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시편 73편 강해 (시 73:23-28)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 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내가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73:23-28)
녹취자 : 조원정
오늘은 근본적인 질문을 한 번 하면서 결론 부분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도 이 문제에 대해서 정확하고 분명히 답하는 사람은 거의 만나기 힘듭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 다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이런 거 아닙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내가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다. 혹시 이 어두운 세상에서 무엇을 의지할 때가 있겠는가? 누군가 절대자를 의지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인가 그리고 그 절대자를 의지하여서 의뢰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 마음에 위안을 얻으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들을 하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앙을 갖는 다는 것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열심 있는 사람들은 이런 답변을 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신앙을 갖는 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으면 예수를 믿고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봉사하고 충성하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그래서 형통하고 자녀들도 잘되고, 어려움이 생길 때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해서 어려움을 물리치고 환난이 닥칠 때 하나님 앞에 열심히 간구해서 그 환난을 극복하면서 예수를 믿고 그렇게 우리가 믿음으로 승리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고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성공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겠습니까. 이 단계까지만 대답할 수 있는 사람도 상당한 신앙의 체험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은 도무지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이런 정도의 대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진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이 시인은 말하기를 깨닫지 못하기가 우매무지하여 짐승과 같으나 주께서 함께 하셔서 깨닫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주의 교훈을 받고 혼란 속에서 정돈되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었으며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부러워하며 실족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24절에,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믿고 다만 지적으로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구나. 그런 일이 동네 어딘가에 일어났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생 자체가 그리스도 예수 그분이 나를 죽을 죄악에서 건지셨다는 사실에 깊은 감화를 받으며 그 십자가의 사건과 의미에 묶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이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인도하리니” 라고 말합니다. 시인이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아니 저럴수가! 그러고는 나중에 후회된다. 내가 왜 이렇게 예수를 믿으려고 애를 썼지 막 살아 버릴 걸 나도 내 맘대로 살아버리고 말거야 이 더러운 세상 신앙생활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이렇게 낙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성소에서 깨닫게 되었는데 바깥에서 형통하던 악인들이 갑자기 하나님의 징벌을 받고 망하게 되었고 자기에게 하나님께서 하늘을 열고 복을 마구 부어주셨습니까? 아닙니다. 깨닫게 된 이 순간에도 이 사람은 여전히 징책을 받고 있었습니다. 깨닫게 된 순간에도 이 사람은 여전히 재앙을 만나고 고통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아무 것도 바뀐 것이 없었습니다. 악인은 여전히 형통하고 하나님을 떠나서 배의 기름진 자들은 낄낄거리며 웃는 웃음소리가 온 동리에 퍼졌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부조리였고 모순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여기에서 후에는 영광으로 자기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참된 의미는 그를 믿었기 때문에 이제는 이 세상에 사는 것을 이 세상에 사는 이유가 이 세상 때문이 아니라 더 영원한 나라 때문에 이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세상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예수의 크신 사랑과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 놀라운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엄청나기 때문에 그 사랑이 너무나 크고 위대하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시인은 여기에서 이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후에는 나를 영광으로 인도하시리니” 시인이 왜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실족하고 왜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서 내 믿음 생활한 것이 말짱 헛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 무엇하나. 나도 이제 막 살아버릴거야.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막 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믿으면서 마음을 정결케 하려고 애썼습니다. 손을 씻어서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애는 썼지만 시인은 그런 일에 있어서 열심을 내었을지 모르지만 마음을 씻고 정결케 하고 애쓰고 그러는 모든 것들이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고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잠깐 잊어버리고 이 세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살았던 청교도들과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주님을 만나고 예수그리스도의 큰사랑을 깨닫게 되자 그 사람들은 온전히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후에는 나를 영광으로 영접해 주시는 그 영원한 나라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너희를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다”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목적이 이제는 이곳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고 쌓아두고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준비하며 사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들의 꿈은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 너머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는 영원한 천국 거기에 자신들의 소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이 세상은 죄 많은 곳이고 다 쓸데없는 것이니 그저 막 살다가 죽어버린다거나 아니면 살아서 무엇하나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 세상에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이 가까웠음을 믿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어찌하든지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봉사하고 주님을 찬양하고 노래함으로써 주님의 이름이 온 세상에서 우리의 인생으로 말미암아 높아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이 고향이 아닌 것처럼 살았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 그들은 나그네와 행인과 같은 사람들로 스스로 자처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블레셋에 들어갔을 때 네가 누구냐는 질문을 들었을 때 “나는 이 땅에 우거하는 나그네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곳에 아무리 많은 제물을 쌓아두고 수많은 짐승이 있고 장막을 치고, 거기에서 돈을 주고 상수리나무 밭을 사고 거기에 사라를 묻고 그렇게 많은 터전을 일구며 살았다고 할지라도 아브라함은 거기에서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영원히 기다리고 있는 본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세상에서 누구냐고 물을 때 기꺼이 이 세상이 집이 아니며 이 세상에서 나그네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땅에 땅을 넓히고 집에 집을 넓히면서도 만족치 않아서 해외로 재산을 도피하고 유아들에게도 불법으로 유산을 물려주고 그 유산을 더 물려주기 위해 사람들을 등치고 그렇게 죄를 행하고 재물에 심취하고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이 세상밖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편에서 하나님을 떠난 악인들의 정체에 대해 말하기를 저 사람들은 자녀에게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저 세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말고는 사랑해야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고 죽지 않으려고 마지막 순간까지 두려움 속에서 몸부림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내세에 기다리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본능적으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들은 이 땅에서 살다가 죽는 그 날이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 앞에 서게 되는 그 날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곧, 죽는 게 뭐가 두렵습니까? 여러분 밤에 잠자면서 내일 아침에 못 깨어나면 어떡하나 하며 덜덜 떨면서 잠자리에 드는 사람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자고 나면 또 일어나는 보장이 있기 때문에 편안하게 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침이 없는 사람들, 아침을 약속 받지 못한 사람들은 밤 무렵 먹고 마시고 즐기며 놀던 중천의 태양이 다 지고 뉘엿뉘엿 황혼이 깃들고 어두움이 찾아올 때 그 한낮 동안에 다가오는 어두움을 준비하지 않고 살았던 사람들은 재앙을 만나는 것입니다.
저는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수첩에 빽빽하게 설교 및 원고스케줄이 써있는데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고 나니 그 스케줄은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용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인생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정직하게 얘기해보십시오.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모르며, 영원과 영원 그 틈바구니에서 이슬과 같이 잠시 사라져가는 그 인생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사람들이 교만하고 악악거리며 죄를 지으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시인은 후에는 나를 영광으로 영접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사람은 영광스럽지 않습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심령이 괴로워서 고통 하는 그런 비참한 신세입니다. 자신은 왜 이렇게 매일 고난을 당하고 징책을 당하고 하나님 왜 나만 야단치시는 거야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예수를 잘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조금만 잘못해도 하나님은 가만두시지 않습니다. 기도를 안 하거나 신앙생활이 흔들거려도 가만두지 않고 정신차리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때 이 시인은 자기가 징책을 받고 재앙을 만난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를 인도해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을 기업으로 여기며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시는 방법이, 신앙이 떠난 상태가 되니 그것을 징계요 재앙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마다 징계하시나니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후에는 나를 영광으로 영접하시리니” 이 시인은 성소에서 깨달은 것입니다. 이렇게 먹고 마시고 사는 이것 하나 가지고 내가 하나님이 모순된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성소에서 깨닫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합당한 영원한 기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도들을 비롯해서 믿음으로 살았던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면서도 신비주의자들이 천국을 사모하는 것과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들이 천국을 사모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신비주의자들은 살아가면서 아무것도 안 합니다. 92년 10월 28일날 예수님 재림한다고 하면서 그 사람들은 뭐 했습니까? 학교고 직장이고 다 팽개치고 산 속에 올라가가지고 맨날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기도했습니다. 그게 바로 신비주의자들이 천국을 사모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심으로 만나서 성도들이 천국을 그토록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런 것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서 못 먹던 거 천국 가면 생명나무 실과가 많다거나 나는 과일을 제일 좋아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거기에는 육식이 없는데 그럼 어떡합니까? 아 거기에는 생명물이 흐른다니 그 물을 먹으면 마음속에서 영혼 속에서 생명의 물이 솟아날 텐데 야 이렇게 공해 많은 세상에 사는 것보다 가서 무공해 생수를 먹자. 거기에는 일을 안 하면서 힘든 노동을 안 하면서 산다는데 거기 가서 살자. 그러면서 천국 가는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탐욕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사람들이 천국을 사모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천국에 누가 계시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찬양)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나 그 때는 주를 맞대고 보리 하나님 나를 알고 계시듯 우리도 주를 알리
이 세상에서 대충 신앙생활을 하다가 회개하고 은혜를 충만히 받으면 기분이 좋지만 그것도 천국에 가서 주님을 만나 뵈올 때 우리들이 누릴 수 있는 기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이런 거울 말고 옛날에 거울은 유리 거울이 아니라 동으로 만든 거 아니면 돌멩이로 만든 거울입니다. 피아노에 비치는 것처럼 희미하게 보였는데 맞대고 보는 것입니다. 기쁨도 희미했었는데 분명해지고 은혜도 희미했었는데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그 놀라운 은혜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언제든지 마치 그들은 이 세상에서 뭔가를 누리고 많은 것들을 얻고 즐기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을 크게 만나고 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그들의 의무요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경건한 청교도들은 자살을 가장 미워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크게 만나고 예수님의 은혜를 놀랍게 받은 다음에 이 시인과 같이 깨닫는 것입니다. “오 주님. 나는 깨닫지 못하는 것이 짐승과 같사오나 마침내 주께서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나를 영광으로 영접하시리라 하늘에 주 밖에 누가 있겠사옵나이까”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지푸라기와 같이 보이고 하나님이 위대해 보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위대해 보이고 훌륭해 보이니까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그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나같이 낮고 천한 인생을 위해서라도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할렐루야 찬양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게 하신 하나님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해서 불평하거나 불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이 그 커다란 하나님의 계획을 가지고 그 일을 이루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나를 살아있게 하신 것에 너무나 감사하는 신앙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왕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고 그 하나님께서 들풀과 같은 자기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인도하실 때 아멘 하며 따르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들은 인생을 장난처럼 살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죄악입니다. 하여튼 열심히 살지 않는 사람들은 주를 만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을 보면 다 뜨겁습니다. 냉랭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열심히 살아갑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에게 주셨으니 “오늘도 주신 하루 동안 먹고 마시는 하루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어떻게 하면 내 인생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져서 주님이 오늘도 내 인생을 바라보실 때 세상을 보시고 답답했던 마음이 우리의 인생을 보시면서 마음이 시원해지실까? 그런 인생이 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사도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마침내 선악간에 무엇을 행하든지 그리스도 예수 앞에 서야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하나님 앞에 힘써 주님을 섬기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가 그렇게 하나님 중심으로 완전히 바뀌고 나면 신앙생활과 세상 생활 사이에서 오는 수많은 갈등이 거의 사라지는 것입니다. 갈등 한다는 것은 자기의 욕망과 욕심이 남아 있고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욕망과 잘못된 욕심과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야 할 신앙이 서로 줄다리기를 하면서 갈등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시인은 성소에 들어갈 때에 “ 지금은 내가 비록 형통한 자들이 보기에는 형통치 못한 자 같고 악인들이 보기에는 나에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 나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같이 생각되지만 그러나 후에는 나를 영광으로 영접하시니 하늘에는 주 외에 누가 있으리요” 땅을 바라보니 악인의 형통하는 문제를 가지고 실족한 것입니다. 시인은 한 가지만 본 겁니다. 악인이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것 딱 한 가지만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주목하는 순간에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기쁨과 모든 즐거움, 모든 은혜는 차단되었습니다. 순식간에 다 식어 버리고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왜 눈앞에서 악한 자가 잘 먹고 잘 사는 그것만이 이 사람에게 걸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소에 들어가서 깨닫는 순간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기의 인생의 휘장이 걷히고 나면 자기를 향해 기다리고 있는 가나안의 영원한 기업이 이 시인의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한 번 하나님을 향해서 새롭게 태어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보면 돈도 많고 지위도 높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겸비하게 물질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명예로 인하여 자긍하지 아니하며 그 모든 것들을 인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을 만들어 보급하는 국제 기드온 협회가 있습니다. 거기 회원쯤 되려면 꽤 큰 기업의 장이 되어야 합니다. 일 년에 내는 회비가 보통 몇 천 단위로 나갑니다. 심하면 몇 십 억씩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누구의 후원을 받아 사업을 하지 않고 그냥 성경을 마냥 찍어서 무료로 마구 보내 주는 것입니다.
(예화) 직장 다닐 때 직장 선교를 위해서 기드온 협회에 전화를 했습니다. 협동 간사로 있는 장로님이 아주 유력한 분이 있었습니다. 직원들에게 성경을 하나씩 나눠 주면 어떻겠느냐? 기드온 협회에서 좀 해줄 수 없겠느냐? 사서 나눠 주려면 몇 백 만원 어치 해도 모자랍니다. 직원이 칠백 명이 넘습니다. 그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돈을 내어 성경을 찍어 가지고 아래 사람들을 시켜서 나눠 주는 것이 아니라 아침 출근 시간에 시커먼 자가용이 줄줄이 들어오는 겁니다. 거기서 회장, 사장들이 내리는 겁니다. 회장, 사장들이 쭉 서 가지고 대머리 다 벗겨지고 50, 60, 70씩 된 분들입니다. 성경을 한 보따리씩 들고 지나가는 사람한테 90도 각도로 인사하면서 이 성경 읽고 구원 받으시라고 나눠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사님은 지금 몇신데 늦게 온다고 야단 치고 있습니다. 야단을 맞으면서 잘못했다고 하면서 쭉 서서 성경책 나눠 주고 자가용 타면 기사가 깎듯이 경례를 하면서 태워 가지고 기업체로 들어가면 전부다 기립해서 인사를 할 정도의 그런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잠깐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잠깐 동안 빌려주신 것들입니다. 그 영광은 모두 사라지는 것입니다. 기업체에서 한 달에 오백만원 봉급 받은 것, 피서 여러 번 다녀 온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뭐 그렇게 천국에 장부에 기록될 만한 일이겠습니까? 그 많은 사회적인 지위와 영광을 버려두고 아침 일찍 나와서 늦었다고 장로님께 야단을 맞으면서 까지 깍듯이 절을 하며 예수 믿으시라고 성경을 주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세를 바라보고 우리를 위해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나라,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진동치 못할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유업으로 주셨음을 굳게 믿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런 식의 모순된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 아침에 저는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조금 지위가 높아지면 난 장로 안 시켜주나 막 이럽니다. 진짜 신앙 있는 사람들은 그러지 않습니다.
카터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다음에도 직무를 그만 둔 후에 주일 학교에서 그 아이들 신발을 정리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진짜 신앙이 들어가고 하나님 자신을 기업으로 삼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거들먹거리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입니까?
시인이 이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갑자기 하나님에 후에는 나를 영광으로 영접하시고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셔서 이 세상을 끝마치고 오늘 나를 영접해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악인이 잘 사는 것이 순식간에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걸림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신앙적인 시야를 잘못 가지고 살 때 얼마나 이상한 뒤틀린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사업이 안 되고 가난하게 살면 뭔가 하나님과의 문제가 있는 것 같이 알고, 탈세라도 해서 돈 많이 벌면 하나님이 축복하셨다고 생각하는 그런 어리석음은 전부 다 헛되고 헛된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시각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보실 때 내 인생은 정말 훌륭하여 “내가 너를 인정하노라.” 그렇게 하나님께 인정받는 인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여기에서 이 사실을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하늘에는 주밖에 누가 내게 있겠느냐” 이 땅에서 눈을 들었더니 하늘의 영광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하늘에서는 하나님만이 홀로 계시고 그는 결코 모순이 없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인생도 그 분의 수중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을 돌리게 되고 성소에서 깨닫게 되자 하늘나라의 기쁨이 이 시인의 가슴속에 밀려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이고 이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못 살 수가 없습니다. 물론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죽을 때까지 못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선지자나 사도와 같은 사람입니다. 예수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잘 살게 됩니다.
사람이 돈을 탐욕과 죄악 때문에 낭비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나면 경건해지고 탐욕을 멀리 합니다. 어떤 사람은 찬송가 부르면서 화투장 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 습관을 버리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굳이 배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예수를 믿고 살아가다 보면 그런 것들을 멀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돈이 모이게 됩니다. 건강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예수 믿고 변화받기 전에도 담배를 한 갑반씩 피웠습니다. 꿈에도 몇 대씩 피다가 나오고 하는데 눈뜨면 더듬어서 담배로 가고 잘 때까지도 이불에 드러누워서 담배를 피워야지만 직성이 풀렸습니다. 그러다 담배가 떨어지면 쓰레기통이라도 뒤져야 됩니다. 자존심이 그렇게 강하던 사람이 지나가는 어린 청년들한테 “선생님 담배 한 대만 빌릴 수 있을까요?” 폐가 괜찮았는데 담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끊으려고 애를 많이 써도 도무지 끊어지지가 않습니다. 지독합니다. 그런데 마약이 그것의 이백배 랍니다. 마약은 못 끊습니다. 담배를 끊으면 그 사람은 살인도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끊었습니다. 딱 끊고 아직까지 한 번도 안 피웠습니다. 갑자기 담이 사라지면서 제가 이말 하면 여러분 안 믿을지 모르는데 어저께 허리재기 했는데 너무 날씬하다고 재지 마십시오. 내가 174키에 56키로에 27인치였습니다. 호리호리했는데 내가 설교자가 되어 그 상태로 서 있으면 성도들이 불안해서 어떻게 보겠습니까? 세상 죄 혼자 진 사람이구나. 얼마나 곤고하면 허리가 27밖에 안 나가는가 합니다. 은혜로운 설교를 해도 악 쓰는 것으로만 들릴 겁니다. 그런데 끊고 나니까 건강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살이 찌고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하고 불면증이 없어지기 시작합니다. 담배를 피면 돈이 남아 날 날이 없습니다. 푼돈은 다 들어가는 겁니다. 그 돈이 어디로 갔나 했더니 은혜 받고 나니까 교회로 다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없는 가운데 그렇게 바치니까 축복해 주시고 잘살게 되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크게 만났습니다. 매일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매일 은혜를 받고 성령이 충만한데 성령 충만 하고 나서 세상에 나가서 술 먹고 노래방 가서 노래 부르고 화투치고 고스톱 치고 돈 잃고 그럴 마음이 생겨나겠습니까? 돈이 모여도 쓸데가 없으니 꼬박 꼬박 저축을 하는 겁니다. 청교도들은 그런 세상적인 즐거움들을 혐오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옳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 게으르게 사는 것은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돈은 버는데 쓸 시간이 없었습니다. 시간 남으면 은혜 받고 그래도 시간 남으면 일하니까 돈은 벌리지만 돈을 쓸데가 없었습니다. 그 돈이 차곡차곡 쌓여서 근대 자본주의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 돈으로 공장을 만들고 산업을 돌렸습니다. 청교도에 의해 새로운 근대화 사회가 태동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덕분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특별하게 하시지 않고 일반적으로만 축복해 주셔도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영역 안에서 사람들이 잘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그러한 인생의 축복 너머에 있는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본 것입니다. 돈은 있다가도 없어지고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피었다가도 시들어 집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은 영원히 불변하시는 하나님으로 우리 자신에게 기업이 되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는 주 외에 내게 누가 있으리요” 시인이 성소에서 깨달은 것입니다.
(찬송)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 랑. 이전에 세상 낙 기뻤어도 지금 내 기쁨은 오직 예수.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이세상 떠날 때 찬양하고 숨질 때 하는 말 이것일세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아멘
그것 하나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밖에 안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으니 그 다음에는 이 땅이 다시 보이는 것입니다.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가 없나이다” 라고 바뀐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명쾌한 정답을 하나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하나님만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주 만이 자신의 복이라고 고백하면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이 세상에서 세상에 있는 사랑을 그대로 간직하고 그 세상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가 없나이다.” 그런 고백을 하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 자기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받게 되니까 이 세상에서 사랑 받지 못하고 상처만 받으며 자라온 사람들은 어떻게 치유가 되겠습니까?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 이 세상에서 너가 받지 못한 사랑이 얼마나 지푸라기와 같고 하나님인 내가 너에게 주는 이 사랑이 얼마나 완전한지를 보라. 그렇게 경험하므로 옛날에 맺혔던 묶였던 모든 사랑 받지 못하고 살아왔던 상처가 치유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악했던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 놀랍게 온유한 사람이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바탕은 어쩔 수가 없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면 안 됩니다. 제대로 하나님을 못 만났으니 그렇지 제대로 만나면 어거스틴 같은 탕자가 변해 성자가 되고 바울과 같은 무지막지한 인생이 변해 지혜로운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와 같이 “하늘을 명하여 우리에게 불을 내려 저 사람들을 다 태워버리기를 원하나이까” 하고 무지막지하던 사람이 변해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사랑하라” 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이런 놀라운 변화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니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히 변화가 되어서 이제는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이 땅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의 목표를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고상한 인생의 목표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조금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최대의 관심거리가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는다 해도 모든 꿈들이 이 세상에 매어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을 빙자해서 자기의 이 세상의 꿈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신앙을 하나의 자기 성취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맨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그들이 대부분 자기는 기도하지 않으면서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말합니다. 신령하다는 사람에게 고기 몇 근 들고 찾아가 점치는 식으로 이 사업을 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실 지 싫어하실 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돌아다니며 아무개는 기도를 많이 해주어 성공했는데 자기도 기도 후원자가 많아야 한다고 팍팍 쓰며 잔뜩 먹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해서 기도 해달라고 합니다. 언뜻 보면 믿음 있는 것 같지만 예수님의 은혜를 빙자해서 자기 일을 잘 벌여 보려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 예수님이 본인은 엉터리로 살아도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면 된다고 했습니까? 아무리 인간이 축복을 해도 그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가 잘못되면 그 축복은 의미가 없습니다. 축복을 안 해도 그 사람이 제대로 살아가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손 높이 들고 머리 내밀어야지만 꼭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상한 사람들 많습니다.
(예화) 어느 교회 중기업을 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크레인 큰 거 돈을 한때 잘 벌었다고 합니다. 하루 빌려 주고 오십만원 육십만원 받았습니다. 목사님 개업 심방을 와 달라고 합니다. 목사님 가서 개업 예배를 드렸더니 목사님 기도 좀 해달라고 합니다. 지금 기도 해 주지 않았나 했더니 안수기도를 좀 해달라고 합니다. 목사님이 그럼 해 주겠다고 했더니 제가 아니고 저쪽으로 가셔야 됩니다. 끌고 나오더니 새로 사온 레카차랑 크레인에다 대놓고 기도해 달라는 겁니다. 쇳덩어리에 그 추운 날에 말입니다. 할 수 없이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예화) 더 심한 얘기 하겠습니다. 모를 내고 축복기도를 받아야겠다고 해서 목사님을 모셔놓고 목사님이 주일날 모내기하면 절대 축복기도 안 해준다고 했더니 주일날 피해서 월요일에 모를 심고 화요일에 목사님 모셔서 축복기도 해 주십시오. 목사님이 손을 들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그랬더니 저쪽에서 장로님이 쏜쌀같이 달려오더니 “목사님 잠깐” 손을 딱 잡더니 이렇게 돌려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저기 물 때문에 맨날 싸우던 박첨지네 논인데 손이 이렇게 벌어져서 저쪽으로 보게 한다는 겁니다. 저리로 가면 복의 농도가 흐려져 그러니까 농축해서 이쪽으로 하라는 겁니다.
(예화) 전에 있던 교회에서 목사님이 계시는데 한밤중이 되었는데 시어머니하고 남편과 자식 하나하고 넷이서 사는 집안에 며느리가 어떻게 해서 전도를 해 가지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집이 돼지하고 소를 치는데 그때만 해도 상계동에 돼지, 소치는 사람들 많았습니다. 맨날 교회 못나가게 시어머니가 못살게 구는 겁니다. 어느 날 울며불며 교회를 뛰어 온 겁니다. 목사님 심방 좀 와주셔야 되겠습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난산이랍니다. 아니 이 집에 누가 애를 낳느냐고 했더니 돼지가 새끼를 낳는데 난산이라는 겁니다. 눈물이 범벅이 되었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난산이 되자마자 시어머니가 하는 말이 며느리가 교회 다녀서 옴 붙었다고 합니다. 집안 꼴이 안 되려고 하니까 며느리가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고 그럽니다. 어떡합니까? 목사님이 할 수 없이 심방을 갔습니다. 예배를 드린 다음에 돼지우리로 코 막고 들어가서 새끼 낳는 돼지를 붙들고 정말 눈물로 안수기도를 했습니다. 그 돼지는 참 복도 많습니다. 그 고기는 아마 쫄깃쫄깃 할 겁니다. 보통 고기겠습니까? 안수 기도 받은 신령한 돼지고기인데 말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과 장기판을 두는 것처럼, 노름판에서 돈 따먹기 하는 것처럼, 십일조를 이 만큼 내면 이 만큼은 줄 거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하고 흥정을 하려고 하는 판 돈 거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전부 다 잘못된 신앙입니다. 물질 문제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교회는 돈으로 가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가는 교회입니다.
저도 예수를 대충 믿을 때에는 십일조를 떼어놓고 십일조가 얼마나 큰 돈입니까? 십분의 일인데 부가가치세도 십분의 일인데 십만원 받으면 만원인데 그것을 성경 갈피에 끼어 놓고 은혜 받기 전에는 늘 갈등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낸다고 해서 갑자기 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일주일에 2,500원이면 너무 비싸다 싶고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급할 때 몇 번 꺼내 썼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고 나니까 십일조를 안내면 그러니까 십일조를 내는 게 옳습니까? 안 내는 게 옳습니까? 그러고 따지는 사람들은 십일조를 내고 싶어서 그러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은혜를 받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 앞에 한없이 바치고 싶었습니다. 뭐든지 바치고 싶지만 바칠게 뭐가 있어야지 바치지 바칠 것도 없지만 뭐든지 바치고 싶어서 뭔가 선한 게 없나 다 뒤져 보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밖에 이 땅에서는 내가 사모할 자가 없나이다”입니다. 이 세상을 바라볼 때에는 실족하고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해주심에 대한 기쁨은 하나도 없고 주님이 자기를 위해서 영원히 흔들리지 않고 진동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주셨는데도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믿고 보니 이런 하나님밖에는 내가 이 땅에서 사모할 자가 없다는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대개 사모하는 것은 돈, 지위, 승진 못해서 자살하는 사람까지 봤습니다. 도대체 승진을 위해서 인생이 있는 겁니까? 인생을 위해서 승진이 있는 겁니까? 승진 안하면 훌훌 털어버리고 호떡 장사라도 하면 되지 그것도 우리 생각입니다. 육백억 빚을 진 사람이 자살을 했습니다. 죽은 다음에 재산을 정리해 보니까 재산이 팔백억 입니다. 우리는 이해가 안갑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자기의 인생을 혹사합니다. 또 요즘은 건강이 완전히 우상이 되었습니다. 건강하면 벌벌 떱니다. 건강을 미끼로 이단도 들어왔습니다. 건강 강좌 한다하고 들어가서 한참을 듣다 보면 교주도 나오고 다 나오는 겁니다. 얼마나 이 건강이 우선인지 젊었을 때는 좀 덜합니다. 몸이 부서지도록 일해도 자고 일어나면 가뿐합니다. 그런데 나이 먹어 제품이 노후화되다시피 하면 기계가 작동을 잘 안하는 겁니다. 그때 사람들이 어떡하면 건강해지는 비결이 없을까 황당무개한 사람들 많습니다. 장사가 가루를 가지고 왔는데 무슨 가루인지도 모릅니다. 자기가 설명을 하는데 하나도 못 알아듣겠습니다. 한 숟갈에 오십 만원이랍니다. 나는 밀가루 같이 생겼던데 그것을 열흘을 먹는데 오십 만원이랍니다.
(예화) 여름철이 되면 지금은 그런 일이 없지만 강원도 쪽으로 내려가면 그땐 산이 없으니까 홍수가 나면 시뻘건 물이 막 내려옵니다. 산사태가 져서 돼지고 꽥꽥거리고 떠내려가고 소도 닭도 개도 막 떠내려 갑니다. 가끔 보면 거기서 산삼이 떠내려 오는 적도 있습니다. 옛날에 제가 어렸을 때 살던 강원도에서는 시골 노인네가 산에 가서 산삼을 캤습니다. 산삼이 아무에게나 보이는 게 아닌데 이렇게 굵은 산삼이 이만한 게 지금 시가로 따지면 몇 백만원 몇 천만원 갈 수 있는 그런건데 세 뿌리입니다. 뿌리는 약간 상했습니다. 그것을 통에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한약재상에 가서 팔려고 하니 시골 노인네가 어수룩하니 아무래도 이것보다 더 비싼 것 같은데 날이 더우니까 차츰 차츰 상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시골에서 비누나 몇 장 사러 나온 사람이 그것을 사먹을 재력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빨리 서울 왔으면 볼일을 보는 건데 펼쳐 놓고 시장 바닥에 앉아가지고 산삼을 사라 그러는데 런닝 바람으로 장돌뱅이 한 사람이 오더니 산삼 어디 봅시다. 몰골을 보니 산삼 수준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안 된다고 가서 무나 먹으라고 아니 그래도 돈 주머니 흔들면서 돈 있다고 합니다. 아니 물건을 봐야지 흥정을 할 것 아니냐 했더니 뚜껑을 열어 물건을 보여 줬습니다. 딱 뚜껑을 열더니 산삼을 들고 삽십육계 줄행랑을 친 것입니다. 뒤에서 저 놈 잡아라고 하는데 그냥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먹으면서 도망을 갑니다. 마지막에 붙잡았을 때는 뱃속에 들어갔는데 세 뿌리나 먹은 겁니다. 산삼은 생으로 먹는 게 최고랍니다. 이 사람을 붙잡아서 족쳤습니다. 이 사람이 집어 넣어라 나 들어가서 한 달 살고 나오겠다는 겁니다. 완전히 배짱인겁니다. 가진 게 뭔가 물었더니 장돌뱅이 보따리가 전부라고 합니다. 나를 집어넣으려면 넣고 이걸 가지고 가서 해결을 보던지 하랍니다. 할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그 보따리를 가지고 갔는데 그 보따리가 삼 만원 어치였답니다. 이 사람이 겨울이 되어 가지고 싱싱 바람이 부는데 거짓말 좀 보탰겠지만 런닝 바람으로 돌아다녔답니다.
인생이 이제는 건강이 우상이 되어 가지고 건강할 수 있다고 하면 뭐든지 다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허망한 인생들의 모습입니다. 여자들은 이뻐지기만 한다 하면 뭐든지 다 합니다. 하다못해 지렁이까지 잡아먹을 용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허무한 것들에 굴복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눈을 탁 뜨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일이 아무것도 아니며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후에는 나를 영광으로 영접하시리니 하늘에는 주 외에는 누가 있으리요. 이 세상에서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가 없나이다.” 나의 사랑을 받고 성도로서의 진실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분이 하나님 아버지 이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시인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소에서의 깨닫게 된 사건입니다.
그리고 26절을 보면,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고 말합니다. 이 시인은 자기의 육체와 마음이 쇠약해져 가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거울을 보며 인생이 후패해져 가는 것을 인해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낙심하는 사람은 속이 허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겉 사람은 나날이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롭다”고 했습니다. 육신이 후패해져 가는데 후패한다는 얘기는 썩어간다는 말인데 육신이 이렇게 비참하게 흉악한 몰골로 되어 가는데 속에 새로워 지는 게 없으니까 그것을 어떻게 좀 견뎌 보려고 온갖 방법을 다 쓰는 겁니다. 그러나 내면의 세계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충만해지고 영글어가는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에 의하여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고상하고 깊은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자기를 조금 무시한다고 해도 파르르 떨며 자존심 상해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인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사상과 철학을 가지고 믿음생활을 하고 거듭난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끔 사람들에게 뒤쳐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 그렇게 위장병으로 고생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그 속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글어 가고 채워지는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산밤의 맛이 정말 좋습니다. 가을이 되면 밤이 이렇게 영그는데 이파리는 다 떨어지고 고목나무도 그런 상 고목나무가 없을 정도로 마치 죽은 나무처럼 다 변합니다. 나무가 이파리가 다 떨어지고 비참한 몰골이 된 걸로 인해서 슬퍼하는 대신에 기쁨의 탄성을 지릅니다. 그렇게 나뭇잎이 쓰러져 갔기 때문에 알밤이 이렇게 영근다는 것입니다. 툭 치면 밤송이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밤송이 속에서 알밤이 떨어집니다. 그렇게 영글어가는 무엇이 있기 때문에 자연은 허무하게 죽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있는 형통한 사람 맨날 쳐다 보면서 껄껄 나도 저렇게 살아 버릴 걸 하면서 맨날 그거 부러워 하다가 마지막에 죽어 가면 인생도 허하고 아무 것도 이 세상에서 남겨놓는 것이 없습니다. 내면이 충만하고 영글어 가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육체도 쇠잔하고 마음도 쇠잔합니다. 예수를 잘 믿고 살아가려할 때 얼마나 어려움도 많고 갈등이 많습니까? 날 버리고 포기해도 여전히 어려움과 갈등이 많습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을 위해서 염려할 것이 없었습니다. 죽으면 주님이 나를 부르시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미련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도 내 마음속에 눌리는 고통스러운 일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염려라”는 것입니다. 믿음 충만하고 성령 충만한 대사도가 왜 염려를 해 하며 말하지 마십시오. 생명이 있는 사람들만 염려할 수 있는 염려가 따로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생명 없는 사람들이 염려하는 것을 인해서는 하나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없는 사람들의 염려는 오늘 무얼 먹을까? 내일은 무얼 입을까? 모레는 무엇을 마실까? 이런 생각으로 염려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은혜를 충만하게 받아서 하나님을 만나고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은 그들이 염려할 수 없는 것을 염려합니다. 이 사람들하고 그 사람들하고 둘이 만나서 보면 아주 웃깁니다. 울어야 되는데 미친놈처럼 허허 웃으며 돌아다니며 사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것 가지고 이 사람은 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될 텐데 이 세상의 사람들이 구원을 얻어야 될 텐데 그런 것 땜에 눌려있고 마음에 무거운 짐이 되어서 염려하며 그 심중에서 생명에 이르는 근심이 있고 멸망에 이르게 하는 근심이 있는 것입니다. 멸망에 이르는 근심을 하지 않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생명에 이르는 근심을 합시다.
시인이 이렇게 하나님만 사모한다고 말하는데도 마음도 쇠잔하고 육체도 쇠잔합니다. 그러나 맘도 육체도 쇠잔했지만 눈을 열어 하늘을 보니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분이 자기의 영원한 분깃이시고 반석이십니다. 원수가 와서 우리를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우리를 실족시키는 겁니다. 서 있는 놈을 밑에서 구덩이를 파면 우르르 무너지는 것입니다. 반석위에 서 있는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원수가 우리를 향해 도전을 해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반석위에 서 있는 사람은 든든한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반석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후에는 영광으로 인도하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나니까 반석이 아니라 고무보트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리 출렁대며 악인이 조금 형통하니까 “아 나는 괜히 사나봐” 악인이 멸망하니까 “역시 예수를 믿어야 되겠어” 하다가 하나님이 안 믿고 살던 사람이 사업이 번창하니까 “에구 왜 그러지” 하며 맨날 갈지자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 그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 하나님을 섬기겠느냐 입니다. 인생 그러면서 시간 다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 뭐하겠습니까?
그러면서 깨닫게 된 사실이 27절,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다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였습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든지 상관없이 주님을 떠난 자는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멸망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음녀와 같이 멸하신다 했는데 음녀는 하나님과 혼인관계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그 혼인 관계를 떠나고 우상을 섬기고 영적으로 간음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관계가 깨어지고 그 음녀가 버림을 받고 망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기필코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혼인관계의 서약을 배역하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는 서로 상대적이고 배타적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이 아주 명쾌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누구든지,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든 목사든 장로든 누구든지 상관없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주를 멀리하는 사람들을 다 멸하실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형통할지라도 주님을 멀리하는 그 인생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멸망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어찌 그리 황폐케 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라는 앞에 나온 말씀은 미리 본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이 오늘 이 집회의 결론을 우리에게 내려주는 것입니다.
28절을 보면,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시인은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녀들의 복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복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그런 관점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약속된 그것을 축복으로 알고, 또 하나님의 자녀들이 볼 때에 복이라고 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복이라고 하는 것과 틀리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대결론을 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성소에서 만나 이 세상에서 하나님밖에는 사랑할 자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이 시인이 경건하게 살고 마음을 깨끗이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애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복에 대한 생각에 있어서는 세상에 사는 사람과 똑같은 관념이었습니다. 형통하고 잘 먹고 잘 살고 자손들이 번성하고 부귀와 공명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니까 세상 사람들의 복과 하나님의 자녀의 복이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찬양)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주님께로 날마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약속된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별로였는데 은혜를 많이 받고 깨닫고 나면 회개를 깊이 하고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자기가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전에는 주님이 고함을 치면서 그 길로 가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도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몰랐습니다. 안 들립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님이 고요히 속삭여도 그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는 분별력에 뛰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멀어질 때에는 분별력이 점점 없어집니다. 안 된다고 고함치셔도 그대로 돌진하다가 조금 후에 붕대 감고 목발 짚고 “손들고 옵니다” 라고 하면서 돌아옵니다. 왜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시인이 이제 깨닫고 “하나님! 주님 자신이 제게 복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이 내가 무엇을 해 주랴 하면 주님만 있으면 다 좋습니다. 사랑하는 사이도 그렇습니다. 나 가난한데 괜찮아. 못 배워도 괜찮아. 함께만 있으면 된다고 그럽니다. 대부분이 거짓말입니다. 하나님만 보이고 그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그 하나님과 완전한 사귐을 갖고, 생수의 근원이신 그분께 우리의 신앙의 젖줄을 대며 거기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은혜를 힘입어서 어두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녀의 최대의 특권이라는 사실을 이 시인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것을 깨닫게 되니까 이제는 무지로 말미암아 시인의 발목을 채웠던 이 작고들이 다 부서지고 거기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제는 시인이 밖에 나가 사람들을 보니 악인이 형통해도 걸림이 되지 않습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이 내게는 있도다. 너희는 이 세상의 많은 것을 유업으로 누리거니와 나에게는 하나님 자신이 유업이시다. 보라 이 세상사람 누구에게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기업으로 주셨는가? 하나님 자녀들 외에는 하나님 자신을 기업으로 받은 사람이 없도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 이 세상 사람이 누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할 수 있습니까? 주님 앞에 그렇게 기도할 때 가까이 계셔 듣고 응답해 주시는 그런 하나님을 이 세상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셨습니까? 사람들은 위기와 고난 속에서 불평하고 원망하고 죽어 가는데 우리는 원수가 날 향해 와도 무너지지 않으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찬송)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주가 주신 능력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원수가 날 향해 와도 쓰러지지 않으리.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일어서리.
그래서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함이 내가 복이라. 하나님께서 나에게만 가까이 오라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멀어질 때에 슬퍼하십니다.
이제 시인은 마지막에 결단합니다. “주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라” 그러니까 이 시인이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낙심해서 주저앉을 때에는 세상을 향해 할 말이 없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고 내 마음을 맨날 정결케 하는데 잘된 게 뭐가 있나 하니 할 말이 없고 하나님께 내가 왜 이렇게 살아왔나 다 집어치워야 할 거 같다. 막살아 버릴 걸 내 인생이 너무 후회스럽다 하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깨닫지 못하면 세상을 향해 전파할 말이 없었습니다. 자기도 모르고 안개 속을 헤매는데 뭘 전하겠습니까? 그 사람들이 혹 나가서 전해도 문제입니다. 안개와 같이 전해서 안개 같은 사람을 데리고 옵니다. 틀림없습니다.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어디가서든지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지고 옵니다. 안개가 잔뜩 낀 사람은 안개 낀 사람만 데리고 와서 헛소리 하고 성경 공부 시간에 딴 얘기만 하고 그래서 사람을 혼돈스럽게 만듭니다.
그런데 성소에 들어가서 깨닫고 하나님이 왜 이 세상에 고통 하는 악을 내버려두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허락된 축복과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허락된 축복이 어떻게 차원과 수준이 다른 지를 깨닫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을 때에 나는 전파하리라. 전에는 세상에 형통한 사람을 볼 때 코가 이만큼 빠졌는데 “너 왜 믿니?” “혹시 하고 믿었지” 그랬더니 역시 하고 된 게 있나? “없어” 하며 하나님 앞에 입이 부어 가지고 가서는 “하나님 난 괜히 이렇게 살았나 봐요 다 때려치우고 세상으로 돌아갈래요” 이런 생각을 했는데 깨닫게 되니 이제는 나는 전파하리라. 무엇을? “나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주님의 그 이 세상의 모순을 초월하시는 그 놀라우신 하나님의 계획을 전파하리라”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형통하다고 오만하며 낄낄거리면서 폼 잡는 죄인들에게 다가가서 “잠시 후에 그 날이 이르리니 하나님이 너를 파멸에 던지실 것이요, 졸지에 황폐케 되리니 돌이켜라”하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자기와 같이 실족한 경우 맘을 깨끗이 하고 정결케 하고 손을 깨끗이 하여 정결케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막 살아 버린다고 하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나도 한때는 그런 때가 있었지만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라 그분은 이 세상의 모든 모순을 초월해서 홀로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말하며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께 가까이함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복이라고 강하게 전파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니까 전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전도하라고 외쳐서 전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면 전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못 만나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 전파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그렇게 실족하는 사람에게 전파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다 신앙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 너의 그 작은 머리로 하나님을 판단하지마라. 주님의 신앙의 세계는 광대하다. 눈을 들어 영광의 주를 보라. 하나님이 너희의 기업이시다.”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세상 사람이 울어야할 만할 때 똑같이 울고 좋아할 때 팔짝 팔짝 뛰고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이 무슨 신앙입니까? 신앙의 힘이 죽음의 힘이 이빨을 드러내고 파도와 같이 우리를 삼키려 달려올 때에도
(찬송)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며
평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끌려갈 때 수많은 사람들과 배를 탔습니다. 배가 부서질 위기를 만나고 모든 사람이 풍랑을 만나 곤두박질치고 먹을 것도 다 버리고 멀미를 하고 사람들이 다 불안에 떨고 있을 때 사도 바울이 묶여 있는 채로 바울이 “너희는 안심하라 평안하라 하나님이 너희 중 한 사람도 죽게 하지 아니하시리라 믿고 고요하라 평안하라”고 말합니다. 죄수가 지금 큰 소리 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하나님을 기업으로 가지고 있으므로 이 세상을 향해 그렇게 명할 수 있는 권세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가져야할 분깃입니다. 살아있는 날 동안 몇 년 더 살겠습니까? 삼십년, 사십년, 오십년, 육십년 뒤에는 여기 누구 만나겠습니까? 이 어두운 세상에 끌려가면서 세상으로 따라가지니 한 쪽에서는 복음을 그리워하며 살지 말고 한 번 청산하고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의 불꽃은 그만두고라도 가정의, 동네의 불꽃이 되어서 어두운 세상에 찬란하게 여러분들의 인생을 하나님이 보배와 같이 고귀하게 사용해 주실 것을 굳게 믿고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 되신다는 사실을 온 천하에 자랑하며 전파하며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환난이 닥칠 때나 곤고할 때나 외로울 때나 어려울 때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수많은 은혜를 기억하며 주님 한 분으로 기업을 삼으며 어두운 세상을 찬란한 불꽃으로 사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