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편 73편 강해 2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하여 생각한 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 손을 붙드셨나이다“(시 73:15-23)
녹취자: 박은희B
지난 시간에 어저께입니다. 그러니까 어저께 14절 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실패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의식이 생기고 그렇게 되게 되니까 이제 한마디로 신앙 생활할 맛이 없어졌다 이것입니다. ‘맨 날 마음을 깨끗이 하고 그리고 내가 의로운 삶을 살아야 되겠다.’ 하는 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생명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 대표적인 특징이었는데 ‘그 까짓것 해서 뭣하나?’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어드린 15절에 와서는 이제 말하자면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여러분 이게 무슨 뜻 인줄 아십니까?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지금 13절에 얘기한 것들이 자기 마음속에 생각이었습니다. 자기가 이것을 다 고백으로 말해버렸더라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무슨 뜻이냐? 만약에 ‘내가 진작 이것을 내가 고백했더라면 그러면 차라리 나도 막 살아버렸을걸’ 그 애기입니다.
내가 뭐 하러 이렇게 답답하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그러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고 그러고 어떡하면 내 마음에 더러운 것들 때문에 주님께서 나를 슬퍼하지 않으실까? 어떡하면 내 마음에 이 불결을 씻어버리고 정결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까? 이런 것들을 다 집어치우고 이 세상에 사는 자녀들하고 똑같아 내가 살았을 것이다 이것입니다. 너희들이 수단과 방법으로 나에게 도전해오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의 수단과 야비한 방법으로 잘 먹고 잘 산다면 나도 그런 식으로 한번 살아볼 꺼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것이 한번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떠나가고 영적으로 깊이 가라앉기 시작하면 인간이 그냥 영적으로만 가라앉고 마음만 하나님으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생수의 근원인 하나님을 버리면 반드시 다른 근원을 인간이 찾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서 떠나시면 그러면 그 우리의 마음에 다른 것들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려는 경건한 노력과 그리고 좋은 신앙심이 사라져버리면 그 다음에 다른 것들이 거기로 들어와서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지금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나는 이렇게 경건하게 살려고 애를 쓰는데도 고난을 당하고 심지어 징책을 당하고 그런데 악한 자들은 이봐라 이렇게 평탄하고 평안하고 그리고 죽을 때도 편히 죽지 않는가? 내가 굳이 이렇게 살면 뭐하겠느냐? 진작 세상에 자녀들과 같이 그렇게 막 살아버릴걸 내 살아온 인생이 억울하도다 그렇게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를 믿다 타락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타락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를 믿다가 타락을 하고 예수를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 신앙을 버리고 나중에 막된 길로 가는 사람들은 정말 세상에 사람들보다 더 악하고 타락합니다. 인간이 얼마나 악하고 얼마나 비참한 죄악가운데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것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세상에 영향을 받았습니까? 나쁜 죄의 꾐에 빠졌습니까? 아닙니다. 무지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었습니다. 무지 때문에.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화있는 사람은 누구냐 하면 도무지 자기의 그 축구공만큼 안 되는 그 머리 하나를 가지고 하나님의 모든 신앙의 세계를 판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마다 다 하나님은 누구시어야 하고 기독교신앙은 어떤 것이고 영적인 삶은 어떤 것이다라고 하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작은 것 가지고 판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자기 생각에 어긋나는 하나님의 말씀은 거절합니다. 자기 생각에 어긋나는 설교는 거절합니다. 그러면서 늘 아전인수 격으로 우물 안에 개구리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무지로 가득 차있습니다. 무지로 가득 찬사람, 이 지금 이 시인의 경우에 이렇게 평소에 하나님을 찾고 경건하게 살던 이 사람이 단 한 번의 무지로 말미암아서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서 이렇게 비참하게 곤두박질쳐서 마지막에는 여태까지 살아왔던 신앙생활을 후회하고 ‘내가 괜히 이렇게 살았구나. 막 살아버릴걸’ 이런 지경까지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일 먼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무지를 쫒아내는 일입니다. 무지를. 그래서 늘 말씀을 드리지만 그 찬송 열심히 부르던데 그 찬송 되게 좋은데
(찬양)
주 여호와 능력의 주 내영혼의 치료자 말씀으로 고치시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고가 먼저 정돈이 되고 그러면서 우리들이 영적인 어둠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주여 뭘 잘못했는지 모르지만 ‘나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런 기도 백번 하나마나입니다. 자기가 왜 지금 그 상황에 들게 되었는가?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한번 봅시다. 이건 어저께까지 이야기이고 오늘 얘기를 봅시다. 16절에 15절까지 완전 혼돈입니다.
그런데 17절서부터 확 열리면서 회복이 되게 됩니다. 그런데 그 15절까지의 침체와 17절부터의 회복 그 사이에 있는 변곡점이라고 그럴까? 그것이 바로 16절입니다. 16절이 뭡니까? 같이 읽어봅시다. 시작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하여 생각한 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그것 보십시오.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하여 생각한 즉” “생각한즉” 이게 바로 회복으로 가는 첫 번째 길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악인의 형통함을 보니까 ‘정말 나는 억울해’ 상대적인 박탈감을 갖는 것입니다. 왜? 같이 못 살 때는 괜찮은데 한사람이 갑자기 잘 살아버리면 그 사람이 잘산다고 해서 무슨 내 것 뺏어간 것도 아닌데 나는 괜히 더 비참해 보이는 것입니다. 같이 손잡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같이 은혜를 못 받을 때에는 그저 그런 대로 다 이런 건가 보다하고 사는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다 은혜를 받으면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야 나는 왜 이럴까? 야 나는 진짜 몹쓸 인간 인가봐. 나는 아무 쓸모없나봐. 하나님이 이제 나를 버리셨나봐.’ 이런 박탈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박탈감을 느낄 때에도 하나님을 바라봐야지 반역하는 마음을 가지면 안 됩니다.
근데 이 사람의 회복의 첫 번째 관건은 무엇이냐 하면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이렇게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떤 하나의 큰 벽에 부딪힐 때에 우리들이 볼 수 있는 태도가 두 개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는 생각하는 태도이고 하나는 그냥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아이, 내버려 둬 그대로 살 거야” 이런 사람들이 입에 붙은 말은 뭐냐 하면 뭐든지 물어보면 모른답니다. “요즘 어떠십니까?” “에이 모르겠습니다.” “왜 사십니까?” “나도 왜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회복이 되실까요?” “에이 나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마치 하나님만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것과 자기가 포기한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것과 자기의 수단과 방법을 의자 하는 것 사이에도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또 자기의 방법과 수단을 의자 하는 것과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들으면 자꾸 생각을 해야 됩니다. 엉뚱한 생각을 하면 안 되고 말씀을 들으면서 계속해서 그 말씀에 우리를 생각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보니까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잠시는 ‘막 살아버릴걸’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내 놓을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살아계신데 하나님은 악한 분이 아니신데’ 그 믿음이 이 사람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잠시는 그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서 완전히 혼란 돼가지고 막 절규하듯이 ‘하나님 도대체 내가 살아온 것이 뭡니까? 내가 왜 이따위로 살아야 됩니까? 아하 막살아버릴걸’ 그러다가 잠시 가만히 시간이 흐르고 나니까 그다음에는 혼돈이 왔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확신을 할 수는 없는데 뭐가 여기에는 다른 게 있을 턴데 하나님은 악한 분이 아니신데’ 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찌면 내가 이를 알까? 어떡하든지 내가 이것을 알아야 될 턴데. 왜 이렇게 되었는지. 왜 악인이 그렇게 형통하게 되었는지를 내가 알아야 될 턴데’ 이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아까는 ‘악인이 왜 형통합니까? 나는 왜 형통하지 못합니까? 나도 형통하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한테 그 해결이 없다면 나도 막살아버릴걸’ 이렇게 나갔습니다. 막 간 것입니다.
그런데 16절에 와서는 관심이 바뀌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 나에게도 형통을 주시옵소서. 그것이 아니라 무슨 비밀이 거기에 있을까? 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나는 고통을 받는데 막 사는 저 사람들은 형통할까? 거긴 무슨 뜻이 있을까?’ 이제 이 사람의 관심은 ‘나도 형통하고 싶다. 나도 돼지처럼 죽더라고 저렇게 돼지처럼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 나도 형통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아니라 알고 싶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이것입니다. 알고 싶었습니다. 풀고 싶었습니다. 풀고 싶었습니다. 그 마음을 갖는 것이 영적인 문제를 풀어가는 이제 단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풀면서 그다음에 풀리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른다는 이야기가 입에 붙으면 안 됩니다. 모른다는 이야기는 생각을 거의 안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감각적으로만 예수 믿는 사람들보면 참 답답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이제는 ‘악인이 형통한데 나는 왜 이렇게 가난할까? 나도 그렇게 형통해야지. 형통하지 못하게 살아온 나의 날들이 너무 억울해.’ 그것이 아니라 알고 싶었습니다. 어떡하면 이것을 알까? 그렇게 해서 그 다음에 뭐했습니까? 생각을 했습니다. 생각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누가복은 15장에 보면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 탕자가 아버지께로부터 아버님이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돈을 다 탔습니다. 아버지도 죽지 않았는데 유산 달라고 그러는 그런 불효막심한 놈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아버지가 죽으면 줄 재산을 내놔라. 타서 타 갖고 갔습니다. 그리고 허랑방탕하면서 거기서 다 썼습니다. 그리고 다 잃어버리고 이제는 완전히 다 알거지가 되어버렸습니다. 돈 있을 때 친구가 있지 돈 없으니까 친구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일 가증하게 여기는 돼지를 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돼지 우릿간에서 말입니다. 흉년이 들어가지고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 가지고 여기저기 뒤지면서 결국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 감같이 생기고 고염같이 생긴 건데 하여튼 맛이 하나도 없답니다. 그것을 먹고서 배 부르려고 돼지우리에서 그 열매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었는데도 아버지께로 안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뭐냐 하면 그 돼지 우릿간에서 길 다니면서 쥐엄 열매를 찾을 때에도 아버지께로 돌아갈 결단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순간에? 생각을 했습니다. 생각하기를 ‘내 아버지 집에는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아버지의 집의 그 풍요로움을 생각하니까 ‘내가 여기서 이제 돌아가야 되겠다.’ 결단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왜 읽습니까? 설교를 왜 듣습니까?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거나 어제 GBS 했지요? 그렇죠? 성경공부 어저께 좋았습니까? 나빴습니까? 좋았으면 ‘아멘’ 해보십시오. 여러분, 그런 성경공부 우리나라에서 흔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지식만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을 두드려 주는 성경공부가 돼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입니다. 말씀을 듣거나 성경공부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 무슨 얼마나 설교를 잘하나? 얼마나 성경에 감동적인 이야기가 많은가? 얼마나 성경공부가 재미있는가? 그것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끊임없이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설교를 듣고 설교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정말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3년 5년이 지나가도 성경을 펴면 그 설교가 생각납니다. 다 생각납니다. 그런데 그래서 생각을 계속 하면서 설교가 지나가도 그 나중에는 생각이 남아가지고 그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해서 우리인생을 결단하게 합니다.
이 시인의 회복의 길은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매 생각했습니다. 생각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종합적으로 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이렇게 살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나는 과연 구원을 받았는가? 정말 내가 하나님을 만났는가? 내 영적인 삶에서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이 충분한 것인가? 정말 무엇이 잘못돼 있는가?’ 그것을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것을 생각할 수 있도록 생각을 넓혀주는 생각할 수 있는 동기를 제공해주고 생각에 도저히 들지 않는 것을 생각하게끔 만들어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깨닫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면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깨닫는 일이 은혜 받는 일보다 먼저입니다. 깨닫는 일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보다 먼저입니다. 깨닫는 일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보다 먼저입니다.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인간의 생각에 한계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생각을 했더니 마지막 생각하고 얻은 결론이 뭡니까? 뭐라고요? “심히 곤란하더니” 그것입니다. 그게 인간의 결론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이런 질문을 제기 할 수 있겠죠? 아니 마지막 결론은 심히 곤란한 건데 당신은 왜 우리보고 생각하라고 그러느냐? 아닙니다. 그렇게 되었는데 생각을 한 그 마지막 결론이 심히 곤란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도 회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길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결국은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자기가 다 판단을 잘하고 있는 한은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인간이 잘 합니까? 안합니까? 생각을 안 합니다. 생각을 안 합니다. 자기가 ‘이것은 이렇게 하고 이건 이렇게 해야 된다’라고 하는 결정을 탁탁 탁탁 내릴 수 있는 것은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물어보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를 인간이 구하지를 않게끔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러나 도무지 자기가 알 수 없을 때 그때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주님의 뜻을 묻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했는데도 계속 생각을 했지만 마지막 인간의 머리를 굴려서 얻은 결론은 무엇입니까? “심히 곤란하더니”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심히 곤란한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 이외에 누가 우리의 영혼의 일을 알겠느냐?” 도저히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생각을 하고 하고 해봐도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침체가 올 때에 그래서 조금 아까까지 ‘아휴, 쯧 이렇게 다 때려 치고 막 살아 버릴 거야.’ 그랬는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그게 아닙니다. 그렇지만 해결은 안됐습니다. 그때에 마음이 산란하고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영적으로 침체에 들어 있는 사람은 횡설수설합니다. 횡설수설합니다. 혼자 산이라도 뽑을 것처럼 박수를 치고 난리를 치다가는 또 갑자기 심드렁해가지고 나가떨어지고 나가떨어졌다가는 또 도깨비같이 나타나가지고 막 혼자 다 뒤집는 것처럼 난리를 치고 사람이 일관성이 없습니다. 일관성이 없고 자기도 자기 자신의 일관성을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주여 죽기까지 쫓아가겠나이다. 이친구들이 다 주님을 버려도 나만 믿으십시오.” 그랬잖아요? 그러다가 그다음에 또 어떻게 됩니까? 주를 막상 끌려가려고 하니까 “이놈” 그리고 칼을 빼가지고 말고의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다니 또 주님이 붙잡혀가서 대제사장의 뜰로 끌려가니까 그 다음에 또 저쪽에 숨어서 나타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 또 나타나 가지고 “너도 예수의 한패지” 그러니까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일관성이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어느 한 부분을 놓고 그 사람의 신앙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야기입니다. 정돈 되어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드디어 해결을 받습니다. 할렐루야! 어떻게 해결을 받습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성경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성경이. 그렇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저희는 누굴까요? 하나님 없이 형통하게 사는 사람.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어떻게 갑자기 저희 결국을 깨닫게 되었을까? 갑자기 저희 결국을 깨닫게 되었을까? 우리는 이런 상상을 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탁 들어갔을 때 하나님이 “아삽아” “예” “너 조금 아까 성소바깥에서 하나님 없이 형통하고 잘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했지” “예” “그것 때문에 혼란하지” “예” “사실은 그게 아니라 이렇고 이렇고 어쩌고저쩌고 이렇고 이렇게 되어서 이렇게 된 것이란다” “할렐루야! 아멘” 그렇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깨닫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시편으로 미루어볼 때 시인은 그런 식으로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성소에 딱 들어갔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기보다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성소에 들어갔을 때 자기가 누구이고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모든 의문이 한꺼번에 풀리게끔 되어 진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마는 소위 이야기하는 직통 파들 많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뭔가를 내리시는 계시. 하나님은 신비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많은 신비한 체험들과 은혜들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인을 보십시오. 이 시인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신비한 체험을 가진 사람들의 삶은 언제나 역동적입니다. 그래서 신비한 체험이 있으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들이 생각을 넘어서는 그런 어떤 역동적인 삶을 삽니다. 그런데 그것이 말씀으로 정리가 되어야 됩니다. 그래야지만 진정한 힘 있는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내가 저희의 결국을 깨달았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선 두 가지를 볼 수가 있습니다. 성소에 들어갈 때에 문제가 풀렸다 왜 성소에 들어갈 때가 그 문제가 풀렸을까? 성소에 들어갈 때에 그 문제가 풀린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을까? 왜 다른 곳에서가 아니라 꼭 성소에 들어갈 바로 그 때에 문제가 풀린 까닭은 무엇인가? 성소에 들어가서 어떤 신비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기 때문 문제가 풀린 것이 아니라 성소에 들어갈 때에 이 사람은 오랫동안 잊었던 것들이 생각나게 되었습니다. 이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시험에 들어서 고통해하면서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여러분 이렇게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니까 교회가 얼마나 복스러운 곳인지를 잘 모릅니다. 교회에서 나와 달라고 바지가락을 붙잡고 통사정을 하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저 뭐 자기가 상당히 대단한 존재인 것같이 그렇게 뻐기는데 참 답답한 노릇입니다. 그렇죠? 그래도 우리나라에는 좀 낫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들의 얘기를 들으니까 이런 말하면 안 되지만 치사해서 목회를 못하겠답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 이삿짐까지 가서 목사가 다 날라주고 취직까지 시켜줘야 된답니다. 그래야지 어느 교회가 서비스가 더 좋은가 그걸 보고 이제 결정을 한답니다.
여러분 누구 좋으라고 신앙생활 하라고 권면을 받는 것입니까? 그래 내가 박 헌준 형제가 이제 8월 달이면 군대를 갑니다. 나라는 누구 보고 지키라고 맨 날 기도할 때 “도로 오게 해주시옵소서. 믿사옵나이다.” 이렇게 기도 한답니다. 그런데 돌아와서 물론 하나님의 일하려고 그러겠죠?
(예화) 제가 군대를 갔습니다. 군대 갔는데 내일 군대 가는데 오늘 밤 9시에 군대 가라고 통지가 왔습니다. 그런 놈의 군대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가지고 교회에 가서 목사님한테 인사를 해야 될 턴데 밤 10시입니다. 그래가지고 할 수 없이 밤 11시에 상계동까지 가 가지고 “목사님 제가 내일 아침에 군대 가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우리 홍 권사가 홍 권사가 누구냐 하면 목사님 사모님입니다. 그 목사님은 이상합니다. 자기 사모님을 권사 시켰습니다. 그런데 “우리 홍 권사가 기도해보니까 김 선생은 군대 안 간다고 그러든데 왜 가지? 그 이상하네.” 그러더니 이제 갔습니다. 갔는데 아 그러니 뭐 졸지에 갔으니 어떻겠습니까? 비는 주룩주룩 오는데 군대 들어가 가지고 하룻밤 자고 났는데 아니 조금 이만한 방에다 사람을 갖다가 150명을 집어넣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자나 그랬더니 양쪽에 죽 드러누우니까 소리를 빽 지르면서 “이놈의 자식들이 여기가 너네 안방인 줄 알아? 누가 똑바로 자라고 그랬어? 옆으로 자.” 그래서 갈치처럼 옆으로 죽 누워가지고 그런데 진짜 150명이 들어가더라고요. 갈치처럼 누워가지고 그러고 자고 일어났는데 자기는 뭘 자요 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는데 어디인줄도 모릅니다. 비가 막 쏟아지는데 기차타고 밤에 가가지고 내렸는데 거기가 알고 보니까 논산이랍니다. 진짜 논산은 논입니다. 진짜 비가 오면 진짜 논입니다. 그래서 논산인가 봅니다. 하여튼 다 물에 푹푹 빠지는데 그러고 나가지고 아침에 눈을 딱 뜨니까 그 때 겨울이었습니다.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2월 달에. 아침에 눈을 뜨니까 하필이면 누가 내 신발까지 신고 가서 나는 이제 신발도 없습니다. 다 나간다음에 뒤져보니까 구멍 뚫어진 허연 신발, 상습적으로 그 구멍 뚫어진 신발신고 와가지고 내 좋은 구두 신고 어디로 가버린 것입니다. 그걸 찾을 수가 있나? 그래가지고 처량하게 그 구두를 신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추운데서 말입니다. 달달달달 떨면서 그러면서 하여튼 보름동안을 있었는데 세수를 한 번도 못했습니다. 세수 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그다음에 주일이 됐는데 아 교회는 가게 해 주더라고요. 민주군대. 그래가지고 주일이 돼가지고 터덜터덜 이끌면서 그러면서 교회를 갔습니다. 아직 군대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민간인 옷 입어다고요. 그러고 이제 교회 딱 들어갔는데 탁 가서 기도를 하는데 찬송가가 들리는데 말입니다. ‘돌아와 돌아와’ 꼭 집에서 오라는 소리 같습니다. 야, 거기는 예수를 믿다온 놈이든 아니면 예수를 안 믿다온 놈이든 할 것 없이 전부다 우는 것입니다. 그게 회개하면서 우는 게 아니라 처량해서 우는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특송도 꼭 그런 특송을 해? ‘돌아와’ 마지막에 뭐냐 하면 ‘집을 나간 자여 돌아와 돌아와’ 그러더니 그 다음날 또 특송을 하는데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오오’ 근데 그 친구하고 나중에 교제를 했습니다. 근데 신학교 다니다 왔는데 바리톤인데 야, 600명 모였는데 말입니다. 마이크도 없이 하는데 쫙 퍼집니다. 완전히 기성 성악 가수 같습니다. 그러면서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오오 집을 나간자여 어서 돌아오오’ 그러면서 찬양을 쫙 부르는데 나도 울었지 뭐. 어떡합니까? 그래서 다 우는데 그때는 그래도 신앙이 꽤 들어갔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는데 내 마음이 말입니다 그 하나님의 교회에서 그 뭐 콘센트막사로 지은 집이잖아요? 내 마음이 한없이 확 물같이 녹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사람이 제대로 신앙이 들어간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곤고한 일을 당했을 때에 어디 갔을 때 하나님을 가장 느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어디나 계십니다. 여기도 계시고, 호명 산에도 계시고, 열린교회도 계시고, 사당동에도 계시고, 방배동에도 계시고, 화장실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그런데도 아니 이게 뭐 교리적으로 맞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니까. 그런데 시인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내가 주의 낯을 떠나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새벽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의로운 오른손이 나를 붙들리라” 그렇게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그대로 느끼는 것입니다.
(예화) 얘기 나왔으니 하나 더해야지. 그리고 밤 9시에 와가지고 군대를 가라고 그랬으니 그러고 이제 보따리는 무슨 보따리야 아무것도 안가지고 가는데 좋다 그래가지고 의정부 와서 머리를 빡빡 깎고 시계를 보니까 한 시간 반 남았습니다. 그래 어디로 갈 데가 없습니다. 그래가지고 서점엘 들어갔습니다. 책을 하나 딱 샀는데 책갈피에다 성경구절을 하나 누가 툭 끼어주었습니다. 그 주인이. 근데 그게 바로 그 구절입니다. 내가 지금 외운 구절. “내가 새벽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의로운 오른손이 너를 붙들리라” 그래가지고 그 성경구절을 갖고 얼마나 그리고 그 위에 그림이 뭐냐 하면 젊은 청년이 항해를 하고 있는데 뒤에서 예수님이 붙들고 계신데 그 손은 또 왼손이더라고요. 왼손으로 붙들고 계시는데 앞뒤가 안 맞습니다. 그래도 하여튼 은혜가 되더라고요. 오른손으로 하면 이사람 얼굴이 안보이거든. 그러니까 왼손으로 해 놓았습니다. 그러고 나가지고 그 다음에 한 시간 반 동안 뭘 할까? 그러다가 내가 너무 미안하니까 경기도 병무청에서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래가지고 미안하게 되었는데 일단 들어가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모색을 해보자고 그랬습니다. 그래가지고 이제 한 시간 반 남았는데 뭘 할까? 생각을 했는데 뭐 하겠습니까? 잊혀 지지도 않습니다. 의정부에 있는 어느 ‘성암교회’ 라고 간판이 있는데 그 누구네 교회인지 내가 알게 뭡니까? 들어갔는데 그 교회는 묘하더라고요. 의자를 안 놓고 바닥입니다. 마룻바닥입니다. 그때만 해도 옛날입니다. 한 20년 전이니까 마룻바닥입니다. 마룻바닥에 혼자 무릎을 탁 꿇고 앉아서 “하나님” 그러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나요? 그래서 간절히 손을 들고 기도하는데 거기서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처음이었습니다. 이렇게 손을 들고 쫙 기도하는데 따뜻한 기운이 위로부터 내려와 가지고 내 온몸을 감싸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막 온몸이 떨리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하나님께서 위로를 해주시더라고요.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십니다. 개울가에도 계시고 여러분들이 다 돌아가 버린 산꼭대기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믿습니까? 어디서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은 역시 하나님의 집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악인을 보면서 ‘저놈은 왜 형통할까?’ 그렇게 고민할 때도 그 현장에도 하나님은 계셨습니까? 안계셨습니까?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뿌리치고 때가 되매, 혹은 절기가 되매, 혹은 기도할 시간이 되매, 혹은 제사드릴 시간이 되매 성소로 들어갔겠죠. 문을 열고 성소로 싹 들어갑니다. 성소로 들어가는 그 순간에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성소로 들어가는 순간에. 그러니까 우리가 누구인지를 가장 잘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할 때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할 때. 우리는 알 것입니다. 그렇죠? 그러던 사람이 교회에 와가지고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죄인오라 부를 때에 날 부르소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소에서 받는 가장 커다란 유익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이렇게 예배를 드릴 때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망이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이 있으며 우리는 아무런 희망이 없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이 되어주시고 그리고 우리의 참된 기대와 우리의 인생의 모든 꿈이 하나님에게 있고 우리가 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인생들이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느끼고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때요? 신앙이 떨어지고 믿음이 식어지면 교회 나오기가 싫은 것입니다.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예화) 옛날에 같이 있던 형제하나는 신실한 형제였는데 교회를 안 나왔습니다. 그래가지고 “왜 안 나왔냐? 어디 아팠냐?” 그랬더니 “아니요” 그럽니다. 그래서 “왜 안 나왔냐?” 그랬더니 인천 앞바다 갔답니다. 그래서 “아니 왜 인천 앞바다 가냐?” 교회를 가려고 성경찬송을 들고 나오는데 도무지 교회로 발걸음이 안 옮겨지더랍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 그러니까 인천 가는 버스를 타고 인천을 가서 하루 종일 바다를 보다가 돌아왔답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관계가 무너지고 영적으로 어려워지면 교회가 싫습니다. 교회만 싫은 게 아니라 교회 다니는 사람도 싫습니다. 교회 다녀도 대충 다니는 사람은 좋은데 그렇게 뭐 맨 날 만나서 막 울고 불며 기도하고 만날 적마다 “당신은 말이야. 회복 되어야 된다.” 고 그러는 사람은 제일 싫다고. 당신 참 은혜 받아야 된다고 우리가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그게 은혜가 충만할 때는 그런 얘기해주는 사람이 너무나 감사하고 고맙고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면 그렇게 고까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 충만 하십시오” 속으로 ‘너나 받아라.’ “바르게 삽시다.” ‘너는’ 그러면서 마음이 꼬부라지는 것입니다.
근데 성소에 딱 들어갈 때에 이 시인이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그러니까 만약에 이 사람이 성소에 들어갈 때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서 “하나님 차라리 내가 왜 이렇게 삽니까? 그냥 막 살아버릴걸요” 그러고 쑥 들어간 것이 아니라 이 사람에게 준비가 있었습니다. 생각을 한 것입니다. ‘풀어야 될 턴데, 여기 뭔가 비밀이 있을 턴데’ 그리고 그사이에 마음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해답이 있을 거야’ 그러고 성소에 딱 들어가는 순간에 “주여 제가 왔사옵니다.” 그러고 주님 앞에 기도할 때에 주님이 자기를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경험해 봤지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 막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의 기도를 들었노라. 사랑하는 딸아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세상에서 너는 환란을 당하나 너는 담대 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
그런데 이 시인이 왜 성소에 들어갈 때에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 성소에 들어갈 때에 문제가 풀렸는데 성소에 들어갈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 내 얼굴 쳐다봐야 답이 없습니다. 성경 쳐다봐야지.) 대답이 뭡니까? 뭘 깨달았습니까? “저희의 결국을 깨달았다” 즉 무슨 뜻이냐 하면 저렇게 형통하고 잘사는데 나는 저 사람에게 없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이 사람은? 하나님 자신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지막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나의 영원하신 기업임을 그 예배의 순간, 성소에 들어가는 그 순간에 깨닫고 그것을 느낌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지막 결국이 얼마나 비참한가하는 종말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시며 이렇게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 때 하나님이 나를 용납해주시는 이 일이 영원토록 계속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 한 토막을 본 것이 아니라 인생 너머에 있는 영원한 세상을 본 것입니다. 그러면서 단순히 위로를 받은 것이 아니라 풀리지 않던 모든 문제가 종말의 문제를 보고 그 종말 넘어서도 영원히 함께하시고 그 영원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붙들고 계신 그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게 되자 그는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악인이 형통할지라도 종말은 그들에게 있어서 낭떠러지이지만 나는 하나님자신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나의 기업이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그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나의 영원하신 기업이 하나님 자신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저들의 결국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지금은 비록 형통하나 그러나 마지막에 하나님 없이 살아온 너희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리라. 하나님이 그것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생각을 해 보십시오. 해결이 안 되는 모순이 너무 많습니다. 이 세상에는. 그렇지 않습니까? 맨 날 탈세하고 나쁜 짓하면서도 끝까지 잘사는 사람들 많습니다. 돈 많은 사람들은 진짜 엄청 많습니다. 엄청 많습니다. 엄청 많은 사람 손 들어보십시오. 우리는 아무도 없습니다. 돈 많은 사람들은 진짜 엄청 많습니다. 그래가지고 그 돈을 말입니다 한없이 쓰고 삽니다.
(예화) 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기로 유명한 평창동에 사는 내 아는 어느 목사님의 얘기가 그럽니다. 앞집에 부잣집이 한 집 있는데 식구가 두식구인데 자가용이 세대입니다. 식구 두 식구에 식모 하나까지 합해서 세 식구인데 자가용 운전기사가 세 사람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 요새 미국 갔다니까 혼자서 자가용 세 대 쓰는 것입니다. 하나는 벤츠, 하나는 볼보, 마지막에 그랜저가 있는데 그것은 식모가 시장갈 때 쓰는 것이랍니다. 식모 기사까지 있습니다. 한 달 생활비가 2500만원이라 그런대요. 그러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행복한가하면 전혀 행복하지 않답니다. 그 목사님 댁에 놀러와 가지고 고기나 사 잡수라 그러고 봉투를 주고 갔는데 200만원 이 들었답니다. 도대체 무슨 놈의 고기가 그렇게 비싸? 우리는 지금 100만 원어치 사가지고 와서 다 못 먹고 이러고 있는데 80명이서 10번은 먹었으니까 800명이 먹는 건데 오늘 저녁에 기대하십시오. 오늘 등심 바비큐를 숯불을 피어놓고 행복하게 그러고 먹겠습니다. 아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죄지으면서 그렇게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마지막에 비참하게 죽느냐 하면 잘 죽거든요. 김일성 봐요? 얼마나 잘 죽었어요. 편안하게. 화장해서 뭘 해요? 화장까지 다 시켜가지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딱 이렇게 누웠습니다. 죽은 사람이 인물이 아무리 좋으면 무엇 합니까? 더 이상 볼 것 없습니다. 땅에 묻어버리면 그만이지. 왜 사람 그렇게 하는 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는데 그렇게 죄 가운데 살면서도 고통을 받지 않는 것이 풀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임마누엘 칸트가 뭐라고 그랬냐하면 “지옥이 있다 없다 말하기 전에 나는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옥이 없으면 인생의 모든 모순이 풀리겠느냐?” 그러면 모순이 풀리겠느냐? 죽은 이후에 세계가 있으니까 이 세상에서 해결되지 않는 모순들이 죽음이후에 세계에서 모두 풀리는 것입니다. 결국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을 딱 보게 되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보니까 그러니까 인생의 참된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게 뭡니까? 18절에 보면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시인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 갑자기 밖에서 잘 먹고 잘 살던 형통하던 악인들이 갑자기 망했다는 이야기입니까?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인데 그 미래에 일어날 일이 시인에게 과거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들이 성경에는 많이 나옵니다. 미래에 예루살렘이 아직 망하지 않았는데 선지자가 나타나서 “망하였도다. 망하였도다. 예루살렘이 망하였도다.” 그러지 않습니까? 미래에 일어날 일인데 과거처럼 말하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그런 예언적인 과거입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인데 시인이 시간을 초월해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들의 말로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비참한가 하는 것을 목격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말로가 어떤 것입니까?
(예화) 돼지를 치자면 돼지를 어떻게 칠 수 없는데 그런데 하여튼 돼지를 치자면 우리나라에 돼지 중에서 제일 맛있는 돼지는 제주도 돼지입니다. 제주도는 화장실 밑에다가 돼지를 칩니다. 그래서 돼지는 사료를 안줍니다. 그럼 뭘 먹고 자라는지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그러니까 거기는 환경오염문제가 없습니다. 돼지가 다 해결을 해줍니다. 그래서 처음에 제주도 갔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럽니다. 화장실 들어갔는데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꿀 꿀 꿀꿀’ 그러는 소리. 밑을 내려다보니까 밑에서 지금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돼지가 그렇게 자란 돼지든지 아니면 고급사료를 먹고 자란 돼지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습니다. 마지막에 기다리는 것은 다 골고루 죽는 것입니다.
여러분 남대문 시장에 가면 고사에 쓰기위해서 돼지 머리를 쫙 놓았답니다. 내가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돼지를 다보면 100마리면 100마리 다 웃으면서 있습니다. 그것은 왜 그런지 아십니까? 아무도 이 퀴즈를 못 맞히더라고요. 그게 바로 뭐냐 하면 칼을 목에 댈 때 간지러워 가지고 돼지가 웃은 것입니다. 칼이 닿는 순간에 간지러워 가지고 웃다가 죽었습니다. 돼지가 각양각색의 모양으로 전부다 다 이렇게 다 놓여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양육을 받고 어떤 식으로 길러졌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그 종류가 무엇이었든지 상관없이 그 마지막 결국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인간을 위해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설교자 한사람 태어났다. 또) 그 모든 것이 바로 돼지들의 말로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의 말로는 결국 무엇입니까? 그렇게 가지고 죽어가지고 머리 보면 재미있습니다. 남대문 가서 한번 보십시오. 웃으면서 돼지가 잘생긴 돼지 못생긴 돼지 쭉 이렇게 놓여있는데 그가 어떤 방식으로 양육을 받으면서 무슨 사료를 먹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무것도 문제가 안 됩니다. 그건 죽음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을 생각해보십시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과도하게 자기 육신을 위해서 엄청나게 많은 돈을 쓰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불행하고 짓밟으면서 까지도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사는 그 마지막 인생의 마지막 결국은 뭡니까? 인간은 여러 종류로 나눠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여러 종류로 나누는 것은 이 세상 살아갈 때만 나뉘는 것이지 딱 죽고 나면 두 부류입니다. 오직 두 부류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 모르는 자 딱 두 부류입니다. 하나님을 기업으로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 하나님이 기업이 되어 지시지 않은 사람들 딱 두 부류입니다. 그리고 파멸로 가는 것입니다. 그 결국을 보니까 완전히 다 무너지고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놀람으로 전멸하게 되었습니다.
20절에 보니까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 이다.” 21절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와서 그것을 깨닫고 나니까 그 다음에 다시 한 번 산란해진 것입니다. 그 산란은 결국 무엇입니까? 산란해지고 혼란해진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아까 나름대로 정리가 됐잖아요. ‘그래, 내가 이렇게 살아서 뭣하랴’ 그것도 일종의 정리는 정리입니다. ‘어휴 막살아버릴걸’ 그렇게 정리가 되었는데 하나님의 성소에 딱 들어갔을 때에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말로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너에게는 이 세상에 형통함이 없을지라도 내 자신, 하나님 자신이 너의 기업이시다’ 라는 사실을 보여줄 때에 그는 눈을 딱 뜨게 되었고 그 악인 앞에 기다리고 있는 비참한 멸망의 심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벌써 이미 이렇게 생긴 얼굴자체가 ‘나는 예수 안 믿는 사람이요’ 써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가끔 보면요. 그리고 벌써 이렇게 사람이 돈 많고 얼굴에 기름이 흐르면서 진짜 그 교만이 이렇게 불거진 사람들이 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자꾸 돼지가 떠오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꼭 돼지가 떠오릅니다. 저 영혼은 누가 건져낼 것인지 하 돼지가 떠오릅니다. 저러고 살다가 자기몸 하나를 갖다가 잘하기 위해서 마구 돈을 쓰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사는데 자 저게 뭐냐? 입니다.
(예화) 여러분들은 남탕에 들어가 본적 없죠? 들어가 보신 적 없겠죠? 남자 목욕탕에 가보면 가관입니다. 남자들이 거기와 가지고 우유 바르고 올리브 바르고 뭐 난리입니다. 사람들 왜 그러나 모르겠습니다. 인삼가루까지 바릅니다. 몇 만원씩 주고 뭐 여자들이야 그런다고 치지만 남자들이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얼굴이 바로 그런 얼굴입니다. 울퉁불퉁해가지고 배는 툭 튀어나와 가지고 얼굴에는 기름이 흐르고 딱 얼굴자체에 예수 안 믿는다고 쓰여 있습니다. 그 뭐하는 것입니까 지금. 돼지 갖다놓고 마사지 하는 것 이외에는 뭐냐 이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마지막 결국은 뭡니까? 그것밖에 아닙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말입니다. 나름대로 정리가 되었었어요. ‘아이 막 살아버릴걸.’ 그랬는데 깨닫게 되니까는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껍질이 깨어지는 아픔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혼란한 것입니다. ‘아아, 도대체 이것이 무엇인가?’ 그러면서 이전에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고정적인 관념들이 깨질 때 사람들은 혼란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웬만하면 이것을 안 허물어뜨리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사명을 주신 것이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며 무너뜨리기 위해서 선지자를 세웠다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무너뜨리면 뭘 의지하고 사냐? 이것입니다. 내가 여태까지 그것을 붙들고 살았는데. 그러니까 안 무너지려하고 안 넘어지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산란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때에 이 시인이 21절 마지막에 깨닫는 것입니다. 22절을 한번 읽어봅시다. 시작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이제 서야 주제파악을 한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그러니까 하나님을 성소에서 새롭게 만나고 인생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보고 삶에 대한 고정관념, 즉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시고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은 잘 살아 된다.’ 라고 하는 이런 고정관념에서 한번 깨지고 나니까 예전에 자기가 이 사람이 짐승처럼 살았습니까? 이 사람은 짐승처럼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이 사람이 짐승처럼 살았으면 이 세상에 짐승들만 모인 동물의 천국이 되게? 아닙니다. 짐승처럼 산 사람이 아닙니다. 살았습니다. 경건하게 살고 내 마음에 더러움을 제해버리려고 노력을 했고 내 마음에 내 몸에 불의를 버리려고 애를 쓰며 노력을 했습니다. 결코 짐승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깨닫고 나니까 이전에 자기가 생각했던 것들이 정말 짐승처럼 산 것입니다. 깨닫게 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는 주제 파악을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자신을 모르고 자기가 제법 무엇인가 된 것처럼 교만한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나는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게 집회에 나가면 그것이 하나의 묘미입니다. 묘미입니다.
(예화) 그러니까 나는 지금도 영원히 잊혀 지지 않는데 학생들한테 책을 이렇게 읽히면서 그러면서 이제 그 책을 읽은 소감을 쓰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다 읽고 나서 자기가 깨달은바들을 쭉 썼습니다. 내가 이름은 일부러 외우질 않습니다. 그런 학생들의 이름을 기억하면 내가 머리에 남을 까봐. 2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김경해 전도사님 졸업하시기 전에 그때 같은 클래스에 있던 사람인데 누군지 이름은 모릅니다. 그런데 ‘묵은 땅을 기경하라’를 읽으라고 그랬습니다. 쭉 읽었더니 아주 리포트를 깨끗이 썼습니다. 타이프를 쳐서. 그런데 그 리포트내용이 뭐냐 하면 교수님은 시간도 많으시군요. 뭐 이런 걸 만들어가지고 학생들보고 읽으라고 그럽니까? 이런 정도를 쓸 수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만약에 나를 불러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시면 교수님한테 답변할 용의가 있습니다. 처음서부터 끝까지 도전적입니다. 그런데 리포트는 깨끗이 썼습니다. 그래서 그다음에 집어치우고 그다음에 리포트를 또 하나 내주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벧엘로 올라가라”입니다. ‘벧엘로 올라가라’를 쓰라고 그랬더니 그 다음에 썼는데 똑 같습니다.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더 길고 더 치밀합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말하자면 반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 그런가 보다하고 그 리포트를 따로 내가 기억을 해 두었습니다. 마지막의 세 번째 ‘십자가의 도전’ 이라는 책인데 지금은 책이 없습니다. ‘십자가’ 라는 책을 이렇게 해가지고 내줬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자기가 썼는데 뭐라고 썼냐하면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지금 왜 이러는 것일까? 나는 왜 이러는 것일까?’ 그런데 초점이 아예 없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두 책을 읽고 나는 꼼꼼하게 읽은 다음에 신랄한 비판을 가했는데 왜 이럴까? 이 90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이 얄팍한 타자로 친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왜 이렇게 무너지는 것일까?’ 그러면서 막 갈등하면서 (제발 조는 사람한테만 갔으면 좋겠어요. 깨어있는 자에게는 가지 말고) 그러면서 마지막에는 뭐냐 하면 ‘왜 나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이 십자가의 평범한 말씀 앞에서 나는 왜 나 자신을 못 가누고 모든 것이 지금 다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심정이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그러면서 그 푸념을 댓 페이지에 걸쳐서 또 깨끗이 써서 냈습니다. 그게 바로 뽑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뽑히는 것입니다.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와르르 무너지게 될 때에 사람들이 다 깨닫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얼마나 무지한 인생인가? 내가 얼마나 짐승 같은 인생인가?’ 그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뭐라고 그럽니까? “깨닫지 못하는 이가 우매 무지하여 짐승과 같사오니” “짐승과 같사오니”말이 통하지 않는 짐승과 꼭 같은 것입니다. 이 시인이 여기서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그리고 인생의 참된 비밀에 대해서 깨달은 사람들은 겸비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칼빈선생이 ‘왜 하나님이 이 세상에 구원을 하시려면 다 구원을 하시지 어떤 사람은 구원을 하고 어떤 사람을 구원을 안 하셨을까? 이것을 어떻게 하면 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굉장히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글을 쓰다가 바닷가를 산책하는데 바닷가에서 어떤 아이가 거기서 놀 시간이 아닌데 아이가 혼자서 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 넌 뭘 하냐?” 조가비를 가지고 바닷물을 퍼면서 장난을 하고 있었습니다. “야, 넌 뭘 하냐?” 그랬더니 웅덩이를 요만큼 팠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아저씨 내가 이 바닷물을 전부다 다 퍼서 이 웅덩이에다가 담으려고 그래요” “그래? 그게 담아지겠니?” 그러고 돌아오는 길에 말하자면 번쩍하고 영혼을 스쳐가는 섬광을 발견했습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뒤를 돌아보니까 그 아이는 없더라.
그러니까 자신의 한계를 깊이 인식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뭐라고 그럽니까? 그렇게 예수 깊이 만나고 나니까 그렇게 일평생을 주님만을 위해서 살면서 마지막에 고백은 뭡니까? “미쁘다 이 말이여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하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런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시인이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앙의 세계와 하나님의 섭리의 세계와 그리고 하나님의 그 은혜의 세계가 얼마나 넓은가? 내 인생의 요런 고통의 문제 몇 개를 가지고 하나님은 잘못됐다, 하나님은 옳다, 하나님은 이랬다저랬다 이렇게 인간이 판단한 것이 얼마나 짐승과 같은 행동인가 하는 것을 이 시인이 깊이깊이 깨닫는 된 것입니다.
어디서 그렇게 깨닫는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성소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니까 인생의 풀리지 않았던 무지의 문제가 풀렸습니다. 무지의 문제가 풀리니까 영적인 회복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회복이 어떻게 주어졌는지를 내일 말씀드리겠는데 정말 장엄한 회복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제는 이 세상에 어떤 것이 와도 흔들 수 없는 그런 신앙으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23절에 보니까 같이 읽읍시다. 시작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 손을 붙드셨나이다.” 그렇습니다. 결국은 그런 모든 영적인 침체의 문제와 무지의 문제를 극복하신 것이 사람이 아니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들도 하나님과 대면하기를 힘써야 됩니다. 그리고 성소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그때에 우리의 모든 무지가 풀리고 그리고 우리가 우리 자신이 누구인 가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는 이런 은혜가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것을 믿습니다. 한 음성으로 같이 우리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