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79
목 차
예루살렘의 슬픔(시 79:1-3) 1
어느 때까지니이까(시 79:4-5) 7
주의 긍휼을 베푸소서(시 79:6-8) 13
주의 이름의 영광(시 79:9) 18
하나님을 보여주소서(시 79:10) 24
당신의 백성을 보존하소서(시 79:11) 31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시 79:12-13) 36
예루살렘의 슬픔
“하나님이여 열방이 주의 기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으로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저희가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며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 짐승에게 주며
그들의 피를 사면에 물같이 흘렸으며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시 79:1-3)
본문해설
시편 79편은 탄원시라고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탄원은 단순한 탄원이 아니라 참회가 섞여있는 탄원이고 그것도 개인의 참회와 탄원이 아닌, 공동체의 참회와 탄원이 섞여있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는 아마도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되었던 주전 605년경의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시인은 제일 먼저 하나님께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된 것에 대해 탄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황폐화
예루살렘이 황폐된 것은 크게 두 가지 부분입니다. 하나는 성전이 더럽혀진 것,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이 초토화된 것입니다. 학자들은 ‘예루살렘’의 의미는 아마도 ‘평화의 도성’일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말씀드린 ‘평화’란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이 평화가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구현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대하셨던 바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의 도성, 예루살렘의 심장부에는 왕궁이 아니라 성소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화목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전체에게 성소는 오직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모두가 예루살렘에 와서 하나님께 경배하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통해서 백성들의 죄가 있으면 용서를 구하고, 또 이스라엘 공동체적으로 위기와 시련이 닥치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국가의 커다란 중대사뿐 아니라 개인의 소소한 일도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거나 성전을 향하여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은총을 입었습니다.
종교적인 평화가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왕권을 통해, 그와 같은 평화를 구체적으로 구현해 나간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스라엘의 열왕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영권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언약관계에 충실함으로 그 평화를 유지되고 증진되어서 하나님을 향한 공경이 이 세상에서의 공의와 인자함으로 나타나도록 촉구한 사람들이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기능들이 철저하게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당시 이스라엘은 언약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을 지닌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께로부터 선택받은 나라로서의 특성이 이스라엘 가운데서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위기에 대한 경고를 보내시고 백성들을 성심으로 가르쳐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오게 하라고 당신의 종, 선지자들을 파송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던 이스라엘에게 선지자들의 가르침은 눈의 가시와 같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보다는 선지자들을 박해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통한 기회들은 이들의 악한 불순종으로 인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경고한 바대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습니다.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어찌 이스라엘을 이렇게 비참하게 심판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야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실 뿐 아니라 당신의 거룩함에 도전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당신의 명예를 지키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인자와 긍휼은 당신께 돌아오는 사람만이 실제적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사랑은 개인적인 것과 공동체적인 것을 함께 고려해서 생각해야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 개개인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시지만, 하나님이 앞에서 영적 이스라엘은 한 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몸에 심각한 질병이 든다면, 어느 부위에 고통이 있더라도 치료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살이 썩는다면 그 환부를 도려내고서라도 몸의 온전함을 보존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보실 때, 당신께 선택받은 백성들이 그 몸을 구성하여 이스라엘을 전체를 구현해 나가야했습니다. 만약 한 몸 이스라엘이 심각하게 병들게 되었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그 그루터기를 보존하기 위해 일부를 심판함으로써 정결한 공동체가 되도록 순수성을 보존하십니다. 이 두 가지를 고려하면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읽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기업을 주신 뜻은
그렇다면 커다란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은 신약으로 말하면 곧,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안에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살아가듯이, 이후에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예표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영적 기업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이미 져버리고 땅만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없는 땅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래서 모세 시대에 조상들이 우상숭배를 저지르자, “내가 내 사자를 보내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니, 사자와 함께 올라가라. 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가지 않겠노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했던 것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리석게도 조상들이 과거를 까맣게 잊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이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누리며 그 안에서 자기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업을 주신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은, 그들이 기업을 누리고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 기업을 누림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과 구원에 이루는 지식을 열방에 두루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그분께서 원래 의도하신 바대로 사용하지 않을 때, 이 기업을 이방 나라에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이방나라들이 주의 기업의 땅에 들어왔고 주의 성전은 더럽혔습니다. ‘더럽혀졌다’는 것은 자격 없는 사람들이 경외심이 없이 성전에 들어와서 마구 짓밟았다는 것입니다. 성전의 금은 기명들을 모두 가져가고 거룩한 전은 완전히 더럽혀졌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전쟁과 약탈로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온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평화를 알려주어야 했으며, 그 성전은 평화를 유지하며 살게 하는 중요한 심장부와도 같았습니다. 이 성전이 더럽혀지고 파괴되어 버렸을 때, 이것은 오랫동안 불순종하며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않으면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깊이 공경할 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백성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만약 예루살렘 선정만 온전하였어도, 다시금 백성들이 진실하게 참회하고 헌신된 제사를 드려서 그분과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었다면 어떠했겠습니까? 만일 제사장들이 모든 제사예법들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하심에 합당하게 살도록 언약백성들의 도리를 선포하고 종교적인 의식들이 그들의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바지했다면, 이스라엘은 저토록 타락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여전히 중요합니다. 물론 세상의 가치가 교회에 유입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이 끊임없이 세상과 접촉하고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물을 들이마신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 속에서 구별된 존재라는 의식이 없이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세상 속에 탐닉하다가 온 사람들이라면, 그들이 어찌 언약백성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세상의 물결과 싸우지만, 여전히 완전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 물들을 마실 수밖에 없습니다. 수영하는 아이들이 수영장물을 먹겠다는 의지는 추호도 없지만, 어쩔 수 없이 입과 코로 들어가 소량의 물을 마시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올 때마다, 언제나 탄핵을 받고 비판을 받아 자신들의 가치가 세상의 보편적인 가치이지만 교회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가치라는 것을 명백히 깨닫고 돌아갈 때 교회는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세상이 같아짐으로 선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격차를 가짐으로 선교가 됩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었을 때 나와 똑같은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저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인가 저와는 다른 것이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이 있다고 믿었기에 인생의 벼랑 끝에서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교회가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없을 때 교회의 외연(外緣)이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파괴되었을 때 그 외연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 전체가 적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2-3절은 교회의 비참함에 대해 구체적으로 표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그래서 “주의 종들이 시체가 공중의 새의 밥으로 성도의 육체가 땅의 짐승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아마도 무수한 사람들이 도륙 당했을 때, 시체를 치울 수 없었기 때문에 짐승들이 와서 먹어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피는 예루살렘 사방에 물같이 흘렀지만,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다는 고백입니다. 바벨론이 침공하였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항했고,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 입성 후에 그 저항자들은 처참한 복수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역사 속에 기록된 이야기와 같이 그들이 피가 도랑을 이루었습니다. 수많은 시체들이 길가에 즐비했으나 품위를 갖추어 매장해줄 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예루살렘 위에 임했습니다.
결론과 적용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의미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지 상고하여야합니다.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어떻게 바쳐질지를 생각하며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해서 교회의 한 지체를 삼으시고 어두운 세상의 빛으로 살게 하신 큰 영광과 은혜를 숙고하며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는 주신바 소명을 따라 살 때 가장 잘 보존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놀라운 회심의 은혜는 회심하게 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살 때 가장 잘 보존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을 기억하면서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이바지하도록 하나님 아버지 앞에 겸손하게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어느 한순간도 주님이 내게 주신 축복과 은총 때문에 교만해지는 일없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어느 때까지니이까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질투가 불붙듯 하시리이까”(시 79:4-5)
본문해설
1-3절이 심판을 당한 예루살렘의 정황에 대해 하나님께 드리는 보고였다면, 4-5절은 하나님을 향한 탄원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웃에게 비방거리가 되었는데 도대체 어떤 비방거리가 되었기에 시인이 “우리를 에워싼 자들에게 조소와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경건한 시인이 단지 자신들이 “민족적인 억압을 받고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라는 상황적인 호소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민족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되도록 짓밟혔을 때 그것은 단지 나라를 잃어버리고 멸망하게 된 것이 아니라 이방 사람들에게 어떤 신학적인 의미를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없다. 이스라엘을 지키는 언약의 여호와는 없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시고 자기 백성들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하늘의 주인이라는 말은 거짓이다.”라는 신학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무신론이 아니라 이방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교적 신앙을 공교하게 해주는 빌미가 된 것입니다.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이심
모압이라는 나라는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나라이고 그들의 조상이 에돔 즉, 에서입니다. 모압은 오랫동안 이스라엘 치하에 복속되어 있다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고 승리한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모압 비문입니다. 이 비문에 보면 그모스라는 자기의 신이 이스라엘에게서 벗어나게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모압 민족뿐 아니라 당시의 모든 중동의 나라들이 종교적인 민족이었습니다. 나라 대(對) 나라의 싸움은 모두 신 대 신의 싸움이었습니다. 이것이 시인의 가슴을 찌르는 신앙적인 고통이었습니다.
이와 유사한 예가 하박국서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하였다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방민족이 집어삼키고, 심지어 언약백성들 중에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갈대아인들에게 빌붙어 호의호식을 하려는 악인들이 이렇게 번성할 수 있습니까? 그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단 말입니까?” 하박국 선지자는 고뇌합니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문맥을 살펴보면, 단순한 믿음이 아닙니다. 이 믿음에는 소위 이야기하는 ‘피데스’(fides), 내가 마음속으로 믿은 것과 ‘피두키아’(fiducia), 그분을 향해 나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고 살아가는 의뢰가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박국은 선견자로서 마지막 때 일어날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미리 내다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큰 심판을 미리 보았습니다. 그 심판으로 말미암아 큰 재앙이 임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무화가 나무가 마르고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고 들에 양들이 없고, 모든 주산업이 황폐된 상태입니다. 그 와중에 하박국 선지자는 “나는 기뻐하리라”고 외칩니다. 이와 같이 커다란 심판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비참해하는 대신 기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심판과 같은 부정적인 방식으로나마 당신의 살아계심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합니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악마의 축복보다 훨씬 가치가 있습니다. 죄악 된 세상이 주는 승리의 상금보다는 신앙을 따라 사는 핍박이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가 자기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패배한 선은 승리한 악보다 위대하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려고 하지만 항상 이기는 것 아닙니다. 때로는 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쳐도 거대한 세력에게 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조차도 패배한 선은 승리한 악보다 위대합니다. 시인이 깊이 하나님의 앞에 탄식하며 호소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땅에 떨어지고 짓밟힌 하나님의 이름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이러한 상황을 주목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심판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판하는 곳에 하나님이 계셨음을 깨달아야 했고, 그처럼 심판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고 싶으셨습니다.
심판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우리는 동양에 살기 때문에 잘 느끼지 못하지만, 2차 대전은 유럽 사람들에게 있어서, 우리가 일본에게 당한 트라우마와는 비교가 안 되는, 어마어마한 상처를 남겼습니다. 비단 극악무도한 유대인 학살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한국에만 정신대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구라파의 수많은 나라에도 정신대가 있습니다. 물론 규모에 있어 우리나라가 훨씬 더 큰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나라가 정신대 문제에 대한 외교대책을 제대로 강구하려면, 역사가와 서지학자들이 그 당시의 문헌들을 샅샅이 뒤져서 연대기를 구성해야합니다. 그처럼 비참한 역사를 유럽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독일은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독일 때문에 일본이 상대적으로 의식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일본의 과거를 찾아 소상히 일깨워준다면 그들을 무릎 꿇게 만들 수 있습니다.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민족적 박해로 인해 유럽 전역에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럽 전체에 흩어져 각 나라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나치의 만행에 대한 고민은 비단 이스라엘만의 고민이 아니라 전 유럽적인 고민이 되었습니다. 유럽 신학자들은 존경스러운 면이 있는데, 그들은 역사문제에 대해 많이 고민을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일본 문제만 나오면 거품을 물고 욕부터 하는데 그들은 진지하게 고민을 합니다. 홀로코스트를 넘어서 2차 대전에서 600만을 죽인 무시무시한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2차 대전 이후에 기독교 신앙을 철저히 버리고, 유럽으로 하여금 모든 유신론을 경멸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습니다. 최근 학설에 의하면 30페이지 책 한권 때문에 600만이 학살당했다는 이론이 주장되고 있습니다. 헤로도토스라는 사람이 쓴 역사책에서 잠깐 게르만족의 우수성을 언급합니다. 그것을 기가 막히게 이용한 사람이 히틀러였습니다. 그는 학자들을 동원해서 게르만족의 우수성이 로마시대 때부터 입증되었다는 것을 증명해냅니다. 이것을 사용해 민족 우월주의에 빠지면서 어마어마한 학살을 저지릅니다. 그 참상을 경험한 사람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습니다.
그런데 신학자들의 고민은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순간이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유대인들이 독가스실과 웅덩이에서 죽어갔습니다. 러시아와 독일이 전쟁할 때 60만 명의 러시아 포로들이 두 번이나 포위되어 사로잡힙니다. 60만 명씩 두 번에 걸쳐 총 120만 명을 사로잡았는데, 독일에는 그들을 먹일 식량 계획이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역사 속에 묻혔지만 그들을 총칼로 죽인 것이 아니라 서서히 굶겨 죽였습니다. 신학자들은 고민합니다. “이런 만행이 있을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많은 신학자들이 찾은 답은 “하나님은 거기서 우리와 함께 고난을 당하셨다.”라는 해석입니다. 인류의 고통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유입니다. 거기서 이런 일들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답을 이끌어냅니다. 모든 추론과정을 완벽하게 동의할 수 없지만 그들은 깊이 고민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처참하게 피를 흘리고 조롱거리가 될 때 시인은 하나님이 어디 계셨냐고 묻고 싶겠지만 사실은 하나님은 거기서 언약백성들과 함께 고난과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자기 백성들 사이에 운명이 하나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질투
시인은 이런 역사를 해석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질투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 이민족에게 박해받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하지 못하시고 심지어 그들과 함께 고통을 당한다면 그분은 하나님이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실제라기보다 역사에 대한 하나의 해석입니다. 그 해석은 하나님이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질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질투는 신인동형론적인 해석입니다. 하나님이 마치 인간의 몸을 가진 사람인 것처럼 비유적으로 표현해서 우리의 삶과 신앙에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인동형론적 표현입니다. 마치 어른이 아이에게 말하기 위해 눈높이를 맞추는 것처럼 하나님이 자기를 낮추셔서 말씀하시는 ‘아코모다치오’입니다.
“하나님이 어느 때까지 영원히 노하시겠습니까? 당신의 질투를 불붙듯 하시겠습니까?” 선지자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랑하는 많은 것들 중 하나가 되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최고가 되길 원하지 않고 유일한 것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나머지는 그 사랑에서 비롯되어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종교를 사랑하고, 하나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 때문에 당신의 법을 사랑하는, 하나님 사랑에 의해 재편된 질서로 이루어진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바로 그 질서를 따라 살아야했는데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우상숭배는 그렇게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살지 않겠다는 이 사람들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이 질투가 바로 소망이 됩니다. 부부가 헤어질 때가 되면 질투를 못 느낍니다. 질투란 감정은 사랑이 남아 있을 때 생겨납니다. 내가 저 사람에게 사랑받겠다는 마음의 원함이 없다면, 질투의 감정은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저 사람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에 질투가 생겨납니다. 내가 저 사람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아무런 욕구가 없고 ‘도리어 저 사람에게 사랑을 받느니 차라리 모든 사람에게 외톨이가 편이 낫겠다.’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질투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질투를 통해 보여주시는 것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여전히 사랑받기를 원하시는 그분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받으셔서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런 사랑을 필요로 한다면 하나님이 하나님이실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이 그분이 우리를 지으신 뜻대로 살 수 있고 그 안에서 우리가 가장 행복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고 여기에서 벗어났을 때 질투를 발하시면서까지라도 다시금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결론과 적용
기도가 안 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입니다. 우리에게 말씀이 안 들어올 때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고통과 괴로움이 일어나 번민할 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잘 듣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도 악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선한 상황으로 여러분을 대해주신다면 그분이 어떻게 선한 하나님이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선과 여러분의 악이 충돌을 일으켜서 피 흘리기까지 마음에 고통을 느끼고, 외롭고 아프고 죽고 싶은 욕망마저 생기는 것이 하나님이 선하심의 증거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을 배양하는 삶을 살면서 행복할 수 없고, 만약 행복하다면 장차 그 행복이 자신을 찌르는 날카로운 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신 한, 그분 밖에서 행복해보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자신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따르는 사람만이 진정한 평안과 복락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의 긍휼을 베푸소서
“주를 알지 아니하는 민족들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나라들에게 주의 노를 쏟으소서
그들이 야곱을 삼키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함이니이다 우리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긍휼로 우리를 속히 영접하소서 우리가 매우 가련하게 되었나이다”(시 79:6-8)
본문해설
본문내용은 자신들에 대한 탄원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악을 행한 이방민족들에 대한 탄원입니다. 성경에 보면 주를 알지 못하는 민족들과 동의어로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나라들이라고 나옵니다. 민족은 혈연 개념이고 나라는 국가 개념입니다. 그래서 전자는 ‘움마’이고 후자는 ‘고임’인데, ‘나라’ 즉 ‘고임’은 ‘가바흐’(Hb;G;)에서 왔으며 ‘높다, 교만하다’라는 뜻입니다. 처음부터 국가의 탄생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뜻이 아니었습니다.
호세아서에 보면, “하나님이 진노함으로 왕을 주었고 분노함으로 왕을 폐하였느니라”는 왕국의 역설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이 나라를 원하였을 때, 그들의 열망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방나라를 바라보는 것에서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신정통치보다는 대리적 통치를 받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에서 왕을 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세우고 싶어 하셨던 인간 사회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교회와 같은 공동체를 세우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러했을, 당신이 직접 통치하시는 신정사회를 세우고 싶어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쏟음
여기서 ‘민족과 나라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 특히나 지금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훼파한 대적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노를 쏟아 부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노를 쏟아 붙는 것은 성경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입니다. 쏟아 붙는 것은 단번에 물 같은 것을 커다란 그릇에 확 부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용광로에 녹인 쇠를 한 번에 쏟아 붙는 것처럼 말입니다. 최근에 어느 주물 공장에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커다란 도가니에 펄펄 끓는 쇳물을 잔뜩 담아서 옮기는데, 기계가 망가져서 풀어지면서 어마어마한 쇳물이 일하던 근로자 위로 쏟아졌습니다. 당연히 시신도 수습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가리켜 성경에서 쏟아 붙는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의 마음속에 있는 대적들을 향한 분노와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보여줍니다.
7절에서 그들의 죄악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야곱을 삼키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북왕국 전체에 대한 애칭은 에브라임이고 유다 전체에 대한 애칭은 야곱이었습니다. 이것은 문맥에 따라 다르게 해석해야합니다. 왜 북왕국을 에브라임이라고 했습니까? 남북 왕국으로 갈라졌을 때, 가장 우세한 지파가 에브라임이었습니다. 야곱이라는 명칭을 남왕국이나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켜 사용한 이유는 야곱이란 인물이 하나님의 긍휼의 승리를 극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모가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요셉보다 야곱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순종하는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또 이삭은 온유하고 순종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신앙으로 모든 시련을 이기며 사는 섭리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야곱은 지극히 계산적이고 세속이었는데 하나님의 불붙는 열심이 그를 빚어 새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이라고 부를 때 하나님의 긍휼의 승리를 보여줍니다.
“야곱을 삼키고 하나님께 사랑받은 이스라엘을 삼키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였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처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처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가나안을 정복한 것도 하나님의 큰 축복이고 거처는 이스라엘의 지계표 안에서의 장소입니다. 거처는 광의로 하나님께서 주신 이스라엘의 땅이고 협의로 각 지파별로 씨족별로 가족별로 나누어준 땅인데, 그 지계표를 떠나지 않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중요한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거처를 황폐하게 하셨다는 것은 한편으로 신앙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다른 한편으로 악을 행한 원수들의 죄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긍휼을 구함
8절에서 하나님을 향해 긍휼을 구하는 탄원이 나옵니다. “우리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긍휼로 우리를 속히 영접하소서 우리가 매우 가련하게 되었나이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조상들이라는 단어가 ‘머리’로 나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우리의 머리의 죄악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님의 긍휼이 우리를 속히 만나게 해주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스라엘의 전체가 하나의 몸(body)을 이룹니다. 시간적으로 먼저 살다간 사람들은 언약의 대표라는 뜻이 아니라 시간적인 흐름 속에서 ‘머리’가 됩니다. 우리도 시간이 흐르면 점점 머리가 되고 새로운 후손이 태어나 자라납니다. 자신들이 심판을 당하는 이유는 조상들의 죄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이 시는 아삽이라는 사람이 지었다고 추정되는데, 아삽이라는 한 인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아삽의 가문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다윗이나 다른 사람들이 지은 시를 아삽의 가문에서 보관해 전수해왔는데 그 저자를 잘 몰라서 ‘아삽의 시’라고 명명했을 것이라는 학설이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경우가 ‘고라 자손의 시’입니다. 그 시들은 고라의 집안에서 전해 내려오는 시이고 저자는 따로 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물론 ‘아삽’이라는 한 사람의 이름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 추측입니다. 저의 판단으로는 이 시를 지었을 때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때였다고 여겨집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수시로 예루살렘에서 전해진 소식을 들었습니다. 20년 정도 지나면 한 세대씩 지나가고 60-70년 지나서 돌아왔으니, 아마도 그런 의미로 조상들이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하나님께 기억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합니다. 성경에는 ‘기억하다’라는 뜻의 ‘자카르’(rk'z:)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옵니다. 신명기에서는 여기에 부정어를 붙여서 ‘잊지 말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기억하다, 잊지 말라’는 말은 근본적으로 사람의 기억력에만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품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마음에 그것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사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으로 부른 것을 기억하라”고 할 때, ‘기억하다’는 기억 속에 저장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작용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조상들의 죄를 기억하지 말아달라”는 것은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이스라엘의 멸망과 예루살렘의 파괴, 그 모든 것들은 조상의 죄로 인해 하나님이 마음속에서 고통스러워하시고 아파하시고 분노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라는 것입니다.
대적들을 멸망시키는 것도 사실은 궁극적인 기도의 제목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며 범죄 할 때, “올라가라. 약속대로 너희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방 백성들이 쳐들어와 너희를 괴롭힌다고 탄원하느냐? 그러면 이방 백성들을 물리쳐 도망가게 하고 너희를 구해주겠다. 그러나 너희를 기억하지 않겠노라.”고 하신다면, 하나님이 용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복수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든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구약 최대의 약속인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말씀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이 말씀을 기반으로 요한복음 3장 16절이 성립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라는 것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당신의 긍휼들이 속히 우리를 만나게 해주십시오.”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문학적으로 겸손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것은 안 되니까 당신의 긍휼을 시켜서 속히 우리를 만나게 해달라고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긍휼’이 ‘헤세드’ 즉, ‘자비’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함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성품에 기초해서 우리를 만나주는 것이 바로 긍휼의 표현입니다. 이어서 시인이 마지막으로 호소하기를, “우리가 매우 가련하게 혹은 비참하게 되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비참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정말 불쌍한 사람은 돈이 없고 가난한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커다란 고통이고 죽음과 같습니다.
결론과 적용
어떤 삶의 형편에 놓여 있던지 간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 당신께 매어 달리는 사람에게 자비와 긍휼을 거두지 않는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 바로 이런 약속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에게 보증해주셨음을 믿으며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고난을 통해 마지막까지 자기의 인생이 의지하며 살아가야할 절대자가 주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며 하나님 절대의존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하나님 의지하며 살아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주의 이름의 영광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시 79:9)
본문해설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하게 된 것이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고백하고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그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9절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히브리어로 ‘쉠’()이라고 합니다. 이 이름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온 땅과 모든 만물위에 초월하셔서 하늘에 계시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에 하나님은 초월하시기 때문에 이 땅에 없으신 것이 아니라 이 땅에도 계십니다. 그분이 이 땅에 계신 증거가 당신의 이름을 두심으로써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심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보이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우리들이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태도는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한다는 말이나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는 말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산다는 말이나 동일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과 그 이름이 지시하는 실체 사이에 일치가 이루어지는데 반하여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피조물들이기 때문에 한계를 가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에게 이름이 있어도 그 이름을 지은 자가 인간이기 때문에 그 피조물과 이름 사이에 완전한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이름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가 항상 열국의 아비답게 산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이름이 주어져도 항상 사람이 그 이름에 온전히 합치하는 삶을 살거나 그러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봅시다.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지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전의 설교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그는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름이 ‘하나님을 이겼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야곱이 얍복 강가의 사건이 있은 이후로 항상 그렇게 참회하는 삶을 살아서 주님의 마음을 이긴 사람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대조적으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본체와 이름 사이에 추호도 간격이 없습니다. 혹시 그러한 것이 있다고 사람들에게 느껴지면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당신과 당신의 이름 사이에 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위에 뛰어나셔서 초월해 계시고 어떻게 보면 아무데도 계신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계시다, 계시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그 기준이 무엇인지에 달려있습니다. 흙이나 물이나 바람이나 공기나 인간의 영혼처럼 하나님이 계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어디에도 안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데나 안 계신 곳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이 세상에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
“그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라고 하였는데 ‘행사’라는 것은 실행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에서 영광스럽게 실행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실행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 줄을 알아서 하나님의 이름을 향하여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그 이름 때문에 그 이름을 향하여 그들의 모든 신념과 사상과 더불어 그들의 실제적인 윤리가 재편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영광스러운 행사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시인이 지금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를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멸망하고 나라가 산산이 짓밟힌 때에 무엇을 느끼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나라가 망해서 비참하게 되었고 먹을 것도 없고 길거리를 유리방황하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이것은 불편하고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를 빨리 원상태로 회복시켜 주셔서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라는 탄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선 순위의 뒤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시인이 가슴 아파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불순종해서 노략을 당함으로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키실 수 없는 허무한 신이다.” 혹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조롱을 받는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저들의 이야기는 “예전에 계셨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라는 뜻이 아니라 “혹시 원래 없는 하나님을 그렇게 섬긴 것이 아니냐?”라는 야유였습니다.
이스라엘 뿐 아니라 온 이방 나라 가운데 존귀하게 여김을 받아야 할 주님의 이름이 짓밟히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참한 형편이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시인은 짓밟히는 하나님의 이름을 먼저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다시 영광스럽게 행사되도록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높아질 수도 없고 낮아질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이 땅에서 높아질 수도 있고 낮아질 수도 있고, 존귀하게 될 수도 있고 발아래 짓밟힐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여김을 받느냐는 것은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는 백성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사느냐, 그들이 어떻게 그분을 믿느냐에 따라서 그 모든 것들이 달려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야 소명을 가진 백성들이었고, 바로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이 유리방황하던 아람족속인 이스라엘을 가나안땅에 들여보냅니다. 큰 민족을 이뤄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하셨습니다.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그런데 오늘날 역사 속에서 정반대의 상황이 대두됩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세 가지를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명령형의 동사로 나타나고 있는데 “도우소서. 건지소서. 사하소서.”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도우심, 건지심, 사하심,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주님의 이름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가 무엇인지를 다시 구체적으로 말하는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라고 말합니다. 증거가 무엇입니까?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법정에서 사실에 대해 증언하고 입증하는 것입니다. 발생하지 않은 일에 대하여 증거함으로써 사실이 아닌 것을 믿게 하는 것은 십계명에서도 금지된 아주 커다란 죄악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거짓말을 밥 먹듯 해서 오죽하면 눈빛 하나 바뀌지 않고 거짓말 하는 시대가 되었는데, 이것은 하나님 앞에 매우 커다란 죄이고 다른 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향한 중대한 도전입니다. 그래서 증거는 사실에 입각해서 사실을 규명하기위해 책임 있는 증언이어야 합니다.
이 증언은 누구에게 이루어진 것입니까? 법정에서 증언은 재판장에서 들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재판장으로 하여금 무엇인가 태도를 바꾸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증언이고 증거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의 이름의 행사를 주님의 이름의 증거라고 보았을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든지, 그 모든 삶과 신앙의 고백은 하나님의 법정 앞에서 모든 피고인석의 열방과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에 관한 증언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판단하신다는 사실을 열방들이 인식하여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태도를 고치게 하는 것이 이 증거의 목적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는 자들이 되기 위하여, 증인들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셨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위대한 증거입니다.
그러한 증인이 되도록 이스라엘을 부르신 것입니다. 증인은 사실에 입각하여 증거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을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거짓말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만인 앞에 참된 것을 증거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심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고 타락하해서 그분의 징계를 받은 작금의 상황에서는 도저히 그 이름을 증거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증거를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무슨 증거입니까? ‘아, 이렇게 살면 안 되는구나. 우리의 조상의 많은 죄와 우리의 악이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왔구나.’라는 정반대의 증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시인이 뼈저리게 공동체의 죄악을 회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인은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면서 “다시 하나님의 이름이 증거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해 주셔야 합니다.”라고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우소서, 건지소서, 사하소서
간청의 내용은 제일 먼저 현상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본질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문학적으로 말하면 점층적으로 점점 더 깊이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도와달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군대용어로 많이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응원군을 보내시며”라는 뜻입니다. 전쟁에서 아군과 적군이 팽팽하다가 적군이 확 강해지면서 전세가 기울게 됩니다. 그래서 전투현장에 위기가 오면, 바로 그 때 지평선 너머로 우레와 같은 말발굽소리가 들리고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면서 지원군들이 달려옵니다. 다시금 군인들은 사기가 충천하기 시작하고 적군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떨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도움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역사의 현실 속에서 패배하고 있으니 도와달라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로, “건져달라”는 이야기는 난관이나 어려움과 관련된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구원해 달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민족의 말발굽아래 짓밟혀서 예루살렘까지 훼파되었고 성전이 다 부서졌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건져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본질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 모든 파괴와 이민족의 약탈, 이스라엘을 향한 이방민족의 승리가 결국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가장 본질적인 문제인 우리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의 죄를 사하소서”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죄를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즉, 죄의 소유자가 ‘우리’라는 공동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백성의 일체 의식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모두 한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심지어 조상들이 죄를 범하고 죽어서 지금 생존하지 않더라도, 조상들의 죄조차도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짊어질 죄라고 본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죄를 사해 달라”는 공동체의 기도가 나옵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죄도 다루시지만 공동체 전체의 죄를 다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몸을 이루는 한 지체로서의 짓는 죄는 결코 남의 죄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죄를 자신의 죄로 여기며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인은 간절히 자신들을 도우시고 건지시고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시켜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이러한 기도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영적인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의 나라의 백성들을 위하여, 주님의 이름이 온 땅과 만물 위에 높이 여김을 받도록 하나님 앞에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여주소서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주의 종들의 피 흘림 당한 보수를 우리 목전에 열방 중에 알리소서”(시 79:10)
본문해설
본문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탄원을 하고 있습니다. 탄원의 내용은 바로 앞에서 올린 기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도우시고 건지시며 사해 달라”는 기도의 구체적인 실행입니다. 시편을 읽으면서 우리들이 마음에 걸리는 내용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악인을 징벌해 달라는 저주의 탄원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시편에 나오는 이러한 저주의 기도들을 영적으로 미성숙에서 비롯되는, 말하자면 민족주의의 산물이고 봅니다. 원수들에 대해서 경렬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하나님께 징벌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헤세드의 정신에도 맞지 않고, 물론 복음의 정신에도 맞지 않는 시인들의 영적인 미성숙의 소치라고 해석합니다. 시편의 저주들을 해석할 때 저주하는 태도는 잘못되었다고 해석하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들이 시편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생겨납니다.
시편의 저주들에 대한 해석
시편의 저주들을 해석하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다면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합니다. 첫째는, 이 저주 기도는 복음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은 구약시대 때의 기도라는 것을 고려하면 우리의 의문 중 상당 부분이 해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복음을 펼치실 때 인간이 타락하자마자 그 복음의 씨앗을 심으셨지만, 그것이 뿌리가 내리고 싹이 나고 나무로 자라서 꽃이 피우고 열매를 맺히는 전개과정은 역사 속에서 실현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뿌려진 복음의 씨앗의 만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놀라운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성령이 강림하심으로써 성취됩니다. 시인들이 활동하던 구약시대에도 분명히 복음이 있었습니다. 아가페의 사랑이 헤세드를 통해서 가르쳐 졌을 때 모든 인간에 대한 인류애로서 가르쳐진 것이 아니라 언약 공동체에로서의 헤세드로 가르쳐진 것입니다. 이것들이 확산되어 가면서 교회에서 세상으로 까리따스의 확장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한 복음의 전개, 성취, 구원역사의 과정을 생각하면 이러한 기도도 가능하겠다는 일종의 해결책을 얻게 됩니다.
두 번째, 전적으로 이 사람들의 영적인 미성숙으로 말미암은 분노로 보기보다는, 복음의 계시의 역사, 말하자면 과정의 맥락에서 본다면 저주 기도에 대한 의문점도 어느 정도 해결됩니다. 시인의 저주 기도를 단순히 자신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에 대한 보복의 개념으로만 보는 것은 곤란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의문이 생깁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같은 경우에는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침략하는 바벨론의 모든 공격과 모의에 대하여 순종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러면 이것들은 어떻게 설명해야겠습니까? 예레미야에게는 애국심이 현저히 부족하다고 보아야겠습니까? 아니면 영적인 미성숙을 거론하기 전에 민족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것이라 해석해야겠습니까? 둘 다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그렇게 단순한 관점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경건한 시인들로 하여금 커다란 하나님의 진노와 보복을 간구하게 만들었던 근본적인 동인에 대해 숙고해야 합니다. 그들의 근본적인 동인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입니다. 즉,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이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드러나야 하는데, 이방나라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짓밟고 모욕하고 박해함으로써 그분의 이름이 모욕을 받는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양면성
하나님의 심판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국면은 이스라엘 내부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었고 악을 행했고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이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의 정당성을 깊이 인식하고 심판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국면이 있습니다. 내부적인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역사의 해석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이 바깥에서 볼 때에는 그러한 섬세한 도덕적인 경륜이 보일리가 만무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지켜주신다고 믿더니, 우리가 공격하니까 저렇게 파멸을 당하는구나.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질문합니다. 결국 대답은 “하나님은 없구나. 하나님은 없다.” 그것도 아니면 최소한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하나님이라는 신은 우리의 신들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심지어는 신의 도움 없이 우리가 공격해도 파멸될 수밖에 없으니 우리의 신들이 그들의 신을 꺾은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인식들이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도덕적이고 위대하시고 능력이 있으시고 모든 만물위에 뛰어나신 여호와이시구나”라는 사실을 열방 중에 알려야할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교적 소명과는 반대됩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나 시인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중대한 모독이라고 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시인도 똑같이 양면성을 가지고 이 심판의 문제에 접근합니다. 한 국면은 내부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면 이러한 진노를 퍼붓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조상부터 줄곧 죄를 지어왔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고 하나님은 정당하십니다. 이것에 대해 전적으로 승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하나를 붙듭니다.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구원하시고 용서하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아닙니까? 이것은 자신들의 정당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성품에 호소하여 도와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다른 국면은 이스라엘이 잘못해서 그들을 징계하시고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는 정당하지만, 하나님이 직접 하늘에서 불을 내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키신다든지,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죽여 버린다든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악인들을 사용하셔서 심판의 일들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손에 이스라엘을 붙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나라들이 심판의 도구가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방 나라들을 도구로 사용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이 악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들이 짓밟히고 고통을 받게 만들 때, 하나님의 도덕적인 판단에 비추어서 그들은 유죄입니다.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두 가지 점에서 정당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여전히 이스라엘을 지키고 살아 계시다는 선교적 측면에서 정당한 것이고, 비록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범하여 징계를 받아 마땅하지만 악한 이방 나라가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짓밟을 권리가 없다는 점에서는 그들을 보복하시는 것은 정당합니다. 이것은 시인의 논리입니다.
이러한 저주에 대한 기도는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경건한 시인들의 갈망을 보여줍니다. 김희보 박사님 같은 경우에 구약시대에 나타나는 시편의 저주 기도가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갈망을 바라본 것이라고 해석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악인들을 향한 진노를 하나님 앞에서 구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다면적으로 놓고 보면 이러한 기도들이 단순히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통제되지 않은 분노 또는 영적 미성숙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현실을 직고하고 있습니다. 이방 나라들이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저들이 의기양양하게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자기들끼리 여호와는 없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들이 어떻게 하나님이 없다고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간단합니다. 이스라엘을 짓밟을 때, 그들이 짓밟혔다는 것을 보고 하나님은 이들 가운데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시인은 마음 깊이 아파하고 신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신앙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지 생각해 봅시다. “이방 나라들이 어찌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말하나이까?”라고 시인이 말하였는데 이렇게 이방에서 들리는 소문을 들으면서 시인은 마음속에 피가 흘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할 때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그분의 이름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이름 신앙’이라고 명명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은 완전히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 이름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태도와 완전히 일치합니다. 하나님은 높아지실 수도 없고 낮아지실 수도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떠한 태도로 살아가느냐에 대해서 높아질 수도 있고 낮아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시인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간절한 사랑을 품었던 사람입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정말 어디에 계신지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다고 비웃는 것입니다. 저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없으십니까? 저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에 영향을 줍니까? 도무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하나님이 백번 없다고 한들, 하나님이 계신 것이 틀림이 없는데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시인이 마음이 왜 상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염려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염려입니다.
시인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자기들이 어디 있느냐고 백 번 묻는다고 하나님이 어디를 가시는가? 자기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짓밟고 살아도 하나님은 천상에 언제나 홀로 계셔서 어떠한 피조물들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나는 이 사실로 충분히 만족하고 이 땅에서 주님의 이름이 짓밟히든지 말든지 나는 상관이 없다.” 이것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땅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이름의 모습을 보면서 찬양합니다.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
위대하신 하늘의 하나님을 현실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우리의 소명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분의 이름이 만물 위에 뛰어나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사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소명입니다.
시인이 이렇게 황폐한 이스라엘을 목도하는데, 이방 나라들은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이렇게 짓밟히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렇게 멸시를 받아도 됩니까? 이것이 나의 고통입니다.”라는 질문과 갈망이 현실적으로 집을 잃고 가족들이 흩어지고 먹을 것이 없고 집이 부서져 가산을 박탈당한 현실보다도 더 깊이 시인의 가슴을 찔렀습니다. 교회가 품어야 할 마음이 바로 이러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이 바로 예수님 안에 있었던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설교하고 가르치고 병자들을 고치고 불쌍한 자들을 먹이고 섬기셨던 모든 아름다운 섬김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들 속에 짓밟히지 않고 존귀히 여김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하는 주기도문을 주님이 가르쳐 주셨을 때,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는 기도가 양식을 위한 기도와 모든 인간의 안녕을 구하는 기도보다 앞섰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복수해 달라는 기도
후반 절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달라는 간구가 나옵니다. “주의 종들이 피 흘림에 대한 복수를 우리 목전에서 이방나라에서 보여주소서” 이것은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륙하고, 특히 하나님을 섬기던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을 도륙한 피 흘림에 대한 보복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들을 죽인 이방나라에게 복수해 주십시오.” 그러면 이들은 모두 억울하게 죽었습니까? 그러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피 흘리고 죽은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에게는 그러한 피 흘림이 정당하다고 할지라도 그 도구로 사용되었던 사람들은 주님의 손의 강압 때문에 강제적으로 그리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스라엘에서 주님의 종들을 잔혹하게 학살한 것은 그들이 좋아서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들의 죄에 대해 징벌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덕적인 모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해 복수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복수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복수입니다. 열방들이 하나님을 얕잡아 보지 못하도록 보수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실현이었습니다. 이러한 복수를 우리 목전에서 보여 달라는 것은 우리가 그 광경을 보면서 “야, 정말 고소하다.” 하는 통쾌함을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통하여 하나님이 자신들을 아주 버렸다고 믿으며 흔들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심판의 광경을 보게 함으로써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심판을 광경을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죄를 심판하시는 일이 언약 백성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방 백성들에게도 공정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다시금 그분을 신뢰하게 만들기 위함이었었습니다. “이방 나라에게도 보여 주옵소서.” 결국 모든 나라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두려움을 알아 하나님을 경외하게 만들기 위한 심판이었습니다.
당신의 백성을 보존하소서
“갇힌 자의 탄식으로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시 79:11)
본문해설
10절에서는 이방나라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복수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복수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11절에서는 시인이 눈길을 돌려서 원수들이 아니라 고난 받는 자기의 백성들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수들에게 보복하시고 이스라엘의 남은 백성들은 보존해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나라가 망할 때 수많은 핍박이 뒤따랐을 것이고, 나라가 망하고 나면 끝까지 저항했던 사람들은 모두 체포됩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자신의 왕국에 반항했던 사람들을 정죄하고 감옥에 가두는 것은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여기에서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나라가 완전히 망하기 전에 이미 조정에서는 원수들과 내통하며 나라를 정복하도록 돕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망국의 징조였습니다. 우리나라도 일본이 부지불식간에 쳐들어와서 그들에게 정복당하고 합병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서서히 접근하였고 우리나라가 일본과 겨루어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항거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 혹은 안전을 위해 일본에 협력하는 친일파들이 되었습니다. 유다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가 망하기 전에 적국에 협력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나라는 형세가 기울대로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결국 나라가 망하고 나자 본격적으로 바벨론에 합병되고 정복되기를 저항했던 많은 자들은 체포되었고, 더 많은 사람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는 하나님
이러한 사람들이 갇힌 자의 탄식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갇힌 자’라는 의미는 한편으로는 나라가 망해서 자유를 잃어버리고 갇힌 자들이고, 나아가 나라를 잃고 자유를 상실하게 된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기는 말이기도 합니다. “갇힌 자의 탄식을 주 앞에 이르게 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실 모순된 탄식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사람들이 탄식하며 그분 앞에 울부짖어도 그 부르짖음이 하나님 앞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자유로운 사람들을 갇히게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시인이 이미 앞에서 고백한 바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갇힌 자의 탄식, 자기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되어도 마땅한 사람들이 체포되고 구금되었다는 탄식을 주님 앞에 이르게 해달라는 간구는 무엇을 기초로 한 호소입니까? 이것은 너무 분명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갇힌 자 된 것이 부당하다거나 억울하다거나, 또는 주님 앞에 기도가 상달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지 않다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이렇게 갇혀서 탄식하고 울부짖어도 듣지 않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비추어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에 비추어서 이러한 자들도 용납해 주셔야 한다는 믿음에 근거한 탄식과 몸부림입니다.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여기에서 죽이기로 정해진 자는 하나님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람에 의해 죽이기로 정해진 자일 수도 있습니다. 바벨론의 입장에서 보면 체포된 자들 중에는 극렬분자도 있을 것입니다. 내버려 두면 바벨론을 위태롭게 하고 이스라엘의 반란을 획책할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결국 바벨론이 꿈꾸는 것은 괴뢰정부를 세우는 것입니다. 괴뢰라는 것은 꼭두각시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왕도 그대로 있고 대신도 그대로 있지만 바벨론이 명령만 내리면 하나에 수족처럼 움직이게 될 나라를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었습니다. 승리국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남의 나라를 이민족이 가서 통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왕도 놔두고 모든 것을 내버려둔 채, 뒤에서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손으로 괴뢰정부를 주무르는 것입니다. 이것에 저항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선고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 저항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득죄하였어도 하나님은 종종 당신이 심판하여 죽이기로 정하신 때조차 용서를 빌고 은혜를 구하면, 당신의 자비로우신 성품 때문에 뜻을 바꾸기도 하시는 분으로 성경에 묘사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고 범죄 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이 백성을 모두 쓸어버리고 너를 통하여 새 민족을 만들리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때 모세가 생명책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나님께 용서를 빕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용서해 주십니다. 시인은 이것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이렇게 죽이기로 정하신 자도 살리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아닙니까? 인간의 자비는 자비심이 넘쳐도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사실상 그 자비를 실행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고 가슴 아파하는 것까지는 해도 실제로 자비를 실행할 능력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에 하시려고 마음만 먹으면 바로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소망이 됩니다. 그래서 주의 능력을 따라서 보존해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서 보존해 주십시오.”
하나님에 성품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
제가 처음 은혜를 받았을 때는 교회를 개척하기 전이었습니다. 대략 서른다섯, 서른여섯 살 때쯤 깊이 하나님을 만난 후, 기도도 많이 하고 말씀을 보는 눈도 열려서 열렬하게 설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은 부패한 세상, 부패한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도 많이 하고 눈물도 많이 흘렸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물론 많은 열매도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과거를 돌아보면 결국 한 사람이 주님을 만나서 일평생을 사는 것은 큰 산에 올라간다기보다는 큰 산을 돌면서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백두산에 올라가려면 중국 쪽으로 올라가야합니다. 중국으로 올라가는 루트가 몇 개 있는데 장백으로 해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산에 다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천지가 정말 아름답습니다. 너무 아름다워서 ‘이게 환상이지.’ 하는 느낌이 듭니다. 경치를 보면서도 ‘이게 합성 사진이지.’ 할 정도로 기막히게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북한쪽으로 백두산을 올라가는 것은 처녀의 앞모습이고, 중국 쪽으로 올라가는 것은 뒤통수를 밟고 올라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전면에서 보는 광경의 수려함과 신비함은 말로 다 수 없다고 합니다. 나중에 꼭 보고 싶습니다. 신앙생활은 마치 그러한 백두산 같은 산을 돌면서 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서도 세월과 나이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전부인 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에 대해서 참 많이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한 2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분과 함께 생활하고 많은 것들을 겪고 나서, 어떤 면에서는 내가 세월이 흐르면서 변질되고 마음이 부패해져서 그러한 부분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인생의 산을 돌면서 하나님의 성품이 내가 본 것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참 다양한 성품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은 분노하고 진노하시고 죄악을 차마 보지 못해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어 죽이기로 정해놓은 자도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보존하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모든 면에 있어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사는 일에 균형을 찾게 되었습니다. 교회도 역시 이렇게 균형을 잡고 하나님을 알아가야 한다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실 뿐 아니라 자비를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신 분이기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어떤 권리나 특권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일삼는 모든 행동과 자세들을 보면 하나님 앞에 이러한 심판을 받는 것이 너무나 마땅하지만,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성품과 은혜로 말미암은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탄식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는 말씀을 보면서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공평하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당신의 그 성품 하나로 우리를 통치하신다면 시인이 여러 곳에서 말한 바와 같이 “누가 주 앞에 서리이까” 여기에서 ‘선다’는 히브리어 단어가 ‘아마드’(dm'[;)인데 선다는 뜻도 되지만 견딘다는 뜻도 됩니다. 누가 주님 앞에서 견딜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찬란한 정의의 빛, 이에 합당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탁월한 공의의 빛 앞에서 누가 감히 견딜 수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비천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찬란한 성품의 빛을 감히 견딜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에 호소해서 하나님의 두렵고 엄위하신 임재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이렇게 당신의 자비에 호소하며 은혜를 구할 때,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훼방한 그 훼방을 저희 품에 칠배나 갚으소서
그러하면 주의 백성 곧 주의 기르시는 양 된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로 전하리이다”(시 79:12-13)
이웃들이 주를 훼방함
오늘 본문은 시편 79편의 마무리입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시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민족들로 인해 고통을 받을 때 기록한 탄원시입니다. 12절에서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훼방한 그 훼방을 저희 품에 칠배나 갚으소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복을 위한 기도라고 흔히 말하는데, 이것은 사랑 없음, 영적인 미성숙에서 오는 단순한 미움의 보복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시인의 마음속에 있었던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갈망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 때는 하나님의 아가페적인 사랑이 충분히 계시되지 않은 때이고, 하나님의 경륜을 해석함에 있어서 유대주의의 선민의식들이 깊이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런 기도가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간절한 갈망과 몸부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면서 이와 같은 구절을 해석해야 합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들이 하나님께 탄원할 때, “자신의 이웃이 주를 비방한 그 비방”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이웃’은 이방나라들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의 이웃이라기보다는 10절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하며 주의 종들을 피 흘려 죽게 하는 만행들을 저지르는 이방나라를 ‘이웃’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친근한 사랑에서 비롯된 표현이기보다는 히브리어에서 국경을 두고 가까이 있는 나라들을 거리적인 의미로 이웃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보복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이번에는 비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함
12절과 13절을 함께 묶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비방과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님의 목장의 양이니 주님의 명예를 위하여 살겠습니다.”라는 간구가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이방나라 백성들은 주님을 모욕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예를 전하며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나쁜 나라 백성들이 하나님을 비방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무슨 손해가 나겠습니까? 온 땅과 만물 위에 계셔 홀로 높으신 하나님이 개 같은 인간들이 짖어 하나님을 욕한다고 한들 털끝만큼이라도 영향을 미칠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그런 피조물들로 인해서 하나님이 오히려 영광을 받으신다면 그분을 어찌 온 땅과 만물위에 초월하신 광대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들이 주를 비방한 비방이 하나님에게는 추호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문제는 하나님의 이름이 많이 더럽혀졌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이름,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평판을 전해 듣는 사람들에게는 영향을 미칠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면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 때문에 존귀히 여김을 받고 그렇지 못하면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업신여김을 받게 됩니다. 여기에서 바로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시인은 지금 이웃나라가 자신에게 입힌 손해에 대해서 가슴아파하고 낙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인이 분노는 개 같은 이웃나라 백성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욕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이름이 업신여김을 받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 대한 중대한 명예훼손이었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미천한 사람들에게 주님을 구체적으로 비방함으로써, 무지한 자들이 하나님을 향해 잘못된 생각을 갖게 한 죄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의 이름의 명예를 현저하게 훼손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비방을 그들의 품에 칠 배나 갚아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칠 배는 최고의 보복을 가리키는 것이고 무한한 복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것을 그들의 품에 갚아달라는 기도는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고 모욕했기 때문에 받을 수치와 불명예가 그들의 마음에 사무치도록 해달라는 간구요 간절한 기도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결국 이방 백성들에 대한 미움으로부터 나왔다기보다는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에 대한 사모함,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함을 받아야 한다는 절절한 열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마음으로 간구하는 시인의 기도를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그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고 영광을 받기를 바라고 그 반대가 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명예에 대한 갈망
시인은 하나님의 명예를 위한 간절한 소망을 품은 사람이었습니다. 시인과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의 명예를 위한 불붙듯 한 간절한 소망을 가슴에 품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기도문에서 맨 처음 가르쳤던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라는 첫 번째 간구입니다. 나머지 두 번째, 세 번째 간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는지를 보여준 것이고, “그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정 반대의 상황이 시인의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훼방하며 그분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는 이방백성들의 모든 행위를 따라서 칠 배나 갚아주어서 그들의 마음에 고통이 사무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소원, 즉 주님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는 열렬한 갈망을 발견합니다.
한 사람이 자기 바깥에 있는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기를 바라는 간절한 갈망은 자기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에 비례합니다. 자기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한 간절한 마음이 있을 때 외적으로 자기가 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기를 바라는 갈망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짐에 대한 진정한 갈망과 그렇게 살아가는 가운데 마주치는 시련이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는 것은 그냥 사무적적인 일이지, 진정한 갈망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대한 감사
시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이요 주님의 목장의 양”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두 가지인데, 주님께 대한 감사와 주님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먼저 주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방나라의 백성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하나님이 어디에 있냐고 물을 정도로 비참한 침략을 당했는데도 주님께 감사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전쟁으로 깊은 시련과 고난을 당했다 할지라도 자신들을 억압하는 이방백성들과 시인이 속한 이스라엘 나라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외인이요 자신들은 주님의 백성이며 주님의 목장의 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침략해서 억압하고 있는 강한 이방 백성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특권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백성이요 주님의 목장의 양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목장의 양’이라고 말한 이유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장소적으로 한군데에 모으셨다는 것, 신약에서 제시되고 있는 영적인 나라로서의 현실적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과는 다른 하나님의 나라의 영토개념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목장에는 하나님이 울타리가 되어서 이들을 보호하고 계시다는 개념이 담겨져 있습니다. 들판에 흩어진 양떼들은 맹수들이 공격할 수 있지만, 목장에 있는 양들은 공격할 수 없도록 보호받는다는 개념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고 하나님의 돌봄과 보호 속에 있는 것은 자신들보다 힘센 이방나라 백성들이 누리지 못하는 영적인 특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이렇게 보호하십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한 곳에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는 것, 영적으로 함께 묶여서 하나의 지체를 이루며 각자마다 임재하시는 성령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 이 모든 모습들이 바로 주의 목장의 양이라는 구약의 메시지들을 신약시대에 성취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랑은 우리와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께 있고, 우리는 영원히 주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이러한 감사는 하나님의 백성의 가장 중요한 표입니다. 종종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못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홀대하셨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각자 욕심에 이끌려 분에 넘치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데서 비롯됩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은혜로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고, 심지어는 우리의 목숨까지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고유하게 우리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죄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리 극심한 형편에 놓인다 할지라도 결국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고, 주님의 이름에 명예를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선한 것은 주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모든 나쁜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며, 선한 것이 나쁘게 된 것도 하나님 탓이 아니라 그것을 오용한 우리의 탓입니다. 편견을 깨고 공정한 시각으로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눈물 없이는 살 수 없을 정도로 은혜를 많이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생명을 포함한 모든 좋은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으니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감사의 마음이 깊을 때 그것은 곧 사랑의 마음이고,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 깊을 때 그것은 곧 주님을 향한 절대의존의 마음이며, 이렇게 사랑과 감사와 의존의 마음이 깊을 때 주님의 명령에 무제한의 순종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영예를 대대에 전함
두 번째는 주님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처럼 선하시고 자비하신 분으로서 그 선하심과 자비하심이 영원하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여 그들도 하나님을 알고 그의 이름을 높이는데 이바지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주의 백성의 의무이자 본분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은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들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것이 아니며 이 세상에 두고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영원히 계속 될 것이니 하늘에서만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계속 될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알고 하나님의 명예를 온 세상에 전하여 그분의 이름이 올바로 대접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만을 위한 길이 아니라 이 땅에 있는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기 위한 길입니다.
더 나아가 시인은 “대대에 전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명예와 그분의 영광이 자기들의 시대에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후손들의 후손, 그 후손들의 후손이라고 할지라도 조상들에게 행하신 일을 알지 못한 세대가 하나님 없이 교만하게 행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표현한 구절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세상 사람들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든지 몸부림치며 사는 일생을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조상들이 남겨준 지식 위에 보태어 더 풍성한 지식을 후손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어야합니다. 단지 글과 책으로 표현된 사상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내면의 세계의 품질까지 우리의 삶의 모본을 통해 후손들이 보고 경험하고 느낄 수 있어야 그것이 대를 물려서 전해질 수 있습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는 종종 한세대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었지만 자식들에게는 전혀 그 신앙이 전파되지 않는 가정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신앙의 실패입니다.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아직 살아있고 자녀들이 있기 때문에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에게 몇 명의 자식이 있다고 합시다. 여러분은 그냥저냥 신앙생활을 하다가 마지막에 주님을 고백하고 죽었는데 자녀들에게는 그 신앙을 전수하지 못하여 하나는 불교신자가 되고 하나는 무신론자가 되었다고 합시다.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일들은 다반사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사람으로서 주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특권과 커다란 은혜이지만, 그와 동시에 주님의 명예를 대대에 전하여야 할 중요한 책임을 우리에게 부과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녀를 위하여 많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물려줄 만한 신앙을 가지며 사는 것은 너무 중차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가족적으로도 적용되어야 하고 교회적으로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시대에 자라나는 불신자들을 모두 이 땅의 자녀로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예가 우리세대보다 다음세대에 훨씬 아름답게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품으며 눈을 감아야 합니다.
시편79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