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월 1일 새벽예배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을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5-26).
많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했더니 이제 많은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바나바가 가서 실상을 보면서 그들에게 따뜻한 권면의 말로 주께 굳게 붙어있도록 권고하고 가르쳤더니 오히려 더 큰 무리가 늘어나서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더 많이 믿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것을 보면 교회에서 행해야할 아름다운 섬김이 전도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죠. 전도도 중요하죠. 동시에 중요한 게 뭐냐 하면 전도되어서 온 교인들이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또 영혼을 사랑하는 착한 사람,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따뜻하게 돌보면서 그러면서 그 영혼들을 진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 이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렇게 잘 가르치고 따뜻하게 위로하고 이렇게 하니까 사람들이 죽 늘어나게 되는 거죠.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이죠. 이 두 가지 사역이 교회 안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해요. 전도만 하고 들어온 영혼을 돌보지 않는 다든지 아니면 들어온 영혼들만 데리고 복닥거리고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 다든지 그러면 교회가 점점 왕성해질 수 가 없는 것이에요. 이 두 가지 사역이 균형 있게 수행이 되어야 된다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이제 바나바는 두 가지 일중에 특별히 영혼들을 잘 돌보는 이런 일에 있어서 탁월한 재능을 가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데리고 영혼들을 섬기는 일을 감당하게 되었던 것이에요. 그 일이 있고나서 이제 바나바가 다소에 있는 바울을 찾아갔습니다. 이미 9장에서 사도바울이 회심을 했을 때에 사도들과 함께 교제하고 싶어 했지만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까? 그때에 사도바울의 회심의 진실성을 변호해주고 감싸준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는 당시 바울하고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예루살렘교회의 저명인사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하나님이 바울을 쓰시려는 것을 알자 자기가 오히려 낮아지고 바울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높인 인물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정말 뛰어난 인품을 가진 그런 바나바였다라고 여겨지는 거죠.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바울을 큰 그릇으로 사용하시려는 것을 깨닫게 되자 다소로 찾아간 거죠. 그래서 바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바울을 잘 권면해서 그래서 데리고 안디옥이라는 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일년 동안 머물면서 공동사역을 하게 된 거죠. 그래서 아마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고 전파되어 들어온 사람들을 가르칠 때에 자기가 돕는 자로서 그 사람들을 주께 붙어있으라고 따뜻하게 권하며 그 착하고 성령 충만하고 믿음이 충만한 그런 인품을 가지고 내적인 목양의 사역들을 잘 도왔을 것이라고 여겨져요. 그랬더니 교회가 아주 탄탄하게 서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각자에게 뛰어난 달란트를 주시어 주님을 위해 일하게 하시는 그런 경우가 있지만 그러나 그 어떤 경우도 하나님은 그 사람 혼자 일하게 하지 않으셔요. 그래서 주위에 많은 사람들을 붙여주셔서 그들과 함께 연합을 이루면서 한 지체가 되어서 섬기게 하시는 거죠. 그런 것들을 잘 찾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비결이에요.
그래서 요한 웨슬레가 이런 일을 참 잘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어요. “당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잘 섬기시길 원합니까? 그러면 함께 섬길 동역 자를 찾으십시오. 기독교는 혼자 믿는 종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했어요. 그렇게 해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시는 사람들을 함께 잘 엮어서 그림같이 함께 어울리게 해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생활,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섬김의 삶이에요.
그런데 가끔 보면 걱정이 되는 사람들이 있지요. 자기가 혼자하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리는 사람, 아주 심하면 자기 혼자 일을 해내가면서 자기를 따르지 않으면 상대방에 대해서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는 사람, 아주 소인배처럼 속이 좁고 그래서 똘마니처럼 자기를 따르지 않으면 자기 손에 집어넣지 않으면 그 사람과 아주 명확하게 선을 긋고 적대적인 감정을 갖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설령 그에게 은사를 주셨다고 하더라도 쓸모가 매우 적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아주 작은 집단속에서는 어떻게 일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자아가 깨뜨려지기 전에는 하나님이 큰일을 위해서는 그 사람을 쓰실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큰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인격과 생각의 폭이 넓고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소인배가 되면 안 되고 군자와 같은 리더십을 가져야 되요. 그러기 위해서는 가슴이 넓어야 되요. 그래서 하나님이 쓰시려는 다양한 사람들이 자기마음에 다 맞을 수가 있어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자기가 하나님도 아닌데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런 사람들을 가슴에 다 품을 수 있는 폭넓은 심성과 사람을 향한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작은 일을 할 때에는 그런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일이 가능한데 하나님이 큰일을 하시려고 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 빼내버리세요. 그리고 그런 심성을 가지고 일 할 수 있는 사람을 하나님이 새롭게 세우시는 거예요. 그렇게 해야만 사역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보세요. 여기에 바나바라는 사람이 안가고 ‘어이씨, 내가 그래도 저보다 먼저 회심하고 나는 그래도 명색이 예루살렘교회의 저명인사인데, 지가 예수님을 만났다고 그러지만 하는 데 사실 그게 진짜인지 거짓인지 누가 알아? 그리고 저는 여태까지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인데 그 회심을 누가 믿을 수 있겠어, 좀더 두고 봐야지.’ 그러면서 ‘그렇지만, 네가 우리무리 가운데 들어와서 내 똘마니 노릇이나 한다면 내가 한번 예루살렘교회에 가서 얘가 그런 애가 아니라고 내가 한번 말해줄 용의는 있지.’ 이런 식의 심성을 만약에 이 바나바가 품었더라면 하나님이 바나바 때문에 바울을 안쓰셨겠어요? 아니면 바나바를 버리고 바울을 쓰셨겠어요? 대답을 이야기 해봐요. 너무나 명백하잖아요. 하나님이 벌써 바울을 쓰시려고 작정을 하신 거예요. 이방의 임금들과 나라들 앞에서 예수님을 증거하기위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신 그릇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차라리 바나바를 버리시고 바울을 쓰시지 않겠어요?
바나바는 그런 심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어요. 쓰시려고 하자 저명인사인 그 사람이 그 바나바가 기꺼이 바울의 비서가 되는 거예요. 이 다음서부터는 어떻게 나오느냐하면 바나바와 바울이 아니라, 바울과 바나바, 바울과 바나바 이렇게 나옵니다. 바울 뒤에 숨어버리는 거예요. 바울을 하나님이 쓰시려고 하자 바울 뒤에 숨어버리는 거예요. 이 사람은 말이죠. 제가 한때 바울보다 이 사람을 훨씬 좋아했었어요. 이 사람은 하나님이 신약교회에 주신 매우 특별한 선물이에요. 이 사람의 행적이 다 안 나와서 그렇지 이 사람이 교회에 끼친 유익은 이루 말할 수 가 없어요. 그러면서 바울을 다루는 리더가 아니라 헬퍼가 됩니다. 하늘나라에서 누가 더 큰 상급이 있는지 가봐야 알아요.
이런 것들이 말하자면 자기에게 맡겨주신 목양, 구역 혹은 교회, 사역 이런 것들 속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을 좌우하는 중요한 변수가 되는 거예요. 원래 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는 것은 차가운 제도나 물질, 그리고 기구 그런 위에 부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복은 사람위에 부어지는 거예요. 하나님의 복은 각 사람위에 부어지는 것이에요. 성령의 충만한 기름 부으심은 제도나, 건물 그리고 사람이 세운 계획위에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위에 부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아닐 경우에 그런 부으심은 없죠. 하나님께서 바나바와 같은 사람을 통해서 그런 사실들을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들이 이렇게 보면, 저도 목회 나가서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 교역자들은 물론, 장로님, 집사님, 심지어는 전도사 때는 교사, 수많은 사람들과 일하잖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매우 유능해요. 그러면 처음에는 함께 손을 잡으면서 일을 해요. 그런데 일이 커져요. 그러면 많은 사람이 나와 관계를 맺으려고 해요. 그런데 그렇게 폭넓게 사역이 전개되는 데 하나님의 축복이 부어지는 데 그렇게 넓어지는 사역을 따라올 수 있는 심성이 안 돼요. 그러면 일이 작았을 때는 그 사람이 내 가까이 있지만, 일이 커질수록 결국 그 사람을 멀리 해야 되요. 멀리해야지만, 다른 더 많은 사람들이 열려진 마음으로 내 지도력 아래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일을 잘해나갈 수 있는 거예요.
속 좁은 그 사람이 보기에는 ‘제기랄, 맨 처음에 근근덕신으로 무슨 일을 한다고 할 때에는 나를 필요해서 실컷 부려먹더니 이제 좀 뭐가 되고나니까 이제 나를 찬밥 취급하는 구나!’ 그런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밖에 생각 못 할 거예요.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물론 지도자가 인격의 결함이 있어서 그럴 수가 있겠지만 그러나 사실 지도자는 그런 개인의 감정만을 가지고 일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에요. 개인적으로는 사람이 좋고 그리고 꼭 필요하다고 여겨져도 전체를 이끌어 가는데 있어서 화합을 방해하고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이 함께 협력해서 일할 수 있는 길을 자꾸 막는다고 생각이 되면 결국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그를 멀리해야 하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는 거예요. 그런 상대적으로 끊임없이 박탈감 같은 것을 느끼겠죠? 그죠? 그러면서 사람이 점점 사람 집착적이 되어가는 거예요. 당당하게 하나님이 나를 쓰시고 계시며 내가 하나님의 원하는 자리에 있으며 하나님의 큰 계획을 내가 이루어가는 도구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어떤 지도자에게 점점 매인 사람이 되어가는 거예요. 그가 칭찬하고 타이르면 자기가 막 올라가서 열심히 일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아까 말씀드린 이유로 인해서 멀리하면 지도자에 대해서 반감을 품거나 지도자에 대해서 서운한 마음을 품으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 자체가 막 흐트러지는 거예요. 이건 결국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의 이러한 아집과 말하자면 협소한 인품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사람의 사람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원래 지도자를 향해서 사심을 버린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헬퍼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자기에게 붙여진 사람들을 향해서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는 거죠. 다시 한번 얘기 할 테니 들어보세요. 지도자 앞에서 자기 사심과 편협함을 버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셔서 그 사람을 섬기게 하셨다는 소명을 느끼는 진정한 헬퍼가 자기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되죠? 자기에게 사역을 맡겼는데 계속해서 똘마니를 거느리는 식으로 밖에 지도자 역할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자기위에 있는 지도자에게 똘마니일 때 안정감을 느끼는 거예요. 그 조직은 아주 병들고 더러운 조직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10장에서 목양을 여러분들에게 가르쳐드리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죠. 교회 중에서 가장 비극적인 교회가 인간관계로 똘똘 뭉쳐진 교회, 이런 교회에서는 부흥이 일어나는 법이 없어요. 그런데 그런 집단이 되는 거예요. 위아래로 결속력은 대단히 강해요. 그런데 배타적이에요. 그래서 목회자 한분이, 제가 가르치는 제자 중에 한사람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우리 동료 중에 그런 이야기를 하고, 교인들이 자기를 너무 잘 섬긴다는 거예요. 교회를 사랑하고, 그런데 교인이 한 50~60명 정도 되는데 예배도 거의 90% 이상 나오고 열심이 보통이 아니에요. 교회가 성장을 안 해요. 왜 안하나 했더니 새로운 사람이 오는 걸 싫어해요. 교회가, 그러니까 혹시 겉으로는 환영해서 들어오면 동아리가 똘똘 뭉쳐져 있어 가지고 들어가질 못하는 거예요. 몇 번 기웃거리다가 다시 그냥 가는 거예요. 이러한 것은 사실은 교회가 아니에요. 엄밀하게 말하면 교회가 아니에요. 교회는 형태와 작용이 개인의 리더십하고도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교회는 계속 퍼져나가야 해요. 가운데는 참된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핵심이 분명하지만 새로운 신자들과 접촉하는 그 영역에 있어서는 희미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적응성을 갖는 거예요.
여기서 얘기한데로 바나바가 만약에 착한 사람이 아니라 단호하고 포압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이런 역할을 하기에 적합했겠어요. 따뜻해야지 우선 그 일을 할 수 있죠. 따뜻하고 사람을 잘 돌볼 줄 아는 부드러운 심성을 가지고 있어야지 일을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왜 바울하고 짝이 되었겠어요. 바울은 이런 점에서 약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후에 많이 변화되고도 그렇게 따뜻하게 사람들을 돌보고 하는 점에 있어서 약점을 가진 사람이라는 케이스가 두 번 나와요. 전도여행 때문에 바나바와 대판 싸우는 기록이 나오죠.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거죠. 결국은 역사를 보면 바울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나오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베드로를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공박을 하죠. “네가 유대인으로서 어떻게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다가 그랬으면 끝까지 할 것이지, 유대인들이 온 다고해서 움찔하면서 안한 것처럼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위선이다.” 공격을 한거에요. 사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죠. 베드로와 자신과의 이런 모든 것을 볼 때에 말이죠.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이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거죠. 그래서 결단, 용기, 투쟁 이러한 것들은 모두에게 필요한 덕목이기는 하지만, 최고 지도자의 덕목이고 돕는 핼퍼들은 따뜻하고 지혜로우며 부드럽고 타협하기 잘하며, 이렇게 움직일 때 조직이, 교회가 아주 놀라운 교회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교회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우리들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한 사람은 매우 우수해요. 매우 유용해요. 그런데 그 우수하고 유용하고 어떤 일을 잘하기 때문에 그러다 보면 그 일은 규모가 점점 커지잖아요. 그렇게 되면 사람을 보내어서 함께 돕게 해야 되잖아요. 그때에는 그 사람의 인격과 인품, 리더십으로서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 거예요. 항상 혼자 일해야지 적합한, 그럴 때에는 하나님이 크게 쓰시려고 하시면 이 사람을 항상 초창기에는 사용을 하시고 나중에 터를 다 닦아놓으면 더 넓은 가슴을 가지고 사람들과 함께 엮여서 함께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리더십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이 택하시게 되는 거예요. 그것은 틀림없는 거예요.
그래서 보면 내가 항상 후배들이나 동역 자들 보고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가슴이 따뜻하고 넓은 사람이 되라,” 심지어는 언제 누구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영혼을 돌본다고 하는 사람이 쓰지 말아야하는 말이 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냐? 네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니?’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 수 있을까?인간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까? 그걸 보고 놀라는 사람은 영혼을 돌볼 자격이 없는 사람이에요. 무슨 일이든 다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더러운 죄인들을 목양하는 거예요. 그래서 죄에 동참하지는 않지만 죄를 잘 아는 사람 그래서 우리가 가끔 질병에 걸려서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도대체 왜 이런 병이 내가 걸립니까?” 그러고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고 병의 이력을 다 설명하면 의사는 조금도 놀라지 않아요. “어떻게 당신이 이런 병이 걸립니까? 아니, 이렇게 젊은 당신이 암에 걸리다니 이런 일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말 안한다는 겁니다. “누구나 다 그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리고 그 사람이 왜 그 병에 걸리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줍니다. 그게 의사에요. 그런 폭넓은 심성을 가져야 해요.
그런데 지도자로서는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는 제일 어려운 점이 그거에요. 오늘도 제가 3시 34분에 깨어서 한숨도 못 잤어요. 저에게 이런 고민을 안겨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 생각하면서 한숨도 못 잤어요. 그러고 내려왔어요. 뭐냐 하면 그 사람은 참 훌륭해, 그리고 내가 꼭 필요해, 그리고 잘해, 그런데 뭐냐 하면 그 사람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런데 그 사람과 함께 사람들을 엮어주어서 일을 잘 하게 하고 싶어요. 그런데 훌륭한 그 사람이 도저히 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그 사람을 버리게 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교회는 한 사람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많은 지체들을 위한 교회이고 또 하나님을 위한 교회이기 때문이에요. 고민을 하는 거예요. 그 사람은 나를 섭섭하다고 생각을 하겠지, 그러나 사실은 그 마음은 몰라요. 모르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깊이 의식하고 하나님의 시선에서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섬김을 다하려고 하고 이렇게 하면서 기도 많이 하고 영적으로 깨어짐 들이 풍부한 섬김의 삶을 살아가면 섬기면서 이런 일들을 만나면서 인격의 아주 놀라운 변화가 오는 거예요. 어떻게 그런 변화가 올 수 있는 지를 지난번에 ‘성화와 헌신’ 에서 설명한거에요. 대충밖에 못 들으셨지만 그런 거예요. 그러면서 거기에서 무수한 본성적 깨어짐과 신령한 깨어짐 들이 동반되어지는 거예요. 그러면서 변화되어가는 거예요. 이 사람이.
그런데 대부분 그런 폭 좁은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런 자기 깨어짐이 풍부하지 않아요. 원래 이런 자기 깨어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그분과 은혜의 숨결을 수시로 느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비추시면 자기가 좋아하는 말씀만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자기를 세워서 그래서 칼 같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뼈가 깨어지고 자신의 살이 도려내어지는 이런 것들을 감당하려는 구도의 정신이 있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똘마니 형 리더십, 소인배 형 리더십을 가지고 자기와 함께 동역하는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폭 좁게 기속하려고하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칼같이 똑바로 서서 거기에서 그 칼에 맞으면서 피 흘리고 뼈 꺾이면서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구도의 정신이 있냐하면 없는 거예요. 구도의 정신은 그런 사람들에게 깃들지 않는 거예요. 구도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의식적으로 자기를 버리려고 하는 사람, 고통스럽더라도 자기를 버리려고 하는 사람, 그래서 자신의 뼈를 깎고 살을 베어서라도 주님의 뜻에 부합하게 살려고 하는 치열한 자기복종의 삶, 이것이 있는 사람에게 열렬한 구도의 정신이 유지되는 거예요. 이것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피를 토하는 것 같은 냉정한 구도의 정신이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그런 구도의 정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죠? 신성이 부패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대게 소인배 형의 지도자, 그래서 그 사람들을 따르면서 만족을 누리는 똘마니 형 추종자들 이런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 절대로 건강하지 않아요. 이미 벌써 심령과 이런 모든 것들이 부패한 사람들이니까 그런 성향들이 고쳐지지 않아요. 그런 부패한 성향들은 그들이 사역해 가는데 어떻게 작용하는지 아세요? 그 부패의 핵심이 죄에요. 그러면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맞는 일, 맞는 사람, 맞는 방향으로 자신들이 가면 열심히 뭉치지만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소명을 따라서 움직이는 집단이 아닌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는 거죠. 겉으로는 어떤 일들을 하고 있겠죠. 그러나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을 수가 없는 거예요. 쓸모없는 사람들이에요. 작은 열매들이야 있을 수 있겠죠. 어디가든지 간에 작은 열매들은 있을 수 있죠. 그리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죠. 왜냐 하면 지도자들은 그 지도자가 정치지도자이든 종교지도자이든 무슨 지도자이든 간에 자기를 따르는 사람을 노예화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어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다 있어요. 그 속에서 자기 쾌감을 느끼는 거예요. 그리고 따르는 사람들은 정상적인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러한 경향성이 조금씩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다 있어요. 누군가에게 폭압적으로 예속될 때 안정감을 느끼는 거예요. 그래서 상담을 할 때도 말이죠. 참 답답해요. “목사님, 곰탕집을 해야겠습니까? 양장점을 해야겠습니까?” 사실은 나도 곰탕집이나 양장점을 해본적은 없지만 경제도 좀 배우고, 세상 돌아가는 물정도 아니까 목사로서가 아니라 인생선배로서 “곰탕집이 아니라 양장점이 낳겠다. 이 동네에서는”, “ 이시기에서는 양장점보다는 앞으로 몇 년 동안은 곰탕집이 훨씬 낳을 걸” 이렇게 조언하라고 하면 못하겠어요? 왜 못하겠어요. 나도 인생을 안산게 아니고 바보도 아닌데 누구나 의견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를 잘 안하죠. 그리고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면서 “이건 이렇고 이건 이러니까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진실하게 물으면서 인격적으로 결정하자” 이러면 되게 실망하는 거예요. “양장점!” 이렇게 선을 딱 긋고, “그대로 안하면 하나님의 저주가 있을 지어다!” 그러고 보따리 싸고 돌아가야지만 “아, 우리목사님 오늘 신령하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양장점을 해서 축복을 받으면 주의 종이 시키는 대로 하니까 복을 받았다고 하고 더 믿음이 좋은 사람은 망해도 ‘고난이 왔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것들은 ‘죄와 은혜의 지배’에서 보면 죄와의 싸움에서 실패하다가 돌아가는 것이 어디냐 하면 미신적인 맹종이에요.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아니 당신이 양장점을 하든지 곰탕집을 하든지 당신이 할 텐데 왜 하나님이 나한테 응답해주시냐 말이에요, 또 내게 응답하셨다고 해도 난 기다려야 된다고 생각한단 말이죠. 왜, 경험할 사람이 당신이니까. 기다려보란 말이에요.
만약, 리더가 그런 사람을 이용하려고 하면 얼마나 편하겠어요. 그래서 사교, 이단들이 활개를 치는 거예요. 그렇게 “곰탕집해, 양장점하면 하나님의 저주가 있을 거야, 돈 내놓고 하면 부흥할걸!” 이렇게 사기를 치는 거예요. 그리고 노예적으로 한번 예속이 되고나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해도 믿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사교와 이단이 판을 치는 거예요. 그런 것에 지도자가 맛을 들이기 시작하면 타락으로 가는 거예요. 한사람 한사람을 하나님이 세우셔서 거기 있다고 인정해주는 거예요. 자신은 중요하고 너는 나를 돕기 때문에 덜 중요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폭압적인 리더십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기 때문에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건 아니에요. 한사람 한사람 하나님이 세우셔서 거기에 있는 사람, 그래서 나 때문에 거기에 있는 사람은 싫다는 이거에요. 하나님이 세우셨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단기적으로는 전자의 사람보다도 약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그 사람이 훨씬 강한 사람이에요. 하나님 때문에 거기에 있으니까 은혜만 받으면 그 사람은 지도자가 눈길 한번 안주어도 하나님 때문에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사람을 보고 섬기는 사람은 계속 관리를 해야되요. 계속해서 손때를 묻혀야 되요. 그러면서 점점 사람에게 예속된 사람들이 되어가는 거예요. 이것은 교회의 모습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의 연결 속에서 하나님이 높아질 수가 없는 거예요. 물론 거기에서 따뜻한 교재와 인정 같은 것들이 오갈 수 는 있지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제 교회에 교역자나 장로님이나 집사들을 뽑잖아요. 제일 먼저 봐야 될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심성이에요. 그런 사람을 잘못 선택을 해놓으면 교회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요.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그 사람 때문에 낭비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지도자는 항상 혜안을 가지고 사람을 써야 되요. 그래서 자기를 열렬하게 따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붙잡힌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으면 멀리해야 되요. 그것이 자기가 지도자로서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하나님의 축복이 머무르는 사역을 하는 비결이에요.
바나바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죠. 깊이 존경스러운 사람이에요. 그래서 바울과 같이 사역을 했을 때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세요?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믿기 위해 따르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어요. 히랍어 성경에 ‘그리스토이’라고 나와요. ‘크리스트’ 는 예수그리스도를 가르키는 것이고 ‘호이’라고 하는 것은 남성 복수주격 접미에요. 호이가 붙으면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를 들면 ‘가난한’ 이라는 말에 ‘호이’가 붙으면 ‘가난한 사람’, ‘아픈’ 이라는 말에 ‘호이’가 붙으면 ‘아픈 사람들’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런데 ‘호이’라고 하는 이 말은 앞에 있는 것 뒤에 명사에 이것이 붙을 경우에는 노예적 예속관계를 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맨 처음에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아주 경멸적인 칭호였어요. “저 예수께 붙어 다니는 놈들”, “예수의 노예들”, “예수만 졸졸 따라다니는 예수에 미친 인간들” 그런 뜻이라 이거예요. 그것이 경멸적인 언어이긴 하지만 이 두 사람의 이런 사역을 통해서 특별히 바나바의 헬퍼십에 의해서 하나님이 그들의 목회현장에 얼마나 복을 많이 주셨는지 보여주는 거예요. 그들이 와서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는 거예요. 예수에 매인 사람이 되는 거예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볼 때 너무나 확실하게 예수에 붙들린 사람이 되니까 평할 때 ‘저 예수 매인 놈들’ 이렇게 얘기 할 수 없었던 거예요. “예수그리도에 매인 사람들”, “예수그리스도의 노예와 같은 친구들” 이렇게 밖에 이야기 할 수 없었던 거예요. 얼마나 목회 사역에 영혼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었는가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나는 여러분들이 모두 이 세상에서 그런 평가를 받으면서 혹은 칭찬을, 혹은 박해를 받는다면 춤을 추면서 걸어 다니겠어요. 죽어도 여한이 없겠어요. 이건 믿는 건지 마는 건지 예배드리다 눈물 흘리는 거보면 하나님 사랑하는 것 같고, 나가서 또 부도덕하게 살고 자기중심으로 완고하게 사는 거보면 또 세상 사랑하는 사람 같고 분간이 안 되는데 이런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면 예수그리토이가 되는 거예요. 예수그리스도에 미친 사람들이 되는 거예요. 이 바나바의 놀라운 헬퍼십 때문에 일어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에요. 여러분들이 이런 사람들이 되어야 되요. 여러분들이 오늘 기도 할 때 여러분들에게 아가 말씀들인 것 같은 그런 결함들이 있다면 오늘이 그날이라고 생각하고 깊이 회개하세요. 그리고 내가 만약 그런 심성이 넓은 헬퍼로 변화됐다면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더 많은 일들을 이루셨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가지세요. 그리고 잊어먹지말고 일평생 그 결함과 더불어서 싸워야 해요. 그래서 온전한 주님의 사람이 되어가야 해요.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통해서 더 큰 영광을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아주 신속하게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