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월 24일 새벽예배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행 13:31-35).
베드로도 예수님의 부활에 관해서 사도행전 2장에서 설교를 하구요. 아마 스데반도 설교를 끝까지 했더라면 결국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메시지가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 그리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다시 심판주로 오신다는 것, 이 사실은 떼어놓을 수가 없는 아주 중요한 선포의 제목이었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지금 자신의 설교 속에서 훨씬 더 많은 부분을 부활을 논증하는 데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경험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죠. 물론 다른 사도들도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했고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직접 뵈었거든요. 그리고 그것이 영혼들을 하나님 앞에 예수 믿게 하는 중요한 선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에게 있어서는 매우 특별했죠. 왜냐하면 자기가 만난 예수님 자체가 부활하신 예수님이었죠. 그러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생생한 사도의 경험이 그의 모든 생각을 바꾸어 놓았고 그리고 그의 회심의 경험과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와의 만남의 경험은 아주 엄청나게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죠. 그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메시아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모든 오해가 풀리게 되었고 그리고 잘못배운 유대교 신학에 중대한 변화가 오게 되었고 그래서 결국은 성경 속을 달려가고 있는 메시아에 관한 진리들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거든요. 비유를 하자면 이제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전에 사울이었을 때 그가 가지고 있던 세계관, 그가 가지고 있던 구원관, 신학 모든 것들이 있었는데 그것들이 폭발하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죠. 그게 폭발하는 지점이 바로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그 지점이었어요. 사도 바울에 신학 있어서 중대한 관심사는 다른 모든 방면도 그렇지만 매우 특별하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바는 기독론과 구원론이에요.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시며 그리고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 하는 이 문제가 사도 바울의 신학에 있어서 초미의 관심사가 되는 것이죠. 이 모든 것들이 다메섹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경험을 통해서 모두 풀려나가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설교하는 지점에 와서 다른 누구보다도 사도 바울은 할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도대체 지금 내 앞에 서신 이분이 누구냐? 놀랍게도 나사렛 예수라 이거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이분이 나사렛 예수다. 나사렛 예수라 하면 평범한 목수의 아들이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심히 잘못해석하고 하나님께 신성모독적인 가르침을 교훈했기 때문에 유대인의 율법을 따라서 사형을 시킨 사람이 아니냐. 그리고 지금 자기가 다메섹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러한 예수의 도를 다시 전파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때문에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예수가 살아났다. 그냥 살아난 그런 모습이 아니라 지극한 영광의 모습, 지극하고 놀라운 영광의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셨어요. 그래서 자기 앞에 자신과는 비교도 될 수없는 영광과 엄위가운데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러면 나사렛에서 목수의 아들이었던 하찮은 젊은이가 그런 영광 가운데에서 신적인 위엄을 가진 그런 예수로 다시 자신에게 왔을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두 가지를 부인할 수없이 확인하게 되는 거예요. 첫째는 자기들이 죽인 예수가 살아나셨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런 예수그리스도를 이렇게 놀랍게 신적인 위엄을 가지신 분으로 변화시킨 그 장본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놀라운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놀라운 두려움을 거기에서 느끼면서 ‘아, 이 예수님이 단순한 나사렛의 젊은이가 아니었구나!’를 깨닫게 되는 거예요. 이게 이제 깜깜한 어둠을 찢고 들어오는 거예요. 폭발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문제를 풀고 나니까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살리셨을까 하나님이 살리셨으면 그 메시아가 그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죽인 자기들이 잘 못된 것 아닌가. 깨닫게 된 것이죠. 그러면 그렇게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인정하시기 때문에 죽여도 다시 살리실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면 왜 하나님이 죽는 것을 막지 않고 죽임을 당하게 하셨을까. 여기서 깨닫는 거예요. 대속의 비밀을 깨닫는 거예요. ‘아, 우리의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구나.’ 그러면서 구약의 찬란한 빛이 들어오면서 구약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경구절 속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의 아버지이시고 그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신 형벌을 받아 죽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시고 그리고 그 형벌을 받으신 후에는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구약의 생생한 예언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예전에는 편견에 사로 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게 보이지 않았어요. 얼마나 재미있냐면 요. 어떤 이단에 속한 사람들이 나를 전도하려고 왔어요. 평신도 시절에, 한참이야기 하는 거예요. 보지도 못한 기억도 잘 나지 않는 되게 이상한 성경구절을 다 끄집어내서 자기들의 논리를 이야기해요.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 아냐 하고 물으니까. 그건 몰라. 그러니까 성경의 아주 중요한 성경구절도 성경책에 성경말씀이 가득차있어도 모든 말씀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 계시의 분량에 있어서 모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다 똑같은 분량은 아니거든요. 거기에 보다 더 치명적으로 중요한 성경구절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모르는 거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으로 성경을 보는 거예요. 여기서 그렇게 이제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가 그 필름이 벗겨지는 거예요. 그러면서 구약성경이 한 사람 예수 메시아를 보고 달려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시편서부터 나오는 많은 부활에 대한 약속들을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 메시아에 관한 예언 속에 나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죠. 그러니까 어떻게 되죠. 성경전체에 진리의 뿌리를 내리게 되는 거예요. 거기에서 사울이 바울이 되고 거기에서 말하자면 모든 고난과 핍박을 이길 수 있는 강력한 확신이 오는 거예요. 확신이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지적확신이에요. 지식에 확신이 없으면 확신한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것이라 이거에요. 알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어요? 또 확신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자신의 생명을 던질 수 있겠어요? 불가능하죠. 그러니까 지식에 확신이 중요하죠. 뭘 믿는 지에대한 지식이 확고할 때에 그게 확신이 될 수 있는 거예요. 그것만 가지고 안 되죠. 그러나 그것이 없이는 확신이라고 하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사울이 바울이 되면서 이런 식의 확신을 갖게 되었어요. 결국은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 그 하나님의 아들에 사로잡혀서 일생동안 바로 죽고 다시사시고 다시오실 예수그리스도 이것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신명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이죠. 우리에게도 이런 신앙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죠. 그때에 오늘날 우리가 당하고 있는 모든 괴로움이나 시련, 고난과 어려움을 이길 수 있어요. 주와 함께 죽으면 불가불 주와 함께 다시 살 것이기 때문이죠. 많은 고난과 괴로움, 육체의 연약함, 죽음과 죄의 유혹, 고난과 시련 우리 눈앞에 가득하죠. 그러나 부활의 소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것들을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