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때와 배신할 때
“내가 나의 친구와 형제에게 행함 같이 저희에게 행하였으며 내가 굽히고 슬퍼하기를 모친을 곡함 같이 하였도다
오직 내가 환난을 당하매 저희가 기뻐하여 서로 모임이여 비류가 나의 알지 못하는 중에 모여 나를 치며 찢기를 마지아니하도다 저희는 연회에서 망령되이 조롱하는 자 같이 나를 향하여 그 이를 갈도다 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시리이까 내 영혼을 저 멸망자에게서 구원하시며 내 유일한 것을 사자들에게서 건지소서”(시 35:14-17)
녹취자: 박지성
오늘 우리들이 읽은 이 내용은 시인이 지난날들을 회상하면서 자신이 그들을 향하여 대한 태도와 또 그들이 자신을 향하여 대하는 태도 사이의 차이점들을 아주 극명하게 대비시키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 사람은 아주 뛰어나게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었고 영적인 인물이었지만 그 이전에 다정다감하고 아주 심성이 고운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을 보면 알 수 있냐면 그 사람이 지은 시를 통해서도 드러나고 다윗이 살아온 그 인생의 발자취를 보고도 드러납니다.
한 토막의 예를 들자면, 전쟁 중에 목이 마르니까 왕을 위해서 군인이 가서 위험을 감수하면서 물을 떠오지 않습니까? 마음이 너무 안쓰러워서 그 물을 마시지 못하는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또 이런 것도 보여줍니다. 압살롬이 자기의 아들인데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옛날에 왕들이 자기 아들 혹은 자기 아버지와 갈등을 일으켜서 그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하는 일은 다반사로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못된 아들이 죽었는데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그러면서 통곡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 대목들이 그가 얼마나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는지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원수였지만 전에는 그들을 친구처럼 대하면서 그들이 아프다면 치료해주고 배고프다면 먹여주고 지금은 원수가 되어버린 그 사람들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을 잘 대해주었는데 결국은 그들이 이 시인을 배신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것은 이런 배신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도 매우 악하게 여기십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우리의 인생사 속에서는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시인이 그런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자식이 반란을 일으켜서 도망을 갈 때 사실 몸이 아픈 것 보다는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줄서있는 수많은 악한 무리들을 보면서 이 시인은 몸보다도 마음이 아픈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 원수들에게서 배신을 당하면서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보면서 시인은 인간을 의뢰하는 것과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 인간에게로 피하는 것과 하나님에게로 피하는 것, 이런 것들 사이의 아주 놀라운 차이점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다윗의 시 속에 보면 인간은 늘 믿지 못할 가변적인 존재이고 하나님은 변함없이 언제나 거기에 계신 분으로 묘사가 되어있습니다. 경험 속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사용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아주 험난한 길을 걷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름부음을 받기 전까지는 그의 인생이 평탄한 인생이었을지 모르지만 기름부음을 받고 난 다음부터 수많은 대적 자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원래 그렇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교회에 와서 아무것도 안 섬기고 예배나 드리고 축도하기 전에 슬쩍 일어나는 사람이라면 여러분을 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물질을 드리고 자기 힘을 쓰면서 섬기려고 하면 시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을 세우고 열심히 하겠지 하면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어쨌든 사람들의 눈에 도드라지게 보이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그를 모함하고 말 한마디도 거칠게 하고 시기하고 하는 일들이 언제든지 일어납니다. 그리고 또 사람들은 그렇게 남의 이야기를 하면서 좋아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입니다.
시인도 그런 것을 많이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가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더라면 사울이 다윗을 그렇게 미워할 이유가 있습니까? 백성들을 그렇게 미워할 이유가 있습니까? 백성들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요”라고 얘기하지 않고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십십이요.” 라고 노래를 했으면 사울이 다윗을 그렇게 미워했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이 쓰시기로 작정한 그 다음부터 다윗의 인생은 아주 비참하게 꼬였고 사람들로부터 시기와 도전을 받았으며 이렇게 사랑했던 사람이 자기를 배신하는 일도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시인이 다 경험하면서 결국은 인간이 얼마나 가변적인 존재인가를 배운 것입니다. 사람의 사랑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잠시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이 세상을 향해 달려가지만 세상을 향해 그렇게 달려가고 나면 그 다음에는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불변하시는 사랑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맨 처음에 회심하고 그렇게 감격했던 내용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야, 이 세상에 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모든 사람, 이웃 간의 사랑은 물론이고, 친구간의 사랑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부모와 자식의 사랑까지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구나.’ 그것을 깊이 깨닫게 되면 깨닫게 될수록 결국은 불변하는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분이 우리에게 아직 계시다는 사실이 말할 수 없는 감격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돌아가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에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렸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린 것이 아니며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지 하나님이 우리를 떠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옛 자리에서 찾으셔도 우리는 지금 그 옛 자리에 없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에 계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매순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은혜 속에서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시인이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서 상처를 입었을 때 더 이상 위로받을 길이 없다면 그 상처는 마음에 큰 병이 됩니다.
(예화) 그래서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대개 자라면서 유치원을 가든 학교를 가든 친구들과 사귀든 무엇을 하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 합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어렸을 때 그러 기억이 있는 아이들은 어디를 가든지 그렇게 사랑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사랑을 받고 싶어 하면서도 그 감정과 함께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쉽게 믿지 못하는 이중적인 성격을 보입니다. 그런 태도가 결국 하나님을 믿을 때도 작용하게 됩니다. 하나님 닳은 부모를 만나면 하나님을 믿기가 쉬울 텐데. 물론 이 말도 어패가 있지만 일반론적 차원에서 하나님을 닳지 않은 부모를 만나게 되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기가 아주 어려워지고 이해가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하나님을 잘 믿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시인은 여기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결국 하나님께 피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마음에 이 시인이 얼마나 기쁘셨겠습니까?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한 나라의 제왕이었고 후에 놀라운 계시와 은혜의 세계도 경험했고, 놀라운 재능도 있고, 그랬는데 어린아이와 같이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이었겠습니까? 녹아내리는 마음. 자신의 잘못 때문에 녹아내리는 마음.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간에 하나님께로 돌아가겠다는 마음. 그런 마음이 이 사람 안에 가득하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에게 배신을 당할 때 얻는 유익이었습니다.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는 것이 뼈저리기는 하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품에 파고드는 것입니다.
(찬양)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이런 고백을 하나님 앞에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