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9일 새벽예배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 2:37)
녹취자: 이한슬
이제 여기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사도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제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들의 새로운 반응이 나타납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마음에 깊이 찔려 하면서 어쩔쭐 몰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마음에 찔렸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은혜를 받았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각성이 일어났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양심이 찔렸다 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양심이 깊이 찔려서 그래서 깊이 양심이 찔렸는데 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제... 평소에 자신이 예상하지도 못했던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 큰 혼란과 어려움이 일어나는 것을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사도행전에서 복음이 전파될 때 사람들이 보였던 회심의 공통적인 초기현상이 됩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이 이후에 회심할 때에도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모습을 뵈옵고 그분이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그리고 성경 전체의 진리가운데 그분이 주인공이시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자 그 역시 양심에 찔려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행하리이까 예전에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행하여야 할지를 가르치는 사람들이었고, 그 기준으로 볼 때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잘못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달려가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라서 그것을 주님께 ‘내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라고 묻는 처치가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제 그 뿐만 아닙니다. 그 이후에 이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게 사람들의 마음에 강하게 찔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통해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마음에 이런 깊은 찔림이 없이 하나님 앞에 진실된 회개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거룩한 각성의 역사가 있는 그곳에 거듭남이 있고, 복음의 승리가 있습니다. 처음에 복음이 선포되자마자 이들은 이렇게 복음이 전파된 곳에서 강력한 찔림을 얻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이런 것들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것 그런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기독교나 하나님안에 자신들이 맞는 것을 있나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 하자면 자신이 그 하나님의 복음이 선포될 때에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과 더러운 허물들을 보고 뉘우치고 새로워지고 하는 그거 보다는 오히려 그렇게 자기가 고쳐지고 새로워지기 보다는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주고 이렇게 자기 자신이 변화되지 않아도 자기와 어울리는 어떤 요소가 그 복음에 있는가 뭐 이런 것에 관심이 많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교회를 아무리 많이 다녀도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깊이 찔려서 고통을 느끼고 그래서 두려워하고 그래서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과는 다른 존재이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자기가 찔림을 받아서 자기가 고쳐져서 하나님께 돌아가고 그분과 합치되고 하는 그런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없고 그것에 묻어서 즐거운 것을 찾고, 그래서 제임스 파커라고 하는 청교도 연구가가 그랬습니다. 현대 기독교는 즐거움을 찾다가 망해버린 종교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런식으로 즐거움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변화 받으려고 하기 보다는 그런 것들이 너무 찔림을 당해야 하고 고통스럽고 그러니까 그런 것 보다는 그냥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이 즐거워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자신은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좋아하고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그런 속에서 어울리고 묻히다 보면은 자신이 뭔가 변화된 것 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진정한 변화가 있기 위해서는 이런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 앞에서 깊은 찔림, 그래서 자신이 정말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과 자기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말할 수 없이 더러운 죄인이라고 하는, 그래서 나는 이제 어떻게 하나 그리고 그 무엇으로도 자기의 이런 절망적인 상태를 개선할 수 없다라고 하는 깊은 절망과 어려움 가운데에서 깊이 고통하게 되고, 그 속에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용서를 빌게 되는 그런 역사를 통해서 그가 진정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바로 그런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 이런 역사가 나타나느냐? 그 바로 앞에 보면 인간의 행복이나 인간이 인생을 살아가는 길이나 이런 것을 이야기 할 때 이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나무에 못 박아 죽인 그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셨다 근데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그분이 십자가에 못박게 하셨고 그리고 우리의 의를 위해서 다시 살아나셨는데 그분이 바로 너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그렇게 선포하고 회개가 필요하다는 이 사실을 선포했을 때에 사람들이 깊이 찔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세상에서 기독교라는 신앙 때문에 잘 살고 편안해 질 것인가 그 인간 편에 서서 그래서 그들의 필요를 말하는 것에서는 이러한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우리에게 돌이키는 것이 신앙에 있어서 주된 일인 것처럼 생각을 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는 창조이래로 이제껏 하나님의 선한 창조 계획과 뜻을 가지고 계심에 있어서 변경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반드시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위대한 복음들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그 사실 자체가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못 박힌 그 자체가 내가 죄인임을 입증한다라고 하는 그것에 대해서 깊이 찔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믿을 때 한번 뿐만이 아니라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필요한, 반복되어서 경험되어야 할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찔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깊이 찔림을 당하고 죽습니다. 고난을 당하고 거기서 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복음이 선포될 때에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복음은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 일 수는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사는 이야기,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는 이야기, 이런 것들은 싫어할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나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에서는 진정한 회심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복음이 선포될 때에 그들에게 강한 찔림의 역사가 나타나는데 그 사이에 무엇이 있었느냐? ‘듣고’ 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듣고 가슴에, 마음에 찔려... 그러니까 ‘듣고’. 아무리 능력이 있게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그 말씀은 그 마음을 기울여서 듣는 사람들 마음 가운데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능력 있는 복음이 선포되는 모든 곳에 가슴을 찔려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사도행전 7장에 보면은 스데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스데반이 첫 번째 순교자가 됩니다. 그가 설교를 하는데 베드로가 설교한 것과 거의 똑같은 설교를 합니다. 거기에서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랬는데 마음에 찔려서 회개한 것이 아니라 돌맹이를 집어 들어서 스데반을 때려죽인 것입니다. 그럼 이제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이쪽에 있는 사람들은 마음을 기울여서 들을 때에 그렇게 순종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이 생겨난 것이고 저쪽에 있는 사람들은 들을 때에 거기에 반항하고 도전할 마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더 이상 설교를 듣지 않겠다고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며 그다음에 돌맹이를 들어서 첫 번째 순교자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둘 중에 하나입니다. 적대적이든지 아니면 거기에 대해서 깊이 동의하고 거기에 엎드려지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성령 안에서 능력 있게 선포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사람들을 구원한다기보다는 사람들의 정체를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복음이 선포되기 전에는 모두 같이 어울리며 살다가 선명하게 복음이 선포되면 사람들이 이제 나누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복음을 듣고 마음에 찔려하며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과 반대의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진정으로 교회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 지 너무나도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이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할 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서 사람들의 마음이 찔리게 하고, 찔린 그 사람들이 회개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야하고 교회 안에서는 더더욱 말할 필요도 없이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는 그런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인간을 즐겁게 하는 그런 세상의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불변하는 복음이 담대하게 선포되고 그 앞에서 항상 그것을 싫어하게 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찔려서 돌을 들게 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 같은 사람은 뭐라 했냐면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설교를 한다는 것은 그 설교가 참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면 그것을 아주 심하게 싫어하는 악한 사람들이 들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 그래서 구원받을 사람들을 구원 얻게 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을 얻지 못할 사람들을 그 속에서 가려내는 가라지와 알곡을 가려내는 그런 역할들을 말하자면 최후의 심판이 오기 전에도 복음을 통해서 선행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그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 있게 그렇게 우리를 변화시키고 굴복시킬 수 있도록 기도하고 간구하고 하는 그런 삶을 우리들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