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해 주신 하나님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시 6:8-10)
녹취자: 서재임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 앞에 애통하며 토로하던 시인이 갑자기 ‘행악하는 너희여 다 나를 물러가라’ 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나의 간구를 들으셨도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을 내릴 수 있겠지만, 저는 시편에 나오는 이런 삽입구 형태의 돌발적인 표현들이 우리에 기도의 경험 안에서 해석 되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가끔 여러분들이 시편을 보면 문맥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들어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계속해서 시인이 화자가 되어서 말을 하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이 그 시편 속에 돌발구로 삽입되어 들어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이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가질 수 있겠지만 저는 시인이 깊은 기도 가운데 들은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하고 시인은 깊은 영혼의 나락에 떨어졌습니다. 그 침체 속에서 통절하게 부르짖고 하나님 앞에 가혹하리만치 깊은 날들을 침체 속에서 보내며 눈물을 흘려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제 읽은 시편 속에서 자신의 눈물로 이불을 적시고 침상을 띄웠다고 표현한 것을 들었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우리들은 확정할 수 없지만, 어느 한 순간에 시인은 하나님에 용서의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비참한 자가 되어서 흐느껴 울던 다윗이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나의 간구에 응답 하셨도다.’ 라고 말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시인이 이렇게 부르짖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죄를 놓고 하나님 앞에 통절하게 참회하는 것, 이 간절한 부르짖음에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셨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시인의 고통 하던 양심은 위로를 받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거두실 것 같고 구원의 기쁨을 모두 잃어버릴 것 같은 그 비참한 정죄감에서 하나님의 사유하심을 경험한 것입니다. 물론 그 이후로도 이러한 죄를 지은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계속되어질 것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시인이게 화목을 누리게 하시고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다시 사죄의 감각과 영광에 대한 감각,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원래의 감각을 상당부분 회복시켜 주셨기 때문에 징계를 통해서 오는 고난이기는 했지만 그 모든 것들을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면서 당함으로서 고난의 길에서 오히려 그 고난을 자기 성숙의 기회로 삼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깊이 경험한 사죄의 체험이었습니다.
신앙의 모든 담대함은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자세는 하나님 편에 서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있는 것, ‘천만인이 나를 외워 싸고 만인이 나를 두른들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세상의 많은 왕들과 방백들을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 훨씬 낫다’ 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는 개의치 않습니다.’ 라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편에 서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는 방법은, 가장 좋은 방법은 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그분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항상 행하므로 하나님께서 나와 항상 함께 하시도다.’ 라고 말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앞에 사는 삶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핵심은 하나님과 온전한 평화를 누리고,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갈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그것이 최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그렇게 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진실한 참회의 삶입니다. 시인이 바로 그 일에 증인입니다. 그렇게 긴 세월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왔습니다. 이 사람처럼 하나님과 평안을 누린 사람이 구약에서 거의 없습니다. 이 시인처럼 하나님의 영광에 목마른 삶을 산 사람도 흔치 않습니다. 그런데 범죄 함으로 그 모든 것이 깨트려 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깨트려진 채로 버려두시는 관계 안에 그를 있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와의 관계를 깨트려진 채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해주신 것입니다. 그 속에서 자신이 깊이 깨트려지면서 자기의 죄를 미워하게 되고 참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다시 들렸습니다. 어떤 음성이 들렸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렇게 영혼의 깊음 속에서 몸부림치며 눈물을 흘리고 흐느껴 울던 이 시인의 간구에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 용서의 음성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자신이 다시 하나님께 용납되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이제 악인들을 향하여 말할 수 있었습니다. ‘행악하는 너희들이여 너희들은 다 나를 떠나라,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나의 곡성을 들으셨고,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이제 필요 없다. 나는 다시 하나님 앞에 살겠노라’ 고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후로도 오랜 동안 이 다윗을 욕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진실과 오해가 뒤섞여 있었습니다. ‘충성스러운 우리아의 아내를 죽인 놈’ 진실이었습니다, ‘남의 아내를 빼앗아 가로챈 놈 나쁜 놈’ 진실이었습니다. ‘사울의 가문을 말아먹은 놈’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진실이든 진실이 아니든 그 모든 것이 섞여서 이 시인을 괴롭게 하고 고통을 주었는데, 이제 이 시인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에게 사죄의 음성을 들려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살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일들이 시인에게 안 일어났으면 참 좋았겠지만, 이미 일어났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런 일들이 일어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일을 계기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태도는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게끔 하나님이 역사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들이 범죄 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넘어지게 되었을 때, 위대한 교부 어거스틴의 말처럼 우리는 이성을 가진 사람이니, 우리가 넘어진 그곳에서 믿음으로 다시 하나님 앞에 일어나서 사는 것, 그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회복되고 나면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손가락질 받을지 모르지만 모든 것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우리를 더욱 진실한 사람, 아름다운 사랑의 사람으로 바꾸어 가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