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바라는 자의 기도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 27:11-14).
원수들이 자기를 에워싸고 끊임없이 인생의 길에 올무를 놓고 함정을 파서 고통을 주는데 오히려 그들을 인해서 나를 인도해 달라고 하는 이 기도는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항상 옳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가는 길을 막으시는 방법 중의 하나가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요셉이 태어났을 때 하나님은 그 요셉에게 애굽의 총리로 만들어서 다가올 모든 흉년 속에서 민족들을 보존하고 그를 영광스럽게 하시려고 작정하시는 뜻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부모를 떠나서 애굽으로 가야했는데 그런 일을 요셉이 혼자서 갈 수 없었습니다.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절하는 꿈은 꿨지만 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야곱이 요셉을 보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수를 사용하십니다. 형제들이 그를 팔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굽 땅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도 충성스럽게 봉사했습니다. 그런데 아주 간교한 여자 보디발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고 그 여자로 말미암아서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아주 신비한 인도, 악한 자들은 믿는 사람을 해치기 위해서 악을 행하고 그들을 어디론가 인도하기 위해서 악을 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섭리 속에서 악을 당한 사람들을 하나하나를 이끌어 아주 보다 깊은 섭리의 바다 은혜의 세계 속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주님을 깊이 의지하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합력해서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가게 되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자기를 괴롭히는 것을 인해서 괴로워하면서 하나님 앞에 많이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많이 부르짖었지만 결국에 가서는 그 악인들의 그 악을 인해서 ‘하나님이 나를 인도해 주시옵소서’ 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많이 일어납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미리 우리의 가는 길 우리의 나아갈 바를 미리 보여주시지만 어떤 때는 보여주지를 않으십니다. 그 때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이 그 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좀 더 넓게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악을 행하고 우리의 심령에 깊은 아픔을 주고 심지어는 우리를 모략하고 비난하고 우리에게 견디기 힘든 괴로움을 주는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이 우둔한 우리를 잘 깨우쳐서 당신이 원하시는 길로 가게 하는 훌륭한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악인도 각각 자기의 날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두셨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시인의 이 고백에 우리가 동참하게 됩니다. 이 풍랑이면 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이 시인이 두 번째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생명을 빼앗지 못하게 해 달라고 ‘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함이니이다’ 라고 합니다. 수시로 악한 자들의 궁극적인 소원은 시인이 생명이 끊어져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움의 심리학입니다. 미움의 근본적인 본질은 존재가 거기 있지 않기를 바라는 갈망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존재가 거기 있기 때문에 너무 싫은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미움이 살인이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대적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시인에게서 생명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생명을 끊어버리는 것이 목표인데 그렇게는 되지 않도록 자기를 보호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또 하나 바라는 것은 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영적인 생명이든 육적인 생명이든 그것을 끊어뜨리는 것이 악인들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이 시인이 자신의 생명을 보호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생명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이 홀로 계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 하나님이 교통하시며 존재하시는데 이 삼위의 교통의 본질이 생명과 사랑입니다. 이 세상이 창조될 때에 태어나는 모든 생명체는 영적인 생명체이든지 육적인 생명체이든지 그 모든 생명체, 더 넓게 이야기하면 아예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생명과 존재를 본 뜬 것입니다. 육체의 생명도 그 분의 뜻이 아니면 소멸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누구도 죽지 않습니다. 악인들이 아무리 겹겹이 에워싸고 그를 죽이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를 보호하고 계시면 결단코 죽지 않습니다. 영적인 생명들의 경우에야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 온갖 시험 내 맘을 흔들고
저 악한 원수들이 안팎에 있으나
겹겹이 에워싸면서 온갖 시험과 시련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다고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주님은 끊임없는 생명을 우리의 영혼 속에 부어 주십니다. 그래서 그 사랑에 감격하고 감사하며 시련과 고난을 이기며 살아가게 만들어주십니다. 그것을 시인은 그 다음에 ‘은혜’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산 자의 땅에 있으며 내가 은혜 받기를 사모하였도다.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으며 내가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입니다. 이 세상 온갖 시험이 나를 흔들고 많은 고난과 괴로움이 있어도 내가 주님을 꼭 붙들고 그 생명의 은혜를 힘입어서 살아갈 것이라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경험을 모든 환란을 당하는 사람에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볼지어다’ 낙심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반드시 포함합니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미움을 반드시 포함합니다. 그렇게 해서는 그 사람의 영혼이 자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자기 자신을 계속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자기 스스로 계속 퍼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환란과 시련이 그 사람의 영혼을 말려 죽이는 역할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오히려 아, 그렇구나 이 세상은 이런 것이구나 끊임없이 나를 배반하고 나를 버리는 곳이 이 세상이구나 하면서 주님을 앙망하면서 살아갈 때에 그 때에 마음 깊은 곳 은혜가 가져다주는 생명이 우리 안에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인 동시에 생명의 감화입니다. 이 생명이 은혜를 통해서 우리에게 확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란과 시련을 당하는 사람들도 이 은혜를 받으면 짓밟히는 자 같으나 다시 일어서는 자요, 버림받은 자 같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는 자로 나타납니다. 주님을 꼭 붙들고 어떤 시련이나 환란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 바로 이것이 신앙입니다.