깐 지혜가 자라면서 또 뭐도 자라죠? 선한 지혜만 자라는게 아니라 사악한 지혜도 함께 자라잖아요. 그래서 아무것도 안 가르쳐줘도 아이들이 꾀가 나면은 거짓말도 함께 자라죠. 예수님에게 그런것은 없었다 이거죠.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지식에 한계가 있으셨는데 그대로 짊어 지신 것이죠. 근데 이제 이것도 쭉 펼치면 얘기가 많아요. 그런데 이런 기회에 기독문을 정리해 보는 건데 그런데 이런 거죠. 지식에 관련해 보자면 그러면은 이 지식에 한계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이게도 사실이라면 뭐 그럴꺼 아니에요 그죠. 사람이 어떻게 모든 걸 알수 있겠어요. 불가능하죠. 그러니깐 그랬더라면 오류는 없었지만 완전히 아시는 것이 이분이 우리에게 하늘 진리를 가르치고 우리 구속을 위해서 속죄에 제사를 드린 대제사장으로서의 길을 가는데 방해가 되신 것은 아닐까 불안감이 우리에게 있거든요. 그것은 아니다. 그럼 뭐냐? 부족한 것이 있었는데 다 알지는 못하셨는데 그렇게 우리에 우리에게 하늘에 진리를 가르치시고 또 우리를 위해서 대제사장으로 길을 걸어가시기 위해서 꼭 필요한 지식이 있으셨다면 꼭 필요한 지식이 요구되는데 그분이 자연적 성장을 통해서 그걸 아직 획득하지 못하셨다면 그거는 하나님이 계시를 통해서 직접 가르쳐 주신 거예요. 그렇게 함으로써 그 지식에 모자라는 것 때문에 구속 사역을 방해 받거나 하늘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칠 때에 오류가 섞인 진리로 전파되지 않을 수가 있으셨단 말이죠. 그러니깐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지식은 자연적 성장을 통해서 알게 되는 그런 지식과 함께 하나님께서 구속사역에 필요하고 인성을 입으셨기 때문에 그 유한성 때문에 파악할 수 없었던 진리 그것들이 구속 사역에 방해 되지 않고 하늘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데 방해되지 않도록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계시로 아들에게 알려 주심으로써 그렇게 하셨던 거죠. 그래서 보면은 예수님에 생애애 대한 기록을 보면은 가끔은 예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신 것 같은 장면들이 나오잖아요. 사람에 마음도 이렇게 모든 걸 알고 계신 것같은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런 것들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계시를 보여주시고 그래서 능력면에서도 마찬가지죠. 어떨 때는 파도도 잔잔하게 하시고 그렇죠. 그리고 막 보리떡 물고기로 수만명에 사람을 막 먹이셔요 그렇죠. 근데 또 어떤 때는 물 한모금을 얻어 마시기 위해서 우물가에 앉으셔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청하시는 거죠. 뭐 바다를 잔잔케 하고 수만명을 먹이신 분이 물. 탁하고 와야지 이게 멋있는 거지. 나 물 한잔만 좀 먹자. 이게 잘 안어울리잖요. 근데 그게 어떻게 설명이 되냐면은 그 신성과 인성이 공존하는 상태에서 그 예수님이 그 사실을 보여주시는 과정이에요. 그러니깐 바다를 잔잔케 하는 과정에서는 어떻게 해요. 하나님이 특별히 그분에게 그 몸속에 있는 신성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어느 한순간에 그분에게 한순간에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또 당신이 참 사람이시기 때문에 행로에 권하셔서 우물가 곁에 앉으셔서 그 여인에게 한잔에 물을 청하시는 장면에서 그분이 참 사람이시라는 것들을 배우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예수님께서 배워야할 것들이 있으셨다. 그런거죠. 마지막 세 번째는 뭐냐면은 권한과 순종에 관계죠. 권한과 순종에 관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 이게 우리 인간과에 어떤 차이점이죠. 우리 인간들은 받은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기 보다는 고난을 통해서 미끄러지고 마음이 굳어져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 하는 예가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는 예보다 훨씬 더 많죠. 당연하잖아요. 그렇게 고난을 받는 사람들 가운데 소수만이 그 고난을 믿음으로 반응해서 그래서 고난을 받으면서 거기에서 예수님과 하나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해서 이제 그 예수님에 참 사랑과 은혜를 배워가는 것이죠. 하나님에 참 사랑과 은혜를 배웠죠. 근데 예수님은 그런 점에서 달르셨다 이거죠. 어떻게 받으신 고난을 통해서 미끄러지시거나 강팍해 지시거나 하나님께 거스리고 싶은 욕망이 생기거나 그러지 않고 받으신 고난을 통해서 그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게 무엇인지를 배워 나아가신 거죠. 그러니깐 하나님에 아들이시라도 사람에 몸을 입고 그 한계 안에 갖혀서 이 세상에 사신 것은 하나님이시지만 처음 경험이였습니다. 그 처음 경험은 어떤 의미에서 성령니도 경험해 보신적 없고 성부 하나님도 경험해 본적 없는 독특한 경험을 하신거죠. 그 그런 경험을 통해서 많은 고난을 받으신 거죠. 멸시와 천대 욕 핍박 그런 것들을 다 당하신 거죠. 그런 것들을 통해서 뒤로 물러가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그런 것들을 통해서 아들이 아버지와 가지고 있는 관계가 정말 아름답게 승화되고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아들로서 아버지에게 가지고 있는 사랑과 그리고 당신이 거기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뿐만 아니라 당신에 순종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셔서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순종에 이르게 하고자 하는 당신에 구원에 계획에 충실한 삶을 사실 수가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오늘날 고난을 당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셨던 그 경험을 목상하고 그 경험을 자신에게 적용하며 어떻게 고난이 왔던 지간에 그 고난을 자신에 십자가로 지고 그리고 자신에 인생길을 걸어가려고 할 때에 자기도 아버지와 놀랍게 가까워 지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고난을 통해 그러하셨던 것처럼 자신도 그걸 배우게 되는 거예요. 그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면서 자신에 고난에 때를 지날 때 성부 하나님과 가까워 질뿐만 아니라 성령님이 이를 도와주시기 위해서 역사하시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계셨을 때에 그 심정을 깊이 깊이 이해하도록 만들어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와도 말할 수 없이 가까워지고 그 분을 이해할 수 있겠끔 그래서 그분을 본 받아서 하나님에 형상을 가진 자로서 온전한 자가 되게 하는 훌륭한 원동력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이 이런 삶을 매일 매일 살아가고 더 온전한 사람 온전한 성도로서 하나님 앞에 갖춰서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없이는 그리스도 바라보는 신앙 없이는 누구도 온전해 질수 없는 것이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