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02월 09일 새벽예배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사도행전 26:24-29)
녹취자: 김성희
이 걸 보면은 아마도 그 당시에 바울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는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다른 로마 사람들에게도 꽤 알려진 사람일 것 이라는 추측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베스도가 사도바울에게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는구나” 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베스도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지 바울이 예전에 유대교회 지도자 였으며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걸로 생각 됩니다.. 물론 그 앞에서 바울이 자기가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던 사람이었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인해서 자기가 최선을 다해 자신의 신명을 바친 사람이라는 간증을 들었지만 공부를 많이 했다는 말은 나오지 않더라도 베스도가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는구나” 라는 말을 통해 베스도는 사도바울에 대해 상당히 자세히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학문에 있어서 사도바울의 진전이나 지적인 정도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알았을까요? 우리는 거기에 대한 적절한 답을 가질 수 없습니다. 확실한 사실은 누가가 이 사도행전을 기록할 때 이미 스데반의 핍박을 이야기하면서 사울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으로 보아서 그가 기독교인 사이에 상당히 많이 알려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교 안에서 가지고 있는 종교적 위치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를 박해하는 중요한 인물로서 기독교인들에게 공포의 대명사인 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사도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서 그분께 사로잡히게 된 데에는 놀라운 신앙에 체험도 있었지만 체험과 함께 확고한 지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전에는 유대교가 가르쳐주는 교리를 따라서 하나님을 믿었지만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께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살아나셨으며 자기가 죽음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사도에게 보여주고 나니깐 사도의 마음속에 진리가 굳게 믿어지면서 자기 마음속에서 예수그리스도가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신앙의 지식 속에 딱 들어오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찬란한 빛이 들어오면서 무엇이 참된 것인지 무엇이 거짓된 것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신앙을 통해서 인생 전체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기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수 밖에 없다는 필연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학문이 도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믿지 못 할 때에는 자신의 많은 학문이 주님을 믿지 못하도록 기여하는데 이제 믿어야 될 것을 믿게 되면 이 학문이 주님을 믿는 것에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많은 성경 지식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구약성경 자체가 이 땅에 오실 예수 메시야가 주인공이신데 인정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편견에 눈꺼풀이 씌워서 바르게 못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 시점에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고 그분이 힘없이 죽으신 것에 그분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우리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신 것을 뼈 절이게 사도가 경험한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깊이 뉘우치면서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붙들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진리임을 마음 속 중심으로 놓고 진리에 비춰 맞지 않는 것들을 버린 것입니다. 우선 성경에 있는 많은 지식들 그 다음에는 헬라문화 아래 있었던 그리스의 철학적인 사변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지만 참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기쁨을 드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했다고 봐야 합니다. 거기에서 깊이 깨뜨려지고 변화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많은 학문들이 이제 이 사람으로 하여금 확고한 지식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으로 가는 길에 네 가지 조건 중에 확고한 지식, 견고한 믿음, 기쁨에 넘치는 소망, 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사랑 이 네가지가 꼭 필요한데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이러한 것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베스도가 네가 많은 학문으로 널 미치게 하는구나 라고 “네가 공부 많이 해서 돌았구나가” 아니라 “머리가 돈 것이 아니라 정신 차리고 올바른 말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선지자를 믿으십니까? 믿으실 겁니다.” 왜냐하면 이 베스도와 같은 사람들에게 사도바울이 이런 식으로 질문하는 이유는 무엇이냐면? 구약의 선지자가 하나님의 보내신 종이냐? 라는 것을 믿는 신앙을 테스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 로마 사람들은 모두 신탁이 있다고 믿었고 신이 누군가에게 말을 주어서 그 신탁을 받아서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대부분 그런 사람들이 신전에 있었는데 많은 로마사람들 심지어는 학문이 깊고 고매한 철학자들 조차도 신탁은 틀릴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렇다면 우리 유대교의 전통 속에서도 그런 선지자가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한 이유가 무엇이냐면 “선지가가 그런 신탁을 하나님께 받아서 그렇게 오리라고 말한 그 약속을 따라서 우리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그분을 내가 만났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말은 하면서 “내가 정신 나간 것이 아니라 당신들 로마인들에게도 신탁이 있지 않는냐?” 그것이 틀리 수가 없다고 보는 것처럼 “유대인들에게도 그러한 선지자가 있다” 고 말하면서 “그 선지자들이 하나님이 메시야를 보내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따라서 예수가 이 세상에 오셨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베스도가 이 말을 듣고 펄쩍 뛰면서 “네가 적은 말 가지고 나를 그리스인으로 만들려 하느냐?” 했더니 바울이 소망을 이야기 합니다. “이렇게 결박을 당해서 심판을 받는 것. 이 겉으로 나타난 모습을 제외하고는 당신과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예수그리스도를 믿기를 원합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결국 넘치는 소망을 보여줍니다.
이에 앞서도 바울은 “내가 소망을 인하여 매인바 되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리라고 한 그 부활의 소망 때문에 내가 이렇게 결박당하고 매인바 되어서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사도바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 부활입니다. 부활이 왜 이렇게 사도바울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요? 그것은 예수의 부활의 통해서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는데 그를 살리신 것은 누가 살리신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살리셨는데 원래 사람이 나무에 매달려서 고난을 받고 죽는 것은 자기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셨다고 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죽으신 그 의미가 틀려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살려 내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셨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기의 죄 때문에 죽은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을까요? 죽은 것은 심판 때문이고 심판 때문에 죽은 것인데 그런데 심판 받아 죽은 그 사람을 사랑했다면 죽은 이유가 자기의 허물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의 소망을 위하여 내가 메인바 되었나이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이냐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분을 내가 믿고, 그 부활의 소망에 동참했기 때문에 내가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핵심은 구원자이신 예수를 믿고 그분의 속죄에 자기의 소망을 걸었다라고 하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같은 사람은 성경도 많이 알고 있었고 철학과 많은 학문에 뛰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주님이 무엇인가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진리를 보여 주실 때 그의 눈앞에 펼쳐지기를 바다와 같이 펼쳐졌을 거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확 펼쳐졌을 때 하나님이 누구시고, 예수는 누구시며, 그분은 왜 죽으셨고, 나는 이제 그분을 믿으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한 번에 창대한 사상으로 펼쳐져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결론을 가르쳐주는 장대한 세계이고 바울은 그들을 타이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그리고 당신들과 모든 이 세상 사람들이 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 앞에서 사는 것 이외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는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이 세상에서도 잃어버릴 수 없는 것들에 소망을 걸고 그것이 모두인 것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자원이 부족해서 핍절한 가운데 살아갑니다. 풍족함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육체만을 보호할 수 있는 이 세상에 있는 재물들에 대한 사랑에 추후이 집착하며 살아가는 동안에 영혼에 진정한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결박당한 것은 본받기를 원치 않지만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그 분을 믿고 그분 안에서 안식을 얻고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라는 소망을 빌고 있는 것입니다. 권력을 가지고 있어 사도바울을 묶어서 재판하는 사람들 보다는 묶여서 포로가 된 채로 있는 이 사람은 더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묶여 있는 채로 오히려 그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인생에 행복을 염려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게 결국은 그리스도인들의 풍부한 삶의 질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바라보며 우리들도 이렇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