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67
목 차
주의 얼굴빛으로 우리에게(시 67:1-2) 45
찬송할 이유(시 67:3) 48
열방의 기쁨(시 67:4) 54
민족들이 주를 찬양할 때(시 67:5) 60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함(시 67:6) 67
땅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함(시 67:7) 73
시편56편 강해 1
시편67편 강해 1
시편67편 강해 1
시편67편 강해 1
시편67편 강해 1
시편67편 강해 1
시편67편 강해 1
주의 얼굴 빛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시 67:1-2)
본문해설
67편은 탄원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찬송의 내용이 나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탄원의 내용입니다. 특별히 이 탄원은 개인적인 탄원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탄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공동체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하고 있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셀라)”라고 말합니다. ‘셀라’라는 말은 아마도 음악적인 고조를 나타내는 음악부호일 것이고 ‘높이다’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곡조를 낮게 부르다가 그 지시가 나오면 위로 올려서 조금 높이 불렀던 그들 나름의 창법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을 읽다가 이 부분이 나오면 읽지 않습니다.
주의 얼굴 빛을 구하는 마음
성경은 우리에게 먼저 언약백성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의지하며 살아야 할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우리를 긍휼히 여겨 달라는 탄원에서 비롯됩니다. 긍휼을 구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존하는 마음입니다. 인간에게 겸손이라는 것은 결국 자신의 존재적인 미력함과 도덕적인 추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자신에게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간곡히 고백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우리를 긍휼히 여겨 달라고 간절히 탄원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언약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그분을 의존하는 마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고 복을 주십니다. 결국 ‘복’이라는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언약백성들은 그 ‘복’을 하나님 안에서 찾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는 지식을 언약백성들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합니다.”라는 간절한 탄원입니다.
“그 얼굴 빛으로 우리에게 비춰 주십시오.”라고 말하는데 하나님이 빛이라는 이야기는 여기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 얼굴을 우리에게 대면하여 주십시오.”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을 인간에게 대면하시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극도의 분노이고, 둘째는 극도의 친밀함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대면하여 주시는 것이 커다란 은총이 되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괄목할 만한 심판이 다가온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는 첫째의 경우로 하나님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춰 주셔서 당신의 탁월한 친밀함을 우리에게 보여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소명
시인은 하나님 앞에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하고 간구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경외하는 참된 도를 알리는 방법은 먼저 언약백성들을 살리셔서 이 땅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살아나는 부흥을 보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 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상태는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매우 중요합니다. 더불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나타내며 살고 그들의 믿음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려 주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구속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목적대로 사는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주님으로 충만해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은 대치할 수 없는 소명입니다.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섬김은 참된 신자가 되는 것이듯, 세상의 나라와 만방을 향해 하나님의 교회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사명은 하나님의 교회다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향한 의도를 구현하기 위하여 당신의 주권을 따라 어떤 시대의 교회를 살리십니다. 때로는 한 시대의 교회가 모두 죽어 있는 것 같아 보여도 소수의 교회에 하나님께서 진리와 성령을 부어 주셔서 그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살아나게 하십니다. 그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강력한 능력으로 행하십니다.
간절히 탄원하라
이런 놀라운 일들이 있기 전에는 항상 조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약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빛을 비춰주시는 것을 최고로 여기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알아 하나님 앞에 그 얼굴빛을 비춰주시기를 간절히 탄원하는 일들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기차는 어디든지 다 갈 수 있지만 레일 위에서만 달리듯 주님께서는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시기 전에 먼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소망은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우리에게 물 붓듯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이며 특권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얼굴빛을 비춰주시고 긍휼히 여겨주시도록 교회는 끊임없이 탄원해야합니다.
찬송할 이유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시 67:3)
본문해설
시인은 먼저 하나님께 자신을 긍휼히 여기사 복을 베풀어 주시고 그 얼굴빛을 자신들에게 비춰 달라고 하며 주의 구원을 만방에 알려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큰 부흥의 은혜가 어떻게 이방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전형적인 본보기입니다.
자연계시를 주신이유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알리셨습니다. 그러나 자연이나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알려지는 지식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올바르게 주님을 찬송하게 만들 정도로 충분하지는 못합니다.
요나서를 읽어 보면 기이하다는 느낌을 받지 않습니까? 우리가 나가서 복음을 전해 보면 사람들은 너무나 강퍅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나가 니느웨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을 때, 하나님을 믿고 임금으로부터 모든 가축에 이르기까지 금식을 했습니다. 물론 가축이 스스로 금식을 했을 리는 없고 사람들이 밥을 안 주니까 굶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금식을 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선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의 배경을 살펴보기 위해 많은 성서학자들이 천문학의 도움을 받아 주기를 계산했는데 바로 그때 니느웨에 굉장히 커다란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일식이었습니다. 이들은 태양을 우상시했습니다. 당시에는 천문학적인 지식이 없었으니 태양이 달에 의해서 가려지는 것을 보고 태양이 갉아 먹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일식을 보고 엄청난 두려움을 느꼈을 그 때 선지자가 나타났습니다. 요나는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구령의 열정도 없이 하나님이 한 대 치시니까 정신을 차리고 와서 마지못해 “곧 하나님이 심판을 하실 것이다.”라고 선포를 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녹아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상의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당신의 계시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경의 계시를 제외하고 자연 속에 나타내신 하나님에 관한 계시는 “하나님이 분명히 존재하신다.”라는 것과 “하나님께서 선악 간에 판단하신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선악을 몰랐다거나 혹은 하나님의 존재를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도록 자연을 통해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자연계시의 한계입니다. 자연계시를 잘 받아들이면 그 후에 특별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 빨려들듯이 잘 받아들이도록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적으로 방황을 하는 중에 때로는 큰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괴로운 일을 당해서 너무 고통스럽고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며 지내다가 어느 순간에 이르러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됩니다. 일반적인 섭리 속에서 살다가 어려움을 겪으며 마음이 준비가 되었을 때 결정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져서 회개하고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해주는 계시를 지니고 있는 민족이었습니다. 이 민족의 삶과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선포해 줄 때 열방이 그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라는 것은 찬송할 이유를 하나님께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때에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까?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알았을 때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찬송의 제목이 됩니다.
예배가 먼저입니까? 지식이 먼저입니까? 당연히 지식이 먼저입니다. 알아야 경배를 하기 때문에 지식이 제일 먼저입니다. 주님을 높이는 지식이 제일 먼저이고 그 지식 때문에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자를 예배하는 것은 이방인들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아덴에 갔을 때 사람들과 논쟁하면서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라고 조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은 혹시라도 빼놓은 신이 있다면 그 신이 섭섭해 할지도 모르니 생각이 안 나는 신을 거기에 다 모아서 도매급으로 경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린다고 할 때는 제일 먼저 머리부터 차례대로 드리는 것입니다. 머리가 들어가고 눈, 코, 입, 귀, 그리고 우리의 심장, 모든 것이, 마지막에는 오장육부까지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최고의 경배는 주님을 알고자 하는 욕망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교회의 중요한 사명중 하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를 아는 지식을 같은 시대의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전도로 나타나고 전도뿐 아니라 이미 예수를 믿고 있는 사람들도 올바르게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전문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신학을 교인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체계적으로 가르쳐서 그것들을 소유하도록 도와야합니다.
신앙의 두 가지 훈련: 믿음과 이성
어제 저녁때 총신대 학생들이 40명 정도 왔습니다. 함께 저녁을 먹고 잠깐 교제를 하면서 제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들이 한 결 같이 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신앙생활도 잘 해야겠다고 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나누어 주려는 이들에게는 더욱 중요해서 끊임없이 공부해야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것을 운동을 하면서 느낍니다. 제자 가운데 탁구선수가 있는데 하루에 20㎞씩 달리기를 한다고 합니다. 투포환 선수가 20㎞씩 뛴다면 이해가 가지만 5g의 탁구공을 움직이는 탁구선수가 20㎞를 뛴다고 하니 이해가 잘되지 않았습니다. 탁구연습이 힘든 것이 아니라 달리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5g밖에 안 되는 공을 치는데 왜 그렇게 뛰느냐고 물었더니 모든 세밀한 기술은 체력에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주님을 알기 위한 두 가지 훈련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는 것을 선생님이나 성경, 책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바구니를 들고 있으면 거기에다 과일을 담아 주는 것처럼 지식을 담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손을 뻗어서 스스로가 가질 수 있도록 운동을 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공룡 중, 뒷다리는 아주 발달했는데 앞다리는 개구리처럼 작은 공룡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앞다리 때문에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나무에 사과가 달렸다면 손을 쭉 뻗어서 그것을 딸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공룡은 손이 오그라들어 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믿음이고, 둘째는 이성입니다. 믿음과 함께 이성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들을 받아들이는 도구입니다. 한 손은 이성이고 다른 한 손은 믿음입니다. 믿음과 이성의 손이 오그라들어 있을 때는 자기가 아무리 가슴으로 많은 것을 느끼고자 해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손이 오그라들어있으니 공이나 과일 같은 것을 던져 주어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력운동을 계속해서 오그라든 손의 능력을 발달시켜야합니다.
믿음도 큰 믿음이 있고 작은 믿음이 있으며, 이성도 큰 이성이 있고 작은 이성이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믿으려는 성향으로써 믿음 그 자체는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이 좋은 사람은 성경의 모든 것을 믿습니다. 믿고자하는 성향이 강화되면 성경의 어느 부분만 믿는 것이 아니라 다 믿어집니다. 시편 67편 3절만 믿는다면서 68편은 믿을 수 없다고 하지 않고 “ 아멘.”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때 발달시켜 나가야합니다.
최근에 제가 논문을 하나 봤는데 재미있고 깊이 공감이 가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쓰인 책 가운데 아마도 가장 어려운 책으로 5권 안에 꼽히는 책 중의 하나가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삼위일체라는 책일 것입니다. 한 번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책장이 넘어가질 않습니다. 심지어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도 잘못 읽는 책으로 아주 난해합니다. 그 책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일화가 있습니다. 책을 쓰다가 너무 어려워서 바닷가를 산책하며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했는데 조그만 아이가 앉아서 웅덩이를 파놓고 바닷물을 붓고 있었습니다. “아이야, 너 거기서 뭐하니?” 물었더니 “아저씨, 내가 저 바다의 물을 이 웅덩이에 다 담으려고 해요.”, ‘참, 어리석은 아이도 다 있구나.’ 그러고는 바닷가를 한참 걸어가다가 ‘아차!’ 하고 돌이켜보니까 아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야사로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아이는 아마 천사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후로 자기의 겸손함을 깊이 인정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전에는 그 책이 굉장히 어렵지만 자기의 교인들과 그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르쳐 주려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썼다는 것을 정설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몇 십 년 전인 65년도 이후로는 새로운 학설이 나왔고 그 학설이 훨씬 더 타당합니다.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처음부터 믿음이 아니고는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없다고 보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관한 논리들을 전개하면서 안으로 오그라들어있는 성도의 믿음과 이성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그 책을 썼다는 것입니다. 그 말에 아주 깊이 동의가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할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 돌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은 돌을 알고 싶어 하고, 흙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은 흙을 알고 싶어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국밥 하나에 인생을 걸어서 30년 가까이 국밥 하나를 연구하는 일에 매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이 이 국밥만도 못 합니까?
결론과 적용
하나님을 알고자하는 것은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의무입니다. 그분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을 통해서 모든 지식이 열방 가운데 전해지고 그들도 주님을 알고 사랑하며 순종하는 세상이 되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맞서지 말고 온유함으로 대하며, 때로는 꾸짖음으로 때로는 바르게 함과 타이름으로 가르쳐야합니다. 무지 그 자체를 비난하지 말고 긍휼하게 여기며 그들의 눈을 열어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한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의 선한 의지의 크기입니다. 그 선한 의지의 크기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만큼 커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방에 전파해서 그들도 주님을 알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섬기며 사는 것이 하나님 백성들의 삶입니다.
열방의 기쁨
“열방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판단하시며
땅 위에 열방을 치리하실 것임이니이다”(셀라)(시 67:4)
본문해설
본문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스라엘 백성에서 열방으로 확산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4절은 3절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복을 주시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얼굴빛을 비춰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은총을 받게 되면 결국 그들이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도가 열방과 만방 중에 알려지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열방들도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언약 백성들의 삶을 통해 알려지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보이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결국 보이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알려집니다. 그 방법은 ‘The way of living’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의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알려집니다. 여기서 말하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은 고래로 부터 인간들이 ‘어떤 삶의 방식을 택해야 인생이 행복할 수 있을까?’라고 고민했던 문제의 답입니다. 인간의 행복과 참된 불행이 삶의 태도에 달려있는데 그 태도라는 것은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불행해지고 행복해지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기심이 가득해서 자기의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고 손해를 입힙니다. 한두 번이야 사람들이 이용당해주고 속아주겠지만, 언제까지나 사람들이 그렇게 속아주고 이용을 당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큰맘을 먹어야 그렇게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몸에 젖어있어서 어디에 가든지 그런 삶을 삽니다. 결국 그 자체가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이 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그의 사람됨은 하나입니다. 물이기 때문에 흘러가고 무게가 있기 때문에 높은 데서 낮은 데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둥글기 때문에 굴러가는 것이고 붙잡지 않으면 자꾸 이리저리로 굴러다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사람의 사람됨은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을 결정합니다. 똑같은 선인데도 악한 사람이 선을 행하면 위선(僞善)이라고 말하고, 선한 사람인데 어울리지 않게 악을 행하면 위악(僞惡)이라고 말합니다. ‘위’(僞)라는 것은 가짜라는 말로, 똑같이 선한 행동인데 원래 선한 사람이 선을 행하면 덕스러운 행동이 되고, 원래 사람됨이 악한데 선을 행하면 위선이 됩니다.
그런 삶의 방식이 언약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도를 보여 주는 삶입니다. ‘도’(道)라는 것은 모든 선악과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도’를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 좁은 의미에서는 ‘율법’입니다. ‘여호와의 도로 행하자’는 것은 결국 길을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길’로 하나님이 정해 놓으셔서 모든 인간이 그곳으로 걸어가기를 원하시는 길, 이것이 바로 ‘도’입니다. 인간은 도에 끊임없이 자기를 합치시키며 살아가야합니다. 그것이 곧, ‘덕’(德)입니다. 이 두 개가 합쳐서 도덕(道德)이 되는 것입니다. 도는 객관적인 것이고 덕은 주관적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구나’ 라는 것을 언약 백성들의 도덕적인 삶의 방식을 보고 알게 됩니다.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도덕은 하나님의 도덕이 아니라 세상의 도덕입니다. 비교적 세상의 도덕과 하나님의 도덕이 일치할 때가 많지만 일치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주님께서 “너희 아내나 자식들을 나보다 사랑하는 자는 합당하지 않다.”라고 하셨는데 이런 것들은 이 세상의 도덕에는 합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는 때로는 주위 사람들과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도덕과는 다른 것입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엄격하게 하라고 말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이런 것은 누구에게 어떻게 하라고 강요할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여자나 남자가 제때 결혼을 못하고 혼기를 놓치면 무언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홀로 있어도 죄가 아니고 장가가고 시집가도 죄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입니다. 가난 같은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난하게 사는 것 자체를 고결함의 상징으로 보지만 성경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도덕과 하나님의 도덕이 서로 일치할 때도 있고 상충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도덕이 갈등과 모순을 일으킬 때 세상의 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가 우리를 통해 전파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도대로 산다고 항상 세상에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상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깨닫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량없는 능력을 가지신 아주 고결한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그 말씀을 환영하고 기뻐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무슨 효과가 있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 선포는 믿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드러내어서 자신이 안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그분을 향한 믿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니까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고자하는 악한 감정이 생겨났습니다. 창기와 세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리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자 그들은 쓰러지듯이 주님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런 놀라운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를 따라 사는 삶
그리스도인의 삶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환영을 받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 올바른 사람일 가능성이 없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는 사람도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사람이 아닐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세상 만방에 당신의 도를 알리는 것이 목적이지만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의 도를 따라 사는 것이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빛은 타오르고 밝게 비추는 성질이 있어서 빛입니다. 빛은 자기가 비추는 사물들이 생물이거나 무생물이거나 착한 사람이거나 악한 사람이거나 상관하지 않습니다. 빛이라는 성질 때문에 찬란하게 빛나고 타오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언약백성들도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켜주시고 새롭게 해주신 대로 피사체와 상관없이 자기 자신의 성질에 의해서 빛을 발하듯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는 본성 때문에 빛을 발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이 바로 변화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룩하며 살아야 할 삶의 방식입니다. 착한 행동을 해서 세상에 감동을 주고 싶다거나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 우리도 이렇게 착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착한 행실이라는 말에 주목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착한 행실을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한결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말하는 착한 행실이라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행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미국의 ‘조엘 오스틴’이라는 목사가 한국교회의 신앙을 아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분의 책이 몇 백만 부가 팔렸다고 합니다. 그 책은 ‘동성애자도 좋다. 모든 것은 상관없다. 그 사람들이 옳은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는 나에게 상관없고 일단 그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합니다. 동성애에 빠진 사람들에게 우리가 복음도 전파할 필요가 없고 도울 필요도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는 판단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고 나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면 그것이 중요한 것이지 나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러한 악들이 교회 안에 번져갈 때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람들이 보기에는 굉장히 좋습니다. 긍정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고 말하고 심지어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그 책을 자기 생애를 움직인 최고의 책이라면서 추천을 하니 성도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 책이 세상적인 안목으로 볼 때는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 책일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을 알려주는 삶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는 못합니다.
제가 미국에 갔을 때 예수님을 믿은 지 석 달 밖에 안 된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가 첫 번째로 읽은 책이 놀랍게도 ‘죄와 은혜의 지배’였다고 합니다. 그 자매가 그 책을 읽으면서 회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두 달쯤 됐을 때 누가 ‘긍정의 힘’을 선물로 주었답니다. 그 자매는 ‘죄와 은혜의 지배’를 읽은 것 밖에는 기독교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긍정의 힘’을 읽고 어땠느냐고 물어보니까 ‘나는 이제 믿은 지 석 달밖에 안 돼서 기독교를 잘 모르지만 이것은 아닌 것 같다. 이게 어디 하나님일 수 있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같다.’라고 말했답니다. 비록 기독교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은 없어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나면 판단의 빛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
본문은 하나님의 도를 만방 중에 알리게 될 때 그들도 그 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되는 세상이 온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비전이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비전입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보이는 세상에서 주님을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아파할 수 있습니다. 그 동기가 오늘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동기이고, 우리 가족의 복음화를 위해서 기도하는 동기이고, 아웃리치를 나가는 동기이고, 이 땅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며 믿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확산을 위해서 이 세상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우리에게 위탁된 중요한 의무는 첫째로 주님을 더 많이 알고 더 사랑하고 더 순종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후손들이 우리보다도 더 주님을 잘 알고 사랑하고 순종할 수 있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 세상에서 하고 남겨두는 것입니다. 제가 교회와 신학교, 신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많이 헌신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개인의 취향이 아닙니다. 이것이 한 시대의 교회에 위임된 아주 중요한 사명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제 설교를 듣고 회심하신 분들도 있을 것이고, 책을 읽고 은혜를 받은 분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 책과 설교들은 어느 날 땅을 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저도 누군가에게서 배웠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책을 읽고 도전 받은 기억도 나실 것입니다. 그 책이 나오기 위해서는 지은이가 수많은 책들을 참고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유산들을 계속 물려주고 영향력 있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해야 할 중대한 사명입니다.
미국에 다녀온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조그만 교회인데, 목사님이 목회를 하시다가 은퇴를 하고 그 교회 지하에 출판소를 하나 차리셨다고 합니다. 그분이 얼마 전까지 살아계셨는데 돋보기안경을 쓰고 스펄전 목사님의 설교집을 내셨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의 책을 저도 거의 다 가지고 있는데 한 육십 몇 권정도 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은 구입을 못했는데 1년에 한두 권씩 책이 계속 나옵니다. 왜 이 할아버지는 목회까지 그만두고 그 연세에 돈벌이도 되지 않는 책을 출간하셨던 것일까요? 이분이 젊었을 때 스펄전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회심을 했다고 합니다. 스펄전 목사님의 신학적인 책들은 별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고등학교밖에 못 나온 분이셨기에 그랬겠지만 아주 탁월하게 설교 속에 사상들이 녹아 있습니다. 늙은 목사님은 그것을 읽으면서 멘토링을 받고 자기의 신앙의 보고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명감을 가지고 그 책들을 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책을 볼 때 감동을 느끼고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하나님의 도를 전하고 살며 보존하고 물려줘서 가고 오는 세대의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도록 이바지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의무요 사명입니다.
민족들이 주를 찬양할 때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시 67:5)
민족들이 주를 찬양할 때
67편의 앞부분에 ‘열방, 만방’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열방’이 나라의 개념이라고 할 것 같으면 본문에 나오는 ‘민족’은 겨레의 개념입니다. 한 나라 안에도 여러 민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애굽에도 이스라엘 민족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러 민족들이 섞여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문화는 서로 공유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각각 다릅니다. 오늘날 다문화 가정이 있습니다. 그들이 한국에서 살고 나라도 하나입니다. 한국에 시집을 오면 귀화를 했으니까 법적으로 한국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한국국적을 가지고 한국 국민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베트남 민족이라든지 태국의 민족들은 각각 문화가 다릅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는 같이 살고 있지만 마치 기름이 물과 섞이지 않듯이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열방과 만방 같은 나라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나라를 구성하는 민족들이 주를 찬송케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모든 나라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되, 주류가 되는 특정한 민족만이 아니라 함께 살고 있는 작은 민족들에게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위엄과 영광이 알려져서 하나님께로 돌아와 경외하고 찬송하는 것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찬송하게 하소서. 경배하게 하소서.”라는 표현은 좁은 의미의 찬양이나 예배, 경배, 이런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비유를 하면, 식물이 있습니다. 식물이 자라면서 꽃이 핍니다. 그 꽃 속에서 그 식물의 특징을 보게 됩니다. 그 식물의 맨 끝에서 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꽃이 열매를 맺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식물들은 꽃을 통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식물의 독특한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 꽃입니다. 줄기와 가지는 모두 비슷해도 피어나는 꽃의 모양은 전혀 달라서 개화를 통해 식물들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식물에 있어서 활짝 핀 꽃과 같습니다. 삶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께 복종하는 가운데 영혼과 마음의 활동으로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신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표현으로서 찬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재산에 관한 기록을 담은 문서를 가지고 있고 거기에 도장이 찍혀있다면, 그 도장 하나가 문서 속에 담겨있는 모든 재산에 대한 소유를 표현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으로부터의 찬양은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을 위한 영광의 도구로 쓰여지겠다는 헌신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나라 단위로 일어나서 대부분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만이 아니라 그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각기 다른 수많은 민족들에까지 하나님을 지식이 파고들어서 그들도 여호와께 무릎을 꿇고 헌신된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나라는 각기 다르고 민족들은 상이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깃발 아래, 나라와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 모두 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경외하는 민족이 되어서 한 정신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날을 꿈꾸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전망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일들은 어떻게 일어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이렇게 요약됩니다. 그런 일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창칼로 민족을 지배해서 그들의 목에 칼끝을 들이대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해서 오게 되는 나라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도 어찌할 수 없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사로 잡혀서 열방과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와 이제는 나라와 민족의 구분이 필요 없이 한 언약백성의 무리가 되는 것, 그것이 시편에서 찬송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들에 대한 전망입니다.
교회의 사명 1: 지식을 전파함
한 시대의 교회의 교회가 하나님 앞에 해야 할 일을 핵심적으로 요약하면 두 가지가 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자기 시대에 전파하고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것, 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던 사람이 중생하고 회심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까? 우리 교회는 좋은 교회이고 아주 편리한 교회라고 홍보를 해서 사람들이 우르르 교회를 찾아와 가득 메우는 것을 통해 영적인 이스라엘이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중생과 회심이 무엇입니까? 결국은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과정입니다. 거기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대면하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뉘우치는 것이 회개이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진수인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붙잡혀 그분께로 돌아오는 것이 믿음입니다. 인간은 타락한 상태에서는 이것을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살리시고 영적인 눈을 뜨게 해주시는 것이 중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그 시대에 전파하는 것입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파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신이 누리지 않는 것을 사람들에게 전파할 수는 없습니다. 제품을 아무리 선전해도 가장 강력한 선전은 그 제품을 써본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서 이웃에게 동정하게 말해 주는 것입니다. 거기에 가장 커다란 전파력이 있습니다. 저는 15년 전에 처음으로 책을 썼습니다.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라는 책이었습니다. 그것을 쓰면서도 ‘이걸 누가 읽겠나? 도대체 우리나라에 설교자가 몇 명이나 될까? 그 사람들이 생각이 높을 텐데 나 같은 무명의 변두리 신학교 선생이 쓴 것을 읽겠나?’ 그러고는 써서 두란노 출판사에 원고를 줬습니다. 그러고는 잊었습니다. ‘1년에 2000권이나 팔리려나? 그러고는 저도 잊어버렸습니다. 얼마 지났는데 책을 계속 찍고 있는 것입니다. 전화를 걸어서 물어봤더니 하루에 200권씩 나가는데 15일 마다 책이 3000권씩 찍히고 있는 것입니다. 신문에 조그만 한 광고도 안 냈습니다. 무명의 작가에게 누가 그런 대우를 해주겠습니까? 그런데도 책이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단번에 25,000부, 30,000부가 팔렸습니다. 어느 목회자를 만났더니 “교수님, 요새 목회자들끼리 만나면 하는 인사가 이 책 읽어봤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사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파되는 방법입니다. 재밌는 것은 그렇게 읽고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추천할 때 굉장히 적극적이고 전투적입니다. 신문 같은 데서 보고 대대적인 홍보를 받은 사람보다 전파 받은 사람이 서점에 갔을 때 그 책을 구입할 가능성이 더 높은 것입니다. 그 때 그 책의 가격은 7,000원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들리는 말이 7,000원짜리 책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나올 수 있다는 기록을 세운 책이라고 했습니다.
먼저 교회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누리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무 소중하고, 주님을 아는 지식에 붙잡혀 사는 것이 말할 수 없이 행복하고 기쁘게 느껴져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영적 침체에 빠져 있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죄이고,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누리고 그 안에서 복되게 살지 못할 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면 상대방은 이렇게 묻습니다. “그게 인생 살아가는데 도움이 됩니까? 당신 보니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당신도 좋아하지 않는 제품을 왜 우리한테 팝니까?” 그래서 자신이 먼저 그것을 충만히 누리고 그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입니다. 동네 나가서 그 일을 하는 것이 동네 전도입니다. 병든 사람들에게 가서 그 일을 하는 것이 병원 선교입니다. 감옥에 갇혀서 내일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교도소 전도입니다. 문화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일을 하는 것이 국내 선교입니다. 먼 나라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해외 선교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대체할 수 없는 소명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을 자신들이 먼저 누리고 그 가치를 알고 행복해 할 때 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하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전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전망이 무엇입니까? 선지서 중에서도 특별히 에스겔서나 이사야서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전망이 무엇입니까?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할 수 없도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편만하게 전파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입니다. 그것을 위해 봉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기가 누리고, 누린 것들 속에서 한없는 행복을 경험하면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누리는 것입니까? 무엇을 가지고 누리는 것입니까? 그것을 누리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가장 우선적인 것이 설교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자신의 책 속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진정한 복음주의라는 것이 이제는 다 기울어져 가고 있다. 그런데 참된 복음주의라는 것이 무엇인가? 설교를 중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 설교를 통해서 쏟아 부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아는 지식을 당신의 교회에 편만하게 보내시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까지 합니다. “이것에 비하면 개인적인 성경읽기, 성경공부, 모든 교육들은 부차적인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설교를 제외하고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교회 안에 편만하게 부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역사적으로 성경적으로 굳게 믿는 것이 복음주의의 한 가지 특징입니다. 쏟아 부어지는 진리가 있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들이 그것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들이 그것들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 2: 후대에 지식을 물려줌
줄리어스 킴 교수가 와서 교제를 하면서 그 참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국이 전부 다 종교다원주의로 가는 것 같아도 그 안에서 칼빈주의의 부흥, 개혁주의의 부흥이 일어납니다. 조엘 비키라는 목사의 개인장서가 65,000권이라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양의 책입니다. 그 속에서 그런 지적 자산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분의 책이 미치는 영향은 굉장합니다. 남침례 신학교가 있는데 실천신학으로 유명한 신학교입니다. 이 학교가 점차 자유주의로 기울었습니다. 그런데 앨버트 몰러라는 사람이 총장으로 취임하고 나서 대대적인 개혁을 한 것입니다. 자유주의 교수들을 다 쫓아내고 엄격한 칼빈주의 전통을 다시 세운 것입니다. 제가 아는 분이 그분을 만나 뵙고 와서 혀를 내두릅니다. 박식함이 비교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론이 있는 칼빈주의입니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개인서재를 보여주는데 75,000권의 장서가 있다고 합니다. 그 속에서 지적인 자산들이 생산되는 것입니다. 많이 생산해서 모든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판타지를 좋아하면 『나니아 연대기』같은 판타지의 방법으로, 아이들이 그림책을 좋아하면 그림의 방법으로, 게임을 좋아하면 심지어 게임의 방법으로, 노래를 좋아하면 노래의 방법으로 문화의 옷을 입혀서 사람들 속에 스며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앞에 무릎을 꿇도록 발전시켜서 그것을 후대에 물려주는 것입니다.
후대에 물려주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 것에 감동받은 사람을 세우고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놀라운 지적인 유산들을 후대에 남겨주는 것입니다. 목사인 제가 이 시대에 태어난 다른 사람들과 같은 사람 중에 하나인데 무엇이 특별하겠습니까? 존 오웬이나 조나단 에드워즈는 다 옛날에 죽은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은 300년 전 사람이고 한 사람은 400년 전 사람입니다. 존 칼빈은 정확하게 500년 전의 사람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1600년 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남겨 놓은 지적인 유산이 없었더라면 저도 변화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분명히 오늘날도 교회에 이런 저런 학교를 만들고 심리학과 마케팅 기법을 들여다가 교회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머리가 좋고 수완이 좋으면 조금 더 큰 교회가 되었을 것이고, 그것이 따라주지 않으면 다른 교회들과 경쟁을 해서 졌을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시작하고 나서 마음의 양심으로 세상에 있는 어떤 교회도 저의 경쟁상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갈 길과 나의 갈 길은 각기 다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온 힘을 다 해 그 지식들을 누리고 발전시켜서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것이 그들도 우리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 아래 살게 하는 교회의 대체할 수 없는 소명입니다. 한 시대에 유행처럼 쓸려 지나가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물건이 있는데 상품과 작품이 있습니다. 상품은 시간이 흘러갈수록 싸구려가 됩니다. 3년 전에 사놓은 컴퓨터 들고 가서 얼마에 사겠냐고 물어보면 도로 가져가라고 할 것입니다. 놓고 가려면 쓰레기 수거 비용도 함께 놓고 가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피카소의 작품이 이번에 1600억인가에 팔렸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사놓으면 값이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얼마나 올라가느냐가 문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흘러 갈수록 그것은 점점 더 가치 있는 것이 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상품과 같은 인생을 살려고 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경쟁상대가 됩니다. 목회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작품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제도 새벽 1시까지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이 끝나고 나면 하게 될 공과 책을 만들었습니다. 마음속에 간절히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우리 시대에 충만히 누리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다음 세대에도 그것을 누려서 아이들을 변화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변화되지 않고는 그것이 좋은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변화된 사람이어야만 자기를 변화시킨 말씀을 소중히 여길 수 있습니다. 그것들을 남겨서 아이들이 누릴 수 있도록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교회의 대체할 수 없는 소명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 모든 민족으로 주님을 찬송하게 하는 것, 이것이 시편의 전망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함
“땅이 그 소산을 내었도다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시 67:6)
본문해설
본문의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라는 구절을 보면 시점이 다시 1인칭으로 돌아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열방으로, 그 다음에는 많은 민족들에게로 하나님의 도가 전파되어서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돌아오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한 후에, 다시 현실로 와서 “우리”, 곧 복수형 1인칭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땅이 그 소산을 내었도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땅이 소산을 낸 것이 뭐 그렇게 대단합니까? 야채가 자라고 곡식이 열매를 맺는 것이 뭐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그러나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은혜를 많이 받으면 아주 사소한 일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향해 베푸시는 호의와 넓은 사랑을 읽어내지만 은혜가 사라지면 모든 것들이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고 느껴집니다.
은혜의 소명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곡식을 거두어 하나님 앞에 드릴 때는 이스라엘 모두의 공통된 신앙고백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민족적 신앙고백으로서 그 고백의 처음에 나오는 구절은 “하나님, 우리는 유리하던 아람사람들이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은 유리하던 아람사람들이었는데, 하나님께 소명을 받고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던 아브라함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소명을 받고 모세를 지도자로 하여서 애굽에서 나온 후에도 민족적으로 유리했다는 것입니다. 광야 생활이 바로 그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소명이라는 것은 이제껏 우리들이 살았던 삶의 기저 전체를 흔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평안한 직장이 있고 살아가던 삶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소명을 주셔서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삶의 기반 전체를 전부 다 흔드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오죽했으면 제가 신학교를 가겠다고 했더니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는 “호적을 파가거라. 내 집안에서 네가 목사 되는 것은 못 본다.”고 하셨습니다. 삶의 기반 자체가 파헤쳐지는 것입니다. 미래에 세웠던 모든 계획과 인생의 꿈, 바람 같은 것들을 다 접고 새로운 것을 찾아야합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거야 목사가 되셨으니까 그렇지 우리야 뭐가 흔들리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같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오늘은 화장품 가게를 했는데 내일은 취직을 하게 된다는 식으로 삶의 기반이 흔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적인 기반이 흔들리게 됩니다. 예전에는 무엇을 하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었고 그것이 생활의 원리였습니다. 자기를 위하고 은혜를 베푸는 사람들에게 자신도 그렇게 했습니다. 자기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원수로 여기고 미워하면서 살았습니다.
은혜 안에는 이미 소명이 있습니다. 은혜 자체가 당신의 계획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은혜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소명을 내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전처럼 살면 안 됩니다. 비록 식료품 장사를 하다가 땅을 파고, 건축업을 하다가 곰탕집을 하는 식의 직업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지만, 삶의 근본적인 원리 자체를 다 흔들어 놓아 완전히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에 주어진 소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애굽에서 고생하는데 하나님께서 건져주셨지 않았냐고 하지만 애굽에서 고생하는 것과 광야에서 고생하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고생스럽습니까? 오죽했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벌을 받는 장면들이 계속 나오겠습니까? 모세를 대적했던 많은 사람들은 애굽에 대한 향수 때문에 그랬던 것 아니겠습니까? 광야의 생활이 더 많이 고달팠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늘 정신없이 바쁩니다.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습니다. 저도 요새는 두 가지 마음이 몇 달째 계속 교차합니다. 한 가지 마음은 ‘내가 이렇게 해야 되나? 기도도 더 많이 해야 하는데. 일을 다 없애버릴까?’라는 생각과 한편으로는 ‘이것도 결국 하나님이 나에게 하라고 주신 일이고, 10년 하면 없어지는 일들인데.’라는 생각이 듭니다. 확대되어가는 일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가는 것 같은데, 나는 어떻게 해야 되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학교에 교수로 있거나 직장을 다니며 살았으면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감사합니다.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삶의 소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애굽에서 고깃국을 먹었다고 했는데 종들에게 누가 그렇게 고기를 많이 줬겠습니까? 주인들이 먹고 남은 것을 줬을 테고, 마늘을 먹었다고 했는데 그것도 그들이 예뻐서 준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 당시 이집트를 비롯한 모든 나라에서는 노예들에게 일차적으로 마늘을 많이 먹였습니다. 마늘을 먹으면 엄청난 힘을 발휘하니까 그것을 먹고 성을 쌓고 길을 닦으라고 준 것입니다. 그것을 그렇게 그리워했는데 거기에는 소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소명이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리했던 자들에게 주신 땅과 소산
땅이 소산을 낸다는 것이 영원한 찬송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땅을 주셔서 이제는 유리하는 민족이 아니라 땅을 중심으로 중앙에 성소를 넣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 수 있는 백성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감격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땅이 소산을 내었도다”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소산’이 아니라 ‘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앨머 마틴스’(Elmer A. Martens)라는 신학자는 이 땅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감격은 결국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아, 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유리하고 방황하던 아람 자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극히 긍휼히 여기시고 애굽에서 아무 기업도 없이 종살이를 하던 비참한 저희들을 건져 이 복된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셨으며 여기에서 이 땅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아멘 아멘 아멘” 하며 감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더욱 그 땅이 소산을 낸 것입니다.
우리는 ‘복’을 두 개를 심고 백 개를 거두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30배, 60배, 100배라는 표현들만 좋아하는데 이것은 상당히 자본주의적인 정신들이 잠식되어 들어온 생각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특히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복은 손이 수고한 대로 먹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은 신약에까지 이어집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큰 분복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농사를 짓는 사람이 추수를 하거나, 사업을 하는 사람이 장사를 끝낸 후에, 근로자들도 마찬가지로 자기가 수고한 것만큼 충분하고 정당하게 대가를 받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지니라”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여호와께서 주시는 분복입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는 여러 곳에서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무엇을 보태는 것도 복이지만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그 자체도 하나님의 큰 은혜라고 합니다.
이것을 영적인 일에 대입해 보면 참 놀랍습니다. 기도한다고 무릎을 꿇고 있으면 무릎을 꿇고 있는 시간만큼 기도가 됩니까? 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전도를 나가면 다 전도가 됩니까? 아닙니다. 열매를 거두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마음에 품은 욕구는 고사하고 수고한 대로만 열매를 거두어도 하나님 앞에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신실하신 은혜에 감격함
시인이 “땅이 그 소산을 내었습니다”라고 감격하는 이유는 그 속에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모든 질서들을 순적하게 움직여서 손이 수고한 대로 먹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연적 법칙을 통해서 언약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뒤에 보면 솔로몬이 왕이 되어 성전을 짓고 나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가 역대하 7장에 나옵니다. 거기에 나오는 간절한 기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혹시 우리에게 재앙이 있을 때, 깜부기가 있거나 역병이 있거나 전쟁이 일어나거나 할 때 이 성전을 향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불의를 고치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입니다.
본문의 시인은 왕이었기에 땅이 소산을 내어서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것은 단순히 자기의 집 앞 뜰에 곡식이 많이 맺혔기 때문에 감탄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 전체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화목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공정하게 땅에서 소산을 내시고 깜부기나 전쟁이나 역병이나 기근이 없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것을 누리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샬롬’의 관계 속에서 주님이 당신의 신실하심을 언약백성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힘으로 산 삶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올바로 살았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당신의 신실하심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셨다 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시인은 주님의 은혜를 입는 언약백성으로서의 행복을 고백하면서 하나님 앞에 경배와 찬송을 올리고 있습니다. 주님 앞에 깊이 감격하며 “하나님이 내었도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과거입니다. 히브리어의 완결형입니다. “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미래형이 나옵니다.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이 복이 바로 언약관계 안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리는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복입니다. 다른 민족에게는 베풀지 않는 독특한 복입니다. 일반섭리 속에서 주어진 복은 곧 영적인 복으로써 우리에게 임할 것이라는 고백 속에서 하나님 앞에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용과 결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감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가 청년들을 목회할 때 어느 청년이 그런 간증을 했습니다. 자신의 신앙이 요즘 많이 식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예전에는 만 원만 생겨도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하고 그 만 원을 어떻게 쓰면 잘 쓸까를 생각했다고 합니다. 요즘은 좀 풍족해지니까 돈이 들어와도 하나님 앞에 감사할 줄 모르고 사는 자신을 본다고 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아주 작은 것 속에서도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느낍니다. 어떤 때는 커다란 영적인 일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일, 누구를 만나고, 작은 물건이 생기고, 또 어떤 기회가 생기는 작은 과정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내가 평범한 시간 동안에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위로와 격려, 힘을 주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참 신비합니다. 어떤 날은 성경을 읽어도 눈물이 안 나왔는데, 섭리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이 영혼의 감각을 일깨우는데 사용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감격할 때가 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우리는 주님의 은혜에 깊이 감격하면서 아버지 앞에 살아가야합니다.
땅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함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시 67:7)
본문해설
이 시의 구성 방식은 쌍괄식입니다. 글의 결론을 앞부분과 뒷부분에 반복하여 나타내는 기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사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만방 중에 알리소서”라는 결론이 똑같이 7절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다만 그 표현을 바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사”라는 표현이 7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라고 나오고,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만방 중에 알리소서”라는 것은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라고 표현되었습니다. 성경에서는 ‘경외하다’ 혹은 ‘두려워하다’, ‘공경하다’라는 표현을 ‘야레’(arey:)라는 말로 썼는데, 두 구절에 같은 단어가 쓰였습니다.
성경의 복: 영과 육의 총체적인 복
하나님은 제일 먼저 언약백성들에게 복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총체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해야겠다고 의도하시는 대상은 인간의 존재 전체입니다. 인간의 존재는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육체가 영혼의 외연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만약 육체가 없다면 인간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할지라도 그것이 참 인간의 존재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가 볼 수 있는 사물들과 관계를 맺으시는 것을 통해서 그분이 어떠하신 분인지 알게 되듯이, 우리의 영혼도 보이지 않지만 영혼이 육체와 관계를 맺는 것을 보고, 육체를 사용해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통해서 우리 영혼의 성향과 상태가 어떠한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참 놀라운 유비이고 아주 탁월한 설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도 육체와 영혼을 모두 아우르는 통전적인 복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어느 한 쪽에 지나치게 치우쳐서 나머지를 무시하는 것은 성경적인 견해가 아닙니다. 물질의 소유나 혹은 육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행복이 우리의 신앙의 추구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 복을 동일하게 열방과 만민이 누리게 하시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의 핵심은 영적인 복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또한 확장되어 퍼져갑니다. 우리의 육적인 삶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복의 지경을 넓히셔서 우리로 하여금 인간다운 삶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탐욕이 있기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께서 복들을 주시면서 접근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들을 선지자나 사도들을 통해서 경고하셨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없는 육적인 삶의 번영에 대한 허무를 우리에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동안에 일평생 싸워야 할 마음의 적들입니다. 또한 가난을 커다란 미덕으로 여긴다든지 그런 삶을 동경하고 흠모한다든지 하는 것도 성경적인 복의 개념이 아닙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가난을 칭찬하거나 그것이 영적으로 풍요로운 삶의 증거라고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특별한 섭리 속에서 당신의 교회들을 고난 받게 하시는 것처럼 우리들을 결핍과 고통 가운데 두시기도 하시지만 그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미덕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미덕이 되는 것은 그런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누리며 살아가고자 하는 강한 마음의 덕과 선, 하나님을 향한 의지의 크기로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원리를 이렇게 생각해보면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속은 우리로 하여금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이 인간을 처음 지으실 때 이미 인간에게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타락으로 말미암아 두 가지를 다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잃어버렸고,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들과 올바른 관계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복도 함께 잃어버린 것입니다. 영원의 복과 육체의 복이 완전히 분리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두 가지를 함께 잃어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생명나무가 있는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며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육적인 결핍 속에 끊임없이 고통을 받는 것이 타락의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시는 목적이 창조의 목적의 회복이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속하실 때 저주받고 고통 받아서 이마에 땀을 흘려야 겨우 식물을 먹을 수 있었고, 힘써 농사를 지어도 가시와 엉겅퀴만 내는 비참한 비생산, 혹은 열매 없음으로부터의 구원도 동시에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라고 할 때 이 복을 주신다는 말에 ‘베라크’(&r'B])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에쉐르’(rv,a)의 복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의미의 복입니다. 정신과 영혼, 육체까지 모두 포함하는 복을 가리키는 단어로 족장들의 기록에도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복 주시고 아브라함이 복을 받았더라” 등에 나오는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당신의 얼굴빛을 인하여 복을 받고 열방과 만방 중에 당신의 도를 알리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충분히 드러내는 언약백성이 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 복을 주실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인의 기도제목입니다. 하나님의 복의 포괄성, 영적인 축복과 우리의 육적인 행복 사이의 떼어놓을 수 없는 연관성 속에서 시인은 모든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과 이웃의 영혼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때문에 일용할 양식까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소유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이상은 모두 탐욕이라고 해석을 하는데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의 육체가 가장 예민하게 느끼는 것은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가 곧 먹고 입고 마시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가장 기초적인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며 사는 방식에 대해 인간은 가장 예민합니다. 명예욕도 배가 고파서 굶어죽게 된 사람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음식과 바꿀 수 있습니다. 불신앙이지만 오죽했으면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았겠습니까? 에서는 배가 고파서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는 망발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원초적인 욕구인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 몸을 유지하고 생명을 지탱하기 위해 필요한 양식은 극히 적은 부분입니다. 그것들을 확대해서 최대한의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니까 막대한 자원이 드는 것이지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경우라면 별것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것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의존 속에서 살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물질의 크기를 나타낸다고 하기 보다는 범사에 있어서 자기 육체의 생존까지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양식을 위해서는 더 많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올바른 질서속의 복
시인은 이런 하나님의 복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질서를 따라 하나님 앞에 복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 땅의 보편교회의 모든 지체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복을 올바른 질서 속에 두는 것이고 이것을 구함에 있어서 우리의 탐심이 작용하지 않아야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그러한 복을 통해 우리가 큰 나무처럼 거기에 피하는 모든 사람들이 덕과 혜택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돌보고 이끄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이며 구원의 계획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실 것이고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땅의 모든 끝’이라고 했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복수로 나옵니다. 그래서 “땅의 모든 끝들이 하나님을 경외할 것입니다”라고 보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온전한 복을 누리게 되고 그 복은 하나님을 알리는 수단으로써 주의 도가 만방 중에 알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자원은 우리가 가슴에 품고 있는 진리의 말씀들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위한 양식이 되었습니다. 그것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서 많은 덕스러운 것들을 맺게 됩니다. 사랑과 온유,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절제, 충성 등등의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게 될 때 이것들이 없었더라면 참을 수 없었던 사람들을 참고, 이것이 없었더라면 포학하게 대할 사람들을 온유함으로 대하고, 이것이 없었더라면 결코 인내하며 충성스럽지 못했을 텐데 이것들로 인해 고난과 시련을 이기면서 자신을 희생하고 봉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자원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영적인 자원을 제외하고 육적인 자원으로 일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사회적 책임을 이야기하고 봉사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물질적으로 많이 돕고 있습니다. 개신교가 통합이 안 되서 정확한 통계를 알 수는 없지만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이나 불우한 이웃을 돕는 많은 운동에서 개신교의 참여율은 월등하게 높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현상을 보면서 상당히 염려스럽습니다. 교회마다 살기가 나아졌기 때문에 열심히 돈을 거두어서 후원을 하지만 그것이 예전보다 더 많이 주님을 사랑한다거나 아니면 고난을 이기면서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것의 전형이 된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질은 내어놓지만 십자가를 지고 핍박받고 고난을 인내하면서 사람들을 참고, 품으며 그들이 변화되기를 원하는 내적인 투쟁과 몸부림들은 이제 안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이 세상의 도덕으로 대치되는 과정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 자체를 아주 좁게 형성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일반적인 개혁신학 안에서 넓은 의미의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고, 좁은 의미에서는 신자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보지만 그는 딱 잘라 말합니다. “불신자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가? 없다. 하나님의 형상은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있다.”라는 극단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아주 작은 몇 가지 표현에 있어서 그 흔적을 불신자에게서 찾기는 하지만 거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 시대에 있었던 ‘소키누스주의’와 같은 이단들이 참된 경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신적 사랑인 ‘까리따스’(Caritas)라는 표현을 인도주의적인 불우이웃돕기 같은 것들과 혼동하여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참된 경건을 추구하며 살아야 할 영적인 자산에 대해 도외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위기라고 생각했고 양자가 서로 펼쳐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쐐기를 박으며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회심과 중생하지 아니하고는 어떠한 하나님의 형상도 회복될 수 없다.”라고 발언했습니다. 자연적인 사람들이 자연적인 형상을 통해서 덕을 베푸는 것은 거듭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회복된 초자연적인 형상을 통해서 베푸는 덕스러운 삶과 대치되거나 연장될 수 있다는 말들에 쐐기를 박은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지난날 이런 것들의 질서를 분명하게 유지하는데 있어서 실패했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된 기복신앙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한 실패로 오늘날 교회가 정반대로 이 세상 물질의 복 자체를 하찮게 여겨서 신앙의 영역 속에 들어올 수 없다고 생각하고 무시하며 물질적인 탐욕으로부터 멀어졌는가 하면 또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저 이런 것들이 점점 신앙과 삶 자체를 분리시켜서 사람들을 이원론적으로 만들뿐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교회에서 아바타라는 영화를 보지 못 하게 했다면 교인들이 진짜 안 보겠습니까? 아마도 다 보고 교회에 와서 입을 딱 닫고 봤다는 이야기를 안 할 것입니다. 보면 왜 안 되냐고 물으면 뉴에이지 작품이니까 보지 말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보고 와서 서로 말을 안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교회에 와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입을 닫아 버립니다. 시쳇말로 뒤에서 호박씨 까는 삶을 살며 신앙적인 통제 없이 다 듣고 보고 즐기고 먹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삶이 아닙니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주님의 말씀이 적용된 포괄적 주권주의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신자의 의무입니다. 무엇이든지 주님 앞에 가지고 나와서 토론할 수 없는 문제는 없고 하나님 앞에서 시시비비를 가릴 수 없는 문제들은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땅의 모든 끝들이 그런 나타남을 보면서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고 그분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영적인 자원들은 결국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옵니다. 말씀으로 우리의 영적인 자산들을 풍부하게 하고 그 지식들을 흘려보내야합니다.
교회의 사명과 우리의 역할
한 시대의 교회의 사명은 두 가지입니다. 자기 시대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충분히 누리는 것과 후대에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그 중요성에 대해서 사람들은 너무 무지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럽게 살았다는 중요한 표식이 됩니다.
마치 여러분이 자식을 기를 때와 같습니다. 부모가 돈만 많이 벌어놨다고 자식들이 그것을 오래 기억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부모가 가난했어도 오래도록 아버지에 대한 인상과 어머니에 대한 인상이 살아남아서 그들은 갔지만 부모에 대한 기억이 자녀들과 후손들의 삶을 움직이는 하나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도 똑같습니다. 그런 것들을 흘려보내는 도구로서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 육적인 자원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이 포괄적이기 때문에 두 가지를 내포와 외연으로 충분히 누리고 하나님을 아는 영적인 지식과 육적인 축복, 물질적인 섬김을 함께 도구로 사용하여 망가진 육신을 펴고 어둠 속에 있는 영혼을 고치는 포괄적인 섬김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역사를 보면 문제는 항상 인간들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미끄러지고 타락해서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들은 피폐한 상태로 육적인 부요함에 만족을 누리며 살아갔습니다. 자기 자신을 모든 자원의 최종적인 소비처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 앞에 구원의 목적을 전적으로 망각한 패역한 삶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흘러가도록 만들어야합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먹고 입으며 인간적인 삶을 누리도록 하셨지만 나머지는 모두 하나님을 아는 지식위에 육적인 축복을 담아서 떠내려 보내야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굽어진 곳을 펴야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는 진정한 부흥이 필요합니다.
시편56편 강해 1
시편67편 강해 1
시편67편 강해 1
시편67편 강해 1
시편67편 강해 1
시편67편 강해 1
시편67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