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 7일 새벽예배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4-15).
여기에 이 성경 구절에서 우리에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바라보아야 할 이유가 분명해 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하신 분이시거든요.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신자든지 간에 예수님을 아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어요. 그게 어떻게 보면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신데 우리는 왜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님만 알아야 된다고 그러는가 심지어는 우리에 신앙에 척도 그 자체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표현이 되는가. 궁금하지 않아요? 삼위일체 하나님이신데 2위이신 예수님께 집중되어 있는가 하죠. 근데 이게 우리 맘대로 정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신 거라 이 얘기죠. 그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삼위일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특히 아버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신 거라는 거죠. 그랬기 때문에 그 예수님이 사람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죠. 그래서 선지자나 혹은 죄 정도를 통해서 겨우 들려지던 하나님에 관한 지식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관한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에 몸을 입고 오심으로써 눈으로 볼 수 있겠끔 만져 볼 수 있겠끔 우리가 느낄 수 있겠끔 아주 보다 분명하고 구체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 그분이 사람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같은 인간으로서 어떻게 주님을 경외하고 믿고 살아야 할 것이며 죄와 유혹이 많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인가 하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이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것이 비교적 모호한 부분이 있었는데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옴으로써 그 빛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리시기를 하나님 자신이 기뻐하셨단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요구에 대해서 예수님 자신이 뭐라고 말씀 하셨냐 하면 나를 본 자는 이미 아버지를 보았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나에게 아버지를 보이라고 하느냐? 나를 믿는 자는 곧 아버지를 믿는 자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바로 그거거든요. 그러니깐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봄으로 아버지를 가장 잘 알수 있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보여 주어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버지를 직접 보여주면 더 잘 믿을 것 같아도 그거는 계시사적으로 거꾸로 돌아가는 거란 말이죠. 그러니 더 어려운 거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면 가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아주 분명한 인식을 갖게 되는 거죠. 그러니깐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에수님께 치우쳤느니 어쨋느니 하는 그런 이야기하고 거리가 먼 이야기다 이런 뜻이죠. 그러면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이 도대체 뭔가.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 하는 그것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적인 본지를 안다는 것이에요. 즉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의 본질을 이해하게 된다는 거. 그것은 찬란하게 뿜어져 나오는 빛줄기와 같아서 눈부시죠. 그 눈부셔서 아 눈이 부셔 그리고 무릎을 꿇는 것이 뭐냐 하면 faith 믿음이란 말이죠. 믿음. 그리고 그렇게 믿게 될 때에 어떤 삶을 살게 되냐하면 하나님에 말을 따라서 순종하는 삶을 살고 싶어 지는거다. 그러니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고통에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데 있는데 그것을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모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모든 고통들이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신자들에 의무가 뭐냐 하면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알아가는 거예요. 그것은 곧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가는 것과 동일한 것이에요. 아무거나 알아가는게 아니라 사람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적 본질을 알아가는. 그것은 그에 인성 속에 감추어져 있어요. 그래서 그 분이 먹고 마시고 이 세상에서 죄인과 함께 생활하시고 살아가시던 그 모든 삶에 과정 그 말씀 속에 깃들여져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보는 거죠. 아 그 뭐 이야기하면 길지만은 새벽시간이니깐 이해가 명쾌하게 되도록 단 하나에 예를 들어 드릴께요. 단 하나. 배산에 광야에서 거의 기진하게 된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축복하셔서 그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시잖아요. 그죠 그것은 떡을 가지고 사람들에 나누어 주시고 당신도 잡수시고 사람들에게 먹게 하시고 이거는 사실 어떻게 보면은 인간에 일이 잖아요. 인간에 일이 잖아요. 근데 그렇게 떡을 먹은 사건 속에서 우리는 신적 본질을 보는 거예요. 예수님에 신적 본질을 첫째는 뭐냐 하면 누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가지고 한 없이 퍼서 그 많은 사람들에게 단지 하늘을 우러러 축사 하셨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런 기적을 베푸실 수 있을까? 그래서 떡을 먹고 물고기를 나누어 먹는 장면에서는 사람이시지만 하늘을 우러러 그렇게 축사하시는 장면에서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신적 본질을 지니신 분이시라는 사실이 이게 이해가 되는거죠. 그러면은 그분이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이 정말 전지전능하신 아버지시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죠. 또 하나는 뭐냐하면 그렇게 먹고 떡을 떼고 물고기를 먹는 것은 사람에 일이지만 그 이면에 뭐가 있냐면은 허기지고 주린 백성들을 향한 말할 수 없는 연민. 그거를 느끼는 것 자체는 인간이신 예수님의 마음과 표정을 통해서 나타나지만 그것을 통해서 뭘 보냐면은 신적 본질을 보는 거예요. 어떤 본질 자기에 백성들은 긍률히 여기시는 그들을 굶주림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하나님에 말할 수 없는 연민 긍률을 보게 되는거에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리시면서 시를따라 때를따라 그들을 먹이셨던 그 아버지의 그 성품을 예수님에게서 보는거에요 그런 신적 본질을 전능하심과 그 긍률이 여기시는 신적 본질을 보는거에요. 그때에 하나님을 향해 우러나오는 이 찬양은 단순이 2위이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독점적인 찬양은 아니라는거에요. 이렇게 하나님을 배워 가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에 가장 큰 의미가 뭐냐 하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고 십이장으로 넘어가게 되면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거예요. 한번만 생각하는게 아니라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 신자에 의무야. 그게 왜? 하나님 아버지도 생각하고 성령님도 생각해야지 왜 예수님만 깊이 생각하냐 이거죠. 그리스도 예수를 깊이 생각하면 그것을 통해서 아까같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적 본질을 이해하게 되는 거에요. 그거를 통해서 삼위에 하나님 모두를 높혀 드리고 찬송할 믿음이 생겨나게 되고 순종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똑같은 논리에요 그래서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에 강팍함을 인해서 불순종하게 되고 그 불순종을 인해서 원망하는 마음 불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약속된 안식에 못 들어가잖아요. 근데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그런게 없느냐? 우리에게도 정도에 차이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마음이 강팍해지는 때가 있고 그래서 그래서는 안되는데 하나님을 원망하는 큰 죄에 빠지는 때가 있고 그래서 우리에 영혼이 갈 곳을 모르고 방황하는 때가 있어요. 그리고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안식을 참으로 누리지 못하고 그리고 고통하는 때가 있다는 말이에요. 그때에 대한 해결책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은 우리에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바라보는것.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 어떻게 도움이 되느냐? 그 신적 본질을 깊이 이해하게 된다 이거죠. 근데 그러한 관찰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신적 본질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우리를 체유하시는 분이시다. 이 체유하신다 라는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그런 뜻이에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그런 뜻이에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시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당신이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도 죄는 없으셨지만 그 시험에 진 적은 없으셨지만 그러나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에 인간에 시험을 받는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시는 거죠. 근데 우리가 시험을 유혹을 받을 때 이러한 이치를 아는 것은 무한한 위로와 힘을 줘요. 무한한 위로와 힘을 줘요. 어떤거 (찬송) 절대로 우리에 힘으로는 이 금욕과 시험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다만 싸울 뿐입니다. 근데 그 싸우는 것이 얼마나 어린 아이처럼 연약한지 몰라요. 그때에 주님도 죄는 없으셨지만 우리처럼 시험과 환란을 당하시고 유혹도 받으셨죠. 그렇기 때문에 지상에서 당신처럼 살아가려고 하는 모든 신자들에 연약함을 아시고 당신이 시험을 당하시고 고통을 당하신 것처럼 환란과 시험 가운데 있는 우리들을 그 심정을 가장 잘 아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놓아 주실 것이다. 그 믿음이 우리에게 얼마나 커다란 위로가 되는지 몰라요. 만약에 예수님이 사람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고 할꺼 같으면 우린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이런 위로를 받는 것이 정말 쉽지 않았을 꺼에요. 근데 생각하면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에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그럴때에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낮아지심 높아지심 모두를 생각하는 거거든요. 그렇지만 우리가 시험에 들었을 때는 특별히 그분에 지상 생애를 많이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거기에서 많은 위로를 얻게 되는 거예요. 왜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계시다. 주님이 우리를 긍률히 여기고 계시다. 그런 생각과 마음을 아주 분명하게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마음에 강팍함을 버리고 그 안식에 들어갈수 있도록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