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80
목 차
목자이시며 빛이신 예수님(시 80:1) 43
구원의 얼굴 빛(시80:2-3) 49
눈물로 연단하심(시 80:4-5) 54
주께서 심으신 포도나무(시 80:8-12) 58
포도나무를 돌보소서(시 80:13-14) 63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심(시 80:15-16) 70
소생케 하소서(시 80:17-18) 74
얼굴의 광채를 비추소서(시 80:19) 79
목자이시며 빛이신 예수님
“(아삽의 시, 영장으로 소산님에 둣에 맞춘 노래)
요셉을 양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자여 빛을 비취소서”(시 80:1)
분문해설
시편 80편은 탄원시입니다. 하나님께 자기의 곤궁한 형편을 도와달라고 간절히 탄원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이 시는 바벨론의 공격으로 이스라엘이 망할 즈음에 쓰인 시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바로 전편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을 허물고 훼방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을 간구하는 내용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애칭, 요셉
1절은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는 이스라엘의 목자여”라고 시작합니다. 요셉은 여러분이 알다시피 구약에 나오는 족장의 이름입니다. 그러나 가끔 성경에서 종종 요셉이라는 이름을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애칭으로 씁니다. 야곱이라는 족장의 이름이었던 이스라엘을 어떤 때는 이스라엘 전체를, 어떤 때는 북왕국만을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했던 것과 유사합니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말을 요셉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됩니다. 여기에 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야곱을 어떠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말로 사용하셨는가를 생각해 보면, 요셉이라는 애칭을 하나님이 무슨 의도로 사용하셨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야곱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셨을 때, 야곱의 생애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을 보여주는 그림을 이스라엘에게 투사하십니다. 즉, 야곱은 교만하고 인간적인 술수에 능하였지만, 자신의 꾀에 빠져서 스스로 실패하곤 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약속을 맺으시고 주권적인 은총으로 약삭빠른 자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말, 요셉을 통해서 우리에게 유사한 그림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야곱의 생애를 통하여 보여주신 당신의 성품과는 또 다른 빛을 요셉의 생애를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알다시피, 요셉은 아버지 야곱과는 전혀 다른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순전하고 하나님 앞에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고, 본성도 아버지처럼 약삭빠른 사기꾼과 같은 기질이 없는 아주 투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이 어린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나 애굽의 노예로 팔렸을 때도 요셉과 일평생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섭리로 고난과 역경에서서 보호하고 인도하셔서 이 모든 것을 애굽의 총리가 되는데 이바지하도록 간섭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속에 요셉은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 인도하신 최고의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고 떠오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말로서 요셉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요셉을 양떼처럼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그래서 하나님께서 요셉을 섭리 가운데 인도하셔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렇게 인도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개인을 가리킨다기보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가 이스라엘 전체를 통하여 나타나게 하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되신 하나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였습니다. 목자라는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공감하는 단어였습니다. 목자라는 직업은 비록 양을 치는 것을 주업으로 삼기는 하지만 양과 선한 목자의 관계는 어떤 경우에도 직업적이지 않습니다.
모든 고아들이 다 입양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 아직도 천여 명의 고아들이 외국으로 수출되고 있습니다. 갓난아이들을 어떻게 하든지 가정에서 기르는 것이 아이들한테 좋지, 시설에서 한꺼번에 젖병을 물리면서 기르는 것이 아이들한테 안 좋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입양과 보육계획을 세워서 상당한 돈을 주고 원하는 가정에 위탁해서 보육합니다. 그러면 생활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아이를 데려다가 키우거나 입양을 하고 싶지만 그럴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아이를 데려옵니다. 한 달에 상당한 돈을 줍니다. 24시간 아이를 봐야 하는데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6개월 혹은 1년 계약을 하고 아이를 돌봅니다. 아이를 기르고 나라에서 돈을 주기 때문에 아이를 돌봅니다. 6개월에서 1년이 차서 아이를 돌려보낼 때는 모두 슬퍼하고 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비록 아이를 양육한 대가를 받았지만 양육하는 동안 진심으로 아이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헤어지는 것이 슬퍼서 눈물을 흘립니다.
목자는 양치기의 소산으로 고기도 먹고 털도 쓰지만 양과 목자의 관계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관계이고 이것이 선한 목자의 도리라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양떼를 사랑하고 불철주야 맹수의 공격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목자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목자라고 말할 때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속에 그 그림이 훨씬 더 풍부하게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다른 동물이 아니라 양에 비유하신 이유는 양떼들이 목자를 의존하여 살게 되듯이, 우리도 또한 하나님을 의존하여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양떼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목자라는 말이 그려주는 그림은 다른 모든 것보다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돌봄을 받으며 살아야할 존재라는 그림을 보여줍니다.
귀를 기울여주소서
그리하여 시인은 하나님을 부르며 호소합니다. “귀를 기울여 주시옵소서”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백성 중 어떤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을 때, 관리와 벼슬아치에게 호소해도 자신의 억울함을 신원해 주지 않을 때, 임금을 향하여 호소하는 간구가 바로 이 간구입니다. 성경에서 종종 “귀를 기울이소서”라는 부르짖음을 하나님을 향해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또한 이방백성들도 자신의 신들에게 호소하였습니다. 혹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을 보증하는 증거자로서 땅과 하늘을 부를 때도 동사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귀를 기울여 달라”는 간절한 간구는 다름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의 안녕과 행복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가장 뚜렷한 인격적인 특징은 인생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하나님이 세상에 주신 모든 것들이 아무리 크고 많다고 할지라도, 세상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섭리 속에서 우리에게 이러저러한 것을 주시고 여러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당신이 원하는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이런 모든 것들을 통해 도움을 받되 이런 것들을 의존하지 않고, 이런 것들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분의 큰 사랑과 은혜를 의지하며 매일 매일 살아가게 되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매일 매일 이기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목자인 하나님을 부르며 귀를 기울여 달라고 호소하고 있으니,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원하지 않는 어떤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그들의 모든 상황과 형편을 통촉해 주시지 않으면 안 될 위기에 처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시련을 만나거나 인생의 위기가 왔을 때 하나님의 자녀들의 해결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붙들고 논쟁하고 사람을 붙들고 결백을 밝히고 도움을 구할 때, 어떤 때는 이 모든 것이 비굴해 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 한분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매달리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바라보아야합니다. 하나님 없이 혼자 힘으로 넉넉히 살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에 깊이 뉘우치며 주님을 붙들고 의지하며 하나님께 간구할 새 힘을 얻게 됩니다. 이처럼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양이 목자를 의지하듯 그분께 호소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빛을 비추소서
두 번째는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는 이여, 빛을 비추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룹’이라는 것은 히브리말로 ‘케룹’(bWrK])이라는 말인데, 이것은 ‘가까이하다’라는 동사, ‘카라브’(br'q;)라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입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핑계로 삼아서 부모를 섬기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변명에 대해 ‘고르반’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었습니다. 부모를 섬기는 물질이 아까워서, “이미 하나님께 바친바 되었습니다.”라고 변명하며 자식으로서 부모공경의 의무를 게을리 했습니다. 이때 사용했던 ‘고르반’이라는 단어도 같은 어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룹’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호위하는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최측근에서 주님의 거룩하심을 호위하는 천사들의 이름입니다. 이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빛을 비추소서”라고 할 때, 이 ‘빛’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지금 상황은 이스라엘이 큰 위기를 만나서 악한 이민족들이 이스라엘의 거룩한 땅을 훼방하고 망가뜨렸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 달라, 그리고 빛을 비춰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 빛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빛을 여러 용례로 사용하고 있는데, 먼저는 물리적인 빛을 의미합니다. 보통 빛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 빛을 윤리적인 빛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의 올바른 도덕적인 행실이 사람들에게 드러나 영향을 끼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신학적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 빛은 하나님,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킵니다. 이것을 입증하듯이 3절에 보면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민족에게 침략을 당하고 나라가 망할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이고, 이로 인해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사라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라진 이스라엘의 영광을 하나님께서 친히 다시 나타내 보이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에게 임재의 빛을 비추어 주실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나라가 되고, 임마누엘의 은총으로 모든 국가적인 시련에서 이스라엘이 구출 받을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하나님께 빛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빛을 잃으셨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타락의 길로 갔기 때문에, 주님의 강력한 임재의 영광이 사라졌으니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영적인 임재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달라는 탄원입니다.
하나님께의 은총의 빛을 구함
이것은 이스라엘의 엄중한 국가적 위기 앞에서의 해결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 주님이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언약관계 속에서 당신의 은총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국방을 튼튼히 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을 것이고, 더 많은 군사와 무기를 준비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을 것이고, 나라의 많은 부를 헛된 곳에 허비한 것도 후회했을 것이고, 환란과 어려움이 올 것을 대비하여 서로가 분쟁하는 대신 한 마음이 되어서 주님의 교회를, 주님의 나라를 지킬 모든 힘들을 모으지 못하였던 것을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보다도 본질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은총을 버렸고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그분의 영광이 이스라엘 가운데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은총의 빛, 조상들에게 비추어 주시던 임마누엘의 빛을 다시 한 번 이스라엘에게 비추어 주시도록 호소하고 탄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우리의 어려움을 모두 호소하고 주님의 임재로 이기게 해달라고 빌어야 합니다.
구원의 얼굴 빛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시 80:2-3)
본문해설
에브라임과 베냐민, 므낫세의 이름은 요셉의 자녀들입니다. 창세기 48장에 보면 야곱이 애굽으로 와서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1절에서 요셉을 이야기했으니까 2절에서 요셉의 아들들인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를 이야기 한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후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양떼를 인도하시는 목자가 되어 주시는 것이 이스라엘과 그 후손들을 향한 은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돌이키소서˛
그러면서 “주님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라고 하나님 앞에 탄원을 하고 있습니다. 3절에 보면 그렇게 하나님이 능력을 나타내셔서 우리를 구하러 오시는 놀라운 역사를 세 개의 동사를 가지고 표현합니다.
첫 번째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이켜 달라는 기도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선지자 혹은 다양한 방법으로 돌이키도록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슈브’(bWv)라는 히브리어 단어인데 명령형으로 나옵니다. “너희는 돌이켜라.” 이렇게 나옵니다. 성경의 여러 곳, 특별히 시편에서 하나님을 향해 돌이켜 달라는 탄원이 많이 나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지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 같지만 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 우리 마음속에 없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께 우리를 돌이켜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국가적인 위기를 겪고 거룩한 땅이 파괴되어서 이민족의 침입을 경험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가까운 맥락에서 보면 나라가 힘이 없고 군대가 모자라기 때문이지만, 멀리 내다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와 패역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입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것인 것이기 때문에 시인은 근본적인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해주시도록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이키시지 않으면 이 상황 속에서 스스로를 돌이킬 수 없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자신들을 돌이켜 달라고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이키시되 물건의 위치를 옮기는 것처럼 돌이키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분의 형상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우리 스스로 판단하고 일을 행할 수 있는 존재로 대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거스르고자 하면 거스를 수 있습니다. 주님을 거슬러서 악한 곳으로 가는 것은 우리의 의지로 할 수 있지만, 거기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일은 우리 힘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우리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게 하실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돌이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돌이키려는 의지와 돌이키게 하시는 은혜 사이의 신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존 화이트’라는 저자는 자신의 책 속에서 이 문제를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우리가 나무를 팰 때 결을 거슬러서 자르는 것이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쪼갤 나무의 결을 보고 곧추세워놓고 도끼로 정수리를 쳐서 쪼갭니다. 반이 갈라지면 다시 그것을 엎어놓고 정수리를 쳐서 쪼갭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쪼개는 것이 우리 모든 사람의 공통된 생각이듯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의 행사는 이렇게 신비한 연관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차원에서 이 두 가지가 모순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모든 차원을 능가하시는 하나님 안에서는 그분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 사이의 신비한 조화가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돌이키게 하심으로 우리가 돌아올 수 있지만, 돌이키지 않는 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도덕적 책임을 진다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돌이킬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끊임없이 돌이키는 것이야말로 모든 일에서 필수적인 대안인 것입니다.
˚비추소서˛
돌이킴 다음에 나오는 동사가 ‘비추사’입니다. “주의 열굴 빛을 비추사”, 성경에 수없이 나오는 ‘주의 얼굴 빛’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얼굴빛을 비추신다, 당신의 얼굴을 대면하신다고 할 때 이것은 두 가지입니다. 당신의 언약백성들을 향해서는 은총의 임재의 빛을 비추시고, 악인을 향해서는 진노하사 징벌하시기 위해 얼굴빛을 비추시는 것입니다. 시인은 여기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돌이키시고, 당신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춰달라고 간절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영적인 축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돌아섰을 때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나라나 성전이나 가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빛이었던 것입니다. 이 얼굴빛이 이스라엘의 회중 가운데 있고 언제나 거기 계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와 사랑, 자비와 놀라운 용서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인생을 우리 마음대로 펼쳐보기 위해 주님으로부터 멀어졌지만 결국 알고 보면 주님의 임재의 은총 속에서 살았던 때가 부족하거나 모자라는 것 없이 행복하고 기뻤던 때였다는 사실이 너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얼굴빛을 비춰주셔서 우리가 구원을 얻게끔 날마다 우리를 이끄시고 도우시는 것입니다.
˚구원하소서˛
세 번째 나오는 것이 “구원을 얻게 하소서”입니다. “돌이키소서, 비추소서, 구원하소서.”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상황을 가져온 근본적인 문제를 차례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시인은 우리가 이러한 어려움을 당하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무찌르시고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맨 나중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어려움 속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신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영적인 축복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돌이키지 않는다면 또 다시 새로운 삶을 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식인종이 옷을 바꿔 입었다고 사람을 먹는 습관을 버리겠습니까? 아프리카나 밀림에서 생활할 때만 사람이 먹을 것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문명세계에 나와도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 도시락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이 근원적인 것을 먼저 고치시고 해결해 주셔서 결국 비참한 이민족의 압제로부터 구해달라고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가 어떤 상황을 만나서 힘겹게 될 때 우리도 이런 순서를 따라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내가 오늘 당하게 된 시련과 고난은 하나님 앞에 죄짓고 불순종하여 어긋난 길로 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내가 돌이킬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두 번째는 주님의 은혜의 빛을 나에게 회복시켜 주십시오. 세 번째는 나를 그 시련에서 건져주십시오.”라고 기도할 때 그것이 우리의 근원적인 문제를 치료할 것입니다.
매튜 핸리라는 영국의 주석가는 자신의 주석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우리, 혹은 다른 사람의 질병된 상태를 위해 기도할 때 이렇게 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질병을 고쳐주시되 고쳐주시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도 함께 고쳐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의 문제들, 굽음의 문제들을 함께 치료하시며 우리의 상황을 바꾸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 속으로 들어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눈물로 연단하심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시 80:4-5)
만군의 하나님
4절과 5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내용이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만군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야훼 체바오트’, 혹은 ‘엘로힘 체바오트’라고 합니다. 이것은 군대를 가리킵니다. ‘군대들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해서 싸우시는 용사로 보는 것입니다. 전쟁의 문맥에서 하나님을 많은 군대들을 거느리시는 위대한 전쟁의 신, 전쟁에서 모든 군대들을 지휘하시는 전사적인 영웅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사적인 하나님을 그리고 있을까요? 어떤 문맥에서 그런 그림을 그릴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싸워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급박한 위기의 상황,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전쟁해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정체성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현실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세에서 매우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군대를 응원군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시인도 현실적으로 바벨론에 의하여 정복당하는 상황을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만군의 하나님’이라는 용사로서의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굉장한 나라였습니다. 아마도 지구상에 존재했던 나라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나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갔던 제국 중 하나였습니다. 로마나 중국 같은 나라들은 유적들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많이 알려지지만 바벨론은 사막에 건설된 국가였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많은 모레들이 쌓이면서 많이 유적들이 묻혀버렸습니다. 돌로 지은 건축물들보다는 대부분이 광야에서 나는 모레 벽돌들로 지어졌기 때문에 대부분이 소실되어 버렸습니다.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 있던 나라인데 어마어마한 왕국이었습니다. 주전 6, 7세기경에 한 도시에 15만이 가까운 인구가 살았다고 하니 그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도시였습니다. 엄청난 대국의 힘에 눌려 있는 상황을 시인은 자신의 힘으로는 개선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군의 하나님을 불러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연단하시는 하나님
여기에서 시인의 역사인식을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현실적으로는 자신들이 나라를 지키지 못해서 강대국에 정복되었지만, 신앙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진노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의 기도에 대해 노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후로부터 끊임없이 구원을 간구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5절에서 상세하게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연단이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통당하게 하시는 것이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이라기보다는 당신과의 약속을 어긴 이스라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끊임없이 거슬러 살게 하였던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고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은 많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 앞에 살았던 날들을 회개하고, 자신 안에 주님을 반역하는 기질이 있다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면서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벌하거나 복수하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민족적인 고난을 주셨다기보다는 이들을 갱신시키시고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눈물의 양식을 먹게 하셨던 것입니다.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압제 하에서 남의 나라를 위해 봉사하며 양식을 먹고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참한 형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먹고 마시는 것을 위해 눈물을 쏟지 않으면 안 되는 큰 고통을 겪게 하셨고, 치열한 눈물의 과정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연단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당신을 멀리 떠나고 불순종하면서 산 쓰디쓴 결과를 맛보게 하시면서 과연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복이요, 주님의 은총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녀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자녀들을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때때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 같고 우리를 향해 노하시는 것 같지만, 주님의 간절한 뜻은 우리가 재앙을 당하고 환란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눈물의 양식을 먹더라도 거기서 우리를 고쳐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 누가 있겠으며,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하지 않은 사람, 완벽하지 않은 교회를 끊임없이 온전하게 하시기 위하여 개인도 연단하시고 교회도 연단하십니다. 심지어는 한 국가에 죄악이 가득차면 하나님은 그 나라도 연단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큰 사랑과 은총을 입은 언약백성들임을 명심하고 자신들뿐만 아니라 교회와 모든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결국 인생, 사람의 역사는 우연의 연속인 것 같지만, 사실은 우연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하나님이 바라보시면서 끊임없이 연단하시는 과정입니다. 때로는 우리로 하여금 눈물의 양식을 먹게 하시고, 눈물의 음료를 마시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결해지기를 원하시고,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을 온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런 큰 은혜를 주셔서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셨고, 매일 당신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우리를 깨끗케 하기를 원하시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사랑하시지만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님 앞에 온전해 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종종 우리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고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눈물 속에서 무한정 세월을 보내도록 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로 하여금 시련을 당하게 하시고 모욕을 당하게 하시지만 주님을 의지하며 당신 앞에 나아오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다시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인처럼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 얼굴의 광채를 비춰주시는 분이시고, 그것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는 여호와이십니다. 우리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의존하면서 주 앞에 나아가 이기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심은 포도나무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주께서 앞서 준비하셨으므로 뿌리가 깊이 땅에 편만하며 그늘이 산들을 가리우고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주께서 어찌하여 담을 헐으사 길에 지나는 모든 자로 따게 하셨나이까”(시 80:8-12)
심으시고 돌보시는 하나님
본문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형편을 아뢰며 탄원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도원, 포도나무, 감람나무 등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이사야서 5장에 보면 “이스라엘은 포도원이요”라고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라고 말씀하심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을 정복하고 거기에 정착하게 된 것을 가리킵니다. 당시 가나안은 텅 비어 있는 땅이 아니라 많은 민족들이 각축전을 벌이며 번영한 물질문명을 구가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철기문화를 제일 먼저 받아들인 민족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민족들을 가나안 땅에서 쫓아내시고 이스라엘에게 주셨는데 이것을 “심으셨다”는 표현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도나무 혹은 감람나무로 묘사할 때 아주 잘 쓰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에 가져다 놓기만 하고 버려둔 것이 아닙니다. 나무가 심기면 땅과 하나가 되어서 거기에서 수액을 끌어 올리며 생명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정착시키신 것은 포도나무를 심고 그것이 땅을 기반으로 생명의 진액을 먹으면서 계속 번성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땅에 두시고 거기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일시적으로 가나안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마치 땅에 깊이 뿌리를 박고 성장하는 나무처럼 그렇게 항구적으로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주께서 앞서 가꾸심
“주께서 앞서 가꾸셨으므로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라고 나오는데 여기서 ‘앞서 가꾸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다음의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첫 번째 해석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오게 되면 잘 정착시키기 위해 시간적, 장소적으로 앞서 가셔서 그곳을 ‘잘 정리하셨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해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하기 전까지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더 멀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생활을 하는 동안, 가나안에 정착하기 전까지의 모든 과정이 우연이 아니라 마치 농부가 식물을 돌보듯이 하나님이 보살피시시고 인도하셨습니다. 당신의 사랑으로 가나안에 데려다 놓으니, 이내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해석이 훨씬 더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잠시 가나안 땅을 차지했다가 쫓겨난 것이 아니라 거기에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포도나무는 계속 자라며 번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포도나무 그늘이 백향목 같으며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과장입니다. 포도나무가 어느 정도 자란 다음에는 넝쿨을 세워서 계속 옆으로 쭉 뻗습니다. 1m 포도나무 묘목이 자라서 12m정도까지 뻗어나간다고 합니다. 영국의 식물원에 가 가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 60년 된 포도나무가 있었습니다. 포도나무 한 그루 자체가 식물원입니다. 나무가 어마어마하게 큰데 지금도 거기에서 포도를 수확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만큼 포도나무가 계속 뻗어나가서 뿌리가 깊이 박혀서 뿌리가 뻗어나가 온 땅을 움켜쥐고 나무가 얼마나 무성하게 되었는지, “커다란 나무 때문에 그늘아래 산들이 가리고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원래 백향목이 최상의 아름다운 수목을 뜻하는데, 이 나무는 건축자제로 많이 사용됩니다. 백향목이 아름답고 튼실하면 기둥이나 들보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과장법입니다. “포도나무가 뻗어나간 가지가 곧게 뻗어나간 백향목과 같이 되었다”는 표현이니 말입니다. 시인의 마음속에 잭과 콩나무에 나오는 것처럼 나무가 쭉 자라서 하늘까지 뻗고 온 산을 뒤덮은 어떠한 번영의 그림을 머릿속에서 그리면서 시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신 큰 은혜와 축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같이 미쳤습니다. 여기서 강은 유프라테스 강을 이야기합니다. 유프라테스 강와 티그리스 강은 주변 땅을 비옥하게 만들었는데 그 곳이 지금의 이라크 지역입니다.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번영과 축복이 얼마나 크고 광범위한 것이었는지 보여줍니다. 여기까지는 축복에 대한 회상입니다. 하나님이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지나와 가나안에 심으시고 그 포도나무 뿌리가 깊이 박혀 땅을 움켜쥐고 가지와 줄기들이 산들을 가릴 정도로 자랍니다. 그 포도나무 가지의 크기는 건축자제로 쓸 수 있는 백향목과 같이 아름드리나무가 되었고, 길이는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치는 놀라운 번영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담장같이 보호해주시는 하나님
12절부터는 하나님의 축복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담을 헐으사 길에 지나는 모든 자로 따게 하셨나이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영을 누리면서도 다른 민족의 침입을 받아서 손해를 보거나 멸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담’은 하나님의 보호, 혹은 하나님의 지켜주심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담장으로 이스라엘을 두루두루 막으셔서 누구도 포도나무 이스라엘에게 다가와 열매를 따지 못하도록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열매는 오직 하나님께 올려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렸습니다. 번영과 평화의 때는 그들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믿었고 무엇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마치 담장과 같이 지켜 주셨기에 안전할 수 있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자신들이 스스로가 강하고 나라를 지킬만한 능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중요한 특징인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의 신앙을 버렸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키시던 보호를 거두시자 모든 이들이 열매를 따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방민족으로부터 받는 침략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당신의 보호를 거두시자마자 이스라엘은 열방의 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커다란 영광은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커다란 수치는 하나님이 떠나시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영광을 하나님의 임마누엘에서 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동행하는 것, 그것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하는 가장 커다란 조건이듯이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든 개인의 삶이든 하나님이 담장이 되어 주셔서 우리를 지켜 주시는 것, 무엇으로도 하나님은 쓰러뜨릴 수 없으니 하나님이 지키시기로 한 교회, 하나님이 지키시기로 한 개인이 약탈당하거나 무너지는 일은 없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만리장성을 쌓았는데 정말 만리입니다. 그런데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만, 중국은 만리장성을 넘어 침략해 온 나라 때문에 패배한 적은 없고, 자중지란이 일어나서 내분으로 나라가 다섯 번 망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담이신데 이민족이 담을 넘어 이스라엘에게 해를 입힌 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담을 허셨기 때문이고, 이것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불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광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고난을 당할 수도 있고, 시련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죄와는 상관없이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며 시련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은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고 스스로 우리의 삶에 담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결론과 적용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너를 칠 것이나 해하지 못할 것이나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내가 너를 쇠기둥이 되게 하리라” 우리에게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주고도 살 수 있는 중요하고 탁월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시기를 기뻐하는 교회와 기뻐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주신 축복을 잃어버리고 이스라엘처럼 하나님 앞에 시련을 당하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주님이 언제나 여러분을 지키셔서 번영하도록 주님과 동행하고 영적으로 번영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포도나무를 돌보소서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포도나무를 돌보소서”(시 80:13-14)
본문해설
시인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탄원하고 있습니다. 멧돼지의 비유를 통해서 앞에 나오는 담을 허신 이야기보다도 훨씬 진전된 약탈 광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담을 헐었기 때문에 보호자가 없어서 이방 민족들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정해주신 영역에 들어와 실과를 따고 포도밭을 해칠 뿐 아니라 멧돼지들과 온갖 들짐승들이 들어와 포도나무를 해치며 열매를 따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이민족에게 약탈당하고 있는 광경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을 보호하심
역사적으로 북왕국 이스라엘은 722년에 멸망했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주전 15C경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605년경 다니엘이 포로로 끌려가고 완전히 망하게 되는 주전 586년까지 약 천년동안을 거기에서 버텼습니다. 역사를 보면 그것 자체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역사를 보면 앗수르를 비롯한 수많은 나라들, 신 바벨론 다음에 메디아, 페르시아, 이런 나라들이 수없이 정복전쟁을 펼치는 와중에서 손톱만한 나라가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앗수르, 신 바벨론, 메디아, 페르시아 같은 나라만 융성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은 수시로 작은 나라들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블레셋이 대표적이었습니다. 밑에서는 애굽이 치고 올라왔고 위에서는 앗수르, 바벨론, 이후에 이어지는 메디아, 페르시아 등 엄청난 나라들과 거듭해서 전쟁을 벌어야 했습니다.
그 속에서 손톱만한 나라 이스라엘이 살아남아 있을 수 있던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원수들의 손에 내어주셨고 이스라엘을 마음 내키는 대로 훼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서 멧돼지, 들짐승, 이것은 모두 이성 없는 사람들, 이성 없는 군대들, 이방 나라들을 묘사하는 표현들입니다. 이렇게 야생동물들이 거칠 것 없이 작물을 해치며 손해를 끼치는 것처럼 이스라엘이 이렇게 이민족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인도 역사적인 상황을 극복하거나 변혁할 수 있는 어떤 힘이 없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포도나무를 돌보소서.”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돌아오소서’, ‘돌이키소서’, 심지어 ‘깨소서’, ‘깨어 일어나소서’라는 표현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교훈적인 적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학에서 ‘아코모다치오’라는 말은 대화하는 상대가 워낙 수준이 낮으면 자기를 낮추어서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나 방식으로 대화를 해주는 것, 이것이 바로 적응 ‘아코모다치오’라고 합니다.
돌아오소서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인데, ‘돌아오소서’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좀 우습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지만 ‘해가 뜬다.’ 혹은 ‘해가 진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준으로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떠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하지만, 우리를 기준으로 보면 하나님이 멀리 떠나셨기 때문에 ‘하나님, 돌아오소서.’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에게 짓밟히고 유린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해 주시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큰 영광이요, 안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굽어보신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포도나무를 돌보아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굽어보신다’는 표현이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데 이것은 이 땅의 모든 질서를 당신 마음대로 재편하고 움직이실 수 있는 통치의 주권을 가지신 분으로서 이 땅을 굽어보시는 것입니다. 임금들은 어느 나라건 높은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신하와 백성들은 높은 용상 아래에서 모두 부복하고 왕은 높은 보좌위에서 눈을 아래고 향하여 굽어 살피며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왕이 높은 용상에 앉아서 자기의 나라를 통치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하늘의 창을 이렇게 열고 밑을 들여다보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보좌에 앉으셔서 이 땅의 모든 것을 당신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권세와 위엄을 가지고 통치자로서 이 세계를 굽어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능력과 주권을 가지신 분으로서 당신의 통치를 받는 세계를 주목하실 때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질서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굽어보심이 커다란 심판과 두려움의 의미이지만, 억압 받고 고통 받는 자기를 사랑한 백성들에게는 원한을 풀어주고 원래의 사물들의 질서대로 돌아가 그들을 하나님의 통치 아래 행복하게 해주신다는 표징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이 굽어 살피시는 것은 질서의 변혁을 의미하고,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굽어 살피시는 왕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뜻대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신원의 날이요,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됩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지상 통치가 가지고 있는 이중적인 국면입니다.
이와 유사한 말로서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로 대면하신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도 악인에게는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 심판을 의미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언약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직면하신다는 것이 하나의 은총에 대한 기대 혹은 상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굽어보시고 특별히 이 세상 중에서도 포도나무,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아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포도나무의 의미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5장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포도원이라고 부르시고 포도원을 삼으신 것이 의와 공평의 열매를 바라셨기 때문이라고 나옵니다. 포도나무는 알다시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몸통이 1m 올라가면 가지는 12m까지 뻗어나갔다고 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포도농사가 아주 잘 되었습니다. 120년 전쯤에 기록된 주석에 의하면 에스겔 골짜기에서는 당시에도 포도 한 송이에 4-5kg짜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질이 좋은 포도주들을 싸게 팝니다.
포도나무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의미하는 첫 번째는 열매입니다. 하나의 나무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부르신 것은 이방 백성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한 열매를 기대하신 것입니다. 의와 공평, 자비와 사랑 이런 열매를 많이 맺게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 앞에 선을 행함으로 모든 이방 백성들 앞에서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의 존재와 하나님의 나라의 존재는 이 세상에 있는 불신자들에게 감동을 주거나 미담거리를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열매는 전시용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이 순종과 믿음의 원리를 따라서 언약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성품이 변하고 그들의 인간성의 본질이 변해서 삶 자체가 열매가 되는 생활을 가리킵니다. 반드시 위대하고 놀라운 일, 이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역사적으로 위대한 일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한 포도나무에서 기다란 줄기가 뻗어 거기에서 알알이 열매가 열리게 되듯이, 하나님의 은혜에 뿌리박은 백성들이 그들의 본성이 변하여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인격적으로 거룩함의 열매를 맺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포도나무가 가지고 있는 확장성입니다. 첫 번째가 결실성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는 확장성입니다. 포도나무는 심을 때는 모르는데 한없이 뻗어나갑니다. 그래서 포도나무는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됩니다. 포도나무는 반드시 넝쿨이 계속해서 뻗어나갈 수 있도록 지지대를 세우고 줄들을 이어주어야 합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겨울에 남한산성을 넘어가고 있었는데 멀리서 보니까 커다란 묘지같이 생긴 데에 수많은 하얀 십자가가 서있습니다. “야, 신기하다. 여기 무슨 묘지가 있나?” 차를 타고 가까이 가보니 묘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 십자가가 뭐지?” 그러고 이듬해 봄에 보니 십자가처럼 보인 것은 포도나무가 쭉쭉 뻗어갈 때 가지들을 지탱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 사이사이로 철사 줄이 연결되어 있고 그 줄마다 가지가 매달리면서 옆으로 계속 뻗어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포도나무를 기르는 방식이 확장성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심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그들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지혜를 실어서 가나안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끊임없이 펼쳐서 하나님의 뜻대로 이 백성들이 살아가게끔 만드시고 그 영향력이 끊임없이 이방에까지 두루 편만하게 퍼지는 것을 바라셨습니다. 이와 같이 나무처럼 영적으로 확장되는 이스라엘을 생각하시면서 하나님과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 비유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선교적으로 대단히 의미가 있는 비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포도나무가 가지고 있는 필수성입니다. 알다시피 팔레스타인은 물이 매우 희귀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물을 얻는 것이 매우 큰일이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는 물이 풍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 년에 100mm이하의 강수량인 곳이 굉장히 많고 한 지역이 좀 풍부해서 헐몬산 아래로 내려오는 물들로 식수로 쓰는 곳이 있긴 한데, 그래도 필연적으로 관개시설을 잘 구비해놓아야 합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에 독일은 일본과 달리,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죄하고,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이스라엘에게 배상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 돈을 한 푼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모두 거미줄처럼 이스라엘 전 영토에 수로시설을 만들어서 전국이 풍부한 농경지가 되도록 그렇게 대규모의 관개사업을 벌였습니다. 그 덕분에 이스라엘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주요 수출품이 농작물입니다.
이렇게 물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물이 생명처럼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땅을 파면 물이 나온다고 해서 모두 식수로 마실 수는 없습니다. 물을 잘못 먹으면 풍토병에 걸려서 다리가 퉁퉁 붙는 문제들이 생겨납니다. 대신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도열매를 따서 즙을 내서 상용해서 이것이 음료를 대신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는 너희를 위한 생명의 떡이요.”라고 말씀하실 때 떡과 함께 등장하는 것은 포도주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밥처럼, 포도주는 물처럼 생명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피조물에도 의존하시는 분이 아니시지만 당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피조세계 안에 당신의 목적을 구현해 가시는데 있어서 이스라엘이 그렇게 필수적인 존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이 우리보다 위대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꼭 필요하듯이, 하나님이 피조세계 안에 당신의 창조 목적을 드러내 보여주시는데 있어서 이스라엘은 그렇게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이 기도는 오늘 교회를 위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도나무로 여기셔서 돌보고 지키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그렇게 지켜서 하나님이 돌보아 주시도록 그리스도의 교회가 멧돼지와 들짐승들에 의해서 짓밟히고 먹히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이 친히 당신의 교회를 다스리고 통치해 주시도록, 그리스도의 교회를 매일 깨끗하게 하시고 온전하게 하시고 날마다 죄인들을 고치셔서 새롭게 해주시도록 구해야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우리들이 주님 안에서 점점 더 온전하게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한 영광이 당신의 교회에 나타나기를 기도하여야 합니다.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심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그것이 소화되고 작벌을 당하며 주의 면책을 인하여 망하오니”(시 80:15-16)
본문해설
하나님께 포도나무 같은 이스라엘을 돌아보아달라고 간절히 호소하면서 15절을 덧붙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심은 줄기요, 가지라는 내용입니다. 성경에서 오른손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작은 나라이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 속에서 부름을 받고, 하나님이 불러주신 소명을 완수하는 일환으로서 가나안땅에 정착하게 된 것을 가리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어 광야에서 긴 세월을 지나 마지막으로 가나안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은 실로 기적 같은 과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고자 할 때 이미 가나안 족속들의 마음이 물같이 녹았고 “여호와라는 신이 특별히 함께 하시는 민족이니 우리가 어떻게 저희를 이길 수 있겠는가?” 하는 두려움이 그들에게 엄습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진정으로 선택되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택함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 힘 있게 하신 가지
이스라엘은 주님이 힘 있게 하신 가지입니다. 포도나무가 심겨져서 멀리 뻗어나갈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정착만 시켜놓고 “나머지는 너희가 알아서 해라”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거기 심으시고 심은 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속적으로 강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과 원수 된 이방백성들에게 먹히지 않도록 하나님이 힘이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국가적인 모든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는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이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이들을 선택하시고 가나안에 심으신 것처럼 이후로도 그들이 동일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땅에 정착한지 불과 얼마 세월이 흐르지 않아서 가나안 정복의 위대한 인물이었던 여호수아가 생존했던 시대에 전쟁이 끝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패하기 시작했고 이방의 신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24장에서 “유일신 신앙을 외치며 너희는 오늘날 결정하라 강 건너 편에서 너희 조상들이 섬기던 신이든지 아니면 여호와든지 양단간에 결단을 하라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고 했던 위기가 속히 닥쳤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방의 신들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통치에 만족하는 대신, 이방나라처럼 임금을 구하는 불신앙으로 불순종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민족에게 짓밟혀 나라를 잃어버리게 하지 않으신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요 도우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때로는 어루만지시고 때리셨으나 나라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기나긴 세월이 흐르고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욱더 악해져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범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제인 북왕국 이스라엘을 722년에 앗수르에게 멸망시킴으로 그들에게 경종을 울려주었지만 180년 쯤 후에 남왕국 유다도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밀알이 되어야할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스라엘을 향하신 장구한 역사가 이렇게 바벨론에 의한 멸망으로 허무하게 끝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육적인 나라인 이스라엘을 통해 영적인 나라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마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어서 싹이 나려면 이미 있었던 밀알이 죽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밀알의 죽음이 사실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순이 움돋아 거기에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육적인 왕국인 이스라엘의 껍질을 깨뜨리심으로 거기에서 영적인 왕국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탄생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커다란 섭리는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불순종이나 악에 의하여 표면상 잠시 좌절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들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이 이루실 일들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불순종하면서 자신의 불순종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일의 사태의 결과뿐만 아니라 일의 동기도 하나님 앞에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주시지만 인간의 불순종은 불순종대로 하나님의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대가
하나님의 영적인 역사까지 미리 알고 있을 리 없었던 시인은 자신의 눈앞에 멸망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참한 형국만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심으시고 줄기를 힘 있게 뻗게 하였던 포도나무가 불타고 베임을 당하는 끔찍한 재앙에 대해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외면적인 이스라엘의 불행의 근본적인 원인을 다시 한 번 규명합니다. 그것은 주의 면책으로 말미암아 멸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불순종해도 다만 타이르고 꾸짖으셨으나, 이번에는 면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국권을 잃어버리고 바벨론에게 점령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깃들여 있던 예루살렘 성전까지 불타고 거기에 있는 모든 값진 기명들과 금은보화를 약탈당하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모든 이스라엘의 파멸은 자신들의 불순종과 죄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자기의 백성들을 버리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할지라도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올바르지 아니할 때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마음을 때려 당신께로 돌이키게 하십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고난도 주시고 역경도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고 은혜를 주셔도 자신을 정확히 볼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직시할 수 있도록 시련가운데 두기도 하시고 뜻밖의 고통을 경험하게도 하십니다. 이때 우리의 마음에는 각성이 일어나고 인생의 모든 사태들에 대한 영적인 의미들을 탐구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신자의 진정한 자기반성이 나오고 진정으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할 생의 방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다시 묻게 됩니다. 겸손한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고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의 중요한 특징인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그의 은총만을 바라며 사는 믿음생활이 이어집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께서는 매순간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대로 우리의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육적인 왕국 이스라엘은 망했지만 영적인 왕국은 육적인 왕국을 깨고 나오게 만드셨으니,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적인 번영을 통해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 우리들이 바라며 살아야 할 이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인이 육적인 왕국 이스라엘을 위해 가슴을 찢으며 빌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인 영적인 교회를 위하여 간절히 매달리며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바로 이런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부르신 것입니다.
소생케 하소서
“주의 우편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의 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
그러하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케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시 80:17-18)
이스라엘의 메시야 사상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해주시도록 탄원하는 내용이 마지막 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주의 오른쪽에 있는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라고 나옵니다. 어려운 구절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오른쪽에 있는 자’는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한 사람입니다.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라고 할 때, 어떤 사람은 ‘인자’를 이스라엘의 택한 왕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인자를 왕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구약 시대의 메시야 사상이라는 맥락에서 해석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여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한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그들에게 메시야는 종말적인 존재로서 신정정치의 부흥을 재건할 분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야에 대한 관념은 다분히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수 있는, 다윗 왕 시대 때의 영광을 재건할 수 있는, 무력과 정치력을 가진 메시야였습니다. 또 하나의 메시야 사상은 육적인 이스라엘을 깨고 영적인 이스라엘을 만드실 구원의 전망이었습니다. 후자에 대한 생각은 매우 미약했기 때문에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에 소위 유대교가 일어나면서 거기에 하나님의 왕국의 회복이라는 전자의 요소가 강한 메시야 신학이 강화됩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을 지킬 위대한 구원자, 어떤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의 왕보다도 미래에 오게 될 어떤 왕을 가리킨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여기에서 ‘주의 손을 얹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는 뜻이고 선지자나 왕이나 제사장들을 세울 때 기름 부어서 그에게 손을 얹어 세우는 것을 염두에 두는 표현입니다. 그렇게 손을 얹어서 세울 때 하나님의 큰 능력이 그에게 충만하게 임하게 하십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주의 손을 얹으소서”라는 것입니다. ‘인자’라는 말은 왕으로 해석을 하든지, 메시야로 해석을 하든지, 아니면 미래의 왕으로 해석을 하든지, 이스라엘 백성의 관심사는 이스라엘의 구원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실 때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줍니다. 시인은 비결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당신의 인자를 손을 언어서 큰 능력을 그에게 부어주도록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참한 역사적인 상황에서 구출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한 시대에 교회에 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축복은 하나님이 좋은 지도자들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국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복은 훌륭한 지도자입니다. 그런 훌륭한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주님 손에 붙잡혀 살 때 한 민족의 역사는 바뀌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주 희소하고 아주 희귀합니다. 저마다 다 자신이 지도자라고 말하고 또 누구든지 지도자가 되고 싶지 지도자의 명령을 따르고 복종하는 추종자가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진정한 지도자는 하나님이 당신의 교회에 역사하시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지도자는 사람이 일반 역사적인 시각에서 “저 사람이 위대한 지도자다. 훌륭한 지도자다.” 그리고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오늘날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보는 시각이지만 하나님은 다른 시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무명한자 같으나 많은 영향을 끼치도록 하나님께서 들어 사용하시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구원하시고 위기 속에서 건지실 때 택하신 자들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시인은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물러가지 않겠나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축복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18절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할 것입니다. 우리를 소생시켜 주옵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우선, 첫 째로 “주님에게서 물러가지 않겠습니다.”입니다. 구약성경에 이미 하나님을 향한 신자의 진정한 경외가 어떤 것인지가 나옵니다. 그것은 외적으로 율법을 준수하고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것인데, 소극적으로 율법을 준수하고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위한 헌신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신자의 내적인 상태가 하나님께 부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하나님께 ‘붙어있다’는 것은 원래 ‘다바크’(qb'D;)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전치사 ‘데’가 동반되는데 ‘속으로 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속으로 딱 붙어있는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지금도 ‘데베크’(qb,D)라는 단어를 ‘풀’이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마치 풀을 붙여서 종이에 발라서 벽에다 붙여놓으면 누가 잡아 뜯지 않는 한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듯이, 진정한 경외의 삶을 살게 하는 내적인 조건은 하나님께 딱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옛날 성경에서 ‘부종하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조금 어려운 말인데 ‘붙어 다니다’라는 뜻으로, 정확하게 말하면 ‘붙어있다’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마음이 연합되어 있는 것, 여기에서 떨어져 나갔다는 사실을 오늘 시인의 고백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과 구별되는 이유는 ‘다바크’의 삶, 딱 붙어있어서 결코 떨어지지 않는 삶을 사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들의 내적인 상태가 되어야 하는데 여기에서 많이 물러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당신의 지도자를 주시고 그에게 충만한 능력을 주셔서 우리를 지도하게 하신다면 우리가 주님께 붙어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이 주님과 연합될 수 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 경우를 많이 보지 않습니까? 연세 드신 분이 손자를 보면 그렇게 귀여워합니다. 돌아가신 저희 아버님이 말씀하시기를, 항상 자식보다도 손자들이 두 배는 더 사랑스럽고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붙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것뿐입니까? 우리가 반지 하나만 좋은 것 사서 껴도 눈이 자꾸 그리로 옮아갑니다. 마음이 ‘다바크’되어 있는 상태, 거기에 붙어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섬기겠습니다. 난국을 만나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된 것은 주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입니다. 본래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런 삶을 상실했기 때문에 이런 시련과 고난이 온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소생하게 하옵소서
두 번째는 소생하게 하옵소서. 히브리어로 ‘하야’(ay;j})인데 “살아있게 하옵소서. 살게 하옵소서. 혹은 존재하게 하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육적으로 살아있는 모든 것이 산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요”라고 사대교회를 향해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으로 살아 있어서 자신을 창조하고 구원하신 목적을 따라 살 수 있도록 하나님과의 관계가 맺어져 있고 관계를 통해서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그것이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소생시켜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이름을 부르겠나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에 ‘주님의 이름, 여호와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간단하게 생각하면 이름을 떼어버려도 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주를 부른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그런데 왜 굳이 이름을 붙였습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이라고 하면서 ‘이름’이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고 접촉할 수도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존재하시는 양식은 피조물들이 서로에게 하는 것처럼,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아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지만, 당신의 이름은 우리에게 알게 하시어 우리가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그 이름을 말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 ‘이름’이 바로 하나님이 이 땅에 계신 현존과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교통하실 수 있는 존재와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이 이름은 이름이 지시하는 실체 자체입니다.
어떤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이름에 대한 태도가 어떤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면 이름도 사랑스럽습니다. 사람의 이름을 사랑하면 그 사람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름과 이름이 지시하는 본체 사이에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라는 말은 “주의 이름이 사랑스러우며 주를 사랑한다.”라는 뜻이고 “주의 이름을 싸우겠나이다.”라는 말은 “주를 위해 싸운다.”라는 말과 완전한 동의어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전부터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게 되어 있는 백성입니다. 한편으로는 시련과 고난이 올 때, 시인의 역사적 문맥처럼 시련과 어려움이 올 때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하는 것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이 자신들에게 행하신 일을 찬양하는 것도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대부분 ‘부른다’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소리를 내어서 부르는 것입니다. 또 위급한 상황으로 자기의 내적인 필요에 의해서 부릅니다. 아이가 “엄마!”라고 부를 때는 무엇인가 바라는 게 있듯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며 산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지도자를 강하게 하셔서 우리를 다시 이끌어 달라는 간절한 탄원을 세 가지 목적을 위해 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물러가지 아니하고 주님께 연합된 삶,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삶, 어떤 경우든지 주님을 간절히 의지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오늘도 우리를 붙드시고 지키시는 이유입니다.
얼굴의 광채를 비추소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시 80:19)
본문해설
시편 80편의 마지막 결론을 내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로 끝을 내고 있습니다. 19절의 기도는 이미 3절의 기도를 시작할 때 하나님께 올렸던 간구의 내용이 확장되어서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첨가된 것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라는 내용인데 3절에 보면 “우리를 돌이키시고”라는 내용이 거의 유사하게 반복되기 때문에 이 구절은 3절의 반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80편의 시작에서 하나님께 올렸던 모든 간구의 내용을 19절에서 결론적으로 반복하고 있는데, 같은 내용이 7절에서도 반복됩니다. 약간 내용이 다르긴 하지만 거의 유사한 내용이 반복됩니다. 한 소절이 끝나면서 후렴구가 들어가고, 또 한 소절이 끝나면 후렴구가 들어가는 형태로 이루어진 형식입니다. 내용은 예전에 살펴보았으나 결론 부분이니까 다시 한 번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우선 “하나님이여”라고 시작된 노래의 마지막에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라고 마무리를 합니다. 7절에서는 “하나님이여” 하고 끝났는데 여기서는 “하나님 여호와여” 하고 하나님의 대표적인 성함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바는 온 땅과 모든 인류와 세계에 대해 위대한 주권의 능력을 가지신 높으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는 반면에, ‘여호와’라는 이름은 언약백성들에게 특별히 관계를 맺으시고 그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위대하신 하나님을 먼저 부르고 자신들을 긍휼히 여겨주시는 하나님을 다시 반복해서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함 두 개가 나란히 온 것을 가지고 이 속에서 무슨 교리를 발견한 다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자신들이 지금 이렇게 바벨론의 억압받고 있는 이 상태를 보여주기 때문에, 하나님이 꼭 필요하다는 표현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와 각 나라 특별히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세계를 통치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처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공평한 주권을 행사하셔서 악한 나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더 이상 짓밟지 못하도록 도와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입증하듯이 하나님이라는 단어 앞에 ‘만군의’라는 수식 어구가 들어갑니다. ‘엘로힘 체바오트’라는데 이 ‘체바’는 ‘짜바’의 복수인데 이것은 ‘군대’를 가리킵니다. 하늘의 수많은 천군과 천사들을 거느리고 이 땅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바벨론은 위대한 나라이고 이스라엘과 같은 나라가 이방 나라들을 꺾을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하나님은 만군의 하나님이시니 당신이 거느리신 천군과 천사들에게 명령만 하신다면 능히 이길 수 있다는 시인의 간절한 신앙이 들어 이는 탄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여호와가 되십니다. 특히 여호와는 언약관계를 통해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계시되는 이름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과 독특한 관계를 맺으면서 비록 자신들이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언약의 관계를 기억하셔서 불쌍히 여겨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과 여호와의 이름을 나란히 부르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조금도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그리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은 우리를 돌이켜 달라는 내용입니다.
회복하여주옵소서
7절에는 “회복하여주시고”라고 번역이 되었지만 사실 똑같이 “돌이켜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아마 시인이 돌이켜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이중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우선 첫째는 나라의 형편을 돌려놔달라는 것입니다. 지금 국권을 다 잃어버리고 바벨론에게 짓밟혀 있고 포로된 상태이니, 국권을 회복시켜서 나라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에 심으신 의도와 목적을 성취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나라를 들어서 사용하시고자 이들을 세우셨는데 국권을 잃어버리고 이렇게 나라가 짓밟히는 것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런 상태를 돌이켜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인이 커다란 국가적인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신들을 영적으로 돌이켜 달라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회개하고 돌아오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5절에 보면 “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죄에 대한 자각을 보여줍니다.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겠습니까?” 여기에서 ‘죄’라는 말은 안 나오지만 이미 시인이 역사해석을 자신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자신들은 나라를 잃어버리고 고난의 길을 걸으며 눈물로 양식을 먹고 눈물로 음료를 삼으며 고난의 세월을 살아왔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들을 돌이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신앙에서 이탈하고 하나님 앞에 잘못했을 때 우리의 삶의 질서들도 뒤엉키고 시련이 오게 됩니다. 오늘 내가 잘못했다고 해서 딱 1시간 후에 그런 일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에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면 우리의 삶의 질서들도 흔들리고 시련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어려움이 생기면 어려움이 없었던 때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마음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고통을 받을 때 단지 괴롭다는 것을 느끼고 이 고통이 제거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짐승들도 하는 것입니다. 개도 앞발을 잡아서 뜨거운 곳에 데면 소리를 지르며 앞발을 치웁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편안한 상태에 있으려고 하지 스스로 고통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징계를 통해서 깨닫게 하심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환경을 돌이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기도 못하던 사람이 환경이 어렵게 되었기 때문에 환경을 바꿔달라고 매달리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돌이켜야할 자신의 잘못된 상태를 깨닫게 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와도 그것은 신자가 잘못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자식을 낳아서 자식이 뭘 잘못하면 혼을 내기도 하고 어렸을 때 매를 대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인간이기 때문에 때로는 자식이 저지른 일의 결과에 대해서 화가 나서 자식을 때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녀들은 절대로 그렇게 징계하면 안 됩니다. 우리 옛 어른들이 손에 살이 들어 있다고 하잖습니까? 발로 차고 언덕을 굴러도 안 죽던 사람이 머리 한 대 쳤는데 죽지 않습니까? 그것을 ‘살’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사기 그릇 같은 것은 떨어지기 전에는 안 깨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화가 나서 주방에 들어가서 사기그릇을 막 씻을 때 어떤 때는 ‘쫙‘하고 깨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보통 힘으로는 깨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정신과 물질적이 세계들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쪼개지는 것입니다. 저는 전공자가 아니라서 쉽게 얘기할 수 없지만 여리고성이 무너진 사건에 대해서 하나님이 일으키신 기적인데 기적의 방식에 대해서 어느 과학자들은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얼마든지 음성으로도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시의적절 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이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물질이 음향에 의해 파괴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상세하게 설명한 글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설명처럼 여리고성 사건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인간의 정신세계와 물질세계 사이에 세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살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 살이 들어있는 손으로 자식을 때리면 뺨 한대 맞고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은 자녀를 올바로 교육시키는 것이 아니라 혈기로 그렇게 자녀를 대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라도 심지어는 하나님의 자녀가 잘못하고 회개하지 않아서 일어나는 시련이나 환란이라도, 하나님이 그에게 복수하신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형벌을 집행하신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무수한 시간동안 말씀하시고 그의 마음을 일깨우고자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시는데 움직이지 않습니다. 내버려두면 하나님의 자녀가 계속 망가집니다. 하나님은 사물의 질서들을 움직이셔서 시련을 당하게 하십니다. 속 깊은 고통을 느끼면서 ‘환경을 예전의 상태로 돌이켜야 되겠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무 고통스럽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매달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더 깊은 의도는 매달림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다시 돌이키게 하는데 있습니다.
‘사두 썬다씽’이라는 인도의 기독교인으로서 성자와 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산을 다 넘는 것은 아니지만 히말라야를 넘어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가는 길에 중간쯤에서 눈보라가 치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길을 떠나면 안 되는데 노인 하나가 가다가 지쳐서 쓰러져서 도와달라고 합니다. 앞에 사람들이 그냥 지나간 것이었습니다. 거기다 놔두면 노인이 죽게 생겼습니다. 그는 바짝 마르고 불쌍해 보이는 노인을 엎고 산길을 걸었습니다. 눈보라가 엄청 거셌습니다. 죽을힘을 다해서 걸었는데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더니 도저히 걸어갈 수 없을 정도인데 여기서 멈추었다가는 죽기 십상이었습니다. 기도하면서 이 노인을 엎고 가는데 앞서 가던 사람들은 눈이 많이 오고 날이 추우니까 쓰러져 죽어 있었습니다. 썬다씽은 할아버지를 엎고 오면서 온몸에 땀이 났습니다. 할아버지를 엎고 거기를 가야겠다는 일념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가니까 이것이 오히려 썬다씽으로 하여금 얼어 죽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가야 하는 책임감이 그의 신체와 정신을 강하게 만들어서 결국 산을 넘어가게 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입니다.
결론과 적용
똑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히려 주시는 문제와 어려움들은 그 자체가 우리를 하나님께 돌이키게 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잘못한 것에 대해 보복하거나 복수하거나 심지어는 화를 풀기 위해 우리를 후려치시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런 느낌을 받을 수는 있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어떤 신앙과 자세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자기들이 당하는 시련을 보는 렌즈도 달라집니다.
이런 어려움을 당해도 나는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다고 마음으로 생각할 때는 이것이 후려치는 복수처럼 느껴지고, 예전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지었던 죄나 잘못이 연상되면서 양심을 찌르는 고통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럴 때는 자비롭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깊이 깨닫고 주님께 돌아가야 되겠다. 그리고 주님 없이 번영하기 보다는 차라리 주님께 징계를 받는 것이 낫겠다.” 이렇게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이킬 때는 시련과 고난 속에서 자기를 부르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가슴 저미는 사랑이 전달됩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을 연단하시고 도덕적으로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에서 나오는 “돌이켜 주시고”라는 기도의 의미입니다.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어 주소서” 이것은 하나님과의 친교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이시는 것, 단지 시련에서 건져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친밀함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가깝게는 국권을 잃어버린 고난에서 우리를 건져주실 것이고, 멀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면서 살게 해주실 것을 간절히 바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고난 속에서도 그렇게 주님을 이렇게 의지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한 인생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시편80편 강해 1
시편80편 강해 1
시편32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