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편 73편 강해 (시73:1-14)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 입는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입은 땅에 두루 다니도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시 73:1-14)
녹취자 : 정은숙B
시편이 다섯 권으로 되어있는데 그 다섯 권은 나중에 시대가 많이 흐른 다음에 편집을 한 것입니다. 편집을 할 때 세 개를 묶었습니다. 다섯 권으로 묶었는데 첫 번째 1권은 창세기와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영광, 그 분의 주권, 아름다운 권세, 이런 것들과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일 권에서 나오는 대표적인 시가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입니다. 하나님의 그 높은 세계를 찬양하는 그런 것들이 많이 나옵니다. 2 권은 출애굽기와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걸어가는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앙망하는 그런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시가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3 권은 레위기와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제사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이야기, 그 다음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이야기, 제사 가운데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이야기와 같은 것들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4권으로 넘어가면 민수기 이야기인데 불순종으로 인해서 광야를 방황하고 고통을 받으면서 치료해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고대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시로 많이 나옵니다. 마지막 5권에서는 신명기와 연결이 되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는데 대표적인 시가 119편으로 “주의 말씀을 정미하니이다 우리로 하여금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축복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73편은 그 중에서 특별히 3권의 시작입니다. 이 73편은 표제에 보니까 아삽의 시라 되어있는데 이 아삽이라는 사람은 모세나 이런 사람보다 훨씬 후대의 사람이라 여겨집니다. 그런데 13편 정도의 시가 여기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렇게 시가 많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아삽이라는 사람의 신앙체험이 상당히 하나님을 깊이 체험했고 그리고 그 사람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의 교훈을 많이 들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73편에서는 우리로 하여금 귀담아 잘 들으면 우리 인생에 있어서 아주 실제적인 문제에 대해서 치유와 해결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73편에 보니까 아삽의 시가 나오는데 우선 전체적인 줄거리를 이야기를 하고 낱낱이 설명을 해나가겠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잘 믿는 아삽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경건하고 죄도 짓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살아보려고 애를 쓰던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주 커다란 영적인 침체를 경험하게 됩니다. 어느 정도로 침체를 경험하게 되냐 하면 ‘에이, 신앙생활을 때려 치워야겠다.’ 이 정도까지 침체에 들어간 것입니다. 하다가 ‘충만해야 할텐데 왜 이렇게 충만하지 못하지’ 이 정도가 아니라 ‘자, 이제 집어치우자. 이제 생긴대로 살다가 죽자. 그러면 그렇지 내가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이 정도까지 내려간 것입니다. 바닥도 그런 바닥이 없습니다. 아주 밑바닥까지 내려갑니다.
그런데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의 형통함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는 자기의 고통을 보며 왜 나는 이럴까 그러면서 영적인 깊은 침체로 떨어집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나중에 다시 회복하면서 마지막 고백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의 주제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마지막 신앙의 고백이 시편 전 편 가운데 가장 뛰어난 고백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 아침에 다룰 이야기는 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영적인 침체에 빠지게 되는가 하는 한 요인, 그 이야기를 설명하면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마지막에는 ‘에이, 그럼 그렇지 내가 무슨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다 집어치우자.’ 이 단계까지 내려가는데 어떤 단계를 밟게 되느냐 이것을 오늘 성경을 통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우리들이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하나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영적인 회복, 사람들이 영적으로 뚝 떨어졌을 때 왜 떨어졌느냐 물을 때에 조목조목 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다가 보니까 눈 떠보니까 시궁창 안에 허우적거리며 굴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푸념처럼 ‘나도 한때는 믿음이 꽤 좋았는데.’ 그러고 푸념을 하는데 ‘나도 어쩌다 이 모양이 됐는지 나도 왕년에는 철야도 하고 응답깨나 받고 그랬는데 나도 왜 이렇게 되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런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영적인 침체에 빠지거나 영적으로 깊은 하강 상태에 내려가게 될 때 사람들은 막 기도하고 싶고 기도를 뜨겁게 하고 싶고 아니면 찬송을 열광적으로 부르고 싶고 아니면 어디 가서 안수 기도 받고 싶고 그런 생각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확실하게 정리하십시오. 영적으로 회복된다는 것과 우리가 정서적으로 회복된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회복된다는 것과 정서적으로 회복된다는 것은 결코 같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먼저 이 73편을 다루기전에 전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73편뿐만 아니라 모든 영적인 회복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을 다뤄나가는데 있어서 우선적으로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영적인 침체 가운데 들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지고 나면 그 다음에 찾아오는 현상은 안개가 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침 안개가 눈앞을 가립니다. 그런데 좋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 아침에 보니 산 아래 안개가 쫘악 끼어있습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런 안개는 멋있지만 영적인 안개는 사람을 혼란하게 만듭니다. 비행기도 뜰 수 없고 차가 고속으로 달릴 수도 없습니다. 충돌의 위험이 있습니다. 영적인 침체에 들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겨서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하강 곡선으로 내려가게 되면 그 다음엔 안개가 낀 것처럼 혼미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침체에 빠진 사람들이 잘 하는 말이 ‘모르겠어, 아무것도 모르겠어. 나도 몰라 나도 왜 사는지 몰라.’ 모르는 것 투성이입니다. 그러니까 우선 뭔가를 막 박수를 치고 은혜를 받아야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이기 전에 우선 안개를 걷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어느 지점에서 어떤 것들이 어떻게 잘못되었는가를 냉철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은혜가 와야지만 문제가 궁극적으로 해결이 됩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꼭 하나님 앞에 은혜 받는 집회 장소가 아니라도 여기 와서 가라오케라도 틀어놓고 유행가에 맞춰서 며칠 신나게 노래를 부르면 정서적으로 회복이 됩니다. 박수도 신나게 치고 하면 왠지 속이 뻥 뚫리는 것 같고 후련합니다. 노래방에서 소리 고래고래 지르고 목이 쉬어서 나오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십시오. 기분이 어떻습니까? 후련합니다. 시원합니다. 삼년 묵은 체증이 뻥 뚫어진 것 같습니다, 정서적인 회복이 된 것입니다. 그런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뭐냐 하면 우리의 인생과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궁극적인 해결이 안 되니까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선 머리부터 정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안개가 쫘악 걷혀야 합니다. 김포 그쪽에 안개가 많이 낍니다. 그래서 초행길에 더군다나 밤에 안개가 자욱이 끼면 발발 기면서 운전합니다. 그러다가 안개가 싸악 걷히고 나면 길이 보이고 샛길이 보이고 큰 길이 보이고 가로등이 보입니다. 안개가 끼면 여기저기 좌충우돌 부딪칩니다. 이것이 먼저 걷히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회복을 바라고 사모하면서도 실제적으로 회복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지극히 소수인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그런 단계를 밟지 않고 갑자기 내 답답한 마음이 뻥 뚫리고 시원해지는 그런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시원해지면 무엇 합니까? 궁극적인 해결이 안 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의 회복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변덕스럽습니다. 은혜 혼자 다 받는 것 같으면서도 며칠 지나면 곤두박질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머리가 정리 안 된 상태에서 정서적으로 회복이 된 것을 영적인 회복이라고 착각하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또 평범한 교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말씀의 거울에 자기를 비춰보려는 마음을 안 가진 사람들의 영적인 회복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회복될 때에는 이상하게 마음속에 끼어있는 안개들이 걷히면서 어렵게 들리던 하나님의 말씀이 굉장히 쉽게 들리면서 그것이 마음에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회복이 일어날 때의 조짐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혼탁해져 있으면 쉬운 설교를 하는데도 아주 어렵고 혼란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맑아 있으면 아무리 수준 높은 설교를 해도 그 핵심이 마음속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자기의 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이런 순서를 밟아야 합니다.
그럼 이제 그런 서론을 깔고 진전합니다. 1절과 2절을 먼저 읽고 해설을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의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라.’ 이 시인은 아주 좋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은혜를 베푸시고 선하신 하나님이시다 이 믿음도 대단한 믿음입니다. 여러분, 오늘 새벽에도 그 얘기를 했습니다. 왜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근심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고 당신의 백성들에게 선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과 초조와 시기와 미움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굳센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악을 행하시지 않고 선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앙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똑같이 대접하신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똑같이 대접하신다고 생각했다면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이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두 은혜를 베푸시고 그것은 모두 동일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은혜 베푸신다 라고 하는 것을 미끼로 삼아서 하나님 앞에 태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문제를 안 삼으실 거야, 이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 방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살아가는데 긴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신다, 이런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속에서 시인이 얼마나 깊은 신앙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적인 인생에 대해서 얼마나 깊은 통찰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보게 됩니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스스로 교만했습니다. 그리고 자긍했습니다. 자신들은 어떤 식으로 살아가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에게 은혜를 부어주실 것이고 그 은혜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그 은혜를 빙자하여서 우리는 굳이 긴장된 삶을 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역사를 보면 이러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아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라도 정말 마음을 다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지 않고 계속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이 너희를 사랑하실지라도 너희를 심판하신다. 그러한 선지자의 긴장과 백성들의 태만함이 계속 충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긴장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또 하나를 보면 이 시인이 얼마나 높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율법의 의를 행하거나 자기의 공로를 쌓아가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하지 아니하고 마음이 정결한 자들에게 선을 행하신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영적인 특성에 대해서 탁월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 내면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이 시인이 간파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시편 51편에서 볼 수 있는 다윗이 범죄 한 후에 번제를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계속 제사를 드리고 난 후에 한참 뒤에 가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번제가 아니시니 기뻐하였더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아삽 이 시인은 오래 전에 이미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 시련의 과정을 거치기 전에 그는 이미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외면적으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나 하는 것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핵심이 인간의 내면 속에 있고 그 인간의 내면이 정결한 그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뽑아내어서 그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에 있어서 맞는 관찰입니까, 잘못된 관찰입니까? 맞습니다. 지금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맞는 건데 이것이 사실 맞는데 맞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인은 자기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이 생각의 껍질 속에서 이 껍질 때문에 말하자면 아, 신앙생활 때려 치워야겠다는데 까지 간 것입니다. 이 73편에 나타나는 영적인 침체의 궁극적인 원인은 무지입니다. 무지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단순히 죄나 유혹만이 우리의 마음을 파고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무기력한 상태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이런 무지가 우리에게 파고 들어와서 이 무지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도무지 기력을 쓸 수 없도록 만들어서 마지막에는 이렇게 살아서 무엇 하나 집어 치워야지 하는 그런 정도의 생각까지 떨어지도록 만드는 것이 이 무지의 위력이고 능력입니다.
무지는 신앙에 있어서 악입니다. 순수함이 아니고 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결한 것만 가지고는 충분치 않고 오히려 뱀과 같이 지혜로우라 그래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런 영적인 삶의 비밀을 파헤쳐서 간직하고 붙잡고 있을 때 사단과 이 세상에 있는 무지가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극단적인 신앙의 포기상태까지 가도록 만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 지식이 아무 쓸모가 없겠지요.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는 이 지식이 매우 중요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설교 중에 소리를 지르면 사람들이 자다가 깨는데 사실 소리 질러서 은혜 못 받은 사람들이 조용히 은혜를 받겠습니까? 지난주에 온누리교회에 갔는데 참 재미있습니다. 비가 지금 막 쏟아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비가, 다 시들어가도 괜찮습니다. 다 시들어가도 생명이 있는 나무는 이 비 때문에 삽니다. 그런데 아무리 커도 생명이 없으면 이 비 때문에 썩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천천히 푸는데 어떤 사람은 말씀이 깊이 들어갈수록 깊은 잠에 빠지는 사람이 있고 말씀이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소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마음이 정결한 자 그러니까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인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말하자면 이런 내면의 세계라는 인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상당히 수준이 높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 지식 자체가 분명히 영적인 지식인데 이것에 걸려서 넘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면 한 가지 신앙 지식이 한 가지 영적인 진리에 대한 것이 올바르다고 할지라도 그 이상의 것에 조명을 받아서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면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영적인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할 수 있는 원인 제공도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해가 안 되더라도 조금 더 들어보십시오. 발단은 이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시인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믿음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마음이 정결한 자와 정결하지 못한 자를 구별하여 대우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정결하지 못한 사람들은 은혜를 조금밖에 못 받고 마음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있으면서 마음이 정결하고 깨끗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주님이 축복을 많이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믿습니까, 안 믿습니까? 당연한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 아삽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평소 인생을 살아오면서 간절한 마음의 소원과 살아가는 삶의 가장 중요한 초점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어쩌면 하나님을 더 마음으로 정결케 섬길 것인가.
(찬양) 정결한 맘 주시옵소서. 오, 주님,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정결한 마음을 어떻게 하면 더 가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정말 외부로만이 아니라 내 마음으로 제대로 섬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매 순간순간을 긴장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신앙생활 제대로 하려면 긴장 안 하고 살 수 없습니다. 늘 긴장하게 됩니다. 죄 가운데 먹고 마시는 사람은 하루를 지내고도 잠을 잡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 깨어서 사는 사람은 저녁때도 곰곰이 생각합니다. 나의 무엇이 오늘 주님을 슬프게 했을까, 마음 아프게 해드리지는 않았는가 생각하고 고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봅니다. 이런 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피곤한 삶 아닙니까?
그런 삶을 살았는데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한 순간에 그렇게 살아왔던 삶의 모든 방식과 신앙의 기대와 모든 비전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언제입니까? 무엇을 봤습니다. 무엇을 봤습니까? 악인을 보았습니다. 여기 시편에서 이야기하는 악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악한 자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악함의 원인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그런 악인입니다. 시편에서 이야기하는 악인이라고 하는 것은 우연히 죄를 짓는 그런 악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부인하는 그런 악인입니다. 혹은 있다고 시인하면서도 말로만 시인하고 믿음으로 믿고 삶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인정하지 않는 이러므로 말미암아 삶이 악해진 그런 악인입니다. 그 악인의 삶을 보는 순간에 시인은 말하기를 이제껏 자기 인생과 신앙을 받쳐왔던 기둥들이 우르르 뽑히면서 들썩들썩 무너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길거리 걸어가면서 특히 지하철에서 사람들 계단에서 참 잘 넘어집니다. 왜 넘어집니까? 저 차가 왔는데 저걸 타야지 안 그러면 늦겠어서 막 뛰는 것입니다. 계단을 보고 내려가시오 거기 써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는 물건 들고 가다가 통그라지는 장면까지 그려놓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시오.’ 급해도 계단을 보면서 뛰어 가야 하는데 쳐다본다고 전동차가 멎어줍니까? 안 본다고 전동차가 떠납니까? 그런데도 전동차만 보고 막 뛰는 것입니다. 조그만 사람들이 넘어지면 괜찮은데 이런 거구의 사람이 넘어지면 우지끈 딱 하면서 막 통그라지는 것입니다.
옛날에 직장 다닐 때 눈이 하얗게 온 겨울이었는데 아주 미끄러웠습니다. 위층에서 내다보니까 눈이 오는 날 뾰족 구두를 신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걸어가더니 툭 넘어지더니 서류가 휙 날아갔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넘어진 것이었습니다. 못 일어났습니다. 죽은 것입니다. 실족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실족이라는 것이 문자 그대로 다리가 뒤뚱거려서 넘어진 것 아닙니까? 다른 곳은 문제가 안 됩니다. 걸어가는 사람이 다리 말고 다른 곳에 문제가 생겨서 넘어진 경우가 있습니까? 눈이 안보여도 다리만 굳게 서 있으면 절대 안 넘어집니다. 힘 없는 사람이 힘 있는 사람이 막 뛰어가는 것을 넘어뜨리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다리를 거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딴지를 거는 일이 간혹 생깁니다. 다리를 걸게 되면 평소에 열심히 걸어가지 않고 그냥 개기면서 노는 건지 믿는 건지 그렇게 비실비실 걷는 사람은 다리를 걸어도 넘어질 것이 없습니다. 원래 걸어가는 것이 그 모양이니까요. 그런데 쏜살같이 그것도 거구가 막 쿵쿵거리면서 달리가면 툭 걸어서 넘어지면 땅이 갈라지는 일이 생깁니다. 이게 왠 지진인가 하는 사건이 나타납니다. 머리가 깨지고 터지고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들이 조금씩 걸어가거나 뛰어가거나 할 때 힘이 들어가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발걸음 한 번만 잘못 디디면 발목이 부러져서 병원에 입원을 한다, 앞 통수가 터져서 반창고를 붙이고 온다, 팔목이 부러져서 붕대를 감고 온다,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실족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실족하지 않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렇게 경건하게 그렇게 긴장을 하면서 그렇게 일관성 있는 해오던 사람이 졸지에 그렇게 무너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다른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악인의 형통함을 보기 직전까지는 이렇게 마음을 정결하게 하면서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참 하나님의 은혜다, 저렇게 개처럼 돼지처럼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생각하며 살아갔는데 어느 날 눈이 떠지면서 세상을 들여다보니까 그것은 자기 추측이었고 하나님을 안 믿고 개판을 치면서 살아가는데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다. 형통한 것입니다. 위기를 안 만나는 것입니다. 사업은 번창하고 자손들은 번성하고 가세는 점점 든든히 서가고 통장에 돈은 점점 더 많아지고. 여기에서 시인이 미끄러졌습니다. 완전히 미끄러지지는 않고 ‘실족할 뻔 하였고 미끄러질 뻔 하였음이라. 왜냐하면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질시하였음이라.’
자, 그러면 우리 잘 기억합시다.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다른 것을 쳐다보지 않고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만 생각하면서 마음을 정결케 하고 매일 매일 살아갈 때에는 하나님께로 날마다 가까이 다가가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형통한 악인을 보는 순간에 그 모든 기쁨과 즐거움이 순식간에 다 깨져버리고 무너져 버리고 자기가 서야할 신앙의 기반조차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시인처럼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만을 바라보면서 살아가지를 않고 다른 사람들의 형통함을 보거나 상대적으로 저 사람과 나를 비교하기 시작하면 졸지에 기쁨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사악하기 때문에 은혜가 충만할 때에는 다른 사람이 나 보다 못한 사람이 눈에 보이면서 ‘아휴, 저 사람도 사는데 나는 하나님의 은혜지.’ 그것은 어느 정도 은혜가 마음에 살아 남아 있을 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고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인간이 교만할 때는 한 없이 교만해지다가도 하나님이 세워주실 때는 또 자꾸 밑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내려가서 ‘에휴, 나 같은 인생 막장이야’ 그러면서 계속해서 밑으로 내려갑니다. ‘너는 귀하다, 귀하다.’ 그러는데 ‘아니에요 나는 이제 막장이에요.’ ‘너는 소망이 있다’ ‘아니에요 나는 소망 없어요’ ‘내가 너를 구원해줄게 아니에요 내가 무슨 구원을 받겠어요.’ 그것이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거친 말, 그러면서 밑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렇게 포도원의 비유를 들지 않습니까? 아침에 온 사람, 오후에 온 사람, 그 다음에 저녁 늦게 온 사람. 그런데 할 일 없이 놀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포도원에 와서 일해라 그러면 한 데나리온, 하루 품삯을 주겠다. 빈둥거리고 놀다가 일자리가 생기니 얼마나 신이 납니까? 마지막 헤어질 때가 되어서 돈을 나누어 주는데 아침에 올 때 분명히 하루 열심히 일하면 하루 일당을 주겠다 그랬을 때 너무 기뻤는데 돈 받는 순간도 너무 기뻤습니다. 그런데 옆을 보니까 다섯 시에 와서 한 시간 일하고 간 놈한테 자기하고 똑같이 주는 것입니다. 아까까지 있었던 기쁨과 즐거움이 순식간에 다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저 놈은 한 시간 일하고 돈을 받는데 그러면서 자기가 열 시간 일한 것이 후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이 시인이 깊은 침체와 나락에 떨어지게 되었습니까? 쓸데없는 비교 의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비교도 하지 말고 삽니까? 아닙니다. 어떻게 살아가면서 비교를 안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이 끊임없이 마음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 애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악인의 형통함을 보는 순간에 자기가 이렇게 살아온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이면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는가 하면 비록 마음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 애를 썼지만 그러나 이 시인이 그렇게 마음을 정결케 하고 그렇게 마음을 깨끗케 하려고 하였던 것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만이 동기가 되어서 그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는 가운데 그 하나님으로 인해서 행복을 느끼고 충만해지는 가운데 그래서 주께로 날마다 더 가까이 가는 기쁨 속에서 자신을 정결케 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하나님 자신이 이 사람의 기업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비교의식에 떨어지게 될 때에 자기의 모든 것을 순식간에 다 잃어버리고 지금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도 이런 생각 때문에 침체에 들어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왜 나만 이렇게 고달픈 인생을 살아야 하나, 왜 나만 이렇게 고통 가운데서 살아야 하나, 도대체 내 주위에 누가 나처럼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렇게 나 때문에 생긴 것, 자기가 잘못해서 생긴 것도 아닌데 그런 고통 그런 어려움들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누가 있다는 말인가 눈을 들고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한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형통함을 보면서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결국 하나님과 함께 형통치 못한 삶을 살기보다는 하나님 없이 형통한 삶을 살기 원하는 시인의 유혹을 받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때에도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시인이 가만히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지금은 그렇지만 죽을 때 얼마나 비참한 죽음을 죽을 것인가 하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죽을 때까지 그 평안함이 계속되고 죽을 때에도 고통 가운데 몸부림치면서 죽는 것이 아니라 편안하게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광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악하게 살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형통합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얼마나 형통하게 사는가 하는 것을 계속해서 설명을 길게 하고 있습니다. 길게 설명한다는 것은 그만큼 느낀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이 없나니’ 여기 타인, 타인 그랫지만 결국은 자기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이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의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며 말하여 거만히 말하며 입은 하늘에 두고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그러므로 백성이 이리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도다’ 하나님이 있긴 어디 있어 하나님이 뭘 살아계셔 하나님 있다 그래도 날 쳐다보겠느냐 그러면서 대충 사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안들림) ,
세상에 예수를 믿으면 성할 날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갚으신다고 믿습니까? 전에는 삶 자체가 하나님을 떠난 불순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징벌을 받고 그런 것 필요 없습니다. 누가 그럽니까?
(예화) 짐승을 치는데 소는 밥을 좀 준 다음에 매일 데리고 나가서 일을 시킵니다. 그런데 소가 가만히 보니까 돼지는 계속 밥만 갖다 주는데 맨손체조 한 번 하는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계속 먹는데 먹고 거기 누워서 자고, 자고 일어나면 또 갖다가 주고 먹고 나면 또 자고 자고나면 주인이 청소를 해주고 그리고 나면 또 먹을 것을 갖다 주고, 그걸 일주일만 하다가 마나 그랬더니 6개월 동안 계속 하는 것입니다. 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건 너무 불공평하다. 나는 밥 한 술 먹고 나가서 하루 종일 입에다가 망까지 쓰고 쟁기를 갈고 고단하게 일하고 들어오면 또 하나 먹고, 자고 아침에 먹인 다음에 또 끌고 나가서 죽도록 고생을 시키는데 돼지는 도대체 누구 백으로 여길 들어 왔길래 매일 먹고 자고 먹고 자고 하는가? 왜 그렇습니까? 두 짐승이 목적이 다릅니다. 돼지는 무엇입니까? 돼지를 치는 집은 축사를 좁게 만들어 운동을 못하게 합니다. 운동하면 살이 빠집니다. 운동장처럼 만들어놓으면 돌아다닙니다. 그런데 돌아다니면서 살찐 돼지가 진짜 맛있습니다. 그런데 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막 갖다 먹입니다. 당뇨병이 걸리면 어떻게 하나 성인병이 걸리면 어떡하나 살만 찌면 끝입니다. 6개월 후면 가는 데가 있습니다. 인물 잘 생긴 돼지는 못생긴 돼지보다 비쌉니까? 그런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요점이 무엇입니까? 그냥 살찌기만 하면 좋은 것입니다. 목적은 .. 그런데 그 돼지가 돼지우리에 누워서 생각을 합니다. 소를 향해서 자긍을 합니다. 야, 짐승이 된다면 나 정도는 되야지. 뭐하는 거냐? 피죽 한 사발 먹고 쟁기를 메고 가서 하루 종일 고생하고 주인이 누구를 사랑하는지 봐라. 난 특과다, 특과. 그런데 그 특과가 6개월 후엔 목따는 소리를 냅니다. 그것이 바로 어제 먹은 그것입니다. 돼지고기 볶음. 목적 자체가 다릅니다.
돼지를 데려다가 쟁기를 씌워주면 뭐하겠습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목적과 계획은 잘 먹고 잘 살다가 잘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는데 그 신앙을 가지고 그런 식으로 대입을 하려고 하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영원히 교감이 형성이 안 되는 것입니다. 손뼉도 마주쳐야 박수 소리가 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자, 하니까 주여, 주여,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요? 이게 뭐 박자가 하나도 안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신앙의 연단이다, 어쩌다, 하는 것이 결국은 무엇입니까? 그런 평범한 사실을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아, 내 인생이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구속해주신 것은 예수 때문에 잘 먹고 잘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정말 차원 높은 계획이 있구나.’ 그것을 깨달아 아는 순간에 우리는 새로운 신앙생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해서 쟁기 지고 나갈 때마다 하는 말이 주인에게 ‘주인, 돼지는? 돼지는?’ 그러면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먹는 밥도 불만족이요, 쟁기 하러 나가는 것도 불만족입니다. 주인이 정말 돼지를 소보다 사랑하기 때문에 먹이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주인의 밭에서 쟁기를 메고 여러분 이제 밭가는 것 이런 묵은 땅은 쟁기를 지고 갈 때에 뒤에서 쟁기 지나가는 것을 가만히 쳐다보면 신기합니다. 딱딱하게 묵은 땅이 큰 황소가 콱 한번 쟁기로 박으면 꼭 물살이 퍼지는 것처럼 이런 흙덩어리들이 까뭉개지면서 지나갑니다. 잡초가 그득한 곳이 갈고 지나가면 거무스름한 흙으로 변합니다. 씨를 뿌리면 아름다운 열매가 많이 맺어져 가을이면 주인이 신이 나는 것입니다. 풍성한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것입니다. 돼지는 그런 일을 위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목적을 위해서 우리들을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돼지의 신세를 부러워하는 것, 여기 나와 있는 이 시인이 그런 지점에서 실족한 것입니다.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최대의 계획은 내가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내가 신앙생활을 잘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넘치도록 복을 주실 것이다 그런 일차원적인 신앙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서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아니, 정결하지 않은데 왜 하나님이 저들에게 복을 주시는 것일까? 마음이 더럽고 하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사람들인데 형통할 수 있을까? 건강하고 잘 먹고 잘 살다가 마지막에 죽을 때도 눈을 까뒤집고 비참하게 거품을 물면서 죽을 줄 알았더니 죽을 때도 평안하게 죽고 죽은 다음에도 우리 같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꽃으로 치장을 하고 김일성 죽은 것 보셨지요? 돼지 죽은 것과 똑같습니다. 주일학교 때 예수 믿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죽었는데 거기다가 아르곤 가스를 집어넣고 안 썩게 하고 북한에 꽃이 동이 나서 중국에서 수입을 했다고 하는데 그것을 말하는 사이에 다 말랐고 영혼은 지옥에 가서 불 가운데서 고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람들이 대형 유리관에 넣고 사람들이 백만이 아니라 천만 명이 눈물을 흘려서 그 눈물이 홍수가 되어서 그 관을 떠내려 보낸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과ㅢ 관계가 끊어진 삶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73편 전편에 흐르고 있는 가장 탁월하고 중요한 사상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나의 자녀들이 내가 너희의 전부다 그것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나 자신이 너희들의 전부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를 않았습니다. 그렇게 생각 속에서만 머물면 괜찮겠는데 실제적인 신앙생활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마음을 정리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이것이 무슨 망발입니까? 지금 신앙생활에 대해서 회의를 갖는 것이 아니라 여태까지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왔던 것에 대해서 회의를 갖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리고 휴가를 반납하며 열린교회 수련회를 오고 누구와 약속한 것도 취소하고 오고 돈이 없어서 꾸어가지고 오고 그런 것이 전부다 다 헛것이다, 그러니 무지가 얼마나 무서운 독약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만 침체가 되어서 옳지만 내가 그것이 좋지 않다 그것이 아니라 무지가 시인의 마음속에 들어가니까 이제껏 까지 하나님을 믿으면서 잘 살아왔던 신앙의 역사를 전부 다 헛되고 헛되도다, 바람결에 날려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인생의 살아온 모든 날을 후회하는 것입니다. 모든 날을 뉘우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헛것이다 라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생각입니까? 지금 당장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을 정결케 하고 손을 씻고 죄 없이 살아야 될 텐데 이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헛된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사람들이 마음에 원하는 대로 욕심이 원하는 대로 이방인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마음이 원하는 대로 막 사는 것입니다. 욕심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마음먹은 대로 막 저질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들은 마음이 원해도 신앙이 그것과 싸우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마음이 그렇게 하고 싶어도 신앙이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앙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이 못하게 하는 것을 물리치면서 애써서 살아보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헛됩니까? 누구든지 살아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 이것이 없다면 그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사실은 죽은 자입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게 몸부림치는 것이 흘러가는 인생 속에서 너무 갸날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마치 탁류와 같이 우리의 인생이 흘러가는데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그렇게 힘이 없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보십니다. 그런 훌륭한 삶을 이 사람이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아삽으로 하여금 진실로 믿음의 사람 아삽이 되게 만들어왔던 그 중요한 특징을 깨트리면서 이것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이 한 번 깨지는 것이 얼마나 순식간인지 모릅니다. 마음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 앞에 주님을 위해서 살아보려고 애 썻는데 한 번의 무지가 들어오고 그 무지가 침체를 불러일으키니까 말짱 헛거다 그러면서 가장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사람 되게 만들었던 그것을 깨트리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지가 무서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헛되도다 이 정도로 되면 삶의 모든 동력을 다 잃어버리고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나 사단이 수시로 와서 우리들이 뭔가 해보려고 할 이런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야, 그래봤자 안 된다. 하나님이 너를 돌보시지 않는 것이다. 살아 계시다면 너를 그런 식으로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런 주사를 한 방 맞으면 마음을 깨끗하게 하려고 노력하던 것이 마치 마취제 맞은 것처럼 기운이 쫙 빠지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으로 떨어지게 될 때 오늘을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할 때 모든 삶의 좌표와 방향을 읽어버립니다.
이때에 시인이 어떻게 해결을 봤는가 하면 결국은 하나님 앞에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딜레마에서 벗어납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듣는 가운데 정신이 모호해지는 사람들은 안 됩니다. 지난번에도 집회 갔는데 그 비싼 돈 내고 삼만 오천 원씩이나 내고 직장 다니는 사람들이 휴가도 포기하고 와서 아예 들어볼 생각을 안 합니다. 왜 온 것입니까? 그래도 올 이유기 있었습니다. 마지막 삼일 째날 갈비 파티를 숲속에서 벌였습니다. 세시부터 여덟시까지 먹었습니다. 먹는 게 남는 것이다 라고 하고 갔을지 모르지만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이 시인이 한 번 악한 세력에게 독침을 맞은 것입니다. 모든 기력이 다 빠지고 이제는 신앙생활을 할 맛도 안 나고 동기부여도 안 되고 오히려 살아온 날을 후회하는 것입니다. 주 없이 막 살았더라면 원이나 없었을 걸, 그런 끔찍한 생각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그 해독제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한 방 맞으니까 다 풀린 것입니다.
개 키워보신 적 있습니까? 개 좋아하시지요? 개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다릅니다. 개를 키우는데 요즘은 점 덜합니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쥐약을 놓았습니다. 요즘은 개 사료도 있고 먹을 것이 넉넉하지만 미국에는 개 레스토랑까지 있다고 합니다. 거기서 사우나 시키고 미용하고 밥 먹이고 손톱손질하고 나온다고 합니다. 개 팔자입니다. 그런데 그 개가 돌아다니다가 쥐약을 먹고 옵니다. 쥐약을 먹고 오면 속에서 창자가 녹아서 끊어집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눈에서 불이 번쩍번쩍 나다가 튀어나갑니다. 그럴 때 약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녹두를 물에 불려서 비벼서 짜낸 국물입니다. 그래서 한약 먹는 사람 녹두 먹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장정 서넛이서 개를 붙잡고 즉시 녹두 물을 퍼 넣으면 그 죽어가던 개가 살아납니다. 몸속에 퍼진 그 독을 해독시킨 것입니다. 그러면서 몸이 정상으로 돌아옵니다.
지금 이 시인은 그렇게 오랜 세월을 애지중지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전전긍긍하면서 살아왔는데 한 방 맞으면서 가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위해서 마음을 깨끗하게 살아왔던 모든 날을 나는 후회합니다. 아, 원통하다 내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발발 떨면서 신앙생활을 했던고 차라리 막 살아 버릴 걸 거기까지 온 것입니다. 누가 이런 사망의 몸에서 누가 이런 깊은 침체에서 이 사람을 건져낼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아무것으로도 건져낼 수 없습니다. 시인이 성소에 들어갈 때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깨달으니까 그 독소가 다 풀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퍼져있는 영적인 독소를 제하는 말씀의 해독작용을 체험하지 못하면 계속 고통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 친구 가운데 어머님이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집에 가서 극진히 간호하고 마지막에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는데 집이 가난하니까 한의원을 하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집이 엄청나게 가난하니까 좀 봐주십시오.’ 그랬더니 무료로 진료를 해주고 약을 두 번 지어주었습니다. 가서 이 목사님이 맥을 탁 짚더니 맥이 안 좋으시군요. 건강이 나쁘시군요. 그게 아니라 목사님이 그 부인보다 약간 연세가 많으셨는데 반말 비슷하게 ‘뭐 이렇게 맺힌 게 맞소. 뭐 이렇게 맺힌 게 많소. 무슨 한이 가슴이 서리서리 서려 있소.’ 그러면서 약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해독작용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매일 그러잖습니까? 자기 인생 한이 주리주리 맺혔다, 피멍이 들었다, 내 마음에 한이 맺혀있다, 눈을 감고 못 죽을 것이다, 이런 소리 하면서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치유가 바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깊이 깨닫게 될 때 그 때에 단숨에 해독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단 번에라도 그렇게 우리의 그런 문제들을 고치셔서 치료하실 수 있는 일생의 문제를 엊저녁에 얘기한 것처럼 근본적으로 치유하실 수 있는 하나님과의 만남은 우리의 그 모든 문제를 근본적으로 치유해주신다는 역사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이렇게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리고 자기를 딱 보니까 전에 그 악인의 형통함을 보지 않고 경건하게 살아갈 때에는 자기가 고통을 당한다 생각을 안 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마음을 정결케 하며 살다보면 이런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내 손을 씻어서 의롭게 살려고 하면 이러한 쓰라림쯤은 받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딱 중독이 되고나니까 그 다음에 나는 매일 재앙을 당하는구나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온 자기의 그 경건한 삶을 재앙을 당하는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재앙을 당하였고 아침마다 징책을 당하는구나, 누가 징책을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매일 나를 개 패듯 패시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내가 뭘 잘못 했길래 내가 이렇게 두들겨 맞고 이렇게 징책을 당하고 이렇게 매일 재앙을 당하면서 살아야 하나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향해 불끈 솟아오르는 이 항의하고 싶은 원망과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의 극치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됩니까. 하나님을 힐문 하는 데까지 나가는 것입니다 . 여러분, 오늘 이 아침 시간에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아가던 사람이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비교의식을 갖게 되면서 신앙의 기쁨과 신앙의 아름다움이 졸지에 다 부서져 버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칭찬을 받으면서 살아온 그 삶이 이 사람에게 후회의 조건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비극은 이 사람의 신앙의 수준의 문제였습니다. 어떻게 이 신앙의 수준을 극복하면서 그래서 마지막으로 그 불후의 아름다운 고백,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고백할 수 있게 되는지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