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 10일 새벽예배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행 10:1-2).
이 10장은 사도행전에서 중요한 분수령이 되는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10장을 분수령으로 해서 이제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병든 자를 고치던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이방인 세계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은 이것이 중요한 사건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러나 이 사건이 뭘 의미하는지를 제자들이 깨닫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비록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또 심지어 성령의 놀라운 강림을 통해서 그들이 성령의 사람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들은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성령의 강림을 통해서 깨달았지만) 그들은 유대인들이었고 그래서 나름대로의 편견이 남아있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은 그런 생각을 하잖아요. 아니, 성령이 역사해서 새사람이 되었는데 어떻게 그런 옛 생각이 남아있을 수 있을까? 남아있어요. 성령이 역사하시면 우리의 본성이 새로워지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예전에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편견과 잘못된 생각이 모두다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니에요. 남아있단 말이죠. 이 사람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편견이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신학적인 편견이었고 하나는 심리적인 편견이었어요. 신학적인 편견은 뭐냐 하면 예수는 그리스도일리가 없다는 거죠. ‘어떻게 나사렛동네에서 자라난 하찮은 목수의 집안에 젊은이가 우리를 구하기위해서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일 수 가 있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게 바로 신학적 편견이었어요. 이런 신학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으니까 성경전체의 주인공이 예수그리스도이시고 그분을 메시아로 증언하고 있는데 그걸 인정하지 않는 신학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성경이 보이겠어요? 여러분 영화를 볼 때 제일먼저 무엇부터 관찰해요? 주인공이 누굴까? 주인공은 대부분 이름 없는 무명이 주인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잘 알려진 배우를 간판스타로 해서 주인공으로 하니까 ‘아무개가 나왔다. 아, 저 사람이 주인공이구나! 당연하지 그 사람이 총 한방 맞고 죽으려고 저기 나왔겠어?’ 그렇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완전히 새로운 영화를 보면서 등장하는 인물들 거의가 다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럴 경우에 영화를 보면서 제일먼저 누구를 찾느냐면 ‘주인공이 누굴까?’ 어떤 때는 한 10분 봐도 주인공이 누군지 잘 모르는 때가 나오죠. ‘저 사람이 주인공이다!’ 그 주인공을 먼저 찾아내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 주인공에 초점을 맞추어서 봐야지만 영화전체가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그럴 일은 없지만 주인공을 잘못 선택했다고 한번 생각해보세요. 용감하게 싸우고 총알이 날아와도 죽지 않는 그 사람이 주인공인데 저기 밥통 들고 다니다가 총에 맞아가지고 영화 시작한지 5분 만에 죽어버리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잘못 찍었다고 생각해보세요. 영화가 읽히겠어요. 안 읽히지. 신학적인 편견이 이들에게 이렇게 심각하게 작용해서 성경전체를 왜곡되게 보게 만들어준 거예요. 제자들도 그런 사람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었는데 예수님께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죠. 그랬지만 그 신학적인 편견을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죠. 그러다가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보면서 이제 ‘하나님이 그분을 살리셨구나! 그렇다면 그분이 참 옳았구나! 그럼 그분은 왜 죽으셨을까? 아,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구나!’ 이렇게 깨닫게 된 거죠. 그러다가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면서 그 모든 의문이 다 풀리게 된 거죠. ‘그분이 진짜 성경에서 얘기하는 메시아시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거죠. 그러나 이제 여전히 심리적인 편견이 남아있는 거죠. ‘그분이 오신 것은 우리 유대인들을 위해서고 성령을 부어주신 것도 우리를 위해서다. 예루살렘에 임하시지 않았는가!’ 이렇게 생각한거죠. 그런데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전파되기 위해서는 이 심리적인 편견이 깨져야 됐거든요. 이 심리적인 편견의 정체가 뭐냐 하면 ‘유대인만이 선민이고 나머지는 다 쓰레기다.’는 사상이에요. 그러니까 그러한 것들이 깨뜨려져야 되요. 그러기 전에는 복음이 전파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8장에서 흩어져서 이제 모든 제자들이 여기저기 흩어지게 되었지만 그러나 명쾌하게 성령께서 이런 일을 통해서 우리를 파송하시고 따라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해서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된다. 우리와 같은 한 언약백성이 되어야 된다는 사상을 갖지 못했던 것이죠. 그 뚜껑을 열어주는 사건이 바로 이 10장 고넬료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엄청나게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몇 주 동안 걸쳐서 10장을 다 설교하겠습니다만 여기에서 등장하는 사람이 고넬료와 베드로가 등장하게 되는 거죠. 그것도 참 재미있죠. 이미 벌써 사울이 회심해서 바울이 됐으니까 바울을 사용해서 첫 뚜껑을 열어도 될 텐데 하나님이 그렇게 안하시고
예루살렘교회의 최고의 지도자인 베드로에게 직접 나타나시고, 직접 체험하게 하셔서, 직접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첫 증인이 되게 만들어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권위에 있어서 흔들림이 없게끔 만들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예루살렘교회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령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부인할 수 없게 만들어주는 거예요. 만약에 다른 사람이 그걸 보고 가서 예루살렘교회에 보고를 했더라면 예루살렘교회에서는 어땠겠어요. ‘그걸 믿을 수가 있겠냐?’ 갈등이 일어나지 않았겠어요. 그렇게 못하게 하기위해서 하나님이 직접 베드로를 역사하신 거예요. 이제 그 베드로를 역사하시기전에 이방인들에게 이런 성령 부어주심을 개시하심에 있어서 최초의 한사람을 도구로 선택하셔요. 그게 고넬료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탈리아대의 백부장이라고 로마사람인데 지금으로 따지면 군대에 중대장정도 되는 그러한 사람이니까 대위쯤 되는 높은 지위의 사람은 아니었어요. 이 사람이 하나님을 깊이 경외하는 사람이었어요. 여러분이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나?’ 이방인들 중에도 이미 벌써 흩어진 제자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면서 믿게 되는 사람들이 있었단 말이죠. 그렇지 않아요? 그런 사람들 중에 한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이 정말 이런 성령 부어주심에 있어서 첫 번째 도구가 되는 거죠. 이 사람을 뚜껑으로 해서 열리면서 이방의 세계에 봇물처럼 성령의 부어주시는 역사가 있었는데 그 부어주시는 성령의 역사가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이 그 성령의 부으심을 받았던 것과 동일한 역사가 나타났던 거죠. 의미에 있어서는 다르지만 동일한 성령의 부어주시는 역사가 일어났던 거죠. 이렇게 될 때에 이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영광스런 일을 위해서 첫 번째 도구로 사용하셨을까?
이 사람의 특징이 몇 가지 나오는 데 첫째는 경건한 사람이었어요. ‘경건하다’라고 하는 것은 희랍어로 말하면 ‘유세베이아’의 사람이었어요. 유세베이아라고 하는 것은 ‘유’는 좋다는 것이고 ‘세베이아’는 두려움이에요. 하나님의 향해서 경건하다고 하는 것은 좋은 두려움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거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든 사상에 없다고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할 때에라도 이 사람은 이방인이면서도 하나님을 깊이 두려워하는 마음 그러면서도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을 들어서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의 첫 도구로 사용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위대한 일을 이루실 때 이렇게 사람을 사용하셔 일을 이루시고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선한 일들을 이루어 가시는 거죠.
두 번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경건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는지 밑에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어요. 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가족들에 대해서 감화가 있는 신앙이었다고 여겨져요. 그러니까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함께 경외하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이죠. 사실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가장 잘 알아요. 그래서 먼 데 있는 사람이 보기에 ‘훌륭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다’ 그렇게 평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까이에 있는 사람 매일 먹고 자는 자기의 집안 식구들, 그 사람들이 진짜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해주면 그 사람은 진짜 그리스도인이에요. 멀리서 보면 실수하기가 쉽거든요. 가까이 보면 정확하잖아요. 그런 이치에요. 그래서 제가 항상 그런 이야기를 하죠. 멀리서 볼 때에는 별로였는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인격과 신앙의 향기가 넘쳐나서 매력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돼요. 멀리서는 상당히 괜찮았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까 정말 별로다 이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돼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존재는 파문과 같다.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를 던지면 ‘퐁~’ 떨어지면서 돌멩이 떨어진 그 자리부터 파문을 그리면서 멀리 퍼져나가잖아요. 세상 사람들이 나를 다 알겠어요? 먼 나라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알겠어요? 나와 상관이 없는 사람까지 나를 다 알겠어요? 자신이 무슨 스타라고... 그러니까 파문을 그리듯이 내가 있는 자리에서 그래서 사랑을 베푸는 것도 먼 데 있는 사람부터 먼저 사랑을 베풀지 말고 가까이 있는 사람이 여러분들에게 혜택을 입게 해요.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으면 여러분들의 가족이 혜택을 입게 하고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게 되면 같이 근무하는 사람들이 은혜를 입게 하고 그러면서 파문을 그리면서 나가는 거예요.
이 고넬료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어요. 온 가족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였어요. 그다음에 두 번째 특징은 많이 구제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요즘 우리표현으로 하자면 나 같은 죄인살리신 주 은혜가 너무 고마워서 이제는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주님이 사랑하는 이웃을 위해서 바치고 싶은 그런 사랑의 마음이 생겨난 거죠. 세 번째 마지막으로 뭐냐 하면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었어요. 이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방인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위대한 역사의 구속사의 장을 여실 때에 기도하는 베드로와 기도하는 고넬료가 기도 중에 만나게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기도할 때 성령이 부어주시는 거예요. 이 성령의 역사와 기도가 밀접한 관계에 있다라고 하는 것을 처음 예루살렘에 성령이 부어질 때부터 계속 이 기도와 성령은 따라다녀요. 그래서 많이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이방인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위대한 역사에 주인공이 되었던 것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