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배신을 당할 때
“불의한 증인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힐문하며 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 나는 저희가 병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시 35:11-13).
하나님 안에서 구원을 경험하면서 이제 시인이 자신의 지난날들을 회상합니다. 회상이라고 하는 것은 예전에 이미 일어난 일이지만 다시 기억을 불러내어서 마음으로 무엇인가 느끼게 하는 것이 회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에 대한 그 회상은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한 회상이지만 오늘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에 대해서 영향을 미치죠. 그래서 우리 안에 은혜가 아주 풍성하게 되면 은 우리의 마음속에는 항상 그 과거에 하나님의 나를 위해 하셨던 은혜로운 일들에 대한 넘치는 기억 감사함 이런 것들로 회상이 넘치게 되는 것이죠. 첫 번째 회상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은 모함이에요 모함 자신은 그런 적이 없는데 누군가 자기를 해 꼬지 할 목적을 가지고 모함을 하는 거죠. 그래서 그릇된 증언을 서는 것이죠. 저 사람이 악을 행한 것을 본적이 있다 이러이러한 잘못을 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하고 말하자면 모함을 하는 것이죠. 성경에서는 구약에서는 특히 거짓증거 하는 일을 매우 커다란 죄로 규정해요. 그러니까 시인을 향해서 거짓증거하면서 시인을 모함하는 이 일은 결국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죠. 그러니까 결국은 시인을 모함 하였던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 할줄 모르고 언약백성들에 대한 자비가 없는 악한 사람들 이였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 때가 있었다는 거예요. 늘 자기를 알고 교재 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고개를 들고 대적하면서 시인도 알지 못하는 일로 모함을 하며 이를 해롭게 하기 위해서 기승을 부리는 거죠.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될 때 이 시인은 아주 곤고하고 고통스러운 사람이 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호소하였더니 하나님이 건져 주셨기 때문에 오히려 그러한 그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됐다는 그런 이야기 입니다. 두 번째는 배신입니다 자신은 선을 그에게 베풀었는데 어느 날 그 선을 베푼 은덕을 악으로 갚아서 자신에게 원수처럼 행하는 자들을 만난 거죠. 시인은 인생을 살면서 이런 경험들을 많이 했습니다. 특별히 자기의 사랑하는 자식들로 인한 배신, 그리고 왕국을 세울 때 그렇게 선대해 주었던 무리들이 함께 반란을 일으키면 대적했던 일들이 생각이 난거죠. 바로 그런 배신 그 속에서 시인은 견디기 힘든 고통스러운 상황을 만나죠.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은 그렇게 자기가 선을 베풀 때 악을 갚고 혹은 그 앞에 나오는 것처럼 사람들이 자기를 모함하고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에 그가 외로웠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제는 하나님의 도움이 끝난 것 같고 인간으로부터 오는 어떤 좋은 모든 혜택이 다 끊어진 것 같은 그러한 시기 속에서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였던 것이죠, 그때에 모함을 할 때에 그 사람들을 함께 대적하며 이를 갈고 미워하고 이랬더라면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일수가 없는 거죠. 그렇죠. 이런 어떤 모함에 걸려들게 되면 자신이 그 모함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누군가를 망가뜨려야 돼요 그렇죠. 그게 아무리 진실이라도 그는 어떤 의미에서 또 다른 악을 공동체에 행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고린도서에서 너희가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게 낫지 아니 하냐 그렇게 외쳤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거죠. 하나님이 모두 아셔요. 그리고 설령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그런 누명을 안 벗겨주신다고 할지라도 그가 정말 하나님을 바라는 사람이면 하나님이 자신을 아신다는 사실 하나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어요 그게 신앙이죠. 저쪽에서 칼 빼든다고 나도 총 들고 나타나면 그게 신앙이겠어요. 그러니까 그게 마음 깊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만이 나의 인생의 피난처 이십니다라고 하는 이 마음에서부터의 고백이 없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거죠.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나를 미워할 때 그 미움을 당하고 있지 않고 그거 보다 더 많이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마음의 병이 없죠. 그래서 한대 때리면 칼로 목을 댕강 잘라 버릴 정도의 보복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라면 마음에 어떠한 상처가 남지 않죠. 그런데 그게 바로 뭐냐 하면 타락한 인간의 악함이에요. 그래서 창세기에 보 면은 가인의 후손들이 후에 고백하는 얘기가 것이 나오죠. 창상을 인하여 내가 저를 죽였도다 상대방이 살짝 긁었어요 근데 사람을 죽여 버리는 거죠. 이런 거는 바로 보복이죠. 이럴 경우에는 어떻게 하든지 그 사람에 대한 증오심을 갖지 않으면은 안되는 거죠. 그런데 그것을 품고 있으면 그 마음에 하나님이 계실 수가 있어요 없죠.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어쩌다 여러분들이 모함을 당하거나 배신을 당했을 때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잖아요. 그게 아니라고 하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를 죽여야 해요 마음속에서 근데 그게 또 하나의 살인이고 또 하나의 고통이에요 그 사람은 또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또 나를 죽이고 하는 일들이 반복이 되는 거죠. 시인이 그런 속에서 하나님께 피했던 것이죠. 그래서 뭐라고 고백 하냐 하면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저희를 내가 위하여 금식하고 기도하고 저희가 어려울 때에 저희를 돕고 이랬단 말이죠. 그랬더니 그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나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어떤 사람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에게 진심으로 축복을 비는데 그 사람이 그 복을 받을 만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못 지녀요. 그러면 그 기도는 다시 돌아서 이 기도한 사람의 품으로 돌아와 자기가 그 모자라고 원수와 같은 사람에게 빌었던 그 복을 자신에게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거죠. 이게 그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다. 라고 하는 거예요. 내 가슴에서 떠난 나를 배신한 자들을 위한 그 기도가 결국은 그들이 그 기도의 축복을 받을 만 하지 못하니까 결국은 나에게로 다시 돌아왔다라고 하는 이야기죠. 이게 바로 하나님을 바라는 신앙이에요. 그래서 항상 이렇게 나는 선대했는데 마지막에 돌아오는 것이 가슴 아픈 배신이에요 나는 많이 아끼고 사랑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아주 뼈저린 배신 그때 우리는 평소에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이 그 자신을 대적하고 미워하는 것보다도 더 큰 상처를 받게 되요 왜냐하면 마음속에서 사랑이라고 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죠. 이러한 배신은 그러한 사랑을 단 번에 끊어버리려고 달려드는 칼을 든 사람과 같은 거죠. 그러니까 더 많은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고통스럽죠.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일들을 허락하시는 거죠.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달라붙어 있었던 그 사람과 의지하는 마음을 떼어서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받을 수 있는 하나의 축복이에요. 한편으로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경험이지만은 그 경험을 통해서 오늘 찬송처럼 이 세상에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오직 예술세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실망을 하거나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거나 하면은 늘 부르는 찬송이 그거에요. 이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날 사랑하는 이는 오직 예술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질 않네, 온 천지는 버려도 날 버리지 않네,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사람에게 때로는 뼈아프게 실망을 하게 하셔서 그래서 우리의 유일한 도움 그리고 변하지 않는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이것이 우리의 참된 소망이 라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게 하고 또 주님을 붙들게 하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 이게 하나님의 방법이에요. 그러니까 만약에 내가 나를 아프게 하고 뼈아프게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 그를 저주하고 마음으로 깊이 미워하면서 악한 마음을 품을 때 그가 만약에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사람이라면 그런 악함은 어떻게 될까요.
그 역시 돌아서 자신을 찌르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의인을 이유 없이 미워하거나 하나님 편에 서있는 사람을 이유 없이 대적하거나 배신하거나 하는 이 일은 자신의 영혼과 육체에 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에요. 스스로 자신의 칼로 자신의 몸과 영혼을 찌르는 것과 같은 것이에요.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커다란 해를 자신의 영혼과 마음 안에 받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몇 푼의 돈이나 제물들은 마음을 쓰면서도 이렇게 자신의 영혼과 마음에 오래도록 남는 그 무수한 상처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아요. 그래서 마음에 불쑥불쑥 정욕처럼 솟아 나오는 욕망을 따라서 사람들을 배신하고 미워하고 하나님 편에 서있는 사람을 모함하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요. 하나님 앞에서 살수가 없죠. 끊임없는 고통과 시련을 만나게 되요. 만약에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이런 것들이 많이 있다면 여러분들이 어떤 모함을 받아요, 혹은 배신을 당해요. 그래서 그럼 어떻든지 간에 여러분들은 뭔가를 해명해야 될 거 아니야 그죠. 또 해명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고 그래서 그것을 해명해요. 해명을 하는 동안에 진실이라고 할 찌라도 무언가를 말해서 결국은 나를 배신하거나 나를 모함했던 사람들을 그 사람이 미워하게 만들어야 해요. 사실이죠, 맞죠, 그렇게 해야지만 자신이 그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 날 수가 있죠. 그죠 그게 할 짓이냐 이거죠 그런다고 해서 자신이 그 사람에게 뭐 뜨거운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게 아니죠. 그래서 시인이 여러 곳에서 나는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나이다. 나는 귀 멍 어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었나이다. 그렇게 고백했던 이유가 바로 그거에요 인간은 바로 그럴 때에 범죄 하는 거라.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그랬던 거죠 그래서 그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그래서 일어난 일의 좋고 나쁨보다는 그 일어난 일 그것을 통해 당하는 고통, 배신, 혹은 모함, 음모, 이러한 깊은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과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시고 싶어 하는 것 거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러면서 뭐라고 해요 나는 귀 멍 어리가 되고 그리고 나는 벙어리가 되었나이다. 다윗시대에 다윗과 함께 요단강 건너편으로 망명의 길을 올랐던 시편42편의 기자가 그죠. 사람들이 나더러 하는 말이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고 묻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뭐라고 대답하겠어요. 우리에게 훌륭한 왕이 있었는데 그 훌륭한 왕에게 아주 나쁜 놈의 자식이 하나 있었는데 그 자식이 반란을 일으켜서 그리고 그 자식의 잔꾀에 놀아나는 수많은 간신배들이 칼을 들고 일어서서 그래서 우리 주군을 내어 쫓고 우리가 여기 도망 왔는데 그렇게 떠들었습니까? 뭐라 그래요 주야로 눈물이 내 음식이 되었나이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 내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어디 있느뇨? 내가 밤낮으로 눈물 흘리니 주여 어찌 합니까? 할말이 많이 있었지만 그것을 가슴에 묻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어요. 그래서 우리를 모함하지도 아니하시고 배신하지도 아니하시고 언제나 진실하셔서 당신께 돌아오는 자들에게 변함이 없으신 그 하나님께 눈물로써 가슴에 많은 언어의 사연을 대신하는 거죠. 그것이 신앙이에요. 그런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원한을 신원해 주시는 하나님 우리를 그 모든 고통과 억압에서 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과 자비 이런 것들을 경험함으로써 변하는 이 세상에 있는 사람 사랑과 변하지 않는 하나님사랑의 차이를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그걸 우리는 쉬운 말로 신앙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사람 앞에서 흘리는 눈물을 구차한 거예요. 자신을 모함하는 사람에게서 쏟아놓는 수많은 변명들은 우리들 추하게 만들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피하는 거죠. 그래서 주님을 깊이 의지하지 못했던 날들을 그 쓰라린 고통 속에서 참회하는 그래서 마음에 붙어 있었던 하나님 보다 사람을 더 의지했던 마음, 사람을 의지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홀로서지 못했던 태만, 그리고 세상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뒤엉켜서 하나님을 온전하게 따르지 못했던 게으름, 불순종 이런 것들을 그 배신과 모함 실망 이속에서 씻어내게 되는 거예요. 씻어 내면서도 한매치고 누군가를 미워하는 저주의 감정으로 가슴이 물드는 것이 아니라 순결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물드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께로 피하는 것이 무엇인가 깨닫게 되는 거죠. 그 속에서 나의 구원 나의 방패 내 머리를 드시는 주시니 이다 라고 고백을 할 수 있게 되요. 그때 아주 자신 있게 우리는 그런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주님과 연합될 때 우리는 아주 자신 있게 이런 고백을 외치게 되는 거죠. 여호와는 내편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라고 외칠 수 있게 되는 거요. 그래서 오히려 모함을 통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리고 배신을 통해서 내가 선을 행해 주었던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내가 더욱 하나님편이 되고 그래서 조금도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되는 거요. 약한 자 같으나 강한 사람, 외로운 자 같으나 주님이 함께하는 사람, 곧 짖 밟힐 자 같으나 다시 일어서는 사람, 쓰러진 자 같으나 다시 거기에서 달려갈 수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이 바꾸어 놓으시는 것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