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05. 10 새벽예배
Psalms 6
목 차
징계 속의 탄원(시 6:1-4) 67
범죄한 영혼의 탄원(시 6:5-7) 71
용서해 주신 하나님(시 6:8-10) 77
징계속의 탄원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거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시 6:1-4)
본문배경
다윗의 시중에서 6편은 참회시에 속합니다. 참회시는 다윗이 통절하게 하나님 앞에 참회한 내용을 담은 시입니다. 참회시 속에는 대부분 죄의 고백과 구원에 대한 탄원과 기도응답에 대한 감사 그리고 용서받은 자로서의 삶의 결단 같은 내용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사실 6편이 언제 기록된 것인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시편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범죄하고 난 후에 징계 가운데서 기록된 것이리라고 추정합니다.
두 종류의 고통
시인은 이 시의 서두에서 자기를 징계하지 말아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둘로 나눠서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사물들의 질서를 이용한 징계와 영혼에 대한 징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사물들에 질서를 통한 징계는 하나님께서 일반 섭리 속에서 사물들의 질서를 자신이 원하지 않게 움직여서 주는 징계입니다. 환경의 고통 같은 것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징계가 이루어집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을 때에는 대부분 고통을 수반합니다.
두 번째는 영혼에 대해 직접적인 고통을 주시는 징계입니다. 시인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선지자 나단에 의해서 다윗의 죄가 드러났을 때, 하나님께서 즉시로 사물들의 질서를 흩트려서 고통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왕국도 그냥 있었고 왕위도 그냥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영혼에 의한 고통은 즉각적으로 시작되었고, 나단 선지자가 와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기 전에도 고통이 시작되었지만, 나단 선지자가 선포하고 난 후에는 더 강력한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징계 받은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내가 수척하였다고 했습니다. 진작부터 그런 일이 있었고 여러 날 지난 후에 이 시를 기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자신의 죄로 인해서 슬퍼하는 가운데 시인은 바짝 여위어갔고 피골이 상접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회개라기보다는 하나님 앞에 느끼는 그러한 가책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깊은 번민이 그를 이렇게 수척하게 만들었습니다. 용서의 확신을 통한 그런 커다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 같은 것들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하나님의 징계아래 있는 큰 고통이 이미 계시되었습니다.
이 시인은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을 느끼며, 육신이 수척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뼈도 떨리고 영혼도 떨린다고 고백했는데, 그 표현은 이게 대게 두려움과 관련되어서 성경에 나옵니다. 그래서 여기서 나의 뼈가 떨린다는 징계아래 있는 사람에게 임하는 심판의 깊은 두려움으로 양심의 가책과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많이 근심하면 뼈가 썩는다고 까지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많은 근심은 우리의 골수를 상하게 만들고 육체적인 기력을 빼앗아갑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지은 죄 때문에 이런 깊은 고통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죄를 선택 당시에는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죄를 범하는 즉시 우리의 영혼은 속박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가장 행복한 상태는 하나님의 계명을 넘나들지 않고 계명 안에서 살 때입니다. 인간이 계명을 넘나드는 데서 오는 즐거움을 느끼려고 생각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일생 동안을 죄의 사슬에 매인 채 살아가게 됩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했다고 하지만, 사실 다윗은 한나라의 임금이었습니다. 동양에서 왕은 오늘날의 대통령과는 다릅니다. 왕에게 한 나라 전체가 자기의 제산입니다. 이것을 가산제(家産制, Patrimonialism) 국가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모든 신하들은 녹봉을 받는 사람들이고 모든 백성들은 자기의 땅에서 빌붙어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온 나라가 왕의 재산이고 거기에 붙어사는 모든 백성들은 자신의 종과 다름없습니다. 동양의 가산제 국가에서는 왕이 원하기만 하면 첩을 두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지금 이일로 인해서 큰 징계를 받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나라의 왕은 그렇게 살 수 있을지 몰라도 다윗은 그렇게 살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다윗은 그 나라의 성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세상 사람들의 잣대를 가지고 인생의 규범을 삼으면 안 됩니다. 그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도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그들은 할 수 없는 것도 우리는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새사람에게는 새 규범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들입니다. 새 사람이 새 규범을 따라서 살아야 행복할 수 있지, 새 사람이 옛 규범을 따라서 살면 불행해집니다. 그래서 매 순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경험
그래서 오늘 성경은 시인이 육신의 뼈가 떨린다고 고백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의 영혼도 떨린다고 고백합니다. 육신은 심오한 양심의 가책으로 떨리고 영혼은 하나님의 은총을 하나님이 거두셨기 때문에 떨고 있습니다. 그때에 시인의 마지막 기도가 “돌아와 주십시오. 그래서 영혼을 다시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오웬의 표현에 의하면 신자가 죄를 지을 때 그 순간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죄를 선택해서 죄의 기쁨을 누리는 순간, 신자는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죄를 선택하는 순간에는 신자는 죄도 얻고 하나님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의 속임에 불과하고 죄를 선택하는 순간 그는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죄의 즐거움이 끝나고 하나님의 징계가 시작하면 그는 두려움 속에 깊이 떨게 됩니다. 육신적으로는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서 떨리고 영혼은 하나님의 은총을 거두심으로 떨게 됩니다.
그때 유일한 대안은 하나님 자신이 오시는 것입니다. 왕국이 커지는 것,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위로하는 것,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자기에게 돌아오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신자는 하나님을 잃어버림으로서 하나님 자신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 올곧음으로 하나님을 꼭 붙들고 인생의 길을 가려고 했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만이 가장 귀하신 분이고 하나님만이 가장 소중한 분이시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물론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잃어버렸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참회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들이 바로 일생동안 주님의 손을 붙들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인도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이 깨뜨려진 다음에 자신의 뼈가 떨리고 영혼의 떨리는 경험을 통해서 얼마나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 비참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다윗에게는 이런 타락과 징계의 경험이 일생을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살아가는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복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참회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건지시고 지키신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범죄한 영혼의 참회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시 6:5-7)
본문해설
시인은 본문에서 영혼의 상태가 자신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탄원의 형식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아룁니다.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고 음부에서는 주께 감사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인간에게 있어서 특히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어서 기억은 아주 훌륭한 작용입니다. 기억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에 가득 찬 역사에서 항시 위로를 받았던 것은 과거에 대한 기억 때문에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택하사 애굽의 바로의 압제에서 건져주시고 광야의 생활 속에서 필요들을 공급해주고 보호하셨고 이 모든 것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감사의 제목이었습니다. 또한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찬송의 제목이었습니다. 그렇게 기억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감사하며 살아가는 비결이었습니다.
음부에서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그런데 시인이 묻는 있습니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시인이 범죄하자 육신은 살아있으나 영혼은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반문합니다. 이어서 나오는 이야기도 거의 같은 맥락의 내용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가 누구겠습니까?” 구약시대에 음부는 히브리 성경에서 스올이라고 불리는데, 이때까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렇게 천국과 지옥에 대한 명쾌한 계시가 아직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있어서 스올이 죽은 다음에 인간이 가는 생기도 없고 생명도 없는 활기가 도무지 없는 어둡고 칙칙하고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음부가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장소로 이해되었습니다. 시인의 영혼은 범죄하자 그런 음부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죽음을 느낀 것입니다. 그렇게 생기가 다 빼앗겨 버린 생태가 되었습니다. 그런 음부에 내려가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인간의 보람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것인데, 그럴 수 없지 않습니까?
신자가 범죄하게 되면 살아있으나 사망이 그의 영혼 속에 스며들어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됩니다. 동시에 그의 영혼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할 수 있는 모든 영적인 활기가 거의 사라집니다. 그래서 다윗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영혼의 깊은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래도 다윗은 한 때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 충만하고 그 신이 역사하던 사람인데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습니까? 다윗의 경우는 사울과 달라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거두시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을 때, 성령이 주는 모든 아름다운 생기와 과거를 기억할 수 있는 감사와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같은 것들이 사라져 버린 가운데 거의 죽을 것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날은 구약시대와는 달리 이렇게 각 사람마다 하나님이 성령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구원을 받는 순간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떠나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때까지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그래도 우리들이 죄를 지으면 다윗이 경험한 것 같이 그렇게 영적인 사망 그리고 마음이 음부에 들어간 것 같은 고난의 순간 즉, 하나님의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어둠속으로 들어갑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유를 갈망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불순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유롭게 행동하는 순간, 우리는 즉시 속박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참된 자유는 하나님의 계명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참으로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기 위해서 매일 하나님 앞에 참회하고 말씀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변화되어 하나님 앞에 깨트려져서 계명을 넘나들며 살아가려고 하는 욕망들을 죽이며 살아갈 때, 우리들이 하나님께 사랑받고 또 그분을 사랑하며 계명 안에 있는 삶으로 만족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즉각적으로 유혹이 시작되고 죄를 범하게 되는데, 이렇게 영혼의 고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외의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속된 욕망을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사실은 고통스러울 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우리의 행복을 위한 참된 처방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더 고백합니다. “그것이 내가 탄식하므로 곤핍하여” 여기서 탄식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데서 오는 탄식입니다. 일순간에 죄의 욕망이 한껏 부풀어 올라서 범죄했을 때 그 사람은 아주 큰 만족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잠깐이었고 그 때가 지나고 나니 탄식과 곤고함이 밀려왔습니다. 비참하게 버려진 자신의 영혼을 구해줄 이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놀랍게 체험하면서 그분의 영으로 일생을 산 사람입니다. 그분의 은혜 가운데 충만한 영으로 일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에게 사라졌을 때 그는 말할 수 없는 영혼의 고통을 느꼈습니다. 밖으로는 자기를 비웃는 수많은 사람들의 조소가 느껴지고, 안으로는 하나님과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든 은혜와 사랑의 빛이 사라졌습니다. 실로 안팎으로 생명의 근원을 모두 잃어 버렸습니다. 이때 시인은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을 자신의 힘과 재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으로 사는 것임을 말입니다.
근심으로 인하여 눈이 어두워져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을 삶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하나님만이 우리의 신자들의 삶에 근원입니다. 또한 모든 인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만이 삶의 근원이 되십니다. 이어서 시인이 고백하기를, “자기는 근심을 인하여 눈이 쇠하였으며 대적들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라고 합니다. 얼마나 자신의 죄로 인해서 가책을 느끼면서 괴로워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그 시름이 가득해서 온몸이 약해졌습니다. 다윗이 젊었을 때는 밥을 잘 못 먹고 근심이 있어도 눈이 어두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달라졌습니다. 저도 마음의 평안하고 식사를 잘할 때는 사물들이 참 잘 보입니다. 그런데 식사를 제때 못했던지 아니면 신경 쓰는 일이 많아서 피곤했던지 하면 시력이 현저히 감퇴합니다. 나의 느낌에 30%정도는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전자와 같은 상태에는 능히 볼 수 있고 식별할 수 있는데 후자와 같은 상태에는 잘 안보이게 됩니다. 이 시는 다윗의 소년시절에 기록된 시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하나님으로 인해서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육체의 건강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근심을 인하여 눈이 어두워졌고 대적들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밤마다 참회하는 다윗
비난하는 사람들이나 수많은 대적들로 인해서 그의 마음에 어두움이 찾아왔습니다. 아무 희망도 없는 것 같고 절망적인 분위기입니다. 이 상황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참회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밤마다 요를 적시고 눈물로 침상을 띄우는 것입니다. 얼마나 폭포수처럼 눈물을 흘렸으면 비유이기는 하지만, “나의 많은 참회의 눈물이 내 요를 적시고 나의 침상이 눈물 위에 뜰 것처럼 그렇게 수많은 날들을 제가 탄식과 통곡 가운데 보냈습니다.”라고 했겠습니까? 한번 조용히 눈을 감고 묵상해 보십시오. 왕이 거처했던 궁이 얼마나 화려했겠습니까? 다윗은 이스라엘 임금 가운데 가장 많은 나라를 정복한 임금 중에 하나였고 수많은 재물들을 가지고 있었으니 침전 또한 화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밤마다 침상에 엎드려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누가 말려도 소용없고 잡인들이 접근하지 않은 가운데 밤마다 수척해지도록 식음을 전패하고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었습니다. 요가 흠뻑 졌고 침상이 뜨기까지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가 지은 죄를 하나님 앞에 참회하였습니다. 다윗의 위대한 점은 악행함으로 소문난 악인이 되었지만, 그의 회개는 그의 범죄보다 훨씬 더 많이 우리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런 통절한 회개를 통해서 다윗이 사망의 어둠속에서 헤쳐 나오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도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항상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기는 사람들보다 훨씬 났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사람의 행동 때문에 자신도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핑계를 대면서 누군가가 먼저 원인을 제공했다고 둘러댑니다. 결국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안계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 쌓여가는 죄를 진실한 회개 속에서 청산하지 않습니다. 다윗과 같은 크고 소문난 죄는 저지르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뒤에서 호박씨 까면서 수없는 작은 죄들을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혼에는 활기가 없고 생기가 없습니다. 죽음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의롭게 여기고 다른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결국은 이런 사람들에게서는 진실하고 통절한 참회를 볼 수가 없습니다. 양심의 가책은 느낄지 모르지만 회개의 눈물이 없습니다. 유감으로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참회의 정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잘못된 것을 돌이키지 않습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는 과거에 자기가 그런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 통절하게 뉘우치며 회개하고, 죄를 지었던 자신을 미워하고 처벌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버리는 것을 통해서 자기부인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회개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함으로 사람들은 점점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갑니다. 이런 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참다운 기쁨과 행복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시인이 철저하게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의 얼굴을 감추십니다. 그리고 영혼들에게는 곤고한 날이 시작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너무 엄격하다고 말하지만 사실을 죄가 커서 하나님이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참회가 없기 때문에 외면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모든 근본은 참회의 생활로 떠받들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참회하고 올바른 길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새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교훈입니다.
용서해 주신 하나님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시 6:8-10)
본문해설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 앞에 애통하며 토로하던 시인이 갑자기 “행악하는 너희여 다 나를 물러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나의 간구를 들으셨도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을 내릴 수 있겠지만, 저는 시편에 나오는 이런 삽입구 형태의 돌발적인 표현들이 우리의 기도의 경험 안에서 해석되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가끔 여러분들이 시편을 보면 문맥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삽입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계속해서 시인이 화자가 되어서 말을 하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이 시편 속에 돌발구로 삽입되어 들어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이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견해를 가질 수 있겠지만 저는 시인이 깊은 기도 가운데 들은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인의 사죄의 체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하고 시인은 깊은 영혼의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침체 속에서 통절하게 부르짖고 하나님 앞에 가혹하리만치 깊은 날들을 침체 속에서 보내며 통절히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읽은 시편 속에서 자신의 눈물로 이불을 적시고 침상을 띄웠다고 표현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우리들은 확정할 수 없지만, 어느 한 순간에 시인은 하나님에 용서의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비참한 자가 되어서 흐느껴 울던 다윗이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나의 간구에 응답 하셨도다”라고 말할 수가 있었습니다.
시인이 자신의 죄를 놓고 하나님 앞에 통절하게 참회하며 간절한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시인의 고통하던 양심은 위로를 받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거두실 것 같고 구원의 기쁨을 모두 잃어버릴 것 같은 비참한 정죄감에서 사유하심을 경험한 것입니다. 물론 그 이후로도 이러한 죄를 지은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계속되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금 화목을 누리게 하시고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사죄의 감각과 영광에 대한 감각,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원래의 감각을 상당 부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징계를 통해서 오는 고난이 있기는 했지만, 모든 것들을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고난의 길을 가게 되었으니 그 고난이 도리어 자기 성숙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깊이 경험한 사죄의 체험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회복
신앙의 모든 담대함은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자세는 하나님 편에 서 있는 것입니다. “천만인이 나를 외워 싸고 만인이 나를 두른들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세상의 많은 왕들과 방백들을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는 개의치 않습니다.”라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편에 서는 방법은, 가장 좋은 방법은 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고 그분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항상 행하므로 하나님께서 나와 항상 함께 하시도다”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사는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핵심은 하나님과 온전한 평화를 누리고,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갈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그렇게 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진실한 참회의 삶입니다. 시인이 바로 일의 증인입니다. 그토록 기나긴 세월동안 시인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왔습니다. 이 사람처럼 하나님과 평안을 누렸던 사람이 구약에서 거의 없을 것입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영광에 목마른 삶을 산 사람도 흔치 않습니다. 그런데 범죄 함으로 모든 것이 깨트려 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깨트려진 관계로 그를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는 스스로 깊이 깨트려지면서 자기의 죄를 미워하게 되고 참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음성이 다시 들렸습니다. 어떤 음성이 들렸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혼의 깊음 속에서 몸부림치며 흐느껴 울던 시인의 간구에 하나님께서는 용서의 음성을 들려주신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용납하심의 확신
자신이 다시 하나님께 용납되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악인들을 향하여 말할 수 있었습니다. “행악하는 너희들이여 너희들은 다 나를 떠나라,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나의 곡성을 들으셨다 나는 다시 하나님 앞에 살겠노라” 사람들은 이후로도 오랜 동안다윗을 욕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진실과 오해가 뒤섞여 있었습니다. ‘충성스러운 우리아의 아내를 죽인 놈’, 진실이었습니다, ‘남의 아내를 빼앗아 가로챈 놈 나쁜 놈’, 진실이었습니다. ‘사울의 가문을 말아먹은 놈’,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진실이든 진실이 아니든 모든 것이 뒤섞여서 시인을 괴롭히고 고통을 주었는데, 시인은 그것과는 상관없이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에게 사죄의 음성을 들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살 수 있었습니다.
결론과 적용
그런 일들이 시인에게 안 일어났으면 참 좋았겠지만, 이미 일어났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런 일들이 일어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일을 계기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태도는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게끔 하나님이 역사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들이 범죄 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넘어지게 되었을 때, 위대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우리는 이성을 가진 사람이니, 우리가 넘어진 그곳에서 믿음으로 다시 하나님 앞에 일어나서 사는 것, 그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회복되고 나면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손가락질을 받을지 모르지만 모든 것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우리를 더욱 진실한 사람, 아름다운 사랑의 사람으로 바꾸어 가실 것입니다.
시편6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