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7
목 차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활(시 7:1-5) 81
세 가지 탄원(시 7:6-10) 85
심판하시는 하나님(시 7:11-17) 91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활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건져낼 자 없으면 저희가 사자 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것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 무고히 빼앗았거든
원수로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고
내 영광을 진토에 떨어뜨리게 하소서(셀라)”(시 7:1-5)
들어가는 말
이것도 고통 속에서 시인이 탄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얼마나 다급하고 어려웠는지 시인은 하나님께 자기를 구해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평범한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신자가 이 세상에서 환난을 만나거나 고통을 당할 때 누구에게로 피해야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우리의 마음과 뜻을 다 들이는 그런 종류의 신앙생활이어야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집에 우환이 계속 닥치고 질병이 걸리게 되면 무당을 찾아갑니다. 무당은 “괜찮다, 우리 신이 보호해 줄 것이다, 조금만 참으면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지 않고 대부분 굿을 하라고 합니다. 점을 보는 것은 푼돈이면 되지만 굿을 하면 판이 커집니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재산의 정도에 따라서 얼마짜리 굿을 하라고 합니다. 굿이 시작하기 전에도, 굿이 마친 후에도 우리는 그 무당이 섬기는 신이 누구인지도 잘 모르고 관심도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당한 우환과 어려움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무당에 의해 드려지는 굿 속에서 무당이 어떤 신과 교통을 하든 우리는 사실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우환이 물러가고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신과의 인격적인 관계 같은 것은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도 자칫 잘못하면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을 많이 당한 것을 자랑하고 간증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물론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으니 그것은 귀한 체험이고 또 훌륭한 체험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이 계속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좋은 신앙생활이겠느냐는 것입니다. 환난이 닥쳐서 하나님을 구하다가, 환란이 끝나면 다시 미끄러져서 평안한 가운데 하나님을 찾지 않고, 또 다시 치열한 환난이 닥쳐서 하나님께로 되돌아오게 되는 사이클이 과연 좋은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시인은 큰 환난을 만나고 원수로부터 고통을 받을 때에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시련을 만남으로 새롭게 수립되는 관계라기보다는 하나님과 평소에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다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환난과 시련이 닥쳤다고 하나님께 한 번 집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때에는 더더욱 하나님 바라보아야 하겠지만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시인처럼 환난을 당하고 고난을 만나도 하나님을 더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특성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모든 구간 속에서 항상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드리는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결백을 입증하는 시인
2절에서 7절까지 시인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입증하는 방식이 부정적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원수들이 자신을 공격할 때에 이렇게 해주소서” 이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첫째는 신자는 시련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일 훌륭한 신앙은 아무런 환난과 시련이 없어도 그 속에서 진리를 바라보고, 그 진리 때문에 행복해 하고, 그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평안하고 어려움이 없으면 마음이 뒤로 물러가기가 쉽고 그렇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둔해지고 우리의 삶이 어두워집니다. 이렇게 마음이 둔해지고 어두워지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시시때때로 우리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권하시고 양심을 일깨우십니다. 시인이 지금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인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돌아보도록 시련 가운데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는 법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물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고 그 분의 뜻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계획과 뜻 가운데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환난과 시련을 만나게 되면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과 동물이 다른 것은 고통을 받을 때 그 이유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런 고난이 왜 닥쳤을까? 그리고 이런 일이 내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를 깊이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째는, 환난을 만났을 때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아온 사람들은 더 많이 하나님을 의지할 용기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시인은 “만약에 내가 이렇게 잘못 했다면 원수가 자신을 공격할 때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환난을 당하게 내버려 두시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뻐기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환난을 당하기 전에도 얼마나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또 찾으며 많은 세월들을 보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일매일 부르짖고 간구하고 매달리는 것을 여기에서 보여줍니다.
결론과 적용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떠해야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구약에서, 특히 사사시대의 역사를 보면 환난을 당해서 멸망을 당할 위기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대부분의 고난이 죄로 인한 것이었기 때문에 용서해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용서해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타락하고 고난이 오고 또 부르짖습니다. 이 사이클이 계속 반복되는데 이것이 이스라엘의 가장 어두운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생각이 없이 신앙생활하면 안 된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사이클 속에서 신앙생활 할 때에는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았을 때 뒤로 물러가고 미끄러지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인간 속에 죄에 대한 욕망은 상대적으로 커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이 정말 좋은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삶의 환경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도 매일 나를 찌르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를 돌아보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등졌던 삶을 돌이켜 하나님을 향하고 방향을 잃고 가던 우리의 삶이 다시 하나님을 향하여 방향을 잡게 되고 자기 깨어짐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는 변화를 계속 겪으면서 더 가까이 다가가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세 가지 탄원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령하셨나이다 민족들의 모임이 주를 두르게 하시고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시 7:6-10)
여호와여 깨소서
이 시는 악인에게 고통을 받고 있는 가운데 탄원하는 시입니다.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세 개의 동사로 압축이 되는데 ‘깨소서, 돌아오소서, 심판하소서’ 이 세 가지 탄원형 동사를 중심으로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깨소서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무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마치 주무시고 계시는 것처럼 깨우는 탄원이 여러 곳에 등장합니다. 이것은 인간 편에서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인간이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필요한 도움이 있는데 그런 일들을 하나님께서 해주시지 않을 때 마치 하나님이 주무시는 것처럼 인간 편에서 깨우는 듯이 기도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에 대해서 묘사하는 것을 하나님께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이 성경에 많이 나오는데 하나의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이 시인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는데, 그래서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간절히 탄원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왜 그런지 역사해주시지 않은 것 같은 현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시인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시인을 도와주시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을 것이고, 또 하나는 시인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기는 하지만 시인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섭리 가운데 시인을 고통 중에 내버려 두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이든지간에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하면서 ‘하나님이여 깨어나소서’하면서 탄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도가 어떻게 보면 하나님 앞에 굉장히 무례한 기도일 수가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그런 기도도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집중되어 있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사느냐, 올바르게 살지 않느냐도 하나님보시기에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집중하는 삶을 사느냐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전적으로 집중된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렇게 집중하는 가운데서 회개도 나오게 되고 간절한 탄원도 나오게 되고 그렇게 집중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생겨납니다. 시인이 바로 그런 마음의 상태로 돌아간 것입니다. 악인에게 고통을 받으면서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께서 깨어나셔서 당신의 삶에 간섭해 달라고 간절히 하나님 앞에 탄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두 번째로 ‘돌아오소서’하고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는 장면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에 일어났던 이스라엘 역사 속에 정말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이 시인이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에 홍해도 가르고 건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에 따라오던 수많은 애굽의 대적들을 바다위에 잠그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에 전쟁도 이기고,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에 만나도 내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에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신 이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날마다 보면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문제는 나에게 얼마나 많은 대적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가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그 분의 임재와 구원의 도움을 바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인생의 문제가 굉장히 큰 것 같고 큰 것 같기 때문에 그 문제를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이럴 때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힘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큰일과 작은 일이 따로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큰일이나 작은 일이 문제가 없습니다. 개미에게 있어서 작은 밥알 하나는 자기들이 들기 쉬운 일이지만, 그러나 사과 하나를 드는 것은 개미에게 있어서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에게는 밥알 한 알을 드는 일이나 쌀 한 톨을 드는 일이나 사과 한 개를 드는 일이나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똑같은 일을 우리에게 적용시켜 보면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께는 큰일과 작은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은 이 모든 천지를 창조하신 위대한 능력을 가지신 여호와이시기 때문에 그 분에게는 힘든 일도 없고 어려운 일도 없고 모든 일을 주님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전심으로 당신을 찾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당신의 능력을 보이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보면 정말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보미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라고 묵상하며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임재와 그 도움을 이 시인이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돌아와 주시옵소서 그래서 나와 동행하는 삶을 보여 주시옵소서 그러면 나를 비웃고 핍박하는 이 악인의 핍박이 나에게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큰 문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편인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가? 그것만이 문제입니다. 주님과 동행하고 있느냐 그것만이 문제입니다. 모든 것이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돌아와 달라’고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판단하소서
세 번째가 ‘판단하소서’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무소부재하십니다. 그분은 어디든지 가실 수 있는데 당신이 마땅히 가야할 곳에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팔복을 가르치시는 가운데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고,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면서 여덟 개의 복을 차례대로 죽 말씀하십니다. 여덟 개의 복을 차례대로 죽 말씀하시는데 그 복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누리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나님이 계신 곳이 천국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이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원래 그 땅이 누구 것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무엇으로 배부르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의의 통치로 배부르게 해주십니다. 전부다 모든 복의 핵심에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없는 복을 찾으려는 것입니다. 아니면 복이 주어지면 거기에 하나님이 안 계셔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상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렇게 해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설교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돈이 생긴 사람이 예외 없이 불행해집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영혼이 올바른 지혜를 가지고 있을 때 영혼이 올바름에 대한 지혜를 가지고 있을 때에 인간의 육체가 무엇을 누려도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 또 무엇을 못 누려도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영혼이 올바름에 대한 지혜가 없는데 물질적으로 넉넉해지면 결국 그 사람을 위해서는 너무나 불행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올바르게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에는 파멸하게 됩니다. 이 때 시인이 하나님 앞에 ‘나를 판단하소서’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깨어나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하나님이 임재와 구원으로 나를 위해 역사하시지 않는 것,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 달린 것이 아니라 결국은 나에게 달려있습니다.
“나를 판단하시옵소서. 내가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깨어나 주시고 나를 위해서 임재의 영광으로 나에게 돌아와 주시지 않을 그 무엇이 있는지 나를 보시고 그렇다면 나를 용서해주시고 깨끗케 해주셔서 다시 하나님이 깨어나시고 내게 돌아오실 수 있도록 나를 바꿔 주십시오.” 이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역사하십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역사해주시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이 깨어나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재의 영광으로 돌아 오시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 받으실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을 즐겨 찾으시는 방문지로 사용 하십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들이 너무 존경하고 너무나 사랑하는 어떤 분이 있다고 칩시다. 훌륭한 스승일 수도 있고 혹은 목회자라고 칩시다. 그런데 그 분이 어디를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이 가시고자 하는 곳을 여러분이 알고 있는데 이 분을 전혀 알려고도 하지 않고, 공경심도 없고, 오히려 모욕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곳인데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 이렇게 존귀한 분이 거기를 가려고 하면 여러분들을 가시라고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선생님같이 존귀하신 분이 거기에 가실 곳이 아닙니다. “거기는 선생님을 무시하고 깔보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어디든지 가실 수 있는데 당신을 찾는 마음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곳, 그래서 주님을 갈망하고 그리워하는 곳,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곳, 그런 곳에 가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판단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는 언제나 우리 편이기 때문에 우리에 대해서 공정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편입니다. 심지어는 우리를 바라보는 생각이 내 생각과 하나님 생각이 틀려도 하나님 생각보다는 내 생각을 믿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회개가 어려운 것입니다. 회개의 기초는 하나님의 판단을 내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것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이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소망하고 있는 바가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않을 가능성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잘못을 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살 것이다” 정직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정직하다’라고 하는 것은 ‘잘 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정직하다는 잘못 살 때도 있지만 그것에 대해서 솔직한 것, 그리고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이는 것, 그래서 내 판단을 가지고 하나님의 판단을 부정하거나 굳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판단에 자기 자신을 맞추려고 하는 것, 그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직한 삶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무리 잘 산다고 생각할지라도 주님이 말씀으로 ‘너는 틀렸다’하시면 하나님 앞에 ‘하나님 그렇습니다. 하나님 저는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을 하면서 나 자신을 고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언젠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습니다. 다윗이 바로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범죄했을 때에도 쉽게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아이를 키우다 어떤 아이는 한차례만 때리면 무릎을 꿇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잘못했다고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비는 아이가 있는가하면, 어떤 아이는 몇 대를 때려도 어금니를 질끈 깨물고 무슨 반감을 품었는지 그냥 패라고 버티는 자식이 있습니다. 애는 매를 맞을 짓을 한 것보다도 부모에게 더 고통을 주는 것은 이 아이의 완고한 성향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아이를 사랑하기 힘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그렇게 정직한 사람, 내 자신의 잘못을 알면 하나님께서 돌이키실 때 언제나 돌이키는 사람, 정직한 사람, 그렇게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여러분들의 문제를 해결 받기를 바랍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
악인이 죄악을 낳음이여 재앙을 배어 거짓을 낳았도다 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그의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그의 포악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시 7:11-17)
심판의 하나님
본문에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나오고 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세상에 모든 사람들을 판단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 일도 안하시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 세상 구석구석에 옳지 않은 일들이 자행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들이 유행하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하나님은 날마다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여기에 나오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 찬양은 자기와 같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언약백성들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악인들, 그래서 지금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가는 자기를 박해하고 괴롭히는 그런 무리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그러하시다는 찬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시지만 그래서 악인들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우리가 이렇게 악을 행하고 범죄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어디계시냐?” 이렇게 반문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분노하신다.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이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시고 그들의 영혼에 하나님께서 곤고함을 주시고 또 그들의 인생의 섭리가운데 간섭하셔서 고통을 당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더 이상 기회를 주실 수 없을 때에는 하나님이 그 생명을 거두어 가신다.” 이것이 바로 이 시인의 대답이자 고백이었습니다.
고난 속에 깃든 사랑과 자비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기 때문에 때때로 악한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자기를 돕지 않으시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고 의로운 사람들은 하나님이 붙들고 도와주시며 악한 사람들은 심판하십니다. 악인이 번성한 것 같지만 좀 더 눈여겨보면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것 같아도 그들의 영혼에 곤고함으로 인하여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 내린 것이 증명이 됩니다. 의로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시는 것 같지만 말할 수 없는 유익이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유익을 하나님께서 그 영혼들에게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난을 당해도 그 고난 속에서 위로와 용기를 주십니다.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서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러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을 세우시고 그들을 도와주시고 붙들어 주시며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일들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에게는 지금 이렇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커다란 위로가 되고 있습니다. ‘아, 내가 지금 고난을 당하고 원수들에게 박해를 받고 있지만 그러나 참자, 왜냐하면 하나님이 의로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선악 간에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이 생기기 위해서는 고난을 당하면서도 자신이 하나님 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이 생기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죄가 있고, 하나님을 등지고 있고, 양심에 깊은 가책이 있고, 그런데 악인들에게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영혼은 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맞서 싸우자니 힘이 없고 하나님을 의지하자니 하나님이 자기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가장 큰 재산은 돈이나 명예나 혹은 건강이 아닙니다. 신자의 가장 큰 재산은 자신이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 이것이 신자의 가장 큰 재산입니다. 그래서 심판하시는 의로운 하나님을 생각하면 위로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주님의 편에 서있습니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나는 날마다 뉘우치며 자기 깨어짐 속에서 주님께 가까이 갑니다. 이런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갈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7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