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9일 새벽예배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2:17)
녹취자 : 한지인
계속해서 에서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은혜에 미치지 못하게 되면 쓴 뿌리가 나고 음행에 빠지거나 혹은 한 그릇 식물을 위해서 장자의 명분을 팔았던 에서같은 사람이 된다고 하면서 에서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진전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의 심중에 무엇을 염두에 둔 것인가. 이때에 이미 박해가 시작되었고, 아주 조직적인 박해가 이루어질 조짐을 보였기 때문에 배교할 위험이 있는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서의 이야기를 굳이 거론한 이유는 순간의 신앙을 저버리고 배교하게 되면, 회복하기 어려운 영혼의 상처가 있을 것이다 라는 것을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앞에 6장에서 잠깐 다루었습니다만, 배교라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 일제시대 때도 보면 신사참배를 강요당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미소기바라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미소기바라이는 천조 대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소기바라이로 세례를 받고 미소기바라이라는 예식을 거치고 심지어 일본의 신사에도 참배를 하게 됩니다.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은 끝까지 지나가다가 자동차 문을 열고 고개만 까딱하라고 해도 그것도 못하겠다 하여 결국은 순교를 하셨지만, 그렇게 신앙을 지키고 순교하기까지 신사를 참배하지 않은 사람들은 소수이고,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순응하고 참배를 했습니다. 그들의 이론은 그것이 국민의례라고 합니다. 요즘에도 고이즈미 수상이 본인은 매년 신사를 참배할테니 상관하지 말라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국민적인 의례이기에 다른 나라는 상관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도 깊이 파고들어가 보면 기독교 신앙으로는 굉장히 용납되기 어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인격적인 사람도 아니고 위패를 모신 곳인데 그 사람들은 일본을 위해서 죽은 조상들을 모셔놓은 곳에 절을 한다는 것은, 우리로 말하자면 제사상을 차려놓고 절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명백하게 성경의 개념에 위반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어쨌든 신사참배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배교는 그것보다 훨씬 더 좁은 의미에서의 배교를 이야기 합니다. 제가 아는 분들 중에서 일제시대 때에 주기철 목사님처럼 순교하지 않고 신사를 참배했는데도 정말 존경스러운 신앙의 인격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예로 한경진 목사님도 신사에 참배한 사람 가운데 한 분 아닙니까. 그렇지만 그들이 잘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한 것입니다. 제가 아는 돌아가신 목사님은 신사참배하고 그렇게 많이 회개하셨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처음에는 깊이 회개했는데 두 번째는 갔다와서 조금 회개하고 세 번째, 네 번째 갔다와서는 회개도 안되더라고 그런 고백까지 솔직하게 다 하셨습니다. 이런 것들도 하나같이 매우 잘못된 것이고 배교를 닮은 행위라고 말할 수 있지만,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배교는 그것보다 훨씬 더 좁은 의미의 배교입니다.
하나님께 심히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심히 거스르는 행위를 한 후에 그 마음이 굳어져서 결코 다시 신앙으로 돌아오지 않거나, 이교적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을 가리켜서 성경은 배교라고 말합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거듭난 사람도 여러 가지 연약함 때문에 그런 배교를 닮은 배신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는 결코 거듭난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성경적인 견해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한그릇 식물을 위해서 장자의 명분을 팔았던 에서를 거명하는 이유는, 이 에서와 같이 참된 신자들이 완전히 배교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배교적인 행위에 빠지는 것이 매우 위험한 일이고, 따라서 이런 배교적인 행위를 할때에 에서같은 사람은 다시 그 축복을 돌이켜서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결코 좁은 의미의 배교에 빠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내가 거듭난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내 마음을 지키지 않고 신앙의 결단을 하지 않아도 결코 배교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거꾸로 유추하여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신자가 되었지만 그렇게 배교할까봐 두려워하고 그 배교의 가능성 때문에 겸손해져서 주님을 붙들고 의지하며 사는 것이 거듭난 사람의 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것이 크게 문제되지 않지만, 일제시대 때나, 그 전으로 올라가서 유럽에서 가톨릭의 박해를 받던 때나,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이슬람과 만난 후에 이슬람으로 배교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게 되는 상황에서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하나의 이슈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내릴 수 있는 결론적인 적용은 에서가 한그릇 식물을 위해서 장자의 신분을 팔고 그래서 결국은 세월이 지나서 그 장자의 직분이 팥죽 한그릇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다시 찾게 해 달라고 아버지께 매달리며 눈물을 흘렸지만, 그러나 아버지도 그것을 되돌릴 수 없었던 것과 똑같이 오늘 우리들이 어려움 속에 있고 핍박의 위험에 직면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핍박을 모면하기 위해서 신앙을 팔아먹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지위, 명분과 같은 것들을 내팽겨치는 것은 정말 위험하고 잘못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사도가 강력하게 권고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신앙을 포기하면 나중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님만 아십니다. 결국은 그렇게 장자의 명분을 팔고 눈물을 흘리며 매달렸어도 다시 그것을 얻을 수 없었던 에서의 예를 듦으로서 신앙을 사생결단하고 지키도록 자기의 회중들에게 수신자들에게 촉구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핍박과 환난의 큰 위협의 왔을 때만 사생결단하고 신앙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우리의 마음을 쏟으며 결단하고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정말 정직하게 결심하고 그리고 결단하고 하나님 앞에 정말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것이 없이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고 주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아름다운 명분을 지켜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평소의 신앙생활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위기가 왔을 때 그때에 즉각적으로 어떤 결단이나 큰 결심과 같은 것들이 일어나서 신앙을 지키게 될 것이라고 믿지 말고, 사람은 큰 어려움이 닥치게 되면 더 평소에 하던 대로 합니다. 설교시간에 말씀드렸듯이, 큰 일이 있게 되면 사람들은 더 평소에 하던 대로 밖에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사도가 지금부터 에서를 생각하고 아직 핍박에 강력한 역사가 없어도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스스로 경계하며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살아가다가 어느 한순간 이런 날이 올 때에 그때에 두려움 없이 평소에 늘 마음에 품던 대로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새롭게 각오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생각하면서 오늘 주님이 나를 부르시면 주님 앞에 가지 않습니까. 주님 앞에 갈 때가 되어서 더 이상 인생을 살 수가 없을 떄, 세상에 살았을 때 이렇게 살았어야 되는데, 이런게 아쉽다 이렇게 생각되는 것을 오늘날 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그것이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아름답게 사는 비결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살아가고, 결국은 어느 순간에 주님이 우리에게 그런 상황을 만나게 하실 때 평소에 행하던 대로 우리들이 두려움 없이 그 배교의 위험을 이기게 되고 환난과 핍박으로 인하여 우리의 신앙을 팔지 않을 수 있는 그런 담대함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위기에 대해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물론 위기에 대해 더 많은 우리에게 있는 것들을 불러일으켜야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없는데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매일 종말론적인 기대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우리가 주님을 대면할 것이라는 신앙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