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70
목 차
내 얼굴을 찾는 자들을 욕되게 하소서(시 70:1-3) 1
주의 구원을 사모하는 자의 찬송(시 70:4) 5
하나님을 찾는 자(시 70:4) 10
가난한 자의 기도(시 71:5) 15
가난하고 궁핍한 자의 기도(시 70:5) 21
시편73편 강해 1
시편71편 강해 1
시편70편 강해 1
시편70편 강해 1
시편70편 강해 1
시편70편 강해 1
시편70편 강해 1
내 얼굴을 찾는 자들을 욕되게 하소서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찾는 자로 수치와 무안을 당케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로 물러가 욕을 받게 하소서
아하, 아하 하는 자로 자기 수치를 인하여 물러가게 하소서”(시 70:1-3)
본문해설
시편 70편은 일종의 탄원시입니다.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1절에서 3절까지는 악인을 위하여 비는 기도, 4절은 하나님을 찾는 자를 위한 기도, 5절과 6절은 자신의 처지와 간구로 나누어집니다.
나를 건지소서
제일 먼저 1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향해 탄원합니다. “나를 건져주옵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라는 간구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시인은 악인에게 심한 고통을 당하고 심적으로 괴로움을 겪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시편에는 ‘영혼’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이것은 히브리어 ‘네페쉬’(vp,n<)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것을 거의 획일적으로 ‘영혼’이라고 번역했는데 사실은 ‘영혼’이라는 하나의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많은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문맥에 따라 각각 다르게 사용됩니다. 영어에도 그런 흔적이 나옵니다. “There is not a soul.”을 직역하면 “거기에는 하나의 영혼이 없었다.” 이렇게 되지만, “한 사람도 없었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영어의 용법은 히브리어 성경을 번역의 과정에서 온 잔재들입니다. ‘네페쉬’라는 단어는 ‘목구멍, 사람’ 등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목숨’을 뜻합니다. “내 목숨을 찾는 자들로 수치와 무안을 당케 하옵소서”입니다. 악인들 중에는 영혼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도 많은데 어떻게 악인이 영혼을 노리겠습니까? 그것은 시인이 어려운 상황에서 토해놓는 하나의 고백일 뿐입니다.
“내 영혼을 찾는 자로”, 즉 “내 목숨을 찾는 자로”, 악인의 관심사는 궁극적으로 시인 같은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악하게 살고자 하는 소원이 강하게 되면 선에 대해 더욱 고통스러워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마음이 부패하고 악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이해관계가 맞물려있지 않는 한, 악이 그에게 커다란 고통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올바르고 선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굳건한 사람들에게 악은 커다란 고통을 줍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이치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추구하고 언약백성으로서 주님이 자신을 구속하신 뜻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악인은 그 중심이 하나님이 아닙니다.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거나 말로는 하나님을 인정해도 실제로는 무신론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들이 그려가는 삶의 질서가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시인의 마음 안에 있는 질서와 상합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을 때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신 이유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면 그것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일용할 공기를 공급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우리가 누리고 살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는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까지 식생활의 공급이 고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악인을 위한 탄원
시인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악인들이 그려가는 질서와 경건한 시인이 그려가는 질서가 상합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시인이 악인들의 멸망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악인을 위한 탄원의 기도는 대개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이라고 보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충분한 하나님의 계시가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에 준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계시의 부족이든 영적인 미성숙이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이든지 간에 시인은 악인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탄원했습니다. 간절한 탄원 속에서 시인은 “나의 목숨을 찾는 자로 수치를 당케 하시며 상함을 기뻐하는 자로 물러가 욕을 받게 하소서”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일평생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영혼을 찾는 자’라는 것은 목숨을 찾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경험한 바였습니다. 그는 사울이 풀어놓은 추격꾼들이 자기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엄청난 포상이나 커다란 위협이 약속되어 있어서 그 일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도록 시인을 찾아 나섰던 사울의 군사들처럼 집요하게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것입니다. 중간에 포기하거나 힘들어서 그 일을 접지 않고 어떠한 난관이 있어도 끝까지 추적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시인을 미워하고 그의 목숨을 찾으면서 집요하게 추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인정해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공개하심으로써 그들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과 무안을 당하게 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그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시인이 상하기를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이 상하게 하든지 무엇으로 인해 상하게 되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상한다’는 말은 죽도록 얻어맞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시인이 폭력과 억압 속에서 뼈가 부스러지고 살이 짓이겨지는 죽음과 방불한 고통을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물러가 욕을 받게 하옵소서”라고 호소하는 시인의 간구는 전쟁의 개념입니다. 전쟁에서 패배할 때 사람들은 퇴각을 합니다. 그때의 부끄러움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들이 영광 대신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고통을 받게 해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여기서 ‘아하, 아하’ 하는 것은 히브리 사람들이 조롱하는 표현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들이 “수치를 인하여 물러가게 하소서. 수치를 당해서 뒤로 물러가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영광을 받으면 힘을 얻고 격려를 받지만 욕을 먹고 비난을 받으면 뒤로 물러나 위축됩니다. 원수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
시인은 자신의 목숨을 찾고, 상함을 기뻐하고, 조롱하는 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 그들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보호하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악인들은 자신의 목숨을 없애기 위해 찾아다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악인들은 자신을 죽도록 두들겨서 상하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심령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보호하시고, 조롱하는 악인들과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인정해주시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어려움과 시련을 만나 주님께 피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이 얼마나 풍부한가를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주의 구원을 사모하는 자의 찬송
“주를 찾는 모든 자로 주를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모하는 자로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 70:4)
들어가는 말
간절함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동일한 길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핍박을 받게 되면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예전에 제가 학교를 다닐 때 공산권에서 특수 선교를 하시던 선배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지금은 자유로운 시대가 되었지만 당시 공산권은 서슬이 시퍼렇던 시기였습니다. 그 때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에 들어가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찾아내고 그들을 자유세계로 탈출시키는 것을 돕는 특수 선교였습니다. 이분들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에서 어느 부부가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일 년이 조금 넘었는데 그들이 선교사를 만나더니 러시아로 다시 돌아가게 해줄 수 없냐고 묻는 것입니다. 살기는 미국이 좋은데 신앙생활을 하기에는 러시아가 훨씬 좋다고 하면서 자유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러시아를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본인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그랬습니다. 일 년 동안 느꼈던 신앙의 격차와 환경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본 것입니다. 비록 박해가 있고 고난이 있지만 거기서는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며 핍박을 이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사모함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런 것입니다. 핍박받는 사람이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지 박해받지 않는 사람이 박해받는 사람들을 위해 하는 기도는 피상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시인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과 같이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과 같이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의 제목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이 기뻐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의 기쁨이 무엇이겠습니까? 병행법으로 반복해서 나오는데, 형태는 바뀌었지만 의미는 같고 더 구체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주의 구원을 사모하는 자로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광대하시다 하게 하옵소서” 여기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명백해집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시련과 어려움들을 만나고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어려움들을 만날 때 하나님만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어느 정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궁지에 몰리면 우리는 돈을 벌 수 있고 꿀 수도 있고 대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병이 나면 살고 죽는 것이야 하나님의 뜻이지만, 우리 손으로 약을 지어 먹을 수도 있고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근원적인 해결이 아니라 부분적인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 완전히 그것을 해결해서 어려움을 모면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려움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 힘으로 넘을 수 없는 벽을 주신 것은 혼자서 잘 해결해보라는 시험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연약한 인간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매달리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꼭 해야 되지만 나 혼자의 힘으로 안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반복해서 마음을 먹지만 마음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것들, 마음에 순종했다 하더라도 외부의 도움 없이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 늘 숙제로 남는 것,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구원을 사모하게 하기 위하여 만드신 상황이고 환경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당신을 향해 간절해질 수 있도록 수시로 숙제를 주십니다. 문제를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매달리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훨씬 더 열렬해질 것입니다. 반드시 해야 하지만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것들을 조용히 돌아보면서 주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믿음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해주시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 주님의 구원을 열렬히 사모하는 사람들이 기뻐하고 감격하는 일들은 어떻게 일어납니까? 고통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과정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새롭게 알게 되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믿는 우리에게 어려움을 허락하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광대성
그 때 발견하는 속성은 하나님의 광대성입니다. 광대성은 하나님의 존재적인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둘로 나뉘는데, 존재적 속성과 품성적 속성으로 나뉩니다. 품성적인 속성은 인간들과 맺으시는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속성입니다. 그것들을 관계적 속성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존재적 속성은 관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한 속성입니다. 이것을 독립적 속성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영원성, 무한성, 완전성과 같은 것들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나서 ‘하나님은 참 광대하시구나. 무한하시구나.’라는 고백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광대성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에 장소적으로 안 계신 곳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만드신 법칙, 그리고 당신이 만드신 규칙으로만 통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도 안 계신 곳이 없이 계셔서 친히 세계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신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광대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인을 비롯하여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악인이 의인들을 박해하고 사람의 뜻이 하나님의 뜻을 이기는 것 같아서 하나님이 거기에 안 계신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악을 잠시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나서 상처가 아물듯이 악이 모두 정리되고 나서 여기도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으신 분이시고,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해도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는구나.’ 하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리학에서 이 우주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생각합니다. 아직까지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이 ‘빅뱅이론’입니다. 원래 이 우주는 천문학적인 ‘특이점’이었다는 것입니다. ‘특이점’(singularity)은 블랙홀의 핵심을 가리키는데 크기는 거의 제로이지만 질량은 무한대인 점입니다. 크기가 거의 없는 무한대의 질량을 가진 특이점이 폭발을 하면서 우주가 이루어졌고 폭발에 대한 증거는 우주 공간에 수없이 널려있습니다. 아직까지는 그것이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입니다. 천문학자들은 그것이 영원과 시간 사이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유럽에서는 10조원을 들여서 27km나 되는 전자광 가속기를 만드는 공사를 실행하고 있는데, 이것도 그러한 비밀을 풀기 위한 것입니다.
생각해봅시다. 크기가 거의 없어 ‘제로’에 가까운 아주 작은 특이점이 있었다고 합시다. 그것이 폭발을 일으켜서 이렇게 어마어마한 우주가 되어버렸다고 합시다. 그 작은 점이 하나님 품 안에 있었다면 그것이 커진 다음에도 하나님 품 안에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 모든 크기는 ‘0’으로 수렴되는 크기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다고 말해도 충분한 것입니다. 세계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주님이 안 계신 곳이 있는 것같이 여겨지는 것은 우리의 상식의 틀과 불신앙의 문제이지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면서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으신 무한하고 광대하신 분이며, 나 같이 티끌 같은 인간과 나를 에워싼 수많은 악인들이 사는 도시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통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자기와 같은 처지에서 목 놓아 주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고백하도록, 안 계신 곳 없이 우리의 모든 삶과 영혼과 외면의 세계뿐 아니라 내면의 세계까지 하나님의 포괄적인 주권을 고백하도록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의 힘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상황과 처지가 있다고 합시다. 그것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은 여기에도 계시는구나. 당신의 주권으로 통치하시는구나.’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기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은혜는 마음을 다해 간절히 주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이며 축복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
“주를 찾는 모든 자로 주를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모하는 자로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 70:4)
본문해설
본문에는 ‘하나님을 찾는 자’, ‘주의 구원을 사모하는 자’가 나오는데 이것은 평행법적인 반복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환란과 시련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주시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 중에도 환란과 시련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대신 자신의 힘으로 어려움을 해결해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련과 어려움을 만났을 때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믿음을 잃어버리는 사람들도 늘 있어왔습니다.
하나님을 찾음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주님의 구원을 앙망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라고 하는데 찾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래전 일인데 여권을 만들고 미국 비자까지 받은 다음, 잘 보관해둔다고 책갈피 속에 끼워놨는데 어디다 두었는지 생각이 나질 않았습니다. 책이 한두 권이 아닌데 그걸 다 뒤지면서 찾아보아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미국 비자를 받는 것은 까다로웠습니다. 서류를 꽤 많이 만들어가서 받았는데 다시 해야 된다고 생각하니 막막했습니다. 집사람이 포기하고 다시 발급을 받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도 두주 정도 마음속에서 사라지지를 않았습니다. ‘겉모습이 푸르스름한 책 사이에 끼워놓은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면 밤중에라도 내려가서 불을 켜고 푸르스름한 책을 다 찾아보았습니다. 일주일 정도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는데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게 바로 시편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이구나. 이 정도로 마음에 꽂힌 것이구나.’ 아마 그 이상일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의지결핍입니다. 무엇을 찾다가 ‘없으면 그만이지.’ 하며 쉽게 포기해버립니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것도 그런 수준 아닙니까? 하나님을 만나야 할 필요, 주님의 은혜를 받아야할 필요를 안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만나고자 하는 의지의 올곧음과 크기가 그렇게 크지가 않기 때문에 또 다른 일에 대한 생각이 마음을 차지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나님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지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엔 이 모습이 당신을 의지하며 사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바라보시고 생각하시는 판단입니다.
성경은 “주를 찾는 모든 자로 주를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이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환란 속에서 자기를 도와주시는 것을 통해 ‘아, 하나님이 내 편이시구나.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으셨구나.’ 하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인하여 즐거워하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높은 사람이나 존귀한 사람으로부터 작은 선물을 받거나 칭찬을 들을 때 그 선물이나 칭찬 자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그 사람과의 관계를 확인하게 됩니다. ‘저분이 나를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는구나. 사랑하는구나.’ 그런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람의 마음을 깊이 알게 되듯이, 하나님이 시련 속에서 우리를 도와주시면 그것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께 잊혀진 사람이 아니구나. 하나님이 나를 긍휼이 여기시는구나.’ 하는 것을 깊이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고 원하시는 믿음 생활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때 구원해주시면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광대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광대성은 하나님의 무한하심입니다. 장소적으로 무한한 것을 편재성이라고 하고 대상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끝이 없이 모든 것을 알고계시는 것이 전지하심입니다. 어느 특정한 시간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간에 걸쳐 계신 것,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하심입니다.
다윗이 살던 시대 사람들은 ‘영역 신’(local God)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들이 너무 많아서 각각 자신의 지역과 관할을 가지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탄 것을 향하여 성경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라고 말했습니다. 학자들은 그 관할을 벗어나면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요나가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여호와를 떠나 어디로 가겠습니까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의로운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십니다” 이런 고백은 그 당시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었던 지역신의 개념을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가 온 땅과 만물 위에 가장 뛰어나시고 어디를 가든지 그분을 피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광대하심에 대한 새로운 인식입니다. 세상의 신들은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생각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온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서 모든 만물을 주관하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직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모두 하나님에 대해 적절한 지식을 갖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해 전에 해외에 나가서 어떤 목사님과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식사 자리에서 목사님이 한 안수집사를 굉장히 칭찬하셨습니다. 믿음이 좋고 훌륭하다면서 칭찬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음식을 준비한다고 다 흩어지고 그 집사와 제가 단 둘이 남게 되었습니다. 목사님도 자리를 비우셨을 때 그분이 저에게 질문을 해왔습니다. “목사님, 늘 궁금하게 생각하던 것이 있는데 질문을 하나 해도 될까요?” 그리고는 황당한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불교, 천주교, 이슬람교, 힌두교, 수없이 많은 종교들이 있고 우리는 그중에서 기독교를 진리라고 믿고 살아가는데 만약에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갔을 때 기독교가 가짜이고 이슬람교가 진짜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신자가 되는 신앙부터 다시 배워야합니다.”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결국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믿음을 함부로 잴 수는 없지만 그 기준이 교회에 나오고 목사님께 협조를 잘하고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목사님이 무엇을 보고 그 사람이 훌륭한 믿음을 가졌다고 칭찬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정말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있는가에 기준을 맞추지 않은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삶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빛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고 그것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경험을 통해 알아감
시인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시련과 환란 속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을 때 응답해주심으로 하나님에 대해 새롭게 알게 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지켜보시고 고난을 당하는 의인을 멸시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줄 알고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에서 배운 것입니까?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배운 것입니다.
아무리 바이올린 같은 악기를 잘 만들었다 하더라도 켜지 않으면 소리가 안 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지식들을 켜지 않으면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다양한 환경, 고난, 시련, 아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배신, 그런 부정적인 것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 영광, 기쁨,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의 활이 되어 현을 건드리면서 다양한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돌아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큰 축복을 통해서만 배우는 게 아니라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도 배우게 됩니다. 그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참 좋은 분이시다. 아름다운 분이시다.”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러나 시련과 환란 자체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전달해주는 아름다운 가락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을 때 그것을 읽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항상 생각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인생 자체에 매몰되어 거기서 번영하고 잘 살고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리고 많은 물질들을 소비하면서 사는 데서만 인생의 행복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보이지 않는 성품을 연주하셔서 당신의 가락을 들려주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배워갑니다. 오늘은 어제보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많은 진리를 알아가며 하나님의 성품에 부합하도록 살아간다면 세월이 흐를수록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 생활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가난한자의 기도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니 여호와여 지체치 마소서”(시 70:5)
본문해설
후렴구처럼 간구문이 자주 등장을 합니다. 그때마다 시인이 고백하는 바는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입니다. 왕이 되어서 시를 쓸 때도 이 고백은 반복됩니다. 이 고백이 물리적으로 돈이 없고 가난하다는 뜻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물질이 없어서 가난한 것과 마음이 가난한 것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습니다.
시인은 가난을 경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도망을 다니면서 먹을 것이 없어서 제사장 이외에는 손을 댈 수 없는 진설병을 먹기도 했습니다. 그가 왕이 된 후에 자신이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고백했을 때 그 기억은 또렷이 남아있었습니다.
시편을 보면 여러 표제어가 붙어 있습니다. 이 시에는 ‘기념하게 하는 시’라는 표제어가 붙어있습니다. ‘마스길’이라고 하는 시가 사람들을 지혜롭게 하기 위한 시라면, 기념하게 하는 시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과거의 일어났던 사건들을 기억하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가난하다는 것
극도로 가난해지면 부유했을 때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버리게 됩니다. 나쁘게 이야기하면 사람이 비굴해지고, 좋게 이야기하면 겸손해집니다. 가난해지면 체면도 거들먹거리는 것도 모두 사라지고 ‘저 사람이 내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에 모든 관심이 쏠리게 됩니다.
시인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하나님을 너무나 필요로 하기 때문에 마음의 부요함이나 거기에서 오는 자만심, 교만, 타성주의, 이런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 한분을 간절히 앙망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시인은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내게 속히 임하소서”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합니다.
가난과 궁핍함은 하나님으로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지 다른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악인들에게 에워싸여 시련과 고난을 당하지만 시련이 멈추고 악인들의 횡포가 모두 끝나고 나면 다시 배부르고 만족하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이것들은 자신의 상태를 드러나게 하는 도구가 되었을 뿐,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마음과 영혼의 가난함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주님이 아니면 채워질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건강이 나빠지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 그러나 몸이 건강할 때 음식이 들어가지 않으면 배가 고프고,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목이 마릅니다. 몸이 제대로 반응해서 욕구를 불러일으켜 그것들을 공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몸이 창조의 상태, 타락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면 마음속에 일어나는 욕구들을 어느 정도는 신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을 마시고 싶다는 것은 몸이 그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고기가 먹고 싶다는 것은 몸이 그것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야채가 먹고 싶다면 그것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서 균형이 깨져버렸습니다. 그래서 배고픔을 못 느낍니다. 그러나 밥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옆에서 다른 사람들이 밥 먹는 것을 보면서 밥에 대한 욕구가 생겨나거나, 마지못해 한술을 떴는데 입맛이 돌면서 밥을 먹고 싶은 욕구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몸이 건강한 상태로 돌아와서 밥을 먹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고 한다면 그 욕구는 밥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지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있겠습니까? 목이 마르면 물이 들어와서 몸을 두루 적시기 전까지는 해갈되지 않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찾게 하심
시인이 마음이 가난하고 궁핍한 자가 되어서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 것은 그가 단지 고통 받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고통은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보게 하는 도구가 됩니다. 결국 필요한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물리적인 시련과 어려움에서 자기를 건져주신 것 때문에 만족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건져내시는 모든 과정 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 주시는 인정, 이런 것들을 통해서 영혼의 참된 만족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거기에서 진정한 만족과 유익을 얻고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만약 모든 일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고, 어려움 없이 마음먹은 대로 일들이 잘 되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 그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고민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할 내용이 없었던 때가 있습니까? 마음이 건조해지고 살아가는 것이 퍽퍽하고 자신도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환경을 만들어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간절히 찾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매달리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하나님의 배려요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마치 고장 난 라디오 같습니다. 옛날에는 라디오를 때리면 소리가 났습니다. ‘지지직’ 그러면서 안 나오다가 ‘탁’ 때리면 소리가 납니다. 요즘은 그렇게 때려야 소리가 나는 라디오는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옛날 라디오와 같습니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가 하나님이 한번 ‘탁’ 때려주시면 한동안은 소리가 제대로 납니다. 하나님은 인생에 시련도 주시고 고난도 허락하시고 그것을 통해 당신을 찾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우리의 생활이 점점 더 나아지고,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 하나님을 잘 찾지 않습니다. 그것이 세계선교역사의 경험입니다. 선교학자들은 5천불이 기준선이라고 말합니다. 획일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경험으로 볼 때, 5천불 이하가 될 때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다가 그 선을 지나면서부터는 점점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영혼의 문제
우리는 물질이나 경제, 건강, 환경, 이런 것들에 예민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때리셔서 우리의 마음에 소리가 나게 하기 위한 좋은 도구입니다. 인간을 정말 고통스럽고 괴롭게 만드는 것은 물질이나 환경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을 접으면 어느 정도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보다 더 깊은 내면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의지할 곳 없는 처지, 영혼 깊은 곳에 하나님이 없는 고통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고 말한 것과 같이 궁극적으로는 정신과 영혼의 문제로 돌아가게 됩니다. 물질이나 돈을 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시급한 문제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돈이나 무엇으로도 도울 수 없는 문제들입니다.
오늘날 현대사회에서 예술뿐 아니라 오락, 문화, 모든 방면에서 이것이 절망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절망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타락입니다. 타락은 무엇 하나가 미친 듯이 좋아서 달려가는 성격의 것이라기보다 인간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영혼과 마음이 방황하고 있는 증상이 극단적인 쾌락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얼마나 인간이 방황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물질 같은 것들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문을 펼치면 나오는 세상 돌아가는 일들, 드라마 속에서 인간의 공허한 모습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인생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해줄 수 있는 답은 찾으려고 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탈출구를 찾으려고 몸부림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현대인들이 처해있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의 만족
반면에 시인은 아주 정직하게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을 보았고, 영혼의 곤고함의 궁극적인 치료책이 상황이나 환경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심지어 원수들이 내 앞에서 진멸되었을 때도 그들이 망했다는 사실이 위안과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내 편이시고, 나와 생명의 관계를 갖고 계시며, 부족하지만 자신이 언약 백성으로서 주의 생명을 힘입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셨다는 것 때문에 감격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한번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 운전수가 나한테 말을 붙였습니다. “손님, 속도 감시 카메라가 있잖아요. 저거 엉터리가 무지하게 많습니다.” “그래요? 왜 그럴까요?” “분명히 정상 속도로 갔는데, 시속 20km가 오버되어 찍혀서 딱지가 날아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법정가면 변호사도 사야 하는데.” “변호사는 안사고 돈을 주고 사람을 사서 똑같은 속도로 달리게 하고 몇 km가 찍히는지 봤습니다. 30만원을 들여서 그것을 촬영했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했습니까?” “말도 마십시오. 제가 10만원을 물어야 되는데 하도 화가 나서 법정까지 가서 이기고 결국 안 냈습니다. 그런데 증거자료를 만들기 위해 30만원이나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말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돌아오는데 30만원이 문제가 아니라 기분이 너무 좋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겼다. 내가 옳다.’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법정에서 경찰을 상대로 소송을 해서 자신이 옳다는 것을 인정받았을 때도 저렇게 기뻐하는데, 만약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서 양심과 율법이 송사하고 수많은 원수들이 우리를 송사할 때 주님께서 “너는 의롭다함을 얻었다. 네가 옳다.” 이렇게 인정을 해주시면 얼마나 기뻐하겠는지를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곤고하고 한없이 괴로울 때, 그것의 시작은 물질이 없고 세상 일이 꼬인 것으로부터 비롯되지만 힘들지 않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 주님이 생사 간에 만족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인이 기대하는 바이고 우리가 기대하며 살아야하는 바입니다.
가난하고 궁핍한 자의 기도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니 여호와여 지체치 마소서”(시 70:5)
본문해설
시인은 하나님의 광대하고 위대하심을 찬송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시련과 고난 속에서 나를 건져주시면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능력이 많으신 분이신지를 보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겠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어떻게 보면 시련과 환란이라는 것은 예전에는 몰랐던 하나님의 성품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주어진 상황과 현실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믿음으로 반응하는가에 미래가 달려있습니다. 본문의 고백은 하나님이 위대하고 능력이 많으신 분이 아닌데 하나님의 능력을 고난 속에서 경험하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래 위대하고 능력이 많으신 분이신데 고난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심으로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는 뜻입니다. 시인이 고난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묵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시련과 고난에서 건져낼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묵상하고 생각할수록 자신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시인은 자신이 굉장히 가난하고 궁핍한 처지에 있다고 고백합니다. 다윗의 시에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라는 표현이 자주 반복됩니다. ‘가난하다’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에브욘’(@/yb]a,)인데 ‘거지’를 뜻합니다. 다른 사람이 자비를 베풀어 빵 한 덩어리, 포도주 한 모금이라도 주지 않으면 생명을 부지할 수 없는 막막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라는 표현은 수사적인 어구가 아니라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것과 같이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파산선고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에브욘’을 히랍어로 옮긴 것이 ‘푸토코스’(πτωχὁς)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의 상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외에는 어떤 대안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인간의 죄악과 부패함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모든 부패함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돈이나 권력으로 다른 사람을 굴복시킵니다. 자녀들이 어리면 폭력으로 굴복시킵니다. 굴복시키기 어려운 상대라도 성질을 부려서라도 결국에는 굴복시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 주위에 친구가 없어서 정작 자신은 외로워집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으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이라도 복종시키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복종시킬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겨루게 됩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과 겨루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라는 고백이 있을 수 없습니다. 통회하는 심령, 하나님 앞에 상하고 찢어진 마음이 아니면 이 고백이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생
다윗이 궁핍한 사람이었습니까? 가난한 사람이었습니까? 온갖 보물을 손에 넣은 사람이었고, 한나라의 제왕이었고,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부강한 시대를 구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고백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런 것들이 자신의 인생에서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찾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깊이 기억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들을 불러 아버지 앞에 살도록 만들어 주셨고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형통하게 해주실 때는 “하나님 때문에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되었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고통 받고 어려울 때는 “내가 나를 더 많이 의지하였구나. 그래서 인생의 결과가 이렇게 되었구나.” 하면서 자신에 대한 신뢰를 버리고 반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오늘도 한시 삼십분에 잠에서 깼습니다. 한참동안 잠이 안와서 마음속으로 묵상하고 기도하다가 다시 잠이 들었는데 문득 세월이 정말 빠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제도 어느 교수한분이 정년퇴임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는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젊은 교수님이셨는데 벌써 정년퇴임을 하신다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눈물이 나옵니다. 오죽했으면 시인은 “하나님이여 주께서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라고 고백했겠습니까?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없는 것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동수 장로님이 지금 제주도에 입원해 계십니다. 체육대회를 하면서 몸이 안 좋아서 감기기운이 왔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균이 몸에 확 퍼지면서 몸에 염증이 생긴 것입니다. 새벽에 이상해서 응급실로 갔더니 응급실에서 잠깐 치료한 후에 더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해서 더 큰 병원에서 치료를 했습니다. 며칠사이에 온몸에 균이 번지고 그 속에 고름들이 생겨나고 뇌, 척추에 전이 되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면 50%이상은 죽는다고 합니다. 제가 두 번 제주도에 내려갔다 왔는데 안정이 되고 치료가 되었습니다. 의사말로는 이렇게 급속도로 균이 번진적도 없고 이렇게 빨리 치료된 적도 없다고 합니다. 눈까지 균이 들어갔습니다. 눈이 굉장히 예민한 부위라서 눈이 안 보이게 될까봐 신경을 곤두세워 치료하고 있습니다. 어제 아침에 마지막으로 연락이 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척추까지 검사를 했는데 균이 거의 다 죽었다고 합니다. 성도들이 열심히 기도한 것이 느껴졌다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의 몸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가? 우리가 과연 있다고 할 수 있는 존재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단지 있다는 이유가 아니라 또 다른 이유로 사실은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균 몇 마리가 순식간 번지면서 피까지 균에 감염되어 썩어가는 패혈증이 오면 몸 전체가 썩은 고목나무가 무너지듯 순식간에 무너지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이 건강하고 자원이 충분하고 우리 힘으로 살아가는 것 같을 때는 하나님을 의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때로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 우리 스스로 서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지탱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시인은 다시 한 번 생애적으로 깨닫습니다.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니”, 여기에서 ‘도움’이라는 것은 응원군을 말합니다. 전쟁을 싸우다가 전세가 기울고 있을 때 지평선에서 먼지를 휘날리며 어마어마한 군대가 몰려옵니다. 그 함성소리는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 아군들의 마음에는 불을 지펴 용기를 북돋아줍니다. 결국 우리 혼자의 힘으로는 패할 수밖에 없는 전쟁을 이기게끔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큰 능력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영혼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할 때와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회개할 때입니다. 두 경우는 모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때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고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당신의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의지하며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스스로를 낮추면서 겸손하게 은혜를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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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71편 강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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