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아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심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시 36:10)
녹취자: 김미영
성경에 나와 있는 많은 사상가운데 가장 심오한 사상 중 하나가 하나님을 아는 것, 그것의 사상입니다. 원래 이 '안다'라고 하는 이 말이 아주 포괄적이고, 그리고 경험적인 말입니다. 이 아는 것은, 여기서 '안다'라고 하는 이 것, 이것은 매우 포괄적인 말인데 그 대상이 하나님이 될 경우에는 '안다'라고 하는 말이 훨씬 더 신비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이 외에 많은 사물들은 눈으로 볼 수 있고 감각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만져지거나. 그것을 아는 것은 감각에 많이 의존하게 되지만 하나님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실 수도 없고 어쨌든 그런 분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안다’라고 하는 이것은 매우 독특한 개념을 갖는 것입니다.
이 ‘안다’라고 하는 말이 성경에서 제일 먼저 쓰인 게 창세기에 보면 ‘아담이 하와와 함께 동침하매’ 그게 ‘안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이것이 경험적인 말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마태복음 1장에 보면 마리아에게 아이가 생길 것이라고 하는 천사의 수태 고지 사건이 나옵니다. 그 때에 마리아가 ‘내가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라고 할 때 그것도 역시 '안다'라고 하는 말이 나오죠.
그러니까 이 아는 것은 지식으로 정확하게 알 뿐 아니라 사랑할 뿐 아니라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그 대상이 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과 아는 것이 분리가 되지 않는 총 포괄적인 지식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인자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하게 알 때만 인자가 그 인자하심을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적으로 어떤 것을 경험하고 감동을 받고 할 때에 그것이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오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닌데 자기 자신이 홀로 해석을 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두 가지가 똑같은 것 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것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어떤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 그것을 두 사람 사이의 완전한 인격적인 관계로부터 경험할 수 가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그럴 경우에는 사랑은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저 사람 마음속에 내가 들어갔다 나올 수는 없지만 올바른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충분히 내가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의 사랑과 그 다음에 그 사람이 나를 실제로 사랑하지 않는데 내가 스스로 여러 가지 많은 일을 상상하고 해석하면서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효과는 비슷할 수가 있겠죠. 그렇지만 사실이 아니잖아요. 두 가지가 절대로 같은 것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혼자 짝사랑 하는 게 대개 그런 경우잖아요. 저 사람은 그냥 생각 없이 웃었는데 자기를 보고 웃는다고 생각하고 그러는 겁니다.
아이를 너무나 갖고 싶어 하면 상상임신도 한다면서요? 임신하는 것과 똑같은 입덧도 하고 똑같은 일들이 몸에 일어난다며. 사실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런 효과가 몸에 나타나잖아요?
그렇듯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의 경험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으로부터 우러나와야지만 그것이 '참된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참된 사랑의 지식이라고 말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하나님을 아는 자에게 인자를 베푸시며’ 그런데 사실은 제일 먼저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고 또 알겠사오니 나에게 인자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나의 마음이 정직하고 정직하겠사오니 나에게 주의 의를 베풀어 주옵소서. 그래서 신앙 생활의 핵심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면서 그러면서 주님의 그 크신 사랑, 자비, 인격 이런 것들을 알아가면서 알아 가면 알아갈 수록 주님에 대한 지식, 이해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신앙입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그게 또 믿음이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 째로는 이제 ‘정직한 자에게 의를 베푸소서’ 성경에서 이 의는 하나님 앞에 받는 사법적인 판단의 결과로써 의입니다. 그러한 의가 내가 하나님 앞에 율법대로 살아서 의를 얻게 되는 수도 있고, 또 하나는 내 의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옳으시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의를 베푸소서.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마음이 정직하다고 하는 것은 올곧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는 그 마음, 올곧은 마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정직한 자에게 주의 의를 베푸소서. 그러니까 이 마음이 정직한 사람이 올바를 때 그래서 하나님을 찾아가고 있을 때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과 거치는 존재들이 되겠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뭔가 뜻을 정하고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려고 하면 잘 지낼 수 있는 사람하고도 부딪히고 어렵지 않은데도 어려운 일이 생겨나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 속에서 그러한 일들이 생겨나는 속에서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만약에 이 시인이 비는 사람에게 대적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판단하시고 처결하시면 그러면 고통 받는 이 마음이 정직한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나겠죠? 그걸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즉각 즉각 당신의 의를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순처럼 보이는 현실도 어떤 특별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상당기간 동안 지나가게 하시잖아요?
하박국 선지자가 번성하는 악인을 보면서 괴로워했던 이유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잖아요.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마음이 정직한 자가 그렇게 어려움을 당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즉각 처결하셔서 그래서 당신의 의를 베푸시옵소서. 그러면 마음이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의 의에 합치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니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처결하므로 그가 보호받고 하나님 앞에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처결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죠? 또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빌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 같은 ‘주의 의를 베푸소서’ 라는 사상이 31편에도 나오는데 그게 마르틴 루터의 칭의 사상입니다. 종교개혁의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되었던 성경구절입니다. 이것은 뭐냐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음이 정직한 자로서 살지만 때로 그렇게 살지 못해서 잘 못 했을 때에는 나의 의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니까 그 때에 주님의 의를 덧입혀 주셔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붙들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살 때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불의한 악으로 힘들게 하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으로 적용되고 그리고 하나님 뜻을 따라 살려는 사람들에게는 인간의 의로써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을 때 하나님의 의를 덧입혀 주시는 재료가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두 이야기가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인자를 베푸는 것과 주의 의를 베푸는 것, 이것은 같은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인자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실 뿐 아니라 또한 내가 명백히 하나님 앞에 심판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기셔서 그 심판을 자비로 바꾸어 주시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인자라 긍휼이라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 생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한 점점 더 탁월한 지식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비밀들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 생활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지켜 주시고 오늘 이 시간에도 아버지 앞에 나아와 간구하고 기도하게 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좋으신 주님 오늘도 저희와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그래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매일 매일 다시 태어나도록 저희를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