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한 영혼의 참회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역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시 6:5-7).
시인은 이제 여기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서 자신의 그 영혼의 상태가 자신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탄원의 형식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아룁니다. 사망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고 음부에서는 주께 감사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인간에게 있어서 특히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어서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참 훌륭한 작용이에요. 그래서 이 기억을 통해서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또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고 이러는 거죠. 이스라엘백성들이 그 고난에 가득찬 역사를 이어가면서 항상 위로를 받았던 것이 과거에 대한 기억이었어요. 하나님이 자기들을 선택하시고 그리고 애굽의 바로의 압제에서 자기들을 건져주시고 광야의 생활가운데서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고 보호하셨고 하는 이 모든것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감사의 제목이었어요.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찬송의 제목이었죠. 그렇게 기억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비결이었거든요. 근데 시인이 묻는 거죠. 죽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시인이 범죄하자 그의 육신은 살아있으나 그의 영혼은 죽은자가 된 거에요. 그러니깐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반문하고 있는 거거든요. 이어서 나오는 이야기는 같은 이야기의 거의 반복이에요.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겠습니까? 구약시대에 이 음부는 히브리 성경에서 스올이라고 불려지는 건데 이때까지는 아직까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렇게 천국과 지옥이 아주 분명하고 명쾌하게 아직 계시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스올이라고 하는 것은 죽은 다음에 인간이 가야하는 생기가 없고 그다음에 생명이, 살아있는 어떤 기운 살아있는 사람들의 활기 이런 것이 없는 어둡고 칙칙하고 이런 곳으로 여겨졌어요. 그래서 그 음부가 이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장소로 이해 되었어요. 그래서 인간이 깊은 슬픔을 당할 적마다 내가 음부에 내려가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표현했거든요. 그러니깐, 범죄를 하자 이 시인의 영혼은 그런 음부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죽음을 느낀거죠. 생기가 다 빼앗겨 버린 그런 생태가 된거죠. 그런 음부에 내려가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인간의 보람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렇게 하면서 사는 건데, 그럴 수 없지 않습니까? 신자가 범죄하게 되며는 살아있으나 사망이 그의 영혼 속에 들어와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요. 그리고 동시에 그의 영혼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할 수 있는 모든 영적인 활기가 거의 사라지는 거에요. 그래서 다윗은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영혼의 깊은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거에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거 아니에요. 그래도 다윗은 한 때,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 그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고 그 신이 역사하던 사람인데,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습니까? 다윗의 경우는 사울과 달라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다윗에게서 거두시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성령이 그에게 있었지만, 역시 그가 하나님앞에 범죄하였을 때, 성령이 주는 모든 아름다운 생기와 하나님앞에 그 과거를 기억할 수 있는 그 감사 하나님을 향한 찬양, 경배와 거룩함, 이런 것들이 사라져 버린 가운데 자신이 거의 죽을 것 같이 되어버린 그런 상황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던 거에요. 오늘날은 우리들이 구약시대와는 달리 이렇게 각 사람마다 필요해서 하나님이 성령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구원을 받는 그 순간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요. 그래서 성령님께서 떠나시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때까지 우리안에 내주하셔요. 그래도 우리들이 죄를 지으면 다윗이 경험한 것 같이 그렇게 영적인 사망 그리고 마음이 음부에 들어간 것 같은 그런 고난의 순간 하나님의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그런 어둠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유를 갈망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불순종하려고 해요. 그러나 그렇게 자유롭게 행동하는 순간 우리는 즉시 속박 받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의 참된 자유는 하나님의 계명 안에 거하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참으로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 안에 거하라.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매일 참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매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고 그래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거에요. 왜냐하며는 그렇게 변화되고 하나님 앞에 깨트려 져서 계명을 넘나들며 살려고 하는 욕망들을 죽이고 그렇게 할 때에 우리들이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사는 이 계명 안에 있는 삶으로 만족을 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즉각적으로 유혹이 시작되고 그리고 죄를 범하며 살게 되는 데 그렇게 되며는 이렇게 영혼의 고통이 시작이 되는 거에요. 그러니깐 다른 길이 없는 거죠. 그래서 우리안에 있는 이 속된 욕망 사악하고 속된 이 욕망을 우리들이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사실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고통일이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이 우리의 행복을 위해 참된 처방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거에요. 여기에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더 고백을 해요. 그것이 뭐냐하면 내가 탄식하므로 곤핍하여 탄식하므로 곤핍하여, 이 탄식은 어떤 탄식일까요.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데서 오는 탄식이죠. 어느 순간에는 죄의 욕망이 한껏 부풀러 올라서 그래서 범죄했고, 그때 이 사람은 아주 큰 만족을 누렸어요. 그랬는데, 그것은 정말 잠깐 이었고 그 순간이 끝나고 나니깐, 탄식과 곤고함이 밀려 왔어요. 비참하게 버려진 자신의 영혼을 구해줄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죠.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놀랍게 체험하면서 그분의 영으로 일생을 산 사람이에요. 그분의 은혜로 그분의 영으로 일생을 산 사람인데, 그 충만한 영으로 일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은혜가 자신에게 사라졌을 때에 그는 말할 수 없는 영혼의 고통이 느껴졌어요. 밖으로는 자기을 비웃는 수많은 사람들의 비웃음과 안으로는 하나님과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에 대한 양심을 찌르는 그 수많은 가책과 그리고 하늘로써는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그 모든 은혜와 사랑의 빛이 사라졌어요. 그러면서 그는 안팎으로 생명의 근원을 모두 잃어 버렸어요. 이때 시인은 비로소 깨달은 거죠.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참으로 살아가는 것은 정말로 자신의 힘과 재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으로 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뼈져리게 깨달은 거죠. 하나님이 사람들마다 다 자기 자신을 자기 삶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데, 사실은 하나님만이 우리의 신자들의 삶에 근원이세요. 신자들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에 있어서 하나님 만이 삶의 근원이 되셔요. 한걸음더 나아가서 시인은 고백하기를 자기는 근심을 인하여 눈이 쇠하였으며 대적들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 무슨 뜻이냐며는 얼마나 자신의 죄로 인해서 가책을 느끼면서 괴로워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그 시금을 있고 온몸이 약해졌습니다. 다윗이 젊었을 때에는 사실은 밥을 잘 못 먹고 근심이 있다고 해서 눈이 어두워지고 그러지는 않아요. 그런데 나이가 들게 되면은 틀려집니다. 저도 하루 중에서 이렇게 푹 쉬고 그담에 편안하게 마음의 평정을 찾고 식사를 잘하고 그러는 시간에는 사물들이 참 잘 보여요. 근데, 식사를 제때 못했던지 아니면 신경 쓰는 일이 많아서 피곤했던지 하며는 현저히 시력이 감퇴해요. 나의 느낌에 30%정도는 차이나는 것같애. 전자와 같은 상태라면, 능히 볼 수 있고 식별할 수 있는 데 후자와 같은 상태에 들어가면 안보이게 되요. 그러니깐, 다윗이 이시를 소년시절에 지은 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가 있는거죠. 그러니깐 당연히 하나님으로 인해서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육체도 건강을 잃어버리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이 시인은 근심을 인하여 눈이 어두워 졌고 대적들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 수많은 비난하는 사람들 이러한 대적들로 인해서 그의 마음에 어두움이 찾아왔어요. 아무 희망도 없는 것 같고 절망이라는 분위기 이거든요. 절망의 분위기에요. 절망을 느끼는 것 같은 그런 상황에 도달하게 되는 거에요. 이상황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참회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밤마다 요를 적시고 그리고 눈물로 침상을 띄우는 거에요. 얼마나 폭포수처럼 눈물을 흘렸으면 비유이기는 하지마는 나의 많은 참회의 눈물이 내요를 적시고 그리고 나의 침상이 그 눈물위에 뜰것처럼 그렇게 수많은 날들을 제가 탄식과 통곡 가운데 보냈습니다. 한번 조용히 눈을 감고 묵상해 보세요. 왕이 묵었던 거쳐였으니 궁도 화려했을 것이요. 다윗은 역대 이스라엘 임금 가운데가장 많은 나라를 정복한 임금 중에 하나였고 수많은 재물들을 가지고 있었던 임금 이니 그 침전 또한 화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밤마다 침상에 엎드려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누가 말려도 소용없고 잡인들이 접근하지 않은 가운데 그는 밤마다 수척해지도록 식음을 전패하고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 눈물에 요가 흠뻑 졌고 침상이 뜨기까지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가 지은 죄를 하나님앞에 참회 하였습니다. 다윗의 위대한 점음 이러한 참되고 진실한 회개 악을 행함으로 소문한 악인이 되었지만, 그의 회개는 그의 범죄보다 훨씬더 많이 우리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런 통절한 회개를 통해서 이 다윗이 그 사망의 어둠속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죠.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짖고도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죄를 짖고도 항상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기는 그사람들 보다 훨씬 났다고 생각합니다. 또는 죄를 짖고 자기가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사람의 어떤 행동 때문에 자신도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핑개합니다. 자신이 죄를 지으면서도 자신이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자기가 그렇게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도록 누군가가 먼저 원인을 제공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결국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안계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는 계속 쌓여가지마는 그 죄를 진실한 회개속에서 청산을 하지 않아요. 그러면서 죄들을 쌓아가요. 크고 소문난 죄, 다윗과 같은 죄는 저지르지 않았을지 모르지마는 그러나 뒤에서 호박씨 까면서 작은 죄들을 회개하지 않고 수없이 지어요. 그 영혼에는 활기가 없고 생기가 없어요. 죽음으로 들어가요. 그렇게 살아요. 그러면서도 자신을 의롭게 여기고 다른 사람들을 비난해요. 결국은 이런사람들에게서는 진실하고 통절한 참회를 볼 수 가 없어요. 가책은 느낄이지 모르지마는 회개의 눈물이 없어요. 유감으로 생각할 지는 모르지마는 참회의 정신이 없어요. 그래서 자신이 잘못된 것을 돌이키지 않아요. 통절하게 뉘우치며 과거에 자기가 그런 죄를 지은 것에대해서 회개하고 그렇게 죄를 지었던 자신을 미워하고 처벌하고 그리고 자기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는 것 이것을 통해서 자기 부인으로 가는 거거든요.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슬픈일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함으로 사람들은 점점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요. 이런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참다운 기쁨과 행복이 없는 거죠. 시인이 이렇게 철저하게 회개하였던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의 얼굴을 감추시죠. 그리고 영혼들에게는 곤고한 날이 시작되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너무 엄격하시다고 말하지마는 사실을 죄가 커서 하나님이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참회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신앙의 모든 근본은 참회의 생활로 떠받들여 지는 거에요. 하나님앞에 끊임없이 참회하고 올바른 길로 돌아가요.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앞에 새롭게 살아가요.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교훈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그래서 저희들이 진실하고 통절한 참회로 우리들의 잘못과 과오를 주님 앞에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저희들이 되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모든 말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