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자의 허무함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시37:1-2).
사람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 생각이 함께 있게 마련입니다. 즉 내가 비록 동의하지 않는 악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악한 사람이 악을 행하는 것을 보면서 그에게 불평하고 또 그로 인하여서 마음 상하면서도 그가 번영하면 부러워합니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처럼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도 말고 또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을 인하여 투기하지도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부러워하지 않고는 투기할 수 없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도 말고 또 투기하지도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실은 참 쉽지가 않습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원하는 삶의 질서가 있고 자기가 원하는 가고자 하는 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길이 있고 질서가 있는데 살아가면서 자기가 원하지 않는 질서로 자기를 데려가려고 하고 또 자기가 원하지 않는 삶의 상황으로 자기를 데리고 가려고 할 때 또 그리고 고통이 있을 때 누구든지 불평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믿음이 상당히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참는 것이 누구나 다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거기에서 불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불평은 가장 낮은 단계의 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러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사실 다윗은 고통스런 인생을 살았던 인물의 대표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말년에 이르기까지 자기가 원하지 않았던 삶의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고통하고 괴로워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평하지 말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우리를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의미’로 볼 때에는 그렇게 악을 행하고 고통을 주는 많은 사람이 결국은 깊은 고통과 악을 통해서 결국은 나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림을 그렸는데 의미심장했습니다. 벼랑이 있고 주인공은 벼랑을 뒤로하고 또 한 사람은 절벽을 바라보고 밧줄을 붙들고 서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절벽을 뒤로한 사람은 절벽이 뒤에 있는 것도 모르고 절벽을 등진 사람도 절벽이 있는 것도 모르고 의견차이가 나서 서로 맛 서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을 넓은 섭리에서 보면 한 사람이 벼랑으로 달려 갈 줄도 모르는 사람을 그 사람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반대자에 의해서 밧줄이 잡아당겨지면서 자기 자신의 생명이 보장되어있는 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100% 동의하기야 어렵지만 인생을 살다보면 간혹 그런 때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어렸을 때 부모님의 징계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데 부모님이 혼을 내서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너무 쓰리고 고통스러운데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 때의 그 받은 쓰라린 고통이 나를 보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어서 어른이 되면 판단과 행동하는 모든 것이 항상 옳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강하게 역사하셔서 우리를 그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우리를 바르게 하십니다. 그 때에 참 선하고 좋은 사람들만 사용하셔서 그렇게 하시면 좋겠는데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쉽게 움직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자녀를 길러 봐도 말을 잘 하면 아이가 모두 시키는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세상 애들에게 징계가 필요한 것입니다. 어른이 되면 아이들보다 전혀 낫지 않습니다.
결국 신앙이 들어가야지만 주님에 의해서 다뤄지는 것이지 신앙이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가 자기 완고함과 고집이 훨씬 강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종종 악인을 사용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유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고난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악한 데서 의롭게 산다는 것 자체가 악인들의 눈에 거슬리는 것이고 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한 이 세상,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로 꽉 찬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산다는 그 자체가 사실은 엄청난 삶입니다. 그 자체가 사실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평상시에 은혜 생활 할 때에는 고갈된 사람보다 은혜 받은 사람들이 훨씬 좋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침체에 깊이 떨어지고 거기에서 좀 더 진전이 되어서 하나님을 향해 대적하는 마음이 되면 은혜 받은 사람들이 싫어집니다. 그 사람들 딴에는 나를 위해 좋은 말을 해준다고 하는데 그것이 전부 마음에 가시가 되는 것입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은혜 가운데 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동안에는 올바르게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가 좋지만 내 마음이 접히고 나면 그 모든 것이 힘이 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리를 한편으로는 좋아하면서도 그 진리가 자신을 책망할 때에는 그 진리를 싫어합니다.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진리에 앞치 하는 솔직한 삶인데 그것이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악인에게는 의로운 길이 악하게 보이고 의인에게는 악한 길이 악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결국 양자는 양자로 인해서 서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믿음의 사람들은 불평하면 안 됩니다. 결국 불평한다고 하는 이야기는 교만입니다. 왜냐하면 이 길 말고 훨씬 좋은 길로 하나님은 인도할 수도 있을텐데 왜 하나님은 이 길밖에 인도하시지 못하시나 라고 자기가 하나님을 이미 판단하고 있는 것이고 지금 상황을 하나님 앞에 받아들이지 않고 원망하는 마음이 깃들여있는 것입니다. 다른 때도 있습니다. 믿음을 지키며 잘 살려고 애를 쓰는데 악하게 사는 사람들이 아주 번영할 때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깊이 원망하고 불평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불평 한 것도 잘못된 것이지만 투기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대부분 자기보다 잘 되는 사람들을 깎아 내리는 것은 이 투기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것은 자기에게 사랑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향한 사랑이냐면 악인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랑은 투기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왜 그러면 악한 자를 불평하지도 않고 투기하지도 말아야 되는가 그것은 모두 잠깐 지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풀과 같이 곧 베임 바 될 것이며...’ 풀이 길같이 자라며 큰 나무와 같이 자라죠. 낫으로 쑥쑥 베어 놓으면 잠시 동안은 아주 풀과 조금도 다름이 없지만 아침 햇살이 퍼지고 낮이 되면 베인 풀은 금방 말라버립니다. 생명의 근원이 잘리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채소와 같다, 채소는 밭에서 뽑아서 마당에 쌓아놓으면 속히 가지고 나아가서 팔던지 먹지 않으면 해가 퍼지면서 그것도 말라버려 모양이 없어집니다.
모두 다 풀이나 채소나 우리에게 지시하는 의미는 ‘덧없다’는 것입니다. 악인의 특징은 덧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악인의 삶 그 자체가 영원을 향하는 삶이 아니라 현세에 묶여있는 삶이기 때문에 그 이상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찮은 삶이 되고 악인의 모든 삶은 하나님 앞에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로 에워 쌓인 가운데 살아가는 삶이 우리의 신앙생활이고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러니까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은혜의 교통이 계속 되는 것이 없이는 이 모든 것들을 이기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생활이고 신앙생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