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과 마음의 빛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시편 13:1~4)
녹취자: 오정민
이 시편 13편도 탄원시 입니다. 즉 무엇인가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있어서 하나님께 진심을 토해놓으면서 주님의 은혜와 응답을 기도하는 그런 종류의 시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 시속에서 시인이 고백하는 바는 자기는 근심하고 있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의 근심이 왜 시작이 되었냐 하면은 원수들이 자기 주위에 많이 에워싸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시인이 근심에 빠지게 됐다는 이야기 입니다. 원수들이 자기를 에워싸서 깊은 근심에 빠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원수들이 자기를 에워싸서 근심에 빠지게 되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많은 원수들이 일어나서 자기를 공격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는데 이상하게 원수들이 그렇게 역사하는 것만큼 하나님이 응답해주시는 것 같지 않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큰 근심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우리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이런 저런 어려운 일을 만나고 인생을 살면서 환란과 시련, 고난을 만납니다. 그런 많은 시련과 환란 어려움들을 경험하지만은 그 종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어떤 때는 자기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사람들 때문에 고생을 하고, 어떤 때는 물질이 없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고생을 합니다. 어떤 때는 자신의 마음을 지키지 못해서 고생을 하고, 어떤 때는 주와 더불어 싸우는 데도 진전이 없어서 고생을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결국은 그 사람 마음 안에서 일어나게 될 때에 그는 깊이 근심하고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우리가 필요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고 우리를 에워싼 원수들을 파멸하시고 우리를 에워싼 시련과 고난 속에서 우리를 구해주시면 우리가 절대로 그렇게 근심하고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시련과 고난의 종류는 많아도 답은 하나이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시인이 깊이 괴로워하고 근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잘못 될까봐 걱정하는 것입니다. 원수들이 에워싸고 시련과 고난이 많이 와서 고통 받고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데 이런 괴로움과 어려움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깊이 근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근심의 제목은 결국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데도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서 당신의 자녀들이 원수의 발 앞에 꺾어지고 원수의 발 앞에 꺾어지고 시련 앞에서 부러지고 하는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 것이 일어나기 힘든 일이기 때문에 만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데 그렇다면 누가 우리를 대적 하겠는가 누가 우리를 대적 하겠는가 우리를 위로하는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그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다 하는 것이죠. 우리의 삶은 어디로 가든지 간에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요. 여기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미국을 갔다고 해서 거기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죠. 여기에서 하나님의 관계가 바르지 못한 사람이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해서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는 거 그런 거 없다 라고 하는 거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왜 이 현실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근심하고 그리고 불행하게 살고 하는지에 대한 원인을 하나님의 관계에서 찾지를 않아 그리고 그 하위에 있는 많은 것들 속에서 찾아 그래서 내가 불행한 것은 이렇기 때문인가 보다 저렇기 때문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 하위에 있는 것들 속에서 자신의 불행과 고통의 근원을 찾으려고 애를 많이 쓰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는 결코 그가 행복 질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뿌리가 아니기 때문이예요. 우리의 삶의 뿌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예요.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은 그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의 반영일 뿐이예요. 비가 많이 쏟아집니다. 그러면 댐이 더 이상 물을 저장 할 수가 없어서 어느 순간에 수문을 열어요. 그럼 평상시에는 별로 그렇게 물이 많이 흐르지 않던 강에 수문을 모두 열게 되면 어마어마한 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어마어마한 물이 흐르기 시작해요. 그 물이 달려 내려가면서 장관을 연출해요.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어마어마한 물이 흘러 들어가면서 강 언덕 주변에 있는 많은 땅들을 물에 잠궈요. 그리고 교각을 휘감으면서 흘러갈 때 어마어마한 소리를 내면서 그 물이 흘러가요. 그렇게 보이는 엄청난 변화는 수문을 연대서 시작이 되는 거예요. 만약에 다시 수문을 닫으면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다시 옛날로 돌아가요. 우리에 인생에 고난과 시련 그 다음에 괴로움과 아픔 이런 모든 것들은 양태야.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라 말이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흘러가는 물과 같이 현상과 더불어서 싸울려고 하지 그 근원인 수문을 막으려고 생각을 안해요. 그러니까 오늘도 아주 소중한 인생을 낭비하는 거예요. 자기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잘못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고 바르지 못한 자신의 삶의 태도를 하나님 앞에 바꾸고 그러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그에게 복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잘못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려고 하지 않고 계속해서 변명을 하면서 주위 있는 사람의 핑계를 대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유를 찾고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계속 고통을 주는 삶을 사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서 인생이 계속해서 막장으로 내려가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서 사니까 그 인생의 방황이 계속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을 믿는 신앙을 주셨으면 젊을 때는 방황하고 그리고 어렸을 때는 고민하고 방황할 수 있어요. 그리고 나이가 먹고 그래도 역시 고민하고 방황하죠. 그러나 고민하고 방황하는 종류가 정상적으로 나이가 들면 달라야 되요. 달라야 되요. 어렸을 때는 어렸을 때는 초등학교 다닐 때는 공부 안하고 싶고 놀고 싶고 그런데 엄마 아빠가 계속 공부하라고 그러고 학원 보내고 이래서 고민을 해요. 중학교나 고등학교 가면 담배도 피고 말이지 도색 잡지도 좀 보고 어른처럼 행세하고 술도 마시고 싶고 미장원에 가서 파마도 하고 싶은데 엄마하고 학교 선생님이 못하게 해서 그래서 고민을 해요. 그런데 그런 그런 고민을 하는데 이제 성인이 되어서 모든 자유가 주어지고 나면 이제 고민하는 내용이 틀려져야 되잖아요. 머리가 희끗희끗 해가지고 인생의 노년이 오는데 뛰쳐나가서 가출이나 하고 담배나 피고 술이나 퍼먹고 싶어하는 이런 거 때문에 고민을 하면 인생 쓰레기와 같은 인생의 길로 걸어 들어가는 거예요. 이 세상은 죄와 슬픔이 가득찬 곳이기 때문에 언제나 고통이 있고 그리고 인간을 언제나 고뇌해요. 그것이 인간의 실존의 모습이예요. 달라야 되잖아요 고민하는 것이 머리가 희끗희끗 해가지고 어른이 되었는데 에구 오늘도 그냥 도망이나 칠까 하고 가출할 생각이나 하고 몰래 나가가지고 담배나 피고 술이나 퍼 먹을 생각을 하고 이렇게 하면서 고민을 하면은 인생은 쓰레기의 길로 접어드는 거죠. 달라야 되요.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계에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돼요. 고난이 일어나고 어려움이 일어나면 물론 생각을 하죠. 왜 이런 어려움이 일어났을까? 저 사람이 나한테 왜 저렇게 대할까?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이일은 왜 하나님의 축복이 없을까? 이렇게 고민을 하고 그래서 지혜를 찾아야 대겠죠. 물론 지혜를 찾아야 되겠죠. 그렇지만 그런 지혜를 찾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보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아니하시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것을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러면서 생각하는 거예요. 그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나의 죄를 자복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렇게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나 때문입니다. 그런 고백이 생겨납니다. 좋은 일이 생겨나면은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신앙적인 마음은 바로 그런 마음에서 시작이 되요. 그리고 슬프고 괴로운 일이 일어나면 내가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용서를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는 거예요. 언약 백성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그 말할 수 없는 축복이 뭐냐 하면은 그게 뭐냐 하면은 그 말할 수 없는 축복이 뭐냐 하면은 한없는 용서예요. 그게 언약 아래 있는 선택된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 용서가 약속되어 있는 거예요. 어제도 설교했죠. 우리가 성령 충만할 때 만난 사람들은 우리를 칭찬해요. 우리가 침체에 있을 때 만난 사람들은 우리를 쓰레기라고 그래요. 우리가 충성스럽게 섬길 때 만난 사람들은 우리를 정말 진실한 일군이라고 그래요. 우리가 침체에 빠져서 주의 일을 게을리 할 때 만난 사람들은 악하고 게으른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거는 모두 지나가는 것이지 우리 모습의 전부는 아니예요. 하나님은 쓰러진 사람을 일으키시고 미끄러지는 자를 붙드셔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돌아와요.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 하고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요. 그러면 마치 수문을 막은 것처럼 당장은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상황들이 모두 변화하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먼저 붙드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근심하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 이 얘기이예요. 그렇게 근심할 때에 시인이 하나님 앞에 기도한게 뭐냐 하면은 원수들을 다 죽여 버리십시오. 나에게 어마어마한 복을 주십시오. 그런 걸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았어요.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비는 소원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 하면은 내 눈을 밝혀 주십시오. 라고 하는 거예요. 내 눈을 밝히소서 내 눈을 밝혀주시옵소서 이거거든요. 이건 뭐냐 하면은 자기 안에 있는 어두움을 물러나게 해 달라 이거 예요. 자기 안에 있는 어두움을 물러가게 해주십시오. 라는 기도였어요. 이 어두움은 다른 것으로는 극복될 수가 없어요. 창이나 칼 돈 물질 명예 이런 것에 의해서 극복될 수 없어요. 여기 빛이 모두 사라지고 캄캄한 어두움이 되었다고 칩시다. 세계에서 제일 좋은 칼을 가지고 이 방에 들어오면 어두움을 물릴 칠 수 있겠습니까? 돈 다발이 교회에 쌓아 놓으면 어두움이 물러 갈수 있습니까? 유명한 학자 들어오면 어두움이 물러 갈수 있겠습니까? 높은 지휘를 가진 사람이 들어오면 어두움이 사라질 수 있겠어요? 그건 사라지는 것이 아니예요. 어두움을 물러가게 하는 것은 오로지 빛 그거 하나 밖에 없어요. 빛 들어오면 칼 휘두루지 않아도 어두움은 물러가요. 그러면 도대체 이 시인이 자기의 눈을 밝히소서 라고 기도할 때 이 시인이 직면했던 어두움이라는 것이 뭐냐 하는 거에요. 뭐가 어두움이냐. 두 가지 어두움이예요. 하나는 우리 위에 있는 어두움이고 또 하나는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이예요. 우리 위에 있는 어두움이라는 건 뭐냐 하면은 객관적인 어두움이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은 우리가 무지하기 때문에 어두움이 위에서 내려서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우리들이 아직 이해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알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객관적인 어두움이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은 아직 우리가 배운 적이 없고 터득한 적이 없기 때문에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것이 어두움이죠. 그것이 어두움이예요. 그런 어두움들이 어떻게 나타나냐 하면은 여러분들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면은 참 무지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고는 하는데 아는게 너무나 없어요. 아는 것이 너무나 없어요. 그래서 그에게 가르쳐주었어요. 그랬더니 그렇게 기뻐하면서 아멘 아멘 하면서 받아드리면서 눈물을 흘리고 변화 되는 거예요.이런 경우에는 자기가 처하고 있는 그 사람이 처하고 있는 어두움이 객관적인 어두움이예요. 그래서 시편 119편에서 시인이 말하기를 주여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에 기이한 것을 보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하는 장면이 나와요. 이게 바로 이게 바로 객관적인 어두움이예요. 이 객관적인 어두움은 부지런히 성경을 공부하고 특별히 교리를 공부하면은 물러 갈수 있는 어두움이에요. 또 하나의 어두움은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이예요. 이 어두움은 주관적인 어두움이예요. 분명히 다 배웠어 자기가 죄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자신이 바로 깨닫지 못하는 거에요. 이것이 자기의 마음 속에서 자기를 어둡게 하는 거죠. 예를 들자면 죄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죄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 지 올바른 것을 모르는 거예요. 자신이 이미 다 알고 있지만 그러나 죄를 사랑하기 때문에 어두움이 내려서 영적으로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이예요. 이러한 어두움을 하나님께서 빛을 밝히심으로써 물러갈 수 있는 것이예요. 이 빛은 진리에서 빛치는 빛이예요.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 빛을 잘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비춰주세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시고 또 깨닫게 하시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에요.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이러한 어두움들을 우리에게서 물러가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겠어요. 한편으로는 신자의 일생 전체가 진리를 배우며 걸어가는 길이어야 돼요. 지금 배우고 있는 진리가 있어야 해요. 지금 깨닫고 있는 진리가 있어야 해요. 또 하나는 하나님 앞에 늘 깨어 기도하고 성령의 충만을 받음으로서 이미 내가 깨닫은 진리들이 빛을 잃어버리지 아니하도록 끊임없이 우리의 지성을 헌신해야 돼요. 그렇게 하지 않고 태만 태만하게 자기 자신을 버려둔 가운데 육욕에 치우쳐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이 치면 물결이 치는 대로 흔들리면서 자기 욕망을 따라 살아요. 그리고 자기는 연약하다 그래요 연약한게 아니라 그것은 악한 거예요. 그래서 신자의 일생 전체는 끊임없이 자기의 마음을 지키면서 사는 일생이예요. 그것이 신자의 일생이예요. 매 일생동안을 신자가 자기의 마음을 지키면서 일평생을 살아가요. 그래서 칼빈 선생도 말하기를 신자가 신자의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데 있어서 최고의 대적은 최고의 대적은 사단이나 원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예요. 자기 자신이 최고의 대적이예요. 자기 자신이 최고의 대적이예요. 거기에 이제 우리 인생의 어려움이 있는 것이예요. 매 순간 우리는 그런 속에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게 되요. 그런 길은 1년이나 2년을 걷고 끝나는 길이 아니라 일평생 가야 되는 길이예요. 그 길이 어려운 길이죠. 그 대신 그렇게 진리를 버리고 세상 속으로 걸어가는 길은 더 어려운 길이기 때문에 우리가 손들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로 나왔던 거예요. 나왔던 거예요. 세월이 지나면서 그때 우리가 얼마나 고통 가운데 있었는지를 몰라 그래서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그리고 모든 것들이 뒤엉켜 거기에서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지금도 우리 돌아가는 우리가 돌아가려고 하는 길이 그 세상으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손들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와요. 왜 그 세상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괴로워서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와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맛본 우리들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이 모든 미친 짓이라 말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거스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면서도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그건 미친 사람의 마음이예요. 절대로 두 가지를 한꺼번에 얻을 수는 없어요. 여러분들의 마음에 세상이 있으면 주님은 안 계세요. 주님이 계시면 세상은 없어요. 그래야 없을려고 노력을 해요. 주님 자신을 놓고 밤새도록 노력을 해요. 그러면서 생명과 평안을 누리면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려고 애쓸때 예전에는 세상에 있는 것들로 행복해지려고 했지만 이제는 세상이 있는 것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없어요. 주님 자신 때문에 행복해지려고 갈망해요. 그러면서 걸어가야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