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66
목 차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라(시 66:1-2) 1
주의 크신 일로 찬양하라(시 66:3-4) 5
인생에게 행하신 일(시 66:5-6) 9
하나님의 이중적 통치(시 66:7) 12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시 66:7-9) 16
은을 단련하심 같이(시 66:10) 21
물과 불을 통과하게 하신 하나님(시 66:11-12) 24
환란 때에 서원을 갚음(시 66:13-15) 29
영혼에 행하신 일(시 66:16) 33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실 때(시 66:17-19) 38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시 66:20) 41
시편56편 강해 1
시편66편 강해 1
시편67편 강해 1
시편67편 강해 1
시편67편 강해 1
시편67편 강해 1
시편66편 강해 1
시편66편 강해 1
시편66편 강해 1
시편66편 강해 1
시편66편 강해 1
시편66편 강해 1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라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발할지어다
그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시 66:1-2)
본문해설
시편 66편은 전체적으로 찬송시라고 분류됩니다. 표제에는 시인이 누구인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대부분 다윗의 시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시편 66편 초두에서 시인은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발할지어다”라고 찬송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땅’은 사람이라는 말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땅’을 의미하는 ‘에레츠’($r,a)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발할지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만물의 찬송
시편 여러 곳에서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노래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향한 찬송과 인간이 아닌 자연만물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 사이에는 아주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는 자기의식 속에서 의지를 가지고 찬송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찬송을 통해서 더 많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자연만물의 찬송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그들의 의식 속에서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작용들은 영혼을 가진 인간만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만물은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께 찬송하는 것일까요? 모든 자연만물이 자신을 통해 하나님과 세계 사이에 있는 관계를 드러냄으로써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관계가 되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가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남기면 예술작품은 의지도 없고 생각도 없지만 그 작품에는 작가의 손길이 묻어있습니다. 그래서 작품을 보는 사람들마다 결국 그 작품을 지은 작가를 생각하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은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에게는 이것이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발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자연의 모든 만물들까지 일깨워서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발하라고 촉구하는 것은 결국 자기 안에 이미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가득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이뤄진 하나님의 나라가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게 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모든 세계 속에서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가 자신의 삶 도처에 있고, 은혜를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가 잘 발견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발할지어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자기 안에 가득 찬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감격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름의 영광을 찬양
시인은 이어서 “그 이름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라고 촉구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그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라고 했을까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세계를 통해 당신을 보이시되 직접 보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과 맺으시는 관계를 통해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고 알게 하십니다.
이제 봄이 옵니다. 갑자기 오늘 내일 추워진다고는 하지만 완연한 봄은 대세를 거스를 수가 없습니다. 봄은 결국 봄볕과 함께 찾아옵니다. 봄볕이든 가을볕이든 모두 태양으로부터 내려오는 빛입니다. 봄이 오면 얼음이 녹고, 꽃망울이 터지고, 새싹들이 자라고, 시냇물이 흐르는 변화들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태양 안에는 시냇물도 없고 꽃망울도 없고 얼음도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태양빛이 이 땅에 있는 모든 만물과 관계를 맺을 때 그 모습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찬란한 영광은 하나님이 피조물들과 관계를 맺으실 때, 바로 그 관계 안에서 나타납니다. 피조물들과 관계를 맺고 피조물들 안에서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드러나게 될 때,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모든 피조물들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그 모든 피조세계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시인은 바로 인간들과 만물들이 아름답다고 인정하고 높이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은 하늘에 계시지만 당신의 이름을 이 세상에 두셔서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 용기와 위로와 힘을 얻도록 만드셨습니다. 한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태도와 완전히 일치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한다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든 만물과 사람들 위에서 높이 여김을 받는 광경을 보면서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그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영광이 어떠한지를 알도록 하나님께 찬송을 돌리라고 시인은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는 티끌 같이 미약합니다. 이슬같이 이 땅에 잠시 태어났다가 정오의 햇빛에 사라지듯이 얼마 후면 사라져가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가장 아름다운 이름, 영원토록 계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과 모든 만물 위에 높이 여김을 받도록 이바지하며 산다면 티끌 같은 인생이라도 티끌 같은 인간과 관계를 맺고 계신 영원하고 존귀하신 하나님 때문에 인생의 복락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크신 일로 찬양하라
“하나님께 고하기를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주의 큰 권능으로 인하여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찬양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할지어다(셀라)”(시 66:3-4)
본문해설
본문의 “하나님께 고하기를”이라는 구절은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하나님께 말하라.”라는 명령형으로 “하나님께 말하거라. 하나님께 말씀드리거라.”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말하라’는 것은 소리로서 하나님을 찬송하라는 뜻입니다.
주의 일과 권능이 하나님께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 당신을 찬송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사람은 그렇게 하나님의 성품을 노래하고 말하는 과정을 통해 영혼의 변화와 은혜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높이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에 뜻대로 살 것입니다.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라는 구절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통해서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지만 우리의 감각적인 기관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통한 지성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파악하고 이해하며 사랑하고 순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보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감각기관으로 보고 맛보고 만지는 것처럼 인식하게 됩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직접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더 보편적인 방법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지성으로 직접 바라봄으로써 아는 것은 주님의 은혜가 늘 느껴지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것들은 착각을 일으킬 수 있지만 믿음으로 보는 것들은 다른 누군가가 뒤집을 수 없는 확실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 보편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이든지 멀어진 사람이든지, 언약백성이든지 언약백성이 아니든지 간에 모두의 눈에 보입니다. 모두의 눈에 보이는 일들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엄위하신 하나님
본문의 ‘엄위’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로브’(br)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큰’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위대하신지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크기나 규모적인 면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비교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일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자연의 질서 속에서 행하시는 여러 가지 놀라운 일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자연의 커다란 변화들과 일상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자연적인 기적들이 하나님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서 이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선악간의 일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섭리는 간접적으로나마 우리에게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자연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본다고 할 때,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자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흔적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공의로써 마땅히 베풀 자에게 베풀고 심판할 자에게 심판하신다는 소극적인 지식 이상을 전달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매우 분명해서 하나님을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는 지식입니다.
이 모든 세계와 자연의 질서와 이적은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선악 간에 심판하신다는 정도의 지식을 가지지만,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도덕적인 성품을 발현하는 놀라운 계시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온 땅에 비가 골고루 내리는 것을 보면서도 ‘하나님은 선인뿐만 아니라 악인도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도덕적인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 때 그 계시의 풍부함이 얼마나 엄청났는지를 생각하셔야합니다.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인정하고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서 우리에게 제시된 구원의 계시들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만 하면 인간으로서 모든 것을 다한 것입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고 사랑하고 그분을 통해서 나타난 구원계시를 받아들여서 순종하며 살면 다른 지식은 모르더라도 탁월한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물의 이름, 하늘의 별자리까지 모두 헤아리고, 그 원수의 종류까지 말할 수 있으면서도 그것을 내신 이를 모르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그 모든 것을 말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내신 이를 알고 그분을 순종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훨씬 더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예를 들면 내 아버지를 생물학적, 의학적, 심리학적으로 분석해서 우리 아버지는 이런 인간이고 저런 인간이라고 하면서 그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모르고서라도 그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식이 훨씬 더 행복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사는 것처럼 우리도 그러합니다. 마치 하나님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을 대체할 수 있다거나,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기만 하면 그런 지식이 무엇이 쓸모가 있겠느냐고 생각하는 것은 둘 다 현저히 인간의 교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주님을 발견하고 그를 알고 그를 사랑하여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이 날마다 더 새롭게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결국 행복이라는 것은 관계의 행복인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나와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발견된 새로운 사실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어서 주님과의 관계가 실질적으로 새로워져야합니다. 관계가 새로워진다는 것이 특별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시므로 우리를 대하시는 태도와 경륜에는 변함이 없지만,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써 그분이 어떠하심을 알고 그분께 맞게끔 쇄신되어 온전한 관계로 돌아가게 될 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더 많이 우리 속에 역사하게 되고 결국은 관계가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또한 시인은 “주의 큰 권능으로 인하여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원수가 복종하는 것에는 어떤 방식이 있습니까? 둘 중에 하나입니다. 주님의 원수였는데 사랑의 감화에 의해서 복종이 되든지, 아니면 하나님이 하신 위대하고 큰일을 보면서 그분의 존재의 위대하심 앞에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굴복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모든 원수 앞에서도 하나님의 위대함이 보이는 이유를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한 결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혹은 분노는 하나님의 성품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공의라는 성품이 있지만 진노는 인간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서 발현되는 것으로, 공의 후에 경험되는 하나님의 성품의 또 다른 측면입니다. 그러므로 원수의 복종은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온 땅’이 나옵니다. ‘온 땅’은 일차적으로는 거민들을 뜻하고 확장되어 자연의 만물들까지 포함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인간들이 이런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주님을 찬양하며 그리고 주의 이름을 찬양할 것입니다.”라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통해 당신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셔서 이 땅의 인간들과는 질적으로 비교될 수 없는 탁월하고 위대하신 분임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순종하고 의지하며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고 이끄십니다.
인생에게 행하신 일
“와서 하나님의 행하신 것을 보라 인생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
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되게 하셨으므로 무리가 도보로 강을 통과하고
우리가 거기서 주로 인하여 기뻐하였도다”(시 66:5-6)
본문해설
시인은 “하나님이 인생에게 행한 것을 보라” 그리고 “하나님이 인생에게 행하신 것이 참 엄위하다”고 찬송하면서 한 사건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 사건은 다름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걷는 사건이었습니다. 자신들은 경험해보지도 못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의 동기에 모든 후손들이 함께 참회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 신앙입니다. 앞서 시인이 “하나님이 인생에게 행하신 엄위하신 것을 보라”고 노래하는 것은 두 가지 사실을 지칭합니다. 하나는 언약백성들을 사랑하시는 것과 또 하나는 언약백성들을 해치는 애굽의 병사들을 홍해에 수장시키는 사건을 가리킵니다. 홍해에서 일어났던 놀라운 기적은 언약백성들에게는 구원의 축복과 언약백성들을 해치는 이방백성들에게 심판의 위엄을 드러내는 사건이었습니다. 시인과 이 시를 듣고 있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를 건넌 사건으로 함께 데려가서 그 신앙고백에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행하신 크고 위대한 일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었습니다.
공정한 의를 베푸시는 하나님
이러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일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베푸신 놀라운 기적의 동기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언약백성들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공정하게 당신의 의를 행하심으로써 언약백성들을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만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있는 모든 만민들과 백성들을 친히 다스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친히 다스리시고 돌보시고 통치하시는 것을 보여주시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 땅에 있는 이방백성들을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정한 통치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밖에 있는 모든 세계를 통치하는 것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언약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각별한 호위와 은총이 됩니다. 그런 각별한 호위와 놀라운 은총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보여줍니다. 때문에 그의 백성들은 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행하고 그를 의지하며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 땅의 모든 만민들을 통치하시고, 만백성들을 친히 다스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공평과 정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통해 당신의 위엄과 능력을 세계에 나타내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 편에 선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과 모든 나라와 만민을 통치하시고, 그 통치가 그대로 실현될 때 이득을 얻을 수 있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불의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에 그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에 그것이 언약백성들에게 행복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붙어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할 때 어려움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주님을 따르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긍휼과 사랑을 언약백성들에게 보이시고 당신의 위엄과 심판을 이방백성들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따라 걸어가도록 이끄시고 돌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라
우리가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난도 만나고 때로는 인생의 시련도 경험합니다. 때로는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이 들 때도 있고 실제로 하나님이 악인으로 하여금 우리를 괴롭히도록 방치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시인이 시편 73편에서 고백했던 바와 같이 “우리가 손을 깨끗이 하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려고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고 반문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언약백성들에게 하셨던 놀라운 일을 회상해야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갈라 육지 되게 하셔서 자신들을 건너게 하시고, 강을 말리셔서 요단을 건너게 하신 사건을 회상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하나의 물세례를 받은 것을 회고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의 세례를 받아 한 몸을 이루게 된 것같이 그 예표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 되게 하신 물을 건넌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으신 고난과 사랑, 은총이 얼마나 큰지를 날마다 경험해야 합니다. 주님이 자기를 다 버려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의 물세례를 통해 우리로 그리스도의 예수의 몸에 접붙이게 하셨습니다. 때로는 고난을 당하고 모순된 세상에 사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고 계시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의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각별한 섭리가 있어서 우리를 종종 고난을 지나게 하시고 시련의 바다를 통과하게 하실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여전히 지키시고 오늘도 붙드신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몸을 버리시고 하나의 세례로 그리스도의 몸 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중적 통치
“저가 그 능으로 영원히 치리하시며 눈으로 열방을 감찰하시나니
거역하는 자는 자고하지 말지어다(셀라)”(시 66:7)
본문해설
본문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말아야할 이유를 분명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뒤에 나오는 “열방을 감찰하시나니”라는 뜻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스라엘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닌 나라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는 온 나라와 세상을 통치하시되 당신이 직접 권능으로 다스리고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거역하는 악인이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선택한 언약백성들을 직접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글속에서 “인간이 하나님께 거역하는 것은 교만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거역의 동기가 자기 사랑이지만, 자기사랑은 교만을 통해서 실행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살아라.”라고 말씀하시지만, 인간은 그렇게 살지 않고 불순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판단도 있고 나의 판단도 있지만, 당신의 판단보다는 나의 판단이 훨씬 더 훌륭합니다.”라는 판단의 교만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판단은 가치의 질서를 정복하고 결국 자기사랑을 통해서 방출되는 것입니다.
언약백성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방법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향한 통치를 중심과 주변으로 나누어서 설명하시는 것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저가 그 능으로 영원히 치리하시며 눈으로 열방을 감찰하시나니” 이것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권능으로 통치하시는 것을 그저 중복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76편의 시뿐만 아니라 모든 시편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통치에 관해 이런 방식으로 설명을 합니다. 즉, 중심에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통치가 있고, 그 중심에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있습니다. 이 언약관계는 엄중한 의무와 책임, 또 한편으로 특권을 도입합니다. 언약국가는 큰 나라, 강한 나라를 만들고, 총칼과 병기를 제조해서 군대를 무장시키고, 황금과 보석으로 왕국을 꾸미는 데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국가로서의 가치는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온전하게 실현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과 은혜로 당신의 백성들을 당신의 도덕적인 통치에 복종하게 하고, 그것을 기뻐하는 민족이 되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그 민족 안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언약백성의 아름다움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언약백성들을 통치하시는 방식입니다.
열방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께서 열방을 통치하시는 방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열방에 있는 백성들에게는 거룩함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용도로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열방도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고 죄를 짓는 일들이 심해지면 하나님이 그들을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을 모르는 나라라고 할지라도 이차적으로나마 하나님의 법에 부합하게 살면, 하나님이 일반적인섭리 속에서 그 나라에게 복을 주기도 하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에서 로마의 오현제(五賢帝)를 거론하면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상당히 바른 길로 나라를 이끌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황제들에게 복을 주셔서 나라가 강해졌다는 사실을 언급한 것과 같습니다. 세상나라를 향해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기대하시는 것과는 다른 기대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교만하고 악을 행하는 나라에 대해 참으시지만, 결국 하나님이 심판하셔서 당신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나라마다 각각 용도와 쓰임새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과 겸손의 미덕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율법을 통해 발견하는 하나님의 통치와 복음을 통해 발견하는 하나님의 통치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통치는 발견됩니다. 우리가 악을 행할 때 양심의 강력한 송사와 율법의 정죄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그것이 죄라는 것을 보여주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핑계 할 수 없으리만치 분명하게 보여주지만, 그 이상을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같은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법은 율법을 이룰 수 없는 인간을 사랑으로 감화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시고, 마음을 먹어도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할 수 있도록 은혜를 부여주십니다. 그래서 그 일을 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약백성들만이 아니라 열방의 백성들 가운데 누구라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은 자고하지 말아야 합니다. 열방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악을 행하는 자들을 심판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겸비해져야 합니다. 언약백성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자비와 은총을 베푸셔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겸비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모든 의무를 다 감당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각각 다른 것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것들 속에 공통적으로 배어있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사랑과 겸손입니다. 그 두 가지가 배어있지 아니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덕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되 겸손이 없다면, 자기 힘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 공로를 자신에게 돌릴 것입니다. 공의를 행하되 겸손이 없으면, 자기가 하나님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거룩하게 살되 겸손이 없으면, 바리새인들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사도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내가 자랑할 것이 있다면 약한 것을 자랑하리니 약한데서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기 때문이라.”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기 때문이라 고백합니다. 주님 앞에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줄 아는 진지한 엎드림과 고백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며 사랑입니다.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
“저가 그 능으로 영원히 치리하시며 눈으로 열방을 감찰하시나니 거역하는 자는 자고하지 말지어다(셀라)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 송축 소리로 들리게 할지어다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시 66:8-9)
본문해설
여기에 ‘셀라’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음악적인 고조를 나타내는 단어일 것이라고 봅니다. 예를 들면, 낮은 단조로 노래를 부르다가 갑자기 조바꿈을 하는 것을 표시하는 음악적인 부호라고 생각을 합니다. ‘셀라’는 읽지 않는 것이 원칙인데, ‘셀라’를 중심으로 앞부분에는 세상의 교만한 열방과 인간, 거역하는 무리들을 감찰하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뒤편에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언약에 부종하여 살려는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주님의 인자하심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 송축 소리로 들리게 할지어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송축하되 큰 소리로 송축하라는 것과 충심으로 송축하여 인간들에게 뿐만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에게까지 너의 중심이 열납되게 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올려야 할 찬송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경배할 때 거기에서 더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경배가 ‘충심적이지만 소수의 사람들이 모인 경배냐? 아니면 가식적이면서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경배냐?’라고 하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전자가 되겠지만, 그것이 충심적인 경배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할수록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경배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계량적 성격입니다. 성질적으로 완전하도록 부르시고 계량적으로 완전하도록 부르셔서 당신이 이 세상에서 구원하고자 선택하신 사람들 모두가 실제의 삶에서 당신을 높이고 경배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시는 것입니다.
찬송의 제목 1: 영혼을 살려두심
본문은 당신을 송축하는 언약백성들에게 찬송의 제목 두 가지를 주셨습니다. 첫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살려두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시인의 고백 속에서는 이러한 몇 가지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자신들이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 있는 도우심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두 번째는 이러한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나무를 살아있게 하는 것은 물을 주고 비료를 주고 햇빛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살아있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직접 우리와 함께 관계를 가지시고 당신 자신의 힘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실 때만 우리는 살아있는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에 나타난 권면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살려두셨다는 것은 언약백성의 진정한 생명이 영혼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생명’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많은 신학자들은 인간의 영혼의 생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존성을 본뜬 것이라고 봅니다. 나무가 있는데 살아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있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 스스로 살아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스스로 환경에 반응하고 빨아들인 물과 받아들인 햇빛, 공기를 자신을 위해 공급함으로써 생명을 유지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생명체의 핵심입니다. 외부에 대한 반응과 자기조절 작용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자체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피조물들의 모든 생명은 그런 점에서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본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있는 큰 나무보다는 살아있는 작은 풀이 아름다운 이유가 그것입니다. 죽어 있는 나무속에는 하나님의 자존성을 흉내 내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유한한 우리의 시각으로 보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모든 물질 너머에 계신 하나님이 힘으로 모든 사물들을 살아있게 하지 않으신다면 어느 사물도 하나님의 자존성을 본떠서 그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만물들의 성장과 피어남, 아름다운 변화,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 얼마나 아름다운 것일까요? 하나님은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시기도 하지만, 만물 속에 있는 당신의 아름다움을 모든 인간들 보다 가장 탁월하게 감상하실 수 있는 최고의 심미자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들을 보면서 당신 자신의 자존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그것이 한없는 아름다움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을 가지면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게 되지만, 지식이 없으면 그저 지나가는 풍경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한 자존성을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본뜬 것이 인간의 영혼입니다. 물질적인 것들은 하나님의 자존성을 본뜨지만 물질과 물질들을 사용하는 과정을 올바로 통찰하게 되면 보입니다. 그러나 영혼은 그런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물질의 자존성을 생각할 때는 하나님이 생각나지 않지만,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것을 생각할 때는 그것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저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은 육체보다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더 많이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이 인간 존재를 창조하신 목적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살려두시고 생명을 누리면서 살게 하신 것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최고의 이유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언약백성의 영광은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백성의 영광은 육체에 의해 영혼이 휘둘리고 억압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영혼이 하나님과 교통하며 주님이 이 땅에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세상이 너무 부패해서 그것이 비현실적이고 너무 고고해보여도 그러한 것을 간직하면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창조하신 커다란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과 시련, 모순된 현실 속에서도 영혼의 충만한 생명과 살아있음을 언약백성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가슴이 터지도록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의 죽음의 문제를 이야기 하는 것과 얼마나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흔히 영혼이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환경이 어려우면 영혼도 곤고해지고, 환경이 좋으면 우리의 영혼도 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마음이 영혼의 생명에 의해 다스려지지 않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세상 사물들에 의해 모든 판단이 지배를 받고 흔들리고 꺾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시며 “세상을 이김은 이것이니 믿음이니라”고 하신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찬송의 제목 2: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심
시인은 두 번째 찬송의 제목을 하나님 앞에 올립니다.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여기에서 ‘실족’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의도적으로 넘어지기 위해 발을 딛는 것, 자신의 몸을 던져 죽기 위해 벼랑에서 미끄러지는 것, 자신의 몸을 던지는 것을 가리켜 ‘실족’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실족’은 문자 그대로 걸음을 놓치는 것입니다. 자기는 옳게 디딘 줄 알았는데 그것이 옳지 않아서 발목을 접지르거나 넘어지거나 미끄러지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배에서 내려서 큰 짐을 들고 가는데 내가 가야 할 곳이 저 멀리 보이고 길이 있는데 굉장히 가파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바닷가로 걸어가면 직선 코스이고 길이 평평합니다. 그래서 짐을 들고 그 길을 가기 시작했는데 어느덧 깜깜해진 것입니다. 더 이상 짐을 들고 갈 수가 없어서 길가에 짐을 두고 갔다가 다음날 와서 가져갔습니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았는데, 튼튼한 길을 걸어갈 때는 경사가 높든지 어떻든지 그저 걸으면 됩니다. 어디에 발을 딛을지 생각하지 않고 그냥 걸어가면 됩니다. 그런데 바닷가를 걸으려니까 수많은 조약돌들이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어디에 발을 딛을지를 생각하면서 걸음을 정확하게 옮겨야 되는데 걸음 속도가 땅을 걷는 것의 3분의 1도 안 됩니다. 그 때 제가 깨달은 것은 ‘평평한 땅을 걸을 때는 생각 없이 발을 내딛지만 조약돌로 가득 찬 바닷가를 걸을 때는 참 힘들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기는 걸음을 제대로 옮겨 놨다고 생각했는데 돌 위에 이끼가 있다든지, 발을 옮겨 놓고 체중의 절반을 싣고 보니까 밑받침이 튼튼하지 않아서 돌이 뒤집어 진다든지 할 때 실족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실족하기 위해서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실족하는 경우는 두 가지입니다. 자기가 옮긴 걸음에 대한 판단이 잘못되거나 몸의 균형을 잡을 수 있는 힘을 상실할 때 넘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실족치 않도록 붙드시는 방법은 우리가 인생길에 걸음을 옮겨 놓을 때 어리석음에 붙잡혀 그릇 판단하지 않도록 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 안에서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지혜를 주십니다. 그러나 은혜에서 미끄러져 부패하게 되면 이런 판단력이 흐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의 부패는 가장 먼저 총명에 영향을 줍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깨닫게 하는 판단력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이런 찬송가의 구절이 있습니다. “정결한 맘 정결한 맘 그곳에서 신령한 빛 비추오니 이 보다 더 원하는 것 정결한 맘 주옵소서” 정결한 그 곳에서 총명을 가늠하게 해주는 순전한 빛이 비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에 힘을 주셔서 올바르게 균형을 잡아서 우리로 하여금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십니다. 인생의 최고의 보험은 보험회사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주님을 잘 믿고 의지하면 커다란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은을 단련하심 같이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같이 하셨으며”(시 66:10)
시련에 대한 신앙적 해석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시련과 어려움들을 신앙의 시각으로 해석해 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신앙입니다. 신앙적 해석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세계뿐만 아니라 자기 인생 전체를 주관하시며 섭리하시기 때문에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면 일어나지 않는다는 믿음에서 옵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신앙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신앙이 충만해지면 이런 해석이 잘되고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집니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요셉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과거에 요셉을 팔았던 과오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자기들을 지키고 있던 벽이 무너지는 것 같은 커다란 두려움과 위기를 느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 가운데 거짓말로 “아버지가 당신더러 우리를 잘 돌봐주라고 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요셉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의 자녀들까지 내가 돌볼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당신들은 나에게 악을 행하였지만 하나님은 그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죽어가는 만민들을 살리려고 나를 애굽의 총리로 삼으셨습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렇게 해석해낼 시각이 없었다면 그는 긴 세월 동안 고생하고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게 만들었던 형들이 이가 갈리도록 미웠을 것입니다. 어린나이에 부모와 떨어져서 얼마나 많은 세월을 서러움 속에서 지냈겠습니까?
인생을 살아갈 놀라운 힘은 신앙적인 해석 속에서 나옵니다. 신앙이 깊어지면 해석의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에게 복수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큰 계획을 보며 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 가지고 있는 해석의 능력입니다. 이런 해석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커다란 섭리 속에서 나에게 이런저런 괴로움과 고통을 주셨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오히려 그 섭리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큰 뜻을 보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성품들을 하나님의 돌보심 속에서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은과 같이 단련하심
시인은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라고 고백합니다. 이것도 공동체적인 기도입니다. 은을 연단한다는 것은 이것을 말합니다. 지금은 첨단기술이 많이 발달했지만 옛날에는 용광로에서 은을 녹였습니다. 은은 쇠보다는 낮은 900℃정도에서 녹인다고 합니다. 쇠가 1500℃정도에서 녹고 은은 900℃정도의 온도에서 녹는데 녹으면 액체상태가 됩니다. 액체 상태가 되어서 그 속에 들어있던 성분 중 위에 떠오르는 가벼운 것들은 태워버리고 무거운 것들은 가라앉혀서 따라냅니다. 이렇게 은의 불순물을 걸러내는데 쌀 씻을 때 조리질 하듯 합니다. 그렇게 굳히고 녹이기를 반복합니다. 이것을 되풀이 하면 할수록 은의 순도는 높아집니다. 순도가 높을수록 은으로서의 제대로 된 가치가 발휘되는 것입니다. 은으로 된 그릇이나 물건을 왕궁에서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그것을 생각하며 이 글을 쓴 것입니다.
이렇게 연단을 할 때 꼭 필요한 것이 불입니다. 시인은 불을 통해 은을 녹이고 찌꺼기를 건져내는 모든 과정이 마치 하나님이 백성들을 더 순전하게 하려고 시련이나 시험을 주시는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표현했던 것입니다. 은은 금속이기 때문에 녹여서 가벼운 것들은 태워버리고 무거운 것들은 가라앉히는 방식으로 정결해지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정결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불 대신 우리에게 시련을 주셔서 우리의 마음이 녹아내리게 하십니다. 그것은 은을 단련하는 것과 아주 비슷합니다. 시련을 통해 우리 스스로가 참으로 가치 있고 중요하다고 여기며 자기를 매몰했던 일들을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안했을 때는 집착했던 것들도 시련이 닥치면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검불 태우듯 태워버립니다. 마음이 단단해져 있을 때는 마음속에 욕망이나 무거운 죄들이 알같이 박혀 있었는데, 마음이 녹아내리면서 자기 안에 못된 것들이 있다는 사실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닥친 시련과 환란은 이런 내 마음에 있는 악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며 하나님 앞에 “내 잘못 때문입니다.”라고 회개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태워지고 빠져나가면서 새 마음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정결하게 되어 새로운 마음이 되기를 은을 계속 연단해서 순전하게 하는 것처럼 하시는 것입니다.
연단의 유익
똑같은 은이라도 불순물이 빠져나가면 그 은은 비싸고 값진 순은이 됩니다. 인간도 똑같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지위의 높고 낮음, 소유의 많고 적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순전한 존재인가 하는 것에 의해 그 사람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순전한 사람이 되고 당신의 성품을 드러내는 거울로 만들어 가시기 위해 끊임없는 연단을 주십니다. 연단은 우리를 정결케 하는 도구이기 때문에 올바른 방법으로 잘 감당한다면 우리에게 커다란 도움이 됩니다.
물과 불을 통과하게 하신 하나님
“우리를 끌어 그물에 들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두셨으며
사람들로 우리 머리 위로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행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 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시 66:11-12)
고통에 처한 언약백성들
10절에서는 연단을 이야기했는데 그 연단은 불로 은을 연단하는 방식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시인은 11-12절에서는 실제로 이스라엘에게 일어났던 정황들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풀어서 주님 앞에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끌어 그물에 들게 하시며”, 그물은 커다란 망을 던져서 물고기나 새를 잡는 도구입니다. 일단 그물에 들어오면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새그물을 많이 사용해서 사냥을 했다고 합니다. 아주 가느다란 실로 망을 짜서 새들이 다니는 길목의 나무 같은데 걸어놓으면 새가 미처 못보고 그물망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들어갈 때는 날아가던 속도가 있어서 ‘콱’ 하고 망에 꽂혀서 앞으로는 빠져나올 수가 없고 뒤로 빠져나와야 하는데, 뒤로 빠져나오려면 깃털이 문제가 됩니다. 깃털이 난 방향과 반대로 나와야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새가 그물에 갇히는 것같이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을 시인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상황 속에 들어가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도 언약백성으로서 이런 한계들을 자주 경험했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다 보면 이렇게도 벗어날 수 없고 저렇게도 벗어날 수 없는 깊고 고통스러운 한계에 직면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속에서 우리를 건져내심으로 우리의 인생을 구원해주실 수 있는 능력이 오직 당신에게만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홀로 당신의 능력으로 우리를 건져내실 수밖에 없다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을 향해 갖는 의존의 마음은 순수해집니다. 내 힘으로도 해결할 수 있고 누구든지 도울 수 있는 일인데 주님이 도우셨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오직 주님이 홀로 도우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분을 전심으로 의존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는 거기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갖는 신앙생활의 모습입니다.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두셨으며”라는 구절은 노예들의 일상적인 생활을 염두에 두고 묘사한 것입니다. 노예들이 등짐을 지지 않습니까? 등짐이 워낙 크니까 이것이 허리 아래까지 내려온 것입니다.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두셨으며”라는 표현은 짐이 무거워서 허리를 못 펴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 보기에 그 짐이 허리 위에 얹어있는 것처럼 보이고, 허리라는 표현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육체의 힘을 상징합니다. 그 허리에 짐을 얹었다는 것은 힘들게 노예 생활을 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닙니다. “사람들로 우리 머리 위로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라고 했는데 이 ‘머리’는 성경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문맥에서도 인격의 상징으로 존귀하게 여겨집니다. 우리가 벗어놓은 양말이나 바지를 밟고 다니는 것도 썩 좋은 것이 아니지만, 남의 모자를 밟고 지나가는 것은 굉장히 커다란 실례로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벗어놓은 모자를 고의로 밟으면 그것은 죽기까지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시로 보았습니다. 일본의 사무라이들에게는 남의 검을 흉보는 것을 마치 그의 아버지를 욕보이는 것과 같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남이 가지고 있는 칼을 욕하는 것은 한번 죽도록 싸워보자는 뜻입니다. ‘머리’라는 것은 존귀를 의미합니다. 시인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는 내 방패 내 영광 내 머리를 드시는 자시니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멸시와 욕을 당할 때 나의 영광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 분은 우리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사람들로 우리 머리 위로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라고 이야기한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짓밟혀서 비참해진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통틀어 고백하기를 “우리가 불과 물을 통행하였나니”라고 합니다. ‘불’은 시련입니다. 강한 시련의 불 가운데를 통과한 것입니다. ‘물’을 통과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시인이 이것을 쓸 때 그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물과 불이라는 것이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경험한 큰 구원을 염두에 두고 기록을 하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물을 통과한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단지 환란을 통과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이것이 세례를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언약 백성들로 물 가운데를 통과하게 하심으로 출애굽의 마지막, 홍해를 건너는 과정을 통해 백성들을 하나의 세례로 묶으실 것을 예표하는 장면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물과 불을 통과하는 일들이 일어날 때는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 같고, 주님이 우리를 홀로 버려두신 것처럼 느껴지고, 큰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지만 마지막으로 시인은 “주께서 우리를 끌어 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어려운 짐을 지게 하신 데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물과 불의 시련,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머리가 짓밟히는 수치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우리를 풍부한 곳에 들이셨다고 찬송을 돌리는 것입니다.
고통을 통해 하나님을 의존함
이것을 통해서 시인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세상에 있는 백성들도 고통을 당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홀로 버려두신 것 같이 큰 고통과 괴로움을 당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커다란 고통과 괴로움을 한 몸에 당할 때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홀로 건져내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가르치시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마음을 갖도록 훈련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탄하고 좋은 길도 주시지만 때로는 어려운 길도 주십니다. 우리가 평탄하고 좋은 길속에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존하면서 살 때도 하나님은 충분히 우리를 도우시지만 때로는 우리를 하나님의 계획대로 더 사용하시기 위해서 시련을 당하게 하시면서 까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에서 이 시련이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구나. 평탄한 길을 주시면 누가 마음에 깊은 절망과 고통을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겠는가?’라고 반문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를 누리면서 살지 못할 때 시련이 오고 물질을 빼앗기고 건강이 상하고 가족들이 죽음의 사선을 넘나드는 고통이 오면 겨우 하나님께로 돌아올 마음을 갖게 되지만, 우리가 은혜 안에서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영으로 기도할 때는 기도의 제목들이 우리 육체의 행복을 중심으로 편성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이 넉넉하고 평화롭고 모자라는 것이 없어도 그 속에서 주님의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보게 되면 먹을 것이 있고 입을 옷이 있고 좋은 집이 있다고 해서 자신의 모습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의 모습이 왜 이것 밖에 안 될까?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이 오늘 오셔서 나의 내면의 세계를 보시면 얼마나 실망하실까? 이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에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것일까?’ 이런 고민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됩니다. 이때 우리들은 오히려 시련과 환란을 만나서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보다 더 절실하게 하나님만이 나의 내면의 세계를 고치실 수 있고 은혜를 부어주실 수 있다는 마음으로 더욱 많이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환란을 당했다고 해서 모두 주님을 의지하며 매달리는 것도 아니고, 평안하다고 해서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성숙한 신앙은 물질적으로 환경적으로 전혀 동요함이 없는 평안함 속에서도 자신의 영혼과 영적인 문제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하고, 다른 사람들의 상황을 보면서 마음을 찢듯이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을 충분히 의존하는 사람들로 다루어 가십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 이런 신앙의 경지를 터득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고, 또 터득했다고 할지라도 올바로 마음을 지키면서 선한 의지로 살지 않으면 부패하게 됩니다. 우리의 약함은 하나님의 약함이 아니라 약한 것을 통해서 주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가짐으로써 주님의 강함을 보게 하기 위하여 주님이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주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사는 신앙의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환난 때에 서원을 갚음
“내가 번제를 가지고 주의 집에 들어가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니
이는 내 입술이 발한 것이요 내 환난 때에 내 입이 말한 것이니이다
내가 수양의 향기와 함께 살진 것으로 주께 번제를 드리며 수소와 염소를 드리리이다”(셀라)(시 66:13-15)
본문해설
본문은 시인이 과거의 은혜를 회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약속한 헌신의 제사를 드리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번제란, 제사의 종류를 일컫는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의 방식에 따른 구분입니다. 태워서 드리는 제사를 번제, 흔들어서 드리면 요제, 곡식과 함께 드리면 소제 등으로 구분하였습니다. 특별히 번제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하여 드리는 감사의 제사가 중심을 이룹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태워 드리는 제사를 올립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시인의 전적인 헌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짐승이 불에 타면 연기가 되고 재가 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주님을 위해 헌신의 제물로 바치겠는 의지를 표현합니다.
은혜의 방편, 회상
시인은 과거를 회상하면서 다음 두 가지 생각이 마음속에 불일 듯 일어납니다. 하나는 환난 날에 하나님 앞에 서약했던 것, 또 하나는 서약을 따라 자신을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께 올려야 되겠다는 헌신의 마음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회상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매일의 현실에 대해 만족스러워야만 겨우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이 없어도 가능한 일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해석의 신앙입니다. 과거를 돌아보면서 과거에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베푸신 일들이 어떤 일이었는가? 베푸신 일들이 오늘날 내가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데 어떤 커다란 은택이 되었는가?’ 이것을 잊지 않고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할 때 오늘을 살아가는 현실을 해석하는 힘이 거기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런 해석의 작용과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견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땅을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이제 짓지 않은 집에서 살고 너희가 가꾸지 않은 포도원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그런데 너희들이 오래도록 잊지 말아야할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너희가 의로워서 가나안땅을 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하나는 그 땅의 백성들이 너무 패역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땅을 주셨다는 것과 또 하나는 조상에게 약속하신 당신의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땅을 유업으로 받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주민들을 거론하시는 이유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약속을 거론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자비가 당신이 언약한 백성들에게 신실하게 시행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자비, 이 두 가지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공로 없이 누리게 한 근거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반응 역시 주님을 향한 두려움과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참다운 까리따스의 사랑이면, 그는 필연적으로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지난날을 회상하여 그분을 송축하면서 오늘 나의 인생이 그분의 수중에 있고 그분을 의지하는 자에게 당신과의 언약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를 갖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잊지 말라.”는 말씀을 수없이 반복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과 시련을 만날 때마다 즐겨 행하던 은혜의 방편이 회상이었습니다. 저 멀리로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는 구원의 역사와 가나안 정복에 이르기까지 광야 생활의 여정을 회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회상을 통해서 “하나님만이 우리를 지키시는 신실하신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올바른 회상, 해석의 신앙
우리 모두 감격하고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은 흔적을 가지고 있는데도 우리는 왜 그런 과거에 대해 올바르게 회상하지 못할까요? 가장 커다란 이유는 과거를 회상하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성향과 연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만나면 모두 고통을 겪습니다. 오늘 어려움을 만나는 것은 미래에 대한 해석을 다르게 하도록 만듭니다. ‘내가 오늘 이 길을 만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큰 능력으로 나를 도우셨다.’ 오늘 내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마음이 있을 때 그런 방식으로 회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과거도 있고 고통스러움으로 우리를 낙심시킬 수 있는 과거도 있는데, 사람이 절망에 빠지려고 하면 비관적인 것들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해서도 비관적이고 어두운 절망 속에 자기를 던져버리며 마지막에 깊은 절망에 빠질 때는 티끌만한 희망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이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믿음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자 하는 마음이 고갈된 상태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자 하는 성향은 과거에 대한 해석과 미래에 대한 전망까지 바꾸어 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을 깊이 의지하고 그분을 신뢰하는 마음은 치열하고 어둡고 고통스러운 과거를 돌아보면서 오히려 그 속에서 희망의 흔적을 발견합니다. 현재의 내게 있는 비관적이고 어려운 것들을 놓고 미래의 전망을 해석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어 해석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것이 주님을 깊이 의지하며 살아가는 신앙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 서원을 갚음
본문에서 시인은 서원을 갚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 서원은 시인이 환란 때 주님께 약속했던 것이었습니다. 환란 때는 위기를 만나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환란을 면하여 염려와 걱정이 없을 때 그 서원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갚는 것은 신실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환란이 겹칠 때는 하나님이 신실하게 인도하셨던 과거를 회상해야 합니다. 회상할 필요 없이 하나님께서 순적하게 나의 인생을 인도하시면, 과거에 고난과 시련이 겹쳤던 때를 회상하면서 그때 주님 앞에 약속하였던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매달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내가 수양의 향기와 함께 살진 것으로 주께 번제를 드리며 수소와 염소를 드리리이다”라고 합니다. 최상의 제물들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수소는 돈이 아주 많은 사람들이 드릴 수 있는 제물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시인은 자신이 가진 최선의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신의 제사를 올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우리도 받은바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영혼에 행하신 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내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시 66:16)
본문해설
환난 날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셨던 것을 진지하게 회상하고 나니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릴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시련의 날에 기도하며 서원했던 것을 하나님 앞에서 이행하게 된 것입니다. 15절과 16절 사이에 단락이 바뀌면서 ‘셀라’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음악적 기호입니다. 음을 바꿔서 부르라는 기호입니다. 이런 기호는 후대에 붙여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16절에서는 단락 바뀌면서 언약백성을 향한 선언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여기에서 ‘두려워하다’라는 단어는 ‘공경한다, 경외한다’라는 뜻입니다. 이방백성들에게 하는 선언이라기보다는 언약백성들을 향한 선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두려워한다’는 것은 공포에 사로잡힌 두려움이 아니라 경건함으로서의 두려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어라.”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배우는 것
시련을 통해서 간증이 생겨납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를 향한 당신의 뜻과 성품을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바로 히해하지 못하면 시련이나 고난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이나 성품을 배우지 못하게 됩니다. 어떤 물체를 공기 중에 두었을 때와 물속에 담갔을 때, 타오르는 불길 속에 집어넣을 때 각기 그 모양이 다릅니다. 아주 특별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물체가 아니라면 대부분 공기 속에서는 그 물체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 속에 들어간다면 그 물체는 검은 연기와 붉은 빛을 내면서 타오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일상적인 환경 속에서 당신을 보게 하실 때는 우리의 감각이 둔해져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그의 성품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불길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지고 옵니다. 하나님이 사랑해주셔도 평탄한 환경 속에서는 그 사랑을 몰랐다가 오히려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때리고 징계하실 때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되는 모순처럼 보이는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들이 흔하게 경험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갖게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에 관한 새로운 앎을 터득하게 되면 사람들에게 간증할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다 와서 들으라”, 무엇을 들으라고 하는 말입니까? “환난 날에 나에게 알게 하셨던 하나님과 그분 앞에 드린 헌신과 감사의 제사와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한 나의 간증을 들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고통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는 무지에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가르쳐 주어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의 섬김은 없습니다. 영혼들을 올바른 길로 이끈 사람들은 하늘의 별과같이 빛나리라고 다니엘이 예언했던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영혼을 위해 섬기며 사는 사람들의 받을 상급과 영원한 축복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내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선포함
그 후에 중요한 선언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내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환란을 만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위기를 벗어나게 해 주시는 것은 일반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물의 질서를 하나님이 움직이면서 우리를 다루시는 것입니다.
고통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고통은 상당히 주관적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고생하는 것을 고통이라고 여길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것이 고통일 것입니다. 환란이란 결국 사물들의 질서를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여서, 우리를 그 모순 속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것이 괴로움이고 고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고통 속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고 이끌어 주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존 오웬은 시편 130편 1절,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의 ‘깊은 곳’을 두 가지로 나누어 말합니다. 영적인 깊음과 환경의 깊음입니다. 환경적으로는 깊음 속에 떨어졌는데 내면에는 완전한 자유가 있을 수 있고, 반대로 환경적으로는 모든 것이 평안하고 깊음이 없는데 영적으로는 깊음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혹은 이 두 가지가 한꺼번에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환경적인 깊음에서 우리를 건져주실 때 그것은 하나의 껍질일 뿐이고,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시는 것은 그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영혼의 구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로운 일들을 주십니다. 집을 사게 해주시거나 이런 저런 일들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기쁨과 즐거움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영국 속담이 있습니다. “하루를 행복하고 싶다면 이발을 해라. 일주일을 행복하고 싶다면 결혼을 해라. 한 달을 행복하고 싶으면 말을 사라. 1년을 행복하고 싶으면 집을 사라.” 결혼을 해서 누리는 기쁨이 말 한 마리만도 못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것이 그러합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주어지면 감격을 하지만 인간은 금방 싫증을 내고 시들해집니다. 감사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에 비해 하나님의 영적인 복은 우리에게 오랫동안 남아서 우리를 움직이고 그 은혜에 감사하게 합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그 찬송을 불러보십시오. 우리의 마음속에 신앙의 감격이 밀려오지 않습니까? 그것이 놀라운 은혜입니다. 새집을 사서 3, 4년이 지난 후에도 “새 집을 주신 주님의 은혜가 놀라워” 이렇게 감동이 몰려오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도리어 더 큰 집, 더 좋은 집으로 이사 가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하나님의 복은 신비입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 주고 싶다. 하나님이 내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고 싶다. 그래서 환란의 시련 속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 놀라운 사랑, 이런 것을 너희에게 알려주고 싶다.” 시인은 고통 받던 날에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이 말 못하는 자 되게 하소서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음이로다”(시 31:18-21)
결론과 적용
주님을 위로로 삼는 사람들은 시련이 오고 고난이 오더라도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거나 근거 없는 모욕을 당하고 괴로움을 받을 때 오히려 사물들의 질서를 통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놀라운 비밀을 터득하게 됩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님이 없었으면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과 맞붙으며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을 텐데 도리어 그 때 주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평탄할 때는 몰랐던 것을 고난과 시련을 통해 하나님이 나의 영혼에 베푸신 일과 허락하신 섭리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깨달으며 주님 앞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일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나빠 보이는 일을 통해서 가장 아름다운 일을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관용과 용서, 그리고 사랑이 나오게 됩니다. 환란을 당할 때마다 그것을 주셔야 했던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오히려 평탄할 때는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경험하고 주님 앞에서 사는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실 때
“내가 내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내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으며 내 기도 소리에 주의하셨도다”(시 66:17-19)
본문해설
시인은 자신이 환난의 날에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지를 17절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18절에서는 그 과정을 통해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성품을 노래하고 있고 마지막 19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대해 주셨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17절 앞부분에 나오는 ‘부르짖는다’라는 것은 기도를 가리키고, 뒤에 ‘입술로 찬송하였다.’라는 것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셔서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감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인은 환난의 날에 있을 때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를 배웠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8절부터 15절까지의 간증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환난을 통해 마음을 정화하심
하나님은 찬송 받으실 만하고 그 찬송소리로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 드릴만한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특별히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의 영혼을 살려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모든 간구의 과정을 통해 깨닫게 된 하나님의 성품은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환난을 당할 때마다 정결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인이 이러한 고백을 하는 것은 환난과 연단 자체가 인간의 신념을 정화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환난 자체에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인간을 정화시키는 효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정화하는 효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올바로 살지 않을 때 환경을 때리시며 궁극적으로는 그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때리시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교정이 되는 것입니다.
시편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실 때 우리의 마음이 정화되는 것을 은을 연단하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원래 도가니는 연필심 같은 흑연으로 만드는데 이것은 무른 것과 단단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녹지 않습니다. 거기에 금을 넣고 불을 지피면 1250도 정도에서 쇠가 녹기 시작합니다. 은이나 금은 그보다 훨씬 더 낮은 온도에서 녹기 시작하는데, 원래는 금이 아닌 철광석을 넣고 그것을 끓인 후, 모래나 불순물들을 다 태우고 타지 않는 금속이 액체상태가 되어 가라앉으면 다시 새로운 곳에 담그는 것을 반복합니다. 찌꺼기는 타버리고 액체 상태에서 비중이 높은 것들은 가라앉는 것을 되풀이 하면서 은이 순도를 더하게 됩니다. 순금은 14금이나 18금과 비교할 때 가격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싼 것은 그 만큼 순도가 높은 것을 높이 쳐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금이나 은을 순결하게 만드시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단련하십니다.
그것을 통해 시인은 환난 속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을 뵈온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정결하게 드린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않으신다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 시인이 환난을 당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에 품은 죄가 있었다면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회개하여 정결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인의 기도소리에 주의하셨으며, 시인은 시련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자신이 정결하게 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법으로 우리를 다루십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실 수 있지만, 주님의 관심은 우리가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다운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하여 부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환난을 당하지 않고 이 세상을 편안하게 사는 것이지만, 주님의 관심은 우리를 당신의 백성답게 만들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녀답게 사는 모습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높이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시 66:20)
본문해설
본문은 대부분의 다른 시편의 예와 같이 하나님을 향한 찬송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저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은 자신의 의로움이나 우리가 원래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존재가 아니며 그분과 교통할 수 없는 존재라는 본래 상태와 상관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인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위기에서 악인들을 물리치고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에 대한 찬송의 이유가 겨우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기도와 응답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했고, 다시 그 은총을 통해 시인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도, 절대적인 하나님 의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방편들 가운데 특별히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의존을 보이는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기도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고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간절한 간구의 과정을 통해서 그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더 많이 기울어지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존의 감정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감정입니다. 인격적으로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도는 더욱 풍성해지고 깊어집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에게 기도의 제목을 주셔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십니다. 영적인 감각이 무디어져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살피는 능력이 없을 때조차 우리 삶의 질서를 움직여가면서까지 하나님 앞에 간구하지 않을 수 없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의지하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기도제목이 없을 것 같지만 막상 기도를 해보면 굉장히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이유는 실제로 기도해 보면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을 더 많이 의존해야 하는 우리 삶의 제목들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하지 않을수록 오히려 기도제목은 없어지고 기도를 하면 할수록 해야 될 기도제목들은 많고 시간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가 당신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가운데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인자하심, 온전한 사랑
덧붙여서 시인은 “그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라는 결정적인 고백을 합니다. 자기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기도가 이루어진 모든 과정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인자’가 바로 ‘헤세드’(dsej) 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속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특별한 호의이자 은총입니다. 헤세드의 사랑을 입은 사람을 뜻하는 단어가 ‘하씨드’(dysij), ‘성도’인데 그 이름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된 자’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내게서 거두지 아니하셨다.”라는 고백은 자신에게 하나님이 사랑하실만한 어떤 좋은 점이 있다기보다는 끊임없이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고자 하는 그분의 완전한 속성 때문에 혜택을 입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시작이 하나님의 은혜인지 인간의 욕정인지에 따라 차이가 나타납니다. 인간의 욕정으로 시작되는 사랑은 자기필요로 인하여 찾는 사랑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성품에서 시작되는 사랑은 하나님 자신의 완전한 성품 때문에 이루어지는 사랑입니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열등한 종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랑은 후자의 사랑이고 하나님은 그런 사랑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성품 때문에 우리에게 발현되는 사랑은 결국 관계를 맺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관계를 심화시키고자 하는 사랑입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로운 원칙으로 대하셨더라면 벌써 버렸어야 할 사람들을 말할 수 없는 인자하심으로 지극히 사랑해주십니다. 인자하심을 더 이상 베푸실 필요가 없을 정도로 우리가 잘못 되었을 때조차도 그것을 거두지 아니하심으로 오히려 고쳐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도록 붙들어 주시고 도와주시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이것이 믿음 생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생활의 밑바탕을 이루는 것은 이것을 늘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아뢰지 않은 삶의 많은 영역들, 우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대해 주님께 더 많이 간구하고 기도한다면, 죄인을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인자를 더 깊이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경험하는 것은 태양의 빛을 받아 지구를 두루 비추는 달과 같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그런 사랑의 빛을 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의 빛을 비추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시편56편 강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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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67편 강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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