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월 18일 새벽예배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쌔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에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니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이 박수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행 13:4-12).
그렇게 해서 바울로 바뀌어진 이름이 나오는 데 바나바와 바울이 파송되어서 그래서 선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제 이들이 제일먼저 가서 복음을 전한 곳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여기가 지금 예루살렘이나 유대지역이 아닌데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인데 어떻게 여기 이렇게 유대인들이 많이 있었을까? 이 사람들을 가리켜서 소위 ‘디아스포라의 유대인’이라고 부릅니다. ‘흩어진 유대인들이라’ 왜 유대인들이 이렇게 흩어졌나 하면요.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관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예수님이 계시던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치적으로 로마아래 살았습니다. 로마시대 이전에는 헬라시대였고 헬라시대이전에는 메대와 파사,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페르시아시대입니다. 그리고 그 이전으로 올라가게 되면 바빌론의 시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바빌론 때에 유대인들이 흩어지게 됩니다. 포로로 끌려가고 나라가 망하면서 그러면서 이제 바빌론의 국제화 정책에 의해서 이 사람들이 전부다 흩어지게 됩니다. 종으로 끌려간 사람도 있고 이렇게 하면서 민족이 전체적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이게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에요. 물론 거기에서 다시 또 한180년 정도 올라가게 되면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하게 되는데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앗시리아라는 나라에게 망하게 되는 데 이때에도 역시 국제화 사민정책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북쪽 땅으로 들어오게 되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끌려가거나 흩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백성들이 이 예수님시대에는 전 세계에 흩어져 살았어요. 흩어져 살아도 그들이 아주 분명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 있었어요. 이것이 유대교 신앙이에요. 특히 남왕국 유다사람들은 더 그랬습니다. 유대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 사람들은 결국 구약에 나오는 여호와를 믿는 종교가 이제 말하자면 신약과 구약의 중간지대에 들어오면서 변질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구약종교와는 또 다른 어떤 사람의 여러 가지 공교한 유전들이 결합된 그러한 새로운 종교들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이것들이 이제 당시 예수님이 계실 때 이스라엘사람들 속에서 보편적으로 믿던 그런 종교였습니다. 이렇게 되서 흩어진 유대인들이 그렇지만 여전히 구약을 중시하고 특별히 모세오경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이전에는 이스라엘사람들이 제사를 중심으로 살았지만 성전이 파괴되고 하면서 이제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회당이 발달하게 됩니다. 회당이 뭐냐 하면 유대인을 정말 유대인으로 교육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교육시설이에요. 그래서 그 회당에는 회당을 관리하는 사람이 있고 거기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이 있어서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회당에 다니면서 공부를 하게 됩니다. 이게 한참 많을 때에는 열 집에 회당이 하나씩 있었다고 하니까 어마어마한 수의 회당들이 유대인이 사는 곳마다 전부 다 흩어져 있어서 거기에서 그것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이 모여서 교제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민족적인 결속을 다지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유대인이 가는 곳에 회당이 있다.’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회당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배경을 가지고 지금 여기에 회당에 유대인들이 많이 모이게 되었고 거기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나게 만들어 주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사도들을 파송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너희들은 차라리 이스라엘에 잃은 어린양에게로 가라” 그래서 사울과 바나바가 이방선교를 위해서 하나님의 앞의 특별히 사명을 받은 사람들임에는 틀림없지만 우선적으로 이제 흩어진 유대인들의 회당을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의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되지만 우리들이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애정을 가지고 헌신해야 될 부분은 이미 믿었었지만 그러나 지금은 낙심한 사람들 그리고 지금 믿고 있지만 그러나 제대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 등등 이런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런 일이 필요하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오늘 이렇게 복음을 전하고 그러다 보니까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서기오 총독이라는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선교에 있어서 이것은 매우 중요하죠. 한사람의 영혼의 가치는 모두 동일하지만 그러나 이렇게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면 선교적으로 매우 이점이 있고 쉽죠. 그래서 서양선교사들이 여기 들어올 때에도 제일먼저 왕실에 먼저 손을 뻗쳐서 신식의료기술을 베풀고 이렇게 하면서 그러면서 접촉이 이루지면서 한국선교가 훨씬 더 많은 피를 흘리지 않고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죠. 이건 하나의 좋은 선교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그렇게 총독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하니까 엘루마라고 하는 무당이 그것을 못하게 아주 힘써서 방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복음의 밝은 빛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이 들어온 이후에 일어나는 많은 결과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이 들어가고 나면 가만히 있지를 않아요. 기존에 있는 사회의 질서, 체계, 악 이런 모든 것들을 그대로 용납한 가운데 그대로 복음이 담기기만 하면 사실 중국에서도 지금 저렇게 심하게 할 수 없거든요. 지금 중국은 굉장히 검속이 심해지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잡혀 들어가고 이런 중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아웃리치가시는 분들 중에서 중국가시는 분들은 기도 정말 많이 하고 가셔야 합니다. 이렇게 심각할 정도로 어려움들을 많이 당하고 있는데 왜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복음이 들어가도 그냥 지금 있는 모든 체제,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도덕이나 관습 이런 것들을 가만 내버려둔 가운데 복음이 그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 만하면 중국에서 저렇게 힘들어할 이유가 없거든요. 저렇게 핍박하고 막 그럴 이유가 없거든요. 인도 같은 나라도 마찬가지요. 복음을 굉장히 두려워하죠. 복음이 제대로 들어가면 카스트제도들 말이죠. 지금 아직까지도 백성들이 네 가지의 계급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결국은 민주적인 발전을 가로막고 있어요. 이런데 복음이 제대로 들어가서 역사하면 기존의 질서들이 다 해체되거든요. 지금 이슬람 같은 데가 기독교 복음을 굉장히 싫어하고 혐오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들어가기만 하면 그 질서들 다 파괴됩니다. 차도르 걸치고 다니고 여성들을 그렇게 학대하고 일부다처제하고 이러는 것들 다 문어지거든요. 이러니까 그런 복음의 강력한 파괴력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이 정치하거나 이미 사회에서 이익을 누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죠. 우리나라의 근대의 역사를 보더라도 복음이 제대로 들어간 모든 곳에 이런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이만큼이라도 하고 살아가는 이유가 사실은 교회 때문입니다. 제일먼저 교회에서 선거를 통해서 사람들을 뽑고 이런 거 전부다 교회에서 배운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로 민주주의의 교실이 지방자치라고 말하지만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사실 민주주의의 자치교실은 교회였어요. 교회에서 그렇게 민주적인 사고방식의 영역을 받고 첩들을 거느리게 되는 것에 대해서 교회에서 심하게 질타하고 하면서 이런 것들을 버리게 되는 거예요. 법으로 금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에요. 그 이전에 벌써 복음의 영향으로 이런 것이 잘못된 것을 알게 되었고 여성들의 지위가 향상되는 문제, 이런 많은 것들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게 된 거죠. 충분하지는 않죠. 지금도 우리들이 제대로 가르쳐야하고 지금도 그런 모든 것들을 우리들이 고쳐나가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는 거죠. 여기 엘루마라는 사람도 마찬가지죠. 복음이 들어와서 세상이 변화되고 이렇게 되면 자기의 밥줄이 떨어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복음의 밝은 빛을 사람들이 받아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면 자기 같은 무당을 의지해야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그렇게 되면 당장 자기의 수입이 줄어들고 생계에 위협을 받고 하는 이런 현실적인 문제가 나오니까 아주 극렬하게 저항을 하는 거죠. 지금도 기독교를 박해하는 많은 이유 가운데 주된 이유가 바로 이런 거예요. 정말 사회가 우리가 정말 민주적으로 발전해야 하겠다고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고 개방성을 가지고 있으면 이런 식으로 복음이 방해받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두려움들이 있는 거죠. 이때 여기에서 성령님의 커다란 역사가 나타납니다. 바울이 ‘사울이라 이름 하는 바울이’ 사울의 이름이 바울로 넘어가는 그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 광경을 보다 못해서 그를 책망하게 되죠. 그리고 성령의 심판을 불러옵니다. 이 사람이 눈이 어두워서 당장 소경이 되어 보지 못하는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게 됩니다. 이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와 관련이 있어요. 그래서 강력한 부흥이 있는 그곳에 죄에 대한 책망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의 역사는 부흥이 일어나는 곳에 강력하게 일어나요.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의 역사는 부흥이 일어나는 곳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 있게 선포되고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나면 사람들은 애매모호한 태도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어지는 거예요. 믿든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 큰 징벌을 받아서 망하든지 그런 것들이 현실적으로 느끼게 만들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놀라운 은혜를 받고 쓰러질 듯이 주님의 품에 안겨서 은혜를 받는 이런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또 한편으로는 이런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죄 가운데 방황하다가 쓰러지고 그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여러 방향으로 이런 것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에서도 성령의 죄를 책망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중생하게 하는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있으니까 회개하지 않고 완악하게 주를 대적하는 엘루마라는 사람이 이렇게 징벌을 받는 장면이 나오는 거죠. 교회역사를 보면 때때로 하나님을 완강하게 저항하던 사람이 그 자리에서 아냐냐와 삽비라 처럼 죽는 사건들도 종종 나타납니다.
1899년도로 기억이 되는 데요. 캐나다 토론토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면서 강력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을 때 도시전체가 그런 부흥을 경험하고 있었는데 그 집회를 아주 열렬하게 방해하던 무리들이 있었어요. 누구냐면 거기에서 술을 만들어 팔던 주류업자들이었다고 그래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회개하면 술집을 안가니까. 그러니까 그 부흥회를 아주 조직적으로 방해를 했고 그러는 가운데 이제 한 사람이 집회에 와서 아주 심하게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로 설교시간에 대들었어요. 그런데 참 신기하게 그 전날 그 집회를 준비하기위해서 목사님이 말씀을 준비하는데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이 말씀을 전하라고 가르쳐 주시는 데 그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히스기야에게 주신 말씀이었어요. ‘네가 죽고 다시 살지 못하리라.’ 그걸 가지고 어떻게 말씀을 준비하나 그러고 어쨌든 그 본문을 가지고 전하는 데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막 신나게 모욕을 하고 그 집회에 모였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게 되었어요. 그때에 설교자가 ‘죽고 다시 살지 못하리라’ 하고 외치니까 그 사람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소리소리 지르던 사람이 입에서 피를 토하고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어요. 이렇게 구원에 강력한 역사가 있는 곳에는 죄를 책망하는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가 있어요.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주님 앞에 바로 세워져 가는 거예요. 여기에서도 이런 역사가 일어나면서 이제 이 엘루마는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게 되었고 이로 인해서 서기오총독이 믿게 되었고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복음의 위대한 능력,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전파되게 되었던 것이죠. 그러니 보십시오. 이들을 선택해서 따로 세우라는 것도 성령의 지시였고 이들을 파송하신 것도 성령님이셨고 그 교회의 동조를 얻어서 성령님이 이들을 파송하셨고 이들로 선교해야 할 것도 성령님이셨고 반대에 부딪혔을 때 그것을 넘어가게 하신분도 성령님이셨고 그리고 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믿어지게 만드신 분도 성령님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만큼 이 성령님을 민감히 느끼는 사람도 없습니다. 진짜 복음이 선포되어지는 현장에 우리들이 있으면 성령님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역사하시고 역사하시지 않는 것에 따라서 선교현장에 놀라운 차이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현장에 있어보면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의 삶에 있어서 얼마나 절대적으로 필요한지 알게 되는 것이죠. 세상 끝 날까지 교회는 이렇게 성령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부름 받은 공동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