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 3일 새벽예배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행 9:26-30).
믿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았겠어요? 유대교의 신진지도자의 길을 걷는 사람이었고 똑똑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때에도 이미 널리 이 사람이름이 알려졌던 것 같아요. 워낙 강성 유대인이고 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일에 있어서 잔인할 정도로 앞장섰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제 기독교 공동체는 이 사람이 자신들에게 가할 위해를 기억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사람의 이름과 신상을 알렸을 겁니다. 그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사도들 좀 만나자고 하고 그들과 함께 사귀고 자기도 복음을 듣고 싶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믿을 수가 없었죠. 또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 이번에는 어떻게 교회를 해치려고 하나 하는 두려움이 앞섰을 거 아닙니까? 이때에 이 사람의 회심을 증명해주던 사람이 있었어요. 바나바라는 사람이었죠. 후일에 이 바나바는 사도바울을 따라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훌륭한 동역자가 되죠. 좀 심하게 이야기하면 바울의 수행인, 혹은 비서처럼 되서 함께 복음을 전하게 되잖아요. 사실은 사울이 바울로서 사람들에게 나타나서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기 전에 바나바가 이미 당시에 초대교회의 유명인사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거죠. 사도들도 이 사람의 이름을 알고 있고 이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줄만한 관계가 이미 초대교회와 형성되어있었다는 거죠. 이 사람의 확인으로 말미암아 사울의 회심이 기독교 공동체에 믿어지게 되었다는 거죠. 이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깊이 받는 감명이 있어요. 자신은 사울하고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의 위치를 이미 초대교회 안에서 누리고 있었거든요. 그만큼 이미 유명해진 사람이란 말이죠. 그런데 사울의 회심을 보면서 하나님이 이 사람을 크게 사용하시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자 그것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경쟁의식을 느끼고 이러는 대신에 오히려 그 사람을 하나님이 충분히 쓰실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세워주고 자신은 오히려 겸손하게 사울을 돕는 자로 자처하게 되는 거죠. 오늘날과 같이 조금만 하나님이 누구를 사용하시려고 하면 헐뜯지 못해서 안달하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 입장에서는 참으로 생경스러운 광경이다 라고 하는 거죠. 이런 것들을 가능하게 했던 것들이 예수의 마음이 아닐까요? 자신들은 아무것도 아니고 그리고 자기들을 이렇게 구원하신 주님만이 이렇게 높임을 받으셔야 하며 나아가서 자기들을 구원하신 이런 구원의 은혜로운 역사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그런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거죠. 그래서 이 바나바는 유명인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이 쓰시려고 하는 이 바울이라는 청년을 보면서 자신은 오히려 그를 수행하고 그를 돕는 자로 자처하면서 하나님이 이 사람을 충분히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실 수 있도록 겸손하게 쓰시는 하나님 앞에서 이 사울을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한때는 바나바라는 인물에 대해서 깊이 매료된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바울보다 더 좋아했어요. ‘야! 진짜 이 사람이야 말로 오늘날 섬기는 자들의 모본이구나!’ 그래서 이제 이 앞에서는 바나바와 사울, 바나바와 사울 이렇게 나오다가 딱 뒤로 넘어가면 바울과 바나바, 바울과 바나바 이렇게 나와요. 아예 이름 자체의 순서가 바뀌게 되요. 이걸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이 생각이 나는 거죠.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실 때 세례요한이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주님께 세례를 드릴 수 있습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아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마땅하다.” 이렇게 주님이 말씀하시잖아요. 그러니까 관점 자체가 자신의 유익, 자기의 관계 이런데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의,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 거기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되는 거죠. 바나바도 바로 그런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기가 유명인사였지만 그러나 갓 회심한 사울을 높이고 자신은 그 뒤에서 그를 섬기는 자로 자처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이렇게 되니까 그 다음에 또 박해가 일어나는 거죠. 사울은 회심하는 즉시 하나님 앞에 무슨 어마어마한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회심하자마자 즉시 고난과 박해가 시작되었어요. 그래서 결국은 다시 예수님의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피신하는 장면이 나오는 거에요. 그러니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금시발복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가르치는 교리가 사실은 얼마나 많이 잘못 됐는지를 보여주는 거죠. 복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참된 성경적인 행복 그 축복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매일매일 걸어가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